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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1 광복군 김문택 수기(탈출기1)

    해방후 탄 철도,내가 탄 철도, 철도, 내가 본 도시, 도시, 국경선, 하천, 산, 내가 걸은 길, 내가 건넌 뱃길, 항카호, 琿春, 두만강, 남양, 靑道, 靑島, 連雲, 泰山, 徐州, 淮河, 南京, 上海, 杭州, 濟南, 歸德, 開封, 臨泉, 阜陽, 立煌, 新陽, 楊子江, 漢口, 武昌, 長沙, 衡陽, 漢陽, 重慶, 西安, 蚌埠, 鄭州, 新鄕, 黃河, 무산, 청진, 圖們, 吉林, 長春(新京), 錦州, 唐山, 天津, 大同, 北京, 瀋陽(奉天), 신의주, 함흥, 한국, 황해, 중국, 서울, 대전, 대구, 부산, 통영, 대마도, 모지(門可), 미야꼬노조(都城), 가고지마(鹿兒島), 시모노세키(下關), 평양, 진남포, 牧丹江, 하얼빈, 만주, 소련

    42 광복군 김문택 수기(탈출기2)

      그러나 나는 요행히도 두성이와 같은 대대에 속했으나 중대가 달라 만날 길이 막연해져 ‘기약할 수 없는 탈출계획’은 고사하고라도 우선 고독감을 달래기 위하여 각 대대 각 중대에 배속되어 있을 동료 학병들을 찾아 헤맸다. 이리하여 요행히도 서로 만나면 각자의 소속대명을 딴 동료들에게도 알려주도록 약속을 한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하게 딴 부대에서 우리 17부대에 들렀다 하면 곧 남방으로 전출되었다는 소문이고 보니 어찌 마음이 불안해지며 초조해지지 아니하랴.   그럴 때마다 나는 남방 무인도로 끌려가 미군이 쏘아대는 화염방사기의 세례를 받을 것을 생각하니 어찌 기가 차지 아니하랴. 때문에 미군이 앞으로 쏘아대는 총알을 무릅쓰고 미군에게 투항하려고 앞으로 돌진을 각오해 보나 뒤로는 왜군이 나를 쏠 것이라 생각을 하니 진퇴양난의 나의 운명이 아닌가! 그렇다 해서 사면 바다로 둘러싸인 이 구주 땅을 어떻게 빠져나가 고국 땅을 밟을 것인가? 생각할수록 막연해지기만 하는 중국 대륙으로의 망명길!   그런데 이 무렵 우리에게는 고맙지도 않은 외출이 허락되었다. 그것은 흔히 새로운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예외없이 외출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내가 전번에 들린 바 있는 시내 사진관에 들르니,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께서는 이미 30원을 우체환으로 보내왔고 또 사촌 우택형이 보낸 위문대(慰問袋)가 와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편지에는   “……지금 30원을 보내니……어디서 어느 때나 매사에 슬기롭게 지혜 있게……용감하게……몸조심 해라…….” 라 씌어있고 위문대에는 나침반과 왜 땅, 한국, 만주 일부가 들어있는 지도가 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며 용기가 용솟음침을 느꼈다. 나의 탈출에 길잡이가 될 이 세 가지!   ‘……이미 죽음의 능선을 넘어온 나! 이제 무엇에 주저하며 무엇에 굴하랴. 지금의 나의 역경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계기가 되리라.’ 고 새삼 다짐을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은 깊어만 간다. 당장에 남방으로 끌려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새 날이 밝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부대에는 두 개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 하나는 남방행이며 다른 하나는 구주 남방에서 진지구축이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나는 진지구축에 동원되게 되었으니 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우리 대대는 구주 사쯔마(薩摩) 반도 남단 이미즈끼(指屋) 서남방 해안에 연한 어떤 산간벽지로 이동하였으니, 본부대를 떠나 몇 개의 준령을 넘고 몇 개의 골짜기를 지나 도착한 산림이 울창한 산간벽지라 대낮에도 울창한 대림(大林) 때문에 어둑시근하였으니, 바로 이곳에 ‘서부 제17부대 제3대대 3중대 3소대’가 자리를 잡았으니, 분명 서기 1944년 9월 9일이었다.   바로 이런 고장 높은 산허리에서 멀리 남쪽 바다를 향하여 땅굴을 파 그곳에 탄약을 저장하고 그 옆에 파는 땅굴을 진지로 삼아 진주만(眞珠灣)의 설욕을 하려는 성난 미군의 상륙을 예견하여 최후의 포화를 퍼부어 최후의 승패를 겨루어보자는 왜군의 어린애의 병정놀음이었다.   쌀쌀한 고원지대에서 밤을 지샌 제3소대 제1분대원들은 새 날이 밝자 통나무와 대나무로 집의 뼈대를 만들고 나뭇잎으로 천장과 벽을 누벼 우리가 기거할 수 있는 내무반을 꾸미고 일대의 숲과 우거진 나무를 찍어 넘겨 환경을 정리는 하였으나 역시 낮이 되어도 어둑시근함을 어찌하랴.   이제 우리는 이 내무반에서 천여 미터 떨어진 산허리에 있는 작업장으로 간다. 얽히고 설킨 숲을 말끔히 정리하고 우거진 관목(灌木)을 베고 나서 해묵은 거목을 찍어 넘기고 얽힌 나무뿌리와 돌을 파내고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이런 중노동이 또 어디 있으랴. 등과 얼굴에 비오듯이 흘러내리는 땀이 문제가 아니라 손바닥에 생긴 물집은 어느새 터져 굳은살이 박히고 손등에 흘린 핏자국은 꺼멓게 되었다.   ‘성자필쇠의 진리, 역사는 돌고 돈다는 천리’조차 모르는 왜 군국주의자들! 패전을 은폐하려는 대화혼도 분명 망령이 났음에 틀림이 없다. 세월이 흘러만 간다. 외롭고 쓸쓸하고 답답한 세월!   특히 나는 저녁만 되면 내무반 왼쪽에 떨어진 위병소를 지나 그 남쪽 200미터나 떨어진 지점에 있는 대대 취사장 옆에 흐르는 냇물가에서 식기 씻기를 도맡았다. 그것은 내가 최하급자이기도 하지만 특히 같은 대대에 속해 있을지도 모르는 동료 학병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의 막연한 희망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런가? 어떤 날 저녁 나는 취사장 옆 냇물가에서 두성이를 만났다. 두 젊은이의 기쁨! 우리는 다짜고짜 탈출의 거사를 재확인하면서 아무래도 한번은 있을 휴가나 외출의 날에는 무조건 부대를 탈출하자는 데 뜻을 같이 하면서 안병형(安炳衡)에게도 그 뜻을 알리도록 했다. 그것은 막연하나마 기와끼(本脇)에 있을 동포에게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며 이곳에 더 있다가 개죽음을 당해서는 아니 되겠다는 최후의 결심 때문이었다. 몸은 부대에 있으나 마음은 ‘조국으로의 가교’로 첫 발을 내딛은 것만 같다. 마음이 후련해지며 만사는 형통될 것만 같다. 그런데 우리가 말을 주고받을 때 취사장에서 배불리 처먹어 돼지같이 뚱뚱해진 취사반 상등병 놈이   “야 개새끼들, 식기를 씻었으면 빨리 들어가. 쭈물거리지 말고, 앙” 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우리는 눈을 껌벅거리며 헤어졌다. 약속의 이행을 다짐하며 내일을 위하여 용기를 내자는 신호였다.  내무반에 들어서자 평상시 같으면 대원들에게 짜증만 내던 분대장은 유별나게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식기 광주리를 든 나를 보자 뜻밖에도   “어이, 수고가 많다. 그런데 귀관은 오늘밤 보초근무야. 그 대신 내일은…….” 이라면서 말끝을 흐린다. 분명 무슨 좋은 일이 생겼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도 까다롭던 점호 때 소대장인 육군 소위가 ‘명령을 하달한다’고 전제하고 나서   “내일 예정이던 사단장 각하의 진지구축 상황 시찰은 중지다. 그 대신 제관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내일은 이 근방 10리 이내의 외출을 허락한다. 귀영시간은 석식 때까지.” 라 한다. 순간 대원들의 기쁨의 함성! 그럴 것이 사단장 시찰에 대비하여 땅굴파기에 얼마나 열성을 다했던가! 그런데 고된 시찰 대신에 이 산간벽지에서 사람구경조차 못하는 우리에게 외출이 허락됐기 때문이다.   순간 섬광(閃光)이 눈에 번쩍인다. 순간   ‘그렇다. 내일 외출시간을 쟁취(爭取)하여 왜적의 쇠사슬을 풀고 자유의 천지 조국의 품안에 안길 수 있는 수만 리 길을 나는 기어이 떠나고야 말리라.’ 고 생각을 하니 산외(山外)에 유산(有山)한 이 산간벽지며 푸른 창파의 현해탄이 무엇이 무섭고 무엇이 두려우랴.   ‘자, 오늘밤도 또 밤의 근무도 이 부대에서는 모두 마지막이다. 내일 아침이 되면 예의 냇물가에서 두성이를 만나 곧 외출을 가장한 영광의 탈출을 개시하리라. 왜적들아 잘 있어라. 나는 나의 조국을 위하여 내 조국으로 떠난다.’ 라 생각하며 이 부대에서의 마지막 보초를 서기 위하여 내무반을 나섰다. 고산지대에는 추위를 재촉하려는 초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영광된 탈출을 예축(豫祝)해 주는 전주곡이련가. 몸은 떨리나 기분은 상쾌하다.   9월 25일! 나는 위병 사령의 뒤를 따라 밤 한 시에서 두 시 사이의 입초(立哨)를 서기 위하여 위병소를 뒤로 숲을 헤쳐 남쪽 고산준령 중턱 빽빽이 서 있는 고목(古木) 밑 관목과 숲이 우거진 곳에 섰다. 이제 위병 사령과 교대병마저 떠나 고요적적한 이 지점! 몸은 오싹해지며 솜털은 일어나고 머리털이 거꾸로 서는 것만 같다. 야수가 막 뛰쳐나올 것만 같고 발 밑에 쌓인 해묵은 낙엽 밑에서는 구렁이가 막 몸을 휘감을 것만 같다. 이상야릇한 짐승(?) 소리가 이따금 귀를 찌르니 어디선가 막 귀신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 게다가 계속 내리는 비에 몸은 물에 빠진 쥐새끼와도 같이 되었으니 팔소매로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뻑 씻은들 무슨 소용이랴. 몸은 계속 와들와들 떨린다. 그러나 한편 나는   ‘자, 새 날! 나는 군화 대신에 걷기 쉽고 소리가 안 나는 지까다비註29)고무로 바닥의 창을 하고 질긴 천으로 만든 양말 같은 신발. 고무다비, 맨발다비. 공사장 인부, 농부, 노동자 등이 신는 신으로 엄지발가락 부분이 따로 되어 있어서 엄지발가락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음.를 신고 병기고에서 훔쳐낸 나침반, 또 중대장실에서 빼낸 참모부의 세밀한 구주 일대의 지도를 챙기고, 또 미야꼬노죠 시가지에 외출했을 때 구입한 두 자루의 단도를 몸에 지니고 왜 땅을 등지련다. 이리하여 다시는 못 밟으리라 생각했던 고국 땅을 밟아 그 반역도 ‘박’ 등의 무리들을 한 칼로 해치우고 만주를 거쳐 독립운동의 성지(聖地)가 있는 중국에 잠입하여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가리라. 자, 빨리 새 날이 밝아라.’ 라고 생각을 하니 속이 후련해지며 용기가 용솟음친다. 이 재경의 두려움은 다 사라지고 몸은 경쾌해지며 눈앞이 훤해진다. 내리는 비는 마치 ‘해방의 기쁨’을 상징하는 값진 기름이 몸에 뿌려지는 것만 같고 이따금 들리는 짐승의 소리와 비바람 소리는 분명 내일의 장도(壯途)를 예축해 주는 것만 같다. 왠지도 모르게 그저 기쁘기만 하다.   그러나 생사기로에서 양자택일을 해야만 할 때의 심정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머리 한 구석을 두드리는 또 하나의 생각!   ‘자, 중국으로 가는 그 머나먼 길! 어떻게 해서 현해탄을 넘어 만주에 숨어들 것인가? 당장 내일부터 펼쳐질 왜적의 경계와 감시, 그리고 수색! 만약 잡힌다 하자. 그러면 20의 꽃다운 청춘의 종말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집과 친지들은 물로 내 신병을 보증한 김 대좌는 어찌될 것인가?’ 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며 머리가 아찔해진다. 귀신이 막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것만 같다. 나는 새삼   ‘목숨을 건 탈출! 탈출에 뒤따르는 집안 꼴! 그렇다면 내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왜적 밑에서 시달리며 그저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 아닐까! 그러다가 미군이 상륙하면 한번의 사선만을 넘으면 되지 않겠나?’ 라 생각을 하니 마음에 평온이 되찾아오는 것만 같다. 총대를 잡고 빳빳이 서 있는 몸은 새삼 떨린다. 새삼 나는   ‘아니다. 오래 전부터 결심했던 조국으로의 길! 이제 이 순간에 어찌 탈출을 두려워하랴. 희망을 저버리는 것은 생명을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태어날 때부터 나는 거의 숙명적으로 민족적 수난을 덜기 위하여 왜적과 싸워야만 할 운명에 놓였다고 다짐했던 것이 아니었던고! 광명된 조국을 위하여 나는 고해(苦海) 아니 사해(死海)에 돛을 달고 저 거센 파도를 헤쳐 굳건히 나아가리라. 내게는 삶의 밑천인 용기가 있다. 이것이 있는 한 나는 어떤 시련도 어떤 운명도 타개해 나갈 수 있으리라. 내일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는 오지는 않으리라.’ 고 생각을 돌이키니 앞이 밝아지며 속이 시원해진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나는 눈을 감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시여, 이제 저는 날이 새면 내 조국을 위하여 중국 대륙에 가서 독립전선에 뛰어들어 젊음을 불사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육지로 만들어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땅까지 인도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길이 되어 힘과 용기와 슬기와 지혜를 더 주어 하나님의 섭리에 맞도록 목적지까지 인도하여 주십시오.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며 강압과 탄압에 신음하고 있는 겨레를 가나안땅까지 인도하여 광명과 희망에 넘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할렐루야’를 외치며 살 수 있도록 하루속히 내 나라를 원수의 쇠사슬을 끊어주십시오.’ 라 빌었다. 눈을 떴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나의 장도를 축하하는 취주곡과도 같다. 나는 새삼   백두산석(白頭山石)은 마도진(磨刀盡)이오   두만강수(豆滿江水)에 음마무(飮馬無)라   남아이십(男兒二十)에 미평국(未平國)이면   후세수칭(後世誰稱) 대장부(大丈夫)랴 라 남이(南怡) 장군의 시를 되새기며 용기를 배가한다.   바로 이 때 멀리서 인기척 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드디어 나는 입초 근무교대를 끝내고 위병사령의 뒤를 따라 위병소에 되돌아왔다. 드디어 서기 1944년 9월 26일 아침이 밝았다. 드디어 희망의 햇빛이 나무 사이로 빤짝인다. 풀잎이 빤짝인다.   나는 보초근무를 끝내고 내무반에 되돌아 왔다. 주인을 기다리는 한 그릇의 쌀밥을 쌀알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렸다. 그것은 우리 땅에서 나는 것을 왜적들이 강탈해다 먹는 것을 이제 쌀 주인이 이 왜 땅 산간벽지에서나마 다시 빼앗아먹는다는 심정에서, 또 우리 농부들이 피땀 흘려 작농한 것이기에 농부에 보답하는 뜻에서 한 알의 쌀도 흘리지 아니하고 먹었으며, 또 이 쌀밥을 먹고 용기백배하여 겨레를 위하여 왜적과 겨루리라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들떠있던 왜병들은 아침식사가 끝나자 거의 다 외출을 해 버렸다. 이제 나는 놈들이 먹은 식기를 광주리에 넣고 내무반 왼쪽 멀리 떨어진 위병소를 지나 바른편으로 굽어내려가 대대 취사장 옆 냇물가로 간다. 첫째, 두성이를 만나 거사를 하기 위함이고, 둘째, 그나마 식기를 씻어 내무반에 갖다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냇물에 이르자   “야 문택이, 왜 이렇게 늦었어. 첫 외출날의 계획도 몰라.” 라고 두성이는 짜증어린 말을 하나 뜻하지 않은 어젯밤의 보초근무였음을 말하자 두성이는 미소를 지으며 오늘의 거사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하였다 한다. 두성이와 나는 우리 내무반 식기광주리를 들고 위병소를 지나 우리 내무반으로 향해 간다. 그것은 우리 내무반 뒤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을 건너 우거진 숲에 몸을 감추어 산으로 오르는 것이 보초선도 피하게 되어 제일 안전한 탈출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위병소를 향하여 바른쪽 좁은 길에서 야스모도(安本)가 내려온다. 이 때 나는 나지막이   “자, 잘 됐어. 우리는 지금 막 떠나련다. 기회는 지금이야.” 라고 말을 했다. 그것은 이미 부대에 있을 때 누가 먼저 테이프를 끊든간에 한 사람의 신호로써 거사를 개시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스모도는 안절부절 천만 뜻밖이라는 듯 당황을 했다. 서글픈 일이 아니랴. 이제 또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나는 새삼 사방을 휘둘러보면서   “……그래, 잘 있어. 차차 알게 될 거야. 아니 빠르면…….” 라 귀뜸을 했으나 배신당한 느낌이 들어 불쾌하고 괘씸하다. 우리는 맥없이 위병소를 지나 우리 내무반 쪽을 향했다. 이 때 내무반장인 병장(兵長)은 마지막으로 외출을 하면서 내게   “야, 미안하지만 벗어 논 내 양말을 좀 빨아줘…….” 라면서 서둘러 사라진다. 뒤에는 우리 중대의 단 한 명의 한국인 지원병인 위생병이 싱글벙글하며 외출하고 있으나, 이들이 우리들이 이제부터 감행하려는 탈출계획을 어찌 알 수가 있으랴.   나와 두성이가 내무반에 들어서자 한 명 남은 상등병이   “어, 너무 늦었어. 빨리 외출해야지, 응. 저 놈은 네 친구냐.” 라고 두성이를 가르키면서 싱글벙글 내무반 싸릿문을 열고 총총히 사라진다. 모든 것이 우섭다. 나는 속으로   ‘어디 두고 보라. 저녁식사 때-아니면 늦어도 저녁점호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 중얼거린다. 이제 내무반에는 나와 두성이 뿐이다. 이제 놈들은 외출의 기쁨을 만끽하겠지만 우리는 왜군의 쇠사슬을 끊고 조국의 품에 안기려고 고난의 길을 뚫고 먼 날 조국해방의 기쁨을 맛보려는 것이다.

