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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기타] 에 대한 전체 443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장순규가 지운영에게 보낸 편지

    헤어진 뒤에 편지 두 통을 차례로 받고 절하고 읽음에 애타게 그리던 마음에 조금 위로가 되었습니다. 꽃피는 계절인 이 때 객지에 계시는 효성스런 체도(體度)는 늘 잘 지내고 계심을 알았으니, 멀리서 생각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본 댁의 안부는 자주 듣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보내주신 편지에 친구도 잘 있고 기계도 결함이 없으며 또 설옹인(說夢人:꿈을 말하는 사람)과 매일 만난다는 말씀이 있으니 미친 듯 소리침을 금할 수 없으며 나라를 위하여 기뻐합니다. 어찌하여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매우 답답합니다. 근래 들으니, 이중당(李中堂:이홍장)이 그간에 과연 일본 조정에 세 차례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두 번은 일정이 돌려줄 수 없다는 뜻으로 답을 하였다가 마지막에는 ‘일정이 비록 돌려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만일 韓人이 찌른 것을 도외시해 버린다면 결국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중당이 袁氏(원세개?)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정부가 역사(力士)를 보내는 것이 매우 좋다고 미루었는데, 원씨가 말하기를, ‘안에는 선생이 있으나 일개 백면서생에 부가하니 어찌 해낼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고 하니 어찌 분하고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2 지운영 서한

