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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EF FOR KOREA(한국의 개요) |
한국 보고서수신: 찰스 에반스 휴즈(Charles Evans Hughes)국무장관전송 편지1921년 4월 17일프레드 돌프(Fred A. Dolph) 컨티넨탈 트러스트(Continental Trust) 빌딩 워싱턴 D. C.장관님께,동봉한 한국 상황에 관한 보고서를 장관님께 비공식적으로 제출하고 떠나야 하겠습니다. 이 보고서를 제출하는 유일한 목적은 보고서에 포함된 정보를 장관님 앞에 놓기 위한 것임을 알아주시고, 미국 시민인 제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1부는 혼동을 주는 참조나 인용 없이 쉽고 편견 없는 진술로 채우려고 노력했습니다. 2부에는 관련된 국제법의 증거와 원리들에 대한 참조가 들어 있으며, 이는 진술 속에 사실과 원리가 기술되는 동일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습니다.이 보고서는 한국 국민들의 소망에 따라 준비한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장관님께 자신들의 매우 고결한 존중과 존경을 보여달라고 제게 부탁했습니다.이러한 확신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프레드 돌프(Fred A. Dolph)존경해마지 않는 찰스 에반스 휴즈(Charles Evans Hughes) 국무장관님께입장에 대한 설명한국의 상황을 고려해 보는 것은 대부분 완전히 인정된 사실에 근거한 것이며 국제법의 원칙과 관련 짓는 것은 기본적인 것으로 자유롭게 언급해야만 한다. 외국과의 관계로 봤을 때 한국 역사는 크게 세 기간으로 나뉜다. 1882년에서 4215년 전까지 기간동안 한국은 독립적인 상태였으며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완전한 상태를 유지했다. 1882년부터 1905년에 이르는 23년간 동안은 전 세계와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다소간 나중에는 전적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맺은 조약에 따라 열강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1905년부터 일본의 권리 침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엄격한 법적 관념으로는 1882년 이전 한국의 국가 지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1882년 이전 상황은 공평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기해야 한다.1882년 미국이 한국을 하나의 분리된 자주 국가로 보고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로 볼 때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자주성을 인정한 것은 확실하다. 그 조약은 마땅한 형식이었으며 일반적인 과정을 따라 상원에 비준을 받고 아서(Arthur)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일본이 한국과 미국의 관계 수립을 공식적으로 축하한 첫 국가였다.한국을 자주국가로 인정하는 이 조약의 국제적인 효력을 강조했음에도, 중국은 한국에 대해 자신이 종주국이라고 항의했다. 그 항의는 중국의 이익을 고려해 계속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결국 번복되었다. 이후 중국은 특정 조약을 인정함으로써 독립적이고 단독적인 자주 국가로서의 한국과 미국의 지위를 인정했다.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벨기에, 덴마크, 그리고 이탈리아가 이어서 미국의 전철을 밟았으며 단독 국가로서의 한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일본은 외교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공식적으로 1882년 미국과의 조약 실행을 “축하했다”. 그리고 중국, 러시아, 영국과 맺은 조약 내용을 언급하며 미국과 직접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우리는 1904년 2월 23일 한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에 관해서만 언급하겠다. 그 조약 3항에 보면 이렇다.“일본 제국은 대한 제국의 독립성과 영토의 자주권에 대해 절대적으로 보증한다.”일본을 포함해 앞서 언급한 나라들과 미국은 한국과 외교적인 관계를 수립했다. 공사가 한국으로 파견됐고 한국 공사들은 다양한 나라에 받아들여지고 인정받았으며 조약이 수립됐다. 이러한 조약들은 고위 계약 당사자의 직권적인 실재 법령에 의해 다시 폐지된 경우는 없었다. 그것들은 1905년까지는 전적인 신뢰 하에 유효하게 발효되었으나 그 때 이후 일본의 주장과 독단적인 태도로 무시되었다. 일본에 대해 당연한 고려 사항을 생각한다고 해도 일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독단적인 태도 또한 근거 없는 것이다. 인정된 사실들은 일본이 1905년 이후 열강들에게 주장하는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이 설명의 목표 중 하나는 국제법이나 여러 계급의 법, 계약, 조약에 이르는 모든 법의 기본적인 원칙을 상기하고 되돌아보는 것이며 계약 당사자도 아닌 제 삼의 세력이나 나라의 주장이나 바람만으로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1905년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과 현재의 곤경으로 이끈 상황과 관련된 일들은 비슷한 군사력과 크기를 가진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시민들이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소지하던 무기들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는 교활한 법안의 시행으로 인해 개인적인 삶은 침해받고 강탈당했다. 사람들은 또한 믿었던 동업자와 대리인의 부정한 계략으로 인해 재산을 빼앗겼다. 상황의 피해자거나 지나치게 믿은 결과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비난받지는 않았고 오히려 동정을 사거나 다른 착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노상강도는 벌을 받고 추방당했으며 사기로 얻은 재산은 적법한 절차를 따라 다시 시민에게 돌려줬다.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원칙과 조건은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적어도 효력이 있는 실질적인 것이었다. 앞서 말한 것은 저자가 지금 현재 한국에 상황에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기에 언급한 것이다.1882년 이전, 4215년 동안 한국은 도움을 받지 않은 스스로의 힘과 활동, 민족으로 독립성과 자주성을 유지해 왔다. 그 당시 사실 한국은 타르타르 족이나 몽고족 집단에 의해 지배되기도 했지만 항상 결과적으로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였다.1595년에서 1597년 한국은 잠시 일본인 히데요시(Hydeyoshi) 막부의 침략을 받았지만 한국의 창조적인 지혜와 진취적 기상이 도움이 됐다. 이 기간 동안 세계 최초의 갑옷이 한국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으며 그 시대 일본 함대는 한국 바다에서 쫓겨갔다. 한국의 지혜를 볼 수 있는 다른 하나는 다른 나라 지상군에 대응해 사용하던 포탄으로 세계 최초였으며 일본인 무인들에게 놀라움이 퍼져갔고 그들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퇴각시켰다. 한국은 우세한 지적 능력과 창조적인 지혜로 다시 자유로운 독립국이 되었다.