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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31 이강 일기(2)

    申應逢(신응봉) 安東郡 禮安面 西部洞 三六番地信堂(조신당) 會賢洞 一街 100의 九二 郭熏房(곽훈방)趙易春(조이춘) 統義洞 七의 30副校長 獎忠洞 一四二

    32 백농실기

    갑인년(1914) 4월 ●일에 엮음.[0287의 강주산기발(降宙散記跋)이 이 때에 씌어진 것이다. 뒷 부분에는 1914년 4월 이후의 시문도 포함되어 있다.] 서(序), 기(記), 시(詩), 서(書), 문(文), 잡저(雜著), 만(輓)상량문(上樑文), 논(論), 소(訴), 가(歌), 설(說)변(辯), 의(義), 규(規), 녹(錄), 축사(祝辭), 역사(歷史)발(跋)

    33 방사겸 평생일기 1권

    나는 신사년 윤七月 二十五日 즉 서력 一千八百八十一年 평양성 방정우 가정에 七兄弟 중 五次子로 났으며 위로 매씨 한 분과 아래로 매제 한 분이 있고 또 형님의 소생 자녀가 많은 복잡분주한 가정에 났었다. 부모는 어곽전과 돈변놀이(돈놀이)를 하여서 집안은 평양성에서 유명한 부호 가운데 하나 되는 집안인 고로 자친되는 이께서 자식 기르는 괴로움을 면하고 호사를 주장하기 위하여 자식들을 낳자 즉시 유모 집으로 보내어 길렀다. 나도 유모 집에서 五세까지 자라서 부모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유모의 성명은 명치정이라 하는 인데 외촌에서 들어와서 ●● 장사를 하여 생도를 하는 인데 위로 노모 한 분을 모시고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자의 명은 명봉손이라고 하는데 사람된 자격이 극히 정답고 사랑심이 많은 청년이더라. 나는 유모 집에서 五세까지 자라나며 유모 부부에게는 어머니 아버지라고 곧 친부모와 같이 믿고 불렀으며 또 유모의 노모친과는 할머니라고 하였고 자식 명봉손과는 형이라고 불렀다. 온 유모집 전 식구가 나를 친자식 손자 동생같이 사랑하고 귀히 길러준 것은 나의 친부모보다 못하지 않은 고로 나는 나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지 못하고 상게까지 사모하고 기억한다.나는 五세에 유모 집을 떠나 친부모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유모의 사랑하던 그 유모의 집만 못하게 생각한다. 부모와 또 형수들이 다 나더러 얻어다 기르는 아이라고 조롱한다. 철 모르는 나의 생각에는 정말 얻어다 기르는 줄로만 꼭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모부 명치정을 나의 친아버지로 늘 생각이 나서 유모집으로 다시 달아나려고 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상거가 먼 때문에 달아나지 못하고 명치정 아들이라는 조롱을 참고 견뎌가며 한살 두살 자라서 온갖 눈치와 경위가 발달되어서 집안에 누가 그중 나를 귀히 하고 동정을 하는지 멀쩡히 다 알게 되었다.나의 자친은 나를 친히 길러내지 않고 남이 길러다 준 자식에게 아무 정이 없고 또 나 역시 친어머닌 줄 안다 할지라도 사랑할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아서 어머니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것은 내가 다 기억치 못하나 그러나 자친에게 그리 정이 가지 않은 것은 내가 잘 기억한다.이런 가정에서 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부모의 따스한 사랑이라고는 일점도 받지 못하고 이 몸이 자라난 것은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는 강보에 싸여서 유모의 젖을 빨고 아무 철모르는 때에 맏형님 한 분은 자녀 둘을 낳고 청춘에 돌아가셨다 한다. 이 형님의 자식 나의 조카되는 놈에 나이 두 살 아래가 되어서 나와 같이 자라나게 되었다. 이놈은 부모를 잃고 조모님의 손에서 길러나게 되었다. 조모님이 이것을 부모 잃은 손자라고 귀히 여기고 사랑하여 주기 때문에 집안 아이들 중에 그중 대장 노릇을 하기 때문에 삼촌도 모르고 함부로 언행을 놀리고 또 암상하고 악하여서 아자비(아저씨)한테 손질 발질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집어서 던지기가 능사로 삼는데 나는 자친이 무서워서 그냥 버려두다가도 하도 견딜 수가 없어서 기회만 만나면 단단히 때려주고는 나는 자친한테 경을 치고는 울고 하였다. 이런 가정에도 나를 동정하여 주는 형수 한 분이 있었다. 이 분은 강동 땅의 주민 문술덕이란 농촌 부가의 따님으로서 우리 둘째 형님의 아내가 되었다. 맏형님 내외는 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 형님과 이 형수가 집안에 맏아들 맏며느리가 되어 집안을 주장하신다. 이 가정에서 그리 나를 사랑하여 주는 이 없고 다만 이 형수님이 나의 억울할 적마다 위로와 동정을 늘 하여주는 고로 어머님 방에서 떠나서 형수님 계신 방으로 가서 자고 몇 해를 지내었다. 이럭저럭 자라나는 동안 나는 칠, 팔세 가량이 되어 세상물정은 그리 다 알지 못하나 그러나 집에 모든 형편 되어가는 것은 대강 짐작하였었다. 학교에 갈 나이 되었다. 六세에 학교에 입학하였다. 지금 학교라고 우리가 보통 칭하지마는 이왕에는 서당 혹 서재 글방이라고 하였다. 六세에 글방에 다니기 시작하여서 갑오년 청일전쟁이 벌어져서 평양성은 전쟁 중심지가 되어서 견딜 수 없어 강동가대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되어서 글을 더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강동 고비소로 피난을 나가서 한 四年 동안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데 한 곳에 이 四年 동안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다니기 때문에 서당에를 다시 가지 못하였다. 백씨께서는 평양성으로 다시 들어와서 객주사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는 나는 十四세 가량이 되어서 세상 형편과 사업상 물정을 실제로 연습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객주사업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인데 재정출납이 거대한 중심이 수입 지출이 복잡한 사업이다. 이 사업에 이것 저것 여러 가지로 형님을 도와주며 이 사업에 실제적 연단(단련)이 되어서 어떤 부분에 한 가지를 담임하여 맡아볼 만한 자격이 되었다. 이때는 十五세에 사업상의 눈이 좀 들 만한 청년이었다. 하루는 백씨께서 돈 받아들이고 내주는 직무를 나에게 맡긴다. 이 직무를 맡아 가지고는 평양성 각양 전방마다 널어 놓은 물건 값을 나의 손으로 받아들인다. 또 받아들이는 수로만치 남에게 물어줄 돈이 또 있다. 받은 돈으로 물어줄 돈을 갚고는 저녁때에 집으로 들어와서 서기와 마주 앉아서 그날 출납한 문부를 맞추는 일인데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격력(경력)을 얻어서 상당히 감당하여 갔다. 장가를 가게 되었다. 十六세에 중화당에서 무쇠점하는 김씨의 딸한테 장가를 들었다. 처가는 무쇠점을 하여서 풍족히 산다. 그러나 시골 생활의 집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딸도 시골여자일 것은 물론일 것이다. 나는 대도시 인물 풍채가 화려한 평양성 태생으로 온갖 사치하고 맵시 있는 것을 주장하는 평양성 청년 자제의 하나 될 것이다. 불행히 어찌어찌 소개가 되어 촌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철이 채 들지 못한 十六세의 청년 나는 이 여자한테 장가든 것을 늘 불만족히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안채방에 들어가 자지 않고 차차 차차 사랑방 잠을 자게 되었다. 자친과 형수들은 장가든 처를 두고 사랑방잠 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이해로서 권한다. 그러나 마음이 원치 않는 것이야 황제위라도 사양하는데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이 잘못된 생각으로 굳어졌다. 나의 처지는 이와 같이 된 고로 집에 있기 싫은 생각이 발동되었다. 그래서 외국으로 달아나버릴 생각이 종종 발한다. 그러나 집을 떠나 달아나는 일이 그리 적은 일은 아니다. 그 뒤 하루 이틀에 거부이 떠나지를 못하고 맡은 책임에 일은 여전히 잘 직무를 하여 나가면서 달아날 계획을 파하지 않고 계속 궁랑하는 중 달아나기 바로 몇 달 전은 섣달 그믐날이다. 이날을 자고 나면 정월 一日 세배 다니는 날이다. 나도 정월 一日에 웃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세배를 한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 또 연갑세라 전방 사원 아이들한테는 세배를 받는다. 세배 받는 아이들에게 돈푼씩 주려고 백통전 돈 백 냥이나 가지고 나갔다. 평양성에 관앞이라 하면 평양성 상업에 중심지이다. 세배를 다니다 관앞 어떤 전방에를 들어가니 그 전방 주인은 없고 청년 자제만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여러 상업가의 청년 자제들이 모여 풋돈푼씩 대고 눈놀이를 한다. 나도 한 몫 들어서 눈놀이를 하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 二百냥 따가지고 저녁때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다시 나가니 눈놀이판이 훨씬 커져서 건달꾼들이 많이 와서 등 뒤에서 구경을 하면서 돈 많이 딴 사람에게 개평을 구한다. 이곳 시로 한복판이 되어 사람이 많이 들락날락하여 번다하여서 유숙으로 옮겨 갔었다. 이 집은 평양성에서 거간하는 김 서방의 집인데 김 서방의 딸은 방금 객을 보는 기생 딸 하나 이었다. 이 기생의 명은 연홍이라 하는데 十六, 七세 된 아름다운 기생이다. 지금 기생집에서 눈놀이가 변하여서 투전 노름이 되었다. 평양성 유명한 상업가의 자제들이 모여서 이 연홍이의 집을 부자 되게 하였다. 이 집에서 두 주일 동안을 주야를 지내면서 투전을 하였다. 나는 한 三千냥을 잃고 정월 훗보름이 되자 투전판은 걷어치우고 각각 상업에 맡은 직무를 하게 되었다. 나는 한 三千냥 버리고, 속이 상하고 또 마음이 외도에 들게 되었다. 그동안 두 주일 동안에 연홍이와 친절하게 되어서 시간만 있으면 연홍이의 집을 가게 되었다. 하루는 가니 연홍이가 서울 진연에 갔다 한다. 나는 마음이 더 들떠서 집에 있을 생각이 없어 우리 집 앞에 사는 조지수 씨를 만나 미주로 달아나자고 상론을 하였다. 조지수 씨는 노비를 변통할 수 없다 한다. 그러나 나는 노비를 얼마라도 변통할 수가 있으니 돈은 염려 말고 같이 달아나자고 하였다. 하루는 달아나기로 꼭 작정을 하였다. 이날은 평양 장날이다. 상업하는 사람들이 돈을 받아서 갚는 날이다. 나는 이날에 받을 돈이 수십만 냥이다. 또 내가 남에게 갚을 돈도 여러 만 냥이다. 받고 줄 것을 적어 가지고 나와서 그중 큰 물건값 청인 東順昌(동순창)한테 지전 판 값 받을 것이 一萬여 냥 돈표를 가지고 아침 열 시 가량에 가서 달라 하였다. 그러나 너무 이르다고 五千兩만 준다. 백통전 三千兩을 세려면 여러 시간을 가져야 되겠는데 세보지 않고 그냥 가지고 오자니 의심을 주겠고 내 손으로 세자니 손이 떨려서 할 수 없기로 조지수 씨더러 대강 세보는 체하고 빨리 가지고 삼시구 밖 마목사한테 가서 인천으로 가는 환표를 만들어 달라 하여 가지고 대동강 사원 나드리 주막집에서 나는 먼저 나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빨리 수습하여 가지고 나오라 하고는 나는 홀출(훌쩍) 평양성을 등지고 대동강을 순식간에 건너가서 사원나드리 주막집 토방에 앉아서 조지수 나오기만 고대고대 하고 있다. 따스하던 五月달 해는 서산에 가물가물하며 내려가 없어져 버린다. 평양성을 굽어보니 집집이 저녁 짓는 연기로 아름다운 평양성을 희미하게 덮어서 해 없는 저녁이 더욱이 어두침침하여진다. 오후 두 시 가량에 이곳을 나와 조지수 나오기만 고대고대하고 기다리는 동안이 이때까지였다. 그러나 성계(아직) 나오는 기척이 없으니 무슨 변고나 없나 또 우리 집에서 사람을 보내어 돈 찾는 것을 다 빼앗지나 않았는가 별의별 생각이 다 난다. 견디다 못하여 최후에는 이같이 작정을 하여 가지고 평양성으로 밤 중 들어가서 우리 집 앞집 조지수 집이니 잘못된 연고를 알아본다 하고 다시 대동강을 건너려고 나룻배 선창으로 나간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흰 모래 강변으로 나간다. 뱃나루 턱에서 방금 건너온 배에서 내린다. 이는 분명 조지수이다. 참말 고대고대하던 조지수 씨가 분명하구나 하고 나는 반가운 중에도 맡기고 온 그 돈 수속을 어떻게 하여 가지고 나온 것부터 물었다. 조지수는 희색이 만면한 태도로 모든 일이 다 잘되었다고 하면서 가지고 갈 돈은 상시구 밖 마목사한테 가서 인천으로 가는 五千냥 환표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환표를 내어 보인다. 이때는 평양 지방의 五百명이 서울로 걸어 올라가고 서울에 있던 평양 지방 방의 五百명이 평양으로 내려오는 환대하는 때가 되어 서울과 평양 사이에 군사가 연락부절인 가운데 조지수와 나도 여기에 섞기어서 보황으로 걸어서 서흥골을 당도하였다. 오고가는 군대가 많아서 서흥골 주막집에는 가득가득 찬 것이 군대뿐이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주막을 얻지 못하고 좀 유측으로 들어가서 농부의 집을 얻어서 이날 쉬고 이튿날 조포까지 걸어가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행한다는 경론을 하고 일찍 간이 조반을 먹고 농부의 집에서 떠나 대로로 나섰다. 대로변 주막집 토방에 나의 사촌형님이 일찍이 토방에 나와서 우리가 그 앞으로 지나갈 것을 예상하시고 기다리던 차였다. 조지수는 나보다 몇 보나 앞서 나가다가 나의 사촌한테 붙들렸다. 나는 황급한 김에 촌길로 달아난다. 사촌되는 분은 넷 보교를 타시고 나오신 고로 보교꾼이 네 사람이 다 나를 따라와서 나도 잡혔다. 할 수 없이 사촌계신 주막으로 들어가서 사촌형님을 만나게 되었다. 조지수 봇짐 속에 장착하였던 인천 가서 찾을 환표는 벌써 사촌한테 빼앗겨서 우리 수중에는 간신히 인천까지 갈 노비밖에 없이 되었으니 달아나야 아무 소용이 없이 된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때에 사촌형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달아나야 네가 고생을 실컷 하고는 염치없이 집으로 다시 찾아들어오는 것보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가자고 할 때에 같이 집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간곡히 권면하기로 나도 생각다 못하여 돈없이 인천이나 서울로 달아나야 별수가 없을 것을 알고 사촌과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자친과 형수들과 또 금슬이 없는 아내라도 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것과 같이 반가워하는도다. 그러나 객주를 주장하시는 백씨께서도 속으로야 반가워 했을 터이나 그러나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지라도 내가 왜 집에서 달아났던가 하는 말 한 마디와 책망 한 마디를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차라리 한 번 단단히 책망과 벌을 받고 달아났던 잘못된 행동에 용서를 받는 것이 천성에 편리한 것을 나는 잘 알고 매일 고대고대하고 기다렸을지라도 백씨께서는 한달이 지나도록 아무 책망 한 마디가 없으니 나는 자연히 사랑으로 나갈 용기와 면목이 없게 되어 살림하는 안처에서 형수들과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게 되었었다. 하루는 객주하는 사무소에서 내가 맡아보던 돈 출납 사무를 다른 사람이 맡아보다가 그만두게 됨으로 사무소에 온갖 곤란이 있게 되는 때에 나와 친절하던 손님들이 나의 백씨에게 권고하기를 달아났던 동생을 다시 직무를 주라고 여러 손님이 말하게 되는 때에 백씨께서도 나를 다시 일을 보게 할 생각이 나서 하루는 저를 사랑으로 나오라 하기로 나는 한 달 동안이나 안방에서 형수들과 세월 보내다가 비로소 처음으로 사랑에 나와서 다년간 우리 객주에 다니던 손님들과 거간들과 총서기 金淳永(김순영)氏를 다 만나게 되는 때에 이분들은 우스개 말로 인천과 서울이 평양보다 좋더냐고 묻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인천과 서울은 채 가지 못하였으니 좋은지 어쩐지 알 수 없으나 하늘에 꽉 닿은 듯한 동실령을 넘어서 서흥골은 잘 구경하고 왔는데 이곳은 내가 평생을 두고 기억할 만한 곳으로 생각하게 될 것은 이곳에서 나의 달아나던 계획이 실패를 당하고 붙들려 와서 지금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된 것만은 반갑습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미소함을 마지 않더라. 유수같은 세월은 쉬지 않고 주총알같이 달아나서 서흥골서 잡혀온 지도 벌써 두 해가 되었다. 지난 두 해 동안 진심으로 백씨가 주장하는 객주사업에 그중 중요한 부분인 각양 물건 판 값을 받아서 남에게 줄 돈을 갚아주는 책임을 맡은 외에 큰 대상들이 오고가는데 영접과 전송하는 것과 화륜선으로 온갖 물건 오고가는 것을 내가 부치고 찾아들이는 책임과 또 여러 거간들이 물건을 팔러 나갈 때에 간색을 가지고 나갔다가 다시 들여오는 것을 간색책에 적어 놓는 것이 나의 매일하는 책임이니 내가 몇 가지 사무를 겸하였으며 이 여러 가지 사무를 보는 시간은 매일 보통 十四, 五시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책임인 줄로만 알고 공투세(고치사) 한번 안하고 전심전력으로 일을 잘 보아나간다. 그러나 백씨께서는 나에게 한시도 자유를 주지 않고 주야로 자기 절제 밑에 두려고 한다. 동서양을 물론하고 어떠한 일꾼이든지 저녁 먹기 전까지는 일을 하지마는 저녁을 먹은 후에는 자유를 가지고 자든지 나가 놀든지 자유회동이나 노예회동을 물론하고 밤 시간은 자유를 가지게 되는데 백씨 되는 이는 나의 밤 시간까지 자유를 주지 않고 밤에 나가 노는 것까지 금지하니 나는 이런 전제정책을 불만으로 생각하고 다시 달아나서 자유생활을 하여보자는 생각이 점점 깊어간다. 백씨께서 나에게 밤에도 나가는 자유를 주지 않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잘 안다. 백씨의 생각에는 상업가는 외도와 멀리 해야 된다는 사상에서 비롯하여 나를 밤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평양성은 기생이 많기로 유명한 곳인데 상업가는 재정을 많이 출납하게 되는데 어떤 기생의 집에 내왕하다 재정에 큰 손해를 당하고 보면 상업상 신용까지 잃고 상업이 결단날까 하여 나를 밤에도 못나가게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나는 주야로 자유를 조금도 가지지를 못하고 젊으나 젊은 이팔청춘에 부자유 생활은 죽기보다 더 싫은 생각이 날이 갈수록 더 굳어지게 된 이것을 누구나 좋은 말로나 권세로 고쳐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로 나는 다시 달아날 생각을 가지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차에 나의 매형되는 차종호 씨가 처가인 우리 집에 놀러와서 몇 달 있게 되었다. 차종호 씨는 한문을 많이 배운 학자요 또 영어와 일어를 배웠고 또 우리나라 무관학교까지 마치신 분이었다. 이분이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부하기에 유여하던 집안이 간곤하게 되어서 우리나라 그때 형편으로는 아무리 재간이 많은 사람이라도 세력이 없으면 우리정부에서 써주지 않고 세력대가에서만 정부의 대소 관직을 얻게 되는 때에 하물며 서북사람으로서 우리정부에 무슨 기회가 있었으랴. 고로 서울과 평양 사이에 오고 가는데 시간만 허송하고 아무 기회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하루는 매부되는 차종호 씨를 조용히 만나서 미국으로 갈 상의를 하였다. 그러나 매부되는 이는 선뜻 대답을 안하고 있다가 미국으로 갔으면 좋지마는 나는 일푼 전이 없으니 어떻게 갈 수 있냐고 말씀하신다. 저와 같이 가실 생각만 계시면 노비 걱정은 마시오 내가 둘이 갈 노비를 변통할 터입니다 하니 반갑게 가기로 작정을 하신다. 그래서 나는 모아두었던 나의 사유자본을 예산하여 본즉 한 五千냥 가량이 잘 되니 미국으로 둘이 갈 선비가 넉넉하여 속히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준비라야 달아나는 판국에 옷이나 행장을 다 잘 수습할 수도 없고 다만 화륜선이 만경대에서 어느날 어느시간에 인천으로 떠나가는 것을 알아보고 또 내가 맡아보던 재정출납 사무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셔(자세히) 분명히 밝혀놓고는 집안 식구나 사랑에서 일보는 사람들이 일절 모르게 감쪽같이 달아날 준비를 하여놓고는 매부되는 이는 만츰(먼저) 만경대로 나가서 기다리라 하고 나는 장날이 되어서 아직 평양성 전방마다 다니면서 돈을 받아서 사원애에게 받은 돈을 주어서 사랑으로 들여보내고는 집에도 다시 들어와 보지 못하고 돈 받으러 다니던 그 길로 나도 만경대로 내려가 버렸다. 매부되는 차종호 씨는 만경대서 나를 무한히 기다리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화륜선은 우리를 데리고 인천으로 가려고 벌써 와 기다리고 만경대 선창에 와서 있다. 매부와 같이 배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 몇 순간에 떠나려고 하는 고동을 푼다. 나는 이 고동소리를 듣고는 자연히 집에서 지내던 생각을 안할 수 없이 된다. 나에게 그리 다정한 사랑을 주지 않던 모친님과 전 가족을 위하여 주야로 사업을 하시느라고 고심초사하시는 백씨와 나에게 늘 동정하여 주시던 형수님과 누님과 또 다년간 내왕하던 손님들이 내게 작은 주인이라고 부르던 생각과 또 동네에 같이 자라나던 동무들과 시간만 있으면 만나보던 기생 연홍이와 소월이와 또 평양성에서 사업하는 사람들과 매일 상종하던 생각이 심각하게 되는 때에는 내가 왜 달아나는가 하는 후회가 나의 지금 달아나는 계획을 방해를 주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작정하고 발길을 만경대로 돌려놓았으니 이 발길을 다시 평양성으로 돌려가지고 회정할 수는 없는 사정이니 에라 청년 장부가 한번 작정한 것을 고칠 수 없다는 결심을 하는 동시에 배는 닻을 감아가지고 뚜뚜 고동을 불면서 떠났다. 지금 평양성에 전 시가에 난리가 났다. 방사겸 하나 달아나기에 우리 집안은 물론이요 전 평양 상노팔이 복잡하게 되었다. 사람 사람이 서로 만나서 지금 둑비전골에서 객주사업하는 方迺亨(방내형) 동생이 돈을 많이 받아 가지고 다시 달아났다고 곳곳이 떠들게 되었다. 그때에 평양성에서 신문이 오늘 같이 출간되고 있었다면 방사겸 달아난 이 보도가 신문 첫장 선두에 대서특서로 제목에다 방사겸이가 돈을 많이 가지고 달아났다는 광고가 되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나라는 호랑이 같은 전제 압박 밑에서 출판자유 언권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이런 전제정부의 명령대로만 살아가는 때에 신문 출판사업이 정부에나 일반 민중에 어떠한 큰 관계있는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대소 성시를 물론하고 신문사업할 사상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평양같은 도성에도 신문 한 장이 없은 고로 아무리 큰 사건이 발생되어도 널리 광고가 안되어 원근을 물론하고 서로 알지 못하게 되는도다. 이상에 말한바 내가 한번 평양성을 떠나게 되는 동시에 평양성과 우리 집안이 다 한번 경동하게 된 것은 내가 무슨 명예가 고상하다거나 또 무슨 유공한 사람이 되어 일판 평양성 중이 요란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었다. 나는 十七, 八세 된 청년으로 백씨당께서 하시는 객주사업에 재정 출납하는 직무를 맡아보던 사람이어서 돈 줄 사람도 나를 찾고 돈 받을 사람도 나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 적지않은 평양성 전 시가가 남북으로 나뉘었는데 북쪽 영문 앞에서부터 남문통까지 한 三十블럭 가량되는 전 좌우편에 형형색색한 즐비한 전방마다 우리 객주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외상으로 사다 놓고는 매 장날마다 내가 가서 얼마씩 받아오는 고로 이 상업하는 사람들이 나를 잘 알게 되고 나도 평양성 전체 상업가들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달아나던 날은 평양성 장날이었다. 이날은 평양성이 적다하리만큼 사처에서 물건을 팔고 사노라고 지레 모인 날이어서 골목마다 사람이 꽉꽉 차서 들여 덤비고(붐비고) 국수집 장국밥집 떡집 객주집 할 것 없이 팔고 사고 먹고 마시고 하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만들어 가지고 박작(복잡)한 날인데 나도 이 복잡한 가운데서 사환애 둘 데리고 전방마다 들어가서 돈을 받아서 중백씨 전방에 적체하여 놓고는 또 다른 전방이나 다른 객주집에 가 돈을 받는 때에 우리가 남에게 갚아줄 것은 내가 찾아다니면서 갚아주는 것이 아니고 돈 받을 사람들은 돈을 받으려고 나를 찾으러 다니게 된다. 나는 이러한 형편에서 홀출(훌쩍) 부지거처로 달아나고 말았으니 돈을 나에게 갚을 사람들은 나의 백씨한테 돈을 받으러 오지 않으니 무슨 일이야 물어 볼 필요가 없지마는 우리한테 돈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나를 찾아다니다 만날 수 없으니 자연 백씨 사무소로 들어가서 돈을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백씨 사무소로 돈 달라고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니 자연히 내가 잘못된 것을 의심하게 되어 나를 찾으려고 사람을 많이 내세워서 나를 찾는 중이나 이미 달아난 사람을 평양성에서는 찾을 길 없어서 기생의 집을 다 뒤지고 또 뒷성너머 남자들 목욕하는 곳에 가서 장번에 벗어들 놓은 의복을 조사한 것은 혹 목욕하다 깊은 물에 빠져 죽었나 하는 의심이 있어서 벗어 놓은 의복을 조사한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상사난 집 모양으로 통곡이 진동하고 큰 야단이 일어났다. 자친님께서는 나와 친절하게 놀던 나의 동무들을 찾아다니시며 나의 생사여부를 묻게 되었다. 우리집 옆에 사는 金在鉉(김재현)이라는 사람은 나와 아주 친절한 친구인 고로 내가 아무날 어디로 달아나니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외아들로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달아날 생각이 없었다. 자친님께서 이 사람한테 가서 너는 내 자식이 어디로 간 것을 알 터이니 빨리 대달라고 하니 속일 수 없는 형편을 알고 실제대로 만경대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차종호와 같이 갔다고 말하였다. 이제는 집에서 더 찾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통곡할 것도 없는 것은 죽지 않고 인천으로 사위와 달아난 것이 분명히 판명되었으니 인천으로 가신을 보내어 찾기로 작정이 된 모양이다. 나는 만경대서 매부와 같이 배를 타고 올라오는데 선중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양반 한 분을 만나 며칠동안 재미나게 담화를 하였다. 이 양반은 기천 군수 이경호라 하는 옥관자를 붙인 양반이다. 이분은 서울 농동이라는 곳에 집을 두고 평양 기생들이 서울로 올라오면 진연에 참례하도록 주선하여 주고 기생들의 등을 벗겨먹는 일을 하고 있는 듯하여서 나는 평양 기생들의 이름들을 물어본즉 나는 모르나 관치 않게 많이 아는 듯 하여서 내가 좋아하는 평양 기생 연홍이를 아는가 물으니 지금 진연에 와 있다고 하면서 잘 안다고 하기로 내가 서울 가면 연홍이를 한번 만나보려고 한다 하니 자기 집으로 찾아오면 만나보게 주선하여 준다 하기를 이 이경호 씨의 문패를 적어 가졌다. 우리는 이럭저럭 하는 동안에 우리 탄 배는 벌써 인천항에 도착되어서 하륙을 하였다. 우리는 객주집에 기숙을 정하고 수일 쉬어가지고 인천시가와 항구 근처를 구경하였다. 인천도 평양보다 좀 번화하고 물산이 들고 나는 것이 과연 조선에는 큰 항구요 또 대도시 가운데 빠지지 않을 만한 인천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으로 간다고 인천을 와서는 곧 미국으로 갈 준비 않고 여러 달 동안 이럭저럭 잘 놀고 흥청거리는 가운데 서울도 내왕하게 되었다. 나는 연홍을 만나려고 서울 가서 기천 군수를 지낸 이경호를 찾아갔다. 나는 이경호 집 집문 밖에서 슴겁지슴게 이리오너라 하고 한 두세 번 길게 뽑았다. 한참 있노라니 한 十四,五세 가량 된 최립중(초립동)이 나와서 문을 열어준다. 아마 하인은 없는 모양인 듯 지금 열어주는 최립중(초립동)이는 아마 이경호 아들인 듯하다. 나는 사랑으로 들어가서 이경호에게 인사를 한즉 자기도 인사를 하고는 앉으라 하면서 담뱃대에 기삼이를 담아 주면서 다정히 대접을 한다. 나는 연홍이를 만나기 위하여 왔노라 한즉 이경호 말이 참 안되었소 하면서 수일 전에 연홍이가 평양으로 내려갔다고 하는구려 하면서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본다. 할 수 없지요 하고 나는 대답을 하고는 조금 더 앉았다가 서울 구경이나 하고 인천으로 다시 가려 합니다 하고 평안히 계십시오 하고는 문 밖을 나섰다. 그러나 어디로 갈 방향은 모른다. 그래서 슬근슬근 걸어서 농동골로 나온다. 어떤 청년 둘이 앞에 오는데 한 사람은 매(매우) 낯이 익기에 자세히 보니 평양성 함일섭의 아들이었다. 어쩐 일인가 우리가 다 평양사람으로서 평양에서 만나기 드물더니 오늘 서울서 이같이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하여간 반갑다. 나는 함씨에 묻기를 서울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즉 벼슬을 하나 얻을까 하고 와 있다고 한다. 대관절 자기 처소로 가자고 하기에 따라갔다. 매우 어렵게 지내는 모양같아 보인다. 그래도 나를 대접하기 위하여 둘이서 수군수군하더니 찼던 안경을 끌러 친구를 주면서 전당국에 가서 몇 원 얻어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라는 모양 같아 보인다 한참 있더니 두부와 콩나물과 제육을 조금씩 사가지고 와서 자기들 손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놓고 먹자고 하기에 같이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더니 나라 감투를 써 볼 생각이 없나 묻기로 감투는 무슨 감투란 말인가 물었다. 함씨의 말이 참봉이나 주사가 되기를 원하면 자기가 주선하여 주겠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모르는 것 아니다. 그러나 짐짓 참봉이라니 눈 먼 참봉이란 말인가? 또 주사라니 멀쩡히 성한 사람에게 주사가 소용있나 라고 나는 웃었다. 자기들도 웃는다. 함씨는 벌써 연전부터 참봉이 되어서 감투를 쓰고 있다. 나는 우스개 말로 함 참봉 당신은 눈을 멀쩡히 뜨고서 왜 소경으로 행세를 합니까? 한즉 함씨는 웃으면서 자 조롱의 말은 그만두고 감투를 쓰고 평양으로 가라고 하면서 자기가 주선한다면 한 一千兩이면 될 듯하다고 자꾸 졸라댄다. 함씨 생각에 우리 집이 평양에서 상당히 사업을 하니까 내가 돈 천냥이나 써도 관계가 없을 줄로 알고 자꾸 달라 붙는다. 나는 서양식의 사방모자 감투는 원하되 우리나라 매관매직의 감투는 원치 않는다고 거절하여 버리고 총총하여 인천으로 가야 되겠다고 작별하고 문 밖을 나섰다. 세월은 여루하여 벌써 인천 와 있는 지도 반년이 잘 되었다. 가지고 온 돈은 거의 다 써버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객주와 거래하는 서울 객주하는 이씨를 찾아가서 거짓말을 하고 몇 천냥 당겨쓸까 하고 다시 서울을 나가서 이씨한테 말을 하여 보았다. 벌써 나의 백씨께서는 원산 인천 서울 객주하는 사람들에게 내 동생이 달아났으니 만일 찾아와서 거짓말로 돈을 달라 하더라도 일푼 주지 말라고 우리와 거래하던 곳은 전보를 하여서 일푼전 돌려 쓸 수가 없이 되었고 겸하여 집에서 나를 붙들어 가려고 사람을 인천과 서울에 많이 내세워 가지고 탐문한다는 소식이 있다. 그래서 매부와 나는 걱정을 하다가 한 곳에서 기숙을 오래 못하고 자주 옮기었다. 보통 낮에는 안 나가고 밤에만 나가 다녔다. 하루는 매부께서 어디 나갔다 오셔서 지금 인천항에 개발회사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나는 개발회사가 무엇이요? 매부한테 물었다. 개발회사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고 미국영지 하와이 군도에 동양인 이민을 주선하는 회사인데 미국 사람이 주장하는 밑에 일인들이 많이 사무를 본다고 하시면서 매부께서 이 이민에 통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나는 영어를 모르니 통변이 될 수 없고 보통 노동 이민으로 가게 될 수밖에 없다마는 매부 한 분만이라도 통변으로 가게 된 것만은 다행이다. 우리는 하와이 이민으로 가게 되어서 눈 검사를 하게 되었다. 매부의 눈은 좋아서 눈 검사를 잘 치렀으나 나는 눈이 부족하여 여러 날 눈을 고쳐가지고야 일본 신호(고베)를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하와이 가는데저 눈 검사가 더 심하여 나는 오래 눈을 고치느라고 있는 동안에 벌써 매부께서는 이민동포 七, 八十명을 대동하고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타고 나를 일본에 떨어뜨리고 혼자 가신다. 나는 이곳에서 매부를 잃고 섭섭한 것보다 외로워서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견디기 어려웠다. 이렇게 한 달 동안을 혼자서 지내며 눈병을 매일 일본 의사에게 가서 고쳐가지고 나도 하와이로 가는 이민배를 타게 되었다. 이번 나와 같이 가는 이민동포는 한 五, 六十명인데 통변으로 같이 가는 이는 이노익이라는 분인데 영어의 에이 비 씨 디 겨우 배워가지고 통변이라고 따라왔다. 일본에서 세 주일 동안이나 망망한 태평양을 건너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들어와서 호놀룰루항에 도착되자 이곳서 이민 동포를 각섬으로 분배하여 보내는 직무를 맡은 안정수 씨가 선상에 올라와서 우리더러 하와이 섬으로 오늘밤에 다른 배를 타고 간다고 통기를 하여주고는 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매부께서 어느 섬에 가 계신지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하와이 군도는 여러 섬으로 성립되었지마는 사람이 사는 섬은 하와이섬과 마우이섬과 카우아이섬과 오아후섬 이 넷이 사람 사는 섬들인데 진주만과 호놀룰루항이 오아후섬에 붙었다. 이 오아후섬 진주만은 미국 태평양 함대가 활동 공작을 여기서 하게 되므로 이곳에 태평양 함대 대부분이 이곳에 집중하고 있는 第一 군항이다. 이번 제이차 세계전쟁에 일본이 이 군항을 파괴하면 미국 해군이 멸망하여 태평양전쟁을 꼭 이길 줄 믿고 일본이 암수적 행동으로 진주만에 폭탄을 던져서 이 유력한 군항에 집중되어 있던 군함 수십 척이 침몰 혹 파괴되어 여러 千萬元 손해를 당하고 분이 바짝 난 미국 국민이 이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사상으로 주야로 상하국민이 일체 합심하여 두드려 만든 군기가 단기간에 태산과 같이 쌓이게 된 고로 자기가 쓰고 남는 군기 군물을 연합국에 공급하여 이번 전쟁을 이기었다. 나는 하와이섬 길노이라는 농장을 가서 자리를 정하고 일을 나가 시험하여 보았다. 사탕대는 우리네 수수밭 같은 가득 들어선 그 틈에서 사탕대를 꺽어서 놓는 일인데 비를 맞으면서 하는 일이요 구두에 감탕 흙이 잔뜩 달라 붙어서 무게가 수십 근이니 발을 옮겨 놓기가 힘드는 고로 나는 할 수 없다 하고 반일만 하고 처(處)로 들어와서는 매부 계신 곳을 찾아 가려고 이 농장에서 떠나 호놀룰루를 다시 나가서 안정수를 찾아서 물어보아야 찾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이럭저럭하여 두어 주일을 이 농장에서 지내었다.

