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콘텐츠

선택

선택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신채호] [단재신채호전집9권] 에 대한 전체 61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단재론 (1)

      又日을 期하여 新大韓 主筆 申采浩(신채호) 先生을 訪問하다. 先生은 庚戌政變(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後로 海外에 亡命하여 至今까지 支那(중국)新聞社에 있었다. 先生은 우리 國民의 希望을 全혀 樂觀的으로 說破하여 曰 「今番 國際聯盟은 大勢變動의 草幕인즉 完全·不完全을 念慮할 것 없고 다만 大勢의 回運을 希望할 뿐이라」하고 우리 國民의 將來를 祝賀하더라.(『革新公報(혁신공보)』 50호, 1919. 12. 25)

    2 단재론 (2)

      陰曆 九月 十三日 여덟點 半입니다. 世事 相關없다 一身이나 깨끗하자는 陶淵明(도연명)은 술이 醉하여 菊花 앞에 쓰러졌고, 四時에 가을이 그중 슬프다고 不平을 자아내는 宋玉(송옥)은 붓대를 벗삼아 詞賦로 일을 삼고, 한번은 높았다 한번은 야젓다(낮았다)하는 다듬이 소리는 西北關山의 征夫들 생각하고 몇 집 少婦의 연한 창자가 끊어졌으며, 或은 東便으로 或은 西便으로 옛나무를 떠나 定處없이 나는 落葉은 萬里異域의 父兄을 생각하고 몇 사람 子弟의 맵고 쓴 눈물을 자아냈으며, 光化門 앞에 쭈그리고 있던 石駝는 어디로 갔나, 아마 荊棘의 가을 가시에 全身이 아프겠고, 昌慶苑 속에 잠겨 있는 金佛은 그대로 있나, 아마 明月을 쳐다보고 潛然히 슬퍼할 지로다. 이날을 當하여 興이 있고 樂이 있고 웃음이 많고 춤이 있는 者는 누구의 팔자인가. 料理집 장구소리와 아울러 나오는 『좋다』소리는 金錢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이며 市街上의 自動車와 같이 번쩍거리는 金銀의 光彩는 또한 金錢이 있는 사람의 儀表이다. 다 같은 朝鮮사람으로 그는 그러하다마는 寂寞한 客窓에 寒蟲의 찍찍 소리는 靑春의 꿈을 깨트리고 殘燈의 반짝반짝하는 빛은 孤獨의 근심을 불사르는 그곳이야 귀먹은 하늘이 나를 위로할까 눈먼 鬼神이 나를 불쌍히 여길까.  나는 先生의 글을 읽을 때에 悽然한 눈물 悠然한 歎息이 한 時間 동안이었습니다. 曼聲으로 한번 읽어 볼까. 그 소리는 鍾儀의 呻吟소리이냐 故國의 생각은 滄海가 깊고 또 깊고 靑天이 늙고 또 늙었도다. 細聲으로 한번 읽어 볼까. 그 소리는 新亭의 이야기 소리이냐. 世事가 果然할 수 없으니 志士의 머리털은 白雪이 半이로다. 高聲으로 한번 읽어 볼까. 그 소리는 乙支文德(을지문덕)의 叱咤聲이냐 北風에 활깍지가 쩡쩡 울고 壯雪에 말 발꿈치가 퍽퍽 빠지는데 白頭山 너머로 劍光이 비췄도다. 그 글을 다 읽고 黙黙히 앉아 있을 때에 先生을 찾아 멀리 鴨江을 跋涉하고 遼野를 馳驅하여 孫大聖(손대성, 손오공)의 觔斗雲으로 北京(북경)까지 갔었습니다.  先生 先生님은 나보다 二十餘 年의 長者가 아니십니까, 二十餘 年 前에 보고들은 것을 이야기로 傳하여 주십시오. 潯陽江頭에 商人婦의 이야기는 요즘 사람의 心思를 哀怨케 할 뿐이라. 血로 血을 洗하고 心으로 心에 印하여 千古의 남아 있는 그것을 나는 듣고자 하며 보고자 합니다. 아! 先生 先生님이 故國을 떠나던 그 날을 나는 생각합니다. 고사리도 殷나리 草木은 아니니 먹고 살 수 없는 이 땅에 夷·齊(백이·숙제)는 너무 消極的이라 大事를 可히 議論치 못 할지라 申包胥(신포서)는 감발 짚신으로 西秦에 들어가고 文文山(문문산)은 黃冠短笻으로 江南으로 逃亡가니 일은 사람이요 運數는 하늘이라 先生의 行裝도 또한 輕雲에 付託하여 遼天에 떴으며 北風에 依支하여 中原에 飄泊하였을 것입니다.

    3 단재론 (3)

      그 언제였던가. 벌써 十五六年 前이니 내가 十二三歲 때인가 한다. 先生은 그 때 ○○新聞社 主筆로서 三淸洞에 사셨고, 나는 孟峴(現在 嘉會洞)에 살았었다. 나의 舍伯(晩)과 親하신 관계로 罷社 後면 거의 每日, 적어도 隔日로는 집에 놀러 오셨다. 그 때 나이 어린 나로서야 어찌 先生의 文章이나 人格이야 알 수 있었으랴. 다만 纖弱하신 體質, 血色좋지 못한 얼굴, 特히 貧弱하신 윗수염만이 半三十年 지난 오늘에 아득히 생각날 뿐이다.  以後로 先生은 中國에 건너가셨다. 中國에 건너가신 뒤로는 先生의 風采에 接할 기회는 물론이고 言信조차 査然하였다. 이따금씩 風便으로 安否를 듣는 것과 碧初(벽초 홍명희)·爲堂(위당 정인보) 두 분이나 舍伯하고 앉으면 졸음 오는 눈이 뜨도록 先生의 人物·性行을 評할 뿐이다. 들으니 先生은 그간 하루 동안 몸을 편히 쉬지 못하시고 東西定住 없이 다니셨다는 것과 國詩·東史考 等 著作에 餘念이 없었단 말이며, 어느 겨를에 硏究하셨는지 英語를 精通하여 칼라일(Thomas Carlyle)의 『英雄崇拜論』, 기번(Edward Gibbon)의 『羅馬(로마)衰亡史』 等 書籍을 책장에 담뱃진은 많이 묻히실망정 原語로 읽으신다는 것을, 桃色 女子內衣 사서 입고 沐浴湯이란 理解 없는 社會에 들어가셨다가 부끄러울 것 없는 망신을 하셨다는 逸話까지 아울러 들었다.  先生의 人物·性格 中 特記할 점을 잠깐 말할 것 같으면 그의 絶對 非妥協의 志操를 십년이 하루같이 끝끝내 지키고 뉘우치지 않는 態度이시다. 絶對 非妥協! 그야말로 先生의 갸륵하신 長點인 同時에 아름다운 缺點도 될까 한다. 누구의 말에 「天才는 永遠한 苦痛이다」한 것과 같이 非妥協的 志操의 持續이야말로 그지없는 苦痛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苦痛을 已暮之年에 十餘年을 더하도록 당하고 體驗하시는 先生의 胸中이야말로 想像에 남는다.  그리고 先生에겐 남이 하는 대로는 하지 않는 뜯어 고칠 수 없는 - 거의 病으로까지 보아도 상관없을 癖이 계시다. 그러한 癖은 現今 英國文壇의 巨擘 G. K 체스터톤 君의 남이 예스라 하면 노라 하고 노라 하면 굳이 예스라 하는 풍치와 비슷하지 않은가 한다.  先生이 詩는 지으나 詩人은 아니시고, 論文은 쓰시나 專門的 論文家도 아니시며, 모든 典考說文 等에도 通하시긴 하다 하나 그렇다고 그 길에 專念하시는 이도 아니다. 先生은 어디까지든지 史家이시다. 朝鮮의 랑케(Leopold Von Ranke)라면 先生께 無禮나 아닐는지 如何間 天才的 氣分에 있어서 방불한 가장 경모할 우리의 歷史家이시다. 先生의 歷史觀은 組織的이거나 科學的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眼光이 紙背를 뚫는다 하여도 過言이 아닐 만한 先生의 炬火같은 史眼이야말로 足히 어두워 가히 알 수 없는 우리 歷史의 解剖光이 되실 것이다. 先生에 限하여서만은 組織的이 아니니 만큼 超組織的의 高貴함이 있으며, 非科學的이니만큼 超科學的의 燦然한 光鋩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小器奸才輩의 二足獸가 跋扈하는 이 세상에 人格學識이 아울러 高邁卓絶하신 先生이 계심 적이 미덥다.(『開闢(개벽)』 1925. 8)

