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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91 THE NEW YORK TIMES

    발간일: THE NEW YORK TIMES한국의 저항 운동: 검열받지 않은 기사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간부, 본 상황을 전해한국에서 일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하여 암스트롱 목사가 메모 형식으로 쓴 영문 기사가 어제 ‘타임지’에 접수되었다. 암스트롱 목사는 캐나다 장로교회 해외 선교부 보조 서기관(Assistant Secretary)으로서, 현재 극동 지역에서 근무 중이다. 암스트롱씨는 3월 17일까지는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메모는 최근 한국에서 돌아 온 세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지의 편집자인 맥클라치(McClatchy)씨 앞으로 기고하는 형식으로 검열을 피해 전달된 것이다. 3월 13일, 암스트롱씨는 이렇게 썼다. “내가 요코하마에 있을 때 에이비슨(Avison) 박사로부터 ‘서울로 빨리 오기 바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이라고 씌어진 전보를 받았다. 다음 날 나는 서울로 떠나 16일 아침에 서울에 도착했다. 17일 저녁까지 한국에 머무르다 요코하마로 돌아 와서 22일에 선편으로 캐나다로 떠났다.“서울에서 머무르던 이틀 동안, 나는 한국의 독립 운동에 관하여 많이 보고 들어 알게 되었다. (나는 1918년 후반에 한국에서 3개월 간 보냈기 때문에, 한국인이 일본 통치의 어떤 부분에 불만스러워 하는지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럴만한 이유’라는 것은 선교사들이 선교사 사무관으로서 북아메리카로 가야하는 내가 이 운동에 대해서 사실을 잘 알고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언론 전달이라는 것이 불충분하고 부정확했다. 그래서 신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전송되어 신문에 난 기사너머 이면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언론의 검열 때문에 한국에 있는 어느 누군가가 편지를 통해서 그 곳 현지 사정을 전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현지를 보고 들은 여행자만이 그 진실을 외부 세계에 전해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 내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한국에서 일어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분노와 동정심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분노는 일본 경찰과 군인들이 한국인에게 가한 잔혹한 탄압 때문이고, 동정심은 정의를 부르짖기는 하나, 탄압 속에서 신음하며 자기를 방어할 힘조차 없는 백성들을 향한 것이었다. 후에 보다 자세한 내용을 쓸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여기 이 지면에는 꼭 전해야 할 몇 가지 점만을 언급하고자 한다.“(1)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과 다른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거사에 대해서 일본인 만큼이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민간 당국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군부와 일본에 있는 일본 언론들은 이 거사를 일으키도록 자극한 책임은 선교사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2) 일반 공립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선교학교에서도 시위는 일어났지만, 주장하는 것처럼 선교학교가 이 시위가 맨처음 일어난 발단지는 아니다.“(3) 한국인들이 이 시위를 조직하고 이끌어 간 능력에 대하여 외국인들은 놀라와 하고 있다. 영국인과 미국인들 중 원로 시민들까지도 그토록 폭넓은 저항을 계획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한국인에게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하였다.“(4) 그들의 저항 방법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폭력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며, 체포당할 만한 이유가 되는 저항을 하지도 않았다. 어린 여학생들까지도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하면서, 그리고 만세를 외치면서 감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만세’는 일본말로는 ‘반자이’로서 10,000년을 10,000배 되는 기간 동안 살라는 뜻이다.) 이 ‘만세’와 또 영원토록 스스로 서라는 뜻의 ‘독립만세’라는 외침은 나라 전체의 마음은 하나로 만든 것이었다.“(5) 경찰은 이 운동의 지도자들을 찾아 내는데 온 힘을 다 하였다. 비록 선언서를 작성한 삼십 삼인을 체포하기는 하였지만, 이 운동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고 조직 위원회는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국이 어느 한국인 목사에게 이 운동의 배후에는 누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였고, 그러면 누가 그 분과 함께 있느냐고 묻자, ‘이천 만 한국 사람 모두’라고 대답 하였다.“(6) 삼십 명의 선교사들이 3월 16일에 서울에 모였다. 나는 그들의 의논 내용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 군부와 경찰 그리고 헌병 조직을 가리켜 독일 무단 정치(German Machine)라고 칭하였다. 외국인, 영사, 사업가, 선교사들 모두가 1910년 이후로 한국을 지배해 온 이 조직을 이렇게 비난하여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같은 조직은 독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벨기에와 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것이 사라졌지만, 아직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에는 남아 있는 것이다.“(7) 특별히 짚고 넘어갈 일은, 경찰과 헌병들이 한국인들에게 가하는 고초는 거짓으로 꾸민 모의 재판을 통해서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로 보낼 진술서를 읽었다. 사람의 피를 끓게 하는 내용이었다. 죄수들이 실토를 하게 만드는 그 수단들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리고 이렇게 고초를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시위에는 참여하지도 않은 단순한 구경꾼들도 많다는 것이다.“(8) 선교사들은 이 혁명과 관계되는 그 어떤 것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언젠가는 마음 속에 있는 인간애라는 도덕률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 다른 외국인들도 자신들의 태도를 밝혀 만연되고 있는 테러리즘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심리적인 시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서울에 사는 모든 외국인들의 모임이 3월 19일에 소집되어,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의논하였다. 