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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박상진] 에 대한 전체 6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광복회-광복회 부활 취지 연혁(1945)

    2 고광복회총사령 고헌 박상진씨의 약력(1960)

    3 우재룡은 고우 박상진의 약력을 수초(1946?)

    嗚呼라 朴尙鎭의 約曆을 中間幾年間 幾十分의 一이라도 記抄하려하니, 禹在龍 自身의 經曆을 먼졈 말하기 가소럽다. 그르나 안을 수 업다. 禹在龍은永川郡 鄭用基氏 再次 唱義時 結義을 하고 從軍하다가 敗戰되어 檢擧을 當하야 終身監刑을 바듯다가 韓日合倂時 出獄된 後 深山에 隱居하야 때을 기두리면셔도 對人酬酌은 敗軍之卒하라셔 此山가 갓치 餘生을 맛치겟다하고 累累 同志가 來訪하야시나 不應하고 잇는바, 梁벽도와 蔡基中氏가 朴尙鎭을 말하고累累히 勸告함을 바다시다 不聽하얏든바, 梁(벽도 : 편자 주) 長子 梁00가 來하야 朴尙鎭氏가 某日에 禹을 만나려고 山下까지 오기로 約束하야시니 其時對面이나 하야셔 彼此間 討論을 하야보라기에 豊基邑을 約束하야셔 相對하기 되엿다. 嗚呼라. 朴尙鎭의 遠大한 抱負중 滿洲陳野로 朝鮮式 水稻를 獎勵하고支那 露領에 居住하는 同胞 及 在鮮同志로 內外相應시길 方法과 歐米諸國에外交할 것과 後位에 後怪으로 向子傳孫하드라도 안을 수 업는 우리의 任務라기에 內心으로 참으로 伏從지 안을 수 업사여 盟警고 許身하앗다.

    4 고헌실기약초(1946?)