    4 단재론 (4)

      吏讀文을 解釋하기는 明治 中葉에 白鳥(백조) 博士가 『朝鮮』이란 雜誌에 먼저하고, 其後를 承하여 金澤(김택) 博士가 『國語硏究』란 著書에 略說하고 金澤(김택) 氏는 다시 大正 七年(1918년) 四月號 『朝鮮彙報』에 詳解하고, 昨年에 小倉(소창) 氏는 此의 解釋으로 博士의 學位를 得한지라. 金澤(김택)氏 後 小倉(소창) 氏 前에 申采浩(신채호) 氏의 解說이 『東亞日報(동아일보)』에 紹介된지라. 近日에 李能和(이능화) 先生은 社會史를 起算할새 比에는 其 解釋이 精하게 된듯하니 李(이능화) 先生은 六十 老齡으로 卷卷作述하는 바 實로 朝鮮史學界의 功人이라 할지라. 그런데 小倉(소창)·李能和(이능화) 先生 兩氏의 解釋은 아직 公表가 되지 않은 까닭에 言치 못할 지로되 申(신채호)氏의 說은 已頒한바 吾人의 利益을 助함이 있다 할지라.  그런데 申(신채호)氏의 日本學者를 評한 文句를 보면 氏(신채호)는 白鳥(백조)·金澤(김택) 氏 等의 解說도 先見하였을지라. 故로 申(신채호) 氏의 說은 右 兩氏의 說보다 얼마큼 異彩가 있을지나 實相 愚見으로 察하면 此點에 있어는 反히 曲逕에 走한 듯하다.  本文의 題目은 「吏讀文名詞解釋」이라 하였으나 其 內容은 古文을 一一이 檢討 說明한 것이 아니라 解釋의 方法論이라. 그러나 方法論이로되 그는 一種 處理 規則을 言한것이라. 그 方法論의 立題는  本文의 自證  同類의 旁證  前名의 搠證  後名의 沿證  同名異字의 互證  異身同名의 分證  六項으로써 辨證한지라. 그 思考法은 右의 六細目으로 分한바 비록 詳密한 듯하나 其實은 觀察法에 不免하다 하노니 大槪 考證法은 多種이었으나 古語를 査함에는 抽象과 類推의 二作用의 思考로 辯證하면서 足하고 其 材料를 聚合함에는 카드에 依하면 能할지라.  故로 氏의 解釋方法은 自己經驗에 依한바 已集한 材料를 分類하여 互相比照의 便을 言함이요, 客觀的 材料를 豐富하여 思考作用의 範圍를 言喩함이 아니라, 便言하면 氏의 方法은 自己의 全觀的의 解釋法을 言한 것이요, 考證의 根地를 言함이 아니다.  是以로 吾人은 無限한 思考作用의 範圍를 束할 것이 아니라, 村料의 聚集方面을 廣하여 辯證의 基資를 富케 함이 可하니, 更言하면 吾人의 解釋方法을 主觀的보다 客觀的의 能率을 高케하여 거기서 抽象과 類推를 行하면 庶可하다. 氏는 思考의 形式을 言함에 先한고로 主觀的 說明이 多하지마는, 今에 吾人은 아무쪼록 主觀을 避하고 客觀의 材料에 依함을 圖할지니 此의 方法은  1 語源  2 方言  3 漢子古音  4 佛經字音  5 支那(중국)書籍外에 日本古書도  6 史的 考察

    5 단재론 (5)

      그 이튿날 아침 일찍이 大連에 到着하여 나는 旅宿을 定하자마자 귀빠른 警察은 벌써 나의 所를 發見하였다. 大連警察署 高等係員 한 분이 來訪하였기로, 나는 그것을 機會로 함께 同伴하여 警察署를 訪問하였으니, 그 訪問의 目的은 이곳 監獄에서 受難中인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氏 兄을 面會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마침 만나고자 하던 牧田(목전) 警務主任이 없으므로 그날은 如意치 못하였고 그 이튿날(二十四日) 同氏를 다시 訪問하게 되었다. 申采浩(신채호) 兄은 벌써 刑務所로 넘어가서 그 面會 許否는 警察의 權限 以外에 屬하였을 뿐 아니라 未決中의 在監者에게는 모든 面會를 絶對로 不許함으로 成功 與否에는 壯談하기 어려우나 如何間 自己 名銜 한 장을 가지고 嶺田屯監獄으로 가서 보라고 한다. 畢竟 拒絶當 할 줄을 알면서도 나는 自働車로 市外 嶺田屯으로 向하였다. 約 二十分이나 疾走하여 어느 山 모퉁이로 들어간 즉, 山谷이라고 할 만한 속에 붉은 벽돌로 지은 巨大하고 보기 싫은 監獄이 앞에 닥치었다. 닫혔던 鐵匣門이 열리며 바로 門 안에는 看守 三四人이 서서 있다. 訪問의 理由를 말한 後 나는 典獄室로 引導되었다. 本來부터 未決囚에게는 面會를 잘 許諾하지 않지만 일부러 京城에서 왔으니 特別히 許하겠다고 하여 나는 기쁜 마음을 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 名義로 하면 飮食·衣服·書籍 等의 差入을 다 받겠다고 하여 그의 親切함을 衷心으로 感謝하였다. 面會 許諾의 節次가 끝나기까지 나는 約 一時間이나 大三(대삼) 典獄과 여러 가지에 對하여 談話하다가 後庭에 있는 面會室로 向하게 되었으니, 나를 그리로 引導하던 看守는 日本人이나 朝鮮사람처럼 朝鮮말을 流暢하는 사람으로 丹齋(단재 신채호)를 위하여는 깊은 同情을 가지고 있어 그에게 對하여는 刑務所의 規則을 可及的 寬厚하게 通用하고자 한다 함이 決코 내게 對하는 皮相的 待接뿐만 아닌 것을 나는 確信한다. 面會室 門을 열고 들어선즉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 兄은 내 앞에 서 있다. 우리 사이에는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同伴한 看守 하나와 또 川瀨(천뢰) 看守가 서 있었다. 우리는 看守의 꾸지람을 무릅쓰고 저절로 同時에 나오는 손을 서로 잡았으나 뭐라고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얼마동안 후에 問 “우선 健康은 어떻소.” 答 “健康은 아무렇지도 않소. 다만 눈이 그저 낫지 못하여…” 問 “飮食은…” 答 “飮食도 그만하면…”할 때 大森(대삼) 典獄이 들어와서 “日前에 十個日間에 시킨 差人은 어찌 되었어?”하고 물은즉 “그건 그저 있지요. 도무지 飮食은 걱정없어요. 다만 書類나 좀 있으면 하는데…” 다시 “무슨 書類요?”하고 물어서 나는 手帖에 H. G. 웰스의 『世界文化史』(日譯)와 日文說明의 에스페란토文典 一冊을 적었다. “또 무엇이냐?”고 물은즉 “그 밖에는 『尹白湖集』을 六堂(육당 최남선)에게 말하였는데 어찌 되었는지?”하였다. 衣服에 對하여는 朝鮮 深多衣 한 벌과 朝鮮 버선 몇 켤레를 願하는 것이다. 그리고 差人에 對하여 말하기 前에 第一 付託하는 것은 그 子姪에 對한 걱정이다. 이에 對하여는 조금도 걱정 말고 또 오는 公判에도 辯護士까지 올는지 모르니 安心하라 한즉 “安心! 암 安心하고 말고” 極히 冷靜한 態度로 대답하였다. 對話할 時間이 모자란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面會 前에는 時間이 짧을까 보아서 할 말을 順序대로 準備한 것이 對面한즉 順序도 바뀌고 도무지 말도 안 나왔다… 벌써 뒷문으로 나갈 때 나는 暫時 遲滯하라고 손짓을 하고 “돈(金錢)은 必要할 것 없어”하고 看守에게 끌리어 나갔다. 돌아서면서 나는 川瀨(천뢰) 看守에게 無數히 付託하였으나 “刑務所의 規則이 許하는 範圍”란 말 까닭에 마음이 종시 놓이지 않았다.(『朝鮮日報(조선일보)』 1928. 11. 8)