    34 방사겸 평생일기 2권

    대동교육회 조직한 지도 벌써 반년이 잘 되었다. 지난 반년 동안에 회무는 날로 확장되어 가는 우리의 대동교육회를 이 외따롭고 작은 패서디나에서만 있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작은 생선이 얕은 물에서 지낼 수 있으나 큰 생선은 얕은 물에선 살 수 없으니 불가불 깊고 너른 큰 강을 찾아가야 잘 살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 대동교육회도 창립할 그때에는 불과 십여 인에 지나지 않던 이 회가 오,륙삭 동안에 자라서 사, 오십명 회원이 되어 회무가 차차 발전이 되므로 따라서 한인이 거주하는 지방마다 지방회를 두기로 우리 교육회에서 작정하고 우선 순찰위원 한 사람을 뽑아서 상항(샌프란시스코)과 새크라멘토와 프레스노와 나성(로스앤젤레스)을 한 번 순찰하면서 회원을 모집하기로 동의 가결로 작정을 하고 순찰위원에 중대한 임무를 나에게 맡긴다. 나는 사회 방면에 아무 경험과 연단(단련)이 없이 이런 중대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동교육회 창립자로 오, 륙삭 동안 사회에 행사하는 것을 대강 훈련을 받은 이것이 도움되어서 순찰위원으로 파송하는 것을 겁내지 않고 이 사명을 받아가지고 오, 륙삭 동안 한집에서 동고동락하던 형제자매에게 섭섭한 상별을 하게 되는 때에 김밀니사 부인께서 자필로 일심단결 영원불망이라는 맹약서를 써서 주면서 사겸 씨 이번 각처 동포순찰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하신다. 또 의회의 영수 장경 선생께서는 사겸 씨는 나의 오른팔과 같이 믿으니 나는 아무 염려치 않고 사겸 씨를 보내오 하시면서 회무가 진행되는대로 자주 통신하라 부탁하는 이분들의 섭섭한 표정을 나타내는 보는 나도 섭섭한 감을 금치 못하고 이분들과 작별을 하고 떠났다. 내가 지금 떠나가는 곳은 어딘가. 또 누가 나를 오라고 청함을 받고 가는가? 아니다.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아무 데나 동포만 있다면 가려고 하는데 금문공원이 있는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발길을 돌려놓았다. 상항(샌프란시스코)은 우리 동포가 그중 많이 거주하며 또 안창호 선생이 창설한 친목회가 번성하여 공립협회로 변경하였을 때이며 이곳 동포 전체의 90%가 공립협회 회원이요 이 회 회원 가운데서 교회와 여관도 설립하고 공립신문도 발행하는 때이었다. 이곳은 공립협회의 중심지가 될 만한 모든 설비와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우리 대동교육회 회원은 아직 한 사람도 없고 문경호 목사가 달아난 그 까닭은 그때에 상항(샌프란시스코) 지진 후에 일본 영사가 한인에게 구제금을 준다는 것을 공립협회에서는 반대하고 받지 않아(않은) 돈을 받아가지고 동포가 무서웠었다 하는 것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말을 붙이게 되었다. 때마침 문경호 목사가, 주장하던 미미교 목사로 있다가 처자를 두고 달아나서 미미교당은 주장무인하게 되어서 예배일에도 문을 닫고 있는 때에 나는 이 교당의 간사가 되어서 예배당을 목사 책임 외에는 다 하게 되는데 수십 명 교인을 기숙시키는 등사를 하게 되는 때에 이 교인들 가운데도 공립협회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대동교육회원이 되라고 열심으로 권면하여 수십 명 회원을 얻어가지고 교육회 第一地方會를 이 교회 속에서 조직하였는데 이때에 회장은 김찬일 씨로 추천이 되었으며 이곳 회원 가운데 장인환 의사가 있었다. 나는 이곳 와서 지방회를 조직하고 파사데나에 있는 총회에 보고를 하면서 신설한 지방회 인준장을 청구하였더니 수일 후에 인준장이 내도하여 완전한 지방회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회원은 나날이 늘어서 벌써 삼, 사십 명의 유력한 회원이 집중되는 때에 하와이 동포가 선편마다 수십 명씩 건너오는 고로 사무가 복잡하여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없는 고로 장경 선생을 빨리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나오시라고 하였다. 수일 후에 장 선생께서 나오셨다. 나는 모든 중대 사무는 다 장 선생에게 맡기고 나는 하와이에서 오는 선편마다 나가서 동포를 맞아들이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배가 오면 나뿐 아니라 공립협회에서도 사람 나가서 새로 오는 동포를 서로 많이 데리고 가려고 어떤 때는 승강이 된다. 하와이로 오는 동포는 다 짐짝이 있다. 고로 우리 회관 번지를 적은 카드를 많이 가지고 나가서 배에 만츰(미리) 올라가서 동포의 짐짝마다 카드를 달면 이 짐짝 주인은 다 내가 모시고 우리 회관에 와서 기숙을 우선 공급하며 원하는 대로 각양 일자리를 주선하여 주는 동시에 이분들을 다 회원을 만들기에 전심전력하는 것이 그때에 교육·공립 두 회의 활동이었다. 우리 교육회 발전이 속도로 내닫는 이런 때에 미미교회 속에 있을 필요가 없다 하고 회관 하나 새로 잡고 파사데나에 있던 총회를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옮겨왔다. 이때에 우리 회의 영수 장경 선생이 중국 보황당 강유위와 양계초와 서신을 교환하는 때에 교육을 고쳐 보국이라고 회명을 대동보국이라 한 것은 제국을 혁명하는 때에 제국을 보호한다는 것은 좀 잘못된 듯하다. 그러나 강유위 양계초를 이용하려는 장경 선생은 짐짓 강유위 주장과 같이하여야 도움을 받게 될 줄 안 것인 줄 나는 안다.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대동보국회 중앙회를 조직하고 중앙회장은 문양목 씨가 추천되었고 중앙회에 거관보 대동공보에 주필은 백일구 씨였다. 나는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보던 일을 다 이분들께 맡기고 새크라멘토로 나왔다. 이곳에도 하와이로 건너온 동포가 많이 나와서 여기저기 있는 농장에서 들일하는 분들 있다. 그러나 다 만나볼 수는 없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좋은 동지 몇 분은 내가 잊지 않고 늘 기억한다. 김홍균 양주은 하상옥 박영식 이희대 김치환 한의선 강홍범 김계선 윤흥호 고응도 정장손 정국현 정국서 송사원 김필권 김수권 장인명 이분들을 다 이곳에서 만나 대동보국회 회원이 되어서 이곳에 지방회를 조직하고 지방회장은 이희대 씨가 추천이 되었었다. 회관 내에 기숙사를 설치하고 수십 명이 한 데서 재미있게 지내는 동시에 청년들과 나는 학교를 가서 공부도 좀 하며 회무도 보며 얼마 지내다가 삭도(새크라멘토) 회무는 장인명 김홍균 황주은 이희대 이 몇 분에게 맡기고 나는 프레스노라는 곳으로 나갔다. 이곳은 공립협회 사람이 많이 와 있는 곳이며 이곳 소산은 포도와 온갖 실과 농사하는 중심이 되어 일이 많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의 친교 김원택이라는 분이 계시고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이 많다. 이분들의 조력으로 이곳에 대동보국회 경찰소를 조직하고 경찰당장은 김원택 씨로 추천이 되어 시무하게 되었다. 오늘 중앙회에 공함을 받아보니 하와이로 동포가 연속하여 많이 건너오는데 이분들이 일을 구하지 못하여 이분들이 곤란한 편이 많고 회금을 거둘 수 없어(서) 중앙회관 유지가 문제니 사겸 씨는 프레스노에서 노동을 주선하여 이곳서 일 못하는 회원들을 데려다 일을 하게 하여야 회관에 곤란을 면하겠다 하기로 나는 지금부터 노동 주선하는 책임을 맡아가지고 오마일, 십마일 바깥 농장으로 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포도 딸 때는 안 되었다. 지금은 四月 중순이니 아직도 넉 달 동안을 기다려서 八月 중순이 와야 포도를 따게 되겠다. 그러나 지금부터 농주와 일꾼을 얼마나 원하는(지) 약조를 하여 두어야 되는고로 나는 세 곳에 포도 딸 일에 일꾼을 한 九十名 대어주기로 하고 약조기를 만들려는 때에 농주가 약조금 五十元이나 一百元을 나더러 걸라고 한다. 이 약조금은 내가 이십 명이나 三十名을 대마하고 약조하였다 못 대면 이 약조금을 농주가 먹는 것이 당연한 사업상 경위인줄 알고 나는 세 곳 농주에게 一百五十元을 갖다 걸어놓고는 상항(샌프란시스코) 우리 중앙회에 편지를 하였더니 동포가 나를 찾아 많이 나온다. 이 곳에 우리 경찰소 회관에 기숙사를 준비하여 놓고 이분들을 우선 일을 얻어 보낼 때까지 식사와 잔용채를 외상으로 공급한다. 아직은 실과밭에 일이 흔치 못하여 한 농장에 여러 사람을 요구하지 않는 때에 이 모인 사람들을 내가 지금 무슨 큰 일자리를 주선치 못하면 이분들은 이곳 저곳으로 다 헤어져서 이미 포도농장에 근 百명 사람을 대어 주기로 一百五十元 약조금을 걸어 논 이 일이 다 실패될까 염려하고 나는 큰 일자리를 구하느라고 자전거를 타고 사처로 내왕한다. 나는 이러는 동시에 이왕 알던 어떤 백인 친구를 만나서 일자리를 구하는 형편을 말하니 이 친구 나더러 왜 철로 회사에 가서 도십장을 찾아보지 않는가? 한다. 나는 철로일은 생각치 않고 농장일만 구하다가 이 친구의 일러주는 철로일이 구미가 바싹 나서 나는 다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도십장을 찾아갔다. 이 도십장의 사무소는 사람이 들락날락 분주하여 도십장과 말할 기회가 없어 오래 기다려서야 말할 기회를 얻어가지고 철도일에 동양인을 안쓰겠나 물었다.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묻는다. 나는 튼튼한 청년이 한 백 명 가량이 일을 구한다고 하였다. 도십장은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철로일을 할 줄 아는가? 한다. 나는 서슴치 않고 우리나라 사람은 근실히 일 잘하는 사람들이니 물어볼 것 없이 한번 시범하여 보면 알 것이 아닌가 하였다. 도십장은 히죽이 웃으면서 마침 이곳에서 二, 三 마일 밖에 새로 갱을 신설하니 명일로 八十名을 데리고 나의 사무소로 오면 보낼 주선을 하여 준다고 하기로 나는 반갑고 즐거운 마음으로 회관에 와서 여러 동포에게 철로일 얻어 놓은 말을 하니 다 반갑게 알고 명일에 철로역장으로 나갈 준비들을 한다. 지금 얻어가지고 가는 철로일은 이 타운에서 삼 마일 밖인데 짐차에서 먹고 자고 철로 노선을 고칠 것은 고치고, 새로 놓을 것은 새로 놓는 일인데 우리를 관할하는 백인 십장 한 사람이 있고 나는 통변 겸 우리 동포의 일한 시간과 날을 적는 타임 키퍼가 되어서 삽자루 들고 일은 아니하나 그러나 어떤 때에는 우리 동포들이 일하는 시간에 일은 아니하고 삽을 땅에 박고 서서 십장이 오고가는 것도 상관치 않고 나태하게 이야기할 때와 객차가 지나갈 때는 일을 하는 척 해야 되는데 우두커니 서서 객차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십장은 나에게 일을 시키라고 몰아대는 것은 지나가는 객차 속에 철도회사에 큰 사무원이나 도십장(이) 있어서 우리 갱 일꾼들이 일을 안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 십장에게 실책 혹 일자리를 잃게 될까 겁이 나서 나에게 누누이 부탁하는 것이 객차 지날 때에는 일을 부지런히 시키라 하여 나는 어디로 객차가 오는 고동이나 연기가 보이면 객차 옵니다 일들 좀 부지런히 하시오 한다고 어떤 동포는 일을 하는데도 내가 일을 재촉한다고 나를 시비하는 분들도 있고 십장은 내가 일을 시키지 않아서 저같이 객차가 지나갈 때도 삽을 짚고 서서 이야기만 하니 나의 잘못이라고 나를 몰아댄다. 고로 나는 어떤 때는 차라리 삽자루를 들고 일을 하는 것이 편하게 생각한 때가 여러번이 었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내가 이것을 참고 견딘 것은 다름 아니라 약조한 포도일과 대동보국회의 맡은 사명을 달성하여 보려는 희망과 책임을 가지고 십장과 일꾼 둘 사이에서 이 곤란한 것을 참고 견디어서 포도 딸 때까지 지내왔다.우리는 철로일을 그만두고 프레스노 회관으로 들어와서 수일 쉬어 가지고 세 곳 포도농장으로 갈라 나가서 포도 따기를 시작하였는데 어떤 이는 七, 八元 어떤 이는 十元 이상 번다고 다 만족히 생각한다. 나는 이 포도밭에서도 통변 겸 시간을 적는 책임을 맡은 외에 여러분의 소용되는 것을 타운에 들락날락하며 사다주면서 포도밭일을 보살핀다. 이 포도 따는 일은 일공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도급으로 매 목판에 얼마씩 정하여 가지고 빨리 따는 사람은 많이 벌고 적게 따는 사람은 적게 버니 내가 빨리하라고 채근할 필요가 없고 나는 다만 매일 몇 목판씩 누가 딴 것만 책에 적었다. 농주한테 돈을 찾아서 내가 가질 10%를 제하고 내어주며 또 포도를 다 따주면 농주가 나에게 一百元이나 二百元을 주고 또 맡겼던 약조금도 찾게 된다. 이상에 말한 철로일과 포도일은 대개 이러한 것이니 이런 일을 하여보지 못한 동포에게 이런 것을 알리기 위하여 여기 적어 두노라. 이상에 말한 철로일과 포도농장일을 나와 같이 한 이분들은 하와이에 이민으로 와서 근검절종하여 간신히 미주 대륙으로 간신히 선비만 장만하여 가지고 오신 분들이라 우리 대동보국회 중앙회관에서 외상으로 기숙을 하였고 입회금과 대동공보 대금 혹은 특별 의연한 이것들 다 적어만 놓고 나오신 분들이었다. 그동안 철로일 三삭 반과 포도일 한달 반 동안 이 두 가지 일을 필하니 어떤 이는 사, 오백원 어떤 이는 三, 四百元씩 벌었으므로 대동보국회에 적어 놓은 각양 의무금과 기숙비 등을 다 나에게 다 주므로 나는 이 돈을 다 중앙회관으로 들여보내니 중앙회 형편이 훨씬 펴게 되었고 이분들도 수백원씩 수중에 있으니 다른 좋은 일 얻을 때까지 아무 걱정 없이 된 것을 나는 다행히 여긴다. 이곳 경찰장은 송사원 씨인데 이곳의 모든 회무는 송사원 씨에게 다 맡기고 나는 상항(샌프란시스코) 중앙회관으로 들어왔다. 장경 씨와 여러 회원들을 여러 달 만에 다시 만나니 서로 반갑기 한량없었다.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몇 주일 지내는 동안에 중앙회에서 나에게 또 순찰원의 중임을 맡기면서 솔트레이크시티 유타주로 가라고 한다. 이곳은 우리 동포가 수삼백 명이 있어 철도일을 하는데 이 철도일을 주선하는 사람은 공립협회의 안창호 선생 대임 제二六 인물 金成武(김성무) 氏인데 이곳 있는 동포 반수 이상이 공립협회 회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불행히 이때 미국에 경제공황이 일어나서 각양 사업은 저락되고 노동은 극히 귀하여 실업자가 처처이 많아서 정부나 민중이 곤란을 당하게 되는 그 원인이 우리 동포에게도 미쳐서 철로역장에서 일하던 동포 수백 명이 솔트레이크시티로 모여 가지고 한인 여관에서 외상 밥을 먹고들 있는 때였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일을 하러 오지 않고 대동보국회에 사명을 가지고 와서 이곳 동포를 대동보국회 회원을 만들어 가지고 이곳에 지방회를 조직하자는 목적으로 왔으니 공황 중에 있는 동포라도 회원이 되라고 권면을 안 할 수 없었다. 며칠동안에 수십 명 동포가 대동보국회에 입회하고 이곳에 경찰소를 조직하였다. 마침 이곳에서 여관하는 사람은 나와 친분이 있는 강정근 씨와 김순호 양씨인데 이 여관이 즉 우리 경찰소가 되었다. 그러나 공황으로 인하여 회금은 일푼 거두지 못하고 책에 적어만 두었다. 이곳에 마침 세력을 잡고 있는 공립협회 사람들은 이곳에서 혼자 공립협회를 확장하려고 하는 때에 대동보국회 사람 내가 홀출(훌쩍) 와서 활동하는 것이 응당 밉고 또 시기할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나 할 일만 하기로 주장하였다. 이곳에 있는 다수 공립협회 회원의 영수되는 김성무 이치겸 양씨는 장차 독립전쟁을 하기로 준비해야 되겠다고 총포탄을 다량으로 사서 원동으로 보내야 되겠다고 하고 철도역장에서 일하는 동포에게 수삼천 원을 걷어가지고 이치겸이가 원동으로 나가서 종무소식이라고 이곳 동포들이 떠들어대는 바람에 공립협회는 좀 타격을 받게 되는 동시에 우리 대동보국회에는 활동할 기회가 더욱이 좋아져서 회원을 많이 얻게 되었다. 그러나 회금은 한 푼 걷을 수 없는 형편에 이곳에 오래 있어야 소용이 없는 줄로 깨닫고 있는 중에 김창화라는 동포가 콜로라도 푸에블로 석탄광에서 솔트레이크시티 지방에 일 못하는 동포가 많다는 말을 듣고 이분들을 석탄광으로 이민하여 가려고 이곳에 내도하였다. 나는 이 김창화 씨를 만나(서) 탄광 형편을 물었다. 이분의 말이 탄광일이 좀 위험하여 보이나 그러나 월급은 많이 받는다고 하면서 보는 사람마다 가자고 권한다. 그러나 땅 속으로 수십리씩 내려가서 하는 일을 누가 원하느냐고 하면서 다 거절한다. 이 김창화 씨는 실패이다. 이분이 본시 탄광 주인의 경비를 가지고 사람을 데리러 왔다가 따라갈 사람이 없으니 걱정 중에 있다가 나를 보자고 한다. 이 김창화께서 사겸 씨가 사람을 좀 주선하여 줄 수가 없나요 하면서 내가 탄광으로 갈 사람을 몇 십 명만 주선하여 주면 나의 덴버까지 가는 차비를 탄광 주인이 판비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솔트레이크시티 박용만 박재형 계신 덴버로 가려고 하던 차 김에게 이 말을 듣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탄광으로 갈 사람을 주선하여 보마 하고 여러 사람 있는데 찾아가서 석탄광일이 이곳에서 철도일 하는 것보다 갑절 벌 수가 있고 또 이곳에는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일이 아직 없으니 탄광 일을 가는 것이 이곳에서 외상 밥 먹고 노는 것보다 낫다고 우선 신입한 우리 회원에게 권고하면서 나도 같이 간다고 하니 가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수십이 된다. 나는 김창화를 찾아가서 한 三十명 가량 주선하여 놓았으니 언제쯤 떠나려 하오 물으니 수일 후에 떠나자고 한다. 나는 덴버 박용만 씨 계신 덴버로 가지마는 이 탄광이 덴버 근방이므로 이분들과 같이 탄광까지 가서 평생에 구경도 못한 석탄광도 한 번 구경할 겸 또 신입 회원들의 자리 잡는 것도 보고 아직 회원 되지 않은 분들을 우리 회에 입회도 시킬 겸 하여 근 五十명 되는 동포 대중과 같이 떠났다. 우리를 실은 화차는 우렁찬 기적소리를 힘있게 한 번 불고는 움직이기 시작하여 슬근슬근 성 밖에 나와서는 잦은 걸음으로 극저거려서 벌써 망망한 벌판을 지나서 오불고불한 산협으로 들어가서는 화통을 하나 더 달고 산중으로 자꾸 들어가는 노선에 좀 번주군한 곳에 여기저기 집들이 있다. 이것이 아마 석탄 광부들이 사는 마을인가 보다 하였더니 과연 우리가 내릴 석탄광이라고 차부가 고함을 지르고 내려가자 김창화 씨도 우리와 내리자 하여 내려갔다. 때는 오, 육시 가량 되었으니 저녁 먹을 준비를 해야 되겠다. 김창화 씨는 탄광 회사로 가서 광부가 몇 십 명이 왔으니 기숙할 처소를 잡아 달라고 하는 모양인 듯한데 일할 한인들은 벌써 석탄 캐내는 지하 속을 내려들 가보고 와서는 모두 다 겁이나 한다. 그래서 왜들 그러시오 하니 잘못 왔다고들 한다. 지하로 수백 수천 척을 내려가서야 일을 한다니 돈에 아무리 게걸이 들었어도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가지고 왔던 짐짝들을 다시 다 싸가지고 김창화 주선자도 오기 전에 한 사람 두 사람씩 다 슬그머니 다 달아났다. 어떤 사람은 궤짝은 무거워서 버리고 간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달아날 필요도 없고 이곳에서 끝장을 보고 가려고 이틀 동안을 남아있는 두 사람과 있었다. 탄광 회사의 차비로 근 오십 명 사람이 왔다가 하루도 일을 안 하여 주고 다 달아났으니 탄광 회사에서 한 一千元 잘 손해가 났었다. 물론 김창화 씨에게 실책을 돌렸을 것은 사실이다. 우리 남아있던 세 사람도 떠나서 덴버로 갔다. 덴버에 박용만 박재형 두 분이 여관을 하는데 이곳 한인들도 일을 못하고 三, 四十명이 여관에서 외상 밥을 먹고들 있는데 이곳에서 몇 십리 밖에 있던 촌에서 장작일 하는 동포가 수십 명 있다고 하여 나는 이곳을 찾아갔다. 이곳은 삼림이 무성한 곳에 집도 없고 다만 군막을 치고 군막 속에서 기숙하고 지내는 캠프이다. 나 간 날 저녁에 군막 앞에 무덩불(모닥불)을 피우고 수십 명이 모여 앉은 좌석을 향하여 나는 여러분께 드릴 말이 있노라 선언하고는 저는 대동보국회의 사명을 가지고 여러 곳에 계신 동포를 찾아다니면서 우리 대동보국회를 찬성하여 달라는 것이 저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찬성이라는 것은 즉 여러분께서 대동보국회원이 되어 달라는 것이외다. 여러분이 다 대동보국회원이 되신다면 우리의 보국회가 일층 더 커지고 유력하게 될 것입니다. 보국회가 크고 유력할수록 우리의 기울어져가는 국가를 바로잡을 날이 점점 더 가깝게 오는 줄 알고 여러분께서는 우리 보국회에 지금 입회하시는 것이 즉 보국회를 크고 유력하게 하여 망하여 가는 국가를 바로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 말을 마치고는 나는 지필을 가지고 여러분께 보국회원 되시기 원하시는 이는 성명과 연령 본국 주소를 적어달라고 하였다. 이곳에 三十명 동포 계신 데서 二十명이 대동보국회에 입회하기로 허락을 한다. 나는 반가운 중에서 감사한 예를 드리고 그날 밤차를 타고 다시 덴버로 왔었다. 박용만 씨는 이왕에 상면이 없고 이번에 와서 처음 상종하나 별로 다정히 군다. 저는 처음 만나보나 우리 보국회 영수 장경 씨와는 서로 친분이 있는 고로 나에게 이같이 동정을 하는 듯하다. 박용만 씨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우리나라 유신운동 때에 유명한 삼만이라는 가운데 한 사람인데 학식과 국가운동에 수완이 상당히 있으므로 우리의 영수 자격을 가지신 분이다. 이상 말한 삼만이라는 뜻은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 이 세 분을 가리켜 가로대 삼만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세 분이 일찍이 동지가 되어서 유신운동을 유력하게 하다가 이승만 박사와 박용만 씨는 미국으로 오고 정순만 씨는 아령(러시아령)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혁명운동을 하다 한인한테 맞아 죽고 그 몇 해 후에 三一운동의 결과로 상해에 망명정부가 조직된 수년 후 박용만 씨도 원동으로 나가서 군사운동으로 아령(러시아령)과 남북 만주로 다니다가 한인한테 맞아 죽었다. 이 유명하던 삼만 가운데서 한 분이 남아 있다가 최후에 독립 성공하신 이승만 박사 한 분이 남아있어 이 삼만이 같이 하자던 이 독립운동의 결속을 하였다고 할 만하게 되었다. 내가 나의 평생 지내온 역사를 적는 가운데 이 삼만의 과거사를 장황이 적어 놓는 것은 이승만 박사와 박용만 씨 이 두 분이 우리 대동보국회를 열정으로 찬성하심으로써 대동보국회에서 주장하던 대동교의원 기관보에 이 두분의 간곡한 서문을 보내주신 것을 늘 감사히 생각하고 이 두 분을 늘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다. 덴버 박용만 씨 여관에서 한 달여 동안 유하였다. 이 동안에 박용만 씨의 찬성으로 대동보국회 경찰소를 이 여관 내에 설립하였으나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회금은 한 푼 거두지 못하게 되니 이곳에 오래 있어야 소용 없기로 나는 중앙회에 모든 형편을 보고하는 때에 여기서 떠나 시카고로 가서 공부를 하겠으니 이미 맡아 가지고 여기까지 온 순찰원을 사면하기로 청원하였다. 그러나 중앙회에서 나의 사면청원서를 접수치 않고 퇴각하면서 아직 순찰원을 사면 말고 그냥 가지고 있으라는 공함이 내도하였다. 나는 수일 후에 시카고로 떠나가기로 작정을 하고 있는 때에 조지수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조지수는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우리 집 옆에 사는 사람인데 一千九百年에 나와 같이 미국으로 달아났던 동무로 서흥골까지 가서 나의 사촌형님한테 잡혀갔던 좋은 친구를 이와 같이 천만 뜻밖에 만나게 되었으니 피차의 즐거운 것은 말할 수 없다. 나는 수일 후에 시카고로 떠나가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돈 五十元 하나를 주면서 노비하라 한다. 이분은 그동안 철공장에서 일을 근실히 오래하여 여러 백 돈 벌어가지고 와서 나에게 적지않은 五十元을 주는 것이다. 나는 이 돈으로 상항(샌프란시스코) 중국인의 약국집 란당에게 길림삼을 五十元어치 부치라고 하였더니 며칠 후에 五十元어치 홍삼이 왔다. 이것을 가지고 타운타운(마을 마을) 들려서 팔아가지고 시카고를 오고도 남은 돈이 한 一百五十元 가량이 잘되니 공부할 때에 요긴하니 잘 쓰게 되겠다. 나는 시카고에 와 김진사 승제 씨를 만났다. 이분은 식자로 유여하고 글씨를 잘 쓰는 고로 청인들한테 위대(우대)를 받는 분인데 청인의 집에서 숙식을 무료로 하고 지내는 이요 청인을 많이 아는 고로 나를 위하여 청인의 찹수이집 일을 하나 얻어서 준다. 지금 방학때 불원하여 학교는 갈 수 없으니 일이라도 오는 개학 때까지 하여 몇 백元 벌어가지고 가는 것이 필요하기로 청인 찬관일을 얻어갔다. 이곳은 지금 세계적으로 자동차 공창이 많기로 유명한 세인트루이스라는 곳이다. 나는 찬관 일이 처음이 되어 어떤 부분에나 다 서투르다. 그래서 종일 고기 써는 일을 두어 달 하면서 온갖 찹수이와 온갖 양찬 만드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내 생각에 온갖 것을 할 듯하게 생각을 가지고 두어 달 더 일을 하고는 학교 개학 때 되기로 시카고로 와서는 휘튼칼리지에 B반 중학반에 입학하여 한 일년 잘 공부하였다. 나의 항상 소원이 웅변가이었기 때문에 중학과정 가운데 앨로큐션(elocution:웅변술) 과정을 특별히 좋아하였다. 여하간 하기방학이 되어 집 있는 학생은 집으로 가고 친척 있는 학생은 친척을 찾아가지마는 집도 친척도 없는 나는 갈 곳이 특별히 없어 시카고로 와서 우트밍하우스에 방을 하나 잡고 가방 두 개를 방안에 갖다놓고는 우선 시원히 목욕을 하려고 목욕탕에 갔다 오니 가방 두 짝을 무엇이 목욕할 동안에 가져갔다. 이 가방 두 짝에는 나의 온갖 살림이 다 든 것인데 졸지에 누가 가져갔으니 이것이 이른바 피게죽에 탕도라는 말과 같이 나는 어려운 학생인데 변변치 않은 것이나마 내 살림 전부를 다 가져갔으니 나는 거지가 당장에 되었다. 아무리 도적놈이기로 이와 같이 고학하는 학생의 살림 전부를 다 들어갔으니 네가 잘 살 듯하냐 하는 저주를 하는 이것이 도적놈과 인사불상이라는 말과 같으니 이놈을 저주한들 무슨 용처가 있나 아! 잊어버리고 말자는 결단을 하고 방에서 나와서 김진사 승제 선생 계신 청인의 전방을 찾아갔다. 김진사는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 한다. 나도 반가웠다. 이 크나큰 시카고에 한인이라고는 사오 인에 불과한데 다 일을 못하고 어렵게 지내는도다. 나는 작년에 가서 하던 청인의 찬관의 일을 얻었다. 작년에는 고기써는 일을 하였고 금년에는 세컨드 쿡으로 나갔다. 다행히 찬관에서 매니저로 있는 사람의 성이 方氏여서 나와 커즌 사촌이라고 하며 친절히 군다. 하여간 이 세컨드 쿡이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고 어떤 것은 어떻게 해야 될 문세속을 몰라서 곤란히 지내는 가운데서 차차 경력과 수단이 생겨서 용이하게 견뎌나가게 되는 것을 나는 다행히 여기고 갈리기 전에는 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근 삼개월 동안을 지내었다. 추기 개학 때가 왔다. 그러나 나는 학교로 갈 형편이 못된 것은 전체 살림을 도적맞았기 때문에 옷도 신발도 장만을 다시 하여야 학교로 가게 될 형편이므로 한 일년 이곳에서 일 하기로 하였다. 세월은 유수같이 쉼 없이 흘러서 삼백육십오일이라는 긴 끝을 찾아 나왔다. 이것이 즉 내가 작정하고 시작한 일 년된 만기이다. 나는 작정한대로 학교로 다시 가기로 하고 시카고로 와서 수일 유하고 있는 때에 하와이 이민시대에 총무로 있던 안정수 씨를 만나게 되어서 입학할 사를 말하게 되는 때에 안정수 씨께서 자기 공부하는 서북대학에 같이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한다. 자기는 핵홀에서 목사 공부를 하고 나는 아직 중학 二年 급이 대학에 입학할 수 없고 아카데미 대학에 B반 즉 중학과에 입학하였다. 나는 학비를 一百五十元 주고야 공부을 시작하였다. 나는 이 학교에 있을 동안에 매일 안정수 씨한테 가서 나의 공과에 모르는 것을 물어보니 나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안정수 씨는 목사 공부를 그만두고 시카고에 큰 음식점에 스튜어드로 고빙이 되어 가고 나 혼자 이 학교에서 있게 되었다. 안정수 씨는 미미교인으로 미미교에 부속한 이 서북대학에서 목사 공부를 하다가 그만둔 이유는 에디 부인이 보스턴에서 창설한 크리스찬사이언스라는 신교의 전도를 받고 감화가 되었는데 이 교회에 유력한 교도 에버핫이라는 부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에 일을 얻어 간것이었다. 나도 이 학교에서 반 학기 동안을 지나서 성탄절 방학 때에 시카고로 들어와서 안정수 씨 있는 곳을 찾아가 만나보는 때에 일을 하라 한다. 그러나 나는 이왕 하던 청인의 찬관 일을 원하므로 안씨가 주선하여 주는 일은 착수치 않고 청인 일을 얻어가지고 갔다. 작년에는 세컨드 쿡으로 갔었고 이번에 퍼스트 쿡으로 갔다. 주방에 일하는 청인들이 나를 보고 희롱하는 청언으로 거년 시에는 세컨드 쿡으로 왔다 금에는 퍼스트 쿡으로 왔으니 이 다음에는 매니저가 된다고 힙스맛시라고 한다. 월급 때가 왔다. 빨간 봉투에 一百五十元 지전을 넣고 방선생이라고 봉투에 쓴 것을 매니저가 갖다 준다. 나에게 뿐 아니라 모든 일꾼에게 다 이같이 하는 것인데 서로 얼마씩 받는 것을 모르게 되는데 청인 쿡이 여섯이요 양찬하는 쿡 셋인데 청인 쿡들은 영어를 몰라서 저희 쓸 물건을 저희가 주문을 못하고 내가 청찬 만드는 물건까지 주문하게 되므로 청찬 쿡보다 二十五元씩을 더 받는 이것을 청인들이 알고 시기가 여간이 아니고 나를 이왕보다 미워한다. 그러나 이 찬관원 주인이 나를 여기 보내었으니 나의 일을 빼앗을 사람은 없으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한동안 잘 지내었다. 불행히 나는 병이 나서 일을 더 할 수 없이 되었다. 병인즉 이질병을 만나서 무한히 고통을 하다가 버팔로로 가서 병원으로 가서 한 달여간 치료하였으나 병을 거근치 못하고 시카고로 와서 장인명 씨가 하는 여관에서 치료하고 있는 때에 장건상 이희경 두 사람이 와서 이 여관을 없이 하기를 주장한다. 그 무슨 이유를 가지고 이 집을 없이 하려느냐고 나는 물었다. 장, 이 양인의 대답은 이 집이 있기 때문에 시카고 한인이 일도 안가고 외상 밥과 잠을 자고는 청인의 잡기판과 기생의 집에만 다니게 되니 이 집을 없이 하여 이런 사람들을 부지할 곳을 없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 집 창립한 역사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일찍 이곳에 와서 내가 五十元을 만츰(먼저) 내놓고 한인들한테 공정연조를 거둬 가지고 가구를 장만하여 놓고 상당한 사람을 맡기어 기숙 범절을 주장하게 하던 것인데 외상으로 자고 먹는 사람이 많아서 부지하기 곤란하여 시카고 전체 한인이 모이어 회의한 결과 이 집을 장인명 씨에게 전권을 주어서 확장하여 가지고 벌어먹으라고 내어맡긴 것이다. 장건상 이희경은 국민회 사람으로 이 집을 세울 그때에는 이 지방에 오지도 않았고 또 이 집에 돈 한 푼 낸 일도 없고 성외에 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인데 이 집을 없이 하고 안하는 것을 말할 아무 관계가 없는 이 사람들이 이 집을 없이 한다는 주장을 유독 내가 많이 강경히 반대하였다. 이 집을 주장하는 장인명 씨는 대동보국회원이요 또 나의 친구인 까닭에 나는 이 일에 극히 반대하기를 주장하고 나가 이 집 없이 한다는 장, 이 두 사람은 나를 원수같이 볼 것은 사실이다. 집 없이 한다는 것이 한 문제가 되어서 시카고 한인 전체 공정회를 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전체 한인이 모인 공동회에서 오늘 모인 것은 이 집 없이 한다는 사건으로 모였다는 취지를 나는 설명을 하고 앉은 뒤에 장건상이가 일어나서 이 집은 잡기와 기생집에만 다니는 사람들의 구혈이니 없이 하여야 된다는 말을 하는데 대하여 모인 청중들은 거의 다 불만불평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 일어나서 장건상의 주장을 공격한다. 이 모인 공정회는 잠시 동안 수라장이 되었다가 최후에는 이 집을 그냥 두든지 없이 한다든지 거수로 가부를 결정하기로 하여서 집을 그냥 두자는 거수가 많아서 장건상의 주장이 실패를 당하고 나서도 일행 집을 없이 한다고 야단을 부리면서 미국 법정에 가서 재판을 하자고 한다. 장건상과 이희경은 자기 편을 돕는 사람이 없으므로 시카고 한인 가운데 불량한 한인 몇을 데리고 다니면서 술과 찹수를 사주면서 이 사람들을 은근 끌었다. 김관칠 김용오 권시중 김창오 이 네 사람은 주색잡기나 하고 우리 사회나 국가운동에 돈 한 푼 내지 않고 난봉이나 부리는 이 사람들을 사귀어 가지고 자기의 불철저한 주장을 이겨보려고 수차 공정회를 열어가지고 회의할 때에 이 불량한 네 사람은 육혈포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한 번은 공정회 석상에서 내가 오늘 다시 모인 취지를 설명하는 때에 이희경이가 나에게 대하여 네가 무엇이기에 번번이 나서서 우리의 주장을 반대하는가 하기로 나는 회장 규칙이요 말하는 때에 이희경이가 규칙은 무슨 규칙하기로 옳다 규칙이 없다고 한즉 나도 나의 혈기를 안 쓸 수 없다 하고 주먹으로 이희경의 볼편을 한 번 본때 있게 냅다 질러서 당장에 꺼꾸러진다. 좌중은 다 (와스스) 일어나서 싸움을 말리느라고 야단법석이 일어나니 모이었던 공정회는 아무 결과 없이 파회하고 말았다. 수일 후에 장건상 이희경이가 미국 법정에 재판을 걸어서 우리 편에서 피고자 몇 사람이 와야 된다 하기로 나는 불가불 가야만 될 것은 장건상 주장에 처음부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의 대변자가 되기 때문에 이일과 장인명과 같이 재판정에 가서 우리는 이 재판을 이기고 나왔으나 율사비를 一百元 주었으니 무슨 이익이 있는가 이 미친놈 장건상 이희경 이 두 놈 때문에 돈 없애고 외국인에게 망신만 하고 말았다.이러한 이 미친놈들이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된 뒤에 원동으로들 게나가서는 외무차장으로 있어서 미주 동포가 보내주는 그 돈으로 뱃지들을 붙이고 있다가 이번 해방된 기회를 이용하여 가지고 본국에게 들어가서는 또 이 박사의 모든 정략을 반대하다가 민주공화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공산당 철벽 뒤에 숨어 있는지 근일에는 이 장건상이 찍소리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 대동보국회 형편이 어찌된 모양인가? 나는 三年前에 상항(샌프란시스코) 중앙회관을 떠나 솔트레이크씨티로 석탄광으로 덴버 이 세 곳을 거쳐서 회원도 三, 四十名을 얻고 두 곳에 경찰소도 세웠다. 그러나 경제공황으로 회금 일 푼을 거두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사회에 도움을 주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영어자라도 배우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시카고를 온 것이다. 그동안 하와이에서도 동포가 안 오고 불과 한 一千 명쯤 되는 한인 가운데 두 단체가 일어나서 우리의 실력과 인력이 미약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연고로 이 두 단체 당국자들은 대동보국회와 국민회를 합하자고 말이 오고 가는 때이었다. 마침내 장, 전 양 의사가 스티븐스를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총살한 사건이 일어나서 두 회를 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서 두 회 당국이 합하기로 상약된 모양인지 장경 씨와 백일구 문양목 이 중앙회 간부 세 분이 나에게 이 두 회가 합동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었기로 나는 여기 대하여 찬성도 반대도 안하고 다만 바라는 것은 두 회가 공정한 마음으로 두 회에 이왕 회명을 없이하고 새로 회명을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히 지어가지고 합하기만 바란다고 이 세 분에게 답장하고 며칠 있노라니 합동되었다는 기별이 다시 왔다. 나는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합한다는데 대하여 반대치 않고 공정히 합한다면 어느 때던지 찬성한다고 우리 중앙회 당국에게 이미 선언한 것인데 오늘 합동하였다는 공함을 볼 것 같으면 내가 원하던 바와는 대상부동하게 틀릴 뿐만 아니라 대동보국회에 대치욕을 당하게 되는 합동이라고 할 것은 이 두 회가 합한 새 회명만 보더라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합동된 새 회명은 大韓人國民會라 하였으니 합하였으나 안 합하였으나 국민회라는 그 명사는 그대로 있고 大同保國會는 은연히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런 합동에 대하여 국민회 회원들이야 응당 만족하였을 것이나 보국회 회원들은 불평을 가지게 될 것은 사실인즉 이런 불공평한 합이 미주 우리사회에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이것은 장래에 반동력의 씨를 심어 놓은 것이라고 여기 말하여 두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를 정말로 진흥시키자고 할 것 같으면 사회의 당사자들이 공평과 정직을 주장해야 되겠는데 여기에서 반하여 간교한 수단으로 남의 것을 정복하여 내 것을 만들려는 이런 불공정을 주장하는 사회는 가장 영리하고 수단이 능한 듯하나 이런 영리와 수단은 오래지 않아서 세상에 드러나서 이런 사회에 큰 영향을 줄 것은 사실이다. 국민회는 자래로 미주 한인사회를 혼자서 세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덮어놓고 반대이다. 대동보국회는 간교한 수단으로 합병을 하여 치우고 상해 신정부 때에 이 정부를 개조를 해야 된다고 떠들었고 또 구미위원부에 세력을 잡으려다가 되지 않으니 위원부를 개조해야 된다고 재미 전체 한인의 대회를 불렀다. 그러나 동지회에서는 참석치도 않고 여기 대하여 불간섭하게 되니 위원부 개조 경영도 아주 실패하고 말았다. 또 해방될 임시하여 국민회는 미·포(미국·하와이) 한인연합회를 불렀으나 동지회와 부인회에서는 응치 않는고로 국민회 소속 단체 몇이 모여가지고 연합회라 지칭하고 대표자를 국민회 가운데서 김호 김원용 김병연 제씨를 뽑아서 해방된 대한에 파송하였다. 이 사람들은 내지에 가서 무엇을 하고들 있었는가? 다른 것이 아니고 이 박사가 하는 운동을 방해시켜 가지고 국민회에서 신대한의 권리와 세력을 잡으려다가 다 실패하고 미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금은 이 박사의 정부가 연합국의 정식 승인을 얻어 완전한 민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오늘날에 와서는 이것이 남북통일 정부가 아니고 다만 남방 단독정부인즉 우리 국민회에서는 이 단독정부와는 아무 관계를 안 한다고 공개 선언하고는 지금 영공사가 미국에 와서 미·포(미국·하와이) 동포를 보호하는 이것도 받기를 원치 않으니 장차 국민회가 어찌 되려는가? 이것은 자기들의 고려할 문제인즉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대동보국회 영수 장경 선생은 보국회와 국민회가 합한 후에 나를 만나려고 시카고로 오셨다. 나는 참 반가웠다. 장 선생은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고 또 자기의 오른팔과 같다고 서신 상에 누누이 말씀하신 것을 나는 믿고 이분을 사회방면에서는 영수로 숭배하고 사삿 교제로는 친형님 같이 대접하였다. 장 선생께서 지금 시카고에 오신 것은 수년 동안 온갖 정력을 들이던 사회운동은 하와이에서 건너오던 동포들이 오지 않고 재정상 곤란으로 회무를 발전시킬 수 없는 중에서 장인환 전명운 양 의사의 사건이 발생되어 서로 합동하자는 교섭이 빈번하게 되는 때에 합동한 회명이 좀 불만하나 장, 전 양 의사의 대사건을 순조로이 치러 나가자면 두 회가 합하는 것이 옳다 하시고 합하신 것이 살신성인과 방불하였도다. 오늘날 행세하는 大韓人國民會라고 하는 것은 大字는 大同保國會을 대표한 大字라고 하고 國民會라는 것은 그냥 둔 것을 불공정하게 되었다고 나는 불평을 가지고 이 두 회가 합한 후에는 이 회에 대한 모든 관계를 끊고 시카고에서 후일을 예비하기위하여 유학을 경영하던 때에 장 선생을 다시 만나서 이곳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장 선생께서 시카고에 주택을 하나 얻어놓고 부인과 상항(샌프란시스코) 교의원에서 길러낸 딸 코라를 데려다 살림을 하신다. 나와 유홍도 두 사람은 장 선생 댁에 같이 있어 한 집안 같이 지내게 되었다. 따님 코라는 그때 十四세 가량 되어 중학교를 시작하고 나는 아직 학교를 못가고 있는데 장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우리가 돈을 좀 벌어야 장래에 국가운동을 실제로 할 기회를 만들 터이니 우선 몇 해 동안 돈 벌기로 주의하자고 자기는 삼을 몇 백원어치 사가지고 남양군도의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신다 하기로 나는 중미 쿠바로 삼을 사가지고 가겠다고 서로 언약을 하고 내가 만츰(먼저) 쿠바로 떠나갔다. 그 후에 장 선생은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신 뒤에 유홍도는 장 선생 댁을 보살피고 있다.나는 쿠바국 도성 하바나에 내렸다. 하바나 도성은 그리 크지는 못하나 화려하게 설비하여 놓은 것이 서반아(스페인)의 제도와 풍속 습관이 아직 있고 서반아(스페인) 언어를 사용한다. 이 쿠바국은 수백년 전에 서반아(스페인)에게 정복을 당하여 동화가 된 나라로서 五十年 前에 미·서(미국·스페인)전쟁에 미국이 승전한 결과로서 자주 독립한 나라이요 이 나라 인종은 세 가지 인종이 있는데 본토종은 인디언 홍인이요 또 혼합 인종이 있는데 서반아(스페인) 인종과 흑인과 혼합한 것이며 이외에 순전한 서반아(스페인) 인종이 있는데 이 서반아(스페인) 사람들이 정부에 모든 권리와 또 민간에도 중요기관은 다 서반아(스페인) 사람이 잡고 앉아서 지배한다. 이 나라에 이민으로 온 청인이 여러 만 명 되어 어디를 가든지 청인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청인이 이같이 많기 때문에 너도나도 삼을 청인한테 팔려고 온 것이다. 하여간 나는 쿠바에 온 것은 큰 운수가 열리었다고 혼자 생각하였다. 삼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청인들이 환영하고 다투어 사니 벌써 수천원 어치를 팔았다. 하바나에서 떠나서 타운 타운에 들러서 샌디에고라는 항구까지 가서는 배를 타고 영국 속지 제미가(자메이카)라는 나라 도성 킹스턴에 가 내렸다. 이곳 토인은 전부가 다 흑인이요 생활은 극히 빈궁하여 발에 신 신은 사람을 볼 수 없고 다 맨발로 다니는 것뿐이요 토종 흑인들은 무엇을 하여 생활을 하는지 일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없고 사업하는 흑인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곳에 이민으로 온 청인들의 조그만큼씩한 장사바치가 사처에 있어가지고 토인의 식용품 일용품을 파는 것을 나는 가는 곳마다 찾아볼 수 있다 들은즉 이같이 빈궁한 나라에 와서 푼 전 장사를 하여 큰 자본가 된 사람이 여기도 여럿이라고 하니 대체 청인은 어디를 가든지 근실 근검하여 생활이 유족하여 잘 지내는 이것 한 가지는 우리도 청인한테 배우는 것이 옳다고 나는 스스로 자인함을 마지않았다. 이곳에 수삭 유하면서 삼을 좀 팔려고 주선하여 보았으나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간신이 내왕경비나 얻어가지고 다시 쿠바국으로 와 수삭 동안 삼을 팔다가 하바나 도성에서 배를 타고 뉴욕항에 와 내렸다. 이번 쿠바 와서 삼을 판 도합이 한 六千元 가량이 잘 되었으나 일 년 동안 돌아다닌 경비가 二千元이 잘 된 고로 뉴욕까지 가지고 온 돈이 한 四千元에서 더 되지 않고 삼은 아직 수백원 어치가 남아있다. 뉴욕 있을 동안에 전명운 씨 댁에서 한 주일 동안 유하는 때 방화중 목사를 만났는데 이 방화중 목사는 뉴욕에 와서 수중에 무일푼하여 고생이 막심하다고 하면서 나에게 남아있는 삼을 다 외상으로 주면 한 주일 내에 팔아서 삼 값을 갚겠다고 하기로 나는 방목사의 말을 믿고 수백원 어치가 잘 되는 것을 전부 다 주고 一百元만 달라고 주었는데 이 삼을 가지고 보스턴에 가서 여러 백원 어치를 팔았다는 소식이 오나 방 목사는 나에게 삼 값을 갚지 않는다. 나는 이 사건으로 수차 편지하였으나 회답도 없으니 나는 더 기달리지 않고 시카고로 오고 말았으니 이 돈 百元은 아무 생광없이 방화중 목사의 잡기와 외도에 쓰게 도와주고 말았다. 방화중이 목사라기에 보통 사람보다 신용이 있을까하고 이 삼을 외상으로 준 것인데 이 목사님의 속은 음탕하고 부잡하여서 한인의 눈앞에서는 목사인제 우리 사회에 주장자같이 행동을 하다가 한인 없는 외딴 곳에 가서는 청인의 잡기판에서 노름하기와 기생집에 다니기와 또 하와이 한인 목사로 고빙되어 나가서는 예배 보러오는 얌전한 부녀를 예배당 뒤에서 음란한 행동을 하다가 교인들한테 쫓겨나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사교회에 얼씬 못하고 죽은 목숨으로 지내다 늙어서 일도 할 수 없이 되니 한인 양로원에 가서 구구이 여년을 마치었으니 이것은 자기의 온갖 죄의 값이라고 안할 수 없다. 뉴욕에서 시카고로 오는 길에 에핑햄에 있는 비셀칼리지를 한 번 심방하고 싶어서 내렸다. 이곳은 조그마한 타운인데 이 학교가 있다. 미스터 비셀은 즉 이 학교 설립자요 또 교장으로 있다. 나는 이 분을 찾아가서 면회하기를 청하고 한참 있노라니 자기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하기에 들어갔다. 미국 사람이 찾아간 사람에게 점잖은 태도로 하는 말이 What can I do for you? 라 한다. 이 말은 즉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도와드리리까라 한다. 예 저는 당신의 미술학교가 유명하다기로 이리로 지나가는 길에 한번 구경하고 가려고 일부러 내려서 찾아왔습니다. 예 아직까지는 미국에 이런 미술학교로는 이 학교 하나밖에 없지요 하면서 나를 데리고 모든 부분을 실제로 보게 구경시켜 준다. 이 미술학교는 포토앤그래픽을 가르치는데 이 미술이 상공업을 발달시키는 능력과 미술적 방법을 가졌다 할 것은 이 세상 인류사회에서 먹고 입고 신고 온갖 쓰는 작은 장기로부터 큰 기계와 집이고 공원이고 산하의 경치를 다 본질대로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상에서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은 꼭 그대로 만들어 내어 신문 잡지에 천만장이라도 박아내서 광고를 널리 하여 사람이 모르는 물건을 팔 수도 있게 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 말할 것 같으면 미국의 유명한 통신 매매상회 씨어쓰오토벅 회사 카탈로그를 볼 것 같으면 천만종류의 물건을 진경으로 사진을 박아놓고 전국적 세계적으로 이 책에 있는 물건을 살 수 있고 팔 수도 있는 것이 즉 이 미술이 만들어 쓴 것이요 또 신문 잡지에서의 세계에 유명한 사람의 언어 동작의 보도를 받고는 즉각으로 이런 사람의 사진을 신문 잡지에 판각하여 공중에 나오는 것이 다 이 미술의 능력과 방법으로 된다. 이 미술은 무엇이고 눈으로 보는 것을 사진을 먼저 박아가지고 이것을 화학으로 새겨 내는 것인데 신기한 방법과 기기묘묘한 생각에서 이 미술이 발명되어 농상공업을 환연하게 발전시키는 미술인 줄 알고 태서각국에서 출판하는 신문 잡지를 볼 것 같으면 이 미술로 박아낸 사진판이 매장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없는 데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신발명 미술을 아직 믿지 못한 동양의 신문 잡지를 볼 것 같으면 사진판을 박아낸 것을 찾아보기가 힘이 들 뿐 아니라 무슨 시체 옷 광고 같은 것을 할 때에 이 미술이 아니고는 그 옷의 맵시있는 모양 그 천의 호불호혹 색깔을 모르고 살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을 이 미술을 이용하여 판을 박은 광고는 분명히 그 본질을 박았기 때문에 모양과 색깔과 무슨 시체인지 그 박아 논 그림을 친히 보기 때문에 사서 입을 구미가 바싹나게 만드는 것을 바로 말하자면 좋은 음식을 소반에 담아놓아 여기에서 김이 문문(풀풀) 나고 호(희)미한 냄새가 코를 지리게 되면 누구나 이 음식에 구미가 동하여 한 번 맛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사람 사람에게 있으리라고 믿는 것과 같이 무슨 물건이든지 아름답게 판을 박아 낼 것 같으면 이것을 보는 사람에게 살 의사와 취미를 주게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나는 이 학교를 심방하고 시카고로 오려하는 때에 이 학교장 비셀 씨가 나를 대하여 이 미술공부를 하라고 권고하면서 이 학교 마치면 곧 일을 얻어 보낸다 하며 월급은 매일 八시간(時) 동안이요 한 주일에 五日만 하고 七十五元을 받는다 하며 공부 마치기가 바빠서 큰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데려간다 하면서 꼭 자기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권고를 한다. 나의 생각에도 월급과 시간도 길지 않으니 공부할 의사가 슬그머니 나서 시카고를 갔다가 다시 와서 작정하겠다고 말을 하고는 떠났다. 장경 선생은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삼을 잘 파신다는 편지는 두어 번 받았으나 아직 오시지 않았고 장부인과 딸 코라만 계신 곳으로 짐짝을 가지고 내 집 찾아들어 가듯 하였다. 장 부인과 코라는 퍽 반가와 한다. 유홍도는 일도 안가고 아직 장 부인 댁에서 지내고 있다가 나를 보고 반가운 중에 저는 일 년 동안 지내온 경과사항을 말하고 나도 삼상으로 돌아다니던 모든 격력담(경력담)을 기울여 놓았다. 나는 에핑햄 미술학교로 갈까 말까하고 있는 것은 나의 목적이 대학교를 마쳐 가지고 동포 사회에서 근실한 일꾼이 되자던 것을 그만두고 미술학교로 가서 개인 생활에 유족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혼자 말하고는 아직 작정을 못하고 있다. 하루는 이 학교 교장의 편지가 왔다. 읽어본즉 나를 입학하라고 간곡히 권면한 사연이 아주 점잖고도 정답다. 나는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을 여기저기 쓰게 되니 무엇이든지 속히 작정을 해야만 이 수중에 남아 있는 한 三千元 잘 되는 것을 나의 장래를 위하여 잘 써야 되겠다. 고로 생각다 못하여 이 미술학교로 가기로 작정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에핑햄으로 떠나갔다. 교장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입학할 것을 다 수속하여 가지고는 교장이 주선하여 주는 방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이튿날 개학 시에 학교 들어가서 미술에 대한 랙추어 하는 말을 듣고는 공부하는 반에 들어가서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하면서 하루를 지내었다. 이 학교의 학생은 한 삼백 명 잘 되는데 기숙사에서 먹고 자는 경비가 매 주일 十元이요 학비가 일 년 二百元이요 또 연습하는 동판과 연판 또 여러 가지 케미컬 화학에 관한 모든 것과 종이와 온갖 것을 다 가지고야 이 공부를 하게 되는 고로 입학하는 날 근 일백원 어치 물건을 샀었다. 이 공부는 물재를 많이 사서 연습을 많이 하여야 이 미술에 성적이 양호하다고 하기로 나는 다른 학생들 보다 물재를 많이 가지고 연습을 많이 한 고로 이태 동안에 졸업장을 맡아 가지고 나왔으나 어떤 학생들은 연습을 많이 못하고 三, 四년에도 못 마치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여간 나는 이태 동안에 이것을 마쳐가지고 시카고로 들어올 때에 마음이 무한이 즐거웠었다. 장 선생께서는 남양에서 삼상에 재미를 많이 보시고 미주로 오신 때이다. 피차에 반갑게 다시 상봉하여 장래 경영을 하고 있는 때인데 장 선생께서는 가족을 데리고 상해로 나가신다고 하면서 나도 장차 나오라 하신다. 정말로 장 선생은 떠나가신다. 나와 유홍도는 이 좋은 동지요 친구인 장 선생을 이별하고 얼마 동안은 심히 섭섭하였다. 장 선생은 상해로 나가서 그곳에 식구를 정돈하여 놓고는 중미성쇠 출판사에 나를 위하여 일을 얻어놓고 나오라 하신다. 그러나 나는 동양으로 아직 나갈 생각이 없고 이곳에 좀 더 있을 생각으로 장 선생의 주선하여 주시는 것을 듣지 않고 미국에 있기로 하였다. 나는 에핑햄 재학 때에 가주(캘리포니아) 삭도(새크라멘토)에 있는 동지 김홍균 씨가 나를 장가를 가라고 누차 권하는 편지가 연속 내도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시작한 공부를 마치기 전에는 장가갈 생각이 없어 지금은 장가갈 문제는 생각할 여력과 여가도 없으니 나를 권하지 말고 김형이나 좋은 혼처가 있다면 먼저 장가를 가라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三十六年 前에 하와이 이민으로 온 동포 가운데서 소위 사진결혼이라는 풍기가 하와이에서 일어나서 미주 대륙에게까지 이 풍기가 성행되어 홀아비로 십여 년간 고적한 생활로 지내던 동포들은 사진혼이라는 소문을 듣고 가정생활에 뜻이 있는 동포들은 이럭저럭 주선할 길을 얻어서 벌써 몇 분 여자가 사진결혼하여 가지고 내지로부터 미주에 왔다. 이 선참으로 온 여자는 양주은 씨 부인과 김병규 씨 부인 김홍균 씨 부인 이분들인데 상항(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남편 될 사람을 만나 볼 때에 만족한 여자도 있고 불만한 여자도 있었다. 만족한 여자는 다행히 사진만 보고 찾아온 사람이 보기에 괜찮고 나이도 많지 않게 보이니 만족하였을 것이나 불만을 가진 여자는 사진만 보고 찾아 온 남편 될 사람을 대할 때에 나이도 많아 보이고 얼굴도 사진과는 단단히 틀리니 잘못 찾아왔다는 후회로 불만이 생각하고 혼례를 하느니 안하느니 한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최후에는 다 혼례를 하고 아들 딸 낳고 잘들 사니 다행이라고 하겠다. 하와이 동포 사진혼인의 대하여 별의별 말이 돈다. 어떤 사람은 나이 많으니 나이를 줄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얼굴 못나서 남의 사진을 빌려서 자기 사진이라고 여자한테 보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양서부지하여 결혼하려는 여자에게 친필로 쓸 수 없는 고로 유식한 동포의 손을 빌려서 연애적 편지를 여자가 결혼하기를 허락할 때까지 여자를 속여서 데려온 것들이다. 이러한 형편을 알지 못하고 찾아온 여자들은 다 우리나라 교회방면 학교방면에서 소학 중학을 다 마치고 온 여자들인데 결혼하려고 막상 찾아와 본즉 나이도 틀리고 얼굴도 사진보다 다르고 학식도 자본도 있는 줄 알고 불원철리에 태평양을 건너와 본즉 상상하고 온 희망이 절망되어 낙심 기절한 여자도 있고 결혼을 안 한다고 떠들어댄 여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종말에는 다 화합하여 성혼하여 자녀를 생산하면서 잘들 사니 우리 외양에 나온 한인전도에 다행이라고 안할 수 없다. 이같이 사진혼인의 풍기가 미·포(미국·하와이) 동포사회에 성행되는 때에 유홍도 씨에게 편지 한 장이 왔다. 이 편지는 북간도 용정에 있는 장로교 목사 김내범 씨의 편지인데 그곳에 李萬玉(이만옥)氏의 딸 이살로매 양을 미국에 있는 좋은 청년에게 소개하여 보라고 유홍도 씨한테 편지가 왔었다고 하면서 나를 권고한다. 유홍도 씨는 이살로매 양을 어렸을 때에 원산교회에서 잘 알게 되었고 李萬玉(이만옥) 씨는 물론 친하게 알고 또 이 여자를 소개하는 김내범 목사는 년전에 유홍도 씨와 같이 한 이민 배를 타고 하와이 사탕농장에 같이 있다가 김 목사는 북간도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유홍도 씨는 大同敎育會 때부터 오늘까지 한 동지 친구로 보통하게 지내게 되는 때에 나를 이살로매 양에게 약혼하라고 여러 번 권면한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서 장가가는 것을 그리 촉망을 가지지 않은 고로 선뜻 작정을 안하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김내범 목사가 이살로매 양의 사진을 유홍도 씨에게 보내었다. 유씨는 사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라고 하기에 받아들고 보았다. 피차의 연분인지 이왕에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여자의 사진을 처음으로 대할 때에 어쩐지 이왕 알던 사람과 같이 나의 전신에 실려있던 사랑 진정에 사랑이 이 여자에게 쏠린다. 이것을 영어로 로맨스라고 할런지 나는 이런 여성에 대한 로맨스를 이왕에 자아내본 적이 없었으니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을 알았든 몰랐든 간에 이것은 인성의 자연적 동기이므로 나에게 적합한 여성을 대할 때에 이 로맨스 즉 연애가 생기는 것은 천연적에서 일어나는 것이 누가 막을 수도 없는 것으로 깨달았다. 이러한 정세를 가진 나는 이살로매 양과 약혼하기로 작정하고 유홍도 씨한테 허락을 하였다. 유홍도 씨는 즉시 김내범 목사에게 편지를 써놓고 나의 사진 한 장을 동봉하여 부쳤다.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나의 사진을 이 여자가 받아보고 만족하여 나와 약혼을 하겠는지 이런 권력은 나에게 있지 않고 오직 이 여자에게만 있다고 상상되니 이 사진 혼인이 꼭 되리라고 믿을 수 없다. 하여간 나는 편지 한 장을 감히 써서 이살로매 양에게 부치고 나의 희망하는 대로 회답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세월은 여루하여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지나가서 편지 올 기한이 되었다. 지금 같으면 비행 우편으로 일주일이면 편지가 북간도에 넉넉히 갈 수가 있지마는 그때는 비행 우편이 아직 발달이 못 되어서 다만 화륜선으로 우체수(우편물)를 실어다 분전하게 되는 시일이 근 일삭 가량이 잘 되는 고로 본국에 편지를 하고 이 답장을 보려면 두 달 동안을 잘 기다려야 되는 때이어서 이살로매 양의 회답을 두 달을 잘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동양으로부터 편지 한 장이 왔는데 이것을 개봉하기 전에 이 편지는 분명히 이살로매 양에게서 온 것이 분명하구나 하고 개봉하여 사연을 읽어보니 꿈에도 보지 못한 나의 사진과 나의 편지 한 장을 보고 나와 약혼할 것을 흔연히 허락하였다. 나는 이러한 편지를 받고 반갑고 즐거운 것을 다 형언하여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지금은 이 여자를 북간도에서 상해로 나오게 하여 가지고 미주로 데려오는 것이 나의 책임이므로 나는 북간도에서 상해로 나올 노비를 부치고 상해에 계신 장 선생 댁으로 인도하였다. 나와 약혼한 이살로매 양은 혼자서 길을 떠날 수 없어서 자기 오라버니 준필 씨와 같이 청차를 타고 위험한 길을 무한한 고생을 하면서 상해 장경 씨 댁을 찾아와서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반가운 중에라도 애처로운 정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젊은 여자가 머나먼 험한 길에 여러 날 청차를 타고 상해까지 찾아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 또 이것이 오직 나 때문이다 하고 나는 더욱이 애처로운 정세가 일어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이곳까지 무사히 온 것만은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신 은혜라고 하나님에게 감사를 올리었다. 장경 선생과 장 부인 또 코라, 헬렌 두 따님과 피터와 애거 두 아들이 다 나와 약혼하고 온 여자와 처남될 사람에게 다정히 대접하는 것은 옛날 동지요 친구가 되어서 고락을 같이 한 그 의분으로라도 안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나는 시카고에 있는데 오마하에서 찬관업 하는 고성태라는 동포가 그 찬관을 부지하여 나가기 불능한즉 유홍도 씨가 와서 도와주기를 구청하였다. 그러나 유홍도 씨는 나더러 가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오마하로 가서 그분들 하는 사업을 수일 구경하였는데 사업은 잘되는 자리를 가지고 할 줄들 몰라서 빚을 잔뜩 걸머지고 빚단련에 견딜 수 없이 된 형편인 것이 사실이다. 이 찬관은 고성태의 찬관만이 아니요 학생 사, 오인이 합자하여 차려놓은 찬관인데 고성태 씨는 매니저였었다. 이분들이 나와 동사를 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자본이 없으니 동사를 할 수 없다고 하니 자본이 없어도 동사를 하여 달라고 간청하기로 허락을 하고 나의 의견대로 좀 개량하여야 되겠다 하니 마음대로 개량하라고 허락한다. 이 찬관 전방은 크고 좋은 집인데 윗층은 방이 없고 다드 평창한 통방이다. 이 사업에 첫 정책은 경비를 줄여야 부지하여 가지 지금 경비를 그냥 두고는 누구든지 부지하여 가기가 힘들다고 하겠다. 이 사업의 동사인이 四人이요 또 나까지 하면 五人이다. 이 五人이 여관에서 방을 매일 매인 이 一元씩을 주고 자니 매일 五元이요 한달 一百五十元이다. 이것을 무슨 모양으로든지 없이 해야만 될 줄로 나는 알고 목수를 불러다 빈 윗층에 우리가 잘 방 다섯 칸을 초사로 꾸며 놓고 우리 다섯 사람이 자게 만들어 놓았다. 둘째로 할 정책은 이 집세가 매월 一百五十元이 많아 보이니 집주인을 잘 교섭하면 五十元 하나를 감함직 하기로 집주인을 찾아가서 五十元만 감하여 달라고 사정을 하나 안 된다고 내버틴다. 나는 다시 감하여 달라고 사정을 이렇게 하였다. 이 찬을 시작한 사람들은 공부하는 외국 학생들인데 학비나 조금씩 벌어가지고 대학교에 임하여 보려고 푼푼이 모아 가지고 이 찬관 시작한 것인데 경비가 많아서 돈을 남길 수 없는 것보다도 이 사업을 부지하여 가기가 곤란한즉 五十元만 감하여 주면 큰 도움이 되겠다고 사정에 우(又) 사정하였다. 집주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허락을 한다. 나는 감사한 예를 하고 와서 동사인들한테 집세 五十元 감한 것을 말하니 일반이 다 대희한다. 아직도 한 가지 정책 있는데 이것은 일꾼 상 심부름하는 여자가 밤낮 여섯을 넷으로 줄일 수 있어 보인다. 이 여자들의 월급은 매 주일 十五元 씩인즉 여자 둘을 줄인다면 매주일 三十元이요 한달에 一百三十元이다. 이상에 말한 방세 一百五十元 집세 감한 것 五十元 일꾼 둘 줄이는데 一百三十元 이 삼종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얻는 이익이 매월 三百三十元이 즉 매달 지출하는 경비 총액에서 줄었으므로 이것을 이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워낙 빚을 많이 걸머지고 여러 달 내려온 까닭에 한두 달에는 다 갚을 수 없고 한 일 년 곤욕을 하여야 빚을 다 청당하게 되는 형편인 고로 동업인 가운데서 세 사람은 그냥 내던지고 나가서 일을 하고 오직 남아 있는 사람은 고성태와 나뿐이다. 그래 이 일을 감당하기 힘이 들어서 시카고에 있는 유홍도 정이용 양씨를 빨리 오라고 편지하였다. 수일 후에 이 두 분이 왔다. 이 두 분이 오자 고성태 씨까지 나가고 만다. 이것을 최초에 차려놓았던 사람은 다 나가고 우리 세 사람이 하게 된 것은 이 시작한 사람들 생각에 수태(여러 해) 진 빚을 다 갚고 돈맛을 보려면 한 일 년 동안 일을 죽도록 하여도 돈 한 푼 가지지 못하고 일만 하는 것보다 이것을 내리고 나가서 일을 하면 매일 사, 오원으로 五, 六元 벌 수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 나간 것이다. 나는 이 사업에 주장자가 되어 보는 일이 여러 가지다. 물건 사는 것 돈 받는 것 문서 하는 것 분주한 때에는 상 심부름을 하여 가면서 매니저 노릇까지 하니 시간이 참 없었다.상해에서 편지가 왔다. 뜯어보니 한 일삭 후에는 상해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온다고 약혼한 이살로매 양이 편지를 하였다. 나는 반갑고도 기뻤다. 이 편지를 유홍도 씨를 보라고 주었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오래지 않아서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나가 이살로매 양을 만나야 되겠는데 이 빚을 담박(단박) 지고 간신이 지탱하여 가는 찬관 돈을 가지고 노비를 할 수가 없다. 나는 부득이 린콘에 계신 안재창 씨를 찾아가서 一百元 하나를 취하여 주어야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나가서 약혼한 여자를 만나 데리고 오겠다고 한즉 두말 않고 一百元을 준다. 이 돈을 가지고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나와서 윤혁 씨 여관에서 유숙하면서 아무 날 아무 배에 이살로매 양이 실려서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하였기로 이날을 고대 고대하여 기다려서 이날 아침에 상항(샌프란시스코) 부두에 이대위 목사와 같이 나가 기다리는 중 큰 배 한 척이 선창에 들어서니 선객들이 와스스하니 다 하륙하는데 상해로 오는 한인 오인이 내리는데 나와 약혼한 여자는 없다.