일본의 침략에 대해 한국의 정치인들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은 그들을 다른 세계에서 고립시키는 것이라 생각했고, 한국은 은둔의 왕국이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각으로는 정당한 것이었으며 그 작은 왕국은 400년 동안 깊은 평화를 누렸다. 한국은 1882년까지 고립된 상태로 남아있었으나 미국의 초대로 세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었다.1882년에서 1905년까지 23년 동안 한국은 국가 독립을 유지했으나 그것은 한국의 힘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과 구속력 있는 조항이 담긴 많은 조약을 맺었다.한국은 이러한 조약을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약해졌고 스스로의 국방을 포기했으며 결국 한국이 전적으로 외국 열강들에게 의지해야 했고 열강들이 압력을 행사하면 한국의 “좋은 관공서”들을 사용하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그 누구도 한국의 이러한 태도나 믿음에 대해 비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깊숙한 의식 속에는 만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덴마크, 이탈리아, 그리고 중국이 단지 글자 그대로 똑같은 것을 요구했고 하기로 했다면 사실상 우리는 허락해야만 했을 것이다. 즉, 그들의 압력에 반대해서 “좋은 관공서” 사용에 항의했더라면 현재의 곤경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한국은 여전히 세계 자유국가 중 하나다. 4천년의 역사에서 한국의 2천만 민족은 공업 기술, 지식적 업적 등 기록적인 성과물을 남겼으며 이는 적어도 세계의 위대한 형제국들인 헤자즈(Hejaz), 리베리아(Liberia), 하이티(Haiti). 온두라스(Honduras), 과테말라(Guatemala)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중요하다.우리는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 같은 상황에서 파렴치한 같은 나라에 의해 다른 조그만 나라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1904년 초,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고 한국에 동맹국으로서 원조를 요청했다. 앞의 상황에서 함께 협력해 준다면 한국의 독립을 확실히 보장하기로 했다. 한국은 그 협정을 글로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1904년 2월 23일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조약이 성립됐다.우리가 이미 본 내용을 인정하는 내용의 그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특히 한국의 독립과 영토상의 자주성을 영원히 보장했다.따라서 일본의 군대는 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가되어 시베리아(Siberia)로 가는 가까운 길로 한국을 통과했다. 또한 일본의 해군은 한국 바다를 가까운 작전 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만일 한국이 이러한 군사적 점령과 한국의 영토 사용을 불허했다면, 만일 한국이 일본에 대해 벨기에가 독일에 했던 것과 같은 태도를 취했더라면, 러일 전쟁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런 과정은 일본이 극동에서 육군과 해군을 동원해 러시아를 무력화시키는 데 있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한국은 사실상 전부는 아니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본의 배반과 배은망덕함을 적당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일본제국은 오늘날까지 한국에 대해 한국의 독립과 영토 자주권을 보장했던 1904년 조약 아래 얻었던 군사 점령을 풀지 않고 있다. 한국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본 군대의 지배와 위협아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어 위에 언급한 상태에 있어보지 못했다.특정한 조약과 허락 아래 조건상의 군사적 지배는 임의대로 원래 의미를 거스르는 지배로 바뀌었으며 이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양도 없이 한 것이다. 그러한 허용된 군사적 지배가 유지되는 한 개인적인 그리고 국제적인 법에 있어 그 원래 허용의 목적을 이행을 고려해야 한다.일본은 한국이 항복한 것이 아니라 원래 목적인 한국의 독립과 영토 자주권을 보호를 위해 군사적인 입성과 점령을 한 것이어서 군사적 점령의 위협 아래서 종주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한국이 고려한 계약과 조건으로 일본을 돕고 러시아와 싸우는 데 동맹을 맺기로 동의했으며 한국은 계획대로 행했다. 일본은 한국에 계속 주둔하면서 한국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상 양도한 적도 없는 상태에서 존속시키고 있는 것뿐이다. 더구나 원래 그 당시 목적은 한국의 독립을 보호하고 보장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국제법의 기본적이고 교활한 법에 따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위협을 가하는 동안 어떤 것도 지키지 않았고 어떠한 일도 하려하지 않았다.이것은 모두 절대적으로 사실이며 미국을 포함한 한국과 조약을 맺은 세계의 국가들은 이론의 반대되는 주장이나 요구에 관계없이 반드시 한국을 독립 주권을 가진 나라이며 조약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사리 추구에 근거해 일본의 한국 점령을 정당화하는 국가가 있다면, 우리는 계속 물을 것이다. “ 누구를 위하는 게 유리합니까? 일본입니까? 한국입니까?” 그들은 모두 독립 국가이며 모두 세계 다른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각각의 소유를 가지고 있는 이웃일 뿐이다.한 이웃이 그의 친구의 재산을 뺐었다는 입장으로 보는 게 편리할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가 그의 이웃보다 더 훌륭한 농부이며 더 훌륭한 곡물을 재배할 수 있으며 이웃 농부의 추수권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가 더 일찍 일어나 오랫동안 일할 것이며 따라서 공동체는 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을 절도라고 말한다.법과 정의의 원칙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 지도 모른다. 정통하더라도 잠시 잊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여전히 일본의 행동을 정당화 할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사소한 행동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의견이나 주장 없이 단지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함이고 만일 올바른 마음을 가졌다면 꼬치꼬치 캐기 좋아하는 의심 많은 사람도 확신할 것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 이것이 욕심과 개발에 관련된 끔찍한 비극이며 끔찍한 이야기라고 고하고싶다.1894년 7월 일본과 한국은 중국에 대항한 동맹 조약을 맺어서 한국이 일본 군대의 중국 진출과 생활 유지를 돕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그 조약은 중국과의 평화적 결론을 없애 버렸다. 