    6 단재론 (6)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가운데 홀로 어린 아이 형제를 거느리고 저주된 운명에서 하염없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애처로운 젊은 부인이었다. 시내 인사동(仁寺洞) 육십구번지 앞 거리를 지나노라면 산파 박자혜(産婆 朴慈惠)라고 쓴 낡은 간판이 주인의 가긍함을 말하는 듯이 붙어 있어 추운날 저녁볕에 음산한 기분을 자아내니 이 집이 조선 사람으로서는 거의 다 아는 풍운아(風雲兒) 신채호(申采浩) 가정이다.  간판은 비록 산파의 직업이 있는 것을 말하나 기실은 아무 쓸 데가 없는 물건으로 요사이에는 그도 운수가 갔는지 산파가 원체 많은 관계인지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는 일이 없어 돈을 벌어보기는커녕 간판 붙여 놓은 것이 도리어 남부끄러울 지경이므로 자연 그의 아궁이에는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 될까 말까 하여 말과 같은 삼순구식의 참상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라도 빨리 가장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박자혜 여사는 밤이나 낮이나 대련형무소(大連刑務所)가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볼 뿐이라 한다.  세상이 무심하기도 하여 그리운 남편과 생이별을 하다시피 하고 홀로 남아 있을지언정 사랑의 결정인 두 아들을 데리고 굶다 먹다 하는 신세라도 적이 위안을 받고 있으나 삼순구식도 그에게는 계속할 힘이 없어져 그의 할 바를 몰라 옥중에 있는 가장에게 하소연한 바가 있었든지 “내 걱정은 마시고 부디 수범(申秀凡) 형제 데리고 잘 지내시며 정 할 수 없거든 고아원(孤兒院)으로 보내시오”이라는 편지를 떼어 본 박(박자혜) 여사는 한층 더 수운(愁雲)에 잠기어 복받치는 설움을 억제할 길이 없이 지내는 중이라 한다. 굶어도 사나이 자식은 글을 배워야 한다 하여 없는 것, 있는 것을 다 털어 교과서를 겨우 사서 큰 아들 수범(신수범) 군을 교동(校洞) 보통학교 이학년에 통학을 시키는 중이나 어머니가 굶으니 수범(신수범) 군도 굶고 다니는 날이 태반인데다가 옷 한 벌 변변히 얻어 입지 못하고 남과 같이 학용품 한 가지 잘 사서 쓰지 못하여, 추루한 기상은 이웃사람도 차마 보지 못하는 모양이나 수범(신수범) 군은 그 어머니에게 효성이 갸륵하여 말썽 부리는 일 한번 없고, 어머니가 혹 나가서 늦게 돌아오면 언제까지든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린다는데, 그의 나이는 금년 여덟 살이라 하며 그 밑으로 두범(申斗凡) 군이 있으니 그는 당년 두 살로 아버지의 얼굴을 아직 한 번도 못 보았다 한다.   “대련이야 오죽이나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하며 박(박자혜) 여사가 다시 생각나는 눈물을 흘리며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잊고 훌쩍거리는 그 광경에는 어언간 동정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편지 한 끝에는 조선 옷에 솜을 많이 넣어 두툼하게 하여 보내달라는 부탁이 있으나 우선 어린 아이를 거느리고 살아갈 길도 망연하니 옷 한 벌 부칠 재료가 있을 리 없다. 서리치는 아침 눈보라 날리는 저녁에 그의 심경이 어이하리. 지금 있는 집도 어느 아는 사람이 불쌍히 여겨서 좁다란 방 한 칸에 육 원 오십 전씩을 주어 왔으나, 이제는 그것도 여의치 못하여 석 달 동안이나 지불치 못하고 있음에 날마다 성화같은 집주인의 독촉에는 굶는 것보다 견디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그의 갈 곳이 어디일는지? “굶어도 같이 굶고 떨어도 같이 떨 운명에 빠진 어린 것들이 더욱 가련하여 못 견디겠습니다” 하는 박(박자혜) 여사와 두 아이의 장래는 어떻게 될는지? 풍운아의 처자라 남모르는 애화(哀話)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원체 풍운아로 돌아다니는 사람의 가정이라 그 처자가 쓰라림을 당하는 것은 지금뿐이 아니다. 박자혜 여사는 그와 인연을 맺고 동거한 지는 지금으로부터 구년 전인 기미년 봄이었다. 어찌어찌 서로 혼담이 성립되어 결혼하자 바로 북경(北京)에서 여관생활을 시작한 것이 처음 사랑의 보금자리이었으나, 세상 사람같이 펴놓고 마음 놓고 살아보지는 못하였고 가장이 피해 다니는 데로 그 뒤를 따라 삼년 동안이란 긴 세월을 풍찬노숙으로 경과하여 왔으니, 체험이 없는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비참하고 곤궁한 생활을 하루같이 하여 왔을 적에 정황이 없이 날뛰고 다닌 것도 한두 번이 아니요, 피눈물로 객지의 춘추를 맞이한 것이 지금 와서도 역력히 기억에 남아 있다 한다.  만리타향에서 온갖 고초를 다 받아가며 전전유리하던 그 부처의 생활이나마 오랫동안 계속하는 운명을 가지지 못하였다. 북경 이역의 생활을 떠나 신채호는 홀로 남아 있고 박자혜 여사만 둘 사이에 생긴 장남 수범(申秀凡)군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아무리 세상에 뜻이 있어 떠돌아다니는 그인들 생활의 도리를 분별하지도 못하고 젖내 나는 어린아이와 젊은 부인을 전별할 때에 그의 애가 끊어졌을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아니하다.  박자혜 여사가 어린 아이를 안고 본국으로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본래부터 빈한한 친정엔들 의탁할 여지가 없어, 이리저리 아는 사람의 신세를 지고 다니다가 친척의 관계로 알음이 있는 모씨(某氏)의 집에서 몇 해 동안을 기류하게 되었으니, 자기 혼자 몸도 아닌 그는 주인이 아무리 관대한 대우를 한다 하여도 전부가 자기의 뜻과 같았을 리도 없으려니와 그도 오랫동안 계속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작년 동짓달 그믐날에 배워두었던 산파술이나 다소 생활의 보장이 될까 하여 지금 있는 인사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라 한다.  겨우 피가 마른 수범(신수범) 군을 북경에서 떨쳐 보낸 신채호는 몽매에 그린 것이 그의 아내와 아들이어서 한번 오기를 바랄 수는 없으나, 수범(신수범) 군의 사진을 보여 달라는 편지가 왔다. 고초에 고초를 거듭하던 박(박자혜) 여사는 그 소식을 듣기가 바삐 장남 수범(신수범) 군을 데리고 다시 북경의 길을 떠나 오랜 만에 만난 가장과 기쁜 눈물에 젖은 생활을 얼마 동안 계속하기는 하였으나, 다른 곳에 뜻을 두었던 신채호가 그 처자에게 구속을 받고자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애인 박자혜와 두 번째 생이별을 하게 된 바였다. 다행히 다시 사랑의 씨가 맺어져 두범(申斗凡)군이 생겨나서 방금 펄덕거리며 노니는 것도 보는 사람의 눈물을 금하지 못한다.(『東亞日報(동아일보)』 1928. 12. 12·13)