    지나온 일의 대개를 소생의 동지들에게 밝히는 것은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본래 형편없는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숙회(宿懷)와 기우(杞憂)를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에 어려움이 많음을 느끼고 흉역(凶逆)들이 다 없어지지 않은 것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을유년(1855) 11월 초3일 밤에 민병석(閔丙奭) 참판을1) 은밀히 만나 신하된 절개를 떨치고 국치(國恥)를 복수할 속마음을 이야기 하였더니, 민씨도 분개하면서 다음날 들어가 이일을 아뢰겠다고 하였습니다. 초5일 밤에 왕명을 받아 입시(入侍)하여 하문을 받고 상중하(上中下) 세 가지 계책을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가장 좋은 계책은 소신(小臣)이 직접 칼을 가지고 온전히 귀국하도록 명하는 것이고, 그 다음 계책은 역사(力士)를 매수하여 행하는 것이며, 마지막 계책은 만약 위의 상중(上中) 두 계책에 어려움이 있으면 직접 칼을 가지고 있다가 적(賊)을 죽이는 것인 바, 소신은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안팎의 두 기관(機關:여기서는 틀, 함정을 가리킴)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밖의 한 기관은 옥적(玉賊:김옥균을 가리킴)과 천천히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다가 만일 새로운 일을 잊고 옛정을 간직하여 그로 하여금 탄연(坦然)히 의심이 없게 해서 천천히 도모하는 것입니다. 안의 한 기관은 만약 옥적과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자주 만난다면 저들의 땅에 있는 본국인은 반드시 소신에게 의심을 가질 것이니 적들과 통모하였다고 하여 본정부에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이런저런 헐뜯는 말이 들리더라도 성상(聖上)께서는 소신에 대한 의심이 없으셔야 합니다. 그런 뒤에라야 소신이 마음 놓고 이 일에 종사할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하니,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충의(忠義)로써 말씀하시면서 여비를 가지고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얼마 뒤에 전보(電報)가 헛되이 전해진 것이 있었는데, 청(淸)나라 전보는, ‘옥적이 일본의 불평당(不平黨)과 공모하여 난을 꾸미다가 음모가 누설되어 잡혔다. 운운’하여, 조금 느슨해진 분위기를 고동(鼓動)시키려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민씨가 멀리 보내는 것을 알선하던 것이 중단되었으니, 속에 가득 찬 끓는 피가 답답하고 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실행하려는 의지가 있는데 어찌 일을 그만 둘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칼 만드는 장인을 불러와서 비싼 값을 주고 한 자 되는 비수(匕首)를 만들었으니, 이것은 어장(魚腸)과 독항(督亢)보다 뛰어난 것이며,2) 칼을 숨길 곳도 찾아 놓았으니 귀신이 시키더라도 번개 같은 솜씨는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은밀한 곳에 앉아서 공연히 집안사람들을 물리치고 매일 체세(體勢)의 운용을 익힌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민씨를 만나 나라 일을 말하던 차에 이 칼이 손에 있음을 내보이며 사나운 기세와 큰 소리로 적을 목 베는 것의 빠르고 늦음에 따른 이해를 논하였더니, 민씨가 처음에는 놀라다가 마침내는 감격하여, 더욱이 힘을 다해 임금께 아뢰면서 자신이 보증을 하여 임금의 마음을 돌려 확고하게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정월 초10일 밤에 부름을 받고 들어가 임금을 뵙고 은밀히 처리할 일을 아뢰고 전권 위임장을 받았으니, 유지(諭旨)에는, “전총리군국사무아문(前總理軍國事務衙門) 주사(主事) 지운영을 전권참적대사(全權斬賊大使)로 위임하노니 한번 대일본에 들어가서 도망한 역적 옥균의 목을 베라. - 역적을 목 베기 전후에 일은 여건에 따라 편의대로 할 것. - 적을 목 벤 뒤에 남은 무리들은 죄를 묻지 말고 모두 사면할 것. - 적을 목 벤 뒤에 청나라는 대일본 정부에 요청하여 그들이 두호(斗護)하고 협조하게 할 것.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국 대군주의 보인(寶印)이 찍힌 위임장과 돈 5만원을 지급받고 나와서 출발하기 앞서 민응식(閔應植) 판서가3) 불러 가서 만났더니 민씨가 말하기를, “흠차(欽差) 원세개(원세개)를4) 만나 본 뒤에 가는 것이 매우 합당하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민판서의 서찰을 얻어서 원씨를 만나기를 청했는데, 원씨가 크게 기뻐하며 바로 일본 동경 주재 공사(公使) 서승조(徐承祖)에게 전보를 쳐서 저 운영이 들어가는 일을 미리 알렸습니다. 마침내 원씨를 작별하고 인천항에 도착하여 20일에 미농환(美濃丸:일본 배 이름)을 탔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배를 탄 사람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장기(長崎)를 거쳐 신호(神戶)에 도착하여 장은규(張溵奎)를 만나 전후 사실의 억울한 사정을 들었는데, 장씨는 과연 진실한 마음으로 충심(忠心)을 다해 옥적을 잡으려 하였으나 시운(時運)이 따르지 않아 비밀이 중간에 새어 나가게 되어 잘 한 일은 묻히고 잘못한 것만 드러나게 되었으니, 유유한 저 푸른 하늘이여! 누가 이 사람의 진실을 헤아리겠습니까? 저 운영도 또한 진실한 일로 말해 주고 좋은 말로 위로해 주었더니, 장씨가 감사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호에 한 달 남짓 머물다가 비로 길을 나서 대판(大坂)에서부터 두루 유람하며 내량(奈良)에 가서 대불(大佛)을 구경하고, 서경(西京:京都)으로 갔는데, 서경에서 일주일 쯤 머물렀습니다. 대양(大洋)에서 출발하여 이세(伊勢)의 산전(山田)으로 가서5) 천조황대신궁(天照皇大神宮)의 신락(神樂)에 배알하고6) 가장 길한 신의 가호를 빌었습니다. 산전에서 출발하여 미장(尾張) 삼하(三河) 원강(遠江) 준하(駿河) 상모(相模)를 거쳐 탕본(湯本)에 도착하여 온천욕을 하였으며,7) 3월 28일 동경의 신전(神田)여관에 도착하였습니다. 바로 이세(伊勢)로 옮겨 옥적의 주소를 그 점포의 종업원인 아김(阿金)에게 물어서 알아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편지를 한 통 써서 은근한 뜻을 담아 아김을 주어 보냈더니, 횡빈(橫濱)에 가서 전해줄 수 없다고 하며 돌아왔습니다. 뒤에 다른 인편으로 전해주었는데 한참 있다가 회답이 있었습니다. 그 여관은 번잡하여 오래 묵기에는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누구하나 우리나라 사람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사인 환목리탕(丸木利湯)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전에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거처할 만한 한정(閒靜) 여관을 알려달라고 하였더니, 환목이 다른 핑계를 대며 사양하며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재삼 긴히 청하자 할 수 없이 허락하여 같이 남좌구간정(南佐久間町) 1정(丁) 2번지에 있는 월전옥(越前屋)으로 갔습니다. 환목이 그의 친족이라고 하고 주인 할머니에게 물어서 좋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거처를 이곳으로 옮기고 마침내는 공(公)들과 함께 이렇게 천지를 뒤집을 인연을 가지게 되어 바람과 구름이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지나온 과정의 사소한 곡절을 또 어찌 다 글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가지고 온 돈은 장기와 신호 및 대판에 있는 심복(心腹)과 같은 친지들에게 나누어 맡겨두었는데, 이 또한 얼마는 나누어 장은규에게, 얼마는 청국 공사관에 맡겨 두었습니다.