    鳴呼라 光復會의 舊日同志가 京城애 會合하야 舊日 會名 光復會란 看板을걸고 國內와 國外애 同志者를 招集하난 中 一邊壯烈하계 殉國하신 朴尙鎭氏의歷史를 幾年問 幾十分의 一리라도 抄錄 登印하야 天下애 布告코져 此筆을 擧하음애 悲憤感慨하야 泲橫流를 禁치 못하●(깃)다. 氏는 慶尙南道 蔚山郡 松亭里애셔 生長하야 慶州郡 鹿洞이란●(디) 居住하였다. 氏의 遠大한 抱負와 烈特한意志는 實로 凡夫俗儒의 窺測할배 안이다 一九一○年(1912년의 착오: 편자 주)애 自己所有財不動産을 日本 三井物産會社애 十年年附로 典當하고 現金八萬円을 出資하야 平壤同志 金德基와 全州 人 吳赫泰를 合資하야 二十四萬円의 巨額을 慶北 大邱애셔 尙德泰本店이란 商店을 設立하야 秘密리애 朝鮮獨立思想애 同志者를 求하는 場所를 定하엿셔 四五年間애 만흔 同志를 連結하엿다. 一九一五애 多數의 同志者를 神秘하계 大邱 達成公園애 會集하야 誓天決死의 團體를 組織하엿다. 一般會員은 氏를 會長 兼 總司令部長으로 推薦하엿셔 諸般任務를 獨身處決●(키) 하얏다. 氏의 處決壽策은 左와 如하다. 一. 滿洲 吉林애다가 朝鮮獨立機關 本部를 設置하야 部長애 安星一氏를 任命하엿고(平壤義倈安昌浩氏 從弟) 잘못된 표현이다. 안창일은 평남 평천군 검 산면 용포리 출신으로 新民會·大韓光復會·大韓獨立團에 활약한 인물이다. 편자 주) 一. 朝鮮農民를 滿洲로 誘引하야 開墾 榮農키하야 朝鮮獨立機關 食量을 保 掌캐 하되 誘引方法은 京城新聞社 編輯長 李相協氏와 社長를 協同하야 滿洲地 帶애 産業便宜와 良好함을 新聞紙上으로 累累 報道●(키)하야 國內民을 移住식히 엿다. 一. 滿洲애셔 朝鮮獨立機關食量 保掌委員을 各地애 選定하야 暗暗裏애 活躍 하야 告知文을 酪附하고 每年農作 中 一割를 保掌식히기로 하야 總委員長은 崔象悅氏를 任命하엿다. 一. 滿洲 牧丹江省 北便 密山애(大德山中) 朝然士官學校를 一九一八애 設立 하야 武士를 養成식히엿난대 其 責任을 安重吉氏의계 任命하여 왓다가 後復1) 필자는 朴孟鎭이다.金擎天氏(日成氏의 初名)의계 任命하얏다(重吉은 安重根氏의 親族: 잘못된 표현인 듯- 편자 주) 一. 軍隊 總司令長官을 推薦하난●(디) 黃海道 李錫大氏를 選定하얏다가 李錫大가 五六百名의 軍隊를 暗率하고 雲山金鑛을 襲擊하얏다가 誤中되야 滿洲로 避身하엿다가 未久檢擧됨을 보고 孫一民의 推薦으로 金佐鎭을 任用하야 多數의軍隊를 總管●(키) 하엿다(訓練바든 農民靑年) 一. 全鮮八道●(이) 光復會의 支部를 設置하야 支部長 一人式을 選置하고 支部長의 擔當地區 內애는 朝鮮獨立思想을 宣傳하야 獨立資金을 募集하기로 計劃하고 支部長 八人을 各道애 選定 任命하엿난●(디) 第一 忠淸道애는 張斗煥(自己財産 六百石 可量 本會애 義捐) 第二 京畿道애는 蔡淇中, 第三 江原道애는 金東浩, 第四 全羅道애는 李秉澯, 第五 黃海道애는 劉昌淳(庾昌淳의 잘못: 편자주), 第六 平安道애는 黃羲悳, 第七 咸鏡道애는 金炳植, 第八 慶尙道애는 金振萬을 任命하엿다 一. 支部長의 手下애 特別派員 五十人式 領率●(키)하야 武器를 携帶하고 出淡活動을 驚神泣鬼토록하엿다. 右와 如히 諸般機關을 敦設하난대 乙卯(丙辰 1916년의 잘못: 편자 주) 五月 日애 京城方面애셔 更次 主謀者 數十人이 合議하야 光復會란 會名을 大書하고 趣旨書를 潛印하야 中外예 宣布하고 武器가 不足함으로 幹部를 派遣하야露領及 海外諸國으로 붓허 武器를 購及하엿는대 同年 六月 頃애 朴尙鎭는 右任務로 滿洲 吉林으로 出發하고, 同年八月애 大邱 在留한 同志 幾人이 軍資金募集 目的으로 大邱 徐佑淳家 事件을 發生하야 同志 幾許人이 滯囚되고 朴尙鎭은 武器의 主人으로 連累되여 京城 沈相鉉家애셔 檢擧되야 一年間 大邱監獄애셔 苦問惡刑을 當하고도 光復會의 秘密은 頭露치 안이하야 體刑滿期로出獄하엿다. 歸嫁 卽時로 禹在龍을 滿洲애 派送하야 各 機關과 連結을 取하계하고 其他奉天 天津 上海 各處애는 韓文(韓焄일 듯: 편자 주)과 鄭淳榮을 派送하야 朝鮮人團體機關애 氣脙을 相通하엿다. 그리고 各項 條例와 規模를 擴張更新●(키) 하되 金漢宗(鍾이 옳다: 편자 주)과李基沃을 氏의 左右애 常在캐하야 幕賓參謨의 任애 選用하고 禹在龍과 裵相喆金鎭澤을 遠近縺絡事務部長애 任命캐 하여 金佐鎭과 馬林甫의계 奉天 吉林을主管캐 하고 安東縣 新市街애 三達洋行을 하고 잇난 李海量 文基成을 長春과天津 等地애 通信及 物資輸送事務를 擔任캐 하고 孫一民 韓文으로 上海臨時政府 連終專務委員을 任命하고(遁法과 縮地애 能한 人士) 崔浚으로 財務主任애擇定하여 各方面收入된 金額을 崔浚의계 保管하엿다가 海外各地 機關事業애酬用하고 上海政府애 送達하엿다. 一. 全朝鮮各處애 本會의 布告文을 發送하난●(디) 右文을 氏의 手抄로셔 各 地部가 贊同하고 長春과 滿洲 方面을 持去하야 直接 發送하기는 禹在龍이가 其責任애 當하엿다 一 布告文과 同封한 信號가 有하야 數字로셔 秘定하야슴으로 後任 査察員及 特派員의 眞假를 對照하야 本會의 派送을 判定 無疑캐 하고 信號數字方法은 重要斡部 幾人 外애는 不知캐 하야 會員 中애도 秘密을 極守하엿다 一. 布告文 發送 後애 接手者의 行動애 ●(ㅅ다)라 三種의 區別을 定하야 武斷的大政策를 施定하엿다. 布告文을 順應하는 人은 本會애 參入캐 하고 半信半疑하는 人은 査察員이 說明開誘캐 하고 反抗하야 親日을 더 힘시는 人은 武力으로 征服하계 ●(하)엿다. 如此히 進行하난 中 布告文애 順應하는 사람은 各道各郡애 小數애 不過하얏난저 誠心誠意로 順應하든 人士 數名을 玆애 記錄한다 全羅道 富豪家 號曰 朴八萬이라고 하는 朴台奎는 現金二十萬円을 本會애 義捐하엿고 開城富豪 金英培는 十八萬円을 義捐하엿고 慶北 義城郡 山雲里애 李泰大는 現金二萬円을 出捐하고 査業員 一行의계 誠心으로 射禮하며 自己 土地 七 百餘斗落을 財務人 崔浚의계 移轉하기로 決定하야 慶州까지 來着한 것을 崔浚이가 氏를 請하야 遂議한 結果 氏가 不可함을 말하기를 無限한 大事業애 箇人의 有限한 財産을 當할 슈 업실●(ㅅ분) 그르캐 順應하는 사람은 우리의 同志인 則 吉林本部로 派遣하면 自家의 世傳財産을 減損치 안코 農作事業애 投資하야每年 收入 中 一割 又는 二割式 本部애 納付하면 一人의 同志를 加得함이요無限애셔한 財源을 發用할 것시라 하야 移轉을 信止캐 하고 滿洲애 投資●(키)하엿고 慶北 新○ 李某家애셔도 現金五萬円을 捐하고 參會하엿다. 