    7 단재론 (7)

      天涯에 飄迫하는 외로운 몸으로 오히려 史學硏究를 繼續하여 이같이 붓을 史論에 물들임은 丹齋(단재 신채호)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史論이 일찍 朝鮮 內에 있는 新聞紙를 通하여 실리게 될 때 斯界 學者들 사이에 多大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아직도 記憶에 새로운 바이거니와 그를 아끼는 친구들이 지금 그 史論의 몇 篇을 다시 收拾하여 單行本으로 出刊한 것이 곧 이 『朝鮮史硏究草』이다. 丹齋(단재 신채호)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史學界의 先輩로서 光武·隆熙 年間에 椽大의 筆을 가지고 朝鮮史原論을 비롯하여 『乙支文德傳』과 『崔都統傳』을 써내어 一世를 놀라게 하였지만 歷史家로서의 革命的 氣魄을 가진 그는 新羅以來 小朝鮮의 歷史에 對하여 아주 不滿을 품어 깊이 묻혀있는 우렁찬 大朝鮮의 精神을 파서 내려고 무척 애를 썼음으로 丹齋(단재 신채호)라면 오늘날까지도 朝鮮魂을 부르짖던 愛國者로 생각하는 것이 普通이다.  丹齋(단재 신채호)가 『朝鮮史』를 通하여 朝鮮魂을 부르짖던 것은 事實이다마는 丹齋(단재 신채호)가 丹齋(단재 신채호)된 所以는 그의 熱情보다도 獨特한 史眼에 있는 것이다. 그는 항상 보는 바가 빠르고도 날카로워 거의 他人의 追及을 許하지 않는다. 忌憚없이 말하면 그의 理論이 반드시 모두 肯緊에 맞는지는 모르나, 또는 그의 硏究가 반드시 모두 科學的이라고는 할는지 모르나, 그의 見識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透徹한 바 있으니, 試하여 이 『朝鮮史硏究草』를 뒤져보면 나의 말이 거짓 아닌 줄을 알 것이다. 그 중에 收拾한 六篇의 史論은 朝鮮史를 硏究하는 이로서는 누구나 한번 參考하지 않을 수 없다. 吏讀文 名詞 解釋같은 것은 朝鮮古史를 開拓하는데 있어서의 한 秘論이 될 것이며, 『三國志』·『東夷列傳』 校正같은 것은 歷史 著述하는 이의 가장 必要한 史料 選擇에 關하여 批判的 態度를 보여준 것이다(『朝鮮日報(조선일보)』 1929. 10. 15·16)

    8 단재론 (8)

      조선사단(史壇)의 지보(至寶)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의 『조선사강의』가 본보에 연재 된다고 한번 발표되자 세상의 비상한 주목을 끌게 되었다.  반만년의 구원한 역사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기원과 발랄이 있고 찬란한 문화가 있으나 기구한 정치적 변천은 뜻있는 학자의 엄정한 연구의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음이 많았다. 그러나 근래 설문학도들의 조선역사를 알고자 하는 열심한 요구와 학구열(學究熱)로 이제 조선사는 한 사담(史譚)으로서가 아니라 체계 있는 과학적 연구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중에서 많지 않은 조선의 사학가(史學家) 중 신채호는 조선사의 정통적 연구를 쌓은 사람으로 그의 지개와 같이 한층 더 빛나는 학자이니 일반 청년학생들의 기대가 클 것도 당연하거니와 그보다도 일반학계에 더 큰 충동을 주게 된 것도 당연한 바일 것이다.  일찍이 어떤 학부의 문을 두드렸다는 일도 없으나 충청도(忠淸道)서 자라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한번 새 사조에 접하게 됨에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학구에 충성하였던 그는 널리 새 지식을 구하여 마지않았다. 그러고 어지럽던 한말(韓末)에는 『대한매일신문(大韓每日新聞)』의 주필로 있으면서 내외의 다단한 문제를 종횡으로 논하여 청년논객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면서 여기마다 조선사연구에 부단히 힘쓰던 그가 부득이 조선을 떠난 이래 이십여 년간 중국에서 물질과 정신으로 온갖 고통을 받으며 각 방면으로 재료를 수집하여 수년 전 오늘의 『조선사강의』를 완질한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악질의 안병(眼病)이 있어 독서와 집필에도 크게 불편을 받으며 촌각을 아끼어 쓴 것이니 실로 그 한편이야말로 그의 오십 일생을 통하여 최후의 심혈을 짜내인 수확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삼년 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사건으로 여순(旅順)감옥에 들어가 방금도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조선사강의』는 입옥 전에 탈고 하였던 것을 그 후 그의 친우인 박용태(朴龍泰) 씨가 간직하여 두었던 것인데 금번 특히 옥중에 있는 그의 뜻을 받아 본보에 위촉하여 게재케 되었다. 기필코 만천하 독자의 기대를 만족시키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朝鮮日報(조선일보)』 1931. 6. 10)

    9 단재론 (9)