민간 당국은 (군부와 구별되어야 함) 3월 9일 그들의 회의에 선교사들을 초대하여, 솔직하게 일본이 어떻게 한국인들을 멀리해 왔는지를 시인하고, 어떤 개혁을 도입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우사미씨는 (Mr. Usami) 특별한 개선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9) 이 사건이 기독교계와 선교 사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예측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관리들은 외국인들과 기독교의 가르침을 매우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특별히 민주 국가인 미국과 대영 제국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다. 17일, 경찰 부대가 조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세브란스 의과 대학에 있었다. 책임이 있는 검사장과 그외 조사자들의 면밀한 추적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해, 조사반은 해채되고 무언가를 찾아내는 데는 실패하였던 것이다. 아마 그 이후로 외국인들의 집도 수색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한국인들이 평화 회담에 자신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 결과로 독립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는다. 서두르지 말고 알맞은 개혁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을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려야 하나 지금까지 거부되어 왔던 일반적인 권리 곧, 언론, 출판, 집회, 청원 그리고 여행의 자유를 이제는 한국인도 누릴 수 있어야만 한다. 현재로는 마을의 이장직까지 일본인만이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나, 행정개혁을 통해서 한국인들도 나라의 행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분이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지금 형편으로는, 일본 법정에서 재판 상대가 일본인일 경우, 한국인은 공정한 재판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중단해야만 한다. 이 시도의 목적은 한국인의 민족혼과 언어를 말살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일본말만을 배우고 쓰게 하자는 것이지만, 이것은 한국인의 4,200년 역사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인 것이다. 일본 정부는 자세를 완전히 바꾸어야 하며, 일본 국민의 주요 구성원도 바뀌어야 한다.현재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정책의 대세는, 일본은 부강하여지고 한국 백성은 열등 민족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정책을 대신하여 일본인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혜택을 받도록 나라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만약에 함께 혜택을 받게 하지 못한다면, 이 땅의 주인인 한국 사람들의 혜택을 위한 정책 수행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을 자기 나라 국민들과 똑같이 여겨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종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일본측 주장은 위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3월 21일 동경에서, 일본 YMCA 국내 간사장인 갈렌 피셔(Galen M. Fisher)씨의 주선으로, 나는 일본인 몇 사람과 외국인들과 만나 한국의 상황에 대하여 의논을 하였다. 한 일본인이(의회 의원 중 한 사람으로 5월경 미국에 갈 예정) 나에게 말하기를, ‘세계가 일본이 한국에서 잘못 행하는 것을 보다 많이 알게 될수록 일본에게는 유익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재 제국을 뒤흔들고 있는 군국주의가 보다 빨리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 이라고 말하였다. 나중에 나에게 전화를 통해서 말하기를, 그는 총리와 의논했는데, 총리는 정부가 그 곳 현지 사정이 어떻게 돌아 가고 있는지 잘 알지를 못하니, 선교사 위원회가 한국에서 사람을 보내 와 총리에게 한국에서의 상황을 말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한다.“선교사들의 견해에 따르면, 현 상황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정말로 필요한데, 그 이유는 이렇게 알림으로써 세계는 한국에서의 사정을 잘 알게 되어, 치우침 없는 공정성을 요구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세계의 여론에 매우 예민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은 세계의 호의를 턱없이 탐내고 있다. 세계가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안다면, 그에 따라 일본은 그들이 해야할 바를 더 빨리 수행하도록 노력할 것이다.“나는 선교사들에게 이 사실이 잘 알려지도록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292 NEW YORK TRIBUNE

    발간일: NEW YORK TRIBUNE일본, 미국인 선교사 다섯 명 구속폭동과 관련, 한국의 수도에서 네 명의 성직자가 체포되다샌프란시스코, 4월 14일(연합 통신):- 이곳 한국 국가 연합회(Corean National Association) 지부의 간사장(general manager)인 데이비드 리 목사가 오늘 접수한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미국인 선교사 네 사람이 한국에서 일어난 폭동과 관련된 혐의로 일본인에 의해서 체포되었다.데이비드 리 목사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체포된 선교사들은 존 토마스 박사, 시.알.에이비슨 박사, 제이 아이 루드로우 박사 그리고 제이 더블유 허스트 박사이다. 이 소식은 먼저 토마스 목사의 딸로 켄터키 주 윌모어에 사는 포운스 여사가 받았다.워싱턴, 4월 14일:- 동경에서 합중국 국무성(State Department)으로 전달되어 온 소식에 의하면, 헌병들이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으로부터 경찰에 의해 총상을 입은 세 사람의 한국인 환자들을 끌어 갔다고 전하였다.군의관(surgeon)의 주장이 묵살당하다한 군의관이 경찰의 행동에 대해 잘못을 주장하는 것이 묵살되었다. 경찰 배석자는 죄수들은 범죄자들이기 때문에 헌병들의 행위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지난 목요일에 일어났으나, 태평양 상의 케이블 상태가 좋지 못하여 동경으로부터 오는 전언이 늦어졌다. 국무성은 이 사건을 재조사 할 것을 요구하였다.서울, 수요일, 4월 9일 (연합통신):-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지방에서 계속 번져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심하게 억압하고 있다. 이로써 많은 부차적인 불상사(casualty)를 낳는 결과를 빚었다. 서울은 조용하다.일본 당국을 대신하여, 이 곳 미국 총영사인 엘 에이 베르홀츠는, 평민 복장을 한 일본인들이 곤봉을 들고 효과적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경찰측은 전에 이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길 밖으로 나가도록 조치를 취했었다고 외국인들에게 설명했었다.선교사가 감옥에 갇히다한국의 북부에 위치한 평양에서 온 오늘 날짜의 전언에 의하면, 오하이오 주 맨스필드에서 온 엘리 엠 모우리 목사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서, 일본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혐의는 한국에서 독립 운동이 전개되는데 있어서, 그의 부동산을 이용하도록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며,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일본은 그의 아내가 면회하는 것을 허용하였다.안셀 더블유 길리스 박사가 일본측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확인한 결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그의 집을 수색하였으나 그를 체포하지는 않았다.