    43 광복군 김문택 수기(탈출기3)

      “문택아, 어서 따끈한 국이라도 한 사발 마셔라. 춥다.” 하신다. 밥과 국이 아닌 보약의 말씀이나 어찌 수월하게 밥이 목구멍에 넘어갈 수 있으랴. 이제 고모님께 내일을 기약하는 인사를 하고 아버지를 따라 앞마당에 섰다. 이 때   “야! 전에 네가 학병에 끌려갈 때에도……또 이제 네가 떠나면 나 살아 생전에 언제 또 너를 볼 수 있겠니…….” 하시면서 고모님께서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으신다. 아니나 다르랴.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으나 이북 땅에 계시는 고모님께서는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알 길이 없다.   이제 부자는 싸리문을 나서 바른편 소나무밭 사이의 오솔길을 뚫고 무궁화 꽃에 둘러싸인 조부모님 묘소 앞에 꿇어앉았다. 일 년 4개월 전 7월 중순 그 어느 일요일 날 조모일(祖慕日)에 찾아 왔었어야 할 조부모님을 유치장 신세니 왜군에 끌려가느니 하여 뵙지도 못했다가 오늘에 비로소 찾아뵙게 되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어찌 나의 얄궂은 운명이 아니랴.   이 때 아버지께서는‘기도를 하자’하시며 고개를 숙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역경을 뿌리치게 하시어 지금 문택이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심을 감사드리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문택이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다시 먼 곳을 향하여 떠나고저 하오니 하느님께서는 예와 마찬가지로 이 문택이에게 지혜와 슬기, 용기와 건강을 허락하시어 뜻한 바를 이룩하도록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이 땅에도 하루속히 하느님의 영광이 깃들게 하여 광명하고 희망에 찬 독립을 허락하여 주시어 굶주림에 허덕이며 암흑에서 방황하며 동포애에 매마른 이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시어 하느님께 하루속히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불쌍한 이 겨레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경영하는 작은 일에도 하느님이 같이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나이다. 이 모든 것을 거룩한 주예수의 공로를 받들어 축원하나이다. 아멘.” 이라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제 부자는 일어섰다. 아버지는 앞서고 나는 뒤따른다. 나 어릴 때 흔히 지나던 길! 어찌 지난날의 일들이 머리를 스치지 아니하랴. 어둑시근한 새벽길! 아버지께서는 “날이 훤해지기 전에 빨리 가자”하시면서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을 ‘고패동’ 산길을 넘으시면서 새삼   “……그 책 광고 용지를 잘 간직했다가 만주에서 중국으로 떠날 때에는 꼭 편지 봉투에 넣어서 집에 보내라. 물론 겉봉은 네 글씨와는 다르게…….” 라 세밀한 주의까지 다시 하신다.   기약 없고 정처도 없이 머나먼 길을 떠나는 아들의 안위를 알기 위하여 주시는 이 책 광고 용지에 아로새겨져 있는 아버지의 심정을 나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으랴.   이제 나는 일주일 전 그렇게도 기뻐서 날아갈 듯이 걸어왔던 득신학교 뒷길을 일주일 후인 오늘 새벽에는 쓸쓸하고 씁쓸하게도 아무 말 없이 아버지와 걸어가고 있다. 인생 무상이런가. 드디어 풍정학교 앞 신작로에 이르렀다.   이 신작로 바른편 신작로를 따라 400여 미터를 가면 우리 집 상점 보문사! 내 머리는 무의식중에 바른편으로 돌아간다. 순간 속이 꽉 멘다. 가고 싶어도 못가는 나의 집. 보고 싶어도 못 보는 내 어린 동생들. 이제 이 거리도 다 지나니 왠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순간 나는,   ‘……어쩌다 나는 이렇게 동생들을 보지도 못하고. 철모르는 동생들은 이 못난 형이 왔다가 가는 줄도 모르고 꿈나라를 헤매고 있겠지….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지금 기도를 하고 있겠지…….’ 라 생각을 하니 그저 앞이 캄캄해지며 새삼 가슴이 메이는 것만 같다. 어느덧 유사리(柳沙里)를 지났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나 사람의 왕래는 없다. 아버지께서는   “날이 더 밝으면 이 이상 더 따라갈 수도 없으려니와 나도 남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상점 문을 열어야만 하니 그만 여기에서 헤어지자…….” 하시면서 길 바른쪽 도랑에 앉으신다. 늦가을 새벽바람에 몸은 떨린다. 이 때 아버지께서는 기도를 올리자면서   “……이제 저의 부자는 헤어져 문택이는 주님의 뜻을 따라 먼 곳을 향하려고……문택에게 슬기와 지혜, 용기와 침착을……우리 땅에 하루속히 독립을……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 이라 기도를 마치시고 들고 오신 두둑한 백을 주시면서   “이거 길 가다 먹으라고 어머니가 싼 떡과 과일이다. 이제 길을 떠나매 몸조심하고 매사에 침착하며 몸을 경건히 갖도록 해라.” 하시고 다시 봉투를 주시면서 ‘필요할 때 쓰라’고 하신다.   피땀 흘려 버신 돈! 학비라면 몰라도 이제 ‘탈출’이란 이 마당에 어찌 2,000원이란 거액을 받을 수가 있으랴. 나는 억지로 500원을 아버지께 되돌리고 나머지 돈을 챙겼다. 그리고   “저 꼭 다녀오겠습니다.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라 인사를 하자 “아주 밝기 전에 그만 남포로 가야겠다”하시면서 아버지께서는 남쪽으로 발을 옮겨 가신다. 이제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부자간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게 마련이다. 드디어 아버지는 언덕 밑으로 들어선다.   다시 뒤돌아 보지 아니하고 북쪽 평양을 향한다. 일주일 전 이 길가에 늘어섰던 저 버드나무들은 한 줄로 정렬하여 나의 환향을 반기는 듯했고 공중 나는 새들 역시 나를 맞이하는 듯 지저귀고 있어 날아갈 듯이 경쾌한 몸 기쁘고 시원한 마음으로 걸어왔던 이 길! 일주일이 지난 오늘 저 버드나무들은 옷은 다 벗겨진 채 마치 사형수와도 같이 씁쓸히 서 있고 그렇게 즐겁게 지저귀던 새들은 모두 온데간데없이 흩어지고야 말았으니, 나는 그저 무거운 몸으로 외롭게 쓸쓸하게 걸어가야만 하니 나의 얄궂은 인생의 향로가 왜 이다지도 기구하단 말인가. 괴롭고 안타깝고 허전하다 못해 두 줄기 눈물이 앞을 가 려 저고리 소매로 뻑 씻기는 하나 눈앞이 어른거려 길 옆 도랑에 빠지기도 했다.   이제 나는 길에 올라서서 다시 앞을 향한다. 이제는 그렇게도 무섭고 보기만 하면 그렇게도 떨리던 시골순사도 파출소도 두렵지 않다. 떠도는 신세에 고달픈 몸. 텅 빈 마음에 생과 사를 개의치 않기 때문일까. 몇 개의 파출소(주재소)를 지나 몇 개의 언덕을 넘으며 갈천(葛川), 진지동(眞池洞)을 지나 이모님이 계시는 기양(岐陽)을 지나니 어찌 옛 추억이 떠오르지 아니하랴.   해도 서산에 기울었다. 시장한 줄도 모르고 어느 사이에 대평(大平)도 지나 조촌(趙村)에 다다랐다. 이제 컴컴해진 이 땅. 나는 일주일 전에 앉았던 소나무밭 언덕에 앉았다. 솔밭 사이를 스치는 늦가을 찬바람이 몸을 스치니 몸은 후루루 떨린다. 눈 아래 먼 조촌 마을에는 전등불이 빤짝인다. 100여 리 머나먼 길을 한숨에 돌파한 몸. 어찌 피곤하고 시장하지 아니하랴. 나는 백을 열었다. 어머니가 만드신 떡을 깨물었다. 목에 꽉 걸린다. 순간 현옥이를 등에 업으신 어머님의 환상이 앞에 나타난다. 순간 나는   ‘엄마 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는 울고 있습니다.’ 라고 속으로 외칠 때 어머님의 환상은 사라진다. 나는 사과를 깨물었다.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다. 순간 치마로 눈물을 닦으시던 고모님의 환상이 사라진다. 두 줄기 눈물이 쭈루룩 얼굴을 씻어 내린다. 먼 조촌 마을의 전등불이 어른거린다.   ‘그래, 연여전(年餘前) 유치장에 끌려갔기에 나날을 한숨과 암루를 흘리시던 어머니! 그러나 유치장 귀신이 안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다시 사자(死者) 밥을 지고 왜군에 끌려 갔으니 가슴에 멍이 들었을 어머니! 게다가 부대 탈출로 왜적에게 고초를 당하시던 어머니가 이제 생사를 무릅쓰고 기약없이 정처없는 길을 떠나고야 말 자식을 생각하니 그야말로 자기 정신이 아닐 어머니! 이제 이런 불효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고 생각하며 먼 허공을 쳐다보며 한숨지을 때 아버지께서는   ‘아니다. 네가 가는 길이 정의의 길이고 사나이의 길이니 모두 잊고 네 길을 씩씩히 매진하라. 좌절이 있을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이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느덧 평양의 거리를 걸어 서평양을 향한다. 함흥으로 가기 위하여 서평양역 형편을 사전에 알아두기 위해서였다. 이제 나는 역전 어떤 여관에 찾아 들었다. 당장에 쓰러져 잠이 들 것 같지만 밤이 깊어짐에 따라 더욱더 또렷해지기만 하니 이 어찌된 연고일꼬! 꿈과도 같고 생시와도 같은 이 밤! 그러나 나는 분명 몸은 이 서평양에 있으나 마음만은 진남포 마산리에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드디어 10월 31일 아침이 밝아온다. 두성이를 만날 생각을 하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쁘다. 만사가 형통될 것만 같다. 나는 여관을 나서 칠성문(七星門)을 지나 황금정(黃金町)을 누비며 드디어 평양역에 이르렀다.   일 년 반 동안에 일어났던 갖가지 쓰리고 괴롭고 안타깝고 저주스러웠던 일들이 머리를 스친다. 시간이 흘러 12시 정오! 가슴은 뛰고 마음은 설렌다. 나는 이곳을 향하여 오는 사람을 일일이 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두성이! 나는 추위에 쫓겨 형사와 헌병 놈들이 득실거리는 정거장 대합실을 들락거리며 안타깝게 두성이를 기다린다. 나는 계속 이 때나 저 때나, 이 사람인가 저 사람인가 애타게 기다리는 두성이는 결국 나타나지 않는다. 벌써 한 시가 지났다. 나타나지 않는 두성이를 새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랴.   나는 발을 돌이켜 서평양을 향한다.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운 두성이! 증오감이 머리털끝까지 솟구쳐 올라 두성이의 배신을 힐책해 보다 문득 ‘아니다. 혹시 두성이에게 무슨 불길한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니 오히려 두성이가 가련해지며 두성이를 욕한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기림리(箕林里)를 스치니 나를 징역에서 구출한 김대좌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 어찌 마음이 착잡하지 않으랴. 드디어 나는 서평양에 이르렀다. 경계가 심한 본 평양역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리 심하지는 않으나 역시 헌병 놈이 역에 도사리고 있다. 이미 각오한 나는 재치 있게 평원선(平元線) 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산학교 시절에 지나던 이 정거장!   기차는 사동(寺洞)을 지나 승호리(勝湖里)를 거쳐 고원지대인 강동(江東) 땅에 이르렀다. 새삼 강동육성(江東六城)을 생각해본들 무슨 소용이랴. 기차는 골짜기를 달리다가 비류강(沸流江)변에 자리잡은 ‘졸본부여’(卒本扶餘)의 비류국(沸流國)의 옛터 성천(成川) 땅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 선조왕이 잠시 피난해 왔던 이 땅을 이제 내가 왜적을 피하여 지나가고 있다. 기차는 달리고 차창 밖 풍물은 바뀌고 승객은 타고 내리지만 마음 붙일 곳 없는 이 젊은 방랑객은 그저 멍하니 기차에 몸을 흔들거리고 있다.   열차는 이미 신성천(新成川)을 지나 단풍으로 물든 고원지대를 숨가삐 달리다가 양덕(陽德)에 이르렀다. 기차가 ‘관령’을 지나 영흥(永興)에 이르렀을 때에는 해가 서산을 넘은 지 이미 오래된 때이다. 드디어 도착한 함흥(咸興)역!   왜군 헌병과 형사 놈들이 득실거리는 역 구내를 나는 난장이를 가장하여 재수좋게 빠져 나갔다. 어제 고향을 등졌던 일이며 오늘 서평양을 등지고 열차에 마주앉아 은근히 연정을 통한 정의고여(正義高女)의 이양과의 대화도 이제는 까마득한 옛 꿈과도 같다. 잠못 이루는 함흥 역전 여관의 밤은 깊어만 간다.   ‘북에는 반용산(盤龍山)을 등지고 성천강(城川江)이 동안(東岸)에 자리를 잡고 서남에 비옥한 광야를 끼고 있는 이 함흥 땅! 아득한 옛날 임둔(臨屯), 동예(東濊), 고구려의 땅이었다가 신라의 공략을 받았다가 드디어는 발해의 옛터에 속한 후에는 다시 동여진(東女眞)의 근거지가 되어 완전히 우리 주권이 미치지 못하였던 처참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이 땅! 그 후 윤관(尹瓘)의 공략으로 다시 우리의 고토(故土)가 되었으나 이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으로 다시금 황폐해졌던 이 땅!’에서 나는 이 한밤을 지내련다. 나 어찌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있으랴.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이면용(李冕用)의 넋도 달래보지도 못하였던 이 흉흉했던 땅! 함흥의 본관(本官)이 어디며 경화루(慶和樓), 덕안릉(德安陵)註48)태조 이성계의 고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능. 의릉(義陵)註49)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능.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으랴.범례: 도보한 길과 산, 통과한 철도, 내가 본 도시, 하천, 미답(未踏)의 철도 만주, 함경북도, 동해, 한국, 至牧丹江, 왕청(汪淸), 석현(石峴), 도문(圖們), 양수천자(凉水泉子), 밀강(密江), 훈춘(琿春), 두만강, 온성(穩城), 남양(南陽), 조양천(朝陽川), 연길(延吉), 용정(龍井), 화룡(和龍), 석인구(石人溝), 상삼동(上三洞), 상삼봉(上三峯), 아오지(阿吾地), 나진(羅津), 고무산(古茂山), 부령(富寧), 청진(淸津), 무산(茂山), 회령(會寧), 고성리(古城里), 청도(靑道),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새 날이 밝으니 11월 1일이다. 여관을 나서 헌병과 형사 놈들이 득실거리는 정거장 대합실 안에 섰다. 어찌 후퇴가 있으랴. 나는 전진을 위하여 여행증의 종점 청진행 열차를 교묘히 탔다. 심장이 뛰고 헌병 놈이 나의 뒤를 따르는 것만 같다. 기차는 어느덧 흥남(興南)을 등지고 동해와 대양을 멀리 바라보며 바로 바른쪽 눈 아래 철썩이는 해변을 내려다보면서 홍원(洪源)에 이르렀다. 순간   ‘그렇다. 저 절벽 아래 창파에 몸을 던진 열녀의 넋을 달래려고 울고 있는 절부암(節婦岩)의 두견새들은 어디 있으랴.’ 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기차는 신포(新浦)를 지나 단천(瑞川) 앞바다를 지나는데 마운령(磨雲嶺) 높은 재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고 북쪽의 마천령(磨天嶺)과 대치하고 있다 하니 이 어찌 천험(天險)이 아니었으랴. 기차는 드디어 성진을 지나 동해의 끝없는 푸른 바다를 바른쪽으로 바라보며 수많은 다리와 터널을 뚫고 길주(吉州)와 명천(明川)의 팔경도 보여 주지 아니하고 그저 달리기만 하니 얄밉다. 그러나 이제 청진에서 두성이를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은 들뜨고 몸은 날아갈 것만 같다.   