一. 全鮮士族 中 富豪로셔 右 布告文애 不應할 ●(ㅅ분) 안이라 親日을 主張하는 人은 死刑을 執行하야 大民重懲戒캐 하엿다. 一. 各地 商會를 起創캐 하되 富豪를 網羅하야 財源을 發用케 하난대 梁山人 尹顯泰를 勸誘하야 甲寅商會와 離春商會를 設立캐 하고 安熙載(安熙濟가옳다: 편자 주) 勸誘하야 白山商會를 設立캐 하고 平壤人 李仁實을 勸誘하야平北商會를 設立캐 하고 忠州人 金聖桓을 勸誘하야 忠州商會를 設立캐 하고其他 南北鮮애 多數의 商會를 創立 식혀서 暗暗히 富衰의 財力을 引用하엿다. 氏는 性度가 毅直하고 用彩가 俊美하야 事機애 臨하야 英斷이 非常함으로 交接한 者가 高亢할 氣㮣애 歎服하야시며 最初 上海를 渡할 時애 朝鮮人團體諸員들이 同一히 海外애 留連하야 握手活躍하기를 懇請하엿스나 氏는 諸員의계 말삼하기를 亡國의 民族 더구나 赤手空拳인 우리들 輩가 朝鮮政府라는 看板만 가지면 엇지하오? 外國租界애셔 外國人의 援助를 希望하●(킷)쇼? 朝鮮境內애셔도 人物다운 人物리 잇셔 內外相應하여가며 一般事業애 進行할 것을 結約하고 歸國하얏다가 其後 丁巳年(1913 癸丑일 듯: 편자 주) 七月 頃애 巨大한金額을 携帶하고 다시 黃浦江을 渡하야 所幹을 終了하고 孫文氏를 尋訪키 爲하야 南京附近●(ㅅ가)지 抵達하야 孫文씨의 副臺 魯月華孃의 紹介를 因하여 孫文氏를 面會하고 中國과 朝鮮의 自來關係上 相負치 못할 것을 烈烈히 말한즉 孫文氏의 壯烈한 意志를 讚揚할 ●(ㅅ분)만 안이라 自國의 複雜無緖함애 外顧의 手腕을暇用할 道理가 업슴을 發明하고 遠訪한 爲國誠意의 感謝紀念品으로 自己의 所持하엿든 最新美式拳銃一柄을 解贈함으로 持來하야 護身用으로 가●(ㅅ다)가 結局讐人의 毒手애 押收되얏든 것이다 氏의 部下애 死生同盟한 人士가 忠憤義勇의 男兒가 許多하지마는 金漢宗 禹在龍 權寧萬 갖흐신 분은 歷史的人物리 안이라 할 슈 업다 위선 禹在龍 한분을 論할지라도 永川郡 鄭用基氏(鄭鏞基의의 잘못: 편자 주) 再次 唱義 時애結義를 하고 從軍하야 日本兵과 累觸하다가 敗戰됨애 檢擧를 當하야 終身留刑을 바덧다가 韓日合幷의 時애 出獄하야 深山애 隱居한 것을 氏가 梁碧度(碧濤의 잘못: 편자 주) 有名한 人物을 使用하야 勸誘 出山캐 하다가 氏가 親히 訪問하야 經論을 討論하고 肝膽이 相照함으로 右 會애 要人으로 從事하엿셔 만흔 勞力을 하엿지만 特히 奇絶할 話題은 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이다. 慶北郵便局애셔 近日 慶州各處 地稅를 收合하야 郵便馬車便으로 大邱로 輸送하는 것을氏가 崔浚을 使用하야 日字를 探知한 後 禹在龍 權寧萬을 右任애 派遺하야 權寧萬은 漆身爲癩格으로 病人을 假粧하고 馬車主人家애 宿泊하야 大邱 病情애治療行을 稱託하고 翊曉애 馬車를 搭乘캐 하고 禹在龍은 信號를 가지고 乘嶢하야 孝峴橋 川邊애 企待하다가 馬車가 川邊애 當到함애 木橋가 破壞하및슴으로 馬가 越水를 ●(ㅅ거)리는 샤이애 信號를 相照하고 禹在龍은 車後을 ●(ㅅ다)르다가 斗垈 光明샤이 堂家 前애셔 權寧萬을 相逢 保護하야 鹿洞으로 歸來한 則 金額은 一萬八千七百円(《每日申辯》보도는 八千七百円: 편자 주)임으로 氏의 命令애依하야 崔浚의계 任置保管하엿다. 吉林과 海外各地애 其時 內容과 實況은 各各 連絡을 取하든 責任者가 有하기 ●(ㅅ대)문애 我 等은 責任者 某某를 逢着키 前애는 아즉 詳細한 事實을 모름으로 大綱 先後秩序도 업시 生覺나난●(디)로 記抄하와 將次 압흐로 各處 同志를 合席問讀하야 다시 正本으로 作成하기로 한다. 如此히 着着 進行하야 事業은 漸次蔗境애 抵至하난 中 不幸히 忠淸道支部애셔 公州富豪家事件을 發生하야 支部派員이 逮捕을 當하야 惡毒한 訊問刑梏애口招連犯되야 要人 中 二百餘名이 檢擧됨으로 首領된 氏가 免할 슈 업계됨애氏는 泰然히 縲線애 就하야 曠古未有한 刑罰를 甘受하면셔도 同志들 中 實犯者 幾人 外애는 모다 出獄캐 하난●(디) 有罪者도 無罪 無罪者도 無罪로 白旅토록 하엿스니 其 壯烈한 志節은 果然 感歎치 안흘 슈 업사며 況此 慶尙道富豪銃殺事件이 一年間으로 端緖를 不得하야 彼警察漢의 頭腦를 셕히든 餘地애 呀至寃絶痛하계도 六個星霜을 鐵窓 쇽애셔 보내다가 桎手襄頭로 一世記를 맛치시니 同袍를 爲하야 半生을 櫛風沐雨中 샤시다가 同袍를 위하야 大鍛電針下애視死如歸하신 特殊無雙한 事蹟은 千古애 不朽할 ●(ㅅ분)만 안이라 우리 朝鮮人으로셔 朝鮮의 魂을 求하고 朝鮮의 넉을 吊샹할 同時애 氏를 버리고 누기를 먼 쳠하오릿가? 禹在龍과 갓치 氏의 歷史를 抄하고 잇난 舊日 同志들은 아모리 無期 二十年 十年이라는 刑을 바덧다 할 지라도 아즉 陽界애 生存하야 今日과갖흔 讐國의 滅亡을 보앗슨則 氏애 比하야셔는 가륵한 榮光이다 氏의 獄中口招애 三百六十萬円을 海外로 送達하엿다는 新聞과 氏의 家族애 傳한 遺書가잇사오니 이것시 朝鮮애 公開할 証案이오며 各處애 秘密히 追入吊餞하온 輓誄가 一世의 公誦할 眞寶이오나 新聞과 遺書는 다 抄할 슈 업고 輓辭 몃 首와氏의 先府令監의 祭文 한 首만 ●(ㅅ배)셔 此紙애 登錄한다. 輓 君生之世我同生 君死之年不死生 萬古堂堂君死死 一疆踽踽我生生 卽持大義追君死 爲報其讐有我生 泉下若逢安壯士 語傅槿域此殘生 右 金嘉鎭 爲問東都人 東都倘有人 堤上千年後 其孫又此人右 安重吉男兒生世事多難 舊義殉身極所難 難不爲難難極處 君於此世更無難 右 金佐鎭子死非眞死 吾生亦謂生 家傳光字史 於此眞生 右 金逸成 日成 嗚乎汝得其死所而死吾於汝之死不足爲深痛極哀然而顧此痛之深哀之極者惟在於汝之生之苦死之慘矣汝之生也九到瀋陽六踰鶴嶺八至牧丹三過安津再渡黃浦周遊四海而風櫛雨沐則其生也可謂苦矣而汝之死也百經火緞十閱電樵梏於手足而桎於頭項漲腹如阜垂舌斷尺以縲以絏而終焉則其死也可謂慘矣千古志節之士縱不無生之苦死之慘者而孰有若汝之生死乎吾以是爲深痛極哀也 右 氏의 春府令監祭文 (생부 朴時奎의 제문, 번역문은 앞의 제문 참조: 편자 주)