    293 NEW YORK GLOBE

    발간일: NEW YORK GLOBE왜인의 잔학함을 비난한국인에 대한 잔혹한 살상 사진 보도 자료를 미국이 입수연합 통신이 보도상해, 3월 20일(연합통신):-일제 통치에 반대하는 소극적인 혁명이라고 알려진 한국의 봉기에 관한 사진 보도 자료를 통해서 미국 정부가 한국 사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연합 통신의 한 특파원이 이에 대한 보도 자료를 일부 보았는데, 이것은 미국인이 작성한 것으로, 3월 1일의 놀라운 사건의 시작으로부터 3월 15일 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중국 주재 미국 관리에게 전해지기 시작할 때까지의 기사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공개적으로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던 한국인들이 폭행을 당하여, 수 십 명이 숨지고 수 백 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기사는 이 봉기에 대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이 혁명은 3월 1일 토요일 오후에 한국의 많은 대도시에서 시작하여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이 일은 준비된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며, 모든 계층을 다 포함하는 시위였다. 삼십삼인이 서명한 독립 선언서는 미리 배포되어 있었다. “삼십 삼인 중, 이십 구 명은 2월 28일 서울에서 함께 모였고, 이 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임이 있은 후, 이들은 함께 만찬을 열었다. 그 후, 그들은 경찰에 전화를 걸어 내용을 말하고 감옥에 갈 준비가 되었음을 밝히자, 당국은 그들을 감옥으로 압송해 갔다.잔혹함이 전해지다.“서울, 평양 그리고 다른 도시들 중에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는 군중들에게 발포하는 것을 자제하는 듯 하였으나, 그 외곽 지역에서는 참으로 언급하기에도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항하지 않는 군중들에게 발포하여, 수 십 명이 죽고 수 백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교회는 부서지고, 개인 집들이 수색을 당하며, 특별히 어린 남녀 학생들이 감옥으로 끌려 갔다. 이들 대부분은 매질을 당했으며, 그 중 일부만이 재판을 받을 수가 있었다.“사람들에 대한 처우가 지방보다 비교적 부드럽다는 여기 평양에서조차, 내가 본 광경과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면, 이에 대하여 필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모습들이었다.“다섯 명의 신학교 학생들이 그 날 아침 평양에 도착하여 조용히 그들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에, 들이닥친 자들에게 이끌려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들이 정부에 대한 반대 운동을 계획하지 않았다고 무죄함을 호소하였으나, 경찰은 온 힘을 다하여 이 학생들을 채찍으로 스물 아홉 대를 때렸다.여학생들 머리채를 끌리다“선교병원에서 가까운 어느 집에서는 경찰을 대신하여 온 소방대원들에게 무섭게 두들겨 맞은 후, 두 여학생들이 머리채를 끌리며 감옥으로 끌려갔다.“65세의 노인이 군인들에게 잡혀 얻어 맞고 발로 채여 걷지도 못할만큼 고통을 받았다. 그런 연후에 그는 감옥으로 끌려 갔다. 그가 끌려 가기 전에 400여 명의 다른 군 부대원들의 시위가 있었으며, 징벌하는 일이 계속되는 감옥에서는, 희생자들이 고문으로 쓰러진 후 인력거에 실려서 집으로 보내지고 있었다.“군중이 길을 행진하여 가고 있는 가운데, 경찰과 군인들은 의도적으로 저항하지도 않는 구경꾼들에게 무기를 들이대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던 방식이었다.“경찰국장(prefects office)의 사무소 앞에서, 아무런 저항 수단도 없는 한국인 한 사람을 창을 든 소방대원들이 덮쳐서 죽였다. 그 시체는 땅 위에 질질 끌리며 살인자들의 손에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다.노파가 해를 입다“늙은 남녀 어린이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일경은 고문과 매질과 칼질을 서슴치 않았다. 창으로 무장한 소방대원들이 창으로 찌르고, 경찰서에서는 공식적으로 고문을 가하며, 대검으로 찔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군부에 저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진실로 이야기되던 말 그대로 점잖은 혁명 그 자체였다.우리는 외국인으로서 이 모든 것을 보아 왔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persona non grata)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고 있다고 느꼈다. 발표에 의하면 고용된 암살대원들이 밤에 시가지를 배회하면서, 누구든지 걸리면 공격하기 위해 숨어서 기다린다고 한다. 외국인들도 이들에 의해서 공격받아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정부는 서둘러서 이 사실을 부인하는 성명을 낼 것이나, 못마땅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들은 어찌할 수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우리 외국인들이 이 문제가 계속되는 동안 여기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점점 커가고 있다.