    35 방사겸 평생일기 3권

    이 배에 온다던 사람이 아니 왔으니 무슨 일일까. 상해에서 배 떠나는 시간을 몰라서 배를 타지 못하고 놓치었나. 배 떠나올 때에 둘 가운데 누가 하나 병이 나서 이 배에는 못 오고 이 다음 배를 타고 오려고 작정이 되었는지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고 별의별 생각을 다하여 보았다마는 무슨 사정과 사고가 있어서 온다고 이미 통기한 이 배에 왜 아니 왔는지 이번 상해에서 이 배를 타고 온 한인이 몇 분이 지금 천사도에 갇혀 있으니 수일간 이분들이 나오면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할 줄 알고 나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에 있는 여러 친구들은 나와 약혼한 부인께서 이 배에 안 오셨나요 묻는다. 나는 어쩐 일인지 이 배에 안 왔어요 하였다. 지금 나는 이대위 목사를 찾아가서 이민국에 갇혀 있는 한인들이 언제 나오는가를 알아보려고 갔다. 이 목사를 만나서 물어보니 명일 오전 좀 되어 나오리라고 말씀하여 준다. 나는 명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고 여관으로 다시 와서 이럭저럭 밤에 잠도 잘 못자고 일찍이 일어나서 여관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윤혁 씨 내외분이 주방에서 조반을 장만하느라고 분주히 지내는 주방으로 들락날락 마음을 정돈치 못하고 있는 이것이 나의 성질이 너무나 예민한 까닭인가 자상자판을 안할 수 없었다. 이민국에 갇혀 있던 몇 분 한인은 지금 이민국 관리한테 여러 가지 문답을 치른 후에야 자유를 얻어가지고 상항(샌프란시스코)에 와 하륙할 시간은 다 되었다. 아니나 달라 천사도에서 조그마한 종선을 타고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와서 내리는 일행을 보고 나는 찾아가서 이살로매 양과 이준필 일행이 이 배로 온다고 하고 안 왔으니 이분들을 아는가 물어보았다. 이런 가운데 한 분이 나서서 말하기를 상해서 같이 탄 청년 남녀가 일본까지 와서는 잡혀 내려갔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분기가 발하여 국민회관으로 달려가서 일본 영사가 어디 있나 물어보니 이대위 목사가 왜 일노 영사관을 묻는가 하기로 나는 일 영사를 찾아가서 미국으로 오는 일행을 왜 일본서 잡아 내렸는가? 하는 질문을 한번 강경히 하여보려고 한다 하였다. 이대위 목사는 나와 한 고향 지인이요 겸하여 사회상 관계로 친분이 이왕부터 있는 고로 나의 사건에 동정이 있으므로 이번 상해로 온 한인들한테 이살로매 양과 이준필 이 두 사람이 왜 이 배로 오지 못한 것을 자세히 물어본 결과로 이 두 사람이 상해서 이번 오는 몽골니아 배를 탔다가 다시 상해로 내려갔다 한다. 그 이유는 이준필 씨가 일인 선객하고 자리를 다투다가 조선 사람으로 드러나서 일본 지나다 잡힐까 겁이 나서 다시 상해로 내려갔다고 판명되었으니 일 영사를 찾아가서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여 준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 나의 열렬하던 분기는 식어지고 이 다음 배로 오겠거니 하는 희망을 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왔었다. 며칠 후에 이살로매 양의 편지를 받아보니 참말 몽골니아 배를 탔다가 다시 내렸다고 하였고 샀던 선표는 이 배 함장한테 찾지 못하였으니 미국에서 교섭하여 찾으라고 하여서 나는 이 배 회사에 가서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고 그 선표 두 장을 상해에서 몽골니아호를 탔다 내려간 그 사람에게 다시 주어 달라고 간청하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허락을 한다.