일본의 성공에 필요한 이 조약을 맺은 후 일본은 1894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중국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역사는 일본이 승승장구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1895년 4월 20일 시모노세키(Shimoneski)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됐다.전쟁에 있어 성공적인 결과로 일본은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지게 됐다. 일본은 한국의 도움을 무시하고는 승리를 확신하며 자신의 동맹인 한국을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극동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했다.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은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으며 당시 조선의 왕비는 그녀가 속한 민씨 가문의 힘을 이용해 일본의 침입과 야욕에 반대했다. 일본은 그녀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일본 수상인 미우라(Miura) 자작이 한국에 와서 한국 왕비 살해를 공모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궁전은 일본인 군대에 포위됐고 자객이 계획을 실행하러 궁전에 들어갔다. 그들은 궁중 경호 사령관과 두 명의 궁녀를 살해하고 결국 왕비를 찾아냈다. 그녀는 칼로 조각조각 난자 당했고 울로 만든 담요에 싸여 등유가 뿌려져 궁중 뜰에서 산화했다.책에 이러한 비극이 기록돼 있지만 더 자세한 사실은 생략하겠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간단하게 일본이 저지른 일을 기술하는 것이다. 일본이 이러한 일을 한 이유와 자신들이 이런 일을 저지른 나라에 대한 태도는 미우라(Miura) 자작에 대한 공판에서 변호인의 말로 대략 알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변호사가 변호한 내용이다.그는 한국에서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그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정치적 문제의 근원은 없어졌습니다.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외교적 지위를 고려해볼 때 미우라(Miura) 자작은 단지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이 변호는 그가 재판 받은 일본 법정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어떤 추론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가 공모자로 드러났음에도 그는 풀려났다.살인과 뻔뻔스러운 변호는 이렇듯 잔학했으므로 세계의 양심이 항의하여 일본이 조약에 있어 원래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 동안 일본은 세계의 결정을 따랐지만 사실상은 외교적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새로운 지우지추(jiu jitsu)를 앉아서 지켜본 것이다.상황은 일본인들이 목표를 실행시키는 것을 늦춰지게 했고 일본은 한국이 러시아에 위협 당하고 중국의 도움을 받도록 하는 선전활동을 폈다. 이것은 성공을 거뒀으며 러시아는 이미 극동에 목표를 세우고 얻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일본은 일본 해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ck)과 황해의 여순(Arthur)항, 대련(Darien)에 만든 철도역을 이용해 동해에 도착했다. 한국은 불필요한 종속물이었다.이러한 명백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획에 성공을 거두고 이번에는 러시아에 대항하는 한국과 일본의 두 번째 동맹을 맺었다. 우리는 이미 이 동맹과 1904년 동맹 성립에 대해 상세히 얘기했고 일본은 그것을 통해 명백히 한국의 독립성과 영토의 자주성을 보장했었다. 그 보장에 대응해 한국은 러시아와 시베리아(Siberia)에 대항하는 작전 기지로 영토 사용을 허락했었다.이것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조약 아래 군사적 점령이었고 일본은 지금까지도 이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마무리지은 조약은 1905년의 포트머스(Portmouth) 조약으로 일본은 사인을 하자마자 상규를 벗어나 바로 한국에서 공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협정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섭정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토(Ito) 후작이 조약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며칠동안 그는 황제와 각료들을 괴롭혀 그의 제국적인 독재 의욕을 실행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단호히 거절했다. 협박과 감언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더욱 강경한 방법을 채택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궁은 두 번째로 일본인 군대에 의해 포위 당했고 으름장을 놓는 장교들과 눈에 띄게 무장한 그들의 경호원에게 침략 당했다. 황제와 대신들은 이토(Ito) 후작의 선제 명령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결론도 없이 계속 함께 항의했고 그들 중 가장 심하게 비난했던 세 명의 대신들이 하나하나 밖으로 끌려갔다. 일본인 장교는 칼을 칼집에 꽂고 권총용 가죽 케이스를 잠그며 들어왔고 여전히 회의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서명하시겠죠?”라고 물었다. 왕과 남아있는 대신들은 자리에 없는 그들의 동료가 한국 자유의 순교자가 됐음을 믿을 수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완강하게 거절했다.이 회의의 자세한 내용은 무수한 역사적 기록 속에 남겨져 있다. 그것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보호 조약은 서명되지 않았고 법에 따라 실행되지 않았다. 비록 일본은 그렇다고 하지만 말이다. 만일 정말로 서명이 되었다손 치더라도 개인적인 감금 때문이라면 소용이 없다. 한국을 대표하여 그 회의 개회식에 황제와 여덟 대신이 참석했다.수상 한긴설(Han Kin-sul), 부수상 겸 외무부 장관 박재순(Park Che-soon), 민영기(Min young-kee), 이하영(Lee Ha-young), 이완용(Yi Won-young), 이근택(Yi Kun-Tak), 이재용(Yi Che-young), 그리고 권중현(Kwon Choong-hyun)이 그들이다. 대신들의 지위는 진행 고문이었다. 문서의 마지막 결정과 실행은 황제의 몫이었다. 황제는 서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대신 대부분에게도 서명하라고 얘기하지 않았다.세 명의 이 씨는 서명을 했다. 이러한 반역 행위에 대한 보상 중의 하나로 이완용은 백작 작위와 백만 엔 (50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 리와 권은 서명 없이 동의했다고 주장된다.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기로 이 두 사람은 단지 참여하는 것만 거절했다 한다. 여하튼 황제와 수상, 외무부 장관과, 민 대신은 어떤 형태로든 서명하거나 묵인하지 않았고 모두 용감하게 큰 소리로 일본의 행위에 대해 탄핵하고 거절했다.일본제국은 이것을 1905년 11월 17일 완성했고 세계는 잠시 그들의 진술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반역자 이완용이 그들의 성명을 입증할 사람으로 거론되었기에 그것은 충분히 그럴 듯 했다. 