    294 NEW YORK TIMES

    발간일: NEW YORK TIMES일본, 한국에서 미국인들을 체포하다경찰, 평양의 모페트 목사, 길리스 목사, 모우리 목사의 집을 각각 수색모우리 박사, 구금되다개인 소유 재산을 운동 전단 인쇄를 돕는데 쓴 혐의로한국 서울, 4월 8일 (연합 통신):- 평양발 전언에 의하면 당국에 의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인디아나 주 메디슨에서 온 사무엘 모페트 목사와 아이오와 주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온 안셀 길리스 목사 그리고 오하이오주 맨스필드에서 온 엘리 모우리 목사의 가택을 수색하였다고 전했다.세 선교사들은 경찰서로 끌려 갔는데, 모페트 박사는 곧 풀려 났다. 발표에 의하면 모우리 박사는 개인 소유의 재산을 한국인들이 독립 운동에 관련된 전단 인쇄를 위해 사용하도록 도운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길리스 박사는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발표된 바가 없다.사무엘 모페트 목사는 한국에 파견된 미국 장로교의 선구자적인 선교사로서, 1890년 서울에 와, 1893년 평양에 들어 갔다. 그는 중일 전쟁 기간, 그리고 후에 한국 개발 기간을 통하여 어려운 난관을 수없이 겪어 온 사람이었다. 3월 13일 상해로 온 전송에 의하면, 모페트 박사는 독립운동 초기에 폭동을 주사했다는 의심을 사 평양 경찰 본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필라델피아, 4월 13일:- 한국에서 있었던 학살은 “일본 정책의 일부인 군부 압제와 불공정성”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이 곳에서 내일부터 삼일 동안 열리는 한국인 의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오늘 이 도시에 온 한국 관리가 말했다.이곳에 온 한국 관리는 만주에 있는 한국 임시 정부 수반인 이 승만 박사와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담 한국인 대표로 참석하는 세 사람 중 하나인 헨리 정씨이다.지난 토요일 늦게 중국 상해에 있는 한국 독립 협회의 한국인 대표로부터 온 전신에 의하면, 수 백 명의 한국인 남녀를 비롯 어린아이들까지 이 저항 운동 중에 죽었다고 전했다.“한국 임시 정부가 출범한 후 한국 지역에서 지난 3월 1일 발생한 혁명은 질서있게 진행되었으므로, 일본이 행한 그런 방식의 진압은 이유가 닿지 않는다” 고 헨리 정씨는 말했다. 이어서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젊잖은 혁명이었다. 한국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군 당국은 그것을 보았다. 왜 피흘림이 필요한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 정부가 한국인이 얼마든지 희생이 되더라도 독립을 위한 혁명을 진압하고 한국의 자결권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한국에 공산주의가 휩쓸고 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다.”