    36 방사겸 평생일기 4권

    스탁 형편이 이 모양되니 하는 찬관사업도 잘 안된다. 그래 집세를 六삭 동안 매월 四千元씩을 못 물고졌다. 집 주인은 집세를 내라고 자주 와서 채근하기로 나의 스탁을 팔면 한 번에 다 물것이니 아무 염려 말라 만일 내말을 믿지 않거든 나하고 지금 은행에 가서 나의 八千여 元어치 스탁을 보여줄 터이니 가자하고 데리고 가 보이었다. 수일 동안은 잠잠하더니 다시 와서 채근한다. 그러나 스탁에서 돈이 나오지 않으면 지금 ●● 없으니 스탁 팔 때까지 참아 달라고 사정을 하나 듣지 않고 칸스테블을 불러서 나를 내보내기로 작정을 하고 나에게 아무 날은 옮겨가야 된다는 통지서가 왔다. 그러나 설마 내쫓기야 하랴 하고 여전히 사업을 하고 있었다. 벌써 집 주인은 나의 스탁 전부를 법률로 관할하였으니 내가 마음대로 팔수도 없이 되었다. 이런 중에서 스탁은 매일 떨어져서 나의 자본은 얼마 남지 않고 은행에서 쓴 돈이나 가리게 되니 은행에서는 스탁을 빨리 팔아서 이 돈을 받으려고 성화같이 몰아대는 동시에 칸스테블은 트럭과 사람을 데리고 와서 찬관에 차려놓은 온갖 물건을 내다 트럭에 싣는 때에 순경도 같이 와서 그러나 나 보기에는 차이나타운이 우리 인류문명과 도덕에 적지 않은 방해를 안준다고 안할 수 없고 이것은 참 음부에 구혈이다. 남의 문명한 나라에 와서 껴서 살게 되는 것을 고맙게 생각지 않고 소재국 그 나라에 금법을 일부러 범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고 이런 비법으로 돈을 번다야 오래가지 못할 줄 알고 우리는 차이나타운에서 하는 이런 종류에 끌리지 말고 정당한 사업을 경영할 것이요 일꾼은 노동력자의 생활을 만족히 여기자. 나는 한 노동자다. 노동은 나의 자본이다. 내가 노동력작 하면 여기서 사업을 할만한 자본이 생겨서 무슨 사업이나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차이나타운을 구경하고 와서 왜 이런 말을 하랴. 우리 동포도 적지 않게 이 음부와 같은 곳에 와서 힘들여 번 돈을 청인의 노름판에 갖다 주는 것을 이곳서만이 아니고 각처 차이나타운 있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고로 연전에 내가 재미한인 경제상 곤란이라는 문제로 기사 한 장을 써서 신한민보에 기재한 가운데 우리 한인이 매회에 청인 노름판에 갖다 주는 돈이 수천원씩 되니 이것이 재미한인 경제 곤란에 한 부분을 주었다고 장황이 설명한 일도 있었다. 나는 이곳 타운 형편을 한 번 돌아보고 김승길 씨 찬관에 다시 찾아와서 김승길 씨와 같이 김씨 댁을 심방하는 때에 김 부인을 처음으로 상봉하게 되는 때에 김 부인은 퍽 반가워 한다. 이것은 내가 자기를 김씨한테 소개하여 준 중매인으로 아는 까닭이다. 김씨는 사업을 근실히 잘하여 살림도 풍족하게 잘 사는 모양 같고 부부간에 금슬도 있어 보이니 기쁘기 한량없다. 나를 위하여 준비한 만찬을 김씨 내외와 같이 앉아서 재미있게 나누고 나는 호텔로 와서 자고 이튿날 일녀를 만나서 호텔값 一千元을 마저 주고는 내가 관할하였다. 이 호텔에 일꾼 둘 있는데 쳄버 메이드 한 사람 또 밤에 방 팔고 집 보는 늙은 남자 한 사람인 이 일꾼들을 내가 다 그냥 쓰기로 하였다. 八十三방이나 되는 방이 매일 부족하여 방 원하는 사람을 다 받지 못하게 되니 사업은 잘되는 모양이기로 방값을 올리기로 작정하고 밤에 일하는 클럭한테 방 호수를 적어다 주면서 이 방에는 얼마를 받고 저 방에는 얼마를 받으라고 하니 이 클럭은 펄쩍 놀라면서 하는 말이 지금 새 주인이 와서 방세를 갑자기 올리면 손님이 다 떨어져 나가면 당신에게 큰 실패가 되겠으니 방세를 올리지 말고 그냥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주견대로 방세를 올리라고 하여서 올렸다. 五十錢 받던 방은 七十五錢으로 一元 받던 방은 一元 五十錢으로 다 고쳐 가지고 이같이 받으라고 하니 클럭은 응낙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며칠 안되어 망하여 호텔 문을 닫는다고 예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클럭의 주견을 별로 신통하게 알지 않고 방방이 값을 올렸다. 이 八十三방에 새로 올린 것이 매일 二十元 하나씩이 더 들어온다. 새로 방세를 올려서도 방은 매일 부족하니 무슨 실패니 망하느니 할 염려가 조금도 없는 것은 이 사람들은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인데 한곳서 일한 자리를 마치면 사오십원 혹 수백원 벌어가지고 타운에 들어와서 마침 잘 방부터 얻어놓고는 나가서 우선 술집에 들어가서 얼근히 취하여서 오는 길로 잡아놓은 방을 찾지 못하여 그 방이 비어있는 것을 나는 종종 발견하게 되는 이런 형편인즉 방세를 좀 올렸어도 알 까닭도 없고 알더라도 술집에 갖다 주는 처지에서 방세 몇 각 더 주고 자는 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는 줄로 나는 확실 알고 방세를 올린 것이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 여전히 잘 되니 다행인 줄 안다. 우리 호텔 밤 클럭은 이곳 순경으로 늙은인데 이집에 여러 해를 있었다. 오늘부터는 새 주인 나의 말을 잘 순종하는 것은 나의 주대로 방세를 올린데 대하여 아무 영향이 없고 여전히 사업이 잘되니 나를 한 사업가라고 보게 되는 연고이다. 나는 이 호텔을 한 일년하여 몇 천원 잡았다. 이 근경 한인들은 나를 한 자본가라고 지목하게 된다. 나는 실상 이런 말을 듣기 원치 않는 것은 친구라는 친구들은 자꾸 찾아와서 돈을 취하여 달라는 것 성가셔서 견딜 수 없다. 하루는 평양 사람 변창수라는 친구 찾아왔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중마부로 자라서 동문수학도 하였고 내가 집에서 달아나 미국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하와이 이민배를 타고 와서 하와이에서 만났었고 또 하와이에서 내가 마침 미국으로 건너와서 내가 선비를 보내어 미국으로 온 친구인데 이 사람은 친구 간에 앉아서 우스운 말하기는 좋은 사람이나 그러나 무주의 무사상하여 공부할 생각도 없고 일하여 돈 벌 생각이 없다. 그러나 어떤 친구가 술이나 찹수이를 사준다면 따라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인들이 변창수를 변문이라고 별명을 주었다. 문이라는 문자는 모기 문자로 모기는 어디 붙든지 빨아먹는다는 뜻이니 이 변씨도 어떤 친구에 붙든지 얻어먹고야 만다는 의미로 변문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이곳에 최창진이라는 사람 있는데 변창수와 본국서부터 친하게 지내었다 하면서 나와도 친절히 군다. 그러나 이 사람도 일하기 싫어하고 친구 간에 한잔 마시고 놀기 좋아하고 우스운 소리 잘하는 사람으로 성성한 눈을 일부러 감고 금일 경을 니리는 형용을 곧잘 하여 사람을 웃기기에 과히 용렬치 않고 신수도 잘 생긴 한량적 인물이라고 누가 보든지 할 만한 사람이 되어 이따위 친구는 많다. 내가 하는 호텔 밑층에서 양찬관하는 김승길 씨는 자기가 하는 찬관을 나더러 사서 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호텔 때문에 이것까지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살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이 최장진이라는 사람이 와서 김승길 찬관이 큰 이익이 있으니 이것을 사서 같이 동사를 하자고 하면서 일은 자기가 다하고 나에게는 자본만 다 담당하라고 한다. 또 정동호라는 사람과 같이 삼인 동사를 하자고 이 찬관을 사라고 며칠 와서 조른다. 내 생각에 괜찮을 것 같아서 김승길 씨의 찬관을 사서 이 두 사람에 맡기고는 매일 내려가서 문서와 물건 사는 것이나 보살피고 올라온다. 이럭저럭하여 한달이 되어서 나는 문서책을 내어 놓고 월종셈을 보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월급 매인이 一百五十元씩 내어주고도 남는 이익이 한 五百元 된다. 이 五百元은 三分파하여 셋이 나눠 먹을 것이니 내게 一百七, 八十元이 온다. 사업이 이만하면 괜찮다는 소문이 한인 가운데 전파되어 변창수가 찾아왔다. 당장에 하는 말이 사겸아 나도 벌어먹게 찬관 하나를 사달라고 조른다. 최창진은 누구며 변창수는 네게 어떠한 친구이기에 최는 도와주고 나는 안도와줄 수 있나 하며 미녀풀 같이 바짝 달러 붙으니 떼어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허락을 안 한다. 이것은 이 사람의 자격이 무슨 사업에 적당치 않으니 내가 이 친구를 벌어먹으라고 수천원 자본을 주는 것이 실상 이 사람을 도와주는 효력이 없고 내 자본만 버릴 것을 나는 아는 연고로 선뜻 대답을 안하니 이 사람은 염치도 모르고 자꾸 툰다. 그래서 내가 만일 찬관을 사주면 네가 음식도 할 줄 모르고 또 무슨 사업을 하여보지 못하고 어떻게 하겠는가? 변의 대답은 이삼룡이라는 한인이 양찬을 잘 하니 이 사람과 같이 동사를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허락을 하였다. 우리 호텔에서 두 블럭 상거되는데 청인하던 찬관을 판다고 얻어듣고 와서 二千元에 사겠다고 하기로 사라고 하였더니 청인과 같이 나한테 와서 문서와 돈 받을 것을 서로 말하여 가지고 법률사한테 가서 법적으로 다 만들어놓고 나는 二千元을 주었다.찬다람의에 물건을 사야 되겠고 또 수중 돈 백원이나 가지고야 사업을 하여 나가겠기로 또 二百元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은 가게 열어가지고 사업이 괜찮았다. 그러나 돈푼 수중에 들락날락하니 술잔 먹어도 자리가 안날 줄 알고 둘이 다 술이 얼근히 취하여 가지고 사업을 하니 자연히 일도 잘 못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사업을 제대로 못하여 손님은 하나 둘 떨어져 나가니 수입은 매일 줄어들어나서 집세를 주지 못하게 형편이 되고 보니 자연 동사인 끼리 티격태격하다가 최후에 싸우고 쿡은 갔으니 문을 닫고 변가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가 수주일 후에 설종석이라는 동포를 만나서 같이 동사한다고 와서 찬관 문을 열었다. 이 타운에 내 오기 전에는 동포가 수삼 인에 불과하더니 지금은 오고가는 이가 많다. 그래서 우리 호텔 맞은편에 일인이 조그맣게 차려놓은 호텔을 사서 우리 식구도 살림하고 내왕하는 동포도 기숙하게 하였다. 지금은 유럽에 제일차세계전쟁이 한창 열리어서 미국까지 참전하게 되는 때에 각양은 올라가서 집세가 삼, 사 갑절이 되었다. 내가 지금 하는 호텔을 매월 七十五元씩 주기로 하고 五年 계약한 이집이 지금 시세로 말하면 매월 三百元 짜리가 잘된다고 사업가들이 말을 한다. 지금 나는 이 호텔을 이 기회에 팔아가지고 다른 사업을 할까하는 생각이 있어서 팔 의향을 돌리었다. 하루는 어떤 일인이 와서 호텔을 팔겠나 묻기로 판다고 하였다. 값이 얼마인가 묻기로 八千元 현금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판다고 하니 이 일인이 일년 전에 네가 一千五百元 준 것을 지금 八千元을 달라고 하니 값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일년 전 집세와 오늘 집세가 얼마나 올라갔으며 노동자의 일공은 일년 전 보다 갑절, 삼절이 되었은즉 나의 사업에 가격도 물가폭등을 따라서 올라가야 되지 않겠는가. 이 호텔 집세 五年 계약한 것 이 七十五元이 지금 시세로 얻으려면 매월 三百元을 주고야 얻을 것을 七十五元에 이 사업자리를 얻으면 매달 二百二十五元씩이니 이익이 되는 이것을 五年으로 승을 하여 보면 이것이 一萬三千五百元이니 지금 내가 八千元 달라는 것이 실상 집세에서 얻는 이익도 못되는 것이니 어찌 많다고 할 수 있는가 라고 상업상 경위로 설명한즉 명일에 다시 와서 사고 안살 것을 알게 하여주겠다고 하고 갔다. 이튿날 이 일인이 다시 와서 五百元만 낙가하여 달라고 하기로 내가 一萬元을 달라고 할 것을 八千元만 부른 것을 여기서 또 감하여 달라고 하니 지금 나는 八千元에도 팔 생각 없으니 다시는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아주 잘라서 말을 하고 말았다. 일인이 당신 너무 빡빡하구려● 하기로 나는 파는 것은 꼭 정가를 부르고 사는 물건은 내가 원하면 값을 깎으려고 하지 않고 달라는 값을 다 주고 사서도 돈을 남기는 사람인 줄 알고 사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부르는 八千元을 주고 살 줄 알라고 하니 할 수 없이 八千元에 사기로 허락한다. 이 일인은 속히 이 사업을 제회를 만들려고 즉시 법률사한테 가서 법적으로 서약서를 만들자고 하여 같이 가서 다 만들어가지고 八千元은행표를 받아가지고 와서 우리 개인의 소유물을 다 싸가지고 사무실에 나와서는 전부 열쇠를 다 주고 지금부터는 이 호텔이 당신의 것이라고 하고 우리는 나왔다. 지금은 조그만 호텔을 팔려고 주선 중인데 이집 아래층에서 식물상점 하는 일인이 자기가 사겠다고 하여 五百元에 팔았다. 최장진과 동사하는 찬관은 나의 자본 들어간 것 二千五百元만 갚아주면 나는 이익분배에 간섭치 않겠으니 할 수 있으면 나의 자본 들어간 것을 변통하여 달라하였더니 이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수일내로 二千五百元을 변통하여 준다. 이것은 나에게 매월 수백원씩 나눠주던 것을 안주고 자기가 혼자 먹게 될 것을 알고 이같이 빨리 변통하여다 준 것인 줄 알게 되었다. 변창수를 벌어먹으라고 차려준 찬관은 이 사람이 할 줄도 모르고 술 마시기에 이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우니 나만 二千六, 七百元이 손해가 났다. 그러나 이곳 와서 一年 반 동안에 이럭저럭하여 한 천만원이나 잡았으니 아직 운수가 나와 동심동력 동행하는 줄로 나는 확실히 믿고 이곳보다 좀 큰 타운 스탁톤으로 이거하여 갔다. 이곳은 청인 일인이 매리스별 보다 더 많아서 동양인 거주지가 적지 않게 크다. 한인도 수백 명이 농장에 나가 일하고 한인 여관 이발소가 두 곳이 있고 이곳 소산은 각종 채소요 감자가 유명하게 잘 되는 곳이요 이곳서 감자 농사하는 일인 한 사람은 감자 농사에 큰 돈을 잡았다고 백인들이 감자왕이라는 별호를 주었다. 나는 지금 이곳서 무슨 사업을 시작하여 보려고 동양인 거주지에 사업할 처소를 구하러 다니는 중에 일인이 하는 큰 풀방을 팔겠다고 하는데 일인의 거주지에 있는데 다른 일인의 풀방들은 사람이 꽉 들어차서 복작하는데 이 집만 사람이 몇이 없어서 쓸쓸하여 보인다. 이 풀방은 남자가 없고 일녀가 주장하는데 집은 크고 좋으나 테이블도 몇 개 안되고 한쪽에는 이발소를 차려 놓고 세를 주는 모양인 듯하다. 이 풀방사업이 잘 안되어 팔려는 줄 알고도 이 사업을 一千五百元 현금을 주고 사서는 테이블도 몇 개 더 들여놓고 전방 앞을 보기좋게 고치고 하는데 한 천여 원 들여서 확장하여 놓고 한쪽에 놓고 티 파는 데를 만들어 가지고 사업을 개시하였다. 내왕하는 손님들은 반수 이상이 묵국(멕시코) 노동자들인 이 사람들은 보통 무식하여 어린애 달래듯하면 좋아하는 고로 무엇을 잘못할지라도 나무라지 말고 내버려두면 다른 풀방에 가래도 안가고 자꾸 찾아오는도다. 또 이 사람들은 잡기와 풀장난 하기를 좋아하여 농장에서 수십원씩 벌어가지고 들어오면 풀방과 잡기집에 다 갖다 주고 부족이 되어 음식 사 먹을 돈도 없어서 배를 곯고 지나는 때가 많은 것을 나는 안다. 이 사람들이 정 배가 고프면 나한테 와서 커피와 우톨 한 十錢어치 외상으로 먹자고 한다. 나는 거절치 않고 외상으로 먹이고 또 방을 얻어야 되겠는데 방세가 없다고 사정하면 한 五十錢씩 취하여 주었다. 내가 이와같이 먹이고 취하여 주는 것을 받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함으로 해 이 나라사람 다 끌어 들이자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소문이 묵국(멕시코) 사람들에게 전파 잘된 모양인지 이 사람들이 많이 오기 시작하여 사업이 발전된다. 그러나 풀 테이블에서는 큰 이익이 없다. 담배와 소다와 수박 이런 것을 많이 팔아야 이가 있는데 이같이 하자면 우선 사람을 무슨 모양으로든지 많이 몰아내야 된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소소한 외상을 주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같은 값이면 우리 집으로 저희의 동무도 보내고 저도 줄곧 찾아와서 다소간 돈을 쓰고 가니 우리 집이 다른 집보다 사람이 더 많이 와서 흥성하게 잘 된다. 이런 것을 보는 우리 한인들은 방사겸 지금 수가 는다고들 하는 말을 듣고 나성(로스앤젤레스)에서 박동규라는 한인이 찾아와서 사업을 한참 보다가 팔지않겠나 묻는다. 나는 누구든지 내가 달라는 값을 주면 팔지요 하였더니 얼마를 원하오. 七千五百元을 주면 팔겠다고 하였다. 박씨는 동사할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시 말하자고 하고는 간다. 한참 있다가 다른 두 한인과 같이 와서 한참 구경하고 앉았다가 셋이 다 나를 찾아와서 이 사업 매매할 말을 하다가 세 분이 다 가고 만다. 그래서 내 생각에 값이 많은 듯하여 안 사기로 하고 갔나 하였더니 한참 있다 다시 들어와서 七千五百元에 사겠다고 허락을 선선히 하면서 아는 율사가 있으면 가서 약조기를 만들고 돈을 찾으라고 한다. 우리는 율사한테 가서 사고파는 문서를 다 만들어 놓고 七千五百元 은행표을 받고는 풀방을 박동규 일행에게 내어주고는 호텔에 나와 며칠 쉬는 중이다. 우리는 지난 과거 三年 동안에 활동사진 한번 구경을 못하고 주야로 사업하느라고 종일 일을 하고는 잔 것뿐이요 자고나서는 또 일을 한 것뿐 이것을 우리 일생일대에 해야만 될 책임으로 알고 험한 일과 괴로운 일을 다 꾸준히 참고 나가서 三萬五千元이라는 소득을 지금 가지고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사물이요 이 사물을 한 사람만이 영원히 소유할 수 없고 돈이라는 물건은 오늘 이 사람에게 있다가 내일은 저 사람에게 가고 또 저 사람에게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 마치 물레바퀴에 돈 한 푼을 달아 매고 바퀴를 돌린다면 이 매단 돈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이 지금 나에게 있는 三萬五千元이 얼마 동안이나 나와 같이 있겠는지 이것은 내가 지금 판단할 수 없다.나는 一千九百十八年에 벼농장을 스탁톤에서 작하였었는데 땅 일백 에이커를 매 에이커에 十五元씩 세를 주고 얻어서 밭 가운데 울 두 개를 파고 물을 재어 올리는 기계 두 채를 사다놓고 일꾼은 한 十五人 두어 가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는데 나는 농사에 아무 경험이 없으므로 벼농사에 경험 많은 사람을 두고 밭 갈고 씨 심어서 벼가 잘되었다. 그래서 희망 많았다. 금년 봄까지 벼 一百근 한 부대에 시장 값이 十元씩 하였다. 가주(캘리포니아) 벼농사 매 에이커 소출은 一百五十석으로 三百석까지 추수한다고 하는 최하로 一百五十석을 매 에이커에 소출을 예산하고 있었다. 그러면 매 에이커에 一千五百元 가격에 벼를 추수한다면 이 일백 에이커에 총 벼값이 十五萬元이나 혹 二十五萬元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운수가 이 고개만 순순이 넘어가서 나의 예산에 들어맞게만 된다면 나도 한번 자본가가 된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구주(유럽)전쟁에 종막 짓는 종전하였다는 소식이 각국 신문에 보도 되었다. 이러한 보도는 세계전쟁에는 다행이나 지역 이 해에 벼농사한 사람에게는 대불행한 소식이라고 안할 수 없었다. 이 정전된 소식이 나오자 각양 물화의 가격은 폭락되어 벼 한 부대에 十元 이상하던 것이 二, 三元에도 팔 수 없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공가는 아직 七, 八元씩 줘야만 농군을 얻어서 벼 추수를 하게 되어 예산을 하여보니 아이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격으로 벼값보다 이 벼 추수할 일꾼에 대한 경비가 더 많게 되므로 밭에 있는 벼를 추수하지 않고 밭에 그냥 내버려두어 썩어버리고만 사람이 나 혼자뿐이 아니라 벼 심었던 사람은 다 동일하게 되었다. 이 해에 촌 타운 은행가들도 많이 결단이 났다. 이 벼농장에 나의 자본 三萬五千元을 다 들여놓고 스탁톤에 이탈리아은행에 가서 크랍모게지를 잡히고 돈 五千元을 얻어 놓고 이 五千元으로 벼 추수할 경비를 예산하여 놓았다. 그러나 은행에서 내가 다른데 쓰는 것은 허락지 않고 오직 일꾼의 월급이나 추수하는데 쓰는 것만 허락한다. 그러나 구주(유럽)전쟁이 정권조약을 하기로 양편에서 언론 할 때에 한 二千元 사유로 장차 용하려고 돌려놓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전조약이 성립되었다는 보도가 대서특서로 전국적 신문에 발표되어 온 천하가 다 알게 되었다. 각양 물종은 폭락되어 벼 값도 여지가 없이 떨어져서 二, 三元에도 팔수가 없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탈리아은행에 찾아가서 지금 벼값이 폭락하여서 지금 추수를 한데도 추수할 경비가 안되겠으니 나는 추수할 생각이 없으니 당신 은행에서 다 맡아가지고 마음대로 하라고 내맡기고는 나의 자본 三萬五千元을 투자한 이 벼농장을 떠나서 맨티가로 왔었다. 이것이 나의 지난 三年 동안 노동력작으로 모아 놓았던 총자본을 여기서 최종에 실패를 당하고 나왔다. 그러나 크랍모게지로 은행에서 얻어놓았던 五千元 중에서 한 二千元 돌려놓았던 이 돈을 가지고 맨티카에 나와서 한동안 지낼만한 형편은 된다. 우리나라 옛말에 피게죽에 탕도라고 나는 벼 농장에 실패를 당하고 간신이 모가지 잡히고 얻은 돈에서 살아갈 장래를 위하여 한 二千元 돌려가지고 온 돈을 또 한인들이 무엇을 하자고 여러 사람이 내왕한다. 一千九百十八年에 이살음 김정진 김탁 임일 이 몇 사람들이 가주(캘리포니아)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대한인사회 개진당이라는 회를 조직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때에 나도 개진당 회원이 되어서 중가주(중부 캘리포니아)단 유바에서 사회개진당 대표대회를 여는데 나는 스탁톤 개진당 대표원으로 출석하게 되는 때에 사회 개진당 당수 이살음 씨와 개진당 총무 김정진 씨 이 두 분께서 벼농장에 실패한 것을 위로와 동정을 하여주시면서 우리 개진당 당원끼리 자본을 모아가지고 우리들에서 실과와 채소건조회사를 세우면 이익이 있겠다고 나더러 할 수 있으면 한 五百元 내라하기로 五百元 허락하고 왔었다. 이 건조회사의 자본은 二萬元이나 그때 한인의 경제상 형편이 二萬元을 거두기에 힘이 부쳐서 간신히 五, 六千元 걷은 이 자본을 가지고 二, 三만원에 실업을 시작하였으니 자연히 만여 원 근 이만원 가량을 은행 모가지를 잡히고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가 二, 三삭 내에 이 사업이 은행의 소유가 되고 말았으니 또 내 돈 五百元이 결단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아무 사업을 경영치 않고 한동안 이 조용한 맨티가에서 좀 쉬면서 정신 수습하기를 주장하고 있는 때 이곳에서 찬관하는 김병보라는 사람이 자본이 없을지라도 동사를 같이 하자고 하며 또 스탁톤에서 큰 풀방을 새로 사놓고 김승길 씨가 같이 동사하자고 하는 것을 다 사양하고 한동안 쉬기로 작정하고 맨티카 촌에 나와 있는 때에 하루는 먹을 식물을 사려고 타운을 걸어가는데 어떤 자동차 타고 가던 사람이 나를 보고는 차를 멈추고 나와 포도 커팅자를 사람 한 십여 명 얻어줄 수 있는가 묻는다. 나는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좋다고 하면서 커팅자를 포도밭들은 우리 한 캠프에서 머지않은 곳에 얻어놓았으니 내일부터 잘라놓으면 자기가 큰 트럭을 보내어 실어간다고 하고 이 사람은 털락이라 하는 곳에 사는 고로 이곳으로 갔었다. 나는 이 사람과 모든 약속을 하고 한인촌에 와서 강천명 내외분 이 분의 백씨 김필권 씨 염만석 변성유라는 학생 나 하여 七人이 커팅을 나가 자르기 시작하였다. 이 일은 일공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도급으로 내가 맡았는데 매 一百개 커팅을 잘라서 묶으면 七錢씩인데 부지런히 하면 매일 일백단을 용이하게 자를 수가 있는 고로 매일 七, 八元씩 용이하게 벌수가 있었다. 이 때는 겨울이 되어 농장에 일이 없는 때에 매일 七, 八元씩 벌게 되니 이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주인은 한 이, 삼일에 한번씩 와서 보고 갈 것 뿐이요 내가 이것을 적어두었다가 돈을 찾아 나눠주게 되니 나는 한 십장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겨울에 이 일을 한 달 동안 잘하여 수백 원씩 벌었으며 이 커팅 일을 우리에게 준 사람은 세리앤 사람인데 실과농장에 경력이 많은 사람으로 빈 땅을 어디서나 헐즉이 사서 포도를 심어가지고 다시 댓가를 받고 파는 중상으로 큰 자본가이며 이 사람의 집은 털락 타운에 있고 우리가 지금 자르는 커팅을 심을 땅은 털락서 한 삼십 마일 상거되는 리빙스톤이라는 곳에 八百여 에이커 모래땅이요 또 봄철에 모래땅에 바람이 불어서 보통사람은 무엇이고 심을 생각을 못하고 내버려 두었던 땅을 매 에이커에 一, 二元씩 주고 사서 포도 심으려고 벌써 캠프를 짓고 밭을 잘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커팅을 한달 안에 二百五十만개 가량을 잘라주었는데 이것이면 넉넉하다고 더 자르지 말라고 하여 우리는 이 일을 그만두었다. 주인이 나를 찾아와서 일을 잘 보아주었다고 二百元 하나를 나에게 준다. 또 나를 자기 농장에 와서 일꾼 한 二十명 먹이는 쿡간을 날더러 맡아하면서 또 우리나라 사람을 한 二十명 대 달라고 하기로 응낙을 하고 우리 식구가 다 이 농장으로 나왔다. 이 농장은 지금 신개척 중이니 집이나 마방이나 내왕하는 도로가 보잘 것이 없고 캠프로 돌아가며 큰나무 하나가 없으니 아무 경치가 없는 농촌이다. 그러나 일꾼들 밥 먹는 식당과 주방은 큼직하고도 편리하게 만들어 놓았고 또 우리 식구가 살림할 집도 큼직하여 우리는 만족히 생각하고 한동안 있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내가 이 농장에 와서 일꾼들을 삼시 해 먹이는 일은 월급으로 작정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사업같이 매 명에 매일 一元 二十五錢씩을 주인한테 받기로 하고 나는 매일 三, 四벙씩 일하고는 오원씩 받기로 주인과 약조를 하고 나가있는 것이다. 일꾼 한 二十명 먹이는데 매월 三百元 하나가 잘 남는 것은 주인이 돼지와 닭을 많이 놓았는데 내가 건사하고 닭 알은 내가 다 무료로 쓰고 한 주일에 한 수씩 돼지를 잡으면 내가 헐가로 다 사서 쓰니 이익이 만좀 난 것이다. 세리앤 사람은 유태국 사람의 성질과 품행이 비슷하여 상종하는 사람마다 상가지 않으면 속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사람이 나에게는 후하고 또 인정을 많이 쓰는 고로 나는 이곳 와서 벌써 한 사천원 벌어놓았다. 나는 지금 생각하기를 나를 배반하고 떠났던 운수라는 양반이 나를 다시 찾아온다고 혼자 생각하게 되었다. 이 농장 八百여 에이커나 되는 빈 땅에 포도나무를 다 심어놓고 밭머리에는 무화과 복숭아 살구 앵두 온갖 과목을 수수 만주를 심어놓은 이 과목들 가운데 내손으로 친히 심은 것도 적지 않았었다. 내가 이곳에 二, 三年만 더 있었던들 돈도 크게 잡았을 것이요 또 내손으로 심은 실과 맛들 보았을 것을 나는 친구의 말을 믿고 이와 같은 복덕방을 떠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마치지 않고 여기서 중지하는 것은 이 문제전에 만큼 기록해야 될 사건 하나를 비어 놓았던 이것을 지금 기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벼 농장에 실패를 당하고 맨티가에 나와 쉬는 동안에 어떤 동포의 소개로 콜닝가라 하는 곳에 기름광에 재네토 일을 얻어갔었다. 이 기름광은 남태평양 철도회사의 소유광산인데 한인들이 여러분이 와서 여러 처에서 재니토일을 하는데 나는 캠프 십일호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집주고 땅에서 자연히 나오는 가스를 마음대로 쓰라고 거져 주고 일공은 매일 七元씩 주는데 일이 아주 수월하여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매일 네시 동안이면 다 할 수 있는데 일이라야 일꾼들 자는 집 다섯 채 십장의 사무소 한간 이것을 비로 한 번씩 쓸고 캠프에 널린 신문 자박지나 주어서 태우고 나무에 물이나 틀어놓으면 하루 일이 다 되는 것이다. 이곳 일이 이같이 수월하고 시간이 많기로 펜실베니아 스크린톤에 있는 세계적 통신학교에 편지하여 북킴빙 과정을 시작하여서 만 二年 만에 마치었다. 이것이 이른바 꿩 먹고 알까지 먹는다는 격으로 일하여 돈벌고 또 공부까지 할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 와서 노동 파공이라는 말은 신문지상으로는 자주 들었으나 이와 같이 내 몸으로 친히 당하고 내 눈으로 이와 같이 위험한 것을 친히 보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노동자들이 파공하는 이유는 유럽전쟁이 종결된 그 원인으로 전쟁 때에 주던 월에서 매일 퍼센트로 회사에서 낮춘다는 것을 항거하기 위하여 동맹파공을 시작한 것인데 이 기름광에서 일하던 전부 노동자는 일을 중지하고 캠프를 떠나서 콜닝가 타운에 수만 명이 들어 모이어 가지고 매일 회이 돌아 사방 하이웨이에 나가서 회사 트럭이나 사무원들 타고 내왕하는 것을 파상 휴힐란하는 행동과 또 캠프 안에 여기저기 있는 기름 저장소를 폭탄으로 파고 흉측화 시켜서 수백만원의 손해를 주는 행동과 또 캠프 안에 있는 회사 사무원과 쿡과 재니토는 저희와 같이 파공을 안하고 캠프안에 그냥 있어서 월급을 받고 이것이 원수같이 미워서 깊은 밤에 숨어들어 와서 잡아다가 난타하는 고로 캠프마다 높은 곳에 활동하는 광명등을 배치하고 사방을 비추고 있다. 또 별순경도 많이 와서 수상지인을 검사 혹 조사하므로 파공자들이 별 수가 없어서 파공자들은 이와 같이 오래 계속할 수 없음을 알고 회사를 교섭하여 월급을 감하여 받고라도 다시 와 일을 하겠다고 하는고로 회사 측에서 다시 와 일 하라고 하여서 이 파공자들이 만 육삭 동안 손해 본 금액이 여백만원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 파공을 안 하고 캠프에 있던 사람은 육삭 동안 일도 안하고 월급은 그냥 받아먹고 상당한 보호 속에서 잘 지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매일 七元 받던 것을 六元씩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五, 六삭 지내서 회사 측에서 월급을 또 一元씩 감한다고 광고를 한다 하기로 이젠 이 일도 물이 낡아가는구나 하고 이 일을 설종석 이란 동포에게 소개하고 우리는 떠나서 맨티가에 와 있다가 서리앤 사람 애스터리앤 이라는 사람의 커팅을 잘라주고 포도 심는 일까지 하여주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이 좋은 농장을 떠나게 된 이유는 옛날에 대동보국회 때부터 좋은 동지로 수십년 동안 동고동락을 같이 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 나와 백년해로를 하는 아내를 나에게 소개하여 준 친구인 유홍도 씨라는 분이 싸우드 밴이라는 곳에 농장을 사놓고는 그 타운 안에 한인이 차려놓은 청찬관에 와서 일을 하는 때에 나한테 편지하기를 자기가 四十 에이커 농장을 사서놓은 가운데 닭이 있어 알을 낳아도 누가 주어다 먹을 사람이 없고 소가 있어도 소젖 짜서 먹을 사람이 없고 온갖 실과가 익어서 떨어질지라도 따 들여다 먹을 사람이 없으니 四兼(사겸)氏가 이곳 와서 농장에서 식구를 안돈시키고 타운 안에서 무슨 사업을 경영하면 가주(캘리포니아)에 있는 것보다 나을 터이니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며칠 두고 생각을 하여본 결과가 유홍도 씨의 말을 믿고 이 좋은 일을 그만두고 가기로 작정하고 주인한테 이 일을 그만두고 싸우드밴으로 가겠다 하니 주인은 깜짝 놀라면서 가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로 이해를 설명하여 준다. 그러나 이미 가기로 작정한 나에게 이런 설명이 나를 머물러 다시 앉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주인은 자기의 권고를 내가 듣지 않는다고 좀 불쾌한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면서 내가 싸우드밴에 가서는 이곳을 떠난 것을 후회하리라고 예언까지 하여 준다. 나는 이 농장에서 떠나 적지 않게 먼 사우드밴에 있는 유홍도 씨를 찾아왔다. 유홍도 씨는 이곳 한인의 주식으로 차려놓은 청찬관에서 쿡을 하고 있다. 이 찬관하는 사람들은 전부가 다 국민회 사람들인데 수천리 원정에 찾아간 나를 보고 그리 반가와 하지도 않고 보통의 동포애라는 것도 이 사람들의 교제나 언어 행동에서 찾아볼 수도 없고 아주 냉랭한 태도와 교만 방자한 거동이 첫날 이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고 마음을 불안케 한다. 그러나 찬관 윗층에 빈방이 있는 여기서 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유홍도 씨는 자기 농장 조진환이라는 국민회 사람한테 일년 계약하고 그 농장을 세를 주었다. 일이 이와 같이 되므로 나의 경영하고 찾아온 경영은 벌써 실패도지 하였은즉 내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하고 이튿날 나 혼자서 시카고를 들어가서 사업을 차려놓을 자처를 종일 다니며 구한 결과에 일인이 하던 청찬관을 一千五百元에 사놓고 식구가 있을 처소도 찬관 옆에 얻어놓고 싸우드밴에 나가 식구를 데려오려고 하고 있는 차에 유홍도 씨가 나를 급히 오라고 전보를 하여서 나는 막 달려갔다. 아내와 어린애 셋이 다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처들이 났다. 이것이 웬일인가 물으니 한백선 씨 자동차를 타고 유홍도 씨 농장 구경을 나가다가 자동차가 엎어져서 같이 탔던 한인과 사는 백녀는 당장에 목이 부러져 즉사하고 우리네 식구도 다 경상은 경상이나 병원에 가서 찍어메고 와서 지금 고통을 하고들 있는 중이다. 나는 이것을 보고 내가 왜 복덕방을 떠나 이곳에 왔는가 또 나는 왜 농주가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고 온 것을 후회무궁에 만시지탄이라고 안할 수 없는 여기 나는 나에게 유일한 단처를 자책 안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단처를 모르는 바가 아니고 잘 알지마는 내가 이 단처를 이기기에는 힘이 부족한 줄 안다. 나의 단처가 무엇인가 할 때에 응당 바깥사람들도 나를 상종하여 보면 알려니와 나 스스로는 더 잘 알 것은 사실인 나의 단처는 내가 무엇이나 작정을 하고 꼭 하려고 하는 일을 친분을 물론하고 막더라도 내 듣지 않고 나가는 그 고집이 나의 단처인 줄 안다. 내가 이런 단처가 있기 때문에 돈 많고 나를 붙들어주는 그 농주가 가지 말라고 여러 가지 이해를 설명하면서부터 잡는 것을 뿌리치고 기어이 이곳을 찾아와서 바라고 온 농장이 틀어지고 또 식구가 홍액까지 당한 이것이 다 나의 고집불통에서 된 줄로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만시지탄이 무슨 소용 있나. 하여간 나는 자동차의 홍액을 당한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은 식구를 대동하고 시카고로 들어와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업이 시원치 못하여 간신히 경비가 되고 일하는 월급은 나지 않는 고로 팔아 치우려고 예산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일상을 지내는 가운데 온갖 풍상의 맛이라는 맛은 고루 퍼보는 가운데 단맛도 쓴맛도 다 보는 것이 한 배가 망망한 대양을 건너갈 때에 순풍도 만나서 평안한 때도 있었고 풍랑이 도도하여 집채 같은 물결에 부딪쳐서 이 배의 기계가 상하고 돛대가 부러져서 이 망망한 대양을 어떻게 건너가나 하는 우려를 가진 이 선인과 같이 나는 이 험한 풍랑이 일으킨 파도에 이 배의 기계가 상한 것과 같이 나의 일엽편주와 같은 일신의 병까지 나서 병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 또 마치 이 파도에 상한 배를 고치려고 건조선창으로 들어가는 것과 방불한 심회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병원에 와 드러 누었다. 오늘 의사가 와서 나의 병을 검사하여 보고는 위장병이라고 한다. 위병에도 여러 가지인데 나의 위병은 얼서라는 병이 위에 생겨서 위를 갉아먹는 이 흠집을 아물게 해야 된다. 난 다 음식을 삼가 먹어야 된다. 매일 우유만 먹이고 시피 파우더를 매 두시 동안에 한 봉지씩 먹게 한다. 이와 같이 만 세주일 동안을 곡기는 일절 못하고 우유만으로 지내자니 기운은 다 쇠잔하고 피골이 상접하여진 모양이 귀신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속이 아프던 것은 거의 다 없어지니 의사가 집으로 나가 치료하면서 먹는 것을 조심하라고 신신 부탁한다. 나는 집에 와서 치료하는 동안에 유홍도 씨가 찬관을 도와서 아직 사업은 하는 모양이나 이익은 없다. 그래서 팔아치우려고 주선 중에 김경찬 김승제 두 사람이 사겠다 하기로 내가 샀던 값 一千五百元을 받고 팔고는 다른 자처에 어떤 여인이 하던 양찬관을 三百元에 샀다. 석냥 짜리 말에 이를 들어볼 것 없다는 격으로 찬관 전부를 三百元이니 볼 것이 없을 것은 말도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이것을 사가지고 한 五百元 더 들여서 좀 확장하여 놓고 사업을 시작하니 괜찮게 잘된다. 설상에 가상으로 위병으로 고통을 하는데 또 항종이 나서 목을 쓸 수가 없어서 한의선이란 사람에게 외상으로 一千五百元에 넘겨주고 매월 一百元씩 받아서 먹고 살아가며 병 낫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두어 주일 후에 항종은 나았으나 얼서병은 낫지 않고 일향 고통을 하게 된다. 유홍도 씨도 시카고서 무엇을 하여보려고 하나 수중에 현금은 없고 다만 농장 밖에 없는데 이 농장을 팔아가지고 찬관을 나와 같이 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같이 할 자본을 많이 낼 수 없는 것을 잘 알고도 같이 하자고 한다. 나는 한 二, 三百元은 낼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찬관할 자처를 구하러 다니다가 542 3. State St.이에 찬관을 四千元 달라는 것을 유홍도 씨에게 말하고 같이 가서 보이니 유씨는 만족하여 사자고 하여 이 찬관을 四千元에 사서 개업하였는데 사업이 흥성하게 잘된다. 쿡이 둘이요 상 심부름하는 여자가 셋이요 유홍도 씨와 나의 아내와 나는 물건사고 일꾼의 월급 또 수입지출 이것을 문서하여 가면서 돈을 받는 여러 가지 책임을 맡아본다. 이럭저럭 수 삭을 지내는 동시에 나의 얼서병이 또 발동되어 맡은 일을 할 수 없고 불가불 병석에 누워서 치료하게 되었다. 내가 찬관에 와서 일을 못하게 되니 아내 되는 사람에게는 보살필 일이 더 많아졌고 동사인 유홍도 씨의 마음은 불평을 가지게 되었다. 주장자가 병이 나서 찬관에 오래 오지 못하니 일꾼들은 갈리기 시작하고 상 심부름하는 계집애들은 속이기만 주장하니 자연히 이익도 없고 사업도 차차 추락된다. 동시에 자본 전부를 거진 혼자 낸 동사인 유홍도 씨는 이 찬관을 앓는 나에게 밀어놓고 간다는 말도 없이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앓으면서 찬관에 와서 일을 한다. 자본이 진하여 간다. 마침 조지수 씨라는 친구가 돈 만원이나 벌어가지고 환국하는 길에 나를 찾아왔기로 돈 한 五百元 주어야 이 사업을 계속 하겠다고 한즉 두말 않고 五百元을 준다. 이 돈 五百元을 가지고 한 두어 달 이 사업을 계속 하였으나 부지하기 곤란하여 팔아치우려고 하나 팔 수도 없다. 그래서 사업을 매매하여 주는 중개인을 찾아가서 찬관을 팔아달라고 하나 팔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하고 바꾸어라도 달라고 하였다. 이 중개인은 불란서(프랑스) 사람인데 이름은 티스델 이라는 인데 안지는 오래지 않았어도 나의 찬관을 팔아주려고 무한히 주선을 하고 있다. 하루는 찾아가니 켄사스주 까덴씨티에 이미그레순 땅 회사 거관 뚜갠이라는 사람이 땅을 팔려고 시카고에 와 티스델을 만나보러 온 사람인데 우리 찬관과 까덴씨티 땅과 바꾸어 보라고 양편을 권한다. 그래서 나는 땅을 보았든 안보았든 이 찬관은 오래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될 형편에서 땅과 바꾸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땅 거관의 입에서 바꾸자는 허락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찬관을 가보자고 하여 땅 거관을 데리고 가서 보여주고 다시 티스델 사무소로 와서 바꿀 것을 다시 말하게 되는 때에 땅 一百 에이커를 주면 이 찬관을 내어주마 하니 땅 거관이 허락하니 찬관은 이곳 티스델이 맡아서 팔게하고 나와 땅 거관과 까덴씨티 땅 회사로 가야만 바꾸는 약조기를 만들게 되겠는 고로 나는 식구를 데리고 땅 거관 뚜갠하고 까덴씨티 땅 회사를 찾아갔다. 이 이미그레순 땅 회사는 여러 백만원 자본을 가지고 땅이 六十삭순이라 한다. 六百四十 에이커를 일 삭순이라 하니 이 큰 들이 거의 다 이 회사의 땅이요 이 까덴씨티는 인구가 十萬여 명이 사는 과히 적지 않은 타운인데 이 땅 회사에서 사탕제조공창과 은행을 소유한 외에 큰 식물상점과 강약농기 회사를 가진 한 유력한 회사이다. 나는 이런 큰 회사와 이만한 관계라도 맺게 된 것을 만히 하였다. 나는 이곳에 오자 거관하고 땅 회사를 찾아갔다. 사무실 앉은 점잖은 늙은이는 한눈만 덮은 안경을 쓰고 앉아서 나를 대하는 것이 영국식의 한 점잖은 맛이 있는 이분은 이 회사의 총무라고 하며 이름은 올필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이 이 사람은 영국 사람이라고 하며 젊지 않으면서도 좀 교만한 듯하게 보인다. 이외에 또 롱복을 입은 한 늙은이가 앉았다. 이 사람은 보기에는 농부 같으나 돈이 많고 이 회사의 부회장이라 하는데 이름은 맥코이라 하니 아마 아리쉬 사람 같아 보이는 것은 맥이라는 그 성은 아리쉬의 성인 까닭이다. 하여간 나는 시카고 나의 찬관과 이곳 땅 一百 에이커와 바꾸기로 이 회사 거관하고 약조를 하고는 식구를 대동하고 멀리 찾아와서 그 땅을 좀 구경하자고 한즉 이 땅회사 총무와 부회장 되는 사람은 우리가 찬관을 거저 준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는데 땅과 바꿀 수 없고 우리 회사 거관이 잘못하여 당신과 식구가 이같이 먼 길에 왔으니 대단히 안 되었다고 하는 동정이 나타났다. 나는 당신네 회사 거관이 이곳 땅 一百 에이커와 내 찬관과 바꾸자는 것을 꼭 믿고 나의 찬관은 벌써 너희 땅 회사를 대표하는 시카고 티스델이라는 거관이 벌써 점령하였으니 만일 땅과 바꾸게 못되면 나는 찬관을 잃는단 말이요 이 땅 회사를 대표하고 이와 같이 만들어 놓은 뚜갠을 한 번 단단히 나무랬다. 이 땅 회사의 형편은 어떠한가 땅은 많아도 육십 삭순이나 되는 땅을 六十으로 나눠가지고 매 삭순에 집 두 채씩 짓고 마방간 하나와 전기 물 펌프 두 곳을 지어놓고 또 말 두 필씩 둔 이런 농막 六十여 곳을 꼭 같이 배치하여 놓은 농장이 반수 이상이 텅텅 비었다. 이 땅 회사의 형편이 이러한 중에서 태평양 연안에서 농사하는 동양인을 갖다 병작도 주고 땅을 동양인에게 팔아볼까 하는 꿈을 연방 꾸던 차에 우연히 나를 이같이 만나게 되는 때에 나를 무슨 모양으로든지 이용하여 자기네들이 꾸던 꿈을 잘 해몽하려고 한다. 나는 이 같은 형편을 분명히 알고 나는 여기서 한 큰 기회가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다. 하루는 이 땅회사 총무 올필이 나를 자기 사무실로 들어오라 하기에 들어갔다. 이 총무는 말하기를 시카고 찬관과 이곳 땅과 바꾸지 못하게 되는 것을 과히 걱정 말라고 하면서 우리 땅 회사에서 좋은 기회를 당신에게 만들어 줄 터인즉 아무 염려 말고 있으라고 하면서 지금 지낼 경비가 부족하면 돈이라도 얼마 갖다 쓰라 한다. 나는 지금 형편이 당장에 돈이 좀 요구가 되지마는 지금부터 돈을 갖다 쓰는 것은 나의 경영에 방해가 되겠는 고로 돈을 갖다 쓰라는 것은 아주 사양하였다. 이 회사에서 나를 이용하여 쓰려는 것은 내가 동양 사람이니 내가 주선하면 가주(캘리포니아)에서 동양인을 많이 데려다 자기네 회사에 많고 많은 묵은 땅들을 동양인에게 병작으로 내어 주어서 농사를 시키면 땅 회사에 큰 이익이 될 줄 알고 나를 지금부터 잡는 것이다.이러므로 나에게 태평양 연안에 있는 동양인을 이곳으로 많이 데려올 수 있겠나 묻는다. 나는 서슴지 않고 원하는 대로 데려올 수 있다고 하니 그러면 내일부터 주선하라고 한다. 내가 이 땅회사를 위하여 동양인이라는 것보다 우리 나라 사람을 많이 데려오면 나에게는 무슨 소득이 있는가? 우리 나라 사람이 나의 주선으로 이곳 와서 땅을 사게 되면 5%를 내가 먹게 된다고 하며 또 내가 주선한 사람이 이곳 와서 병작 농사를 하게 되면 여기서도 첫해 소출에서 5%를 준다고 하며 내가 장차 할 일은 이곳으로 이민하여 오는 동포와 이 땅 회사와 병작 계약이나 땅을 몇 해 기한에 팔고 사는 것과 통변이요 중개자요 또 이민주선자로 여러 가지 일을 내가 맡아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부터 이 회사 사무실에 차려놓은 테이블 하나를 맡아가지고 우선 이곳 위치가 어떻게 되었으며 농토의 토질과 무슨 강물이 흐르며 이곳에 무엇을 심어야 토질에 적합한 것과 병작은 몇 퍼센트요 땅 사는 데는 현금이 없을지라도 二十年 기한하고 살 수 있다는 것과 병작 농사에는 회사에서 농사에 드는 경비를 취하여 준다는 것 등등을 다 기록한 대광고 끝에 이곳이 즉 가나안 복지라고 한 이글을 신한민보에 내었더니 각처에 이 광고를 본 한인들이 광고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고 한 편지가 많이 오기 시작한다. 우리가 까덴씨티에 온 해는 一千九百二十四年이다. 이 해에 가주(캘리포니아)에서 동양인에게 대한 신법령이 통과되어 동양인은 땅이나 집이나 살 수 없는 것은 이왕부터 그러하였으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러한 형편에서 지금은 병작 농사나 농토를 세를 주고도 얻을 수 없이 된 이때에 한인 가운데 농업을 경영하던 사람은 다 실패 도지하게 된 때에 마침 내가 까덴씨티에 와서 큰 땅 회사와 언약을 하고 내가 신한민보에 광고한 것을 본 한인들은 이곳에 농토를 아니 경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처에서 오겠다는 동포와 더 자세한 형편 물어보는 편지가 매일 수십 장씩 와 쌓인다. 나는 밤낮으로 이 숱한 편지를 한 장도 빼지 않고 일일이 다 답장을 쓰기에 과연 적지 않은 수고를 들였다. 지금 땅회사에서는 우리 살림할 집을 나를 위하여 지어준다고 하며 벌써 길이를 정하고 재목을 갖다놓고 짓기를 시작하는데 한 일삭이면 완전히 다 지어놓는다고 한다. 집은 별로 크지도 않고 찬란히 짓는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이 있을만한 다섯 칸 나무집이다. 나는 매일 한 번씩 가본다. 타운 안 복잡히 모이어 사는 동리가 아니고 타운 끝에 나가 외따로 자유롭게 지낼 곳에다 짓는다. 우리는 이런 곳을 원하고 좋아한다.호사다마라는 명언을 누가 생각하여 우리에게 전하였는지 불행히 오늘날 나에게 꼭 들어맞는구나. 지금 나의 장래를 위하여 잘 진행되는 일에 대하여 이곳 시민들이 동양인 배척운동을 시작한다. 이곳 시민들이 동양인이 이곳으로 다수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시민대회를 열어가지고 켄사스주 수부트피가에 보낼 대표자를 뽑아 파송하기로 하였는데 이 대표자는 트피가에 가서 가주(캘리포니아)에서 동양인에게 대한 새 법과 같이 이곳서도 같이 새 법을 제정하여 가지고 동양인을 배척하자는 것으로 대 활동을 하는 중이다. 이곳 신문지상에 매일 이 문제가 머리말이 되어 이 근방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곳 신문에 떠드는 그 기사를 볼 것 같으면 이러하다. 이곳으로 다수의 동양인을 이민시키려는 햇맨은 벌써 이곳 와서 이곳 땅 회사와 모든 계약을 성립하여 놓고 지금 가주(캘리포니아) 일대에서 동양인이 오기 시작하고 이 땅회사에서는 이 이민을 주선하는 사람을 위하여 벌써 집을 다 지어놓았으니 우리는 빨리 막지 않으면 이곳 우리 시민은 생활이 곤란하리라고 한 그 이유는 이러하다. 가주(캘리포니아)에서 좋은 농토는 동양인이 많이 가지고 근농하여 큰 돈을 잡는데 백인은 동양인과 같이 하지 않고 시간을 적게 들이고 수월한 농사만 하기로 주장하니 동양인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요 또 타운 안에서 하는 사업 찬관이나 여관이나 식물상점 이발소 풀방 같은 사업도 동양인은 값도 좀 싸게 받고 여관방 같은 것도 정결히 하여가지고 백인보다 적게 받으니 자연히 동양인의 각양 사업은 흥성하고 백인의 각양 사업은 엉성하니 이 백인들이 동양사람 많이 오는 것을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전체 도시가 들고 일어나서 동양인을 배척하게 되었다. 이 배척운동이 동양인이 많이 거주하는 태평양 연안에서 시작된 것이 오늘날 또 이곳에까지 이 풍기가 일어나서 나의 장래에 큰 경영을 방해하니 이것이 호사다마라고 안할 수 없다. 벌써 나의 광고와 편지를 받은 한인들은 오기 시작한다. 가주(캘리포니아)에 있던 김원택 씨는 대동보국회 때부터 동지자로 친절히 지내던 분인데 나의 광고를 신한민보에서 보고 천여 마일 되는 이곳을 찾아왔다. 그래서 땅회사에 모시고 가서 소개를 시키고 회사 사람과 같이 농장을 여러 곳 구경을 시켰다. 김씨는 이곳 농장을 돌아보고 와서는 나와 땅이 좋고 이 회사가 후하니 우리 한인에게 수가 났다고 말씀한다. 이분은 성질이 좀 괄괄하여 수가 정말로 있는 듯이 한바탕 떠들고 다시 가주(캘리포니아)로 가 부인과 다른 한인 몇을 더 데리고 오겠다 하고 떠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부인을 대동하고 또 잘잘한 살림을 자기의 자동차에 싣고 다시 왔다. 그래서 회에 같이 가서 농 第十一号 六百四十 에이커를 병작하기로 계약하였다. 이 계약은 농주가 三分의 一을 가지고 농군은 三分의 二를 가지고 땅회사에서 말과 말 먹을 것과 또 농사할 경비를 취하여 준다고 하였으니 이런 어수룩한 병작은 미국에 어느 농촌에서는 만나기 드문 기회라고 하게 되었다. 김원택 씨는 만족하여 수일내로 농장으로 나가기로 모든 것을 준비하는 중이다. 불행한 일이 다 나에게도 불행하고 김원택 씨에게 불행이 더하다고 안할 수 없는 것은 머나먼 길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와서 병작 농사를 하기로 계약까지 다하여 놓고 지금 농장으로 나가려는 때에 이곳 배척운동의 결과는 십분여이로써 성공이 되었다는 기별이 이곳 신문에 대서특서로 기재가 되었으니 땅 회사의 세력을 가지고서도 우리 동양인을 이곳으로 이민할 수도 없고 병작이나 땅도 팔 수 없이 되었으니 나는 빨리 우리 신문에 이곳으로 오지말라고 광고를 해야만 되겠고 편지로 온다는 사람한테들은 오지 말라고 편지를 해야 되겠다. 나는 벌써 오지 말라는 광고와 편지를 하였다. 김원택 씨는 부인을 대동하고 오늘 떠나 가주(캘리포니아)로 나가셨다. 그러면 우리 나라 사람 다수를 이곳으로 이민하려고 수고하던 나의 경영은 여기서 실패의 종국을 지어 놓고 말았다. 지금은 나의 형편은 어찌 될 모양인가? 나로서는 무엇이라고 기약하기 어렵게 되었다. 시카고로 가자니 찬관도 없어졌고 노비도 없다. 이곳에 있자니 동양인 배척하는 데서 무엇을 하여 벌어먹을 수 있나. 하여간 땅 회사에 나가보고 어디로 갈 노비나 좀 달라고 하여보겠다고 찾아갔다. 이 땅 회사에서도 트피가에 사람을 보내어 이곳 시민들이 동양인 배척하는 것을 막아보려고 온갖 운동을 하였으나 그러나 성공을 못하고 실패하였다고 지금 말을 하면서 내가 수삭 동안 수고만 하였다고 위로를 많이 하여주면서 나에게 가지 말고 이곳서 농사를 금년에 하라고 간곡히 권한다. 그러나 나는 이같이 배척하는 곳에서 어떻게 농사를 할 수 있을까 한즉 회사 총무가 말하기를 이곳에 동양인 다수가 있어 농사나 장사를 해야 배척을 하지 한 사람 당신이 이곳에 있어서 농사를 하는 데는 아무 배척이 없을 터이니 아무 염려말고 금년에 농사를 하여보라고 한다. 회사에서 농사할 경비와 말과 말먹이와 집을 다 준다고 하기로 김원택 씨가 잡았던 十一号 삭순으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지금 正月 중순인데 아직 농기는 멀었다. 한 삼삭 동안은 이 농장에서 평안 잘 지내는 가운데 촌사람들은 동양 사람이 여기 와서 농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십 리, 이십 리에서 찾아온다. 이 근경은 땅은 넓은데 사람은 희소하여 사람을 보고 참으로 반가와 한다. 어떤 사람은 생선도 잡아가지고 와서 먹으라 하고 어떤 사람은 토끼를 잡아다 준다. 한 번 나의 아내가 편치 않은 것을 보고 가서는 스노우푸딩을 하여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한다. 이곳 농촌 정형은 어떤가 한다면 겨울에는 눈은 괜찮게 오나 봄철이 잡히기 시작하면 三月 중순부터는 비 한 방울이 오지 않고 이곳 중앙으로 아칸소 강이 있어서 겨울에 와서 쌓였던 눈이 녹으면 강이 넘치게 물이 많다가 한 四月 중순이 되면 강물이 다 흘러가고 말라버린다. 연고로 二月 말로 三月 초상께 쯤하여 이 지방 고을 관원이 일만 농군에게 물을 마음대로 받아서 땅을 적실 수 있는 한도까지 적시라고 광고를 하고는 중앙떼취로 물을 보낸다. 이 근경 농군들은 이곳 고을에 섞어주는 이 물을 원껏 받아서 흠뻑 적셔놓았다가 물 다 잦아먹은 뒤에는 밭을 갈아 제치고 종자를 심는다. 이곳 토질과 일기에 적합한 것은 참외와 수박이며 단감자와 사탕무우와 대맥 소맥을 많이 심는 곳이나 이곳에는 연년이 천재와 자연적 피치 못할 재앙이 여러 가지가 있어서 농군에게 큰 방해와 손해를 거대하게 주므로 이 근경에 농사하는 농군이 희소하게 있는 것이 나로서는 판명된다.이곳의 천재와 또 자연적 재앙이 무엇인가 한다면 봄에는 밤알만큼씩 하는 우박이 한 번만 오지 않고 두 번 세 번 오는 해가 있으니 곡식이고 채소고 참외 수박 이것을 입종하여 연하게 자라날 때에 꼭 우박이 와서 수박 참외 채소 곡식 할 것 없이 그 연한 위에다가 얼음 강산을 만들어 놓으니 밑에 있던 것은 무엇이고 다 죽탕이 되니 큰 손해를 받는 것이요 또 봄부터 비가 안 오기 시작하여 여름이 다 지날 때가지 비 한 방울 안 오니 모든 농산물은 마르고 타서 큰 손해를 받는다. 또 메뚜기는 유명하게 많아서 농산물에 적지 않은 손해를 연년이 주는 고로 이 지방 관원이 농군의 패리스그린이라는 메뚜기 죽이는 약을 무료로 누구나 갖다 쓰라고 한다. 또 이곳에 토끼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요 이 온갖 풍상을 다 겪고 간신히 살아나서 거의 다 자라는 참외 수박 채소 대 소맥을 물론하고 이 토끼 무리가 와서 큰 손해를 준다고 이 지방 관원이 누구든지 토끼를 잡아서 귀때기 한상을 가지고 오면 十錢씩 준다고 하여 이곳 농군들은 봄과 겨울 토끼 사냥 한 업으로 삼는다. 이외 또 한 가지는 우리 사람이 그 중 싫어하고 보기에 징그러운 여러 가지 종류의 뱀이 많다. 불 스네이크는 굵기가 홍두깨만치 굵은 놈은 집으로 들로만 기어들어와서 병아리와 닭 알을 찾느라고 방 안에 종종 들어오고 밭에 나가면 우릴텔 스네이크 독사는 매일 몇 놈씩 안 만날 때가 없다. 하루는 헤이 밭에 나가다니는데 무슨 종류의 뱀인지 길이가 한 십척 가량 좀 되고 가느다란 놈이 전체의 반은 늘어뜨려서 지나가는 빠름이 총알 같다. 나는 이왕에 뱀을 매우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이곳 와서는 매일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지 뱀 안 볼 때가 없고 나는 보는 대로 때려죽이기 시작하여 지금은 과히 무섭지 않다. 이상에 말한 헤이 밭에서 만났던 한 십척 가량 긴 이 뱀은 소젖을 빨아먹는다 한다. 이놈은 소젖을 빨아먹기 위하여 몸체 가늘고 길다. 이놈이 그 긴 몸체를 소 젖통에다 찬찬히 감아놓고 조여 들어가 젖이 나오면 입으로 빨아먹는다고 촌사람들이 설명하여 준다. 지금은 내 이 농장에 나와 농사하는 것을 말해야 되겠다. 나는 농부가 아니고 상인이다. 상인이 어찌 농사를 할 수 있는가 한다면 사람을 얻어서 할 예산이다. 그래 가주(캘리포니아)에서 이왕부터 잘 알던 이창호와 양기찬이란 두 분을 오라고 하였더니 왔다. 이 두 분과 나와 셋이 동사를 하자고 약조할 때에 두 분은 일하고 나는 회와 교섭하는 일과 경비 뒤 대는 일과 분부를 맡아가지고 적는 것이 나의 책임이었다. 참외 七十五 에이커와 단감자 五十 에이커 강냉이 一百 에이커 앨파앨파 五十 에이커 이와 같이 농사를 하기로 예산하여 놓고 이 한인 두 분은 농사에 경력이 많다하여 나는 전부를 다 이 두 분에게 맡기었다. 지금은 춘경 때가 가까워서 이 지방 관원이 물을 중앙 떼취로 보내니 마음대로 누구나 받아서 땅을 적실 수 있는 대로 적시라고 명령이 내리자 농군마다 물을 한 방울이라도 더 얻어 적실라고 한다. 그러나 나와 같이 농사하는 이창호 양기찬 이 두 분은 물 받아야 소용이 없다 한 방울도 받지 않고 있다가 기경할 때가오니 그 많던 땅을 말을 메여가지고 갈아 제친다. 땅 위에는 바짝 풀뿌리가 말라붙은 그 땅을 갈아 제친 것이 솥뚜껑 같이 자빠졌다. 마침 갈아 제친 것은 햇볕에 말라서 끌 수도 없고 부스러뜨릴 수도 없으니 여기다 어떻게 씨를 심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이 두 분한테 묻기를 왜 남과 같이 물을 받아서 땅을 적시었다 밭을 갈지 않고 마른 땅을 갈아서 제친 것이 솥뚜껑 같은 여기다 어떻게 종자를 심을 수 있을까요 한즉 이 덩어리 흙을 다 부스러뜨릴 수 있다고 아무 걱정 말라고 한다. 그러나 내 농사에는 아무 경력은 없으나 그러나 시작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이 사람들의 잡도리를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밭을 다 갈고는 큰 나무통 한 개를 쇠사슬로 말 뒤에다 매달고 갈아 제친 땅위로 끌고 다닌다. 그러나 땅덩어리가 부스러지지 않고 땅 속으로 들어가 베기니 보기에는 편편하나 그러나 속에 파묻힌 덩어리는 그냥 있다. 이 위에다 참외씨 심을 밭이랑을 곧게 줄로 먹줄 치듯 하고 이 줄을 따라 씨 심는 기계로 심어야 되는데 우리 밭에는 우선 씨 심을 이랑을 곧게 부터 할 수 없는 것은 밑에 큰 덩어리가 있어서 씨 기계가 바로 나가지 못해 식색 Z 즉 之 갈 지 자로 씨를 심어 놓았다. 씨가 며칠 후에 나와서 두 닢 세 닢 되어 너불너불하게 자란다. 이제는 휘치질을 해야 되겠는데 이 갈지 자 밭이랑을 어떻게 말이 휘치질을 하는 문제가 한퍼슬 같이 되어서 이 두 사람도 자기들이 잘못한 줄 알고 또 잘못한 결과로 아무 소출이 없을 줄로 알고 둘이 다 가려고 한다. 이와 같이 가려고 하는 사람을 붙잡는 수도 없고 또 이런 사람이 있어야 아무 소용이 없기로 갈 차비를 주어보내고 묵(멕시코)사람 한 七, 八人을 얻어다 두고 내가 친히 농사를 감독하였다. 七十五 에이커에 심은 참외 밭은 휘치질을 못하여 짠슨그뤼쓰 우리 나라 피띠 같은 풀이 길 같이 자라서 참외 넝쿨은 자라지도 못하고 열매 많이 달리지 않아서 이것은 패농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단감자 五十에이커가 잘 되면 五, 六千元 바라볼 수 있다고 회사 사람들이 나와 보고 말한다. 이곳서 농사하는 사람들은 농사를 시작하여 놓고 보험회사에 보험을 한다. 가령 참외 一百에이커를 심어놓고 매 에이커에 보통 一百元씩 보험을 한다. 이것은 연년이 우박● 와서 손해를 보는 고로 이 같이 보험하였다. 정말로 우박이 와 농산물이 결단이 난다면 매 에이커에 一百元씩 찾아먹고 만일 우박이 이 땅에는 아무 손해준 것이 없으면 보험회사에서 농주한테 10% 一千元을 받아 먹는 것이 피차에 노름과 같이 하는 풍속이 있다. 어떤 날 나는 단감자 밭에서 수십 명 모종하는 사람을 감독하고 있는데 우리 땅회사 사람하고 어떤 낯 모르는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보험을 하라고 한다. 단감자 오십 에이커와 참외밭 七十五에이커를 우박보험을 하라고 한다. 매 에이커에 一百元이나 五十元이나 마음대로 하라고 강권한다. 그래서 보험에 프리미엄 즉 보험비가 얼마나 되나 물었다. 10%라 한다. 그래서 나는 잠시 예산하여 본다. 가령 참외와 단감자 一百二十五에이커를 매 에이커에 一百元씩을 보험 하는데 보험비가 一千二百五十元을 선금주고 一萬二千五百元을 찾아먹자면 나의 두가지 농사하여 놓은 一百二十五에이커가 한 가지도 남지 않고 우박이 와서 다 때려 부서져야만 이만큼 찾아먹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박이 오려는지 안 오려는지 또 이 지방에 우박이 오더라도 내가 농사 지여놓은 밭 위로 지나가겠는지 나의 밭을 피하여 지나가겠는지 이러한 형편에서 一千二百五十元 보험비를 마침 주고 있다가 우박에 손실을 당하지 않고 보면 금년 농사한테서 얻는 이익 전부를 보험회사에다 주고 나는 헛수고만 하고 날 샐까하여 보험을 안하였었다. 이곳에 우박은 매해에 二, 三次씩 온다. 우박 오는 것이 ●것 백마일 범위를 잡아가지고 이 우박이 이 몇百 마일을 다 동●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에 시작하여 어디 지나갈 때에 일안곳이나 혹 이마일 범위를 잡아가지고 지나가는 그 끝도 않고 나와서서 혹 十마일, 二十마일 혹 백마일 이만치 가서는 오●● 우박이 멎고 날이 청명하여지니 이러한 노름을 가지고 인은나한 그 숫자대로 찾아먹자고 하란다면 심히 어려운 줄로 알고 나는 보험을 안한 것이다. 우박이 오는 때 五, 六月인데 이때 오는 우박이 농산물에는 해를 주게 된다. 그 七, 八, 九月께 오는 우박은 별로 손해를 주지 않고 지나간다. 나는 집 옆에 한 二十에이커되는 참외밭에 늙은 말로 휘치질 하는데 이날은 매우 덥고도 물