사실, 이완용은 박재순이 외무부 장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로 외무부 장관 대행으로 서명했으며 또 다른 반역자인 김윤청(Kim Yun-chung)에게 명령을 내려 워싱턴(Washington)에 머물러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며 그 조약을 미국에 알리라고 했으며 일본 공사로서 돌아왔다. 김은 시키는 대로 일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의 반역행위에 대한 상으로 제물포(Chemulpo) 지사가 되었다가 나중에 전라도 지방 고문이 되었으며 수 천 에이커의 막대한 부동산을 하사 받았다.미 국무부 장관 루트(Root)는 그 당시, 보호 조약의 서명에 대한 일본의 진술과, 이완용과 김윤철이 매수되어 그를 속여 말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므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 조약을 인정하고 한국에 있는 미국 외무부 대표를 소환했다.그 동안 황제는 궁극적 목적을 향한 일본의 태도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1905년 10월 충실하고 막역한 친구인 미국인 호머 B. 헐버트(Homer B. Hulbert) 교수를 워싱턴(Washington)에 파견해 미국의 태도에 항의하고 도움과 “좋은 관공서”를 요청했다.헐버트(Hulbert) 교수는 조약이 서명된 것으로 추정된 바로 그날 워싱턴(Washington)에 도착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한국의 직무 대행을 맡고 있는 김윤청(Kim Yun-chung)을 만나려 했으나 일본의 비용을 댄 것이었고 다음 날 일본의 보호조약이 성립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 루트(Root) 장관을 만났기 때문에 소용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그는 마침내 루트(Root) 장관을 만났지만 그 상황 아래서 그는 공식적으로 한국의 대표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항의는 국무부에 전해졌고 단지 비밀 문서에 덧붙여졌을 뿐이었다. 다음 날 헐버트(Hulbert) 교수는 황제로부터 보호 조약의 실행을 반대하는 전보를 받았다. 그 전보는 신속히 국무부로 전해 졌고 또한 국무부 서류의 일부가 되었다.왕의 모든 실질적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호령이 선포된 후 황제는 자국 안에 일본인 죄수처럼 감금되었다. 명백한 친일파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를 볼 수 없었다. 세계의 주도적인 신문들의 노련한 특파원들이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충실한 친구인 헐버트 교수(Pro. Hulbert)는 일본인의 정찰이 있는데도 어떻게든 해서 그를 보았고, 황제는 보호국의 부정한 특징을 상술하고 곤경에 처한 한국을 돕기 위해 그런 국가들의 "중재"를 요청하면서, 그에게 한국과 조약을 체결했던 강대국들에게 주는 신임장을 전했다. 그렇지만, 헐버트 교수 혼자서는 일본이 한국에서 자행한 강탈의 부정한 특징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지속하는 것 이외에는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는 이것을 우리가 약자와 피억압자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미국인에게 기대하는 성실함과 자기희생을 통해 이 일을 했다.항의서와 헐버트 교수에게 전달된 신임장을 추가하면서, 황제는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에 참가할 전권대사에게 신임장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1907년 4월 20일이란 날짜가 찍혔으며 2급 관리인 이상설(Ye-Sang-sul), 한국 대법원의 전(前) 판사인 이준(Ye Choon), ‘프린스(Prince)’ 이위종(Ye We-chong)에게 발행되었다. ‘프린스(Prince)’ 이위종은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주미 공사를 지낸 이범진의 아들이고 황제 조카의 아들이었다. 이런 행위에 대해 알았을 때 일본 제국 정부는 신속하게 ‘프린스(Prince)’ 이위종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이상설과 이준에게는 종신형 판결을 내렸다.일본은 신임장에 서명한 황제의 양위를 선언함으로써, 헐버트 교수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특사에게 발행된 신임장을 무효로 만들려고 했고 실제로 무효로 만들었다. 그 성명서를 믿은 이들은 당연히 신임장이 자동적으로 무효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 성명서는 1907년 7월 19일에 만들어졌고, 5일 후인 24일, 매수당한 한국의 반역자인 이완용은 한국을 위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이토 후작과 맺은 조약에 서명했다. 그것은 일본 통감인 이토 후작에게 국내 및 그 밖의 한국의 정부 기능 전체를 양도하는 것이었다.황제의 태도와 많은 공개적인 저항들로 볼 때, 일본이 황제가 공포했다고 발표한 이런 법령들 어느 것에도 황제가 실제로 그리고 자진해서 동의했다고 믿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하튼간에,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는 원리로, 그는 1919년 1월 24일에 독살 당했다. 그의 죽음은 며칠 동안 비밀에 부쳐졌고, 마침내 그가 졸중으로 죽었다고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왕세자는 불행한 사람-정신 박약자-이었다. 명성황후 살해 이전의 격동의 시기에 그는 불운하게 그녀에게서 태어났다.어머니가 겪었던 바로 그 공포와 시련이 그를 감쌌다. 그는 통상적인 지적능력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나 현재 살고 있다. 이는 논박할 수 없는 공공연한 증거로, 그것으로써 일본의 사기를 비난할 것이다.일본은 자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불행한 사람을 이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07년 8월 말, 그는 "분개한 민족의 음울한 침묵 속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대관식을 통제한 일본 당국은 공개를 막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이를 하면서 그들은 적절한 조언을 받았다. 새로운 황제가 공식석상에 들어갈 때 두 명의 관리가 들어 올린 그의 골격이 떨리는 것, 또는 그가 이후에 열린 입, 떨어뜨린 턱, 무관심한 눈, 그리고 한 가닥의 지적인 관심조차 없는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은 결코 이것을 본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낫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그는 세상에 "꼭두각시 황제"로 알려졌고, 물론 일본인들은 그들이 의도한 대로 그를 움직였다. 칙령들이 그의 이름으로 발포되었지만 그는 아마도 그것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혹 그것들을 본다고 해도 선명한 붉은 인장과 노란 띠 외에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첫 번째 명령은 더 많은 수의 일본 군대가 유리한 모든 곳을 점령하고 있었는데도 소규모이고 무력했던 한국군을 해산하는 것이었다. 상이한 지대(支隊)들은 "무기 없이" 정해진 지점에서 보고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들은 해산 명령을 읽었다. 그들 대부분은 거부했고 맨 손으로 싸웠다. 그들은 총에 맞아 쓰러졌고, 이처럼 조국의 자유가 찬탈된 것에 반대하는 마지막 저항을 하면서 죽어갔다.결국 일본인들은 이런 불운한 꼭두각시 황제로 한국 정부의 형태와 주장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관료적 형식주의에 싫증이 났고, 1910년 뻔뻔스럽게 합병 포고령을 공포했다.물론 이것은 처음부터 그들의 목표이고 의도였다. 하지만 합병의 그날까지 그들은 그것을 언제나 부인했다. 공격적인 조치를 취할 때마다 그럴듯한 구실이 주어졌고,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세계의 민족들에게 몇 번이고 다시 확신시켰다.