    295 NEW YORK TIMES

    발간일: NEW YORK TIMES한국 전역에 시위가 확산수 백 지역에서 폭동 발생동경 당국 공식 발표한국인 학살1,000 명 이상의 시민들 살해 기사샌프란시스코 위원회에 전달동경, 4월 6일(연합통신):-한국에서의 시위는 점점 확산되어 가, 전 한반도를 집어 삼킬듯한 기세로 번지고 있다고 일본 정부는 오늘 공식 발표했다. 지난 삼일 동안 수 백 군데에서 심각한 정도의 폭동이 발생했다. 수 명의 경찰이 숨지고 경찰서 몇 군데와 우체국도 파괴되었다.전신망이 여러 곳에서 끊기었고 다리와 일본인의 집이 불탔다. 상황을 더욱 악화되게 한 요인은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에게 있다. 특별히 블라디보스톡의 한국인은 한국과 더 나아가 일본에까지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음모를 가진자들이다.이 혼란은 군대의 힘으로 활발하게 진압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신 기사에 의하면 일본 군대가 한국의 여러 곳에서 폭도들에게 발포하여 여러 사람들을 죽였다고 발표했다.한국인들 “학살”을 말하다샌프란시스코, 4월 12일:- 한국인 기독교 목사로부터 한국 국가 연합회(Korean National Assiciation) 앞으로 온 전신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3월 28일의 시위 동안에 있었던 “학살”이라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기 시작했다.이 전신은 상해에서 이 곳으로 보내왔다. 이곳 한국 국가 연합회의 간부에 따르면, 이 정보는 서울에 있는 연합회 대표가 전달자를 통해 서울로부터 상해로 보냈던 것이다. 이 전신의 내용은: “일본은 한국에서 학살을 시작했다. 28일 있었던 시위에서 단 세 시간 동안에 천 명이 넘는 비무장 한국인들이 죽었다. 일본 군대와 화기 부대, 그리고 일본 민간인들이 명령에 따라 한국 전역에 걸쳐 한국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총을 쏘고 때렸다. 27일 이후만해도 죽은 사람이 수 천명에 이른다. “교회, 학교 그리고 지도자들의 집들이 파괴되었다. 여성들은 옷이 벗겨진 채 군중들 앞에서 매를 맞았다. 지도자들의 가족에게는 이같은 곤경이 더욱 심하게 주어졌으며, 감옥에 갇혀 있는 경우는 심하게 고문도 당하였다. 외국의 적십자 구호 활동이 매우 필요한 시점이다.”한국 국가 연합회 관리에 따르면, 이 전신의 정보는 믿을만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국인 목사로부터 왔으며 그는 이 상황을 직접 겪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으로부터 앞서 온 정보도 온전히 진실함이 확인되었다.이곳 일본 총영사인 오다씨는 한국의 사태에 관련하여 연합 통신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내왔다:“한국의 혼란 초기에는 폭도들의 활동이라는 것은 별로 심각하지 않았었다. 그들의 시위는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나 마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국은 해당 경찰서에 위임하여 핵심 지도자들를 체포하고 군중을 해산하는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폭도들은 정부의 관대한 태도에 힘입어 그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하여졌다. 도가 지나쳐 법의 한계를 넘어서 폭동으로 번졌으며, 그들의 활동은 이제 전 한반도에 걸쳐 확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아무도 군대가 책임을 방관하는 자세로 남아 있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에 정부가 이 폭동의 진로를 바로 잡지를 못한다면, 이 혼란은 더욱 확산되어 갈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은 결국 현재 한국과 인접해 있는 시베리아 전역에 그 세력이 확산되어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296 NEW YORK TIMES

    발간일: NEW YORK TIMES한국의 어린 학생들 데모하다일본어로 대답하라는 선생의 요구 거절53명의 죄수 총살저작권 1919, 뉴욕 타임즈사 소유뉴욕 타임즈 특보북경, 4월 11일 - 최근 한국으로부터 전해 온 소식에 의하면 서울에 있는 보통학교들이 어린이들이 공부를 거부하는 이유로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 일본 선생은 어린이들이 일본어로 대답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어린이들은 한국어로 대답하기를 계속 고집하였다는 것이다.이러한 거부는 점차 힘을 얻어 확산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팔거나 사지 않도록 권고하여, 가게들은 전보다 더 굳게 문을 닫고 있다.Neeainghsam에서는 한국인 53명이 총살당했다. 경찰은 지도자인 천도교인 한 사람을 체포했었다. 경찰은 그들이 포위하고 있는 기차역으로 그를 유인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역 구내에서 체포되었다. 군은 죄수 전부를 총살하였다.저작권 1919, 뉴욕 타임즈사 소유뉴욕 타임즈 특보서울발 북경 4월 11일- 도지사는 한국인 상인들에게 24일 간이나 문을 닫고 있는 그들의 가게를 열도록 명령했다. 문을 열지 않으면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경찰은 상인들에게 이 명령을 따르도록 위협을 하고 있다.서울 4월 4일 (연합 통신)- 정부 관리에 따르면, 평안도 내의 송도(Songdo), 장선(Changshon), 송양(Songyang), 의주(Wiju), 홍현(Honghyon) 등 여러 지역에서 아홉 명이 살해 당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서울은 조용하다고 전했다.

