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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계봉우] [북우계봉우자료집1] 에 대한 전체 10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꿈속의 꿈 (上)

    꿈속의 꿈 (一)  팔월 보름날 저녁이었다. 끄즐오르다의 여름 저녁은 철도역 시마포의 전등이 개밥아락이(長庚里)와 더불어 그 빛을 비추고, 정미소의 여덟시 기적이 긴 소리를 치는 그때에 오게 된다. 그러면 종일토록 반사막지대(半沙漠地帶)의 모진 더위에 괴롭게 지내던 사람들이 비로소 ‘얼굴의 주름을 펴고 저녁의 선들선들한 맛에 살이 찐다’는 카자흐스탄들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때면 카자흐스탄의 특산물 중에 가장 유명한 이 지방의 ‘카운’(우리말의 참외) 맛도 좋다고 하지만, 저녁의 서늘한 맛은 과연 얼음냉수를 먹은 듯 시원하기도 하다. 이러한 맛에다가 나의 생장하던 그 지방의 것, 등 뒤에는 그림같이 묘한 산, 눈앞에는 거울같이 맑은 물, 이 두 가지를 양념삼아 가미(加味)하였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나는 산과 물에 무한한 흥미를 붙이던 그 전의 생각은 언제든지 잊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늘 저녁의 선선한 맛에는 무슨 생각이든지 아마 잊을 듯하다. 이쪽 저쪽에 널린 이웃집에서 웃음소리가 드믄드믄 들리는데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고 하는지, 그것은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는 모양이다. 우리 가정에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화답하여 가면서 이웃집의 웃음소리에 ●●히 뭣도 모르고 한두 번만 웃지 않았다. 그렇게 못다 한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고 계속하곤 하였다.  “●● 아버지께 여쭐 말씀이 있는데 어려워서요.” 맏딸 화림이 말한다.  나는 맏딸의 성질을 아는지라, 무슨 말이든지 두세 번 생각한 후에야 입 밖에 던지는 터인데, 이번에도 필연 심상치 아니한 말을 내리라고 속으로 헤아리면서  “무슨 말이야? 어렵기는 무얼…”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어 말씀드리면 이 일은 하루, 이틀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래 무슨 말이냐?”  “생각한 바 창림이 공부하는 인민경리대학의 개학일자가 멀지 아니한 즉 개학 전에 반드시 가야 할 것이오, 더군다나 선생이 요양소에서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치르지 못한 화학시험을 주기 위하여서는 남보다 며칠 더 먼저 가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하다가 아버지 환갑연에 참여하자면 왕환(되돌아올) 일자가 적어도 십여 일은 걸릴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솔도주베 중학교에 러시아어교원으로 있는 큰오빠 태림이도 3~4일 가량을 흠석(결석)하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오매 창림이 떠나기 전에 환갑연을 차리는 것이 제 미련한 생각에는 좋을 듯합니다. 아버지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하고 화림이는 나의 입만 쳐다본다.  “니내(너의) 말이 그럴듯하오. 경우에 따라서 환갑연을 당기어 할 수도 있고, 또는 밀리어 할 수도 있지 않소. 9월 15에 딱 맛이 있소? 내 생각에는 날짜를 당기는 것이 좋겠소.” 마누라가 말한다.  “내가 공부하는 농업전문학교에서는 10월 1일에 개학하니까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마는 창림의 일은 참 딱합니다. 학교당국에서 허가할는지도 모를 일이오, 만일 허가한다면 오고가고 하는 그 일자가 누이의 말과 같이 열흘 너머 걸릴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말씀드리기는 미안합니다마는, 학과생산(學課生産)에 적지 않은 손해를 줄 것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에는 날짜를 당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둘째 아들 정림이는 나의 눈치만 보고 있다.  저런 십여 일을 흠석(결석)하다니! 대학 3학년에서는 하루에 7시간, 혹은 8시간씩 과정을 보는데, 열흘을 흠석(결석)한다하고… 하루에 평균 7시간으로 계산하여도 일칠칠 70시간을 못 볼 터이니, 그러면 관비(官費)를 받는 오뜰니츠(最優等生)로서 그렇게 궐공하고야 좋은 성적을 그전과 같이 얻을 수 있을까요? 하루만 흠석(결석)하여도 공부가 남보다 뒤떨어지는데… 막둥이 학림이는 절반 응석을 섞어 말한다.  “마누라의 말도 옳고, 너희들의 말도 또한 옳다. 나는 너희들이 환갑연을 차린다고 오래전부터 수군거리나 준비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 준비가 있느냐?”  “우리 가난한 살림에 무슨 별 준비가 있겠소? 정림이 지난 5월에 실습생으로 파견을 받아 야늬우루간 어떤 콜호즈에 가서 콤바인을 타고 밀을 추수한 노력비로 채밀가루를 가져온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써 국수를 누를 셈하고, 화림이 또한 재본소에서 탄 지난 달 월급으로 술 몇 익뜰(리터), 내가 돼지를 잡아 판 그 돈으로써 술 십여 익뜰(리터)을 사서 두었으니, 그만해도 대체로는 준비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오. 그리고 태림이도 무슨 준비가 있을 모양이니 거기에 대하여는 아무 염려도 하실 것 없어요.” 속에 있는 말을 다 토하고야 시원히 여기는 마누라는 아이들을 향하여 뉘를 보았다는, 만족한 기색으로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속궁리로써 부모와 자식의 사이에 대한 도덕이 여지없이 타락된 이때, 하물며 러시아 풍습에 무젖은 저 애들이 그만큼이라도 용심하는 것이 기특한 일이오, 그 중간에서 마누라의 지도가 물론 많았겠지만 그래도 그 용심은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창림이는 어째, 잠잠하고 있을까? 옳지, 저에 대한 문제니까, 되어가는 형편만 가만히 볼 수밖에 없지! 하고 마누라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까지 준비된 것은 몰랐소 그려! 준비도 그렇고 사세가 또한 그러하니, 날짜만 정하면 될 터인데, 언제쯤 좋을까?”  “오는 스무날이 어떨까?” 마누라는 의견을 낸다.  “네, 스무날이 좋습니다!” 아이들이 일시에 찬성한다.  “너무 급박하지 않을까?” 나는 걱정되는 듯이 말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태림이의 부부도 통지만 받으면 어린애들을 데리고 꼭 올 터인데 급박하기는 무얼!” 마누라는 말한다.  “내일 통지하면 모레쯤에는 형님네 전 식구가 다 올 것입니다. 형님도 이렇게 날짜를 정한데 대하여는 물론 찬성할 줄 압니다.” 정림이는 자신있게 말한다.  “그럼 찬동하고 말고!” 마누라가 말한다.  이때껏 아무 말도 없던 창림이는 기쁨이 넘치는 낯으로 긴 목을 들고서  “이렇게 저를 위해 날짜를 당기어 정하시니, 저는 속에 품었던 진정을 토하겠습니다. 저는 안가기도 어렵고, 가기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9월 1일 개학에 간다면 공부한 지 2주일도 못되어 십여 일 말미를 달라기도 학생의 체면에 관계가 없지 않고, 체면이야 어쨌든 기어이 청유서(請由書)를 드린다 하여도 러시아 풍속에서 보지 못하던 환갑에 대하여 그렇게 존중히 여겨 허가할 것 같지 아니하매, 차라리 환갑연을 지낸 후에 가리라는 결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생에 한 번 있는 부모의 환갑에 축수(祝壽)하는 술 한 잔도 못 드린다면 ●●의 유감으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 근심도 없이 되었사오니, 저에게는 만족한 것뿐입니다.” 한다.  “네가 참여를 못한다면 아버진들 얼마나 섭섭하겠느냐? 이제는 잘 되었다.” 마누라는 기뻐하면서 말한다.  이때에 한쪽 구석에 앉았던 학림이, 이제는 의논하던 일이 다 낙착되었으니 다른 문제로 넘어가도 무방하다는 기색으로 좌우를 돌아보면서 나는 아버지께 물어볼 말이 있는데, 그리고 나를 보면서  “그런데 아버지! 아버지께서 1880년생이요, 금년이 1940년이니, 더할 것 없는 예순 살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금년에 예순한 살이요, 예순한 살이면 환갑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을 누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누이도 조선에서는 사람의 나이 계산할 때에 출생한 그해까지 헤는 까닭이라고만 말하고 환갑이 무슨 뜻인 것은 몰라요. 그래, 나는 아버지께 한 번 물어보자고 벼르면서도 그런저런 (이유로) 묻지 못하였는데, 글쎄 시원히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히죽이 웃으면서  “그렇지!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말할 것 같으면 조선에서는 그전에 음력을 사용하였고, 음력은 육갑(六甲)으로 되어진 것이다. 육갑은 갑자·갑술·갑오·갑진·갑인 그 여섯을 통칭하는 말이오, 갑(甲) 하나에 십 년씩 들어있으니, 갑이 여섯이면, 육십 년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나던 그해로 다시 돌아오자면 예순한 해가 되는데, 여기로부터 환갑이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더 쉽게 말한다면 내가 갑자년에 태어났다고 하자, 갑자로부터 갑술·갑신·갑오·갑진·갑인 각 십 년씩을 지나, 갑자년에 다시 돌아오면 예순한 해가 되고 여기로부터 환갑 혹은 회갑이란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더 쉽게 말한다면 살이 되매, 그것을 곧 환갑이라 하는데, 환갑은 갑(甲)에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다. 알아들었니? 학림아!”  “네! 대체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육갑의 속내를 똑똑히 몰라서 머리를 문지방에 찧은 것처럼 상기 얼떨합니다.” 학림이는 말한다.  정림이는 창림이를 마주보면서 학림이의 말을 연이어  “어, 그래 환갑이라고 하는구만, 우리는 몰랐지!” 한다.  이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무슨 궁리를 하던 화림이 머리를 들면서  “얘들아, 그만 말하고 좀 조용하면 좋겠다. 내가 아버지께 요구할 말씀이 있어. 글쎄 조용하라니까! 아버지께서 나의 요구대로 응낙하신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다.” 화림이는 말하려는 학림의 입을 막는다. 그러고 말을 또 계속한다.  저는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학교에 제출하시려고 초 잡은 이력서에서 학력(學歷)·교육·저작(著作)·혁명 사업에 대한 네 가지 조목을 읽어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조목의 내용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실이 숨어 있을 터인데, 그 조목이 너무 간단하여 저에게 만족치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육십년이 짧은 세월이 아니오매, 그 육십년 동안에 얻은 온갖 경험을 저희들에게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래 일에 큰 거울을 삼을 것입니다. 아버지! 괴로우신 대로 말씀하신다면 저는 기쁘겠습니다.  “우리야 무엇을 압니까? 말씀하십시오!” 창림이도 간청한다.  “나처럼 어렸을 그 때에 지내던 일도…” 학림이는 응석 삼아 말한다.  내가 보기에는 화림의 말은 무거운 맛이 있고, 창림이의 말은 참된 맛이 있고, 학림이의 응석스러운 말은 고소한 맛이 있다. 그것들이 요구한다면 속의 창자까지라도 뺄 수만 있으면 빼어줄 터인데, 그까짓 요구를 막아치우는 것도 옳지 못하고, 만일 그 요구대로 한다면 기억에서 떠난 지 오랜, 그런 사실을 어떻게 붙잡아 올까? 잠시동안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마누라를 향하여  “여보, 마누라, 아무래도 저 애들의 간청에 못 견디겠구먼.”  마누라는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아들, 딸을 앞에다가 수북이 앉혀놓고 지난 일을 옛말삼아 이야기하는 것이 여북 재미있어서… 그것도 경사지요.” 한다.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떡이다가 웃으면서  “그렇지요. 마누라의 말도 그럴듯한 말이오.” 하고 나는 말을 시작하였다.  나는 너희들과 같은 아이 때, ‘인생은 꿈이라’는 늙은이들의 말을 듣고, 그것이 무슨 의미의 말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이제야 생각하니 인생은 꿈이 분명하다. 육십년의 세월도 짧지 않다고 말하나 지난 일을 곰곰 생각해보면 한 시간 동안의 꿈을 꾼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한 시간을 이루어진 60분에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과거의 수없는 억만년은 꿈의 한 시간, 한 시간을 쌓아서 된 것이요, 그 수없는 억만년 동안에 수없는 억만의 사람은 한 시간, 한 시간의 꿈을 이어놓은 것이다. 그런 꿈속에서 성현이니, 영웅이니, 호걸이니… 하는 그 칭호를 듣는 사람들은 큰 꿈을 꾼 사람들이다. 나에겐들 왜 그런 큰 꿈을 꿀 소원이 없었겠느냐? 마는 이때까지의 꿈은 코를 골면서 아무 쓸데없는 잠꼬대만 한 셈이다. 그래도 무슨 자취가 있다면 너희들의 5남매 또는 잘 되나 못 되나 몇 권의 글을 지어놓은 그 것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에게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詩)를 말하고 싶다. 그 시는 어떤 시냐 하면,  주인이 꿈에 나그네와 이야기하고主人夢說客  나그네도 꿈에 주인과 이야기하였다客夢說主人  주인과 나그네가 서로 꿈을 이야기하니主客相說夢  다 이 꿈속의 사람이로다俱是夢中人  고 하였다.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60년의 지낸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꿈속의 주인이 꿈속의 나그네에게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시는 우리의 진경을 신통히 그려내었다.  “어찌 꿈 이야기가 그렇게 지루하오? 아이들을 데리고서” 마누라는 염증이 나는 듯이 말한다.  “어머니도, 왜 그러세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데…” 화림이는 무슨 느낌을 받은 듯한 기색으로 말한다.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라니까… 네, 빨리요!” 학림이가 무릎을 쪼그리고 다시 앉으면서 응석하는 듯이 말한다.  나는 이 말 저 말을 듣는 대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마누라의 말은 내 말을 꺾는 것이 아니요, 아이들이 듣고 싶어하는 근본 문제로 어서 들어가라는 말이요, 화림이의 말은 31살을 먹는 동안에 시집살이도 맛보고, 교육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교편도 잡아보고, 아이도 낳아 죽여보고, 또는 제 남편이 3년 구금된 그 동안에 산업조합의 모자직공으로 일하여 보았으니, 인간사회의 맛이 어떻다는 것은 대강이라도 짐작하는 일이고, 학림이는 오는 9월 1일이면 8학년에서 공부하겠지만 그래도 14살 먹은 아이니까,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아마 좋아하겠지! 하고 마누라를 보면서  “마누라의 말도 그럴듯하고 저 애들의 말도 또한 그럴듯하오. 자, 그러면 본 문제로 들어가지요.” 하였다. 그리고 말을 다시 시작하였다.  나는 5살 이전의 일은 무엇이든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5살 때의 일은 몇 가지가 기억에 남아있다. 아마 인상(印象)이 깊이 박히었던 모양이다. 그 몇 가지 중에 한 가지만 들어서 말하겠다. 5살이 되던 그해 봄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해, 가을인지 그것은 똑똑히 지적할 수 없으나, 그때에 내가 병이 났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집이 불길하다는 무녀(巫女)의 말을 믿고서 다른 집으로 옮겨가서 치료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낮에만 나를 업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밤에까지 업고서 두 무릎을 꿇고, 두 주먹을 이마에 대고 주무시던 그 형상, 닭 알의 한쪽 끝을 깨고서 노른자위와 흰자위를 접시에 쏟아서 찢고 그 빈 깍지에 입쌀을 넣어 화롯불에서 밥을 지어 주시던 그 동작이 지금도 나의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학림이는 쫑그리고 앉아서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말을 듣다가 다시 평좌하면서,  “한 술이 되나마나한 그 밥을 잡수시어도 요기가 되시어요?” 한다.  나는 히죽이 웃으면서  “너는 그 밥이 적다는 말이지? 한참 병이 중한 때에는 그것도 다 먹지 못하였다.” 그리고 나는 말을 또 계속하였다. 그 다음에 기억되는 것은 내가 6살 되던 그해 봄에 지금의 말로는 천연두(天然痘), 그때의 말로는 마누라에 걸리었던 일이다. 그때까지는 서양으로부터 우두법(牛痘法)이 들어오지 못하여 만일 10명의 아이가 천연두에 걸리었다고 하면 7명이나, 8명은 죽고 한 둘이 겨우 사나 마나 하였다. 사람마다 자식을 많이 두지 못하고, 나라의 인구가 늘지 못한 그 원인이 거지반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연두에 걸린 지 며칠에 콩알같은 불긋불긋한 두드러기가 온몸에 덮이고 지금 생각하면 온도가 40도 이상에 달하여 죽고 사는 고개의 꼭대기에 다다른 그 때, 아버지께서는 정화수 한 그릇 올린 상을 내 앞에 놓고, 그 상 앞에서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나를 대신으로 잡아가고, 당상관(堂上官)을 살려주옵소서. 하면서 두 손을 비비시던 그 형상이 지금도 나의 눈에 어리어 있다.’ 자식을 위하여서는 자기의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그 사랑이야말로 참사랑이 아니겠느냐?  이때에 둘째 며느리 채봉이는 무릎 위에 안기어 칭얼거리면서 울먹울먹하는 어린 영실이를 오른손으로 살랑살랑 두드려 주고 또 영실이 누운 무릎을 손장단에 맞추어 들었다 놓았다 하며 입으로는 쉬-쉬 소리를 들릴락 말락 가만가만 내면서 말하자면 손장단·무릎장단·입장단 그 3장단이 똑똑 맞아떨어지게 그렇게 하여 재우면서 나만 보고 말을 듣다가,  “아버지! 제가 한마디 물어보고요.”  “무슨 말…” 나는 돌이켜 물었다.  “마누라니, 당상관이니 하는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그 의미는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우두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그전의 조선 사람들은 어떤 임신이 아이에게 접하여 천연두로 되는 것인 줄 꼭 믿었었다. 그래 그 임신을 존경하여 마누라 혹은 당상관이라고 불렀으며, 또는 그 아이가 자기의 자식일지라도 하대의 말이라곤 한마디도 감히 던지지 못하고 당상관이라고 부르면서 존경하였는데, 당상관과 대감은 똑같은 의미의 말이다. 내가 15살 잡히던 해 곧 1894년에 우두법이 비로소 우리 조선으로 들어온 그 후에야 천연두가 분명히 임신의 행위가 아닌 것을 사람마다 깨닫게 되었고, 또는 곰보라는 별명을 듣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게 되었다. 이것 보아라! 자세히 보면 내 얼굴에도 얽은 자리가 드믄드믄 있지 않느냐?  “그래, 얼굴이 얽은 사람을 곰보라고 합니까?” 학림이 묻는다.  “그렇다. 몹시 얽은 사람을 곰보라고 불렀는데 나도 하마터면 그런 별명을 얻을 뻔하였다.” 하고 나는 말을 또 계속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지 못하였다. 내가 11살 되던 그해, 섣달 초닷새 날에 아버지는 다시 뵐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가셨는데, 바로 임종하기 몇 시간 전에 내 손목을 잡으시고 어머니를 보면서 “당신은 나이 젊으니 개가(改嫁)할 셈하고 하근(나의 兒名)이는 누구의 문전에 세운단 말이냐?”의 눈물지고 목이 멘, 그러고도 33살의 청년, 젊으나 젊은 날을 애달파 여기는 최후의 말씀은 나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상을 깊이깊이 주시었다. 나는 언제든지 원망의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머리가 희끗희끗 한 56살 되던 그해 6월까지 받았다. 만일 어머니까지 없었다면 나는 세상에 불행한 사람으로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상사나시던 그해까지도 내가 어디로 떠나가는 때면 뒤를 따라 나오시면서 “기차에 오르고 내릴 때에 조심하라!”는 주의를 번번이 주시던 그 말씀은 너희들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는 때면 너희들은 웃으면서 “할머니는 아마 아직도 아버지를 어린 아이처럼 여기시는 모양이다.” 하고 서로 수군거리던 소리를 나는 어제 들은 듯하다. 부모의 눈에는 그 자식이 골백살을 먹어도 어린아이처럼 보이고, 그렇게 보시는 까닭에 변함이 없는 사랑을 그냥 준다는 것을 환갑이 거의 되는 그때에 더욱 깨달았다.  이때까지 캄캄한 속에 죽은 듯이 고요하던 사람 무더기에서 이엄이엄 뛰어나오는 말소리가 내 말을 갑자기 중지시킨다.  “손자들은 어떻게 사랑하였다고!” 음성만 들어도 분명한 마누라의 말소리였다. 내 듣기에는 그 말속에 나만은 시어머니의 사랑을 그렇게 받아보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포함된 듯하다.  “참말 누이나, 맏형님이나 창림이는 특별한 사랑을 받으셨지요.” 음성만 들어도 이것은 성질이 진득한 정림이의 말소리였다. 내 듣기에는 그 말속에 그 애들은 할머니의 품속에서 잔뼈가 굵었으니 저보다 사랑을 더 받았으리라는 의미가 포함된 듯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다시 계속하였다.  부모의 사랑은 물이다. 물의 본성은 아래로 내려만 간다. 그러니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손자들에게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이 생긴 것인데, 세상에서 이른바 효자라는 사람도 부모의 사랑을 다 보답하기 어려운 것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외며느리 고운데 없고 열 사위 미운데 없다’는 그 속담은 고부간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니, 이것은 딸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사위에게까지 미치고, 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며느리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속담대로 다 그렇다고 긍정치는 아니하되 예로부터 며느리 되는 그네들은 자기의 만족을 다 얻지 못하였던 모양이요, 시어머니는 아무리 사랑이 많더라도 며느리의 만족을 무엇이든지 다 허락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이것은 자식에게 대한 부모의 사랑이 대체로 그러하고 며느리에게 대한 시부모의 사랑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어느 사람이 어머니가 없으랴마는 나처럼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과거에도 없고, 장래에도 또한 없으리라고 단언하고 싶다. 어머니의 깊고 깊은 사랑을 바다에 비긴다면 내가 지금 말하려는 어머니의 사랑은 바다에서 두어고치의 물방울을 떠내는 그것에 지나지 못한다. 나의 기억에 가장 깊이 박힌 인상을 들어 말한다면:  첫째는 내가 7살 되던 그해 여름의 일이다. 병술년 쥐통(콜레라)이라면 지금 생각하여도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때에 쥐가 조선 전국을 휩싸고 횡행하여 한 집에 들면 그 한 집을 진멸시키고, 한 동리에 들면 그 한 동리를 거의 진멸시키었다. 그러는 때면 누구든지 쥐를 피하여 멀리 멀리 사람이 적은 궁벽한 산골로 도망가면 그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와 5살 되는 내 아우 바우돌이를 데리고 도망하게 되었는데 가는 중도에서 우리보다 먼저 도망가다가 죽어진 송장들을 넘고 또 넘어서 열흘 만에 운곡면 챌장거리 고모댁으로 갔었다. 간지 며칠이 안 되어서 불행하게도 바우돌이는 쥐에게 잡히어 그 목숨을 빼앗기었다. 그뿐이냐? 세상에 별일도 있는 것이, 내가 어느 날 개암을 따먹으려 산에 갔다가 나무가시에 긁힌 듯한 자그마한 흔적이 불두덩의 오른쪽 넓적다리에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차차 쏘고, 필경에는 곪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동생이 죽은 것을 생각하고 우실 겨를도 없이 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의원을 청하였다가 화침(火針)질하니 고름이 어찌 쏟아지던지 건너편 맞은 벽(壁)을 뚫을 뻔하였다.  그렇게 고름을 빼었으니 이제는 곱게 합창시키는 문제가 앞에 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나를 위하여서는 다만 하루라도 급히 쥐를 피하여 다른 데로 도망가는 것이 대책이라고 결정하였던 모양이다. 화창한 그 이튿날 새벽에 어머니는 혼자 나를 업고 먼저 도망걸음을 떠나시었다. 그때의 나는 남보다 몸이 실하고 키가 또한 장대하여 무게가 25킬로 가량은 넉넉히 되었고 게다가 또 업힌 다리는 어머니의 무릎에 지나쳤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업고 ●●●되는 횡천면 밤까시라는 촌에 가셨다. 이것이 만일 사랑의 힘이 아니라면 그렇게 연약한 몸으로는 도저히 능치 못할 일이 아니겠느냐? 나는 여기로부터 사랑의 힘은 과연 못할 일이 없다는 결론을 짓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말끝을 마치고, 침을 다시는 그때 사람의 무더기에서 누구의 말소린지 어두운 공기를 헤치고 나온다.  “쥐가 사람을 죽인다니 고양이가 잡아먹는 그런 쥐라는 말입니까?” 한다.  음성을 들으니 4살 때에 작은 마누라(천연두의 종류)을 하고 그 끝에 반년동안이나 기침하여 목청이 굼뜨던 창림이의 음성이었다.  “얘! 그런 쥐가 아니다. 내가 말한 쥐병은 지금의 이른바 ‘콜레라’라는 급성전염병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그 병에 걸리기만 하면 으레 구토, 설사하고 그것이 몇 시간 동안 그냥 계속되면 근육(筋肉)이 줄어드는 법이다. 그때의 사람들은 그렇게 종아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넓적다리에까지 차차 미치는 것을 쥐가 올라온다고 말하였다. 여기로부터 쥐병이라는 이름이 생기어지고, 쥐가 다리에 올라오기만 하면 사는 사람이 백에 하나도 쉽지 않았다.” 하고 나는 말을 또 계속하였다.  둘째로는 내가 13살 되던 그해 겨울의 일인데, 그때는 내가 생장하던 읍내를 떠나 산촌에 옮겨가서 공부를 다시 시작한 때였다. 내가 공부하는 서재의 뒤에 보섭(보습) 모양으로 생긴 산이 있었고, 집 뒤에도 보섭(보습) 모양으로 생긴 산이 있었다. 그 두 개의 보섭(보습)을 서로 잇대어 놓은 듯한 그 끝에는 우리가 길어먹는 샘물이 있었다. 우리 집으로부터 저 재에까지 가는 거리로 말하면 보통 다니는 길로서는 약 100메뜰(미터) 가량이 되고 샘물로부터 발을 꿰서 간즉 150메뜰이 되나 마나하였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면 그리로 지름길을 내고 내왕하였다.  어느 날 첫눈이 오는 밤, 나는 그전과 같이 여러 아이들과 함께 서재에서 자고 새벽 공부를 하다가 아침 먹으려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지름길의 눈을 다 쓸어놓았다. 이 눈을 누가 쓸었을까? 물어볼 것도 없이, 어머니께서 쓰신 줄을 나는 짐작하였고, 또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도 황공하여 후일에는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으나 어머니께서는 눈이 오는 때마다 적게 오면 비로 쓸고, 많이 오면 갈애(가래)로 치우시었다. 소위 자식이란 무엇이기에 눈과 코를 뜰 수 없는 첫 새벽의 애질에, 뺨을 에이는 듯한 초저녁의 바람길에 손발이 시린 것을 잊어버리고 자식이 다니는 그 길의 눈까지 쓸고 치고 하였는지? 나는 지금에도 겨울의 눈 오는 날이면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나는 속으로 솟아오르는 눈물을 도로 머금을 때, 사람의 무더기에서 말소리가 이엄이엄 나온다.  “아버지만 그러신 줄 아십니까? 저도 할머님한테 그보다 못하지 아니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다.  이것은 화림이의 말인데, 그 말의 꼬리를 이어서 창림이는   “허, 누이만 그런 사랑을 받은 줄 아오? 나는 누이보다 더없는 사랑을 받은 것 같은데요.”  정림이 또한 말꼬리의 꼬리를 이어서 말한다.  “할머니의 말씀을 들은즉 아들 4형제, 딸 4형제 모두 8남매를 낳아서 오직 아버지 한 분만을 양하셨나니(기르셨나니) 오죽 사랑하셨겠습니까?”  ‘나는 이 말, 저 말을 들으면서 생각하기를 저애들은 아직까지 경력이 없으니 부모의 사랑하는 그 원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한 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하고  얘들아! 너희는 아직도 부모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물론 모를 것이다. 말하자면 부모의 사랑은 태양과 같다. 태양은 사(私)가 없다. 어디에든지 비친다. 그러나 엎어진 그릇의 밑에는 비추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도 또한 그러하며 자식이 100명이라도 100명을 똑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오,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자식의 자식에게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만일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남녀 양성간의 사랑은 여러 곳에 나뉠 수 없고, 또는 흔히 변동되는 일도 없지 아니하나, 부모의 사랑은 언제든지 그렇지 않다.  내 곁에 앉은 학림이는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2~3번 한다. 나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졸음이 오느냐?”  “아니요, 졸음이 오다니 이야기를 들으면 잠이 안 오는데요. 이제부터는 공부하시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음- 공부하던 이야기!”  나는 공부하던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가기 전에 한없는 감상이 먼저 머릿속에서 솟아오른다. 생각하면 인간 60년이 오래지 않은 듯하나, 그래도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라는 칭호를 듣는 그것으로 보아서는 그리 오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꿈도 같고, 생시도 같은 어린 때의 지난 일을 다시 붙잡아 오자니까, 감아 아득하고 또는 어슴푸레하여 저 일도 다 꿈속의 일이요, 이 일도 다 꿈속의 일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꿈속 같은 어릴 때의 일을 다시 이야기할 기회나마 얻은 그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하고 말을 시작하였다.  내가 8살 되던 해, 늦은 봄 어느 날에 아버지께서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천자책을 가슴에 품은 나의 손목을 붙잡고서 윤 선생님의 서재로 처음 가게 되었다. 입학하던 그 날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슨 큰 뉘를 본 듯이 기뻐하시던 그 일이 지금도 내 눈에 어린다. 그럴 때마다 부모의 얼굴을 보는 듯하고, 나는 또 어리광을 부리던 어린아이로 되면서 눈 같은 흰 털이 두 귀밑에서 휘날리는 그 탄식을 하며 못어지게 된다.  나는 그날 입학하려 갈 때에는 걸어갔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때에는 발바닥에 흙 하나 묻히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너희들은 마차 같은 것을 탔으려니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등에 업히어 집에까지 돌아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교 후, 아이들의 무더기에 휩싸여 서재의 대문 밖에 나온즉, 어머니께서는 몇 시간 전에 그리로 오셨던지 나의 앞에 등을 대고 업히라고 하신다. 나는 좋은 김에 사양도 하였지만, 다짜고짜로 권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못 견디어 그날부터 아침·저녁으로 업혀 오고 가고 하였다.   우리 집에서 서재에까지 한낄노메뜰(1km)은 넉넉히 되는 그 길에서 어른들의 웃음과 아이들의 조롱을 얼마나 받았던지, 나는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을 등에 대고 다리를 버둥거린지 며칠 후에야 겨우 내 발로 걷는 자유를 얻었다.  나는 선생님을 몹시 무서워하였다.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이마의 석 삼자 주름이, 찢어진 눈초리에 감기었다, 띄웠다하는 그 동작을 따라서 올라내리고, 철색기른 얼굴의 반부 이상을 차지한 탑삭불이(텁석부리) 수염이 입의 동작을 따라서 흔들거리는 모양이 나에게 무서움을 주었다. 그렇듯 무섭게 생기신 선생님이 이런 때에 밖으로부터 취하여 들어오시면 눈알을 곧추세우고, 입을 앙 물고, 콧살을 치면서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다가 ‘이놈들, 응!’ 이런 소리가 날 때마다 우리 아이들은 밥을 굶고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벌벌 떨게 된다.  선생님은 번번이 그러다가도 어느 날에는 자주 썼던 말총관을 목침에 씌우고 “내가 어떻게 교훈하였는데 아이들이 글은 잘 읽지 않고, 작폐만 능사로 할까!” 하면서 초달을 친다. 이것이 아이들을 징계하는 간접수단이며, 교수방식의 하나로 되었던 모양이다.  작폐를 좋아하는 것은 아이들의 본성이었다. 그런데 도시의 아이들은 농촌의 아이들보다 그 본성을 몇 곱이나 더 뽐내는 터이다. 선생님이 어디로 나가시면 일시에 책을 다 덮어놓고, 웃는 놈·우는 놈·뛰는 놈·달리는 놈·싸우는 놈·놀이하는 놈·춤추는 놈 가지각색의 놈이 다 있게 되어 단칸의 공부방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만다. 누가 알았던가?  선생님은 들어오는 길에서 그것을 가만히 엿듣다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시면 앉는 그 즉석에 호통소리를 치고 구석에 세웠던 문푸리채 한단을 당기어다가 샅자리 위에 내어치면서 “이놈들 하나씩 하나씩 종아리를 거두고 나서라!”는 명령이 내린다.  만일 간장이 여린 아이가 있다면 그 혹독한 위협에 경풍을 일궜을지도 모르겠다. 작폐야 하였거나, 말았거나 그것은 도무지 묻지 않고 일체로 달벌하는데 나이가 제일 적은 아이는 1대, 그 다음 아이는 2대, 또 그 다음의 아이는 3대, 그렇게 나이를 따라서 올라갈수록 차차 더하여 만일 서른 번째의 아이라면 30대를 맞게 된다. 나는 어찌도 겁이 났던지 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가다가 도로 붙잡혀서 그 매를 맞은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작폐군은 언제든지 틈만 있으면 작폐하였다. 그런 엄혹한 수단으로써는 작폐의 뿌리를 아주 끊지 못하였다.  또는 여러 아이가 밖에 나가서 작폐하는 그것을 금지하는 방법으로서는 출입패(出入牌)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길이 20만지(센티), 넓이 6싼지(센티) 가량이나 되는 널조각에 ‘출입패’라는 3자를 쓰고 그 윗머리에 구멍을 뚫고, 노끈을 꿰서 마주 맨 것인데, 그 패는 항상 출입문의 설주에 걸어놓는다. 어떤 아이든지 대변 혹은 소변이 마렵거나 또 그밖에 무슨 일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게 되는 때에는 반드시 그것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나갔던 아이가 들어온 후에야 다른 아이가 그것을 쥐고 또 나가게 된다. 이렇게 종일토록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들어오고 하여 속담에 이른바 ‘그 쥐 그 꼬리를 물었다’는 형상이었다. 그러는 중에서 몇 분이라도 지체하여 들어오는 아이가 있다면 두말없이 초달을 맞았으며 또는 금방 들어온 아이가 재차 나가자면 그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사람의 무더기가 움직이면서 말소리가 나온다.  “오줌이 소태거나, 설사하는 아이들은 어찌하였습니까?” 창림이가 묻는다.  나는 허허 웃으면서 그러기 때문에 어떤 아이들은 바지 밑을 더럽힌 일도 없지 않아 있었다.  정림이 그 뒤를 이어 묻는다.  “하루에 몇 시간씩 몇 과정을 공부하였습니까?”  그때에는 지금 너희들이 공부하는, 그런 학교는 없었다. 또는 시간을 기준하는 시계도 없었다. 그리고 과정이라는 것도 보통으로 한문을 전문하였는데, 그것을 만일 분류한다면 줄글과 구글의 두 가지가 있다. 줄글에는 사략·통감 등의 중국역사와 사서(四書: 論語·孟子·中庸·大學), 오경(五經: 詩傳·書傳·周易·春秋·禮記)이 있고, 구글에는 마상당시(馬上唐詩)·연주시(聯珠詩)·고문진보(古文眞寶)·염략(濂洛) 등의 중국 시집이 있다. 가을부터 봄에 이르기까지는 줄글을 읽고, 여름에는 구글을 읽으면서 시·부·론·표·책·문·의·의(詩·賦·論·表·策·問·疑·義) 그 여덟 가지 중에서 한두 가지를 전주하여 서재마다 글짓기를 하니, 이것은 지금에 이른바 학기로 볼 수 있고, 당일 공부에 대하여는 해가 길어졌거나, 짧아졌거나 그것은 물론하고 아침에 해가 뜨면 상학하여, 저녁에 해가 기울어지면 하학한다. 그렇게 해로써 표준시계를 삼았기 때문에 상학시간은 오라고도 일정치 못하였다.  내가 공부하던 서재는 사방 4메뜰 가량이나 되는 온돌방이었다. 근 40명의 아이들을 두 줄로 나눠 앉히었는데 첫째의 줄은 벽을 향하여 앉고, 둘째의 줄은 그 반대방향으로 앉게 되었다. 자세히 말하면 이쪽 등과 저쪽 등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총관을 쓰신 선생님은 아랫목에 꿇고 앉아서 복습을 감시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몸을 흔들면 목청이 자라는 대로 소리를 내어 각기 글을 읽는다. 어떤 놈은 몸을 좌우로 흔들고, 어떤 놈은 몸을 앞뒤로 흔들어 엉덩이까지 들었다, 놓았다 하는 바람에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며, 책장이 또한 뒤집어진다. 이렇게 흔들어대고, 소리치는 모습을 무엇에 비기면 좋을까? 여름의 달 밝고 고요한 밤, 어느 큰 못에서 몇 백 몇 천의 개구리 떼가 서로 짖어대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러는 때 화끈화끈한 사람의 화기에 취하여 눈을 감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조는 아이가 있다거나, 혹은 서로 사담하는 아이가 있다면 선생님은 그 아이의 머리꼭대기와 몸을 매채로 친다. 이것은 마른 하늘의 벼락이었다. 생각도 못하던 벼락 매를 맞은 아이는 고통보다도 넋이 떨어져 정신을 미쳐 차리지 못한다. 나도 그런 매를 한두 번만 맞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외우는 총명함이 적었다.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기 쉬워하였으나, 소리치면서 읽어서는 기억하기가 퍽 곤란하였다. 아침에 배운 그것을 종일 읽어도 외우지 못하다가도 이튿날 새벽에 몇 번만 읽으면 혼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외강으로 맞히는 거기에 있어는 매를 맞아본 적이 없었다.  내 마음에는 매질하는 그것도 몹시 언짢게 생각하였으나, 그보다 종일토록 두 무릎을 꿇고 앉게 하는 그것을 더욱 언짢게 생각하였다. 무릎을 꿇던 처음 며칠에는 꿇어앉을 때마다 두 다리가 아프다가 저린 기운이 생기고 그런 끝에는 신경이 마비되어 내 다린지, 남의 다린지 전혀 분간할 수 없는 데에까지 이른다. 그럴 때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핑계-핑계하여 일어선즉 다리가 휘청거리면서 발이 어디에 놓이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학자라는 그네들을 보니까 그것이 버릇으로 되면 일 없는 듯하나, 나는 그런 버릇을 얻으려고 애쓸 마음이 없었다.  그것뿐 아니라, 마주 쥔 두 손 끝을 이마에 대고 두 무릎을 꿇고 절하는 그것이 또한 귀찮게 보였다. 아침에는 집을 떠날 때, 부모 두 분에게 절하고 서재에 가면 선생님에게 절하고 그 다음에는 아이들끼리 두 줄로 대립하여 각기 두 손 끝을 마주 잡고 이마에 대고 서로 예읍한 후에 상학한다. 상학의 절이 어떠냐 하면 첫째로는 선생님 앞에서 전날에 배운 것을 외강으로 읽고 쓰고 하는 것인데, 그때에도 반드시 절한다. 둘째로는 새 글을 배우는 것인데, 먼저 글자를 배우고 그 다음에 읽어보고 그 다음에 뜻을 배우고 물러나오는 때에도 절한다. 셋째로는 배운 것을 종일 복습하는 그것인데, 그 동안에 어떤 손님이 오신다면 오시는 대로 그들에게 다 절하고 저녁이 되어 하학하는 그때에도 아침과 같이 선생님에게 절한 후, 아이들끼리 또 예읍하고서 흩어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와 어머님께 절하는데, 마당에서 만나면 마당에서 절하고, 부엌에서 만나면 부엌에서 절하였다. 그뿐 아니라 잠들어 기침하시는 그때에도 절하고, 날이 밝아 취침하시는 때에도 절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다가 허리가 끊어질 일이다. 한번은 장마 때에 진흙이 푹푹 스미는 마당에서 절하였구나! 그 꼴이 어떠하였겠느냐? 누가 알았나? 그런 경우에는 부모에게 ‘방으로 드십사’의 말씀을 여쭈어 방에 드신 후에 절한다는데, 그런 지시는 선생님께 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옷에 흙이 얼마나 묻었겠느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도 그것을 귀찮게 여기셨던지 그만두라고 누차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다. 선생님은 비밀리 뒷조사를 하여 자기의 지시대로 절하였다면 아무 죄책도 없거니와 그와 반대되는 아이들은 달초를 맞는 것이 대단히 무서웠다.  몇 분 전부터 사람의 무더기 속에서 들어도 들을 수 없던 무슨 소리가 수군거리더니 묻는 말이 연이어 나온다. “우리 쏘베트(소비에트) 학교에서는 아무 형벌이 없어도 아이들이 공부를 다 잘하는데…” 한다.  너희들이 알다시피 나도 얼마 전에 소학교학생을 가르쳐 보았다. 평화수단으로써 교수시간의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한두 번만 느끼지 않았다. 너희들의 생각에는 어린아이에게 무슨 자각이 있으리라고 짐작하겠느냐? 자각이 있을 수 없다. ‘사람 노릇하려면 공부에 힘써야 되겠다’는 그런 자각은 적어도 열두서너 살 된 후에야 생길 것이다. 그전에는 공부에 취미를 붙이는 그것보다 작폐에 더 취미있어 한다. 진정의 말이지, 나도 어느 시기까지는 매가 무서워서 공부에 명심하였다. 다시 말하면 서재로 가지 않으면 부모가 때리고, 아무 연고도 없이 며칠 결석하다가 서재로 가게 되면 선생님이 때리고 또는 배운 글을 혼자 못 외우면 때리는 거기에서 공부를 불가불 명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달초하는 벌을 실시하여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무슨 형식의 벌을 주든지 벌주는 일이 마땅히 있어야 하고 벌이 있는 그 반면에는 상주는 일 또한 있어야 한다. 상벌이 분명한 후에야 선악과 시비를 능히 분별할 만한 자각이 아이들에게서 나오게 된다. 들에서 생장하던 짐승을 붙들어다가 길을 들이자면 시키는 대로 듣지 않는 때에는 때리고, 들을 때에는 먹을 것을 주어 버릇하여야 필경에는 그것이 길드는 데에까지 이른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교양하는 방면에서도 상벌이란 그것이 좋은 결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어 누가 제 먼저 물어볼까봐 먼저 묻는 모양인데, 말버릇이 정녕한 응석둥이 학림이 말이었다.  “조선 사람이 절한다니, 절이란 것이 어떤 형식으로 된 것인지 몰랐는데, 이제야 듣고 보니 야, 번거롭기도 한 게! 그리고야 조선이 망하지 않고! 나처럼 양복에다가 구두를 신었다면 날마다 코밀이하다가 볼 일을 못 보겠네! 그렇게 자꾸자꾸 절하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지요?” 한다.  말버릇은 고약하겠다. 아령(러시아)에서 생장한 소위 얼마우재의 말법은 보통 그렇지만 어째 그런지 내 귀에는 몹시 거슬려 들린다. 러시아어화한 오늘날에 그만큼이라도 조선말을 빼앗고 또는 그 말속에 솔직한 맛이 있는 것만은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그전의 조선 사람들은 옷을 풍차게 지어 입기 때문에 그렇게 절하여도 아무 거침이 없었다. 말하자면 바지 밑이 땅에 거의 닿고 향전을 친 바짓가랑이가 신 뒤축에 치렁거리고 그 위에다가 70 싼지(센티)나 되는 긴 소매의 도포 혹은 중추막을 입었으니,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데 무슨 거침이 있겠느냐? 너희가 지금에 만일 그런 옷을 입은 사람이 머리에 망건을 두르고 그 위에 큰 갓을 쓰고 손에는 한메뜰 가량이나 되는 장죽을 쥐고서 갈지자 걸음하는 그것을 본다면 세상에 별별 괴물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조선이 망하는 그때까지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제는 그네들이 숭상하던 예절의 하나인 그 절 법도 조선으로 더불어 다 망하였고, 또는 망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절이 그렇게 몹시 번거로웠지만, 다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절하던 그것을 말하여도 부모가 기침하신 그때의 절은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의 의미를 표하는 것이요, 서재로 갈 때의 절은 ‘낮 사이에 안녕히 계십시오!’의 의미를 표하는 것이요,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온 그때의 절은 ‘낮 사이에 안녕히 계셨습니까?’의 의미를 표하는 것이요, 밤이 되어 취침하실 그 때의 절은 ‘밤사이에 안녕히 주무십시오!’의 의미를 표하는 것이다. 그렇게 산사람에게만 절하는 줄 아느냐? 죽은 사람에게도 절하고, 또는 형투리도 없는 귀신에까지 절하였다. 귀신이 몇 백 몇 천의 종류인지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어느 집에든지 산사람의 인구보다 귀신의 수효가 더 많았다. 내가 12살 피난 때, 우리 집에도 성인·제석·토공·산거리·성조신·조앙신·터줏대감 등 20여 종류의 귀신을 사괴어 놓은 질그릇·나무그릇·당직이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들을 죄다 거둬 물에다가 장사하였더니 어머니께서 아시고 무슨 큰 사단이 날까봐 겁나하시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확실히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조선 사람은 귀신에게 굴복하던 그 습관이 남의 나라한테 굴복을 당하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 정도에까지 이른 듯하다. 그러나 근일에 와서는 조선에서도 그런 미신이 많이 타파되었고 또한 절법에 있어서도 존장에게 대하여는 모자를 벗어 오른손에 쥐고 기착하고서 몸의 위를 구부리며, 평교 간에는 손을 마주 잡는 서양예절이 통행되고 있다.  내 말이 아마 지리 하였던지, 어떤 아이는 하품하는데, 몇 해 동안 교수의 경험을 얻은 화림이 다른 문제로 넘어간다.  “아버지 그때에도 공부 성적을 알기 위하여 시험하는 법이 있었습니까?”  시험하는 법이 있다마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서 받는 그 시험과는 얼마간 다르다. 학교에서는 각 학기와 학년의 시험이 있고, 그 시험의 성적을 총합하여서 졸업시험을 치르지만, 구학 서재에서는 그렇게 일정한 규정이 없었다. 내가 처음 공부하던 서재를 두고 말하면 가을부터 봄까지는 달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강(講)을 받는데, 선생님이 열닷새 동안 가르쳐준 가운데에서 줄글이면 어느 대문, 구글이면 어느 제목을 지정한다. 그러면 그 지정을 받은 아이가 그것을 외강으로 읽고 또는 그 뜻을 묻는 대로 대게 된다. 아이마다 다 그렇게 하여 차례차례로 그 성적을 받는데, 성적은 순통(純通)·통(通)·조(粗)·략(略)·불(不)의 다섯 가지가 있었다. 그것을 지금 학교에서 매는 그 성적과 ●● 비교하여 본다면 순통은 최우등이요, 통은 우등이요, 조와 략은 급제요, 불은 낙제로 볼 것이다. 순통과 통을 받은 아이에게는 시상하되 미리 아이들에게서 거둔 돈으로 장만한 물품-종이·붓·먹-을 주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날마다 선생님이 내어주는 글제에 응하여 글짓기를 하는데, 선생님은 그 날에 지은 글을 그날에 골라 주필(朱筆)로써 그 글감에다가 성적을 맨다. 그 성적은 강(講)하는 그것과 달리하여 상지상(上之上)·상지중(上之中)·상지하(上之下)·차상(次上)·차중(次中)·차하(次下)의 여섯 가지로 등분하였다. 그것을 지금 학교에서 작문 성적을 매는 그것과 서로 비교한다면 상지상은 최우등이요, 상지중·상지하는 우등이요, 차상·차중은 급제요, 차하는 낙제라 할 것이다.  그런데 상지상을 매긴 그 글 종이에는 괴례(魁例) 두 자를 쓰니, 그것은 장원한 턱을 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괴례를 당한 아이가 술을 한턱 내어서 선생님과 기타 어른들을 대접하였다. 여기에서 어떤 특징을 지적한다면 글짓기 할 때의 우등생은 한 턱을 내게 되고, 강할 때의 우등생은 상급을 타게 된 것이 첫째의 특징이요, 여름의 선생님은 날마다 취하여 있고, 가을부터 봄까지의 선생님은 깨어있는 것이 둘째의 특징이요, 강에서의 성적은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작문에서의 성적은 여섯 가지로 나누는 것이 셋째의 특징이다. 그리고 졸업시험은 언제든지 없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지금의 학제와 같이 소학·중학·대학의 구별이 없었던 까닭이다.  나는 대답을 끝내고 신문 조각에 담배 한대를 말아 성냥불에 피워 물고 이야기를 또 시작하였다.  나는 천자 한 책을 한 해만에 겨우 떼게 되었다. 그때에는 국절·경절이라던가 일요일이라던가 그 따위의 휴식일은 전혀 없었다. 다만 무슨 명절이 있었다면 한설날·한식·단오·추석이란 것이 있었는데 그런 명절에는 며칠씩 휴식하였다. 그리고는 쉬지 않고 공부하였건만, 천자 한 책을 읽고 쓰고 하는 거기에다가 1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었다. 말하자면 첫 돌에는 그것을 배워 혼자 외워 마치고, 다음 돌에는 그것의 선후기우시를 가리어 써서 혼자 마치는 그 일에서 허다한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러니 하루에 평균 석자도 못 읽은 모양이 아니냐? 여기에 더하여 결론을 짓는다면 벙어리 꿀 먹은 모양으로 아무 맛도 모르고 읽기만 위주한 것이 첫째의 이유로 되었고, 그보다도 남과 같이 총명하지 못한 것이 더욱 큰 이유로 되었겠다. 간단히 말하면 한문은 배우기가 어렵고, 잊어지기는 쉽다는 그것에 지나지 못한다.  나는 천자를 그렇게 다 읽고 그 다음에는 우리 집에서 20메뜰이 되나마나한 새로 설립한 조 선생님의 서재로 다니면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종일토록 두 무릎을 꿇고 앉는 일이나, 아침·저녁으로 부모와 선생님께 절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앞날에 배운 글을 외우고, 새로운 글을 배우는 그때는 반드시 절하고 꿇게 되었다. 어째 그러냐하면 조 선생님은 유교학자의 본을 뜨지 아니하신 까닭이다. 그래 나는 형식에 지나지 못한 그 번잡한 예절의 구속에서 벗어난 것을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런데 조 선생님은 해수병으로 하루에 몇 번씩 붉은 가래와 흰 가래를 섞어 게우시고 거기에 또 각통을 겸하여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곧 폐병인데, 그 병균(病菌)이 전염되면 생명이 위험이 생기는 것을 누구도 몰랐다. 만일 그런 줄을 알았다면 그에게서 글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 허물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때 조선의 의학이 그 병균을 발견하지 못한 거기에 그 허물을 돌려야 하겠다.  폐병환자는 보통으로 신경이 예민하여 화을 쉽게 내지마는 조 선생님처럼 까딱하면 성을 내어 독살을 부리는 이는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이제마의 사상설(四象說)에 비추어 본다면 소양인(少陽人)일게 분명하다. 그렇게 성질이 급하고 표독하시나 나를 몹시 사랑하였고, ‘키다리’의 별명을 듣는 사모님은 나를 더욱 사랑하셨다. 어찌 귀엽게 보시었던지, 내가 새벽에 너무 일찍이 가는 때면 부부간의 덮은 이불 속에 눕혀 재우는 일까지 자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이 나는 때에는 알던 정, 보던 정이 다 없었다. 그것은 내가 9살 되던 그해, 여름의 일인데, 내가 어떤 다른 아이에게 모를 글자를 물어보다가 말다툼이 되어, 필경에는 여간한 손붙임(싸움)까지 서로 있게 되었다. 그것을 보신 조 선생님은 성이 나서 흰자위에 머리끌 같은 핏줄이 간 그 눈알을 굴리면서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시더니, 우리 두 아이의 머리태를 맞매어놓고 문푸리채로 막 두드리매, 우리는 불에 던져진 벌레처럼 꼬물거리었다. 그리하는 것도 그의 마음에 오히려 시원하지 못하였던지 또는 기왓장 굴림까지 시키었다. 사모님도 보기에 그것이 어찌나 측은하셨던지 사잇문을 열고 안쪽으로 은근히 우리의 역성을 들어, 형벌이 너무 과도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다가 도리어 난매를 맞고 쫓긴 일까지 있었다. 나는 몰랐더니 그때에 어머니께서 서재의 앞길로 지나가다가 그런 애처로운 광경을 보시고 어찌도 가슴이 아팠던지 남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다 못하여 집에 돌아가서 하염없이 통곡하시니, 아버지께서는 도리어 책망하시면서 우리가 그 애를 선생님께 맡긴 바에는 죽이거나, 살리거나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하셨단다. 그때 학부형들의 생각은 다 그러하여 매손이 센 선생님이면 교훈을 잘하는 선생님이라고 칭찬하였으며, 공부하는 아이치고는 매 아니 맞은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조 선생님께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아슬아슬 춥고, 두통·골통이 나는 고뿔(감기)과 같은 병에 걸리어서는 공부가 남보다 뒤떨어질까봐 엉엉 울면서 결석하여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서재에서는 아이들이 날마다 첫 새벽에 가서 앞날에 배운 글을 복습하다가 그것을 혼자 외우고 새 글을 배웠다. 나는 새벽 글에 무한한 취미를 붙였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앞날에 암만 읽어도 혼자 외우지 못하던 것도 몇 번만 읽으면 거울같이 환하게 알게 되는 것을 제일 취미있어하였다는 말이다.  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나, 아이들 사이에는 새벽마다 제가 먼저 가려는 경쟁이 일어났다. 한 번은 은가루 같은 흰 눈이 길에 깔리고, 거울같이 밝은 달이 반공에 걸린 어느 겨울밤에 배운 것을 복습하다가 이불 속에 누워서 어찌나 오미하였던지 몇 시간 동안 자는 둥 마는 둥 갑자기 오들뜨리면서 눈을 퍼뜩 뜨고 내다보니 창문이 훤하였다. 달빛이 그렇게 훤한 줄이야 짐작이나 하였던가? 정녕, 먼동이 튼 줄만 생각하였다. 벌떡 일어나서 바삐바삐 차리고 손으로 문걸쇠를 붙잡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도 또한 깨어나서 아직은 닭도 울지 않았다느니, 창문이 훤한 것은 달빛에 그렇다느니, 한 잠 더 자고 가도 늦지 않았다느니 말씀을 서로 던지면서 갖가지로 만류하신다.  나는 부모에게서 속아 본 일이 한 번도 없건마는 그래도 말씀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 제 말만 제 말이라고 우기면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그것처럼 더 괘씸한 일은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어찌 괘씸히 보셨던지 벌떡 일어서시더니 부엌에 있는 부집게를 쥐면서 위협하시었다. 나는 겁을 먹은 김에 문을 차고 뛰어나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얼음 강으로 내달았다.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성이 나셨던지 내 뒤를 따라오신다. 지금과 같으면 나는 굽 높은 나무 신을 신고 얼음판에서 두 자국도 떼기 전에 엎어져 코가 터지든지 자빠져 뒷골이 깨어지든지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그런 나무 신을 신고도 아무 근심 없이 설마놓이를 하면서 줄달음하였고, 어머니께서도 나보다 못하지 않게 달음질하여 거의 붙잡을 만큼 쫓아오신다.  그래서 나는 부득이 방향을 바꾸게 되어 우물거리로 쭉 빠져가다가 바로 빙고장판을 꿰어 작은 만경재로 치달았다. 그 마루에 올라가서 헐떡거리는 숨을 돌구면서 보니까, 어머니께서도 그리 멀지않은 거리에 당도하셨다. 나는 어찌나 바빴던지 숨도 채 돌리지 못하고 즉시 서재가 있는 그쪽을 바라보면서 내리달려 필경에는 서재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서 사모님의 품에 한잠 늘어지게 자던 일까지 있었다. 아차하면 어머니에게 붙잡혀 얻어맞았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아프게는 때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 그러냐 하면 한 방면으로는 괘씸히 여기셨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칭찬할 만한 열성이 있었던 까닭이다. 만일 누가 나에게 향하여 공부에 열심히 했던 것을 묻는다면 나는 오직 이 한 가지의 사실만을 설명하려고 한다.  나는 11살에 사략 이권을 읽었는데, 그때부터는 선생님한테 매를 맞기는커녕 꾸지람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철이 차차 들면서 문리를 자못 이해하였던 까닭이다. 그런데 애달프게도 그해 섣달 초닷새 날에 조 선생님의 문하를 하직하였다. 그날은 곧 아버지께서 상사하시던 날이었다. 그 후부터는 공부를 다시 계속할 힘이 없었다.  나는 말하다가 깜짝 놀라면서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정미소의 12시 기적소리가 고요하던 전 시가의 공기를 흔들어 놓는다. 사방을 살펴보니 북두칠성이 맴돌아서고 이웃집의 웃음소리는 언제 끊어졌는지 아무 인적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도 제각기 모기장속으로 들어갔다.

    2 꿈속의 꿈 (下)

      열 여드렛날 저녁이었다. 하늘을 쳐다보면 티끌 한 점 없이, 말쑥하게 닦아 놓은 푸른 유리라면 좋을까? 그러한 하늘에 금강석을 박은 듯한 크고 작은 별들의 반짝이는 양은 각기 자체의 영광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의 일을 다시 추억하였다. 여러 아이들로 더불어 별들을 바라보면서 누가 단숨에 별을 더 많이 헤기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별 넷, 나 넷, 별 다섯, 나 다섯, 별 여섯, 나 여섯…」이렇게 헤다가 어떤 아이는 숨이 차서 더 헤지 못하고 헐떡이던 그 모양이 눈 속에 떠오른다. 그 일은 지금에 생각만 해도 형용할 수 없는 흥미가 있어서 별들을 또한 헤고 싶었다. 그리고 또 생각하니 「여든 살을 먹어도 세 살적 마음이 있다.」는 속담은 과연 헛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체면에 그럴 수도 없어서 난 이들을 향하여 히죽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내가 삼 개년의 거주제한을 당하였던 그 시기에 조선역사의 큰 사변인 삼일 운동(3·1운동, 1919)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운동이 1919년 삼월 일일에 일어났다 하여서 삼일 운동(3·1운동, 1919)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운동의 폭발에 있어 세계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민족자결(民族自決)에 대한 윌슨 대통령의 성명(聲名)이 큰 동기로 된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한 방면으로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마는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이라면 빼앗기를 좋아하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강박수단으로 조선을 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하던 그때에 벌써 그 운동의 움이 생겨지고 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한 지 십 년 동안에 경제적 또는 정치적으로 온갖 압박을 다 맛보는 거기에서 그 운동의 줄기와 가지가 장성하였다. 그러니까, 윌슨의 성명은 그 운동의 도화선(導火線)으로 됨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조선 사람은 절대적 독립을 완전히 얻는 그 때까지는 어느 기회에나 그런 운동을 중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독립을 요구함은 그 의미가 민족적 해방에 있지마는, 자세히 분석한다면 경제상으로는 생활의 안전, 정치상으로는 인권(人權)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 거기에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표시되었다.

    3 조선문학사(제1권) 括論

      本書를 編述하려는 意圖는 二十三年(1927年) 前에 벌써 있었던 것이다. 말한다면 海港 勞動學院에서 敎鞭을 쥐던 그때에 安自山(자산 안확)의 『朝鮮文學史』를 읽고서 그런 意圖가 생기었다는 것이다. 이것에 關한 材料를 充分히 얻을 수 있는 그 處地에서 왜 이렇게 內容이 貧弱하며 게다가 또 類別과 論斷까지도 詳明하지 못한가? 이러한 觀察로부터 濫分의 意圖가 나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朝鮮의 書類라곤 얻어 볼 길이 實로 아득한 海外異域에 앉아서 이런 設計를 낸 것이 果然 誤解이었다.  그런데 긴 歲月을 두고서 東의 鱗과 西의 爪[瓜]를 拾取하듯이, 材料를 얻으면 얻는 대로 하여 歌樂史·童謠民謠集·詞와 別曲의 變遷 等 三種書를 먼저 編成하였나니 이것은 本書의 土臺를 修築하는 工事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때에든지 蒐集한 材料가 나의 마음에 滿足하다는 그때에야 本書를 쓰려고 하였는데, 한 뉘(한 평생)로 志望하던 朝鮮의 解放은 되었겠다, 그 結果는 나의 붓대에 滿足을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한 것을 누가 失錯이라고 할까? 그러나 모두가 甕算이었다.  그래서 朝鮮解放의 第三回 紀念(1948年)을 맞는 그 때에 本書의 起草를 비롯하였나니 이것은 무슨 까닭이냐? 오랜 經營이라 거저 버리기도 可惜한 까닭이었다. 해마다 半年은 菜圃에, 半年은 筆墨에 그렇게 作業하면서, 더군다나 末期에 와서는 喪明의 歎을 克服하면서 오늘의 功塔을 完成하였다. 이것이 實狀인즉 考據가 적은지라 內容이 勿論, 貧弱할지며, 솜씨가 서툰지라 論斷이 勿論, 詳明하지 못할지니 安自山(자산 안확)의 그것과 무슨 다름이 있으랴? 그렇지마는 後來의 讀者 中에서 나의 積年苦心만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그에서 더한 榮幸은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一九五○年 五月 一日에 著者는 識하노라.

    4 조선문학사(제1권) 說話

      여기에는 神話·傳說·野談·童話·寓語 等이 다 包含되었다. 이것을 簡短하게 한마디의 말로 한다면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 中에 神話가 먼저 생기었는데, 이것이 神政一致의 時代에는 惟一한 權威를 가지고 있었다. 왜 그런 神話가 생기게 되었는가? 原始人의 思索方式은 接近性 또는 類似性의 聯想的 作用에 있었음에, 어떤 境遇에는 사람을 神格化 或은 動物化하는 일도 있었으며, 또 어떤 境遇에는 動物을 人格化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大槪 말한다면 檀君을 神人, 解慕漱(해모수)를 天王郞이라 한 것은 사람을 神格化한 것이며, 곰에게서 檀君, 龍에게서 閼英(알영)(新羅始祖의 妃)이 出生하였다는 것은 動物을 人格化한 것이며, 王隆(왕륭)(高麗太祖의 父)의 어머니는 龍女, 李朝太祖[李成桂(이성계)]는 瑤樂池의 龍이라는 것은 사람을 動物化한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動物을 類似하게 생각하였다. 그것도 그 當時에 所謂 偉大하다는 人物에게만 限하였나니, 偉大하다는 그 人物이 自體를 非人間的 어떤 神聖物로 보이기 爲하여 그런 神話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샤먼과 같이, 그 階級에 屬한 어떤 놈이 그런 神話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民衆을 欺瞞하여 마음대로 壓迫 또는 搾取하였다.  그러므로 그 神話와 傳說이 때때로 重複되면서 얼마큼의 變形은 있다 하더라도 그 意味가 同一한 것이 적지 아니하다. 『三國遺事』·『三國史記』 等에 散在한 神話와 傳說이 얼마든지 있으나, 여기에는 다만 同一한 意味를 가진 것만, 略擧하여 보이겠다.ㄱ, 天降說.  「古記에 이르되 옛적에 桓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庶子 桓雄(환웅)이 자주 天下에 뜻을 두고 人間을 貪내더니 아버지가 그의 뜻하는 바를 아시고 三危·太白을 내려다보고서 人間을 可히 弘益할 수 있다 하여 天符印 세 個를 주면서 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雄이 三千의 徒를 거느리고 太伯山 神壇樹의 아래에 降하니 이것을 일러 神市라 하고 그가 곧 桓雄天王이다. 」(『三國遺事』 古朝鮮條)이것은 桓雄(환웅)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人間에 降하였다는 말이니, 그는 檀君(단군)의 아버지였다.  「마침내 神人이 太白山 檀木의 아래에 降하거늘 國人이 세워 임금을 삼으니 그가 곧 檀君(단군)이라」(東史)  이것은 檀君(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神人이라는 말이다.  「… 그 정승 阿蘭弗(아란불)이 말하되 꿈에 하느님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장차 나의 子孫으로 하여금 나라를 여기에 세울 터이니 너희는 그를 避하여 가라! … 그 舊都에는 自稱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解慕漱(해모수)가 와서 都하다」(『東國通鑑』 解扶婁條)  「하느님이 太子를 보내어 夫餘王의 古都에 降遊하게 하시니 이름은 解慕漱(해모수)라, 하늘로부터 下하여 … 아침이면 政事하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世上에서 그를 天王郞이라 하였다. 」(『三國史記』 東明王條)  崔滋(최자)의 『三都賦』에 「西都의 創先에 東明(동명)이라고 이름하는 임금이 九玄으로부터 降하여 下土를 살피시고 여기에 宅하니 基도 아니하고 築도 아니하였으나 他域에 屹然하도다. 五龍車를 타시고 하늘에 올라가며 하늘에서 내려오니 百神이 導하고 列仙이 從하도다.」 (『文淸家集』)  이것은 解慕漱(해모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下土에 降하였다는 말이다.  “… 그 王 松讓(송양)이 朱蒙(주몽)을 보고서 말하되 寡人이 치우치게 海隅에 있음에 君子를 한 번도 보지 못하였더니 당신이 어디로서 오셨습니까? 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卒本에 와서 都하였노라. 」(『東國通鑑』 東明王條)  「自稱 하느님의 아들로서 日光을 타고 왔노라 하여 姓을 高라 하였다.」 (『東國通鑑』 東明王條)  이것은 高朱蒙(고주몽)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卒本에 降하였다는 말이다.ㄴ, 卵生說.  「濊國에 一村嫗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더니 크기가 瓢子만한 一卵이 上流로서 내려오는지라, 村嫗가 異常히 여겨 건져다 두었더니 얼마 만에 一男子가 껍질을 깨치고 나오는데 形貌가 非常한지라, 村嫗가 그대로 기르니 年이 六七에 身長이 八尺이요 얼굴이 검은지라, 남들이 검도령이라고 부름에 마침내 이름이 되었다…」[洪萬宗(홍만종)의 『旬五志』]  이것은 검도령이 卵에서 生하였다는 말이니, 그는 韓人 張良(장량)의 懇托에 應하여 一百二十斤의 鐵椎로써 博浪沙中에서 秦始皇을 狙擊한 勇士이었다.   「高墟村長 蘇伐公(소벌공)이 楊山麓 蘿井의 곁 수풀사이에 白馬의 跪伏한 狀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卽時 가서 살피니 馬는 문득 간데없고 大卵이 있는지라, 그것을 깨치니 어린애가 그리로서 나옴에 거두어 養하였더니 年이 十三에 岐嶷夙成한지라, 六部人이 그의 난 것이 神異하다 하여 임금을 삼고서 赫居世 居西干이라 하였으며, 辰人이 匏를 朴이라 하는데 그 大卵이 匏와 같다 하여 그 姓을 朴이라 하였나니 居西干은 方言에 尊長이라는 말이다.」(『輿地勝覽』 慶州 蘿井條)  이것은 新羅始祖 朴赫居世(박혁거세)가 卵에서 生하였다는 말이다.  九干이 水濱에서 禊飮하다가 龜旨峰에 異氣가 있는 것을 바라보고 곧 거기로 가니 紫繩에 달아맨 金盒이 空中으로부터 내려온다. 그 盒을 열고 보니 日輪과 같이 둥그런 金色大卵이 있다. 그것을 가져다가 我刀干의 집에 두고 翌日에 九干이 다 모여 그것을 보니 六個의 卵이 깨어지면서 六個의 童子가 나오는데 年이 十二이나 됨직하고 容貌가 또한 거룩한지라, 衆이 다 拜賀하였더니 童子들이 날로 岐嶷하여 十餘日이 지남에 身長이 九尺이나 된다. 그 中에서 一人을 奉하여 王을 삼으니 그가 곧 首露王이요, 金盒에서 生하였다 하여 姓을 金이라 하였다. (『輿地勝覽』 金海 龜旨峰 條)  이것은 駕洛國 始祖 金首露(김수로)가 卵에서 生하였다는 말이다.  「解扶婁(해부루)가 薨하고 金蛙(금와)가 嗣하였더니 太白山南 優渤水에서 女子를 얻었다. 그에게 물어본즉 나는 河伯(하백)의 딸로서 諸弟와 함께 出遊하다가 解慕漱(해모수)에게 誘引되어 熊心山의 아래에 있는 鴨綠室 中에서 私한 일이 있었다. 父母께서 아시고 媒한 바 없이 남에게 몸을 許하였다 하여 나를 여기에 謫하였다고 한다. 金蛙(금와)가 異常히 여겨 室中에 幽하니 그에게 日影이 炤하면서 孕胎하여 一卵을 生하였다. 金蛙(금와)가 棄하라고 하여 犬豕에게 던져도 먹지 아니하고 路에 던져도 牛馬가 避하고 野에 던져도 鳥가 도리어 날개로써 덮어주고 金蛙(금와)가 또한 깨치려고 하여도 깨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것을 裹하여 暖處에 두었더니 男子가 그 껍질을 깨치고 나온다 …」(『東國通鑑』 高朱蒙條)  「多婆羅國은 倭國의 東北 千里되는 곳에 있는데 一名은 龍城國이라. 그 國王 含達羅(함달라)가 女國王의 女로써 妃를 삼았더니 娠한지 七年만에 大卵을 生하였다. 王이 말하되 사람으로서 卵을 生하였으니 祥스럽지 못한 일이라, 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女가 帛으로써 그것을 裹하여 櫝中에 넣고 船에 載하여 바다에 띄우면서 祝하되 因緣이 있는 땅에 가서 國家를 成立하라고 하였다. 그것이 辰韓 阿珍浦에 이르매 老嫗가 있어 열고 보니 그 가운데에 小兒가 있다. 取하여 養하더니 壯成함에 미처 風神이 秀朗하고 智識이 過人한지라, 或이 말하되. 아 애는 姓을 알 수 없었는데, 처음 오는 그때에 鵲이 날면서 울었다 하여 거기에서 鳥를 떼어버리고 昔으로써 姓을 삼았으며 또는 櫝을 解하고서 나왔다 하여 그 이름을 脫解라 하였다고 한다. 王이 그의 賢함을 듣고 딸로써 妻를 삼게 하더니 新羅의 第四王으로 되었다.」(『輿地勝覽』 慶州 阿珍浦條)ㄷ, 龍生說.  「作帝建(작제건)이 아버지에게 보이려고 商船을 타고 海中에 이르니 … 一老翁이 와서 절하고 말하되 나는 西海龍王인데 每日 대낮이 되면 老狐가 있어 熾盛光 如來像을 作하고서 空中으로부터 내려온다. … 이 巖上에 앉아서 臃腫經을 외우면 나는 頭痛이 甚하노라. 듣사온즉 郎君이 射에 善하다 하오니 나를 爲하여 害를 除하여 주소서. 作帝建(작제건)이 許諾하였다. … 作帝建(작제건)이 화살을 메워 그놈을 쏘니 果然 老狐라. … 翁이 長女 翥旻義(저민의)로써 그의 妻를 삼고 … 이에 漆船에 七寶와 豚을 싣고 바다에 떠서 문득 岸에 닿으니 곧 昌稜窟前의 江岸이라. 龍女가 四男을 生하였는데 長男은 龍建(용건)이라, 後에 이름을 改하여 王隆(왕륭)이라 하며 字는 文明이라 하니 그가 곧 世祖이었다.」(『高麗史』 第一 世系條)  「度祖가 젊었을 때였다. 꿈에 白龍이 와서 말하되 나는 赤池의 白龍이로다, 黑龍이 나의 있는 데를 빼앗으려고 하니 그대는 나를 爲하여 그놈을 쏘아달라고 한다. 度祖가 그 이튿날에 弓矢를 가지고 池邊에 가니 果然 두 龍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러나 主客을 가릴 수 없어서 그냥 돌아왔더니 그날 밤에 白龍이 또다시 꿈에 와서 말하되 그대가 어째서 쏘지 못하였는가? 두 龍이 서로 싸우는데 黑白을 가릴 수 없어서 쏘지 못하였노라. 明日에는 내가 먼저 올 터이니 그대는 단단히 記憶하라고 한다. 度祖가 아침에 가서 보니 두 龍이 또한 서로 싸우는지라, 뒤에 온 그놈의 허리를 쏘니 피가 흘러서 赤池에 가득히 찬다. 그래 그 못을 射龍淵이라 하였다.」(『輿地勝覽』 慶興 射龍淵條)李朝朝鮮의 太祖가 微時에 지은 三龍詩 : 「瑤樂池中舊日龍, 離淵今作世間龍, 男兒豈是尋當者, 早晩當爲沛澤龍. 」(璿源記)  이것은 王建(왕건)과 李成桂(이성계)가 다 龍孫이라는 말이다.ㄹ, 鷄鳴說.  「大良院君(顯宗)이 年이 十二에 千秋太后의 忌함을 받아 祝髮하고 처음에는 崇敎寺에 있었고 다음에는 三角山 神穴寺에 移寓하여 老僧의 힘으로 太后의 謀害를 여러 번 免하였다. 한번은 꿈에 鷄聲과 砧響을 듣고서 그 夢兆를 術士에게 물어보니 術士가 方言으로써 解釋하되 鷄鳴聲은 「高貴位」요, 砧響은 「御近」이니 마땅히 卽位하실 吉兆로소이다.」(『高麗史』 第一 顯宗條)  「太祖[李成桂(이성계)]가 일찍이 安邊에 寓하였을 때, 꿈에 萬家의 鷄가 一時에 울 때, 破屋에 들어가서 三椽을 負하였다. 문득 깨어나니 곁에 한 老婆가 있는지라, 夢兆를 물으려한즉 老婆가 拒絶하면서 丈夫의 일은 女子의 알 바 아니오니 말씀을 마시고 여기에서 西쪽으로 가시면 雪峰山 土窟中에 異僧[無學(무학)]이 있사오니 그에게 가서 물으소서. 太祖가 그의 말대로 중을 찾아가서 물으니 그 중이 拜賀하면서 解釋하되 鷄鳴聲은 「고귀위」하나니 곧 高貴位요, 三椽을 負한 것은 一脊에 三橫이니 곧 「王」字라, 이것은 至高極貴하여 王位에 오르실 夢兆로소이다.」[崔東洲(최동주)의 『五百年奇譚』]ㅁ, 放溺說.  「寶育(보육)이 일찍이 꿈에 鵠嶺에 올라가서 南쪽을 向하여 오줌을 누니 그것이 溢하여 三韓山川이 變하여 銀바다로 되었다. 明日에 兄 伊帝建(이제건)에게 그 꿈을 이야기하니 伊帝建(이제건)이 말하되 네가 반드시 支天의 柱를 낳을 것이라 하고 그 딸 德周(덕주)를 許하여 妻를 삼게 하였다 … 그 後에 寶育(보육)이 두 딸을 낳으니 둘째로 낳은 딸 辰義(진의)가 美妙하고도 才智가 많았으며 그리고 笄年이 되었었는데, 그 娣가 五冠山 頂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니 그것이 흘러서 天下에 넘치는지라, 깨어나니 꿈이었다. 그 꿈을 辰義(진의)에게 이야기함에 辰義(진의)가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唐의 肅宗皇帝가 潛邸의 때에 山川을 歷覽하여 … 寶育(보육)의 집에 寄宿하다가 그의 두 딸이 다 마음에 들어서 옷이 터진 것을 꿰매달라고 請하였다. … 寶育(보육)이 곧 맏딸을 命하여 들어가라고 하였더니 맏딸은 겨우 문턱을 넘다가 코피가 터져서 도로 나오고 辰義(진의)가 그 代에 들어가서 드디어 枕에 薦하여 그 後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王建(왕건)의 曾祖 作帝建(작제건)이다.」(『高麗史』 第一 世系條)  「獻貞王后 皇甫氏가 景宗이 薨한 뒤에 王輪寺의 南에 있는 私第에 出居하다가 꿈에 鵠嶺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니 그것이 流溢하여 國中이 다 銀바다를 이루었다. 卜者가 그 꿈을 解釋하되 아들을 낳으면 王이 되리라 하니, 后가 웃으면서 내가 이미 寡居한지라, 어떻게 아들을 낳겠느냐고 말하였다. 그 때에 王安宗(왕안종)의 집이 后의 집과 가까우므로 彼此에 來往하다가 孕胎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顯宗이었다.」(『高麗史』 第二 后妃條)  이 위에 쓰인 세 個의 꿈이 서로 어슷비슷한데, 오직 그 結果가 各히 다를 뿐이다. 그런데 辰義(진의)에 對한 事實이 金庾信(김유신)의 누이 金寶姬(김보희)·金文姬(김문희)의 그것과 조금도 틀림이 없다. 만일 다른 點이 있다면 人物만 變換되었을 뿐이다.  위에서 說話가 小說의 原型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였거니와 그런 素朴한 說話에다가 肉을 붙이고, 빛난 衣服을 입히고, 粉도 바르고, 臙脂도 찍어 놓으면 絶世美人과 같은 特種의 神品으로 되나니 그것은 作者의 意匠과 筆致에 달린 것이다. 『春香傳』·『沈淸傳』이 傳說 즉 野談으로부터 된 것인데, 世人의 好評을 가장 크게 얻은 것은 作者의 手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鼈主簿傳』은 龜兎에 對한 寓語에서 나온 것이며, 『두껍傳』·『鼠同知傳』 等은 童話에서 나온 것이다.