그러나 열차 내에 있을 헌병과 형사들의 불심건문이며 또 청진 역에도 있을 것을 생각하니 삼수와 갑산이 따로 있나. 바로 이런 것이 삼수, 갑산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열차 안에서 무사했던 나는 청진에 도착해서도 운좋게 놈들의 경계를 피하여 무사히 역전 광장에 나섰다. 항구의 찬바람이 몸을 친다.   고향 떠나 천여 리 떨어진 이 청진 땅! 옛날 중부(仲父)님께서 사업차 오셨다가 귀향치 않아 아버지께서 와서 비로소 환향하셨다는 돌아가신 할머님의 옛말이고 보니 분명 이 청진 땅은 내게는 어떤 인연이 있는 땅인지도 몰라. 그러나 중부님께서는 환향은 하였으나 이제 나는 이 땅을 떠나면 다시는 고향 땅을 못 밟을지도 몰라.   저녁이 되어 나는 어떤 여관에 들어갔다. 잠 못 이룰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서였다. ‘이제 나는 몇 날 후 두성이를 만나 남양(南陽) 땅을 넘어 만주 땅 도문(圖們)에 스며들어 가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니 난감하지 그지없다. 밤은 깊어간다. 이 때 홀연히 여관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순간 가슴이 철렁, 솜털이 오싹, 머리털이 거꾸로 서며 ‘아차. 왜놈의 불심 검문에 걸렸구나’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나 방문과 여관 대문밖에 없으니 어찌 여관을 빠져 나갈 수가 있으랴. 위기일발의 가슴 조이는 순간의 연속! 그러나 잠시 후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다시는 들리지 않았으니 분명 방을 구하는 손님의 소치였으리라. 노루 제 방구에 놀란 밤!   새 날이 밝자 나는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행여나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길이 트이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어찌 수월하랴. 오직 눈앞에 펼쳐지는 한 일자(一)를 긋고 있는 동해의 수평선에 도취하면서 드디어 허리띠와도 같이 해변가를 따라 길게 뻗친 소위 명치정(明治町)에 이르렀다. 보기도 싫은 세 글자. 발을 돌이켰다. 쓸데 없는 모험은 삼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야미떡’으로 시장기를 끄기 위하여 어떤 시장 골목길에 들어섰다. 그것은 소위 식권이 없으면 여관에서는 밥을 아니 주기 때문이었다. 어제 들렀던 여관 주인은 나를 반긴다. 청진에서의 이틀째 밤인 11월 2일의 밤은 깊어간다.   새 날이 밝자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행여나 월경의 길이 트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여관 문을 나섰다. 그러나 막연한 이 길! 해가 중천을 넘었을 때 나는 시장을 향하여 어떤 골목길을 굽을 때 나타난 ‘진남포식당’이라는 간판! 보기만 해도 따뜻한 느낌을 안겨 주는 진남포라는 낱말! 나는 쏜살같이 식당문 안에 들어섰으나 식권이 없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깨끗이 거절당하고 보니 식당 주인이 얄밉고 진남포라는 낱말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나는 시장 한 구석에서 비싼 팥죽으로 배를 채우고 여관에 들어섰다. 초조해지는 밤을 지났다.   11월 4일 희망의 새 날이 밝았다. 어쩐지 기분이 상쾌하다. 그것은 오늘 12시 청진역전 광장에서 두성이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여관을 나서 팥죽으로 요기를 끄고 청진역을 향한다. 나는 역 대합실에서 열차 도착시각을 보기도 하면서 역전 광장을 배회한다.   기다려지는 긴 시간은 흘러 드디어 12시. 사이렌이 울려 퍼진다. 왜적 패망의 최후적인 발악상을 오는 이, 가는 이는 발걸음을 멈추어 묵념으로 표한다. 드디어 사이렌 소리가 멎자 200미터쯤 앞에서 두성이가 걸어온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며 마음은 설렌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그럴테지. 제1의 약속지 평양에서 약속을 어겼으니 이 청진에야 당연히 나타나리라’고 생각하면서 역전을 향하여 오는 두성이를 기다린다. 그런데 생사를 같이할 두성이는 나를 보지 못하였는지 곧바로 대합실을 향해 간다. 때문에 나는 두성이를 불렀으나 두성이는 나를 본 체 만 체 대합실 안으로 들어선다. 나는 두성이를 따라 이리떼가 득실거리는 대합실 안에 들어가 막 차표를 사려는 두성이 앞에 섰다. 그러나 청천벽력! 두성이와 같이 키가 좀 작고 안경을 끼고는 있으나 두성이가 아님을 어찌하랴. 순간적인 낙망! 나는 헌병, 형사 놈들의 눈을 피하여 역전 광장에 섰다. 북풍 모진 바다 바람에 몸은 떨린다.   배신당한 기분에 싸인 나는 두성이를 저주를 해 보았으나 한편 불행에 부딪혔을지도 모르는 두성이의 안위에 대하여 하늘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이리하여 나는 이왕 두성이를 두 번이나 기다렸으니 이 청진에서 몇 날 더 머물며 두성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나는 맥없는 발길을 어디론가 옮기고 있다. 쓸쓸하고 우울해진다. 나는 이번에는 제2의 딴 여관에 들렀다. 쓸쓸하고 허전하고 외롭고 답답한 밤은 깊어만 간다. 오늘의 일이 아득한 옛일과도 같이 느껴진다. 내일을 기대해 본다.   새 날이 밝아 11월 5일! 여관을 나서 팥죽에 몸을 녹이며 12시를 기다려 본다. 그러나 12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두성이, 이제 새삼 두성이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랴. 배신당한 느낌에 울화통이 터지나 허전해지는 마음을 스스로 달래본다.   나는 어디인지도 모르고 발을 옮기고 있었으니 바로 남쪽 나남(羅南) 방향이 아닌가! ‘왜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 곳을 어쩌자고 간단 말인가’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발길을 돌이켰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내 집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빠르기도 하다. 어제 들렀던 여관의 하녀(下女)만이 나를 반긴다. 이렇듯 떠도는 젊은이의 처량한 신세를 눈치가 빠른 이 하녀 박양이 모를 리가 있으랴. 먼 일가 집인 이 여관에 와서 일을 보고 있다는 이 평양 출신의 박양에게 나는 다짜고짜 만주로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물었다. 이 때 보통학교 출신인 박양은 이미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예, 그건 무산(茂山)에서 ‘상삼동’(上三洞)으로 가서 만주 땅 ‘고성리’(古城里)로 넘는 것이 가장 수월하고 안전하지요” 라 한다. 내게는 아무런 증명도 없을 것이고 게다가 식권이 없어 밥조차 못 사먹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박양의 말에 틀림없다. 천하를 얻은 듯한 나의 마음, 그저 박양에게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 이렇듯 알아낸 월경(越境)의 길! 나는 이 길을 알려고 이 넓은 청진의 거리를 그 얼마나 헤맸던 것이랴.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경우는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함일까!   여하튼 박양에 대한 나의 연정은 박양의 나에 대한 연정의 몇 배나 되었을지도 몰라. 순간적으로 마주치는 눈빛의 불꽃. 조용한 여관방에는 거센 숨소리만이 들린다. 가슴은 울렁거린다. 바로 이 때 여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히 나자 박양은 나에게 “선생님, 아마 경찰의 불심검문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빨리…”라 하면서 나가 여관 대문을 연다. 나는 어찌하려는가? 나는 어느 곳에 숨으며 어느 곳으로 빠져나가라는 것일까? 출입문 하나밖에 없는 이 여관방에 여관 대문 하나! 진퇴양난! 처음 당하는 이 일에 그저 머리가 아찔해지며 솜털이 오싹, 머리털이 거꾸로 일어서며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른다.   이 때 옆방에서 손님을 끌고 나가는 소리가 나자 이번에는 나를 무조건 끌어낸다. 독안에 든 쥐! 나는 여관 밖에 있는 트럭에 실렸다. 트럭에는 이미 7~8명의 손님이 실려 모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분명 그 중에 한 사람만이 일어서 있으니 형사 놈(?)에 틀림없다. 트럭은 엔진에 발동을 걸어 검은 막을 헤치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다. 나는 최후를 각오했다. 죽지 않으면 살리라고. 이제 달리는 트럭은 검은 커브 길에 이르러 속력을 줄인다. 절호의 찬스! 나는 홀연히 일어서서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땅 위에 뒹굴었다. 나는 어디인지도 모르고 골목길을 헤매며 뛰었다. 나 한 명 때문에 트럭이 멎을 리 없고 또 7~8명을 감시하는 형사가 나를 뒤따를 리가 없다.  나는 죽은 듯이 조용한 골목길을 뛴다. 뒤돌아 보나 아무도 뒤따르는 사람은 없다. 가슴은 뛰고 숨은 가쁘고 얼굴과 등에는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린다. 땀을 씻을 겨를도 없다. 드디어 나는 어떤 산 중복 큰 바위 틈에 앉았다. 찬바람을 막기에는 안성맞춤이나 몸은 와들와들 떨리기만 한다. 악몽과도 같았던 이 밤의 스릴이 눈앞을 스친다.   눈 아래 먼 곳 청진항에 비치는 불빛이 물 위에 어리어 빤짝인다. 휘몰아치는 바닷바람은 매섭기만 하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 산 중턱 바위틈의 밤은 깊었다. 두성이를 좀 더 기다려 보겠다 하여 당한 충격과 스릴의 모험을 일생을 두고 나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새 날의 동이 트니 11월 6일 아침이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산을 내려서니 구역질나는 명치정(明治町)이란 왜 거리가 아닌가! 나는 쏜살같이 거리를 빠져 나갔다. 이제 나는 예의 시장 골목에 들어서서 몰래 파는 팥죽으로 몸을 녹이며 ‘야미떡’으로 배를 채운다. 이러는 동안 해가 중천에 오를 무렵, 나는 다시 역전 광장에 섰다. 그래도 혹시나 두성이가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요지부동, 이때나 저때나 두성이를 기다리나 나타나지 않는 두성이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랴.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지나간다.   나는 묵직한 발걸음을 맥없이 옮긴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서울역에서 평양이 아니면 청진 역두에서 만나자고 굳게 약속했던 두성이와는 그저 그때 서울역에서 헤어짐이 글자 그대로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나 어찌 상상이나 하였으랴.   나는 두성이의 배신에 두성이를 원망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성이의 무사함을 빌어보면서 ‘살아 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쓸쓸히 청진의 거리를 헤맨다. 해는 이미 서산을 넘었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디뇨. 나도 모르게 어제 찾아 혼이 났던 여관 앞에 섰다. 그래도 들렀던 방이 그립고 나를 반색하며 월경의 길을 알려준 박양이 그립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를 본 박양은 나를 보고 저윽이 놀라면서 반겨준다. 어젯밤 트럭에 실려 경찰서에 끌려가 잘못되었으리라 생각했던 내가 이렇게 늠름히 다시 찾아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어제의 숙박료를 주려 하였으나 잠자리도 못 들고 오히려 변까지 당했으니 어찌 숙박료를 받을 수가 있겠느냐라면서 박양은 굳이 사양한다.   갖가지의 추억을 남긴 청진의 밤은 깊어간다. 이 때 박양이 살며시 방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선다. 떠도는 신세에 고달픈 몸에게 월경의 실마리를 풀어준 박양을 대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나는 타오르는 욕정을 뿌리치고 억지로 마음을 돌려 어젯밤에 일어난 해괴망측했던 일의 이면을 묻자 박양은 그런 일은 전에는 별로 없었는데 근래에 한번 있었다며   “……듣노라니까 이 청진은 소·만 국경지대에서 가까울 뿐만이 아니라 스파이 사건이 종종 있는 데다 근래에는 징용을 피하는 청장년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렇게 밤에 불심검문을 한다는 거지요. 게다가 이곳에는 환전소(換錢所)도 있고요.” 라 한다.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거린다.   그 때 두 청춘남녀간의 감정과 서로 오간 말을 나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서로의 대화로 대강한 나에 관한 윤곽을 알아차린 박양은 나의 성공을 빌겠다며 나를 격려해 준다. 그러나 그 후 나도 그녀도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분명 미완성의 연정이었단 말인가.   11월 7일 청진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아온다. 세수를 오래간만에 해 보았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식권도 없는 나에게 박양은 쌀밥이 놓인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근 일주일만에 맛보는 박양의 정성이 든 쌀밥의 맛을 나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박양은 묻는 말에 무산행 열차는 저녁 7시에 있다고 한다.   정오가 되어 나는 다시 청진역에 갔으나 두성이를 원망도 하며 무거운 발길을 여관으로 돌려 청진에서의 마지막 6시간을 지내련다. 고향 떠나 일주간이 왜 이다지도 길까? 몇 달이 지난 것과도 같다.   해가 질 무렵, 나는 잠시나마 정들었던 박양과 재회를 약속하며 여관 문을 나섰다. 모진 바다의 찬바람이 몸을 후려친다. 나는 예에 따라 야미떡을 씹으며 청진역을 향한다. 이제 무산에서 상삼동(上三洞), 거기에서 만주 땅 고성리(古城里)를 넘는다고 생각을 하니 정녕 마음은 상쾌하고 몸은 분명 가벼워지는 것만 같다.   각오한 내게 헌병, 형사의 눈초리가 무엇 그리 두려우랴. 차표를 쥐고 어엿이 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형형색색의 승객을 실은 기차는 움직인다. 얼마를 달렸는지 기차는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면서 은세계의 산악지대를 숨가삐 달리고 있다. 명상에 어찌 잠기지 않을 수가 있으랴.   기차는 ‘부령팔담’(富寧八潭)이란 산수명미하다는 부령 땅을 지나 무산고원(茂山高原) 지대를 숨가삐 달리고 있다.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옛터를 여진족이 살고 있었으나 역사의 조류에는 역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조 때에는 완전히 우리 영토로 환원된 이 땅! 