    37 방사겸 평생일기 5권

    나의 불평한 동정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형편이 일도에 이 같이 결단이 나는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고 하여 도무지 살 생각이 조금도 없고 이 악착한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순검이 엄밀히 지키는 틈에서 빠져나서 두 블럭 걸어가서 뜨럭스토아에 가서 까볼닉끼스 두 아운쓰를 사가지고 찬관으로 들어왔다. 순경과 칸스테블은 내가 어디를 무엇하러 갔다 왔는지 모른다. 나는 멀찌가니 서서 미스터 칸스테블이여 내가 지금 무엇을 손에 쥐었는지 아는가 하고 이 독재을 들어 마신다. 순검이 벼락같이 달려와서 마시는 그 병을 탁 쳐서 떨군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반병 이상을 마셨으니 별 수가 없이 땅바닥에 고꾸라져서 정신을 모르고 누워있다. 순검들이 우리 아이스박스로 달려가서 버터밀크를 한 병 갖다 먹여서 독재를 좀 순하게 하여가지고 병원으로 실어다 창자 속에 들어간 양잿물을 펌프하여 내고 침상에 정신없이 누워서 한잠을 잤는지 눈을 떠보니 옆에 아내 와서 있다. 어쩐지 나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고 아픈데도 별로 없기로 벗었던 옷을 찾아 입고 간호부와 나는 내 집에 가서 치료하겠다고 집으로 왔다. 병원에 있을 때에는 아픈데가 없더니 지금 온 창자 속도 아프고 입은 타서 아파 견딜 수 없는 중에도 침을 넘길 수 없는 것이 그중 고통이다. 목젖과 혀와 입은 타서 음식도 먹을 수 없고 물도 마실 수 없어 고통을 하고만 六삭 동안을 병석에 누워있었다. 그러나 이 모진 생명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러나 수중에 있던 자본은 다 없어져서 아무것 못하고 죽은 모양으로 집에 들어 있다가 하루는 돈 없이라도 무슨 기회가 있을까 하고 집에서 떠나 이리저리 다니다 한 곳에 이르러 조그마한 찬관에 들어가서 무엇을 좀 사먹으며 주인과 이런 말 저런 말 하고 앉았는데 주인은 이탈리아 사람인데 찬관을 판다고 하며 나에게 사보라고 한다. 그래서 값을 물어보니 一百五十元만 달라고 한다. 나는 마음에 있었으나 자본이 이것 사기에도 부족하여 一百元만 지금 받고 五十元은 두 달 후에 받기로 한다면 사보겠다고 하니 허락을 한다. 나는 집에 와서 아내한테와 자식들한테 찬관을 사기로 하고 왔노라 하니 위치가 어딘가고 묻는다. 소도와 十二가 근방이라고 하니 아내도 대강 짐작하는 듯 석냥 짜리 말에 니도 들어 보지 말라는 격으로 찬관 전부의 값이 一百五十元이니 보기에 너절하고 모든 차려놓은 것이 불편리 또 불완전할 것은 다시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손으로 고쳐서 잘 만들어 놓을 예산도 있고 자처는 사업이 잘 될 희망이 많은 자리다. 나에게 이 찬관을 팔고 간 사람은 온갖 기계를 수선하는 기사인데 매일 十여 元씩 버는 사람이요 이 사람의 아내가 하던 것인데 다만 몇 가지 샌드위치와 소다 이 몇 가지 파는 것이 이 사람의 전문적 사업이였었다. 그러나 나는 이같이 하던 것을 나의 주견대로 다 개량을 하여가지고 보통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런치를 만들어 팔기로 작정하고 집을 다 고치고 정결하게 식당과 주방을 만들어 놓고 사업을 시작하니 사업이 잘 된다. 다시 돈 잡을 기회가 왔다고 우리는 심중에 많은 희망을 가지고 한 일년 동안 장시간을 들이면서 붙들고 나가니 수중에 수천원 다시 모인다. 지금은 미국서 제이세계대전에 들어간지 수삼일 내의 기간이다. 미정부에서 전국적으로 발령하기를 축심국 나라 사람으로 이 나라에 와 있는 사람들의 재정을 프리싱 즉 봉쇄하고 모든 행동을 엄정히 감시하는 때에 우리 한인들도 이 감시를 당하는 때에 은행에 저금한 돈은 다 봉쇄하여 마음대로 쓸 수 없고 별순검은 두, 셋이 늘 사업하는데 와서 지키고 있다가 밤이 되면 열쇠를 앗고 우리는 나오고 이 별순검은 사업처소에 혼자 있어서 시시콜콜 다 뒤져보고 어디서 우리말로나 영어로 온 편지나 무슨 문자가 있는 종이는 다 가져다 내용을 알아보고 다시 갖다 준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주일 이상을 겪으면서 지내라니 죄가 없어도 죄가 있는 듯 견디기 참 어려웠다. 이것이 무슨 연고냐 하면 우리가 독일과 무슨 정탐 등의 연락을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두주일 동안을 와서 우리를 이같이 볶아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와 같이 두주일 동안을 같히었다가 시원섭섭히 가서는 다시 오지 않으니 우리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이 숨을 확 내어쉬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완전한 전쟁국이 되어 온갖 법령이 내려서 사업하기가 참 곤란하다. 온갖 식물제한, 가격제한과 물 사서 쓰는 표를 얻어야 고기와 모든 식물을 살 수 있고 신도정부에서 만든 스탬프를 얻어가지고 가 사신을 수 있고 어떤 날은 고기를 못 쓰게 어떤 날은 닭 알을 못 쓰게 하는 이것을 다 참고 견뎌야 사업을 하여갈 수 있으니 얼마나 곤란을 당하였으며 또 의무적으로 공채표를 사야 된다. 일인이 하와이 진주만을 암시적으로 습격한 원인으로 미·일(미국·일본)간 태평양전쟁이 발동된 기회를 이용하여 재미·포(미국·하와이)한인은 독립 회복할 기회가 온 줄 알고 우리는 적극적 활동을 하게 되는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돈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회는 국민회원에 동지회 동지회원에게 무제한하고 거둔다. 나는 일찍이 동지회 회원으로 북미동지 총회 관할 밑에서 독립금 인구세 외교위원부 유지금 동지회 연례금 온갖 특별의연금 다섯 종류 우리 신문대금 세계평화회 상항(샌프란시스코) 세계안전대회의 대표자 경비 캐나다의 세계 구제회에 파송할 대표자 경비 이 박사 생신 기념에 대한 특연 우리 신문사들이 유지할 특연 교회 보조비 북미 시보 확장할 특연 이 박사 귀국하시는 여비에 대한 특연 등등에 쓴 돈 수천원이 잘 되었다.전쟁 동안에 온갖 곤란을 겪으면서 수만원 잡았으나 그러나 쓴 것이 많고 또 동포에게 취하여 준 것이 三千여 元인데 한 푼도 받지 못하였으니 차 소위 구슬이 서 말이라도 실에 꿰놓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이 내가 이 취하여 준 돈을 받지 못하면 내게 아무 소용없는 돈의 명사뿐이다. 지난 전쟁 동안에 온갖 법령 밑에서 곤란을 무한히 겪은 육신도 좀 쉬어야 되겠기로 하던 사를 팔아치우고 한 일년 동안 쉬었다. 한 일년 쉬고 나니 또 무엇을 하여 가용이라도 써야 되겠으므로 막겟 스트리트에 있는 찬관 하나를 사서 한 三年간 하니 이젠 늙고 기력이 전만 못하여 힘든 일을 할 수 없어서 팔아치우고 다시는 무슨 사업이나 안하고 지내보려고 하나 내가 지금 모아놓은 돈으로는 불가능이라고 하게 되니 이 찬관을 팔게 되면 무슨 힘들이지 않고 조금씩 버는 것을 지금 구하는 중이다. 지금 하는 찬관을 三年 前에 현금 五千元을 주고 사서 첫 일년 동안은 수천원 잡았으나 사업처소를 일신 개량하는데 수천원이 들어가서 이 사업에 자본 들어간 것이 七千元이 잘 되었다. 그러나 삼년 후 오늘에 와서는 三千元을 받을 수 없이 시세 형편이 되어서 팔아치울 수도 없는 것은 근일에는 각양 물자는 전쟁동안 보다도 갑절이 올랐는데 음식값은 전쟁 때보다 반값을 받게 되는 고로 사업이 아무리 흥왕하여도 이익이 없으므로 이 찬관을 一千九百四十九年 五月 十五日에 二千元에 팔아치우고 말았다. 一千九百四十五年 四月 二十日께 손이도라는 동포가 이곳 와서 어렵게 지내는 중에 一年 前에 대한남방 미국정부에 통역하는 일을 이곳 미정부에서 얻어놓고 나가기로 하고는 일년이 지나도록 나가지 않고 이리저리 피신하여 다니다 이곳 와 있는 줄 아는 미군부에서는 어서 나가라고 독촉을 하는고로 이 손씨의 형편이 딱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는 이 미군정부 일을 얻어가지고 갈 형편이 못되는 것은 이곳서 화부(워싱턴)를 가서 수주일 유하면서 다시 수속을 마쳐야 되겠는데 화부(워싱턴)로 갈 차비도 없고 의복과 신발도 남루하여 갈 형편이 못된다고 수차 찾아와서 三百元 하나만 들려주면 미군정부 일을 얻어가지고 나가서 수삭 동안에 환보한다고 하기로 三百元을 주고 아무쪼록 이 좋은 기회를 잃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손씨에게 이 三百元 주기 전에는 생도가 곤란하다고 하면서 무슨 행상을 좀 하여서 기숙비라도 벌어먹어야 되겠다고 하기로 행상할 물건을 사라고 五十元을 대여 주었고 또 매일 찾아오니 음식도 수십 차 대접하였고 화부(워싱턴)로 갈 때에는 특별 전 별 만찬까지 대접하는 중에서 아무쪼록 본국에 나가 귀히 되라고 축사까지 올렸었다. 이 손이도는 미군정부 일을 매월 미화로 四百여 원씩을 받기로 일년 계약을 하고 나가서는 수차 편지가 있고는 나에게 쓴 돈은 만 사년이 지나도 갚지 않고 지금은 통신도 끊는다. 이것이 이른바 배은망덕이라고 안할 수 없고 이런 불신용과 비인정 도덕과 의리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 어떤 민족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데 오직 우리 사람 가운데서만 불행이 만났다고 나는 자탄 낙심치 않을 수 없다. 손이도라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면 손경도 목사의 동생이요 자기의 조카딸은 윤치창 씨의 아내라 한다.