    5 조선문학사(제1권) 歌謠

      歌曲과 音樂이 神事로부터 起源하였다는 것은 누구든지 잘 理解할 것이다. 그것이 進化하는 途程에서 有閒階級이 自家의 娛樂에 供하기 爲하여 奴婢로 하여금 그것을 傳習하게 하여 때때로 演奏하였다. 그 後에는 어느덧 그것에 對한 專●가 起하여 奴의 代에는 倡優(廣大)·樂工이, 婢의 代에는 娼妓가 생기는 그 中間에 所謂 「자이」라는 賤稱이 歷史上에 出現되었다.新羅 儒理王의 때, 「辛熱樂에는 舞監 四人, 琴尺 一人, 舞尺 二人, 歌尺 三人을 쓴다.」(『增補文獻備考』 樂考)  新羅 奈解王의 때, 「笳舞에는 舞監 六人, 笳尺 二人, 舞尺 一人을 쓴다.」하였다. (上同)  「尺」은 吏讀로 된 것인데, 우리말로 하면 「자이」란 것이니 近代에까지 水尺을 「무자이」라 한 것이 그 一例이다. 至今으로 말하면 聲樂家·絃樂家라는 榮稱을 받을 만한, 훌륭한 藝術的 한 사람으로 될 터인데, 왜, 소리자이·춤자이·피리자이·거문고자이라는, 그런 賤名을 주었을까? 그것이 本히 奴婢役이었던 거기에 그 原因이 있었겠다. 여기에 對하여는 李朝朝鮮에서 그들은 奴婢와 同一視하여 七般賤役에 落下한 것으로써 說明하는 것이 더욱 좋겠다.  歌謠의 部門에 있어 謠에는 童謠·民謠, 歌에는 打令·詞·別曲·時調로 區分하면, 그 範圍의 안에 어떤 것이든지 다 집어넣을 수 있다.  童謠와 民謠는 拙著 「『通俗文學集』 第一, 第二」에 記入하였음에, 더 煩論하려고 아니하나 地方的 特色을 보이기 爲하여 大槪만 따서 말하겠다.1, 咸鏡道의 謠.ㄱ, 「눈」눈이 온다 눈이 온다, 싸락눈이 솔솔 온다, 하느님의 입쌀곡간, 밑창 빠져 내려오나? 옥황상제 좁쌀무지, 뭉쳐져서 내리는지? 넓고 넓은 산과 들에, 쌀로 한 벌 옷입혔네.ㄴ, 「베짜는 노래」구름 속에 잉아 걸고, 안개 속에 베틀 놓고, 황경나무 바디집에, 튕경나무 부두집에, 자작나무 잉아대에, 문두레로 매꼬리 달아, 평경나무 도투마리, 올려감고 내려감아, 붓끝같은 손끝에, 황둥개같은 북을 쥐고, 올려짱짱 내려짱짱, 한 앞 두 앞 짜고 나니, 정신조차 아득하다. 어이하면 이 베 섶을, 어느 제나 다 뗄소냐? 그렁저렁 짜서 내니, 열대자이 되었더라, 청색나는 참대자로, 요리조리 말가내어, 반폭으로 진을 내고, 반폭으로 폭을 달아, 스침으로 해어 내고, 쌍침으로 해어 내어, 자지나무에 걸어 놓고, 올라가는 향인들아! 내려가는 구란들아! 내 치마나 구경하소.이 두 개의 노래에는 어느 地方보다 기후가 寒冷하여 눈이 먼저 오고, 그 特産物은 北布인 것을 알게 된다.2, 平安道의 謠.ㄱ, 「가신 님」서러워마라. 죽은 풀이, 비가 온들 개싹하리, 님 그리워 죽은 무덤, 님이 온들 개싹하랴?ㄴ, 「홍수(洪水)」떠내려간다 떠내려간다, 궐굴처녀 떠내려간다, 처자는 잡아 낚아채고, 누이는 잡아 밀쳐넣네, 고초당초 맵다더니, 올아바니 쓰리고나, 처자골은 골골이요, 누이나 골은 한골이다, 전반같은 요내 댕기, 물결마다 솟으르고, 내나 신던 꼬까신은, 모애등에 쌔왔고나, 내나 입던 깨끼적삼, 혼백이나 불러주소, 내나 먹던 오기바리, 상식이나 차려주소.이 두 首는 龍岡民謠인데, 「궐굴」은 龍月面 東里요, 「깨끼적삼」은 上單衣요, 「오기바리」는 食器다.이 노래에서는 女子의 可憐한 신세를 同情할 수 있는데, 愁心歌와 對照하여 보는 것이 좋다.3, 黃海道의 謠.ㄱ, 「가뭄에」비야 비야 오너라, 서울 장구 쳐주마, 빨리빨리 오너라, 어서어서 오너라, 이팝이 온다, 조팝이 온다.ㄴ, 「장마에」비야비야 오지마라, 서울 장구 쳐주마, 유월 장마 걷어지고, 칠월 장마 지기 전에, 고모집으로 가자고, 벼르고 별렀더니, 육칠월 그늘 장마, 속상해서 죽겠네.이 노래에서는 가뭄과 장마가 農家의 아이들에게까지도 큰 근심으로 되는 것을 알게 된다.4, 畿湖의 謠.ㄱ. 어우 와라 두우 와라, 진질나비 꼬꾸와라, 찌아찌아 사두찌아, 한 손으로 받아봐라, 두 손으로 받아봐라, 고년 고년 잘도 죽었다, 소콤의 밥에 잘도 죽었다.ㄴ.아버지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 우리 형제 죽거들랑, 앞동산에도 묻지 말고, 뒷동산에도 묻지 말고, 고개고개 넘어가서, 가지 밑에 묻어주소, 가지 한 쌍 열리거든, 맛보지도 말고, 따지도 말고, 대궐산에 치성바치오. 시집보다 더하오리까?이 노래에서는 시집살이의 쓰라린 것을 感觸하게 된다.5, 江原道의 謠.ㄱ, 「열매노래」둘러주게 둘러주게, 요내 열매 둘러주게, 요내 열매 둘러주면 준치자반 먹는다네, 준치자반 아니 먹는, 신계곡산 중이 살까? 요내 몸은 백옥이라, 부처님의 제자라네.ㄴ, 「게으른 년」오조밥에 열무김치, 잔뜩 먹고 잠자는 년, 팔을 잘라 흙손하고, 살을 베어 개를 준다.이 노래에서는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먹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 表明되었다.6, 慶尙道의 謠.ㄱ, 「사승노래」달은 벌써 다 졌는데, 닭은 어이 또 우는가? 잔말 많은 시어머니, 이내 잠을 또 깨우네, 진보·청송 긴삼가리, 영해·영덕 관솔가지, 너랑 나랑 웬 정 많아, 아침저녁 따라든다, 새벽 길삼 지기는 년, 사발옷만 입더란다.ㄴ, 「곱은 새」새야새야 곱은 새야, 삼밭에 가 앉지 마라, 엵둑씨를 네 먹으면, 내 옷자락 끊어진다.새야새야 곱은 새야, 조이씨를 쫓지 마라, 조이씨를 네 먹으면, 내 밥술이 떨어진다.새야새야 곱은 새야, 녹두꽃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  첫째의 것에서는 길쌈하는 여자들의 困窮, 둘째의 것에서는 沙里花에서 보던 賦斂의 煩重, 豪强의 攘奪을 回想하게 된다.7, 全羅道의 謠.ㄱ, 「밀마질할 때의 노래」離虛島러라 離虛島러라, 離虛離虛 離虛島러라, 離虛島 가면 나 눈물난다, 이허말은 말아서 가라, 울며 가면 남이나 웃나, 大路 한길 노래로 가라, 갈 때 보니 ●●●가도, 돌아올 때 花旃이러라.이어도는 濟州人의 理想鄕인데, 女子들이 흔히 부른다.ㄴ, 「부모생각」물엣바늘 좀좀이 주워, 錦山비단 주머니에 넣어, 부모사려 서울을 가니, 사잔 이는 많더라마는, 부모 같은 한 분이 없다.  첫째의 것에서는 搾取에 시달린 人民이 어떤 理想鄕을 夢想하는 것, 둘째의 것에서는 부모는 한번 잃으면 다시 얻어 볼 수 없다는 人子의 情感을 보게 된다.  이제부터는 歌曲에 있어 그 構成의 內容을 正面 또는 側面으로 分晳하여 보자.1, 地方的 特色을 가진 것.  咸鏡道의 「애원성」, 平安道의 「수심가」, 黃海道의 「난봉가」, 畿湖의 「제비가」, 全羅道의 「육자배기」, 慶尙道의 「단가」, 江原道의 「아지랑이」.2, 小說의 影響을 받은 것.  「九雲夢」으로부터 「黃鷄詞」에의 「한 곳을 들어가니, 육관대사 제자 성진이 八仙女를 희롱한다. 어허야 아자, 좋을시고」가 되었다.『春香傳』으로부터 「小春香歌」가 나오고, 또는 「오호打令」에의 「옥사장아 문 열어라, 옥중 갇힌 춘향이, 내가 잠깐 보련다.」와 「개구리 打令」에의 「남원옥중 춘향이는 이도령 오기만 기다려」가 되었다.『토끼傳(鼈主簿)』으로부터 「토끼打令」이 나오고, 또는 「육자배기」에의 「백운청산 놀던 토끼 동해유수 흐르는 물에 목욕차로만 내려를 갔다, 우연히 별주부 따라 수궁에 완경 갈까나」가 되었다.  『沈淸傳』으로부터 「성주풀이」에의 「동북간 지어내니 왕소군의 넋도 아니요, 공양미 삼백 석에 어둔 눈을 뜬단 말가. 심낭자의 넋이로다.」가 되었다.  『興夫傳(燕의 脚)』으로부터 「제비歌」·「楊柳歌」·「박타령」이 되었다.  『三國衍義』로부터 「原本孔明歌」·「別赤壁歌」·「華容道」 또는 郭輿(곽여)의 時調 二首가 되었다.3, 儒家의 道德觀으로 된 것.  「井邑詞」·「鵄述嶺曲」·「居士戀」에서는 兩性愛에서 흘러나오는 戀夫의 熱情을 보게 된다.「井邑詞」의 一節 : 「진 데를 디디올세라, 내 가는데 저무를세라.」鄭叙(정서)의 「苽亭歌」, 鄭澈(정철)의 「思美人曲」, 金春澤(김춘택)의 「續思美人曲」에서는 封建時代의 惟一한 道德인 戀君의 丹忱을 보게 된다.「苽亭歌」의 一節 : 「내 님을 그리워 우이다소니, 산접동새와 이슷하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한들, 殘月曉星이 알으시리다.」  鄭夢周(정몽주)의 時調에서는 國勢의 岌嶪에 對하여 百死不變하는 臣子의 丹心을 보게 된다.「이 몸이 죽어죽어, 一百番 고쳐 죽어, 白骨이 塵土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 임 向한 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朴仁老(박인로)의 時調에서는 雙親의 늙으심을 애처롭게 생각하는 人子의 臣情을 보게 된다.「萬鈞을 늘여내어, 길게길게 노를 꼬아, 九萬里 長天에 가는 해를 잡아매어, 北堂에 鶴髮雙親을, 더디 늙게 하리라.」  成三問(성삼문)의 時調에서는 二君을 不事하는 節士의 志槪를 보게 된다.「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蓬萊山 第一峰에, 落落長松 되었다가, 白雪이 滿乾坤할제, 獨也靑靑하리라.」  崔纉(최찬)의 「耘田歌」에서는 李爾瞻(이이첨) 等 奸臣의 誤國病民에 對한 憂憤心을 보게 된다.「耘田歌」 第一曲.「남산에 심은 팥이, 씨는 어이 드물었던고, 저물도록 홋매다가, 호미더러 이르는 말이, 풀이야 성하다마는, 너를 믿고 매노라.」第二曲.「호미 대답하되, 주인님 내말 듣소, 팥을 심으거던, 씨를 배우 못하실는가, 뿌리 깊고 수많은 풀을, 낸들 어이하리.」4, 社會相의 反映으로 된 것.  「큰아기 打令」에서는 各 地方 女子의 職業別을 보게 된다.  「큰아기 打令」의 一節 : 「애오개 큰아기는 파망건장사로 나간다. 에 - 인모앞살 전주당에 공단 뒤막이 제격이라.」  「老處女歌」에서는 父權獨裁와 門閥婚姻에 對한 늙은 處女의 詛呪를 보게 된다.「老處女歌」의 一節 : 「가난한 좀양반이, 양반인 체 된 체하고 처사가 不敏하여 교만을 일삼으니 다만 한 딸 늙어간다.」  「寡婦歌」에서는 婦女의 再嫁를 禁하는 不合理의 制度에 對한 靑春 홀과부의 哀怨을 보게 된다.「과부歌」의 一節 : 「이 간장 둘 데 없어, 친구 벗을 찾아가니, 이 집도 가장 있고, 저 집도 남편 있네, 금슬을 잊자하고, 削髮爲僧하자 하니, 시집도 양반이오, 내 집도 품관이라, 가문을 헤아리니, 중 되기도 어려워라, 아마도 모진 인생, 못 죽어 원수로다.」  「장타령」에서는 搾取制度에서의 産物인 乞人의 慘狀을 보게 된다.  「장타령」의 一節 : 「왔소! 설이가, 설이가, 설이가 각설이, 얻어먹는 각설이, 죽지 않고 또 왔소, 무슨 타령으로 들어가나, 장타령으로 들어간다, 오르며 내리며 사다리장, 오르내리다 못보고 …」  「풀무타령」에서는 광산노동자의 생활 全面을 보게 된다.「풀무타령」의 一節 : 「이번 성녕 잘되면, 환고향을 한다.」「농부歌」에서는 天下의 大本인 농민의 情景을 보게 된다.「농부가」의 一節 : 「여봐라 농부야 말 들어, 여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거두어, 부모처자를 봉양하세. 에헤 에에 헤에로 상사지야!」  「배떠나기」에서는 水路風波에 決死冒險하는 船人의 生活을 보게 된다.「배떠나기」의 一節 : 「천생만민에 필수 기즉으로 벌어먹는 곬이 각각 달라, 우리는 구태여 선인이 되어, 먹는 밥은 使者밥이요, 자는 잠은 칠성판이라 하길래, 옛말삼아 들었더니, 이번 길 烟波萬里, 수로창파로 불려를 갈 제, 우리도 언제나 부모 동생을 또다시 만날까?지와자 에헤에 어기야-하 지야차 어허 어기야차 좋다.」  「桃花타령」에서는 景福宮 役事의 費用不足으로 新貨通用의 强迫令에서 人民이 얼마나 困苦하던 것을 보게 된다.「桃花타령」의 一節 : 「뒷마당에 여사당 놀고, 앞마당에 남사당 논다, 사랑궁 속에서 골가보 놀아라, 피천을 쓰라고 관자간 내렸다, 당백전 쓰라고 별관자 내렸다, 에헤 도화로구나.」  다음으로는 歌曲 그것을 다시 分類하여 次第로 論擧할 터인데, 그 속에는 打鈴·詞·別曲·時調의 네 가지가 包含되었다.

    6 조선문학사(제1권) 小說

      過去의 우리 小說은 普通으로 傳·錄·記·談·話 等의 名目을 띠고서 그 思想을 表現하였다. 그래서 漢字 그대로는 傳記冊이라고 하면서도 閭巷間에서는 흔히 「이야기책」이라 하나니, 그것이 이야기로 된 것은 漢人의 記錄에서 보게 된다.  「小說은 街談巷語·塗聽途說者의 所爲라」하였다. [班孟堅(반맹견)]  「元의 以前에는 小說이 極히 적었다. 그 있었다는 것도 거의 다 神仙變易에 지나지 못하였다. 小說家는 周의 稗官者流에서 나왔는데, 宋世의 『四庫總目』에는 그것을 一派로 하여 雜事의 敍述, 異聞의 記錄, 瑣談의 綴輯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元代에 降하여는 新思想이 外種人과 함께 中國本部에 들어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好奇心을 興起하게 하여 그 새로운 奇事異聞을 때때로 記錄하되 마침내 俗語로써 그 事物을 演繹하는 거기에까지 이르게 하였나니, 그 中에 가장 著名한 作品은 施耐菴(시내암)의 『水滸傳』이다. 그 結構가 雄渾하고 文字가 巧妙하여 千古奇書의 好評을 얻으면서 明代의 『西遊記』·『後水滸傳』·『三國衍義』의 先河로 되었다.」[顧康伯(고강백)의 『中國文化史』]  이렇게 說話를 文章으로써 表現하였다 하여 그 이름을 小說이라 하였는데, 그것이 奇書로 되고 못되는 것은 作家의 才能에 달리었다. 그러나 文章으로서는 제 아무리 名著傑作이라도 現在 또는 將來의 社會生活에 어떤 好影響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 價値도 없는 廢物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天君衍義』의 作家 鄭泰齊(정태제)가  「近來에 小說雜家가 많이 流行하나 鬼神怪誕의 이야기가 아니면 男女期會의 이야기뿐이라.」고 一歎을 發한 것도 그럴듯한 일이요;  『星湖僿說』의 作家 李瀷(이익)이「『水滸傳』의 作者는 반드시 陰賊의 마음이 있다.」고 冷評을 加한 것도 그럴듯한 일이요;  『申金夫婦傳』의 作家 李德懋(이덕무)가  「演義小說은 奸譎과 淫亂을 가르치는 것이니 눈에 닿지도 못할 것이라, 누구든지 子弟로 하여금 보지 않도록 단단히 嚴禁하라.」고 痛論을 下한 것도 그럴듯한 일이다.  그래 그런지, 우리의 小說은 그 大部分이 儒家의 倫理道德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佛敎를 極히 崇奉하던 高麗時代에도 國治에 있어는 儒敎로써 根本을 삼았는데, 하물며 儒敎의 尊尙으로써 惟一의 國是로 한 李朝朝鮮의 時代에는 勿論, 그리되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小說이란 名稱을 줄 만한 作品은 壬辰亂(임진왜란, 1905) 後에 비로소 많이 있게 되었나니, 그것들을 儒家의 倫理道德觀으로써 大旨를 든다면 이러할 것이다.  『沈淸傳』은 孝.  『興夫傳』은 悌.  『林慶業傳』은 忠.  『玉丹春傳』은 信.  『天君衍義』는 仁.  『玉娘子傳』은 義.  『春香傳』은 節.  花史는 政治的 得失을 批評한 것이오.  『洪吉童傳』은 『嫡庶差別』의 不合理를 檢討한 것이오.  『九雲夢』은 富貴는 一場春夢에 지나지 못하다는 것을 暗示한 것이오.  『南征記』는 아시아式인 一夫多妻制의 弊害를 戒한 것이오.  『薔花紅蓮傳』과 『콩쥐팥쥐』는 繼母의 惡을 懲한 것이오.  『鼠同知傳』은 背恩忘德을 罵한 것이오.  『장끼傳』은 貪慾을 戒한 것이오.  『두껍傳』은 鄕黨에서는 年齒의 尊尙을 明示하였다.  위에 列擧한 小說에서 革命性의 流露된 作品을 찾는다면 첫째로 『洪吉童傳』을 指摘하여야 되겠다. 作者 許筠(허균)은 洪吉童(홍길동)으로써 登庸의 길을 잃어버린, 심지어 家庭에서까지 容納을 받지 못한 庶子들의 代表的 人物로 하여 活貧黨을 組織하고 特權階級을 敵對하다가 乃終에는 嫡庶의 差別이 없는 硉島國을 創建하는데에까지 論及하였다. 그런 高大한 理想이 비록 事實化는 못되었을 망정 그 가운데에 革命의 暗流가 含有되었던 것은 숨기지 못할 일이었다. 말할 것 같으면  朴應犀(박응서)[思菴(사암 박순)의 庶子], 徐羊甲(서양갑)[牧使 徐益(서익)의 庶子], 沈友英(심우영)[沈銓(심전)의 庶子], 李耕俊(이경준)[兵使 李濟臣(이제신)의 庶子], 朴致義(박치의)[朴忠侃(박충간)의 庶子], 金慶孫(김경손)[金沙溪(사계 김장생)의 庶弟] 等이 仕路의 通함을 聯名疏請하였으나 許하지 않음을 憤慨하여 驪江上을 根據地로 하고 一室에 同居하면서 或은 竹林七賢으로 自處하며, 或은 桃園結義를 擬仿하며, 一方面으로는 海州에 가서 鹽商도 經營하며, 富豪 李承崇(이승숭)의 집도 剽掠하며, 嶺南에 가서 銀商을 쳐서 죽이고 銀 六七百兩을 빼앗기도 하고, 다른 方面으로는 兵糧을 準備하며, 賄賂로써 朝廷에 있는 文武官을 買收하여 장차 임금을 들어 내리려고 하였다. [『光海日記』, 『燃藜室記述』을 引證한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서]  이것이 곧 『洪吉童傳』의 內容이니, 許筠(허균)은 그들의 同情者로만 된 것이 아니요, 事實上 主謀者로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對하여는  『松泉筆譚』, 「許筠(허균)이 『洪吉童傳』을 지어서 『水滸傳』에 擬하고 그 徒로 더불어 몸소 그 行을 蹈하다가 一村이 虀粉이라」하고;   『靑野謾輯』. 「許筠(허균)이 金悌男(김제남)으로 더불어 通謀하고 遷都의 議를 主張하여 讖書本文에 없는 말을 添入하였나니, 一漢·二河·三江·四海가 곧 그것이라. 어쨌든 一國의 사람으로 하여금 騷擾하여 亂을 想하게 하고서 그것을 따라 自己의 뜻하는 바를 試圖하려 하였다」는 이 두 個의 記錄을 보아도 알 수 있으며 이보다도 그가 光海 十年 八月 二十四日에 反逆의 罪名을 쓰고서 四人의 同志와 함께 磔刑을 當하였다는 그것이 더 明白히 말하여 준다.  둘째로는 『春香傳』을 指摘할 터인데, 이것이 『洪吉童傳』과 같이 革命性으로써 一貫된 作品은 아니라 할지라도, 다만 春香(성춘향)에게 同情을 表하는 附帶條件에 지나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全羅道 五十三州의 머슴들이 南原府使를 膺懲하려고 사발通文을 돌렸다는 것만은 階級으로 보아 그 全篇에서의 特色이 아니라고 못하겠다. 그 多面多樣한 事實의 가운데에서, 마치 沈沈漆夜에 번득거린 一點螢火에 지나지 못한 것이로되, 다른 小說에서는 그만한 것도 얻을 수 없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春香傳』의 光彩로 보게 된다.ㄱ, 對立的 小說.  위에서도 말하였거니와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의 後에 小說作家가 漸次로 興起하여 肅宗 - 正祖까지의 時代를 軟文藝의 黃金時代로 이루게 한 것은 明末淸初에 輩出한 小說雜家의 影響을 充分히 받은 까닭이라 하노니, 그래서 우리에게 模擬作으로 볼만한, 그런 作品도 勿論 있으리라고 推斷하겠지마는, 차라리 對立으로 보는 것이 妥當하며 그 實은 對立할 만한 價値가 있다.  金時習(김시습)의 『金鰲新話』는 瞿佑(구우)의 『剪燈新話』를 對立한 것이요;  許筠(허균)의 『洪吉童傳』은 施耐菴(시내암)의 『水滸傳』을 對立한 것이요;  愼後聃(신후담)의 『續搜神記』는 晋 干寶(간보)의 『搜神記』를 對立한 것이요;  玉蓮子의 『玉樓夢』은 曺雪芹(조설근)의 『紅樓夢』을 對立한 것이요;  『春香傳』·『沈淸傳』은 淸代의 戱曲 즉, 洪昉思(홍방사)의 『長生殿傳奇』와 孔尙任(공상임)의 『桃花扇傳奇』를 對立한 것이요;  朴泰錫(박태석)의 『後唐遺事』는 羅貫中(나관중)氏의 『三國衍義』를 對立한 것이다.ㄴ, 儒佛思想의 混合體.  『金犢傳』·『王郞返魂傳』·『白雲居士傳』 等은 純全히 佛系에 屬한 것이나, 儒系의 作品으로 보게 되는 『九雲夢』·『沈淸傳』·『翟成義傳』 等은 佛敎의 影響을 무던히 感受한 듯하다.ㄷ, 小說의 叢書.  『金鰲新話』는 『萬福寺樗蒲記』·『李生窺墻傳』·『醉遊浮碧樓記』·『南炎部州志』·『龍宮赴宴錄』 等의 五種小說을 收入한 叢書요;  『熱河日記』는 『許生傳』·『虎叱文』·『兩班傳』·『閔翁傳』·『馬馹傳』·『穢德傳』·『金神仙傳』·『廣文傳』·『虞裳傳』 等의 九種小說을 收入한 叢書요;  『三說記』는 「三士誤入黃泉記」·「五虎大將記」·「西楚覇王記」·「三子遠征記」·「黃州牧使戒」·「老處女歌」 等의 六種小說을 收入한 叢書이다.  이 밖에 紀傳體로 되어진 『三國史記』·『三國遺事』·『高麗史』와 같은 것도 小說의 叢書로 볼 수 있으며, 李齊賢(이제현)의 『孝行錄』과 世宗朝의 『三綱行實』로부터 『名臣錄』 十二卷, 『名臣言行錄』 五十卷, 『俎豆錄』 二卷, 『嶺南人物考』 十卷 또는 『東國名賢錄』·『東國名將傳』·『國朝人物志』와 같은 것도 小說의 叢書로 보게 된다.ㄹ, 諺文小說과 漢文小說.  나는 正音字가 出世하기 前의 小說은 말하려고 아니한다. 그 當時에는 邦語를 그대로 적을 만한 우리의 表音字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正音字가 頒布되면서 三綱行實로부터 至於 兵書·佛經·杜詩까지 諺譯한 그 後의 漢文小說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보다도 먼저 論及할 것은 諺文이란 그것이니, 왜 正音字란 그 名稱을 그대로 使用하지 아니하고 구태여 諺文이라고 하였을까? 自立性과 自尊心이 薄弱한 朝鮮사람에게, 이웃집 팥죽이 더 맛있다는 어린 애의 모양으로 남의 것이라면 盲目的으로 欽慕하는 朝鮮사람에게,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一定한 方向도 없이, 한 개가 짖으면 그 소리를 짖는 뭇 개와 같이, 無條件으로 왁 떠들기를 좋아하는 朝鮮사람에게, 그 中에도 더욱 漢人의 것은 그 汚穢物까지도 향기롭게 여길 만큼 慕華主義에 中毒되었던 朝鮮사람에게 무슨 論責할 바가 있으리오마는, 나의 文字는 諺文이라 하고, 漢人의 文字는 眞書라 한 거기에 對하여는 大喝一聲으로 痛棒을 加하면서 論罪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國粹主義者도 같고, 外國文化를 排斥하는 것도 같으나 實狀 그런 것은 아니다. 朝鮮사람은 朝鮮사람답게 남의 것을 消化하지 못하고, 통째로 먹었다가 통째로 게우면서 나의 것은 大體로 蔑視하였다는 말이다.  李朝(朝鮮)에 이르러는 學者는 勿論이려니와 詩人文士까지도 性理學의 旋渦中에 모두 捲入되어 그 以外의 것은 어떤 哲理와 學說이든지 다 異端이요, 邪說이라 하여, 그들의 尊重視하는 漢文이로되 小說의 이름을 가진 漢文에 있어는 보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도리어 切禁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小說에 對한 그들의 觀察을 말하건대  「疎齋集」에는 「明末 小說의 盛行은 또한 國變의 하나이니 … 足히 써 天下風俗을 어지럽게 할지라.」하였고;  「澤堂雜著」에는 「演史는 兒戱文字와 같으니 類書에 採入하면 文章의 士가 알지 못하고 混用할지라, 演史가 나서 正史를 汨亂하게 하며, 男女의 일도 淫媒한 것이 많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觀察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西洋에도 또한 있었나니  古代文華의 淵叢이라고 할 만한 法國(프랑스) 翰林院에서 오히려 小說은 無智한 農民의 玩弄物이라 하여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러시아의 大作家 이반 투르게네프가 名作을 連出하여 盛名을 文壇에 擅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런 著作에는 絶筆하라고 數次 切願하였다고 한다.  아마 東西를 勿論하고 그 觀察은 時代風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도 한때요, 저것도 한때라, 明·淸兩代의 小說을 耽讀하는 人士가 漸漸 增加되면서 退溪(퇴계 이황)門人들의 손에 草穚되었던 『語錄解』가 南二星(남이성)의 增補를 거치어서 刊行되며, 『水滸傳』·『西遊記』·『西廂記』 等에 실린 語錄 그 他를 收集한 作者未詳의 『小說語錄解』와 「洛閩語錄」·「華漢語錄」·「傳奇語錄」 等을 編入한 李義鳳(이의봉)의 『古今譯林』이 世上에 나오게 되었다. 그런 事態에 依하여 士子 中에서 小說作家가 많이 나왔는데, 말하자면 위에서 列擧한 明·淸小說과의 對立的 名著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環境의 支配를 받지 않을 수 없는 士子들인지라, 小說家란 그 名稱을 羞恥로 하여 흔히는 匿名作을 내어놓았나니, 이것이 우리 小說에서 作者未詳이라는 歎息을 發하게 된 까닭이겠다.  漢文小說에 對한 그것은 이만치서 끊고, 다음으로는 諺文小說을 말할 터인데, 여기에 먼저 論擧할 것은 諺文을 內書라 한 그것이다. 內라는 것은 闕內에 있어는 宮女를 內人이라 하고, 家內에 있어는 婦人을 內子라고 稱하는 거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보니까, 諺文은 內人이나, 內子의 指稱을 받는 婦女들의 글이라 하여 漢學界의 人士들이 內書라는 特別名詞를 許與하였다는 것이 分明히 보이나니, 이보다 더 깊은 解釋은 아무나 要求하지 않을 것이다. 諺文은 이러한 賤待를 받았다. 여기에 對하여는 西浦(서포 김만중) 作의 諺文小說 『九雲夢』·『南征記』를 北軒(북헌 김춘택)이 일부러 漢譯한 그것으로만 證明하여도 넉넉할 것이다.  諺文小說은 女子의 愛讀品이었다. 그 밖에 또 愛讀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漢學에 素昧한 農民群衆과 市井人뿐이었다. 士族으로 自處하는 家庭에서는 女子에게 世宗朝의 諺解한 『三綱行實』이나 中宗朝의 諺譯한 劉向(유향) 「烈女傳」이나, 그렇지 않으면 班昭(반소)의 『女誡七篇』을 읽게 할 뿐이요, 小說은 許諾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女子들도 小說을 즐겨 하였다. 特히 空房에 獨守하는 內人, 內醫院·惠民署의 醫女, 工曹 尙衣院의 針線婢 等은 空然히 늙어가는 靑春의 愛情을 小說에 붙이고 기나긴 여름날, 겨울밤을 보내고 또 보내고 있었다. 諺文의 書法에 宮體란 것이 特히 생기게 된 것도 이런 形便에서 나왔나니, 그 當時에는 漢文小說의 讀者와 諺文小說의 讀者는 이러한 分野에 各히 處하고 있었다.

    7 조선문학사(제1권) 演戱

      現在에 이른바 演劇이 우리의 말로는 「놀음」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古代記錄에는 戱라거나 或은 伎라거나 그렇게 두 가지의 名稱이 幷行하고 있었다. 그러나 劇으로 指稱한 자취도 있었나니, 『高麗史』를 보게 되면  西南京 巡幸回駕 奉迎儀仗條에는「雜劇伎는 一百六十人으로 하여 左右에 分한다.」하였고;  法駕儀仗條에는「雜伎 一部는 四十人으로 하여 左右에 分한다.」하였다.  이 두 個의 記事를 等閒히 본다면 雜劇伎와 雜伎가 判異한 듯하나 그 內容을 파본다면 劇과 伎가 똑같은 意味를 가졌나니, 雜劇의 아래에 「伎」를 더 添付한 것은 慣用記法에 依하여 語尾를 統一함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곱씹어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그 前에 劇이란 말이 있었다는 그것이다. 그 名稱이 이와 같이 一定하지 못하다가, 李朝 明宗의 때에 이르러서야 演戱라는 名稱이 完全히 두드러지게 成立되었다. 그 演戱는 「都目政事」라는 例題下에서 興行되었는데, 그 動機와 內容을 一般에게 알리기 爲하여 아래에 紹介한다.  明宗이 일찍이 편하지 못한 中에 계심에, 群臣은 그것을 크게 걱정하면서 아무거나 그의 心神을 즐겁게 할 양으로 倡優를 불러서 여러 가지의 戱伎를 올리었다. 그러나 明宗은 한 번도 웃으시지 않았다. 그래서 倡優들은 「都目政事」의 演戱를 놀려고 明宗에게 請하여 許諾을 마침내 받았다. 그리하여 倡優 中의 하나는 兵判이 되고 다른 하나는 吏判이 되어 자리를 定하고 擬注에 着手하였다.吏判. (兵判을 보면서) 大監 !兵判. (머리 건떡 들면서) 예, 말씀하시오 !吏判. 아모는 武弁의 名族이요, 내 집에 긴한 門客인데, 그래서 이번에 守令으로 擬注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兵判. 나는 그 사람이 大監집 食口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시면 擬注하시지요.吏判. 아니 그의 所願이 邊地履歷이라 하는 까닭에 그만두려고 합니다.兵判. 네, 그러세요, 邊地履歷이 오히려 늦었습니다 그려.吏判. (히죽이 웃으면서) 글쎄 말입니다.兵判. 그러시면 僉使로 擬注하는 것이 어떨까요?吏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兵判. 그의 姓名을 都目에 적는다. (그리고 吏判을 보면서) 大監 !吏判. 무슨 말씀이오?兵判. 나는 사위 한 사람이 있는데,吏判. 아무란 말씀입니까?兵判. 네! 그렇습니다.吏判. 武弁에 적당하시면 武職에 擬注하시지요.兵判. 아니올시다, 體質이 弱하여 武弁에 可合지 못한 거요.吏判. 그러시면 文官에 擬注하는 것이 어떨까요?兵判. 그러는 것도 좋습니다마는 그가 詞翰에 서툴러서.吏判. 아따, 別 말씀 다 하십니다그려! 如干 좀 서투른 데야 꺼릴 것이 무업니까?兵判. 그래도 그럴 수가 있습니까?吏判. 그러시면 蔭職에 可堪할 듯합니다.兵判. 大監이 그렇게 하시니 말이지, 나도 蔭職이 可堪하다고 생각합니다.吏判. 齋郞에 擬注하는 것이 어떨까요?兵判. 좋습니다.吏判. 그의 姓名을 都目에 적는다.  이렇게 換手하는 일을 낱낱이 形容하니 明宗이 비로소 크게 웃었다고 한다. [崔東洲(최동주)의 『五百年奇譚』]  이것은 그 當時의 政事가 어떠하였다는 것을 諷刺的 또는 批評的으로 赤裸裸하게 暴露하였나니, 생각건대 明宗의 웃음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웃은 웃음이겠다. 내가 새삼스럽게 이 演戱를 例擧한 것은 그 本意가 演戱란 그 名稱의 생겨진 端緖를 摘拔하려는 거기에만 있을 뿐 아니라, 또는 封建李朝의 政治가 그렇게 腐敗하였다는 一面影을 表露하려는 거기에만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戱本은 그 構成의 體裁와 그 表現의 形式이 大槪 이러하다는 것을 보이려는 거기에 더욱 큰 意味가 있다.ㄱ, 外國으로서 輸入한 것.  우리가 古代로부터 漢族과의 文化上 交換이 서로 많았다는 것은 더 贅論하려고 아니한다. 여기에 主로 말하려는 것은 西域의 文化를 어떻게 輸入한 데에 關한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演戱가 西域의 影響을 直接 또는 間接으로 感受한 것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近來에 發掘되어가는 高句麗 古墳 中의 壁畵에 나타난 意匠과 手法 또 그 壙戶, 玄室의 構成을 보고서, 그것은 確實히 바구다리아國으로부터 간다라(犍陀羅)에 流入한 印度-希臘(그리스)式을 取法하였다 하여, 벌써 高句麗의 때에 西域과의 交通이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다 證明하게 된다. 간다라는 公歷 二三世紀頃에 지금 波斯(페르시아)의 東部로부터 中央아시아와 印度까지를 包括한 大國이었나니, 그 當時에는 東西文物의 湊合地이었었다. 그러면 그 文物을 어떻게 輸入하였을까? 中央아시아로 來往하는 求法僧侶의 손으로부터, 자세히 말한다면 十七年 동안에 西域의 百三十餘國을 두루 歷踏하고 돌아와서 『西域記』를 지었다는 唐의 玄奘(현장)과 伴行한 阿離耶跋摩(아리야발마 新羅僧), 또는 간다라 山茶寺에 淹留하던 惠輪(혜륜 新羅僧), 公歷 五百二十九年에 航路로서 中印度에 轉至하여 律部를 攻究하고 돌아와서 律宗의 祖로 된 謙益(겸익 百濟僧), 山東省의 海路로서 天竺(인도)에 들어가서 五天을 歷涉하고 公歷 七百二十七年에 本國으로 回還하여 『往五天竺傳』 三卷을 著成한 慧超(혜초)三藏(新羅僧)과 같은, 그런 高僧들의 손으로부터 그 文物이 齎傳되었겠다.  우리의 僧侶만 그렇게 西域으로 來往한 것이 아니라, 西域의 僧侶도 우리나라에 來往한 일이 또한 적지 않게 있었다. 記錄上에 드러난 것만 하여도 謙益(겸익)을 따라와서 律部를 共譯한 中印度의 倍達多(배달다)三藏, 新羅의 智異山 大華嚴寺를 開創한 烟起(연기)三藏, 安弘(안홍)法師를 隨來하여 皇龍寺에 住居하던 烏長國의 毗摩羅(비마라)眞諦三藏·農伽陀(농가타)三藏, 摩豆羅國의 佛陀僧伽(불타승가)三藏 等이 있었으며, 高麗에 이르러는 太祖 二十一年에 西天竺(서인도)의 僧 弘梵(홍범)이 來到함에, 法駕로써 迎接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면 그들에게서도 西域의 文化를 또한 吸收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 또 말할 것은 아라비아의 有名한 地理學家 이븐 코트다르바의 撰輯한 『天下道路郡國志』에 적힌 新羅의 事情이다. 그 事情의 가운데에는 「이 나라에는 黃金의 産出이 많은 것으로 著名하며 兼하여 風土가 佳適하고, 物産이 富饒하므로 그 땅에 들어간 西國商人은 樂하여 돌아가기를 잊어버린다」하여 商人의 來往을 指明하였는데, 우리의 記錄으로는 高麗의 初期에 그런 것을 비로소 보게 되었다.  顯宗 十五年 九月에 「大食國(今의 아라비아)의 悅羅慈(열라자) 等 一百人이 와서 方物을 드리었다」하고 (『高麗史』 第一, 顯宗條)靖宗 六年 十一月에 「大食國 宋商 保羅盖(보라개) 等이 와서 水銀·龍齒·占城香·沒藥·大蘇木 等을 드리었다」하였다. (『高麗史』 第一, 靖宗條)  以上의 一般記錄은 彼我의 僧俗이 或은 佛法으로 或은 商利로 來往하던 事實의 一端을 說明하여 준 것이다. 그 까닭에 다른 藝術方面에서도 그러하였거니와 特히 演戱에 있어는 西域의 遺韻이 더 顯著히 보인다.  金克己(김극기) 詩에 실린 五技 中의 「金丸·大面·狻猊·束毒」. (『東國輿地勝覽』 慶州條)  法駕儀仗條에 「安國伎 一部는 四十人, 高昌伎 一部는 十六人, 天竺伎 一部는 十八人이라」하였다. (『高麗史』 第二)  太祖 元年에 있은 八關會儀條에 「… 그 四仙樂部에 龍·鳳·象·馬·車·船은 다 新羅의 故事라」하였다. (『高麗史』 第二)  「狻猊戱」와 「象戱」는 波斯(페르시아) 或은 아라비아로부터 分明히 들어왔을 것이다. 金克己(김극기)는 「狻猊」에 對하여서만 「遠涉流沙萬里來」의 詩로써 그 出處를 證明하였으나, 象도 勿論, 그 證明에 添付하여야 된다. 어째 그러냐 하면 象 그것도 狻猊와 한 가지로 그런 地方에서 生長하는 動物인 까닭이다.  安國은 叢嶺(파미르고원)의 高에 있고, 高昌은 지금의 西藏(티벳)이요, 天竺은 지금의 印度이니 그 當時에는 西域이란 그 範圍속에 다 包容되었던 나라들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 戱伎들의 出處는 더 물을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高麗史』의 다른 記錄에는 演戱의 名目이 위의 것처럼 따로 各히 區分된 것은 도무지 없고, 오직 百戱·雜戱 或은 雜伎라는 凡稱이 通例로 쓰여 있다.  太祖 元年에 仲冬八關會에 「百戱 歌舞를 呈하였다」하고;睿宗 十一年 大儺에 「… 倡優雜伎와 外官遊妓에 이르기까지 부르지 않은 것이 없다」하고;  毅宗 六年 二月에 「宴을 賞春亭에 設하고 伶官으로 하여금 雜戱를 交奏하였다」하고;  同年 十二月에 「王이 內殿에서 百戱를 구경하였다」하고;  十九年 四月에 「內侍 左右番이 서로 다투어 珍玩을 드리었는데 右番에는 紈袴子弟가 많아서 … 彩棚을 結하고 雜戱를 載하여서 …」하고;  二十一年 五月에 「長湍縣 應德亭에 幸하여 舟中에 彩棚을 結하고 女樂雜戱를 載하였다」하고;  二十四年 正月에 「還宮하는 때, 管絃坊·大樂署가 彩棚을 結하고 百戱를 陳하였다」하고;  同年 五月에 「親히 樂章 五首를 製하여 工人으로 하여금 그것을 歌하게 하며, 彩棚을 結하고 百戱를 陳하였다」하고;  高宗 三十二年 四月 八日에 「崔怡(최이)가 燃燈하는데 彩棚을 結하고 妓樂百戱를 陳하였다」하고;  同年 五月에 「崔怡(최이)가 宗室司空 以上과 宰樞를 請하여 宴하는데 … 伎樂百戱를 陳하였다」하고;  元宗 五年에 「元으로부터 還하는 때, 八坊箱 兩部가 樂을 奏하면서 다투어 百戱를 呈하였다」하고;  忠烈王 十四年에 「公主와 함께 妙蓮寺에 幸하니 宦者의 將軍 崔世延(최세연)과 金光義(김광의) 等이 彩棚을 結하고 雜戱를 張하였다」하고;  忠肅王 十二年의 五月에「公主와 함께 元으로서 돌아오는데, 彩棚을 結하고 雜戱와 歌謠로써 迎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國境이 우리와 서로 隣接하여 從來에 干戈를 자주 交하면서도 文化上 交換이 많이 있었던 西方의 漢族, 北方의 胡人(鮮卑·契丹 等)에게서 輸入한 演戱도 한두 가지가 아니련마는 그 眞面目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典據가 있다는 것도   熙宗 四年에 「崔忠献(최충헌)이 王을 맞이하여 闊洞私第에 모시고 錦繡彩棚에 胡漢雜戱를 設하니 極히 侈異하였다」는 그렇게 흐리멍텅한 陰影만을 볼 것뿐이다.ㄴ, 八關會와 演戱.  八關法이란 그것이 歷史上 記錄으로는 高句麗의 僧 惠亮(혜량)이 新羅에 傳하던 그때 (高句麗 陽原王 七年이요, 新羅 眞興王 十二年)에 처음 나타나게 되었다. 八關의 「關」은 「閉」를 意味한 것이니, 그것을 八禁으로 보아도 좋고, 八誡로 보아도 또한 좋다. 惠亮(혜량)의 傳한 그 法을 든다면  「첫째는 殺生을 아니할 것, 둘째는 偸盜를 아니할 것, 셋째는 淫佚을 아니할 것, 넷째는 妄語를 아니할 것,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아니할 것, 여섯째는 高大한 牀에 앉지 아니할 것, 일곱째는 香華를 입지 아니할 것, 여덟째는 저 혼자만 觀聽을 즐기지 아니할 것.」  이 八條의 法은 祭天節 곧 夫餘의 迎鼓, 濊의 舞天에서 刑獄의 斷함과 함께 實用하던 것인데, 그것이 高句麗의 東盟에 傳하고 거기로부터 新羅에 또한 傳하게 된 것이다.  法禁은 그러하거니와 祭天의 儀式이 어떻다는 것과 그 祭를 누가 主한다는 것에 對하여는 더듬어 알 길이 도무지 없는데, 高麗時代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비로소 똑똑히 알게 되었다.  「太祖 元年 十一月에 有司가 말하되 前主(弓裔:궁예)가 해마다 仲冬이면 八關會를 크게 設하고 福을 빌었사오니, 願하건대 그 例를 좇을 지이다. 王이 그 말대로 하여 毬庭에 輪燈 一座를 置하고서 그 四旁에 香燈을 列하며, 또 二個의 彩棚을 結하니 높이가 各히 五丈餘요, 百戱歌舞를 呈하니 그 四仙樂部에 龍·鳳·象·馬·車·船은 다 新羅古事라」하여 그 儀式을 明示하였다. (『高麗史』 第二 仲冬八關會儀條)  「… 이른바 國仙의 事는 比來로 仕路의 門이 많아서 조금도 求하는 者가 없으나 마땅히 大官子弟로 하여금 그것을 行하게 하라!」 (『高麗史』 第一 睿宗 十一年 四月 庚辰의 下敎)  「옛적 新羅에는 仙風이 크게 行하였으므로 龍天이 기뻐하고 民物이 安寧하였다. 까닭에 祖宗 以來로 그 風을 崇尙한 지 오래던데, 近來에는 兩京의 八關會에 舊格이 날로 減하여 遺風이 점점 衰하나니, 이제부터는 八關會에 미리 擇한 兩班의 家産饒足者로써 仙家를 定하고 古風을 依行하여 人天이 다 기뻐하도록 하라!」(『高麗史』 第一 毅宗 二十二年 三月의 下敎)  여기에 말한바 國仙과 仙家는 祭天을 主하는 사람 곧 祭司長을 가리킨 것이요, 仙風과 古風은 祭天의 道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고 보니 新羅에서 國仙이 天祭를 主하였다 함은 아무 疑心도 없는 일이요, 그 때에는 花郞 中의 俊秀한 者를 國仙이라 하였나니, 그러면 花郞의 由來를 먼저 알아볼 必要가 있다.  「新羅 眞平王 三十七年에 美女 二人을 揀拔하여 源花를 삼으니, 하나는 南毛(남모)娘이요, 다른 하나는 俊貞(준정)娘이었다. 그리고 容儀端正한 童男 三百餘人을 모아 그 徒를 삼았더니 娟을 다투면서 서로 猜妬하다가 하루는 俊貞(준정)이 그 私第에 술을 두고 南毛(남모)를 强勸하여 滿醉한 뒤에 죽이었다. 그래서 俊貞(준정)을 誅하고 源花를 廢한 後에 다시 美男子를 取하여 粧飾하고 이름을 花郞이라 하였다. 그 徒가 날마다 增加하여 或은 道義를 서로 磨하며 或은 歌舞로써 서로 즐기며 또는 山水에 娛遊하여 비록 隔遠한 곳이라도 가지 않는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歲月이 오래면 邪正이 저절로 드러남에, 그 中에서 가장 譽望이 있는 者를 擇用하였다.」(『東國通鑑』)  花郞은 처음에 이렇게 생기었는데, 그 後에 여러 가지의 變稱을 가지게 되어서 『三國遺事』에는花郞國仙. (卷一 金庾信, 卷二 景文大王條)神仙 또는 仙花. (卷三 彌勒仙花條)大仙家. (卷五 月明師 「兜率歌」條)  『高麗史』에는  仙郞. 「李知白(이지백)이 奏하되 … 土地를 輕割하여 敵國에 棄하는 것이 어찌 先王의 八關·燃燈·仙郞 等의 일을 다시 行하여 … 國家를 保하여서 太平을 致하니만 같사오리까?」(『高麗史』 第三 列傳 徐熙條)  仙郞 또는 國仙. 「國俗이 幼時에 반드시 僧을 從하여 句讀을 習하되 面首가 있는 者면 僧俗이 다 그를 崇奉하여 號를 仙郞이라 하니 그 徒가 或은 千百에까지 이르는데, 그 風은 新羅로부터 起하였다. 閔頔(민적)이 十歲되는 때, 僧舍에 가서 受學함에, 性이 敏悟하여 배우는 대로 그 義를 通하고 眉宇가 그림과 같고, 風儀가 秀雅하니 보는 이마다 다 그를 사랑하였다. 忠烈王이 그를 불러다가 宮中에서 보고 눈질하면서 國仙이라 하였다.」(『高麗史』 第三 列傳 閔宗儒條)  이 記錄들에 依하면 上天에 對한 信仰에 있어 祭職을 帶한 者가 아니면 仙이란 榮稱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 煥然히 보인다. 그런데 그 榮稱은 新羅時代에 비롯한 것이 아니다. 歷史로 보아 멀리 檀君의 때에도, 훨씬 가깝게는 高句麗의 때에도 있었다는 것이 또한 알리어진다.「平壤은 仙人 王儉의 宅이라.」(『三國史記』 東明王條)「松讓王이 말하되 나는 仙人의 後이니 여러 世代로 王하였다.」(『三國史記』 東明王條)「高句麗의 官爵에 十三等이 있는데 十二曰 仙人이라.」(『後周書』)  여기에 이른바 仙人은 國仙 또는 仙家와의 同一한 意味로 보아야 한다. 北方에서는 이렇게 仙人을 두는 그때에 南方의 馬韓에서는 各 國邑에 天君을 두어 天에 祭하다가 新羅 眞平王의 後에는 國仙이나, 仙家를 둔 것이 事實이었다.  이만하면 八關儀式의 進展하던 그 徑路는 누구든지 다 理解하리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그 儀式에서 興行하던 百戱를 말하여야 되겠다. 百戱의 中에는 山戱와 野戱의 兩部가 包含되었는데, 山戱에는 반드시 彩棚을 結하여 山을 만들고 그 山에 羅幃를 張하나, 野戱에는 그런 設備가 없다. 거기에 對한 例證을 든다면   太祖 元年에 設한 八關會에 五丈餘의 二個 彩棚을 結하고서 百戱歌舞를 呈하였다는 것은 山戱를 말한 것이요;  睿宗 十五年 十月에 八關會를 設하고 雜戱의 中에서 國初功臣 金樂(김락)·申崇謙(신숭겸)의 偶像을 보고 王이 感歎하여 詩를 지었다는 것은 野戱를 말한 것이다.  山戱와 野戱는 八關會의 祭禮에서만 專有한 것이 아니라, 君臣間의 公私燕饗에서도 通用하였나니, 거기에 對한 例證을 든다면  毅宗 二十一年 河淸節에 萬春亭에 幸하여 宰樞·侍臣을 請하여 延興殿에서 宴하는데, 大樂署와 管絃坊이 서로 다투어 彩棚·樽花·獻仙桃·抛毬樂 等 聲伎의 戱를 갖추었다 함은 山戱와 野戱를 兼用한 것이요; (『高麗史』 第一 毅宗條)  高宗 三十一年 五月에 崔怡(최이)가 宗室 司空 以上 및 宰樞를 請하여 그 第에서 宴할 때, 彩棚을 結하여 山을 만들고 그 山에 繡幕羅幃를 張하며, 山의 中에 鞦韆을 結하여 文繡彩花로써 飾하고 四面에 銀釦貝鈿한 四大盆에 各히 氷峰을 盛하였으며 또 四大樽에 紅紫芍藥 十餘品을 滿揷하니 氷花가 交映하여 表裏燦爛한 中에서 伎樂百戲를 陳하되 八坊箱 工人 一千三百五十餘人이 다 盛飾하고 庭에서 樂을 奏하니 絃歌鼓吹의 소리가 天地가 轟震하였다 함은 山戱와 野戱를 兼用한 것이다. (『東國通鑑』)  李朝朝鮮에 이르러는 高麗의 그것을 그냥 承襲하여 儺禮都監의 營下에 두었는데, 우리로 하여금 演戱의 內容을 그 大槪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山戱에는 獅·虎·曼碩舞 等을 擬作하는데, 曼碩(만석)은 高麗 때의 중이니 曼碩舞의 一名은 鼇棚이라 하였다.  野戱에는 唐女와 小梅舞 等을 扮演하는데, 唐女는 禮成江에 來留하던 中國의 娼女요, 小梅는 古代의 美女라 하였다.ㄷ, 大儺와 演戱.  高麗의 時代로부터 해마다 冬季를 當하면 大儺를 行하였는데, 거기에 要하는 人物·器服·儀式은 이러하였다.  年이 十二 以上, 十六 以下의 童男 二十四人을 選하여 侲子를 삼는데, 그들은 다 假面을 쓰고 赤布의 袴와 褶을 입는다. 그 中에서 一行에 六人씩으로 하여 二行을 만들고 그 남은 十二人은 執事者로 하여 赤幘을 쓰고 褠衣를 입고서 鞭을 쥔다. 그리고 工人의 數는 二十二人인데, 그 中에서 한 사람은 方相氏이니 黃金四目의 假面을 쓰고 熊皮玄衣와 朱裳을 입고서 右手에는 戈를 쥐고 左手에는 楯을 쥐며 또 한 사람은 唱師이니 假面을 쓰고 皮衣를 입고서 棒을 쥔다. 鼓角軍은 二十人을 一隊로 하여 그 中에서 四人은 旗를 들고 四人은 角을 불고 十二人은 북을 치면서 禁中에 進하여 惡鬼를 驅逐하되 方相氏는 戈를 들고 楯을 揚하면서 아래와 같은 逐鬼文을 唱하면 侲子는 句마다 받아 외운다 :甲作 食◉, 赫胃 食疫, 雄伯 食魅, 騰簡 食不祥, 覽諸 食咎, 伯奇 食夢, 强梁, 祖明共食磔死, 寄生委隨 食觀, 錯斷 食巨窮, 奇騰根 共食蠱, 凡使十二, 押追惡鬼, 凶赫汝軀, 拉汝肝節, 解汝肌肉, 抽汝肺脹, 汝不急去, 後者爲糧. (『高麗史』 第二, 冬季 大儺儀條)  이것도 漢土로부터 輸入한 것인데, 그 이름을 儺戱라 하여 그렇게 冬季에만 上演한 것이 아니라, 平常時의 娛樂에도 種種 供用하였다.  「睿宗 十一年 十二月 己丑에 大儺를 興行하는데, 宦者들이 左右便에 分하여 서로 勝負를 다투게 되었다. 그래서 王이 親王으로 하여금 左右에 分하여 그것을 主하게 하니 倡優雜伎로부터 外官의 遊妓까지 다 徵上되었으며 遠近이 坌至하고 旌旗가 路에 亘하여 禁中이 充斥하였다. 이 날에 諫官의 切諫을 因하여 雜戱 中의 가장 怪한 놈들을 다 命黜하였으며, 저녁의 모임에도 左右가 다투어 가면서 그 伎를 呈하였는데, 그 中에 條理가 없는 놈 四百餘人을 命黜하였다.」 (『高麗史』 第二, 冬季 大儺儀條) 하니 이것은 冬季의 儺戱를 이름이요,  「四年 五月 己酉에 儺戱를 구경하다」(『高麗史』 第一 忠惠王條) 하고;  「二十一年 九月 丙申에 甑山峰에 가서 밤새도록 火山과 儺戱를 구경하였다」(『高麗史』 第一 恭愍王條) 하고;  「同月 丁酉에 還宮하는 路中에 儺戱를 設하고서 구경하였다.」(上同) 하고;  「九年 正月에 謹妃殿에 가서 儺戱를 行하였다」(『高麗史』 第三 反逆, 辛禑條)는 平常時의 儺戱를 이름이었다.ㄹ, 燃燈과 演戱  燃燈會는 正月 望日(上元)에도 設하고, 四月 八日에도 設하였다. 前者는 「國俗이 王官國都로부터 鄕邑에 이르기까지 正月望에 燃燈하여 二夜를 經한다」(上元 燃燈會儀條)는 그것이요, 後者는 高麗太祖의 訓要에 이른바 「燃燈은 佛을 事한다」는 그것이었다. 이 두 가지의 儀式은 『高麗史』에서 처음 보는 것이라 하여 그 前代에는 없던 것이거니 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文獻은 散亡하였지만 그래도 「國俗」이란 그 文句로써 보든지, 佛敎流入의 年祚로 보든지 하면 벌써 新羅時代에도 있었다는 것이 完然히 나타난다.  燃燈의 光景에 있어는 時調 中의 「編數大葉」 一首를 드는 것이 좋겠다.  「夏四月 여드레 날에, 觀燈하려 臨高臺하니, 遠近高低에 夕陽은 빗겼는데, 魚龍燈·鳳鶴燈과 두루미·남생이며, 蓮꽃 속에 仙童이요, 鸞鳳위에 天女로다. 鐘磬燈·仙燈·북燈이며, 水朴燈·만을燈과 배등·집등·山臺등과 影등·알등·甁燈·壁欌燈·가마등·欄干등과 獅子 탄 체괄이며, 虎랑 탄 오랑캐며 발로 툭 차 구을등에, 七星등 벌려 있고, 日月등 밝았는데, 東嶺에 月上하고, 곳곳이 불을 켜니, 於焉間에 燦爛한저이고, 이윽고 月明 燈明 天地明하니, 大界光明하여라.」(『歌曲選』)  이것은 佛生日의 燃燈을 말한 것이나, 正月望의 燃燈도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演戱의 進行을 말할 터인데, 이것에는 上元 燃燈會儀의 一面을 드는 것이 좋겠다.  「小會日 坐殿前期에 都校署는 康安殿의 階前에 浮階를 設하며, 尙舍局은 그 屬을 데리고서 殿下에 王幄을 設하며 王幄의 東에 便殿을 設하고 前楹의 밖에 二個의 獸爐를 設하며, 尙衣局은 玉座의 左右前楹에 花案을 設하며, 殿中省은 浮階의 上下左右에 燃籠을 設하고 殿庭에 彩山을 設하며, 內庫使는 殿庭左右에 尊罍를 列한다. 그 날에 王이 梔黃衣를 입고 便殿에 出御한 즉 … 百戱雜伎가 次例로 殿庭에 들어와서 連作하고 나가면 敎坊이 樂을 奏하고 舞隊가 進한다 …」(『高麗史』 第二 上元 燃燈會儀條)  上元 燃燈에서만 이런 儀式이 있을 뿐 아니요, 佛生日에도 儀式이 또한 그러하였다.ㄱ, 歷代의 上元燃燈.  太祖는 正月望으로써 燃燈의 定日로 하여 數代에 傳하였다. 그러나 成宗은 그것이 너무도 煩擾하다 해서 罷하였는데, 顯宗의 때에 이르러 그것을 復設하되 해마다 二月望으로 定期를 삼았고, 恭愍王에 降하여는 다시 正月望에 그것을 進行하였다.  顯宗 元年 閏二月에 燃燈會를 復設하다.  二年 二月에 燃燈會를 淸州行宮에서 設하니 그 後부터 通例로 二月望에 그것을 行하다. (上元 燃燈會儀條)  文宗 二十七年 二月 乙亥에 敎坊이 女弟子 眞鄕(진향) 等 十三人의 傳한바 「踏沙行歌舞」를 燃燈會에 쓰기로 奏請함에, 王이 從하였다. (『高麗史』 第二 樂考)  三十一年 二月 乙亥에 燃燈하고 重光殿에 御하여 樂을 구경하는 때, 敎坊 女弟子 楚英(초영)이 「王母隊歌舞」를 呈하는데, 一隊를 五十人으로 하여 舞함에 四字도 成하고 或은 君王萬歲 或은 天下太平의 字를 成하였다. (上同)  恭愍王 二十三年 正月 壬午에 燃燈하였다. (『高麗史』 第二 上元 燃燈會儀條)ㄴ, 歷代의 四月燃燈.  高宗 三十二年 四月 八日에 崔怡(최이)가 燃燈하는데, 彩棚을 結하고 伎樂百戱를 陳하면서 밤새도록 즐기니 都人士女의 구경꾼이 堵와 같다. (『高麗史』 第三 反逆 崔忠献條)  恭愍王 元年 佛生日에 宮中에서 燃燈하는데, 僧 一百에게 飯을 주고 火山雜戱를 設하였다. (『高麗史』 第一 恭愍王條)  十三年 四月에 燃燈하는데, 殿庭에서 「呼旗戱」를 구경하고서 布를 賞賜하였다. (『高麗史』 第一 恭愍王條)ㄷ, 競技的 演戱.1, 擊毬戱. 太祖 元年에 八關會를 毬庭에 設하였다 하니 그 戱가 高麗初期에 벌써 있었다는 것이 보이며, 忠肅王이 馬上에서 姚安道(요안도)의 作인 「玄宗 打毬圖」詩 「金殿千門白晝開, 三郞沈醉打毬回, 九齡已老韓休死, 明日應無諫疏來」를 沈吟하였다 하니, 그 戱도 또한 漢土로부터 輸入하였다는 것이 보인다.  睿宗 十一年에 西京으로부터 돌아오는 때에 留守와 百官이 儀仗·樂部를 갖추어 가지고 駕를 馬川亭에서 맞이하는데, 大樂·管絃 兩部가 다투어 奇侈를 힘쓰면서 婦女로 하여금 馳馬擊毬함에, 王이 命하여 黜하니 그 戱가 드디어 끊어지었다. (『高麗史』 第一 睿宗條)  恭愍王 十六年 五月에 益妃·定妃와 함께 高羅里에 幸하여 擊毬戱를 구경하고 크게 百戱를 陳하였다. (『高麗史』 第一 恭愍王條)2, 水戱. 이것은 高句麗의 때, 浿水上에서 例行하던 濺水戱이었다.毅宗 二十二年 四月 丁酉에 多景樓에서 宴을 設하고 水戱人에게   白金 三斤을 賞賜하다. (『高麗史』 第一 毅宗條)  同年 四月 丙午에 浮碧樓에 御하여 水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一 毅宗條)  二十三年 三月에 八景亭에 幸하여 水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一 毅宗條)  忠肅王 後二年 四月 己丑에 大同江에 幸하여 水戱를 設하다. (『高麗史』 第一 忠肅王條)3, 手搏戱. 이것은 馬韓의 「踏地低昻舞」에서 나온 듯한데, 高麗 毅宗의 때에 가장 盛行하였다.  毅宗 二十四年에 장차 普賢院에 幸하려 하여 五門前에 이르러 … 武臣을 命하여 手搏戱를 行하였다. (『高麗史』 第三 反逆 鄭仲夫條)  杜景升(두경승)은 勇士로서 控鶴軍이 되었는데 手搏者가 그를 招하여 伴伍를 삼았더니 그의 舅 上將軍 文儒寶(문유보)가 聞하고 手搏은 賤技라, 壯士의 할 바가 아니라 함에, 杜景升(두경승)이 드디어 가지 않았다. (『高麗史』 第三 列傳 杜景升條)  忠惠王 三年 五月 癸丑에 賞春亭에 幸하여 手搏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一 忠惠王條)  四年 二月 乙酉에 手搏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一 忠惠王條)  五年 六月 丙申에 馬巖에 幸하여 手搏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一 忠惠王條)4, 角觝戱. 이것은 世俗에 이른바 「씨름」인데, 그 行迹은 高句麗 古墳의 壁畵에서 보게 되었나니, 그러면 上古에부터 그 戱가 있었던 것을 可히 짐작하겠다.  忠惠王 四年 二月 甲辰에 勇士를 거느리고 角觝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一 忠惠王條)  四年 五月 戊子에 角觝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一 忠惠王條)  同年 十一月 庚寅에 角觝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一 忠惠王條)5, 石戰戱. 이것은 戰爭用으로서 上古에부터 平時에 便을 分하여 練習하던 것이었다.辛禑 九年 三月에 佛日野에 遊하면서 石戰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三 反逆 辛禑條)同年 五月에 鴟巖에서 石戰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三 反逆 辛禑條)6, 弄馬戱. 이것은 武士劇의 一種이다.  毅宗 二十二年 四月 乙巳에 浮碧樓에 御하여 神騎軍의 弄馬戱를 구경하다. (『高麗史』 第一 毅宗條)  演戱는 高麗時代에 가장 盛行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高麗 時代를 演戱의 全盛期로 보게 되고, 李朝時代를 演戱의 沈滯期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李朝에서는 儒敎만을 尊尙하면서 演戱發達의 中心인 八關·燃燈의 儀式을 度外視한 까닭이다. 그러나 歌劇으로는 「春香傳」·「沈淸傳」, 情劇으로는 汶陽山人(문양산인)의 「東廂記」, 李鍾麟(이종린)의 「滿江紅」이 있은 것이 高麗時代에서 보지 못하던 特色이었다. 그리고 民衆 속에서 자주 興行되는, 諷刺劇으로는 「덕놀음」·「탈놀음」, 滑稽劇으로는 「啞婦産兒戱」·「曲背戱」·「盲人戱」 等이 있는 것이 또한 特色이었다.