    3 유인석 문하 동문록

    崔永勳 居江陵, 李弼熙 居丹陽, 洪鍾薰 居堤川, 尹陽燮 居淸風, 洪承義 居忠州, 吳寅泳 居江陵, 朴廷和 居砥平, 李康年 居聞慶, 朴貞洙 居原州, 元容正 居原州. 李正奎 居堤川. 徐在衡 居平川. 姜蘭秀 居堤川. 申芝秀 居春川, 安承禹 居砥平, 李春英 居砥平. 尹憲, 金思鼎 居原州, 趙泰貞 居平山, 尹正學 居忠州, 金亨植 居保寧, 李錫永 居丹陽, 李承龜 居延豊, 安慎模 居永春, 林李燮 居鎭川, 金演祖 居牙山, 申延黙 居淸風, 裵是綱 居江陵, 鄭華鎔 居堤川, 李鳴九 居砥平. 具滋鳳 居廣州, 具然痒 居原州, 洪德杓 居堤川, 洪直杓 居堤川, 孟樂在 居溫陽, 申明均 居廣州, 魚敬善 居廣州, 魚中善 居廣州, 李起振 居忠州, 崔烈 居丹陽, 申泰亨 居楊根, 沈興奎 居原州, 魚萬善 居廣州, 李東極 居江陵, 李濟奎 居江陵, 千洛龜 居江陵, 洪思九 居堤川, 李根達 居利川, 朱鉉九 居堤川, 蔡洪鎭 居平山, 元澈常 居堤川, 崔東鳳 居忠州, 吳弼洪 居平山, 李炳文 居忠州, 南永洙 居豊基, 許健 居江陵, 張泰鎭 居隣蹄, 洪承 居忠州, 金玄濟 居龍仁, 李奎顯 居丹陽, 任百淳 居平山, 安熙壽 居平山, 安光烈 居平山, 趙啓學 居白川, 李種夏 居平山, 禹承命 居平山, 申在鳳 居平山, 閔泳善 居白川, 吳弼斗 居平山, 邊錫範 居平山, 李建民 居平山, 邊承黙 居平山, 邊東煥 居平山, 禹泰榮 居白山, 朴瓚永 居平山, 申聲源 居平山, 李錫夏 居平山, 邊承洙 居平山, 申亨熙 居平山, 邊東植 居平山, 姜瀌 居海州, 趙元善 居平山, 鄭晉錫 居平山, 洪淳和 居平山, 朴禮善 居海州, 朴敖錫 居海州, 申杬 居平山, 李秉敎 居白川, 車載貞 居肅川, 韓升泰 居博川 韓洪模 居博川, 韓道燮 居博川, 蔡華欽 居平山, 吳世晩 居平山, 趙養善 居平山, 朴壽鉉 居平山, 趙膺善 居平山, 李明夏 居平山, 高錫倫 居海州, 金鋼 居價川, 金德潤 居江界, 李元燦 居龍川, 文錫獻 居龍川, 李善校 居豊川, 蔡洪根 居平山, 蔡相植 居平山, 崔根昌 居義州, 朱鉉三 居原州, 蔡奎五 居平山, 蔡相鎭 居平山, 蔡相學 居平山, 鄭夏錫 居平山, 鄭孝錫 居平山, 李秉河 居松禾, 尹昌烈 居海州 劉道植 居平山, 閔衡鎬 居載寧, 吳圭泳 居載寧, 梁學浚 居載寧, 金淳範 居殷栗, 金永涉 居鳳山, 鄭毅鉉 居殷栗, 蔡昌欽 居平山, 邊敬植 居平山, 梁鎭哲 居鳳山, 黃鳳周 居延安, 鄭箕錫 居平山, 邊玩 居鳳山, 梁樣善 居海州, 李秉世 居白川, 柳元赫 居白川, 趙泰中 居平山, 趙泰能 居平山, 韓斗燮 居遂安, 鄭駿燮, 居殷栗, 鄭在善, 居殷栗, 趙鏞諧 居豊川, 趙鏞翕 居豊川, 鄭祖鉉 居殷栗, 李秉熙 居松禾, 趙天衡 居平山, 韓克濟 居博川, 韓寬模 居博川, 白仁海 居寧邊, 車殷祚 居肅川, 康鎭 居安州, 康進國 居安州, 金鼎業 居安州, 邊宗鉉 居松禾, 趙性善 居海州, 弓復烈 居价州, 梁文善 居載寧, 金弘植 居海州, 金性克 居海州, 金達植 居海州, 趙宋奎 居豊川, 趙鏞厦 居豊川, 趙鍾均 居豊川, 金龍鎭 居安州, 金聖錬 居价州, 朴勝鎭 居博州, 柳東輝 居文化, 洪在祐 居文化, 禹相哲 居文化, 洪鍾源 居文化 徐洪基 居平山, 李光禧 居海州, 朴泰東 居海州, 朴震東 居海州, 具泰書 居海州, 金景壽 居海州, 金薰善 