제1대 총독인 이토 후작은 "모든 합병 이야기를 불합리한 것"으로 규정했고, 모든 일본 관리와 외교관들은 세상을 현혹하는 완벽한 위선으로 이 슬로건을 채택하고 반복했다.전술한 것은 순전히 법률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상황을 사실 그대로 개괄하고 있다. 그것은 그저 국제적인 법률가가 그의 최종 결론을 옹호하며 내릴, 그 사건의 예비적인 진술에 불과하다. 그것의 범위 안에서 다른 모든 문제들은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한국을 지배하고 통제함에 있어서 일본이 사용한 방법들이 인도적인 것이든 아니든, 또 경제적으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 사태의 요지는 권리 없는 지배와 통제, 즉 한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파괴이다.일본의 지배가 한국에 좋은 것이고 한국은 개량과 경제적 발전을 통한 물질적인 방식으로 이득을 얻었다고 말할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침범자의 무자비한 손에 의해 유역(流域)에 있는 비옥한 작은 논 혹은 도시에 있는 안락한 집에서 쫓겨나 언덕에 있는 진흙 누옥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은 이 진술을 잠자코 받아들일 수 없다. 좀 더 긴 거리의 철도, 좀 더 많은 상수도, 좀 더 좋은 도로와 좀 더 많은 상업 활동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가 공동 번영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이득이 외국인 강탈자에게 돌아간다면,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가? 그것은 그의 땅이었다. 천연자원은 그의 것이었고 그것은 그의 작은 나라였다. 그는 결국 이런 번영을 창조한 것이 그의 재산과 그의 세금과 그의 이마에서 나온 땀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가 온 정신을 기울여 증오하는 외국인 침범자를 위한 것이다. 한국에는 살해되었고 매질을 당했으며 불구가 된 사랑하는 이들과 능욕당한 여자들에 대한 생각과 함께, 바로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2천만 동포가 있다.실제로 일본은 철도, 튼튼한 도로, 공공 개량 공사를 통해 한국의 물질적인 개선을 꾀하는 데 약 7천 5백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의 국가 부채를 그들이 한국을 빼앗고 점령하기 이전 한국의 평균 정상 세금 외에 한국인들에서 5천 5백만 달러를 초과 세금으로 징수했을 때보다 더 많은 6천만 달러로 증가시켰다. 한국인은 1억 천 5백만 달러로 그의 필요와 욕구를 좀 더 잘 이해하면서 7천 5백만 달러의 개선을 이룰 수 있었다고 느낀다.일본은 이런 생각들을 하고 또 마음속에 이런 증오를 품고 있는 2천만 민족을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통치하려고 하면서, 5만 명을 처형했고, 70만 명을 감옥에 집어넣었으며, 30만 명을 매질했다. 그들이 이런 생각들을 궁리하고 우리가 동일한 조건에 있다면 했을 이런 대우에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반항적인 민족을 지배한 모든 군국주의 정부에서 그런 것처럼, 한국에서 살해·불구 만들기·강간·불의·억압의 소름끼치는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결과는 소름끼치지만, 주된 원인은 매우 단순하다. 민족 전체의 생명과 자유, 행복 추구의 생득권이 침해당하고 있다.일본은 압제에서 잔인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부에 투표권과 목소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이 정부 업무를 장악했을 때 12배나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만 했다. 철도, 철광, 탄광, 삼림, 여타 경제적인 자원들은 강탈했고 도(Province) 혹은 구(District)로서 한국에 보상과 공제를 주지 않은 채 운영되고 있다.왕실 소유지와 공유지는 압류되어 일본인 정착자들을 위해 개발되었고, 사유지는 교활한 방식으로 소유주에게서 빼앗아 일반인 소유의 동양척식주식회사(Oriental Development Company)의 재산이 되었다. 한때 쌀과 곡물이 자라났던 수천 에이커의 밭에 양귀비가 재배되어 일본의 정부 독점 아편을 풍부하게 했다.법정은 일본인 서기와 집행관과 함께 일본인 판사가 관장하고 있고, 20여 만 명의 한국인들이 재판 없이 즉결 심판에 의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 고소당하면 유죄로 추정되었다.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는 충분하지만, 한국인들을 위한 학교는 극히 드물다. 법의 어떤 규칙은 한국인들에게, 다른 규칙은 일본인들에게 적용되고, 생명과 자유를 구성하는 데 소용되는 모든 것들은 일본에 의해 통제되었다. 모든 것은 한국에 거부되었다.독자들의 마음에 한국인들이 하고 있는 것에 관한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왕실(Royal House)의 일원들이 한 것을 상술했다.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들은 저항했고 항의했으며, 결국 명성황후와 황제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사람들은 이전 황제의 생애 동안 그에 대한 신뢰와 그가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을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속박당했다. 1919년 1월 24일 그가 죽자, 모든 속박이 벗어 던져졌고, 비밀리에 조직된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협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인 남녀의 적어도 95퍼센트를 성원으로 포섭했다. 계획들이 수개월 동안 논의되었고 모든 세목에서 완벽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게 조국의 독립 회복을 요구하기로 결심했고, 미국을 모방한 공화주의 정부 형태에 동의했다. 독립 선언서와 헌법이 작성되었고, 모든 국민의 일반 투표로 정부 형태에 관해 동의했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그것을 일본에 전달할 33명이 선출되었다. 그들 모두는 그 운동이 성공적인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음이나 종신형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명예의 장소에 관한 논쟁이 있었고, 결국 상이한 당파와 계급 사이에서 인원에 따라 사람들을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조정되었다.독립 회복을 요구할 때 채택할 방법에 관해서 열띤 논의들이 있었다. 2천만 한국인들이 30만 일본인들을 덮칠 수 있고, 백병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신속하고 결정적인 행동으로 그들 정부의 소유물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 무력 옹호자들이 있었다.