    8 조선문학사(제1권) 漢文學 上

      우리에게도 純全히 邦語土風으로써 그 思想을 能히 表記할만한 어떤 形樣의 古代字, 申景濬(신경준)의 말에 依하면 東方에 예로부터 俗用의 文字가 있었다는데, 왜, 漢字만을 專用하게 되었을까? 從來로 漢族과의 國境이 서로 連接하여 戰爭·媾和·交聘 等 一般問題가 날이 가면 갈수록 漸漸 더 複雜하게 되매, 그의 文字와 學術을 講究할 必要가 저절로 있게 되려니와 하물며 그 當時의 漢族文明이 우리네보다 한 걸음 더 나간 것은 隱蔽하지 못할 事實이었다. 그러면 그 文明을 當然히 輸入하여야 될 것이요, 그렇게 輸入한 것으로는 過誤라고 아니한다. 畢竟에 우리의 固有한 文字는 忘域에 버리고 慕華主義의 捕虜가 되어 上下 數千年의 間에 全國民을 驅하여 事大病에 呻吟하게 한 儒學者 輩의 罪는 到底히 容恕할 수 없다.  漢學의 最初 流入에 있어는 두 個의 時期로 나눌지니, 첫째는 箕子(기자)가 그 衆을 데리고 東으로 오던 그 時期요, 둘째는 漢武帝가 四郡을 두던 그 時期이었다. 이 둘째의 時期에는 滿潮와 같이 밀어오는 그 勢力과 함께 學術이 또한 많이 波及되었겠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秦政이 焚書坑儒한 後에 漢武帝가 비로소 學術을 尙하여 國學을 세우고 五經博士를 두며 賢良方正의 士를 擧用하니 對策에는 董仲舒(동중서), 『春秋』에는 公孫弘(공손홍), 『尙書』傳에는 孔安國(공안국), 文章에는 司馬相如(사마상여)·司馬遷(사마천)이 있었으며, 그 밖에 또 河間王 劉德(유덕)은 錦으로써 先秦의 遺書를 求하며, 淮南王 劉安(유안)은 天下의 學者를 招請하여 그것을 硏究한 거기에 그 까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藝苑에 漢文學의 基礎가 完全히 築成되기는 典章文物이 唐制를 模倣한 그 後의 일이었다.  이제 漢文學 發展의 要件을 든다면 여섯 가지가 있나니 그것을 次例로 아래에 論陳하겠다.1, 漢書籍의 輸入.  「俗의 愚昧함과 學의 鹵莽함은 書籍이 없는 까닭이라, 『十三經注疏』·『二十三代史』·『三國史』·『高麗史』·『國朝寶鑑』, 杜佑(두우)의 『通典』, 鄭樵(정초)의 『通志』, 馬端臨(마단림)의 『通考』, 王圻(왕기)의 『續通考』, 吾東(오동)의 『文獻備考』, 이 數帙의 書籍은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牧民心書』 三 興學條)라 하여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은 書籍의 準備에 對한 必要를 말하였고;  「朝鮮사람은 가장 書를 좋아한다. 使臣이 入貢함에 그 人數가 五十人이나 되는데, 舊典·新書·稗官小說이 저에게 없는 것이면 各히 그 書目을 써가지고 날마다 市中으로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물어 重價를 아끼지 아니하고 購回하므로 彼國에는 도리어 異書藏本이 있다.」(『太平淸話』)라 하여 陳繼儒(진계유)는 朝鮮사람의 購書에 對한 熱誠을 말하였고;  「秦皇御宇 焚三代之詩書, 漢帝應期 闡五常之載籍, 國家草創之始, 羅代喪亡之餘, 鳥跡玄文 燼于原燎, 龍圖瑞牒 委於泥途, 累朝以來, 續寫亡篇, 連書闕典, 寡人 自從嗣位, 益以崇儒, 踵修曩日之所修, 繼神當年之所補, 沈隱士 二萬餘卷, 寫在麟臺, 張司空 三十車書, 藏在虎觀, 欲收四部之典籍, 以畜兩京之府藏, 靑衿無閱市之勞, 絳帳 有執經之講, 使秦韓之舊俗, 知鄒魯之遺風, 識父慈子孝之常, 兄友弟恭之懿, 宜令所司於西京, 開置修書院, 令諸生 抄書史籍 而藏之.」(成宗 九年 十二月의 敎)라 하여 高麗 成宗은 抄書貯藏에 對한 急務를 말하였다.  以上의 記錄은 漢書籍에 關한 過去 朝鮮人의 一般趨向을 說明하였나니, 書籍은 아래와 같은 時期에 더 많이 輸入하였겠다.1) 前漢成帝가 天下의 遺書를 求하여 劉向(유향)으로 하여금 經傳·諸子·詩賦를 校하여 그 篇目을 條陣하며 그 指意를 採正하고, 아들 劉歆(유흠)이 또한, 그 業을 繼하여 七略을 著成한 그 時期;2) 後漢明帝가 東觀 仁壽閣에 新書를 集積하고 班固(반고)·傅毅(부의) 等으로 하여금 그것을 典하며 또는 劉歆(유흠)의 『七略』을 區分하여 『漢書藝文志』를 編成한 그 時期;3) 南朝의 梁元帝가 古今圖書 四十萬卷을 收有한 그 時期;4) 唐의 貞觀 初에 魏徵(위징)·虞世南(우세남)·顔師古(안사고)가 서로 繼하여 秘書監으로 되면서 天下의 遺書를 購入하며 그것을 工書者로 하여금 繕寫하고 一般書籍을 經·史·子·集의 四種에 分類하였는데, 玄宗에 이르러서는 長安과 洛陽에 그 圖書를 藏하니 開元著錄이 八萬二千三百八十四卷에 達하던 그 時期.  이렇게 各個의 時期를 따라서 舊典과 新書를 繼續的으로 輸入하였을 터인데, 三國 以前에는 그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고, 三國時代에도 麗·濟(고구려·백제)의 것은 九牛一毛에 지나지 못하며 新羅의 그것도 또한 充分하지 못하다. 그러나 高麗로부터 李朝에 이르기까지는 그 자취가 歷歷히 보이나니 그것은 文獻이 自在한 까닭이다. 이제 記錄上에 드러난 것만을 時代를 따라 例示한다면 아래와 같다.ㄱ, 高句麗에 있어는  小獸林王 四年에 秦王 苻堅(부견)이 僧 順道(순도)와 佛像·經文을 送하였다 하고, 同年에 太學을 立하여 子弟를 敎하였다 하며;  嬰陽王 十一年에 『新集』을 刪修한 李文眞(이문진)을 太學博士라는 그런 記錄만 있고 書籍의 名目은 없다.ㄴ, 百濟에 있어는  古爾王 五十一年에 博士 王仁(왕인)이 『論語』와 『千字』를 가지고 日本에 渡往하여 王子를 敎하였다 하며;  聖王 十九年에 使를 梁에 보내어 毛詩博士와 涅槃 等 經義를 求하여 왔다는 그런 記錄만 있다.ㄷ, 新羅에 있어는  神文王 六年에 使를 唐에 보내어 曲禮·詞章을 請하니, 武后(측천무후)가 有司를 命하여 別卷을 만들어 주었다 하고;  十二年에 薛聰(설총)이 九經을 讀(두)하였다 하니, 九經은 一說에 『易』·『詩』·『書』·『禮記』·『春秋』·『孝經』·『論語』·『孟子』·『周禮』라 하고, 또 一說에는 『周禮』·『儀禮』·『禮記』·『左傳』·『公羊傳』·『易經』·『書經』·『詩經』·『穀梁傳』이라고 한다. 어쨌든지 그 當時에 그런 書類가 들어온 것은 明瞭하게 알린다.同年에 醫學博士와 律令博士를 두었다 하고;  聖德王 十六年에 算博士를 두었다 하니, 『醫學』·『律學』·『算學』의 書類가 이미 들어온 것이 보인다.  景德王 二年에 唐의 玄宗이 『御註孝經』을 보내었다 하고;  元聖王 四年에 讀書出身科의 科目을 定하였는데, 그 科目 中에 『春秋左氏』·『五經』·『三史』·『諸子百家』·『孝經』·『文選』·『曲禮』 等이 있다.ㄹ, 高麗에 있어는  太祖 十一年 八月에 新羅僧 洪慶(홍경)이 唐의 閩府로부터 배에 大藏經 一部를 싣고 禮成江에 이르니 王이 親히 迎하여 帝釋院에 두었다 하고;  光宗 十年에 韓彦恭(한언공)이 宋에 가서 大藏經을 請하니 帝가 藏經 四百八十一函, 二千五百卷을 주었다 하고;  顯宗 十八年 七月에 宋의 江南人 李文通(이문통) 等이 와서 書冊 五百九十七卷을 드리었다 하고;  十三年 五月에 韓祚(한조)가 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帝가 『聖惠方』·『陰陽二宅書』·『乾興曆』·『釋典』 一藏을 주었다 하고;  文宗 十年 八月에 西京留守가 報하되 京內의 進士·明經 等 諸業擧人의 業하는바 그 書籍이 거의 다 傳寫하여 字의 舛錯이 많사오니, 請하건대 秘閣에 藏한 『九經』·『漢』·『晋』·『唐書』·『論語』·『孝經』·『子』·『史』·諸家文集·醫·卜·地理·律·算 等의 書籍을 分賜하여 諸學院에 두게 하소서 하니 王이 有司를 命하여 各 一本을 보내게 하였다 하고;  宣宗 三年에 王弟 王煦(왕후)가 宋으로부터 돌아와서 釋典 및 經書 千卷을 드리며 또는 興王寺에 敎藏都監을 두게 하고 遼·宋·日本에서 書籍을 購入하니 거의 四千卷이나 되는데, 그것을 다 刊行하였다 하고;  七年 十二月에 宋에서 『文苑英華集』을 보내었다 하고;  獻宗 六年에 任懿(임의)·王瑕(왕하) 等이 宋으로부터 돌아와서 『治平要覽』·『神醫普救方』·『濟世要術』을 獻하였다 하고;  肅宗 五年 六月에 吳延寵(오연총)이 宋에 가서 朝旨로써 『太平御覽』 一千卷을 購하려 하니 宋人이 隱秘하고서 許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吳延寵(오연총)이 上書懇請하여 그것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니 王이 말하되 이 책은 文考가 일찍이 求하다가 얻지 못하였었는데, 이제 朕이 얻게 된 것은 使者의 能이라 하였다 하고; (『高麗史』 第三, 列傳 吳延寵條)  同年에 遼에서 釋經 二函을 보내었다 하고;  六年 七月에 文德殿에 御하여 歷代의 秘藏文書를 보고서 部秩이 完全한 것은 擇하여 文德·長齡殿·御書房·秘書閣에 나누어 간직하고 그 나머지는 兩府宰臣 및 誥院史翰·內侍文臣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고;  明宗 二十二年 八月에 宋商이 와서 『太平要覽』을 獻하매 白金 六十斤을 주고 崔詵(최선)을 命하여 訛謬를 讎校하였다 하고;  忠烈王 三十年에 安珦(안향)이 사람을 江南에 보내어 六經·子·史를 購來하였다 하고;  忠肅王 元年 六月에 贊成事 權溥(권보), 商議會議都監事 李瑱(이진), 三司使 權漢功(권한공), 評理 趙簡(조간), 知密直 安于器(안우기) 等이 成均館에 모여서 新舊書籍을 考閱하고 또는 經學을 試하였다. 처음에 成均館 提擧司가 博士 柳衍(유연)과 學諭 兪迪(유적)을 江南에 보내어 書籍을 購하기로 하였는데, 中路에서 破船하여 柳衍(유연) 等이 赤身으로 岸에 登하였다. 太子府 參軍으로 江南에 있던 崔瀹(최약)이 寶鈔 一百五十錠을 주어서 經籍 一萬八百卷을 購得하여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高麗時代에는 漢書籍을 그렇게 熱心으로 繼續 購入하여 陳繼儒(진계유)의 말한 바와 같이, 異書藏本이 많이 있게 됨에, 저들이 도리어 우리에게 向하여 그 缺乏된 것을 要求하는 때도 種種 있었다.  光宗 十年 秋에 『別序孝經』 一卷, 『越王孝經新義』 八卷, 『皇靈孝經』 一卷, 『孝經雌雄』 三卷을 周에 보내었다 하고;  宣宗 八年 六月 丙午에 李資義(이자의) 等이 宋으로서 還하여 奏하되 帝가 我國에 好本의 書籍이 많다는 것을 듣고 館伴을 命하여 그 要求하는 書籍의 目錄을 써주면서 卷數가 不足한 것은 傳寫하여 附送하라고 하더이다. 그의 要求하는 書目은  『百篇尙書』, 『荀爽周易』 十卷, 『京房易』 十卷, 『鄭康成周易』 九卷, 『陸績注周易』 十四卷, 『虞翻注周易』 九卷, 『東觀漢記』 一百二十七卷, 『謝承後漢書』 一百三十卷, 『韓詩』 二十二卷, 『業遵毛詩』 二十卷, 『呂悅字林』 七卷, 『古玉篇』 三十卷, 『括地志』 五百卷, 『輿地志』 三十卷, 『新序』 三卷, 『說苑』 二十卷, 『劉向七錄』 二十卷, 『劉歆七略』 七卷, 『王方慶園亭草木疏』 二十七卷, 『古今錄驗方』 五十卷, 『張仲景方』 十五卷, 『元白唱和集』 一卷, 『深思方黃帝鍼經』 九卷, 『九墟經』 九卷, 『小品方』 十二卷, 『陶隱居效驗方』 六卷, 『尸子』 二十卷, 『淮南子』 二十一卷, 『公孫羅文選水經』 四十卷, 『羊祐老子』 二卷, 『羅什老子』 二卷, 『鍾會老子』 二卷, 『阮孝緖』 七錄, 『孫盛晋陽春秋』 三十三卷, 『孫盛魏氏春秋』 二十卷, 『于寶晋記』 二十二卷, 『十六國春秋』 一百二卷, 『魏澹後魏書』 一百卷, 『魚豢魏略』·『劉瑞梁典』 三十卷, 『吳均齊春秋』 三十卷, 『元行沖魏典』 六十卷, 『沈孫齊記』 二十卷, 『楊雄集』 五卷, 『班固集』 十四卷, 『崔駰集』 十卷, 『汲冡紀年』 一十四卷, 『謝靈運集』 二十卷, 『顔延年集』 四十一卷, 『三敎珠英』 一千卷, 『孔逭文苑』 一百卷, 『類文』 三百七十卷, 『文館詞林』 一千卷, 『仲長統 昌言社』 『恕體論』·『諸葛亮集』 二十四卷, 『王羲之小學篇』 一卷, 『周處風土紀』 一卷, 『張揖廣雅』 四卷, 『管絃志』 四卷, 『王詳撰音樂志』·『蔡邕月令章句』 十二卷, 『信都芳撰樂書』 九卷, 『古今樂錄』 十三卷, 『公羊黑守』 十五卷, 『穀梁廢疾』 三卷, 『孝經劉邵注』 一卷, 『孝經韋昭注』 一卷, 『鄭志』 九卷, 『爾雅圖贊』 二卷, 『三倉』 三卷, 『埤倉』 三卷, 『衛宏官書』 一卷, 『通俗文』 二卷, 『凡將篇』 一卷, 『在昔篇』 一卷, 『飛龍篇』 一卷, 『聖皇章』 一卷, 『勸學篇』 一卷, 『晋中興書』 八十卷, 『古史考』 二十五卷, 『伏侯古今注』 八卷, 『三輔黃圖』 一卷, 『漢官解詁』 三卷, 『三輔決錄』 七卷, 『益部耆舊傳』 十四卷, 『襄陽耆舊傳』 五卷, 『嵆康高士傳』 三卷, 『玄晏春秋』 三卷, 『于寶搜神記』 三十卷, 『魏名臣奏』 三十一卷, 『漢名臣奏』 二十九卷, 『今書七志』 十卷, 『世本』 四卷, 『申子』 二卷, 『隋巢子』 一卷, 『胡非子』 一卷, 何承天(하승천) 『性苑高士廉氏旅志』 一百卷, 『十三州志』 十四卷, 『高麗風俗紀』 一卷, 『高麗志』 七卷, 『子思子』 八卷, 『公孫尼子』 一卷, 『愼子』 一卷, 『晁氏新書』 三卷, 『風俗通義』 三十卷, 『氾勝之書』 三卷, 『靈憲圖』 一卷, 『大衍曆』·『兵書接要』 七卷, 『司馬法漢圖』 一卷, 『桐君藥錄』 二卷, 『黃帝大素』 三十卷, 『名醫別錄』 三卷, 『曺植集』 三十卷, 『司馬相如集』 二卷, 『桓譚新論』 十卷, 『劉琨集』 十五卷, 『盧諶集』 二十一卷, 『山公啓事』 三卷, 『書集』 八十卷, 『應璩百一詩』 八卷, 『古今詩苑英華集』 二十卷, 『集林』 二十卷, 『計然子』 十五卷.  忠肅王 後三年에 元이 使를 보내어 宋·遼·金의 事蹟을 求하였다고 하였다.ㅁ, 李朝朝鮮에 있어는  太宗 十八年에 明에서 歌曲千本을 보내었다 하고;  太宗 四年에 明에서 『劉向烈士傳』을 보내었다 하고;  世宗 十五年에 明에서 四書·五經 및 綱目을 보내었다 하고;  端宗 二年에 明에서 『宋史』를 보내었다 하고;  仁祖 二十三年에 淸節使에게 命하여 『杜氏通典』·『文獻通考』 等 書를 購來하였다고 하였다.  李朝時代에는 高麗의 內藏書籍을 遺産으로 承受한 것이 充足한 거기에다가 印刷術이 또한 크게 發展되어 諸般書類를 連續刊行한 까닭에 僻邑窮鄕에서까지도 그것의 缺乏을 느낀 일이 없었다. 만일 새로 購入하는 것이 있었다면 明·淸 兩代의 新出書籍을 購入할 뿐인데, 末葉에 와서는 그것을 嚴禁하는 일까지 있었다.  正祖 十五年의 下敎를 보면  「近來의 俗習이 다 學을 捨하고 書에 趨함을 免하지 못하는지라, 予는 小說이란 그것을 한 번도 披覽하지 않았으며, 內藏의 雜書는 다 버리었노라」하고;  純祖 八年에는 南公轍(남공철)이  「稗官雜書는 一切嚴禁하고 아울러 經史까지도 아직 購來하지 말도록 下令하시라」고 啓請하였다.  이렇게 唐板書類를 嚴禁한 그 때의 國情을 詳察하면 그 本意가 所謂 「邪書」라는 天主敎 書類의 流入을 防止하려는 거기에 特히 있었겠다.2, 漢學校의 建立.  우리의 學制沿革도 또한 漢學制의 沿革에서 考察할 必要가 있다. 太學과 五經博士의 設置는 前漢의 武帝때에 비롯하고 西晉에 이르러는 太學의 밖에 國子學을 또한 두어 隋煬帝의 때에까지 傳하였다. 그런데 唐太宗의 때에 와서는 前代에 比하면 學制가 完備하여 京師에는 國子監이 있어 敎育을 司하되 그 長官을 國子祭酒라 하고 國子監의 下에 六學館을 두었는데1) 國子學. 文武官 三品 以上의 子弟가 入學하며, 定員은 三百名.2) 太學. 文武官 四品·五品의 子弟가 入學하며, 定員은 八百名.3) 四門學. 文武官 六品·七品의 子弟와 庶民의 子弟 俊秀한 者가 入學하며 定員은 千三百人.4) 律學. 文武官 八品 以下의 子弟와 庶民의 子弟도 入學하며, 定員은 五十人.5) 書學. 律學과 同樣의 子弟가 入學하며, 定員은 五十人.6) 算學. 律學과 同樣의 子弟가 入學하며, 定員은 三十人.  그리고 宋代에는 그보다 적게 變하여 國子學·太學·四門學은 그냥 있었으나, 專門學校로는 武學·律學·書畵學·醫學이 있었으며 元明 以後로는 多少의 增減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時代를 따라 變遷하는 漢土의 學制를 追行하던 그 歷路에 對하여 말하겠다.ㄱ, 三國時代에 있어는  高句麗에서는 小獸林王 四十一年에 太學을 세우고 子弟를 敎하였다 하며 또 漢人의 記錄에는 그 國人이 學을 喜하여 그것으로써 窮里廝家에 이르기까지 서로 矜勉하되 衢側에 다 嚴屋을 構하여 號를 扃堂이라 하고 子弟未婚者가 거기에 모여 經을 誦하고 射를 習한다 하였다.  新羅에서는 神文王 二年에 國學을 두고, 景德王 六年에 國學諸業에 博士와 助敎를 置하였다고 한다.ㄴ, 高麗에 있어는  太祖 十三年에 西京에 學校를 設하고 廷顎(정악)으로써 書學博士를 拜하며 또 特別히 學院을 設立하고 六部生徒를 聚하여 敎授하되 兼하여 醫·卜 二業을 거기에 두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서 國子學·太學·四門學이 設置되고 또는 律學·書學·算學을 國子學에 屬하게 하였는데, 그것에 對한 學式은 仁宗朝에 이르러서야 詳定되었다.  國子學生은 三百人인데 文武官 三品 以上의 子孫으로.  太學生은 三百人인데 文武官 五品 以上의 子孫으로.  四門學生은 三百人인데 文武官 七品 以上의 子孫과 勳官 三品 以上의 子孫으로.  書學·律學·算學은 文武官 八品 以上, 庶人의 七品 以上의 子孫으로.  雜業 및 工商樂名 等의 賤事者, 大小功親에 犯嫁者, 家道不正者, 惡逆에 犯한 者, 賤鄕部曲人 等의 子孫은 入學을 許하지 않았다.  國子·太學·四門에는 다 博士와 助敎를 두어 가르치게 하고, 律·書·算의 三學과 三京·十二牧·諸州府에 있는 學校에는 博士만 두어 가르치게 하였다.  學生의 課業에 있어는  律學에는 律令을 가르치고;  書學에는 八書를 가르치고;  算學에는 算術을 가르치고;  經學에는 『周易』·『尙書』·『毛詩』·『周禮』·『禮記』·『儀禮』·『春秋』의 「左氏傳」·「公羊傳」·「穀梁傳」을 各히 一經으로 하여 가르치되 『論語』와 『孝經』도 반드시 아울러 通하게 하였다.  그 授業年限에 있어는  『孝經』·『論語』는 共히 一個年;  『尙書』·「公羊」·「穀梁傳」은 各히 一個年半;  『周易』·『毛詩』·『周禮』·『儀禮』는 各히 二個年;  『禮記』·『左傳』은 各히 三個年.  一體로 먼저 『孝經』과 『論語』를 읽고 그 다음에 諸經을 읽되 算術과 時務策을 學習하며 또 餘暇에는 兼하여 書法을 익히는데 每日 紙一張을 반드시 쓰며, 아울러 『國語』·『說文』·『三倉』·『爾雅』를 읽게 한다.  以上의 것은 다 官立을 말한 것이요, 그 밖에 私立이 또한 있었나니 文宗의 때에 興起한 十二徒가 곧 그것이다. 一은 崔公徒이니 尙書令 崔冲(최충)의 學校요, 二는 文公徒이니 侍中  鄭倍傑(정배걸)의 學校요, 三은 匡憲公徒이니 參政 盧旦(노단)의 學校요, 四는 南山徒이니 祭酒 金尙賓(김상빈)의 學校요, 五는 西園徒이니 僕射 金無滯(김무체)의 學校요, 六은 文忠公徒이니 侍中 殷鼎(은정)의 學校요, 七은 良愼公徒이니 平章 金義珍(김의진)[或은 朴明保(박명보)]의 學校요, 八은 貞敬公徒이니 平章 黃瑩(황영)의 學校요, 九는 忠平公徒이니 柳監(유감)의 學校요, 十은 貞憲公徒이니 侍中 文正(문정)의 學校요, 十一은 徐侍郞徒이니 徐碩(서석)의 學校요, 十二는 龜山徒이니 누구의 學校인지 알 수 없다.  恭讓王 元年에는 十學을 두고 敎授官을 分隸하였는데, 禮學은 成均館에, 樂學은 典儀寺에, 兵學은 軍候所에, 律學은 典法寺에, 字學은 典校寺에, 醫學은 典醫寺에, 風水陰陽 等 學은 書雲觀에, 吏學은 司譯院에 隸屬하기로 하였다.ㄷ, 李朝朝鮮에 있어는  太祖 二年 九月에 兵學·律學·字學·譯學·醫學·算學 等의 六學을 두었고, 太宗 六年 十一月에는 河崙(하륜)의 啓에 依하여 以上 六學의 밖에 儒·吏·陰陽風水·樂의 四學을 加設하여 十學이라고 하였다. (『李朝實錄』) 그 後에는 京師에 太學을 두어 儒學을 尙하고 各州縣에는 鄕校가 있었으며, 閭里에는 私立한 書齋가 있었다.3, 漢土에 遊學生 派遣.  記錄上에 나타난 것으로 證憑을 삼는다면 우리가 漢土에 遊學하기는 唐의 貞觀 時에서부터 始하였다.  「貞觀 十三年에 學舍 千二百區를 增築하니, 高麗·百濟·新羅가 子弟를 보내어 入學하여 그 數가 마침내 八千餘人에 이르렀다」하여 三國人의 遊學한 事實을 記하였고;  「唐 太和 七年에 學生 解楚卿(해초경)·趙孝明(조효명)·劉寶俊(유보준) 三人을 보내어 上都學問에 赴하게 하고, 먼저 보내었던 學生 李居正(이거정)·朱承朝(주승조)·高壽海(고수해) 三人은 業이 稍成하여 歸國하였다」하며;  「後唐 同光 二年에 그 族 學堂親衛 大元固(대원고)를 보내어 兼히 國子監丞을 試하니 朱梁·後唐에 이르기까지 三十年間에 登科한 者가 十數人이어서 學士가 彬彬이라」하여 渤海人의 遊學한 事實을 記하였다.  저들에게만 그런 記事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또한 있나니,  「崔致遠(최치원)은 精敏하고 學을 好하여 年이 十二에 商舶을 따라 唐에 들어가서 學을 求하였다. (『大東文粹』)  崔彦撝(최언휘)는 新羅末의 사람인데, 年이 十八에 遊學하러 唐에 들어갔다. (『高麗史』 第三 列傳 崔彦撝條)  景宗 元年에 金行成(김행성)을 宋에 보내어 國子監에 入學하며, 五年에 崔罕(최한)·王琳(왕림)을 宋에 보내어 入學하다.  睿宗 十年 七月에 金瑞(김서)·甄惟底(견유저)·趙奭(조석)·康就正(강취정)·權迪(권적)을 宋에 보내어 大學에 赴했다.」(『高麗史』 第二 選擧條)라 하며 新羅로부터 高麗에까지 그 遊學하던 事實의 一斑을 提示하였다.  이렇게 遊學한 사람이 많았던 까닭에 漢土의 賓貢科에 登한 者가 적지 않았다.  東國人이 唐의 賓貢科에 登하기는 新羅의 金雲卿(김운경)으로부터 비롯하여 五十八人에 이르고, 五代·梁·唐의 때에 또한 三十一人이 있었나니, 그 姓名을 可考할 者는 新羅에는 金夷魚(김이어)·金可紀(김가기)·崔致遠(최치원)·崔匡裕(최광유)·金文蔚(김문울)·李同(이동)·崔承祐(최승우)·崔彦撝(최언휘)·崔光允(최광윤)·朴仁範(박인범)·金渥(김악)이요; 渤海에는 高元固(고원고)·烏炤度(오소도)·烏光贊(오광찬)·沙承賛(사승찬)이요; 高麗人으로는 宋의 賓貢科에 登한 者가 金行成(김행성)·康戩(강전)·崔罕(최한)·王彬(왕빈)·金成績(김성적)·康撫民(강무민)·權適(권적)·趙奭(조석)·金瑞(김서)·康就正(강취정)이요; 元의 賓貢科에 登한 者는 安震(안진)·崔瀣(최해)·安軸(안축)·李穀(이곡)·李仁復(이인복)·安輔(안보)·尹安之(윤안지)·李穡(이색)·金升彦(김승언) 等 九人이요; 明의 賓貢科에 登한 者는 金濤(김도) 一人뿐이다.  明·淸 兩代에는 우리의 遊學生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 世宗 十五年에 使를 明에 보내어 子弟의 北學을 懇請하였으나 許諾을 얻지 못하였으며, 燕巖 朴趾源(연암 박지원)의 「玉匣夜話」에는 理髮胡服하고 子弟를 淸國에 보내어 留學할 必要만을 말한 것뿐이었다.4, 科制의 模擬.  科制에 있어 『高麗史』의 著者 鄭麟趾(정인지)는 「大抵 그 法이 唐制를 頗用하였다」하였으나, 實際에는 高麗가 唐·宋의 制를 參酌하여 應用한 것이 보이고, 李朝朝鮮은 高麗의 그것을 沿襲하면서 明制를 또한 採用한 것이 보인다. 그러므로 漢制의 沿革을 먼저 말하여야 되겠다.  西漢 以後, 隋의 以前까지는 州選·里選으로 되어진, 이른바 賢良科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隋煬帝가 南北을 混一한 後에 비로소 進仕科를 設하여 士子로 하여금 投牒自進하게 하였다. 그것이 唐의 太宗때에 이르러는 그 制가 아주 確立되어서 文詞로써 士子를 取한 까닭에 士子들은 文詞를 好尙하였으며, 開元 以後에는 士子가 文章으로써 그 身을 榮達하지 못하면 그것을 羞恥로 여기었다. 그 後代에 가서는 아래와 같은 增刪이 있었다.  五季時代에는 三禮·三傳·學究·明經 等 科가 있었고;  宋世에는 進士·九經·五經·開元禮·三史·三禮·三傳·學究·明經·明法 等 科가 있었는데, 仁宗의 때에는 試法을 三場에 分하여 初場에는 策, 中場에는 論, 終場에는 詩·賦를 考取하되 專혀 文詞를 尙하고 實學을 求하지 아니하며 또는 場屋 中에서 挾書를 禁한다는 名義만 있을 뿐이요 實際에는 搜索이 없는 까닭에 眞才를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더군다나 詩·賦의 弊는 浮華만을 崇尙하고, 帖經의 弊는 또한 記誦에 치우치니 實로 人材를 作하는 道가 될 수 없었다.  明의 때에는 鄕試·會試·殿試의 法이 있게 되었는데;  恭愍王 十九年에 明이 侍儀舍人 卜謙(복겸)을 보내어 아래와 같은 科의 擧程式을 頒布하였다.一, 鄕試·會試의 文字程式 :  第一場에는 五經義를 試하나니 各히 本經 一道를 試하되 그것은 五百字 以上으로 하여 舊格에 不拘하고 오직 經旨의 通暢만을 힘쓰게 한다. 그런데 『易』에는 程氏朱氏注, 古注疏, 『書』에는 蔡氏傳·古注疏, 詩에는 朱氏傳·古注疏, 『春秋』에는 左氏·公羊·穀梁·胡氏 張冾傳, 『禮記』에는 古注疏; 四書疑一道는 三百字 以上으로 한다.  第二場에는 三百字 以上의 禮樂論 一道와 詔誥表箋의 內科 一道를 試한다.  第三場에는 一千字 以上의 經史時務策 一道를 試하는데 오직 直述을 힘쓰게 하고 文藻는 尙하지 아니한다.  試 三場 後 十日에는 面試를 行하는데, 騎에는 그 馳驟의 便捷을 보며, 射에는 그 中數의 多寡를 보며, 書에는 그 筆劃의 端楷를 보며, 算에는 그 乘除의 明白을 보며, 律에는 講解의 詳審을 보게 되는데, 現行律令을 用하기로 한다.一, 殿試. 一千字 以上의 時務策 一道를 試하는데, 오직 直述을 힘쓰게 한다.一, 出身의 第一甲은 三名이니 第一은 從六品, 第二·第三은 正七品으로 하여 進士及第를 준다;  第二甲은 十七名이니 從七品으로 하여 進士를 준다;  出身의 第三甲은 八十名이니 正八品으로 하여 進士를 준다.一, 鄕試. 各 省과 直隸府州 等處에서 通選하는데 五百名으로써 定率을 삼는다.一, 會試. 一百名을 試取한다.一, 高麗·安南(베트남)·占城(참파) 等 國에서 經明行修의 士가 各히 本國의 鄕試에 入格한다면 그를 京師의 會試에 貢赴하기로 하는데 選取에 있어는 額數를 不拘한다고 하였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科制由來를 말할 터인데, 三國 以前에 對하여는 文獻의 散亡된 關係로 科制의 有無를 알 수가 없으며, 얼마큼 記錄이 있다는 三國時代에도 그 形迹이 다만 新羅의 記錄에 남기어 있다. 말한다면  新羅 元聖王 六年에 비로소 讀書出身科를 定하였는데, 그 科目과 試法에 있어 『春秋左氏傳』·『禮記』·『文選』을 읽고 能히 그 義를 通하며 兼하여 『論語』와 『孝經』에 明한 者는 上으로 하고, 『曲禮』·『論語』·『孝經』를 읽는 者는 中으로 하고, 『曲禮』와 『孝經』만을 읽는 者는 下로 하며, 만일 『五經』·『三史』·『諸子百家書』를 能通한다면 그를 超擢하여 登用하였다. 이것으로써 보면 그 時代까지는 製述業은 없었던 것이다.  高麗의 科制는 光宗의 때에 비롯하였나니, 「光宗 九年 五月에 雙冀(쌍기)의 議를 從하여 비로소 科擧를 設하고 詩·賦·頌 및 時務策으로써 進士를 取하며 兼하여 明經·醫·卜 等 業을 取하였다」는 『高麗史』의 記錄이 곧 그것이다. 그 科目과 試法도 위에서 말한 바 學制와 같이, 仁宗의 때에 詳定되었는데, 各 業의 試選式은 大槪 아래와 같다.製述業. 經義·詩·賦.明經業. 『詩經』·『書經』·『易經』·『春秋』·『禮記』.醫業. 『素問經』, 『甲乙經』, 『本草經』, 『明堂經』, 『脈經』 十卷, 『針經』 九卷, 『難經』 一卷, 『灸經』.呪噤業. 『脈經』, 『劉涓子方』, 『瘡疽論』 七卷, 『明堂經』 三卷, 『針經』, 『本草經』.地理業. 『新集地理經』, 『劉氏書』, 『地理決經』 八卷, 『經緯令』 二卷, 『地鏡經』 四卷, 『口示決』 四卷, 『胎藏經』 一卷, 『歌決』 一卷,『蕭氏書』 一卷.何論業. 『何論』, 『孝經』, 『曲禮』, 律 前後帙.書業. 『說文』 三十卷, 『五經字樣』, 『眞書』, 『行書』, 『篆書』, 『印文一窠』.律業. 律令.算業. 『綴術』, 謝家九章』 十卷, 『三開』 三卷.  이렇게 그 業을 따라 試取하되 그 考法은 三場에 分하여 初場에는 經義를 試하고, 二場에는 論·策을 試하고, 三場에는 詩·賦를 試하였다. 그 中에도 詩에 더욱 留意하여 德宗의 때에는 六韻詩와 十韻詩로써 試取하다가 毅宗의 때에는 十韻詩로만 試하여 그 法이 末年에까지 傳하였다. 그런데, 末年에 와서는 科法이 紊亂하여 紅粉榜의 譏가 있었나니 그것은 勢家의 幼稚兒童이 登科함에, 그 兒童은 粉紅衣를 입는 까닭이었다.  여기에 添付하여 말할 것은 李朝朝鮮의 製述業에 詩·賦·論·表·策·問·疑·義의 八體가 있고 그 中에 詩·賦의 體制가 特異하다는 그것이다. 詩는 글題의 中에서 一個字를 取하여 韻으로 하고 거기에 따라 十八韻의 長篇을 짓는데, 第一·二句는 글머리, 第五·六句는 立題, 第七·八句는 鋪頭, 第十三·十四句는 첫목, 第十九·二十句는 둘째목, 第二十三·二十四는 回題, 그 以下는 回下라고 한다. 이 詩體가 英祖때에 始하였다고 하나 아직까지는 考據를 얻지 못하였으며, 賦는 三十韻으로써 짓는데, 第七·八句는 破題, 第九·十句는 鋪敍, 그 나머지는 詩와 大略 같게 된다.5, 作家의 興起.  文과 詩의 構成에는 一定한 規法이 있다. 文의 構成法에 있어는 起·承·鋪·敍·結의 五段說과 起·承·鋪·敍·過·結의 六段說이 널리 通行되었다. 이제 陳繹曾(진역증)의 『文筌』에 依한다면 六段說을 사람의 身體에 比喩하여 「起는 사람의 眉目과 같이 明切을 貴히 하며, 承은 咽喉와 같이 疏通을 貴히 하며, 鋪는 心胸과 같이 詳悉을 貴히 하며, 敍는 腸臟과 같이 轉折을 貴히 하며, 過는 腰膂과 같이 重實을 貴히 하며, 結은 手足과 같이 緊快를 貴히 한다」하였나니, 이 法은 議論文에 가장 適切한 것이다.  詩의 構成法에 있어는 起·承·轉·合의 四段說이 널리 通行되어 이러한 立論까지 있게 되었다. 말한다면 「起處는 如 開門見山에 突兀崢嶸하며 或은 如 開雲出壑에 飄逸自在하고, 承處는 如 草蛇仄線에 不卽不離하고, 轉處는 如 洪濤萬頃에 必有高源하고, 合處는 如 風廻氣聚에 淵泳含蓄이라」하였나니, 우리 詩人들의 이른바 「界·景·情·事」는 그런 意味에서 나온 것이겠다.  文體에는 論·表·策·序·跋·箴·贊·書·檄·記·辨·傳·疏 等의 名目이 있다. 거기에 對한 槪例를 든다면論. 尹淮(윤회)의 「百里奚論」.表. 尹瓘(윤관)의 「平女眞賀表」, 金富軾(김부식)의 「三辭起復表」.策. 扶芬奴(부분노)의 「伐鮮卑策」.序. 鄭麟趾(정인지)의 「訓民正音序」, 權近(권근)의 「恩門牧隱先生文集序」.跋. 李奎報(이규보)의 「睿宗唱和集跋」, 李詹(이첨)의 「朴判事日本行錄跋」.箴. 李達衷(이달충)의 「愛惡箴」.贊. 李穡(이색)의 「判三司事崔公畵像贊」, 李季甸(이계전)의 「八駿贊」.書(往復用). 祿眞(녹진)의 「上金忠恭書」, 高麗 太祖의 「答甄萱書」.檄. 崔致遠(최치원)의 「檄黃巢書」, 鄭經世(정경세)의 「募糧檄」.記. 朴趾源(박지원)의 「熱河日記」, 洪良浩(홍양호)의 「遼野日出記」.辨. 鄭道傳(정도전)의 「佛氏禍禍辨」, 徐命膺(서명응)의 「首陽山辨」.傳. 金大門(김대문)의 「高僧傳」, 南孝溫(남효온)의 「六臣傳」.疏. 崔承老(최승로)의 「論時弊疏」, 趙浚(조준)의 「私田革廢疏」.1) 文의 散體와 騈體.  散體는 兩晋 以前에 普遍的으로 流行하던 그 文體를 이름이요, 騈體는 六朝時代에 文辭의 華美를 爲하여 騈儷를 主하던 그 文體를 이름이었다. 唐의 初期에는 오히려 그것을 承襲하여 楊烱(양경)·王勃(왕발)·駱賓王(낙빈왕)·盧照鄰(노조린)은 騈儷文의 四傑이라고 稱하였다. 그 後에 韓愈(한유)와 柳宗元(유종원)이 서로 繼起하여 古代의 散體를 回復하니, 韓愈(한유)의 文은 雄厚雅健하고, 柳宗元(유종원)의 文은 雋傑廉悍하여 世人이 韓(한유)·柳(유종원)라고 號하였다. 그리고 宋의 時代에 이르러는 楊(양억)·劉(유균)이 다 騈體文에 善하여 楊億(양억)·劉筠(유균)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歐陽修(구양수)가 唐의 韓愈(한유)·柳宗元(유종원)를 繼述하여 北宋의 大宗이 되고, 同時에 歐陽修(구양수)의 奬引한 者로 蘇洵(소순)과 그의 아들 蘇軾(소식)·蘇轍(소철) 또는 曾鞏(증공)·王安石(왕안석)이 있었나니, 歐陽修(구양수)는 秀雅하고, 蘇洵(소순)의 才는 橫하며 矯하기 龍蛇와 같고, 蘇軾(소식)의 才는 大하여 一瀉千里하고, 蘇轍(소철)은 淳蓄淵涵하고, 曾鞏(증공)은 湛深經術하고, 王安石(왕안석)은 勁爽峭直하다 하여 明의 茅坤(모곤)이 韓愈(한유)·柳宗元(유종원)·歐陽修(구양수)·三蘇[蘇洵(소순)·蘇軾(소식)·蘇轍(소철)]·曾鞏(증공)·王安石(왕안석)을 幷하여 唐宋八大家라고 評定하였다.  우리에게 있어는 新羅가 所謂 三韓을 統一하였다는 그 前까지는 純全히 兩漢의 散文體를 模仿한 자취가 確然히 보인다. 馬韓王의 「讓百濟王書」, 新羅 文武王의 「大赦文」은 그것을 넉넉히 證明하여 준다. 그런데 唐의 文化를 充分히 吸收하여 典章文物이 다 唐制를 仿行하던 그 때부터는 文章에 있어서도 그의 影響을 무던히 感受한 모양이다. 一方에는 祿眞(녹진)의 「上金忠恭書」와 薛聰(설총)의 「花王戒」와 같은 兩漢의 散體文이 流行되고, 다른 一方에는 崔致遠(최치원)의 「檄黃巢書」와 崔承祐(최승우)의 「代甄萱 寄高麗王書」와 같은 騈體文이 또한 流行되었다. 文武王의 遺詔에서도 騈體의 一端을 指摘할 수 있으나, 그것의 完全한 形式이 記錄上에 表露된 것으로는 崔致遠(최치원)·崔承祐(최승우)를 騈體文의 鼻祖라고 말할 수밖에 더 없다. 그들은 唐에 遊學하고 科第에까지 登한 才子로서 楊烱(양경)·王勃(왕발) 等 四傑의 文體를 移本함도 그럴듯한 일이었다. 高麗에 있어는 太祖의 「答甄萱書」, 또는 歷代君主의 下敎文, 崔行歸(최행귀)의 「詞腦歌 序」는 다 騈體로 되었고, 그 中에 「翰林別曲」에까지 오른 李公老(이공로)의 四六은 그 作風이 가장 著名한 듯하다. 李朝朝鮮에 鄭經世(정경세)의 「募糧檄」도 그러하거니와 特히 許景樊(허경번)의 「廣寒殿玉樓上樑文」은 그 聲譽가 明國에까지 널리 暄藉하였다. 그러나 一般文壇에서 그것의 應用範圍는 極히 狹小하였고 普通으로 唐宋八大家의 散體를 效法하였다.2) 詩의 變遷.ㄱ, 四言詩. 이것은 毛詩體를 이름이니, 그 體는 雅·風·頌·賦·興·比의 여섯 가지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는 麗玉(여옥)의 「箜篌引」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將公奈何」와 高句麗의 「人蔘讚」 「三椏五葉, 背陽向陰, 欲來求我, 椵樹相尋」이 곧 그것이다.ㄴ, 五言詩. 이것은 西漢때에 蘇武(소무)와 李陵(이릉)의 「河陽贈答」에서 始하였나니, 乙支文德(을지문덕)의 「賜宇仲文詩」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가 곧 그것이다.ㄷ, 六言詩. 唐의 때에 王褎(왕수)의 「高句麗樂府」 「蕭蕭易水生波, 燕趙佳人自多, 傾杯覆盌漼漼, 垂袖奮手婆娑, 不惜黃金散盡, 只畏白日蹉跎」가 그 一例이니 우리에게 있어는 高麗 毅宗때의 사람 崔婁伯(최누백)의 名下에 載在한 「披榛到孝子廬, 情多感淚無窮, 負土日加塚上, 知音明月淸風, 生則養死則守, 誰謂孝無始終」이 곧 그것이다.ㄹ, 七言詩. 이것은 漢武帝의 「柏梁臺 騈句」에서 始하였나니, 그래서 그것을 柏梁體라고 한다. 그러나 漢으로부터 六朝 때까지는 오직 五言詩가 盛行하였고, 七言詩는 唐에 이르러 비로소 盛行하였나니, 新羅 王巨仁(왕거인)의 「出獄詩」 「于公痛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이 곧 그것이다.ㅁ, 古風詩(長短句). 이것은 李白(이백)의 「將進酒」에 보게 되었나니, 그러면 그것을 將進酒體라 할까? 鄭夢周(정몽주)의 「江南柳」 「江南柳 江南柳, 春風䙚䙚黃金絲, 江南柳色年年好, 江南行客歸何時, 滄海茫茫波萬丈, 鄕關遠在天之涯, 天涯之人 日夜望歸舟, 坐對落花空長歎, 但識相思苦, 那識行人行路難, 人生莫作遠遊客, 少年兩鬢如霜白.」이 곧 그것이다.  詩學은 唐의 時代에 全盛하였다. 거기에 對하여는 詩로써 人才를 試取함에 그 原因이 있었다고 說明하게 되는데, 詩品으로는 初唐·盛唐·中唐·晩唐의 區別이 있다. 沈佺期(심전기)·宋之問(송지문) 等의 詩는 初唐에 屬한 것이니, 그것은 風雅의 發芽期라 하고, 李白(이백)의 詩는 高妙하고도 飄逸하며, 杜甫(두보)의 詩는 悲壯하고도 沈鬱한데 그것은 盛唐에 屬한 것이요, 韓愈(한유)의 詩는 奧衍하고 柳宗元(유종원)의 詩는 溫雅하고, 李賀(이하)의 詩思는 艱深하고, 元稹(원진)·白居易(백거이)의 詩는 平易로써 著名하였는데, 그것은 中唐에 屬한 것이요, 杜牧(두목)·李商隱(이상은)·溫庭筠(온정균) 輩의 詩는 晩唐에 屬하는데, 그 中에 韓偓(한악)의 詩는 獨히 香匳體로 得名하여 晩唐의 特色으로 되었다.  宋의 時代에도 詩人이 輩出하였으나, 그 中에 蘇軾(소식)·王安石(왕안석)·黃庭堅(황정견)을  第一指에 屈하게 된다. 蘇軾(소식)의 詩는 飄逸하여 李白(이백)과 비슷하고, 王安石(왕안석)의 詩는 渾厚하여 唐人에 가깝고, 黃庭堅(황정견)의 詩는 專혀 杜甫(두보)를 學하였는데, 各히 그 意境만 다를 뿐이었다.  우리에게 있어는 高麗 때, 鄭知常(정지상)의 詩가 晩唐體를 얻었다 하고, 李朝朝鮮의 때에는 『芝峰類說』에 依하면 「我東詩人이 흔히 蘇軾(소식)·黃庭堅(황정견)을 尙하여 二百年間에 다 그 一套를 襲하더니 近世에 至하여 崔慶昌(최경창)·白光勳(백광훈)이 唐을 學하여 淸響의 詞를 務하니 號를 崔白이라 하여 效하는 者가 자못 많아서 向來의 習을 얼마큼 變하였으나 그러나 그 尙하는 바가 晩唐뿐이요, 盛唐에 進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光海 때에 이르러 女詩人의 許景樊(허경번)·李淑媛(이숙원)이 盛唐體를 얻었나니, 그들에게 對하여는 陳臥子(진와자)의 評을 들어야 되겠다. 그는 「許景樊(허경번)과 李淑媛(이숙원)의 作은 盛唐의 風이 있다」고 하였나니, 李朝 詩人의 傾向은 위에 말한바, 두 個의 例證으로써 總結論을 짓는 것이 좋을까 한다.3) 作家의 神童的 秀才.  漢人들은 作家에 對하여 王勃(왕발)·李長吉(이장길)을 童年秀才로 指稱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一步를 더 躍進한 神童이 많이 있었다.  高麗時代 [鄭知常(정지상) 仁宗時, 李奎報(이규보) 高宗時]  鄭知常(정지상)은 生父가 確明하지 못한 處女에게 나고 따라서 五歲까지 말하지 못한 까닭에 外祖가 江에 던지라고 命하였다. 鄭知常(정지상)이 江岸에 到하여 물에 떠도는 오리를 보고,  「何人持神筆, 乙字寫江波」라 하니, 이 詩는 그의 口中에서 떨어지는 첫말이었다. 업고서 나갔던 사람이 크게 驚異하여 업은 그대로 돌아와서 그 詩를 傳誦하니 外祖도 또한 驚異하여 收養하였다. (『東國儒賢錄』)  그 詩를 譯하면   어떤 사람이 神筆을 가지고서, 乙字를 江波에 썼느냐?  李奎報(이규보)는 九歲부터 屬文에 善하다는 聲譽가 있어서 어떤 官員이 그 虛實을 알기 爲하여 하루는 일부러 찾아와서 「紙路長行毛學士」의 一句를 부름에, 公이 곧 應聲하여 「杯心常在麴先生」의 一句로써 和答하였다. (『李相國集』)  그 詩를 譯하면  종이의 길에는 毛學士(붓)가 같이 다니도다. 官員  잔의 中心에는 麴先生(술)이 항상 있도다. 李奎報(이규보)  李朝時代 [金時習(김시습) 端宗時, 金絿(김구) 中宗時, 金麟厚(김인후) 仁宗時, 李山海(이산해) 宣祖時, 許景樊(허경번) 光海時]  金時習(김시습)은 난지 八個月 만에 能히 스스로 글을 씀에, 그의 族祖 崔致雲(최치운)이 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말은 더디나 心神은 警敏하여 어떠한 文章이든지 입으로서 외우지는 못할지라도 그 뜻을 다 曉得하였다. 그리하여 三歲되는 때에 아래와 같은 詩를 지었다.  「柳綠桃紅三月暮, 珠貫靑針松葉露.」  譯解하면  버들이 푸르고 복숭아가 붉었으니, 삼월이 저물었도다, 구슬이 푸른 바늘에 꿰었으니, 솔잎의 이슬이로다.  또는 그 乳母의 밀마질하는 것을 보고서 지은 詩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國朝人物志』)  譯解하면  비도 없는 우레소리가 어디에서 나는가? 누런 구름은 조각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도다.  金絿(김구)는 己卯名賢의 한 사람인데, 六歲되는 때에 石榴를 두고서 아래와 같은 詩를 지었다.  「愛寶不愛身, 堪笑賈胡愚, 如何不自愛, 剖身藏明珠.」(『自菴集』)譯解하면  보배만 사랑하고 몸은 사랑하지 않으니, 우습다 賈胡의 미련함이여, 어째서 저를 사랑하지 않고, 몸을 깨치고서 명주를 간직하였는가?  金麟厚(김인후)는 五歲부터 能히 文을 綴하였다. 六歲되는 때에 어떤 손님이 天을 指하면서 저것을 글題로 하고 詩를 지으라 하니, 公이 韻을 請한 後에 곧 應聲하여 아래와 같은 詩를 불렀다.  「形圖至大又窮玄, 浩浩空空繞地邊, 覆燾中間容萬物, 杞人何事恐頹連.」(『國朝人物志』)  譯解하면  몰골은 둥글고 크고, 검푸른데, 마이없이 땅덩이를 둘러쌌구나. 햇빛으로 덮은 그 중간에 온갖 것을 다 담았나니, 기인은 무슨 일로 무너질까봐 무서워 하였는가?  李山海(이산해)는 宋翼弼(송익필)·河應臨(하응림)·白光勳(백광훈) 等 八文章의 속에서 한 몫을 차지하였던 사람인데, 七歲되는 때에 아래와 같은 長短句의 詩를 지었다.  「一犬吠, 二犬吠, 三犬亦隨吠, 童言山外月如鏡, 滿庭樹影間婆娑.」(『國朝人物志』)  譯解하면  개 한 놈 짖고, 개 한 놈 또 짖고, 개 한 놈 또한 따라서 짖으니, 동자 여쭙되 재 너머 거울 같은 달이, 뜰에 가득한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춤춘다고 하더라.  許景樊(허경번)은 그의 兄 許篈(허봉)과 許筠(허균)으로 더불어 文名이 內外國에 鳴하던 女才子인데, 일찍이 八歲되던 그때에 「廣寒殿玉樓上梁文」을 지었다. (本文은 省略함) (明人詩綜)4) 詩에 對한 두 가지의 傾向.ㄱ, 贊成論者.  成宗 十四年 二月 敎, 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化成天下, 文之時義, 大矣哉, 予恐 業文之士, 纔得科名, 各帝公務, 以廢學業, 其年 五十以下, 未經知制誥者, 翰林院 出題, 令每月進 詩三篇, 賦一篇; 在外文官, 自爲詩三十篇, 賦一篇, 歲抄 附計吏以進, 翰林院, 品題以聞. (『高麗史』 第一 成宗條)  仁宗 十二年 十月, 禮部貢院 奏, 范仲淹云, 先策論 以觀其大要, 次詩賦, 以觀其全才, 以大要,  定其去留, 以全才, 升其等級, 斯擇於本, 致理於基也. 我朝 製述業, 於第三決場, 試經義, 中場, 論策相遞, 三場 詩賦, 永爲格式. (『高麗史』 第二 選擧一, 科目一)  恭愍王 十一年, 洪彦博, 柳淑, 掌試, 復用詩賦. (『高麗史』 第二, 選擧條)  辛禑 二年, 政堂文學 洪仲宣, 革 林璞所建 對策取士之法, 復以詩賦 取士. (上同)ㄴ, 排擊論者.  崔㵸 上書 諫曰 昔 唐玄宗, 欲置詩學士, 宰相 奏, 詩人, 多輕薄, 若承顧問, 恐撓聖聰, 玄宗, 乃止, 帝王, 富好經術, 日與儒雅, 討論經史, 咨諏政理, 安有事童子雕篆, 數與轉薄詞臣, 吟風嘯月, 以傷天衷之淳正耶. (『高麗史』 第三 列傳 崔冲條)  李齊贒 光宗贊曰 光宗之用雙冀, 可謂立賢無方乎, 冀, 果賢也, 豈不能納君於善, 不使至於信讒濫權耶, 若其設科取士, 有以見光宗之雅, 有用文化俗之意, 而冀, 亦將順以成其美, 不可得無補也, 惟其倡以浮華之文, 後世 不勝其弊. (『高麗史』 第一 光宗條)  忠肅王 七年, 李齊贒, 朴孝修, 典擧, 草詩賦, 用策問. (『高麗史』 第二 選擧條)  忠穆王時, 韓宗愈, 爲左政丞, 王 嘗欲觀 李白·杜甫詩, 宗愈曰 抽黃對白, 無補於政, 王 命進之, 宗愈 托以無典守者, 竟不進. (『高麗史』 第三 列傳 韓宗愈條).  辛禑 五年 五月, 諫官 上言, 玄陵 崇信經學, 養士取人, 近年以來, 詩賦取士, 專尙詞章, 經學漸廢, 今後, 一遵玄陵 己酉年 科擧之法. (『高麗史』 第二 選擧條)  恭讓王 六年, 趙浚 等 上言 … 鄕愿之托儒名 避軍役者, 至五六月間, 集童子 讀唐宋絶句, 至五十日 乃罷, 謂之憂課, 爲守令者, 視之泛然, 曾不介意, 如此 欲得經明行修之士, 以補國家之盛理, 其可得乎, 願自今 以勤敏博學者, 爲敎授官, 分遣五道, 各一人, 周行郡縣, 其馬匹供億, 幷以鄕校 主之, 又以外方 閑居業儒者, 爲本官敎導, 令子弟 常讀四書五經, 不許讀詞章 … (上同) (『高麗史』 第二 選擧 二, 學校條)  恭讓王 元年 十二月, 大司憲 趙浚 等 上書曰 今之學者, 以雕篆之學, 幸中科第, 取榮一身, 自以爲足, 從仕之後, 盡棄所業一昧於施措, 以負國家 崇儒重道之意, 願自今聚各年及第, 四品以下, 對策殿庭, 中者 使掌製放, 不中者 左遷, 以振儒風. (『高麗史』 第二 選擧 一)  丁若鏞曰 夫所謂科詩者, 何物, 項羽沛公之句, 風塵宇宙之詠, 狂言妄說 …. (『牧民心書』 二, 勸農條)  又曰 詩賦爲物, 本於經術謨獻之外, 別求詞藻, 欲其汎濫百家, 雕鎪萬物, 蓋後世所謂, 文章之學也, 本係浮文, 罷之固善. (『牧民心書』 三, 課藝條)5) 詩의 樂府體.歌 : 李石亨(이석형)의 「呼耶歌」.曲 : 金宗直(김종직)의 「會蘇曲」.謠 : 許景樊(허경번)의 「望仙謠」.詞 : 成俔(성현)의 「木綿詞」, 許筠(허균)의 「錦囊詞」.吟 : 許景樊(허경번)의 「貧女吟」.行 : 成侃(성간)의 「田父行」, 丁若鏞(정약용)의 「僧拔松行」.引 : 麗玉(여옥)의 「箜篌引」.怨 : 林悌(임제)의 「閨怨」.6) 詩의 聯句體.  聯句라 함은 한 사람이 一句의 詩를 唱하면 다른 한 사람이 그 卽時에 應하여 對를 놓는 法이니, 構思의 敏捷과 作才의 能否를 試하는 特種의 詩戱이었다. 이제 그것을 大槪 論擧한다면 이러하다.  傳說에 依하면 唐에 有名한 詩人 賈島(가도)가 新羅의 能詩者로 더불어 그 優劣을 較하기 爲하여 使命을 띠고서 나온다는 先聲이 들리었다. 그 때에 崔致遠(최치원)이란 이가 朝廷에 自請하여 애꾸눈이 沙工으로 假裝하고 鴨綠江 渡口에 가서 그의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及其 賈島(가도)가 當到하여 行船하는 中에서 아래와 같은 聯句를 서로 唱和하였는데, 賈島(가도)가 깜짝 놀라서 저런 沙工도 詩에 이렇듯 能하거늘, 그 밖의 사람이야 더 試할 것도 없으리라 하여 그만 가재걸음 하였다고 한다.  鳥啄沙工目. 賈島(가도).  이것은 崔致遠(최치원)의 애꾸눈임을 嘲笑하는 말이다.  風吹中使鼻. 崔致遠(최치원).  이것은 賈島(가도)의 코가 비뚠 것을 嘲笑하는 말이다.  水鳥浮還沒. 賈島(가도).  山雲斷復連. 崔致遠(최치원).  棹穿波底月. 賈島(가도).  船壓水中天. 崔致遠(최치원).  金仁存(김인존)(一名은 緣)이 少年의 翰林學士로서 遼使 孟初(맹초)의 接伴이 되었는데, 孟初(맹초)가 그의 年少함을 보고 輕히 여기었다. 하루는 서로 말을 타고 郊外로 나가는데 雪晴한 後라, 앞이 茫然하여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오직 말발굽의 소리뿐이 들리었다. 孟初(맹초)가 卽景에 따라 詩 一句를 부르니 金仁存(김인존)이 그 소리에 곧 應하여 對句를 놓았다. 孟初(맹초)가 크게 驚歎하면서 眞天才라 하고 그때부터 情好가 날로 篤深하여 서로 唱和하다가 作別함에 미처 表情物로 金帶를 풀어주고서 갔다. (『高麗史』 第三, 列傳 金仁存條)  馬蹄踏雪乾雷動. 孟初(맹초).  旗尾翻風烈火飛. 金仁存(김인존).  金希磾(김희제)가 東眞使의 館伴으로 되었는데, 그때는 初春이었다. 東眞使의 口占에 應하여 아래와 같은 聯句를 唱和하였다. (『高麗史』 第三, 列傳 金希磾條).  東君初報暖. 東眞使.  北帝已收寒. 金希磾(김희제).  崔瑩(최영)이 어느 날 저녁에 會飮하다가 慶復興(경복흥)으로 더불어 아래와 같은 聯句를 唱和하여 그를 嘲笑하였다. (『高麗史』 第三, 崔瑩條)  天是古天人不古. 慶復興(경복흥).  月爲明月相無明. 崔瑩(최영).  이때에 慶復興(경복흥)이 左相으로 되었으나 泣擬의 際에 李仁任(이인임)과 池奫(지윤)에게 끌리어 己意를 能히 行하지 못하고 날마다 醉함으로써 일을 삼으니, 崔瑩(최영)이 그것을 嘲笑한 듯하다.  金時習(김시습)이 五歲부터 屬文에 能하여 神童이라는 名聲이 一國에 傳播되니 世宗이 그를 불러다가 그 才를 試하되 朴以昌(박이창)을 命하여 아래와 같은 聯句를 서로 唱和하였다. (『國朝人物志』)  童子之學 白鶴 舞靑空之上. 朴以昌(박이창)  聖主之恩 黃龍 翻碧海之中. 金時習(김시습)  金麟厚(김인후)는 五歲부터 文을 綴하여 應口輒對하는 才能이 있었다. 湖南觀察 趙元紀(조원기)가 그 才를 試하기 爲하여 아래와 같은 聯句를 서로 唱和하였다. (『國朝人物志』)  信宿完山 飽梨園之風景. 趙元紀(조원기).  滯留豊沛 饜梅亭之月光. 金麟厚(김인후).  兒郞詩筆 李白主羲輩. 趙元紀(조원기).  先生處事 召吉延壽群. 金麟厚(김인후).  이때에 金麟厚(김인후)는 八歲이었고 完山과 豊沛는 全州를 指한 것이다.  五山 車天輅(오산 차천로)가 詩 一句를 짓고서 對를 얻지 못하였는데, 鄭文孚(정문부)가 그것을 보고 卽時, 아래와 같이 對를 聯하여 一座를 驚倒하였다.  風無一足 行千里. 車天輅(차천로).  月有孤輪 轉九天. 鄭文孚(정문부).  許筠(허균)이 詩 一句를 짓고서 그 對를 얻지 못하여 沈吟하는 때, 누이 許景樊(허경번)이 그것을 물어 알고서 곧 아래와 같은 對句를 불렀다.  花笑檻前聲未聽. 許筠(허균).  鳥啼林下淚難看. 許景樊(허경번).7) 詩의 諷刺體.  諷刺體의 가운데에는 嘲笑 或은 懲創의 意味로 된 것도 있고, 謗訕 或은 警勸의 意味로 된 것도 있다. 이런 意味의 詩는 筆禍에 걸리기 쉬운 까닭에 흔히는 作者의 氏名을 숨기게 된다. 그 思想의 表現에 있어 吟風嘯月의 그것처럼 纖麗絢爛한 色彩는 없다 할지라도, 또 或은 排律諧韻의 軌道에서 脫線되었다 할지라도 그 때의 實生活에서 缺點을 摘拔한 그것에 對하여는 多大한 價値를 賦與하지 않을 수 없다.ㄱ, 筆禍에 걸린 諷刺詩.  盧成(노성)은 高宗 때의 河東監務로서 鄕人 李珪(이규)·李昌(이창)으로 더불어 兄弟를 結하고 陜州副使 薛仁儉(설인검)과 南海縣令 鄭皐(정고), 及第 兪汝諧(유여해), 僧 明就(명취) 等을 招集하여 宴會를 設하고 서로 詩를 唱和하였다. 그런데 아래와 같은 詩로써 國政을 誹謗하였다 하여 前學錄 鄭珹(정성)이 崔沆(최항)에게 讚하니 崔沆(최항)이 怒하여 盧成(노성)·李珪(이규)·李昌(이창)을 斬刑에 處하였다. (『高麗史』 第三, 反逆 三, 崔忠獻條)  賢士槌胸舊.  倡雛得意秋.  譯解하면, 어진 선비는 가슴을 두드리는 날이요,  광대새끼는 뜻을 얻은 가을이다.  忠烈王의 때에 李德孫(이덕손)이 慶尙道 王旨使用別監으로서 人民의 膏血을 빨아내어 王에게 드리고 衛尉尹近侍別監이 됨에, 金良釰(김양검)이 아래와 같은 詩를 馹壁에 題하였는데, 李德孫(이덕손)이 王에게 訴하여 流刑에 處하였다. (『高麗史』 第三, 嬖倖一, 權宜條)  慶尙州道殘民血, 染出德孫三品職.  譯解하면, 경상도 잔약한 백성의 피가, 덕손의 삼품직첩을 물들였도다.  柳淑(유숙)은 字를 純夫라 하고, 號를 思菴(사암 유숙)이라 하였는데, 詩에 能하여 「他鄕作客頭渾白, 到處逢人眼不靑」의 句로써 一世를 膾炙한 詩人이었다. 恭愍王때에 贊成事로 있다가 辛旽(신돈)이 그 忠直을 猜忌하니, 그는 明哲保身의 計로써 田里에로 退去하는 때, 將相大臣·門生·故吏의 餞席에서 詩의 末聯에 아래와 같은 句를 쓴 일이 있었다. 그런데 辛旽(신돈)이 王에게 讚하되 范蠡(범여)가 句踐(구천)을 도와 吳를 伐하여 이기고 吳王의 妃 西施(서시)를 배에 싣고서 갈 때에 「烏嘴魚鰓, 食人之相, 大名之下, 難以久居」라고 말하였으니, 柳淑(유숙)의 詩를 보게 되면 上은 句踐(구천)에 比하고 저는 范蠡(범여)에 比한 것이라 하여 縊刑에 處하게 하였다. (『高麗史』 第三, 列傳 柳淑條)  不是忠衰誠意薄, 大名之下久居難.  譯解하면, 충심이 적어지거나 성의가 박한 것이 아니라, 큰 이름의 아래에는 오래 있기가 어렵다.  南怡(남이)는 十七歲에 武科에 登하여 李施愛(이시애)의 亂을 平定하고 建州虜를 征할 때에 先登力戰하여 一等軍功으로 世祖에게서 兵曹判書의 除拜를 받은 名將이었다. 일찍이 北征하는 때에 아래와 같은 絶句를 지은 일이 있었는데, 睿宗의 때에 奸臣 柳子光(유자광)이 그의 才能을 猜忌하여 「平國」의 「平」字를 「得」字로 改하여 謀反으로 誣殺하니 時年이 二十八이었다. (『五百年奇譚』)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流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譯解하면,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가는데 닳아지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이는데 없어졌도다, 남아가 스무살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하랴?  呫嗶齋 金宗直(점필재 김종직)은 文章道德이 一世에 冠한 名儒로서 世祖의 때에 登科하여 벼슬이 兵曹判書에까지 이르렀다. 燕山君의 때에 奸臣 柳子光(유자광)이 그의 지은 「弔義帝文」은 世祖를 譏한 것이라 하여 戊午士禍를 構成하니 그는 마침내 剖棺斬尸의 刑을 받았다. (弔義帝文은 略함) (東史)  農圃 鄭文孚(농포 정문부)는 文武才가 兼備한 사람으로 일찍이 北評事가 되었는데, 壬辰亂(임진왜란, 1592)에 義兵의 推戴를 받아서 大將이 되었다. 그리하여 長坪·臨溟·端川·白塔의 四大捷에 加淸藤正(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의 一軍을 敗走하게 하였다. 그러한 戰功이 監司 尹卓然(윤탁연)의 誣告로 因하여 賞典을 받지 못하고, 乃終에는 詩禍를 입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對하여는 北軒(북헌 김춘택)의 「蘆山醉筆」을 例證으로 드는 것이 좋다.「農圃 鄭文孚(농포 정문부)는 그런 큰 功이 있고서 賞을 받지 못한 것도 또한 怨恨이라 할 터인데, 畢竟에 아무런 罪도 없이, 禍를 입은 것은 더욱 冤恨이라 할지니, 이것은 癸亥 以後의 일이라, 예로부터 冤死한 者가 많으되, 農圃(농포 정문부)의 일은 가장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의 詠史詩 「楚雖三戶秦亦亡, 未必南公說得當, 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이 곧 그의 罪案으로 되었다. 이 詩를 아무렇게 傅會한다 하여도 罪될 바가 없는데, 생각건대 그것을 傅會하는 者가 農圃(농포 정문부)는 功이 있고서도 賞을 받지 못한 까닭에 宣祖를 怨望하여 懷王에 比하고 仁祖로써 孱孫이 된다고 하였을까? 그런데도 말이 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宣祖가 일찍이 武關에 들어갔던 일이 없었나니, 仁祖의 卽位를 어찌 孫心에 比하랴? 當時에 그 獄事를 按한 者는 다 元勳이요, 또는 壁間에 쓰인 그 詩를 처음 본 者도 亦是 勳臣 中의 한 사람[崔來吉(최래길)]이라, 澤堂[李植(이식)]이 問事郞으로써 齟齬救解하려 하였으나 그런 판국에서 어찌할 수 있으랴? 癸亥 後에 士大夫가 功臣에게 阿附하지 않아서 坎軻한 者가 많은 中에 農圃(농포 정문부)와 같이 禍를 免하지 못한 이가 얼마던가? 그 따위의 告變이 자주 있어서 被告된 者는 得脫이 적었나니, 이것은 時勢의 그러한 까닭이라, 그런데 農圃(농포 정문부)의 禍는 어찌 冤痛하지 않으랴?」(『農圃集』)  石洲 權韠(석주 권필)은 詩와 歌에 다 善한데, 그러나 落魄하여 節을 拘하지 아니하며, 汚世하여 科에 赴하지 아니하고, 다만 보잘 것 없는 敎官의 이름을 띠었을 뿐이었다. 그때에 戚臣 柳希奮(유희분)이 當國用事함에, 進士 任叔英(임숙영)이 對策함에 있어 時政을 매우 切直하게 諷論하였더니, 光海가 親히 보고 크게 怒하여 榜에서 拔去하였다. 그래서 石洲(석주 권필)가 「宮柳靑靑鶯亂飛, 滿城冠蓋媚春輝,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의 詩를 지었나니 宮柳는 外戚 諸柳를 指한 것이요, 布衣는 任叔英(임숙영)을 指함이라. 光海가 惡히 여기어 拿囚刑訊하여 慶源으로 命竄하였는데, 石洲가 出獄하자 酷刑의 餘毒으로 興仁門 外 民舍에서 醉歿하였다. (『五百年奇譚』)ㄴ, 筆禍에 걸리지 않은 諷刺詩.  毅宗이 宮人 無比(무비)를 幸하여 三男九女를 生하였는데, 崔光鈞(최광균)이 無比(무비)의 女壻로 되고 內嬖를 因緣하여 八品 式目錄事로 超授되니 士夫치고는 切齒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래서 諫官이 崔光鈞(최광균)의 告身에 署하지 않았더니, 王이 諫議大夫 尹鱗瞻(윤인첨), 諫議 李知深(이지심), 給事中 朴育和(박육화), 司諫 金孝純(김효순), 正言 梁純精(양순정), 鄭端遇(정단우)를 불러서 署하기를 督促함에 郞舍가 畏縮하여 唯唯하면서 退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諫官의 溺職을 嘲하여 이런 詩를 지었다. (『高麗史』 第三 列傳 尹鱗瞻條)  「莫說爲司諫, 無言是正言, 口吃爲諫議, 悠悠何所論」  譯解하면, 말 많은 것이 사간이요, 말 없는 것이 정언이요, 어눌한 것이 간의니, 길게 평론할 것이 무엇이냐?  杜景升(두경승)은 글이라고는 한 字도 모르는 武人이었다. 여러 번 軍功을 세운 까닭에 上將軍으로 되고 兼하여 守太尉參知政事·判吏部事·修國史에까지 이르렀으며, 그때에 醫人하나가 自稱 玉堂人이라 하여 그것을 壁에 題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詩를 지어 嘲笑하였다.  「戰將今爲修國史, 不妨醫作玉堂人.」  譯解하면, 싸움하는 장수가 지금 수국사로 되었거든, 의원이 옥당인으로 되는 것이 해로울 것 없다.  庚癸以來로 宰相에 武人이 많이 있었다. 知樞密院 金永存(김영존)과 副使 孫碩(손석)이 院中에서 서로 詐罵하기를 兩虎가 哮吼하듯하니 同列이 畏縮하여 점점 引去하고 오직 副使 王度(왕도)가 있어서 從容히 그들을 誘解하였으며, 또 하루는 李義旼(이의민)이 杜景升(두경승)과 中書에 함께 앉아서 자랑하되 某人이 勇力을 自矜하기로 내가 그를 이렇게 擊僕하였노라 하면서 拳으로 柱를 撞하니 榱桷까지 動하고, 杜景升(두경승)이 또한 자랑하되 某時의 일은 내가 空拳으로써 奮擊하니 衆이 다 奔潰하였다 하면서 撞하니 拳이 壁에 陷한 일이 있었다. 그 後에 李義旼(이의민)이 杜景升(두경승)으로 더불어 省中에 앉아 議事하다가 相失하여 奮擊으로 柱를 치면서 네가 무슨 功이 있관데 位가 나의 위에 있느냐고 호통하였다. 그래서 民間에 「掖垣李杜, 密院孫金.」이라는 流行語가 있게 되고, 어떤 사람이 이런 詩를 지어 職非其人을 嘲하였다. (『高麗史』 第三, 反逆 李義旼條)  「吾畏李與杜, 屹然眞宰輔, 黃閣三四年, 拳風一萬古」  譯解하면, 나는 이의민과 두경승을 무서워하노니, 두드러지고 참다운 재상들이야, 황각에 있은 지 서너 해에, 권풍은 만고에 하나이로다.  元宗 때에 林貞杞(임정기)가 全羅道 王旨使用別監으로서 苛暴하게 聚斂하여 王의 寵幸이 되고, 慶尙道 按廉 閔萱(민훤)이 啓事를 專擅함으로써 王에게 媚하였는데, 王이 同日에 林貞杞(임정기)와 閔萱(민훤)에게 帶紅을 주니, 어떤 사람이 이런 詩로써 嘲罵하였다. (『高麗史』 第三, 嬖倖傳 林貞杞條)  「如今守宰紆朱紱, 盡是生靈血染成」  譯解하면, 지금 수재들의 붉은 인끈은, 다 백성의 피로써 물들인 것이다.  忠惠王 때에 官爵이 猥濫하여 奴隸도 또한 軒冕을 얻었었는데, 李穀(이곡)이 燕京에 留하면서 殿中 崔江(최강)이 正尹을 求한다는 消息에 對하여 이런 詩를 지어 嘲弄하였나니, 第二句는 安就(안취)와 趙溟(조명)이 다 死後에 中書의 除拜를 받았다는 말이다. (『高麗史』 第三 李穀條)  「不妨正尹生前得, 猶勝中書死後加」  譯解하면, 생전에 정윤을 얻는 것이 해롭지 않다 하노니, 사후에 중서를 받는 것보다 오히려 나은 까닭이다.  尹孝孫(윤효손)은 成宗朝의 名臣이라, 어렸을 때에 그 아버지 尹處寬(윤처관)이 議政府 錄事로 되어, 첫 새벽에 相公의 門에 가서 名刺를 드리니 閽人이 寢함으로써 拒함에, 日晩에 돌아와서 尹孝孫(윤효손)더러 말하되 나는 不才하므로 이렇듯 辱을 보았으니 너는 반드시 勤業하라고 하였다. 尹孝孫(윤효손)이 그 刺尾에 아래와 같은 詩를 써서 警勸의 意味를 表示하였더니, 그 아버지는 그런 줄을 모르고 그 이튿날 아침에 또한 가서 名刺를 드리니 相公이 그 詩를 보고 곧 引入하여 묻되 네가 이 詩를 썼느냐? 尹處寬(윤처관)이 驚懼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 그 字劃을 본 즉 自己 아들의 글씨라, 그 實情을 吐하니 相公이 이에 尹孝孫(윤효손)을 불러 極히 奬歎하고 사위를 삼으니 相公은 곧 朴元亨(박원형)이었다. (『五百年奇譚』)  「相國酣眠日正高, 門前刺紙已生毛, 夢中若見周元聖, 須問當年吐握勞.」  譯解하면, 해가 늦도록 상국이 단잠을 자니, 문 앞에 명함지가 보풀이 났도다, 꿈에 만일 주공을 보시거든, 당년에 토악하던 일을 물을지어다.  李後白(이후백)이 嶺北에 按節하여 宿弊를 다 없애 버리고 郡縣의 賦入을 거의 蠲除함을 因하여 그 後에 오는 守宰들은 地稅를 徵收하니 人民이 다 困苦하였다. 그래서 白湖 林悌(백호 임제)가 이런 詩로써 嘲笑하였다. (『牧民心書』 二, 平賦條)  「蕙折風霜玉委塵, 一時淸德動簪紳, 可憐貊道終難繼, 相國醫民是病民.」  譯解하면, 난초는 풍상에 꺾어지고, 옥은 티끌에 버리었으니, 한 때의 맑은 덕이 세상을 움직이었다, 불쌍하다 맥도여 지탱하기 어려웠으니, 상국이 백성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병들게 하였도다.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에 朝廷에서 令을 下하여 賊을 斬하고 그 級을 獻하는 者에게는 科第로써 賞하였는데, 義興縣의 어떤 놈이 飢民의 頭를 斬하고 그 髮을 剃하여써 官에 納하니 縣令 鄭希贒(정희현)이 또한 要功하여 巡營에 瞞報하고 因하여 慶宴을 設함에, 어떤 사람이 이런 詩로써 嘲笑하였다. (『五百年奇譚』)  「飢民頭上桂花浮, 紅牌紙中鮮血流, 太守慶筵知有酒, 盍分殘瀝慰啾啾.」  譯解하면, 주린 백성의 머리 위에는 계화가 떴고, 홍패의 종이 속에는 선지피가 흐르도다, 태수의 잔치에 술이 있는 줄 아노니, 어째서 그것을 가지고 주리어 죽은 귀신을 위로하지 않는가?  光海 때에 李爾瞻(이이첨)이 執權함에 國政이 昏濁하여 一方으로는 官爵을 팔고, 다른 一方으로는 班閥이 王에게 媚하여 李冲(이충)은 雜菜를 私獻하고서 戶判에 階하고, 韓老純(한노순)은 山蔘을 進御하고서 台鉉에 登하므로, 어떤 사람이 이런 詩로써 國政을 誹謗하였다. (『五百年奇譚』)  「山蔘閣老人爭慕, 雜菜尙書勢難當.」  譯解하면, 산삼각로는 사람이 다투어 사모하고, 잡채상서는 세력을 당하기 어렵다.  어떤 郡守가 貪虐을 몹시 行하나, 누구든지 그의 威勢에 눌리어서 敢히 一言도 發하지 못하다가 그가 遞歸하는 때에 어떤 사람이 「今日送此盜」라는 詩 一句를 木牌에 써서 五里亭의 路邊에 세웠다. 郡守가 그 詩를 보고 轎子에서 내려 「明日來此盜, 此盜來不盡, 擧世皆爲盜」의 三句를 거기에 添記하여 當時 官吏의 盜行을 餘地없이 說破하였다고 한다. [今村鞆(금촌병)의 『朝鮮風俗集』]  그 詩를 譯解한다면   第一句는 「오늘에 이 도적놈을 보내노라」의 말이요, 그 다음의 三句는 곧 「명일에 이런 도적놈이 올 것이다, 이런 도적놈이 다함없이 오리니, 온 세상이 다 도적놈이니라.」  여기에 對하여는 霞山冷談을 例示하는 것이 또한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葛衣居士, 南方之傑也, 嘗過雙橋之市, 遇軍官 執一盜, 縛之以朱索, 蒙之以紙罩, 返接以就道, 葛衣居士, 忽前, 執盜臂, 放聲大哭, 淚淫淫交下, 且弔且語曰 冤哉, 子也, 胡受辱至此, 一市大驚, 圍三匝以觀, 軍官 大驚, 命卒幷縛, 葛衣居士曰 子之縛我 何居, 以我之盜黨乎, 盍亦聽吾之言, 而縛之縱之, 軍官曰 何, 居士曰 今 群盜滿地, 田盜其災, 戶盜其賦, 賑盜其廪, 倉盜其利, 訟盜其賕, 盜盜其贓, 察使守臣, 與之朋比, 匿之不發, 厥位彌尊, 盜力彌强, 厥祿彌厚, 盜慾彌巨, 行則樹旗, 居則垂帷, 翠袍紅縧, 裝飾鮮楚, 終身逸樂, 莫之敢誰何, 而獨此 三飢四餓, 鼠穿狗突者, 蒙此大辱, 不亦悲乎, 吾是以哭, 匪有他耳, 軍官曰 嘻, 先生之言 是也, 謝之以酒, 而遣之.」(『牧民心書』 三, 除害條)  또, 鄭瑄(정선)의 말한 바를 添加하는 것이 더욱 必要하겠다.  官訊一盜曰 爾試自言盜狀, 盜佯不省, 曰何名爲盜, 官曰汝盜, 那得不自知, 胠篋竊財, 是爲盜耳, 盜乃大笑曰 如公言, 余何能盜, 若官大 眞盜也, 儒生 唔咿帖括, 曾不考古今 究天人, 思經濟皇輿, 惠澤黔首, 日夜望 專權入手, 借以攫取大利, 父師所敎, 友朋所學, 習盜也, 公服手板, 而高坐堂皇, 胥吏傍列, 輿臺下擁, 尊嚴 如天帝, 官繇利出, 政以賄成, 原郭巨豪, 白晝殺人, 苞苴一入, 三尺安在, 黃金有權, 白日無光, 又出而 揚揚豪里中矣, 閭左賤氓, 罰贖貪苦, 披髮剝膚, 室廬不保, 鬻及妻孥, 赴海顚壑, 莫之省憂, 神怒人怨, 錢神通天, 官譽大起, 甲第連天, 歌鐘撲地, 僮奴如蜂, 粉黛塞房, 眞天下之大盜也, 穴地破⊙, 竊人一錢, 卽以盜論, 官人 高坐拱手, 搜括鉅萬, 而不失官譽, 大盜不問, 而問民間乞兒小偸乎, 於是 官人 立釋此盜. (『牧民心書』 一, 飭躬條)  薛緯(설위)가 萬頃縣令으로 되어 매우 廉謹하였는데, 그릇 監司의 詆함을 받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笏을 던지고 가면서 諷喩의 意味로 이 詩를 지어 世上에 知音者가 없음을 慨歎하였다. (『牧民心書』 四, 遞代條)  「數年江郡獨鳴琴, 志在山高與水深, 世上難逢鍾子耳, 絃中誰會伯牙心.」  譯解하면, 강군에 온 지 수년에, 나 혼자 거문고를 울리노니, 산이 높고 물이 깊은데, 뜻을 두고 있었도다, 종자의 귀는 세상에 없구나! 백아의 속마음을 누가 알아주랴?8) 詩의 寫實體.  여기에 이른바 寫實은 詞人騷客의 酒後餘興으로 個體의 一時感情을 吐露하면서, 江南風月을 吟弄하는, 그런 作品에 局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世道民情에 무슨 關係가 있으랴? 그 時代의 社會相을 具體的으로 一幅의 活畫와 같이 寫出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만 一墻面이라도 披露한 作品이 가장 珍貴한 것이다. 지금 말하는 寫實體는 그런 것을 意味하였는데, 上下數千年의 詩學을 通하여 章章篇篇을 探査하여도 革命性을 띄었거나, 反逆的 氣分을 瀉하였거나의 作品은 一句도 볼 수 없다. 그런 훌륭한 作品을 찾자면 西北의 農民을 基本隊로 하여, 李朝의 王室을 推翻하려던 洪景來(홍경래)에게서, 現 制度에 對한 不平不滿으로써 昭陽江上에서 竹林七賢의 名義를 假하여 同志를 糾合하던 朴應犀(박응서)에게서, 洋倭를 逐滅하고 門閥을 打破하려던 全琫準(전봉준)에게서 찾아야 할 터인데, 至今에 流傳된 것으로는 洪景來(홍경래)에게 있어 文으로는 「西北人 文不過 持平掌令, 武不過 僉使萬戶」의 煽動的 一段文뿐이 남기었고; 詩로는 「山將劍勢衝天立, 水學兵聲動地來」의 七言詩 一聯, 또는 知友間의 一種 戱謔으로 보게 되는 四言詩의 吮之 三章 :  「吮之吮之여 夫吮其上하고 婦吮其下로다. 賦也라.  吮之吮之여 夫吮其甘하고 婦吮其酸이로다. 賦也라.  吮之吮之여 夫吮其二하고 婦吮其一이로다. 賦也라.」가 남기었을 뿐이다. 傳說에 據하면 洪景來(홍경래)가 大事를 共謀하는 義에의 어떤 知友를 찾아간 즉 謄書하던 詩傳의 寫本만 舍廊房에 남기어있고 그는 간 데 없음에,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그의 아들에게 물어서, 몸을 補할 양으로 內室에서 婦人의 젖을 빨아먹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洪景來(홍경래)가 그 寫本의 餘白에 이 吮之三章을 記入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朴應犀(박응서) 等의 筆蹟은 얻어 볼 데가 全혀 없고, 全琫準(전봉준)에게 있어는 文으로는 洪啓勳(홍계훈)에게 보낸 二十四個條의 時弊文, 詩로는 「愛國丹忱誰有識, 無人天地獨徘徊」의 一聯이 남기었을 뿐이니, 그 內容에는 北上計劃에 對하여 道統이 同一한 崔時亨(최시형)의 北接一派까지 反對하는 것도 다 包含되었을 것이다. 그런다고 民家의 悲切慘切한 그 生活을 實地대로 表現한 作家가 아주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作家가 비록 人民的 詩人은 아닐지라도, 燕巖 朴趾源(연암 박지원)의 말과 같이, 「儒는 諛라」自己의 階級에게 阿諛하여 盲目的으로 그들을 讚美하는 무더기 속에서 그래도 人民에게 憫憐한 同情을 表하면서, 上層階級의 不合理한 行爲를 暴露한 그 點에 있어는 鳳毛麟角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런 作品들을 列擧한다면 아래와 같다.  汚吏. 鄭樞(정추).  「城頭烏亂啼, 城下汚吏集, 官牒昨夜下, 豈辭行露濕, 窮民相聚哭, 子夜誅求急, 舊時千丁縣, 今朝于室空, 君門虎豹守, 此言何自入, 白駒在空谷, 何以得維縶.」(『明人詩綜』)  鄭樞(정추)의 一名은 公權(정공권)인데 恭愍王때에 左司議大夫로서 正言 李存吾(이존오)로 더불어 疏를 上하여 辛旽(신돈)의 誤國하는 罪를 極言하였다가 貶하여 東萊縣令으로 되었으며, 禑王때에 簽書密直 政堂文學으로 되어 항상 權奸의 用事함을 憤惋不平하다가 背에 疽가 發하여 卒하니 著作으로는 『圓齋集』이 있다.  呼耶歌. 李石亨(이석형).  「呼耶呼耶在南北, 呼耶之聲何時息, 千人輸一木, 萬人轉一石, 華山之石拔幾盡, 白雲之木斫幾禿, 石盡山禿寧可虞, 顚坑仆谷民可惜, 民可惜誰能識, 惡卒捶督如電擊, 朝未食夕未飱, 可憐腰間空垂橐, 猶唱呼耶口吻燥, 口燥喉嘠聲難作, 聲衰力盡一僵仆, 塵飛濺血萬人足, 我願天公生大材, 不置山林置君側, 作我堂堂大廈之柱石, 不勞萬姓力, 不爲萬姓瘼, 莫使呼耶在南北.」(『樗軒集』)  李石亨(이석형)의 號는 樗軒(저헌 이석형)이었다. 端宗 元年 卽 癸未年間에 土木의 事가 크게 興하여 人民들이 그 役事에서 困瘁함을 보고 그 情景을 그린 것이다.  田父行. 成侃(성간).  「隴雉雙飛草深碧, 隴上行人長歎息, 我生今年七十餘, 手脚腁胝面黧黑, 男婚女嫁知幾時, 短衣襤衫纔掩膝, 昔年召募度流沙, 萬里歸來鬢如雪, 慇懃荷戟還荷鋤, 石田磽确牛蹄脫, 牛蹄脫兮空流汗, 獨坐茫然心斷絶.」(明人詩綜)  成侃(성간)의 字는 和中이요, 號는 眞逸(진일 성간)이었다. 端宗 癸酉에 文科에 登하여 그 官이 郊理에 이르고, 年이 三十에 早夭하였다.  徐居正(서거정)曰 和中之於文章, 所養旣深, 所見亦卓, 根於心, 發爲辭者, 高古沖澹, 溫厚雅贍, 蔚然成家, 有古作者之風.  貧女吟. 蘭雪軒 許景樊(난설헌 허경번).  「夜久織未休, 戞戞鳴寒機, 機中一疋練, 終作阿誰衣.」(明人詩綜)  이것은 길쌈하는 貧家女子의 情形을 描寫한 것인데, 「昨日到城郭, 歸來淚滿巾, 遍身綺羅者, 不見養蠶人」이라는 그것보다 못하지 아니한 느낌을 讀者에게 준다.  積城村舍. 丁若鏞(정약용)  「臨溪破屋如磁鉢, 北風捲茅榱齾齾, 舊灰和雪䆴口泠, 壞壁透星篩眼豁, 室中所有太蕭條, 變賣不抵錢七八, 厖尾三條山粟穎, 鷄心一串番椒辣, 破罌布糊⊙(度+夂)穿漏, 庋架索縛防墜脫, 銅匙舊遭里正攘, 鐵鍋新被隣豪奪, 靑棉弊衾只一領, 夫婦有別論非達, 兒稚穿襦露肩肘, 生來不識袴與襪, 大兒五歲騎兵簽, 小兒三歲軍官括, 兩兒歲貢五百錢, 願渠速死況衣褐, 狗生三子兒共宿, 虎豹夜夜籬邊喝, 郞去山樵婦傭舂, 白晝掩扉氣慘怛, 晝闕再食夜還炊, 夏每一裘冬必葛, 野薺苗沈待地融, 村篘糟出須酒醱, 餉米前春食五斗, 此事今年定未活, 只怕邏卒到門扉, 不愁縣闍受笞橽, 嗚呼此屋滿天地, 九重如海那盡察, 直指使者漢時官, 吏二千石專黜罰, 弊原亂本棼未正, 龔黃復起難自拔, 遠摹鄭俠流民圖, 聊寫新詩歸紫闥」(『牧民心書』 三, 簽丁條)  이 詩는 丁若鏞(정약용)公이 甲寅冬에 暗行御史로서 積城村舍의 情形을 寫한 것이다.  哀絶陽詩. 上同  「蘆田少婦哭聲長, 哭向縣門呼穹蒼, 夫征不復尙可有, 自古未聞男絶陽, 舅喪已縞兒未澡, 三代名簽在軍保, 薄言仰愬虎守閽, 里正咆哮牛去皁, 磨刀入房血滿席, 自恨生兒遭窘厄, 蠶室淫刑豈有辜, 閩囝去勢良亦慽, 生生之理天所予, 乾道成男坤道女, 騸馬豶豕猶云悲, 況乃生民思繼序, 豪家終歲奏管弦, 粒米寸帛無所捐, 均吾赤子何厚薄, 客窓重誦鳲鳩篇.」(『牧民心書』 三, 簽丁條)  丁若鏞(정약용)公이 康津에 있을 때 蘆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아이를 낳은 지 三日만에 軍保에 들게 되고 軍布를 내지 못한다 하여 里正이 소를 奪去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陽莖을 指하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런 困厄을 받는다 하고 칼로써 그것을 베었다. 그 妻가 피 흐르는 그 陽莖을 가지고 官門에 가서 痛哭을 하고 呼訴하려다가 閽者에게 逐出을 받았다. 丁若鏞(정약용)公이 그런 말을 듣고 이 詩를 지었다.  僧拔松行. 德山樵夫  「白蓮寺西石廪峰, 有僧彳亍行拔松, 稚松出地纔數寸, 嫩幹柔葉何耒茸, 嬰孩直須深愛護, 況復老大成虬龍, 胡爲觸目皆拔去, 絶其萌蘗湛其宗, 有如田翁荷鋤携長鑱, 力除稂莠勤爲農, 又如鄕亭小吏治官道, 剪伐茨棘通人蹤, 又如蔿敖兒時樹陰德, 道逢毒蛇殲殘凶, 又如髬髵怪鬼披赤髮,  拔木九千聲詾詾, 招僧至前問其意, 僧咽不語淚如⊙(雨/農), 此山養松昔勤苦, 闍梨苾蒭遵約恭, 惜薪有時餐冷飯, 巡山直至鳴晨鐘, 邑中之樵不敢近, 況乃村斧淬其鋒, 水營小校聞將令, 入門下馬氣如蜂, 枉捉前年風折木, 謂僧犯法撞其胸, 僧呼蒼天怒不息, 行錢一萬纔彌縫, 今年斫松出港口, 爲言備倭造艨艟, 一葉之舟且不製, 只赭我山無舊容, 此松雖稚留則大, 拔出禍根那得慵, 自今課拔如課種, 猶殘雜木聊禦冬, 官帖朝來索榧子, 且拔此木山門封」(『牧民心書』 四. 山林條)  丁若鏞(정약용)公이 水營將吏의 不法을 論罪하기 爲하여 德山樵夫라는 名義를 假借한 듯하다.  弔蠅文. 藮夫  是歲에 餓死한 사람을 미처 다 파묻지 못한 까닭에 거기로서 蟲蛆가 생기고 그것이 化하여 蠅으로 된 것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제 蠅을 弔한다 함은 蠅에 托하여 餓死者를 弔하는 것이다.  「蠅兮飛來, 陳盂盤只, 有饛白飯, 和羹酸只, 酒醴醲薰, 雜麪饅只, 沾君之渴喉, 潤君之焦肝只.  蠅兮飛來, 無啜泣只, 挈爾父母, 妻子合只, 聊玆一飽, 無於悒只, 觀君之故室, 蓬虆盈只, 崩簷敗壁, 戶欹傾只, 伏翼夜飛, 狐晝鳴只, 觀君之故田, 童梁茁只, 今年多雨, 泥滑滑只, 衖無居人, 蕪而不垈只.蠅兮飛來, 麗以煮只, 肥牛之臑, 煮倫膚只, 酢醬䓤渫, 鱠鱻鱸只, 塞君之莩腸, 顔色敷只, 砧有餘腥, 饗君徒只, 視君之恒幹, 衡從壟只, 無所衣被, 薪草籠只, 雨淋日炙, 化異種只, 詰屈沸騰, 紛蠢動只, 氾濫脅幹, 滿鼻孔只, 於玆蟬蛻, 脫梏拲只, 惟路有僵, 行人竦只, 嬰孩據胸, 猶吮湩只, 里不埋胔, 山無塚只, 塡坑塞塹, 雜草蓊只, 狸來猾食, 喜跳踊只, 髑髏圜轉, 多穴孔只, 君旣蛾飛, 有遺蛹只.  蠅兮飛來, 無入縣只, 鵠形菜色, 嚴簡選只, 胥吏握管, 察其面只, 立如密竹, 幸一揀只, 淡粥如水, 纔一咽只, 有飛者蟲, 上下瞬只, 膚如腯豕, 是豪掾只, 敷同奏功, 嘉而無譴只, 登麥罷賑, 張筵宴只, 擊鼓其鏜, 簫管囀只, 曼睩蛾眉, 舞回旋只, 含嬌作態, 遮紋扇只, 雖有豊膳, 君不可流羨只.  蠅兮飛來, 無入館只, 旗纛森張, 棨戟攢只, 曉膷盈望, 爛璀璨只, 爓鶉煎鰿, 臛鳧雁只, 粔粻蜜餌, 雕花蔓只, 滿志喜悅, 撫以玩只, 揮颺巨扇, 君無所窺瞷只, 長吏入廚, 視饎㸑只, 倭銚爇肉, 口吹炭只, 桂釀蔗漿, 騰私讚只, 虎豹守閽, 毅防捍只, 麾斥哀籲, 無雜難只, 寂而不譁, 飮食衎衎只, 吏坐酒家, 倩題判只, 馳驛飛書, 閭里晏只, 道無捐瘠, 太平無患只.  蠅兮飛來, 無還魂只, 賀君之無知, 長昏昏只, 死有餘殃, 詒弟昆只, 六月催租, 吏打門只, 聲如獅吼, 山嶽掀只, 私其錡釜, 曳犢豚只, 驅之入門, 株困臀只, 歸而委頓, 遘癘瘟只, 艸薙魚爛, 群煩冤只. 已下 刪」(『牧民心書』 四, 竣事條)  凶歲에 郡守가 郡內飢民을 揀入하여 春分에 賑을 設하고 芒種에 賑을 罷하는데, 罷賑하는 그 때에 賑場의 幹事人을 慰하려면 觴酒豆肉으로 犒饋함은 可하거니와 餓死者의 僵尸도 아직 다 파묻지 못하고 또는 살았다는 사람들도 주린 腸子에 보리를 過食하고 새로 죽는 이가 많으며 或은 病에 걸리어 呻吟이 끊이지 않는 이때에 마치 慶宴처럼 浪藉한 杯盤에 歌舞絃管을 用하므로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이 藮夫의 名을 假借하여 弔蠅文으로써 痛罵하였다.  嗟乎爾迹自何方, 不識姓名不識鄕, 三尺短笻身徒物, 數升粗米乞時糧, 蠅侵寒肉喧朝露, 鴉喚孤魂弔夕陽, 寄語前村年少輩, 携來一簣掩風霜.  이 詩는 乞食詩人 金笠(김립)[金炳翼(김병익)]이 乞人의 路邊僵尸를 보고서 지은 것인데, 字字句句에 同情의 눈물이 無限히 흐르고 있다.  金笠(김립)의 밖에도 乞人에게 득없는 同情을 表한 이가 또한 있나니 邪獄의 嫌疑를 받아 南徼에 十八年이나 流落하여 民情世態를 익히 歷覽한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이 곧 그 사람이었다. 流乞에게 對한 그의 立論을 讀者에게 供하기 爲하여 여기에 添付한다.  「中國賑政, 主於流民, 故 流民受賑, 全活者多, 吾東賑政, 主於居民, 故 流乞受養, 畢竟盡死, 豈不哀哉, 賑恤事目, 凡流乞接濟, 其粥米醬菽, 皆使縣令自備, 仍無會減, 縣令 豈必是仁人哉, 客館之前, 掘坎一處, 其深尺餘, 其圍數丈, 索縛數椽, 草覆一重, 上雪傍風, 不堪澿凜, 如水之粥, 半雜糠土, 厖尾之衣, 不掩其陰, 髠髮皴膚, 形如烏鬼, 喇叭一聲, 聚歠如豚, 散而行乞, 不得一匙, 至夕而會, 投于一坎, 詰屈蠢動, 有如糞蛆, 互相蹂躪, 弱者壓死, 病氣相噓, 疾病熾興, 監者厭惡, 以死爲幸, 委諸溝壑, 日課數十, 烏鳶啄腸, 狐狸咂血, 天下之哀冤慘怛, 未有甚於是者也, 然 且居民之受賑者, 或有捐瘠, 怨謗以興, 上司督過, 而流乞之死, 視爲常事, 上不苛責, 守令無憚, 付之閒漫, 蓋與中國之法, 迥然不同也, 或 又爲不仁之 論曰, 凡流乞 皆無用之物, 天之所棄, 國之所贅, 懶惰無業, 偸竊成性, 收而養之, 徒費穀粟, 畢竟盡死, 勞而無功, 不如困迫絶餘, 以速其死, 在渠無悲, 在國無惜, 嗚呼此何言也, 豊年 不見流乞, 村里 但有良民, 及至凶年, 乃見此物, 則知此物, 本係良民, 非棄物也, 特其六親散亡, 四隣拒絶, 鱞寡孤畸, 無處托身, 洋流蓬轉, 以至於此, 積飢久凍, 喪其良性, 廉恥都亡, 聰識遂昧, 如鬼如獸, 使人可悲, 斯豈本質有殊哉, 天厭其怠, 令受玆苦, 則貪官汚吏, 天胡不厭, 令受彼樂, 斯皆不仁之言, 非理之論, 不足述也, 父母 憎其怠兒, 笞之流血, 爲其兄者, 收而撫之, 勸以粥糜, 斯爲孝友, 從而叱之, 驅迫出門, 其父母 未有不惻然內悲, 反嫉其兄者也, 理旣如此, 牧 宜收撫流乞, 以解天怒, 張橫渠 西銘云鱞寡孤獨疲癃殘疾, 皆我兄弟之顚連無告者也, 人 苟以橫渠之心 爲心, 接濟流乞, 必不當若是也.」(『牧民心書』 四, 設施條)  流乞은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의 論證한 바와 같이, 凶年의 産物이 아니다, 또는 怠惰의 産物도 아니다. 簡短히 말한다면 不合理한 社會制度의 産物이다. 原來, 封建制는 農民을 壓迫하는 機具인 까닭에 賦稅가 苛重하고 따라서 官吏의 貪虐, 土豪의 徵索, 地主의 濫收, 그 모든 것이 農民으로 하여금 貧窮化에 이르게 하고 그렇게 貧窮한 農民이 凶年을 當하게 되면 流乞로도 되고 偸盜로도 되는 것이다.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은 그런 根本問題까지 會得할 識力은 없었던 모양이다.6, 印刷術의 發展.  印刷術의 發明은 智識普及에 있어 두 가지의 功益이 있나니, 첫째는 鈔錄의 辛勤을 免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文字의 傳播를 넓게 하는 것이다. 傳說에 依하면 木製刻字가 新羅 哀莊王때에 雕造되어 大藏經을 刊하였다 하니 그렇다면 後唐 明宗 長興 三年에 宰相 馮道(풍도)가 國子監 田敏(전민)으로 하여금 九經을 校正하여 刻板印賣를 始하였다는 그것보다 그 年代가 훨씬 久遠할지나 그러나 거기에 對한 典據는 아직까지 얻지 못하였다. 오직 史策에 記載한 것으로만 確證을 삼는다면 高麗 靖宗 十一年 곧 公歷 1045年에 雕板使用을 始하였고 高宗 當年에 이르러는 雕法이 크게 進步하여 大藏經의 雕板까지를 完成하였다.  靖宗 十二年 四月에 秘書省이 新刊한 禮記正義 七十本, 毛詩正義 四十本을 進하니 一本은 御書閣에 藏하게 하고 나머지는 文臣들에게 주었다.  肅宗 六年 四月에 秘書省의 文籍板本이 委積毁損함을 因하여 國子監에 書籍鋪를 두고, 그 板本을 移藏한 後에 摹印을 크게 하라고 命하였다.  文宗 十年에 經·史·子·集·百家 等 書를 印하여 各 一本을 西京에 보내라고 命하다.  十二年 九月에 忠州牧이 新雕한 『黃帝八十一難經』·『川玉集·傷寒論』·『本草括要』·『小兒巢氏病源』·『小兒藥證病源一十八論』·『張仲卿(장중경) 五臟論』 九十九板을 進하니 秘閣에 두게 하다.  十三年 二月에 安西都護使 都官員外郞 異善貞(이선정) 等이 新雕한 『肘後方』 七十三板, 『疑獄集』 一十一板, 『川玉集』 一十板을 進하고, 知京山府事 殿中內給事 李成美(이성미)가 新雕한 『隋書』 六百八十板을 進하니 秘閣에 두게 하다.  同年 四月에 知南原府事 試禮部員外郞 李靖恭(이정공)이 新雕한 『三禮圖』 五十四板, 『孫卿子書』 九十二板을 進하니 秘閣에 두게 하다.明宗 二十二年 四月에 吏部尙書 鄭國儉(정국검)과 判秘書省事 金詵(김선)을 命하여 秘書閣에서 書筵諸儒의 讎校한 『增續資治通鑑』을 各州縣에 分送하여 雕印하다.  高宗의 때, 公歷 十三世紀頃에 『大藏經』의 雕板이 完竣되었다. 大藏經이라 함은 釋迦의 成等正覺한 後, 四十五年間의 一切說法 곧 八萬四千法門의 經論疏釋을 總合한 것이다. 『漢譯藏經』으로 말하면 漢 明帝 永平 十年으로부터 六朝時代에까지 約 一千三百年間에 二百人의 學者가 千五百部 六千卷의 譯纂을 卒就한 것이니, 漢譯藏經의 刻板은 宋太祖때의 蜀本으로 始하여 거의 千年동안을 두고서 中國·朝鮮·契丹·日本 等 各國에서 約 二十次의 雕役이 있었으나 高麗本의 藏經을 가장 完備하다고 한다. 이 藏本은 前後 十五年의 勞力으로 八萬六千七百張, 十七萬餘面의 雕板으로 되었는데, 今日까지 陜川 海印寺 兩宇藏經閣 中의 五層板架에 千字次序로 整然히 貯存되어 있다.  그리고 活字에 있어는 宋 慶厝(仁宗)의 間에 있는 畢昇(필승)의 固膠活字는 一時的 私試에 지나지 못하나 우리는 禑王의 때에 가장 完實한 鑄字를 만들었다. 말한다면 知白州事 徐䝺(서찬)이 鑄字를 發明하여 法律書를 印刷하니 字本이 精妙하다 하고(『東國通鑑』), 恭讓王 四年 곧 公歷 1395年에 書籍院을 置하여 活字의 鑄造와 書籍의 印刷를 掌하였다 하니(『東國通鑑』), 이것은 鐵活字의 由來를 말한 것이요, 李朝 太宗 三年 곧 公歷 1403年에 鑄字所를 設하고 李稷(이직)·朴錫命(박석명) 等을 命하여 銅治字 數十萬을 만들어 書籍을 印刷하여 널리 普及시키었다.  增補 高宗 二十一年 - 西紀 1234年에 鑄字로써 『詳定禮文』을 印行하였나니 그것이 李奎報(이규보)의 撰한 그 跋文에 記入되었다.