居海州, 申世熙 居平山 趙奎壁 居平山, 趙庸善 居平山, 趙昌東 居平山, 申泰理 居平山, 安成欽 居龜城, 尹泰亨 居平山, 尹泰貞 居平山, 李膺洙 居鳳山, 文鳳岐 居龍川, 洪基衡 居安州, 金明九 居安州,, 金璞 居安州,, 李秉根 居价州, 洪基女 安州, 申榮● 肅川, 金培郁 宿川, 金昌植 安州, 崔珍五 安州, 安鳳鎭 安州, 白三圭 寧邊, 崔錫邊 安州, 金錫熙 价州, 李東燮 安州, 金憲鎰 安州, 趙大憲 龍●, 李炳瀌 安州, 姜文鉉 安州, 李種夏 順安, 朴基權 順安, 車基鎬 肅川, 金致祥 龜城, 全允道 龜城, 李圭復 慈山, 金性信 龜城, 李淳興 龜城, 金錫燮 肅川, 申榮傑 肅川, 車豊鎬 肅川, 車聖鎬 肅川, 金康植 价川, 金天熙 价川, 郭鎭 鳳山, 金白熙 价川, 金鳳錬 价川, 金●永 价川, 金錫永 价川, 玄基國 价川, 李容道 安州, 玄基燮 价川, 車益鎬 肅川, 韓大模 博川, 韓升鎭 博川, 韓熙燮 博川, 韓得濟 博川, 白顯穆 泰州, 金相鶴 嘉山, 姜龍泰 嘉山, 李國毫 寧邊, 池錫魯 寧變, 韓德模 寧邊, 趙膺杰 龍岡, 金基瓚 龍岡, 金瀯杰 寧邊, 金芝黙 安州, 白樂夏 郭山, 車雲哭 宣川, 鄭克柱 鐵山, 鄭恒俊, 鄭恒倫, 鄭錫周, 鄭錫夏, 鄭錫殷 鐵山, 李晦植 鐵山, 鄭得宗 鐵山, 鄭錫廣 鐵山, 金用哭 宣川, 鄭鳳和 鐵山, 金洙曾 鐵山, 鄭秉无 鐵山, 金尙沃 鐵山, 鄭元玉 鐵山, 白光駿 龍川, 金忠洛 龍川, 文鳳輝 龍川, 李錫奎 龍川, 張學潤 龍川, 李昌欽 龍川, 張道潤 龍川, 李昌鎬 龍川, 張世瀞 龍川, 張斗植 龍川, 文錫寬 龍川, 張義植 龍川, 張性植 龍川, 張奎鳳 龍川, 金諜守 朔州, 鄭元吉 鐵山, 張益壽 龍川, 金德煥 龍川, 張南哭 龍川, 張亨植 龍川, 張潤禧 義州, 李元燮 龍州, 全昌語 龍川, 李泰和 价州, 弓滋絢 滋山, 金煉熙 价川, 李庭基 价川, 李升鉉 遂安, 李進柱 价川, 崔一浩 遂安, 金錫殷 平壤, 玄基正 价川, 玄熙燮 价川, 玄玉根 价川, 白仁濟, 寧邊, 康衡黙 寧邊, 車斗恒 寧邊, 李泰熙 价川, 金文熙 价川, 李球周 龍岡, 長益輔 龍岡, 崔瑞煥 滋山, 宋尙奎 遂安, 金鳳來 安州, 申彦國 安州, 申仁榮 安州, 崔昌秀 价川, 明德基 寧邊, 金相斗 嘉山, 金宅西 泰川, 金參 泰川, 玄基衡 价州, 金源永 价州, 金秉斢 肅州 李涵 龍川, 金原植 安州, 白健濟 安州, 康基亨 寧邊, 康鎭祐, 康元鎭, 康鎭燮, 康樂鎭 寧邊, 崔興烈 遂安, 康鳳淳 寧邊, 弓學均 价川, 韓衡柱 順安, 康養禮 寧邊, 李庭連 价川, 李庭迂 价川, 康殷國 安州, 申濟是 安州, 白應復 泰川, 白鍾西 泰川, 全民植 安州, 玄商璿 安州, 鄭元範 鐵山, 鄭恒鎭 鐵山, 鄭泰鎬 鐵山, 鄭國柱 鐵山, 金道緯 鐵山, 金錫豊 鐵山, 鄭賢瑞 鐵山, 李鎭璟 郭山, 文鳳陽 龍川, 文鍾一 龍川, 李信鳳 龍川, 李榮夏 龍川, 白炳琳 龍川, 李芝柱 龍川, 白哲元 龍川, 李熙迪 龍川, 李基鎬 龍川, 李鳳麟 龍川, 崔命嶙 龍川, 文秉淑 龍川, 韓暐模 博川, 韓鼎燮 博川, 韓麟燮 博川, 金衡銓 安州, 金敬銓 安州 金練銓 安州, 洪錫禹 安州, 李泰熙 价川, 丁進源 海州, 白南哲, 海州, 洪起植 遂安, 李義權 遂安, 金斗運 寧邊, 李東均 江東, 李昌均 江東, 康鶴淳 寧邊, 弓履一 海州.