    38 방사겸 평생일기 6권

    광풍이 일어나더니 멀리 보이는 산 밑에서 일어나는 검은 구름은 청명하던 하늘을 순식간에 덮어놓고 모진 바람에 밀려오는 빗방울이 한참 내리더니 우박이 내리 시작하여 한 십분 동안 내외간에 이 근경이 다 얼음 강산이 되고 말았다. 이 얼음 강산 밑에는 내가 농사하여 놓은 참외와 단감자 강냉이 헤이 알파알파 이 모든 농산물은 이 차디찬 얼음 밑에서 운명을 잠시간에 당하였었다. 땅 회사에서는 우박이 온 뒤에 자기네 농장들이 이번 우박에 손해가 얼마나 당한 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내가 있는 농장에 왔다. 이 땅 회사의 농장이 이 벌판에 六十여 개가 있는데 한 二十개 농장이 우박에 손해를 내가 있는 농장과 같이 당하였다고 한다. 내가 금번에 우박보험을 하기만 하였다면 七, 八千元을 받아서 회사에 三分 一을 주고 二分은 내가 먹게 될 것을 너무 정밀한 예산만 믿다가 보험 돈 맛을 못 보니 이것도 재수가 없는 연고라고 자탄을 안할 수 없다. 금년 농사는 떡 다하고 굿 다하였으니 명년 농사를 다시 하겠다고 이곳에서 七, 八삭을 기다리고 지낼 수 없어서 나는 나성(로스앤젤레스)으로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이 땅 회사에서 나를 금년 농사를 시키는데 농비로 뒤를 보아준 돈이 二千五百元 가량이 손해가 났었다. 이것은 나의 실수가 아니고 천재로 이렇게 된 것이니 우리 양 편에서 누구를 수원수구도 할 수 없이 되었다. 나는 아직 농업에 실패한 농장에 있어서 장래에 일을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가주(캘리포니아)로 나가서 무슨 기회를 엿보는 것이 상책이라고 작정을 하여 가지고 땅 회사를 찾아가서 금년 농사는 패농이 되었으니 우리 식구가 이곳서 지낼 수 없으니 가주(캘리포니아) 같은 곳으로 나가야 지낼 수 있는데 나갈 차비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한즉 이 회사 총무가 얼마면 가주(캘리포니아)에 나갈 수 있나 묻는다. 한 三百元이면 넉넉하겠다고 하니 회사 중요 임원 모이어 의논하여 가지고 알게 하여 준다고 하기로 나는 다시 농장으로 와서 기다리고 있는 중에 미스터 맥코이 부회장 되는 이가 은행표 三百元 짜리를 가지고 와서 주면서 가주(캘리포니아)로 나가 잘 지내라고 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헤어졌다. 우리는 지금 수일 내로 가주(캘리포니아)로 나가려고 행장을 서서히 수습하는 중이다. 방금 편지 한 장이 왔기로 떼어보니 유홍도 씨의 편지인데 나를 또 시카고로 오라고 하였다. 오라는 이유는 자기가 하는 일자리를 나와 하자고 하는 말을 앞세워 가지고 나를 시카고로 오게 하는 편지인 것을 모르고 나는 가주(캘리포니아)로 행하려던 것은 중지하고 유홍도 씨를 찾아와서 보니 유홍도 씨는 외촌에서 일하느라고 없고 뜻밖에 코라와 핼렌 형제가 유홍도 씨가 오라는 집에서 나오며 반갑다고 한다. 우리는 짐짝을 가지고 들어가서 여러 해 만에 서로 만나서 온갖 이야기를 하는 중에 유홍도 씨는 언제쯤 우리가 만날까 하니 오늘밤에 온다고 한다. 지금 이 두 처녀가 있는 집은 상당한 사람이 상당한 세를 주고야 얻은 아파트다. 이 집세는 매 주일에 四十元씩을 유홍도가 낸다고 하며 며칠에 한 번씩 들어와서 먹고 쓰는 용비를 주고 간다 한다. 지금 이 두 여자가 어찌되어 여기 와서 유홍도의 경비로 있는가 한다면 한 이유가 있다. 이 큰 여자 코라는 우리 대동보국회의 영수 장경 선생의 따님인데 무려 내가 길러내다시피 六, 七세부터 내가 장경 씨와 보국회의 발기인으로 한 집 한 사회 한 뜻 한 목적으로 동고동락과 환난상고를 같이하던 동지의 따님이다. 미국서 十二, 三세 때에 부모를 따라 상해로 나가서 중학을 마치고 지금은 다 큰 여자가 되었다. 불행히 장경 선생이 싱가포르에 가셨다가 객사하신 후에는 장 부인께서 어린 자녀 삼남 이녀를 데리고 외국인 상해에서 지내기 곤란하여서 나와 유홍도 씨와 이따금 몇 십원씩 돈을 부처드리나 이것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시 돈을 잘 벌지 못하는 때에 넉넉히 도울 수가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코라가 미국에 다시 오겠다고 나에게 간청한다. 코라가 이 나라에서 자라서 이 나라 소학까지 마치고 상해로 갔지마는 미국 시민권이 없는 것은 대한서 나서 二, 三세 때 부모의 품에 안기어서 미국에 왔었다. 그래서 이 나라에 재입국할 권리가 없으므로 오기가 힘드는 가운데 또 선비가 없으니 이 여자가 도미하기에 여러 가지로 곤란하여 나와 엉클이라 하면서 엉클이 나를 도미하도록 주선하여 달라고 자주 편지가 온다. 그래서 하루는 유홍도 씨를 만나서 장 부인의 곤란한 형편과 코라 여자가 도미하겠다는 모든 정형을 말하고 나는 이렇게 유홍도 씨한테 권고하기를 지금 상해서 곤란하게 지내시는 옛 동지 부인을 우리 두 사람 밖에 도울 사람이 없고 또 그 따님 코라가 지금 근 이십삼 세가 잘 되어서 미국을 오게 주선을 하여 달라고 자꾸 조르니 우리가 코라도 도와주어야 되겠다고 하였다. 유홍도 씨는 그간 한 집에서 일을 여러 해 하여 지금 수천원 있는 듯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여 보았다. 지금 코라가 미국으로 오겠다고 하기로 내 편지하기를 유홍도 씨와 약혼할 마음이 없나 물었더니 허락을 하면서 선비를 부쳐달라고 하였으니 홍도 씨 생각은 어떠합니까. 만일 생각이 있으시면 선비를 부쳐 주시오. 내가 코라를 왜 유홍도 씨에게 소개를 하냐하면 장 부인의 문제가 해결이 될까하고 지금 하는 말이외다. 우리가 아무래도 장 부인의 뒤를 도와야 될 관계가 있는데 이와 같이 옛 동지의 딸과 혼인하고 장 부인을 도와주는 것이 조금도 잘못이 아닌 듯하여 내가 홍도 씨에게 이 코라를 소개한다고 한즉 홍도 씨가 코라를 데려 오라고 三百元을 준다. 그러나 돈만 가지고서는 들어올 수 없다. 코라가 외국 시민으로 이 나라에서 살다가 동양으로 나간지가 여러 해 되어 재입국할 기회를 잃었다. 그래서 나는 김기선 씨를 찾아가서 김씨 주인 미스터 업햄한테 코라의 도미할 주선을 좀 하여달라고 청구하니 김씨는 그러마고 허락을 한다. 이 김씨는 나와 같이 대동보국회 회원으로 친절한 친구이다. 이분이 일하는 주인은 유력한 정치가요 또 자본가요 사업가로 시카고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가운데 첫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연고로 시카고 공화당 대통령 선거할 때마다 회장으로 오래있는 미스터 업햄이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힘으로 코라가 미국으로 올 주선이 되었다는 즉시 코라한테 편지하여 곧 떠나오라 하였더니 미국 상항(샌프란시스코)에 하륙하였다가 나성(로스앤젤레스)으로 가서 병원에 들어가 콧병을 수술하고야 시카고로 온다는 기별을 듣고는 나는 카덴시티에 와 농사하는 동안에 코라가 헬렌을 데리고 시카고 지금 온 것인데 유홍도 씨가 늙었다고 메리를 안하겠다고 거절하니 자기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어서 나를 또 이같이 오라고 한 것이다. 하여간 하루는 코라를 조용히 불러가지고 유홍도 하고 혼인하고 살라 한즉 나에게도 거절하니 나도 할 수 없이 되었다. 이 코라가 유홍도 씨의 돈을 벌써 수천원 쓰고 오늘 와서는 혼인을 안 하겠다고 젓는다. 지금에야 우리가 이 코라의 내용을 잘 알게 되었다. 이번 미국에 오기 전에 상해서 미국 수군과 상관이 있어서 아이를 배었다. 아이를 미국 병원에 와서 순산하려고 나성(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코를 수술한 것이 아니고 아이를 낳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모르고 돈을 여러 번 보내주었다. 유홍도 씨가 친히 나가 보고야 아이를 낳아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유홍도 씨는 용서하고 살아주려고 하여도 코라가 말을 안 듣고 있다가 두 형제가 다 어디가고 말았다. 하! 세상 인심이 이렇게 진실치 않아서야 누구를 믿고 살며 또 살 재미가 무엇인가. 이같이 어린 여자가 나를 중간에 세워가지고 나에게 도미할 주선과 선표 살 돈을 주선하여 달라는 것을 나의 힘껏 주선하여 데려다 놓으니 들어오기 전에 약조한 것을 배약하고 어디로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세상사가 이와 같이 난측하구나 하고 잊어버리자는 결심을 가지었다. 하여간 나는 또 유홍도 말을 듣고 이곳에 온 것이 또 잘못이라고 한탄을 안할 수 없이 형편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시카고에서 떠나 유홍도 씨 일하는 집으로 나가서 나를 준다는 일자리를 가지려고 나갔다. 살림할 집은 사업하는 집 맞은편인데 여기다 우선 짐짝을 풀고 임시적으로 정돈하고 한 三日간으로 일을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불행히 또 병이 나서 꼼짝할 수 없이 고통을 한다. 주인과 유홍도 씨가 와서 병원으로 실어왔다. 나는 얼서가 다시 발동하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하는 중에서 의사한테 해부를 하여 달라고 간청하나 의사의 말이 나의 위병은 분명한 얼서니 해부하면 죽는다고 약으로 고쳐보는 수밖에 없다고 하여 세 주일 동안 우유와 씨피 가루약으로 치료한 결과로 좀 차도가 있어서 병원에서 나오게 되었다. 주인은 내가 앓는 사람이라고 일을 안주려고 하는 가운데 유홍도 역시 그 일을 내놓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내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그마한 농장을 사가지고 병을 고칠 때까지 농촌 생활을 하여볼까 하고 유홍도한테 돈을 한 칠, 팔백원 대어주면 미시건주로 나가서 농장을 하나 사가지고 병이 날 때까지 있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하니 七, 八百元 돈을 주기를 아주 싫어하는 모양으로 대답을 한다. 내가 이 돈을 거저 달라는 것이 아니고 취하여 달라는 것인데 이와 같이 의심하는 표정을 가진다. 내가 누구 때문에 가주(캘리포니아)에서 매월 사, 오백원씩 벌던 농장일을 그만두고 사우드 밴에 와서 아무 실효가 없는 자리 때문에 고생을 하였고 지금 가주(캘리포니아)로 나가기로 잘 작정하고 떠나려 하는 때에 또 이곳으로 오는 것이 좋다고 하여 끌어들여 가지고 병까지 나서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 돈 七, 八百元 취하여 달라는 것을 꺼리고 의심이 나서 응낙을 안 하니 이것이 수십 년 알아온 친구라고 할 수 없다. 하루는 내 아내가 홍도 씨한테 돈을 주겠는가 안 주겠는가 분명히 결정하라 하니 七百元 은행표 써서 공손히 주지 않고 걸인에게 동정이나 주는듯이 집어던져 준다고 아내되는 사람은 지금까지 두고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이 귀여운 돈 七百元을 구구이 얻어가지고 미시건주 토아잭이라는 한 일만명 사는 타운으로 나와서 이십 에이커 농장을 二千元에 사가지고 농촌 생활을 하면서 나의 위병을 고쳐 볼까하고 적막한 농장에서 지내게 되었다. 동삼에 눈은 내려붓고 촌길은 강산같이 온 눈이 덮여서 어디가 어딘지 찾아갈 수가 없이 되었고 먹을 식물은 타운에 가야 사다 먹겠는데 버스나 화차는 없고 二, 三 마일을 걸어가야 된다. 아이들 학교에 가려면 눈 속으로 한 二마일 쯤 걸어가야 되니 농촌생활이 더욱이 곤란한 것을 지금이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지금 농촌 생활이 이같이 곤란한 것을 깨닫고 토아잭 타운으로 나 혼자 들어와서 일을 얻어보려고 이왕에 두어 주일 우리 식구가 이 농장으로 나오기 전에 호텔에서 있을 때에 주인을 잘 알게 되었기로 나는 지금 이 호텔 주인을 찾아와서 일을 하나 좀 소개하여 달라고 구청하였다. 호텔 주인이 쿡 할 줄 알면 지금 당장에 일자리가 있다고 하기로 쿡을 잘 한다고 하니 같이 가자고 하여 한 두어 블록 걸어가서 찬관으로 들어가서 주인과 나를 소개하고 일을 줘서 시험하여 보라고 한다. 주인은 월급을 얼마나 원하는가 하기로 나는 매주일 五十元을 받고는 일을 어디서든지 하지 않았으나 지금 나의 형편이 월급 다소를 관계할 수 없으니 지금 당신이 쓰는 쿡을 얼마나 주느냐고 하니 여인 쿡인데 매주일 二十五元씩 준다고 하면서 나는 남자니 三十五元씩 주마한다. 그래서 나는 일하기로 작정하였으나 나는 한마디 말하여 주는 것이 필요할 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일을 하여 사업이 증진된다면 월급을 올려주겠는가 하니 사업이 잘될 지경이면 매 주일 十元 하나를 더 준다 하기로 일을 시작하였다. 이왕 있던 여자는 갔고 파이 만드는 여인 하나와 그릇 씻는 처녀 하나, 주인 부처가 같이 일을 하는데 사업이 일취월장하니 주인이 나를 좋아한다. 주인이 나를 좋아하니 나는 더욱 이 사업에 이익을 내어 줄 생각이 있어서 모든 물자를 경제적으로 써주는 것을 주인이 잘 알고 내가 이 일을 그만두고 갈까 봐서 매사에 친절히 군다. 내가 일을 한 삼삭 동안하여 수입이 갑절이 되니 十元 하나씩 더 준다. 지금은 나의 월급이 매주일 四十五元 씩이다. 나는 四十五元 씩을 받아가지고 식구가 먹을 식물을 사가지고 주인의 자동차에 싣고 주인과 같이 한 주일에 한번씩 나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반가이 만나보고 두어 시간 후에는 업소로 와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책임이요 직업이다. 내가 지금 일하는 부처는 어떤 사람들인가? 이 사람들은 나를 이 일을 소개하여 준 호텔에서 일을 하던 젊은 사람들인데 법적으로 성혼하고 살지 않고 위법으로 부부와 같이 사는 사람인데 다 순직하고 상당한 집 자녀들이라고 한다. 이 남자의 이름은 이스톤이라 하며 이 사람의 머지않은 친척은 이 타운의 시장을 지내었다 한다. 또 이 사람의 사촌누이라는 과수 여인은 노모 한 분을 데리고 이 찬관 옆에서 사는데 이 집에 공방 한 칸이 있다고 주인이 소개하여 주기로 매 주일 五元씩 내가 주고 있다. 얼마 후에는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오래있도록 하기위하여 주인이 나의 방세까지 물어주니 나는 지금 매 주일 五十元씩 받는 것을 만족히 생각하고 한동안 있어주려고 외딴 농장에 있는 식구를 이 타운으로 옮겨 올 주선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 타운 안 집과 나의 농장과 바꿀 기회가 생겨서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집 값은 三千五百元이요 나의 농장은 二千元이니 一千五百元을 지고서 바꾸어 가지고 식구를 다 타운으로 데리고 나와서 나의 집에서 살림하게 되니 다 즐거워한다. 나도 방세를 주고 있던 데서 떠났다. 내가 근 일년 동안이나 방을 잡고 있던 집주인 과수 여인은 이곳 시장의 따님이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적적하게 지내는 사람들인데 나에게 퍽 고맙게 굴기로 나도 이 늙은이들을 도울 수 있는대로 도와주었다. 겨울에 석탄도 들여다 주고 불 피울 나무도 찬관에서 모아두었다 갖다 주고 나 지내는 방은 내가 건사할 터이니 일절 건드리지 말라하고 또 무엇이고 무거운 것은 내가 다 도와주니 나를 친자식 같이 사랑한다. 이러는 중에서 내가 집을 사고 자기 집을 떠나게 될 때에 이 늙은 모녀는 매우 섭섭하다고 하면서 자봉침을 내 아내에게 기념으로 주라고 준다. 나는 고맙다고 받았다. 우리는 지난 반년 동안이나 서로 갈려 살기에 서로 그립고 외로웠던 우리 식구는 지금 한 곳에 다시 모이어 살게 되니 우리는 즐겁기 한량없는 중 새로 산 집도 방이 다섯 칸이요 바깥 텃밭이 커서 내가 온갖 채소를 심어서 먹는 가운데 수박 참외 물외가 어떻게 잘 되었는지 다 먹을 수 없이 되었다. 나는 이곳 와서 이렇게 지내는 중에서 이곳 올 때 유홍도한테 취하여 가져온 七百元을 다 갚고 이 三千五百 짜리 집이 온전히 나의 소유가 되었으나 아직 현금은 몇 푼 없다. 그래서 이 찬관 일을 한 一年 더 계속 하여가지고 무슨 사업을 경영키로 하고 있는 때에 불행히 또 얼서병이 발동하여 일을 하는 수 없어서 이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일년이나 치료를 하여도 별로 이 차도가 없다. 수중에 있던 현금은 거의 다 가용에 다 쓰고 몇 푼이 남지 않아서 걱정이 된다. 동네 여인들은 오고가면서 내 아내한테 구제부에 가서 말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는데 왜 이와 같이 병들은 가장을 두고 가만히 있을 필요가 없다고 권고하여 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 온지도 몇 해가 되지 않고 또 시민권도 없는 우리가 이 타운에 괴로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거절하였다. 이곳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여 주는 것이 정부 돈으로가 아니고 이 타운에서 우라운욱이라는 화덕을 제조하는 공창 주인 미스터 리의 부인으로 비롯한 쏘사이티에서 이곳 부가의 구제금을 걷어가지고 어려운 가정을 도와주는 것이다. 하루는 어떤 젊지않은 부인이 큰 자동차를 타고 우리 집 앞에 멈추고 우리 집 포취 안에 들어와 문을 두드린다. 아내가 문을 열어주니 이 부인이 들어와서 우리의 지내는 형편을 다 물어보고 앉아있는 동안에 한 남자가 여러 가지를 갖다 준다. 이 부인이 화덕회사 주인의 부인 미세스 리라는 이다. 듣노라니 남편이 앓은 지가 오래였고 자식들이 많다하여 우리 구제부에서 도와주려고 무엇을 좀 가지고 왔으니 이것을 다 쓰고 더 원하는 것이 있어 기별하면 반가이 도와주겠다 하고 갔다. 지금 이 부인이 갖다 준 것을 다 조사하여 보니 밀가루 二十五근 한 부대 감자 한 부술 돼지기름 五근, 실과 한 바스켓, 아이들 동삼내복 네벌, 눈 위에 신는 울오버 덧신 네 켤레를 우리는 뜻밖에 받고 기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우리가 이같이 남을 도와주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 하루라도 더 살겠다고 하는 것이 나의 양심의 불평을 준다. 그래서 아무리 부족한 것이 있을지라도 다시는 구제 받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이러는 중에서 자급자족할 생각이 더 단단히 굳어진다. 내가 자급자족을 하자면 내가 평안이 드러누워서 아무 것을 경영치 않고 말로만 한다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 가지고 나는 앓는 중에서도 무엇을 하나 하여볼 생각이 생겼다. 이것은 무엇인가? 자본도 요구되지 않고 육신으로 힘드는 노동도 아니고 다만 정신상 수고만 꾸준히 하고 나가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영어도 그리 능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간신히 영어 신문을 보고 그 뜻을 알게 되리만큼은 일찍이 배웠다. 지금 미국 사람은 청인의 찹수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고 안 먹어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고 이 찹수이가 중국인이 이 나라에 와서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는 미국인의 보통 먹는 스튜나 별로 다르지 않게 이 나라 사람들의 보통 음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국인 가정에서 자기들이 그 감을 사다가 만들어 먹고 그러하다. 그러나 만드는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청인 찬관에 가서 상당히 돈을 쓰고야 찹수이 맛을 보게 되는 사정을 잘 알고 나는 지금 찹수이 만드는 쿡북을 하나 써서 미국인 가정에 팔아 볼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부족한 영어로나마 이 책 한 권을 써 놓기로 작정하고 지금 쓰기를 시작하였다. 이 책은 한 二百 장 가량인데 첫 一, 二장에는 음식이라는 것이 인류 생존에 어떻게 중요한가와 음식 만드는 법은 과학의 일종인데다가 미술적 색채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좋은 식을 가지고도 그 만드는 법을 모르고 음식을 만든다면 맛도 없고 모양도 흉하다면 먹는 사람의 구미를 잃게 할 것이니 만드는 방법을 마침 알아야 맛도 있게 할 수 있고 보기에 아름다워서 음식을 맛보기 전에 구미부터 끌만한 미술적 색채를 사용할 줄 알아야 되겠다는 서문을 기록하였고 그 다음 장에는 이 책에서 각종 음식 가운데서 내가 원하는 것을 속히 찾아낼 인덱스 목록 호수를 적어놓았으니 누구 이 책에서 무슨 음식을 찾아서 만들기에 간편하게 차서로 기록하였다. 여기부터는 二百여 종류의 찹수이와 온갖 종류의 국과 온갖 종류의 닭알로 만드는 것과 생선 닭 새우 가재 소고기 돼지고기로 만드는 온갖 종류를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어떤 모양으로 썰어서 어떻게 지지고 볶아서 어떻게 그릇에 담아가지고 어떻게 무엇으로 단장한다는 것을 자세히 분명하게 기록한 이책 한 권을 근 삼삭 동안에 마쳐가지고 시카고 큰 인쇄소 여러 곳을 찾아가서 이 책을 한 二十萬권 가량 발간하기로 교섭하여 보니 선금으로 사, 오천원을 줘야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형편은 사, 오천은 그만두고 사, 오백원도 낼 수 없다고 하니 그러면 커미션 패스로 매 권에 二錢 구문을 먹고 책을 발간하여 파는 권리를 자기에게 완전히 양여하라 한다. 그래서 시카고에서는 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기로 줄리엣이라는 곳에 유명한 인쇄소가 있다고 하기로 찾아갔다. 과연 크고도 잘 차려놓은 인쇄소다. 이 인쇄소는 Valand Printing Co. 발랜드 프린팅 컴퍼니라 한다. 사방 한 블록 안에 수십층으로 건조한 집안에서 일하는 일꾼이 사, 오천명이 한다. 나는 이 큰 집안에 차려놓은 사무실로 들어가서 매니저를 보자고 하였으나 분주하여 오늘은 볼 수 없으니 명일에 다시 오라한다. 할 수 없이 나와서 명일을 기다려서 다시 찾아갈 수 밖에 없다. 나는 오늘 다시 찾아가서 매니저를 만나서 쿡북을 하나 써가지고 온 것을 말하니 자기는 이런 것은 간섭치 않고 출판물을 관할하는 미세스 마가렛이라는 부인을 찾아가보라 하고 나와는 교섭을 아주 단절하여 버린다. 나는 이리저리 물어서 마가렛 부인을 찾아가서 청찬관 만드는 쿡북 한 권을 써가지고 왔으니 이것을 무슨 계약상으로든지 출판하여 줄 수 없는가? 한즉 이 부인이 나의 기록한 글을 보고 지금 시대에 적당한 책자가 되어 출판만하면 많이 팔 줄 안다마는 우리 회사에 이런 책자를 출판하여 달라고 들어와 써온 것이 적여구산이라 한다. 그러나 당신 써 가지고 온 이런 종류의 글 하나밖에 없으니 커미션 패스로 원할 것 같으면 한번 시험하여 보려고 한다. 커미션은 책을 발간하여 가지고 팔리는 수대로 매 권에 三錢씩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천년세월하고 이것을 기다려 찾아먹을 형편이 못되어 커미션 패스로는 원치 않고 차라리 로얄티로 얼마를 받기를 원한다고 한즉 얼마나 원하는가? 二千元을 원한다고 하였더니 三百五十元에서 더 줄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나의 생각에 三百五十元이 적다고 좀 더 줄 수가 없나하니 자기는 여기 더 줄 수 없으나 매니저한테 물어보아서 五百元이 되면 하겠는가 묻는다. 그래서 五百元만 받아달라고 하고서는 집으로 돌아와서 수 주일을 기다려도 회답이 없어서 다 틀리는 줄 알고 있었더니 세주일 만에 마가렛 부인이 편지하기를 三百五十元에 더 줄 수가 없다 하였기로 나의 형편이 몇 백원 더 받으려고 오래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기로 허락을 하여 보냈더니 수일 후에 三五十元 은행표와 또 내 이런 쿡북을 다시 만들어 팔지 않는다는 약조기까지 만들어서 동봉하여 왔다. 나는 이 약조기에 나의 이름을 써서 부치고 은행표 三百五十元은 이곳 은행에 가서 찾아왔다. 이 돈이 비록 많지는 않으나 한동안 가용에 도움이 되겠다. 나는 이 돈 三百五十元을 다 써버리기 전에 조그만 커피숍이라도 하나 차려가지고 벌어먹을까 하나 三百五十元 가지고는 차려놓기에 부족하여 유홍도한테 二, 三百元만 취하여 달라고 편지하였더니 돈이 한 푼 없다고 냉랭히 거절한다. 그래 나는 별 수 없이 이 돈을 가용에 쓰고 있는 중이다. 나의 속병은 완전 차도는 안 되었으나 일을 할 만한 형편은 되니 무슨 사업을 하나하여 볼 생각은 있으나 자본을 변통하는 수 없으니 불가불 이 집을 다만 반값이라도 받고 팔아가지고 무슨 장사를 하여 돈을 버는 것이 집에 돈이 三千五元이 들어간 이것을 한 푼이라도 잃고는 팔지 않는다면 나의 금같은 시간만 허비하고 이 조그만 타운에만 있을 수 없다 하고 값은 고하간에 이곳 집을 팔아치워야 앞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곳서 한 사십 마일 밖에 있는 벤톤하버라는 타운에 가서 집 거관을 찾아가서 집 팔 말을 한즉 지금 세월이 좋지 못한 때에 조그만 타운의 집을 팔기가 어렵다고 하면 이곳 실과농장 一百 에이커와 바꾸자고 한다. 그래서 농장을 나가보자하여 거관과 나가보았다. 때는 七月 초상인데 포도밭 二十 에이커에 포도가 참 잘 열렸고 복숭아 열 에이커도 잘 되었고 후레쉬베리가 七, 八에이커나 되고 헤이와 콩 심은 땅이 수십 에이커 있는데 밭머리로 벤톤하버 내왕하는 전차가 있어 농산물을 이 전차로 이운할 수 있다. 그러나 농장 값은 一萬五千元이요 내 집은 三千五百元을 때우고 이것을 감하여 내더라도 아직 一萬一千五百이 남는다. 이 남는 돈을 五分변을 하여 줘야 되고 또 매년 오백 원씩 물어줘야 되고 이 농장을 나의 이름으로 옮겨놓은 날부터 정부세납 근 이백 원을 내가 물게 될 것이 이 농장을 집과 지금 바꾼다 하더라도 이 농장을 내해를 만들자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과 같으니 만일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정말로 나갈 수가 있다면 나도 이 농장을 내해를 만든다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농장에 한 가지 보는 것이 있어서 바꿀 생각이 있다. 지금 이 농장에 실려 있는 실과가 나보기에 수삼천원 어치가 잘 있다. 나는 집도 원치 않고 농장도 원치 않고 오직 무슨 사업을 하나 시작할 자본 돈 천원이나 이 농장에 열린 실과에서 얻게만 된다면 나는 이 농장을 버리고 갈 작정이니 농 값을 감하여 보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나의 三千五百元짜리 집과 이 농장에 열린 실과와 맞바꾼 셈이다. 그러나 농주는 명년 일년만 이 농장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五百元 매년 무는 것을 받아먹고 또 정부세납 근 二百元을 내가 물게 되면 나의 발이 점점 깊이 들어가서 이 농장을 떠나지 못할 것을 희망하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포수가 범을 잡으려다가 범한테 물리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 농주는 어떤 사람인가? 벤톤하버에서 패물상점 보는 유태인이다. 유태인 천성이 총명하고 상업의 이해를 잘 내다보는 사람인 것은 나 혼자만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 사람이 다 이와 같이 동일하게 말하니 희한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 나라 과실 농사는 실과나무 밑동은 회칠을 매해 이른 봄에 하고 여름에 과실이 맺히면 화학물을 기계에 메어가지고 실과나 실과나무 전신을 뿌리는 것은 독기를 가진 흰파리를 제외하여 실과에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하기위하여 연년 이와 같이 하는데 이 농주 유태인은 이 농장에 과목을 위하여 금년에 이와 같이 약물을 포도밭에 뿌리지 않은 관계로 그 잘 열린 포도밭에 독기를 가진 흰파리떼가 수수 千萬이 와서 자라나는 포도를 쏘아서 썩기 시작한다. 동네에 사는 농부들이 우리 포도가 썩는다고 지금이 늦기는 늦었으나 안하는 것 보다는 나을 듯하니 빨리 약물을 뿌리라고 일러 주길래 사람과 기계를 얻어다 한 五十元 허비하고 다 뿌렸다. 이미 독파리가 터치한 포도 알이야 약을 뿌려서도 썩을 것이나 아직 독파리가 터치 안한 것은 구할 수가 있다고 들린다. 이것이 다 나의 운 불길하여 하필 이런 유태인의 농장을 만나서 실과가 다 썩었다. 지금 후레쉬베리를 따서 시카고 커미션 하우스로 부친다. 그럼 이 커미션 사람은 나는 모르고 다만 이 동네에 농군들이 부치니 나도 이 번지로 베리와 포도를 따서 상자에 놓고 회사와 그 번지만 써서 밭머리의 전차길 옆에 갖다놓으면 전차가 지나가다가 집어 싣고 가서 철로로 시카고로 보내주면 한 삼일 후면 우리 농장 우체통에 은행표가 온다. 이것이 좀 싱겁고도 이 커미션한테 많이 잘 여윈다. 그러나 달리 하는 방책이 별로 없어서 이 야근 농부들은 다 이같이 하니 나도 따라갈 수밖에 없이 된다. 이와 같이 따서 실어서 보내면 책이 오는 것을 모아놓은 것이 한 一千元 잘 된다. 실과 외에는 헤이가 한 수백원 어치 있다. 이것만 다 팔면 우리는 농장을 떠난다는 기별만 하고 우리는 콜노마라는 곳으로 가기로 다 준비를 하여놓고 농주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농주가 나오기로 우리는 떠나려 하는 때에 농주 유태인은 우리를 한 일 년 더 있어서 시험하여 보지않고 속히 떠난다고 감언이설로 주저앉히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떠나는 길을 막지 못한다하고 우리는 떠나서 콜노마라고 하는 인구 六百명 사는 타운으로 왔다. 지금 떠나 온 농장에서 애나라는 딸을 낳아가지고 이곳에 일곱 식구가 왔다. 이 콜노마가 인구도 적고 타운도 보잘 것 없는 한 조그마한 농장 타운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조그마한 찬관을 五百元에 사가지고 왔다. 이곳 타운은 아주 볼 것이 없으나 자동차 탄 행객이 연락부절하는 큰 하이웨이 두 대로가 걸쳐놓은 그 옆에 스탠다드오일스테이션 마당을 연접하여 여기 멈추어 가지고 기름을 자동차에 넣을 때에 우리 집에 들어와서 음식도 먹고 담배와 소다 캔디 껌 온갖 것을 사가고 또 이 근경에 파우파우라는 유명한 호수가 있어서 여름철이면 피서하러 오는 사람이 사처에서 들어와서 돈을 쓰는 곳이요 또 타운에서 수삼 마일 밖에 나가면 크리스탈 팰리스라는 댄싱홀 있어서 사람이 밤낮으로 복작 복작하는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업을 큰 도시에서 하는 것 보다 흥성하게 잘 하여 수천원 잡았다. 이곳서 영팰러라는 아들을 낳아서 잘 자라나고 사업이 잘되어 유족하게 다시 살게 되었다. 시카고 있는 한인들이 내가 이곳 와 사업을 잘하여 여러 천원 자본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 수삼백 마일을 찾아와서 돈들을 취하여 달라고 성가시게 군다. 그러나 멀리 찾아와서 사정하는 것을 몇 십원씩 안 취하여 줄 수 없어서 수백원 취하여 줄때 뿐이지 받을 수는 없다. 이곳 오기 전에 쿡북을 써서 三百五十元 얻은 그 돈을 다 써버리기 전에 무엇을 하나 차려놓고 벌어먹으려고 유홍도 한 二, 三百元만 취하여 달라 하였으나 일 푼 없다고 냉랭히 거절하던 유홍도는 그때에 없다고 하던 돈이 어디서 갑자기 나서 써비아 사람과 끼리에서 찬관업을 하다가 불과 반년 동안에 실패를 당하고 나를 찾아와서 지금 시카고 정태은 김흥기 몇 사람이 찹수이 홀 세일을 시작하는데 고본을 내고 사면 그 회사에서 일을 얻어 할 수 있다고 하기로 나는 두말안하고 五百元을 내어주었다. 유홍도가 나에게 어떻게 한 것을 생각한다면 좀 의심이 불안할 것이나 나는 아무 말 안하고 공손히 주었다. 이 돈을 받아가지고 시카고로 간 유홍도는 정앤회사에 고본주가 되고 또 여기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편지를 하면서 지금 사업이 잘되니 나도 한 一千元 고본 내라고 자주 편지가 온다. 그래서 나도 一千元 어치 고본을 사라고 돈과 편지를 하였다. 얼마 후에 유홍도 씨가 편지하기를 지금 이 회사 간부들이 문세로 고본주들을 속속히 들어와서 문부도 조사하고 고본주들이 서로 싸우는 것도 잘 정돈시키라고 자주 편지를 한다. 그래서 한번 들어가 보았다. 고본주로 이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무식하여 문부 같은 것이 어찌되는지 알지 못하나 유홍도는 밤일을 혼자 하면서 문서책을 밤마다 상고하여 본 결과로 희미한 것과 수입 지출이 맞지 않는 것을 가지고 여러 고본주들에게 하여 이 사람들이 회사간부들을 도적놈이니 죽일놈이니 하고 떠드는데 이 사람들은 내가 이 회사의 그 중 고본을 많이 내었으니 내가 와서 다 정돈시키고 나갈까 고하고 나한테 온갖 부정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회사의 사장은 정태은이요 서기와 재무는 김홍기다. 이 두 사람이 배가 맞아서 고본주들을 속인다고들 하나 나는 이 두 사람 다 오랜 친구가 되 시비쟁탈 하기 원치 않으므로 이 불합한 회사에서 고본을 찾아가지고 나오는 것이 상책인 줄 알고 사장 정태은 씨 하나는 이 회사에서 나갔으니 나의 고본을 내어 줄 수 있는가 한즉 지금 현금 없으나 한 六삭 후에 찾아 쓸 은행표로 준다고 하기로 좋다하고 받아가지고 콜노마로 돌아와서 여전히 사업을 하면서 六삭 동안을 지내고 다시 시카고로 들어가서 이 돈 一千元을 찾으려고 여러 날 호텔에서 묵으면서 정태은 김홍기를 매일 교섭하나 돈을 찾을 수 없어서 근 백원 경비만 없애고 또 돌아왔다. 一千九百三十年은 미국에 경제공황이 와서 각양 사업이 대 타격을 당하는 때에 이 잘되던 사업이 경비를 지탱할 수 없어서 큰 타운 센조셉으로 옮겨와서 근 일 년 시험하여 보았으나 경제공황은 점점 더하여 콜노마서 七, 八千元 잡았던 것이 양년 동안 경제공황이 다 가져가고 근심과 고생만 남겨 놓았다. 이런 형편에 처한 나는 돈을 다시 잡을 만한 신개척지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이 되는 때에 시카고 정앤컴퍼니에서 인디애나폴리스에 찹수이 지점을 두었던 것을 나의 고본 一千元 대신에 받고 말라 하기로 나는 정태은 김홍기 양인과 같이 가 보았는데 이것은 찬관 같이 차려놓지 않고 문안에 사무 보는 테이블 한 개와 교자 네개가 있고 주방에는 아이스박스 한개와 천찬 만드는 가마 두개 걸어놓은 것 뿐이니 이것이 어찌 一千元어치가 될까. 사업도 없으니 팔아먹을 물건도 비로 쓴듯하게 없다. 그러면 이곳 이것이 단 二百元 어치가 못된다. 그러나 시카고 정앤회사는 불원간 거판하게 된다고 하니 이것이라도 안 받는 것보다는 날까하고 이것을 부득이 받고 一千元 은행표를 다시 주고 말았다. 나는 센조셥에서 하는 찬관은 오늘 낼 문을 닫게 되는 고로 쿡 하나와 상 심부름하는 처녀를 얻어두고 아내와 관할하라고 하고 나는 인디애나폴리스로 혼자와서 한인 세일즈맨 한 분을 두고 이 사업을 개시하였다. 어떤 날은 十元도 어떤 날은 五元도 어떤 날은 한 푼도 사지 못하는 날이 종종 있어서 문서책에 기록할 것이 없었다. 나는 이 나라에 와서 각양사업을 수십 년 하여 보았으되 이와 같이 사업이 안되어 한푼 못 산 날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업을 문을 닫고 그만둘 생각은 없어서 그냥 끌고 나간다. 전기 가스 전화 집세를 주지 못하여 수백원 걸머졌다. 그러나 공황이기 때문에 독촉은 안하고 장차 물어줄 기회를 준다. 경제공황은 차차 풀리기 시작하여 각양 사업이 전과같이 소비량이 올라감을 따라 제조량도 높아지니 자연 무직업자가 직업을 얻게 되어 돈을 벌게 되니 온갖 물건 매매고가 올라가서 공황이 풀리고 옛 상태를 다시 가지게 되는 때에 나의 사업도 지금은 경비 염려가 없이 되고 차차 조금씩 여재가 넘어선다. 이곳은 三十萬명 인구를 가진 과히 적지않은 타운에서 찹수이 홀 세일하는 사람은 나 하나 밖에 없으므로 값도 상당히 받고 큰 회사와 병원과 사가에서들 와서 사가기를 시작하여 매일 五, 六十元으로 七, 八十元씩 수입이 되어 공황 때에 졌던 빚을 다 갚고 사업 처소를 일층 확장하여 놓고 잘 하는 때에 뉴욕에서 찹수이 홀 세일을 하는 친찹스컴퍼니에서 큰 도시마다 지점을 두기 시작하여 이곳까지 왔다고 소문이 난다. 그러나 친컴퍼니 사람은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다. 이곳에 친찹스 지점을 둔 것이 아니고 친찹스 팔아주는 세일즈맨 하나를 두고 클리블랜드에서 만들어서 매일 밤 철로로 부쳐 보내는 것을 이곳에 있는 세일즈맨이 아침마다 나가 찾아서 제 자동차에 다 싣고 다니면서 팔아가지고 제 커미션 10%를 제하고는 클리블랜드로 매일 부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다니면서 파는 찹수이는 나보다 매 갤런 二十五錢으로 三十錢씩들 받는고로 나보다 갑절 사업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 친찹수이 때문에 근심이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친찹수이 세일즈맨을 한번 만나보고 내가 이 사람에게 커미션을 좀더 주고라도 이 사람 이용하는 것이 나의 사업에 영향도 받지 않고 큰 이익이 될 것을 분명히 내다보고 이 사람을 만나려고 사방에 주선을 하여본 결과로 하루는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젊은 유태인이요 이름은 랭이라는 사람인데 세일즈맨 자격이 잘 되어 보이는 사람이다. 나는 말하기를 시작하였다. 당신이 이곳 사람으로서 이곳서 만드는 찹수이를 두고 먼 지방에서 만드는 찹수이를 팔아줄 필요가 무엇이오. 내가 지금 당장에 세일즈맨을 원하니 나의 찹수이를 좀 팔아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또 친찹수이 회사에서 커미션을 얼마를 받습니까? 한즉 이 미스터 랭의 대답이 10%를 받는다 하기로 나는 15%을 줄 것이니 내 찹수이를 팔아줄 수 있는가 한즉 수일 후에 와서는 알게 하여준다고 하고 간다. 나는 이 사람이 수일 후에 와서 나의 찹수이를 팔아주기를 고대 고대하고 기다렸다. 三日 후에 이 사람이 찾아와서 친찹수이 팔기를 그만두고 우리의 일을 보아준다고 하기로 나 대희 하였다. 내가 지금 이 랭이라는 사람이 우리 일을 보게 되는데 대희하는 것은 이 사람이 친찹수이스 팔던 커스터머를 많이 갖고 나한테 들어오는 것이 우리의 커스터머보다 많다. 매일 四, 五十갤런을 더 팔게 된다. 이 랭이 들어오자 사업은 삼 갑절 되어 매월 칠, 팔백원에서 팔, 구백원 이익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일을 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알고 이 사람에게 상당히 대우를 한다. 그래서 이 사람도 만족하여 만 일년 동안을 우리와 같이 있는 동안에 이 사람도 수三千元 벌었고 나도 六, 七千元 잡았다. 이 세상 원리는 무엇이고 그대로 있지 않고 바뀌는 변동이 있는 것은 천연한 이치인줄 안다. 사람은 젊어서 늙어지고 아름다운 꽃도 피면 떨어질 때가 있고 부자가 가난뱅이가 되고 가난뱅이가 부자가 되는 이것이다. 이 세상 원리원칙으로 되는 것이니 나도 이 원리원칙에서 살아가야 될 줄 아는 동시에 나의 사업을 도와주던 랭이라는 세일즈맨 일을 그만두고 이곳에 있는 폭스자동차 회사로 들어가서 세일즈맨 일을 얻었다고 우리 집일은 그만두고 갔다. 그러나 랭이 가지고 들어왔던 그 커스터머들은 그냥 찹수이를 가져간다. 나는 이 곳곳에 사년 동안을 있는 동안에 이곳서 공부하는 학생 두어 사람을 사귀었는데 장기영 김창수 이 두 학생은 매일 만나게 됨으로 매우 친절하게 되었었다. 학생 두 분은 고학을 하는 때에 물론 부족할 것이 많아서 나한테 돈도 취하여가고 시장할 때에 음식도 내 집 같이 와서 자시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고통스럽다고 한 적이 없고 三年 동안을 한결같이 공급하고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왔었다. 장기영 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한 일 년 동안 세일즈맨으로 타지방으로 갔다. 지금은 임병직 씨라는 분이 오셔서 찹수이 세일즈맨 잡을 달라고 하여 주었다. 이때는 하절이라 사업이 저락되는 때이므로 한 서너달 하다 그만두고 가셨다. 김창수 씨는 의학을 마치고 나와서 있는 때에 셀루이스에 만 호스피탈에 가서 에리테순이라는 오줌통에 병든 것을 특별히 공부하려 하나 이곳 올 경비도 없고 와서 기숙할 경비가 없어 할 수 없다고 걱정을 하기로 셀루이스에 내 친구 한분이 있으니 기숙할 걱정은 없고 갈 차비는 내가 줄터이니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하라고 하였다. 나는 셀루이스에서 찬관하는 친구 유홍도 씨한테 편지하기를 지금 이곳서 학생 한 분이 귀처로 가니 사업에 무엇을 좀 보살펴 달라고 하고 기숙을 그 학생에게 무료로 시킬 수 있는가 물었더니 반가이 응낙하기로 김창수 의사를 셀루이스로 보내고 보니 이곳에는 매일 만나보던 학생은 한분도 없이 다 갔다. 지금은 셀루이스에 있는 유홍도 찬관 셋이 다 재판에 걸려서 율사를 사가고 재판을 하는 중에 돈이 없다고 五百元만 보내달라고 하여 보내주었다. 그 다음에는 나에게 와서 이 패판사건을 와서 맡아가지고 처리하여 달라고 편지가 자주 온다. 그러나 나의 찬관을 문을 닫고 갈 수 없다. 이러는 때에 한인 가운데 일도 안하고 이리저리 다니는 어중이떠중이가 하나둘 몰려와서 유홍도 일을 도와준다고 뜯어먹고 속여 먹는다는 기별이 자꾸 온다. 내가 보낸 학생 김창수 의사도 내가 와야 이 일을 바로 잡겠다고 빨리 오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사업을 그냥 두고는 갈 수 없다고 회답하고 이 사업을 조치 되는대로 간다고 하였다.한 일년 동안 헤어졌던 장기영 씨가 왔다. 나는 반가웠다. 내 생각에 돈을 좀 벌어가지고 온 듯하여 나의 찬관을 사서 하여보라고 하였다. 장기영 씨는 마음은 있으나 할 줄 모르니 사면 어떻게 합니까 한 다음 만드는 것은 내가 얼마동안 가르쳐 줄 것이니 염려말고 사라고 하니 값을 묻는다. 그래 내가 값을 많이 받으려고 장한테 팔라는 것이 아니고 장형께 사업할 기회를 드리려고 하니 값을 많이 달라지 않고 二千元주면 이 안에 있는 온갖 물건을 다 준다고 하였다. 장형은 사기로 허락하고 현금으로 三百元만 주고 여재 一千七百元은 매월 七十元씩 벌어 문다고 하니 나는 좀 불만하다. 그러나 이미 이분을 도와주려고 하고 이 잘되는 찬관을 二千元에 내어놓는 때에 현금이나 페이먼트가 적다고 안 팔 수 없어서 장형의 원대로 다 허락을 하고 나는 장기영 씨에게 찹수이 만드는 법을 근 일삭 동안 실제적으로 가르쳐서 이 분이 넉넉히 할만 하기에 나는 어서 유홍도 씨의 찬관 셋에 대한 재판사건을 도와보려고 셀루이스로 오게 되는데 장기영 씨는 아직 어떤 값 많이 받는 찹수이는 아직 서투르니 내 아내가 한주일 떨어져 있어서 도와달라고 또 중학교를 방금 마치고 있는 딸애가 문서를 맡아보던 그것을 다시 맡아서 도와달라고 하기에 내 아내와 같이 떨어져 있어서 얼마동안 도와주다 나와 같이 셀루이스로 다 왔었다. 지금부터는 유홍도 씨 사건을 내가 맡아가지고 이 일을 정돈하기에 전력하게 되었다. 유홍도 씨가 자기 찬관 셋이 무슨 사건으로 재판에 걸리어 가지고 일년 동안이나 끌고 나오는 것이 무슨 일인가? 지금으로부터 二年前에 유홍도는 이곳에 청찬관을 하나 열 때에 청인 둘을 갖다두고 얼마동안 하여 나가는 때에 사업이 괜찮게 잘 되어 여기서 돈을 좀 잡게 되니 이 두 청인한테 이 사업이 더 잘되면 월급외에 이익을 나눠주마 한 언약이 있었고 또 이 찬관 시작할 때에 이 두 청인의 돈을 한 五百元 취하여 쓴 일이 있었는데 아직 갚지 않고 있다가 지금 이 찬관에서 이익 난 돈을 가지고 나와서 다른 위치에다 찬관 하나를 또 내고 이 찬관에도 청인 둘을 두고 또 이익이 있으면 월급외에 이익을 나눠준다는 언약이 있었다. 얼마 후에 이 찬관 두 곳에서 얻는 이익을 뽑아가지고 나와서 또 다른 위치에다 第一, 二보다 크게 내고 청인 매니저를 두고 하여 나간다. 그러나 사업이 잘 되지 않는 중 청인 매니저한테 속고 잘리기 시작하여 빚을 지기 시작하는 동시에 마침엔 두 곳에서 이익이 있던 이 두 곳도 밑진다고 주인 유홍도한테 물건 값을 물어주라고 보낸다. 실상 처음 연 두 찬관에 이익이 나지 않아서 물건 값을 못 갚는 것이 아니고 유홍도를 속여 먹기 위하여 일부러 이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청인만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이 경위가 되었다. 이 찬관 셋이 다 유홍도의 것인데 청인 일꾼을 한 곳에 둘씩 두고 한 주일에 한번씩도 가서 문서와 사업되는 형편을 조사하여 보지 않고 한달에 한번도 가지 않고 청인들에게 그냥 맡겨두고 본즉 부처님이나 성인군자가 아니고 사람인 이상에야 죽어서 무슨 부처가 되겠다고 속여먹을 기회를 주는 이것을 안 속여 먹을 어리석은 놈이 없다하고 속여 먹을 수 있는 대로 속이는 것을 유홍도도 모르는 바가 아니니 분이 나고 마음이 상하였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유홍도는 율사를 사가지고 이 두 찬관에 가서 청인을 다 내몰고 문을 걸어 맸다. 이 두 곳에서 쫓겨나간 청인 넷이 분하여 유홍도를 걸어서 재판을 하게 되었다. 이 청인들의 재판하자는 이유는 그 찬관 셋이 다 같이 이익보자는 약조가 있으니 우리를 이같이 쫓아 낼 권리가 없고 유홍도가 우리의 돈을 취하여 가지고 시작한 찬관에서 이익을 많이 얻은 그것을 나눠주지 않고 혼자 다 가졌으니 이것을 오분파 하여 나눠달라는 것이 청의 지금 정장하는 이유라고 한다. 그러나 유홍도는 이 청인의 이유가 다 거짓이라고 한다. 하여간 청인의 율사는 유력한 사람이요 유홍도가 산 율사는 나이도 어리고 쿠룩질이나 하여먹는 율사가 되어 재판도 하기 전에 이렇게 저렇게 벌써 돈을 五, 六百元 갖다먹고 일년이 잘 되어서 아직 재판은 끝이 안나고 이 율사놈은 매일 계집을 데리고 와서 三, 四元 어치씩 먹고 간다. 유홍도는 병까지 나서 찬관 윗층에 누워서 앓고 찬관사업과 이 재판 사건은 내가 전부 다 맡아가지고 정돈시키려고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여 본바 우리의 율사를 무슨 모양으로든지 쫓아내고 우리끼리 해야 이 사건이 빨리 해결이 날 줄 알고 율사 냉글을 만나서 지금 유홍도는 돈이 일푼도 없이 되어서 재판을 이긴다 하더라도 한 푼 찾을 케이스가 못되는 것을 가지고 율사를 고용하여 율사 비를 더 낼 수 없으니 당신은 오늘부터 이 케이스를 놓고 물러나라고 하니 나를 불량한 태도로 건너다보며 내가 와서 이 사건에 율사없이 정돈시키라는 것은 잘못이라고 이해를 설명한다. 그러나 내가 율사없이 이 사건을 넉넉히 정돈시킬 수 있으니 당신은 물러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곳 오기 전에 청인을 내몰고 문을 닫던 찬관 두 곳은 하인을 한 곳에 하나씩 보내어 사업은 한다. 그러나 유홍도에게 무슨 이익이 있나. 한 곳에는 강정근이요 한곳에는 유재익이가 매니저라고 하면서 청인들 있을 때보다 더 쿠룩질 하니 이익이 있다하더라도 주인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이 강정근이라는 자는 미국 온지 사십여 년 동안에 하루도 노동을 안 하고 잘 먹고 잘 입고서 양여자에게 수삼 차 장가를 들었던 사람이다. 이곳 올 때에 一分 없던 사람 지금 매일 저녁에 우리 로이 부처를 데리고 반반한 나이트클럽으로 다니며 우리 로이의 마음을 사가지고 자기에 무슨 양탁을 채워보려고 우리 로이와 아주 친절하게 되는 때 유홍도 찬관 셋을 다 제 이름으로 옮겨놓고 이것을 다 자수어인지공을 하려고 다 만들어 놓은 것을 나는 알고 마침 우리 로이를 물리친 것이 강정근과 우리 율사 사이에 이런 음계를 꾸미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한 것이었다. 며칠 후에는 강정근도 가라고 월급을 다 회계하여 주어서 보내었다. 아직 한인 한 분이 있어서 겉으로는 유홍도를 도와주는 척 속으로는 제 망태 속만 채우고 있는 분이 있다. 지금 이러한 형편에서 청인 네 사람도 손해가 는다. 이 네 사람은 서양인 호텔에서 여러 달 묵으면서 이 재판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전화로 이 청인 있는 호텔을 불러가지고 청인과 말 좀 하자고 하니 청인이 대답하기로 나는 유홍도의 친구로 이곳 와서 당신네들 재판사건을 평화적으로 당신들과 정돈하려고 하니 오늘 나 있는 찬관 윗층으로 올 수 없겠냐고 물으니 저희는 오기를 원치 않으니 나에게 저희 있는 호텔로 오라고 하기에 간다고 하였다. 나는 지 청인을 찾아가서 서로 인사하고 앉아서 나는 말하기를 시작하였다. 우한·청(한국·청국) 양국인은 무여 형제와 같은 처지를 가지고 외국법정 등장하는 것이 우리 양편 율사만 좋게하고 우리 양편은 다 손해 밖에 날 것이 없으니 왜 우리끼리 이만한 일 조치를 못하리까. 나는 벌써 우리 율사를 물리치고 당신들과 친히 교섭하려고 내가 지금 찾아왔으니 당신들이 유홍도한테 요구하는 조건이 무엇이오. 말씀하시면 내가 할 수 있으면 하여보려고 찾아왔노라 한즉 이 사람들이 말하기를 취하여 준 돈 五百元과 월급으로 지난 두 달치 못 찾은 것 四人에 六百元, 우리 넷이 오, 육삭 호텔비와 율사비 하여 一千二, 三百元이 되니 우리는 三千元 하나를 받지 않고는 쌔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유홍도는 지금 일 푼 전이 없으니 당신들이 지금 말하는 三千元을 돈으로는 받을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인즉 돈으로 받으려고 집을 쓰고 시간만 허송하는 것보다 능히 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면 당장에 내가 허락할 터이니 당신들이 내말을 들을 테요 한즉 말을 하라고 한다. 당신들이 잘 아는 유홍도 찬관 셋이 있으니 이 셋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가지고 이 케이스를 쌔틀하려면 내가 당장에 허락할 터이니 셋 중에 어느 것을 가지려 하오니 탤마에 있는 것을 원한다고 한다 하기로 나는 허락을 하고 청인의 율사한테 가서 법적으로 후페가 없이 잘 쌔틀하자고 하여 청인들은 이곳에서 큰 사업하는 청인을 데리고 율사에게 갔다. 이 청인, 이곳에 있는 청인의 시장이라고 백인들이 알아주는 사람인데 성명은 죠린이라 하면 이곳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는 지금 율사한테 와서 모든 일을 다 법적으로 만들어가지고 청인 네 사람의 사인과 나의 사인을 한 조약서를 각기 한 장씩 가지고 서로 웃는 낯으로 손잡고 인사를 피차에 교환하고 헤어지니 이때에 오래 승강하고 나오던 사건이 결말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 길로 유홍도한테 와 이와 같이 쌔틀하고 온 것을 다 설명하니 유씨도 이제야 마음을 놓게 되었다. 지금은 찬관 둘이 아직 있으나 큰 것은 매월 수백원씩 밑지고 적은 찬관은 잘만 하면 이익을 낼 수 있다. 그런 그동안 재판사건으로 근 일년 동안을 불신용한 사람들을 갖다 두고 사업을 하느라고 남의 빚을 이천여 원을 걸머졌다. 이 사람들이 빚 받으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매일 몇인지 알 수 없고 빚달년에 사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빚들을 청산하여 버리려고 빚 받으러오는 사람에게 이왕 주인은 이 사업을 거판하고 그만두는 것을 내가 하여보려 하나 빚을 청산하기 전에는 나도 원치 않는다 하면서 이 빚을 25%로 받아가기를 원하면 내가 매월에 二十五錢 내준다고 하니 통째 잃는 것보다 낫다고 다 찾아간다. 그러나 시카고 청인 탐챈회사에 진 빚 八百여 원은 25%에 받지 않겠다고 거절을 한다. 그래서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청인의 율사를 찾아가서 그린 스트리트에 있는 유홍도 찬관을 내가 목게지 전당을 잡아야 되겠으니 목게지를 내 이름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면 시카고 청인탐챈이 이 찬관을 법률로도 앗을 수 없이 만들어 놓고는 이 모게지 페이퍼는 유홍도한테 갖다주고 나는 아무 상관치 않았다. 이 잘되고 적은 찬관은 유홍도가 하고 나는 사업이 잘 안되어 밑지는 큰 집을 맡아가지고 한 삼삭 시험하여 보아야 별 수가 없어 八, 九百元 버리고 유홍도한테 문을 와 닫든지 와서 친히 하든지 나는 내 돈을 여기다 더 집어넣지 않겠다고 하니 문을 닫고 물건은 다 우리 집 그라지에다 다 갖다 적재하여 두라고 하여 나는 이것을 옮기느라고 죽을 애를 다 썼다. 나는 우선 살림할 집을 하나 사고 한동안 쉬기로 작정하고 좀 한가하게 쉬고 있다. 그러나 사업에서 수십 년 밤낮 분주히 노력하다가 이같이 아무 것 안하고 들어앉으니 별 취미도 없고 갑갑하기 짝이 없으므로 무엇을 다시 경영하고 있는 중에서 뉴욕 월 스트리트에서 백만금 부자가 잠시간에 오고가는 스톡 마켓 노름을 한번 하여 볼 생각이 나서 신문을 매일 사다놓고 수만 종류의 스톡 가운데서 어느 놈을 택하여 사야 돈을 남길까하고 궁리를 하고 또 하다가 U.S.Steel을 택하여 가지고 一百고를 四千五百元을 주고 사니 정부 세납과 사주는 구전을 다 병하면 四千六百元 가량이 들어간다. 이 스톡을 사놓고 집에 와서 신문을 사다놓고 각양 스톡 값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살피고 있다. 내가 산 스톡이 매일 오십 전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한 주일 잘 지내서 내가 산 스톡이 매 고에 五十元이 올라갔다. 매 고에 四元씩이 올랐으니 四百元이 남는다. 나는 팔까말까 하다 만일 내려가면 팔 기회를 놓칠까하고 얼른 샀던 은행에 가서 빨리 팔아달라고 하니 벌써 뉴욕에서 우리 전보를 받고 벌써 팔았다고 하는 회전이 왔다. 이 판 스톡 값을 은행에 맡기고 집으로 돌아올 때 기쁘기 한량없고 백만원 그림자가 내 눈앞에 어른어른하니 용이하게 잡을 듯하다. 나는 샀던 스톡을 팔고 와서는 이 스톡이 훨씬 내려가기를 기다려서 퍽 내려가면 또 사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한 주일 동안을 기다려도 별로 변동이 없다가 두주일이 되자 四十一元에 떨어진다. 나는 빨리 은행에 가셔 U.S.Steel 一百五十고를 사달라고 하고 그 은행에서 한 반시 기다리고 있노라니 四十一元에 샀다고 하기에 돈을 다 쳐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매일 신문만 들여다보고 있다. 근 세 주일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五十二元에 올라갔다. 그러나 은행은 벌써 닫았다. 할 수 없이 명일을 기다려 은행에 가서 팔아달라고 하니 밤새에 五十錢 내려가 五十一五錢에 팔아가지고 그 돈은 또 은행에 맡기고 왔다. 이번에 一千五百元을 남기었으니 나는 사업을 고생스레 하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이 해 一年 동안에 일곱 번을 맞추어서 三千七百여 元을 벌었다. 그 이듬해에는 찬관사업 또 하게 되어 시간도 없어서 이 노름을 칠, 팔삭 그만두고 사업에만 종사하고 나가는 동시에 스톡 노름을 한번 크게 하여볼 생각이 늘 심중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스톡 노름을 바로만 하면 돈을 꼭 잡는 것인데 이것도 한 잡기와 같아서 실수 없는 편으로 하다도 허욕이 나서 속히 큰 돈을 잡으려고 하다가 실패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스톡 노름을 실수없이 하려거든 우선 좋은 스톡을 골라서 살 것이요 둘째로 주의할 것은 내 자본이 적으면 적게 살지언정 많이 사서 이익을 많이 얻으려고 은행에 변을 얻어서 사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나의 자본이 적으면 적게 사서 시세가 올라가면 팔고 내려가면 팔지 않고 어느 때까지라도 쥐고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어서 다소의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마는 나의 자본이 적다고 은행에서 변을 얻어 사는 것은 위험하기 한량없다. 가령 내 돈이 四千元이 은행 있다면 60% 六千元을 은행에서 얻어 一萬元 어치를 살 수 있다. 만일 스톡이 올라가는 경우이면 돈을 많이 잡지마는 시세가 내려가는 경우에는 마음이 초조하고 겁이 나서 사람의 양심까지 흐려놓을 수 있는 동시에 스톡도 연일 내려가서 一百元 주고 산 것이 五十元이나 四十元에 고개를 숙이고 내려간다면 은행에서 빌려 준 돈에 손해가 날까하여 위협적으로 팔아서 저희의 돈은 건지나 고본을 샀던 사람의 자본은 한 푼 남지 않고 잃어버리고 마는도다. 지금 구주(유럽)에서 셔 쳄벌린과 히틀러 사이에 번익조약한 것을 히틀러가 배약함으로 구주(유럽) 각국은 第二次세계전이 일어난다고 떠드는 판이다. 나는 이런 소문을 듣고 전쟁이 불원한 장래에 올 줄 알고 공기선 보잉 스톡 一百고와 컷티스 一百고를 샀는데 내 자본은 五千元에서 더 없는 것을 가지고 은행에서 三千元을 얻어서 도합 八千元 어치를 샀다. 내가 이왕에 사서 재미를 본 U.S.스틸을 안사고 이번은 공기선 고본만 산 것은 第二次세계전쟁이 꼭 올 줄 알고 또 전쟁이 일어나면 공기선 스톡이 평시보다 무척 올라갈 줄 알고 산 것이다. 나의 예상대로 구주(유럽)에서 전쟁은 벌써 일어나서 적군이 렉센벅, 할란드(네덜란드), 벨기에 이 모든 소약국들을 돗자리 말 듯하여 가지고 앨사스트레인으로 나가서 불란서(프랑스) 파리성을 점령한 후에는 덕국(독일)에 유력한 공군은 매일 영국 런던과 각 도시들을 함락하여 그 화려하던 도시들이 잿밭이 되는 것을 보는 세계는 이번 전쟁에는 영국이 별 수 없이 망한다고 만구동성으로 떠들게 되는 동시에 뉴욕 스톡 마켓 값은 고개를 푹 숙이고 내려만 간다. 영국이 덕국(독일) 폭탄에 위협을 당하는 그것이 왜 미국에 스톡 마켓 값이 저락될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영국은 상공업이 일찍이 발달된 나라가 되어 세계 만방 어디를 가든지 영인의 자본이 머무르지 않은 곳이 없고 또 영인의 상공업의 세력이 확장되지 않은 곳이 별로 없으므로 월 스트리트 스톡 마켓과 은행에 영인의 자본이 없는 데가 없는 이 사람의 나라 영국이 히틀러 폭탄에 망하게 된다면 세계적으로 널려서 상공업자나 은행가나 다 일체로 망할 것이라고 할 것은 이번 전장에 전패한 독일을 보더라도 확실하다고 안 할 수 없다. 불행히 나는 이러한 현상이 올 줄 모르고 마진 스톡을 샀다가 실패를 당하게 되었으니 수원수구할 곳도 없고 다만 나 혼자 벙어리 ●가슴 앓듯 할 수 밖에 없었다.