    9 조선문학사(제2권) 漢文學 下

       이時期는 李朝 五百十九年의 동안을 統稱함이었다. 왜 이 時期를 繁榮期라 하는가? 그것은 漢文學이 高麗時代에 比하여 高度로 旺氣를 發揮하였다는 거기에만 局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李朝에서는 오로지 右文의 治를 主眼으로 하여 性理學과 功令學이 어깨를 마주 걸고 伴行함에서 文學上 作品이 보다 더 많이 나왔다는 것으로써 그렇게 繁榮이란 指稱을 준다는 것이 아니다. 그 繁榮은 朝鮮사람의 思想을 그 語音대로 自由表現할 만한 『訓民正音』의 制定에 實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은, 이제 『正音(훈민정음)』의 制定의 本意가 어디에 있었던가를 살펴보자.  『正音(훈민정음)』이 制定되던 世宗 二十五年 十二月 즉, 公歷 1443年으로부터 『正音(훈민정음)』의 解例가 完成되던 同 二十八年 九月까지의 進行된 事業이 그것을 歷歷히 說明하여 준다.  첫째는 世宗의 『訓民正音』 序言에 「國之語音 異乎漢土, 與其文字, 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라 하여 그 本意가 刑獄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崔萬理(최만리) 等 反對疏에  「刑獄의 事件은 吏讀로 적어도 넉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刑獄의 公平 不公平은 獄吏의 人物如何에 달린 것이요, 言文一致로 訴狀을 잘 꾸미는 거기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諺文이 刑獄의 公平에 아무런 補益도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둘째는 世宗 二十六年 二月에 ‘『東國正韻』의 編成을 前提로 하고서 申叔舟(신숙주)·崔恒(최항)·朴彭年(박팽년) 等을 命하여 韻會의 翻譯을 開始하였으니, 그 本意가 또한 音韻의 矯正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崔萬理(최만리) 等 反對疏에「事業의 成功에는 近速을 貴重視할 것이 아니라, 그 百年大計인 如何를 살피며 또 그것이 歷代 政敎에 어그러지지 않고, 中國에 比하여 부끄럽지 않으며, 百世聖賢에게 疑惑되지 않고, 全國民의 群意에 應合되는 것이라야 眞重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先代로부터 使用하던 韻書를 고치고 無稽의 諺文을 附會하여 工匠 數十人으로 하여금 이것을 새기게 하고 吏輩 數十名에게 이것을 訓習시키어 장차 널리 廣布하려는 것은 實로 알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셋째는 世宗 二十六年에 『三綱行實』을 諺解하였는데, 讀者에게 印象을 더 깊이 주기 爲하여 그 題材에 關聯되는 그림을 揷入하였으니 그 本意가 또한 儒敎의 傳統的 道德인 忠孝貞烈의 大義를 勸奬함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넷째는 世宗 二十七年 四月에 權踶(권제)·安止(안지)·鄭麟趾(정인지) 等으로 하여금 一百二十五章의 『龍飛御天歌』를 諺漢文의 交作으로 撰進하였으니, 그 本意가 또한 太祖創業의 盛德神功을 讚頌하며 後世子孫의 繼述保守를 規戒함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다섯째는 『正音(훈민정음)』의 頒布와 함께 公文書類에 『正音(훈민정음)』使用令을 내리며, 吏科 및 吏典의 取材에 『正音(훈민정음)』를 試驗科目으로 定하였으니, 그 本意가 또한 公文處理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崔萬理(최만리) 等 反對疏에  「薛聰(설총)의 吏讀가 비록 鄙陋하나 또한 中國文字에 類似하고 또는 吏胥奴隷의 무리라도 數卷의 書籍을 배우고, 그것을 익히면 能히 다 通하여 自己의 思想을 疏通하게 된다. 더군다나 吏讀는 벌써 數千年동안 모든 公私文牒에 通用되면서 아무 不便을 느끼지 않게 하는바, 이런 弊害없는 낡은 文字를 버리고서 鄙陋하고 無益한 文字를 創作하는 것은 學問硏究를 너무나 쉽게 하여 吏胥輩에게 立身의 길을 막 열어 놓는다」란 말까지 있었다.  위에 提示한바 그 다섯 가지를 보면 누구든지 『正音(훈민정음)』制定의 本意를 다 알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儒書·佛書·兵書·醫學·農學 等의 諺解·諺譯이 나온 그것으로써도 『正音(훈민정음)』란 普通으로 漢學硏究에 關한 一種 補助物에 지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證明할 수 있다. 그러나 宮廷用의 樂章으로 된 것이지만, 自家의 創業難·守成難을 爲해서 지은 것이지만, 그래도 正音歌曲의 百花頭인 『龍飛御天歌』가 出現한 것은 『正音(훈민정음)』, 그 自體에 文學的 素質이 內包된 것과 그 素質에는 漢學을 能히 壓倒하고서 朝鮮 將來의 民族的 文化를 創建하려는, 그렇게 偉大한 可能性까지 갖추어 있다는 것이 다 表示되었다.  그러한 素質에 對하여서는 『正音(훈민정음)』 制定에 參劃하였던 鄭麟趾(정인지)·成三問(성삼문) 等 一世 名儒의 眼光으로 發見하지 못한 듯하며, 燕山主의 權威로도 防止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燕山主는 李朝 朝鮮의 第十一世 王인데 그 어머니 尹氏가 非命의 奇禍를 當한 것은 諺文으로 그의 非行을 暴露한 거기에 있었다 하여 卽位하던 처음에 諺文禁止令을 내렸다. 이제 「燕山實錄」에 실린 그 禁止令의 內容을 分析한다면1. 諺文을 行用하는 者는 制書法을 毁棄한 罪로써 處理할 것;2. 알고도 告發하지 않는 者는 同一한 條律로 論罪할 것;3. 만일 朝官·士大夫의 집에 諺文混用의 書籍이 있다면 그것을 모조리 불 질러 없애야 할 것;4. 諺文은 候籍이나, 外語書類의 翻譯에만 쓸 것이라 하였다.  이 禁令이 얼마나, 嚴酷하냐? 그럼에도 不拘하고 『月印千江之曲』의 釋譜라든가, 『初學字會』의 諺釋이라든가, 『永嘉集』·『明皇誡鑑』 等의 諺解라든가 그러한 것들이 다 남기어 있었나니, 이것은 『正音(훈민정음)』의 生命이, 浩遠하다는 것을 말함이며, 또는 燕山朝에 燒酒陶瓶이라는 月旦評까지 받은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漁父詞’」가 있어서 從來에 純漢文이었던 詞體가 一變하였고, 壬辰·丙子(임진왜란 1592·병자호란 1636)의 兩亂을 겪으면서 漢文小說보다 諺文小說이 漸次 優勢를 잡게 되었으니, 이것은 『正音(훈민정음)』의 大衆性을 말하는 것이다.  甲午更張(1894年)이라 하면 實로 눈물나는 일이었다. 中國으로 더불어 同文同軌의 길을 꼭 밟아야 慕華主義의 精神에 合致되는 것으로 國是를 삼아오던 李朝의 君臣上下가 外勢에 부대끼어서 그런 일이지만, 어쨌든 獨立國으로 宣布하고 皇帝라 稱한 것은 痛快한 일이 아니라고 못하겠다. 外勢에 부대껴온 그것을 생각할 때에는 눈물을 禁할 수 없으되, 그래도 獨立(實地에는 虛名이지만)이란 그 名義에 있어는 痛快를 부르짖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 國文使用令이 아울러 내렸으니 그렇지 않아도 時勢의 要求로서 『正音(훈민정음)』는 더욱더 새 活氣를 昻揚할 터인데, 말하자면 正音(훈민정음)文學은 그러한 經路를 踏破하면서 成長한 것이다.1. 歌曲  위에서 말한바 高麗 以前에도 朝鮮사람의 情調를 그 語音대로 그려낸 歌曲이 量的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많았지만, 金富軾(김부식)과 鄭麟趾(정인지)같은 作史家의 손에서 다 削除를 當하고 말았다. 金富軾(김부식)의 當時에는 正音(훈민정음)文字를 가지지 못하였음에, 그것을 記入할 可能이 아주 없었거니와 『高麗史』의 完成은 『訓民正音』를 制定한지 九個年되는 文宗 元年의 일이니 그것을 記入할 可能이 넉넉히 있었다. 하물며 鄭麟趾(정인지)는 『正音(훈민정음)』制定에 參劃하였던 사람 中에 가장 有力한 한 사람이었는데, 그러나 純漢文의 歌曲이 아니라면 다 鄙俚하다 하여 削除하였다. 생각하면 그 心事가 어디에 있었을까? 아무리 寬大한 사람이라도 容忍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입과 입이 서로 傳하여 오던 百濟의 「井邑詞」, 高麗의 「苽亭歌」·「處容歌」 等이 『樂學軌範』에 記入되고 李朝 以來의 歌曲을 撰輯한 書類가 많이 있게 된 것은 그 功을 『訓民正音』의 制定에 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歌曲에 關한 書類를 든다면 이러하다.『樂學軌範』. 成俔(성현)『靑邱風雅』. 金宗直(김종직)『昭代風謠』. 南龍翼(남용익)『歌曲源流』. 張友璧(장우벽)『海東歌謠』. 金壽長(김수장)『海東樂府』. 沈光世(심광세)『靑丘詠言』. 金天澤(김천택)『鄕歌律髓』. 作者未詳『女唱類聚』. 作者未詳『南薰太平歌』. 作者未詳『大東風雅』. 作者未詳『歌曲選』. 崔南善(최남선)『新撰俗曲集』. 李尙俊(이상준)이 밖에 營利的으로 되어진 『新舊流行雜歌集』 等 小冊字가 市肆에 多數히 나왔으니 그것은 다 晩期의 現象이었다.一. 打令  打令은 普通으로 雜歌라 하는데, 그것이 「판소리」라 하는 短歌의 따위를 對立한 名稱인가 한다. 다른 歌曲도 그 大部分이 그러하거니와 더욱이 打令에 있어서는 年代와 作者를 알아볼 길이 茫然하고 그 中에서 或 어떤 것은 알 수 있으나, 그런 것은 두셋에 지나지 못한다.「놀양」초목이 다 성림한데 구경하기도 즐겁도다.마를네야 에야 아야라 찌여라 네월네가 네로구나 마리에헤 에헤루지-아 네월네로구나 에 에헤루지-에 에헤루지 이에에에야 네월네로구나 에라듸여, 에에야 네월네로구나.녹양벋은 길로 북향산 들어를 간다.에 에야 네월네로구나춘수는 낙락, 기러기는 훨훨, 낙락장송이 와자찌끈 뚝닥 부러지고, 마른 가지만 남아,지와자쟈 절시구나, 지와자쟈 절시구나, 얼시구 좋다, 말 들어들 보아라, 인간 하직하고 천산에 들어를 간다.에 에이에 에에야 네월네로구나.황혼을 거지 검쳐 잡고, 성황당에 궁뻐꾹새야, 한 마리는 나무에 앉고, 또 한 마리는 들에 앉아 네 어디로 갈라느냐, 네 어디로 갈라느냐, 이산 넘어가도 궁뻐꾹새야, 저산 넘어가도 궁뻐꾹새야, 에 어린 양자, 고운 태도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임 생겨달라고 비나이다, 삼월이라 육구낭자 대사뭉구리 얼시구나 절시구나.담불담불이 생긴도 사랑, 사랑사랑, 사랑사랑 남창북창에 열고나보니 담불담불이 생긴도 사랑, 층암절벽에 기어나 올라, 홰홰츤츤이 감긴도 사랑, 사랑초 다방초 홍두깨, 너출너출이 박너출이 소고 자루로 다 나간다.에 네월네로구나「긴山打令(사거리)」나지나 에헤이나노, 에헤에헤에헤에헤로 산하지로구나.1. 천(과천이란 말), 관악산 염불암 연주대요, 도봉불사, 삼막으로 에헤이 둘렀구나.에―에헤루지-지로구나, 마를네야 에헤에헤에헤루 산하지로구나.2. 추야공산 다 저문 날에 모란 황국이 다 붉는구나.에― 경상도라 태백산은 상주 낙동강이 더듬어 있고 전라도 지리산이 해동뒤쳐 자빠라진 김에 에헤이 둘렀구나.3. 백마는 가자고 네 굽을 땅땅 치는데 정든 님 날 부여잡고 낙루만 한다.에― 울지를 말아라, 울지를 말아라, 네가 진정하고 울지를 말아라, 너무 울기만 하여도 정만 떨어진다.4. 저산 곧 돌아를 가면 우리의 정든 님을 보련마는.에― 삼척 울릉도 우리 조선 수구막이 성황인데 열두제 섬으로 에헤이 둘렀구나.5. 저 달아 보느냐 임 계신데 명기를 빌려라, 나도 잠깐 보자,에― 한량노릇을 마저 하고서 가리각신 마음을 먹더니만, 새 장고 치는 대로 발림춤만 나간다.6. 탁자 밑에 늙은 장승이 활대장삼을 입고 굽으럭 굽석어려서 춤만 춘다.에― 동헌은 지척이요, 사포님 계신 곳에 울음이란 말이 아이고 웬 말이냐.7. 백구는 펄펄 대동강상 비하고, 장송낙락 청류벽상취라.에― 장성일면 용용수요 대야동남은 점점산인데 능라도 백운탄으로 놀러나 가세.「자진 산타령(중거리)」나지나 산이로구나 에라 두게나요, 나나지로만 산이로구나.1. 여초목이 동남풍에 거리심액 우는 소리, 대장부 열네 촌의 간장 다 녹여낸다.에― 일락서산에 해 떨어지고 월출동령에 백운간으로 달이 뭉깃뭉깃 솟아만 온다.2. 산진이냐, 수진이냐, 해동청 별볼애매는 두 죽지 옆에 끼고 고문장줄령을 안고만 돈다.에― 아하 저것이 무엇이냐, 아하 저것이 무엇이냐, 금이냐, 옥이냐, 옥이냐 금이냐, 금생려수가 아니어던 금이란 말이 웬 말이며, 옥출곤강 아니어던 옥이란 말이라도 당치를 않소.3. 열려거던 열려무나, 말려거던 말려무나, 남의 집 딸 너뿐이며, 남의 아들이 나뿐인가.에― 아하 예 보아라, 말 들어라, 야하 예 보아라 말 들어라. 너는 어떤 년의 계집애완대, 장부 장따지를 새장고 변죽같이 와싹 바싹에 다 녹이며, 나는 어떤 놈의 귀동자완대 사람 년의 열네 촌의 간장을 다 녹여낸다.4. 우수연의 기생들아, 저배를 타고서 선류를 하자, 선류는 하지마는 사공이 없어서 어찌를 하나.에― 바람이 장차 부시려는지 나뭇가지는 밤춤 추고, 악수 장마가 지려는지 만수나 천산에 구름이 펑퍼졌다.5. 영천수라 맑은 물에 귀를 씻고서 앉았으니, 연잎은 숙어지고, 방초는 우거졌는데, 물찬 제비 한 쌍이 왕래만 한다.에― 나무잎만 뚝뚝 떨어져도 한병인가 의심하고 새만 좌르륵 날아들어도 자룡의 사모창만 여겨 의심을 한다.6. 엄지장가락은 다 물어빠지고 새끼손가락은 삼동이 났네.에― 어머니 알면 매 맞겠네, 재전 깊은 정을 생각하면 죽으면 죽었지 못 놓겠네.7. 갈까보다, 말까보다, 임을 따라 갈까보다, 자룡이 월강하던 청총마 칩더타고 이날이시라도 한양을 갈까나.에― 널로 하여 얻은 병은 무슨 약을 쓰잔 말고, 형방패독산도 저버리고, 곽향정기산도 저버리고 살뜰한 님의 말씀으로 날 살려내게.「경발림」1. 천지변방이요, 이수는 요란한데 삼산반락 모란봉이요, 이수중분 능라도로다.에― 어디로 가자고 나만 졸라, 어디로 가자고 지그렁 직신, 일하기 싫고 낮잠 자기 좋으면 나만 졸졸 조리조리 따라 안성의 청룡 가세.2. 수락산 폭포수에 중구재 만리재며, 약잠재 누에머리, 용산 삼개로에 둘렀구나.에― 예산의 김덕선이 수원의 북문 지어, 나라의 공신되어 수성옥이와로 감투 눌러쓰고, 어주삼배 마신 후에 앞에는 모흥갑이, 뒤에는 권삼덕이, 소동옥이, 십만여겹의 쌍화동 세우고 어전풍악 꽝꽝치면서 장안 대로상으로 갖은 신래만 청한다.3. 바람이 불려는지 나무중동 반춤 추며, 악수장마 지려는지 만수나 청산에 구름이 솟아온다.에― 관동팔경 구경 가자, 강릉의 경포대·양양의 낙산사·울진의 망양정·삼척의 죽성루·고성의 삼일포·통천의 총석정·평해의 월송정·간성의 청간정이란다. 놀기 좋기는 남원의 광한루로다.4.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 법당 뒤에 느릅나무 가지마다, 서천 서역국서 나오신 불상 오십삼불이 분명하다.에― 서도팔경 구경 가자, 삼등의 황학루·성천의 강선루·개천의 무진대·영변의 약산대·강계의 인풍루·의주의 통군정·안주의 백상루·평양의 연광정이란다. 놀기 좋기는 부벽루 대동강이란다.놀양·사거리·중거리·경발림은 그 調의 名稱을 이름인데, 그 中에 놀양은 꽤 오랜 年祚를 가진 듯하다. 왜 그러냐 하면 그 結束에 「너출너출 박너출이 소고자루로 다 나간다」라는 말이 있는 까닭이다. 曲項葫蘆(호로박)에 金鈴을 綴하고 彩帛을 飾하여서 拊擊進退함은 打令의 本色이니 手鼓로써 그것을 대신하기 前에 「놀양」이란 노래가 벌써 있었다는 것을 알린다.「육자백이」산하지로구나―1.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묻어서 내려온다, 우장을 허리에다 두르고 거름 매러 갈까나.2. 천년을 살까나 만년이나 살으란 말이냐, 죽음에 들어서 노소가 있을까나, 살아생전에 마음대로만 노자.3. 춘산에 지는 꽃은 지고 싶어서 제가 지나, 사세 만부득 하여서 지는 꽃이로구나.4. 진국명산 만장봉이 바람이 분다고 제 쓰러지면 송죽 같이 굳은 절개 매 많이 맞는다고 훼절을 할까나.5. 백운청산 놀던 토끼, 동해 유수 흐르는 물에 목욕차로만 내려 왔다 우연히 별주부 따라서 수궁에 완경 가누나.6. 저 건너 초당 앞에 백 년 언약 화초를 심었더니, 언약 화초는 아니 나고 금년 이별 화초가 만발하였네.7. 만리장공에 하운이 흩어지고, 월색은 만정한데, 임이 저리 다정하면 이별한다고 잊을쏘냐, 이별 말자고 지은 맹세, 태산같이 믿었더니, 태산이 허망이, 무너질 줄 거 뉘가 알까나.8. 저 달은 떴다 대장이 되고 견우직녀는 전군후군이 되어 청천에다가 유진을 하고 은하수로만 건너갈 제, 동자야 행군취타를 하여라, 저 건너 해 떨어지는 곳으로 승부결단을 하리라.9. 방안이 컴컴 어둡다 하고 길 옆으로 창도질 말며, 임이라고 속에 있는 말 다하지 마라, 일후에 남되고 보면은 후회막급이라.10. 예보아라 동무들아, 이내 말을 들어를 보아라, 춘향이가 중형을 당해 거의 죽게 되었구나, 아이고 이 말이 웬 말인고, 어서 바삐 삼문거리로 나가보세.11. 임 잃고 임 생각하니 주야장천에 꿈 몽자요, 생각사, 탄식탄하니, 베개 넘어서 눈물 루라, 누었으니 잠이 오며, 앉았으니 임이 오랴. 임도 잠도 다 아니오고, 요 내 심장만 썩는구나, 우리도 언제나 허공 달린 저 달을 따라서 임의 창전에 빛될까나.  傳說에 依하면 우리 時代의 名唱 宋萬甲(송만갑)의 祖父가 이 노래를 作曲하여 내었다고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그 年代는 줄잡아도 純祖의 때인가 한다.「수양산가」1. 수양산에 고사리 캐고, 우수빈에 고기를 낚아, 이적의 빚은 술, 이태백 밝은 달이, 등왕각 높은 집에, 장건이 승사하고, 달구경 가는 말녕을 청하자, 바람 불고 눈비가 오려는지, 동녘을 바라보니, 자미봉 자각봉과 청전 밝은 달이 벽수벽운이 층층방곡에 절로 감아 흔들흔들.네에루 호세이의네루 호노네니, 나네루 이루허고 나이루 이루허고, 네루나니 나루나루허고, 너루네헤이 너니나노, 노너니 나이루, 나너니나노 너니나노 노너니나.2. 목왕은 천자로되 요지 연락하고, 항우는 장사로되 만영추월에 강개비가 하고, 명황은 영주로되 양귀비 이별 후에 마외역에 울었나니, 한벽당 청풍월에 만고천하 영웅호걸이 오늘같이 좋고 좋은 날 만나 아니 놀고 무엇을 하자느냐.「매화타령」좋구나 매화로구나.1. 안방 뒷방 가르닫이 완자문에가 제격이라.에야 데야 에헤야 에에 에헤루여라 좋구나 매화로구나.2. 네 귀 번뜩 장판방에 살진 큰아기 게 누었거라.에야 데야 에헤야 에에 에헤루여라 좋구나. 매화로구나.「도화타령」에헤 도화로구나.1. 도화로다, 도화로다, 도화 점점이 안주나 되고, 녹수 잔잔에 술이나 부어라 에헤 도화로구나.에헤 나 돌아를 간다, 에헤 나 돌아를 간다, 에헤- 에에 루 지루 에에루지루 에헤 지여루 도화로구나.2. 사당년아, 사당년아, 어두운 골목으로 가지를 말아라, 속옷 밑에 돌들어가면 거사놈 앞 길이 다 틀어진다. 에헤 도화로구나.3. 뒷마당에서 여사당 놀고 앞마당에서 남사당 논다, 사랑궁 속에서 골가보 놀아라 피천을 쓰라고 관자가 나렸다, 당백전 쓰라고 별관자 내렸다. 에헤 도화로구나.이 노래는 高宗 二年 즉 公歷 1865年의 前後에 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경복궁을 건축하는 역사에서 재정부족으로 피천(淸國小錢)과 당백전을 통용한 까닭이라. 「관자」는 지금에 이른바 상부기관의 명령서와 같은 것이다.「큰아기타령」1. 애오개 큰아기는 망건 뜨기로 나간다.에― 인모앞살 전주당에 공단 뒷막이 제격이라.2. 신재녕 큰아기는 올베 훑기로 나간다.에― 달대 갈대 훑개를 만들어 죽죽 소리가 제격이라.3. 수양산 큰아기는 풋나물 장사로 나간다.에― 고비 고사리 두릅나물일세 용문산 취가 제격이라.4. 함경도 큰아기는 명태장사로 나간다.에― 명태 동태 떼를 묶어 전라도 상고선이 제격이라.5. 임진강 큰아기는 월천꾼으로 나간다.에― 이 양반 업고 저 양반 업고 돈 두 푼 받기가 제격이라.「개골이타령」1. 개골 개골 청개골이야.에― 에헤에 나헤에야.2. 청개골이 찾으려면 미나리골로 가거라.에― 에헤에 나헤에야.3. 양류 천만산들 가는 춘풍을 잡아매.4. 흰 백자 붉은 홍자 고물고물이 단청.5. 남원 옥중 춘향이는 이도령 오기만 기다려.6. 푸릇 푸릇 봄배추는 찬이슬 오기만 기다려.7. 충청도 당대추는 방긋방긋이 열었네.8. 녹엽이 낙화된들 어느 나비가 돌아와.9. 따라 가거라, 따라가 여필의 종부라니 임을 따라서 가거라.「날개타령」1. 한량 중에 멋 알기는 고창의 신오위장이 날개라.에― 에헤에 나헤에야.2. 기생중에 멋 알기는 앵무 비취가 날개라.3. 사당중에 멋 알기는 영산홍이 날개라.4. 양반 중에 멋 알기는 대원대감 날개라.「乞僧타령」  일심정념 극락세계 나무아미로다. 야하에― 아등이면 도사님, 금상여래 금상마마 무량손님 여래만보살 염불동참, 서방에도 어진세존님, 평생원이 발원이오, 가자복록 효자충신 열녀절부 발원이오, 자손 곱게 길러, 부귀영화 명복백년 울려 가을마데, 자미공덕 금상마마, 선심 없이 남자 되며 공덕 없이 여자 되오, 고대광실 높은 댁에 금의옥식을 노적하고 남종여종을 부리실제, 태평성대로 잘 사옵다가 어느 후세에 돌아가서 착한 성현의 남자로 되리로다, 남자여자 원을 마오, 선심 없이 남자 되며, 공덕 없이 극락 가오, 주야장천 염불하오, 노는 입에 염불하오, 염불이면 불법이오, 불법이면 염불이라, 어서 바삐 시주하오.  이 노래는 경기도 풍덕 백룡산 흥교사의 중이 지은 것이다. 적어도 두 個의 男僧이 짝을 지어 乞粒할 때에 꽹과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놀양으로부터 걸승타령에 이르기까지는 佛系에 屬한 것으로 보게 되나니 그것이 居士寺黨의 놀음에서 나온 까닭이다. 居士라 하면 僧侶로서 還本한 사람을 이름인데, 元曉(원효)의 小性居士가 곧 그것이요, 또는 俗人으로서도 佛法을 嗜好하여 居土로 自稱한 일이 있는데 白樂天(낙천 백거이)의 白蓮居士가 곧 그것이다. 그 놀음에는 居士가 「모갑이」로 되고 寺院을 中心으로 하여 모든 것을 準備하느니 그래서 「자진山打令」에도 「慶尙道 해동문거리, 京畿 安城 利川 용인대, 黃海道 文化 九月山 佛堂에 거사사당년이 많이 모여…」가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寺黨이란 名稱이 생기어진 것이다.  丁茶山(다산 정약용)의 列擧한 八般雜流의 첫째는 優婆인데 方言으로는 舎堂이라(『牧民心書』 第三 禁暴條)하고 『朝鮮語辭典』(總督府 編纂) 寺字條에는 寺黨으로 적혔으니, 첫째의 것은 方言의 音을 漢字로써 그렇게 적은 것이며, 둘째의 것은 그 根本義를 잘 解明하였다.「성조(成造)풀이」에라 대신이야―1. 성조본이 어디메야, 경상도 안동 땅에 제비원이 본일이라, 제비원의 솔씨를 받아 소평대평에 던졌더니, 그 솔이 나서 점점 자랄 적에 밤이면 찬이슬 받고 낮이면 햇발을 받아, 소부등이 되었구나, 소부등이 점점 자라 대부등이 되었구나, 대부등이 점점 자라 청장목이 되었구나, 황장목이 되었구나, 에라하면 만신이야, 에라하면 대신이야 억만 대신이 나리만소서.2. 그 재목을 고이 길러 옥도끼를 둘러메고 영평가평에 들어가서 소산에 올라 소목을 찍고 대산에 올라 대목을 찍고 원근산천의 칡을 끊어 한 개 두 개 떼를 묶어, 양구양천 흐르는 물에 둥덩실 띄었구나. 이 물의 이 사공아, 고물의 고사공아, 허릿간의 화장아야, 물때 늦고 시 늦어간다.3. 고개 이쪽에 이 편수야, 고개 저쪽에 저 편수야, 곧은 나무는 곧 다듬고, 굽은 나무는 굽 다듬어, 삼각산 제일봉이라 자좌 오향 터를 닦아, 고대광실 집을 짓고 네 귀에 풍경을 달아라, 동남풍이 건듯 불기만 하면 웽가당 뎅가당 하네.4. 이 집을 지은 지 삼년 만에 아들이 나면 효자가 나고, 딸이 나면 열녀가 나고, 개가 나면 사자가 나고, 말이 나면 용마가 나고 소가 나면 우황이 든다.5. 하늘이 울었다 천둥대신, 땅이 울었다 지동대신, 우직근 작근 벼락은 대신, 삼대신이 내릴 적에 죄 있는 마누라는 가슴이 떨렁한다.6. 이 넋이 뉘 넋이냐, 동북간 지어머니 왕소군의 넋도 아니오, 공양미 삼백 석에 어둔 눈을 뜨단 말가, 심낭자의 넋이로다.7. 왔구나 왔구나, 천리라도 제가 오고, 만리라도 제가 오고 경상도 아기무당, 제일 경성으로 오입장 걸립을 왔네.8. 마누라, 마누라, 어디로 가시오, 만수산 넘어서 송림을 가오, 오백예단 장옷에 솔잎이 돋아 청청하기로 하월이라 하노라, 마누라 오시는 길에 거문고로 다리 놓고 가야금·양금으로 둥가 둥당실 내리소서.9.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아,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대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도 죽어를 지면 저기 저 모양 되리로다, 살았을 제 먹고 쓰고 거들어 거리고 놀아보자. 이 노래는 경상도 무당에게서 나온 것인데, 어떤 사람이 집을 成造한 後에 巫女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굿한 것이다. 그래서 이 굿의 이름을 成造풀이라 한 것이다.「무녀(巫女)의 노래가락」1. 유자도 나무이려만, 한 가지에 둘씩 세씩, 광풍이 건듯 불어, 떨어질 줄 왜 모르나, 우리도 좋은 님 만나, 저 유자 같이.2.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 수 절로 하니, 산수간에 나도 절로, 어려서 병없이 자란 몸이, 늙기라도 절로절로.3. 월중명 월중명하니, 배를 타고 금릉에 내려, 물아래 하늘이요, 하늘 가운데 명월이라, 동자야 잠긴 달 건져라, 완월장취.4. 용산삼개 공덕리하에, 늙은 돌이 있답데다, 아이야 거짓말 마라, 늙은 돌 어디 있니, 옛 노인 하신 말씀이, 노돌이라 하옵데다.5. 대천바다 한가운데, 뿌리 없는 나무가 나서, 가지는 열둘이요, 잎은 삼백예순이라,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으니, 일월인가.6. 어려서 글 못 배운 죄로, 순령수(巡令手)의 몸이 되어, 백사장 너른 뜰에, 영기(令旗) 꽂고 누었으니, 밤중에 긴 대답소리, 가슴이 덜렁덜렁.7. 친구가 남이었마는 어이 그리 유정한고, 보면은 반가옵고, 못보면 그리워서, 아마도 유정무정은, 사괴인 탓이라.8. 길나랍이 훨훨 다 날아나고, 임의 소식 뉘 전하리, 수심은 첩첩한데, 잠이 와야 꿈을 꾸지, 내게는 꿈조차 야속하니, 그를 슬퍼.9. 자룡아 말 놓고 창 쓰지 마라, 만인장졸이 다 놀란다, 장창은 어디다 두고, 두르나니 장검이라, 아두를 품에 품고 돌아든다고 장판교라.이 노래는 시조體로 된 것인데 서울 巫女들이 놀이굿 할 때에 부르는 것이다.「넋들이」1. 넋이로다, 혼이로다, 녹양심산에 초넋이야.나니나노 나니나노나 노나니가 산이라.2. 넋이라도 네나오고 혼이라도 네오나라.나니나노 나니나노나 노나니가 산이라.이 노래는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죽은 사람의 혼을 좋은 곳으로 가게 한다 하여 다리를 갈라주고 또는 친척으로 하여금 둠우에 담은 물속에 나타난 그 혼을 보게 한다는데, 그 굿을 함흥 이남에서는 「망묵」이라 한다.「산(山)念佛」1. 백팔염주를 목에다 걸고 향산사루만 돌아든다.나무아미 타불이라.2. 백화운림에 강산 두룸히 높이 떴다.이나누나요 나니난실나요 나도나니가 산이로다.3. 산에 올라서 옥을 캐니 이름이 좋아서 산옥이라.나무아미 타불이라.4. 심불로라, 심불로라. 백수한산에 심불로라.나무아미 타불이라.5. 저산 넘어 파를 심어 그 파 이름이 경파로다.나무아미 타불이라.6. 뜨어간다, 뜨어간다, 배뱅이 영안이 떠나간다.나무아미 타불이라.7. 성산에 최일 장군 마누라, 왕림하는 길에 무엇으로 다리 놓노돌다리 놓자하니 돌다리 가라 앉고, 흙다리 놓자하니 흙다리 풀어지고, 나무다리 놓자하니 나무다리 뜨네, 무엇으로 다리 놓을고, 오현금 탄일성에 기치창검으로 다리 놓게.나무아미 타불이라.  이 노래는 평안도 무당들이 놀이굿을 차리고 乞粒하는 때에 부르는 것이니 그 命題만 보아도 佛敎의 影響을 무던히 感受하였다. 括論에서도 말하였거니와 우리 조선에서 「샤머니즘」이 原始時代로부터 一種의 宗敎的 形態를 가지고서 近代에까지 내려 온 것이다. 三國時代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高麗時代에도 「簫管家家盡事神」이라는 安裕(안유)의 詩가 있었고, 李朝時代는 「大內로부터 群邑에 이르기까지 다 主巫가 있다는 李睟光(이수광)의 『芝峰類說』이 있었으니, 이것으로써 샤먼의 勢力이 傳統的으로 一般社會에 얼마나 伸張하였던 것을 可히 想像하겠다. 그런데도 「山念佛」은 샤먼의 領域에서 멀리 떠나서 佛敎와 合流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欺瞞과 搾取에 對한 巫·佛의 本質이 同一하므로만 說明할 바가 아니요, 事實上, 샤먼이 佛敎의 勢力에 눌려서 種種의 璄遇에는 그런 假面을 쓰게 되었다는 것으로써 說明하여야 된다. 여기에 對한 例證으로는 咸南 巫女들의 「도랑선비」굿을 드는 것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도랑선비굿」홑 일곱 살에 도랑선비, 어머니와 아버지 죽고, 외삼촌 집에 가서 열다섯 먹고 청청각시에게 혼사되고 장가가서 삼 년 만에 병들어 백약이 무효하고 죽게 될 적에 집에 돌아와서 오일 만에 죽었다. 청청각시 그 소식을 알자고 고대하다가 삼일 만에 문을 열어 놓고 앞의 길만 보는데, 한 사람이 올라오더니, 청청각시 집을 찾거늘 마주 나가 그 사람을 모셔 들여다 방안에 앉혀놓고 무슨 일로 내 집을 찾는가고 물었다. 그 사람이 옆차개에서 편지 일 장을 내어주거늘 받아보니 편지 속에 부고 일 장 있다. 그 부고 펼쳐보니 만단사정 다 적었다. 그 부고 받아 쥐고 고비·고사리·왕고비 같은 손으로 구름 같은 머리를 발발이 풀어 헤치고 울었든지 말았든지, 베개 너머 강수되고 베개 이쪽에 늪이 되고 보고지다, 보고지다, 내 남편 한번 다시 보고지다, 그렇게 탄식하는 때에 안의산 금산절 중이 동냥을 왔거늘 그 중과 청청각시 말하기를 동냥쌀은 달라는 대로 드릴 것이니 내 남편 도랑선비를 한번 보게 함이 어떤가, 그 중이 바랑 안에서 표주박을 내어 놓으면서 이 됫박에 한 됫박을 채워주면 네 남편 도랑선비를 다시 보게 하여 주마, 그러니 그 바가지에 쌀을 채워도 차지 않거늘, 내 남편 도랑선비를 먹이자던 쌀독에 거미줄을 휘휘 층층 끌어 던지고 세 독을 모두 퍼내어 와도 그 바가지에 차지 않거늘 할 수 없이 악발하니 그 중이 엵씨 한쌍을 내어주면서 이 엵씨를 심어서 열흘 말미를 주는 것이니 이 엵씨가 나서 자라거던 껍질 벗겨 삼 삼아서 우리 절 중이 삼천이니 고깔 삼천 개와 장삼 삼천 개를 만들되 꼭꼭 맞게 하여 주면 네 낭군 도랑선비를 보게 하여 주마, 그래도 뵈지 아니하고 또 그 중이 말하기를 청청각시 손에 기름을 발라 말리고 말리고, 닷새를 말리고 우리 부처님 앞에 불을 열 손가락에 켜들고, 물구리만 남아도 뜨겁다는 말 아니하면 네 남편 보게 하마, 그 불을 켜들어 거의 손이 타게 되는 때에 그 중이 말하기를 그 남쪽 벽상을 보라 하거늘 벽상을 바라보니 그때 보던 도랑선비 완연히 뵈거늘 깜짝 보고 말았다.「방아타령」1. 노자 좋구나, 노들강변 비둘기 한 쌍이 푸른 콩 한 알을 입에다 물고 암놈이 물어 수놈을 주며, 수놈이 물어 암놈을 주며, 암놈 수놈 어르는 소리, 늙은 과부 한숨 쉬고, 소년 과부는 에라 반보짐 싼다.에 에 에헤이야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이렁숭 저렁숭 흩어진 근심, 만화방창에 에라 궁글려라.2. 엣다 좋구나, 이십오현 탄야원에 불승청원 저 기러기, 갈순 한 대를 입에다 물고 부러진 죽지를 좔좔 끌며, 점점이 날아드니, 평사낙안이 에라 이 아니냐.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늙어지면 에라 못 놀겠네.3. 엣다 좋구나, 뽕따러 가세, 뽕따러 가서, 뒷집 후원으로 뽕따러 가세, 뽕도 따고 임도 보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겸사겸사로 에라 뽕따러 가세.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절반이나 늙었으니 다시 젊지 에라 못할너라.4. 노자 좋구나, 춘추절이 적막하여 개자취의 넋이로다, 면산에 봄이 드니, 불탄 잔디는 새파랗게 새 속잎 난다.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너는 뉘며 나는 뉘냐, 상산 땅에도 에라 조자룡이라.5. 노자 좋구나, 치어다 보니 만학은 천봉, 내려 굽어보니 백사지로다, 허리 굽고 늙은 장송, 광풍을 못 이겨 반춤 추고, 주란화각이 벽공에 걸렸다, 앵무 공작이 펄펄 날아든다.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진국명산 만장봉이, 청천삭출이 에라 금부용이라.6. 노자 좋구나, 뒷동산 노송지에, 자고 가는 저 화조며, 후원초당 백화중에, 놀고 가는 저 봉접아, 그립던 임 소식을 에라 전하여 주게.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세월아 네월아 가지 마라. 청춘소년이 에라 다 늙는다.7. 노자 좋구나, 강남서 나온 제비 한 쌍 박씨 하나를 입에다 물고 허공중천 높이 떠서, 이 집 저 집 다 버리고, 흥부의 집으로 에라 날아든다.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푸른 것은 버들이요, 누른 것은 에라 꾀꼬리라.8. 노자 좋구나, 하늘천자 따지땅에, 집우자로 집을 짓고, 날일자 열창문을 달월자로 달아놓고, 밤중이며 낮이며 만나, 별진 잘숙에, 거드러 거리고 노자.에 헤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삼산은 반락 청천외요, 이수중분은 에라 백로주라.이 노래는 新羅의 때, 百結(백결 박문량)先生의 「碓樂」으로부터 생기었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양산도」1. 에헤이에― 차문주가 하처재요, 목동이 요지 살구나무촌이라.에라 놓아라, 나 못 놓겠네. 능지를 하여도 못 놓겠네.2. 에헤에헤- 창포 밭에 금부어 논다, 금실금실이 생선국이라.에라 놓아라, 잡아 당겨라, 끄들어라, 그래도 못 놓겠네. 열네 번 죽어도 못 놓겠네.3. 에헤이에― 북망산천아 말 물어보자, 임 그리워 죽은 무덤이 몇몇이냐.에라 놓아라, 나 못 놓겠네. 죽으면 죽었지 못 놓겠네.4. 에헤이에― 너는 뉘며 나는 뉘냐. 상산 땅에도 조자룡이라.에라 놓아라, 나 못 놓겠네. 칼침을 주어도 못 놓겠네.5. 에헤이에― 가던 님은 잊었는지, 가고 영천 아니 온다.에라 놓아라, 나 못 놓겠네, 열네 번 죽어도 못 놓겠네.  이 노래의 名稱만은 그 本源이 新羅의 「陽山歌」에서 흘러 나온가 한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양산도」가 漢譯으로는 陽山徒로 되는 까닭이다. 陽山 一戰에서 郞幢大監 金歆運(김흠운), 大監 穢破(예따), 少監 狄得(적득), 少騎幢主 寶用郡(보용나) 等 四人이 다 節死한 거기로부터 그 노래가 생겼는데, 後人이 그 歌名의 尾末에 「徒」字를 더 添付한 듯하며, 또는 그들이 다 花郞徒에 屬하였을지니 그것으로써도 「徒」字를 더 添付할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지금 이 노래의 內容이 歌名의 本義에 背馳된 그것은 時代를 따라서 여러 번 變轉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농부가」1. 예봐라 농부 말 들어,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사농공상 직업 중에, 우리 농부가 제일일세.에헤 에 에헤에로 상사지야.2.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교민화식 하온 후에, 농사밖에 또 있는가.에헤 에 에헤에로 상사지야.3.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봄에 밭 갈아 씨뿌린 후에, 우순풍조가 제일이라.4.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춘하추동 순환함은 우리농부를 위함이라.5.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거두어, 부모처자를 봉양하세.6.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저 남 제비 묻어온다, 우장 두르고, 김 매세.  이 노래는 三南地方의 農夫들이 두레를 지어 農作하는 때, 揷秧 또는 除草하는 그 때에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부르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것을 볼 때에 原始的 氏族社會에서 共同耕作하던 그 餘風을 다시 想像하게 된다.「咸北농부가」1. 농부 일생에 무한 일하니, 춘경추학은 연년사라.얼널널, 얼널널이 상사나 지야 우리 집 농부는 상농부라.2. 우순풍조 백곡 등하니, 격양가 절로 난다.얼널널, 얼널널이 상사나 지야 우리 집 농부는 상농부라.「경복궁타령」1. 을축 삼월 초 사흩날, 경복궁 역사가 시작이라.에 에헤이 에야 얼널널 널이고 방아홍에로다.2. 도편수란 놈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 갈팡질팡한다.에 에 에헤야 에헤야, 얼널널 널이 만화방창에 궁굴려라.3. 남문을 열고 바라를 치니, 개명산천에 날이 살짝 밝았네.4. 남문 밖에 이탁주 장사년아, 탁주 한 잔 못 사먹어도 탁탁이만 걸러라.  경복궁은 임진倭亂(임진왜란, 1592)의 때, 掖隷와 亂民의 손에서 燒燼되었는데, 高宗 二年 즉 公歷 1866년에 다시 改建하게 되었다. 그 當時의 工事에 義務的으로 服役하는 人民들의 속에서 이 노래가 생겼다.「화포타령」1. 화약 염초 내 담당할게, 화포나 도영장 신다지만 시켜라.아하아 둥둥, 어허허 둥둥, 만판 멋으로 짓족여만 달라네.2. 사영가세, 사영가세, 구월산 밑으로 큰아기 사영을 가세.3. 은가락지 끼던 손에 호미자리가 아이고 웬 말인가.4. 구경 가세 구경 가세, 정반산 위로 달구경 가세.5. 모시수건 쓰던 머리에 물빵구리가 아이고 웬 말인가.  이 노래는 公歷 1894年 東學亂 한창 熾盛하는 그 때에 생겼는데, 그 調는 「오독떼기」처럼 부른다.「닐리리 타령」1. 비가 온다, 애고나 비고 온다, 아산의 둔포서 애고나 비가 온다.닐 닐 닐닐 느리고 전사 말 말아라, 서서섬마 둥둥 애고나 성화로다.2. 간다간다 애고나 나 돌아간다. 떠떨떨거리고 애고나 나 돌아간다.이 노래도 公歷 1894年에 생겼는데, 그때, 東學亂의 關係로서 日淸戰爭(청일전쟁)이 牙山에서 일어남에, 그 戰爭의 狀態와 避亂民의 情景을 그려낸 것이 곧 닐리리 타령이었다.「오독떼기타령」1. 오독떼기 중추월에 달도 밝고 명랑하다.지두나 덩실, 지두나 덩실, 던져 버리고 여기도 경사로다.2. 만첩청산 물소리 수루룩, 까마귀 펄펄 날아든다.「긴난봉가」1. 난봉이 났네, 난봉이 났네, 남의 집 외아들 또 난봉이 났네.에 에 에헤이야, 어러마 둥둥 내 사랑이라.2. 슬슬 동풍에 궂은 비 오구요, 시화나 연풍에 임 섞여 노세.3. 정방산성에 초목이 무성하고나, 밤중에 울 닭이 대낮에 운다.4. 담안에선 잡년 잘 가라고 울고, 담밖에선 잡놈 잘 있으라고 운다.5. 간 곳마다 정들여 놓고서, 이별이 잦아서 나 못 살겠네.6. 갈 적에 보고 올 적에 보니, 보기만 하여도 정이 든다.「자진난봉가」1. 넘어간다, 넘어간다, 잦은 난봉가 넘어간다.에 에 에헤헤 에에에헤이야 어라마 둥둥 내 사랑아.2. 깔낏깔낏 보지만 말고 속내를 풀어 말 좀 하렴.에 에 에헤에 에 에헤이에야 어야듸야 내 사랑아.3. 임의 집은 성안이요, 요내 집은 성 밖이라.4. 성 넘어 갈적에는 개가 짖고, 품안에 들적엔 닭이 운다.5. 원수로다, 원수로다, 닭·개 짐승이 원수로다.6. 나는 좋아, 나는 좋아, 총각의 낭군이 나는 좋아.7. 영감 잡놈을 보면 성이 버럭 나도, 총각아저씨 보면 입이 헤벌적하누나.「신난봉가」1.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임을 따라서 나 돌아간다.에 에 에헤이 에헤에 에야 어라마 둥둥 내 사랑아.2. 녹아지 향나무에 쌍그네 매고, 너와 나와 쌍그네 뛰세.3. 오르며 내리며 잔기침 소리에, 맑숙한 냉수가 내 목이 메누나.4. 간다하면 아주 갈까, 아주 가면 잊을쏘냐.5. 남산이 고아 바라를 볼까, 임 계신 곳이니 바라를 보지.「개성난봉가」1.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연시 돌아든다.에헤에 에라 좋고 좋다 어화나 둥둥 내 사랑아2. 길나랍이 훨훨 다 날아가고 주렴주렴 내 사랑아.3. 간다 간다 내가 돌아간다, 떠떨거리고 내가 돌아간다.4. 산도 설고, 물도 선데, 누구를 바라고 여기를 왔나.「숙천난봉가」1. 인생 백 년이 여주마로다, 아니나 노지를 못하리라, 나무라도 고목되면 오던 새도 아니 오고, 꽃이라도 십일홍되면 오던 나비도 아니 오고, 임이라도 늙어지면 오던 정판도 아니 온다.에 에 에헤이야아 어라마 둥둥 내 사랑이라.2. 우투룩 두투룩 저기 저 남산 보게, 우리도 죽으면 저 모양이라, 살은 썩어 물이 되고, 뼈는 썩어서 진토 되고, 삼혼칠백이 흩어질 제, 어느 마누라가 날 불쌍하다 할까.3. 내 돈 없으면 은행돈·전당돈·백전·은전·지전을 다 낼지라도 족집게 석 경을 내 사다줄게, 이마나 눈썹을 여덟 팔자로만 지어라, 이마나 눈썹을 지을 줄 몰라, 속의 속눈썹 다 뽑아놓고 물독을 안고서 그림자만 본다.4. 물동이는 움물 금정 귀틀에다 놓고 수수밭 속으로 기어기어만 든다. 너도 기는데 나도 좀 기자, 자주자주 걸어라, 이마 벗어질라, 작은 삼대 쓰러지고, 굵은 삼대는 밤 출제, 오장육부는 순력을 돌고, 삼백육십사흘에 초단 풀러 맺혔구나.「개타령」1. 개야 개야 검정얼룩의 수캐야, 밤사람 보고 네가 함부로 짖느냐. 에 에히에야 에에헤이에 요개, 방정맞은 개, 망망, 앙앙, 밤사람 보고서 함부로 짖다가는 개미허리가 두 동강 나고, 네 각 떠서 솥 안에 넣고 솟뚜껑을 덮고서 비지땀 내리라, 앗아라 말아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2. 앵두나무아래 병아리, 한쌍 노는 것, 총각의 낭군에 에라 몸보신감일세.에에히에헤이야 에에히에헤야, 수리 후려, 쥐 닭다 차갔다, 차가다니 무엇이 차가서, 저 남산 솔개가 다 차갔다. 한 마리는 쥐똥구멍을 파먹기, 갖다가 술안주 했지, 맛 좋지, 쌉쌉하더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3. 놀양의 대가리 배채밑구멍 상투, 언제나 갓과서 내 낭군 삼을까.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나는 가겠소 얘 가단 말이 무슨 말인가, 눈 꼭 감고 삼년만 참아라, 삼년이 낼 모레만 말이오, 나는 가겠소, 닥채는 바람에 코집이 터져서 당홍물 나온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4. 시집의 살이는 트자에 니을을 했네. 시아비 잡놈 다리고 술추렴이나 가세.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그 집안 잘 되었다, 시아비 먹고 며느리 먹고 막 먹누나, 잘 되었지 부어라 먹자,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5. 영감 잡놈을 보면 통골이 쑥쑥 아파도, 총각의 아저씨 보면 배속이 시원하구나.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영감의 김치는 목침이만큼 썰어서 양잿물을 뿌리고, 총각낭군의 김치는 숙지로 살살 갈겨서 설탕을 가입하여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6. 족집게 석경은 내가 사다가 줄게, 이마나 눈썹은 여덟의 팔자로 지어라.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저런 흉물 보았나, 이마눈썹을 지을 줄 몰라, 속의 속눈썹 다 뽑아놓고 물독을 안고서 그림자만 보누나, 잘 되었다 속눈썹 없어 남경 잘 보겠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7. 조앙문 밖에 백지 한 장 걸린 것, 총각낭군의 혼백상이라.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열남은 식구는 다 굶어 죽어도, 혼백상은 똥집만 꾸쳐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8. 섣달이라 그믐날 시집의 장가를 갔더니, 정월이라 초하룻날 맹간이 한 죽을 낳았네.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몇 마리냐 돼지처럼 한 죽을 낳더라, 그렇게 많이, 세낱이만 낳더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9. 뒷문소리가 더덜석 나더니, 아기씨 숨결이 장단 맞춰 높았네.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원앙금침은 중솟음하고 삼팔이불은 꼽장춤 추고 양다리 두짬에는 호나팔 부누나, 호병대 불러서 보초를 세우고 발뒤축에 다 흰댕기 드리고 반고수 머리에 파망을 씌우고 맞상자 불러서 발상을 시켜라, 아이고, 아아고 너는 왜 우니, 중동이 시큰시큰해서 운다, 너는 왜 웃니, 나는 좋아서 웃는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10. 놀앙의 대가리 물렛줄 상투, 은동곶 사달라고 발버둥이만 친다.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너 멋들었구나, 멋들었기 은동곶 사달라지 어디서 사니, 저 안동상점에서 샀다, 얼마, 조금 주었네, 백동 삼환 주었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11. 푼돈 열 냥을 얻어서 민며느리를 얻었더니 십년 만에 시아범 이마에 칼 꽂기만 하누나.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야, 작작 꽂아라, 시아범 번대멀 이마에 썩살이 박힌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12. 새벽동자를 하려면 바가지 싸움만 붙이고, 물 길러 가라면 엉덩이세만 쓴다.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야, 작작 둘러라, 시아범 털휘양 쓰고서 귀 날아난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몽금포타령」1.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둥둥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에헤이에헤야 임 만나 보겠네.아하아 에헤 에헤이 에헤야 나 혼자 살라나.2. 임도 보구요, 술도 먹구요, 몽금이 개암포 들러나 가겠나.3. 갈 길은 멀고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성황님 조른다.4. 돈 실은 배거던 들러나 가구요, 임 실은 배거던 바루나 가시오.5. 사공의 아저씨 요내 말 들어보, 오늘밤 꿈에도 사곰님 보았지.6. 앞강에 뜬 배는 임 실은 배구요, 뒷강에 뜬 배는 낚시질 배로다.7. 임 실러 갈 적엔 반돛을 달더니, 임 실어놓고서 찬 돛을 다누나.  「난봉가」로부터 「몽금포타령」까지는 黃海道의 産物이다. 人間의 性的 關係는 秘密이 아니건마는, 그러나 秘密에 돌리는 것은 社會道德으로 보아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打令」은 傷風敗俗에 이르도록 너무나 露骨化하여 우리로 하여금 『毛詩』三百에서 鄭·衛(정나라·위나라)의 淫風을 보는 듯한 느낌을 얻게 한다.「풀무타령」1. 쩍물은 흘러서 한강수 되고, 동쇠는 녹아서 천태산이 된다.에이 얼싸 방 걸어 놓고 네 불고 나가자.2. 십육사 골품기 처녀동자 논다.에에 에헤야 신선품기로다.3. 이번 성녕 잘되면 만대작이 낸다.4. 저 건네 종종바위 우선우선한다.5. 강게칠평 몽통다리 네-날- 살려라.6. 이번 성녕 잘되면 환고향을 한다.7. 토수래 저고리 자지고름 자리야 네-날- 살려라.  이 노래는 甲山 고진동 銅店의 노동자가 지어낸 것이다. 이것이 생기어진 年代에 있어는 詳言할 수 없으나 생각건대 英祖 十七年 後의 일이겠다. 그때에 吹煉法을 解得지 못하여 遂安·寧越의 銅鑛을 廢棄하였다 하니, 孝宗의 때, 李義立(이의립)의 發明한 鐵의 吹煉法이 後世에 傳하치 못하였던가? 高麗 末年의 靑기와처럼 그 發明法도 秘密에 묻히고 말았던 모양이다.「애원성」1. 노자 노자 저-젊어서 놀자, 나이 많고 병들면 네가 못 노리라.에 에라 절싸 네로다, 아무리 보아도 널과 내로다.2. 오르며 내리며 발구주 소리에 물만 차리밥이 목이 깡깡 멘다.3. 갈적에 보니까 청-청산이더니, 올적에 보니까 황산이로다.4. 우수경칩에 대동강 풀리고, 정든 님 연설에 아내 속이나 풀린다.5. 세월아 네월아 네 가지를 말아라, 알뜰한 청춘이 다 늙어간다.公歷 1890년頃에 端川 梁基鳳(양기봉)이 이 노래를 지었다는데, 그 調는 「景福宮打令」의 變體인 듯하나, 甚히 悲哀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怨訴를 느끼게 한다.「흥타령」1. 저녁을 먹고-흥, 썩 나서니 흥, 겨묻은 손으로 날 오란다.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구나 흥.2. 오르며 내리며 흥, 잔기침 말아라 흥, 물만 이밥이 목이 메누나.3. 성화성화 흥, 황주월편에 흥, 체다리 성화라.4. 저 년의 입은 흥, 꿀단지지 흥, 이놈도 빨고, 조놈도 빠누나.5. 이년의 손목은 흥, 대동문 걸쇈지 흥, 네놈도 당기고 저놈도 당긴다.  내가 어렸을 때, 公歷 1888年頃에 이 노래를 처음 듣게 되었는데 그 때에는 그 調가 매우 素朴하였으니 아마 江原道에서 비로소 생기어진 그 形態를 그냥 가지고 있었는 듯하다. 그 後에 점점 洗鍊을 받으면서 서울調 또는 宋萬甲(송만갑)調가 있게 되었다.「서울 흥타령」1. 너는 누구며, 흥, 나는 누구냐 흥, 상삼 땅에도 조자룡이로다.엣다, 짓다 흥, 경사가 났네 흥.2. 천안 삼거리 흥, 능수버들은 흥, 제멋에 지쳐서 넘늘어졌나네.3. 은하작교가 흥, 꽉 무너졌으니 흥, 건너갈 길이 난감이로다.4. 달은 밝구요 흥, 명랑한테 흥, 임의 생각이 절로 나누나.「아리랑타령」1.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노다 가게.2. 뒷동산의 고목 나무 나와 같이만 속 썩는다.3. 뒷동산의 박달나무 지르마 가지로 다 나간다.4. 아리랑타령을 정 잘하면 가는 아씨가 돌아선다.5. 저기 가는 저 마누라 나를 오라고 손질한다.6. 너 오라고 손질했나 내 길이 바빠서 활개 쳤네.이 노래도 강원도에서 생기어진 것인데, 흥타령과 同時에 流行하였다.「긴아리랑」1. 기차는 가자고 고등을 트는데 친구는 비어잡고 낙루락루만 한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속에서 노다노다 가게.2. 인생이 살면은 한 백년 사나뇨, 살아서 생전에 마음대로 놀까나.3. 날 버리고 가는 님은 십 리를 못 가서 발탈이 나네.「오호타령」1. 한강수라 맑고 깊은 물에 풍덩실 빠져 애고 내가 못 죽어.에야 에야 에야 어야 어야 얼사마 중기지둥에 내 노던 사랑아.2. 문영석자 잃었다고 야단이 벌커덕 났는데, 새 버선 신고 애고 왜 왔다가나.3. 옥사장아 문 열어라, 옥중에 갇힌 춘향이 내가 잠깐 보련다.4. 장롱 안에 옥양목 버선 있는 것, 총각의 낭군에 에라 선사감일세.5. 세월아 네월아 오고 가지마라, 우리네 인생 다 늙는다.「도라지타령」1. 도라지 캐러 간다고 핑계핑계를 하더니, 총각낭군 죽은데 삼우제 지내러 간다. 응 응 으흐야 에에에헤야 어야란다 듸여라 네가 내 사랑이라.2. 석탄백탄 타는데 연기가 물석 나더니, 요내 가슴 타는덴 연기도 아니난다.3.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나는 참말 좋데, 총각의 낭군이 나는 좋아.4. 우리 나 두 사람이 요렁을 하다가 아이나 들면은 어찌를 하나.5. 아이가 들든지 영감이 들든지 실근실근 눌러만 주게.이 노래는 公歷 1908年頃에 새로 流行되었다.「양류가(楊柳歌)」1. 양류간에 앉은 꾀꼬리 제비만 여겨서 후린다.에 후려쳐 더덤석 안고서 허허 이것이 내 사랑.2. 양류가 천만사인들 가는 춘풍을 못 잡아매.에 후려쳐 더덤석 안고서 허허 요것이 내 간간.3. 나라 나라 네 오나라, 네가 와야 나를 보지.4. 널로 인해 병 들었으니, 네 수단으로 날 살려라.4. 천리로다 만리로다. 임 계신 곳이 천리라.이 노래는 「興夫傳」이 世上에 널리 流行되고 「박타령」과 「제비歌」가 생기어진 그 後에 되었을 것이다.「구운밤타령」1. 중아 오냐, 대사 중아 옳다, 네절 뒷산이 허허 모두 다 명산이란다, 오냐, 옳다.구운 밤이오― 삶은 밤.2. 너도 병정 오냐, 나도 병정 옳다, 두 병정이 허허 모두 다 조련을 하누나, 오냐, 옳다.구운 밤이오 삶은 밤, 삶은 밤 밑에는 맘밤, 맘밤 밑에는 자짝밤, 자작밤 밑에는 도톨밤이로다. 오냐, 옳다.  이 노래는 公歷 1900年頃에 流行된 것인데, 서울에서 구운 밤 장사가 목청 좋게 부르던 것이다.「담바구타령」담바구야, 담바구야, 동래나 울산에 담바구야, 너의 나라는 어떻길래, 대한의 나라로 나왔느냐, 금을 주려 나왔느냐, 은이나 주려고 나왔느냐, 금도 아니오, 은도 아니오, 담바구씨를 가지고 왔네…  담바구란 말이 아메리카 土人에게 있어는 「다박고」란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流入되기는 光海主의 時代인데, 그 流入한 歷路를 말한다면 애初에는 아메리카로부터 유럽에, 거기로부터 南洋에, 또 거기로부터 日本에, 또 거기로부터 우리나라에, 그리고 滿洲를 거쳐서 中國에까지 그런 順次를 밟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流行되기는 公歷 1900年頃이었으나, 그 씨가 日本으로서 우리나라에 건너온 事實을 歷歷히 說明하여 준다. 