    5 제문(1923)

    올 해 癸亥年(1923) 7月 丁巳朔 초8일 甲子는 바로 出系한 亡子 尙鎭(상진)의 終祥이다. 그 本生父 醒心翁은 간장이 끊어지는 듯하고, 정신도 다 떨어진 듯하다. 몇 마디 이야기해 보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父子의 정으로 뜻밖의 窮天之痛을 당하여 한마디 말이 없다는 것도 나로서는 참지 못할 일인데, 하물며 너의 혼령이 만약 나 때문에 떠나가지 않고 머뭇거리게 된다면, 나는 더욱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 전인 癸亥日 아침에 몇 가지 과일과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尙鎭(상진)아'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아아! 오늘은 바로 네가 죽은 날이다. 너의 죽음을 온 천하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말들이 다 한 입에서 나오는 듯하다. 네가 죽던 날, 옥졸은 울먹이면서 "義人이 죽으니 천지가 깜깜해지고 市井에는 점방 문이 모두 닫혔습니다"고 전하였고, 아이 琥(호)가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렀다. 또 번갈아가면서 밤을 새우기도 하고, 金帛과 紙燭으로 돕기도 하여 含歛에 대한 모든절차를 별 지장 없이 치르도록 하였다.장사 지내던 날,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남 모르는 길을 가던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모두들 "죽었어도 오히려 영광이다"라고 하였다. 또 영국인과 우리 조선인 李晩雨(이만우) 金某 등 수십 명은 경관들의 조사를 피하여 15리쯤 떨어진 東村驛前에 와서 통곡하였다. 또 淸泉驛까지 이르러서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하는 소리에 땅이 꺼지는 듯하였다.葬地에 대해서는 鹿門舊山까지 운구할 힘이 없어 그만 너의 장인께서 전에 잡아 놓았던 登雲山 기슭에 장사지내게 되었었다. 발인할 때부터 기마대가 달려와 길가에 늘어서서 오는 손넘들을 휘몰아 쫓았는데, 그 광경이 참혹했었고, 산 위까지 와서 장례에 참여한 사람은 겨우 십여 명 밖에 되지 않았었다. 지난 겨울, 나는 다시 일본 江戶로 건너가 末永節(말영절)의 집에 얹혀 있었다. 末永(말영)은 年前에 너를 죽음에서 구해 주려고 몹시 애쓰던 사람인 때문이다. 그런데 몇 달 후 조선학생 金天海(김천해)가 그 동지 십여 명과 함께 밤중에 찾아와 묻기를,"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으며, 무슨 이유로 저들에게 머물러 계십니까? 더구나 義士의 아버지로서 저들의 집에 얹혀 계신다는 것은 우리들 마음에 아주 불쾌한 생각이 듭니다. 혹 불미스러운 일이 있게 되면 義士에게도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하면서 잠깐만이라도 末永(말영)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하므로 어쩔 수 없이 그만 여관으로 옮겨 버렸다.금년 봄에는 日比谷 詩會에 나도 가서 참석했다. 그 때 중국인 原憲(원헌)은 바로 肅親王의 아들인데, 내가 너의 아비라는 말을 듣자 다시 옷자락을 여미고 끊어앉아 이르기를 "아드님의 훌륭한 義烈과 참혹한 죽음은 중국의 각 신문에도 자세히 보도되었습니다." 하며, 輓詞 一絶을 써서 나에게 주었는데, 아래와 같다.당당한 그 義氣 누가 꺾으랴! 當當義烈孰能移6년간의 감옥살이 세상 모두 슬퍼하네. 六載南冠四座悲韓國에는 오늘날 빼어난 문장이 많으니 韓國如今多健筆기념비 세워도 부끄러울 것 없으리. 也無慚德欲爲碑또 印度人도 이날 소문을 듣고 여관으로 나를 찾아와 통역을 시켜 이르기를, "아드님의 광복에 대한 의거는 4천년 역사를 가진 귀국에서 과연 鳳鳴朝陽이라 할 수 있고, 또 죽음을 당해 만세삼창까지 하였으니, 2천만 동포 중에 第一人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재작년에 英字新聞을 사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고 하면서 그 신문까지 내보였다. 또 百金이나 되는 돈을 香料라 하면서 내게 주고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도 朴尙鎭(박상진)의 소문을 듣고, 잘못된 사람들을 처단하는 기풍을 일으키다가 죽은 자가 수백 인에 달합니다"고 하였다.나는 네가 살았을 때에는 너의 人望이 이와 같았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아!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살았어도 그 시대에 아무 이익이 없고, 죽은 뒤에도 후세에 남길 만한 소문이 없이 그냥 왔다가 그냥 가게 됨은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 일이지만 만약 너 같이 죽는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 하겠다. 내가 왜 어리석은 사람처럼 마음속에 온갖 슬픔을 쌓아 나의 생생한 마음을 傷할 필요가 있겠는가?그러나 네가 죽은 후, 崔君 浚(최준)은 우리 집안 兄弟와 子姪들이 가졌던 농토의 전부를 그가 샀다고 핑계를 대면서 하루 아침에 다 빼앗아 가버렸다. 대체로 생각해 볼 때 농민은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굶게 되고 굶으면 죽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일곱 집안 백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렇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어 네 아내에게 물어 보았더니, 네 아내는 말하기를 "乙卯年(1915) 7월 어느 날 崔浚(최준), 崔浣(최완) 형제가 우리집에 와서 말하기를 '娣氏는 전일의 사치한 생활을 생각지 말고, 지금부터 弟씨의 집안 살림은 우리들이 돌보아 드릴테니, 우리들을 믿고 우리말을 받아들이면 장차 큰 재산을 늘려 복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지금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天運이라 할까요? 아 天運이라 할까요?"라고 하었다. 또 崔浚(최준)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는 말하기를, "朴尙鎭(박상진)이 三井會社에 부채가 있어 저당한 토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하면서 나에게 買受하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값이 시가에 맞지 않아 買受할 수 없다고 했더니, 尙鎭(상진)은 바로 칼을 빼들고 위협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그를 구조하기 위해 억지로 買受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죽을 고비를 당하자 하늘이 부여해준 本性을 잃어버리고 그 아이들을 보내 느닷없이 생떼를 부리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것이 이치에 닿는 말인가? 이 토지는 논이 5백 두락이고 밭이 4백 두락으로, 합치면 모두 9백 두락이며 그때의 원가를 따지면 6·7만圓이 넘는 까닭에 三井會社에서 3만圓으로 저당잡게 되고, 崔浚(최준)은 그 보증인이 되었다. 이는 모르는 사람이 없던 일인데 갑자기 위협이 두려워 1만 2천圓으로 억지로 買受를 했다니, 이것이야말로 생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구조하기 위해 억지로 買受하게 되었다면, 그 농토 전부를 다 빼앗아 그 兄弟子姪의 일곱 집안 식구 백여 명을 감자기 거지가 되도록 만든 것을 과연 구조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너의 장인도 崔浚(최준)에게 꾸짖기를, "네 말은 한마디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많은 농토를 이미 빼앗겼다면, 三井會社에 빼앗겼거나 너에게 빼앗겼거나 간에 尙鎭(상진)에게는 아무 손익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尙鎭(상진)이 꼭 너에게 팔려고 칼로 위협까지 했다면, 그때 네가 딴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그 토지를 3만圓에 저당 잡혔다면 그 원가는 6·7만圓어치가 넘는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는 尙鎭(상진)의 위협에 눌려 1만 2천圓을 주고 사기 싫은 것을 억지로 샀다하니, 그 실제를 따진다면, 尙鎭(상진)이가 그 토지로써 너를 구조한 셈이고, 너는 도리어 尙鎭(상진)에게 구조를 받은 셈이었다. 