이런 무력옹호자들에 맞서 기독교의 교의를 글자 그대로 따르자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무력에 의지하지 않지만, 그들의 요구조건을 만들고 소극적인 시위를 벌일 것이다. 분명 그들의 대의는 옳았고, 세상이 주목할 것이다. 최소한 도덕적으로 스스로를 억압에서 보호하겠다고 맹세한 나라들은 앞으로 나갈 것이고, 그들의 저항과 일본을 움직이는 영향력을 통해 한국을 위해 독립 회복을 보장할 것이다.그들은 국제적인 정의가 죽었다거나, 만약 그 사실들이 본국을 압박할 때 강대국들이 그 서약들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 주장의 실제적인 측면은 무력에 의지하는 것이 강대국들의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란 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그들은 결국 세계의 민족들의 지지를 상실할 것이다.마침내 그들이 어떤 경우에도 법을 그들 마음대로 다루지 않고 그들 사정을 균형 잡힌 정연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당당한 신사로서 세계 정의의 법정에 설 것이란 결정이 내려졌다.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정을 세계에 제시하는 방법에 관한 그들의 최종 결정이 실제적인 관점과 이상적인 관점 둘 모두에서 볼 때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생활에서 우리는 법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사람을 아무리 성을 낸다 해도 거의 존경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상주의뿐만 아니라 그들의 판단과 결정에 찬사를 보내야만 한다.
약속한 시간에 신속하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 서울의 유명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들은 송별 연회를 열었다. 선언서에 서명을 했고, 그런 다음 일본 관리들에게 그들이 한 바를 알리고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들은 체포되었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다. 사실, 늦게 도착한 두 사람은 뒤에 출두하여 동료 동포들과 같이 있겠다고 주장했다.이 일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고, 그 후 탈출한 1명과, 이후 감옥 생활의 노출과 고난으로 죽은 2명을 제외하고 33명의 애국자들은 아직 감옥에 있다. 의장 혹은 지도자 손병희는 그가 시작의 불씨를 당긴 독립운동 2주년인 1921년 3월 1일에 죽었다. 이 독립운동은 시기가 적절했고 미리 준비된 것이었다. 선언서는 1시에 서명되었고, 2시에 신속하게 322명이 한국 전역의 322개 지역에서 일어나서, 운집한 한국 시민들 앞에서 독립 선언서를 공식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국 소년단원들이 선언서의 사본을 모든 세대와 지역의 모든 일본 관리에게 배달하기 시작했다.독자나 소년단원이 총에 맞아 쓰려졌을 때,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 또 다른 사람이 항상 있었다.세계는 일본이 이 운동의 진압을 시도하면서 채택한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의 강화된 경계와 활동이 있었는데도, 대한민국의 헌법이 채택되고 한국 의회의 대표자들이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22일에 소집된 이들 대표는 만장일치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내각 각료들이 지명되고 승인되었다. 머지않아 구미위원부가 선출되었고, 이 보고서의 작성자인 당신의 변변찮은 종복이 법률 고문이 되었다.이런 시기 내내 한국은 가장 엄격한 검열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언론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고, 공개적인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신문은 발행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만나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곤경과, 놀랄만한 철저함과 세목에 대한 관심으로써 그것에 대한 적절한 치유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본보기인 독립선언서와 조국의 정부를 위한 헌법을 공식화했고, 최종적인 법적 절차에 이르는 그것들의 공포와 채택을 준비했다. 헌법은 손으로 나무 블록들에 새겨졌고, 수백만의 사본들이 동굴과 때때로 한적한 묘지의 무덤들에 있던 인쇄기로 인쇄되었으며, 독립선언서 사본·투표 용지·다른 필요한 문건과 같이 널리 배포되었다.우리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 대학들을 졸업한 교육받은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있었고, 극동의 사람들이 학생 계층을 언제나 존경하고 우러러 보았으며, 한국인들이 이런 사람들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뽑았다는 점을 고려해보라.그들은 무지한 지도자들을 가진 무질서한 폭도가 아니다. 그들은 정당한 불만을 가진 생각이 깊고 신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고 세상이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제안한다.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는 프린스턴 대학교와 조지타운 대학교 둘 모두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구미위원부의 의장인 김규식 씨는 버지니아의 로노크 대학을 졸업했다. 서기인 정 헨리 씨는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위원부의 부의장인 현순 씨는 극동에서 한문, 일본어와 영어 학교를 졸업했다. 우리 의정원 의원들 가운데 대학교 졸업자들이 있는 만큼 그들 수에 비해,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대학교들을 졸업한 한국 의원들이 많다고들 한다. 한국인들이 자치할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그런 장애물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이 독립운동에서 보여준 활동과 조직력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진실인가? 미국이 어떤 경우에도 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 있다. 그들은 한국과 다음의 사항을 규정하는 조약을 맺었다."다른 강대국이 부당하게 혹은 압제적으로 어느 한 정부를 다룬다면, 상대 국가는 그 사건에 대한 정보에 근거를 두고, 평화적인 합의에 이르도록 중재를 발휘하여 그들의 우호적인 감정을 보여줄 것이다."한국은 그 조약에서 규정한 의무를 수행했고 미국에게 지금은 우리 시민들에게 인정되지 않는 많은 상업적인 이익을 주었다. 그들의 소위 서구적인 개선의 전부는 그 조약으로 그들이 우리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동안 미국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 친선과 협력의 가장 호의적인 감정들이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지만, 한국인들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있다. 우리는 미국이 이런 한국 억압에 반대하여 일본에 항의하는 과정에 그것의 "중재"를 행사해야만 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그들이 한국에서 저지른 잘못들을 교정할 수 있도록 그것이 가진 설득과 논증의 모든 힘을 선의로 사용해야만 한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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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신문 |