그 名稱이 漢譯으로는 「淡巴菰」로 적히우고, 또 다시 一轉하여 「담배」로.「길군악(길軍樂)」1. 추야(秋野) 空山 저문 날에, 황국단풍 다 늦는다.지야 지야 지야자쟈, 얼싸 좋다 좋은 경개.2. 구경가세 구경가세, 강릉 경포대로 달구경 가세.3. 달은 밝고 명랑한데, 고기 낚아서 술 바꾸네.4. 백일청천 뜬 기럭아, 임의 소식을 전하고 가게.황해도 地方의 風流男女가 늦은 가을의 黃菊丹楓을 구경하기로 山놀이를 갔다가 夕陽이 되면 半나마 취한 걸음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 노래를 서로 唱和한다.「신고산타령」1. 우루루, 우루루 기차 가는 소리, 신고산 큰아기들이 에루와 반봇짐 싼다.어항 어항 어허 어러마 듸여루 내 사랑.2. 이 산 너머로 가야 할까, 저 산 너머로 가야 할까. 총각낭군 데리고 숲을 놀음을 할까.3. 신작로가 넓어서 몸에 횡횡 도나, 동남풍 바람 불어 궁덩이 살살 돈다.4. 자동차 바퀴는 서양기계로 놀고, 우리 님 사랑은 이내 품에서 논다.5. 자동차, 기차는 구라파(유럽) 기계로 놀고, 맛나까 기계는 자연적으로 논다.6. 네 잘 났나, 내가 잘 났나, 양신이 정들면 모두 일색이라.7. 울타리 꺾으면 제가 나온다더니, 한 모퉁이를 흔어도 꼼짝이 없다.  이 노래는 京元線을 敷設하던 公歷 1914年頃에 생기어진 것이다.「이팔청춘가」1. 이팔은 청춘에 홀과부 되구요, 설움의 사정을 누구에게 말할까.2. 눈물은 지어서 한강수 되구요, 한숨은 쉬어서 동남풍 되누나.3.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구요, 인생이 늙기는 꿈결이로다.4. 날 데려 가게요 날 모셔 가게요, 한양의 낭군이 날 데려 가게요.5. 날 데려 가면은 제비똥 되구요, 안 데려 가면은 전막난이로다.6. 조부님 산소에 화산이 터져서, 우리나 삼동세 떼난봉 났구나.이 노래는 公歷 1915年頃의 前後에 생기어진 것이다.「선류가(船遊歌)」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러를 가세, 배를 타고 놀러 가세, 지둥덩기어라 둥게둥덩덩시루 놀러 가세.1. 앞집이며 뒷집이라 각위각집 가인들은 장부간장 다 녹인다.동삼월 게삼월아 회양도 봉봉 돌아를 오쇼, 에남아 에일손이 돈 받소.가던 님은 잊었는지, 꿈에 한번 아니 온다, 내 아니 잊었거던, 전들 설마 잊었으랴.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러를 가세, 배를 타고 놀러를 가세, 지둥덩기여라 둥게둥덩덩시루 놀러 가세.2. 이별이야 이별이야, 이별 리자 내신 사람, 나와 백년 원수로다.동삼월 게삼월아, 회양도 봉봉 돌아를 오쇼, 에남아 에일손이 돈 받소.살아 생전 새이별, 생초목에 불이 나니, 불꺼줄 이 뉘 있는가.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러를 가세, 배를 타고서 놀러를 가세, 지둥덩기여라 둥게둥덩덩시루 놀러 가세.3. 나는 죽네 나는 죽네, 임자로 하여 나는 죽네, 나 죽는 줄 알양이면, 불원천리 하련마는.동삼월 게삼월아, 회양도 봉봉 돌아를 오쇼, 에남아 에일손이 돈 받소.박랑사중 쓰고 남은 철퇴, 천하장사 항우를 주어, 깨치어라 깨치어라, 이별 두 자를 깨치어라.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러를 가세, 배를 타고서 놀러를 가세, 지둥덩기여라 둥게둥덩덩시루 놀러 가세.「배떠나기」1. 좌우산천을 바라를 보니, 안개는 자욱하고, 동서남북이 다 보이지 않네, 사공영좌님 쇠 놓아보쇼, 평양의 대동강 어디로 붙었나, 지와차.에헤에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2. 천생 만민에 필수지직으로 벌어먹는 꼴이 각각 달라, 우리는 굳해서 선인이 되어 먹는 밥은 사자밥이요, 자는 잠은 칠성판이라 하길래, 옛말 삼아 들었더니, 이번 길 연파만리, 수로창파를 불려를 갈 제, 우리도 언제나 부모동생을 또 다시 만날까, 지와차.에헤헤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3. 배머리는 빙글빙글 돌고, 물소리는 출렁출렁 태산 같애여 놀 떠는데, 치는 빠져 두엉치배 되고, 바다에 취하는 것은 돌보다도 더한 것이라, 배는 취에 지끈 받히어 배쌈은 쪼개져, 검은 물은 콸콸 솟아들고, 돛대는 부러져 삼동강 나고, 깃발은 찢어져 산산이 헤어질 제, 사십여 명 동무를 다 잃어버리고, 단 세 인간이 남아 돛대 찾고, 물에 뛰어 들어가니, 갈매기란 놈은 잔등을 파고, 상어란 놈은 발목을 잡아 다닐 제, 세상에 사람이라고 생겨를 났다가 강호의 어복중 장사를 나 어찌하리오 지와차.에헤에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4. 돛대 차고 물에 들어가 망망대해 중에 단 세 인간이 살아를 나서 널조각을 타고, 이리저리 불려를 다닐 제, 마침 고향 배를 만나 건저주기로 살아를 나서, 그리 한참 들어를 갈 제, 산이라도 예보던 산이요, 물이라도 예보던 물이라, 북을 두리둥둥 울리면서 또 한참 들어를 갈 제, 중추팔월 십오야에, 광명 좋은 달이 둥두러저 밝은데, 청천에서 울고 가는 외기러기, 짝을 불러 슬피만 울 제, 아무 생각도 다 아니 나고, 동정식하던 동무의 생각에 콧물이 쪼루룽 나누나 지와차.에헤에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5. 몇 날 몇 달을 불려를 가서 고향이라고 찾아를 가니, 부모 동생이며 일가친척 백명 척권이 일시에 내달아라, 날을 부여잡고, 대성통곡하며 하는 말이 임자가 살았나 죽었나, 죽었나 살았나, 혼이 왔나 넋이 왔나, 넋이 왔나 혼이 왔나, 임자 나간 날을 생각하니, 오늘이 꼭 대상날이올세, 그리 한참 슬피 울제, 백일이 무요(無曜)하고, 산천초목이 다 슬퍼하는데, 황릉여산에 두견이 울고, 창파녹암에 잔나비 휘파람 소리에 장부의 비회간장이 다 녹아나누나 지와차.에헤에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6. 윤화윤생을 다 겪고 나니, 황국단풍이 다시 돌아오누나 지와차.에헤헤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  「船遊歌」와 「배떠나기」의 생기어진 年代는 알 수 없으나, 그 發生地에 있는 分明히 平安道라고 指摘하겠다. 그리고서 또 더 깊이 생각한다면 平安道의 中에도 平壤地方이라는 信念이 저절로 일어난다. 어째서 그렇다고 할까? 平安道에서 船遊라면 먼저 大同江을 聯想하게 되고, 배 떠나기에는 「平壤의 大同江 어디로 붙었나」의 말마디가 있는 까닭이다. 그뿐 아니라, 그 두 개의 노래 속에는 地方語가 特히 섞이어 있다. 例를 든다면「오쇼」. 회양도 봉봉 돌아를 오쇼 (船遊歌)「님자」. 임자로 하여 나는 죽네 (船遊歌)「보쇼」. 사공영좌님 쇠 놓아보쇼 (배떠나기)「올세」. 오늘이 꼭 대상날이올세 (배떠나기)「님자」. 임자가 살았나 죽었나 (배떠나기)「휘파람」. 잔나비 휘파람 소리에 (배떠나기)  휘파람이란 말은 平安道에서뿐 아니요, 함경도에도 또한 慣用하는 것이지만, 南方에서는 그와 달라서 「수파람」이란 말을 共通히 使用한다. 例하면수파람 큰 한소리에 [金宗瑞(김종서)의 時調]잔나비 수파람할 제 [鄭澈(정철)의 「將進酒」]「장타령」왔소― 설이가 설이가 각설이, 얻어먹는 각설이, 어제 장에 올라다, 볼 일이 있어서 못 오고, 오늘 장에 왔소, 무슨 타령으로 들어가나, 장타령으로 들어간다.올랐다, 내렸다, 사다리장 올라나려다 못 보고깡장 뛰었다 노루장 오금이 꺾여서 못 보고, 와싹 바싹 담배장 부서져서 못 보고,와깍 데깍 사기장 깨어져서 못 보고,애고 대고 곡산장 제복이 없어서 못 보고,칼로 찔렀다 피난장 절린에 잡혀서 못 보고,제 어미 붙고 대명장 법률이 중해서 못 보고,품배, 품배 잘한다, 네 못하면 내 할나, 이 대문을 다 버리고 또 한 대문 들어간다, 무슨 대문으로 들어가나, 투전풀이로 들어간다.일자 한 장 들고 보니, 일월이라 일일 날은 일년중 제일이요, 남녀노소 오락가락, 신년례가 장관이오.이자 한 장 들고 보니, 이월이라 한식날은, 개자추의 넋이 왔다, 찬밥에 게워 못 살고,삼자 한 장 들고 보니, 삼월이라 삼일 날, 연자새끼 날아들어, 옛집을 다시 찾고,사자 한 장 들고 보니, 사월이라 초팔일 날, 이집 저집 등불일세, 낮보다도 밝고나,오자 한 장 들고 보니, 오월이라 단옷날은, 천중지 가절이라, 녹의홍상 이이들은, 오락가락 노니면서 추천장을 보는구나.육자 한 장 들고 보니, 유월이라 유두날, 홍로 중에 덥고 덥다, 할 일은 별로 없고, 밀전병이나 하여라,칠자 한 장 들고 보니, 칠월이라 칠석날은 견우직녀가 그리워 살다, 일 년 일차를 상봉하여, 만단설화 다 하누나,팔자 한 장 들고 보니, 팔월이라 추석날은, 백곡이 새로 나고, 세월이 풍등하니, 우리 같은 각설이, 마음대로 놀아보세.구자 한 장 들고 보니, 구월이라 구일 날은 천리타향 고객들은, 집생각이 간절하다.장수 한 장 들고 보니, 시월이라 십오일에 이산 저산 바라보니 등산하던 날이로다.투전풀이 다하고 또 한 대문 들어간다, 무슨 대문으로 들어가라, 귀타령으로 들어간다.외발 가진 돌쩌귀, 두발 가진 까마귀, 세 발 가진 퉁노귀, 네 발 가진 당나귀.어엉 얼싸 잘한다, 이 대문을 버리고, 덕타령으로 들어간다.산에 올라 곰의 덕, 둘우에 나려 원두의 덕, 밥 잘 먹기는 하느님 덕, 돈 잘 쓰기는 부모의 덕, 옷 잘 입기는 처권의 덕, 술 잘 먹기는 친구의 덕.이 대문을 버리고, 첨지타령으로 들어간다.거년 첨지는 구첨지, 금년 첨지는 신첨지, 새빨갛다 홍첨지, 바가지 뚝뚝 박첨지, 물 가운데 이태백이.한푼 주―여러 대문을 하고 나니, 배가 고파 못하겠소, 우리 같은 각설이, 돈을 많이 주어야, 자손이 창성하고, 부귀는 영원하리라.二. 詞李聾巖(농암 이현보)의 「漁父詞」  聾巖 李賢輔(농암 이현보)는 燕山朝에서부터 오랫동안 宦海에 出沒하였다. 中宗 三十七年(1542年)에 陶淵明(도연명)의 「歸去來辭」를 效嚬하여 노래를 짓고 故鄕에 돌아왔다. 그렇게 錦衣로 還郷한 後에 「聾巖歌」와 「生日歌」를 지어서 自身의 榮光을 자랑하였다. 여기에 말하는 「漁父詞」와 「漁父短歌」는 明宗 四年(1549年)에 지었나니, 그 때는 그의 逝世하기 바로 六年 前이었다. 이 「漁父訽」의 完成에 關하여는 退溪 李滉(퇴계 이황)과의 書信往復이 數次 있었는데, 그래서 同春(동춘 송준길)은 그것을 退溪(퇴계 이황)의 作으로 하여 冊中에 謄置하고, 善歌者 洪柱石(홍주석)을 시키어 노래한 일까지 있었단다.(『同春別集』)1. 雪鬢漁翁住浦間하니, 自言居水勝居山을, 배 띄어라, 배띄어라, 早潮纔落晩潮來라.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倚船漁父一肩高라.2. 靑菰葉上에 凉風起하고, 紅蓼花邊에 白鷺還을 닻 들어라 닻 들어라, 洞庭湖裏 가귀풍을.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帆過前山 忽後山을.3. 盡日泛舟煙裏去하니, 有時搖棹月中返을, 이어라 이어라, 我心歸處自忘歸라.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鼓枻乘流無定勢라.4. 萬事無心一釣竿하니, 三公不換此江山을, 돛 지어라 돛 지어라, 山雨溪風捲釣絲라.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一生蹤迹이 在滄浪을.5. 東風西日에 楚江深하니,一片靑磯萬柳陰을, 어으라 어으라, 綠萍身勢白鷗心을.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隔岸漁村兩三家라.6. 濯纓歌罷주정장하니, 竹徑紫門 猶未關을, 배 띄어라 배 띄어라, 夜泊秦淮近酒家를.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하니, 臥久篷底獨寢時라.7. 醉來순간무인환하니, 流下前灘也不知라, 배 매어라 배 매어라, 桃花流水鱖魚肥라.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滿江風月을 屬漁船을.8. 夜靜水寒魚不食하니, 滿船空載月明歸라, 닻 지어라 닻 지어라, 罷釣歸來係短篷을.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風流來必재세시라.9. 自持竿上釣舟하니, 世間名利盡悠悠라. 배 붙여라 배 붙여라, 係舟猶有去年㾗을.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款乃一曲山水綠이라.尹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司』  孤山 尹善道(고산 윤선도)는 歌謠의 大作家이었다. 光海朝에 奸臣 李爾瞻(이이첨)이 國政을 擅弄하여 淸流를 竄逐할 때에 抗疏를 들이었다가 慶源에 귀향을 가서, 「遺懷謠」 五篇을 지으니 이것이 그의 처음 作品이었다. 仁祖가 反正한 後에 召還되어 鳳林(後日의 孝宗)·麟坪 兩大君의 師傅로 되었다. 孝宗이 卽位함에 있어는 禮曹參議 除拜를 받았는데, 그러나 讒訴를 입고 故里에 돌아와서 八十一歲에 歿하였다.  일찍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의 때에는 海南에 있다가 統營舟師로써 來救하려 하였는데, 南漢山城에 白旗가 꽂히었다는 情報를 듣고 濟州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다가 金鎖洞과 芺蓉洞의 勝景을 사랑하여 隨意逍遙하면서 多數한 歌謠를 지었나니 말한다면 金鎖洞에서는 『山中新曲』(滿興謠 六首, 朝霧謠一首, 夏雨謠 二首, 日暮謠 一首, 饑寒謠 一首, 五友歌 六首의 聯合體로 된 것)과 「山中續新曲」(秋夜操, 春曉吟, 古琴詠 等 各 一首의 聯合體로 된 것)을 지었으며, 芺蓉洞에서는 『漁父詞』을 지었고 그밖에도 「雨後謠」, 「夢天謠」, 「初筵曲」, 「罷宴曲」 等을 또한 지었다.  그런데 「漁父詞」는 春夏秋冬에 나누어 各히 十章으로 되었는 까닭에 「漁父四時詞」라는 指稱을 얻게 되었다. 이제 그 속에서 봄노래만 뽑아서 아래와 같이 提示하겠다.1. 앞 내에 안개 걷고, 뒷 뫼에 해 진다, 배 띄어라 배 띄어라, 밤물이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江村 온갖 곳이, 먼 빛이 더욱 좋다.2. 날이 덥도다, 물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고야.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낚대를 쥐었느냐, 濁酒瓶 실었느냐.3. 東風이 건듯 부니, 물결이 고이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東湖를 돌아보며, 西湖로 가자스랴.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앞 뫼가 지나가고, 뒷 뫼가 나아온다.4. 우는 것이 뻐꾹인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이어라 이어라, 漁村 두어 집이, 내 속에 날락들락.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맑아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나다.5. 고은 볕이 쪼야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이어라 이어라, 금을 주었느냐, 낚시를 놓을릴가.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濯纓歌에 興이 나니, 고기도 잊을노다.6. 夕陽이 비꼈으니, 그만하여 돌아가자, 돛 지어라 돛 지어라, 岸柳汀花는 구비구비 새롭고야.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三公을 부를쏘냐, 萬事를 생각하랴.7. 芳草를 바라보며, 蘭芝도 등떠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一葉扁舟에, 실은 것이 무스것고.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갈제는 내이요, 올제는 달이로다.8. 醉하여 누었다가, 여울아래 내리려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落紅이 흘러오니, 桃源이 가깝도다.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人世紅塵이, 언제나 가렸나니.9. 낚시를 걷어놓고, 篷窓의 달을 보자, 닻 지어라 닻 지어라, 하마 밤 든게야, 子規소리 맑게 난다.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남은 興이 無窮하니, 갈길을 잊었도다.10. 來日이 또 없으랴, 봄 밤이 몇 덧새랴,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대를 막대 삼고, 紫扉를 찾아보자.至菊公 至菊悤 於思臥, 漁父生涯는 이러구러 지낼노다. (『孤山集』)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詞」가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그것은 效嚬하였다는 데에 있어서 봄노래의 한 首만 보아도 다 짐작할 것이다. 이제 그 效嚬 例證을 든다면ㄱ. 早潮纔落晩潮來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第一章밤물이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一章ㄴ. 帆過前山忽後後山.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第二章앞 뫼가 지나가고, 뒷 뫼가 나아온다.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三章ㄷ. 盡日泛舟煙裏去, 有時搖棹月中返. 李龍巖(농암 이현보)의 第三章갈 제는 내이요, 올 제는 달이로다.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七章ㄹ. 萬事無心 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李礱巖(농암 이현보)의 第四章三公을 부를쏘냐. 萬事를 생각하라.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六章ㅁ. 竹徑紫門猶未關.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第六章紫扉를 찾아보자.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十章ㅂ. 隔岸漁村 兩三家. 李礱巖(농암 이현보)의 第五章漁村 두어집이.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四章ㅅ. 濯纓歌罷주정장. 李礱巖(농암 이현보)의 第六章濯纓歌에 興이 나니.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五章ㅇ. 醉來순간무인환하니, 流下前灘也不知.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第七章취하여 누었다가 여울아래 내리려다.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八章「竹枝詞」  成宗 十九年에 許琮(허종)이 明使 董越(동월)의 館伴으로 되어 詩를 唱和하는 中에서 「斜日竹枝歌」의 句를 吟詠한 일이 있었다(『皇華集』). 그러면 그것을 지금 우리가 보는 「竹枝詞」라 할까? 그렇지 않으면 明末·淸初의 戲曲家로 著名한 尤侗(우통)의 「朝鮮竹枝詞」처럼 七言 漢詩體로 된 것일까? 그 內容을 알 수 없으나, 생각건대 그 當時의 樂府에도 이런 이름을 가진 딴 形式의 노래가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에는 두 個의 理由를 들 수 있으니 첫째는 詞에서 本章과 分章의 區別이 생기기는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漁父詞」에서 始하였다면, 그 當時에 이런 形式의 「竹枝詞」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둘째는 魚叔權(어숙권)의 말인데, 그 말에 依하면 內宴用이었던 觀音讚이 佛家語로 되었다 하여 名臣碩輔의 多年間 諫諍으로서 마침내 斥逐를 當한 것이 可歎이라 하였으니(『增補文獻備考』, 樂考) 그 當時에 이런 佛家語의 分章을 갖춘 「竹枝詞」가 생기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본즉 이 「竹枝詞」는 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詞」가 出現한 後, 洪國榮(홍국영)의 「白鷗詞」가 出現하기 前, 그 中間時代 즉 肅·英(숙종·영조)時代에 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1. 乾坤이 不老 目長在하니, 寂寞江山이 今百年이라.어이오이 이오이히 오이아에 一心正念은 極樂 나하무하하무하 阿彌像이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世界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2. 騎鯨仙子浪吟過하니, 魍魎秋色迷長天이라.어이오이 이오이히 오이아에 一心正念은 極樂 나하무하하무하 阿彌像이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世界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3. 冊보다가 窓 퉁탕 열치니, 江湖에 둥덩실 白鷗둥 떴다.어이오이 이오이히 오이아에 一心正念은 極樂 나하무하하무하 阿彌像이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世界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4. 洛東江上에 仙舟泛하니, 吹笛歌聲이 添遠風이로구나.어이오이 이오이히 오이아에 一心正念은 極樂나하무하하무하 阿彌像이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世界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黃鷄詞」  이 노래는 西浦(서포 김만중)의 『九雲夢』이 一般社會에 무던히 波及된 後, 즉 英祖時代에 생기어진 것인가 한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本詞 第六章에 「육관대사 제자 성진이 팔선녀를 희롱한다」가 있으며 또는 「竹枝詞」와 같이 그 分章이 一律로 된 까닭이다.1. 一朝郞君離別後에, 消息조차 頓絶하다.어허야하자 좋을시고.2. 어찌어찌 못 오던고, 일정 자네가 아니 오던가?어허야하자 좋을시고.3. 春水滿四澤하니, 물이 깊어 못 오던가, 夏雲이 多奇峰하니, 山이 높아 못 오던가? 어디를 가고, 날 아니와 본고?어허야하자 좋을시고.4. 屛風에 그린 黃鷄, 두 날개를 둥둥 치며, 四更一點에 날 새라고, 꼬끼요 울거던 오려는가?어허야하자 좋을시고.5. 저 달아 보느냐 임 계신데, 명기를 빌리렴, 나도 보게, 나는 죽어 黃河水 되고, 너는 죽어도 大船되어, 밤이나 낮이나, 낮이나 밤이나, 어화 둥실 떠서 노세.어허야하자, 좋을시고.6. 한 곳을 들어가니, 육관大師 弟子 性眞(성진)이는 八仙女를 희롱한다.어허야하자 좋을시고.7. 竹冠簑笠 저겻쓰고 十里沙場 내려가니.어허야하자 좋을시고.8. 玉容이 寂寞 淚闌干하니, 梨花一枝春帶雨라.어허야하자 좋을시고.좋은 좋은 좋은 景을 얼싸 좋다 景이로다「白鷗詞」  洪國榮(홍국영)은 正祖가 東宮으로 있을 때에 百方으로 擁護하여 洪麟漢(홍인한)·鄭厚謙(정후겸)의 危害를 避하게 하였다. 그래서 正祖가 卽位한 後에 그에게 大將을 拜하여 禁旅를 거느리고 宮中에 直宿케 하며, 아울러 政權을 附予하니, 이것이 이른바 世道이었다. 世道란 말은 이때에 처음 생기었는데 곧 政權을 잡았다는 그 代名詞이었다.  國榮(홍국영)이 世道를 잡은 後에 權勢를 專擅하기 鄭厚謙(정후겸)보다 더 甚하므로 世人에게서 大厚謙이란 指稱까지 들었다. 그러다가 廢黜을 當하여 湖中天地에 淪落하여 春景을 感傷한 것이 곧 「白鷗詞」이었다.  「白鷗야 훨훨 나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聖上이 버리시니, 너를 좇아 예 왔노라, 五柳春光 景 좋은데, 白馬金鞭 화류가자, 雲沈碧溪 花紅도 柳綠한데, 萬壑千峰이 非天鎖라, 湖中天地에 別乾坤이 여기로다, 高峰萬丈 청게울하니, 綠竹靑松이 늙어를 가누나, 바위 巖上에 다람쥐 기고, 시내 溪邊에 金잘애 긴다. 조팝나무에 핏죽새 소리며, 함박꽃에 벌이 나서, 몸은 둥글고 발은 적으니, 제 몸을 못 이기어, 東風 건듯 불 적마다 이리로 접두적 저리로 접두적, 너울너울 춤을 추니, 근들 아나 景일러냐, 黃金같은 꾀꼬리는 楊柳間에 往來하고, 白雪같은 흰 나비는, 꽃을 보고 반기어서, 날아든다 떠든다, 두 나래를 펼치고 까맣게 별같이, 둥그렇게 달같이, 아주 훨훨 날아드니, 근들 아니 景일러냐.」「惜春詞」  이 노래는 정다운 임을 이별하고 밤낮으로 그리던 어떤 花柳男子의 지은 것이겠다. 그가 半나마 지난 春光을 아까워서, 그 보다도 임 그린 생각을 하마 잊을 양으로 西園에 들어갔다가 버들 속의 꾀꼬리, 珠簾 밖의 제비, 꽃 사이의 나비, 그것들이 다 짝을 지어 노래하며, 춤추는 그 光景을 보고 도리어 深刻한 느낌을 받아 長相思을 그린 모양이다.  「어화 아깝도다, 요지에 봄이 간다. 이 몸이 多事하여, 철가는 줄 몰랐더니, 强忍하여 창을 여니, 花草가 爛熳하다. 忽然히 일어 걸어, 西園에 돌아드니, 楊柳千萬絲에 鶯歌聲이 浪藉하고, 珠簾繡幕에, 鷰語가 喃喃하다. 芍藥白花間에, 蝴蝶이 雙舞하더니, 西風昨夜雨에, 殘紅이 다 盡하니, 성상에 西施(서시)마음, 곳곳이 葬사로다. 漁陽의 少年들은 惜春을 모르는가, 林間宿不歸는, 나는 잠깐 들었더니, 千山萬樹에, 두견이 슬피 운다. 一枝香 牧丹花는, 담 안에 피었더니, 太陽이 初出하니, 도리어 잠겨서라. 月下에 美人같이, 綽約한 고운 빛이, 西王母(서왕모)의 蟠桃會요, 處士家의 운명회라, 東風에 휘날리니, 鬱金香 振動한다, 水晶같은 잎 사이에, 거울같이 비췄으니, 靑春美人들이, 새 丹粧을 고르는 듯, 天上의 月宮姮娥, 상면산에 걸렸는 듯, 春到門前增當貴는, 이를 두고 이름이라. 夭夭婷婷 저 氣像이 花中王이 分明하다. 六宮粉黛三千中에 뉘 아니 無色하리. 風前에 蝴蝶舞는 香氣좇아 노니는 듯, 나비야 가지마라, 韶光과 緣分이라, 和風도 전교한데, 봄소식 물어보자. 아마도 봄 다 가면, 이 꽃이 이울리라, 九十韶光이 半나마 지났으니, 四時長春 아니어던, 길이 어이 보잔 말가, 東君의 造化로되, 길이 볼 길 바이 없다. 自古로 옛 말이라, 今人이 못 되거던, 龍眼의 妙한 手段, 금환을 들였다가, 一幅花牋紙에, 前生마음 기록할제, 富貴榮華를 宛然히 그려내니, 나 앉은 書案 위에, 屛風같이 둘러두고, 不出門前으로, 三春이 한 가지라, 미끈히 누었으니, 꽃가지 볼 양이면, 三春이 다진토록, 떠날 날이 없건마는, 그리고 또 그린들, 임 그리기 어려워라. 이 몸도 나비되어, 숭구리고 우뚝 앉아, 花不衰春一場은, 이 또한 소회로다. 제아무리 잘 그린들, 못 그릴 것 임이로다. 잘 그리는 毛延壽(모연수)는, 王昭君(왕소군)의 원수되어, 千古의 남은 恨을, 曲中에 議論커늘, 그리긴들 어이하고, 생각인들 어이하리. 愁心으로 붓을 잡고, 한숨으로 彩色하니, 임의 모양 그려내고, 내 모양 그려내니, 임 없는 이내 그림, 長相思만 그렸구나. 그리고 또 그리니, 長相思만 또 그렸구나. 이 붓도 원수같이, 그림도 名手로다. 그리던 이내 그림, 언제나 다 마쳐서, 華帳衾裏에, 그림같이 마주 앉아, 그리던 長相思와 태우던 내 간장을, 春節의 氷雪같이, 다 쓸어 버리리라.」「怨夫詞」  이 노래는 靑樓殘燈에 눈물로 벗을 삼는, 참으로 孤寂을 느끼는 어떤 佳人이 임의 薄情을 원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一名을 靑樓怨別曲이라고도 한다.  「엊그제 젊었더니, 하마 아희 다 늙었다, 평생에 원하기를, 君子好逑하려더니, 三生에 원수런가, 月下에 緣分인지, 長安花柳中에, 輕薄子 걸어두고 살뜰한 임의 생각, 肝腸만 다 썩는다.  「惜春詞」와 「怨夫詞」는 그 作者에 있어 비록 알 길이 없으나, 그 出現年代에 있어는 「白鷗詞」가 流行된 그 後의 作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三. 別曲  이제 李朝의 別曲類를 적음에 있어서 遺感스럽게도 「霜臺別曲」·「西京別曲」·「關西別曲」의 原本을 볼 수 없는 것이 藝苑의 큰 損失이 아니라고 못하겠다.  「霜臺別曲」은 陽村 權近(양촌 권근)의 作인데, 憲府 燒尾宴에 工人으로 하여금 그것을 부르게 하였다는 記錄만 있을 뿐이요, 後世에 傳하지 못하였다. 「西京別曲」은 『高麗史』 樂志에 없던 것인데, 李朝 世祖 때에 撰한 『大樂後譜』의 俗樂에서 비로소 보게 되었다. 말한다면 거기에 「西京別曲慢」과 「西京別曲」이 아울러 記入되었으니, 그런즉 그것이 李朝 初期에 되어진 作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成宗 때에 이르러 「雙花店」·「觀音讚」과 함께 斥逐을 받았나니, 成宗 十八年 敎에  「宗廟之樂…俗樂 如西京別曲, 男女相悅之詞, 甚不可也, 樂譜則 不可卒改, 宜依其曲調, 別製曲調라」 하여 우리 後人으로 하여금 그것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關西別曲」은 玉峰 白光勳(옥봉 백광훈)의 作이었다. 그는 當時 文士界에 가장 著名한 宋翼弼(송익필)·李山海(이산해)·崔慶昌(최경창)·崔岦(최립)·李純仁(이순인)·尹卓然(윤탁연)·河應臨(하응림)으로 더불어 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되었었다. 그런 中에 詩에 있어는, 崔孤竹(고죽 최경창)·李蓀谷(손곡 이달)과 함께 三唐의 하나로서 더욱 書畫에까지 能하여 月沙 李廷龜(월사 이정구)의 이른바  「白玉峰者 以詩 鳴於湖中, 又工於絶句 深得盛唐風格. 又以量妙擅盛名, 咸謂長吉復生, 逸少再生 片言隻句皆 膾炙人口」라가 곧 그것이다.  그래서 盧蘇齋(소재 노수신)가 明使의 館伴으로 되었을 때, 그를 奏請하여 製述官을 삼은 일까지 있었다. 이렇게 白衣로써 推薦을 받았지만, 그 時代는 門閥을 尙하는지라, 그의 出身이 寒微한 까닭에 겨우 北評事라는 이름만 띠고 말았다. 이로부터 그는 不遇才子를 벗하여 南으로는 嶺南樓·廣寒樓와 西으로는 練光亭·浮碧樓에서 痛飮과 浪吟으로써 花朝月夕을 보내는 中에 「關西別曲」을 지은 것이다. 그가 夭逝한 後에도 西京의 妓女叢中에는 그 別曲이 그냥 流行되었던 모양이다. 그의 단짝 親舊 崔孤竹(고죽 최경창)이 거기에 갔다가 妓女들의 노래하는 것을 듣고 玉峰(옥봉 백광훈)을 追憶하여 지었다는  「錦繡煙花依舊色, 綾羅芳草至今春, 仙郞去後無消息, 一曲關西淚滿中」이라는 詩뿐이 지금에 남기어 있다.「華山別曲」  春亭 卞季良(춘정 변계량)은 麗末의 擧子로서 李氏를 臣事하여 世宗 七年, 大提學으로 있을 때에 이 노래를 지었는데, 王命으로 樂府에 실어 宴饗에 쓰게 하였다.  이 노래는 『正音(훈민정음)』가 制定되기 前에 된 것이다. 다른 記錄에는 純漢文으로 載在하였으나 『鄕歌律髓』에는 國漢文의 木刻으로 쓰이었으며, 여기에는 그것을 移本하였다.1. 華山南 漢水北 朝鮮勝地, 白玉京 黃金闕 平夷通達, 鳳峙龍翔 天作形勢, 經緯陰陽,에 都邑景其 어떠하니 잇고.太祖太宗 創業貽謨,太祖太宗 創業貽謨,에 持守景其 어떠하니 잇고.2. 內受禪 上稟命光明正大, 禁草竊 通高賈 懷服倭邦, 善繼善述 天地交泰 四境宇一에 太平景其 어떠하니 잇고.至誠忠孝 睦隣以道,至誠忠孝 睦隣以道,에 兩得景其 어떠하니 잇고.3. 存敬畏 戒逸欲 躬行仁義, 開經筵 覽經史 學貫天人, 置集賢殿 四時講學 春秋製述,에 右文景其 어떠하니 잇고,天縱之聖 學問之美,天縱之聖 學問之美,에 古今景其 어떠하니 잇고.4. 訓兵書 敎陣法 以習坐作, 順時令 擇閑曠 不廢蒐狩, 萬騎雷驚 殺不盡物 樂不極盤,에 講武景其 어떠하니 잇고,長慮却顧 安不忘危,長慮却顧 安不忘危,에 預備景其 어떠하니 잇고.5. 懼天災 憫人窮 克謹祀事, 進忠直退姦邪, 欽恤刑罰, 考古論今 夙夜圖治 日愼一日,에 無逸景其 어떠하니 잇고,天生聖主 以惠東人,天生聖主 以惠東人,에 千歲世.6. 慶會樓 廣延樓 崔嵬敞豁, 軼煙氛納灝氣遊目天表, 江山風月 景槩萬千, 宣暢鬱堙,에 登覽景其 어떠하니 잇고.蓬萊·方丈·瀛洲三山蓬萊·方丈·瀛洲三山에 何代可覔.7. 止於慈 止於孝 天性同歡, 止於仁 止於敬 明良相得, 先天下憂 後天下樂 樂而不淫,에 侍宴景其 어떠하니 잇고.天生聖主 父母東人,天生聖主 父母東人,에 萬歲世.8. 勸農祭 厚民生 培養邦本, 崇禮該尙忠信 固結民心, 德澤之光 風化之洽 頌聲洋溢,에 長治景其 어떠하니 잇고.華山·漢水 朝鮮王業,華山·漢水 朝鮮王業,에 竝久景其 어떠하니 잇고.「不憂軒曲」  不憂軒 丁克仁(불우헌 정극인)은 太宗 元年에 崔孤雲(고운 최치원)의 桑梓라고 傳하는 泰仁地方에서 낳았다. 그 때의 임금이 寵愛하는 妖僧「行乎(행호)」를 諫斥하다가 濟州로 귀향을 가서 數十年을 있다가 成宗 때에 비로소 召還되었었다. 그는 歌曲의 著作에 많은 興味를 붙인 모양인데 그 著作한 中에는 「不憂軒曲」·「不憂軒歌」·「賞春曲」 等이 있다. 그런데 「不憂軒曲」은 高麗 「翰林別曲」의 音節을 依倣하여 지은 것이다.1. 山四回 水重抱 一畝儒宮, 向陽明 開南窓 名不憂軒, 左琴書 右博奕 隨意逍遙,에 樂而忘憂 景 어떠삿다.平生立志 師友聖賢(再唱)에 遵道而行 景 어떠삿다. 2. 晩生員 老及第 樂天知命, 再訓導 三敎授 誨人不倦, 家塾三間 鳩聚童蒙 詳說句讀,에 諄諄善誘 景 어떠삿다.不亦樂乎 負笈書生(再唱)에 自遠方來景 어떠삿다.3. 再上疏 闢異端 依乎中庸, 進以禮退以義 守身爲大, 備員霜臺 具臣薇垣 引年致仕,에 如釋重負 景 어떠삿다.一介孤臣 濫承天寵(再唱)에 再參原從 景 어떠삿다.4. 耕田食 鑿井飮 不知帝力, 賞良辰 設賓筵 兄弟朋友, 談笑之間 不遑他及 孝悌忠信,에 樂且有儀 景 어떠삿다.舞之蹈之 歌詠聖德(再唱)에 祈天永命 景 어떠삿다.5. 尹之任 惠之知 我無能爲, 聖之時 顔之樂 乃所願也, 上不怨天下不尤人 心廣體胖,에 不懼不憂 景 어떠삿다.不伎不求(脫落)(再唱)에 古訓是式 景 어떠삿다.6. 壬辰歲 四月初 抑有奇事, 降諭書 至衡門 閭里觀光 廉介自守 不求聞達 敎誨童蒙,에 過蒙褒奬 景 어떠삿다.特別三品 時致惠養(再唱)에 聖恩深重 景 어떠삿다.7. 樂혼저 不憂軒이여, 樂혼저 不憂人이여-에 作此好歌 消遣世慮 景 어떠삿다.「騎牛牧童歌」  이 노래는 世祖 때의 중 末繼智訕(말계지산)이 지은 것인데, 그 全篇이 專혀 다 佛의 敎化를 頌한 것이다.1. 生生世世 頓脫邪見 遠離邪魔, 世世生生 絶貪嗔癡 除滅我慢,爲 回向三處 景幾何如爲尼伊古.回向三處 實相圓汸(再云)爲 度諸迷淪 景幾 好下同 阿彌他佛(再云)2. 頓悟妙用 本是靈源 一念不生, 前後際斷 參見趙州 常住道場,爲 自然天堂 景幾何如爲尼伊古.自然天堂 頓敎法門(再云)爲 自照元明 景幾好下同 阿彌他佛(再云)「花田別曲」  自菴 金絿(자암 김구) 二十歲에 魁科에 登하고 二十七歲에 弘文博士로 되었다. 그 때에 靜菴 趙光祖(정암 조광조)와 손을 잡고서 儒家의 見地로써 政治를 改革하려다가 奸臣 南袞(남곤) 等의 嫌忌를 받아 三十二歲에 南海絶島로 流竄되니 이것이 이른바 己卯士禍였다. 그는 約 十二年 동안이나 南海 花田에서 過去의 得意한 生活을 追憶하며 또는 政治的 理想이 泡花에 돌아간 것을 感憤하여 近境의 風流老少를 벗하여 一觴一詠의 間에 萬般愁心을 잊으려 한 것이 이 別曲을 지은 理由였다.1. 天之涯 地之頭 一點仙島, 左望雲 右錦山 巴川(봉내) 高川(고내),山川奇秀 鍾生豪俊 人物繁盛,에 天南勝地 景기 어떠하니 잇고.風流酒色 一時豪傑,風流酒色 一時豪傑,에 날조차 몇 분이신고.2. 河別侍 芷芝帶 齒爵兼尊, 朴敎授 손저니 醉中빼탓, 姜綸雜談 方勳鼾睡 鄭機飮食,에 品官齊會 景幾 어떠하니 잇고,河世涓氏 발버훈 風月,河世涓氏 벌버훈 風月,에 唱和 景기 어떠하니 잇고.3. 徐玉非 高玉非 黑白頓殊, 大銀德山銀德 老少不同, 姜今歌舞 綠今長鼓 번린學非 소졸玉只,에 花林勝美 景기 어떠하니 잇고.花田別號 名實相符,花田別號 名實相符.에 鐵石肝勝이라도 아니 끊기리 없더라.4. 漢元琴 以文歌 鄭韶草笛, 或打鉢 或叩盤 間擊盞臺, 搖頭轉目 備諸醉態,에 發興 景기 어떠하니 잇고.姜允元氏 스라랭딍소리,姜允元氏 스라랭딍소리,에 듣고야 잠 드오리라.5. 綠波酒 山麴酒 麥酒濁酒 黃金鷄 白文魚, 柚子杯 貼匙臺에 가득 부어에 勸觴 景기 어떠하니 잇고.鄭希哲氏 過麥田大醉,鄭希哲氏 過麥田大醉,에 어느 제 슬플 적이 있을꼬.6. 京洛繁華야 너는 부르냐, 朱門酒肉이야 너는 좋으냐, 石田茅屋 時和歲豊 鄕村集會야 나는 좋아하노라.『武陵雜稿』에 실린 別曲類  愼齋 周世鵬[신재 주세붕, 一號는 武陵(무릉)]은 宋學崇拜로 著名한 분이었다. 일찍 豊基郡守로 있을 때에 性理學의 輸入者로 有名한 文成公 安珦[문성공 안향, 一名은 裕(안유)]의 遺址인 白雲洞에 書院을 設立하였으니, 이것이 朝鮮人民에 弊窟로 되던 多數 書院의 鼻祖이었다. 그의 著作한 『武陵雜稿』의 卷八에 記入된 歌詞篇을 보게 되면 그 一字一句가 道學에 根據하지 않은 것이 조금도 없다. 그 歌辭篇은 「道東曲」 九章, 「六賢歌」 六章, 「儼然曲」 七章, 「太平曲」 五章으로 構成되었는데, 表現形式에 있어 全部가 別曲體의 分章과 비슷한 點이 있을 뿐이다.ㄱ. 「道東曲」1. 伏羲·神農 黃帝堯舜(再唱)에 繼天立極 景幾 어떠하니 잇고.2.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에 주거니 받거니 聖人의 心法이 다만 이뿐이니다.3. 禹·湯·文·武 臯(고요)·伊(이윤)·周(주공)·召(소공)(再唱)에 君臣相得 景幾 어떠하니 잇고.4. 下土茫茫하거늘 上帝是憂하사, 圩頂大人을 洙泗 위에 나리오시니,에 萬古淵源이 끊길 뉘 없사삿다.5. 顔生(안연)三勿 曾氏(증자)三省 仰高鑽堅 瞻前忽後,에 聖人忘勞 景幾 어떠하니 잇고.6. 率하니 天命之性, 養하니 浩然之氣(再唱)에 至誠無息이아 本이니라.7. 光風霽月 瑞日祥雲(再唱)에 그 처지 긴 날 어떠하여 아신고.8. 人欲이 橫流하여 浩浩滔天일새 一千五百年에 晦翁(주희)이 나섰다, 敬으로 本을 세워 大防을 막으라시니,에 繼往開來아 仲尼(공구)와 다르시리니까.9. 三韓 千萬古에 眞儒을 나리오시니, 小白이 廬山이요 竹溪가 濂水로다, 學術街道는 小分네 일이어니와 尊禮晦菴(주희)이 그 功 크삿다,에 吾道東來景幾 어떠하니 잇고.「六賢歌」1. 規圓矩方 繩直準平, (再唱)에 程伊川(정이)의 展也大成 貴한 줄을 뉘 알 리 잇고.2. 早脫孫·吳(손자·오자) 晩逃佛 老, (再唱)에 張橫渠(횡거 장재)의 一變至道 力踐 景幾 어떠하니 잇고.3. 手探月窟 足躡天根, (再唱)에 卲堯夫(요부 소옹)의 駕風鞭霆 歷覽 景幾 어떠하니 잇고.4. 篤學力行 淸修苦節, (再唱)에 司馬公(사마천)의 事神不欺, 獨樂 景幾 어떠하니 잇고.5. 安靜詳密 雍容和豫, (再唱)에 韓魏公(한기)의 端嚴謹重 어느 제 밟우시리 잇고. 6. 居廟堂則 憂其民 處江湖則 憂其君, (再唱)에 范文正(범중임)의 進退有憂 어느 제 즐거우시리 잇고.「儼然曲」1. 儼然端坐 如對聖賢, (再唱)에 一點邪念이 어대로서 나리닛고.2. 仲尼·顔子(공구·안회) 所樂何事, (再唱)에 찾고야 마오리이다.3. 溫溫安安 어리우니, 亹亹翼翼 있다마오, (再唱)에 敬으로 丘隅를 삼았는데 안다 마옵세.4. 높으나 높으신 하늘에, 두터우나 두터우신 땅에, 밝으나 밝으신 日月에, 春夏秋冬은 눌로하여 흘러가는고,에 一元循環 悠久 景幾 어떠하니 잇고.5. 動하되 天을 보오, 靜하되 地를 보오, (再唱)에 俯仰에 부끄럽지 아닌 景幾 어떠하니 잇고.6. 謙遜自牧 和敬待人, (再唱)에 萬福無疆 景幾 어떠하니 잇고.7. 北窓淸風 南軒霽月, (再唱)에 羲皇적 사람과 어니 아더니 잇고.「太平曲」1. 몸에란 允恭하시고, 사람에란 克讓하시니 (再唱)에 唐堯聖德이 하늘과 같으셨다.2. 伯禹가 居左, 臯陶가 在右, (再唱)에 帝舜無爲 무슨 일이 있으시리 잇고.3. 內修七敎 外行三至, (再唱)에 太平 景幾 어떠하니 잇고.4. 齊有鮑叔 鄭有子皮, (再唱)에 進賢 景幾 어떠하니 잇고.5. 滿하면 損하나니 益한들 謙하소서, (再唱)에 江海能下 百川朝宗 景幾 어떠하니 잇고.鄭松江(송강 정철)의 別曲  松江 鄭澈(송강 정철)은 西人의 領袖로서 五十四歲 己丑에 領相으로 되었던데, 北人 崔永慶(최영경)을 冤殺하였다는 反對黨의 口實下에서 江界로 귀향간 일까지 있었다. 그 까닭에 器量이 狹窄하다거니, 심지어 小人이라거니의 惡評을 듣게 되었다. 黨爭의 판국에는 正論이 없나니 그런 批評을 누가 遵信할까보냐? 李判書 尙吉(이상길)의 手記에 依하건대  내가 督運使로 海西(황해도)에 있었는데, 하루는 監司 李德泂(이덕형)과 함께 南以恭(남이공)의 謫所에 찾아가서 從容히 會話하게 되었다. 南(남이공)이 묻기를 鄭澈(정철)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대답하기를 淸忠峻節이 近代의 賢相이라 하였다. 南(남이공)이 또 李德泂(이덕형)에게 물으니 李(이덕형)가 말하되 鄭某(정철)가 小人이 아닌 줄을 아노라. 令公이 어떻게 그런 줄을 아시오? 내가 일찍 黃思叔[思叔은 秋浦 黃愼(추포 황신)의 字]에게서 들었노니 思叔(황신)이 늘 말하되 鄭某(정철)는 疎脫하고 邪慮는 없은즉 決하고 小人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思叔(황신)은 나의 敬信하는 사람임에 그러므로 鄭某(정철)가 小人이 아닌 줄 아노라(「秋浦傳」 拾遺).  이 세 사람의 問答이 松江(송강 정철)의 性格에 對한 그 當時의 物論을 曲盡하게 解明하였다. 또 月沙(월사 이정구)는 그의 風度를 評하였는데,  「豪風이 灑落하고, 爽氣가 人에게 襲하여 거의 神仙 中의 사람이라」 하고(『月沙集』),  白沙(백사 이항복)는 그의 儀彩를 欽服하여  「半醉한 松江(송강 정철)이 抵掌談論할 때에는 天上人과 같다」고 하였다(「遲川遺事」).  그러한 風度·儀彩·言論에다가 詞人的 素質을 調合하여 歌曲의 大作家로 된 것이겠다. 그의 作品 中에는 「思美人曲」·「續思美人曲」·「將進酒」·「訓民歌」 十六篇, 時調 六十一首 또는 여기에서 말하려는 「關東別曲」·「星山別曲」이 있다.  나는 이 두 個 別曲의 全篇을 얻어 보지 못하고 다만 金台俊(김태준)氏의 「別曲의 硏究」에서 殘鱗片爪를 收拾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遺憾스러운 일이다.ㄱ. 「關東別曲」  「江湖에 病이 깊어, 竹林에 누었더니, 關東 八百里에, 方面을 맞이시니어니와, 聖恩이야 가지로 罔極하다. 延秋門 들어달아, 慶會南門 바라보며, 下直고 물러가니, 玉節이 앞에 섰다. 平丘驛 말을 갈아, 黑水·昭陽 나린 물이 어드러루 드단 말고…」  이 노래는 京城을 出發하여 內外金剛을 巡覽하는 그 經路에까지 大自然의 美를 自由스럽게 雄大한 筆致로 그린 것인데, 『東國樂譜』에는  「關東別曲…歷擧關東山水之美하며, 說盡幽遐詭怪之觀하며, 狀物之妙와 選語之奇가 信樂府之絶調也」라 하고, 同春(동춘당 송준길)은 이것을 絶唱이라 하여 善歌者 洪柱石(홍주석)으로 하여금 노래하였다는 것을(『同春集』) 보면 이 別曲이 우리 藝苑의 珍品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ㄴ. 「星山別曲」  「어떤 지날 손이, 星山에 머물면서, 棲霞堂 息影亭主人아, 내말 듣소, 人生世間에, 좋은 일 하기마는, 어떤 한 江山을, 가지로 나히 녀겨, 寂寞山中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松根을 다시 쓸고, 竹牀에 자리 보와, 져근덧 올라 앉아, 어떤고 다시 보니, 天邊에 뜨는 구름, 瑞石을 집을 삼아, 가는 듯 드는 양이, 主人과 어떠한고…」  이 노래는 星山의 景致를 稱美하고 仙翁과 같이 閑寂한 風月主人의 山水間 趣味를 갖가지로 描寫한 長篇歌이다.  「思美人曲」은 憂時戀君의 丹衷에서 流出한 것인데, 淸陰 金尙憲(청음 김상헌)은 그것을 가장 愛讀하고 또 漢詩로 翻譯하여 家族과 奴婢로 하여금 誦習하게 하였으며(『北軒集』), 諺文小說의 作家로 有名한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은 그것을 小冊子에 手寫하여 「諺騷」라 하고서 말하되,  그 忠心, 그 潔志, 그 貞節, 그 雜辭가 可히 日月로 光을 爭하리라」 하였으며,  北軒 金春澤(북헌 김춘택)은 濟州에 가서 이 두 篇의 美人曲을 追和하는 뜻으로 「別思美人曲」을 지어 州妓에게 주었다 하니 이것만 보아도 松江(송강 정철)의 歌曲이 社會一般에게 어떤 큰 影響을 주었다는 것을 알리운다.  「訓民歌」는 그가 江原監司로 있을 적에 民間에 頒布한 것인데, 그 後에 韓相翼(한상익)이 國柄을 잡고서는 全鮮에 頒布하였다고 한다.  「將進酒」는 李白(이백)의 그것과 伯仲을 다투는 것인데, 詞旨가 通達하고 句法이 悽惋하여 비록 木石이라도 눈물을 흘리면서 몇 잔의 술이든지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노래를 보인다면:  「한 잔 먹사이다, 또 한 잔 먹사이다, 꽃 꺽어 籌를 놓고, 無窮無盡 먹사이다, 이 몸 죽은 後에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수풀 우에 메어가나, 流蘇寶帳에 百夫緦麻 울어 예나, 우억새·덕욱새·더까나무·白楊 속에, 가기 곧 가량이면 누른 해, 흰 달빛과 굵은 눈, 가는 비에, 蕭蕭히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 하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수파람할 제 뉘우친들 어떠리.」「江湖別曲」  이 노래의 作者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그 內容을 考察한다면 世上功名을 꿈 밖으로 보는 사람이거나 或은 紅塵萬丈의 속에서 厭症이 생기어 急流中 勇進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疑心도 있게 된다.  그리고 「綠波記」에 依하면  “「六香歌」·「傷春歌」·「江湖別曲」 等 斷腸諸作이 江上에 播在라」하였으니 이것의 出現年代는 꽤 오랜 모양이다.  「世上功名 浮雲이라, 江湖漁翁 되오리라. 一葉扁舟에 흘려저어, 任其所之하올 적에, 萬頃滄波 너른 곳에, 浩浩蕩蕩 떠나간다, 舟輕하니 산사주요, 波急하니 야여주라, 銀鱗玉尺 펄펄 뛰는데, 白鷗翩翩 비껴난다, 淸風은 徐來하고, 水波는 不興이라, 左右山川 바라보니, 景槪無窮 좋을시고, 隔岸前村兩三家에, 저녁煙氣 일어나고, 半照入江 半石壁에, 거울 낯을 열었더라, 언덕 위에 樵童이요, 石壁아래 漁翁이라, 滄浪一曲 반겨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嚴陵여울 다다랐다. 景槪無窮 좋을시고, 千尺斷崖 높은 곳에, 蒼松綠竹 푸르렀고, 七里淸灘 고요한데, 雙雙 오리 높이 떴다. 兩個漁翁 흘림낚시, 巨口細鱗 낚아내어, 고기 주고 술을 사서, 醉케 먹기 맹서한다, 嗚鳴라 世上事 如夢이라, 擧匏樽而相屬하니, 壼裏乾坤 되었구나. 日落黃昏 되었으니, 月出東嶺 솟아 온다, 배를 저어 돌아갈 제, 倒着接罹 좋을시고, 縱一葦之所如하여, 凌萬頃之茫然이라, 船壓水中天與月하니, 於焉間 作天上人을, 無窮하다. 이내 興味, 世上알까 두리노라.」「相思別曲」  이 노래는 郞君을 이별한 空房美人이 밤이나, 낮이나 長相思를 그리면서 郞君과 歲月의 無情함을 哀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著作年代는 詳言할 수 없지만, 「黃鷄詞」가 出世한 그 後가 아니면 或 그 前에 있었으리라고 推測하게 된다. 왜 그러냐 하면 그 詞說의 中에 「黃鷄詞」의 第一章 즉   「一朝郞君離別後에, 消息조차 永(頓)絶하다」가 있는 것으로써 이렇게 말하여 둔다.  「人間離別 萬事中에, 獨守空房이 더욱 섧다, 相思不見 이내 眞情을, 뉘라서 알리, 맺힌 설움 이렁저렁이라, 흩어진 근심, 다 후리쳐 던져 두고, 자나 깨나, 깨나 자나, 임을 못 보아 가슴이 답답, 어린 양자 고은 소리, 눈에 黯黯 귀에 錚錚, 보고지고 임의 얼굴, 듣고 지고 임의 소리, 비나이다. 하느님전, 임 생겨라 하고 비나이다, 前生此生이라 무슨 罪로, 우리 둘이 생겨나서, 죽지 마자하고 百年期約, 萬疊靑山으로 들어가니, 어느 우리 낭군이 날 찾으리, 山은 疊疊하여 고개 되고, 물은 충충 흘러 沼이로다, 梧桐秋夜 밝은 달에, 임 생각이 새로워라, 한번 이별하고 돌아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千金珠玉 귀 밖이요, 世上일 不關係하니, 根源 흘러 물이 되어, 깊고 깊고 다시 깊고 무너질 줄 모르더니, 끊어질 줄 어이 알리, 造物이 새우는지, 鬼神이 희지는지, 一朝郞君離別後에, 消息조차 永絶하니, 오늘이나 들어올까, 來日이나 奇別올까, 日月無情 절로 가니, 玉顔雲鬢 空老로다, 梧桐夜雨 성긴 비에, 밤은 어이 더디 가고, 綠楊芳草 저문 날에, 해는 어이 쉬이 가노, 이내 相思 알으시면, 임도 나를 그리리라, 寂寂秋夜 혼자 앉아, 다만 한숨 내 벗이라. 一寸肝腸 구비 썩어, 피어나니 가슴 답답, 우는 눈물 받아내면, 배도 타고 아니 가랴, 피는 불이 일어나면, 임의 옷에 단기리라, 사랑 겨워 우던 울음, 생각하면 목에 메고, 嬌態 겨워 웃던 웃음, 헤아리니 더욱 섧다. 咫尺東西 千里되어, 바라보니 눈이 시고, 萬疊相思 그려낸들, 한 붓으로 다 그리랴, 날개 돋힌 鶴이 되어, 날아가다 아니 가랴, 山이 어이 고개 있고, 물은 어이 사이 진고, 天地人間 離別 中에, 나 같은 이 또 있는가, 해는 돋아 저문 날에, 꽃은 피어 절로 지니, 이슬 같은 이 人生이, 무슨 일로 생겼는고, 바람 불어 궂은 비와, 구름 끼어 저문 날에, 나며 들며 빈 房으로, 오락가락 혼자 서서, 기다리고 바라보니, 이내 相思 虛事로다, 空房美人 獨相思는, 예로부터 이러한가, 내 혼자 이러한가, 남도 아니 이러한가, 날 사랑하던 끝에, 남사랑 허이는가, 無情하여 그러한가, 有情하여 이러한가, 山鷄野鶩 길을 들여, 놓을 줄을 모르는가, 路柳墻花 꺾어 쥐고, 春色으로 다니는가, 가는 꿈이 자최되면, 오는 길이 무디리라, 한번 죽어 돌아가면, 다시 보기 어려우니, 아마도 네 정이 있거던, 다시 보게 생기소서.」四. 短歌  短歌의 定義는 括論에서 이미 詳密하게 解明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말할 것은 歌와 曲이라는 名稱을 가진 것, 그런 名稱도 가지지 못하고 다만 진양이니, 중머리이니 하는 調名을 가진 것, 그 어느 것이든지 情이나 景을 敍述한 長篇의 노래라면 다 短歌의 속에 집어넣는다.  우리의 歌曲에 다른 것도 가다가 訛誤處가 없지 아니하나 短歌에서처럼 訛誤處가 많은 것은 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슨 까닭이냐? 거기에 對하여는 몇 가지의 理由를 들 수 있다. 말한다면 첫째는 『春香傳』와 같이 文字로 記傳되지 못하고 그 大部分이 口傳된 까닭이다. 名唱(그 當時에 이른바 廣大)이라면 적어도 十年의 長歲月을 두고서 목청을 鍊鍛하기 爲하여 山中에 들어가서 瀑布의 소리와 競爭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움 속에 앉아서 그 소리가 땅을 뚫고 碧空에 사무치게 하든지 그렇게 功塔을 쌓은 後에야 萬壑千峰의 高수강이니, 斜風細雨의 모환갑이니 하는 好評을 비로소 얻게 되는데, 그들의 사이에는 口傳으로 서로 學習하는 것이 惟一의 鐵則이었었다. 事實上, 그들은 音調에만 注重하고 그 노래의 內容意義에는 關心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訛傳이 많이 있게 되었다. 둘째는 「南薰太平歌」의 따위 또는 近來에 流行하던 『新舊雜歌集』 等에 記傳된 것이 있기는 하나 그것을 編輯하는 사람에게 그 內容을 考究할 만한 常識이 없었던 까닭이다. 能改齋의 이른바 善歌者는 內裏聲을 貴히 하여 「聲中無字하고 字中有聲」인 그것을 다만 聽覺에 依하여 함부로 記入하였으니 여기에서 訛傳이 많이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하여 나에게는 그런 常識이 있다는 것은 決코 아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아는 데에까지는 間間이 修正하고 能히 解得할 수 없는 것은 그 原本대로 그냥 두면서 漢字를 많이 섞이었나니, 그리면 幸여나 讀者에게 얼만큼의 便益이라도 供할는가? 將來에는 訛誤를 다시 거듭하지 아니할런가? 그런 志望에서 손을 대게 된 것이다.「春眠曲」  이 노래의 出現 年代는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別曲의 化身인 노래로서 英祖 以前에 벌써 流行하였던 것이라고 論斷하게 된다. 그 理由는 어디에 있는가? 英祖 때의 肚元郞인 石北 申光洙(석북 신광수)가 率倡을 治送하는 자리에서  「桃紅扇打汗衫飛, 羽調靈山絶世稀, 唱罷春眠歌一曲, 落花三月渡江歸」의 詩 一首를 贈與하였으니, 이 詩를 보면 그 年代는 어슴프레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春眠을 늦어 깨어, 竹窓을 半開하니, 庭花는 灼灼하여, 가는 나비 머무는 듯, 岸柳는 依依하여, 성긴 내를 띄어서라, 窓밖의 들괸 술을, 一二三杯 醉한 後에, 浩蕩하고 미친 興을, 부질없이 자아내어, 白馬金鞭으로, 冶遊園을 찾아가니, 花香은 襲衣하고, 月色는 滿庭한데, 狂客인 듯 醉客인 듯, 興을 겨워 노니다가, 徘徊顧眄하여, 有情히 섰노라니, 翠瓦朱欄 높은 집에, 綠衣紅裳 一美人이, 紗窓을 半開하고, 玉顏을 暫間 들어, 웃는 듯 반기는 듯, 嬌態하여 맞아들여, 秋波를 暗注하고, 綠綺琴 비껴 안아, 淸歌一曲으로, 春意를 자아내니, 雲雨襄臺에, 楚夢이 多情하다, 사랑도 그지없고, 緣分도 깊을시고, 이 사랑 이 緣分은 비길 데 전혀 없다,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되어, 三春이 다 盡토록, 떠나시지 마자더니, 人間에 말이 많고, 造物조차 샘하여, 新情이 未洽하여, 애달플손 이별이라, 淸江에 노던 鴛鴦, 울고예고 떠나는 듯, 狂風에 놀란 蜂蝶, 가다가 돌치는 듯, 夕陽은 다 저가고, 征馬는 자주 울제, 羅衫을 부여잡고, 黯然히 여윈 後에, 슬픈 노래 긴 한숨을 벗을 삼아 돌아오니, 어제 이 임이야, 생각하니 원수로다, 肝腸이 다 썩으니, 목숨인들 保全하랴, 一身에 病이 되니, 萬事가 無心하여, 書窓을 굳이 닫고, 섬서히 누었으니, 花容月態는, 眼中에 삼연하고, 粉壁紗窓은, 枕邊에 如舊로다, 荷葉에 露積하나, 別淚을 뿌리는 듯, 柳幕에 煙籠하니, 遺恨을 머금은 듯, 空山夜月에, 杜鵑이 슬피 울 제, 슬프다 저 새 소리, 내 말 같이 不如歸라, 三更에 못 든 잠을, 四更末에 빌어드니, 相思하던 우리 임을 꿈 가운데 暫間 보고, 千愁萬恨 못 다 일러, 一場蝴蝶 흩어지니, 아름다운 玉鬢紅顔, 곁에 얼핏 앉았는 듯, 어화 怳惚하다. 