그러나 그 후 왜적들이 다시 우리 땅을 병합하여 그 위세를 떨치고 있으니 이제 나는 이렇게 왜적들의 눈을 피하여 숨어 다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얼마 후에는 기필코 우리 본연의 땅이 되고야 말 이 무산 땅! 자랄대로 자랐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지고는 다시 자라난 이 고원지대의 큰 나무 숲은 지금은 흰 눈을 머리에 얹고 있다. 마음은 산란해지고 음산하기 그지 없으나 봄이 오면 그 흰 모자를 벗으며 푸른 옷을 갈아입을 것이 아닐까! 하늘의 섭리에 순응하는 이 무산고원 지대의 대해림(大海林)의 용자(勇姿)여!   야광열차는 백두산 영봉(靈峰)에서 수천, 수만 년을 두고 흘러내리는 두만강 지류를 따라 기운차게 달리다가 ‘차우령’ 높은 고개를 숨가삐 지나고 ‘폐무산’, ‘신창’과 ‘주소’를 지났다. 그 동안 기차 안에서 놈들의 검문 검색은 없었으나 국경지대에 가까워지는 탓인지 승객은 거의 없어져 썰렁해진 찻간이 되었으니 몸은 으시시 떨린다. 드디어 무산에 도착하였다.   불과 10여 명이 줄을 지어 역 출구를 빠져 나가려 한다. 그런데 출구에는 헌병이 딱 버티고 서 있다. 국경지대니 당연하리라 예상은 했었지만 어쩐지 가슴은 조이고 심장은 뛴다. 나는 출구를 빠져 나가는 손님들 맨 끝에 섰다. 흰 눈 위에 밝게 비친 이 역 구내니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다 다를까. 헌병은 출구를 빠져 나가는 손님 한 명을 열외로 세우며 계속 손님들을 짜려 본다. 진퇴양난의 유곡에서 뛰는 심장! 나는 전투모를 푹 내려 썼다. 그런데 헌병 놈은 줄 선 승객들을 훑어보고 열외에 세운 한 명을 끌고 출구 옆 자기 사무실로 끌고 들어가고 만다. 추위도 약이런가. 이리하여 나는 무사히 역 출구를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북풍에 몸은 떨린다.   비로소 나는 백두산, 관모산(冠冒山) 등의 고산준령을 왼편에 끼고 창평(倉坪), 황토암(黃土岩), 천수동(天水洞) 등의 명승의 땅을 안고 있는 무산 땅 무산읍에 그 첫 발을 앞으로 내렸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이 죄 많은 세상을 온통 희게 만든 백설의 대지! 마음은 싸늘해지며 별천지를 헤매는 기분마저 든다. 그렇다. 이 무산 땅! 내가 학병에 끌려갈 때 결혼했던 사촌 누이동생 신옥(信玉)이가 자기 남편 따라 와 있을 이 땅! 이제 나 여기 왔다한들 어찌 동생을 찾을 수가 있으랴. 나는 속으로 ‘너를 찾지 못하고 그냥 간다’는 한 마디를 남겨 놓고 역전의 어떤 여관에 투숙했다.  쇠약해진 몸에서는 기침이 쏟아져 나오니 가슴은 터질 것만 같고 뱃가죽은 팽팽해져 찢어질 것만 같고 머리는 아찔해진다. 잠 못 이루는 국경의 밤! 오늘의 일이 주마등과도 같이 눈앞에 명멸한다.   새 날이 밝자 나는 여관 문을 나섰다. 온통 백설에 쌓인 이 땅! 처마 끝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북풍한설은 매섭기만 하다. 발은 시려 얼어빠질 것만 같다. 하기는 겨울 내복 두 벌에 푸른 홑겹의 징용복을 걸치고 다리는 각반에 싸였으나 발은 두 켤레의 양말과 운동화를 신었을 뿐이니 어찌 발이 시리지 아니하랴.   나는 눈이 쌓여 분간조차 할 수 없는 길 없는 길을 헤치며 상삼동을 향하는 버스 정류장을 찾아간다. 간혹 눈에 띄는 사람들은 북극지방의 에스키모족과도 같이 뚱뚱하게 옷을 입고 얼굴은 눈과 코, 입만을 내놓고 있다.   드디어 이른 상삼동행 버스 정류장. 대합실 안에는 눈알을 빤짝이는 형사 놈들이 매표구에 서서 손님들의 여행증(?)인가 무언가를 일일이 들여다보면서 무엇인가를 조사하고 있다. 돈이 있은들 어찌 차표를 살 수가 있으랴. 때문에 나는 아예 차표 없이 출발하려고 움직이는 자동차를 타기로 하고 자동차가 뜰 시각을 기다리며 대합실 밖에서 대합실 안 형편을 살핀다. 아니나 다를까. 형사 놈은 매표구에 선 청년 한 명을 열외로 붙들어 내어 정복 순사에게 넘긴다.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그렇다 해서 이 지방 사정에 백지인 나는 상삼동까지는 걸을 수 없기에 처음 마음먹은대로 달리려는 자동차를 타기로 새삼 마음을 굳힌다. 이제 출발시간까지 20여 분! 게다가 만주경찰까지 이에 장단을 맞추니 진정 일초가 여삼추다. 드디어 손님들의 승차가 시작된다. 승차구에도 역시 형사 놈이 서 있어 승차객을 일일이 체크한다. 국경지대를 향하는 자동차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드디어 자동차는 움직이려 한다. 순간 나는 ‘잡혀도 좋다. 이 마지막 순간을 나 어찌 포기하랴’는 생각도 할 겨를도 없이 막 버스가 움직이는 순간, 잠시 발걸음을 뒤로 하는 형사 놈을 제치고 “어이 차장”이라 소리치며 재빠르게 버스 안에 올랐다. 순간 형사 놈이 나를 힐끗 쳐다보는 것 같았으나 버스는 이미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등 뒤 먼 곳 버스 정류장에는 달리는 버스를 유심히 보고 서 있는 놈이 있으니 분명 그 형사 놈에 틀림이 없으리라. 이제 두근거리는 가슴도 가라앉자 나는 찻간에서 차표를 사니 어엿한 손님의 한 사람이 되었다. 자동차는 달린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눈에 쌓인 이 은세계 뒤 고원지대를 목탄 연기를 내뿜는 자동차는 이리 굽고 저리 굽으며 씩씩거리고 있다. 정류장도 아니지만 때로는 손님들에게 용변시간을 주기도 하면서 가도 가도 끝없는 흰 고원지대를 달리다가는 몇 채밖에 없는 집 앞 정류장에 선다.   해는 이미 서산을 넘으려 한다. 츰했던註50)‘잠시 그쳐 뜸했던’의 북한지역 방언.눈이 함박눈이 되어 훨훨 나니 하늘도 희고 땅도 희다. 고향 땅을 등지고 비록 살풍경이기는 하지만 억지로 이 설경에 도취하는 동안에 어느덧 상삼동에 이르렀다. 몸은 후루루 떨린다.   불과 5~6명밖에 남지 않은 손님들은 차가 정차하자마자 어디론가 쏜살같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왼편 높은 산 바로 밑을 따라 허리띠와도 같이 길게 뻗쳐 있는 근 20여 채의 이 상삼동 마을은 저녁연기에 감싸여 있다. 바른편에는 두만강 지류인 ‘서수라’라는 내를 건너 눈을 얹고 있는 만주의 높은 준령들! 이뿐인가. 눈앞에는 바로 내가 넘어가야만할 만주 땅의 준령에도 역시 내가 지나온 뒤의 고원지대와 마찬가지로 백설이 뒤덮여 있다.   그 옛날 삼수·갑산의 머나먼 곳에 유배를 당해 온 사람들의 심정을 다소나마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길 왼편에 있는 파출소(주재소)를 무의식중에 지나기는 하였으나 등골이 오싹거린다. 얼마를 앞으로 걸어가다 길 왼편에 있는 ‘평양여관’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평양이란 두 글자! 분명 초라한 옷차림을 한 이 젊은 객을 여관의 하녀가 의아스런 눈초리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하녀는 다짜고짜 숙박기를 쓰라고 한다. 이제 막 국경을 넘으려는 이 때, 이 마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 여관에 든 투숙객을 파출소에서는 임검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 해서 이제 당장 넘을 수도 없는 국경의 길! 나는 할 수 없이 꺼림칙한 숙박기를 쓰고 바로 하녀를 불러 엿을 사오라고 했다.   우선 시장기를 끄며 내일의 식량을 준비하며 게다가 엿으로 하녀를 사로잡아 만주 땅을 넘는 요령을 알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엿을 갖고 들어온 하녀에게 기분좋게 선뜻 엿을 절반 떼어주자 다소 부드러워진 듯한 하녀에게 애원하다시피 만주 땅 고성리(古城里)로 가는 길을 물었다. 여관에서 쭉 일보고 있는 여자이기에 여관을 드나드는 손님들은 그 인상착의로 대개 그의 직업이며 그들의 성분을 잘 알아 맞출 수 있음에 틀림이 없으리라. 보통 떠돌아다니는 젊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이 여자는 나와의 대화를 반기는 듯이   “아무래도 밤이 깊어야지요. 경비가 자기 집에 들어가니까.” 라 한다. 분명 내게는 어떤 증명도, 특히 여행증도 없는 줄 아는 여자의 대답임에 틀림이 없다. 비로소 만주를 넘어서는 길을 안 나는 이 여자에게 감사하며 청진의 박양을 생각한다.   “감사하다”는 말에 “천만에요”라 대답하는 이 여자는 의당 알려줄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듯이 생긋이 웃는다. 분명 애수에 잠긴 얼굴에 안개 낀 것과도 같은 뽀얀 살결에 빤짝이는 타오르는 눈동자! 이 모두 외로이 떠도는 사나이의 매력의 대상이 됨에 충분하였다. 분명 경중(鏡中)의 미인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비단과도 같은 그 마음씨 어찌 왕후장상(王候將相)의 씨가 따로 있으랴. 남녀간의 대화는 계속된다.   이리하여 이 여자는 ‘현○옥’이며 고향이 평남 강서(江西)이고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계모 밑에서 더 진학할 수도 없고 해서 돌아간 아버지가 활약했다고 들은 바 있는 이 국경지대, 게다가 먼 일가가 되는 이 여관에 있다는 이야기고 보니 떠도는 내 신세와 어찌 다를 바가 있으랴. 서로 통하는 마음과 마음! 그저 이녀가 애처롭기만 하다. 나는 그녀에게 장단 맞추듯 탈출병이라는 낱말 외에 내가 여기까지 온 경로의 대강과 앞으로 중국을 향하리라는 내용의 말을 건넸다. 현양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기는 멀리 타향에서 만나는 동향인(同鄕人)! 그것도 생각을 같이 하는 이성간의 만남. 떠도는 신세에 고달픈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두 남녀간에 보이지 않는 인력(引力)을 어찌 부인할 수가 있으랴. 이쯤 되고 보니 손님과 하녀가 아니라 전세(前世)에 인연이 있었던 청춘남녀가 되어 버렸다. 두 남녀는 밤이 깊어가는 것도, 고단한 줄도 모르고 말의 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가슴이 설레고 심장의 고동이 심해지며 거센 파도가 나의 몸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입술에는 바르르 경련이 일어난다. 죽은 듯이 조용한 이 국경지대, 이 방에는 두 청춘남녀간의 거센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현양도 눈시울을 붉히고 나를 쳐다보며 무엇인가를 애원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건너지 못할 강. 양안(兩岸)에 서서 서로 불꽃만을 튕기고 있는 두 청춘남녀의 애타는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가 있으랴. 밤은 깊어간다.   날이 밝았으니 11월 9일 아침이다. 식권 없이는 못 먹는 조반상을 들고 온 현양은 생긋이 웃으면서 아침인사를 하고 나서   “……오늘밤 재경에 제가 선생님을 만주 땅 고성리로 넘겨줄 터이니 오늘은 종일 편히 쉬시오……. 또 오겠어요.” 라 한다. 하룻밤을 지내도 만리장성을 쌓는 법! 고맙고 또 고맙다. 어젯밤의 대화로 나를 완전히 파악하여 자기와 일체감(一體感)을 느낀 현양의 아름다운 마음의 발로였다. 현양을 믿고 하루종일 내일을 위한 휴식을 한다. 이따금 휘몰아치는 북풍소리가 창호지 문을 휘두르니 나 어찌 명상에 잠기지 아니하랴.   ‘잃어버린 나라의 이(利)를 구하고 그 의(義)를 행하려고 드디어는 왜군부대를 탈출하여 죽음의 능선을 넘어 고국을 찾았다가 다시 고향을 등지고 지금 이곳에까지 이르러 다시 서운한 마음으로 이 땅을 등지려 하니 웃음으로 내 고국산천을 다시 대할 때까지는 나는 결코 내 고국의 땅을 다시는 밟지는 않으리라.’ 고 생각을 한다. 어느덧 밤은 깊었다. 이 때 기다리던 현양이 방 안에 들어서서 ‘밖에는 눈이 막 쏟아진다’며   “……선생님 후일 다시 고국에 돌아오시면 꼭 찾아주세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일이 꼭 성공하시기를…….” 이라 말끝을 흐린다. 두 남녀 사이에는 이렇듯 떼놓을 수 없는 사랑의 싹이 움튼 줄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만 간다. 이 때 현양은 열한 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를 들으며   “선생님 지금쯤은 떠나셔야만 되겠어요.” 라면서 일어서 방문을 나선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른다. 죽은 듯이 조용한 이 국경의 밤에는 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눈앞을 가린다. 두 남녀는 눈길을 헤치며 말없이 앞을 향한다. 얼마를 걸었을까? 이 때 현양은 뒤돌아보며   “선생님,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오……. 저 다리 형편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라면서 앞길을 달린다. 잠시 후 현이 내게 다가서면서   “자 빨리! 마침 잘 됐어요. 다리에는 아무도 없어요.” 라 나직이 귓속말을 하면서 앞선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면서 우리 땅과 만주 땅을 이어주는 10미터 가량 길이의 나무다리 앞에 섰다. 다리 양쪽에 초소는 있으나 인기척은 없다. 이 때 현양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새삼   “선생님 하시는 일이 형통되어 꼭 성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 후일 우리 나라가 독립되는 날 꼭 한 번 찾아주세요.” 라 한다.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두 남녀는 선 채로 서로를 마주본다. 숨은 가쁘다. 잠시 동안이나마 정들었던 두 남녀가 헤어져야만 하는 순간의 마음이 왜 이다지도 괴로울까! 나를 이토록 이해하고 이토록 이끌어준 아리따운 현양! 나는 여자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그 동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후일 다시 찾으리다.” 라 말을 하나 분명 내 음성을 떨렸으리라.   이제 나는 이미 다리를 넘어서 뒤돌아보았다. 남쪽을 향해야만 할 현양은 아직 다리 옆에 서 있음이 분명 내 시야에 들어온다. 발이 북쪽을 향하여 떨어지지 않는 나는   ‘그대의 가슴에 어찌 정의(情誼)의 불과 그대의 눈에 어찌 아름다운 눈물이 없으랴. 누가 슬픔에 울고 기쁨에 반가워하지 아니하랴.’ 고 생각을 하니 ‘이것이 현양과의 영원한 이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애타는 나의 마음 때문에 나는 스스로   ‘내 조국이 독립되는 날까지 생(生)을 반드시 부지하였다가 다시 내 고국 땅을 밟아 이 현양을 꼭 만나야만 한다.’ 라고 굳게 다짐하면서 나 혼자   ‘세상에 저렇게도 아름다운 마음씨에 그렇게도 아름다운 미인이 또 어디 있으랴. 고마운 여인, 감사한 여인, 그러면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중얼거리면서 새삼   이별이 불이 되어 간장이 타노매라   눈물이 비가 되어 끌 듯도 하건만은   한숨이 바람이 되니 끌동말동 하여라 는 옛 시조를 되새겨 본다. 이제 현양은 함박눈 내리는 사이에 숨어 버렸다. 나는 고성리 땅을 등지고 함박눈을 뒤집어 쓰며 조용한 이 무인지대 만주 땅을 향하여 북으로 간다.   여하튼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근 40여 년이 지난 오늘! 해방된 조국이 두 동강이로 갈라진 데다 6·25의 비극마저 겪었으니 그때의 현양은 어느 하늘 밑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한·만·소(한국·만주·소련) 국경 일대의 행적 범례: 내가 탄 철도, 내가 본 도시와 마을, 내가 걸은 길, 철도 지(至), 목단강(牧丹江), 왕청(汪淸), 석현(石峴), 도문(圖們), 양수천자(凉水泉子), 밀강(密江), 훈융(訓戎), 온성, 남양(南陽), 상삼봉(上三峰), 아오지, 고무산(古茂山), 부령(富寧), 무산, 석인구(石人溝), 고성리(古城浬), 상삼동(上三洞), 청도(淸道), 삼도구(三道溝)(청산리靑山里), 조양천(朝陽川)연길(延吉), 용정(龍井), 화룡(和龍), 회령, 두만강, 훈춘하(琿春河), 훈춘(琿春), 서대파(西大坡), 나진, 청진