작성일: 0922-05-261922년 5월 26일, 금요일기독교인의 양심과 한국영국의 일부 계층의 여론이 기독교 사상을 혐오하는 군사적 전제 정치와 결합한 몇몇 열강과 협력하려고 열망한다는 사실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번 주 ‘옵서버(Observer)지는 이런 식으로 한 칼럼에서는 볼셰비키(Bolsheviks) 일원들에 대해 그리고 다른 한 칼럼에서는 일본인에 대해 과장하여 이야기했다. 이 두 열강은 분명히 대영 제국의 지지자인 것이다. 글의 작성자에게는 분명히 일본과 소련 공산주의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없으며, 한 열강과의 동맹은 다른 한 나라의 적의를 남길 것처럼 보였다. 우리 신문과 사회에서 이러한 기독교와 반대인 편견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몇몇은 이것을 유대인의 영향으로 돌릴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야만적인 힘과 칼라일(Carlyle)의 복음과 그의 학교에서 만들어진 군국주의에 대한 숭배에 대부분의 이유를 돌릴 것이다. 어떤 것이 이유가 되건 간에 우리 사회의 다수가 항상 신앙의 적에게 동감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아직도 영국과 미국에는 기독교적 양심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양심에 대해 호소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솔직하게 몇 마디하고 싶다. 우리는 때때로 미카도(Mikado) 정부로부터 한국인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받는 잔인한 대우에 대한 얘기로 독자들의 주의를 끌어왔다. 이러한 폭정에 대항한 모든 사례는 유명한 한국 민족주의자인 헨리 정(Henry Chung)박사가 글로써 고발한 끔찍한 실상으로 지금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이 고발은 너무 끔찍해서, 만약 이러한 고발을 완전히 반박할 수 없다면 일본인 지배 계층을 동양의 야만인들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두 가지 유의할 것이 있다. 민족주의자들의 망명은 때때로 씁쓸하고 가끔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저자에 대해 비판을 하고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우리는 그의 나라의 압제자들에 대한 비난에 대해 무척 많이 참작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가 일부 사람들에 대해 배척하고 비난하는 것은 편협한 개혁론자라면 정직하게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믿을 준비가 돼 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한국의 수동적인 저항이라는 바로 그 “약함”이 바로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극심한 분노의 이유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불행한 한국인들에게 행해지는 끔찍하게 잔혹스러운 행위의 일부가 전제정치의 확립된 정책보다는 일부 개개인의 순간적인 흥분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그리고 우리는 한국인 기독교인들에 대한 악명 높은 박해가 일본이 한국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결심의 일부라는 정 박사의 증거를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다. 일본인들이 정부와 연계하여 조합 교회를 운영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사실은 적어도 지금의 그들이 목적은 한국에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따라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계획적으로 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또한 유의해야 할 것은 어떤 유럽 국가도 지배받는 사람들과 관련한 실상에 대해 비난할 때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있어 한국과의 합병은 그 자체가 전략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영국인들이 아일랜드(Ireland) 병합 조약을 정당화한 것과 유사한 논법으로 변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일본인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콜리(Macaulay)의 말을 빌리면 “야만적인 독재정치의 포악한 모습 중 가장 포악한 것”과 “문명의 모든 힘”과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더구나 지적으로 우월한 민족에 대한 열등한 민족의 폭정이다. 종교적, 지식적, 도덕적으로 “은둔의 왕국”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다. 종교적으로 한국은 항상 극동의 어느 나라보다도 신성한 인간의 천성이라는 기독교 이론과 가까웠다. 사실 한국에서의 기독교 성공은 하나님의 도움 아래 그들의 기본 생각이 논리적으로 진화한 이론이라는 사실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한국은 또한 군인이 학자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가장 평화로운 국가다. 도덕적으로 한국의 삶은 완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여성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매춘에 대한 일본의 태도에 대해 혐오했다. 반면 일본은 항상 군국주의와 물질주의를 숭상해왔다. 일본은 한국인들과 우리에게 우스워 보이는 미카도(Mikado)를 숭상하는데, 미카도란 국가를 개인 양심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 더 큰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면 어떤 범죄나 배반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모든 우상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군국주의도 일종의 우상숭배와 같은데-일본인들은 그들의 숭배 대상을 섬기는 데 있어 자기 희생적으로 충성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군사적으로 힘있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유럽의 몇몇 제도를 도입하고 그들의 우두머리를 유럽의 귀족이라는 타이틀로 변장시키는 기민한 영리함을 가지고 있다. 