꿈을 상시 삼고지고, 撫枕噓唏하여, 바삐 일어 바라보니, 雲山은 疊疊하여, 千里眼을 가리웠고, 皓月은 蒼蒼하여, 兩鄕心에 비추었다. 어제 내 일이야, 나도 모를 일이로다. 이리저리 그리면서, 어이 그리 못 보는고, 弱水三千里 멀단 말을, 이런 데를 이르도다, 佳約은 杳然하고, 歲月은 如流하여, 엊그제 二月꽃이, 綠岸邊 붉었더니, 그덧새 倐忽하여, 落葉이 秋景일다, 새벽 달 지샐 적에, 외기러기 울어옐 제, 반가운 임의 소식, 幸여 올까 바라보니, 滄茫한 구름밖에, 빈 소리 뿐이로다. 支離하다 이 이별은, 언제 만나 다시 볼까, 山頭의 片月되어, 임의 낯에 비추고져, 石上의 梧桐되어, 임의 무릎 베어보랴, 屋上雕樑에, 제비되어 날고 지고, 玉窓櫻桃花에, 나비되어 날고지고, 華山이 平地되고, 錦江이 다 마르나, 平生 슬픈 懷抱, 어디를 가을하리, 書中有玉顔은, 나도 暫間 들었더니, 마음을 고쳐먹고, 强氣를 다시 내어, 丈夫의 功名을, 아로조차 알리로다.」「긴중머리」  이것은 申光洙(신광수)가 魁科에 中하던 「關山戎馬」를 『大東樂府』에 실은 그 後의 作品이겠다. 그 詩에 「靑袍一上萬里船, 洞庭如天波是秋」의 句가 있으니, 그러므로 이 노래가 英祖 末年이나, 正祖 初期에 出現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杲杲天邊一輪紅, 扶桑에 둥실 높이 떠, 양곡의 잦은 안개, 遠峰으로 돌고, 漁場村 개 짖고, 호연봉 구름이 떴다. 蘆花는 다 눈되고, 浮萍 물에 금실 떠 魚龍은 잠자고, 子規새는 날아든다, 洞庭如天에 波是秋, 금수추파가 이 아니냐, 앞 팔로 碧波를 찍어 당기며, 뒷발로 滄浪을 탕탕, 요리조리 조리요리, 앙금 당실 높이 떠, 東南을 바라 봐, 地廣은 七百里, 波光은 天一色, 天外巫山 十二峰은, 구름 밖으로 멀고, 霞外瀟湘의 一千里, 眼下의 景槪로다. 岳陽樓 높은 집에, 杜子美(두보) 앉아 지은 글은, 洞庭으로 爭雄하고, 北方消息 저 기러기는, 瀟湘江으로 들고, 千峰萬壑을 바라봐, 萬景臺 구름 속에, 鶴聲이 울어 있고, 七寶山 검은 구름, 虛空에 둥실 높이 떠, 稽山罷霧에 鬱嵯峨, 山은 層層 높고, 鏡水無風에 也自波, 물은 슬렁 깊었는데, 이 골목 물이 쭈루룩, 저 골목 물이 꽐꽐, 열의 열골물이, 한 대 合水쳐, 천방저 지방저, 언턱저, 방울저 방울저 언턱저, 자주 울려 두당거려, 저 건너편 언덕에 마주 꽝꽝 솨르렁 꼴꼴, 흐르는 물은, 사양수로 돌아든다, 萬山은 鬱鬱, 菊花는 접접, 벽수는 뚝뚝, 長松은 落落, 해오리 舞罷에, 綠樹秦京 남난 두루미 날아든다. 쳐다보느냐, 萬壑은 千峰, 나리 굽어보느냐, 白沙地 땅이라, 허리 굽고 늙은 長松, 狂風을 못 이겨, 우줄우줄 반춤 춘다.」「자진 중머리」  이 노래는 위에 있는 「긴 중머리」의 副産物로서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 頭尾에 딴 色彩의 冠履을 갖춘 것뿐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도 그 尾末에 春景을 군더더기처럼 添付한 것은 缺點이 아니라고 못하겠다.  「가자 어서 가, 二水 건너 白鷺가, 白露橫江을 함께 가, 笑指蘆花 月一船, 楚江漁父 가변 배, 騎鯨仙子 간 然後에, 空秋月之團團, 고래 등에다, 저 달을 실어라, 우리 故鄕을 함께 가, 고고 천변 일륜홍, 부상에 둥실 높이 떴다, 魚龍은 잠자고, 子規새 펄펄 날아들 제, 洞庭如天波是秋, 금수추파가 이 아니냐, 앞 팔로 碧波를 찌어다리며, 뒷발로 창浪을 탕탕, 이리저리 앙금당실 떠, 洞庭 七百里, 四面을 바라봐, 稽山罷霧에 鬱嵯峨하고, 鏡水無風에 也自波, 山은 층층 높고, 물은 슬렁 깊은데, 이골 물이 쭈루룩, 저골 물이 솰솰, 열의 열골 물이, 한데 合水쳐, 천방저 지방저, 지방저 천방저, 언턱저 방울저, 방울저 방울저 언턱저, 자주 울려 두당거려, 건너편 언덕에, 마주 꽝꽝 솨르렁 골골 흐르는 물은 자양수로 돌아든다, 치어다 보니 萬壑千峰, 나려 굽어보니 白沙地라, 허리 굽고 늙은 長松, 狂風을 못 이기어, 우줄우줄 춤만 춘다. 綠陰은 우거지고, 芳草는 숙어져, 앞내 버들은 柳綠帳, 두르고, 뒷내 버들은 靑布帳 늘여처, 한 가지 찌어저, 한 가지 늘어저, 春悲春興 못 이기어, 흔들흔들이 노일 적에, 三月 삼짇(일)날에, 鷰子 펄펄 날아들어, 옛집을 다시 찾아들고, 蝴蝶은 紛紛, 나무 나무 속잎 나, 가지가지 꽃 피어, 아마도 네로구나, 이런 景致가 또 있는가, 아니 놀고 무엇하리오.」「遊山歌」  이 노래는 위에 있는 「긴 중머리」의 詞說을 그대로 移本한 것이 있으니, 늦어도 正祖 時代에 되어진 作品인가 한다.  「花爛春城하고, 萬和方暢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山川경개 구경가세, 竹杖芒鞋 單瓢子로, 千里江山 들어를 가니, 滿山紅綠들은, 一年一度 다시 피어, 春色을 자랑노라, 色色이 붉었는데, 蒼松翠竹은 蒼蒼鬱鬱하고, 琪花瑤草 爛熳中에, 꽃 속에 잠든 나비, 자취없이 날아든다, 柳上鶯飛는 片片金이요, 花間蝶舞는 粉粉雪이라, 三春佳節이 좋을시고, 桃花滿發點點紅이로구나, 漁舟逐水愛山春이라던, 武陵桃源이 예 아니냐, 楊柳細枝 絲絲綠하니, 黃山谷裏 當春節에, 淵明(도연명)五柳가 예 아니냐, 제비는 물을 차고, 기러기 무리지어, 거진 中天에 높이 떠서, 千里江山 머나먼 길에, 어이 갈꼬 슬피 운다. 遠山 疊疊, 近山은 주춤하여, 奇巖은 層層, 長松은 落落, 허리 구부러져, 狂風에 興을 겨워, 우줄우줄 춤을 춘다. 層巖絶壁上에 瀑布水는 콸콸, 水晶簾 드리우듯이, 이골 물이 주루룩, 저골 물이 솰솰, 열의 열골 물이, 한데 合水쳐, 천방저 지방저, 솟구라지고 펑퍼져, 너울지고 방울져, 저 건너 屛風石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銀玉같이 흩어지니, 巢父(소부)·許由(허유) 問答하던, 箕山穎水가 예 아니냐, 주각 啼禽은 千古間이요, 적다 鼎鳥는 一年豊이라, 日出落照가, 눈앞에 버려나, 景槪 무궁히 좋을시고.」「處士歌」  나는 「天生我才 쓸 데 없어」의 句를 읽고서 두세 번 長歎하다가 星湖(성호 이익)의 말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그의 말에 依하면 「天下에 가장 可惜한 것은 有用으로써 無用에 돌리는 것이라, 저 山野가 枯槁하는데 川流가 空然히 海에 注하니, 어찌 可惜지 아니하냐?」 하고, 그 註에 「萬姓이 塗炭에 있는데 賢人이 空然히 늙어지니 어찌 可惜지 아니하냐?」라고 하였다. 試問하노니 天下古今에 處士와 같은 사람이 몇몇이나 되는가?  그런데 이 노래는 「黃鷄詞」가 流行된 그 後에 되어진 것이라 하노니 詳言하면 「黃鷄詞」의 第七章을 그대로 移本한 그것이 實證으로 된다는 것이다.  「天生我才 쓸 데 없어, 世上功名을 하직하고, 養閑守命하여, 雲林處士되오리라, 九승葛布 몸에 걸고, 三節竹杖 손에 쥐고, 落照紅蓼 景 좋은데, 芒鞋緩步로 나려가니, 寂寂松關 닫았는데, 寥寥杏園에 개 짖는다, 경개무궁 좋을시고, 山川草木 푸르렀다, 蒼巖屛風 둘렀는데, 白雲深處 집을 삼고, 江湘漁父 같이하여, 竹冠簑笠 젓겨쓰고, 十里沙場 나려가니, 白鷗飛去뿐이로다, 一葦片帆 높이 달고, 萬頃滄波 흘려 저어, 數尺銀鱗 낚아내니, 松江鱸魚 비길러라, 日落滄江 저물었다, 泊舟蒲渚 돌아오니, 南隣北村 두세 집에, 落霞暮煙 잠겨서라, 箕山穎川이 아닌가? 別有天地 여기로다, 淵明(도연명)五柳 심은 곳에, 千條細柳 늘어졌다, 子陵澤畔 낚던 臺인가? 白頭金鱗 뛰노누나, 二個家僮 벗을 삼아, 반향기와 바라보니, 牛背牧童 閑暇하다, 壽春山도 일삼노라, 東林子規 슬피 우니, 醉中회포 돋으는 듯, 酒醒否아 일어나니, 逸興風景 그지없다, 回還麋鹿 벗이 되어, 萬壑千峰 오며 가며, 石路蒼苔 막혔으니, 塵世消息 끊어서라, 아마도 事無閑身은 나뿐인가 하노라.」「瀟湘八景」  우리 朝鮮에서 瀟湘八景이란 말이 언제부터 起因되었는가? 記錄上에 나타난 것으로 實證을 삼는다면 高麗 明宗의 때, 李光弼(이광필)의 「瀟湘八景圖」가 처음인가 한다. 그리고 그것을 詩로써 表現하기는 李朝 成宗 때의 翰林 鄭希良(정희량)인가 한다. 그의 詩를 提示한다면 첫째는 「瀟湘夜雨」이니  「九疑嵯峨楚雲碧, 鷓鴣啼雨湘江夕, 寒聲浙瀝何悽悽, 竹間哀淚懸餘滴, 楚些爲招帝子魂, 月恨風愁天亦泣, 孤帆一夜滯未歸, 遠客蕭蕭生白髮」  둘째는 「平沙落雁」이니  「秋鬼濃淡雨復晴, 海波不動含深綠, 平沙若剪雲嵯峨, 雁背斜光斷還續, 西風吹影落漁磯, 字字新出臨池墨, 稻梁離離網弋多, 急向蘆花深處宿.」  셋째는 「洞庭秋月」이니  「渡頭楓林霜初結, 海風吹滴猩猩血, 秋光上下鏡面平, 淸光一片琉璃徹, 沙頭眠鷗忽驚起, 客帆飛去波明滅, 煙水滄茫野牧歸, 數聲短笛吹新月.」  넷째는 「漁村落照」이니  「靑山影空釣石寒, 海門秋色濃可掬, 漁人帶簑臥不驚, 沙鳥欲起還相逐, 一聲款乃及暮歸, 南隣喚酒酒初熟, 絲絲細雨急收網, 一抹斜陽掛古木」  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詞」에 「뒷 뫼가 지나가고, 앞 뫼가 나아온다」는 聾巖(농암 이현보)의 「帆過前山忽後山」을 依倣한 것이지만, 遠浦歸帆의 보아 알 든 못하여도, 다만 앞에 섰던 山이, 문득 뒤로 옮아가니」는 孤山(고산 윤선도)의 그것보다 오히려 淸絶한 맛이 있으며, 聲巖(농암 이현보)의 그것보다도 더욱 詳明하여 朝鮮 냄새가 가지록 무르녹았다.  「江湖別曲」에서는 孤山(고산 윤선도)의 「漁村 두어 집이, 내 속에 들락날락」을 引用하여 「隔岸漁村兩三家에, 저녁 煙氣 일어나고」로 修正하였다면 「漁村落照」에는 「江湖別曲」의 그것을 또 얼만큼 修正한 것으로 볼 것이오. 그리고 「漁村落照」의 「고기 주고 술을 사서, 醉토록 먹은 後에」는 「江湖別曲」의 그것을 또한 얼마큼 修正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江湖別曲」이 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詞」보다 뒤떨어져 된 것과 같이 「瀟湘八景」이 「江湖別曲」보다 멀리 뒤떨어져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어느 時代의 作品이라 할까? 우리의 先人들은 나의 것보다 남의 것을 더 愛好하였다. 嶺東八景은 그림에나, 노래에나 讚美한 자취가 別로 없으되, 瀟湘八景만은 慕華主義의 表徴으로 壁畫와 屛畫에 常用하다가 畢竟, 노래로써 讚美하기는 正祖의 時代인가 한다.1. 山岳이 潛影하고, 陰風이 怒號하여, 樹邊에 우는 새는 千兵萬馬 서로 맞아, 鐵騎刀鎗이 이었는 듯, 簷下 끝에 急한 形勢, 百尺瀑布 쏟아오고, 대수풀에 흩뿌릴 제, 皇靈의 깊은 恨을, 잎잎이 呼訴하니, 瀟湘夜雨라 하는대요.2. 七百平湖 맑은 물은, 上下天光 푸르렀다, 구름 밖에 문득 솟아, 天空에 徘徊하니, 桂宮姮娥 淡粧하고, 새 거울을 열었는 듯, 寂寞한 魚龍들은, 勢를 얻어 出沒하고, 楓林에 歸鴉는 빛을 놀라 사라지니, 洞庭秋月 이 아니냐?3. 煙波萬頃은 하늘에 닿았는데, 오고 가는 商賈船은, 북을 둥둥 울리면서, 어기여차 닻감는 소리, 보아 알든 못하여도, 다만 앞에 섰던 山이, 문득 뒤로 옮아가니, 遠浦歸帆 이 아니냐?4. 水碧沙明兩岸苔에, 不勝淸怨却飛來라, 날아오는 저 기럭기, 갈순 하나를 입에다 물고, 一點二點 點點이 날아, 行列지어 떨어지니, 平沙落雁 이 아니냐?5. 湘水로 울고 가니, 愁雲이 寂寞하고, 黃陵으로 울고 가니, 옛 祠堂이 荒凉하다, 南巡 皇帝 魂이라도, 應當히 설으려던, 새소리 눈물지니, 黃陵哀猿 이 아니냐?6. 隔岸漁村兩三家에, 밥짓는 내가 있고, 罷釣歸來 배를 매고, 고기 주고 술을 사서, 醉하도록 먹은 後에, 款乃聲 부르면서 달을 띄고 누었으니, 漁村落照 이 아니냐?7. 天地는 자욱하여, 紛紛霏霏 내리나니, 粉蝶에 다투는 듯, 유세는 척광하여, 유공의 성낸 가지, 鹽虎가 엎드린 듯, 江山이 變化하여, 銀世界가 되었으니, 江村暮雪 이 아니냐?8. 山村에 지는 煙氣, 무르녹아 빚어내니, 情다운 魚龍들은 여러 萬個 戲弄하고, 진천의 젊은 계집, 깁을 지어 버렸는데, 巫山에 노던 仙女, 六綃山裙 떨쳐 입고, 발맞게 陣을 쳐, 秋寂寂 雨霏霏하니, 山市靑嵐 이 아니며, 江山을 다 구경할 양이면, 몇 날일지 모르겠다, 洞庭湖 一區域에 瀟湘八景뿐이로다.「寒松亭」  이 노래는 「瀟湘八景歌」가 充分히 播傳된 그 後의 産物이겠다. 이렇게 斷言하는 것은 여기에 遠浦歸帆의 後半部를 그냥 引用한 까닭이다.  「寒松亭 솔을 베어, 조그맣게 배를 묶어, 漢江에 띄어놓고, 술이며 안주 많이 싣고, 거문고·가야금·笙簧·洋琴·細피리·젓대·나는 북장고 넌짓 싣고 長安의 一等名妓, 左右로 늘여 앉혀, 소리名唱, 歌客이며, 風流郞 豪傑男子, 한 배에 넌짓 싣고, 밤이면은 月色 따라, 童子야, 네― 노를 나루 저어, 슬렁슬렁 배 띄어라, 江陵 鏡浦臺로 달맞이 가자, 다만 앞에 섰던 山이, 보아 알든 못하여도, 문득 뒤로 옮아가니, 遠浦歸帆 이 아니냐, 等狀가자, 等狀가자, 하느님전 等狀가자, 무슨 緣由로 等狀가리, 늙으신 어른은, 궂기지 말고, 젊은이란 늙지 마라, 그만 緣由로 等狀가자, 아서라! 모두 다 醉談이다, 멀고 먼 黃泉길을, 어이하여 가단 말가? 살았을 적 먹고 쓰고, 쓰고 먹고, 거들먹 거리고 놀아보자, 路柳墻花를 꺾어 쥐고, 淸風明月에 놀아보세.」「진양」  이 노래는 要路에 失脚한 어떤 사람이 山水를 따라 逍遙하면서 지은 것인데, 그 가운데에 「白鷗詞」의 첫 머리를 引用하였으니 그 處地가 洪國榮(홍국영)과 비슷한 點이 있은 듯하다. 또는 「江湖別曲」에서도 摘用한 것이 있으니 「滄浪一曲 반겨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가 곧 그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에는 過去 朝鮮人의 淸貧主義가 다 表現되었다. 漢土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一切로 欽慕하되 高尙하게 여기는 人物로는 「沮·溺(장저·걸익)의 耕田, 許由(허유)의 洗耳, 四皓(동원공·기리계·하황공·각리선생)의 圍碁, 嚴子陵(엄자릉)의 垂釣, 諸葛亮(제갈공명)의 午睡, 竹林七賢의 集會, 甯戚(영척)의 飯牛, 李謫仙(이백)의 騎鯨, 孟浩然(맹호연)의 騎驢, 赤松子(적송자)의 騎鶴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壁畫와 屛畫에서도 자주 보게 되었고, 이렇게 노래에서도 또한 보게 되었다. 이 노래의 作者가 그런 人物을 장차 提示하기 爲하여서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서 누었으니, 大丈夫 살림살이, 요만하면 넉넉하지」를 먼저 말하였겠다.  「夏四月 初八日날, 南風之薰兮하고, 解吾花之慍兮로다, 三角山 第一峰에 鳳凰이 앉아 춤을 추고, 漢江水 맑은 물에, 河圖龍馬가 나단 말가? 百工相和景星歌는 오늘이야 알리로다, 이형 이목이 암암한데, 夢中에나 만나 볼까? 打起黃鶯 아이들아, 莫敎枝上에 恨을 마라, 꾀꼬리 탓이 아니로다, 黃金甲옷 떨쳐 입고, 細柳營 넘어가니, 喚友聲 켜는 소리, 겨우 든 잠 다 깨운다, 長安萬戶 燈을 달아, 山呼萬歲를 부를 적에, 光風霽月 너른 天地, 鳶飛魚躍 뛰놉는다. 그 달 그믐 다 보내고, 五月이라 端午日은, 天中之佳節이요, 月遲遲 窓外로다, 蒼蒼한 수풀 속에, 百舌이 漸漸 잦았으니, 時哉時哉 聖賢이요, 山陽雌雉 우는고나, 白鷗야 펄펄 나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聖上이 버리심에, 너를 좇아서 예 왔노라, 江山에 터를 닦아, 構木爲巢 하여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서 누었으니, 大丈夫 살림살이, 요만하면 넉넉하지, 一寸肝腸 맺힌 설움, 父母님 생각뿐이로다, 松柏垂楊 푸른 가지, 높다랗게 그네 매고, 綠衣紅裳 아이들은 오락가락 鞦韆을 하는데, 우리의 父母님들은, 어디로 가고, 鞦韆時代를 모르는고? 그 달 그믐 다 지내고, 유월이라 流頭날은, 乾坤이 有意하여 양심에 잠겨서라, 중염이 미곤하여, 洪爐流金이 되단 말가? 나도 미리 避暑하여, 어디로 가잔 말가? 陶淵明(도연명) 千秋後에, 萬古江山이 묻혀서라, 竹杖 집고 풍월지취하여, 大觀江山을 하여 보세, 瀑布도 좋거니와, 廬山이 여기로다, 飛流直下三千尺은, 옛말 삼아 들었더니, 疑是銀河 落九天은 果然 헛말이 아니로다, 그 물아 有道하여, 塵衿을 씻은 後에, 은하 石逕 좁은 길로, 引導한 곳 내려가니, 沮·溺(장저·걸익)은 이리야 밭을 갈고, 四皓(동원공·기리계·하황공·각리선생)先生은 바둑 두네, 그 山을 썩 넘어서, 穎水로 내려가니, 許由(허유)는 어이하여, 팔을 걷고 귀를 씻노? 巢父(소부)는 무슨 일로, 소고삐를 붙잡았노? 滄浪一曲 반겨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嚴陵灘 여울물에, 고기낚는 漁翁들을, 羊의 갖옷 떨쳐 입고, 벗을 줄 몰라 있고, 嗚呼라 성현 기운 평하니, 미재 군평이 여기세라, 黃山谷 돌아드니, 竹林七賢 다 모였다. 甯戚(영척)은 소를 타고, 李謫仙(이백) 고래 타고, 赤松子(적송자) 鶴을 타고, 孟浩然(맹호연) 나귀탔네, 杜牧之(두목) 보려하고, 白樂天(백낙천)邊 내려가니, 呂동빈이 백락이라, 孟東野 너른 天地, 臥龍罔邊 내려가니, 鶴氅衣黑帶로다, 八陣圖 縮地法은 胸藏萬甲 하여 있고, 草廬에 깊이 든 잠, 大夢詩을 읊네그려, 그 山廣野 넓고 넓은 金잔디 좌르르 깔렸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흐늘거리고 놀아보세, 江山구경을 다 하려고 들면, 몇 날 몇 달이 될 줄 알리라.」「梅花歌」  이 노래의 發生地는 平壤인가 하면서 그 內容으로 보아 흐르는 물과 같은 情다운 사람을 義州에 두고 안타깝게도 歎息한 듯하다.  「梅花의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온다, 春夢이 하 紛紛하니, 필지 말지도 하다마는, 잎 피었던 가지마다, 피엄직도 하마다는, 北京使臣 역관들아, 五色唐絲를 붙임하세, 매세매세 그물을 매세, 五色唐絲로 그물을 매세, 치세치세 그물을 치세, 浮碧樓下에 그물을 치세, 걸리소서 걸리소서, 情든 사랑만 걸리소서, 물아래 그림자 젓다, 다리 위에 중놈이 간다, 중아 중아 거기 暫間 섯거라, 너 가는 人便에 말 물어를 보자, 그 중놈이 白雲을 가리키며, 돈람 無心만 하는구나, 宣川이라 통義州를 이리루 접첩, 저리루 접첩, 저늬렴 접첩, 개어다 놓고, 한 손에는 박달망치, 또 한손에 물박 들고, 흐르는 川水, 드립더덥석, 이리루 솰솰, 저리루 솰솰, 출렁출렁, 안南山에, 밖南山에, 개암을 개암 심어 심거라, 못 따먹는 저 다람의 안이야.」「小春香歌」  이 노래는 그 名稱과 같이 「春香歌」의 한 場面을 簡拔하여 만든 것이다.  「春香(성춘향)의 거동 보아라, 오른손으로 日光을 가리고, 왼손 높이 들어, 저 건너 竹林 본다, 대 심어 울하고, 솔 심어 亭子로다, 東便에 蓮塘이요, 西便에 우물이라, 路傍심에 오후다요, 門前학동 선생류 긴버들, 휘늘어진 늙은 長松, 狂風에 興을 겨워, 우줄우줄 춤을 추니, 저 건너 사립문 안에, 삽사리 앉아 먼 산만 바라보며, 꼬리치는 저 집이오니, 黃昏에 丁寧히 돌아오쇼, 떨치고 가는 形狀, 사람 뼈다귀 다 녹인다, 너는 웨한 계집애관대, 나를 종종 속이느냐? 너는 웨한 계집애관대, 丈夫의 간장을 다 녹인다, 綠陰芳草勝花時에, 해는 어이 더디 가고, 梧桐夜月 밝은 달, 밤은 어이 쉬이 간고. 日月無情 덧없도다, 玉鬢紅顔 空老로다, 우는 눈물 받아 내면, 배도 타고 가련마는, 咫尺東方 千里완대, 어허 그리 못 보던가?」「토끼타령」(一名은 「토끼화상」)  이 노래는 「兎의 肝(별주부傳)」에서 分化된 것인데, 다만 토끼의 생김생김을 그림으로 解剖한 것이다.  「토끼화상을 그린다, 토끼화상을 그린다, 화공을 불러라, 화공을 불렀소, 토끼화상을 그린다, 李謫仙(이백) 鳳鳳臺, 鳳 그리던 환장이, 南宮天子 凌虛臺, 日月 그리던 환장이, 燕昭王의 黃金臺며, 그리던 환장이, 동정류리 靑黃硯, 금수추파 거북연적, 오징어 불러 먹을 갈려, 美頭畫筆 담북 풀어, 白菱雪花 簡紙上에, 이리저리 그린다, 天下名山勝地間에, 경개 보던 눈 그리고, 蘭草芝草 우거를 진대, 불로초 뜯던 입 그리고, 앵무공작이 짖어울 제, 소리 듣던 귀 그리고, 蓬萊·方丈 雲霧中에, 香내 맡던 코 그리고, 大寒嚴冬雪寒風에, 防風하던 털 그리고, 左便에는 靑山이요, 右便에는 綠水로다, 綠水靑山 깊은 곳에, 桂樹나무 그늘 속에 앙금조츰 뛰던 발 그리고, 두 귀는 쫑긋, 두 눈은 도리도리, 허리는 잘룩, 꽁지는 뭉툭, 앞발은 짧고, 뒷발은 길어, 깡짱깡짱 뛰어가는 峨嵋山半輪兎를, 이에서 더할쏘냐? 아니었다, 별주부야, 네 가지고 가거라.」「제비가」  이 노래는 「興夫傳」에서 分化된 것인데, 심술궂은 놀부의 제비 후리는 狀態를 갖가지로 敷衍하였다.  「萬疊靑山 늙은 범이, 살진 암캐를 물어다 놓고, 에리 궁글 놀린다, 狂風에 落葉처럼 碧海 둥둥 떠나간다, 日落西山에 해는 뚝 떨어지고, 月出東嶺에 달이 솟네, 萬里長天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제비를 후리려 나간다, 伏羲(복희)氏 맺은 그물을, 들쳐 메고서 나간다, 芒碣(망갈)山으로 나간다, 우여라 저 제비야, 네 어디로 向하느냐? 白雲을 박차고, 黑雲을 무릅쓰고, 半空中에 높이 떠서, 위여어 하고서, 저 제비 너 어디로 向하느냐? 내 집으로 훨훨 돌아오쇼, 楊柳間에 앉은 꾀꼬리를, 제비만 여겨 후린다, 아야 에야 너 어디로 向하느냐? 空山夜月 달 밝은데, 슬픈 소리 杜鵑聲, 슬픈 소리 杜鵑聲, 月到天心 夜三更에 어는 郞君이 날 찾나? 雲林飛鳥 뭇 새들은, 弄春和答 짝을 지어, 雙去雙來 날아든다, 말 잘하는 앵무새, 춤 잘 추는 鶴두루미, 文彩 좋은 孔雀새, 공기적다 공기 주루룩, 숙궁 접동새 수루룩, 호반새 날아든다, 기러기 훨훨, 방울새 떨렁, 다 날아드는데, 제비만 어디로 向하느냐? 江南으로 向하지 말고, 내 집으로 훨훨 날아드쇼.」「새타령」  一幅의 그림과 같은 朝鮮의 山水, 봄철이면 「以鳥鳴春」하는 朝鮮의 景槪, 이 나라의 사람으로서 누구가 興에 겨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랴? 거기로서 새타령도 흘러나온 것이겠다.  「새가 새가 날아든다, 온갖 雜새가 날아든다, 南風 좇아 떨쳐나니, 九萬里 長天에 大鵬새, 文王이 나게시니, 岐山朝陽에, 鳳凰새…」「原本孔明歌」  이 노래는 朱子(주자)의 『通鑑綱目』과 金聖歎(김성탄)評의 『三國衍義』에 根本한 그 思想의 衝動을 받아서 되어진 것이다. 乙支文德(을지문덕)이나 李舜臣(이순신)보다 劉·關·張(유비·관우·장비) 三人과 諸葛亮(제갈공명)을 오히려 天神같이 崇拜하는 朝鮮사람에게서 孔明(제갈공명)歌나 赤壁歌가 나왔다는 것이 그리 異常한 일은 아니다.  「孔明(제갈공명)이 葛巾野服으로 南屛山에 올라가 壇 높이 보고, 東南風을 빌 제, 東에는 靑龍旗요, 北에는 玄武旗요, 南에는 朱雀旗요, 西에는 白虎旗로다, 中央에는 太極旗 꽂고, 五方旗幟에는 東西四方으로 좌르르 벌려 꽂고, 발 벗고 머리 풀고, 鶴氅衣 黑帶 띠고, 壇에 올라, 東南風 비온 後에, 壇下를 굽어보니, 江上에 둥둥 떠오는 배, 徐盛(서성), 丁奉(정봉)의 밴줄만 알았더니, 趙子龍(조자룡)의 배가 分明하구나, 卽時 壇으로 내려오니, 子龍(조자룡)이 船隻을 等待하였다가, 先生을 뵈옵고 하는 말이, 先生은 佳候 一向하옵시며, 東南風은 無事히 빌어 계십니까? 東南風은 無事히 빌었으나, 뒤에 追兵이 올 듯하니, 어서 배를 돌리어 行船을 하소서, 子龍(조자룡)이 여쭈오되, 小將하나 있사오니, 무슨 念慮가 있사오리까? 즉시 배를 타고 夏口로 갈 제, 이때 周瑜(주유)―魯肅(노숙)더러 하는 말이, 孔明(제갈공명)은 제아무리 上通天文, 下達地理, 六韜三略을 無不通知할지라도 甲子年 甲子月 甲子日 甲子時에, 東南風 빌기는 萬無로구나? 말이 닷지 못하여 風雲이 大作하여, 東南風이 일어날 제, 검은 구름은 뭉게뭉게, 雷聲霹靂은 우루룩, 바람은 地動치듯, 번개는 번쩍, 빗방울은 뚝, 뚝, 뚝 떨어질제, 周瑜(주유) 肝膽 놀라, 北窓을 열고 南屛山 바라보니, 암성기암은 펄펄 나붙기어 西北을 가리웠거늘, 이때에 徐盛(서성)·丁奉(정봉) 兩將을 불러 分付하되, 孔明(제갈공명)은 天神같은 謀士니, 저런 謀士를 두었다가는, 日後 患이 있을 듯하니, 너의 두 장수는 不問曲直하고 南屛山 올라가, 孔明(제갈공명)의 머리를 베어 오라! 만약 베어 오지 못하면은, 軍法으로 施行하리라! 徐盛(서성)·丁奉(정봉) 分付듣고, 匹馬單騎로 長鎗을 높이 들고, 徐盛(서성)은 水路로 가고, 丁奉(정봉)은 陸路로 가, 南屛山 올라가니, 孔明(제갈공명) 先生은 간 곳 없고, 다만 남은 건, 겨우 壇지킨 軍士뿐이라, 軍士더러 묻는 말이, 孔明(제갈공명) 先生은 어디로 가시더냐? 軍士 대답하되, 이제 발 벗고 머리 풀고, 壇에 올라 東南風 비인 後에, 壇아래 내려가시더니, 어디로 가신 蹤迹을 알지 못하나이다, 徐盛(서성)이 그 말 듣고, 大驚하여, 山으로 층층 내려와 江口에 점점 당도하니, 人迹은 고요한데, 다만 남은 것은 左右 江지킨 守軍將卒뿐이라, 將卒더러 묻는 말이, 先生은 어디로 向하더냐? 將卒이 여쭈오되 이제 한 사람 발 벗고, 머리 풀고, 九節杖 짚고, 예 와 섰더니만, 江上으로 웬 扁舟 둥둥 떠오더니, 웬 한 장수 船頭에 선뜻 나서, 兩손으로 揖하고서, 先生을 맞아 모시고, 江上으로 向하더이다, 徐盛(서성)·丁奉(정봉) 그 말 듣고, 船隻을 재촉하여, 順風에 돛을 달아 따르다가, 앞에 가는 배, 돛 없음을 보고, 점점 따르다가, 船頭에 선뜻 나서 하는 말이, 앞에 가는 배, 孔明(제갈공명) 先生 타셨거든 暫間 닻 주고, 닻 놓고 머무르소서, 우리 都督께옵서 申申付托하오니, 말 한 마디 들으시고 行船하소서, 孔明(제갈공명)이 배머리에 선뜻 나서 하는 말이, 徐盛(서성)아, 말 들어라! 내 너의 나라에 가서 恩德도 많이 베풀고, 東南風까지 빌어 주었거던, 무슨 일로 나를 害코저 하느냐? 너희 두 장수는 부질없이 길을 따르지 말고, 빨리 돌아가 내말 갖다 너의 都督에게 傳하고 國事나 도와주어라! 徐盛(서성)이 들은 체 아니하고 따를 적에, 子龍(조자룡)이 선뜻 나서 하는 말이, 내 너를 죽일 것이로되, 兩國의 和氣가 傷할 듯하기로 죽이지 않고, 그저 보내거니와 手段이나, 暫間 비양하노라, 鐵弓에 왜전 먹여 깍지손 끼어들고, 左弓에 우거질까, 右弓에 좌저질까, 가는 살이, 徐盛(서성)·丁奉(정봉) 배돛대 맞아 물에 가 푹―덤벅 떨어지니, 돛은 좌르르, 처릉은 끊어져, 배머리 빙빙, 몰아를 갈제, 連하여 鐵弓에 왜전 먹여 깍지손 지끈 떼니, 江上 수루루 건너가 徐盛(서성)의 쓴 투구 물에 가 덤벙, 떨어지니, 徐盛(서성) 魂飛魄散하였다가, 겨우 人事차려, 沙工 불러 묻는 말이, 저기 저 장수 어떠한 壯士냐? 沙工 여쭈오되, 前에 長板橋 싸움에 阿斗(유선)를 품에 품고, 億十萬大兵을 瞬息間에 제쳐버리고, 長板橋로 돌아와도 後主 잠 들고 깨지 않던 常山 땅의 趙子龍(조자룡)이로소이다, 徐盛(서성)이 그 말 듣고, 할 일 없이 빈 배머리를 슬슬 돌리며, 本國으로 돌아가며 自歎하는 말, 漢宗室 劉皇叔(유비)은 德이 두터운지 저런 謀士·名將을 두었건만, 우리 陛下는 다만 仁慈할 뿐이로다, 생각을 하면 天時를 拒逆지 못하겠으니 自歎뿐이다.」「別赤壁歌」  「大丈夫 虛浪하여, 富貴功名을 하직하고, 三尺童 一匹驢로, 勝地江山을 遊覽할 제, 秦始皇 古國之墟와, 萬里長城 阿房宮이며, 漢武帝 千秋遺蹟 仙人掌과, 이러한 勝地를 어디어디 보았는고? 黃鶴樓 鳳凰臺며, 黃龍口 영귀塔과 順天府 영천府는 沃野千里 되어 있고, 燕·齊·楚·韓 魏·秦·趙, 吳·隋·唐·越 魯·蔡·宋, 다 본 後에 風景이 旣盡하고, 玉欄干에 비껴 앉아, 引壼觴而自酌하고, 不勝醉興하여, 邯鄲枕 돋우 베고, 萬疊靑山 들어가니, 山形地勢도 좋거니와, 楚山物色이 더욱 좋다, 東三江은 水戰이요, 赤壁은 鏖兵이라, 난데없는 火光이 沖天하니, 曹操(조조)가 大敗하여, 華容道로 行할 즈음에, 應砲一聲에 一員大將이 掩身甲옷에 봉투구 젓겨 쓰시고, 鳳眼을 부릅뜨시고, 三角鬚를 거스리시고, 赤兎馬를 비껴 타시고, 八十斤 靑龍刀, 눈 위에 선뜻 들어, 압다, 이놈 曹操(조조)야! 날다, 길다 하시는 소리, 精神이 散亂하여, 비나이다, 비나이다, 殘命을 살으소서, 小將의 命을, 將軍前에 비나이다, 前日을 생각하오, 上馬에 千金이요, 下馬에 百金이라, 五日에 大宴하고, 三日에 小宴할 제, 漢壽亭侯 封한 後에 高大廣室 높은 집에, 美女充宮하였으니, 그 精誠만 생각하오, 今日 曹操(조조)가 赤壁에 大敗하여, 말은 疲困하고, 사람은 주리어, 能히 寸步를 못하겠으니, 將軍厚德을 입사와지이다, 네 아무리 살려고 하여도, 살지 못할 말 듣거라! 네 精誠 갚으려고 白馬江 싸움에, 河北名將 범같은 天下壯士 顔良(안량)·文醜(문추)를 한 칼에 선뜻 베어, 네 精誠 갚은 後에, 漢壽亭 印兵符 끌러, 轅門에 걸고, 獨行千里 하였으니, 네 精誠만 생각하느냐? 이놈, 曹操(조조)야! 너 잡으려고 여기 올 제, 軍令狀 두고 왔다. 네 죄상을 모르느냐? 天命을 拒逆하고, 百姓을 殺害하니, 萬民塗炭을 생각지 않고, 너를 어이 容恕하리, 奸邪한 말을 듣고, 짧은 목 길게 늘여, 靑龍刀 받으라 하시는 소리, 一寸肝腸 다 녹는다, 小將을 잡으려고, 軍令狀 두었으나, 將軍의 命은 하늘에 달렸으며, 小將의 命은 今日 將軍前에 달렸소, 어지신 聖德을 입사와, 將軍厚德에 살아지이다, 關公이 들으시고, 殘忍히 여기사, 周倉(주창)으로 하여금 五百刀斧手를 한편으로 치우시고, 말머리를 돌으키시니, 曹操(조조)가 華容道 벗어나서, 曹仁(조인) 만나, 許都로 가단 말가?」「老處女歌」  國初로부터 婚嫁에 對하여는 法的으로 重視하였나니, 成宗 十六年에 頒布한 『經國大典』의 禮典 三十二項 婚嫁條에 「子女의 年이 滿十三歲가 되면 議婚함을 許한다」하고, 그 禮典의 拾遺 六十七項 惠恤條에  「土族의 女가 三十에 近하되 婚嫁를 못한 者에게는 資材를 量給한다」하고,  그 보다도 더 일찍이 成宗 六年 八月條(『成宗實錄』 卷 三十三)에  「女年이 二十五歲가 되도록 婚嫁를 못하였다면, 그 父母를 罰하기로」에 對한 臣等의 願書가 있었다.  老處女의 成婚問題는 이렇게 重大視하였는데, 이 노래에 나타난 그 父母는 貧乏한 것도 아니요, 다만 士族家門을 擇하는 거기에서 딸을 그렇게 늙게 하였다. 그것은 이 노래의 「검정 암소 살쪄 있고, 奉祀田畓 같건마는, 士族家門 가리면서, 이때도록 늙어간다」가 充分히 說明하고 있으니 그런 兵曹判書까지 지낸 兩班님에게는 婚嫁違時律도 쓸 데 없던가?  그런데 이 노래의 作者는 한 方面으로는 그리 貧乏지 않은 兩班父母란 것을 말하면서, 다른 方面으로는 「가난한 좀 兩班이, 父親하나 半便이요, 가난한 私說뿐이로다」 等의 말로써 前後가 矛盾되게 하였으니 그 솜씨의 서투름을 스스로 告白하였다.  「人間世上 사람들아, 이내 말씀 들어보쇼, 人間萬物 생긴 後에, 草木禽獸 짝이 있다, 人間에 생긴 男女, 富貴子孫 같건마는, 이내  八字 헛궂을손, 나 같은 이 또 있는가? 百年을 다 살아야, 三萬 六千날이로다, 혼자 살아 千年살며, 貞女되어 萬年살까? 답답한 우리 父母, 가난한 좀 兩班이, 兩班인체 된체하고, 處事가 不敏하여, 驕慢을 일삼으니, 다만 한 딸 늙어간다, 寂寞한 빈 房 안에, 寂寂寥寥 혼자 앉아, 輾轉不寐 잠 못 들어 老妄한 우리 父母, 날 길러 무엇하리, 죽도록 날 길러 잡아 쓸까, 구워 쓸까? 人皇적 생긴 男女, 伏羲(복희)적 지은 嫁娶, 人間配匹 婚娶함은, 예로부터 있건마는, 어떤 處女 八字 좋아, 二十前 시집간다, 男女子孫 시집장가, 떳떳한 일이건만, 이내 八字 崎險하여, 四十까지 處女로다, 이런 줄 알았으면, 처음 아니 낳을 것을, 月明紗窓 긴긴 밤에, 寢不安席 잠 못 들어, 寂寞한 빈 房 안에, 오락가락 다니면서, 將來事를 생각하니, 더욱 답답 민망하다, 父親 하나 半便이요, 母親 하나 菽麥不辨, 날이 새면 새 날이요, 세가 쇠면 來年인가, 婚姻私談 全廢하고, 가난 私說뿐이로다, 어디서 손님 오면, 幸여나 仲媒신가, 아이 불러 詰問한즉, 風憲·約正 還上 재촉, 어디서 편지 왔네, 幸여나 請婚書인가, 아이더러 물어보니, 外三寸의 訃音이라, 애달프고 설움지고, 이 肝腸을 어이할꼬? 앞집의 아무 아기, 벌써 子孫 낳단 말가? 동편집 용골녀는, 今明間에 시집가니, 그 동무의 無情歲月, 시집가서 풀건마는, 친구 없고 血屬없다. 慰勞할 이 전혀 없네, 우리 父母 무정하여 내 생각 전혀 없다, 富貴貧賤 생각 말고, 人物風采 마땅커던, 處女 四十 나이 적소, 婚姻擧動 차려 주오, 金童이도 喪妻하고, 李童이도 棄妻로다, 仲媒할미 전혀 없네, 날 찾을 이 뉘시런고? 검정 암소, 살쪄있고, 奉祀田畓 같건마는, 士族家門 가리면서, 이때도록 늙어간다. 臙脂粉도 있건마는, 성적 丹粧 全廢하고, 검정치마 헌 저고리, 화경거울 앞에 놓고, 遠山같은 푸른 눈썹, 細柳같은 가는 허리, 아름답다 나의 姿態, 妙하도다 나의 擧動, 흐르는 이 세월에, 아까울 손 늙어간다. 거울더러 하는 말이, 어화 답답 내 八字여, 갈 데 없다. 나도나도, 쓸데없다 너도너도, 우리 父親 兵曹判書, 할아버지 戶曹判曹, 우리 門閥 이러하니, 風俗 좇기 어려워라, 아연듯 春節되니, 草木群生 다 즐기네. 杜鵑花 만발하고, 잔디잎 속잎 난다. 싹은 바재 짱짱하고, 종달새 돋우 뜬다. 春風夜月 細雨時에, 獨守空房 어이할꼬? 원수의 아이들아, 그런 말 하지 마라, 앞집에는 新郞오고, 뒷집에는 新婦왔네, 내 귀에 듣는 바는, 느낄 일도 하구 많다. 綠楊芳草 저문 날에, 해는 어이 쉬이 가노, 朝露같은 우리 人生, 飄然히 늙어가니, 머리태를 옆에 끼고, 다만 한숨뿐이로다, 긴 밤에 짝이 없고 긴 날에 벗이 없다. 앉았다가 누었다가, 다시금 생각하니, 아마도 모진 목숨, 죽지 못해 원수로다.」「寡婦歌」  李朝 初에부터 男子의 再娶는 不問에 두고서 特히 婦女의 再嫁만을 嚴禁한 것은 그 意味가 어디에 있는가?  太宗 八年(1408年)에 再嫁女의 子孫은 仕版에 두지 말기로 하고,  太宗 十五年에는 徐選(서선)의 말을 從하여 庶孽子孫은 正職에 敍하지 말라 하고,  成宗 八年(1477年)에 再嫁를 禁하여 그 所生에게는 授官赴擧를 許하지 말기로 하고, 曾孫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許하되 淸顯官은 되지 못한다 하고,  成宗 十六年에는 再嫁女의 子孫은 東西班에 敍하지 말기로 하였다.  이 禁令들은 다만 「忠臣은 不事二君이요, 烈女는 不更二夫라」는 儒家의 道德觀에 根據하였다는 것이요, 그 밖에는 意味가 없었겠다. 過年의 處女가 婚嫁을 못하였다면, 그것은 和氣를 感傷한다 하여 資材를 量給하느니, 그 父母를 罰하느니 그렇게 와자자 떠들면서 靑年 홀寡婦의 再嫁를 禁하는 거기에 있어 和氣가 感傷될 것까지는 채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五百餘年을 내려오면서 婦女의 怨冤이 얼마나 쌓이었으며, 人口의 生殘이 얼마나 減縮하였던가?  婦女가 한번 不幸히 홀어미로 되면 그 將來가 悲絶慘絶 함에 對하여는 사위를 弔傷하는 어떤 詩 一首를 들어 두겠다.  「爾生我女死면, 哭死不哭生인데, 爾死我女生하니, 哭死又哭生하노라.」  「人生이 생겨날 제, 男女로 생겨나서, 글 배워 成功하고, 활 쏘아 及第하여, 猉獜閣 一片石에, 第一功臣 그려내면, 父母님께 榮華되고, 子孫에게 顯達하여, 丈夫의 快한 이름, 後世에 傳할 것을, 前生에 무슨 罪로 이내 몸 女子되어, 우리 父母 날 길러서 무슨 榮華 보려하고, 깊으나 깊은 房에, 千金같이 넣어두고, 外人去來全廢하니, 親戚도 稀疎하다. 歲月이 如流하여, 二十五歲 暫間이라, 百年佳約 定할 적에, 오며 가며 媒婆로다, 예장 온 지 보름 만에 벌써 新郞 오단 말가? 花燭이 다 지난 後에, 衾裏에 同枕하니, 繾綣之情이 比할대 전혀 없다, 衾裏에서 盟約할 제, 百年살자 굳은 언약, 生則同住하고, 死則同穴이라, 人間에 일이 많고, 造物이 샘하여, 一朝에 우리 郞君, 偶然히 得病하여, 百藥이 無效하고, 一分效驗 전혀 없다. 可憐한 이내 身勢, 胸膓痛 일어난다. 華陀(화타)가 更生하고, 扁鵲(편작)이 살아신들, 一朝에 우리 郞君, 죽을 밖에 전혀 없다. 出嫁한지 보름 만에, 靑春紅顔 寡婦로다. 萬事에 뜻이 없고, 一身에 病이 된다, 철없는 아이들아, 時節노래 하지 마라, 正月이라 보름날에, 뉠과 한양 翫月할꼬, 二月이라 寒食날에, 뉠과 함께 看山하리, 三月이라 삼짇날에, 踏靑할 이 전혀 없다, 四月이라 初八日에, 觀燈할 이 전혀 없다. 五月이라 端午日에, 씨름구경 뉠과 하리, 六月이라 流頭날에, 流頭노래 뉠과 하리, 七月이라 七夕날에, 牽牛織女 보려하고, 鴛鴦枕 돋우 베고, 烏鵲橋 꿈을 꾸니, 窓 앞의 櫻桃나무에, 지저귀는 雜鳥소리, 忽然한 相思夢은 孟浪하고 虛事로다, 八月이라 秋夕날에, 어느 郞君 祭祀하리, 九月이라 九日날에, 菊花구경 뉠과 하리, 이 달 그믐 다 지나고, 十月이 오는도다, 나뭇가지 여위기는 잎 떨어진 탓이건만, 이내 몸 여위기는, 郞君없는 탓이로다. 오동짓달 긴긴 밤에, 어이하면 잠을 들꼬, 넓으나 넓은 房에 홀로 못 자 원수로다, 남의 집 少年들은 섣달 그믐 날에, 오며 가며 벗을 불러, 新舊換歲 人事로다. 우리 郞君 어디 가고, 歲拜할 줄 왜 모른고. 벼슬로 外方 갔나, 他鄕에 興利 갔나, 去年 가고, 今年 가니, 생각하면 목이 멘다. 남 잘 자는 긴긴 밤에, 무슨 일로 못 자는고, 슬프다 可憐하다, 이내 八字 어이할꼬, 손꼽아 헤아리나, 오실 날이 漠然하다, 애고 애고 설움지고, 실낱같은 이내 목숨, 흐르나니 눈물이요, 지나니 한숨이라. 아연듯 봄이 가니, 가지마다 잎이 핀다. 江南서 오는 제비, 왔노라고 現身한다. 瀟湘江 뜬 기러기, 물을 보고 반기는 듯, 去年에 갔던 지승, 今年에 다시 왔네, 미천한 우리 郞君, 가고 올 줄 왜 모르노, 靑天에 뜬 기러기, 임의 소식 아리워라, 濸茫한 구름밖에, 비인 소식뿐이로다. 緣分도 갔고 갔고, 琴瑟도 없고 없다, 靑天明月에, 생각나니 임이로다. 이리저리 잊자하니, 아마도 원수로다, 暫間 좀 잊자하고, 花柳구경 가노라니, 淸風花柳場에, 벗 부르는 黃鳥로다, 間關하는 소리마다, 이내 肝腸 다 썩인다, 花柳구경 다 버리고, 빈 房으로 돌아오니, 夜月三更 깊은 밤에, 蟋蟀聲 더욱 섧다. 이리 가도 슬픈 소리, 저리 가도 슬픈 소리, 이 肝腸 둘 데 없어, 친구 벗을 찾아가니, 이 집도 家長 있고, 저 집도 男便 있네. 琴瑟을 잊자 하고, 削髮爲僧 하자 하니, 시집도 兩班이요, 내 집도 품관이라, 家門을 헤아리니, 중 되기도 어려워라. 아마도 모진 人生, 못 죽어 원수로다. 도리어 다 풀치고 다시 생각 마자하니, 영등을 높이 달고, 諺文古談 비껴 들고, 同현성錄 보노라니, 화씨 석씨 節行이라, 「烈女傳」을 들고 보니, 斑婕妤(반첩여)도 날과 같다. 梧桐秋夜 긴긴 밤에, 轉輾不寐 잠 못 일어, 欄干을 의지하여, 혼자말로 하는 말이, 靑春시절 늙어가니, 어느 시절 다시 볼꼬, 長長秋夜 긴긴 밤에, 洞內 할미 불러다가, 옛말로 벗을 삼아, 밤 새우자 언약하니, 그 할미 凶佞하여, 改嫁하라 하는 말이, 靑春少年 白髮되면, 다시 젊지 못하리라. 아무개네 맏딸아기, 改嫁하여 平安하지, 늙은 몸 잘애되어, 兎公先生 못 속인다. 世上事 생각하니, 夫妻밖에 또 있는가, 이내 말씀 책망 말고, 後日이면 待接하리, 無情歲月 如流하여, 玉鬢紅顔 절로 늙네, 할미년의 부동으로, 암만해도 못 참겠네.」「悔心曲」  이 노래는 어떤 沙門의 손에서 나온 것이겠다. 그 內容을 보면 一切衆生으로 하여금 佛法에서 歸依하도록 因果報應의 說을 縷陳하여서 노래하였으니 오늘에 있어 그것이 欺瞞이요, 誘惑임에 對하여는 더 苟苟히 解明할 것도 없는 일이다.  「世上天地 萬物 中에, 사람밖에 또 있는가, 여보시오 施主님네, 이내 말씀 들어보쇼, 이 世上에 나온 사람, 뉘 德으로 나왔는가? 釋迦如來 공덕으로, 아버님전 뼈를 빌며, 어머님전 살을 빌고, 七星님전 命을 빌며, 帝釋님전 福을 빌어, 이내 一身 탄생하니, 한두 살에 철을 몰라, 父母恩功 알을손가, 二三十을 당하여도, 어이없고 애닯고나, 父母 은공 못 다 갚아, 무정세월 如流하여, 원수 白髮 돌아오니, 철통하고 애닯도다, 人生 七十 古來稀라, 없던 망녕 절로 난다, 망녕이라 흉을 보고, 구석구석 웃는 모양, 애닯고도 설움 지고, 철통하고 분통하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紅顏白面 늙어간다, 人間의 公道를, 뉘가 能히 막을 손가, 春草는 年年綠이나, 王孫은 歸不歸라, 우리 人生 늙어지면, 다시 젊지 못하리라, 人間百年 다 살으랴, 病든 날과 잠든 날과, 걱정근심 다 除하면, 단 四十을 못 살 人生, 어제 오늘 성하던 몸이, 저녁 낮우 病이 들어, 첩첩하고 약한 몸에, 泰山같은 病이 드니, 부르나니 어머니요, 찾나니 泠水로다. 人蔘鹿茸 약을 쓰니, 약 效驗이 있을 손가, 판수 불러 誦經한들, 經의 德을 입을 손가, 巫女 불러 굿을 한들, 굿德인들 입을 손가, 齋米쌀 쓿고 쓿어, 名山大川에 찾아가서, 상탕에 뫼를 짓고, 중탕에 沐浴하고, 하탕에 손을 씻고, 촛대 한 쌍 벌려놓고, 香爐香盒 불 갖추고, 燒紙三張 드린 後에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느님전 비나이다. 七星님전 發願하고, 부처님전 供養한들, 어느 부처님이, 感動하여 應할 손가, 第一에 진광大王, 第二에 초관大王, 第三에 송제大王, 第四에 오관大王, 第五에 閻羅大王, 第六에 번성大王, 第七에 태산大王, 第八에 평등대왕, 第九에 도시大王, 第十에 보도전륜大王, 열시왕전 부린 使者, 열시왕의 命을 받아, 日直使者 月直使者, 한 손에는 鐵椎 들고, 또 한 손에 창검 들고, 쇠사슬을 비껴 차고, 활직같이 굽은 길로, 살대같이 날아와서, 닫은 門 박차면서, 天動같이 소리하여, 姓名三字, 불러낼 제, 어서 나오 바삐 나오, 뉘 分付라 拒逆하며, 뉘 令이라 머물 손가, 실낱같은 이내 목숨, 팔뚝 같은 쇠사슬로, 한 번 잡아 끌어내니, 魂飛魄散 나 죽겠네. 여보시오 使者님네, 路資돈 개고 가세, 萬端開喩 哀乞한들, 어느 使者 들을쏘냐, 애고 답답 설운지고, 이를 어이 하잔 말까, 불쌍하다 이내 一身, 人間 하직 망극하다. 明沙十里 海堂花야, 꽃 진다고 서러 마라, 明年 三月 봄이 되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人生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北邙山 돌아갈 제, 어찌 갈꼬 深山險路, 한정 없는 길이로다, 언제 다시 돌아오랴, 이 世上을 하직하니, 불쌍하고 可憐하다, 妻子의 손을 잡고, 萬端說話 다 못하여, 精神차려 살펴보니, 藥탕관을 벌려놓고, 至誠救護 극진한들, 죽을 목숨 살을손가, 옛 늙은이 말 들으니, 저승길이 멀다더니, 오늘 내가 당하여선, 大門밖이 저승이라. 친구 벗이 많다한들, 어느 친구 代身가며, 일가친척 많다 한들, 어느 일가 同行할까, 舊祠堂에 하직하고 新祠堂에 허배하고, 대문밖에 썩 나서니, 적삼 내어 손에 들고, 혼백 불러 招魂하니, 없던 哭聲 낭자하다. 日直使者 손을 끌고, 月直使者 등을 밀며, 風雨같이 재촉하여, 허방지방 몰아갈 제, 높은 데는 낮아지고, 낮은 데는 높아진다. 惡衣惡食 모은 세간, 먹고 자며 쓰고 가랴, 使者님아 使者님아, 내 말 暫間 들어주오. 시장한데 점심하고, 신발이나 고쳐 신고, 쉬어 가자 哀乞한들, 들은 체도 아니하고, 쇠뭉치로 등을 치며, 어서 가자 바삐 가자. 이렁저렁 여러 날에, 저승 轅門 다다르니, 牛頭나찰 馬頭나찰, 소리치며 달려들어, 인정 달라 하는구나. 인정 쓸 돈 반 푼 없다. 담배 끊고 모은 재물, 인정 한 푼 써볼쏜가, 저승으로 옮겨 올까, 換錢붙여 가져올까, 衣服 벗어 인정 쓰며, 열두 大門 들어가니, 무섭기도 끝이 없고, 두렵기도 측량 없다. 待令하고 기다리니, 獄司掌이 分付듣고, 男女罪人 등대할 제, 정신차려 살펴보니, 열시왕이 좌기하고, 崔判官이 文書잡고, 男女罪人 잡아들여, 다짐받고 봉초할 제, 鬼頭나찰 나졸들은, 前後左右 벌려 서고, 旗幟槍劍森列한데, 刑罰機具 차려 놓고, 臺上號令 기다리니, 嚴肅하기 측량 없다, 男子罪人 잡아들여, 刑罰하며 묻는 말이, 이놈들아 들어봐라. 善心하마 發願하고, 人世間에 나아가서, 무슨 善心 하였는가. 바른 대로 아뢰어라, 龍逄比干 본을 받아, 임금에게 極諫하며, 나라에 忠誠하며, 父母에게 효도하며, 늙은이를 恭敬하며, 배고픈 이, 밥을 주며, 기사功德 하였는가.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功德 하였는가, 좋은 곳에 집을 지어, 行人功德 하였는가. 깊은 물에 다리 놓아, 越川功德 하였는가. 목 마른 이 물을 주어, 汲水功德 하였는가. 病든 사람 약을 주어, 活人功德 하였는가. 높은 山에 佛堂지어, 衆生功德 하였는가, 좋은 밭에 원두 심어, 行人解渴 하였는가. 부처님께 공양 드려, 마음 닦고 善心하여, 念佛功德 하였는가. 무슨 功德하였느냐, 어진 사람 맞내어서, 不義行事 많이 하며, 貪財함이 極甚하니, 이 罪目을 어이하리, 萬事가 그러하니, 풍도옥에 가두어라, 착한 사람 불러들여, 恭敬하고 대접하며, 몹쓸 놈아 구경하라, 이 사람은 善心으로 極樂世界 들어가니, 이 아니 좋을손가. 所願대로 물을 적에, 네 願대로 하여줄나, 極樂으로 갈라느냐, 蓮花臺로 갈라느냐, 仙官弟子 될라느냐, 長生不死 할라느냐, 西王母(서왕모)의 侍童되어, 蟠桃소임 할라느냐, 男中의 絶色되어, 瑤池宴에 갈라느냐, 百萬軍中 總督되어, 장수몸이 되겠느냐, 어서 바삐 아뢰어라, 玉帝에게 奏文하여, 釋迦如來(석가여래)·阿彌他佛(아미타불), 지도하기 공부하자, 山神 불러 議論하고, 바삐 바삐 지도하라, 저런 사람 善心으로, 貴히 되어 나아가니, 大雄殿에 올린 後에, 酒饌으로 대접하며, 몹쓸 놈 잡아내어, 착한 사람 구경하라, 너희 놈들 罪重하니, 풍도옥에 가두어라, 男子罪人 處決한 後, 女子罪人 잡아들여, 嚴刑鞠問하는 말이, 너의 罪目 들어봐라, 시父母와 친父母께 至誠孝道 하였든가, 同生行列 友愛하여, 친척 和睦하였는가. 狡惡하고 奸毒한 년, 父母 말씀 대답하고, 同生間에 離間하여, 兄弟不睦 하게 하며, 世上奸毒 다 부리며, 열두 사로 마음變化, 못 듣는데 욕하는 년, 마주 앉아 웃음樂談, 군말하고 성내는 년, 남의 말을 일삼는 년, 씨앗하기 좋아한 년, 풍도옥에 가두리라. 罪目을 물은 後에 온갖 刑罰 하는구나. 罪之輕重 가리어서, 次列대로 處決할 제, 刀山地獄·火山地獄·寒氷地獄·검수地獄·拔舌地獄·毒蛇地獄·阿鼻地獄·거해地獄·석산地獄·지악地獄, 各處地獄 分付하여, 모든 罪人 처결한 後, 大宴을 排設하고, 착한 女子 불러들여, 恭敬하며 하는 말이, 所願대로 다 일러라, 仙女되어 갈라느냐, 瑤池宴에 갈라느냐, 男子되어 갈라느냐, 宰相婦人 될라느냐, 帝室皇后 되겠느냐, 諸侯王妃 되겠느냐, 富貴功名 하겠느냐, 네 願대로 하여 줄라, 하고픈 것 다 일러라, 仙女 불러 付托하여, 極樂으로 나아가니, 그 아니 좋을손가, 善心으로 마음 닦아, 不義行事 하지 마소, 悔心曲을 허수 알고, 善心功德 아니하면 午馬形狀 못 면하고, 구렁·배암 못 면하네, 조심하여 修身하라, 修身齊家 능히 하면, 治國安民 하오리니, 아무쪼록 힘을 쓰오, 積善功德 아니하면, 後生 길을 못 닦겠네, 바라노니, 우리兄弟, 慈善事業 많이 하여, 來生 길을 잘 닦아서, 極樂으로 나아가세.」「秋風感別曲」  내가 十八歲 되는 때에 이 노래와 「秋風感別回答歌」를 아울러 一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것을 다만 文章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俄領(러시아령)遠東에로 들어온 後, 어느 날 海港에 있는 東洋大學 圖書館 朝鮮部에 가서 자그마한 小說冊 모양으로 編成한 『秋風感別曲』을 다시 얻어 보게 되었다. 그것이 이미 二十餘年 前의 일이라. 作者의 姓名은 忘却하였으나, 平壤의 아전(營吏)인 것은 지금까지 記憶에 남기어 있다. 그가 妓生 金彩鳳(김채봉)에게 살뜰한 사랑을 던지고, 서로 百年 살자는 굳은 盟約까지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新任 監司의 勢力에 부대끼어 하는 수 없이 그 사랑을 빼앗기고, 忽然히 일어나는 秋風에 無限한 느낌을 받아 이 노래를 지은 것이다.  咫尺東西에서 만나볼 길이 아주 끊기어서 作者로 하여금 「秦藏에 감춘 狐裘, 盜賊할 길 바이 없고, 金籠에 잠긴 鸚鵡, 다시 戲弄 어려워라」의 絶望的 感歎을 吐露하게 하던 監司의 色靡로도 이 노래의 感動을 받아서 彩鳳(김채봉)을 도로 作者에게 許還하였다 하니 이 노래의 傑作에 對한 評價는 이것으로써 論定하여도 좋겠다.  「어젯밤 불던 바람, 金聲이 完然하다, 孤枕單衾에, 相思夢 훌쩍 깨어, 竹窓을 半開하고, 漠漠히 앉아보니, 萬里長空에, 夏雲이 흩어지고, 千年江山에 찬 기운이 새로워라, 心思도 悵然한데, 物色도 有感하다. 庭樹에 부는 바람, 離恨을 알리는 듯, 砌菊에 맺힌 이슬, 別淚를 머금은 듯, 殘柳南郊에, 春鶯이 已歸하고, 素月東嶺에, 秋猿이 슬피 운다, 임 어이고 썩은 肝腸, 하마터면 끊기리라, 三春에 즐기던 일, 예런가 꿈이런가, 細雨紗窓 寥寂한데, 洽洽히 깊은 情과, 夜月三更 私語時에, 百年 살자 굳은 언약, 丹峰이 높고 높고, 浿水가 깊고 깊어, 무너지기 意外어던, 끊어질 줄 斟酌하리. 良辰에 多魔함은, 예로부터 있건마는, 地邇人遐는, 造物의 탓이로다. 忽然히 이는 秋風, 花叢을 搖動하니, 雄蜂雌蝶이, 哀然히 흩단 말가, 秦藏에 감춘 狐裘, 盜賊할 길 바이 없고, 金籠에 잠긴 鸚鵡, 다시 戲弄 어려워라. 咫尺東西 千里되어, 바라보기 杳然하고, 銀河鵲橋 끊겼으니, 건너갈 길 아득하다. 人情이 끊겼으면 차라리 잊히거나, 아름다운 姿態擧動, 耳目에 每様 있어, 못 보아 病이 되고, 못 잊어 원수로다, 千愁萬恨 가득한데, 끝끝이 느끼어라, 하물며 이는 秋風, 別恨을 부쳐내니, 눈앞의 온갖 것이, 전혀 다 시름이라. 바람 앞에 지는 잎과, 풀 속에 우는 짐승, 無心히 듣게 되면, 關係할 바 없건마는, 悠悠別恨 懇切한데, 소리소리 愁聲이라. 아이야 술 부어라. 幸여나 寬懷할까, 盞같이 가득 부어, 醉토록 먹은 後에, 夕陽石路로 乙密臺 올라가니, 風光은 예와 달라, 萬物이 蕭然하다. 綾羅島 衰한 버들, 성긴 가지 蕭瑟하고, 錦繡峰 꽃 진 나무에, 霜葉이 飄拂하다. 人情이 變化함은, 測量하여 이를 건가, 可憐히 눈을 들어, 遠迫을 살펴보니, 龍山의 늦은 景은, 蒼鬱함이 心思같고, 馬灘의 너른 물은, 蕩漾함이 懷抱같다. 普通門 送客亭에 離別 아껴 서러 마라, 世上離別 男女中에, 날 같은 이 또 있을까, 수레 문에 뜨는 배는, 向하는바 어디메요, 萬端愁懷 실은 後에, 千里弱水 건너가서, 우리 님 계신 곳에, 수이수이 풀고지고, 城頭의 늦은 景은, 견디어 못 볼러라. 長歎短吁로, 曲欄을 의지터니, 바람결에 오는 鍾聲, 묻노니 어느 절고, 草鞋를 떨쳐 신고, 석거이 일어걸어, 永明寺 찾아가서, 중더러 묻는 말이, 人間離別 내신 부처, 어느 塔上 앉았는고, 임 그린 一片丹心, 佛前에 發願하여, 임을 다시 못볼망정, 차라리 죽어져서, 白骨은 塵土되나, 靈魂은 높이 날아, 임 앉으신 欄干 앞에, 어루와 보리로다. 다시금 생각하니, 이 또한 天數로다. 竹杖을 고쳐 짚고, 浮碧樓 올라가니, 들밖에 點친 뫼는, 구름 속에 솟아 있고, 淸江의 맑은 물은, 秋天과 한 빛이라. 이윽고 돋는 달이, 皎皎히 빛을 펴니, 그린 相思 支離한 中, 玉面인 듯 반겼더니, 어이한 뜬 구름이, 光明을 가리웠네. 어화 이 어인 일고, 造物의 탓이로다, 언제나 구름 걷어, 밝은 빛 다시 볼꼬, 宋之問(송지문)의 明河篇을, 깊이 읊어 徘徊하니, 寒露霜風에 醉한 술 다 깨었다. 落葉을 깔고 앉아, 金樽을 다시 열고, 一杯一杯 復一杯에, 䑃朧히 醉케 먹고, 짧은 歎息 긴 한숨에, 발을 밀어 일어 걸어, 定向없이 가는 길에, 愛蓮堂 드단 말가. 芙蓉을 꺾어 들고, 有情히 돌아보니, 水邊에 피는 꽃은, 임이 나를 반기는 듯, 葉間에 듣는 비는, 내 事情 아리는 듯, 兩兩白鷗는 紅蓼에 往來하고, 雙雙鴛鴦은, 綠水에 浮沈이라, 이 人生 可憐함이 微物만 못하도다. 忽然히 다 떨치고, 白馬에 채를 던져, 山이냐 구름이야, 定處없이 가자하니, 내 마음이 현황하여, 갈 길이 아득하다. 噓唏歎息하고, 草廬로 돌아오니, 간 곳마다 보는 物色, 어이 그리 心亂한고, 울 밑에 피는 黃菊, 담 안에 섰는 丹楓, 임과 함께 볼 양이면, 景槪롭다 하련마는, 陶陶心思 鬱鬱한데 도리어 愁心이라, 無情歲月 如流하여, 나날이 깊어간다. 가기는 철을 찾아, 九秋에 늦어서라. 牀아래 우는 蟋蟀, 너는 무슨 나를 미워, 지는 달 새는 밤에, 暫時도 끊지 안고, 긴 소리 짧은 소리, 경경히 슬피 울어, 다 썩고 남은 肝腸, 어이 마저 썩이는고. 隣鷄가 더디 우니, 밤도 자못 길어서라, 霜風에 놀란 鴻雁, 雲霄에 홀로 떠서, 嗈嗈한 긴 소리로, 짝을 불러 슬피 우니, 春風花月 저문 날에, 杜鵑聲도 느끼거든, 梧桐秋夜 斷腸時에, 차마 어이 들을건가, 네 아무리 微物이나, 事情은 날과 같다. 一幅花牋紙에 細細私情 그려내어, 외쳐 이르기를, 이내 事情 가져다가, 月明紗窓 寥寂한데, 임의 앞에 던져주렴, 人非木石이어니, 임도 應當 반기리라. 支離한 이 離別이, 생각사록 끝이 없다, 因緣없어 못 보는가, 有情하여 그리는가, 因緣도 없지 않고 有情도 하건마는, 一城中 함께 있어, 어이 그리 못 보는가. 吳洲明月 밝은 때와, 楚山雲雨 생길 적에, 說盡心中 無限事도, 怳然한 꿈이로다, 無盡長懷 强忍하여, 門을 열고 바라보니, 無心한 뜬 구름이, 끊겼다가 다시 잇네. 우리 님 계신 곳이, 저 구름 아래건만, 오며 가며 두 사이에, 무슨 弱水 막혔관대, 兩處가 漠漠하여, 消息조차 끊단 말가, 둘 데 없는 이내 心思, 어데다가 支接할꼬, 壁上에 걸린 梧桐, 강인하여 내려 놓고, 鳳求凰한 曲調를, 한숨 섞여 길이 타니, 餘音이 嫋嫋하여, 怨하는 듯 恨하는 듯, 相如(사마상여)의 옛 曲調는, 依然히 있다마는, 卓文君(탁문군)의 맑은 知音, 심심히 자취 없다. 缺然한 이 離別이, 느낄 일도 하구 많다. 前生此生 무슨 罪로, 우리 둘이 생겨나서, 人間百年 얼마관대, 各在東西 그리는고, 皇天厚土 이 뜻 알아, 離別없이 願이로다. 秦始皇 焚詩書할 제, 어느 틈에 숨었다가, 至今까지 流傳하여, 나의 一身 病이 된고, 首陽梅月 흠석 갈아, 黃毛筆 덥석 풀어, 月梅草竹 그리기는 옳건마는, 明月紗窓 앞에, 나는 무엇 그리는고, 相思 두 글字는, 날 爲하여 지었는가, 窓外月 嶺頭雲, 임 계신 곳 비취건만, 心中所懷 眼前愁는, 나 혼자뿐이로다, 가도록 心亂하여, 해는 어이 쉬이 가노, 잘 새는 깃을 찾아, 무리무리 돌아들고, 夜色은 滄茫하여, 먼 나무가 熹微하다, 耿耿히 흐르는 빛, 節期찾는 螢火로다. 寂寞한 빈 房안에, 울적이 홀로 앉아, 지난 일 다 풀치고, 오는 시름 생각하니, 山 밖의 泰山이요. 물 밖의 大海로다, 九疑山 구름같이, 바라도록 杳然하다, 長長秋夜 긴긴 밤에, 차마 어이 견딜쏘냐. 아무쪼록 잠을 들어, 꿈에나 보자 하니, 鴛鴦枕 서리 차고, 翡翠衾 冷落한데, 皓月殘燈에, 꿈 이루기 어려워라. 一柄殘燭 벗을 삼아, 轉輾不寐 앉았으니, 劍閣嶺 새벽달에, 五更인 줄 깨닫겠다. 