    44 광복군 김문택 수기(탈출기4)

      나는 찾아들었던 싼시샹 입구로 다시 나아가 팻말을 보나 분명 싼시샹 입구다. 마음을 가다듬고 여기서부터 북양면옥을 찾는다. 찾아도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 이 면옥! 사람의 왕래마저 끊어져 죽은 듯이 조용한 이 밤거리에는 눈만이 사뿐히 내린다. 순간 ‘이 재밤에 혹시 도적이나 간첩으로 몰리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니 공포심이 든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을겸 눈을 꼭꼭 빚어 입에 넣었다.   지쳤음에 틀림이 없다. 나는 내리는 눈을 피하여 어떤 집 처마 끝에 앉았다. ‘뗑’한 시를 알리는 시계소리가 들리니 분명 12월 8일 새벽이었으리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몸이 후루루 떨려 눈을 비비게 되니 분명 잠이 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내가 쓰고 있던 왜놈의 전투모는 눈앞에 뒹굴고 있고 나는 어떤 집 처마 끝앞 길가 눈구덩이에 쓰러져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몸은 와들와들 떨린다. 기침이 난다. 얼어죽지 않은 것만도 하늘의 도움이다. 나는 눈 한 덩어리로 요기를 끄고 정신을 가다듬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시금 면옥을 찾으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이 어찌된 하늘의 도움일까. 바로 내가 쓰러져 있는 이 집이 북양면옥일 줄이야.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세로로 된 해묵은 나무판자에는 ‘북양면옥’이라 희미하게 씌어져 있다.   암흑에서 광명을 찾은 나는 이 집 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서 주인을 찾는다. 마음은 설렌다. 한참 후에야   “니 쉐야(그 누구요)” 라면서 어떤 중국인 장년이 문을 열면서 이 재밤에 찾아든 나를 마치 도적이라는 듯이 위아래로 흘겨보고 문을 콱 닫아 버린다. 그러나 나 어찌 후퇴가 있을 소냐. 나는 ‘이 중국인이 면옥의 하인이리라’생각하면서 다시 문을 두드린다. 얼마 후 이번에는 10여 세 가량의 어린애가 서튼 왜말로 ‘주인은 없다’고 한다. 때문에 나는 어린애와 겨우 의사를 통하니 이 집은 북양면옥 자리라고는 하나 주인은 이미 ‘면옥’을 그만두고 고향인 신의주로 떠나 버렸다는 것이 아니냐!   순간적인 절망. 눈앞이 캄캄해진다. 얄궂은 나의 운명이여. 어쩌면 내가 스릴과 모험의 고비를 넘어 훈춘의 서군을 찾아들어 갔을 때와 꼭 같단 말인가! 하늘의 시련이 왜 이다지도 무심하단 말인가! ‘하느님이여,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라 기도를 하나 이제부터의 일이 그저 난감하다. “어허” 장탄(長嘆)의 일성(一聲)뿐이다.   그러나 나는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소망이 있는 곳에 삶의 길이 트이리라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린애가 문을 닫으려 할 때 어린애의 손을 꽉 잡고 애원하다시피 왜말과 한문자를 손바닥에 써 가며   “혹시 이 근처에 안영식 군의 일가 친척이 살지 않느냐.” 라 물었다. 찾는 자는 만나며 두드리는 자에게는 문이 열리는 법이련가. 역시 나와 의사가 통한 어린 학생은 왜말을 섞어 가며   “이 길을 왼편으로 굽어 가면 ‘대륙여관’(大陸旅館)이 있으니 그 집에 가 보십시오. 혹시 친척인지도 모르니까요.” 라 한다. 어둠의 빛! 나는 어린애에게 고맙다면서 대륙여관 앞에 섰다. 혹시 영식이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부푼 희망에 가슴은 설레인다. 눈이 펑펑 날리는 은세계의 죽은 듯이 조용한 밤! 나는 여관 문을 몇 번 두드리며 주인을 찾았다. 잠시 후 30여 세의 장년이 나를 마치 도적이나 아편쟁이라도 대하는 듯 위아래로 짜려만 본다. 나는 다짜고짜 여관 문 안에 들어섰다.   6~7평 가량의 시멘트 바닥 홀 중앙에 있는 화덕(스토브) 앞에 앉으니 몸이 녹으며 기침이 난다. 홀 바른 편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구름다리가 있고 바로 눈앞에는 창호지 밀문을 한 방 한 칸이 있고 좁은 마루에는 어제 저녁 손님(?)이 먹다 남은 밥상이 놓여 있다. 이 뿐인가! 스토브 위 주전자에서는 뜨거운 물이 막 끓고 있다. 배에서는 쪼르륵 소리를 내면서 뜨거운 물을 마시며 먹다 남은 밥상의 것을 빨리 집어삼키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체면. 군침을 삼키다가 불청객인 나는 정색을 하고   “저, 이 댁이 바로 안영식 군 댁이지요. 그렇지요?”   나는 단정적인 말을 연발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나를 도적이나 아편쟁이로 취급한 이 장년은 어쩌면 그렇게도 잘 알고 있을까라는 듯이 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영식이는 지금 집에 없소……빨리 나가시요.” 라면서 방으로 들어가려 한다. 영식의 집을 찾은 쾌감은 이 놈의 태도와 말대꾸에 순식간에 사라지고 증오와 불쾌감이 온 몸을 감싼다. 그러나 나는 격되는 감정을 억누르고   “실 안군과는 오산의 동문으로 같은 하숙에……또 동경에서도…….”라 속에 있는 것을 털어 놓으면서 영식이의 안부를 재차 묻고  “……실 만주에 와서 이제 먼 길을 떠나려는데 여비를……그리고 오늘 하룻밤이라도…….” 라고 내가 뜻한 바를 간청하였다. 나는 내 자존심마저 저버린 것이다. 그러나 놈은 예기했던 대로 시끄럽다는 듯이   “아니, 이 친구 빨리 나가래두. 여기서 쭈물거리면 아예 헌병대에 연락할 거야.” 라 협박을 하면서 나를 여관 출입문으로 끌어내면서 전화통을 붙잡는다. 사선을 넘어 두려움을 모르는 나. 끓는 물을 그 쌍통에 끼얹고 싶다. 그러나 뜻 두고 못하는 일! 그저 왜적의 앞잡이라는 함정에 빠진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아니 뭐라구. 헌병대! 돈을 안 주면 그만이고 하룻밤의 잠자리를 거절하면 그만이지, 응…….” 이라 격동된 어조로 대들었다. 내 바른팔은 이미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단도를 잡고 있었다. 내게 두려울 것이 무어냐! 이가 뿌드득 갈리니 내 눈에서는 불빛이 쏟아져 나왔으리라.   ‘칼을 쓰면 칼로 망하는 법! 참는 것도 용기다. 어찌 잘못을…….’이라 생각을 하니 손이 바르르 떨린다. 그러나 나는 흥분이 되어   “좋소, 두고 봅시다. 때는 올 것이오. 후회하지 마쇼.” 라 말을 했으나 말은 떨렸으리라. 이제 볼장을 다 본 나는 씁쓸히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홀에서 옥신각신하는 말을 방 안에서 듣고 있던 50여 세의 노인이 방문을 열고 마루에 나선다. 나는 이 어른이 영식군의 춘부장이고 이 장년이 바로 영식이 자형인 줄 알았다.   나는 어른께 인사를 하며 내 이름을 알렸다. 오산 때 같은 하숙에 있은 탓으로 직접뵌 적이 있는데다 영식이를 통하여 동경 때 일을 잘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때 나를 응시하던 영식의 춘부장은   “영식이는 저녁 ‘영사관 숙직’이야. 보다시피 여관은 만원인데 현찰이 없어서……. 참.” 하면서 말 끝을 흐린다. 사위의 권에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 한다. 순간 분노의 피가 끓어 오르며 이가 뿌드득 갈린다. 이렇듯 죽을 기를 쓰고 믿고 찾아온 이 집에서 얻은 것은 하룻밤과 여비 대신에 분노와 울분 뿐이며 공연히 남을 저주하는 것 뿐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렇다. 나라를 잃은 망국민으로 만주와 이 중국땅에까지 흘러 와서 그 얄팍한 잔꾀를 피워 물장사나 심지어 갈보장사 또는 아편장사를 하며 게다가 심하게는 왜적의 앞잡이까지를 서슴지 않고 선량한 교포들마저 괴롭히는 그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 한국인의 탈을 쓴 이놈들 곁을 한시 바삐 피해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라 생각을 하니 나는 이중 삼중으로 내 자신이 처량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겨우 중국땅에까지 파고 들어왔지만 임정과 독립군으로 가는 길은 까마득하고 막연한데 이 안군이란 친구 매부의 그 악질적이며 영식 부친의 비인간적인 행동머리에 내 자신이 쓸쓸해졌기 때문이리라. 순간 나는   ‘그렇다. 사람은 몇 백 년 사는 것도 아니다. 인정에 넘치는 그 따뜻한 한 마디가 이렇게 떠도는 나에게 그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일까.’ 라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힌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망상일지는 몰라. 이제 새삼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저주하랴. 믿어서는 안 될 놈을 행여나 기대를 걸었던 내 자신이 처량하고 가증스러울 뿐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예, 좋습니다.……아버지께서도 저와 같은 아들 영식이가 있지 않습니까.……이제 제가 거지꼴을 하고 아닌 밤중에 이렇게 찾아왔다 해서 도적입니까, 아편쟁이입니까. 제 딴에는 생각이 있어 어떤 먼 곳을 향하는 길에 영식이 생각이 나서 들려 구차한 말을 한 것 뿐입니다. 좋쉬다.” 라 말을 했으나 분명 나의 말은 떨렸음에 틀림이 없었으리라. 나를 잘 알고 있는 영식이 아버지는 그저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런 말도 없다. 이 때 나는 종이와 연필을 달래서   ‘영식이, 들렀다 가네. 백선장(白扇莊)의 친구’ 라 써서 ‘이것을 영식에게 전해 달라’면서 영식이 아버지께 주었다. 그것은 내가 동경에서 기거하던 집 이름이 백선장이고 이 집에 영식이가 종종 찾아와 내 학비도 가끔 융통해 가면서 사이좋게 지냈기에 이 집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이 영식군에게 전해 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흥분과 비감에 싸인 나는 드디어 이 대륙여관 문을 나섰다. ‘사람이라고 다 믿을 것은 못 된다’라 생각한다. 갈 곳 없는 젊은 나그네의 앞길에는 흰 눈이 말 없이 펄펄 내리고 있다. 순간 왠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동포에 대한 그립던 정은 저주와 멸시의 기분으로 변하고, 있지도 않은 영식이를 공연히 원망도 하면서 정처없이 밤거리를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바로 이 때 등 뒤에서   “여보게, 김 군! 잠깐 거기에 서 있게”라며 영식 군의 아버지가 뒤따른다.   서리발 같은 분노에 싸인 나 어찌 뒤돌아보랴. 나는 발길을 빨리 한다. 이 때 내게 재빨리 다가선 영식이 아버지는 “여보게, 이거 얼마 되지는 않지만 이 근방 여관에 들러서……자, 받게나……”라면서 얼마의 돈을 내게 쥐어주려 한다. 아마 인간으로서 제 자식과도 같은 내게 대한 연민의 정이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한번 토라진 나의 마음을 어찌 돌이킬 수가 있으랴. 나는 그 즉석에서 “……성의는 고맙지만 이제 돈만은 사양합니다”라 대꾸를 하고 총총히 앞을 향한다. 나는 어떤 집 처마 끝에 앉았다. 왠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순간 나는   ‘지사의 길은 이렇게도 쓸쓸하고 독립운동가의 가는 길은 왜 이다지도 외롭고 고달프단 말인가! 아니 내 몸과 마음은 이다지도 약해질대로 약해졌단 말인가!’ 라 생각하며 눈을 한 주먹 집어삼키며 자리를 일어선다. 외롭고 고달픈 나는 스스로를 달래면서 다시 앞으로 발을 옮긴다.   이 때 눈앞에 ‘만수여관’(萬壽旅館)이란 간판이 외등 밑에 또렷이 나타난다. 나는 무의식 중에 다짜고짜 여관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이 재밤에 친절을 베풀어 주는 여관주인이 고맙다. 고작해서 야광열찻간 아니면 변소 아니면 대합실 또는 남의 집 처마 끝을 숙소로 삼았던 내게 ‘여관’이란 정녕 꿈과도 같다.   재밤 아니 첫 새벽이라 숙박기를 쓰라는 말도 없으려니와 숙박비를 선불하라는 말도 없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몸이 포근히 녹는 것만 같으니 기침이 막 쏟아져 나온다. 옆 방 손님에게 그저 미안하다. 남은 잠을 재촉하나 어찌 잠이 들 수 있으랴. 어젯밤과 오늘 새벽의 일이 그저 꿈만 같다. 그런데 나는 무전여행을 하면서 굶주렸을 망정 무전취식을 아니한 나. 이제 양중무일푼으로 이 여관에 고맙게도 투숙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초조하지 않으랴. 당장에라도 슬그머니 여관을 나서고 싶은 생각이 굴뚝과 같다.  나는 혹시나 하는 초조한 마음에서 주머니를 샅샅이 털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웃저고리註75)‘겉저고리’의 북한지역 방언.작은 윗주머니에 꽁치꽁치 꿍겨져 있는 만주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 비상금으로 생각하여 아예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돈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암흑에서 빛을 보는 듯한 쾌감과 기쁨! 순간 나는   ‘자, 이 만주돈으로 사정하여 여관비를 치르리라.’ 생각을 하면서도‘난데없이 이 만주돈을 잘못 쓰다가 꼬리가 잡히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고 거짓 없는 사정에 주인도 이해하리라’고 되생각해 본다.   창문이 훤히 밝아 온다. 먼 길가에서는 교통의 잡음이 들려오고 옆방 손님들의 부산한 소리가 귀를 찌르나 나는 못이룬 잠을 독촉한다.   이제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해는 이미 높이 솟았다. 오래간만에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니 기분은 상쾌하고 살 것만 같다. 나는 조반 겸 점심상을 받았으나 꺼림직하다. 그러나 시장한 배는 상 위의 음식을 모두 청소해 버린다. 만주돈의 위력을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먹고 살아야겠다는 인간의 본능 때문이었을까!   궁하면 통하는 법이련가. 아니면 주인의 호의와의 일치런가! 주인은 얼마 되지 않는 만주돈을 받으며 “젊은 양반 고생이 많소”라 하니 나는 지금도 그 말을 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그 뜻을 내 나름대로 나의 앞길을 예축(豫祝)해 주는 말로 되새기고 있다.   이제 나는 막연히 여관 문을 나섰다. ‘이제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라 생각을 하니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허리를 굽히고 발걸음을 빨리 한다. 떨리는 몸을 가누며 막연히 정거장을 향한다. 그래도 따뜻한 정거장 대합실이 그리웠을지도 몰라. 어젯밤에 왔던 길을 되걸어가면서   ‘그래, 상해에는 오산의 은사 오봉순(吳鳳淳) 선생, 김정학(金鼎學) 선생님-해방 후 상해에서 뵈었음-이 계시는데……그러나 나는 하얼빈까지 가서 임극제(林克濟) 선생님을 찾아뵙지 않았는데 어찌 김, 오 선생님을 찾아가랴’고 생각이 드는 순간   ‘그렇다. 득신학교 선배며 동향인 김덕연(金德淵) 형이 청도(靑島)에 있다고 들었다. 그러면 청도로 갈까!’ 라 생각하면서 북경역을 향하여 바른쪽 보도를 걸어간다.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 누구 한 사람 아는 사람 없는 이 대륙의 잡다한 군중 속을 헤치고 나가자니 이처럼 고독을 느낄 수가 또 어디 있으랴.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몸을 웅크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정거장을 향하여 발을 옮긴다.   넓은 신작로 좌우에 즐비한 상점에는 대개 세로로 된 검은 널판지 간판에는 황금색의 상호가 유별나게 눈길을 끌며 특히 놀란 것은 돌 하나 없는 이 허허벌판 그 어느 곳에서 운반해다 깔았는지 마치 아스팔트와 같이 판판하게 깐 돌도 돌이려니와 그 섬세하고 끈질긴 ‘중국인’ 기질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이뿐이랴. 이네들의 옷은 짙은 원색(原色)의 검은 옷, 붉은 옷, 청남색 옷만을 입고 있으니 무슨 이유가 있을까. 머리를 갸우뚱거려 본다.   이 때 붉은 완장을 두른 왜군 헌병이 맞은 쪽에서 온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 놈을 피하자 그 뒤로는 마스크를 한 왜형사같은 놈이 온다. 어찌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으랴. 분명 이 놈은 나를 쳐다보면서 스치는 것만 같다. 나는 곁눈질을 하면서 이 놈을 지나쳤으나 어쩐지 모르게 알 수 있는 사람만 같다. 나는 발을 돌이켜 이 사람을 10여 미터나 앞질러 다시 되돌아 이 사람을 보려 한다. 그것은 이 사람이 흡사 내가 찾아보려는 덕연 형 같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간 나는   ‘아니지, 청도에 살고 있다고 들은 이 덕연 형이 어찌 이 북경에 있을 리가 없지. 분명 내가 착각했을 거야.’ 라 생각은 하면서도 이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스크를 하고 왜놈의 냄새를 풍기는 이 사람은 형사도 아니고 왜놈의 앞잡이를 하는 밀정도 아니고 바로 내가 청도에 가서 찾아보려는 덕연 형이었다.   순간적인 감격! 나는 목메인 소리로 다자고짜   “형님. 저, 덕연 형님이 아닙니까. 형님.” 이라 연발했다. 이 때 이 신사는 발길을 멈칫하면서 대답 대신에 자기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이 어찌된 연고일까? 물론 해방 후 이 형의 동생 김덕성(金德聖) 말에 의하면 그때 덕연 형은 나를 지나가는 거지인 줄 알고 내게 동냥을 주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는 뒷이야기다.