弓履隱 价州, 鄭基馹 永興, 李進洙 端川, 洪後弼 郭山, 崔繼道 宣川, 金用熙 价川, 金運熙 价川, 吉 勳 寧邊, 金在昇 价川, 金在德 价川, 李斗熙 价川, 金 璣 安州, 吳泰熙 价川, 金祉榮 博川, 車致聖 肅川, 車免鎬 肅川, 金秉律 平壤, 李致花 平壤, 韓禮善 寧邊, 白昌翼 泰川, 金在璿 价川, 金奎講 价川, 金秉祖 江東, 鄭命和 江東, 李益璿 江東, 鄭志漸 博川, 李仁培 价川, 金聲璿 蘆浦, 方雄植 嘉山, 都錫台 泰川, 吳昌奎 价川, 金河容 价川, 康仁健 价川, 金采鼎 价川, 李寅溶 价川, 柱處運 宣川, 朴智俊 德川, 趙觀賢 德川, 徐基善 德川, 文斌 寧邊, 金準賢 安州, 金世杰 安州, 金淳玉 价川, 朴鳳陽 价川, 尹容燮 安州, 金舜熙 价川, 鄭桓順 安州, 梁昇龍 寧邊, 姜昌一 昌城, 林鍾洞 安州, 林鍾京 安州, 玄基遠 价川, 金璿 江東, 吉昇珌 孟山, 吉昇渊 孟山, 崔完植 遂安, 金斗均 三和, 申益均 平山, 申璿均 平山, 胡健珍 龍岡, 金淳世 龍岡, 金致裕 三和, 洪●道 安州, 金持免 安州 林壃 安州, 韓國鎭 嘉山, 玄商祐 郭山, 金重鎬 宣川, 金義俊 宣川 金欽 价川, 金鏞 价川, 金洛源 韓山, 朴基鎬 順安, 金基柱 順安 朴揸鎭 宣川, 李晦根 宣川, 金諴 宣川, 李承鉉 宣川, 李學模 宣川, 金鼎鉉 宣川, 朴治奭 宣川, 洪仁泰 安州, 洪義泰 安州, 李世坤 龍川, 車丙軾 龍川, 車應僧 龍川, 張用燦 龍川, 李燦箕 龍川, 車明夏 龍川, 張龜洙 龍川, 安秉甲 龍川, 文致奎 龍川, 張惠善 龍川, 李燦甲 龍川, 文錫璦 龍川, 金燦禹 龍川, 金奎鉉 龍川, 金瑞鼎 龍川, 張秉植 龍川, 趙虎均 安州, 宋柱邦 博川, 朴紀龍 孟山, 張慶雲 孟山, 朴寅龍 孟山, 金泰熙 价川, 弓隱均 价川, 車旭聲 寧邊, 車旭驊 寧邊, 金瀯材 寧邊, 宋濟雲 肅川, 金相範 价川, 金持修 旅善, 李夢燁 安州, 李廷奎 安州, 李鳳元 安州, 高致龍 江東, 金奎學 价川, 金昞植 价川, 李奎洙 价川, 金奎● 价川, 丁基昌 价川, 金聲瀌 江東, 趙敬均 嘉山, 李庭● 价川, 玄基明 价川, 朴相洛 价川, 韓文彦 安州, 康聖鎭 寧邊, 黃雲瑞 江東, 丁繼商 海州 李寅箴 价川, 康基夏 寧邊, 金煉植 寧邊, 楊鈺瀯 价川, 楊大瀯 价川, 金在聲 价川, 韓履浩 寧遠, 弓履鳳 海州, 玄基初 价川, 朴相敦 成川 朴基璿 安州, 辛寅珪 安州, 金錚 价川, 任秉摯 安州, 金秉植 安州, 李承鉉 江東, 李基薰 江陵, 李寅玉 祥原, 李志瑩 龍川, 林尙民 鐵山, 尹希淳 寧邊, 朴免熙 咸川, 車驥斗 寧邊, 金東屬 寧邊, 玄炳翼 博川, 朴炳疆 博川, 韓鳳奎 遂安, 李錫煥 遂安, 韓景源 遂安, 田英根 宣川, 金澲 龜城, 李學一 寧邊, 康瑛肇 寧邊, 玄始乙 价川, 金貞熙 安州, 朴勝街 博川, 玄五赫 价川, 朴治翼 宣川, 崔紀鳳 安州, 崔雲瑞 海州, 吉昇達 孟山 金國鉉 海州, 吉昇 孟山, 吳錫泳 价川 韓義● 順安, 張利用 寧邊, 崔麟哲 泰川, 申相甲 肅川, 明鎭浩 寧邊, 朴永淳 殷山, 白虎● 泰川, 金相寶 嘉山, 林鍾洛 安州, 康奎黙 寧邊, 金應傑 安州, 林致童 安州, 金恕松 龜城, 金鶴鉉 寧邊, 崔洛九 泰川, 李炳基 寧邊, 洪炳一 龜城, 林鍾完 安州, 沈龍斌 朔州, 金鍾舜 泰川, 李應彬 价川, 李應碩 价川延安人.