앉았다가 누었다가, 다시금 일어 앉아, 이리 헤고 저리 헤니, 아마도 원수로다. 苦盡甘來는 그윽히 있건마는, 明天이 도우시고, 鬼神이 ●意하여, 藍橋의 굳센 풀로, 月姥繩 다시 이어, 瀟湘江 어느 날에, 故人을 다시 맞아, 봄바람 가을 달에, 거울같이 마주 앉아, 이런 일 옛말 삼아, 情懷中에 넣어 두고, 有子生女하여, 限없이 즐기다가, 人心이 狡詐하여, 어느 누가 是非커던, 秋風 五湖 저문 날에, 錦帆을 높이 달고, 가다가 아무데나, 山좋고 물 좋은데, 子坐午向 제 法으로, 數間草屋 지은 後에, 石田을 깊이 갈아, 草食을 먹을망정, 百年이 다 盡토록, 떠나 살지 마자하더니, 相思로 困한 몸이, 牀위에 暫間 누어, 죽은 듯이 잠을 드니, 蝴蝶이 나를 몰아, 그리던 우리 님을 꿈 가운데 暫間 만나, 悲喜가 交集하여, 別來事情 다 못하여, 誰家玉笛이, 秋風에 섞여 불어, 悽凉한 한 소리로, 잠든 나를 깨우누나. 두어라 離散이 有數하니, 後日 다시 볼까 하노라.」五. 宮廷用의 樂歌  李朝 時代에 있어 宮廷用의 樂歌는 高麗의 그것을 承襲하였다 함은 括論에서 이미 論及하였다. 그러나 그 初期에는 創作品이 많이 나오게 되었으니, 말할 것 같으면 太宗朝에는 河崙(하륜)의 「覲天庭之樂」·「受明命之樂」이 있었으며, 世宗朝에는 會禮宴에 쓰는 「降安之樂」·「休安之樂」·「受寶籙之樂」·「文明之曲」, 宴饗樂에 쓰는 卞季良(변계량)의 「華山別曲」, 「鶴蓮花臺舞」에 쓰는 尹淮(윤회)의 「鳳凰吟」, 廟祭에 쓰는 納氏歌, 朝祭와 公私燕享에 쓰는 『龍飛御天歌』가 있었다.  「華山別曲」의 위에 있는 樂歌들은 다 漢文 四言體로 簡短하게 된 것인데, 여기에서 提示하려고 아니하며, 다만 鳳凰吟으로부터 아래의 것을 次第로 들려고 한다.「鳳凰吟」  尹淮(윤회)는 世宗朝의 文臣인데, 「處容歌」의 擬作으로서 이 노래를 이루었으니 그는 일찍부터 歌詞를 지을만한 素養이 있었던 모양이다. 「處容歌」는 高麗樂府에서부터 이미 採用하던 것인데, 李朝 世宗의 때에 와서 그것을 巫女들이 疫神을 물리치는 때에 쓰던 것이라 하여 畢竟에 斥逐하고 그 代에 「鳳凰吟」을 지어 「鶴蓮花臺舞」의 呈才歌詞로 쓰게 하였다.  「山河千里固, 佳氣鬱葱葱, 金殿九重明日月, 群臣千載會雲龍, 熙熙世俗春臺上, 濟濟群臣壽域中, 濟濟群臣壽域中, 高厚無私未遑臻, 祝堯皆是太平人, 祝堯皆是太平人, 熾而昌, 禮樂光華邁漢唐.金枝秀出千年聖, 綿瓞增隆萬歲基, 邦家累慶超前古, 天地同和卽此時, 天地同和卽此時, 豫遊淸曉玉輿來, 人頌南山薦壽杯, 人頌南山薦壽杯, 配于京, 十二瓊樓帶主城.道與乾坤合, 恩隨雨露新, 千箱登黍稌, 庶彙荷陶勻, 帝錫元符揚瑞命, 滄溟重潤月重輪, 滄溟重潤月重輪, 風流楊柳舞輕盈, 自是豊年有笑聲, 自是豊年有笑聲, 克配天, 聖子神孫億萬年.山河千里壯, 宮殿五雲高, 輝輝瑞日鳴螭陛, 冉冉香煙繞袞袍, 積德百年興禮樂, 垂衣一代煥文章, 雍熙至治邁漢唐, 慶雲淚處仰重瞳, 一曲南薰解慍風, 鳳凰來舞九成中, 大有年, 禾稼與雲連, 紅腐之粟貫杇錢.陰陽順軌雨露均, 萬家煙火太平民, 撫五辰, 聖壽無疆千萬春.」「納氏歌」  이 노래는 納哈出을 戰勝한 李太祖(이성계)의 偉功을 讚美한 것인데, 作者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世宗朝의 音樂大家인 蘭溪 朴堧(난계 박연)이 雅樂을 整頓한 그 後에 나온 作品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노래는 廟祭하는 때, 干戚舞·弓矢舞·槍劍舞에 쓰기로 되었고, 그런 祭典에는 반드시 雅樂을 쓰는 까닭이다.  「納氏恃雄强, 入寇東北方, 縱傲誇以力, 銳鋒不可當, 我后鼓勇氣, 挺身衝心胸, 一箭殺偏裨, 再射及魁戎, 裏槍不可救, 追奔星火馳, 風聲固可畏, 鶴唳亦堪疑, 卓矣莫敢當, 東方亦無虞, 功成在此擧, 垂之千萬秋.」『龍飛御天歌』  世宗 二十七年에 權踶(권제)·鄭麟趾(정인지)·安止(안지) 等이 創業의 盛德神功을 讚頌하며, 後世子孫의 繼述保守를 規戒하여 正音(훈민정음)本과 漢字本으로 一百二十五章의 노래를 撰進하니, 이것이 이른바 『龍飛御天歌』이었다. 그리고 崔恒(최항)·申叔舟(신숙주)·李賢老(이현로)·成三問(성삼문)·李塏(이개)·辛永孫(신영손) 等이 거기에 註解를 加하여 一般觀覽에 便利를 주게 하였다.  이것을 朝祭의 樂歌로도 쓰게 하며 또는 公私燕享의 樂歌로도 쓰게 하였다. 그런데 公私燕享에는 「醉豊享」·「致和平」·「鳳來儀」 等의 樂歌로 나누었다.1. 「醉豊享」에는 海東章·根深章·源遠章·昔周章·今我章·狄人章·野人章·千歲章·子子章·嗚呼章·漆沮章·商德章·太子章·奉天章·一夫章·虞芮章·五年章·獻言章·聖孫章·楊子章·逃亡章·赤爵章.2. 「致和平」에는 『龍飛御天歌』 全篇.3. 「鳳來儀」에는 海東章·根深章·昔周章·今我章·狄人章·野人章·千歲章·子子章·嗚呼章.  그런데 여기에는 複雜을 避하여 그 原本의 表記法대로 몇 章만을 들려고 한다. 그것은 『正音(훈민정음)』를 創制한 그 當時의 記法이 이렇다는 意味에서 나온 것이었다.海東 六龍이 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하시니海東 六龍飛 莫非天所扶 古聖同符右 第一章불휘 기픈 남 매 아니뮐 곶 됴코 여름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출 내히 이러 바랭 가니根深之木 風亦不抗 有灼其華 有蕡其實源深之水 早亦不渴 流斯爲川 于海必達右 第二章뒤헤를 모진도 알 어드 길헤 업던 번개를 하이 발기시니뒤헤 모진 쥼 알 기픈 모새 열 어르믈 하이 구티시니後有猾賊 前有暗程 有爆之電 天爲之明後有猛獸 前有深淵 有溥之氷 天爲之堅右 第十九章애 자거 밀므리 사리로 나거아 니이다셤안희 자싫제 한비 사리로 뷔어아 니이다宿于沙江 不潮三日 迨其出矣 江沙乃沒宿于島嶼 大雨三日 迨其空矣 島嶼乃沒右 第六十七章 아니 말이샤 밀므를 마시니 하히 부러 뵈시니한바 아니 그치샤 나므를 외오시니 하히 부러 우일 뵈시니不禁江沙 迺防潮濤 彼蒼者天 示人孔昭不止霖雨 迺迴潢洋 彼蒼者天 示我孔昭右 第六十八章마지막으로 여기에 添付할 것은 世祖 四年에 지은 學祖(학조)大師의 『月印千江之曲』이란 것이다. 이것이 만일 觀音讚처럼 宮廷用으로 되었더라면 排他에 成習한 儒臣輩의 諫爭으로서 必然 斥逐을 當하여 或 埋沒되기도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月印釋譜』가 後世에 傳하였으니 그 內容과 또 그 表記法의 어떠함을 보이기 爲하여 그 一端만을 들어 둔다.『月印千江之曲』「부테 百億억世셰界계옝 化황身신야 敎굫化하샤미 리 즈믄 매 비최요미 니라」  이것을 現行의 記法대로 적는다면「부처 百億世界에 化身하여 敎化하심이 달이 즈믄 가름에 빛외임과 같으니라」  이 노래와 『龍飛御天歌』에서 正音(훈민정음)字의 左傍에 點을 加한 것은 四聲의 標符인데, 一點은 去聲, 二點은 上聲, 點이 없으면 平聲, 入聲은 點이 같으나 促急한 것뿐이다. 그렇지마는 그 後來에는 四聲을 區別할 必要가 없이 되었다.六. 時調  다시 말하거니와 李朝 時代는 歌曲의 全盛期로 보는데, 特히 時調에 있어는 더욱 그러하다. 君主로부터 名公巨卿, 學者文人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吟詠하지 아니한 이가 거의 없으리만큼 그렇게 上層階級의 사이에 盛行風으로 되었었다. 그뿐인가. 女子界에서도 作家가 많이 있어서 善山 朴香娘(박향낭)의 「山有歌」, 咸安 沙斤驛 月明(월명)의 「望東京歌」가 나오는 그 一方에 笑春風(소춘풍)·黃眞娘(황진이)과 같은 時調作家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肅宗 때에는 金聖器(김성기)·金裕器(김유기)·朱義橫(주의횡) 等 時調名唱이 輩出하였으니 그것은 當時의 風潮라, 偶然한 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時調는 確實히 上層階級의 專有物이다. 그렇다 하여 文藝上 價値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價値를 寄與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括論에서 그 調를 따라서 大體를 提示하였음에, 여기에는 다만 몇 首의 노래를 들어두겠다.1. 孟思誠(맹사성)의 노래「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興이 절로 난다. 濁醪溪邊에 錦鱗魚 안주로다. 이 몸이 閑暇하옴도, 亦君恩이삿다.」2. 卞季良(변계량)의 노래「治天下 五十年에 不知왜라 天下事를, 億兆蒼生이, 戴己를 願하느냐, 康衢에 聞童謠하니, 太平인가 하노라.」  孟思誠(맹사성)과 卞季良(변계량)은 李太祖(이성계)와 함께 王氏를 臣事하다가 突然히 變節하여 李氏(이성계)를 推戴한 것이었다. 그리고 富貴를 누리는 것이 너무도 滿足하여 君恩과 太平을 노래하였겠다.  雪中梅(설중매)는 그 當時에 賤視하는 妓女로되 그들의 變節을 嘲笑하였다. 말한다면  「李太祖(이성계)가 開國한 처음에 政府諸臣에게 宴을 賜할 때, 雪中梅(설중매)가 行酒하게 되었다. 그 席上에서 政丞 하나가 醉中에 戲言하되 들은즉 네가 東家에서 朝食하고 西家에서 暮宿한다 하니, 또한 老夫와 薦枕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雪中梅(설중매)가 그 말에 應하여 東家食, 西家宿하는 賤軀로서 事王氏, 事李氏하는 政丞을 모시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아니리오 하였다. 그러니까 政丞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머리를 드리우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五百年奇譚』) 孟·卞(맹사성·변계량) 兩人도 勿論, 이 宴席에 參與하였을 터인데, 만일 沒廉恥漢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어찌 되었을까?3. 朴樹年(박팽년)의 노래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夜光明月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向한 一片丹心이야, 變할 줄이 있으랴?」4. 李塏(이개)의 노래  「窓 안에 켜는 燭불, 누구와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저 燭불 나와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더라.」  朴彭年(박팽년)·李塏(이개)는 成三問(성삼문)·河緯地(하위지)·柳誠源(유성원)·兪應孚(유응부)로 더불어 端宗의 位를 謀復하다가 誅刑를 當하였는데, 後世에 이른바 死六臣이 곧 그들이었다. 그들은 일찍이 文宗의 申托을 받고서 幼主 端宗을 輔翼하였다. 그런데 端宗이 그 位를 首陽大君(世祖)에게 빼앗기고 壽康宮에 退處하게 되니 그 때에 悲憤慷慨한 이 노래들이 나온듯하다.5. 李元翼(이원익)의 노래  「綠楊이 千萬絲인들, 가는 春風 매어 두며, 貪花蜂蝶인들, 지는 꽃 어이 하리, 아무리 사랑이 重한들, 가는 님 어이하리.」  光海가 奸臣 李爾瞻(이이첨) 等을 信任하여 國政이 날로 昏亂하니 그것이 仁祖로 하여금 反正을 遂行하게 하였다. 그러나 新舊兩君에게 對한 人心의 向背는 李元翼(이원익) 一人에게 달렸던 것이다. 그래 元翼(이원익)이 光海를 拜辭하고, 仁祖에게로 돌아오셨으니, 여기로서 이 노래가 생기어진 듯하다.6. 笑春風(소춘풍)의 노래  「梨花雨 흐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括論에 이미 記入되었음)  笑香風(소춘풍)은 永興名妓로서 成宗이 群臣에게 宴을 賜할 대에 行酒하게 되었다. 領相과 兵判에게 술을 勸하면서 노래를 지어 부르다가 吏判에게 이르러서도 노래를 또한 지어 부르니  「齊는 大國이요, 楚亦大國이라. 小小한 藤國이, 齊·楚에 間하였으니, 何事何否리오, 事齊事楚함이 진실로 好事로다」가 곧 그것이다.  이 노래는 그들이 各히 戲言으로서 薦枕을 要하는 그 끝에 곧 應答한 것으로서 笑春風(소춘풍)의 名價가 全國을 傾動하였다.(『五百年奇譚』)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가? 李朝 五百年間의 屈辱的 外交,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事大主義가 切實히 그리어진 것을 보게 된다.7. 黃眞娘(황진이)의 노래  「靑山裏 碧溪水야, 쉬이 간다 자랑마라,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어감이」  黃眞娘(황진이)은 그 性이 倜儻하여 男子에 뒤지지 아니하고, 琴·歌·詩에 다 能하여 항상 山水間에 놀기를 좋아하였다. 그 當時에 花潭先生[徐敬德(화담 서경덕)]과 知足禪師(지족선사)는 道通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娘(황진이)이 春意로써 그들을 試하여 보았다. 그리하여 知足(지족)은 마침내 十年工夫 南無阿彌陀佛이라는 웃음거리를 世上에 남기게 되었지만, 花潭(화담 서경덕)의 마음은 能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娘(황진이)이 그의 道高함을 크게 欽服하면서 先生과 나와 朴淵瀑布는 松都의 三絶이라는 豪語를 吐하였다.(『五百年奇譚』)  따라서 그의 數多한 作品 中에서 「初月」이란 詩 一首를 들어 두겠다.  「누가 玉을 찍어내어, 織女 얼게 만드신고? 牽牛 가고 안 오시니, 虛空에다 던졌고나!」  朴香娘(박향낭)의 山有花歌(메나리)는 다만 漢譯으로 남기어서  「天何高遠, 地何曠漠, 天地雖大, 一身難托, 寧投此淵, 葬於魚腹」이란 그것이 있을 뿐이오. 또는 「節如霜雪義如山, 不去亦難去亦難, 回首洛東江水碧, 此身投處此心閑」이란 後人의 詩가 傳하였으며, 月明(월명)의 「望東京歌」는 傳하지 못하고 그와 그의 愛夫이었던 東京商人의 先後情死를 哀憐히 여기면서 지었다는 「月明塜上月惟明, 環佩無聲蜀魄鳴, 此是人間腸斷處, 街兒莫唱望東京」이란 後人의 詩가 只今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七. 「愁心歌」  「愁心歌」가 上層階級의 專有物인 時調를 敵對로 하여 생겼다는 것은 括論에서 詳細히 말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그 調를 따라서 多少의 例를 더 들어 두겠다.ㄱ. 平調(一名은 「긴 愁心歌」)1. 人生 한번 죽어지면 만수청산의 운무로구나 아니 놀고 아니 쓰지는 못하리로구나.2. 江草日日에 喚愁生하니, 江풀만 푸르러도 고향생각이 간절해 나 못 살리로다.3. 山中은 險峻한데 귀곡성은 왜 이다지 슬피 울어 사람의 심사를 공연히 수심케 하느냐?ㄴ. 羽調(一名은 「寧邊歌」 또는 「질림」)1. 梧桐의 복판이로구나야 아하 거문고로다, 자동 다동 쓸기동 타면서 놀아만 보세.寧邊의 藥山의 東臺야 하아 하아 에헤이야 아 부디 平安히 너 잘 있거라, 나도 明年 陽春은 佳節로 또 다시 보자.2. 아사라 말렴은 아하 아하 사람의 人情에 괄시를 네 그리 말아라.南山을 바라다 보니 야하 야하 에헤이야하 진달花草가 다 滿發한데 웃동 짧고 아래 아랫동 팡파짐한 아이들아 네가 날 살려라.3. 노자-노자 노자 아하 아하 젊어서 청춘에 마음대로만 놉시다,달아- 달아 달아 아하 아하 에헤이야아 半空中天에 뚜렷한 달아 님과 나와 만나던 窓前으로만 비추어 주게.4. 세월아 네월아 아하 아하 오고 가지를 말아라, 우리 청춘소년들 다 늙는구나.子規야 우지를 말아라 아하 아하 에헤이야하 울려거던 너 혼자 울겠지 旅館寒燈 잠드신 나그네를 왜 깨우느냐.ㄷ. 編(一名은 「자진 愁心歌」 또는 엮음)1. 乾坤이 有意하여 男子를 내이시고 무정세월 如流하여 우리 靑春을 다 늙히는구나. 大丈夫 늙을진대 옛날로 두고 말하면 소자첨·도연명·孔(공자)·孟子(맹자) 같은 분네들은 죽어 死後에 遺跡이나 있건마는 朝露같은 우리 人生은 아차 한번 失手하면 만수장림에 구름안개로구나.2. 바람 불어 휘어진 나무가 봄이 온다고 늘어를 나며 임으로 말미암아 병든 내 몸에 藥을 쓴들 藥效驗이 있단 말가? 牛黃·熊膽으로 집을 짓고 蘇合丸·淸心丸으로 안토칠하고 人蔘으로 구들 놓고 鹿茸으로 불을 때며, 三神山 不老草로 미음을 다려 먹을지라도 이내 病 낫기는 만무로구나. 널로 하여 병난 몸이 扁鵲(편작)같은 名醫라도 막無可奈何로다, 생각을 하면 네 花容 그리워 나 못 살겠구나.3. 나는 진정 말이지 三角山 居하던 범나비로 長安萬戶를 내려다 보니 五色이 玲瓏하기로 花開當節인가 春興을 못 이겨 내려를 왔다가 돌아가던 回路에 이 몸이 앗차 失手되어 仁王山 蛛絲에나 걸렸구나 에라 놓아라 못 놓겠구나 열 발가락 찌어저도 나 못 놓겠네.4. 七月이라 初七日날에 牽牛織女가 그리워 살다가 烏鵲橋로 越江하여 一年에 一次를 相逢이 되고, 黑海바다의 밀물이라 하루 두 때는 潮水로구나, 나무라도 향자목은 陰陽을 分하여 마주 나 섰고 돌이라도 망두석은 左右를 따라서 마주를 섰는데 우리의 情든 님은 한 城中에 있건마는 어이 그리 못보단 말가? 千里弱水에 萬里長城이 두른 바 아니오. 三千 구비峰에 蜀道之難이 가리웠더냐 晝夜로 임 消息 끊어져서 나 못살겠네.5. 데려 가거라 끌어 가거라 나를 두고선 못 가느니라. 女必은 從夫랬으니 그저 두고는 못 가느니라, 나를 버리고 가려 하거던 靑龍刀 잘 드는 칼로 腰斬이라도 하고서 가쇼, 못 가느니라 못 가느니라, 나를 버리고 못 가느니라 나를 버리고 가려 하거던 洪爐火 모진 불에 사룰터이면 사루고 가쇼, 못 가느니라 못 가느니라, 그저 두고는 못 가느니라 그저 두고는 못 가느니라 그저 두고서 가려 하거던 廬山瀑布 흐르는 물에 던지기라도 하고 가쇼,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五里를 못 가서 발病이 나고 十里를 못 가서 앉은뱅이 되리라, 참으로 임 생각 그리워서 나 못 살겠네.八. 音樂과 舞踊1. 音樂  李朝 五百年間에 藝術新興의 時代는 곧 世宗의 時代이었다. 『訓民正音』도 이 時代에, 銅活字도 이 時代에, 測雨器 等 天文儀器도 이 時代에, 圖書의 撰輯도 이 時代에 그 大成의 功을 告하였다. 이러한 大功을 이룸에 있어 世宗만 있고 作者가 없어도 그 時代의 形便으로 可能하지 못하였을 것이요, 作者만 있고 世宗이 없어도 그 時代의 形便으로 또한 可能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世宗과 作者가 魚水際遇의 好機運을 얻게 된 것이 實로 千古의 稀事라 할 것이다. 그 作者의 中에 朴堧(박연)은 特히 音樂大家로서 空前의 英才를 發揮하였다. 만일 世宗으로 하여금 紅頭賊에게 埋沒되었던 池中 數枚의 磬을 얻지 못하였더면 그 英才를 어떻게 發揮하였을까? 夷則一枚에 限墨이 오히려 있어서 音律에 協지 못하는 것을 能히 發見하는 朴堧(박연)의 聰이 아니더면 그 雅樂을 어떻게 制定하였을까? 그 때에 世宗과 朴堧(박연)이 있다 하더라도 海州의 秬黍와 南陽의 磬石이 産生되지 않았더면 그 業을 어떻게 成就하였을까? 또는 秬黍와 磬石이 있다 하더라도 앉으나 누우나 心胸의 사이에 그 手를 交하여서 戞擊의 形을 試하며, 口吻의 가운데에 그 喉를 轉하여서 律呂의 聲을 驗하는 朴堧(박연)의 十餘年 積功이 아니더면 그 樂制를 어떻게 完成하였을까? 이와 저가 一時에 竝出한 것이 稀事 中의 稀事라 하겠다.1) 樂制  禮曹의 아래에 掌樂院이 있어 提調가 그것을 主하고 掌樂院의 아래에 典樂署가 있어 典樂이 그것을 主하고 典樂署의 아래에 左坊과 右坊이 있어 樂師가 그것을 主한다.  樂人에는 樂生과 樂工의 區別이 있는데, 樂生을 試取함에는 雅樂中의 三成 및 登歌·文武舞를 主로 하고 樂工을 試取함에는 唐樂과 鄕樂을 主로 한다.  樂人의 數는 大典通編에 據하면 左坊에 樂生 一百九十五人, 右坊에 樂師 五人, 樂工 四百四十一人이요, 特히 進宴時에는 各道로서 選上女妓 五十二人(이것은 隨時加減이 있음), 樂師·樂生·樂工 또 그 長番仕滿者까지를 竝하면 一千二百人이었다.  左坊의 本業은 編鍾·編磬·琴·瑟·簫·笙·塤·篪·籥·篴 等의 各 十四宮인데, 그 十四宮은 곧 雅樂의 黃鍾·大呂·大簇·夾鍾·姑洗·仲呂·蕤寰·林鍾·夷則·南呂·應鍾宮과 送神의 黃鍾·夾鍾·林鍾宮이오. 그 밖에 또 歌曲 四十一章을 兼業하나니, 그 四十一章은 곧 社稷 四, 風雲雷雨 五, 文廟 十, 先農 四, 先春 三, 雩祀 八, 纛所 二이오.  右坊의 本業은 唐樂의 唐觱篥·方響·唐笛·洞簫·唐琵琶·牙箏 等의 各 四十六聲이니, 그 四十六聲은 곧 宗廟祭樂 二十二, 靖東方典·維皇曲·洛陽春·步虛子 各一, 與民樂慢令 各十이오. 그 밖에 또 鄕琵琶 十一聲(登歌의 奠幣로부터 繹成에까지), 太平簫 三聲(昭武·奮雄·永觀), 塤篪 各三聲(熙文·昭武·順應), 笙 四聲(熙文·昭武·順應·與民樂令初章)을 兼業하고,  鄕樂의 本業은 大笒·玄琴·奚琴·伽倻笒·杖鼓 各 四十六聲(唐樂과 同함)이요, 그 밖에 또 編鍾·編磬, 二十二聲(迎神으로부터 送神까지), 歌曲 二十七章(迎神으로부터 送神까지), 舞二變(文舞·武舞)를 兼業한다.2. 樂器一. 俗樂部  朴堧(박연)이 樂制를 定할 때에 鄕樂과 唐樂을 竝하여 俗樂部라 하였다.  鄕樂器에는 拍板·大鼓·玄琴·鄕琵琶·伽倻琴·大笒·中笒·小笒·鄕觱篥이 있다.  唐樂器에는 方響·拍·敎坊鼓·月琴·杖鼓·唐琵琶·奚琴·大箏·牙箏·唐笛·唐觱篥·洞簫·太平簫가 있다.ㄱ. 金의 屬  方響. 이것은 鋼鐵로 만든 것인데 그 數는 十六이요, 그 十六聲은 十二律과 四淸聲에 分配하였다.  響鈸. 이것은 鍮鐵로 만든 것인데 每個人이 左右手에 各 하나씩을 쥐고서 마주 친다.  銅鈸. 이것은 鍮鐵로 만든 것인데 僧家의 鳴鈸보다 작은 것이다.ㄴ. 絲의 屬  玄琴. 이것은 方絃으로 된 것인데, 그 調에는 樂時調平調·羽調平調·邈調·樂時調界面調·嗺子調·啄木調 等이 있다.  伽倻琴. 이것은 十二絃으로 된 것이다.  月琴. 이것은 五鉉으로 된 것이다.  奚琴. 이것은 奚契丹의 樂器이다.  唐琵琶. 이것은 本히 胡樂인데, 柱는 十二요, 絃은 四로 되었고, 그 調에는 平調·界面調·上調·下調가 있다.  鄕琵琶. 이것은 新羅 때에 비롯한 것인데, 그 制는 唐琵琶와 비슷하다. 그 調에는 樂時調平調·羽調·八調·邈調·河臨調가 있다.大箏·牙箏·戞箏.  大箏은 그 制가 瑟과 같은데, 다만 그 體가 작고 그 絃은 十五이며,  雅箏은 그 制는 大箏과 같으나 다만 그 體가 더 작고 그 絃은 七이며,  戞箏은 黜檀木에 松脂를 塗하여서 軋하는 것이다.ㄷ. 竹의 屬  唐笛. 이것은 年久한 黃竹으로 만드는데, 그 孔은 八이다.  大笒·中笒·小笒. 이것은 新羅의 樂器에서 이미 말하였다.  洞簫. 洞은 通이니 底面이 없고 上下가 서로 通하였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年久한 黃竹으로 만드는데 그 孔의 數는 九이다.  唐觱篥. 이것의 一名은 笳管이라 하는데, 本히 羌胡龜玆의 樂이다. 그 前에는 九孔이었으나 至今은 八孔을 두었다.  太平簫. 이것은 女眞의 樂器인데, 그 孔의 數는 八(上下端까지 合하여)이었다. 一說에 依하면 崔潤德(최윤덕)이 野人을 征服하던 그 때에 이 樂器가 流入되었다고 하나 이것에 對한 鄭夢周(정몽주)의 詩가 있으니 그 由來가 이미 오램을 可히 알겠다. 처음에는 이것을 純全히 軍樂에만 使用하였는데, 李朝에 이르러는 定大業의 樂에 쓰게 되고 또는 居士寺黨의 行樂에도 쓰이었다. 鄭夢周(정몽주)의 詩:  「鳳管粧金口, 淸商自此生, 一聲高撼月, 六孔巧鑽星, 止作嚴軍令, 低昂動客情, 想看征北日, 吹徹虜王庭.」ㄹ. 革의屬  節鼓. 이것은 한갓 樂을 興止함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樂을 奏하는 때에도 間間히 친다.  大鼓·小鼓. 이것은 木桶에다가 그 面에 牛皮를 씌운 것이다.  杖鼓. 이것은 細腰鼓인데, 右는 杖으로써 치고 左는 手로써 拍하므로 그 이름을 杖鼓라 한다.二. 雅樂部ㄱ. 金의 屬  編鍾·特鍾. 이것은 銅鐵에 鑞鐵을 和하여서 鑄成(錞·鐲·鐃·鐸의 類도 같음)하였다. 編鍾은 軒架 三面에 그 位가 모두 아홉인데, 그 九架에 各히 十二律의 鍾을 懸하니 그 合數가 一百八顆라, 그것은 本律의 中聲을 갖춘 것이오. 만일 四宮淸聲을 兼한다면 每架에 四顆를 添하느니 그런즉 그 數가 一百四十四顆에 이르며, 祭享에는 倍數를 하여 二百八十八顆가 된다. 그리고 特鍾은 登歌의 樂이 始作하는 때에 쓴다.  錞. 이것은 文舞가 退하고 武舞가 進入하는 때에 쓴다.  錿. 이것은 小鉦인데 柄中의 上下가 通하였다.  鐸. 이것은 大鈴인데 그 舌은 金으로 만들었다.  鐲. 이것은 자그마한 鍾과 같은데 그 소리가 濁하다.ㄴ. 石의 屬  磬. 이것에는 特磬과 編磬이 있는데, 다 南陽의 石으로 만든 것이다. 特磬은 그 소리를 黃鍾律에 들어맞게 한 것이요, 編磬은 黃鍾으로부터 淸夾鍾에 이르기까지 그 數가 十六이 된다.ㄷ. 絲의 屬  琴. 舜(순)의 五絃에다가 文王과 武王이 各히 一絃을 더하여 七絃으로 된 그것이다.  瑟. 이것은 二十五絲으로 된 것이다.ㄹ. 竹의 屬  簫. 이것은 海竹으로서 만들었는데, 그 管은 十六이다.  籥. 이것은 篴과 같이 三孔이 있으나 그보다 짧다.   管. 이것은 烏竹으로 만들고 그 孔은 六인데 十二月의 音을 衆하여 兩管을 倂하여서 부는 것이다.  篴. 이것은 黃竹으로 만드는데 前面에 五孔, 後面에 一孔, 尾兩傍에 各 一孔, 모두 八孔이다.篪. 이것도 黃竹으로 만들고 그 孔은 五個인데 第一孔은 後面에 있다.ㅁ. 匏의 屬  笙·竽·和. 十九簧이 있는 것은 大笙이라 하고, 十三簧이 있는 것은 小笙이라 한다. 大笙은 衆管을 匏入한 것이 蜂窠와 같으므로 그 一名을 巢笙이라 하고, 大笙이 唱하면 小笙이 和하므로 小笙의 一名을 和라 하며, 竽는 三十六簧이니 中國工人도 能히 불지 못하고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그러하여 그것을 巢笙으로써 代한다.ㅂ. 土의 屬  塤. 이것은 瓦土로써 만드는데, 그 孔은 六이다.  相. 이것은 鼙와 같은데, 樂을 輔하고 舞을 節하는 것이다.  缶. 軒架에 十缶를 쓰는데 그것은 다 瓦土로 만들고 그 厚薄으로써 律을 定한다.  土鼓. 이것은 瓦로서 그 匡을 만들고 革으로 그 面을 만든다.ㅅ. 革의 屬  晉鼓. 晉은 進이니 樂을 進케 한다는 말이요, 또 그것을 懸設하면 懸鼓라 한다.  雷鼓·靈鼓·路鼓. 이것은 다 軒架에 쓰는 것이다. 天神을 祀함에는 雷鼓三架를 쓰는데, 그것은 馬革으로 만든 六面鼓요, 地祗를 際함에는 靈鼓三架를 쓰는데, 그것은 牛皮로 만든 八面鼓요, 人鬼를 享함에는 路鼓三架를 쓴다.  雷鼗·靈鼗·路鼗. 鼗는 小鼓라, 거기에 木을 貫하여 柄을 만들고 그 傍에 兩耳가 있다. 雷鼗는 三, 靈鼗은 四, 路鼗는 二, 이것은 다 軒架의 樂이 始作할 때에 搖하는 것이다.  建鼓. 이것은 殿庭軒架의 朝會宴饗에 쓰는데, 그 槌는 木으로써 만들고 높이 六尺六寸의 柱로서 鼓를 貫하여 植하므로 그 이름을 建鼓라 하였다.朔鼓. 이것은 倡始의 鼓라, 그러므로 朔이라 하였으니 殿庭軒架에 쓰는 것이다.  應鼓. 이것은 和終의 鼓라, 그러므로 應이라 하였으니 殿庭軒架에 쓰는 것이다.ㅇ. 木의 屬  拊. 堂下의 樂은 鼓로써 始하고 堂上의 樂은 拊로써 始한다.  柷·止. 柷이 堂上에 있어서, 控하면 止라 하느니 三擊九聲이면 樂이 始作한다.  敔·籈. 敔는 그 器狀이 伏虎과 같은데 樂을 止함에는 籈三木樂으로써 그 등을 세 번 긁는다.   應. 그 形이 桶과 같은데 그 底에 連한 椎가 左右로 마주 치면서 柷을 應한다.  雅. 그 狀이 漆桶과 같은데 舞를 節하는 것이다.  相. 이것은 武舞가 進할 때에 쓰는 것이다.  牘. 이것은 竹으로써 만드는 것인데 그 소리로 舞人步를 節한다.  簴·簨·崇牙·樹羽. 鍾의 植한 것을 簴라 하고, 橫한 것을 簨이라 하고, 簨의 위에 崇牙가 있고, 簴의 위에 業을 設하고 業의 위에 羽를 樹한다.  우리에게는 樂譜의 記法이 現下의 洋譜와 같이 그렇게 完美치 못하여 年代의 久遠함을 따라서 訛傳 또는 遺失의 歎을 免치 못하였다. 朴堧(박연)의 上疏에 據하면 「우리나라의 樂은 그 器物·制度·歌詞의 曲折이 매우 繁密한데, 예로부터 비록 譜法書本이 있었으나, 訛傳도 되고 遺失도 되어 至今까지 流傳된 것이 겨우 四十餘聲에 지나지 못한지라, 오직 玄琴의 屬으로 말하여도 그 彈法을 알되 그 歌詞를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嗺子·啄木·憂息·多手·喜淸率·居士戀의 類가 곧 그것이오. 또는 譜法은 있으나 急慢의 節을 解得치 못하며 兼하여 그 歌詞를 잃은 것이 있으니 露中仙·賞春光·望春天·樂春天·喜春苑·賞春曲·實相曲·杇木·狗墓等 篇이 곧 그것이오.  또 伽倻琴의 屬으로 말하여도 嫩竹詞·河臨調는 그 이름만 있을 뿐이요, 그 聲은 傳치 못하였으니 그 따위의 遺亡諸篇을 다 記錄할 수 없는지라. 그러나 생각건대 譜法이 아직까지 있고 그 歌詞의 舊本을 傳寫私藏한 사람이 있을 터인즉 中外에 令하여 옛적의 歌曲을 求하되 詳細한 舊本을 進呈하는 者에게는 官爵으로써 賞하면 舊樂의 缺을 可히 塡補할 것이라, 하고 또 말하되 唐樂은 모두 百有餘篇인데 我朝工人은 다만 三十餘聲을 알 뿐이요, 그 나머지는 理解치 못하는지라. 그러나 譜法이 分明하니 尋悟할 道가 있는데 다만 緩急의 節을 알지 못하는 것이 恨歎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또 添付할 것은 日本 宮內省 雅樂部長 田邊尙雄(전변상웅)의 朝鮮雅樂 視察談이다. 지난 二十六年인가? 『報知新聞』에 發表한 것인데 그 大要를 든다면 이러하다:  「朝鮮에는 李王家의 樂과 民間의 樂이 있는데, 李王家의 樂은 매우 高尙하여 世界的 音樂에 列할 것이 많으니, 日本 音樂으로는 到底히 比較할 수도 없다. 雅樂은 宗廟와 文廟의 二種에 分하였는데, 거기에 軒架登歌와 文舞·武舞가 있으며, 俗樂에는 日本 宮中舞樂의 原形인 宮中宴舞樂 및 普通宴舞樂이 있다. 그리고 普通樂에는 劍舞·僧舞 等의 各種이 있는데, 그 中에 壯大한 것은 半鍾 十六式으로 列한 것, 十八坐와 雷鼓·管絃에 屬한 七百餘人의 合奏함과 같은 것은 城內를 떠나서 멀리 北漢山에나 南山에서 들어야 비로소 알맞은 音樂이라 할 만큼 무섭게 宏壯한 것이 있다. 特히 滋味 있는 것은 四尺假量의 큰 虎形인 그릇의 등을 竹策으로써 긁으면 그 소리가 그 宏壯한 中에도 能히 들리어 딱 끊기는 그것이다.  그런데 李王家의 音樂이 이제 衰亡에 濱하여 樂工은 거의 淘汰되고 그것을 通한 者는 겨우 老樂工 한 사람만 있을 뿐이요, 七百餘人을 要하던 그 音樂은 지금에는 五十餘人으로 減하였다. 音樂은 한번 亡하면 다시 復活할 餘望이 없는 것이다. 이제 興亡의 境에 있는 世界的인 朝鮮雅樂에 對하여 어디에까지 保存의 道를 講하려 하노니 이것은 그대로 亡케 함은 世界의 損失이라」 하였다.  나는 이 記事를 보고 이런 노래를 불렀다.  「景福宮 노랫소리, 그침도 그치리라, 管絃은 依舊컨만, 朴堧(박연)은 어디간고? 海外에 彷徨하는 客이, 눈물 겨워하노라.」三. 大樂前後譜  世宗 때에 撰한 것은 『大樂前譜』라 하는데 그 目錄에는 雅樂·雅歌. 定大業·醉豊享·致和平·鳳凰吟·與民樂慢·步虛子·洛陽春·前引子·後引子·與民樂絃·與民樂管·步虛子管·桓桓曲·水龍吟·憶吹簫·憂雲峰·小拋毬樂·五雲開瑞朝·會八仙·千年萬歲·折花衆仙會.  世祖 때에 撰한 것은 『大樂後譜』라 하는데 그 目錄에는  俗樂. 圜丘樂·創守曲·時用保太平·時用定大業·維皇曲·靖東方曲.  時用鄕樂. 致和平·醉豊享·鳳凰吟·眞勺·履霜曲·滿殿春·納氏歌·橫殺門·感君恩·西京別曲慢·大業感君恩·翰林別曲·西京別曲·雙花店·步虛子·靈山會相·北殿·動動·井邑·紫霞洞.  『大典通編』에 據하면 樂工을 取才할 때에 唐樂 三十一調와 鄕樂 三十一調를 試하는데, 唐樂 三十一調는 곧 三眞勺譜·與民樂令·與民樂慢·洛陽春·五雲開瑞朝·萬葉熾瑤圖·嗺子·步虛子令·步虛子急拍·破子·桓桓曲·太平年慢·保太平十一聲·定大業十一聲·進饌樂·豊安曲·前引子·後引子·班賀舞·靖東方·還宮樂三臺·折花急拍·小拋毬樂令·淸平詞·水龍吟·憂雲峰·憶吹簫·白鶴子·獻天壽·衆仙會·金殿樂·賀聖朝·會八仙·天壽嗺·千年萬歲引子·聖壽無疆引子. 鄕樂 三十一調는 곧 三眞勺譜·與民樂令·與民樂慢·眞勺四機·履霜曲·洛陽春·五冠山·紫霞洞·動動·保太平十一聲·定大業十一聲·進饌樂·豊安曲·前引子·後引子·靖東方·鳳凰吟三機·翰林別曲·還宮樂·致和平三機·維皇曲·北殿·滿殿春·醉豊享·井邑二機·鄭苽亭三機·獻仙桃·金殿樂·納氏歌·儒林歌·橫殺門·聖壽無疆·步虛子.2. 舞踊ㄱ. 鄕樂의 舞踊  「保太平舞」. 이것은 祭樂의 舞인데, 妓 三十六人이 丹粧과 服飾을 갖추고 籥과 翟을 쥐고서 樂節을 맞추어 추는 춤이다.  「定大業舞」. 妓 七十一人이 一齊히 五色段의 甲과 靑段의 冑를 着하고서 그 中에 三十五人은 各히 儀物을 쥐고 三十六人은 劍槍弓矢를 쥔다. 그리고 樂의 節과 拍의 聲을 따라서 曲陣도 되고 直陣도 되고 銳陣도 되고 圓陣도 되고 方陣도 되면서 춤을 추는 것이다.  「鳳來儀舞」. 妓 八人이 四隊를 지어서 樂의 節을 따라 對舞도 하고 背舞도 하며, 또는 다른 諸妓와 함께 歌詞를 竝唱하는 때도 있고 回旋換隊하여 北向舞하는 때도 있다.  「牙拍舞」. 妓 兩人이 各히 牙拍을 쥐고서 諸妓가 詞를 唱하고 樂이 奏함을 따라 北向舞하다가 對舞하고 다시 北向舞하다가 背舞하며 或은 進退하면서 舞하기도 한다.  「響鈸舞」. 妓 八人이 各히 左右手의 母指와 長指에 響鈸을 係하고서 舞하되 拍을 擊한즉 每腔에 鈸을 擊하면서 서로 그 位를 換하여 背舞도 하고 面舞도 한다.  「舞鼓舞」. 舞鼓는 高麗 忠宣王 때의 侍中 李混(이혼)이 寧海에 謫宦하던 그 때, 海의 浮査를 얻어서 만든 것이니, 소리가 宏壯하고 그 舞가 變轉하여 翩翩然 雙蝶이 花에 繞하는 듯, 矯矯然 二龍이 珠를 爭하는 듯하여 樂府에 가장 奇妙한 것이다.  이것은 妓 八人이 各히 左右手에 槌를 쥐고 서로 連하여, 左旋하면서 鼓를 繞하여 舞하되 杖鼓의 雙聲과 鼓聲를 따라서 그 舞鼓를 친다.  「鶴舞」. 靑鶴·白鶴 한 쌍이 날개를 너울거리면서 蓮筒이 있는 池塘을 向하여 두 걸음씩 나아간다. 다시 後面으로 向하여 두 걸음씩 나아가기도 하여 그렇게 몇 번 重複하다가 乃終에 蓮筒을 啄開하면 그 속에서 兩童女가 나온다.  「教坊歌謠」. 沈香山과 池塘具를 路中에 設하고 沈香山의 앞에 花甎碧을 펴고 諸妓가 沈香山의 左右에 分立하였다가 大駕가 이르면 函에 담은 歌謠軸을 跪進하고 鶴舞·蓮花臺의 呈才를 興行한다.  「文德曲舞」. 처음에 妓 一人이 呈才致語를 올리고 다음에 妓가 文德曲의 開言路章을 唱하고, 그 다음에 妓 四人이 保功臣章을 唱하고 그 다음에 妓 四人이 正經界章을 唱하고, 또 그 다음에 壯妓 二人과 少妓 二人이 定禮樂章을 唱하고서 樂의 節次를 따라 서로 다니면서 춤을 춘다.  鶴·蓮花臺·處容舞의 兼設. 十二月 晦前 一日에 儺을 驅하고 그 다음에 二度의 處容舞를 興行하게 된다. 第一度에는 靑黃紅白黑의 옷을 입은 五方處容의 舞만 있게 되고, 第二度에는 鶴舞·蓮花臺의 呈才와 假面舞童의 舞가 있고서 五方處容의 舞가 또한 있다. 그러한 行程에서 諸妓가 奏樂을 따라서 鳳凰吟·井邑調·北殿·處容歌·彌陀讚·觀音讚·本師讚을 次第로 부른다.ㄴ. 唐樂의 舞踊  「獻仙桃」. 이는 西王母(서왕모)의 事를 引用하여서 樂에 侑한 것이니, 또한 仙呂調의 類라. 이것은 唐으로부터 高麗에 流入하였는데, 高麗 崔忠獻(최충헌)이 群妓로 하여금 蓮葉仙娥의 來賀를 狀한 것이 곧 이러한 類라. 妓 二人이 王母(서왕모)의 左右挾이 되어 舞하다가, 仙桃盤을 王母(서왕모)에게 跪進하면 王母(서왕모)는 그 盤을 奉하여 卓上에 두고 이런 致詞를 올린다.  「邈在鰲臺, 來朝鳳闕, 奉手年之美實, 呈萬福之休祥, 敢冒宸顏, 謹進口號, 斂霞裾而少退, 指雲路而言旋, 再拜階前, 相將好去.」  그리고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에는 獻天壽·金盞子·瑞鷓鴣가 있다.  「壽延長」. 壽延長이란 것은 어느 때에 始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高麗 成宗의 때, 崔承老(최승노) 疏에 奉佛의 失을 論하되 唐德宗妃의 父 三景과 駙馬 高怡(고이) 等이 聖壽의 延長을 爲하여 佛像을 鑄進하였다 하니 생각건대 거기에서 비롯한 듯하다.  妓 八人이 每隊에 二人씩 東西南北의 四隊로 分하여 對舞 背舞 또는 回舞 等 各樣의 춤을 추면서 「中腔急拍詞」와 「破子詞」라는 노래도 부르고 아래와 같은 致詞도 올린다.  「流虹繞殿布禎祥, 瑞氣雲霞映聖光, 萬邦歸順來拱手, 梨園樂部奏中腔, 太平時節好風光, 玉殿深深日正長, 花雜壽香薰綺席, 天將美醁泛金觴.」  「五羊仙」. 唐 李群玉(이군옥)의 「菖蒲澗詩」에 「五仙騎五羊, 何年降兹鄕」이라 하고 그 註에 寰字記를 引用하였는데, 高固(고고)가 楚相이 되었을 제 五仙人이 五色羊을 타고 와서 穀穗를 州人에게 주므로 그들을 五羊仙이라 하였다」하고 또 『南越志』에 菖蒲澗은 熙寧縣에 있는데 姚成甫(요성보)가 그 澗側에서 丈人을 만남에 그가 말하기를 이 菖蒲는 安期生(안기생)의 심은 것이라 하였으니 모든 것을 綜合하여 보면 五羊仙의 戲는 반드시 거기에서 생기었을 것이다.  妓 五人이 하나는 王母(서왕모), 넷은 그의 左右挾이 되고 五仙에 擬하여 各樣의 춤을 추면서 「步虛子詞」와 「破子詞」를 부르고 또는 이러한 致詞를 올린다.  「雲生鵠嶺, 日轉鰲山, 怳逢鶴駕之眞仙, 竝結鸞驂之上侶, 雅奏値於儀鳳, 華姿妙於翩鴻, 冀借優容, 許以入隊.  式歌目舞 聊申頌禱之情, 俾熾而昌 用贊延洪之祚, 妾等 無任激切屛營之至.  歌淸別鶴, 舞妙面鸞, 整環佩於言歸, 指蓬瀛而都步, 百和沈煙紅日晩, 一聲遼鶴白雲深, 再拜階前, 相將好去.  寰海塵淸, 共感昇平之化, 瑤臺路隔 遽回汗漫之遊, 未敢自專, 伏候進止.」  「拋毬樂」. 拋毬樂이란 것은 沈存中(심존중)의 『筆談(몽계필담)』에 일렀으되 海州 士人 李愼(이신)이 夢中에 水殿中 어떠한 곳에 이르러 宮女들이 毬로써 戲하는 것을 보았다 하는데, 山陽 蔡純(채순)이 그 事實을 仔細히 傳敍한 中에 「拋毬曲」 十餘闋은 그 詞가 淸麗하다고 하였으니 至今에 이 戲가 반드시 거기로부터 생기었을 것이오. 宋의 敎坊樂에 拋毬樂이 그 第三에 있다.  妓 十六人이 兩隊에 分하여 毬門의 左右에 立하였다가 左右隊에서 各히 한 사람씩 次例로 進하여 彩毬를 쥐고서 風流眼에 拋하되 그것을 맞히면 賞布를 주고 맞히지 못하면 그 左腮에 墨點을 찍는다. 그렇게 賞布와 墨點의 多少로써 左右隊의 勝負를 判定하는데 그 中間에 여러 번의 舞進舞退도 있고 또는 「折花詞」·「小拋樂詞」도 부르게 되고 아래와 같은 致詞도 올린다.  「雅樂 鏗鏘於麗景, 妓童, 部列於香階, 爭呈綽約之姿, 共獻蹈躚之舞, 冀容入隊, 以樂以娛.七般妙舞 已呈飛燕之奇, 數曲淸歌 且冀貫珠之美, 五音齊送, 六律相催, 再拜階前, 相將好去.」  「蓮花臺」. 蓮花臺란 것은 그 本이 拓拔魏에서 나온 것이다. 二童女가 鮮明한 衣와 㡌를 着하고 거기에 또 金鈴을 施하여 抃轉한즉 소리가 나게 하였다. 그 童女들이 올 적에는 二朶의 蓮花中에 藏하였다가 그 꽃이 터진 뒤에 나타나게 하였으니 그것은 대개 「花神踏歌」와 「採蓮曲」의 類를 取材로 하여 만든 것이다.  兩 童女가 蛤笠을 쓰고서 舞進舞退하되 或 서로 面하고 或 서로 背하여 跳躍하면서 춤을 춘다. 그런데 그 行程의 中間에 「微臣詞」도 唱하고 또는 아래와 같은 致詞를 올린다.  「住在蓬萊, 下生蓮蘂, 有感君王之德化, 來呈歌舞之歡娛, 雅樂將終, 拜辭華席, 仙軺欲返, 遙指雲程.」  「六花隊」. 처음에는 竹竿子를 奉한 妓 二人이 左右에 分하여 一人은 「問花心詞」를 唱하고 다른 一人은 「花心答詞」를 唱한다. 그리고 보면 이미 妓 六人으로 兩隊에 分하였던 紅衣隊와 藍衣隊가 次第로 興行하는데, 먼저 紅衣 第一人이 花를 奉하고 進하여 紅頭 第一念詩를 唱하고, 다음에 藍衣 第一人이 花를 奉하고 進하여 藍 第一念詩를 唱한다. 그렇게 紅衣人과 藍衣人이 서로 엇바꾸어 花를 奉하고 進하여 第二·第三의 念詩를 다 唱한 後에 對舞도 하고 背舞 或은 回舞도 한다. 花心問答은 呈才致語로 되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新花右手 呈綽約之春光, 寶帶圍腰 學六宮之裝束, 幸預在庭之樂, 願陳詣闕之由.」(問花心詞)  「竹枝調美 殊非治世之音, 桃葉情多未合正人之聽, 採新聲於上國,追古事於前修, 賦以篇章, 第其名品.」  「顧慚微品, 願助陳歡, 金縷聲催 想行雲而可駐, 華駰影過 知回雪之將飄, 未敢自專, 伏候宸旨.」(花心答詞)  「嫩綠嬌紅 競爭姸於麗景, 淸歌妙舞 俱效技於華筵, 雅樂垂成, 拜辭以退.」「曲破」. 妓 兩人이 첫 번에는 面舞·背舞 或은 前舞하고 두 번째에는 「惜奴嬌詞」를 唱하고 세 번째에는 舞進하여 面舞 或은 背舞하고 네 번째에는 面舞 或은 背舞 하다가 東西로 서로 가면서 交舞하고 그 다음에는 舞進舞退하되 그렇게 다섯 번을 거듭한다.(音樂으로부터 舞踊까지는 『增補東國文獻備考』, 樂考에 據함)  鄕樂과 唐樂의 舞踊은 西人의 이른바 「오페라」式으로서 純全히 宮廷의 娛樂에 供하던 것이다. 그것이 劍舞(黃昌舞)나 法鼓舞(僧舞) 보다는 그 儀節이 매우 複雜한데, 特히 唐樂의 舞踊은 一種의 演戲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렇게 보느냐 하면 場所·人物·背景도 그 가운데에 있으며, 幕과 幕의 連結이 또 있으니, 樂을 奏하면 開幕으로, 樂이 止하면 閉幕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 題材와 內容을 考察한다면 人生의 實生活에는 一毫의 關與도 없는, 다만 君主를 爲하여 頌德·祝壽·競技하는 거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階級的이요, 古典的이라 하여 아무 價値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藝術로 보아서는 너무 적게 評價하여도 옳지 못하다. 우리는 그것을 遺産으로 承受하여 勞動者와 勤勞大衆에게 適合하도록 增刪의 能手로서 잘 修正한다면 보다 多大한 價値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2. 小說  漢大에서는 元의 時代에부터 戲曲과 小說의 作風이 竝行하였다. 그래, 戲曲으로는 南曲과 北曲의 區別이 있어서 南曲에는 高則誠(고칙성)의 「琵瑟記」, 北曲에는 王實甫(왕실보)의 「西廂記」와 같은 傑作이 連出하였으며, 小說로는 施耐菴(시내암)의 『水滸傳』과 같은 奇書가 그 踵을 繼하였다. 그 流風이 明代에 傳하여는 더욱 速度로 躍進하여 沈靑門(심청문)·陳大聲(진대성) 等 戲曲作家와 『西遊記』·「後水滸」·『三國衍義』 等 各種 小說이 出現하는 거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는 그 事態가 달리 되었다. 高麗로 말하여도 元宗의 때로부터 元의 勢力에 눌리어서, 百年餘의 긴 歲月을 經過하면서 文化上으로 오직 性理學을 輸入하였을 뿐이요, 戲曲과 小說에 對하여는 全혀 度外視하였다. 李朝 朝鮮으로 말하여도 高麗로부터의 傳統的 思想을 그냥 承襲하여 그 初期에는 또한 그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性理學의 害毒이 軟文藝에까지 미쳤다는 말인데, 그렇지마는 成宗의 때에 小說家가 비로소 그 머리를 들고서 完全히 活氣를 띠기는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을 겪은 그 뒤의 일이라 하노니, 漢人의 小說까지 批評한 大作家 許筠(허균)이 世上에 나오게 된 것은 實로 偶然이 아니었다. 그가 『西遊記』 跋을 지으면서 말하되,  「余得戲家說 數十種, 除三國·隋·唐外, 兩漢齬, 齊·魏拙, 五代殘, 唐率, 北宋略, 水滸則 姦驕機巧」라 하였으니, 이에 關하여는 그의 超凡한 文章才와 絶世한 判別力으로써 小說이 가장 盛行하던 明末에 立脚하였다는 것도 또한 말하여야 되겠다.  그리고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으로 말미암아 南漢의 羞恥는 當하였지만, 肅宗으로부터 正祖에 이르는 그 동안은 康熙·乾降 兩代의 淸文化를 相當히 吸取하고서 李朝 五百年을 通하여 軟文學의 全盛時代를 形成하였다. 肅宗 當年의 創作家로는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을 첫 가락에 꼽아야 할지니 그는 東坡(동파 소식)『志林』을 引用하였는데  「閭巷에 說書家가 있어서 三國事를 말할 제, 玄德(현덕 유비)이 負하였다고 하면 洛淚하는 이가 있으며, 曹操(조조)가 敗하였다고 하면 痛快히 여기어 雀躍하나니 이것이 『羅(나관중)氏 衍義』의 楷輿인지 알 수 없다. 이제 陳壽(진수) 『三國志』와 溫公(사마광) 『通鑑』과 같은 것으로는 涕泣할 이가 없으니 이것이 通俗小說을 쓰는 理由라」하여 『九雲夢』·『南征記』의 著成에 對한 動機를 指明할 뿐만 아니라, 장차 『春香傳』·『沈淸傳』 等 多數 作品이 나올 그 前路를 열어 놓았다.  그런데 高宗의 甲午更張은 小說界에 큰 轉換을 주었다. 그 前에는 諺文小說과 漢文小說의 區分이 있었으나, 이때에는 舊小說과 新小說의 界限이 嚴正히 있게 되면서 表現形式도 勿論 그렇거니와 그 名稱까지 舊殻를 벗어 버리고 새 面目을 또한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一方에는 舊小說은 그 名稱을 고치어 『春香傳』은 『獄中花』로, 『沈淸傳』은 『江上蓮』으로, 『興夫傳』은 『燕의 脚』으로 되어지고 다른 一方에는 『雉岳山』·『雙玉淚』 等 西洋風의 小說體가 優勢를 잡게 되었다.  위에서 論及한 그것들은 李朝 時代의 小說이 어떻게 進展되며 또는 어떻게 變遷된 것을 大槪나마 提示한 것인데, 만일 그것을 時期別로 본다면第一期 成宗―明宗第二期 宣祖―光海第三期 仁祖―哲宗第四期 高宗―隆熙末年ㄱ. 第一期의 小說  이 時期에 있어 軟文藝의 價値를 賦與할 만한 小說이 있었다면 오직 東峰 金時習(동봉 김시습)의 『金鰲新話』, 秋江 南孝溫(추강 남효온)의 『六臣傳』, 四佳 徐居正(사가 서거정)의 「滑稽傳」을 指摘하여야 될지니 그들은 다 成宗朝의 文士이었다. 그 後에는 그런 作家가 더 없이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士人치고는 三次의 士禍에 거의 殺戮을 當한 것도 큰 理由로 되려니와 退溪(퇴계 이황)·花潭(화담 서거정)·龜峰(구봉 송익필)·孤靑(고청 서기)과 같은 性理學者가 서로 繼續하여 一國을 風靡한 것이 더욱 큰 理由로 되었겠다.『金鰲新話』 五篇  「萬福寺樗蒲記」. 이것은 老總角이 佛前에 訴하여 佳緣을 얻은 이야기다.  「李生窺墻錄」. 이것은 得意치 못한 太學生이 流浪하다가 崔家娘을 만나 異緣을 맺은 이야기다.  「醉遊浮碧樓記」. 이것은 富商이 廢塘에서 죽은 지 오랜 箕女를 만나 서로 盡歡하던 이야기다.  「南炎部州志」. 이것은 佛을 믿지 않던 書生이 地獄 炎部州에 갔다가 돌아와서 宇宙를 達觀하였다는 이야기다.  「龍宮赴宴錄」. 이것은 어떤 文士가 龍宮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구경한 이야기다.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는 東峰(동봉 김시습)의 이것이 『剪燈新話』의 影響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만일 宣祖 때의 사람 林芑(임기)가 燕京에 赴하였다가 瞿佑(구우)의 著 『剪燈新話』를 가지고 온 것이 그 처음이라면 東峰(동봉 김시습)은 그것을 依仿할 수 없으니 年代로 보아 林芑(임기)와 東峰(동봉 김시습)의 相距가 서로 差遠한 까닭이다.ㄴ. 第二期의 小說  이 時期는 小說의 新興期라고 말하게 된다. 小說의 種類를 든다면 『元生夢遊錄』·『壽聖宮夢遊錄』·『江都夢遊錄』·『金角干實記』·『柳淵傳』·『桂旬傳』·『紅白花傳』·『壬辰錄』은 宣祖 때에 나온 作品이요, 『洪吉童傳』·『田禹治傳』·『徐花潭傳』은 光海 때에 나온 作品이다.『元生夢遊錄』. 白湖 林悌(백호 임제)  이것은 南秋江(추강 남효온)의 人格을 題材로 하여 지었는데, 그의 境遇를 애닯게도 歎惜하였다.『花史』. 白湖 林悌(백호 임제)  이것은 花類에 托하여 當時의 政治를 批評한 一種의 史論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壽聖宮夢遊錄』(一名은 「雲英傳」)  이것은 安平大君의 冤殺된 實情을 그린 이야기였다. 말한다면 靑坡士人 柳泳(유영)이 宣祖 三十四年 봄에 安平大君 李瑢(이용)의 舊居인 壽聖宮에서 놀다가, 醉夢間에 安平(이용)宮女 雲英(운영)과 雲英(운영)의 愛人이던 金進士를 만났다는 그것을 憑藉로 하여 篡立을 陰謀하는 首陽大君(世祖)의 손에서 安平大君(이용)이 억울하게 誅殺된 그 事情을 敍述한 悲劇的 作品이다.『柳淵傳』. 白沙 李恒福(백사 이항복)  이것은 大邱 士族 柳淵(유연)이 그 兄을 죽이었다는 誣獄으로 冤死한 이야기다.『紅白花傳』  이것은 桂公子 一知(일지)와 順小姐 纖素(섬소)가 드디어 成婚하여 八十年의 富貴를 누리던 이야기다.『壬辰錄』  이것은 固有한 歷史的 事實에 얼마큼의 英雄的 誇張과 空想的 異蹟으로써 潤飾한 作品이다. 그 中에 特히 四溟堂(사명당, 송운 유정)의 神通力을 各 方面으로 現示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집이 차면 「四溟堂(사명당, 송운 유정)이 낮참하고 갔다」를 格言처럼 通用하게 되었으며, 또는 倭놈에게서 人皮二百張을 해마다 받았다는 것이 마치 實事로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小說은 僧侶의 손에서 되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疑心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洪吉童傳』. 許筠(허균)  筠(허균)은 徐花潭(화담 서경덕)의 高足인 草堂 許曄(초당 허엽)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의 文章才로 말하면 明의 尙書 錢牧齋(전목재)는 「筠(허균)이 그 兄 筬(허성)과 篈(허봉)으로 더불어 文으로써 海東을 鳴하였다(『列朝詩集』)」라 하였으며, 奇荷潭은 「筠(허균)의 文章이 한 때에 獨步하였다(「荷潭錄」)」라 하였다. 그의 同情人物로 말하면 모두가 庶流인데, 昭陽江上에서 竹林七賢으로 自處하던 徐羊甲(서양갑)·沈友英(심우영, 筠의 妻三寸) 等으로 더불어 光海를 집어던지고 嫡庶의 區別이 없는 새 政權을 세우려 하였으며, 詩로써 李朝 三唐의 一人이던 蓀谷 李達(손곡 이달)에게서 詩를 배우고 또 그의 傳을 지어 그 不遇를 歎惜하였으며, 東人의 詩를 選함에 있어는 鄭道傳(정도전)의 詩를 으뜸으로 삼고, 沈友英(심우영)의 詩를 또한 거기에 加入하였다. 이런 것으로 보아 「洪吉童傳」은 許筠(허균)·徐羊甲(서양갑) 等의 自敍傳이요, 洪吉童(홍길동)은 庶流를 代表한 理想的 人物이라 하겠다.『洪吉童傳』의 內容  「世宗의 때 東大門 內에 洪政丞이란 이가 살았는데, 그에게는 仁衡(홍인형)과 吉童(홍길동)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 吉童(홍길동)은 侍婢 春纖(춘섬)에게서 난 것이라 하여, 嫡庶의 區別이 酷甚한 그 판에 갖은 驅迫과 虐待를 받았다. 그러다가 乃終에는 家族 全體의 미움을 받아 여러 번 죽을 變을 當한 일이 있었다. 聰慧가 非凡한 吉童(홍길동)은 儒書·兵書 그 무엇이든지 다 通達하였으나 집에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며, 兄을 兄이라고 부르지 못함에 그렇게 敵國같은 家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四方으로 漂浪하다가 賊窟에 들어가서 行首로 되고 또는 活貧堂을 組織하여 八道守令의 不義한 財物을 빼앗아서 貧民을 구제하였다. 이것이 重大한 罪目으로 되어 國王의 捕捉命令이 八道에 내렸다. 그러나 人間의 凡技로서는 呼風喚雨의 術이 있는 吉童(홍길동)은 잡을 수 없음에, 國王도 할 수 없이 兵判을 주기로 하고 吉童(홍길동)을 說伏하였다. 그 後, 吉童(홍길동)은 故國을 떠나 南京으로 向하다가 芒碣山에서 妖怪를 退治하고 硉島國王이 되어 理想의 나라를 建設하였다.」『田禹治傳』.  田禹治(전우치)는 潭陽 사람으로서 松都에 와서 隱居하였다. 그런데 일찍 妖狐의 幻書를 얻어가지고 幻術에 能하였다고 한다.(『海東異蹟』·『大東野乘』·『松都志』)『田禹治傳』의 內容  「麗末에 田叔(전숙)의 아들 禹治(전우치)는 일찍 尹公에게서 道術을 배웠다. 그리고 竹林에 울고 있는 處女에게서 狐精을 빼앗아 九尾狐를 죽였다. 그 後로는 科業을 全廢하고 仙官으로 變하여 或은 闕內에 날아들기도 하며, 或은 들보를 空中으로 가져가고 五百金을 얻었다. 國王은 그것을 端緖로 하여 逮捕令을 내렸다. 마침내 田禹治(전우치)를 잡아다가 瓶속에 넣어도 죽지 않았는데, 그때에 各道로서 잡아들인 田禹治(전우치)의 總數 三百六十一名이나 되었다. 그는 그렇게 道術이 있지마는 寡婦의 關係로서 각림 道令에게 屈服한 그 後로는 母夫人을 모시고 山中에 숨어 버리었다.」『徐花潭傳』.  이것은 花潭(화담 서경덕)을 道術家로 하여 九尾狐와 神虎에 關한 異蹟을 傅會한 이야기다.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도 論及한바어니와 洪·田·徐(홍길동·전우치·서경덕) 三傳이 한 사람의 構想에서 나온 듯하다. 그 同一한 點을 든다면  道術로 中心한 것은 洪·田·徐(홍길동·전우치·서경덕) 三傳이 다 같고;  金錢說은 洪·田(홍길동·전우치) 兩傳이 같고;  國王의 逮捕令은 洪·田(홍길동·전우치) 兩傳이 같고;  九尾狐說은 田·徐(전우치·서경덕) 兩傳이 같다.ㄷ. 第三期의 小說  이 時期의 初期에는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을 치루고 나서 全國 上下의 北伐論이 한창 高調하던 그때이었다. 거기로부터 軍談類가 많이 나오게 되었나니 『蘇大成傳』·『趙雄傳』·『郭海龍傳』·『王將軍傳』·『張國鎭傳』 等이 곧 그것이다. 그 傳記의 가운데에 胡王이니, 가달이니 하는 그 人物은 滿洲를 對像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主人公되는 將軍마다의 最後成功은 北伐의 未來勝利를 暗示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三國衍義』로부터도 軍談類가 또한 나오게 되었으니 『赤壁大戰』·『魏王別傳』·『諸馬武傳』·『玉人記』 等이 곧 그것이다. 이런 軍談은 神通力과 兩性愛에 關한 이야기보다는 아주 달라서 國民一般의 尙武的 精神을 鼓吹함에 큰 效果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天君衍義』. 菊堂 鄭泰齊(국당 정태제, 1612~1669年)菊堂(국당 정태제)은 光海 四年에 나서 顯宗 十年에 歿하였다. 그 當時의 人心이 物慾에 陷溺하여 花酒에 失身하는 일이 많은 까닭에 그것을 規戒하고 矯正하기 爲하여서 이 衍義를 짓게 되었다. 그 目次는 三十一回나 되는데, 內容의 槪例를 보인다면  第一回 天官卽位分封官, 第二回 都督戰覇刺圍中, 第三回 五利將軍 蕩欲生, 第四回 惺惺翁來諫天君, 第五回 群邪交讒惺惺翁.『九雲夢』.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 1637~1692年)  西浦(서포 김만중)는 遺腹子로서 그 兄 瑞石 金萬基(서석 김만기)와 함께 母夫人 尹氏의 敎訓을 받았다고 한다. 말한다면 그 어머니에게서 『小學』·『十八史』·唐詩까지 다 배웠다는 것이다. 그의 政界生活이 西南人의 黨爭으로 因하여 竄逐을 當한 그때에 『九雲夢』를 지었다. 