우리 집안은 옛날 조상 때부터 정당치 못한 일에 대해서는 한 평의 땅도,한 푼의 돈도 몸에 붙이지 않았었다. 너도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빼앗은 농토를 되돌려주어야 옳을 것이다"라고 했었다. 그러나 崔君 형제는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兩代의 분묘가 계신 山坂까지 제 소유로 만들어 지금 은행에 저당했다 한다. 네가 살았을 때 崔君과 더불어 어떻게 했기에 그 욕스러움이 조상에게까지 미치며, 또 나로 하여금 이 궁지에 빠져 徹天之寃을 하소연해도 아무 반응이 없도록 하였느냐?한밤중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나는 네 나이 40세에 이르도록 왜 가정을 돌볼 생각이 없었는지, 그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원망스럽기만 하다. 너는 그때 5년 年賦라는 일 때문에 부산과 서울을 몇 차례나 오르내렸다. 이는 모두 가정을 돌보려고 한 일이었는데, 왜 조상에 대한 香火도 생각하지 않고, 늙은 부모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어린 처자들도 걱정하지 않았느냐? 일곱 집안 식구가 먹고 사는 농토를 아무 까닭없이 浚(준)에게 넘겨 주었으니, 이는 浚(준)의 父兄과 叔姪에게 물어본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럴리가 없다 할 것이다. 또 네가 죽을 때 적었다는 유서에는 다만 이르기를, "小川貴(소천귀)가 竹內銃彦(죽내총언)에게 소개하여 잘 처리하도록 했기에 賣買하지 않았다. 이 일은 三井會社 사원 일동이 모두 알고 있다"고만 하였다. 이 사실은 琥兒가 河姪과 함께 너를 따라가 그 일을 주선하게 된 까닭에 환히 다 알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年賦를 마감하던 날, 崔浚(최준)이 무슨 이유로 제 명의로 이전하게 되었으며, 三井會社에서도 무슨 이유로 이전서류에다 날인하게 되었었느냐? 이런 이유를 알기 위해 琥兒를 京城支店에 보내 물어 보도록 하였으나, 모두 옛날 직원들이 아니어서 홀대하기가 아주 심하였으며, 부산에 가서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河姪을 시켜 부산으로 가보도록 하였으나, 釜山支店은 벌써 폐지되어 물어볼 곳 조차 없었으니 두 아이들은 결국 헛걸음만 했을 뿐이었다.이에 남들이 모두 내게 권하기를 "東京支社에 가서 탐문해 보면 그 사실 여하를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고, 나도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작년 겨울, 다시 東京으로 건너가 본사를 찾아갔는데, 그곳은 거대한 건물과 여러 층으로 된 樓閣(빌딩일 듯), 그리고 전혀 다른 옷과 말씨로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내 말도 통하지 않고 그들의 글도 내가 해득할 수 없었으며, 나의 行色을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서로 말 없이 보기만 할 뿐이었다. 層樓에 오래도록 머뭇거리다가 다행히 그들 중에 조선어를 아는 사람을 만나, 비로소 물어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小川貴(소천귀)와 竹內銳彦(죽내총언)이라는 두 사람은 그만둔 지가 벌써 5·6년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외지에 가 있다" 하며, "文簿는 9년 전에 보던 것이어서 어느 서고에 쌓여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만약 찾아보아 발견하게 되면 우편으로 보내 드릴테니 여관에 돌아가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대답이었다.그러나 망망한 섬나라에서 竹內와 小川, 이 두 사람을 어디로 좇아가 만날 수 있었겠는가?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들은 잘 알려진 사람이 아닌 까닭에 모두들 모른다고만 하니 내 마음은 더욱 답답하기만 했었다. 누가 이런 심정을 알았겠느냐? 그러나 금년 봄에야 비로소 荏原郡 平壕村까지 찾아가 竹內(죽내총언)란 자를 만나게 되었고, 초여름에는 兵庫縣 武庫郡까지 찾아가 小川貴(소천귀)란 자도 만나게 되었었다. 이 두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年賦를 마다 갚은 후에는 그 토지를 채무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므로, 이 두 사람의 증명서를 받아 가지고 다시 본사로 들어가 文簿를 조사해 보니, 어떤 도적이 그 중간에서 당초부터 간계를 부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賊反荷杖이란 말이 바로 이런 일을 이른 것이 아니겠느냐?네 유언에 따라 지금 법정에 고소까지 하였으나 法吏의 생각이 또 어떨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오늘은 네가 늘 말하던 小川貴(소천귀)와 竹內銳彦(죽내총언) 이 두 사람의 증서를 너의 靈卓에 펴놓고 너로 하여금 분명히 알도록 한다. 아마 너는 지금 깜깜한 저승에서 잠자고 있을 터인데, 혹 기억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은 죽음을 슬퍼하고 情誼를 되새기는 마당에 길게 이야기할 것은 아니나, 내가 이토록 번거로운 말을 싫어하지 않고 전후의 내용을 다 적어서 네게 고하는 것은 나중 자손들로 하여금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원수 놈의 땅으로 다시 건너갔으며, 너 또한 무엇 때문에 온 집안을 거지가 되게 했는지, 그 이유를 다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저 崔浚(최준) 형제가 만약 그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하늘도 두렵지 않고, 귀신도 무섭지 않다고 여기는 때문이라 하겠느냐? 아아! 우리 집안은 요즈음 몇 해 이래 세상이 바뀜에 따라 온갖 풍상을 다겪었다. 너의 생모 貞夫人을 장사지내기 바로 전날, 너는 감옥으로 끌려갔었다. 그 때의 상황이 워낙 위험하고 참혹하여 겨우 집 근처에 權窆으로 그냥 끝내고 말았었다. 그후에는 힘이 모자라 아직까지 딴 곳으로 옮기지도 못했는데, 또 3년이 채 못되어 伯嫂氏 淑人이 우리 집에 계시다가 세상을 버리셨다. 初終에 쓸 壽服諸具는 네가 준비해 놓은 것이 있어서 아무 유감없이 치렀다. 그러나 너는 경성감옥에서 그 부고를 듣고 엎드려 울면서 밥도 먹지 않다가 결국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었으니, 더욱 슬픈 일이었다. 아, 우리 형제는 모두 자식이 없어 우리 부모께서 밤낮으로 걱정하셨다. 뒤늦게 네가 태어나자, 겨우 백일이 지난 후 淑人께서 데려다 잘 길러 키우기를 마치 자기가 난 것처럼 하셨으므로, 너는 워낙 어려서 貞夫人에게 태어난 것을 미처 알지도 못했었다. 밤이면 우리 어머님께서 끌어안고 주무셨으며, 낮이면 우리 아버님께서 등에 업고 놀기도 하셨는데, 마치 손바닥 속에 든 구슬처럼 여기셨다.네가 겨우 다섯 살이 되던 해, 담 밑에서 여러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였다. 어떤 노파가 바가지에 나락을 담아 가지고 문을 나서며 이르기를, "이처럼 좋은 집안에서도 거지에게 주는 곡식은 돌이 반이 넘는다"라고 하였다. 너는 그말을 들은 즉시 노파를 이끌고 들어와 우리 어머님께 여쭙기를, "거지에게 주는 곡식은 하찮은 것에 불과한 것인데, 왜 돌이 섞인 나락으로 주셨습니까? 좋은 곡식으로 더 주십시오" 하므로, 어머님께서는 너의 등을 어루만지며 "어린 종년이 몰라서 그렇게 했구나" 하셨고, 아버지께서도 네 말을 아주 기쁘게 여기시어 "이는 다섯 살 되는 아이의 말이 아니구나" 하시며, 좋은 곡식 한 말을 내주셨다. 그 노파는 이런 내용을 떠돌아다니는 곳마다 전파했으므로, 너에게 축하하는 자가 많았다.7 8세에 이르러서는, 아이들 중에 떨어진 옷을 입은 아이가 있으면 입었던 옷을 벗어 입히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므로 淑人께서는 너의 의복은 늘 여유가 있도록 많이 만들어 보관해 두셨으며, 우리 부모님께서도 너를 사랑스럽게 여기어 늘 무릎 앞에 있도록 하셨다. 不肖한 나로서도 부모께서 너를 사랑해 주시는 것을 알고 역시 사랑스럽게 여겼으며, 너도 나를 염려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내가 혹 어려운 일을 네게 시켜도 너는 어렵게 여기지 않고 늘 시키는 대로 했으며, 내가 너의 행동을 貞夫人에게 이야기하면, 貞夫人은 너를 효자라고 칭찬하기도 했었다.아! 