    4 통문

    삼가 생각건대, 우리 금옹선사(錦翁先師) 묘의(墓儀)가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선사의 한 평생 세상에 뛰어나신 주덕(周德)과 도학을 지키고 후학을 열어주신 것이 없어지지 않고 공업(功業)이 마땅히 비석에 새겨 오래 전해지게 해야 했는데, 아직까지도 이렇게 미비하였으니 한 가지를 일삼아야할 도리에(事一之道) 어찌 속으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희들은 세력이 미약하여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고 여러 군자들의 형편에 따라 도와주시는 힘에 의지하여 이에 준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삼가 알려드리오니, 우러러 생각건대 편지를 받으시는 날(納書之日) 반드시 ‘먼저 내 마음을 알았구나.’라고 하실 것이니, 함께 정성을 다할 수 있기를 천만번 바랍니다. 영력(永曆) 다섯 번째 갑자년(五甲子, 1924) 2월 11일 통문을 보냅니다. 원극상(元極常) 엄희영(嚴熙永) 김사찬(金思贊) 신우균(申右均) 김태원(金泰元) 장석인(張錫寅) 박용훈(朴庸勳) 송빈헌(宋斌憲) 송건제(宋建栬) 원세보(元世寶) 원세신(元世臣) 이규현(李奎顯) 김준모(金俊模) 변성우(邊聖雨)

    5 유인석 간찰(簡札)

    동쪽을 바라보며 사모하고 그리워하기를 밤낮 쉴 새 없이 하였는데, 이때 허군(許君)이 편지를 가지고 와서, 삼가 형제분들 기체(氣體) 높이 보위하시고 합환(閤患:상대방 부인의 병환)과 솔우(率憂:상대방의 자식 등 손 아랫사람들의 걱정거리)가 점차 나아고 있음을 알고 늘 염려 되었습니다만 바로 개인 날씨처럼 그 사이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존숙씨(尊叔氏:상대방의 아우)가 또 늦게 이런 경사가 있으니 덕문(德門:상대방의 가문)에 복록이 더욱 창대하게 멀리 이어지고, 집안의 남녀 혼인은 세상의 변고가 중간에 끼어들기는 하였으나 장차 순조롭게 이루어짐을 알았으니 위로되고 천만번 축하드림에 좋은 말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게다가 입제(立齋) 흥학(興學)이 바야흐로 널리 퍼져 나감이 있고 몸가짐을 단속하고 일을 하는데 장차 더욱 부지런히 하기로 맹세했다고 하니 더욱 더없이 좋은 일이라, 듣는 사람이 기뻐서 잠이 오지 않게 합니다. 글로써 서로 도와 드러내려는 것은 가슴 속에 말이 궁할뿐만 아니라(乏言) 또한 그럴 겨를도 없으니, 비록 뒤에 만나 뵙는 날을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어도 그럴 수 있을 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존선고비(尊先考妣:상대방의 죽은 부모)의 행장(行狀)을 저술하는 것는 본래 어리석고 천한 제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승낙하였던 터라 마음에 감히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행록(行錄) 원본이 누구에게 보관되어 있는지 몰라 매우 죄송합니다. 탐문해서 찾으면 마땅히 저의 정성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저는 와서 산두재(山斗齋)에 의지하고 있는데 큰 병 없이 날로 여러 사우(士友)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비록 지극히 어둡고 어리석다 해도 조금씩 개발됨이 있으니, 저를 위하여 두텁게 마음 써주는 것이 골육이 털끝만큼의 사이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박한 인물이 어찌 이런 복을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일은 이곳으로 정소(定所)로 하고, 관서(關西)와 요동(遼東)도 일의 형편에 따라 왕래하고자 합니다. 요동의 일은 본래 대의(大義)에 관계가 있는 것이라, 앞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한 바는 과거대로 경리하는 것인데, 차동산(車東山)1)이 결단코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고 하며 주장하고 힘을 쓰는지라, 그래서 마침내 들은 대로 허락하였습니다. 신경유(申景裕)와 정병철(鄭炳哲)[수봉(壽鳳)으로 개명하였음]이2) 일간에 왔던 것도 실은 이 일 하는 것을 겸한 것인데, 그들에게도 마음을 다하는 것으로 힘을 삼으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 쪽의 동반(同伴)하기로 약속했던 사람들은 모두 별일 없다고 들었습니다. 강남(江南)에 대한 계획도 마음속에는 놓지 않고 있는데 끝내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요동으로 가신다고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거리끼고 장애됨이 있을 것입니다만, 이미 정해진 진실한 뜻(義諦)이 있으시니 가실 만하면 가실 것이요 소소한 거리낌이나 장애를 돌아보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소의신편(昭儀新編)」은 한(韓) 이(李) 두 친구가 장차 출판하려 한다고 하니, 그 뜻이 보통이 아닙니다. 다만 이일은 우리가 마땅히 권하거나 막아야 할 것이 아니고, 습재(習齋)를3) 반드시 만나볼 수 있어야 하고 또 서암(恕菴)이4) 있으니 서로 질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편(外篇)에는 혹 빼낼 것과 추가로 넣어야 할 것이 있을 듯한데, 이 또한 이 사람들과 더불어 검사해 나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각처에 있는 사우(士友)들은 모두 편안하신지요? 일일이 편지를 드리지 못하니 인사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끝이 있겠습니까만 정신이 혼미하여 모두 빠뜨렸습니다. 한해가 다가는 것도 바로 앞에 닥쳤습니다. 멀리서 묵은 해 잘 보내시고 새해를 맞으심에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6 남만통일후원대 선포문