      申丹齋[采浩, 原名寀浩(단재 신채호)]와 나와는 弱冠時부터의 舊要인만큼 兩人 相好의 程度가 比喩를 不許하니만큼 ― 나는 丹齋(단재 신채호) 熟知者로는 第二人은 아니다. 그러한데 目下 丹齋(단재 신채호)의 史論이 『朝鮮日報(조선일보)』에 依하여 繼續 刊布하게 됨은 참 慶幸으로 생각된다 함은 한간 情好의 私에서 나온 그것이 아니고 實로 斯學의 公的 前途를 爲하여 果然 그러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丹齋(단재 신채호)의 史學的 論評을 論評하기 보다는 爲先 그 爲人의 何如함을 最大限度의 緊縮的 描寫로 一般公衆에게 紹介하려 한다.  凡常(或은 그 以下)한 顔面에다가 두 눈만이 爽朗하여 天國과 地獄을 一時에 洞觀하는 듯하고 溫直한 表情인 채로 그 明嚴한 語音은 昏夜의 大空을 劃度하는 淸鐘의 소리인 同時에 鶑聲처럼 轉折的 樂曲까지를 兼하였으며 性格인즉 澄潭一碧, 些毫의 티끌이 없는 一面에 是非正邪의 際에 臨하여는 - 무엇이라 할고 - 霹靂 或은 爆彈일 것이다. 가장 形容하기 어려운 點은 그 天才의 內容인 바 莊生(장자) 及 釋家의 筆法을 合備하여 表示하자면「如雷光如石火一念之間再撫天下」의 流일 것이다. [莊·釋(장자·석가모니) 兩學이 또한 丹齋(단재 신채호)의 得意處] 蔽一言하고 萃嚴部類中에서도 高遠難解로 有名한 圓覺經 全部를 數刻 內에 風雨같이 閱讀하여 그 秘義의 巨細를 證了하였고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英雄崇拜論』을 燭下 一瞥한 后, 곧 滔滔히 批評하되 그 縱斷橫扶의 解剖的 嚴酷性이 十數年 專攻者의 見地를 踰越하는 곳이 있었음은 나의 腦膜에 永久銘刻된 實見의 兩個 奇蹟이다. 그 所作 漢詩文의 程度를 말하면 決코 金滄江(창강 김택영)·李修堂(수당 이남규)·李寧齋(영재 이건창)·黃梅泉(매천 황현) 流의 雄麗 嚴密 惑은 □刻의 蹊徑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君一流의 滉漾·浩蕩·幻怪의 境地가 따로 開拓되어 있고, 同時에 그 所吟 「國詩」인즉 屈子(굴원) 九歌의 亞流이며, 至抉邦 漢文으로 交作한 時論·時評·史麗 等에 至하여는 벌써 謝世한 三大巨星인 嵩陽山人[張志淵(장지연)]·石儂山人[柳瑾(유근)]·太白狂奴[朴殷植(박은식)]로는 그 肩背일 바 到底히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니 眼光이 紙背에 澈透하기 때문이다. 知識이 弘贍하기 때문이다. 考證이 嚴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交章이 雄暢하여 所欲을 죄다 表現하여 놓고야 말기 때문이다. 나는 日月을 가리처 公言한다. 君은 「니체」的 魂膽에다 「칼라일」的 勇猛을 兼하고 林白湖(백호 임제)的 橫濶에다가 「실러(Friedrich Schiller)」的 義憤을 合하고 黃宗羲(황종희)的 文章에다고 王夫之(왕부지)的 史眼을 倂有한 朝鮮學識界 最後의 巨人이라고 公言한다. 이처럼 光輝있는 君의 存在로서도 그 過去 歷史에는 兩個의 缺點은 있었다. 曰 成均館居齋生으로 博士가 되었고 曰 初期의 愛讀物로 『飮氷室文集』이 그 中心이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지나간 古談일 뿐이고 只今의 君인즉 一切의 桎梏과 一切의 因襲과 一切의 妥協을 沒數히 脫却하여 버렸고, 다만 三生深重한 因緣上 「朝鮮」만이 그 最後의 夢痕인바 身體로는 自由를 잃어 目下 囹圄中의 一人이다. 그리고 雪上加霜으로 「밀톤」의 後半生처럼 「失明」의 悲運이 君을 訪問하였다고 傳한다. 그러나 悲弔할 것은 없다. 自古로 預言者가 容納되는 法이 없고 幸運의 天才가 없었다. 君에겐들 薔薇의 高香으로만 噴飾된 平坦의 美途가 있을쏘냐. 當初부터 나는 그러한 期待는 아니 하였노라. 다만 筆을 攔함에 臨하여 故人의 逸話的 一絶句만을 附記한다. - 내가 付託한 某文字를 他體로 讀作하여 가지고 나와 不在中 來傳하다가 舍弟의 提醒을 받은 뒤에도 其文을 仍置하고 가면서 謝過의 意味로 卽刻立書한 것이다. - 其詩에 曰 我誤聞時君誤言 欲將正誤誤誰眞 人生落地元來誤 善誤終當作聖人(『朝鮮日報(조선일보)』 1931. 6. 12)