나는 일찍이 멀리 나가 여러 해를 보냈는데, 너를 꿈에 본 다음날 아침이면 반드시 너의 편지가 이르곤 하여, 내가 이것을 징험으로 삼자, 옆에서 보는 이들은 내게 前知之鑑이 있다고 하기도 했었다. 내가 경성에 있을 때나 瀋陽에 가 있었을 때, 또 네가 옥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지난 해 내가 東京에 가 있을 때에도 너를 꿈에 세 번이나 보았는데, 역시 세 번 다 편지가 왔었다.첫 번째 편지에는 "몸을 깨끗이 갖고 죽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어찌 구구한 짓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또 두 번째 편지에는 "죽으면 죽었지, 저들과 더불어 삶을 구한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본래부터 이렇게 결정한 저의 마음을 왜 모르십니까?"라고 하였으며, 또 세 번째 편지에는 "만약 제가 불행하게 되면, 먼 만리 밖에서 허탈해 하실까 늘 밤낮으로 걱정입니다. 빨리 돌아오셔야만 한 번 만나 뵙고 永訣 말씀을 여쭐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소원입니다"라고 했기에, 나는 즉시 돌아와 옥중으로 들어가 너를 만났었다. 그랬더니 너는 눈물만 철철 흘리면서 "저의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졌습니다"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東京에 건너가 있으면서 꿈에 너를 보았는데도 다음날 아침에 편지가 오지 않으니, 네가 정말로 죽었나 보다. 네가 죽었는데도 지금 나는 머리가 백발이 된 이 늙은 나이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네가 죽은 忌日을 두 번이나 맞이하였으나 나는 참으로 너를 잊었나 보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본래 내가 하고 싶은 바이나, 조금 잊을 만하면 지나간 浚(준)의 일이 늘 나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갑자기 너의 몸이 내 눈앞에 서 있는 듯하고, 네 음성이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여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맺혀진 恨이 불처럼 일어난다. 마치 미친 듯이 땅바닥을 두들기며 울음을 터뜨리고 공연히 나의 정신만 손상시키게 되니, 이는 잊으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잊을 수 없도록 하는 셈이 되는구나. 아아, 다 끝나고 말았으니, 이 모두를 다 천운이라 할까? 아아, 내가 東京에 있을 때에 여비를 구하기가 어려워 돌아오지 못하던 중 아버님의 忌日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밤에 잠을 잘 수 있었겠느냐? 다시 몸을 닦고 관복 차림으로 앉아 새벽 닭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었다. 닭이 운 후, 의자에 기대서 잠깐 졸게 되었는데, 갑자기 꿈을 꾸었다. 우리 父母·諸父·淑人·貞夫人이 모두 한 마루에 계셨는데, 너는 靑袍와 烏冠 차림으로 기쁜 모습을 지으면서 그분들을 모시고 섰다가 나를 보자 옛날 살았을 때처럼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러한 꿈을 깨고 슬픔을 견딜 수 없어 詩를 지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네가 지금 내 부모 앞에 서 있으나 吾父母今置汝前이승에서 맺은 부자지정 이미 끊어졌어라 人間偏愛斷因緣아! 까마득한 저승에서 於乎漠漠泉臺下끝없는 이 원통함을 누구에게 전하랴 此恨無窮孰可傳아! 너는 깜깜한 저승에서 잠들어 있으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이토록 나를 잊어버리지 않았건만, 나는 도리어 너를 잊어야겠다는 것으로써 내 몸만 보호할 비결을 삼으려고 하였으니, 나는 참으로 너를 차마 잊을 수 있는 사람일까? 아! 너는 우리 부모께서도 사랑스럽게 여기셨고, 또 淑人께서도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지금도 저승에서 기쁜 모습으로 모시는 낙을 얻게 되었으니, 이 인간 세상에서 千辛萬苦를 겪으면서 살고 있는 나보다 도리어 더 낫다 할 수 있겠다.네 아내가 낮에도 가끔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나의 心肝을 마치 칼로 도려내는 듯하며, 우리 형님은 흰머리를 날리면서 고독한 생활로 남에게 얹혀있게 되었으니, 내가 목석이 아닌 만큼 이 쌓이고 쌓이는 慢이 먼 우주까지 뻗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 참으로 비참한 신세이다. 네가 죽은 후 몇 달이 안되어 道孫(도손)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임신했다는 말은 네가 옥중에 있을 때 들었을 줄 아나, 그가 태어난 일은 네가 모르겠기에 지금 들려주는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浩東(호동)이라 지었는데, 생긴 眉目이 아주 청수하고 살결도 마치 玉雪처럼 깨끗하다. 지금 나이는 세 살인데, 말도 할 줄 알고 걸음도 제법 걷는다. 하늘이 부여한 자질이 매우 剛明하게 보이니, 참으로 우리 집 아이라 하겠다.나는 이 아이를 끌어안고 희롱 삼아 이르기를 "너의 할아비는 내게는 바로 아들이었고, 너의 아비는 나를 從祖라고 불렀다. 너는 나를 從曾祖라고 불러야 하며, 내가 죽은 후에는 너는 媤服을 입어야 하는데, 옛날 성인이 이렇게 마련한 禮制는 인정에 따라 후하고 박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죽은후 제사를 지낼 때에 이 말을 잊지 않고 늘 제사에 참여하겠느냐?"고 하였다. 우리 형님도 이 아이를 끌어안을 때면 마음속의 울화증을 풀고 약간이나마 웃음을 지으시며, 네 아내도 그 손자를 안으면 울음을 그치고 억지로 밥도 먹으면서 이 저주할 세월을 보내고 있다. 세상의 興廢와 성쇠란 서로 바뀌어지는 바가 시대에 따라 한이 없다. 이로 본다면 앞으로 우리 집안이 중흥될 조짐이 이 아이에게 있다고 하겠다. 나는 이것만을 기대하면서 자위하고 살아갈 뿐이다.아! 맨 처음 네가 구속되어 갈 때에 나를 돌아보면서 따라오라고 한 말은 나를 지극히 염려한 때문이었고, 내가 너를 따라다니게 된 것 또한 잊을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다. 바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한 부탁이었는데, 아비된 나로서 어찌 저버릴 수 있었겠느냐? 그러므로 경주에서 대구까지, 대구에서 공주까지, 공주에서 경성까지 따라가게 되었고, 또 경성에서 다시 대구까지 따라가기도 했었다. 5년 동안 남쪽과 북쪽으로 수 없이 쫓아다닌 것은 너의 목숨을 꼭 살려보려고 한 것인데, 너는 끝내 죽음을 당연한 일로 알고 그만 후회 없이 가버렸다. 이로 본다면 너의 죽음이 오히려 나의 산 것보다 낫다 하겠다.나는 지금 南中에 있는데, 몇 달 동안 脚氣症이 더 심해져 몸에 살이 빠지고 뼈만 남았으며, 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으니 이것은 末症인 듯하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 이미 63세나 되었으니, 죽은들 무엇 아까울 것이 있겠느냐? 머지않아 저승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는 慈情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한 번 작별한 것은 순식간에 불과할 뿐이나 지하에서 만나게 됨은 장차 한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네가 오늘 아침 나의 이 말을 듣고 반드시 슬퍼하지 않으며, 또는 내가 가는 날 기쁜 모습으로 미리 기다리게 되지 않겠느냐? 너를 장사지내던 날에는 내가 갑자기 눈이 어두워지고 귀도 들리지 않아 붓을 잡을 수 없었으며, 또 소상에는 마침 설사를 앓고 있어 누워 있느라 제문을 쓰지 못했다. 지금 三霜이 되었는데 끝내 한마디 말이 없다면 父子間 恩情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마음속에 쌓인 생각을 글로 표현하다 보니 이처럼 장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은 네가 양해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오직 이 祭文은 내가 너에게 이별을 말하는 바요. 이 술과 음식은 오직 내가 너에게 먹고 마시도록 권하는 바이다. 너는 감격스레 여기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고 흠향하기 바란다. 오호! 가슴 아프다! 많이 들기 바란다.