더 큰 기민함은 유럽의 정치 이론을 받아들여 그들 자신의 이익에 맞게 어떻게 문명화된 민족들의 원칙에 부합시켜 호소하는 가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문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여전히 야만적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많은 일본 지식인들이 매춘은 즐기고 있으며, 이 나라의 도처에는 남근 숭배 사상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나 모든 우상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동시에 매우 어리석은 민족이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물질주의를 인간 지혜에 있어 결정적인 작품으로 믿고 있고 한국인과 같이 총명한 민족은 분노하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다.만일 일본과 한국의 과거 관계가 우호적이었고, 그리고 만일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국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성격의 두 민족은 분명히 마찰을 일으켰을 것이다. 사실상 과거 두 나라 사이의 역사는 끔찍한 적대감으로 점철되어 있는 동시에 독립국이자 주권국인 한국을 일본 제국으로 병합한 것은 파렴치한 조약 파기, 대규모의 부패와 폭력, (일본 법정이 인정한) 비겁한 한국의 애국적인 국모 살해의 결과였다.이 정부에 대해 일본 정치인들이 자행한 방법은 훔친 것과 다름없었다. 현지(한국)의 자유는 억압되어 왔다. 읍, 리의 자치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본인 군국주의자들과 경찰이 독재자다. 몇몇 지역에서는 겉으로는 한국인인 사람들이 업무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일본인 조언자의 지도 아래 있으며 복종하지 않는 경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른바 법정이라 불리는 곳은 일본인들에 의해 출두영장 서류 없이도 잡혀갈 수 있으며 모든 재판 진행은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로만 진행된다. 판사는 증거를 인정할 것인지 기각할 것인지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고 있고, 수감자는 그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할 때까지 죄인으로 취급받는다. 더 심각한 것은 감옥에서의 고문으로, 잔인한 태형(일본법에 의해 일본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방법이다), 젊은 기독교도 여성의 옷을 벗기고 차는 것 등이 있다. 칭(Ching)박사의 책에서 이런 끔찍한 것들을 읽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고, 우리 독자에게 이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기독교 국가에게 적합한 친구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의 책 중 3, 4, 5 장을 읽으라고 충고하고 싶다. 일본은 또한, 우리가 추정하기에, 문명화를 가속시키기 위해 한국에 일본의 끔찍한 매춘 제도를 억지로 시행시켰다. “당신들은 우리의 사립 학교를 가져가고 창녀촌을 줬다”고 한국인 여성은 그녀의 압제자에게 말한다. 교육과 언론의 측면에서도 일본은 덜 잔인하지 않았다. 공립 학교에서 수업은 주로 일본인 선생에 의해 일본어로만 이루어졌다. 한국인들이 민족적이고 훌륭한 교육을 시행하고 있던 사립학교는 주로 탄압을 받았고 심지어 기독교 학교들도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본토박이 한국인들은 외국 심지어 일본에서 좋은 교육을 받는 데에도 장애가 있었다. 많은 한국의 고전 문학 작품들이 파괴되고 모든 언론은 자유가 없었다.마찬가지로, 국가의 경제 수탈도 시도되었다. 대규모의 토지 몰수가 단행되었으며 세금은 한국 정권이 있을 때보다 다섯 배나 늘어났다.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와 보스니아에서 한 것처럼 일본은 빌딩을 세우고 위생시설을 개선시켰지만 한국인들은 그들 자신이 낸 비용으로 혜택을 본 것이다. 우리가 말했듯이 우리는 일본 정부가 즉각적인 기독교 박멸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기술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개종자들이 잔인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상식과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예가 있다. “기독교인 메신저라는 곳에서 봄에 대한 소네트를 출간했다. 이 주제는 검열관에게 제지를 받았는데 새 해의 재 탄생이라는 것이 나라의 재 탄생을 의미하며 따라서 한국의 반역을 의미한다는 근거에서였다.” 얼마 전에는 종교 관련 팜플렛을 만들었는데 한 문장은 한국인 기독교도들이 그들 안에서 악마를 쫓아내자는 내용이었다. 그 팜플렛은 굉장한 분노와 함께 억압되었다. “악마”라는 것에 대해 공무원이 작가에게 말하기를, “악마! 당신이 악마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 당신은 한국인들에게 모반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책이나 신문에서 다시는 한국어로 악마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는 명령이 발효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본 경찰들이 기독교 선교사들을 잔혹하게 공격한 것이다. 남자 선교사뿐만 아니라 여성에게까지 모욕을 한 예가 책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예를 보면 충분하다. 존 토마스(John Thomas) 목사라고 하는 한국에 사는 영국인 선교사는 일본인 군인 및 시민들로부터 이유 없이 공격을 받았고 스물 아홉 군데나 상처를 입었다. 그는 체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었지만 건강이 매우 안 좋아져서 더 이상 한국에서의 업무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운 좋게도 영국 의회에서 이 일을 화제로 삼아 일본 정부는 보상 차원으로 2,50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본토박이 개종자에 대한 잔인한 대우였다. 정치적인 시위가 있을 때 첫 번째 용의자로 항상 그들을 지목했다. 그들의 이웃에게 그들을 모욕하도록 선동하고, 기독교인 여성은 만약 체포되면 우리가 앞서 말한 추잡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종교적으로 박해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했고 만일 일본인들이 그들 정부 조직을 지체 없이 바꾸도록 설득 당하거나 강제로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더 잔인한 박해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1919년에 있었던 한국 독립 선언에 대해 당연히 분개했다. 그들은 악당이나 극단적인 과격론자라고 불평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원하고 있었던 것일까?그러나 기독교적 양심에 있어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까? 여기에 기독교 교리에 동양의 그 어떤 나라보다 기꺼이 마음을 연 나라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폭압자가 유럽의 외교적인 회의에서 그들을 문명화된 강대국으로 이해시키는 사이 그 나라는 믿음의 대가로 순교했다. 여기에는 전쟁에 대한 의문이 없다. 현재의 일본은 유럽과 미국의 의견에 대해 조심스러운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견이 충분히 표현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폭정이 끝날 것이라 믿는다. 만일 일본이 한국의 무질서 상태에 대해 불평한다면 그들은 에드먼드 벌크(Edmund Burk)의 날카로운 말을 되새겨야 한다. 무정부 상태에 대한 치료책은 노예상태가 아니라 자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