    45 광복군 김문택 수기(광복군1)

      잠 못 이룬 감격의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오니 서기 1945년 1월 11일 희망의 새 아침이다. 잠시 후 누군가가 큰 소리로   “기상(起床)! 기상! 동지들, 일어들 나시오.” 라 외친다. 같은 방에 있던 동지들은 모두 자리를 박차고 문 앞뜰로 나간다. 이 때 기상이라 외치던 주번 동지(?)는   “어젯밤 새로 들어온 동지들은 오늘만은 그냥 방에서 쉬쇼.” 라 말한다. 왜군에서 기상 나팔소리로 시작되었던 그 지긋지긋하고 골치가 아팠던 점호였지만, 오늘 아침의 기상 소리는 왜 이다지도 내 마음을 훈훈하게 감싸주며 내게 새 활력소를 불어넣고 용기를 일깨운단 말인가! 순간 ‘그렇게도 열망했던 독립군이 되어 이 땅에 섰노라. 이에 더한 영광 또 어디 있으랴’라 속으로 외친다. 문 밖에는 끝없는 대평원이 펼쳐지고 동쪽 지평선에는 붉은 둥근 해가 물씬물씬 대공(大空)에 솟아오르고 있다. 어찌 통쾌한 아침이 아니랴.   그렇다. 이 대평원상의 한 지점인 이 싼타지(일명 쑈쪼우장)란 촌락은 중국의 촌락이 그렇듯이 흙벽돌로 만든 보잘 것 없는 4~5채의 집(?)이 있을 뿐이고, 이 집들 둘레에는 ‘쪼우’(棗) 자가 뜻하듯이 큰 대추나무 10여 그루가 앙상하니 서 있고 다시 그 둘레에는 큰 대추나무 10여 그루가 앙상하니 서 있고 다시 그 둘레에는 3~4미터 폭 넓이에 2미터 가량 깊이의 ‘크리크’(壕)가 있어 물이 살짝 얼어붙었으니 이 쑈쪼우장이란 분명 이 대평원상에 놓여 있는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고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국군이자 독립군인 한국광복군 제3지대 본부가 있는 고장으로, 왜적으로부터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 내일의 영광된 조국 건설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질 젊은 독립투사들이 정의의 정염을 뿜어내는 활화산의 진원지가 될 고장이다.   잠시 후 앞뜰에서는 조용한 아침 공기를 깨트리는 주번 동지의 구령소리에 뒤이어 “하나 둘 셋……”이라는 난생 처음으로 들어보는 구령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며 피가 끓어오르며 새삼 긴장해짐을 어찌하랴. 그도 그럴 것이 왜적 밑에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그저 왜말로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던 ‘어찌(一), 니(二), 상(三)’하는 것만이 구령인 줄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앞뜰에서는 여러 동지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라 부르는 애국가(지금 부르는 안익태 씨의 곡임)가 우렁차고 장엄하게 이 대지에 울려 퍼진다. 이뿐인가. 앞뜰에는 태극기가 하늘높이 휘날리고 있다. 순간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눈앞에 나타난 동지들의 이 광경! 우리 네 명은 방 안에서 무릎을 꿇어앉았다. 순간 밖에서는 분명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란 구령소리가 들린다. 어찌 고개를 숙여 눈을 감지 않으랴. 두 줄기 눈물이 쭈루룩 흘러내리며 콧시울이 시큰해진다.   우리 배달민족의 정기(正氣)가 아로새겨 있고 조국의 얼이 깃들어 있는 저 태극기와 애국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태극기와 처음 듣고 처음 불러보는 애국가가 무엇이며 하물며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우리들!   하기는 우리말을 조선어로, 왜어(倭語)를 국어라 하여 소위 국어사용을 강요당하며 갖가지로 왜적에게 눌려 살아왔던 우리들이었기에 이제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듣고 저 창공에 자유스럽게 휘날리는 태극기를 본 우리들의 감격과 그 감회에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있으랴. 하기는 우리들은 날 때부터 망국(亡國)의 후예란 운명에 태어났기에 우리의 국기 태극기 한번 쳐다보지도 못하고 우리의 애국가 한번 마음놓고 불러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비록 나의 고국산천은 아니지만 이 이역만리 산 설고 물 설은 타국 타지 이 땅에서나마 나는 태극기를 찾았고 또 동해물과 백두산을 불렀다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지고 속이 후련해지며 용기가 용솟음치는 것이 아닌가. 감개가 무량하다.   묵념도 끝이 나자 밖에서는 누군가가 열심히 말을 하고 있으니 분명 조회자의 훈화에 틀림이 없다. 훈화가 끝나자 용진가의 우렁찬 행진곡의 소리가 대지에 울려 퍼진다. 속이 후련해진다. 드디어는 “헤쳐-가”하는 구령소리가 들린다. 조회를 마친 동지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지를 거닌다. 젊음의 기염을 토하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굳히기 위함이리라.  여하튼註1)원문에는 ‘여튼’으로 표기되어 있다. 문맥으로 보아‘여하튼’‘하여튼’의 의미에 해당되므로 이하 본문에서는 모두 ‘여하튼’으로 바로잡았다.듣는 것, 보는 것 모두 우리에게는 신기하고 감격적인 일에 틀림이 없다.   드디어 나는 문을 박차고 앞뜰로 뛰쳐나가 국기 게양대를 부둥켜안으며 하늘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를 쳐다본다. 심신이 태극기와 더불어 하늘을 훨훨 나는 것만 같다. 꿈과도 같은 생시! 이제 나는 진남포경찰서 유치장에서 이춘식(李春植) 선배로부터 임정에 관한 말을 들은 지 만 일 년 반 만에 드디어 임정 산하인 광복군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어찌 기쁘고 기쁘지 아니하랴.   이제 우리들은 저 태극기 밑에서 조국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를 맹세하고 뭉쳤으니 이제 무엇이 무섭고 그 무엇에 굴할 소냐. 그저 영광된 조국의 앞날에 영광이 비치고 희망이 넘치는 조국을 위하여 우리 젊은 투사들은 오로지 힘찬 전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왠지도 모르게 새삼 눈물이 쭈루룩 얼굴에 흘러내린다. ‘내 나라가 없어 왜적에게 시달림을 받은 원한과 슬픔, 저주와 비감에 응고된 피눈물! 그러나 이제 애국가를 듣고 태극기를 보니 마치 잃었던 조국을 다시 찾은 듯한 감격과 기쁨의 눈물! 그러나 이제는 정녕 잃어버린 조국을 기어이 되찾고야 말리라는 독립투사의 비장한 각오에 응어리진 눈물이 아니련가.   잠시 후 나는 방에 들어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흙 벽담, 어젯밤에 누웠던 잠자리! 천정 사이로는 하늘의 별이 빤짝거렸고 깔고 자는 것이란 땅 흙 위를 덮은 밀짚이고 게다가 덮는 것이란 역시 밀짚을 넣어 만든 이불(?)이 고작이고 보니 이 추운 겨울에 난로란 말은 저 꿈나라의 말과도 같기만 하다. 이뿐인가. 동지들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다 해진 중국군 군복이었으니 어찌 추위를 막을 수가 있으랴. 잠시 후 아침밥이라고 누른  깡랑가루註2)강냉이, 곧 옥수수가루를 말함.로 만든 만두 두 조각에 밀가루로 후릅게 쑨 씨환(풀)이 고작이고 보니 말하자면 상거지 생활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아침식사가 끝나자 잠시 후 “오늘의 일과가 시작된다”고 하여 20여 명의 동지들 전원이 앞뜰에 모이자 차영상(車永祥, 일명 차약도車若島)註3)학병(學兵) 출신, 서주(徐州)에서탈출, 한국광복군훈련반 졸업, 제3지대원.동지는 정색을 하며   “어제 새로 들어온 동지들을 위하여 환영 배구대회를 하겠소.” 라 한다. 이제 우리들은 양 패로 갈라져 배구와 환영에 열을 올린다. 전방 왜적 점령지역에서의 고달팠던 생활의 독소와 귀덕에서 이곳까지 근 일주일간의 피로를 떨쳐주어 보려는 것이다. 이리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자유의 진가를 터득하고 왜적과 대결해야만하는 의무의 신성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저녁이 되자 깡랑만두 몇 조각과 씨환 한 그릇, 게다가 쓰디쓴 빼갈이 담긴 깨진 사발! 오늘의 경기와 신 동지를 환영한다는 연(宴)을 겸한 저녁밥이다. 초라한 연(宴)이라면 잘못일까! 소란했던 연장(宴場)의 막은 내리고 일석점호가 끝이 나자 뒤 이어 동북방에 있는 고국을 향하여 일동은 요배를 한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렇다. 황폐해진 두고 온 고국 땅에서 왜적에게 시달리고 있을 동포와 부모형제의 안위를 생각하며 하루속히 잃어버린 우리의 조국을 되찾아 독립의 영광을 누려야만 하겠다.’ 는 젊은 독립투사들의 굳센 의지를 나타내는 요배임에 틀림없다.   떨면서 잠자리에서 지새다시피 하는 기나긴 밤은 깊어만 간다. 분명 꿈과도 같은 하루의 일이 눈앞에 아롱거린다. 여하튼 새 날이 밝았으나 서가에 끼어 있는 책을 탐독할 뿐,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무위(無爲)의 일주일이 지났다. 속에서는 불이 붙기 시작한다. 어찌 실망감이 몸을 엄습해 오지 않으랴. 이럴 때마다 나는 석만금 동지의 말을 되씹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허전해지며 실의에 찬다.   그래, 여기 어느 곳에 육군사관학교가 있으며 이 병사에 어디 병기가 있으며 이런 환경에서 어찌 중국군과 합작하여 왜적군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감행할 수가 있으랴. 의기소침해지며 답답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희망이 크면 클수록 낙망은 이에 정비례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태극기 밑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조국 독립을 위하여 이 생명 다하겠다고 다짐했던 내 자신이었기에 나는   ‘이 곳에 있는 선배 동지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사선을 넘어와 여기서 이런 고초를 겪어 왔을 것이며 지금도 겪고 있다.…….’ 라 생각하며 나 스스로를 달래 보면서   ‘과연 나라가 없는 망명군은 이런 것이련가. ……왜적과의 혈투의 구심력이 바로 이 고장일진대 나는 하루 빨리 내 자신을 이 환경에 적응시키며 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만 하겠다. 오직 이 길만이…….’ 라 스스로 다짐을 하니 그 동안 내가 몸부림친 결론을 찾아낸 것만 같다. 때문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는 석동지가 공작상의 필요에 따라 악의 없는 거짓말을 한 연유를 비로소 안 것만 같다.   ‘이 해가 있는 곳에 희망이 싹트며 이 해가 있는 곳에 역경을 뚫고 나아갈 용기가 용솟음치게 마련이다’라 생각을 하니‘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라는 명언이 머리를 스친다.   여하튼 뒤에서도 자세한 말이 나오겠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작년 11월에는 그 간 중국군 내에 특설한  한광반(韓光班)註4)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의 약칭. 부양(阜陽) 근처의 임천(臨泉)에 있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에 설치된 광복군 지원자 훈련기구. 1944년 5월 중순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총 48명이 졸업하였으며, 이들 모두 광복군에 편입되었다.에서 단기 훈련을 마친 애국청년들을 주축으로 한 50여 명이 중경(重慶)에 있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로 전출이 되고, 몇 명 남지 않은 학도병 출신, 일반 애국청년의 한광반 출신 정예들이 한광반 훈련지였던 임천(臨泉)을 철수하여 광복군징모제6분처(光復軍徵募第六分處)-단순히 초모위원회(招募委員會) 또는 초모위라고도 함. 즉 광복군 제3지대의 전신-쑈쪼우장으로 이동해옴으로써 본시 본부에 있던 요원과 합하여 40여 명이 되었고 그 중 근 20명이 전방 왜적 점령지역으로 공작도상에 오르고 보니 이제 20명의 구동지들이 이 쑈쪼우장 본부에 남아 있음을 알았다. 때문에 석동지가 말한 육사는 한광반을 말함이고 또 한광반 졸업생들이 중경에 있는 총사령부로 원에 따라 전출되었고 또 원에 따라 석동지처럼 적 지구로 공작도상에 오른 사실도 알았다.   때문에 이 쑈쪼우장 본부에 있는 20명은 내일의 출진 등을 위하여 오늘의 휴식을 취하면서 갖가지 구상에 골몰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노혁명 선배인 장조민(張朝民)註5)평북 선천(宣川) 출신. 만주에서 참의부(參議府)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대원으로 활동. 1943년 8월 김국주(金國柱)와 함께 부양(阜陽)의 징모제6분처에 도착. 제3지대 비서실장. 1977년 건국포장.선생이 그 어느날 오후 우리들에게   “지대장 김학규(金學奎) 장군은 평남 평원(平原) 출신으로 19세의 홍안으로 서기 1919년 그러니까 3·1운동이 일어난 해에 만주에 있는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필하고 조선혁명당에 뛰어들어 항일독립운동을 시작하여 조선혁명군사령부에서 부관장(副官長)을 역임한 후 서기 1932년에는 양세봉(梁世奉) 장군을 도와 만주 영반(營盤)에서 왜적군을 타도하여 큰 전과를 올리고 계속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하는 일방, 드디어는 조선혁명군사령부의 참모장으로 피임되어 계속 왜적군과 혈투를 계속하였답니다. 그 후에는 조선혁명당의 대표로 중국 남경에 온 후 임정에서 광복진선(光復陣線)을 형성할 때에는 그 군사위원이 되고 서기 1939년 삼당(三黨) 통합에 참가하며 또 광복군 창건시에는 참모장대리가 되어 광복군 창건에 관하여 중경 중국국민방송을 통하여 국내외에 있는 동포에게 광복군 지지 호소를 하였던 것이오. 그 후 우리 광복군 3지대 지대장에 임명되어…….” 라 마치 교과서를 따로 외우듯이 김장군의 과거 투쟁의 이면을 소상히 알려 주니 어찌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있으랴.   하기는 후일에 알았듯이 만주 독립군 시절 통의부(統義府)의 백광운(白狂雲) 부대, 또는 참의부(參議府)의 최석순(崔碩淳) 중대에 가담하여 왜적과 항쟁하다 드디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몸담아 대왜적 항쟁을 계속한 바 있는 초로(初老)의 장조민 선생이 김장군의 내력을 이렇듯 눈에 잡힐 듯이 그 때 전투상황을 우리에게 들려줌은 분명 애송이 독립군에 대한 일종의 정신훈화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렇듯 열을 올리며 우리에게 말을 하고난 장선생은 긴 한숨을 쉬면서 만주 독립군 시절 직접 체험도 하고 또 선배들로부터 들은 왜적의 우리 독립군 또는 동료들에 대한 천인공로할 잔학상이라 전제하고나서 눈에서 불을 뿜어내듯   “……그 왜적들은 우리 독립군을 잡아서는 그 눈알을 빼며 팔을 분질러 놓고서는 이것마저 부족하여 비명을 지르는 그 독립군의 등에 총을 쏘았으니 이 얼마나 잔학한 만행이요. 게다가 왜적들은 그것마저 부족하여 그 시체를 끌어다가 얼어붙은 강을 깨어 강물에 띄워 버렸으니 이제 그 독립군의 시체를 그 어디서 찾는단 말이오. 이뿐이오. 왜 적들은 저 유명한 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보복으로 우리 교포들을 닥치는대로 학살 감행하였으니 어떤 촌락에 가서는 왜적을 피하여 집을 버리고 수숫단에 숨어 버리자 놈들은 채 숨어 버리지 못한 집에는 물론 수숫단에 불을 질러 버리니 수숫단에서 밖으로 튀어나오는 양민들을 모조리 총으로 쏘아 그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처넣으니 어찌 까맣게 타버리지 않겠소. 동지들! 왜적들의 이런 천인공로할 만행을 우리 어찌 잊을 수가 있겠소. 철천지원수, 고 왜적들…….” 이라면서 장탄식과 더불어 눈을 지그시 감는다. 꿈과도 같은 이 선배의 경험에 의한 말에 어찌 치가 떨리며 이가 갈리지 아니하랴. 두 주먹이 뿔끈해진다.   진남포서와 평양형무소의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되살아나니 독립군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새삼 다짐한다.   그런데 어떤 날 어떤 선배 동지가 내게 다가서면서 내가 광복군에 들어온 경로를 아무런 악의도 없는 듯 묻는다. 물론 이 동지가 지대의 참모로, 학병으로 한광반 출신인  김용민(金容旻, 일명 서운棲雲)註6)학병(學兵) 출신. 학국광복군훈련반 졸업. 제3지대원.동지인 줄을 후일에야 알았다.   여하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재차 묻는 말에 진남포경찰서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형의 구형을 받았다는 말에서 시작하여 왜 땅 구주에서 탈출하여 현해탄, 고국 땅, 만주를 거쳐 중국에 잠입하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이곳에 이른 대강의 줄거리를 들려주었다.   이 순간 무척이나 놀라는 김용민 동지는 내 두 팔을 꽉 잡으면서 희한하다는 듯   “동지, 동지야말로 사선을 돌파한 장거리 탈출에 금자탑을 세웠소. 참 장하오. 그런데 여기에도 동지와 같은 학병 출신의 동지가 몇 명 있다오.” 라면서 나의 탈출을 극구 찬양해 마지 않는다. 나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그러나 사람은 자기의 비밀은 어디까지나 자기만이 간직하고 싶은 법! 더욱이 비밀을 엄수하는 독립군의 신분으로 말이다.   이리하여 나는 나의 비밀을 털어는 놓았지만 정색을 하고 김용민 동지에게 새삼스럽게도   “김동지, 내 신상에 관한 것은 동지만 알고 계십시오.” 라 당부를 했으나 그 후 얼마나 비밀이 지켜졌으랴.   여하튼 나는 후일에도 단체사진을 찍으려 하지 아니 한 것도 이런 심정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이틀이 지난 어떤 날 오후 지대장 사모님 오광심(吳光心)註7)평북 선천(宣川) 출신.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의 부인. 민족혁명당 부녀차장(婦女次長). 광복진선청년공작대. 광복군 창설 멤버. 서안(西安) 광복군총사령부 간부. 징모제6분처. 제3지대 기밀비서. 1977년 국민장.선생이 나를 부른 다. 지대의 간부로서 내 신상을 확인하려 함에 틀림이 없다.   이 때 오선생은 다짜고짜 나에 관한 말을 김용민 동지로부터 들었다면서 다시 나의 일을 확인한다. 순간 김용민 동지가 원망스럽지만 직책상 김동지도 별 도리가 없었으리라 이해를 하면서 내게 관한 자초지종을 전보다도 더 자세히 알려 주었다. 분명 흥분된 내 음성은 쇳소리와도 같이 쟁쟁 울렸을 것이며 내 눈에서는 불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나온 나의 발자취를 더듬으니 그것이 너무나도 눈앞에 선하고 또렷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때 내 말을 듣고 있던 오선생은 내 양 팔을 와르륵 붙잡으면서   “김동지, 참 장하오. 왜적의 그 빠른 비행기가 왜 땅에서 날아와 이 중국 땅에 폭격을 가하고 다시 그 본토에 되돌아가려고 해도 도중에 우둔한 중국군에게 변을 당하는 판국에 동지는 그 머나먼 길을 악착스럽고 재빠른 왜적의 겹겹이 쌓인 감시와 경계망을 뚫고 또 돌파하여 이곳에까지 이르렀다니 참 장하고 또 장하오. 김동지는 분명 하늘이 낸 독립군이오. 참 게다가 김동지는 왜적에 끌려가 갖은 옥고를 치렀다니 참…….” 이라 혀를 차고 나서 나같은 젊은 독립투사가 있으니 제3지대의 앞날은 번영하여 기필코 독립의 그 날을 맞이할 것이라 한다. 오선생 얼굴에는 새로운 결심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인텔리를 자처하는 학병 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한광반 출신의 대다수가 이미 중경에 있는 총사령부로 전출하고 또 본부에 남은 동지들마저 적 지구로 공작차 출진한 후라 이제 이 지대본부는 텅 빈 것만 같아 한 명의 애국청년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여하튼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때 오선생은 다시   “지금 지대장께서는 잠시 출타 중이오. 일간 이곳 본부에 들렀다가 다시 임천(臨泉)을 거쳐 중경으로 떠나십니다. 그때 중경에 가면 김동지의 그 특출한 쾌거를 우리 임정의 김구(金九) 주석 선생님께 알려 표창을 내리도록 해야만 하겠소.……그런데 김동지는 어떤 직책이 좋을까?…….” 라 말을 맺는다. 오선생의 말에 나 어찌 기쁘지 아니 하랴. 그러나 나는 표창이나 어떤 감투를 위해서 이곳에 찾아든 것은 아니나, 여하튼 나는 이제부터 어떤 일을 할 것이며 어떻게 감당해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로부터 몇 날 후 이미 장, 오선생으로부터 들은 바 있는 작은 키에 야무진 몸매를 하고 안경을 낀 김학규 장군이 이곳 쑈쪼우장 본부에 나타났다. 동지들에게 둘러싸여 기쁨을 나누던 지대장은 다음날 내 신상에 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김동지, 동지에 관해서는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어. 참 고생이 많았소.……그러나 사선은 이제부터입니다. 왜적이 망하는 날까지 계속되는 거지요” 라면서 내 두 팔을 꽉 붙잡는다. 처음 뵈는 지대장! 노혁명 선배에게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지대장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다. 새삼 콧시울이 시큰해진다.   다음날 지대장께서는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렸다. 역시 독립운동 전선에 영일(寧日)이 없는 그 고된 길! 누구한테도 물어볼 수 없고 또 알아서도 안 되는 일! 마음은 허전하다. ‘사선은 이제부터’라는 지대장의 말을 나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여하튼 몇 간부에게만 알려진 내 신상에 관하여는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알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구(舊) 동지인 이윤하(李允夏) 동지마저 해방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게   “왜 땅 구주에서 왜군부대를 탈출한 학병 출신 동지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참 누구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라 말했을 정도였으니 분명 비밀을 생명으로 여겼던 광복군이 아니었더냐.