    10 단재론 (10)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氏! 그가 一九一○年 朝鮮이 歷史的으로 큰 變換을 하던 해, 飄然히 故國을 떠난 지 이미 二十有一年에 한번도 朝鮮에 돌아오지 않았고, 또 그이에 對한 消息이 널리 社會的으로 傳하여지지 않았으나, 그러나 그이의 名聲만은 隱然히, 또 依然히 朝鮮 讀者層에 알려지고 그 性이 忠士로써 剛直·潔癖한 것과 朝鮮歷史의 大家로써 깊은 造詣가 누구보다도 卓越한 것은 비록 그가 最近까지 朝鮮 內에 向하여 한 번도 그 蘊蓄을 發表한 적은 없었고, 또는 紹介한 일은 없다 할지라도 그가 曾前 『皇城新聞(황성신문)』과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時代에 主筆로써 峻烈한 筆鋒과 雄大流麗한 文章으로써 一世를 驚震케 하던 그 聲價와 함께 아직도 敬慕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四年 前 丹齋(단재 신채호)가 東方無政府主義聯盟事件에 關係되어 臺灣 臺北에서 逮捕되었다는 消息이 한번 傳케 되자 오랫동안 끊어졌던 그의 消息이 意外의 事實로써 나타나게 됨에 一世의 驚愕과 興味가 크고 많았으며, 다시 最近 數個月부터 우리 新聞紙上에 그가 三十有餘年 깊은 硏究와 細密하고 넓은 調査와 꾸준하고 絶倫한 努力을 傾注한 『朝鮮歷史』와 『朝鮮上古文化史』가 비로소 大衆的으로 繼續 發表 紹介됨에 深奧한 內容, 풍부한 例證, 正確한 事實, 그 端雅·尖銳·雄渾한 筆致가 果然 朝鮮歷史大家로써 推仰을 받던 所以를 바로 나타나며 數十萬 讀者에게 絶對의 歡迎과 支持를 받고 있는 한편, 丹齋(단재 신채호)는 昨年 四月 二十八日부터 旅順刑務所에서 十年 苦役을 갖추고자 그날그날 鐵窓에서 呻吟하고 있는 채로 消息이 杳然하였었다. 記者는 過般 意外 事變을 만나 異域寒天에서 慘憺한 迫害를 當하고 있는 滿洲遭難同胞의 避難狀況을 紹介하고 아울러 그들에게 一言의 慰問이라도 하라는 社命을 받들어 滿洲에 갔었던 것을 機會삼아 十一月 十六日 至極히 怱忙한 旅程에를 올라서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 氏를 旅順獄中으로 訪問 面會하여 겨우 十五分間 서로 面對하고 돌아왔었다. 온 후 곧 丹齋(단재 신채호)의 獄中消息을 傳하고자 하였으나 個人의 事情으로 只今까지 遷延하여 晩時의 感이 있으나 이제 褐色의 獄中赤衣를 입었을망정 端正한 風采를 가진 그때 그를 追想하면서 이 拙文으로 그의 最近 消息을 傳하고저 하는 바이다.  十一月 十六日 벌써 한 달 전 이야기다. 例年같으면 이때에 벌써 넓은 滿洲 벌판에 寒氣가 衝天하고 朔風이 살을 베일 듯한 零下 二十餘 度의 極寒이 襲來하였을 것이나, 今年에는 意外로 溫暖한 天候가 繼續되어 前後 十五日間 南北 數千里 滿洲 벌판을 돌아다니는 사이에 한 번도 추위다운 추위를 當해보지 못하여서 滿洲는 추운 곳이라는 先入觀 때문에 나로 하여금 오히려 滿洲情趣를 흐뭇하게 맛보지 못하였다는 多幸하고도 섭섭한 生覺을 갖게 하였다. 이날도 今番 避難同胞를 찾는 最終으로 十五日 營口에 있어 三百餘 同胞의 慘狀을 살피고 夜行으로 大連을 向하는 車中에 「스팀」이 없어도 오히려 連日 疲困한 記者로 하여금 酣夢을 貪게 할 만큼 氣候가 춥지를 않았다. 아침 일곱시 日本이 滿·蒙(만주·몽골)發展의 精髓를 이곳에서 모으고 近代的 가장 進步된 計劃으로 자랑껏 만들어 놀았다는 大連驛 頭에 처음으로 발을 멈추어 그 停車場 建物이 想像보다 몇 十倍 貧弱하고 초라한데 먼저 喫驚하였고 藍部通 「아스팔트」 위로 값싼 馬車를 달릴 때에 暫間 엿본 外觀이 처음으로 또 其餘코 가보고자 하던 都市로써 깊은 印象은 姑捨하고 별다른 情趣와 特色이 없어 平凡하였다. 처음 奉天驛 前의 雄豪한 맛과 長春驛 前 大陸的인데도 다소 哀愁的인 北滿情과 景吉林市中의 陰鬱하고도 鈍重한 中國味와 哈爾賓(하얼빈) 「기타이스카야街」의 華麗하되 蠱惑的인 露西亞(러시아)味와 鄭家屯의 荒漠하여 殺伐的인 蒙古(몽골)味가 있어 다 各各 첫 印象이 깊었으나, 大連만은 그다지 큰 印象을 주지 아니한다. 그러나 記者가 大連까지 온 것은 決코 求景만을 爲하여 온 것이 아니고 只今까지 한번도 相對한 적은 없으나 마음으로써 늘 敬慕하던 丹齋(단재 신채호)를 獄中으로 訪問 會見코자 한 것이었으므로, 먼저 急하게 大連刑務所에 물어서 丹齋(단재 신채호)가 旅順에 있다는 것을 다진 後, 아침 九時 滿鮮 「버스」 旅順行에 몸을 싣고 旅大道路를 달리었다.  이 道路는 露國(러시아)帝政時代에 遼東半島를 倂呑하고, 그것을 地盤으로하여 東洋進出을 꾀하고자 國力을 傾注하여 여러 가지 施設한 事業 中에 한 가지 큰 자랑을 삼는 道路이니, 大連서 旅順까지 三十里 星浦의 黃海 잔잔한 물결을 끼고 돌며 海岸의 높고 낮은 山들 사이로 따라서 起伏하여 三十里에 延長된 이 道路는 全部 「콘크리트」로 돌(石) 하나 풀(草) 하나 없이 다져논 것이 제법 宏壯하고 참으로 豪華로워서 내가 只今까지 다녀본 道路 中에는 第一 좋은 것 같다. 約 한 時間 疾走한 끝에 三高地의 要塞標幟가 멀리 바라보이니 戰跡地로서 所謂 難攻不落의 要塞地인 旅順에 다다른 모양이다. 「버스」에서 내려서 미처 市街地를 살필 사이도 없이 人力車夫를 잡고 서투른 中國語로 監獄으로 찾아 가자고 겨우 일러가지고 異常스럽게 울렁거리는 가슴을 鎭定시키고저 애쓰며 刑務所로 向하였다.  只今까지 다녀 본 어느 監獄이던지 붉은 벽돌로 높이 담을 쌓고 무지한 鐵門이 굳게 닫혀서 보기만 하여도 미리 鬱壓한 氣分이 나거니와 들어가려면 鐵門 한 조각으로 머리만 내미는 看守에게 門鑑을 얻어가지고 事務室로 가는 것이 大槪 一定된 監獄의 構造같았다. 그러나 旅順監獄만은 事務室 建物이 붉은 담 밖에 서있어서 굳은 鐵門을 開閉하는 看守의 身勢를 지지 아니하고도 곧 用務를 볼 수 있게 된 것이 監獄이라면 異常스럽게 싫증나는 생각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多少 輕快한 맛을 갖게 한다. 더욱 이날은 좀 쌀쌀한 바람이 부나 맑게 개인 冬節 하늘이 海岸都市의 獨特한 淸朗味와 함께 記者로 하여금 輕快하여 조금도 陰鬱한 氣分을 갖게 아니한다.  먼저 應接室 兼用으로 된 接受係에 들어가 人事를 마치고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 氏를 面會왔다는 뜻을 傳하였다. 監獄의 看守란 大槪 오랫동안 罪囚에게 많이 接觸되어 그런지 不親切하거나 猾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陰險하여 따뜻한 人情味라고는 찾아 볼 나위도 없이 對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퍽 嫌忌한 感情을 갖게 하는데, 이곳 接受係는 比較的 親切이 굴어서 或時나 面會되지 못할는지도 모르겠다는 不安을 가지면서도 左右間 보기나 하자고 온 記者로 하여금 多少 安心을 준다. 面會手續을 마치고 그 房에서 그대로 앉아서 기다리는 사이에 看守와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동안 看守가 申采浩(신채호)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記者 아는 대로 簡單히 紹介한즉 看守가 다시 말을 繼續하여 이곳에 收監된 후 가끔 弟子라 하고 늘 面會 오는 사람들이 있어 自己도 申采浩(신채호)란 이가 큰 學者인줄 알았다 한다. 