    6 대구복심법원(1920)

    경상북도 慶州郡 外東面 鹿洞里 농업 朴尙鎭(박상진) 37세충청남도 禮山郡 光時面 新興里 농업 金漢鍾(김한종) 37세右 보안법 위반 및 공갈 살인 피고 사건에 있어서, 대정 8년(1919)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피고 박상진·김한종은 각각 사형에 처했던 유죄 부분 판결에 대해 동 피고 兩名으로부터 京城覆審法院에 공소를 제기한 바 있었고, 또 피고 박상진에 대해서는 原審檢事로부터 공소제기가 있어서 同院에서 심리한 결과, 피고 양명의 공소 및 피고 박상진에 대한 원심 검사의 공소를 기각하였다. 그러나 피고 양명은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기에 上告審에서 심리한 결과 原院 판결 중 피고 양명에 관한 부분을 破毁하고 사건을 當院으로 이송해 왔다.따라서 당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村上淸(촌상청)의 관여 하에 다음과 같이 심리 판결한다.

    7 광복회검거보고서(1918)

    8 광복회사건(1934)

    大正 6년(1917년) 10월부터 安東縣, 五龍背, 신의주, 평양, 김천, 경주 등에서 경남북, 충청남도, 京城 등의 부호에게로 光復會 명의로 국권회복운동자금을 제공하라는 불온통고문을 빈번히 우송하여 관계 道에서 수사 중이었는데, 大正 7년(1918년) 1월 충청남도 경무부에서 관계자를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도내 漆谷郡 부호 張承遠(장승원) 및 충남 牙山郡 道高面長 살해사건도 광복단원의 소행으로 판명되었다. 본건의 首犯者 朴尙鎭(박상진)은 경북 慶州郡 外東面 廉(鹿의 잘못: 편자 주)洞里 元奎章閣(今 經學院) 副提學 朴時奎(박시규)의 장남으로 누대에 걸쳐 학식과 덕망을 갖춘 높은 양반가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어 16세에 이르러 집에서 漢文을 배운 후, 본도 善山郡 출신으로 당시의 參政(今 內閣書記官長) 許蔿(허위)에게서 훈도를 받은 수년 후 21세에 그 門下를 나와 26세에 이르러 京城 養正義塾에 들어가 법률경제학을 공부한 후 판사등용시험에 급제했다. 그러나 그 사이 은사 許蔿(허위)는 일본이 韓國保護 아래 統監府를 설치한 것에 분개하여 드디어 관직을 그만두고 경기도 임진강, 강화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당시 정부를 전복하여 공고한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드디어 明治 41년(1908년)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사형되었다. 그러자 朴尙鎭(박상진)은 이에 死體를 받아 홀로 장례를 치른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그가 許蔿(허위)의 훈도를 받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극도로 깊어 때가 오기를 기다리던 바, 大正 6년(1917년) 陰 6월 蔡基仲[채기중(安東出身?)]의 방문을 받고 협의하여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南鮮富豪에 脅迫文을 보내어 軍資金을 징수하고 만약 응하지 않는 경우는 사살하는 것이었고, 이외에 충남 稷山金鑛을 습격하고 중국에 건너가 通貸를 僞造行使하여 점차 正貸로 바꾼 후 東三省에서 鮮人 壯丁을 훈련하여 군대를 편성하는 한편, 鮮內 주요지역에서 한 지역 1만원의 자본으로 1백 개 지역에 표면적으로 잡화상을 개업하고 그 이익으로 국권회복의 자금을 충당하는 것과 함께 무기 구입을 계획하였다. 어느날 일본이 외국과 국교단절에 이르게 되면, 일거에 일어나 일본에 반항하면 곧 조선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당분간 光復會인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이 各地의 부호에게 불온문서를 보내어 자금을 모으고 大正 元年(1912년) 朴尙鎭(박상진)이 중국 혁명상황의 시찰로 중국에 갔을 때 손에 들어온 권총 십수 정(판명된 것으로 禹利見(우리견) 등이 구입한 것을 합하여 11정)을 각 동지에게 나눠주어 강도살인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관계자의 이름이 거듭되는 범죄사실이 다음과 같다. 大正 7년(1918년) 2월 1일 보안법위반 및 살인죄와 더불어 총포화약취체령 위반으로 送致되었다.