    297 NEW YORK TIMES

    발간일: NEW YORK TIMES한국인 억압을 시인일본 당국, 봉기 초기에 억압 완화 고려서울, 4월 1일:- 한국에서의 봉기에 대하여 의논을 하는 가운데, 조선 총독부의 가즈오 우사미 내무성 장관은 한국인에게는 두 가지 불만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차별 정책과 승진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분명히 일본 정부는 차별을 철폐할 것을 고려하여 필요한 계획을 만들고 있었으나, 일본인과 비교하여 한국인들은 능력이 부족하여 시행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모든 장벽을 일시에 허물기는 시기상조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인들이 일본인과 비교해서 같은 시간을 일했을 때, 일한 보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시인하였으나, 그 이유는 열등한 한국인들의 능력이 작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 비해 보다 낮은 보수로도 살아 갈 수가 있다고 하였다.“정부는 봉기 초기에 개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인들과 비슷한 승진의 기회를 주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다섯 명의 한국인 지사와 많은 수의 군수, 면장과 의원들을 한국인으로 지명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시의 자문 위원회 (Advisory Committee)를 조직하였는데, 이 조직은 마을 단위로까지 확산시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기구로 발전시킬 목적이었다.”우사미씨는 덧붙여 말하기를, 개인적으로는 한국인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줄 수는 없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한국인은 ‘쉽게 잘못 이끌려 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선언하기를 현정부는 새로운 내각이 조각되기 전에, “시대 정신에 맞는 평등 정책을 반드시 도입할 것”이라 하였다.서울의 신문들은 선교사들로부터 헌병과 경찰이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을 매우 거칠게 다룬다는 불평을 담은 편지를 많이 받고 있다고 전하였다. 이러한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일본인 민간인”들의 활동을 매우 비판하고 있다고도 전하였다. 따라서, 이 비판은 서울의 거리에 나타난 곤봉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당국은 경찰의 잘못을 비난하는 소리가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또한 동시에 정부는 관리들에게 무질서를 야기한 사람들을 가능한한 관대하게 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주장하기를, 지방에서는 한국인들이 경찰과 헌병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들의 가족들도 또한 죽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이 “다른 경찰들을 흥분케”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맞부닥뜨리는 충돌의 무서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일본 군당국은 시베리아에 등장한 일본군이 공산주의가 만주에서 한국으로 또 일본으로 번져 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데 공헌할 것을 기대하였다.

    298 아더 브라운이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28발신자: 미합중국 장로교회 해외 선교부발신자: 아더 제이 브라운 수신자: 조선 선교사들의 가족과 친지들친구들에게:여러분은 지난 6월 30일에 보낸 내 편지에서|| 연방 자문 위원회에서 동양 관계의 일로 일본의 하라 총리에게 보낸 전신에 관한 참고 자료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 전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조선을 욕보이는 일에 대한 선동이 심각한 사태로까지 증가하고 있어|| 선린관계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사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귀하께서 공식 선언문을 발표하여|| 이같은 수치스러운 행위를 중단하고 이치에 맞는 행정 개혁을 진행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건의에 대한 대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연방 교회 자문회 동양 담당부로 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신을 받았습니다.“나는 귀 단체가 나의 말에 확신을 가져 주시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일본정부 산하 관련 조직에 의해서 저질러진 악행에 대하여 매우 깊은 염려를 표하는 바입니다. 실제 일어난 사실을 치우침 없이 객관적인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러 다른 상황에서도 선언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합병 당시에 취임한 현 정권은 거의 십 년 동안이나 일을 해 온 탓에|| 모든 것이 많이 변한 상황에 맞게 알맞은 개각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인 것입니다.지난 구월에 현 내각이 조각된 이후로|| 나는 한국에서 필요한 행정 개혁을 어떻게 단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전념해 왔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단행할 재조직에 관한 납득할 만한 계획은 이미 준비중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반도의 수많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혼란 사태로 인해서|| 아직은 이의 공식적인 도입을 추진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그러나|| 최근 상황이 많이 개선되는 것을 보는 마당에|| 나의 견해로는|| 심사숙고하여 마련한 새 개혁은 이제 가능해졌으며|| 진행 과정에 필요한 법적 절차만 완비가 되면 안전하게 도입 되도록하여 실제로 곧 추진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완비된 계획의 발표는 현재로서는 유보된 상태이지만|| 나와 나의 각료들에게는 우리의 한국인 형제들의 영속적인 복지증진을 위하여 노력하고자 하는 확고한 결단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현 상황에서 획기적인 개선을 주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확신시키려는 목적이 잘못 이해되거나 해석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입니다.”내가 이 글을 보내는 이유는 여러분이 이것에 대하여 깊이 관심을 가질것이라 믿고|| 또 여러분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 때문입니다.여러분의 진실한|| 아더 제이 브라운 씀

    299 아더 브라운이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22발신자: 미합중국 장로교회 해외 선교부발신자: 아더 브라운 수신자: 모우리 목사의 가족 친지들에게친지들에게:-나는 지난 18일에 한국인들이 혁명에 관한 전단을 인쇄하도록 그의 집을 사용하게 허락했다는 이유로 모우리씨를 체포해 갔다는 편지를 이미 전했습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신문에서 그가 유죄 판결을 받아 육 개월의 수감 생활을 언도받았다는 것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상급 법원에 상고할 것을 목적으로 300 엔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 났습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서울의 미국 총영사와 동경에 있는 미국 대사가 신중하게 그가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찾고 그 지역 변호사와 연결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첨가하고 싶은 말은|| 검열 제도 때문에 선교사들이 그들이 전하고 싶은 말을 바로 우리에게 전할 수가 없어|| 우리는 워싱턴의 미 국무성을 통해서만 새로운 뉴스를 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여러분의 진실한|| 아더 브라운 씀