늘 그를 찾아서 오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기다린지 約 四十分間 戒護係 있는 看守모양이다. 面會 온 理由와 親戚關係를 다시 물은 후 이말 저말 區區한 다짐을 받은 뒤 비로소 面會室로 들어갔다. 普通 방안에 「테이블」을 中間에 놓고 서로 앉아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것만 하여도 좀 進步된 셈인가? 約 一分이나 지났을 때이다. 看守에게 引導를 받아 丹齋(단재 신채호)가 드디어 온다. 오 - 얼마나 不幸한 일이냐? 記者가 어려서부터 집안 長老에게 늘 丹齋(단재 신채호)의 逸話를 들었고 그 天才的 才質과 剛直한 性格에 늘 敬慕하던 나머지 더욱 멀리 와서 처음으로 對하는 先輩를 이런 곳에서 이와 같이 만나게 됨은 참으로 彼此에 不幸한 일이다. 그러나 다시 生覺하면 이것이 朝鮮人으로써 避치 못할 事情이고, 또 반드시 받아야 할 受難이라 하면 오히려 이런 곳에서 平時 敬慕하던 先輩를 만남이 彼此에 本懷일는지도 모르며 더욱 敬虞함을 돋우게 한다. 記者의 經驗으로 보면 法廷에서나 獄中에서 만나는 사람의 첫 印象으로는 到底이 그 人物을 如實이 理解 認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丹齋(단재 신채호)를 만날 때에,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그 날카롭고 맑은 눈瞳子이다. 只今까지 獄中生活에 오랫동안 眼疾을 앓아 閉人이 되다시피 되었다는 所聞을 듣고 第一 念慮하였으며, 또 그 性格으로 보아 健康이 퍽 損했으리라고 믿고 갔던 記者에게 意外에 퍽 健康하여 보이는 것이 눈에 띄인다. 서로 暫時동안 바라만 보고 嚴肅한 沈黙이 繼續된 다음 말문이 터지기 始作하였다.   “얼마나 苦生되십니까.”  記者로써부터 물었다.   “關係치 않습니다.”記者: 健康은 어떠하십니까.  그대로 지낼만 합니다.記者: 밖에서 所聞은 眼疾이 생겨서 퍽 困難하시다더니 요새는 어떠하십니까.   “一時 困難했으나 只今은 그것으로는 그다지 困難치 않습니다. 좀 不便한 것은 하루에 여러 번 일어나서 小便 보는 것이 異狀할 뿐입니다.”  生覺보다는 比較的 健康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말하는 것이 簡單明瞭하고 率直하다. 이와 같이 形式的 修辭로 한 問答에만 그치지 말고 좀 더 털어놓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러나 미리부터 看守에게 注意받은 일이 있고 또 앞뒤로 돌아앉아서 監視하고 있으니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記者: “獄中에서 多少 冊子를 보실 수 있습니까.”   “될 수 있는 대로 冊을 봅니다. 勞役에 從事하여서 時間은 없지만은 한 十分式 쉬는 동안에 될 수 있는 대로 貴重한 時間을 그대로 보내기 아까워서 조금씩이라도 冊보는데 힘씁니다.”그가 弱冠을 조금 넘어서부터 博學으로 이름 듣는 것이 決코 그의 天才에만 있지 아니하고 어려서부터 只今까지 조그만 時間이라도 아끼어서 孜孜이 勞力한 까닭이라 하겠다.記者: “先生이 오랫동안 努力하여 著作한 『朝鮮歷史』가 『朝鮮日報』 紙上에 每日 繼續 發表됨을 아십니까.”   “네. 알기는 알았습니다마는 그 發表를 中止시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只今까지 비록 큰 勞力을 하여서 지은 것이라 하나 그것이 斷定的 硏究가 되어서 到底히 自信이 없고 完璧한 것이라고는 믿지 아니합니다. 돌아가시면 그 發表를 곧 中止시켜 주십시오. 萬一 내가 十年의 苦役을 無事히 마치고 나가게 된다면 다시 訂正하여 發表하고자 합니다.”  얼마나 學者로서 謙讓하고 그리고 또 率直한 말이냐. 그의 半生의 結晶으로 我紙에 한번 그 歷史가 連載되지. 그 深奧한 硏究·整然한 體系·透徹한 觀察·豊富한 例證은 現代史家로써 누구나 追從을 不許하는 바이며 絶對의 熱狂的 歡迎을 받고 있음에도 不拘하고 丹齋(단재 신채호)는 決코 그것으로써 조금이라도 自慢하거나 滿足함 없이 不滿足을 느끼고 다시 完璧을 期코자 生覺하고 있으니 얼마나 貴重한 態度이며 學者로써 얼마나 敬虞한 態度이냐?記者: “그와 같이 謙遜하여 말씀하지만은 그것이 한번 發表되자 朝鮮에서는 큰 歡迎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지을 때에는 決코 그와 같이 速히 發表하려고한 것이 아니고 좀 더 깊이 硏究하여 내가 自信이 생기기 前에는 發表하고자 아니한 것이 中途에 이러한 處地에 當하여 硏究가 中斷되었으나, 多幸이 健康한 몸으로 다시 世上에 나아가게 된다면 다시 繼續 硏究하여 發表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퍽 妄念된 生覺이나 朝鮮四色黨爭史와 六伽倻史만은 朝鮮에서 내가 아니면 能히 正鵠한 著作을 못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中에서는 그런 것은 쓸데없는 소리고 萬一 내가 健康하게 世上에 다시 나아가게 된다하면 이것만은 自信있게 發表할 수 있다고 늘 生覺하고 있습니다.”  記者: “大關節 健康이 앞으로 能히 八年을 繼續하겠습니까.”記者로써 얼마나 각박한 물음이냐? 只今 生覺하면 왜 그런 無遠慮하고 大膽한 말을 하였는지 後悔가 난다. 그러나 그때 그 자리에서는 스스로 그와 같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八年의 苦役은 能히 견디어 가겠다고 自信합니다. 가시면 나를 爲하여 걱정하는 親知에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아무쪼록 그를 爲하여 完全한 健康이 持續되기를 心祝한다.  丹齋(단재 신채호)와 記者의 問答은 옆에 있는 看守의 時間 再促으로 말이 順序있게 못 간다. 그는 이어서 記者의 집안일을 묻고 우리 日報에 對한 最近 消息을 묻고 그리고 碧初 洪命熹(벽초 홍명희)의 消息을 묻는다. 碧初(벽초 홍명희)는 學生事件에 關聯되어 只今 西大門刑務所에서 苦役 中이라는 것을 말한즉, 그는 點頭할 뿐 한참 있다가 같이 苦生하는 親友를 다시 生覺한 듯,  그래서 내가 그동안 여러 번 片紙를 하였어도 아무 消息이 없었군…  다시 한번 看守가 時間 再促을 한다.記者: “무어 付託하실 말씀은 아니 계십니까.”  “朝鮮에 돌아가시면 『國朝寶鑑』과 『朝鮮輯要』를 差入해 주십시오. 그리고 「에쓰페탄트」 原文冊과 字典을 보내주십시오. 끝으로 서울 있는 내 子息-今年 十一歲로 校洞普校에 다닌다.-의 工夫 시킬 것이 퍽 걱정되나 이 속에서 그런 것을 生覺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인 故로 아주 斷念했습니다.”  丹齋(단재 신채호)는 決코 家庭의 人은 아니다. 그가 十五歲에 娶妻를 하였으나 弱冠에 이르기 前부터 五十二歲되는 오늘까지 放浪生活을 繼續하여 家庭生活과는 아주 因緣이 적은 사람이었다. 十三年 前 北平에서 朴慈惠(박자혜) 氏를 娶하여 그 몸에서 申秀凡[신수범(二)]·申斗凡[신두범(四)] 두 아들을 얻었는바 五年 前 朴慈惠(박자혜) 氏는 朝鮮으로 돌아와 只今 仁寺洞 一二五番地에서 구차한 살림으로 그 男便의 出獄을 기다리는 한편 어린 아들들의 교육을 爲하여 갖은 苦痛과 싸워가며 지내간다. 