    46 광복군 김문택 수기(광복군2)

      ‘힘은 정의다’라는 말! 약육강식의 원리가 예외없이 적용되는 국제사회! 한때 독일군에게 참패를 거듭하다 드디어 스탈린그라드가 풍전등화격이 되어 소련의 국운도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평상시 같으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만 외치며 국가와 민족을 부인하는 척하며 공산주의만을 선전하던 스탈린은 드디어 비장하게도 “슬라브 민족이여, 단결하라. 조국이 처한 이 위기를 극복하자”라며 자의(自衣)註97)‘자기(自己)’의 오기인 듯.국민에게 외치면서 가장 강인한 정예부대를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투입시켰으나 패배를 당하자, 드디어 서기 1943년 1월 드디어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 대한의 아들과 그 2세가 주축을 이룬 외인부대를 스탈린그라드에 투입시켜 드디어는 독일 30만 정예군을 포위 섬멸시킨 것이다.   이렇듯 패전을 만회한 소련은 그 전세를 몰아 드디어 서기 1944년 4월에는 독일군을 자기 나라 밖으로 완전히 구축해버리고 그 4월에는 루마니아, 5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 7월에는 폴란드까지 진격하고 서기 1945년 2월에는 독일의 동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미·영(미국·영국) 연합군은 서기 1944년 6월에 불란서의 노르망디에 상륙을 강행하고 그 해 8월에는 파리를 탈환하고 드디어 서기 1945년 2월에는 독일의 서부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4월에는 독일의 베를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독일은(이탈리아가)註98)원문에는 누락되어 있어 첨기하였음.서기 1943년 9월 이미 연합군측에 무조건 항복을 한 데 뒤이어 서기 1945년 6월에 드디어는 연합군측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야 말았다.   한편 태평양전쟁 초기에는 왜적의 전세가 제법 당당하였으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철리를 어찌하랴. 서기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 참패한 후부터는 그 전세 급전직하하여 그해 8월에 미군은 콰다카날섬에 상륙하고 계속하여 싸이판, 비율빈, 유황도(硫黃島) 등을 탈환하는 일방, 서기 1942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섬을 점령하고 왜 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대규모의 공습을 감행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왜적의 패망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우매한 왜군국자들은 소위 대화혼(大和魂)을 빙자하여 자기네 국민들마저 우롱하면서 억지춘향격으로 연합군과의 대결을 시도하고 있었으니 이 어찌 가증스런 일이 아니랴.   이런 격랑의 때를 맞이한 광복군은 대외적 선전포고는 하였지만 연합군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왜적과 전투다운 전투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왜적이 강점하고 있는 고국 땅에는 상륙조차 엄두도 못 냈으니 이 어찌 초조해지지 않으랴. 때문에『빛』에서 외쳤듯이   “동포여,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왜적을 바다 건너편으로 내쫓으며……애국지사들이여, 동포들의 사표(師表)가 되어, 동포들의 선봉장이 되어 최일선에서 최후까지……왜군 부대에 억류되어 있는 한적 애국청년들이여, 때가 오면 무기를 탈취하여……공장에 끌려간 애국청년들이여, 공장의 기계를 때려 부숴 그 기능을 마비시켜서……또 청년 학도들이여, 학원을 지키며 때가 오면 왜적을 무찌를 차비를……이제 우리 광복군은 곧 국내로 상륙을 감행하여 왜적을 처부수며 친일 역도들을 소탕할 것이요……동포들이여…….” 라고 외치면서 남의 나라에서 안타깝게 발버둥만 치면서 국내 상륙의 부대편성을 위하여 오늘도 적 점령지역에 뛰어들어 인원초모 등의 각종 공작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47 광복군 김문택 수기(광복군3)