    2월 초순 경 관전현(寬甸顯)에 거주하는 불량배로부터 상해 프랑스 조계 거주 불령선인등에게 별지에 선포문(宣布文)을 중국우편으로 우송한 자가 있는데 그 내용은 관전(寬甸)과 봉천(奉天)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 남만주(南滿洲) 통일후원대라는 것을 조직하고 대장에 서범선(徐範善), 부관에 김관성(金觀聲)을 내세우고 대원 20명으로 분담하여 내외 일반의 조선인에게 배포한 모양이며 종래의 각파를 통일시켜 강건한 단결 아래 독립운동을 개시하고 당 상해에 대원을 잠입시킨 형적이 있다. 또한 이곳의 불령배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지금 통일을 모의하고 있으나 도저히 어려운 상황으로 결국은 저들이 생활난 때문에 금품강탈에 통일이라는 미명을 빌리는 무리배라는 평이 있으니 이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경배(敬拜)본 보고서와 사진 첨부 송부처 기노시타(木下) 내무사무관으로부터

    7 평북 독판부 협의원 임명장

    집안현(輯安縣) 지방에 밀파한 당 관할 밀정으로부터 평안북도 독판부(督辨府)라 칭하는 불령단체는 별지에 복사본 사령서를 인쇄해서 조선 내지의 동지에게 보내는 군자금 기부자에 대해 교부하고 통보함에 있어 참고 및 보고한다.본 송신처

    8 양심잃은 자에게 충고하는 글

    양심 잃은 자에게 충고지금 세상백만사가밤낮으로 변해가매사람 역시 세월따라밤낮으로 변해간다날이 가고 밤이 오은천지도 수리치로되단군기자 혈족으로왜놈들과 작반하여제에 동족 구박하니만족한 것 무엇이나양심 잃은 아무개야이말 깊이 들어두라위원부에 출신하니유지신사 아무씨오신문에게 글을 쓰니애국열사 아무씨라애국열사 유지신사어찌하여 오늘날은전일 열성 간데 없고왜놈들과 작반하여일황의 생일날에십원 내어 득연하고왜놈 학교 위하여서오원주어 보조하며조선사회 학교에는일원 한 푼 아니주어너와 같은 조선놈은용서하기 어렵구나너에 원수 왜놈들은두 손으로 환영하니속히 회개 아니하면너의 이름 반포하여전일 잘못 생각하고오늘날로 회개하라독립보에 공필노는사정없이 쓸터이니너와 같은 악한 심장왜놈들과 일레로다너희들은 용서없이사형에다 처하리라너와 같은 조선놈은자작지얼한을 마라삼척동자 아이들도너희 주목할 터이니만일 회개 아니하면단불용대 할 터이니너희 죄를 뉘우쳐서동포 앞에 사죄하라