    39 방사겸 평생일기 7권

    다면 이것은 인류 정의상에 차마 못할 일인 줄 알고 저는 임 장관한테 이같이 간청하오니 한 번 원수를 사랑하시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신 국가 건설하는 때에 바른 정책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고하니 이분도 어쩔 수 없이 유신덕 여사에게 여행권 준다는 허락을 하신다. 그래서 나는 반가운 마음을 가지고 유신덕 여사 일하는 시장통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 유 여사는 나에게서 무슨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왔나 하는 소망을 가지고 나를 맞는다. 지금 저는 외무에 가서 여행권을 얻기로 임 장관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왔으니 오늘 오후 한 시 좀 같이 가서 여행권 수속을 하자고 하니 이 유 부인께서 매우 반가워 하시기 한량없다. 같이 나가 찬관에 가서 점심을 사먹고 외무로 들어가서 임 장관을 다시 만나서 이 부인이 정덕근 씨 부인이라고 소리하고 여행권에 대한 말을 하니 자기 비서한테 벌써 말하였으니 비서실로 가라고 하여 우리는 고맙다고 말씀하고 비서실로 와서 유신덕 여사의 도미할 여행권 말을 하니 비서가 우리를 데리고 외무 차장의 사무소로 소리한다. 차장의 비서가 여행권을 만들려고 여러 가지 문답을 한 후에는 명토 범가항에 와서 찾아가라고 하여 우리는 나왔었다. 이튿날은 내가 다른 일 때문에 같이 못가고 유 부인 혼자 가서 여권을 얻어 가지고 왔다. 우리정부에서 유신덕 부인께 할 책임은 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큰 고지 하나를 더 넘어가야 비로소 미국가는 도정에 오를 수 있는 서울 있는 미국대사의 비자 입국허가를 얻어야 도미할 수 있다. 그러면 유신덕 여사를 위하여 내가 도와드릴 것은 다 하였다. 지금은 미국대사에게 비자를 얻어야 되겠는 고로 조카 방창덕을 시켜서 유 부인을 모시고 가서 비자 얻는 일을 도와주게 하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올 기한이 되어서 이 유신덕 여사의 일을 더 봐주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게 된다.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일을 더 봐줄 것은 미국서 조종억 씨의 부탁이다. 이분의 부탁은 본국에 있는 자기 아들을 체신부에 일을 하나 얻어주고 오라하였기로 나는 체신 장관 댁에서 거하고 있는 고로 체신 장관 장기영 씨에게 말하여 이분에게 일을 수월하게 열어주었으며 또 미국 있는 남정은 씨 부탁대로 자기 손자를 찾아보고 지금하는 사업이 변변치 않으면 잘되도록 가르쳐주고 나오라고 하였기로 이분의 손자를 찾아가 보니 자동차에 관한 여러 가지를 놓고 파는데 이런 사업이 우리나라에 적당한 사업이기로 나는 별로 가르칠 것이 없기에 좋은 사업이니 계속 발전시키라는 권면 몇 마디 하여주고 왔었다. 서울에 유명한 상업가요 자본가인 박흥식 씨를 나는 이왕부터 말은 많이 들었을지라도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 내가 이번 본국 가서 있는 동안에 상류계급의 인사들을 자연히 상종하게 되는 동시에 지용은 씨를 방창덕의 인도로 상종하게 된 것은 이 지용은 씨는 평양 숭실대학에 교장으로 계실 때에 방창덕이가 이분한테 훈도를 받고 있었던 관계로 피차 사제지의 분이었던 고로 자주 상종이 있었고 지금 지용은 씨는 박흥식 씨의 고문으로 계시게 되었는데 나는 방창덕과 같이 화신상회를 수차 구경하게 될 때에 이분이 나를 박흥식 씨한테 소개를 시켜 주어서 서로 알게 되었다. 나를 이분에게 소개하여 준 지용은 씨는 미국에 유명한 서북대학을 마치신 고로 영어를 잘 하시고 한문도 잘 하시는 동서양 학식이 풍부하신 분이요 사람 된 자격이 매우 자서하고 천성이 매우 정다워서 한번 상종하여 보면 경외하는 이 분을 자연히 가지게 되는도다. 이 분이 나를 박흥식 씨한테 내 소리하여 처음으로 면회하게 되었는데 저를 위하여 맛있는 과자와 커피를 아주 정다히 대접한다. 나는 이 유명한 상업가 박흥식 씨와 상업상에 관한 담화를 하여 보았는데 동서양 상업상 물게가 고상한 분으로 나는 존경하게 되는 동시에 이분도 나를 상업상의 형편을 좀 아는 줄로 짐작하시고 한·미(한국·미국) 간에 물화 통상할 것을 묻는다. 나는 우리의 물화 어떤 것은 미국으로 가져가면 맞지 않고 어떤 미국 물화가 우리나라에 가져왔으면 상당한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와 같이 이 분을 심방하고 돌아왔다. 수일 후에 박흥식 씨가 나를 다시 한번 만나자고 지용은 씨가 자동차를 가져오셨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지용은 씨의 자동차를 타고 화신상회로 갔다. 첫 번 이곳을 심방 왔을 때에는 화신상회가 얼마나 큰지 몰랐었지마는 이번에는 지용은 씨가 나를 데리고 화신상회 오, 륙층을 다 구경 시키는데 미국서 보던 디파트먼트 스토어와 같이 차려놓았는데 별로이 없는 물건이 없고 층층이 온갖 물건이 즐비하게 차려놓고 사람이 꽤 많이 들어오고 나간다. 한편에는 음식 파는 데를 차려놓고 음식을 파는데 양찬도 있고 한찬도 있다. 박흥식 씨는 나를 이 식당에서 대접하는데 음식이 다 맛나고 선명하게 장만하였다. 우리는 음식을 다 필하고 삼층에 차려 논 영화 연극을 한참 구경하고는 박흥식 씨 사무실로 와서 앉아서 한·미(한국·미국) 간에 상업을 통상할 의논을 하는 동시에 화신상회 각 부분에 ●여자와 서기와 고문관되는 분들 十여 인을 불러다놓고 나를 소개하는데 이 十여 인 가운데 미국대학 출신과 일본대학 출신이 여러분이다. 이분들을 모아놓고 자기회사에서 제조하여 파는 물건들을 갖다놓고 나한테 이러한 물건들을 미국에 가져갔으면 소용이 되겠으며 또 어떤 물건들이 미국 시장에 가게 되면 값은 얼마나 받게 될 것을 나한테 묻는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내가 방물 군자가 아닌 이상에 이분이 지금 묻는 여러 가지 물건의 값을 정확히 다 대답하지 못하였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상업가 집에서 자라나서 실제 시염도 많이 지내보고 미국에 와서 미국 사람들의 온갖 하는 상업도 친히 관찰하였고 또 내가 친히 여러 가지 사업을 하여 보았던 관계로 다 근사하게 말하였다고 스스로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루는 조카 방창덕이 찾아와서 박흥식 씨께서 나를 위하여 큰 만찬을 대접하기로 하였다고 명일 저녁에 가야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연회에 가기로 허락하였다. 이튿날 박흥식 씨께서 하인과 자동차를 나 있는데 보내었다. 방창덕은 나와 같이 가려고 와 있다가 같이 갔다. 박흥식 씨 댁은 반양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잘 지은 집인데 열 칸은 되어 보이고 방방이 차려놓은 것이 서양식인데 화려찬란하게 응접실 식당이 다 미국에 밀닌니여의 집에서 못할 것이 없다. 주인공은 우리를 기다리다가 들어가니 응접실로 인도하여 서양식에 물큰하는 교자에 앉히고 우리나라 권련을 권하기로 한대 피우면서 담화를 하는 동시에 화신상회 각 부분에서 일하는 사무원 가운데 부사장과 고문으로 계신 지용은 씨와 또 박흥식 씨 동서되는 金氏와 방창덕과 체신부 장관 장기영 씨와 주인당과 제가 참여한 연회였으나 그 진진한 재미는 대중이 모인 어떤 큰 연회보다 나았었다. 만찬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약주와 서양 위스키와 맥주가 있어 서로 부어 권한다. 이 연회는 나를 위한 연회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술과 음식을 나에게만 좀 권한다. 주안을 이 같이 나누기 시작할 때에 주인공이 내당으로 들어가서 부인을 모시고 나와서 나에게만 좀 소리를 시키고 장 장관에게도 소리를 시킨 후에 부인께서 맥주를 부어 나에게만 좀 준 후에 장 장관으로부터 다른 분들에게도 준다. 우리도 한 잔 부어 부인에게 드리니 우리나라 예절에 의하여 사양하시고 받지 않는다. 장 장관이 말씀하기를 부인께서 주시는 술을 우리가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는데 우리가 부어 드리는 이 회사에 잔을 부인께서 받지 않는다면 섭섭한 감이 없지 않다고 하니 박 부인께서 마지못하여 잔을 받아 마시고 우리에게 또 부어서 권한다. 이 박흥식 씨 부인은 일본서 음악을 전공하시고 수년 전에 박씨하고 혼인하여 사는데 연세는 삼십 가량인데 키가 날씬하고 동양 여자의 인물하고는 최상으로 잘난 부인이다. 비단으로 만든 한복을 입으시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우리를 접대하는 그 아름다운 태도는 우리 주위에 마음을 더욱이 기쁘게 하는도다. 나도 상당한 가정에 태어나서 온갖 맛있는 음식을 다 먹고 자랐지마는 오늘 이 연회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 가운데 이왕에 보지 못한 음식이 많다. 고기로 만든 것이 십여 종류요 채소도 여러 가지가 있고 나중에 잣죽까지 들어온다. 잣죽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먹어는 못 보았다가 오늘 맛을 보니 고소하고도 감미가 있다. 우리는 두어 시간 동안 마시고 잘 먹으면서 담화도 하는 동안에 만찬을 필하고 응접실로 나와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장래에 한·미(한국·미국) 간에 상업을 경영할 문제도 담화를 하는 동안에 커피와 과자가 또 나와서 한 잔씩 받아 마시면서 설왕설래의 상업에 관한 문제로 피차의 유익될 말을 많이 하고 각각 산회하였다. 주인공께서는 나를 위하여 기념품으로 하나 주신다고 하며 자동차에 다 넣어주시고 잘 가라하신다. 우리는 각각 처소로 다 돌아왔다. 나는 박흥식씨가 기념으로 주신 그 물건이 무엇인가하고 잘 봉한 것을 열어 보았다. 이것은 참 귀여운 기념품을 나에게 주셨다. 우리나라 식으로 만든 자그마한 궤짝인데 자기로 꽃단장을 화려 찬란하게 만든 것인데 미국 소용으로는 패물 담아두는 것이 되었고 또 다른 방면으로는 응접실에 한치장품에 하나로 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마음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박흥식 씨가 나에게 이와 같이 친절히 또 후대를 하는 것은 이 분이 나를 어찌 보았든지 한 상업가로 보시고 한·미(한국·미국) 간에 무역을 통상하여 보자는 생각을 가지시고 나를 이같이 위대하게 대접하시는 것이다. 하여간 나도 이 분을 한 상업가로 존경함을 마지않는 동시에 우리 신정부에 상무장관 하나 되리라고 나는 혼자서 생각하게 된다. 이 분은 천연적으로 상업가로 나신 분이 되어 상업상에 관하지 않은 문제는 별로 취미없이 아시고 보통 상업에 관한 말씀만 하시고 취미있게 들으신다. 나 역시 상업에 관한 문제를 취미있 듯고 또 내가 말 하는 것을 이 분이 아시고 자기의 물건을 다량으로 줄 것이니 미국에 화신상회 지점을 내고 날 과 관할하라고 하여 나는 흔연히 허락하고 와서 우리정부 상공부 장관 윤보선 씨를 찾아가서 박흥식 씨의 물건을 다량으로 미국으로 갖다 팔아서 한국에 가급적 소용되는 미국 물건을 사 보내 보려고 하니 윤보선 상공부 장관께서 좋은 경영이라고 찬성을 하면서 지금 우리정부에서 L.C. 법률을 준행하여야 한국 물건을 내갈 수 있다고 하면서 L.C. 관계를 설명하여 준다. L.C.법은 어떤 것이냐 하면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에 물건을 누구나 외국으로 내다팔려면 물건이 황금은행을 거쳐서 가는데 물건 찾는 지방에서 그곳 은행에 보증장이나 보증금을 가지고 가서야 찾는다는 것이다. 우리정부에 신법률이 이러함으로 박흥식 씨가 방사겸을 신용하여 물건을 준다하더라도 나의 실력이 이 물건을 찾을 만하여 은행에 보증장이나 보증금을 휘수할 수 없이는 본국 물건을 외국에 갖다 팔 수 없다 하기로 박흥식 씨가 준다는 물건을 그만두고 말았다. 내가 미국에서 여러 수십 만원을 보증할 실력도 없고 혹 있다 하더라도 본국서 나오는 물건을 선급주고 찾기는 원치 않아서 그만두고 만 것이다. 서울 있는 동안에 김충학이라는 상업가를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어떤 인고 하니 조카 방창덕과 동서간 되는 사람인데 지금 대구 석유회사에 사장으로 있는 이다. 큰 자본은 없으나 우리나라 돈으로 사, 오백만원은 가졌다 하는데 대구회사 외에 다른 상업을 겸하는데 한·미(한국·미국) 간에 무역을 하여보라는 경영을 가졌으나 첫째는 미국 형편을 모르고 둘째는 미국에 상업을 같이할 만한 친구 없어서 상업을 착수치 못하고 있던 차에 나를 만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알고 한·미(한국·미국) 간에 무역을 하여보자고 한다. 이 분은 경상북도 대구에 큰 석유회사에서 사장으로 있으니 대구 근경에 일을 잘 알게 되는 관계로 대구서 머지않은 포항에 있는 포린통조림 회사가 해방 이후에 문을 닫아 둔 것을 알고 이 통조림 회사를 얻어서 같이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해방 전에 일인의 소유이던 것을 지금은 이것을 적산이라 하여 정부에서 가지고 있으나 아직 비어두고 있는 것을 알고 우리는 이것을 얻을 기회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김충학 씨가 나더러 상공부에 들어가 이것만 얻어내면 나와 같이 하자고 하여 나는 상공부에 또 들어가서 윤보선 상공부 장관을 만나보고 포항에 있는 통조림 회사를 얻어 볼 말 하였다. 그러나 벌써 다른 사람이 이것을 얻기로 하였다고 하면서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고 경상북도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군 줄 알게 된 것은 경상북도 위원은 즉 임영신 여사인데 이분은 무슨 모양으로든지 세력과 재경에 탐심이 많기로 유명하다고 내지에서 지목하는 분이니 내가 이런 분과 경쟁하여야 쓸데 없다는 자신을 가지고 그만두고 말았다. 오늘날 현 정부에 당국자들에 하는 모든 행동을 본다면 백성을 위하기보다 자신들만 위하여 척산 가운데 똑똑한 것들은 다 정부에서 일보는 사람 또 이 사람들의 친척들이 다 가졌다고 이외에 백성이 좀 가졌다하는 것은 뇌물을 바치고 얻은 것들이다. 나는 우리나라 형편이 이러한 것을 알고 무슨 상업상에 기회가 없을 줄 알기 때문 다시 더 운동을 아니 하고 장 장관 댁에서 누님의 댁으로 옮겨와서 누님과 같이 한 주일 동안을 같이 지내다 十一月 十五日에 김포 비행장에서 비행선을 타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에 누님과 외조카 순영 순자 오누와 친조카 방창덕 내외가 비행장까지 나와서 다시 만나보지 못하겠다고 슬피 우는 정형을 볼 때에 나도 슬픈 정서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七十五세나 되신 누님을 이 六十九세 된 내가 머나먼 본국에 다시 나와서 만나볼 것 같지 않은 연고로 나는 일층 더 비감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순간에 떠날 비행선을 안 탈수 없는 사정이어서 서로 마지못한 상별을 하고 떠나서 한 사시 가량에 일본 동경에 도착하여 한시 가량 지체하여 비행선은 다시 나라스미야 섬에 잠시 멎었다. 일나스라인쪼려지에 도착하여 온갖 검사를 다 치른 뒤에는 재한국에 있는 미국대사한테 비자 입국증서는 이곳 이민국에서 거두어 워싱턴 사법부로 보낸다 하여 주었다. 이민조례 지가가 동양에서 들어오는 첫 미국 영지가 된 까닭에 이곳서 모든 이민조례를 오케이가 되면 미국 대륙을 아무 시험 없이 입국하게 되어서 나도 상항(샌프란시스코)까지 잘 왔었다. 나는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한 사, 오일 묵으면서 여러 친구들을 심방하고 나성(로스앤젤레스)으로 왔다. 나성(로스앤젤레스)에 와서 동지회관 윗층에서 한 주일을 묵으면서 센트루이스에 있는 가족을 데려 나오려고 식구가 살 주택을 하나 사놓고 가려고 이곳 있는 동지 조종익 씨와 집 여러 개를 돌아 본 가운데 지금 있는 이 집을 장차 사기로 작정하고 센트루이스 집으로 화차를 타고 가서 아침 여섯시 가량에 집에를 들어서니 어른 아이들이 다 죽었던 아부지 남편이 살아오는 듯이 반가워 한다. 나도 반가운 중에 오랫동안 심중에 두고 경영하던 본국 심방을 이같이 무사히 마치고 본가로 회경하여 친권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하다고 안할 수 없었다. 지금은 센트루이스 집을 팔아 가주(캘리포니아)로 나가 살 경영인데 이 일이 적은 일이 아니고 일 가운데 가장 어수선하고도 큰일이라고 안할 수 없다. 우리네 집을 사겠다는 사람은 둘인데 다 동네에 사는 사람인 대한사람 약국을 하는 사람으로 우리 집을 아주 헐가로 살 경영을 가지고 우리가 달라는 八千五百元에 절반도 안주고 사려고 하는데 우리 집 맞은편에 사는 아진사스서 온 여인이 우리 집을 다른 사람한테 팔지 말고 자기한테 팔라고 여러 차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고 있었는데 하루는 거관이 와서 아진사스 여인이 정말 우리 집을 원하니 얼마를 꼭 받겠나 묻기로 八千五百元을 받아야 된다하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고 저한테 팔라고하니 집은 꼭 팔게 된 모양이므로 큰딸 친숙이한테 편지하여 통기한 것은 만일 집 거관이 우리 집 매매에 사인을 하여 보내라고 하면 즉시하여 보내라고 부탁을 하고는 우리 집 거관 비어런을 교섭하여 현금으로 다 찾게 하였다. 집 파는 사건은 이만큼 만들어놓고는 나는 二月 十五日께 가주(캘리포니아)로 나와서 지낼 주택을 하나 사려고 들른 차에 나성(로스앤젤레스)동지 총회에서 二月 二十日 화부(워싱턴) 우리 대사관에서 열리는 미·포(미국·하와이) 한인대표대회에 나를 북미시보 대표로 참석하라는 대표자 위임장을 보내었다. 그러나 나는 가주(캘리포니아)로 이사할 일에 총총하여 이 북미시보 대표를 사양하는 공함을 나성(로스앤젤레스)동지총회로 즉시 하였는데 총회에서 다른 사람을 택할 수 없으니 이 대회에 북미시민 대표로 참석하여 달라는 공함이 재차 왔기로 나는 다시 사양할 수 없사와 부득이 二月 十七日에 비행선을 타고 화부(워싱턴)에 도착하여 우리 대사관을 찾아가니 장면대사가 나를 맞는다. 벌써 하와이 총영사, 상항(샌프란시스코) 영사, 이우욱 영사, 동지총회 대표, 뉴욕 한인교회 대표, 학생회 대표, 북미시보 대표 나하여 수십여 명이 모이었는데 이 이번 이 대회가 화부(워싱턴) 우리 대사관에서 열리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 한다면 다른 것이 아니고 넌●포 미·포(미국·하와이) 동포사회에서 어떤 사회는 남선정부를 봉대하는 반면에 어떤 사회는 남선정부가 반쪽 정부라고 지지하지만 않을 뿐 외파반대를 하게 되는 언론 미·포(미국·하와이) 사회 기관지 신한민보 국민보 독립신문 이 삼종신문은 남선정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기 위하여 남선정부에 정책을 반대하는 기사가 연속 불절하여 그들 신문에 기재되는 동시에 태평양주보, 북미시보, 공지 편지 이 삼종신문은 남선정부를 봉대하니 자연 이 박사의 정견과 정책 이를 타고 이 삼종신문에 기재되니 자연히 미·포(미국·하와이) 동포사회에 출판계 언론이 충돌된다. 이 박사께서 이러한 형편을 아시고 미·포(미국·하와이) 언론기관을 통일하여 보자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미·포(미국·하와이) 한인 가운데 남선정부 반역을 선동하는 분자들을 취금 시켜보자는 것이요 또 우리 독립운동 당시에 일어났던 한·미(한국·미국)협회를 부흥시킨다는 것이다. 이상 삼대 목적을 가지고 이번 대회를 부른 것이다. 나는 이 대회가 이상 三大문제를 가지고 모인다고 듣는데 대하여 이 세 가지 문제가 다 미·포(미국·하와이)한인 형편에서 보면 한 가지도 결정할 것이 없다고 이 회에 대표자로 떠나기 전에 나성(로스앤젤레스) 동지총회에 편지한 것이 불행히 맞았다. 내가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하여 한 가지도 이 대회에서 통과될 것 없다한 것은 여좌하다. (一) 미·포(미국·하와이) 언론기관을 통일한다는 것은 출판자유 언론자유가 있는 미국서 발행하는 신한민보 국민보 독립보 이 세 가지 신문의 언론이 아무리 우리정부를 반대하더라도 이 신문들을 우리정부 대통령이나 재미대사의 세력 범위로서는 반대하는 것을 막는 수도 없고 돕지 않는다고 정간 시킬 수도 없으니 이런 문제가 시세형편에 불필요하다는 것이요 또 둘째 문제 미국 법률을 복종하고 미국 보호 밑에서 사는 한인이 대한 남선정부를 백방으로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남선정부에 세력이 나의 교포 이런 한인을 반대 안하게 할 수도 없고 잡아다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으니 반동분자들을 취금 시킨다는 말도 미·포(미국·하와이) 우리의 형편에 가당치않은 말이요 또 셋째 문제 한미협회 부흥도 재미한인 형편에 불람한 것은 본시 한미협회가 조직되기는 화부(워싱턴)에 구미위원부가 설립된 수년 후에 이 박사의 친구 스태거 윌니암 알니버 박사며 모 인사들이 한미협회를 조직한 것 이 박사 독립운동에 선전기관으로 우리 운동에 많이 조력하던 기관인데 이 기관에 경비가 매월 평균이 一千五百元으로 二千元씩 예산이 있어야 되는데 이 경비는 九十퍼센트가 미인사회에 특연으로 지탱하여 오다가 一千九百四十五年에 대한이 해방된 후에는 이 한미협회에서 특별히 할 일 없고 보니 한미협회에 재정으로 돕던 미인사회나 이 기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도 자연히 마음이 식어져서 유명무실에 상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한미협회 창립자들은 이 기관을 유지하여 가려고 한인서기 한 사람을 두고 이 한미협회 명사라도 유지하여 가려고 김세선을 서기로 두었는데 이 서기에 월급이 매월 二百元씩 주던 것도 지금은 지출할 수 없이 된 이 한미협회를 다시 부흥시키라는 것이 이 박사의 정책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미협회 부흥시킬 필요가 없다고 나는 말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 기관을 부흥시키자면 매월 수천원 경비가 있어야 되겠는데 지금은 미인들 가운데서 우리나라가 독립정부가 수립되었으니 돈을 내어 이 기관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게 사상이 변하였을 것이니 미인의 보조금이 많이 안 들어올 것이요 그러면 미·포(미국·하와이) 한인에게서 청연하여 이 기관을 유지하여 가자고 한다면 재미한인에 형편은 과거 수십 년 동안 독립운동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시달린 동포들이 이 유명무실하게 된 한미협회 부흥시키자는데 나부터 돈을 내기 원치 않으니 한미협회 부흥문제도 이 대회에서 통과될 것이 없으니 이 박사께서 이번 회 부대사관에 대회를 소집한 것은 아무 결실이 없고 다만 수천원 경비만 들었다. 나흘 기간의 경비만 하여도 二百五十元 쓰고 왔었다. 나는 워싱턴 대회를 마치고 뉴욕으로 전왕하여 자식들을 만나보고 한주일 묵어서 니우욱 선공기선을 타고 나성(로스앤젤레스)으로 직행하여 지금 있는 주택을 一萬六千五百元 사가지고 페인트칠 하고 대강 고치고 보니 一萬八千元이 들어갔다. 이 집을 一千九百五十年 三月 초상에 사가지고 나 혼자서 이 집을 건사하고 한 달 동안을 있노라니 전체 식구가 四月 초상에 다 나왔다. 나는 그간 센트루이스 집을 팔고 이곳에 있을 새 주택을 장만하는 큰일을 다 마치고 나성(로스앤젤레스)에 안돈이 되었다. 나는 나성(로스앤젤레스)에 와서 수삭 유하며 있을 주택을 장만하는 동안에 여러 친구와 또 우리 동지 회원들에게 너무도 후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것 잊을 수 없으므로 이러한 이곳 여러 동포의 사랑과 관대한 대접을 만분에 일이라도 갚기 위하여 새로 산 주택에 피연을 배설하고 동지회원 일동과 국민회 친구 또 독립신문사 친구였던 단체 사람을 물론하고 친분이 있는 친구는 다 청하여 한 九十명 가량 동포 동지가 모이었는데 새로 산 이 집에 응접실과 식당과 독서실이 ㄱ자 모양으로 연접하게 생겨서 수백 명이 용람하게 되어서 근 九十명 손님을 능히 잘 영접하게 되었고 음식은 턱기와 벡팀과 온갖 채소와 비스킷을 장만하여 가지고 커피 탈 이●스타일로 서브를 하는 동시에 맥주와 소다와 펀치를 각각 마음대로 마시고 밤이 깊도록 주객간에 흥치있게 노는 동시에 한국 노래와 춤도 추고 온갖 여흥에 들어가서 가장 특출한 것은 안경오 씨 부인에 천안 삼거리 능수버들에 육자배기와 조종익 동지에 굿거리 장단은 아직도 우리 귀에 은은히 들리는 듯하다.