    300 아더 브라운이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6-30발신자: 미합중국 장로교회 해외 선교부발신자: 아더 제이 브라운 수신자: 조선 선교사들의 친지와 친구들에게사랑하는 친구 여러분:여러분들에게 보낸 나의 지난번 편지에서 조선에서의 혼란에 관한 소식이 계속 전달되어 오고 있어|| 현재 우리 앞에는 이에 대한 아주 많은 편지와 서류들이 쌓여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어떤 편지는 매우 분량이 방대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일반 서신 행정 방식이 아닌 다른 수많은 방법으로 이 편지들을 보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교류한 편지는 6월 6일에 받은 것으로서|| 슬프게도|| 언급한 내용은 그곳의 상황은 아직도 계속 불확실하며 심각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한국인들의 공개적인 시위는 수그러들었으나|| 의심스러운 자들은 계속 체포하는 중이라 합니다. 상점들은 경찰에 의해서 강제로 열리고 있는데|| 경찰이 열게 하는 수단으로|| 만약에 문을 열지 않으면 혁명분자로 여길 것이라고 위협한다는 것입니다.선교학교와 공립학교들은 문을 닫고 있습니다. 이유는 일본인이 학교문을 닫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생들과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방학 시기가 가까왔기 때문에|| 다음 가을 학기까지 학교 문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선교사들은 학교가 다시 열릴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선교사들은 그들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위험에 처해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상황을 신중하게 판단하여|| 그들은 임시로 지방 마을 순회 강연를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봉사지역을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으며|| 거주 구역에서 평소처럼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우리의 평양 구역에 있는 엘리 모우리 목사만이 유일하게 선교사 중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염려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데|| “정치범을 은닉한 혐의”로 4월 4일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변호사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4월 15일에 첫 공판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중징역인 육개월 간의 강제 노동(penal servitude)울 선고했을 때|| 판사는 4월 19일까지 그의 확정 판결을 연기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상급 법원에 항소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는 300 엔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으며 능력있는 일본인 변호사 두 사람을 붙여 주었습니다.상고 법원(Appelate Court)에 가기 전|| 5월 17일에 있었던 재판에서는 육개월 간의 징역형에서 4개월 중노동으로 감형되고 2년의 집행 유예(suspending sentence)를 선고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모우리씨가 가석방된 것이어서|| 만약에 아무런 다른 징계를 받지 않고 2년이 지나면|| 그 후에는 그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경우는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며|| 답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한번도 재판을 받아 본 적이 없고|| 또한 그가 아는 한 어떤 법을 어겨 경찰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해 본 적도 없는 모우리씨로서는|| 놀란 한국인들을 그의 집에 들여서 잠을 재운 것이 범죄에 해당되는 것인지를 정말로 몰랐던 것입니다.우리는 최근에 조선에서 돌아 온 몇 사람들과 함께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를 가졌습니다. 캐나다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사무관인 암스트롱 목사|| 남부 장로교단의 에그버트 스미스 목사|| 서울에 있는 미국 성경 협회 요원인 에스 에이 백씨|| 동경 YMCA 간사장인 갈렌 피셔씨 그리고 조선 감리교 감독(Episcopal Bishop)인 허버트 웰취 목사가 그들입니다. 이 분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사실에 실제로 접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들을 전해 줄 수 있었던 이 사람들로부터 정말 가치있는 정보와 조언을 들었습니다.현지에서는|| 조선의 다양한 각계 각층의 대표들이 위원회를 구성하여 총독부의 관리들과 서울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함께 가졌습니다. 틈틈이 미국 총영사와도 의견을 함께 나누었는데|| 총영사는 그가 수집한 모든 정보를 워싱턴의 합중국 국무성으로 전달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그들이 보낸 위원회는 총리를 비롯한 일본 당국과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이 정도의 선에서|| 우리 선교 교단 측에서는 손을 떼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마치 이 사건이 선교사 문제인 것처럼 매달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미합중국 기독교 연합위 동양 관계 위원회에서 이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조선에서 행하는 외국인 선교사 활동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미국 신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감리교 감독 교단(Episcopal Board)의 간사장(secretary)과 우리 교단에서 보낸 두 명의 간사장인 저와 스피어 박사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조선 문제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또한 신중하게 주시하고 있는 바입니다. 열 두 번의 모임을 이미 열었는데|| 앞으로도 더 많은 모임이 열릴 것으로 기대합니다.나의 제안은|| 이 위원회에서 일본 총영사|| 뉴욕에 거주하는 일본인 중 저명하고 영향력있는 몇 사람 그리고 동경에서 와 파리에 가기 위해 뉴욕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저명한 일본인 몇 사람 등|| 뉴욕에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일본인들을 모임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일본인과 함께하는 이런 모임이 이미 몇 차례 열렸었는데|| 그 모임 동안에 전체 상황에 대하여 흉금을 터놓고 토론하였는데|| 모임을 마치면 일본인들은 동경의 일본 정부에 우리의 입장을 전문을 통해 전달하였습니다. 또한|| 위원회의 간사장인 시드니 굴릭 목사는 워싱턴에 있는 일본 대사관에서 두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가졌었는데|| 우리는 독자적으로 하라 총리에게 우리의 입장을 전문을 통해 직접 전달하였습니다.