丹齋(단재 신채호)는 어린 아들 秀凡(신수범)을 極히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只今은 數千里 아득하게 떨어져 귀여운 아들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消息도 가끔 듣지 못하니 얼마나 애타는 일이겠느냐? 더욱 커가는 아들의 敎育問題를 爲하여 苦心함도 決코 無理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獄中에서 生覺하여도 所用이 없으니 차라리 斷念하겠다는 말을 들을 때 記者는 가슴이 막히는 듯 무엇이라 그 말에 應하여야 좋을는지 몰랐다.記者: “될 수 있는 대로 너무 이것저것 生覺마시고 健康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決코 헛된 生覺은 아니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健康도 이만하면 能히 持續되리라고 自信합니다. 돌아가시면 내 消息을 묻는 이에게 傳해 주십시오.”  너무 時間이 지났으니 이야기를 고만두라고 立會看守가 命令한다.記者: “安寧히 계십시오.”  “고맙습니다. 잘 가시요.”  丹齋(단재 신채호)는 다시 看守에게 引導되어 나가버린다. 얼마나 섭섭한 일이냐? 한번 만나보겠다고 하던 그를 비록 이런 곳에서 만났을망정 좀 더 坦懷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不過 만난 지 十五分에 다시 헤어지고만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었다. 看守에게 그가 獨房에 있는 것과 比較的 健康이 지낸다는 것을 듣고 적지 않은 安心을 가지고 獄門을 나섰다. 쌀쌀한 듯 밝게 개인 겨울 햇볕이 如前이 따뜻하게도 비친다. 다시 丹齋(단재 신채호)의 健康을 心祝하였다. 끝으로 이것을 機會하여 記者의 아는 範圍에서 丹齋(단재 신채호)의 履歷을 紹介하고저 한다.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의 故鄕은 記者의 鄕弟와 隣接한 忠淸北道 淸州郡 加德面 花山里이었으나 그가 出生하기는 一八七九年 忠南 大田郡 山內面 桃林里이다. 그의 家系는 所謂 封建的 時代의 兩班으로 선비의 生活을 하며 오던 집안이니 일찍부터 才名을 듣던 집이었다. 그 祖父 申星雨(신성우) 氏는 年少하여 講經及第로 文科正言에 進仕하였으나 中間에 宦路를 끊고 隱居하였으며 그 父 申光植(신광식) 氏는 三十八歲에 夭折하였고, 그 兄 申在浩(신재호)도 亦是 二十歲에 夭折하였으나, 모두 出衆한 才氣로써 當時 京鄕에 그 이름이 높았었다. 丹齋(단재 신채호)는 幼時에 父親을 死別하고 嚴格한 祖父와 慈愛한 生母의 膝下에서 生長하다가 七八歲頃에 家事의 形便으로 淸州郡 琅城面 古道尾에 와서 자라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才質이 참으로 표일하였으니 六歲에 入學하여 七九歲에 能히 通鑑全秩를 마치고 十二·三歲에 經書를 能히 讀破하며 무엇이던지 一覽捷記하여 神童의 이름을 들었다. 當時에 벌써 『三國志』·『水滸傳』 等을 愛讀하였다 한다. 丹齋(단재 신채호)는 그때 學者로써 이름 냈던 그 祖父에게 修學하였으니, 그 祖父의 性格이 剛直嚴格하여 글 배우는 때에 무엇이던지 한번 가르쳐 곧 알지 못하고 또 暗誦하지 못하면 甚한 매를 때렸다 한다. 只今 生覺하면 그 敎育法이 너무 封建的이었으나, 그때에는 이것으로써 能히 人才를 養成하였으니, 丹齋(단재 신채호)가 天才的 才質에 또 그 祖父의 嚴格한 敎育을 받아 十五六歲에는 이미 大人으로써 成熟된 感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 性格이 外面으로 보면 못나고 흐린 듯하여 도무지 衣食에 無關하며 自己感情을 表現하지 않아 同伴사이나 그 附近에서 몹시 흐리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다. 丹齋(단재 신채호)가 十五歲때 그 祖父가 그를 데리고 이야기하다가 世上 사람이 모두 너를 보고 흐리고 못났다 하니 무슨 까닭이냐 물었다 한다. 그 말에 丹齋(단재 신채호)는 “나보고 못생겼다고 말하는 世上 사람들도 별수 없습디다.” 對答하였다는 것은 只今도 有名한 逸話이거니와 世上 사람이 비록 自己를 못났다 하여도 조금도 아무렇게 生覺하지 아니하고 內明外愚하여 世上을 睥睨하여 왔다. 그가 十七歲時에 自己 祖父와 같이 記者의 집을 찾아왔을 때 記者 祖父와 함께 詩作한 것이 다음 詩이니 얼마나 그때 벌의 漢學의 修養이 깊었고 才質이 뛰어난 것을 알 것이다.  故國文物總依前 儒雅風流不用仙  峰樹擁蒼爲特地 硯氷呵白又凉天  鄕愁越鳥方成夢 詩意吳竊正入眠  吟罷讀叢兼話攔 閒人趣味信悠然  [丹齋(단재 신채호) 作]  早年才譽耀人前 爾是淸都識字仙  秋水精神稱雅士 落霞名句歡其天  雲深古洞多幽趣 冬瞹疎簷足醉眠  久廢吟詩思更□ 山南夕氣見悠然  (記者 祖父 作)  丹齋(단재 신채호)는 二十歲頃에 그 祖父와 같이 上京하여 判書 申箕善(신기선) 氏의 恩寵을 받아서 成均館에서 工夫하는 동안 그 才名은 當代 長安에 높이 떨치었고 그 博學함은 누구든지 敬服하였다 한다. 丹齋(단재 신채호)가 冊을 보는 것은 그대로 冊張을 세는 것 같아 훌훌 넘기면서도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記憶하였다 한다. 鐘路書鋪店頭에 서서 數日동안 店中에 싸인 冊을 全部 讀破하였고, 親知의 집에 가서는 그 집이 冊이 얼마가 있던지 있는 대로 讀破하지 아니하면 움직이지 아니한 것은 當時 有名한 逸話이다. 그러나 丹齋(단재 신채호)는 그때부터 다만 漢學에만 沒頭하지 아니하고 넓이 西洋文物를 硏究하여 二十二歲에 記者의 鄕里 隣村인 仁次里에 設立된 文東學院에 와서 時代의 變遷과 漢文 無用論을 主張하다가 排斥을 當한 것 같은 것은 그가 벌써부터 가장 進步된 思想을 가진 것을 窺知할 수 있을 것이다. 그 後 늘 京城에 있어 二十七八歲 때부터 『皇城新聞(황성신문)』·『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等 主筆로 峻烈한 文筆로 一世를 警醒하였고, 天下를 論하여 一代에 文名이 날리었으며, 大韓協會(대한협회)에 參與하여 그 機關紙인 會報에 投稿하여 當代에 獅子吼함은 只今껏 널리 記憶되는 일이다. 一九一○年 時局의 不利를 느끼고 漂然이 朝鮮을 떠나 南北滿洲로 北中國을 周遊하여 朝鮮歷史를 調査硏究하다가 四年前에 붙들려 囹圄의 몸이 된 것이다. 丹齋(단재 신채호)가 朝鮮歷史硏究에 留意한 것은 二十四五歲 때부터인 듯하며 그가 以來 數十年 傳心傾力하여 努力함으로써 今日 朝鮮歷史大家의 名望을 듣는 것은 普通學者로서의 探究慾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고, 그가 當時 기울어지는 天下大勢에 對하여 깊은 感興을 느끼고 뜨거운 愛着을 가지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隆熙 二年 五月에 그가 發表한 「歷史와 愛國心의 關係」같은 論文은 朝鮮人으로써 歷史論을 發表한 嚆矢요, 또 가장 貴重한 論文이거니와 그가 凡庸한 學者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證明한다. 끝으로 다만 獄中에서 그의 健康을 빈다.(『朝鮮日報(조선일보)』 1931. 12. 19·20·22·23·25·27·30)

    1 / 7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