    40 홍범도의 일지

                            1868년  고려 평양 서문 안 문열사 앞에서 탄생하여, 모친은 칠일 만에 죽고 아버지 품에서 여러 분네 유즙을 얻어먹고 자라 초 구세에 아버지 세상을 떠나시니 남의 집으로 다니며 머슴살이로 고생하면서 십오 세가 되므로 내 나이 두 살을 돋우고 평양 중국의 보단으로 호병정 설할 때 우영 제일 대대에서 코코수로 사 년을 있다가 사연을 치고 도망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 종이 뜨는 지막에 와서 종이 뜨기를 배워 삼 년을 뜨다가 그때는 어느 때인고 하니 병술·정해쯤 되었다. 그때 고려나라 동학이 불일 듯할 때입니다.  동학의 등쌀이 무서웠습니다.  지소 주인 놈은 자본가입니다. 삼 년 고삯에서 일곱 달 고삯을 못 찾고 자꾸 내라고 성화치듯 빌어도 주지 않다가 주인 놈이 말하되 네 고삯을 찾으려 하거든 동학에 참여하여라. 그러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네 소원대로 할 데 있으면 하여 보라. 내가 죽어도 동학에 들 생각은 없고 에라 네 놈한테 내 땀나게 번 것을 거저 잘릴 수는 없어 하고 사작살판하고 야간에 그놈의 집에 뛰어들어 그놈들 삼형제 놈을 독하게 벤지하여 다 죽였습니다.  그날 밤 산페로 도망하여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 가서 변성명하고 경기 수원 덕수 이가 지담의 상좌로 삭발 위승하고 중질하였습니다.  햇수로는 양 년이고 달수로는 일 년입니다.  도망하여 강원도 홍양 먹패장골 골 속 사십 리 깊은 페간 속에 들어가 준 삼 년을 물 쥐여 먹고 총노이 공부를 필하였습니다.  그때는 어느 때인고 하니 을미년(1895) 팔월 이십삼 일입니다. 구월 십팔일 장안사 넘어오는 길 영상인즉 단발령입니다. 그 곳 첫 쉬염터 앉아 쉴 때에 황해도 서흥 사는 김수협을 만나 의병할 공론하고 단 두 사람 더 나서 김성창 두장거리에 당진한즉 일병 이백팔 명 당진한 것을 보니 그놈들 멘 총을 본즉 과연 욕심이 나서 못 견디겠습디다.  그날로 함경도 처령 넘어오는 길목에서 두 사람이 앉아 있는데, 일병 천여 명 넘어오니 불질 못하고 앉았으니, 그 이튿날 아침에 일병 십이 명이 원산서 서울로 올라가는 거 둘이나 잡아가지고 안변 학포로 도망하여 와서 그곳서 의병모집하여 가지고 합 십사 인으로 안변 서왕사 절에 와서 철원 보개산 유진석 진과 합하였습니다. 그 진과 합하여 세 번 전쟁에 크게 패하고 그 진이 일패 도주하여 없어지고 김수협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나 혼자 요행 목숨이 살아서 황해도 연풍 널귀 금점판에 들어와 몸을 숨기고 있다가 금점 동학군 놈에게 막혀 일본놈에게 붙잡힐 뻔하였습니다.  그날 밤으로 도망하여 박말령 영상에 당한즉 해가 산등에 올라오니 일본놈 세 놈이 나를 붙들려고 왔던 놈이 원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몰수히 다 잡았습니다.  그 총 세 대를 앗아서 두 대는 땅에다 묻고 철 삼백 개, 그놈들 먹는 과자·쌀 들추어 바랑에 거둬 넣고 지경산 꼭두에 올라 한돈하고 덕원 무달사에 와서 산속에서 자고 덕원읍시 좌수로 있는 전성준 놈의 집에 야밤에 달려들어 일본돈 팔천사백팔십 원을 달래 가지고 무달사 어귀에서 전성준 놈을 쏘고 평양도 양덕으로 넘어가서 양덕으로 성천으로 여원으로 다니면서 산간으로 준 삼 년을 혼자 의병을 하다가 철 없고 의포 없고 신발 없고 고생하다 못하여 그만 변성명 하였던 것을 버리고 저 홍범도로 부르면서 함경도 북청 단양 이가에게 서방 들어 팔 년을 농사하여 먹다가 일본놈과 러시아와 전쟁할 때 갑진년(1904)에…또 내가 다시 구월 초파일에 다시 나섰습니다.  구월 십일일 차량동 동학쟁이 십일일 밤에 동학쟁이 회소에 달려들어 삼십여 명을 죽이고 회소를 불 지르고 그날 밤 솔봉개 안에서 풀밭에서 자고 그 이튿날 휘치령 허리원에서 일병 삼 인을 잡고 총 세 병을 앗고 철 삼백 개 얻어가지고 서쪽골 포수 누기에서 자려고 하다가 그 누기에서 자고 사영 간 포수를 만났습니다.  그 동무들 이름입니다. 제일-김춘진, 제이-황봉준, 제삼-이문협, 제사-박용낙, 제오-온성노, 제육-유기운, 제팔-조병룡, 제구-홍범도, 제십-태양욕, 제십일-노성극, 제십이-원성택, 제십삼-차도선, 제십사-최학선, 합 십사 인으로 합하여 데리고 시월 초구일에 휘치령 말니에서 일병 일천사백 명과 전쟁을 하여 일병이 반수 이상이 죽고 조선인 보조인 이백삼십 명이 죽고 우리 의병 김춘진 죽고 황봉준 죽고 이문형 죽고 조강록 죽고 임승조 죽고 임사존 죽고 제일등 포수들이 여섯 사람이 죽었습니다.  첨이 되다나니 총들 뿌려 던지고 싹 도망하고 한 놈 없이 우리 부자만 깃텃습니다.  부자간도 철 한 개도 없습니다.  두 부자가 공론하고 밤이 들면 우리 둘이 전쟁터에 비밀히 기어들어가 일본 주검에서 철을 얻어야 이곳서 우리 둘의 몸이 빠져 나가야 살지 그렇지 못하면 두 목숨이 죽을 모양이다 하고 둘이 밤들기를 저대하여 죽으면 죽고 요행 살면 우리 앞으로 게영하던 일이 된다 하고 부자간이 기어들어가 수백 명 주검에서 철 수천 개를 얻어가지고 떠나자 하는 때에 일본놈들이 내려다 사격총살이 소낙비 오듯 하는 철을 피하여 도망하여 서쪽골로 그 밤에 어두운 것을 무릅쓰고 사십 리를 피하여 후영동 토기막 옹기가마에 기어들어 두 몸이 자고 새벽에 떠나 엄방골짜기 들어가니까 그곳에 의병 칠십 명이 그곳에 모여서 이제는 철이 없으니 화성대를 모집하노라고 있는 때 우리 부자 지고 간 철을 한 사람에게 일백팔십육 개씩 나눠가지고 그날 밤 지나서 그 이튿날 배승개덕에 나가서 일본놈이 갑산 해산포로 철 운반하는 것을 사십 바리를 앗아내니 일병은 삽십여 명을 잡고 그러다나니 동짓달 이십육일에 응구괫택이 넘어가서 원성택으로 중대장을 삼고 응구사 포수를 모집하여 십이월 십사일 세 시 삼수성을 점령하고 일대 이백구십사 병과 탄환 백육십 궤를 앗아가지고 고려진우대 여든 베르단이 이백육십 대와 철 15궤를 앗아가지고 삼수부사 유등을 목을 베어 쑥꽃대에 달고 삼수읍 군주사를 죽이고 십이월 이십팔일 저녁 일병 양천명과 28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정월 초삼일까지 전쟁을 계속하여 초 4일까지 전쟁하였는데 부상당한 자 : 김동운·성태일·노성극, 새골에 사는 홍병준·임태준 합 5인이 상하고 죽은 동무들 : 최학선·길봉순·이봉준·조기석·홍태준·오기련·박봉준·김일보·최영준입니다.  일본병은 1,033명이 죽고 고려보조원 90명이 죽고 합 1,123명이 죽고 총은 18개만이 얻어오고 철은 한 개도 얻어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중에 행군하여 정평서 들어온 군대와 합하여 가지고 갑산읍에 정월 19일 밤중에 달려들어 일본군 109놈 죽이고 상한 놈 38놈이 있다. 의병 48명이 죽고 또 패진하여 사방을 헤어진 동무들을 다시 모집하여 가지고 등디벨 청지평서 22일 전쟁하여 의병 20명이 죽고 일병 1,013놈을 죽이고 총 3대만 얻었습니다.  이전은 고군 약졸되므로 산간을 웅거지지가 됩니다. 정월 28일에 용문동 더뎅장거리하고 이월 초 8일에 붉은별 전쟁입니다. 대병과 접전하여 의병 2,800명이 일본병 한 놈 죽였습니다. 2월 18일 일진회 회원 도수하는 놈 임재덕·김원홍·최정옥이 소위 귀순시키노라고 일병 103명과 고려노 보조원 80명을 데리고 내 처와 내 아들을 잡아가지고 농구 창평리에 들어와서 주둔하고 내 처가 지식 있는 줄 알고 「네 서방한테다가 글을 쓰되 당신이 일본 천황에 귀순할 것 같으면 천황께서 당신을 공작 벼슬 주자 하니 항복하면 당신께 좋은 공작 벼슬하게 되면 나도 당신 자식도 귀한 사람의 자식이 안 되겠습니까? 내가 시킨 대로 글을 보내려거니와 배약하면 너희 모자는 어육을 만들겠다.」 성황같이 호통이 심해 죽으면 했습니다.  내 말에 말로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거든 계집 글자로 영웅호걸이 곧이듣지 않는다. 너희 놈들이 나와 말하지 말고 너희 맘대로 할 것이지 나 아니 쓴다고 무수한 욕질한즉 저 악독한 놈들이 발가락 두 사이에다 심지에 불 달아 끼우고 반죽음시켜도 종내 항복지 않으므로 갑산읍으로 잡아 들여보내고 김원홍·임재덕이 자비로 나의 처가 쓴 모양으로 편지를 한 놈에게 주어 용문동 더뎅이에 보낸 후에 농구사 남부여대를 물론하고 청하여 놓고 백성의 원수를 받고 홍범도 잘못한다는 말로 백성들에게 다 흥겁한 거짓말을 하니까 당신네 말씀이 전부 다 옳다 박수갈채가 농구사 창펜이가 깨어질 지경이 되었다.  용문동에 편지 가지고 왔던 왜놈은 그시로 스쳐 치우니까 변방 이틀지간에 편지가 여덟 장 돌아오니 여덟 놈은 다 살았다.  9번 만에 내 아들 양순(홍양순) 놈에게 편지를 주면서 ‘너도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것은 안다만, 이 편지가 너의 원 군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이런 일이 있은 줄 나도 안다만은 그러나 네가 가면 너의 아비가 반가워 할 것이다. 그러면 네게서 편지가 나지면 그때는 네 부가 탄복할 것이다’ 하고 보내니 이놈이 그것을 가지고 나 있는 대장소 문밖에 나온즉 내가 총을 들고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지만은 네가 일본 가옥에 삼사삭을 같이 있더니 그놈의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주자고 하는 놈이야 너부터 쏴 죽어야 하겠다 하고 쏜 후 부관이 나가 본즉 귀방울이 맞아 떨어지고 죽기는 면하였다고 합디다. 2십8일에.  삼월 초 이일에 임재덕·김원홍 두 놈이 일병 190명과 조선인 190명과 더뎅장거리 김치강의 집에 와서 주둔한 그곳 백성에게 전령하되 싸움할 것 같으면 싸움하고 귀순하기 원하거든 세 시 전에 계약을 체결하소.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속사포로 너의 군대를 씨 없이 멸망시키겠다고 서리같은 명령이 돌아오니 온 군대 안에 송구영신입니다.  군대 안에 일등 불 잘 놓고 양기 좋은 군사 칠백 명을 비밀단속하고 여차하라고 단속하고 참모부에 귀수 귀순이 요구된다고 글을 써 나를 주면 내가 가서 교섭하여 그놈들 데리고 흙다리 한판에 들어서거든 여차여차하시오. 제가 변복하고 변성명하고 장거리에 당진하여 김치강 매제 집에 들어가서 편지를 드린즉 김원홍이 받아보고 씩 웃으면서 너의 소원이 그렇다 하면 그렇게 하여 주마 하고 무장을 집안에 세우고 파수 15명으로 파수 세우고 그 나머지 이백여 명으로 영솔하여 흙다리목에 당진하자 더뎅장거리에서 총소리가 콩닥듯하며 사방방천에서 모진 광풍에 불 일어나듯 하여 막재작이를 하여 몰수히 생금하고 장거리에서 의병 고응렬이 죽고 조인각이 부상되고 그 집 식솔 어린 안동이 죽었습니다.  209명을 잡아다가 대장소 앞 김원홍·임재덕 두 놈을 꿇리고 내가 나서면서 너희 두 놈이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 년을 진유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 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 산면에서 보지하여 감자 농사하며 먹고 지내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 옳거든 칠조약·구조약(을사늑약·한일신협약)에 참여하여 나라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될 것이다. 형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다 청한다. 조선 놈들아 너희 놈들도 들어보아라. 너희나 내나 다 조선 놈으로 무슨 일이 달라서 저런 역적 놈과 나를 해코자 하느냐?  일본 놈은 남의 강토를 제 강토 만들자 하니 그럴 수 있다 하자. 너희 같은 놈들은 네 아비 네 어미 다 너와 같이 씨를 없애야 되겠다 하고, 김원홍 놈과 임재덕 두 놈을 말짱을 두 대를 깎아서 들여 세우고 한 놈씩 마주 세워 기둥에다 얽어매고 석유퉁자를 윗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 놓아라 하고, 그 나머지는 포살로 하여 죽이라 하고, 삼월 십육일 농구패택이 이행군하여 십팔일 일병과 접전하여 일병 구 명을 죽이고 약수동에 들어가 자고 십구일 장진 능골 늘구목이에서 일본과 접전하여 일병 여든다섯 놈 잡고 23일 동사다랏치 금점 앞에 두텁바우골서 일본과 싸워 십육 명 죽이고 의병 5인이 죽었습니다. 거기서 함흥 초리장 유채골 동리에 야밤에 달려들어 부자 놈 아들놈 붙잡아다가 일화 이만팔천9백 여 원을 빼앗아 군비에 쓴 일이 있습니다. 28일에 함흥 동교촌 신성리에 자본가 박명장이라고 하는 놈의 집에 달려들어 일화 육천 원을 앗아가지고 그놈의 맏자식이 함흥 일본 놈의 군대에 소대장으로 있었나니 제집에 의병들이 재산을 탈취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병 300명과 보조원 50명을 영솔하여 350명으로 친히 제가 영솔대장이 되어 제 대대장께 연품치 않고 비밀히 달려들어 야심한 밤중에 접전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의병이 588명이 되었으니 그 동네 집집마다 들었습니다. 불시에 사방으로 총소리가 나더니 헤어져 있던 군사가 나갈 곳이 없으니까, 마침 접전이 아침 날 밝도록 싸웠으니 일병이 왔던 군사가 사분지일이 살지 못하고 회진하였으니 박명장의 식솔 하나도 남지 않고 구족이 멸망하였습니다.  그날 밤 날 새도록 싸움하고 그 이튿날 호원 영동으로 행군하여 지산당에 주둔하고 사월 초이일 내가 변복하고 호원읍에 박원섭 집에 가서 그놈의 문간에다 일병 헌병대 사 인을 월급 주고 문간 파수병으로 둔 곳에 들어가 이 댁에 들어가는 글자를 적어 달라고 한즉 조사가 심히 묻는 고로 싸근다리에 사는 백성으로 나의 외편도 되려니와 지원한 일이 있노라고 한즉 들어가라 하기에 들어간즉 함흥 본관 좌수로 있던 이경택과 호원 군수로 있는 홍가와 원섭(박원섭) 세 놈이 앉은 데 들어간즉 네 웬 놈이냐? 그 말끝에 단총을 내어들며 나는 산간에서 나무 밑을 큰집 삼고 지내는 홍범도입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너희가 모르겠느냐 빨리 나의 조처를 빨리 조처하시오. 이번 내 일이 바로 되면 커니와 약 불연이면 이 방 안에 주검이 몇이 될 것을 모르겠소. 빨리 조처하시오. 주인 놈이 제 댁과 얼마든지 통틀어 내오라고 한즉 일화 30천을 내어다 전대에 넣어 허리에 띠고 원섭(박원섭)을 앞에 세우고 나와 싸근다리 고개에 올라와서 부디 안녕히 계시라고 부탁하고 지산당에 돌아와 4월 초 8일 밤에 행군하여 명태골로 장전 여애리 평풍바위 밑에 행군하여 사방에 있는 군대를 불러 모아놓고 군사 점고한즉 1,864명이고 중대장이 11명이고 소대장 32명으로 고쳐 편성할 때 제일중대장 원창복으로 장진 청산령을 지키고 꼭 아적 저녁에 장진군대가 삼수로 넘나드는 놈을 목잡고 있다가 불시에 쏘고 몸을 피하였다가 경부로 비밀히 군사 먹을 것을 걱정하라고 시키시오.  제이중대장 최학선으로 매덕령을 지키고 갑리로 드나드는 놈과 앞 서식대로 하소. 제삼중대장 박용락으로 안장령을 지키고 함흥 장진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제사중대 조병영으로 조개령을 지키고 삼담·단천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제오중대 유기윤으로 새일령을 지키고 통피장골·북청을 넘나드는 놈과 그대로 좇아 하시오.  제육중대장 최창의로 후치령을 지키고 앞서와 같이 시행하시오.  제칠대장 송상봉을 불러서는 부걸령을 지키되 너는 꼭 내가 명으로 시키노라. 남시령을 지키고 길주로 갑산 허리로 드나드는 놈과 싸움을 하되 남을 10명을 죽이지 말고 내 군사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므로 너를 극력 주선으로 부탁하노라.  제팔중대장으로 삼수 신파 목재 압록강으로 내려가는 것을 쏘아 넘기시오.  제9중대장으로 통팔령을 지키고 흥원·북청으로 드나드는 놈과 앞서 계약한 대로 꼭 그대로만 하면 우리의 성공이 잘 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사중대로 내가 영솔하고 사방으로 다니며 일본과 접전하게 하고 다 분배 후에 우리가 이르지 아니하고는 숱한 군사를 기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고 나는 사방으로 다니며 할 것입니다. 시월 27일 통패장골 쇠점거리에서 전쟁하여 일본 대장 아들 놈 잡고 군사 십삼 명 잡고 일본 군량 닭 50개, 과자 열 궤, 백미 삼십 말 앗아가지고 그날 밤으로 사동으로 하남 안장혈 싸움에 일본 400여 명이나 죽고, 우리 승전은 하였으나 패하여 상남 숫치기 깊은 산골 폐간 속에서 굶어 이틀을 유진하고 있었으니 비는 자꾸 삼사일 쏟아지는 것을 견디어 갑산 간평에 내려와서 귀밀밥을 얻어먹으니 모두 취하여 고생하는 중에 길주서 넘어오는 일병 80명과 쌈하여 일병 3명을 죽이고 의병 8명이 죽었습니다.  5월 초 2일 구름물령 넘어오다가 일병 32명이 오는 것을 목잡고 저대하다가 일시에 쏘아 한 놈도 남지 않고 다 죽이고 총 30개, 군도 두 개, 탄환 300개, 단총 네 개 앗아가지고 갑산 청지평 싸움에 의병 11명 죽이고 일병 90명을 즉살시켰다.  초 사일 괴통병 어구에서 일본 마병 15명 잡고, 말 다섯 필 앗아가지고 약수동 넘어가서 여해산 평풍바위 밑에서 군회를 열고 그 말 잡아 분육하고 회의 결정에 군비는 물론하고 전쟁에 죽은 동포의 가족을 살려 주어야 되겠는데 한 가정에 150원씩 분배시키고 도합을 놓으니 116천 898원으로 분배하고 어찌하든지 재전을 모아야 약환을 외국으로 청구하여야 될 것입니다. 5월 25일로 다시 이곳에서 다 우리가 군회를 불러가지고 재전으로 외국에다 청구하자고 각자 맹세하고 초 9일에 각지로 떠나 사방으로 각산하고 헤어져 간 후 나는 동사다리치 금점에 달려들어 일병 6인을 죽이고 별장놈 죽이고 금 1,994개를 앗아가지고 수동골수로 넘어와 행창에 당진하여 밤을 유하고 함흥 천보산 절로 들어가 4일 유하고 있노라니까, 안변·덕원·연풍 등지에서 수십 번 전쟁하던 노희태 군대 540명과 연합하여 정평 한대골 어구에서 접전하여 일병 190명 잡고 의병 4인이 죽고 한 명 팔 맞아 중상되어 고생하였다.  정평 바맥이에서 500명 일병과 쌈하여 107명 잃고 내 아들 양순(홍양순)이 죽고, 거차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되기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홍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홍양순)이 죽었다. 그날로 떠나서 거사골수로 들어와서 노희태 군사를 데리고 함흥 명태골로 천보사 절로 넘어가고 나는 군대를 데리고 장진 남사로 내려와서 실령 어구에서 접전하여 16명을 일병을 죽이고 총 16개, 철궤 여섯 개 앗아가지고 도로 천보사 절로 가 노희태 군대에 철 2,400개 분배하여 나눠주고 인차 떠나 18일에 홍원읍 앞에 전진포의 홍가집에 달려들어 홍원군수 홍가 자를 붙들어 일화 37,000원을 빼앗아가지고 그날 밤으로 함흥 덕산관 함영문 그놈의 집에 달려들어 너는 시 좌수로 있고 도 군주사로 있는 놈이니까 돈을 내 청하는 대로 받지 않으면 당장에 식구는 오늘밤으로 멸망시킨다 하고 일화 3십만원을 바치라 한즉 극력 주선하여 3만 원을 내어다 주는 형식을 보니 여러 곳에서 대용하여 주기에 받아가지고 인차 떠나 오면서 글을 써서 사방에 돌려놓으면서 덕산 관사는 한영문가 함흥읍을 들어올 것 같으면 남대천 다리목에 일병 300명 있고 성안에 500명 있으니 염려 말고 들어오라 하기에 수일간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그 댁에 와서 연품하되 우리가 어느 날 밤에 들 것을 우리도 비밀이다 하고 간다는 것을 글을 써 누구와 담화하고 있는 듯이 하고 떠나 장진 여래산으로 드니 회의를 모였다가 회의를 못하고 있는 중에 마침 들어가 회의를 열고 앞서와 같이 일화 20천을 정하여 놓고 외국으로 갈 사람을 뽑는데 북청하는 조화여·김충열 그 동무들이 화수야 연추에 주둔하고 있는 이(이범윤) 관리에게 보내면 비똔약을 몇 십 밀리온 치라도 내올 수 있다고 하기에, 김충열·조화여 두 사람으로 20천과 노수로 백 원을 주어 강동 연추 이범윤한테 서사를 다 두 사람에 보냈더니, 이 험한 놈들이 다 잘라먹고 오히려 일본 청탐군으로 몰아 가두고 당금 죽게 되니까 그 갇힌 자들이 본대에 글을 보내니 글을 받아보고 인차 김수현으로 노비를 주어 급속히 들어가 구하라고 보내니 그놈이 또 제가 이(이범윤)가 놈에게 들어와 그 당누와 같이 휩쓸리어 있다 하니 소식이 영 무소식하니 알 수 없어 약철이 없어 일병과 쌈도 못하고 일본이 온다면 도망하여 매 본 꿩이 숨듯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다가 할 수 없어 외국 중국땅 탕해로 10월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올 때에 신파 기름구피 일병 군대와 접전하다가 그날 밤으로 건너와 압록강을 하직하고 너의 수궁이 수천 리 장강인데 내가 무사히 건너 왔다. 부디 잘 있거라. 다시 볼 날이 있으리라고 눈물로 하직하고 탕해로 들어와서 한날 묵어 길림으로 1,300리 되는 곳에 와서 생면부지한 곳에 와서 돈 한 푼 없이 길림성 안 중국 통사 길성익 영변 사람인데 사상이 좋아서 우리 군대 40여 명을 수십 원으로 용비 써서 이틀을 유하고 데리고 온 동무들을 도로 탕해로 보내고 김창옥·열두 살 먹은 자식 용환(홍용환)·권감찰·나 합 4명이 러시아로 들어올 때 노수 한 푼 없이 도보하여 난림창 우수현, 우라개, 우시허 아시허 내도한 즉 술기길을 만나 네 사람이 도보하여 굶어 오길 준 이틀을 왔더니 기한이 들 뻔하다나니 러시아 거사리에 와서 배를 가리키며 먹을 것을 비니까 러시아 산다르미 흘네브[Хлеб(흘렙-빵)] 한 덩어리 내다주니 요기하고 떠나 도보하여 먹으며 굶으며 근근 도보하여 엿새가 되도록 오니까 어딘지 모르고 오다나니 술기길에서 조선 사람 셋을 만나 일만포 얼마나 머냐고 물은즉 그자가 멀다고 하면서 이리로 가면 칠십 리고 술기길로 가면 고려 리 수가 고려 리 수로 150리라고 하면서 질러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니 질러오다가 홍우재 무리에게 붙들려가서 이틀을 자고 대접도 많이 받고 온 일도 있습니다.  12월 6일에 흥더허재 나와서 엿새를 묵어 고려 풍속에서 노수 차려 술기 타고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들어 엿새 묵어 해삼(블라디보스토크) 내려가서 일삭 유하고 1908년에 연추(노우키에프 스코에) 나가서 이(이범윤) 관리라 하는 자를 보고 조선서 김충열·조화여 두 사람을 어떻게 보니까 일본 탐정으로 보셨는가요 한즉 그자의 말이 나는 그런 줄 저런 줄 모르노라고 한즉 그러면 그 사람들 어찌하여 주루만에[тюрьма(쮸리마-감옥)] 가두었든가요. 그 대답에 비쌔기[документ(서류)] 때문에 갇혔다고 대답한 소문이 낭자하니까 연추(노우키에프스코에) 주민들이 이범윤 죽일 놈이라고 누구든지 아니 욕할 자가 없었다.  그 후에 최재형 연추노예 김운경 이자들이 서로 반대파가 일어나므로 1909년에 추풍 허커우 와서 도로 고려로 나가려 하는 때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원세가 올라와서 극력 주선으로 말리며 내가 주선하여 차려 내보낼 터이니 걱정 마시고 계시라고 말리니 할 수 없이 있었으니 최원세 각처로 다니며 원조하여 수천 원으로 모집하여 가지고 허커우 올라와서 박기만으로 총무를 정하고 김제현으로 부총무를 정하고 김왕윤으로 재무를 정하고 1910년 3월 6일로 고려로 나가려고 맹세하였으니 조물이 시기하여 박기만 놈이 원조돈 1,800원을 쓰고 내놓지 아니하므로 재피거우에다 회를 불러놓고 박기만·김왕윤·김재형 절땅 노예 김아부람 다 불러놓고 회의를 불렀다.  1910년 3월 11일에 회의 문제는 각 총무며 재무 각 임원으로서 다수한 금전을 거둔 것을 보고에 얼마나 도합된다는 총무의 보고, 무장을 얼마나 싸서 어디다 둔 것. 문제는 그뿐.  총무의 보고에 전후 4,980원으로 무장 30병에 2,180원이 들었다고 보고에 나타나고, 탄환 3,800개를 1,100원 주고 산 것입니다. 그 나머지 남은 것은 의병들 비쌔기 300장에 800원 주고 내게 하였고, 그 남아 있는 돈 내가 한 달 통영하고 썼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우리의 일은 망태기 되었구나 하고 내가 밸이 뿔이 나서 회의고 뭐고 이 종자들 모조리 때려죽이고 말아야 하겠다 하고 달려들어 박기만을 단개에 쳐서 주검을 만들고 회의가 망태기 되었다. 그 며칠 후에 추풍 사사원 호놈들 추겨 가지고 나를 죽이자고 취군하여 올 때 이범윤의 군사적 관리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군대가 척후병이 되었었고 다리안재 안준현이고 육성 최순경이고 허커우 김가네 다수고 박가네 다수고 문창범 도수하여 250여 명이 취군 작정하여 자피거우 박문길 집에 달려들어 나를 결박하여 가지고 왕거우 유새장 집에다 가두고 무수한 매를 치면서 이범윤에게 보고를 써서 해삼(블라디보스토크)으로 보내되 이 홍범도를 죽이는데 관리자의 명령이 있고야 죽이겠습니다. 써보내니 그 보고를 깔고 회답도 하지 아니한 고로 14일을 죽지 않으리만큼 수천 매를 맞고 14일 만에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군대 사단장이 알고 까삭까 8인을 왕거우 어구서부터 총질하면서 올라와 나를 결박한 것을 풀어놓고 30여 명을 붙잡아 갔으니 요행 목숨이 살아 데리고 다니던 군사 30여 명을 죽게 만든 동무들 데리고 총을 사가지고 고려 무산에 나가 일병 놈과 쌈하여 군사 17명을 죽이고 일병 하나 죽고 패하여 산간으로 도망하여 이틀 먹지 못하고 굶어죽게 된 때에 북사령으로 갑산 있던 일병 42명이 넘어오는 거 목을 잡아다가 한 개도 남지 않게 다 잡고 두 사람 죽고 열네 놈 생금하여 싹 죽이고 무장 40개, 단총 4개, 코코 두 개, 폭발 14개, 군량 세 바리, 탄환 칠천 개, 탄자 50개 앗아가지고 깊은 산페에 들어가 4일을 그놈들에게 앗은 구벙이개에다 끓여 먹으면서 있다가 그 남은 것을 나눠 지고 무산 왜갈림에 나와 야밤 삼경 일본 병참소 달려들어 폭발로 치며 총질하여 죽이고 불을 놓아 놓고 밤으로 도망하여 백두산으로 행하여 장백부로 행하다가 종성읍에서 20리 나와 그곳이 모를 데인데 일병과 접전하여 진종일 쌈하다가 그놈들에게 포위되어 의병이 다 잡혀 가고 나는 빠져 도롱봉으로 하여 내도산으로 안도현으로 길림에 들어와서 차 타고 도로 러시아에 들어와서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와서 부리딴에서 커우대 메기 시작하여 삼·사삭을 벌어먹다가 금점 딴뚠(안군)에 들어가 양년을 금점하여 번 돈이 1,400원을 가지고 나와 추풍 당미재 골짜기에서 약담배도 심고 곡식도 심었다가 미깔래 어리방이까 가서 일 년을 벌다가 구리바로점(Курбадт,꾸르바트)으로 중구식가점으로 비양고점으로 연드리스까점으로 돌아다니며 번 돈이 3,050원을 가지고 이만 나와서 오연발 한 개에 탄환 100개씩 끼워 9원씩 주고 사서 중국놈에게서도 사고 고려 놈에게서도 사고 러시아에서도 사서 의병을 모집하여 17개를 싸매고 봉미산 김성무 집팡에 가서 고려로 나가지 못하고, 1915년 7월 26일부터 산지 작녹을 잡아먹기 시작하여 햇수로 이태 반을 사냥하다가 그 총을 밤으로 운반하여 추풍 당어재 골짜기 최의관 병준 집에다 묻어 놓고 농사를 시작하여 한 해 농사짓고 18년 전 고려 독립만세가 불일 듯하므로 농사고 뭐고 나가자 하고 묻어두었던 총을 끄집어내어 일변 닦으며 일변 의병 모집과 탄환 모집과 일변 원조하여 의병들 입힐 것과 천리경 그러한 것을 갖추었으니 1919년 8월 8일에 밤에 떠나 앵덕이 106인이 무장을 메고 앵덕에 당진하니 저녁때가 되므로 거기서 자고 가려하려고 하고 있는 때 불연간 러시아 빨치산 6명이 우리 유하는 곳에 당진한즉 통변을 청하여 물은즉 수청 등지에서 쌈하다가 패하여 9명이 요행 목숨을 보전하여 왔으니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여승당거리 와서 폐간에서 굶어 자다가 세 놈이 간 곳 없이 도주하여 없어지므로 그 동무를 찾는 중에 백파(백위파)들에게 투항하고 우리 6인을 잡아주려고 다짐까지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목숨을 도주하여 왔으니 고려 빨치산이 이곳에 있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나도 고려 빨치산과 같이 다니면 어떻겠습니까 한즉 우리는 고려로 나가는 의병이니까 같이 갈 것 같지 못합니다. (답) 나도 어느 국이나 빨치산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네 말도 모르겠는데 어찌 같이 다니겠습니까? 우리를 믿어 주시면 말 모르는 것이 관계 없습니다. 하나 그러나 우리와 같이 못 가겠습니다 하고 우리 군인을 데리고 한 삼리 거리 되는 곳에 집사가 있는데 따로 자다가 샐 녘이 되니까 그 동무들 유하는 곳에서 총 소리가 콩닥듯 소리가 나므로 우리 군대를 사방으로 산조시켰고 저 물방아 거리서 동네다 총질하는 놈들을 사격하라고 명령하고 나는 개안에서 쏘다니니 물방아 거리에 있던 놈이 13명이 죽고, 말 세 필 죽고, 그놈들이 퇴진하여 양재거우 등으로 도망하는 것 보고 그 동네 수색하러 들어간 즉 먼저 왔던 그 동무 말과 같이 투항한 놈들이 같이 다니던 동무를 잡으려고 백파(백위파)를 데리고 온 놈이 분명하다. 그 동무들이 6인 중에 세 사람 죽이고 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무들과 성명을 물은 즉 (답) 이와노우츠·완실네꼬싸·까리면니츠 헐벗고 신발 없이 된 것을 차려 입히고 같이 중국 땅 차무정재 서쪽골 깊은 골에 주둔하고 밤 잘 지간에 홍우재 70명 달려든 것을 잡아치우고 먼 고개 방축령 깊은 개웅덩에서 홍우재 90명 잡고, 총 50병, 철 1,300개, 약담배 여섯, 봉우재천 190자, 대양 300원, 일화 700원 앗아 군인들 나눠 가지고 러시아 3인을 대양·일화 합하여 500원으로 체급 주니까 아니 가지겠노라고 하는 것을 억지로 주고 그 이튿날 행군하여 나재거우로 중국 하마탕 예수촌에 야밤에 들어가 무장을 벗고 19년 10월 14일부터 20년 3월 초 3일에 무단봉에 나가 사흘 유숙하고 있다가 행군하여 봉오골 최진동 진과 연합하여 1920년 시월 초 3일 일병과 접전하여 일병 370명 죽고, 저녁편에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운무가 자욱하게 끼어 사람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게 끼었는데, 일본 후원병 100여 명이 외성으로 그 높은 산 뒤로 영상에 올라서자 봉오골서 쌈하던 남은 군사 퇴진하여 오던 길로 못 가고 그 산으로 오르다가 신민단 군사 80명이 동쪽산에 올랐다가 일병이 저희 있는 곳으로 당진하니까 내려다 총질하니 일병은 갈 곳이 없어 마주 총질한즉 올라가는 철에 후병이 몇이 죽으니까 속사포로 내려다 부치니 신민단 군사 한 개도 없이 죽고, 일병이 수백 명 죽고 서로 코코 소리 듣고 총소리 끊어졌다. 그때 왔던 일병이 오륙백 명 죽었다. 초 6일 그곳에서 떠나 일낭거 지나 천보산 늣투거우 석탄고로 당진하니 시거우 들어갔다 나오는 일병 100명이 마주쳐 접전하여 일병이 술을 잔뜩 먹고 오던 놈들과 접전하여 몰신 다 잡고 무장을 앗아가지고 뫼일거우로 들어가 허영장 군대와 연합하여 한 달 유숙하고 있었으니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서 글발이 나오되 붉은 주권이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점령하였다고 글발이 나오니 러시아 동무 삼 인이 들어가길 요구한즉 군사 30여 명으로 그 동무들 보호하여 보낼 때에 중국 군대가 접어든 것을 보고 우리 군대서 총질하여 중국인 5명이 죽었으니 그놈들이 너희 군대는 우리와 상관 없는 이려 우리에 불질할 이치가 무엇이냐고 시비가 일어나 그놈들이 배상금 한 놈에게 800천씩 물지 않으면 너희를 무장으로 쏘겠다고 고성대독하니 물마하고 대답은 하였으나 물 것이 없음으로 비밀운동하여 운툴나재에 삼경에 접어들어 중국 군대에 사격하려고 차부하는 시에 출장 나갔던 기병 30여 명이 본 영문으로 들어오던 대장이 말에서 내려 이것이 어쩐 일인가 하고 물으니까 전후 사실을 말한즉 그럴 듯하다고 하면서 조금 지체하소 하고 영문으로 들어가더니 대대장 오패라 하는 대장이 나와 우리 영문에서는 그런 것을 전후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군사의 법은 세계 어디든지 꼭 같으니까 그럴 듯하다고 하면서 보의탄 한 장을 청하여 물은즉 제 군대가 도적 잡으러 갔다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한즉 탄장을 책망하여 놓고 인차 서로 양국이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조선이 없어지니까 중국도 순망거치라 고생한다 하면서 누가 잘못이든 거우 군대에는 서로 좋은 낯으로 화친 화친하자 하고 서로 손길 쥐고 서로 헤어진 일이 있다.  4월 28일에 떠나 천보산 뒤로 어랑촌을 지나 말리거우에 들어가 유진하고 한 달 유하고 투두거우 일본영을 야심 삼경에 달려들어 재작하고 그곳에서 어딘지 모를 곳에 조선인 예수촌에서 오라 하기에 행군하여 간즉 군사들을 쇠잡고 분육하여 먹인 후에 내복 한 벌씩 주니까 타 입고 떠나 말리거우로 돌아오니 구월이 되었다. 일병이 러시아에서 철병하여 나오는 놈이 수만 명이 북간도에 푹 덮였다. 그런데 고려에 있던 일병이 몇십 명이 종성 와서 고려 포수 수십 명을 청하여 놓고 너희 중에 백두산 사냥꾼이 몇이나 되느냐고 물은즉 반수 이상이 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한 달에 50원씩 줄 것이니 말니거우에 홍범도 군대가 있다니 누가 그놈의 목을 바치면 상금으로 오천 원 상금으로 줄 것이니 그럴만한 자가 있으면 손을 들어 맹세하라 한즉 몇 놈이 손을 들어 맹세하고 무리를 지어 백두산으로 들어 밤낮 페속으로 단체하고 야지골 당진하여 그날 밤으로 말리거우 조분 고려 둘러싸고 날 밝기를 저대하는 중에 내 심정이 솔난하여 밤중에 군사를 취군하여 말리거우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밤을 새는 중에 날이 금시 밝자 대포소리 한 방 나더니 사방으로 이야 소리가 천지진동하면서 사격소리가 끊기지 않고 단번에 말리거우 인가촌에 달려드니 인적이 고요하고 아무 것도 없으니 물론 어떤 웅덩이던지 몰수히 없어서 나갈 방수를 얻는 중에 내에 군인 520명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벼락치듯 막 사격하니까 종천강 종지출 못할 것을 그려놓았다. 밤이 삼경 되도록 진을 풀지 못하고 답새우다나니 다 잡았다.  총 240병과 탄환 500발 받아가지고 조선 놈 사복하고 몸 빠져 나가는 놈 여섯 놈 붙들어 뒷짐 지어 가지고 높은 산으로 잡아 가지고 올라와서 초사를 받으니 개개 직고하되 재전 사람을 죽입니다. 저희는 의병으로 몇 달 다니었습니다. 그놈들을 코를 꿰어 가지고 저녁 굶고 아적 굶고 페간으로 샘물 곳에 가서 산에서 샘물골 백성을 청하여 돈을 많이 주고 음식을 지어다 먹고 소미 한 섬에 일화 백 원씩 주고 사 올려다가 조금씩 나눠주고 떠나서 소밍미거우 왕닌에 형의 집팡에 와서 소미 두 섬에 일화 300원 주고 사서 나눠 넣고 어구로 나와 군정서 청산리에 있다 하니까 연합하여 고려로 나갈까 하고 찾아가는 길에 어구의 큰 길에 나가 서자마자 하여 보초병이 뒤물러 서면서 일병이 수천 명이 당금 당진하였다 한즉 할 수 없이 고려 나가 쓰자던 뿔니묘트를 걸고 일병 대부대에다 내두르니 쓰러지는 것이 부지기수로 자빠지는 것을 보고 도망하여 오른 길로 산페로 들어와 코 깬 놈 죽이고 9월 11일 밤에 추운 산간에서 불도 놓지 못하고 떨었더니 날 밝은 후에 군사를 점구한즉 세 사람 없어졌다. 찾아보니까 나무 밑에 엎어져 죽었다. 굶고 얼어 죽었다 하고 그 산속에 묻어 놓고 떠나 큰 봉미거우 지나 훈신장 앞덕이에 올라서자 청산에 들여다 보니 청산·갑산 어구에 일병이 수천 명이 모여 서서 장교 놈이 군대에 여차여차하여야 포로로 잡을 모계를 가르치느라고 서서 공론할 때에 뿔니묘트 걸어놓으니 막 쓰러지는 것 보고 철이 없어 놓지 못하고 도망하여 천리송 밭을 께여 동남창 안도현 가는 골로 70리를 도망하여 오다가 홍우재 굴을 만나 때려 부수고 대양 7만 원과 소미 석 섬을 얻어 나눠지고 우두양창으로 안도현을 향하여 가다가 날이 저물어지므로 우두양창 막치기에서 불을 놓고 유하게 되니까, 내가 분부하되 우등 앞에서 불 쪼이지 말고 대거리마다 쬐되 등화불면이므로 도적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 명심하여라고 명령하고 밤을 지내는 때 마침 일병 뒤를 쫓아오다가 홍우재를 만나 그놈들과 의병 간 길을 알려주면 돈을 많이 주마 한즉 그놈들이 우리도 그놈들을 잡자고 쫓는 중이다 하고 같이 뒤를 쫓아 와서 우등 놓은 우등에다 속사포를 막 놓으니 우등 앞에 불 쪼이던 군사는 씨도 없이 다 죽고 그 나머지는 사방으로 일패 도주하니 다시 갱무여망이 되었다. 숱한 탄환을 피하여 부딪치고 산간으로 기어 올라간즉 부지하처라 갈 바를 모르고 헤매는 중에 한 곳에 간즉 묘한 바위가 날 새도 출입 못 할 곳에 들어간즉 늙은 포수 하나씩 둘씩 모여드니 40여 명이 모여들어 날 밝기를 저대하고 있다가 사방을 살펴보니 과연 천작으로 생긴 곳이다 하고 우등 놓은 것을 내려다보니 일병과 홍우재 섞여 다니는 것을 본즉 견딜 수 없어 내 총질하니까 일병과 중국 홍우재 죽는 것이 환하게 보이니까 자꾸 쏜즉 얼마 죽은 것은 모르나 누렇고 검은빛이 많이 보이더라. 그놈들이 막 우리 있는 곳으로 기어 들어오는 놈을 자꾸 놓다나니 수십 명이 썩어지니 기병이 올라 달려오는 것을 쏘았으니 올라온 놈은 한 개도 살지 못하였다. 그렇게 하여 밤낮 사 일을 쌈하였더니 우리 양식이 진하여 죽게 되니까 마가목 열매를 따 먹고 있다가 9월 30일 저녁에 불시로 뇌성벽력이 천지를 깨어치듯 하더니 불시로 소낙비가 막 쏟아지면서 천지를 분별치 못하게 쏟아지는 때 틈을 타서 그 짬에 나와 물개안에 내려와 소낙 소리 날 때면 기어 얼마쯤 가다가 서쪽 산으로 올라간즉 날이 새었다. 안도현 쪽으로 향하여 갔더니 제일중대장 이천호를 만나 합이 200명으로 안도현을 향하여 얼마쯤 가다나니 페간으로 내다보니 흰풍이 보이길래 점점 가까이 간즉 일병 대장놈이 군사 15명으로 파수를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데 달려들어 멸망시키고 군량·군복·탄환·전화통 한 개·과자 여러 가지 앗아가지고 안도현 싸닌방으로 행하여 간즉 어느 때인고 한즉 동짓달 14일이다. 그곳에서 두 달을 유하다가 인차 러시아로 들어올 때 오동청 앵무현 태성 영고탑을 지나 모무거우진이―투형동서 한 달 지워 홍우재와 쟁토하고 12월 19일 떠나 봉밀산 내려와 십여 일을 유하고 양무강 수리더우 호림현 도무거로써 이만 싸인발 와서 정월 26일 이 군대에게 무장을 바치고 2월 6일 자유시로 들어올 때 무장 몇 개를 준 것을 기록한즉 말진 일대 709병이고 노식(러시아식) 4개이고 철 사만7천 개이고 폭발 2,804개이고 코코 6개, 단총 40개고, 전후 다 이 군단에 넘기고 자유시 들어와 까란다시 유일니와 연합하여 양 삭만에 이르쿠츠크 들어와 있다가 모스크바 1921년 12월 11일에 이르쿠츠크서 떠나 모스크바 당진하여 객저에서 개를 열고 전기부려 사진찍고 첫 번 트로츠키 놈이 나와 보고한 후에 심야식까 몽골국 기 간부에 취식시키고 칼리닌 나와 보고하고 그담에 일본 가다야마 축하 삼아 몇 마디 말하고 그 나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회관에 돌아와 그 이튿날 계속 대회를 열고 스탈린 집행부 회장으로 선임되어 회를 처리하였다. 나도 레닌의 후원을 많이 받았다. 회의가 필되지 못한 것은 페트로프스크 가서 회의를 필하려고 미상하였다. 그리고 레닌께서 저를 불러오라고 사단이 내려오므로 제 레닌께 들어가서 뵈온 일도 있고 말씀에 대답한 일도 있다. 자유시 사변(1921)을 묻는데 몇 마디 대답한 일이 있었다. 활동사진 제일신을 돗처 가지고 활동사진 몇 시간 논 사실이 있었고 그리고 페트로브스크에가 회를 필하고 1922년 정월 초 6일 떠나 21일 만에 이르쿠츠크 나와 유하다가 1923년 4월 3일에 치타 나와서 사·오 삭 유하다가 8월 초 일일 블라고베셴스크 나와 수일 유하다가 배에 앉아 하바로프스크 나와 내린 즉 14일에 삭클니 아른닷때에 있던 김창수·김오남 이놈들이 합동 군대 까란다시 군대와 쌈할 때에 나를 쌈하지 않았다고 나를 죽이자고 불시로 피짱으로 나를 치니까 두대 부러지므로 레닌이 체급 준 싸창으로 그 두 놈을 죽이고 칠일 주르만에[тюрьма(쮸리마-감옥)] 갓기웠다가 레닌께서 회의 나온 일이 있소. 레닌 심야쓰까 깔린 그녀분 겹서 증명을 얻어가지고 나온 것 다 찾아 가지고 이만 싸인발 나와 농사 삼 년을 하다가 왼첨으로 양봉 알쩨리(조합) 조직해 가지고 이리를 하다가 스바스크 진동촌 와서 빨치산 알쩨리(조합)를 조직하여 농사하다 달레사 소브호즈에서 물을 잘 주지 않아 추수 후에 회계해 본즉 소브호즈 빚진 것이 500원을 진 것을 그나왈[канал(카날-수로)] 쳐서 그 빚 물고 그곳에서 떡가미나 어리발 빡끌로 토지를 얻어가지고 마소 한 개 없이 회원들 어깨에다 멍에를 걸게 만들어 메고 후치로 째고 조이 21헥타르, 콩 두 헥타르로 8년도에 농사하여 대작으로 되었는데 까멘나 어리발놉 홍투애 기관에서 홍범도 알쩨리(조합) 선봉조합을 다른 곳으로 가라 하면서 어디든지 지시도 없이 가라한즉 모스크바 칼리닌 선생께 청원 올렸더니 변강 크라이에 명령하되 홍범도 몇천 날가리라도 요구하는 대로 획정하여 주라고 내리므로 천 헥타르를 떼어 가지고 광개 공사하여 열두 주모자리 나쏘쓰 걸고 70헥타르 논을 내어 벼를 심어 내니 한 헥타르에서 80쩬트녜르씩 생산이 났습니다.  그 이듬해 31년입니다. 직커우재 꼼문나를 정하여 연합고는 102헥타르 하여 벼를 심으니까 이따위 회원놈들이 노다리[лодырь(로드리-게으름뱅이)] 축이 다수이므로 가슴을 명심하지 않다나니 논밭이 낫 대일 것 한 헥타르도 없이 모두 묵어 회원들이 기한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놈들에게 농사지어 그놈들 속에 집어넣고 씬두히츠에 나와 수랍씨까는 20헥타르를 농사하다가 물에 패하고, 1934년에 수청 쓰꼬또브 “레닌길” 조합을 연합하여 3년 만에 1937년도 7월 초 8일 딸린(스탈린) 명령에 의지하여 카자흐스탄 얀꾸르간시리다리 강을 건너 사나리크 쎌쏘베트에 와서 10월 11일, 12월, 1938년도 4월 초에 크슬오르다(Кызылорда, 크질오르다)와서 2백 원 주고 집 하나 얻어 가지고 삽니다.  1938년 5월 초 7일입니다. 크질오르다 당 군부에다 당월 연금을 물려고 아침 십일 시에 가서 당 간부 책임서기 없어 새로 두 시까지 대하다가 당 간부 맞은 칸에 들어가 그 사실로 말한즉 역세를 내놓고 열흘날 와서 물라고 하시면서 월 연금 받는 사람 오지 않았다고 하기에 곧 쏘유즈에 가서 침켄트에서 깔또치까[карточка(카드)] 왔으면 생활비 탈까 하고 그곳에서 세 시나 있다가 오지 않았다고 하시므로 제 집에 온즉 새로 다섯 시가 되었습니다. 점심을 얻어먹고 앉았노라니까 밀리채[милиционер(밀리찌아녜르-경찰관)] 두 분이 와서 총을 내놓으라고 성화같이 재촉한즉 총을 내어다 주었습니다.  본래 내 나이 70 먹은 늙은 몸이 소용 없는 총을 집에다 둘 수 없다 하고 보내기는 하나 내 사랑하던 30여 년 총입니다. 1903년 3월 초 8일 후치령 허리원서 나 혼자 일병 마군 세 놈을 잡고 앗은 총입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삼 년을 사용하다가 1905년 러시아로 들어올 때 간으로 도망하여 왔다가 또다시 무산 땅에 나갔다가 그동안 산간에서 삼 년을 고생하다가 다시 1908년에 다시 러시아로 들어와서 그 총을 가목을 잘라 추풍 당어재골 최병준 집에다 묻어두고 농사하기도 하며 밋깔내 우여주만네 어리바이깨[рыбалка(르발카-낚시)]도 가 있었고 여러 금광에도 다니다가 1919년에 다시 그 총이 세상에 나와 다시 일본놈의 몸에다 철을 뿜었습니다.  그런 총으로 모스크바 동양 민족 대회에 젤리가태[делегат(젤레가트-대표)]로 갈 때도 그 총을 메고 갔던 것입니다.  원동서 해삼(블라디보스토크)·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수청·쓰꼬또브 각처로 다녀도 면목이 있는 곳이므로 다니면서도 의심하여 각 고로대 경찰관에 총을 내어달라고 호송도 많이 하였습니다. 일이 없다고 하시므로 그 총을 명심하지 않다가 까산스크 이주하여 올 때에 쓰꼬또브 구역 경찰관에 가디올리였습니다.  경찰서 서장께서 가지고 가라고 하기에 가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등한하였습니다. 원동서 각 경관께서 사랑하는 것만치 믿고 있었습니다.  이 무식한 놈의 행사로 제가 책임졌습니다.  시월 초 8일에 경찰서에 가서 밤중 새로 네 시에 당책 앗기고 주루만[тюрьма(쮸리마-감옥)]에 세 미노대[3минуты(3분)] 앉았다가 제집에 와서 자고 1938년 5월 11일에 당책·빨치산책·생활비·크니시까[книжка(크니즈카, 책)]·목필책·혁대·철필·옷측까[очки(아치키-안경)]·망원경 찾아내왔습니다.  절 두고 경관에게 호송한 계집은 사돈입니다. 그 계집이 1908년도부터 이력을 제가 잘 압니다. 나지바또[Владивосток(블라디보스토크)] 있을 때도 술장사로 제 몸을 매음녀와 같이 팔아먹으며 숱한 노동자를 등쳐먹고 살았습니다. 또 그리고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올라와서 나부사리[базар(바자르-시장)] 곁에서 집을 얻어가지고 그런 행위로 장사하다가 양딸 돈을 받고 두 번이나 팔아먹은 모양입니다. 첫 번 주었던 서방재에게 숱한 재산을 그년이 술 먹자 떡 먹자 신발 없다 삼사 년을 뜯어 먹다가 그자가 재산이 끝나니까 저와 깜빠니 되는 계집에게 주고 몇 해 지간 살았습니다. 19년 밋꼬식까 일병이 점렴하고 있을 때에도 일본놈들 군대에 다니는 보조원 통변 놈들이 그 계집의 집에 속아 다니며 그년을 내세워놓고 장단 갖다 놓고 매일 육싼표육에 거들거리고 잘 살았습니다. 또 이곳 와서 항상 원동서 놀던 버릇을 잊지 않고 본 남정 죽어 양색이 되지 않아 다시 서방을 얻되 경찰서 허가 없는 채장놈을 얻어가지고 매일 장취로 육싼표립으로 지우기만 하여도 과연 아니겠는데 제가 경찰서에서 허가 얻은 듯이 그라신이 고로대 윤파리 계집과 술장사 떡 장사하여 먹으라고 권면하여 시킨 일이 시금 있습니다.  그리고 사일 만이면 와서 눈깔에 술비지가 나오도록 먹고 제 맘대로 주정을 하다나니 홍범도가 경찰서에 왔다 갔다 한 일입니다. 끝은 1938년 5월 11일에 끝입니다. Хон Помдо(홍범도)  1938년 5월 14일에 영제부 겡치수 낌한테 서마리야의 죄목을 전수 기록하여 영제부 겡치수 낌에게 드린 일도 있었다. 1938년 6월 18일부터 녹똘간[больница(볼니짜-병원)] 거리울네[караул(카라울-보초)] 매삯에 90원씩 받고 석 달 선 일도 있다.  1938년 6월 24일 우뽀로호사에브 쎄쎄르 소비에트 후보로 선임될 때에 우리 두 늙은 부처가 투표찌 부친 일도 있다.  1927년 3월 초 6일 이만고로서 양참 알쩨리(조합)로 일 년 반을 있다가 1928년 7월에 콜호즈를 조직하여 가지고 스빠스크진 농촌 달리사 소브호즈에 나와 20헥타르 떼어 가지고 일 년을 농사하니 물이 말라서 가을에 전후 회계를 보니 소브호즈 기관 빚을 이천 원을 지고 도랑 파서 싹전으로 그 빚 물고 깜미나 어리발롭으에 알쩨리(조합)를 데리고 빠끌로 땅을 뗄 때에 칼리닌 선생께 청원 올리고 800헥타르 허가하시므로.                      끝.  계속이 더 없기에 끝입니다. 이것은 그의 일기대로 등서한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필자 (서명)Ст. Уш-Тобе(우씨-토베 역)16/ⅳ-58г.(1958년 4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