이와 같은 방법으로|| 조선과 일본에 있는 당국 관리들은|| 우리가 전하는 사실 내용과 일본과 미국의 우방국들이 가지는 지대한 관심사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전해 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신문들은 그들의 고유 기사를 비롯하여 다양한 출처로부터 입수한 이 주제에 관한 많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동경에서 발행하는 영향력있는 영자신문으로 미국의 여느 신문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Japan Advertiser가 일본에서 이와 같은 기사를 많이 발표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선교 교단이 “비밀 정책”을 채택하고 있으며 상황을 미국에 알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이에 대하여 느끼는 것은 먼저 그런 길 자체가 현명하거나 바른 정책이 아닐 뿐더러|| 이런 학대를 감소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신문에 기사를 싣게 되는 것보다 일본인에게 바로 전하여 그들 손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미 설명한대로 우리의 믿음대로 행해왔습니다.우리는 일본 정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한 압력을 행사해 왔으며|| 우리는 우리가 대신하여 행한 이 행위가 상당한 효과를 내고 있다는 믿을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우리의 정보를 구하는 책임있는 신문 제작자에게 자유롭게 전달하고 있으며|| 이 위원회는 현재 상당한 분량의 소책자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분의 책자는 상당수의 영향력있는 신문사의 편집자들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믿을만한(authentic) 정보인 동시에 마음 아픈 사실들을 전달해 주고 있는 주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처음부터 조선에서 일어난 봉기와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사이에서 이를 구별하도록 신중을 기해 왔습니다. 정치적인 운동으로서 전자는|| 선교사업을 행하는 우리로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인간성의 문제로서|| 우리는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 관심의 바탕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분명합니다.우리는 또한 일본 안의 민간측(Civil party)과 군부측(military party)을 신중하게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전자는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동에 대해서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로 교육을 받아 깨이고 발전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자는 그들의 성질과 행위에 있어서 프로이센식의 군국주의적인 사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민간측은 조선에서 봉기가 일어난 후 영향력과 힘을 얻고 있으며|| 군국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사용하는 잔혹한 방법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러므로 미국인들은 일본 안에 한국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군부측이 채택하고 있는 단호한 철권 정책을 심하게 거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한국문제를 다루는데 현명하고 인간적인 정책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전 동경 시장이었으며|| 교육부 장관|| 그리고 오쿠마 행정부 제국 내각에서 법무성(Justice) 장관이었던 유키오 오자키 씨는 4월 18일 New York Evening Post 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일본이 한국인에게 가한 잔혹한 처우에 대한 기사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동경 정부는 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할 것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이 혁명의 근원은 일본 군부 통치의 악이 빚어낸 또 다른 경우입니다. 한 국의 총독부 관리들은 대만의 경우처럼 언제나 군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민간인 출신은 식민지 경영에 거의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서도 군국주의 정신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것을 한국인은 분개 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또한 한국인들이 그들의 정부에 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때이기도 한 것입니다.”일본이라는 나라 전체|| 곧 검열받는 언론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알려지도록 허용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전체 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는 것|| 그것은 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정의롭지도 않다고 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던 것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전해 들은 우리의 친지들과 친구들이 이 사실을 세상에 공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공개자의 신분이 보장되고|| 또한 그 사실이 정확하게 전달만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수만명의 한국인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수십 만 명이 감옥에 잡혀 갔다”와 같은 과장된 말이 단순한 짐작일 뿐 증명되지 아니하는 것이라면 더 큰 해를 줄 따름입니다. 실제 사실에 대한 보도가 쉽게 확인될 수 있는 증거가 확보되지 않으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가져다 줄 뿐입니다.현지에 편지를 보낼 때에도 크게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지러운 상황에 대한 언급 자체가 그 편지를 검열관이 읽고 조사하게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편지를 받은 선교사가 심각한 곤경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조선에서 봉사하는 우리의 선교사들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과 미묘한 입장에 처해 있어 우리의 관심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있는 그들의 가족과 친지들의 염려에 깊이 감사를 드리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별한 소식들을 말하지 않아도 신속하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선교사들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참으로 큰 시련에 처한 사람들은 가엾은 한국인들입니다. 그들은 잘못 인도되어 왔습니다.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방법이 매우 감상적이고 희망이 없어 보여|| 현명한 시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엄격하고 혹독한 경찰의 곤봉과 군대의 총보다는|| 현명한 부모의 보살핌같은 친절하고 지속적인 기반이 필요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연방 자문위의 소책자에는 이에 관한 내용의 가엾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여러분의 진실한|| 아더 제이 브라운 씀간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