    1) 어떤 일요일의 외출   날이 새어 일요일! 기다렸던 일요일이기에 이제는 병영 안에서도 좋고 병영 밖에서도 자유다. 때문에 몇 명씩 한 개조가 되어 외출을 하기도 한다. 마음의 시름을 달래며 중국 시골의 광경도 살펴보며 굶주린 배를 별미로 채워보기 위해서이다. 1  0명의 한 그룹이 해가 중천을 지났을 때 몇 채 아니 되는 작은 마을 어귀에 있는 음식물 장사 앞에 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잠시 후에 장사꾼과의 시비가 벌어졌다. 분명 값을 깎자느니 안 된다느니의 시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승강이는 드디어 주먹다짐으로 번졌다. 뒤따르던 동지들은 그쪽으로 왁 몰려갔다. 싸우는 동지는 신바람이 났고 장사치는 풀이 죽어 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영문인가. 불과 수 분 내에 어느 고장 어데서 몰려왔는지 근 20명이 몰려들었다. 그것도 맨주먹이 아니라 손에 손에 몽둥이, 곡괭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심지어는 시퍼렇게 번쩍이는 작두까지 들고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째려보며   “따 따 따(때려 때려) 타 마나가 삐” 라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막 대들참이 아닌가. 위기일발의 순간은 계속된다. 어찌 기가 꺾이지 아니하랴. 중과부적이 문제가 아니라 놈들은 쟁기를 들고 있지 않은가. 구슬 같은 땀이 흘러내린다. 살벌한 순간이 아닐 수가 없다.   바로 이 때 그 중에서도 제일 늙어 보이는 노인이 흰 수염을 날리며 군중들 앞에 선뜻 나선다. 분명 이들을 대표하는 이 인근 마을의 뽀장(保長)-촌장(村長)임에 틀림 없다. 이 순간 흥분한 군중들은 더욱 더 기세가 등등하여 우리를 항하여 막   “따 따 따 타 마나가 삐 따 따” 라 막 욕지거리를 한다. 시퍼런 작두가 햇빛에 번쩍인다. 숨이 막힌다. ‘현기증이 난다’라면 거짓일까. 당장에라도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이 때 뽀장은 군중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씨부리니 분명 ‘조용히 하라’는 말에 틀림이 없다. 그렇게 떠들썩했던 군중들은 물을 끼얹은 듯이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이 때 뽀장은 위엄있게 그네들과 우리들을 번갈아보며 무엇이라고 말을 하려 한다.   이 때 중국말을 잘하는 백동지가 촌장에게 다가서서 서로 한참 동안 말을 주고받는다. 하기는 언어란 사람의 의사를 나타내는 것인데 듣기에 따라, 말하기에 따라 칭찬도 되고 또는 욕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 동지가 애써서 한 말이 중국인에게 불쾌감, 아니 나아가서는 욕설이 될 지도 몰라 특히 사성발음까지 하는 중국어이기에 한 저음을 잘못 말하면 듣기에 따라 ‘한국인’(韓國人)도 되고 ‘한구인’(漢口人)이 되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 이번 사건의 내용인즉, 동지가 쑈빙註117)밀가루로 만든 떡.을 사면서 ‘싸게 하자’느니 ‘안 된다’느니 하면서 주고받은 말을 하는 사이에 중국인 장사치에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 오히려 욕설이 되었다는 말이고 보니 외국말을 함에 있어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여하튼 한때 왜적에게 침공을 당해 혼비백산했을 뿐만이 아니라 왜적에게 갖은 만행을 당한 이들의 왜적에 대한 타오르는 적개심이고 보면 왜적모양과도 거의 같을 뿐만 아니라 말이라고 하는 중국말조차 거의 왜식발음과도 같으니 이네들은 우리 일행을 왜적은 아닐 망정 그 앞잡이라고까지 착각을 한 선입견 때문이었을 지도 몰라. 여하튼 쌍방간 서로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하여 서로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부드러운 분위기에 싸인 두 나라 사람들! ‘그렇다. 이해가 없는 곳에 어찌 용서와 관용이 있을 수가 있으랴. 서로의 이해만이……’이라 생각해 본다.   이제 피아(彼我)간에   “광복군 동지들, 수고가 많소. 이번 일에는 실례가 많소.”   “아니오. 실례는 우리가 했소. 먼저 당신네 비위를 우리가 거슬렀으니 말이오.” 라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형제의 우의(友誼)로 뀌즈(鬼子)-왜적- 타도를 다짐한다.   여하튼 외세(外勢) 침범에 이렇듯이 똘똘 뭉치는 그들의 단결심에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으랴. 얻어맞으면 쑥 기어 들어갔다가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면 쑥 기어 나오는 그네들의 기질! 여하튼 모처럼 즐거웠어야만 했을 오늘 외출에서 귀대하는 발길은 무겁기만 하다. 분대장인 나는 체면이 서지 않는다.   2) 중국인-한민족(漢民族)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내가 중국 땅에서 직접 본 중국인들에 대하여 느낀 바를 몇 가지 더 써보기로 한다. 그러니까 말은 거슬러 올라가 내가 막 쑈쪼우장-일명 싼타지-에 입대한 지 불과 몇 날이 지난 어느 겨울날 오후였다. 대륙의 벌판은 넓으나 사람 몸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으리만큼 비좁은 이 시골길을 저 바른편 먼 곳에서 누군가가 우리가 있는 이 쪽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다.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이 사람 왼팔에는 손 광주리를 걸치고 이 노인은 허리를 굽히며 무엇인가를 주어 광주리 안에 넣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드디어 우리 병사 앞을 지날 때 내가 곧 따라가 보니 손광주리 안에는 노새 똥알 네댓 개가 들어있다. 분명 이 노인은 이 추운 날 아침부터 이 노새 똥알을 줍기 위하여 저 먼 곳에서 이 곳에까지 걸어오면서 허리를 굽혔을 것이고 또 앞으로도 허리를 굽히며 노새 똥알을 주우면서 갈 것이 아니겠는가. 하도 이상해서 내가 묻자 노인은 얼굴색 하나, 음색(音色) 하나 변하지 않고   “예, 겨우 네 알 주었소.” 라고 태연하게 대답하면서 유유히 앞을 향한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으랴. 만일 이 노인이 한국 노인이라면 ‘말도 마쇼. 여태껏 네 알이오. 이래서야 어데 해 먹겠소’라고 대답했음에 틀림이 없었으리라 생각하며 ‘소 잃고 외양간 고쳐도 늦지 않아’라고 대답할 수 있는 중국인의 그 지구성(持久性)에 다시 한번 감탄해 본다.   노새 똥알을 말려 화롯불 위에 놓아 화롯불을 오래오래 보존해 나아간다는 이 원시적 방법은 고사하고라도 이 노인은 이 곳 싼타지에서 불과 20여 리 떨어진 부양성 안을 불과 열 번 미만밖에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하니 이 노인은 분명 이 곳 싼타지 근방에서 태어나 이 곳에서 일해 왔고 결국은 이 땅에 묻혀서 한 줌의 흙이 될 것이 아닌가! 폐쇄된 그들의 생활과 그 양식에 놀란다.   이제 다시 싼타지에 있을 때의 말을 다시 펴보기로 한다. 이에 앞서 전쟁 전 이 땅에는 과거의 타성이나 근대의 군벌(軍閥) 내지는 토후(土侯)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중국의 유지-권세가 또는 재산가-라면 으레 열 두 대문이 있는 고대광실에 사병(私兵)까지 있기 마련이었다.   이렇듯 작은 마을을 이룬 이런 집들의 둘레에는 크리크가 있어 좀도적은 물론 도적의 무리 투휘(土匪)들도 접근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어데까지나 전쟁 전의 일이었고 자국의 도적이 문제가 아니라 왜적이라는 도적 떼거리에 시달린 지 8년이나 되는 이 지방 사람들의 처참한 생활상이란 그야말로 목불인(目不忍) 그대로였다. 때문에 초모위가 쑈쪼우장에 있을 때 두 세 채 밖에 없는 인근 주민에게 빈곤한 생활상의 내력을 짓궂게 물으면 이들은 성을 와르륵 내면서‘항전팔년’에 이 꼴 이 모양이라 대답을 하니 흙벽돌집 단칸방 한 모퉁이에는 벽도 없이 한 구석에는 마구간, 한 구석에는 수수깡으로 엮은 침대가 있어 사람과 노새가 동침함은 물론 먹던 깡낭수수떡을 노새에 던져주니 노새와 동거하는 이 지방 농부의 생활을 비위생적이란 말 이전에 동물의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억지로 살아나가는 것만 같다. 특히 ‘쪼’ 태태라는 중년 부인은 이미 지아비와 아들이 전쟁터에 끌려간 지 4년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도 없이 젊은 며느리와 어린 딸을 데리고 인간 이하의 삶을 영위하니 어찌 왜적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오르지 아니하랴. 눈시울이 뜨겁고 콧방울이 시큰해짐을 어찌하랴.   ‘낫 놓고 기역(ㄱ)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농부일망정 원수 왜적을 무찌르고야 말리라는 그 원한에 사무친 복수심과 적개심에 불타는 순수한 자아본능의 애국심과 민족애에 새삼 머리가 숙여지며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이 불끈해지고 이가 뿌드득 갈린다.   그러면 싼타지에서 부양현성 안으로 이동해온 지 몇 날 후에 내가 본 기이한 일을 간단히 쓴다. 예에 따라 아침 점호를 끝내고 우리는 구보로 성문 밖 와이허(淮河) 지류 푸른 냇물가로 간다. 아침 체련과 세면을 끝내고 다시 성문 안에 들어서 귀영길에 오를 때의 일로 어떤 좀도적이 길가에 앉은 어떤 노점상의 물건을 훔친다. 그런데 더욱더 놀란 사실은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장사치는 물건을 훔치는 이 광경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도 아예 못 본 체 한다. 만일에 우리들 같으면 당장에 “도둑이야 도둑”이라 소리치며 나란히 앉은 옆 장사꾼에게 알릴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말했듯이 ‘위 메이 관시’(나는 아무 상관없다)라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며 ‘메이 관시’적인 생활태도가 오히려 얄미울 뿐이다. 이 광경을 보고도 그냥 귀영하니 심사는 편치가 않다.   여하튼 ‘길고 긴 역사(歷史)로서 노(櫓)를 저어가지고 넓고 넓은 지리(地利)로서 돗을 삼아’이 웅장한 광대한 대륙의 대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한족(漢族)! 분명 이네들에게는 어쩐지 모르게 유유한 기질을 읽을 수가 있으니 대륙성 기질이련가!   여하튼 이네들에게는 위에 말한 기질 외에도 특히 이네들의 미신적 생활양식에서 엿볼 수 있는 사회에의 순응성을 엿볼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은 어떤 일에 대하여는 끈질기고 적극적으로 대들다가는 쿡 찔러버리면 움찔하며 쑥 들어가면서 그저 ‘메이화즈’(沒法子)-즉 별 도리 없지-라 말한다.   때문에 이들은 일반사회에 대하여 개척적이고 혁신적이 것이 아니라 어데까지나 사회에 순응하며 이에 적응하며 인종(忍從)하면서 조화를 이룩하는 생활양식에 젖어 있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성질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전통주의(傳統主義) 때문에 그들은 항상 ‘멘즈’(面子), 즉 체면을 중요시하여 이 ‘멘즈’로 일을 처리해 나가기도 한다. 이에 곁들여 이네들에게는 보수주의적 기질마저 수반하고 있으니 예를 들면 그네들의 옷 색깔은 예나 지금이나 시골이나 도회지에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흑색, 짙은 곤색, 하늘색, 적흑색(赤黑色)이 있을 뿐이다   이에 곁들여 일상 생활양식에서 엿볼 수도 있듯이 허식을 버리고 사치를 거의 외면하면서 실리(實利)를 추구함에 틀림이 없다. 때문에 이들은 재물이라면 오륙註118)오륙(五六). 오장과 육부라는 뜻으로 온 몸을 이르는 말.을 못 쓸 정도로 이를 희구(希求)하며 또 이를 보지(保持)해 나간다. 때문에 돈이 생겼다 하더라도 쓰지 않는다. 입(入) 줄은 있어도 거(去) 줄이 없는 것이 축재(蓄財)의 원칙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다음해 정초 어떤 시골집에 갔을 때 그 집 돼지 우리에까지   肥豚滿圃 살찐 돼지는 우리에 차 있고   大猪日日長 큰 돼지는 날마다 자라고   小猪月月增 새끼 돼지는 다달이 늘어난다 라고 씌어 있었으니 이 얼마나 복과 재물이 굴러 들어오기를 바라는 중국인들의 심사일까. 이렇듯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한족-중국인-들의 기질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세 끼 먹을 것을 한 끼로 때우는 일은 있어도 식량과 돈만은 절대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중국인들! 축음기조차 모르는 전근대적인 이들을 현대화시켜 보자. 사해의 이민족을 동화시켜온 4억 여의 한민족에게 ‘제2의 황화설’(黃禍說)이 설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그 누가 단정할 수가 있으랴. 때문에 나는   ‘왜적들이 대륙을 침공하고 있으나 결국 점(點) 즉 도시와, 선(線) 즉 철도만을 차지했을 뿐 그 광활한 대륙 자체는 어떻게 못하였다. 반면에 중국의 난민(難民)들은 내 고장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새 보금자리를 꾸미고 끈질기게 살고 있으니 결국 왜적의 대륙 침공은 오히려 중국인의 세력을 남방에까지 뻗혀 주게 하는 결과와 중국인들의 원한을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편협한 왜적들이여.’ 라 외쳐보면서 ‘지금도 늦지 않으니 침략을 걷어치우고 한국, 중국, 왜국 등이 평등히 공존하며 세계평화에 기여하자’고 외쳐본다.

    48 광복군 김문택 수기(광복군4)

      흥분과 감격에 싸인 채 이제부터 할 일을 숙의하고 있을 때 8월 15일 오후 다시금 또 놀랄 만한 쾌보가 중국군 장교에 의하여 지대 본부에 날아들었으니 바로 왜적의 무조건 항복 소식이다. 어리둥절해진 동지들은   “아니 저번의 항복은 무엇이고 오늘의 항복은 또 뭐야? 항복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도 있단 말이냐.” 라고 하면서도 왜적 패망이란 소식에 동지들은 새삼 ‘대한독립 만세 만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 또 외친다. 이 얼마나 피에 맺혔던 왜적에 대한 원한의 토로며 광명을 찾은 우리 기쁨의 토로였으랴.   분명 청산리전역 등에서 한국독립군에게 바친 피의 대가를, 무고한 한국교포를 만주 길림성(吉林省) 요녕(遼寧) 등지에서 30,000여 명이나 학살하면서까지 한민족의 피를 받아내고야 만 악마구리 왜적은 이제는 패망하고야 말았다.   여하튼 앞서 말했듯이 8월 6일 미 B-29 에라노케이 호가 왜 땅 광도에 원폭을 투하, 10만여 명을 살상하고 그 땅을 삽시간에 폐허화시키자, 이에 당황한 왜적은 8월 8일 조건부 항복 의사 표시를 하여 그 10일에 그 정보가 주중 미사령부에까지 파급케 하면서 쭈물거리니 이 얼마나 얄미우랴. 때문에 미군은 다시 8월 9일 11시 그레이트 아리스트호로 이번에는 장기(長崎)에 제2의 원폭을 투하하니 비로소 왜적은 민족 전멸을 우려하여 연합군측에 무조건 항복을 하려 하며 소위 어전회의를 하면서 다시 쭈물거리고 있을 때 8월 9일에는 러일전쟁의 설욕을 씻기 위하여 소련이 대일전을 선포하면서 껍질만 남은 만주 주둔 왜군을 내려치니 어찌 이를 막을 수 있으랴. 이리하여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신세가 된 왜적은 드디어   “짐(朕)은 세계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깊이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미·영·중·소 4개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토록 하였다…….” 라는 왜황(倭皇)을 통하여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다.   이는 분명 이 세상의 공도(公道)이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진리와 성자필쇠(盛者必衰)란 역사적 철리(哲理)를 스스로 표명한 것이니 8·15야말로 악에 대한 하늘의 응징으로 천벌이 왜적에게 임한 날이며 왜적의 철제 밑에 신음하던 우리 겨레에게는 새 천지를 눈앞에 전개시켜 주면서 광명과 희망을 안겨준 하늘의 섭리를 보여준 날이 아닐 수가 없다.   새삼 하늘 높이 튕겨 오르는 감격의 불꽃이 이 어찌 류쟈이에 한하랴. 쭈리코 부양현 성 내에서는 수많은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전승을 축하하고 있으니 이 넓고 넓은 대륙을 흔드는 그 감격의 물결! 분명 낮과도 같이 밤하늘을 밝힌 밤의 축제의 불꽃놀이에 폈던 폭죽 터지는 그 희열의 폭성을 나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이민족 외적(外敵)에게 짓밟혔던 피압박 민족의 해방의 환희란 정녕 이런 것일까’라고 실감나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인들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아니런가. 이 때 어떤 시골 노인이   “여보, 광복군 동지들! 원수 뀌즈는 망했소. 천벌을 받은 거요. 당신네들, 이 낯선 땅에 와서 고생이 많았소. 이제 귀국은 해방을 맞아 독립이 되었고 우리들은 이 8·15를 영원히 잊지 말 것이며 우리 두 나라는 더욱 더 우의를 돈독히 합시다.” 라 떨리는 음성으로 감격에 넘치는 격정 어린 말을 우리에게 던지니 일생을 두고 나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이제 흥분과 감격으로 잠 못 이룬 밤은 지나고 새 아침이 밝으니 8월 16일 아침이다. 겨레의 가슴에 슬픔과 걱정, 근심, 분노와 격정을 일소하고 기쁨과 희망, 광명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광명한 붉은 태양이 동쪽 지평선에서 물씬물씬 창공에 치솟고 있다.   감격의 해방을 맞이하여 흥분에 들떠 있던 독립군들! 이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강한 의지력과 투철한 예지로서 다가올 현실적인 산적한 수많은 일들을 착실히 처리하면서 앞날을 맞이해야만 했다.   더구나 왜적의 압제에 지쳐 설움에 살아오기 근 40년 동안 광명한 햇빛이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하며 그저 암흑에서 왜적만을 저주하고 이를 갈며 악이 치받칠대로 치받쳐 살아온 우리들이었기에 우리들은 더구나 냉정을 되찾고 냉철해야만 했다.   이제 태극기를 보며 백두산과 동해물을 되찾은 기분에 쌓인 아침 조회가 끝나자 부지 대장은   “동지들, 이제 우리는 제1의 여정(旅程)은 끝이 났소. 이제는 격분과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근히 이성을 되찾아 우리 눈앞에 다가선 제2의 여정을 열과 성으로 맞이해야만 할 것입니다. 일을 함에 있어서는 서둘러서는 아니 됩니다. 어데까지나 침착하고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야만 합니다.…….” 라고 전제하고 나서 그 동안 대강이나마 부지대장을 중심으로 지대 간부들 사이에 간간히 교환된 의견을 종합하여 부지대장은   “첫째, 왜적 점령지역이었던 전방에서 왜적에게 억류되어 있는 동지들을 안전, 신속하게 우리의 품으로 받아야만 할 것이고, 둘째, 연합군 특히 중국군 당국과 협조하여 교포들의 생명, 재산을 적극 보호하며 교포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며, 셋째, 교포들의 귀국을 단시일 내에 실현토록 적극 추진하며, 넷째, 왜적군부대 내에 억류되어 있는 한적사병들을 빨리 인수하여 광복군 10만 대군을 양성함에 전력을 다해야만 합니다.” 라 각별한 훈시를 한다. 찬물을 끼얹은 듯 긴장감에 감싸인 이 조용한 아침의 훈련장!   여하튼 창졸지간에 맞이한 해방이었기에 감격과 흥분에 감싸였으나 날이 지남에 따라 동지들은 이성을 되찾기 시작한다. 이제 전 적 점령지역으로 특파되어 활동할 동지들을 위하여 이 류쟈이 본부에서는 부지대장을 비롯한 몇 간부들의 특별강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항일독립투쟁의 선봉장이고 민족의 꽃이었던 광복군! ‘이제 천신만고 끝에 연합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실질적인 참전을 꾀하려고 훈련을 받던 O.S.S. 훈련단도 게다가 국내정진의 결의를 새롭게 하여 의기양양했던 꿈도 이제는 다허사가 되어 버렸다’고 새삼 생각을 하니 맥이 풀려 어찌 훈련을 시키고, 훈련을 받는다 한들 어찌 전과 같을 수가 있으랴.

    49 義勇實記(의용실기)

    丙戌 癸巳 壬辰 壬寅   一五八四   二丙戌 四月 二十九日 寅時生 陽男 木局 子 子女  七殺  鳳閣丑 妻妾  火星寅 兄弟 廉貞  龍池  忌卯 命垣 鈴星辰 父母 破軍 陀羅巳 福德 天月  祿存  祿午 田宅 天府 武曲  文曲  擎羊未 官祿 太陽  太陰  左輔  右弼    身申 奴僕 貪狼  天馬  文昌 科酉 遷易 天機  巨門  天鉞  權戌 疾厄 紫微  天相亥 財帛 天梁  天魁  

    50 윤봉춘 일기(1935년)

    < 天氣 晴 寒暖 暖 豫記 今月 內로 시나리오 一編을 써 보라. 發信 受信 重要記事 京城에서 木浦로 내려온 日字 昭和 九年 十二月 二十三日 아침 十時 感想 설이란 觀念이 아주 없어져 버린 내 마음을 알 수 없다. 까닭모를 불안이 가득하였다. 光州에서 아침 열시 車로 一行이 羅州로 왔다. 陽曆으로 正月 初하루날이면 해마다 이날은 눈이 오거나 춥거나 하던 것이 오늘은 完全히 늦은 봄철 같이 따스하였다. 밖에는 보리가 세치나 자라고 野原에는 잔디가 파릇파릇 하였다. 나주에 내리던 길로 雲奎(나운규)와 信雄(이신웅) 이 세 사람은 市街地를 求景하였다. 적은 洞里다. 밤에 入場하는 人員을 보니 이곳 人士들이 演劇을 매우 좋아하는 便인 것 같다. 客員으로 있는 나는 오늘도 不安한 가운데 하루를 보냈다. 내 마음도 그러하려니와 이 市街에도 正月의 氣分은 없었다. 不日內로 木浦 撮影이 着手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 當面한 問題로 남아 있다. 北朝鮮에는 눈보라가 甚할 것을 生覺하다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