    9 북경유학생의 성토문

    우리 北京留學生會는 眞正한 愛國의 熱誠과 完全한 獨立의 精神에 基하여 우리 二千萬 兄弟姉妹의 앞에 對美委任統治請願을 提出한 李承晩(이승만), 鄭漢卿(정한경) 等 賣國賣族의 그 罪惡을 聲討하노라.四千二百五十二年(1919년) 三月 一日에 國內 國外를 勿論하고 우리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枚하며 二千萬 民衆의 熱誠을 合하여 倭奴의 覊絆을 脫하고 固有의 國權을 復하려고 獨立을 宣布하며 百折不屈의 精神으로 勇往邁進할 그때에 李(이승만) 鄭(정한경) 等이 在美國民會의 代表가 되어 巴里平和會義에 朝鮮獨立問題를 提出하기 위하여 發程하여 가다가 中路에 滯留하면서 儼然히 二千萬 民族의 代表를 冒稱하고 美國의 植民地되기를 願한다는 請願書를 美政府에 提出하였도다. 우리 同胞는 一片丹心으로 자나깨나 十年 동안에 敵의 毒한 銃, 利한 劍, 惡한 刑을 무릅쓰고 生命 財産 能力을 모두 貢獻하야 血戰苦鬪하여 온 것은 오직 獨立을 위한 따름이라. 賣國賊 李完用(이완용)을 狙擊한 李(이재명)烈士의 검과 自治運動奴 閔元植(민원식)을 快殺한 梁(양근환)義士의 칼이 우리 獨立의 眞正한 本意을 表顯함이 아닌가. 어찌 夢寐의 間이라도 自治는 委任統治를 뜻하였으리오. 망령되게 彼賊 等이 大逆不道의 行動으로 內로는 蕭墻의 禍를 起케하고 外로는 外國의 侮笑를 受하였으며 그 後 조금도 후회함이 없이 스스로 禍心이 勃發하야 奸輩雜類를 糾合하고 陰謀巢窟을 作하야 逆賊의 道를 實行코져 하니 어찌 우리 二千萬 同胞로 하여금 痛恨切齒할 바 아닌가. 彼賊도 同是國民이요 他族異種이 아니거든 어찌하야 獨立을 싫다하고 委任統治를 바라며 自由를 마다하고 奴隷됨을 좋아하는가? 或 美國의 奴隷됨이 倭敵의 奴隷됨보다 榮光으로 生覺하야 그리하는가? 우리의 徹底한 精神과 確固한 意志로 다물 事業에 나아가는 前途에 到底히 彼賊을 討誅치 않을 수 없으며 在美國民會 中央總會長 安昌浩(안창호)는 該會에 主幹이 되었으니 李(이완용)賊 等이 賣國賣族의 事實을 必然明知하리라. 만일 獨立精神의 眞意가 있었으면 當場에 餘地 없이 聲明討責하야 그 망령된 行爲를 阻止케 함이 可하겠거늘 如何한 逆心으로 只今까지도 아무 소리 없이 悍然掩蔽의 態度를 가지니 이 어찌 同意贊成이 아닌가? 그 罪狀도 또한 容赦할 수 없으며 所謂 上海政府와 議政院은 彼賊 等의 罪惡을 煥然明知하고도 討誅치 아니하며 그 請願을 取消시키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推戴하며 擁護하니 이 어찌 李完用(이완용)을 忠臣이라 하며 閔元植(민원식)을 愛國者라 함과 무엇이 다르리오. 그런즉 이는 곳 우리의 獨立의 精神을 眩惑케 하고 自由의 前途를 障害케 하야 美國의 奴隷되기를 請願하는 賊을 우리 留學生들은 비록 學生의 身分이나 亂逆悖道의 賊 等이 國家의 禍孽을 作함을 볼 때에 끓어오르는 祖國의 血誠을 抑制치 못할 뿐 아니라 民族의 一分子인 責任으로 右의 聲討文을 發하야 同胞의 迷惑을 打破하야 獨立의 精神을 鞏固케 하며 國民의 眞意을 表顯하야 將來의 禍根을 斬除케 하노니 愛國諸君子는 此에 同聲共討하기를 바라노라.

    10 대한국민회 보존서류

    본건에 관해 지난 달 29일 발 전보 제 139호로 우선 대요를 보고드린 바 있고 별지 원문 사본 네통을 보냅니다. 종래 불령선인에 대한 중국측의 타협 행동 등의 왜곡이 위와 같으니 인지하시길 바랍니다. 별지에 번역문을 첨부해야 하나 요즘 관무가 몹시 바빠 우선 번역문 없이 송부하니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별지 제1호는 올해 9월 16일자 기밀 제31호로 졸신으로 보고드린 맹단장이 명월구(明月溝)에게 출동하여 압수한 물품에 대해 국민회로부터 옹성기자(壅聲磯子) 소재의 간부원(정재면(鄭裁冕)은 원래 용정촌(龍井村) 기독교 장로교교사(長老派學校) 교사로서 國民會에 적을 두고 상해 임시정부(上海假政府)와의 통신을 담당하고 있고 이형도(李亨道)는 옹성습자(壅聲習子) 지나보위단(支那保衛團)의 배장(排長)을 하고 있어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 관헌과의 교섭사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각파의 불령단(不逞團)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주로 國民會에 예속되어 있음)에게 당시의 그 지역에 체재 중인 단장 및 왕영장(王營長) 등에게 반환하는 쪽의 교섭을 의뢰하는 서면으로 처음 부분에 기재한 사실에 비추어 지나 관헌의 불령단에 대한 태도 여하를 알려주며, 제2호는 이 지역의 지나 육군단부 감사원(지나인)이 맹단장(孟團長)의 뜻을 받아 단장의 출마 전 국민회장 구춘선(具春先)과 만나 토벌의 이면에 대해 알린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읍니다. 제 3절은 위의 시달에 대해 구춘선(具春先)으로부터 단장에게 감사하는 뜻을 표한 것으로 미리 지나 군영이 불령선인의 진압은 우리의 교섭이 강경하기 때문에 국제상의 체면 상 할 수 없이 성언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증하는 것이다. 제4호는 지나측이 취하는 쫒아내는 정책을 유감 없이 폭로하고 있는 것으로 처음부터 무력 토벌의 의사가 전혀 없었음을 단정할 수 있는 것으로 참고로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