    9 공주지방법원예심(1918)

    豫審終結決定書慶尙北道 慶州郡 外東面 鹿洞里 四百六拾九番地無職朴尙鎭(박상진) 三十五歲同道 榮州郡 豊基面 東部洞農業蔡基中(채기중) 四十六歲忠淸南道 禮山郡 光時面 新興里農業金漢鍾(김한종) 三十五歲同道 天安郡 城歡面 三龍里農業張斗煥(장두환) 二十五歲同郡 修身面 卜多會里農業庾昌涥{유창형[庾昌淳(유창순)의 잘못, 편자 주]} 三十八歲慶尙北道 榮州那 鳳峴面 魯佐洞 林鳳柱(임봉주) 林世圭(임세규) 三十九歲同郡 長封面 葛山里當時 忠淸南道 天安郡 北面 海松里 權國弼(권국필)權相錫(권상석) 五十二歲忠淸南道 靑陽郡 赤谷面 冠峴里 農業 金永根(김영근)金敬泰(김경태) 四十歲同道 禮山那 光時面 新興里當時 京畿道 仁川府 松峴里米穀商金在昶(김재창) 三十一歲慶尙北道 漆谷郡 石積面 磻溪洞農業孫基瓚(손기찬) 三十三歲忠淸南道 天安郡 城歡面 三龍里農業趙鍾哲(조종철) 二十七歲同道 禮山郡 光時面 新興里漢學敎師金在豊(김재풍) 三十四歲同道 牙山郡 松岳面 東花里農業姜奭周(강석주) 二十三歲同郡 道高面 石堂里農業成文永(성문영) 三十二歲慶尙北道 禮泉郡 知保面 知保里漢文敎師趙鏞弼(조용필) 五十二歲忠淸南道 禮山郡 新陽面 加支里當時 京畿道 仁川府 松峴里 四拾九番地米穀商李在德(이재덕) 三十歲忠淸南道 禮山郡 光時面 新興里農業金商俊(김상준) 三十二歲同道 洪城郡 谷面 新豊里 元面長鄭泰復(정태복) 三十一歲同道 靑陽郡 飛鳳面 淸水里當時 京畿道 仁川府 松峴里米穀仲介業黃學性(황학성) 三十五歲江原道 三陟郡 蘆谷面 下軍川里 當時 同郡 近德面 校河里米穀商金東鎬(김동호) 四十二歲慶尙北道 醴泉郡 知保面 新豊里農業尹昌夏(윤창하) 三十五歲同郡 豊壞面 憂忘里農業鄭鎭華(정진화) 四十五歲忠淸南道 天安郡 城歡面 山中里 農業柳重協(유중협) 二十八歲同道 禮山郡 光時面 新興里農業金元黙(김원묵) 二十七歲同所農業金在哲(김재철) 四十六歲同道 天安郡 天安面 星牙里成達永(성달영) 四十六歲同道 禮山郡 光時面 新興里農業金在貞(김재정) 五十七歲同道 靑陽郡 赤谷面 花山里奇載璉(기재연) 四十八歲同面 冠峴里農業洪顯周(홍현주) 三十七歲慶尙北道 榮州郡 豊基面 西部里 四拾參番地 農業趙在夏(조재하) 四十六歲忠淸南道 牙山郡 盬峙面 芳峴里當時 同面 石牙里農業鄭雨豊(정우풍) 四十歲慶尙北道 淸道郡 梅田面 溫幕里農業 廷禧李庭禧(이정희) 三十八歲同道 安東郡 豊西面 佳谷里農業權準興(권준흥) 三十八歲同道 慶州郡 慶州面 校里農業崔浚三(최준삼)十五歲京畿道 京城府 八判洞 四十六番地訓導金魯卿(김노경) 三十五歲全羅南道 寶城郡 福內面 詩川里測量業李秉昊(이병호) 三十二歲京畿道 抱川郡 新北面 加采里當時 同道 京城府 長沙洞崔勉植(최면식) 二十九歲忠淸北道 槐山郡 文光面 玉城里農業申陽春(신양춘) 三十歲同所農業鄭雲漢{정운한[淇(기)의잘못-편자주]} 四十一歲慶尙北道 奉化郡 在小面 葛山里農業姜順弼(강순필) 三十七歲右 保安法違反 恐喝 殺人 放火 强盜 犯人藏匿 鋶砲火藥類取締令違反 橫領被告事件豫審을 遂하여 決定함이 左와 如하다

    10 경성복심법원(1919)

    경상북도 慶州郡 外東面 麻明里 재적·거주농업朴尙鎭(박상진) 36세同道 榮州郡 豊基面 東部洞 재적·거주농업일명 小夢(소몽), 蔡基中(채기중) 47세충청남도 禮山郡 光時面 新興里 재적·거주농업金漢鍾(김한종) 36세동도 天安郡 城歡面 三龍里 재적·거주농업張斗煥(장두환) 26세동도 동군 修身面 卜會里 재적·거주庾昌淳(유창순) 39세경상북도 榮州郡 鳳峴面 魯佐洞 재적·거주 농업통칭 鳳柱(봉주) 또는 東根(동근), 林世圭(임세규) 40세 동도 동군 長秀面 葛山里 재적 충청남도 天安郡 北面 林松里 거주 농업통칭 相錫(상석) 또는 國弼(국필), 權成旭(권성욱) 53세 동도 靑陽郡 赤谷面 冠峴里 재적·거주 농업통칭 永根(영근), 金敬泰(김경태) 41세동도 禮山郡 光時面 新興里 재적·거주 米穀商金在和(김재화) 32세경상북도 漆谷郡 石積面 磻溪里 재적·거주농업孫基瓚(손기찬) 34세충청남도 禮山郡 光時面 新興里 재적·거주漢文敎術金在豊(김재풍) 35세동도 牙山郡 道高面 石堂里 재적·거주농업成文永(성문영) 33세경상북도 禮泉郡 知保面 知保里 재적·거주漢文敎術趙鏞弼(조용필) 53세동도 동군 동면 新里 재적·거주농업尹昌夏(윤창하) 36세동도 동군 豊壤面 憂忘里 재적·거주鄭鎭華(정진화) 46세충청남도 天安郡 城歡面 山中里 재적·거주柳重根(유중근) 29세동도 牙山郡 道高面 石堂里 재적·거주농업成達永(성달영) 47세동도 동군 동면 石斗里 거주농업鄭雨豊(정우풍) 41세충청북도 槐山郡 槐山面 西部里 재적동도 동군 文光面 玉城里 거주漢文敎術鄭雲洪{정운홍[鄭雲淇(정운기)의 잘못-편자 주]} 41세右 19명에 대한 保安法 위반, 공갈·살인·방화·강도·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등 피고사건에 대해 대정 8년(1919년) 2월 28일 당 지방법원이 宣告한 판결 중 유죄 부분에 대해, 피고 박상진·채기중·김한종·장두환·유창순·윤창하로부터 控訴 제기가 있었다. 이어서 피고 권성욱·성영달·조용필·정진화·유중근·정우풍·정운기·임세규·김경태·손기찬에 대한 부분에 관해 원심법원 검사로부터 공소 제기가 있기에 當院은 조선총독부 검사 小野重功(소야중공)의 관여 하에 아래와 같이 심리 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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