그때는 肅宗 十五年(1689年)이니 功名富貴는 一場春夢에 지나지 못하다는 뜻으로 母夫人의 憂慮를 慰釋하려는 것이 곧 『九雲夢』의 內容이었다.  「閭巷間에 流行하는 것은 다만 『九雲夢』이 있는데, 그것은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이 지었으니 다른 것보단 얼만큼 意義가 있다. 世傳에 西浦(서포 김만중)가 竄荒하였을 때에 大夫人의 破閑을 爲하여 하룻밤에 그것을 지었다고 한다.」[李圭景(이규경)의 『五洲衍文』]  「稗史에 『九雲夢』이 있는데 곧 西浦(서포 김만중)의 지은 것이라. 大旨는 功名富貴는 一場春夢이라 하여 大夫人의 憂思를 慰釋하려 하였으니 그것이 閨闔의 사이에 盛行한다.」(北泉筆譚)『九雲夢』의 內容  衡山 蓮花峰에 숨어 있는 六觀大師의 弟子 性眞(성진)이 師命을 받아 洞庭龍王에게로 가다가 그 途中에서 八仙女로 더불어 春情을 通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런 뒤로는 그가 禪佛의 學에 進就되지 못함에, 大師가 크게 怒하여 性眞(성진)과 八仙女를 地獄에 보내었다. 그러나 閻王이 그들을 憐惜히 여기어 特히 容恕하고 極樂世界로 보내었다. 그 날에 性眞(성진)은 淮陽 楊處士 夫人의 臨産에 當하여 才情이 煥發한 楊少遊(양서유)로 換生하여 간 곳마다 路柳墻花를 戲弄하며 八仙女의 後身으로 各處에 헤어져 난 華州 秦彩鳳(진채봉)·洛陽名妓 桂蟾月(계섬월)·江北名妓 狄驚鴻(적경홍)·京師 鄭小姐와 그의 侍婢 春雲·皇妹 蘭陽公主·吐蕃(티벳)刺客 沈裊煙(심요연)·龍女白綾波(백승파)를 娶하였다. 그리고 少年에 壯元及第하여 河北三鎭 吐蕃(티벳)의 亂을 平定하니 天子가 駙馬로 삼고 燕王으로 封하였다. 그렇게 少遊(양소유)는 富貴功名과 一世福樂을 마음대로 누리다가 그 八夫人은 胡僧의 說法에 頓悟하여 다시 옛날의 八仙女로 되어 極樂世界로 돌아갔다.『南征記』. (一名은 『謝氏南征記』)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  西浦(서포 김만중)가 『九雲夢』를 짓던 肅宗 十五年으로부터 그의 歿하던 肅宗 十八年 그 中間에 『南征記』를 지었다고 한다. 兩部의 小說이 本히 諺文으로 되었던 것인데, 그것이 그의 從孫 金春澤(김택춘)의 손에서 漢譯되었다.  「西浦(서포 김만중)가 俗諺으로써 小說을 많이 지었는데, 그 中에서 이른바 『南征記』는 다른 것과에 견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文學으로써 翻하였다… 稗官小說은 荒誕하지 않으면 浮靡하나 오직 民彝를 敦케 하고, 世敎에 裨할 것은 『南征記』 뿐이라.」[金春澤(김춘택)의 『北軒雜說』]  「『南征記』는 北軒(김춘택)이 仁顯王后 閔氏의 位를 回復하기 爲하여 肅宗의 마음을 悔悟시기려고 지은 것이라.」(『五洲衍文』)  傳說에 『九雲夢』가 나오자, 畜妾의 風이 盛行하여 各 家庭의 紛亂은 쉴 날이 없었다. 그래서 『南征記』를 짓게 되었는데, 그것이 世上에 금방 流行하자, 妾을 집어던지는 波濤가 움직였다고 한다. 小說은 그렇게 人心을 左右하는 힘이 있으니, 北軒(김춘택)의 漢譯序에 民彝를 敦케 하고 世敎에 裨할 것은 오직 『南征記』 뿐이라 함은 這間의 消息을 傳하여 준다.『南征記』의 內容  明나라 嘉靖年間이다. 順天府 劉翰林(유한림)의 正室 謝氏는 淑德과 才行은 俱備하지만, 시집을 온지 九年이 되도록 子女가 없었다. 그래, 翰林(유한림)을 勸하여 妾 喬氏를 얻게 하였다. 喬氏는 極히 凶淫한지라, 門客을 私畜하고 正室을 讒毁하니 畢竟 謝氏는 쫓겨나서 南으로 또 南으로 定處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렇게 流浪하다가 懷沙亭·黃陵廟를 다 지나서 娥皇·女英(아황·여영)을 만나 괴로운 앞길에 對한 光明의 暗示를 보았다. 그리자, 喬氏의 노던 凶計가 一朝에 綻露됨에, 翰林(유한림)은 喬妾과 그 門客을 一時에 집어 던지고 謝氏를 다시 찾아다가 正室을 삼았다. 그리고서 翰林(유한림)은 丞相으로 榮進하면서 門戶가 繁榮하였다.  夢字小說은 벌써 宣祖時代에 생기었다. 위에서 말한바 『元生夢遊錄』·『壽聖宮夢遊錄』·『江都夢遊錄』이 곧 그것인데, 肅宗時代에 이르러 『九雲夢』란 夢字小說이 또한 나오게 되었다. 그 뒤를 따라서 英·正(영조·정조) 兩代를 거치는 동안, 그 命題를 다시금 거듭하여 『玉麟夢』·『玉樓夢』·『玉蓮夢』 等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漢土에서는 夢字小說이 매우 늦게 나왔으니 世界的 傑作이라는 曹雪芹(조설근)의 『紅樓夢』은 우리의 『九雲夢』보다도 五六十年이나 뒤떨어진 作品이었다. 淸朝의 人士들은 그것을 다 模擬하여 南陽氏의 『紅樓復夢』, 曹塢(조오)의 『續紅樓夢』, 普山氏의 『紅樓夢圖詠』, 荆石山氏의 『紅樓夢散套』, 慕眞山人(모진산인 유달)의 『靑樓夢』, 그밖에 또 『紅樓幻夢』·『紅樓增夢』·『紅樓夢補』·『後紅樓夢』 等이 連出하였다. 이 夢字는 彼我間에 무슨 約束이나 있은 듯이 서로 通行하는 時代風이었던 모양인데, 여기에 對하여는 休靜(휴정)의 三夢詩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을 한번 읊는 것이 더욱 좋겠다.「王郞返魂傳」.  이것은 英祖 二十九年에 出版한 것인데, 佛說 「阿彌陀」의 附錄으로 되어 있다.  그 內容의 大槪  「吉州에 王思机(왕사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佛敎라면 絶對否認者이었다. 일찍이 妻 宋氏를 잃고 孤獨한 生活로 歲月을 보내더니 하루는 十年 前에 죽은 宋氏가 와서 勸告하되 「당신은 부처를 비방한 罪로 冥府의 미움을 받아서 來日 아침에는 上帝가 使者를 보내서 잡아가려 하니 반드시 佛像을 베풀고 佛經을 念讀하라」 하였다. 果然 그 이튿날 使者의 손에 잡혀 갔었다. 그런데 王郞은 그 날 아침에 熱心으로 念佛하였던 것이었다. 使者에게서 그런 報告를 받은 閻王은 기뻐서 그 罪를 容恕하고 그 妻 宋氏까지 人間으로 다시 보내었다. 그런데 죽은 지 몇 날이 안 된 王郞은 人間에 돌아와 다시 依接할 肉體가 그대로 있었지만, 宋氏는 죽은 지 十年이었다. 그 肉體가 어찌 남아 있었으랴? 하는 수 없이 月氏國 翁主의 肉體에 붙어서 世上에 更生하였다. 그리하여 彼此에 未盡한 因緣을 다시 이루고 熱心으로 信佛하다가 極樂往生하였다.」『朴氏夫人傳』.  그 內容의 大槪  朴氏는 金剛山 朴處士의 愛娘이었다. 그가 漢陽 安國坊 李時白(이시백)에게 出嫁하였던데, 얼굴이 薄色이라 하여 渾家가 嘲弄하고 新郞도 또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朴氏는 北쪽에다가 避禍堂이란 집을 따로히 짓고 그 속에서 孤獨한 歲月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마는 元來 學術이 神奇하고 智謀가 深遠한지라, 하룻밤 사이에 緦父(李貴)의 朝服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三百金으로써 三萬金의 價値가 되는 龍馬를 사고, 碧玉으로 만든 硯滴까지 郞君에게 주어 壯元及第가 되게 하였다. 그 後, 郞君이 平安監司로 되어갈 제, 그는 밤사이에 허물을 벗어 버리고 훌륭한 美人으로 되어서 琴瑟이 서로 和合하게 되었다. 그 때에 胡王이 朝鮮에 神人 朴氏와 林慶業(임경업)이 있음을 무서워하여 一等刺客을 보내어 朴氏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明見萬里하는 朴氏는 道術로써 刺客을 退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胡兵이 漢陽에 侵入함에 朴氏는 道術로써 賊將을 죽였다. 龍骨大(용골대)가 그것을 알고 크게 怒하여 避禍堂을 襲擊하다가 그만 失脚하여 달아나고 말았다. 林慶業(임경업)은 南漢의 敗報를 듣고 淸兵의 回路를 扼하여 憤풀이를 하였으나, 大君과 여러 夫人은 볼모로 잡혀 瀋陽으로 가게 되었다. 그 後에 李時白(이시백)은 丞相에까지 榮進하여 夫婦間의 享樂을 다하였다.『彰善感義錄』. 春洲 金道洙(춘주 김도수)  春洲(춘주 김도수)는 英祖 때의 사람으로서 이것을 지었다는데, 十四回의 長篇에 善과 義를 中心으로 하였다.  『南興記事』. 四卷 河濱 愼後聃(하빈 신후담)河濱(하빈 신후담)은 星湖 李瀷(성호 이익)의 高弟인데, 十三歲에 『金華外篇』·『續列仙傳』을 짓고 그 後에 또 『續搜神記』·『太平遺記』·『龍王記』·『海蜃記』·『遼東遇神記』·『紅粧傳』·『南興記事』 等을 지었다.  우리의 小說에는 動物―나는 놈, 뛰는 몸을 題材 삼아 一般的 童話로 閭巷間에 流行하다가 究竟, 小說化한 것이 적지 않게 있다. 그런 動物을 說話의 根本的 思想으로 取한 것은 그 本意가 어디에 있을까? 그 本意를 究明한다면 人間自體의 日常行爲로써 勸善懲惡하는 그것보단 動物을 人格化하여 寓語法으로 應用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效能을 준다는 것이었다. 여기로부터 固有의 童話를 敷衍하여 各種의 小說을 지었나니 이른바 『장끼傳』·『콩쥐팥쥐』·『鼠同知傳』·『두껍傳』·『토끼傳』·『金송아지傳』 等이 곧 그것이다.『장끼傳』.  이것은 노래의 形式으로 된 것인데, 장끼가 까투리의 諫하는 말을 듣지 않고 차끼의 콩 한 알을 貪하다가 죽은 이야기다.『콩쥐팥쥐』.  이것은 콩쥐가 心術궂은 그 繼母와 義妹 팥쥐에게서 온갖 苦役을 겪어오다가 乃終에는 蓮塘의 冤魂으로 된 이야기다.『鼠同知傳』.  이것은 富한 서대쥐가 貧한 다람쥐를 자주 救恤하다가 도리어 背恩忘德한 다람쥐의 誣訴를 받은 이야기다.『두껍傳』.  이것은 獐先生의 宴會席에서 토끼·여우·두꺼비의 무리가 자리다툼을 하다가 乃終에는 두껍이란 놈이 年長者로 된 이야기다.『토끼傳』.  이것은 龍王이 그 딸의 心病으로 因하여 鼈主簿를 시키어 토끼의 肝을 求하던 이야기다.『金송아지傳』.  이것은 波利國 太子 如來가 처음에 송아지로 되었다가 高麗王의 딸 微妙公主와 因緣을 맺은 後, 仙果를 얻어먹고서 그 被毛와 頭角을 다 벗어버리고 마침내 波利國王으로 된 이야기다.」  括論에서도 말하였거니와 『興夫傳』·『沈淸傳』·『春香傳』은 著名한 歌劇이었다. 그것이 本히 오래 前부터 傳說로 되어 오다가 文章才子의 손을 거쳐서 小說化하고, 名唱廣大의 입을 지내어서 世上에 더 없는 絶調로 되었다.『興夫傳』.  그 內容의 大槪  「兄 놀부는 富하나 心術이 궂고, 아우 興夫는 가난하나 마음이 착하것다. 하루는 興夫가 먹을 것을 얻으려고 兄의 집에 갔다가 兄과 兄嫂에게 큰 溥待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처마의 둥이에서 제비새끼가 떨어졌다. 興夫의 夫婦는 그 제비의 다리가 부러진 것을 보고서, 五色 실로 동이어 주었다. 이듬해 봄인데 그 제비가 박씨 한 개를 물고 왔다. 그래 興夫는 그 씨를 심어 커다란 박을 얻었다. 夫婦가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박을 타니 그 속으로서 온갖 寶貨가 쏟아지면서 갑자기 큰 富者로 되게 되었다. 농부는 그 사실을 알아가지고 제비의 다리를 일부러 꺾고서, 五色 실로 동이어 보내었다. 果然 그 이듬해에 제비가 박씨를 물고 왔다. 놀부는 그 씨를 심고 열리는 박이 굳기를 기다리어 바삐 타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寶貨가 나오기는커녕 별별 잡것이 다 쏟아지어서 놀부는 猝地에 못 살게 되었다.」蒙古(몽골)에도 이와 같은 傳說이 있는데,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는 착한 處女요, 하나는 心術이 궂은 處女이며 또는 박 속에서 뱀이 나와서 심술궂은 處女를 죽였다는 그것뿐이다.『沈淸傳』  그 內容의 大槪  「黃海道 黃州郡 桃花洞에 沈鶴圭(심학규)라는 盲人이 있었다. 그의 賢妻 郭氏는 아름다운 딸 沈淸(심청)을 낳은 後, 즉시 重病을 얻어 이 世上을 버렸다. 鶴圭(심학규)는 어린 沈淸(심청)을 안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젖과 밥을 빌어 먹였다. 그렇게 열다섯 살까지 고이 길렀다. 이때부터는 沈淸(심청)이 밥을 빌어다가 아버지를 孝養하며, 餘暇만 있으면 裁縫과 孝行을 오로지 배웠다. 그러므로 絶世의 天女라는 名聲이 世上에 喧藉하여 武陵洞에 사는 張丞相의 夫人이 養女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沈淸(심청)은 盲父의 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그것을 拒絶하였다. 하루는 그 아버지가 供養米 三百石만 佛前에 提供하면 盲眼이 밝아진다는 夢運寺 主持僧의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뒤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勸善帳에 「三百石 沈鶴圭(심학규)」라고 記入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근심 중에 잠기어 있었다. 마침 그 때에 서울로서 數十名의 商賈가 十五歲의 處女를 求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그런 處女를 臨堂水에 生贄로 던지고야 船路가 安全하다는 까닭이었다. 沈淸(심청)은 商賈들에게 팔리어 供養米 三百石을 夢運寺에 부쳤다. 그리고서 約束한 그 날에 몸을 臨堂水에 던지게 되었다. 벌써 上帝는 四海龍王을 命하여 大孝 沈淸(심청)을 玉蓮花에 싸서 臨堂水 물위에 返魂케 하였다. 船人들은 大利를 얻어가지고 돌아오다가 물위에 뜬 天上蓮花를 天子에게 드리니 實은 蓮花가 아니요, 사랑스러운 處女 沈淸(심청)이었다. 天子가 즉시 皇后를 삼음에, 皇后는 盲父를 찾으려고 盲人宴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그 동안에 鶴圭(심학규)는 뺑덕의 어미라는 凶惡한 계집을 얻어 살림을 하는데, 盲人宴으로 가려는 路費까지 그 계집에게 다 빼앗겼다. 그래서 鶴圭(심학규)는 빌어먹으면서 가장 늦게 그 宴席에 참여하였다. 그 날에 沈淸(심청)은 盲人들을 또한 낱낱이 點考하다가 그 末席에 앉은 이가 자기의 아버지임을 알고서 아버지! 크게 부르짖었다. 鶴圭(심학규)는 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눈이 열리었다.」  『沈淸傳』과 비슷한 傳說은 印度의 『專童子』와 日本의 『小夜姬』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國外의 일이라, 번거히 말하려고 아니한다. 여기에서는 다만 우리 國內에 예前부터 있어 오던 傳說의 두어 가지를 들어서 沈淸(심청)의 그것과 對照하여 보기로 한다.ㄱ. 蟾石에 對한 傳說  「新羅 時節의 일이다. 新羅가 한참 全盛하던 그 時節에는 地方이 五十五里, 戶數가 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三國遺事』卷一, 辰韓條)에 達하던 그 서울에, 서울의 막다른 어느 골목 한 모퉁이에 오막살이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에는 소경 아버지 하나와 간난 딸아기 하나 모두 두 인구가 살았다. 소경의 아내는 그 딸을 낳고 重病으로 앓다가 그만 世上을 떠난 것이었다. 그래서 두 인구만 남게 되었는데, 소경은 한 손으로는 어린 딸을 품에 품어 안고, 또 한손으로는 막대를 짚고서 그 크나큰 서울의 어느 집에든지 안가는 집이 없이, 젖을 빌고 밥을 빌어, 그날그날의 목숨을 이어갔다. 그렇게 한해, 이태를 지내다나니 그 딸은 여덟 살이 넘었다. 이때부터는 딸이 밥을 빌어다가 아버지도 供養하고 저도 먹었다. 異常한 일도 있지, 하루는 아침을 먹노라니까, 생각지도 않던 두꺼비 하나가 조왕 밑의 쥐구멍으로 기어 나와서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는다. 딸은 그 먹는 것이 하도 貴해서 밥 한술을 떠 주었더니 그놈이 넙적- 넙적 다 먹고서는 구멍으로 도로 들어간다. 그 後로는 그놈이 끼니마다 참여하니 그 집에는 남모르는 食口 하나가 더 불었다. 삯바느질·삯방아로 生活하여 그렁저렁 딸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의 孝行과 才色은 欽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勸善하는 중 하나가 와서 「부처님에게 供養米 三百石을 드리면 눈먼 사람은 눈이 밝아진다.」고 말하였다. 마침 그 때에 어떤 洞里의 사람들이 열다섯 살 되는 處女를 사려고 다닌다. 그 洞里에는 神詞가 있는데, 해마다 處女 하나씩을 生贄로 祭하고야 平安히 지낸다고 한다. 딸은 그들에게 팔리고 供養米 三百石을 佛前에 보내었다. 約束한 날은 당진하였다. 소리 없는 눈물로 두꺼비의 등을 만지어 주고서 떠나는 때, 아버지는 그 딸이 어디로 삯일하러 가거니 하고 그 衣食을 이웃집에 부탁한 것도 또한 모르고 있었다. 딸은 그 洞里에 당도하여 祭官들의 引導대로 祭物牀에 들어누었다. 祭官들은 祭禮를 畢한 後, 祠門을 굳게 잠그고 다 흩어지었다. 밤은 바다같이 깊었는데, 天井위의 단골로서 우직-우직 하는 소리가 나더니, 보기만 해도 눈이 뒤집히는 큰 구렁이가 한해 한 번씩 한밥 잘 먹던 버릇으로 꼬리는 단골에 붙이고 두 가닥의 혀끝을 祭物에 점점 가까이 닿인다. 그 때에 牀밑으로서 一條의 파란 기운이 바로 구렁이의 입을 直射한다. 그러자 祭物은 情神을 잃었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祭官들은 祠門을 열고서 祭物의 有無를 살피어보는 그 前例에 依하여 그리로 들어가려 하다가 엄청난 큰 구렁이의 죽어 자빠진 것을 보고 다 뒤저참하면서 놀랐다. 자, 그러면 祭物은 어찌되었나 하고 살피어본즉 가슴에서 피가 그냥 뛰고 있다. 이로부터 딸은 다시 蘇生하고 또 두꺼비는 그의 養하던 것이요, 그 두꺼비의 毒氣에 구렁이 죽은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은 온 서울판을 휩싸고서 闕內에까지 들리었다. 王은 그의 孝行과 姿色에 感服하여 王后를 삼게 되었다.  그 동안에 아버지는 그 딸의 팔린 事情을 들어 알고서 밤낮 슬퍼하다가 갑자기 入侍하라는 王后의 命令을 받아 闕內로 들어갔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이라, 아버지! 부르는 그 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눈이 열리었다. 그 後에 두꺼비가 죽음에, 王과 王后는 그 恩義를 잊지 않기 爲하여 돌로써 두꺼비를 만들어 두었다.(慶州 古蹟博物館 蟾石의 傳說)ㄴ. 全南 玉果縣 聖德山 觀音寺의 緣起에 關한 傳說  1. 忠淸道 大興縣에 元良(홍원량)이란 盲人이 있었다. 일찍 妻를 잃고 洪莊(홍장)이란 예쁜 딸 하나를 依賴하여서 生活하였다. 하루는 元良(홍원량)이 밖에 나아갔다가 弘法寺 중 性雲(성운)을 만나서 눈이 열리고 그 밖의 어떤 일이든지 祝願하는 대로 되는 法을 들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自己의 한 家族이요 愛女이던 洪莊(홍장)을 팔아 주기로 하였다. 洪莊(홍장)은 나이 十六歲이었다. 그는 어쩔 줄을 모르고 蘇浪浦의 岸頭에서 쉬고 있는 때, 碧海에서 나타나는 中國船人들이 그 아름다운 姿態에 끌리어 사가지고 가서 皇帝에게 드리었다. 때는 晉惠帝 永康 丁亥 五月이었다. 帝는 皇后를 방금 잃고 孤寂한 눈물이 袞衣를 적실 때에 자주 새 皇后가 있다는 吉夢도 있었었다. 實狀, 이 船人들은 惠帝가 보낸 使臣이었다. 洪莊(홍장)은 새로 皇后가 된 後에 本國을 잊지 못하여 배 세 척에 觀音을 실어서 本國으로 건너 보내었다. 그 배가 漂浪하여 到着한 곳이 卽 玉果縣 聖德山 觀音寺의 基址요, 元良(홍원량)은 功德에 依하여 눈이 열리었다.[權相老(권상로) 先生의 藏本을 引用한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  이 緣起文은 雍正 七年에 지었고 이것을 쓴 白梅子(백매자)가 그런 말을 長老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緣起와 같은 이야기가 오래 前부터 傳하여 오다가 文字로써 나타나기는 雍正 七年 以後의 일이겠다. 雍正 七年은 英祖 五年(1729年)에 當하고 申在孝(신재효)가 「沈淸歌」를 불렀다는 것은 純祖 初期의 일이니[曺雲(조운)氏의 考證] 이렇게 따지고 보면 「沈淸傳」은 英·正(영조·정조) 兩代의 사이에 생기었다는 것이 아무 틀림도 없겠다.『春香傳』.  『春香傳』의 起源과 作者 및 年代는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 依하여 그 大要만을 들어두겠다.  ㄱ. 『春香傳』은 玉溪 盧槇(옥계 노전)의 事實을 小說化하였다.(『溪西野談』) 玉溪(옥계 노전)는 南原 사람인데, 中宗 十三年에 나서 宣祖 十一年에 歿하였다.(『玉溪集』) 일찍 宣川府使로 되어간 叔父를 찾아가서 退妓의 딸인 童妓와 因緣을 맺고서 서로 헤어진 일이 있었다. 그 後에 玉溪(옥계 노전)가 御史로 되어 그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畢竟에는 그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서 偕老하였다. 玉溪(옥계 노전)가 宣祖 때에 吏判에까지 昇進하여 그 名望이 一世에 높던 人物인즉 그만큼 그 實話가 그의 故鄕인 南原地方에 美談으로 되어 頌傳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頌傳하는 동안에 針小棒大로 原型보다 훨씬 小說化하였을 것이라 하여 金台俊(김태준)氏는 事實의 起源과 主人公의 年代를 指明하였다. 南原에 梁進士란 이가 있어 科擧에 及第한 後, 倡優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서 遊街하였다. 그런데 집이 赤貧하여 그 費用을 辦償할 수 없으므로 노래를 지어 倡優와 함께 불렀다. 이것이 『春香傳』의 古本이오. 純祖 十四年頃(1814年)에 高敞人 申在孝[신재효, 一名은 百源(신백원)]란 이가 才藝도 많고 歌唱에도 善하므로 그 古本을 敷衍하고 潤色하며 今俗의 「春香歌」로 되었다 하여 金台俊(김태준)氏는 作者와 由來를 指明하였다.  그리고 본다면 『春香傳』의 古本은 肅宗 以後, 純祖 以前에 되어진 것이겠다.  丹齋 申埰浩(단재 신채호)의 말에 依하면 「『春香傳』는 高句麗의 韓珠(한주)를 演述한 것이요, 놀부傳은 新羅의 房色을 演述한 것이요, 토끼傳은 高句麗의 龜兎說을 演述한 것이라(由來 朝鮮의 文字와 詩歌의 變遷) 하니 龜兎說은 勿論 그렇거니와, 그 밖의 것은 어떠한 考據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 充分한 考證을 얻을 때까지 이만큼 말하여 둔다.  傳說에 依하면 『春香傳』에 對한 申在孝(신재효)本이 出現하던 그 同時에 金海人 裵此山(배차산)本이 또한 있었다는데, 申(신재효)本보다 裵(배차산)本이 오히려 長點이 많아서 廣大의 가운데에서 그것이 秘傳品으로 되다가 湮沒되고 말았다고 한다.『春香傳』의 內容  아름다운 山과 맑아한 물이 左右짝으로 된 거기에다가 무르녹는 봄빛으로 웃짐을 친 廣寒樓의 風景 속에서 才子와 佳人이 짝을 묶게 된 것도 또한 奇緣이었다. 才子는 廣寒樓에서 物色을 玩賞하는 本官使道 子弟 李夢龍(이몽룡)이요, 佳人은 廣寒樓의 맞은편 垂楊 사이에서 추천을 戲弄하는 退妓 月梅(월매)의 딸 成春香(성춘향)이었다. 그 두 사람이 서로 만난 것은 그야말로 三生緣分이었다. 사랑의 情은 날로 깊어가고 굳은 盟約은 變할 수 없었다. 그런데 夢龍(이몽룡)은 그 아버지가 同副承旨로 榮轉함에,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서 上京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이별할 날이 닥치어 왔다. 石鏡과 玉指環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은 어느 때에나 잊지 마자는 言約이요, 流浪眼看流淚眼, 斷腸人送斷腸人은 送別하던 그 當時의 光景이었다. 그런 後, 夢龍(이몽룡)은 文科에 壯元及第하고 湖南 暗行御史로 南原의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그 동안 南原에는 色이면 精神 잃는 卞府使란 者가 새로 到任하여 春香(성춘향)의 才色이 俱美하다는 말을 듣고 卽時, 불러다가 수청 들라고 督促하였다. 春香(성춘향)은 죽기를 決心하고 松竹같은 절개를 主張하면서  「禮儀는 士大夫의 집에만 있고 娼女의 賤家에는 없어야 옳으냐?」고 痛論하였다.  卞府使는 그 말에 성이 나서 春香(성춘향)을 獄에 던지었다. 그리하여 春香(성춘향)의 앞에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이튿날 卞부사는 生日宴을 열었다. 벌써 春香(성춘향)의 事情을 探知한 李御史(이몽롱)는 乞人으로 假裝하고 그 잔치에 대들어「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라는  詩로써 四筵을 驚動시키었다. 잔치가 끝나자, 부사는 春香(성춘향)의 死刑을 執行하라는 命令을 내렸다. 그와 함께 暗行御史 出道라는 소리가 벼락 치듯 일어났다. 잔치에 참여하였던 各邑 守令들은 남 먼저 다 달아 버리고 부사는 封庫罷職을 當하고 刑場으로 나가던 春香(성춘향)는 多年만에 그리던 郎君을 만나서 一場의 喜劇이 興行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가서 一生의 榮光을 누리었다.  括論에서도 『三說記』와 『熱河日記』는 小說의 叢書란 것을 말하였다. 그렇다해서 『熱河日記』의 全部를 小說로 본다는 것은 아니다. 『三說記』에는 六篇의 小說이 있고, 『熱河日記』에는 九種의 小說이 內包되었다.『三說記』. 三卷ㄱ. 『三士誤入黃泉記』  洛陽 東村에 사는 세 선비가 白岳山 놀음을 하다가 閻羅大王에게 잡혀간 일이 있었다. 崔判官은 生死置簿帳을 考覽하고서 十年後에야 잡아올 사람이란, 報告를 閻王에게 올리었다. 그래 閻王은 그 魂을 어떤 宰相家에 點指하기로 하였다. 그 때에 세 선비는 王에게 號訴하여 그 所願을 말하였다. 그 中에서 한 선비는 兵曹判書·驃騎將軍을 願하고, 한 선비는 壯元及第로 八道御史·大司成 되기를 願하니 王이 그 두 사람을 極樂淨士로 보내었다. 마지막의 한 선비는 人間生活의 모든 幸福을 願하니 王이 怒해서 그런 곳이 있으면 나도 閻王의 職을 던지고 그리로 가겠다」라고 하면서 꾸짖었다.ㄴ. 『五虎大將記』  그 전에 武勇으로 名望이 높은 大將 한 분이 있었는데, 左右奸人들은 그를 五虎大將에 比하였다. 그 部下에 直言하는 砲手 하나는 그 말을 極히 反對하여 「將軍의 무슨 行蹟이 足히 關羽(관우)·張飛(장비)·趙雲(조운)·馬超(마초)·黃忠(황충)에 比肩할 수 있느냐?」고 肉迫하였다. 大將은 그제야 阿諛하는 部下들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直言하는 砲手를 擧薦하여 大將의 地位를 讓與하고 奸人들을 處罰하였다.(이上은 第一卷)ㄷ. 『楚伯王記』  그전에 豪氣있는 선비 하나가 四方에 流浪하다가 虞美人(우미인)의 廟宇에 들어갔다. 美人(우미인)의 곁에 楚伯王(초백왕 항우)이 나서면서 「家宅侵入」이라고 꾸짖는다. 그 선비가 대답하되 拔山蓋世의 氣力으로 天下를 다투던 當年 英雄이 어찌 數間草屋을 다투느냐?고 抵抗하니 伯王(초백왕 항우)이 부끄러워서 달아나 버렸다.ㄹ. 『三子遠征記』  松都 서울 시절에 한 道士가 弟子 셋을 가르치고 있었던데 하루는 弟子들의 所願을 물었다. 그러니 한 아이는 「少年登科 翰林學士로 平安·全羅監司」 되기를 願하고, 그 다음 아이는 「名山勝地에 집을 짓고, 花朝月夕에 杜牧之(두목)의 生活로 보내기를」 願하고, 마지막 아이는 「一生에 巨富로 지내기를」 願하였다. 道士가 그 말을 다 듣고 장차 너희들의 所願대로 될 터이니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그 後에 세 사람이 果然, 그 所願대로 되었는데, 平安監司된 사람은 神仙되어 다니는 學友를 三十年만에 서로 만났다. 그와 半日 동안 閑談하였더니 그 半日은 人間 八十年의 긴 光陰인줄 몰랐었다. 집으로 돌아온즉 아들도 白髮이요, 四方에 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 王에게 上疏하니 王이 奇異히 여기사 다시 平安監司로 보내었다.(以上은 第二卷)ㅁ. 「黃州牧使戒」  예전 東村 梨花井에 사는 尹賢壽(윤현수)란 이가 龍弼(윤용필)·寶弼(윤보필)·貴弼(윤귀필)이란 세 아들을 두었었는데, 그 中에 龍弼(윤용필)은 거만하고, 寶弼(윤보필)은 怜悧하나 동무의 忠告를 듣지 않고, 貴弼(윤귀필)은 뒤숭숭한 도령님이었다. 黃州牧使인 賢壽(윤현수)은 警戒하여 말하되 龍弼(윤용필)·寶弼(윤보필)은 將來에 失敗하고 貴弼(윤귀필)은 成功하리라 하였다. 그 後에 그 말이 果然 符驗하였다.ㅂ. 「老處女歌」  옛날 今身에 갖은 病으로 因하여 마흔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간 處女가 있어서 밤낮 悲憤한 노래만 吟詠하였다. 그러다가 그 近處에 있는 金道令에 結婚한 後에는 먹은 귀가 밝아지고 病身이던 발을 能히 쓰게 되었다. 成婚한지 十朔만에 玉童子를 낳고 다음 나는 아들까지 다 ●●●●다.(以上은 第三卷)小說. 燕巖 朴趾源(연암 박지원)  ●●● 나서 六十九歲(1737-1805年) ●●● 때에 妻叔 李校理의 주는 信陵●●이 閉門 三年의 동안에 諸子百家를 다 涉獵하였다. 四十四歲에 布衣學者로서 從兄 明源(박명원, 入燕正使)을 따라 北京으로부터 熱河에까지 갔었다. 그 동안에 보고 들은 것을 記錄한 것이 卽 『熱河日記』 二十六卷이니 實로 先生의 得意作이었다. 그 속에는 磈礧不平의 氣가 充滿되고 또는 當塗貴人 및 欺世僞學의 流를 譏斥한 것이 더욱 可觀이다.『許生傳』  許生은 墨積洞에 사는데, 十年을 爲限하고 讀書하다가 七年만에 妻의 꾸중을 받고서 책을 덮어 놓고 卞富豪의 집에 가서 萬金을 빌렸다. 그 돈으로써 처음에는 果類를 榷하고 다음에는 말초리를 都沽하여 三十萬金을 얻었다. 또 그 다음에는 邊山의 群盜를 거느리고 島中에 들어가서 農作한 餘穀을 長崎(나가사키)에 往糶하여 銀 百萬의 利를 보았다. 그러나 銀 百萬은 朝鮮이란 작은 나라에 容할 바 아니라 하여 五十萬은 바다에 던지고 또는 貧民을 찾아다니면서 救濟하고 그 나머지 十萬은 卞氏에게 올리었다. 卞氏는 什一의 利만 받으려 하였으나 그는 소매를 떨치고 간다. 그래 卞氏가 그 뒤를 따라간즉 南山 밑 오막살이로 들어간다. 老嫗에게 물어서 姓이 許氏인 것을 안것 뿐이었다. 그 때는 朝廷에 北征의 冤議가 있어서 人材를 傍求하던 때이었다. 李政丞 浣(이완)이 卞氏의 말을 듣고 許生을 찾아갔었는데, 許生은 時事三難을 論하여 可能性의 有無를 물으니 李政丞(이완)은 대답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 이튿날에 李政丞(이완)이 다시 찾아가니 許生은 간 곳이 없었다.  時事三難은 첫째로 臥龍(제갈량) 先生을 擧薦할 터이니 임금으로 하여금 三顧草廬시킬 것, 둘째는 理髮胡服하고 子弟를 中國에 留學케 하며, 商賈를 江南에 보내어 中原의 虛實을 搜探하고 中原의 英雄을 交結하여 丙亂의 羞恥를 갚을 것, 셋째는 南蠻椎結의 상투와 文弱의 象徵인 廣袖白衣를 廢止할 것이다.『虎叱文』  하루는 山君으로 이름 높은 大虎가 궁금한 생각이 나서 人肉을 가리는 판이었다. 醫는 「疑」라, 자세치 않은 것으로써 사람을 죽이며, 巫는 「誣」라, 惑世誣民으로써 職業을 삼으니, 그것은 다 不義의 腥肉이며, 罪惡의 葷肉이라, 잡아먹을 것이 없다. 그 다음에는 儒者의 肉을 먹을 討論이 나서게 되었다. 그 村中에는 學文과 道德이 높은 北郭 先生(북곽선생)이 있는데 그이는 일찍 天子의 表彰도 받은 분이었다. 또 그 곁에는 東里子(동리자)라는 少年寡婦가 守節하고 있어서 天子의 表彰을 또한 받았다. 그러나 그 寡婦는 각각 姓 다른 여섯 아들을 두었다. 北郭 先生(북곽선생)이 東里子(동리자)와 私通하다가 그 다섯 아들에게 쫓기어 거꾸로 걸어서 도망하는 中이었다. 그렇게 달아나다가 選肉會議를 열고 있는 大虎를 만나서 「寬大하신 陛下여! 살리어 주옵소서」하고 哀乞하였다. 범은 當場에 北郭 先生(북곽선생)을 꾸짖는 말이 「儒는 諛라, 平時에는 범을 가지가지로 嘲罵하다가 形便이 急해지니까 아첨하여 목숨을 求하며, 平時에는 人間에 있어서 모든 暴惡한 일을 敢行하고도 罪名을 전혀 범에게 돌리느냐?」고 하였다. 그리자 해가 붉으스레히 뜨니 범은 어디로인지 가버리고 말았다.『兩班傳』.  이것은 어떤 賤富가 어떤 가난한 兩班의 犯한 郡稅千石을 代償하여 兩班權을 사던 이야기다.『閔翁傳』.  이것은 閔翁의 逸話奇辯을 點綴하면서 間間히 諧謔과 傳說을 더하여 墮落한 社會의 一生을 그린 것이다.『馬駔傳』.  이것은 世俗의 虛僞一面을 論하여 交友의 難을 말한 것이다.『穢德傳』.  이것은 穢德의 貧窮에 對하여 窮하면 똥도 먹지만 입은 매우 깨끗하다 하여 그 純眞한 天性과 不遇한 環境을 깊이 同情한 것이다.『金神仙傳』.  이것은 不遇한 金弘基(김홍기)의 굶주림이 곧 神仙辟穀이라는 말이다.『廣文傳』.  이것은 乞人 廣文(광문)의 性行을 말한 것이다.『虞裳傳』.  이것은 博學能詩한 虞裳 李彦瑱(이언진)의 日本行에 經過한 이야기다.  英·正(영조·정조) 兩代의 間에는 諺文小說이 가장 많이 出現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林慶業傳』·『朴泰輔傳』과 같이 男子를 中心한 小說은 그리 흔치 않고, 女子를 中心한 小說이 가장 多數를 차지하였다. 거기에 對하여 한번 생각해 볼 必要가 없지 아니하다. 말할진대 諺文은 內書라 하여 女子들의 專有物로 다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되어진 作品이면 女子들이 반드시 愛讀하였다. 그 까닭에 小說作家의 눈은 그리로 돌리면서 女子로써 命題한 作品임을 많이 내어 놓았나니 女子의 性行을 矯正함에 적지 않은 效能을 주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沈淸傳』도 그러하고, 지금 말하려는 『申金夫婦傳』·『薔花紅蓮傳』·『玉娘子傳』·『淑英娘子傳』·『玉丹春傳』도 또한 그러하다.『申金夫婦傳』 李德懋(이덕무)  이것은 年晩한 金道令과 申處女가 朝家의 特典을 입어서 成婚한 事實이다.『薔花紅蓮傳』.  이것은 鐵山 裵座首의 두 딸 장화·홍련이 繼母 許氏의 凶險한 手段에서 非命의 冤魂이 되었다가 府使 鄭東祐(정동우)에게 哀訴하여 冤怨을 갚은 事實이다.『玉娘子傳』.  이것은 永興 金座首의 딸 娘子가 殺人罪로 死刑宣告까지 받은 獄中의 郞君 李時業(이시업)을 내어놓고 그 代身에 갇히었다가 貞烈夫人으로 된 事實이다.『淑英娘子傳』.  이것은 天上仙女 淑英(숙영)娘子가 慶尙道 安東 白仙(백선)君과 奇緣을 맺은 後, 失寵을 원망하던 侍婢 梅月(매월)에게 暗殺을 當하였다가 壯元及第한 仙(백선)君이 돌아오자, 다시 살아나서 榮華를 누리던 事實이다.『玉丹春傳』.  이것은 平壤妓 玉丹春(옥단춘)에게 知人鑑이 있다는 것이다.   純祖로부터 哲宗에 이르는 동안에는 小說의 作風이 아주 沈滯狀態에 돌아가고 말았다. 말한다면 英·正(영조·정조)時代에는 淊天의 勢로 高潮되었던 그것이 왜 이렇게 日落千丈의 느낌을 우리에게 주게 되는가? 벌써 正祖 末年에부터 小說作家에게 큰 打擊을 준 일이 있었다. 이를테면 燕巖(연암 박지원)의 族孫 朴南壽(박남수)가 『熱河日記』의 朗讀을 듣고서  「先生이 文章에 아무리 能하나 稗官雜書를 좋아하니 무엇하랴?」하고 그 原稿를 불에 태우려 하였으며,  正祖 十五年에 내린 敎旨에  「近來 俗習이 다 學을 바라고 新書를 좋아하는 趨向이 있는지라. 나는 小說에 있어는 한 번도 펼쳐보지 아니하며, 內藏雜書를 다 버렸노라」하였으며,  純祖 八年에 있은 南公轍(남공철)의 狀啓에  「稗官雜書는 一切嚴禁하고 아울러 經史까지 購入함을 아직 말게 하라」고 하였다.  이것을 綜合하여 본다면 그 本意가 燕京으로부터의 邪書(天主敎 書類)購入하는 그것에만 있는 듯하나, 小說界에 미친 影響도 實로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이 時代의 小說로는 二三種에 지나지 못하나니 『天君本紀』·『晩香傳』·『後唐遺事』가 곧 그것이다.『天君本紀』.(一名은 心史) 鄭琦和(정기화)  鄭琦和(정기화)는 純祖 때의 사람인데, 本紀의 內容을 본다면 그 構思와 筆致가 菊堂(국당 정태제)의 『天君衍義』와 恰似한 것이다.『晩香傳』.  晩香(김만향)은 咸興 退妓의 딸로서 그 몸이 아직 童妓의 名簿에 있는 때이었다. 監司의 아들 冊房도령님 黃直綱(황직강)이 晩香(김만향)의 才色에 醉하여 「一自結緣, 待以正妻, 生則同居, 死則同穴」이라는 誓約文까지 쓰고서 彼此間 따뜻한 情을 通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職年의 苽滿으로 上京할 날이 當面하였다. 「兩班의 집에 妓生을 正室로 한다는 것이 웬 말이냐?」의 아버지 호통에 다시 말붙임도 못하여 보고 直綱(황직강)은 그 뒤를 따라서 간 것이었다. 새로 도임한 監司의 冊房은 有名한 色魔이었다. 晩香(김만향)을 불러 수청 들라고 强迫하였다. 晩香(김만향)은 죽을지언정 貞操를 빼앗기지 않기로 決心함에, 冊房은 그를 夾室에 가둬두고 威嚇과 勸誘로 밤낮 졸라대는 판이었다.  直綱(황직강)은 上京한 지 며칠이 안 되어 아버지의 强壓的 命令下에서 장가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본 집으로 돌아오던 길인데, 馬夫더러 暫間 서서 기다리라 하고, 自己는 三角山의 後麓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줄달음하여 咸興에까지 向하였다. 晩香(김만향)의 집에 찾아갔다가 그 어미에게 갖은 薄待를 받았다. 눈이 막 쏟아져 오는 밤에 쫓기어나서 그 前, 부리던 由吏를 찾아보고, 서러운 事情을 다 吐하였다. 그 이튿날 새벽인데, 直綱(황직강)은 由吏의 시키는대로 掃除夫의 假裝을 하고 冊房의 門庭에 들어가서 눈을 쓸었다. 晚香(김만향)은 귀에 익은 기침소리에 놀라서 미닫이를 열고 보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과 눈이 한참이나 서로 마주 서고 있었다. 그러다가 直綱(황직강)은 晩香(김만향)의 눈짓을 따라서 도로 由吏의 집으로 간 것이었다.  그 날 밤이었다. 晩香(김만향)은 아버지의 忌日祭라는 口實로서 冊房의 許可를 겨우 얻어 가지고 집으로 나오게 되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는 三十六計에 달음질이 上策이란 것이다. 晩香(김만향)은 成田江의 얼음판에서 물구멍을 찾아 신 한 켤레를 놓고 들어갔던 발자국을 뒷걸음질로 감쪽같이 밟으면서 나왔다. 그렇게 魚腹의 魂이 되었다는 것을 表示하고 두 사람은 黃草嶺을 껑정 뛰어 넘어서 目的地인 平壤城內에까지 無事히 다다랐다. 거기에 貰房 한 칸을 얻어 가지고서 晩香(김만향)은 刺繡와 裁縫으로 生活만 維持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써 가끔 冊子를 바꾸다가 郞君에게 올리었다. 그렇게 書籍이 생기는 대로 直綱(황직강)은 熱心으로 밤낮 讀習하여 한 해, 두 해를 지났었다. 그런데 直綱(황직강)은 本宅의 消息은 알 수 없었다. 또는 알려고도 아니하였다. 그적에 本宅에서는 馬夫의 여쭙는 말을 듣고서 三角山의 後麓을 죄죄 뒤집어 보아도 直綱(황직강)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仁王山 호랑이란 놈이 삼키었거니 하고 假形을 만들어 棺에 넣어서 葬事를 지내었다. 그리고 그 緣由를 祠堂에 告하는 同時에 임금에게까지 上奏하였다. 直綱(황직강)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느날 直綱(황직강)은 科擧보려 上京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三試官 中의 한 사람이었다. 글을 뽑아가지고 御前에 들어가서 먼저 壯元及第의 글封를 떼고서 四祖와 姓名을 보니까, 分明히 自己의 아들 黃直綱(황직강)이었다. 이에 伏奏하되 「直綱(황직강)은 臣의 아들이온데 그는 君父를 속인 罪가 莫重하오니 마땅히 罷科하여지이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는 이미 죽은 줄 알았던 直綱(황직강)이 이제껏 살아 있는 것이 너무도 奇異하여 直綱(황직강)을 곧 불러서 물어 보았다. 事實의 顚末을 들은즉 晩香(김만향)의 節操와 德行이 特히 갸륵하다 하여 直綱(황직강)에게 紅牌를 내어주고 晩香(김만향)으로 正室을 삼으라 하였다. 따라서 「女中貞烈 金晩香(김만향)」이란 旌門을 내려 그것을 咸興에 세우게 하였다. 그 後에 두 夫婦는 갖은 富貴를 누리면서 榮光스럽게 이 世上을 마쳤다.『後唐遺事』. 錦城 朴奉錫(금성 박봉석)  錦城(금성 박봉석)은 哲宗 때의 사람인데, 十八歲부터 才子란 名聲이 喧藉하였었다. 이 遺事는 五季의 때, 後唐의 遺事를 演義化한 四卷, 八十八回의 巨作이다.ㄹ. 第四期의 小說  高宗의 卽位 後, 近四十年까지에는 小說의 作家가 한 사람도 없은 듯하다. 그 동안에 小說의 題材로 取用할 만한 大事變이 한두 번만 있지 않았다. 말한다면 外國과의 關係로는 丙寅(병인양요 1866年)·辛未(신미양요 1871年)의 洋亂과 日淸戰爭(청일전쟁 1894年)이 있었고, 國內의 情勢로는 壬午(1882年)軍亂·甲申(1884年)政變·甲午(1894年)東學亂이 있었다. 그러나 多種多樣의 그 事實을 描寫한 小說은 나온 것이 한 篇도 없었다. 그러다가 小說이란 새 作品이 비로소 나오기는 「是日夜 放聲大哭」이란 韋菴 張志淵(위암 장지연)의 痛告가 『皇城新聞』에 실린 그 後이었다. 被保護條約(을사늑약 1905年)에 五賊大臣이 調印한 그 날 밤(을사늑약 1905年)에 이 哭聲이 全國을 驚動시키었나니 이것은 國權喪失이란 哭聲이요, 그 條約은 將來合倂의 初步이었다. 이렇게 國亡의 地頭에 立脚한 그 때에야 丹齋 申埰浩(단재 신채호)의 作, 『乙支文德傳』·『李舜臣傳』·『崔都統傳』·『夢見諸葛亮』 等이 連出하였고, 또는 『伊太利(이탈리아)三傑傳』, 『葛蘇士(헤수스)傳』 等 譯本이 나타났었다. 이것을 時勢의 必然으로 보아야 할까? 그 當時에는 國權恢復에 熱中하였으며, 그런 偉大한 人物을 憧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밖에 『金山寺夢遊錄』과 『弄球室主人』 安國善(안국선)의 『禽獸會議錄』, 六堂 崔南善(육당 최남선)의 『洪景來實記』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 舊小說體에 屬한 것이요, 西洋風의 新體小說 또는 菊初 李人稙(국초 이인직)의 『雉岳山』과 春園 李光洙(춘원 이광수)의 『無情』이 처음 인 듯하고, 新聞에 小說欄을 두기는 『萬歲報』가 처음인 듯하다. 그 中에서 文體를 評한다면 丹齋(단재 신채호)의 文은 長槍大劍의 將軍과 같이, 雄毅한 風이 있으니 그러므로 煽動에 能하며, 春園(춘원 이광수)의 文은 淸歌妙舞의 美人과 같이, 纖巧의 態가 있나니 그러므로 描寫에 能하다.3. 演戲  우리가 아는바 李朝 時代에 歌曲 및 小說의 作家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그들이 演戲에 對하여는 손을 대고 건드려 볼 생각도 둔 것 같지 않다. 實狀, 學者와 文士가 덕놀음이나, 탈놀음을 꾸민다면 世上에서 容納을 받지 못할 羞恥거리로 될 것이다. 이러한 關係에서 어떤 사람은 劇作家의 素質이 있어 가지고도 劇本의 按出에는 生心을 못하였을지니 이 時代의 事情은 그렇게 寒心하였다. 廣大·蕉蘭伊의 놀음과 같은, 그런 演戲는 물을 것도 없는 일이요, 眞正한 意味의 劇으로는 비록 적기는 하나 「東廂記」와 「滿江紅」을 指摘하여야 되겠다.「東廂記」. 汶陽山人(문양산인)  이것은 金道令과 申處女의 成婚을 題材로 하여 꾸며낸 情劇이었다. 道令 金禧集(김희집)은 二十八歲, 處女 申德彬(신덕빈)의 딸은 二十一歲[李德懋(이덕무)의 『雅亭集』], 그때의 國定婚法으로서는 매우 晩婚이라고 볼만한 老總角, 老處女의 結婚이 그나마 朝家의 盛德에 依한 것이다.  正祖 十五年 二月 봄의 일이었다. 그때에 京城內 士庶의 貧窮한 子女가 適當한 時期에 婚姻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正祖가 그것을 憫憐히 여기고 特히 國命을 내려, 그 宴費補助로 金五百, 布二段씩을 주어 一般에게 婚姻을 勸하니 그때, 結婚者의 數가 百五十名에 이르렀다. 그러나 金道令(김희집)과 申處女만은 여러 가지의 事情으로 因하여 그 좋은 特典에 參與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同年 六月에 正祖가 그 두 사람을 勸하여 約婚시키고 戶判 趙鼎鎭(조정진)과 宣惠堂上 李秉模(이병모)에게 分付하여 서로 雙方의 父母처럼 되어 下賜한 宴費로써 慶華스럽게 婚禮式을 맞치었다. 그 後에 國命을 받아서 이 空前絶後의 奇事佳傳을 記錄한 것이 李德懋(이덕무)의 「申金夫婦傳」이요, 또는 塡詞一日, 讎校一日, 謄校一日 그렇게 三日의 閑을 가지고서 劇을 만든 것이 곧 汶陽山人(문양산인)의 「東廂記」란 것이다.「滿江紅」  이것은 李鍾麟(이종린)의 作인데 그 內容을 얻어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時期에 劇場 비슷한 團成社·光武臺란 것이 京城 內에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朴春載(박춘재)·宋萬甲(송만갑) 等의 名唱이 흔히 出演한 모양이다.4. 漢文學  우리가 漢文學이란 어떤 것이냐를 考究하자면, 敎가 무엇이냐를 알아야 한다. 또는 儒敎가 封建制에 어떻게 有利하였다는 것까지도 알아야 된다. 儒敎 그 本質은 封建制의 擁護物로 되어진 것이다. 從來의 封建的 魔王이 一體로 그것을 適用한 것은 그런 見解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李朝의 封建制는 가장 發達된 封建制의 國家이었다. 그 發達은 勝朝에서처럼 佛敎를 依賴한 것이 아니요, 純全히 儒敎를 根據하여서 된 것이다. 封建的 國家는 本히 農民을 壓迫하는 機具로 된 것임에, 對內政策에 있어는 구태여 말하려고 아니한다. 그러나 對外政策에 關해서는 그저 黙過할 수가 없다. 外國은 可히 親近할지언정 信賴치는 못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儒敎의 李朝는 明國을 絶對로 信賴하였다. 말한다면 「大明天子, 賜國號曰 朝鮮이라」를 큰 榮光으로 하여 幼年 敎科用의 『童蒙先習』에다가 記入하였으며, 또는 明國이 亡한 後에도 大報壇을 쌓고 崇禎年號를 그냥 使用하였던 것이다. 儒敎人物은 果然, 沒人性한 人物이었다. 그따위의 人物에게 自存自立의 精神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을 것도 없는 일이다. 만일 李朝 五百年間에 그런 精神이 있는 사람을 헨다면 몇 사람이나 될까?  첫째로는 宣祖 때의 사람, 白湖 林悌(임제)를 헤야 할지니 그는 臨終時에 아들을 불러 놓고서 이렇게 말하였다.「四海의 各 나라에 皇帝로 일컬으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예로부터 그러지 못하였다. 이런 더러운 나라에 나서 죽는 것을 어찌 아까워하랴? 너희는 내가 죽은 뒤에 울지 마라」고 하였다.(『星湖僿說類選』)  둘째로는 英祖 때의 사람, 正言 金若行(김약행)을 헤야 할지니 그는 나라에 이렇게 疏請하였다.  「지금 中原에 帝統이 없으니 本朝에서 마땅히 帝號를 稱하고서 天子의 禮樂을 쓰자」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의 말이 비록 말로나마 그렇게 悲憤慷慨를 吐한 것이 얼마만한 快絶壯絶의 일이냐? 앉은 놈은 무덤 같고, 누운 놈은 주검 같은 그 人叢의 속에서 이런 不羈獨立의 산 사람이 나온 것도 奇異하지 아님은 아니었다.  大體, 儒敎는 異己者를 排擠하는 데에는 能한지라, 그래서 서로의 물고 뜯고 죽이고 하는 士禍와 黨爭을 釀成하였다. 儒敎는 聖學만을 急務로 하여 武備를 輕視하는 데에는 能한지라. 그래서 全國의 經濟를 거의 衰退시키는 壬辰亂(임진왜란 1592)·丙子亂(병자호란 1636)을 招致하였다. 그러면서도 儒敎文學은 그 前에 보지 못하던 繁榮에 躍進하여 著作物이 많이 出現된 것만은 實로 可觀이었다. 어떤 記錄에 依하여 著作書類의 統計를 본다면 그 數字는 꼭 正確한지는 모르지마는, 그래도 相當한 考據에서 나온 것으로 肯定하면서 아래와 같이 그 數字를 보인다.類別    種別農學類    3種醫學類   15種語學類   11種字書類   19種兵學類   15種圮誌類   36種象緯類   14種故實類   59種文章類   40種典章類   47種儒家類   249種官撰類   196種御製類   107種史記類    17種  이렇게 書類로는 十四, 種目으로는 八百四十八에 達한 것은 前代에 比하여 實로 놀랄만한 數字이었다. 그 數字의 가운데에는 漢文學이 어느 程度에까지 繁榮되었다는 것이 다 包含되고 있다.  그러나 高宗 末年에 가서는 아주 崩壞되고야 말 封建制, 그와 運命을 함께 할 漢文學은 一時的 繁榮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替代할 새 文學은 벌써 『正音(훈민정음)』製定의 當時에 脴胎하여 壬辰亂(임진왜란, 1592)의 直後에는 歌曲·小說의 두 方面에서 큰 旺氣를 漸次 發揚하였다. 이것은 다만 物盛則衰의 定理로써 解明할 것이 아니요, 마땅히 新陳代謝의 公例로써 解明하여야 된다.一. 散文  李朝 時代의 古今의 文을 蒐集編纂한 것이 三種이 있는데, 그것을 提示한다면 이러하다.『東文選』. 徐居正(서거정)  徐居正(서거정)이 新羅로부터 李朝까지의 詩文을 抄出하여 一部를 만들고 그 이름을 『東文選』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東方文章의 炳然可觀할 것이 많다는 成宗의 命을 받아서 撰한 것이다.  「東文粹」. 金宗直(김종직)  「大東文粹」. 張志淵(장지연)  그런데 抒情文에 屬한 漢文小說은 위에서 이미 論擧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敍事文·議論文·儀式文·騈體文에 屬한 文學的 作品을 例示하겠다.ㄱ. 敍事文  敍事文에는軍記類·史傳類·談話類·諧謔類·隨筆類의 다섯 가지로 區分하여 말하려고 한다.1. 軍記類  여기에는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에 關한 것과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에 關한 것이 있는데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에 關한 것으로는 柳成龍(유성룡)의 『懲毖錄』, 釋南鵬(석남붕)의 『奮忠紆難錄』, 金良器(김양기)의 『少爲浦倡義錄』, 李萬能(이만능)의 『唐山義烈錄』, 鄭琢(정탁)의 『龍灣見聞錄』.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에 關한 것으로는 「丙子錄」·「丙子湖南倡義錄」·「南漢日記」·「江都日記」.2. 史傳類『東國史略』 二卷 權近(권근)·李詹(이첨) 等의 共撰『朝鮮史略』 十二卷 權近(권근)『高麗史』 一百三十卷 鄭麟趾(정인지)『朝鮮史略』 六卷 申叔舟(신숙주)『海東諸國記』 申叔舟(신숙주)『東國通鑑』 五十六卷 徐居正(서거정)『東國纂要』 八卷 尹吳雲(윤오운)『東史補編』 九卷 申翌聖(신익성)『東史補遺』 四卷 趙有道(조유도)『麗書』 七十卷 崔某『東史提綱』 洪汝河(홍여하)『麗史提綱』 十二卷 兪棨(유계)『東史會綱』 十三卷 林象德(임상덕)『東國文獻備考』 二百五十卷 英祖時『東史綱目』 二十二卷 安鼎福(안정복)『海東繹史』 六卷 韓致奫(한치윤) 光文會版『燃藜室記述』 六卷 李肯翊(이긍익) 光文會版『歷史輯略』 二卷 金澤榮(김택영)『東國史略』 二卷 玄采(현채)3. 談話類  李陸(이륙)의 『靑坡劇談』, 成俔(성현)의 『慵齋叢談』, 晉山 姜希孟(진산 강희맹) 『村談解頤』, 徐居正(서거정)의 『太平閑話』, 南孝溫(남효온) 『秋江冷話』, 曺偉(조위)의 『梅溪叢話』, 適菴 曺伸(적암 조신)의 『謏閒瑣錄』, 柳夢寅(유몽인)의 『於于野談』, 李命源(이명원)의 『東野彙輯』, 李羲準(이희준)의 『溪西野談』.4. 諧謔類  宋寅(송인)의 『古今笑叢』, 醉隱 宋世琳(취은 송세림)의 『禦眠盾』, 雙泉 成汝學(쌍천 성여학)의 『續禦眠盾』, 作者未詳의 『靑邱笑叢』.5. 隨筆類『大東韻府群玉』. 二十卷 權文海(권문해)  이것은 元의 陰時夫(음시부) 著 『韻府群書』를 依倣한 것인데, 檀君으로부터 李朝 宣祖까지의 數千年間 事實을 韻字로 分類하여 編述한 一種의 辭書이었다. 本書 編撰에 引用한 書籍으로 말하면 朝鮮의 것이 一百七十五種, 中國의 것이 十五種이며, 그 分類法은 地理· 國號· 姓氏·人名·孝子·烈女·守令·仙名·木名·花名·禽名 等 十一個의 種目으로 하고 거기에 各히 說明을 내리었다.『芝峰類說』. 二十卷 李睟光(이수광)  本書는 그 全卷을 天文·時令·災異·地理·諸國·君道·兵政·官職·儒道·經書·文字·文章·人物·性行·身形·言語·人事·雜事·技藝·外道·宮堂·服用·食物·卉木·禽蟲 等 項目으로 나누어 合計 三千四百三十五條로 編述하였다.『類苑叢寶』. 四十七卷 金堉(김육)  本書는 著者가 兵火로 因하여 모든 文獻의 燒滅됨을 慨歎하여 本國 또는 中國의 書籍을 參考로 하고서 編述한 것이다. 全篇을 天道·天時·地道·帝王·官職·吏部·戶部·禮部·刑部·兵部·工部·人倫·人道·人事·文學·筆墨·璽印·珍寶·布帛·器用·飮食·冠服·米穀·草木·鳥獸·蟲魚·四夷·鬼神 等 項目으로 나누었다.『潘溪隨錄』. 二十六卷 柳馨遠(유형원)  이것은 法制書類로 볼 수 있는데, 全篇을 田制·田制後錄·田制考說·田制後錄考說·敎選之制·敎選考說·任官之制·任官考說·職官之制·職官考說·祿制·祿制考說·兵制·兵制考說·兵制後錄·兵制後錄考說·續篇 等으로 나누고 이에 關한 沿革을 各 方面으로 敍述하였다.『增補山林經濟』. 十六卷 柳重臨(유중림)  本書는 政治生活에서 失脚한 어떤 窮士가 山林에 隱居하면서 自己의 物的生活의 온갖 方面을 隨錄한 것인데, 柳重臨(유중림)이 그것을 增補하여 完成하였다. 이제 그 內容을 말한다면 人君·治農·種樹·養花·牧養·治圃·攝生·治膳·救荒·家政·求嗣·救急·四時纂要·雜方 等 十六篇으로 되었다.『星湖僿說』. 十一卷 李瀷(이익)  本書는 本히 五篇으로 되었는데, 그 後에 順菴 安鼎福(순암 안정복)이 讀者의 便覽에 供하기 爲하여 分門類選하여 그 이름을 星湖僿說類選이라 하였다. 말한다면 天地篇을 天文·地理·鬼神의 三門으로, 人事篇을 人事·論學·論禮·親屬·君臣·治道·服食·器具·技藝의 九門으로 經史篇을 經書·論事·聖賢·異端의 四門으로, 萬物篇을 禽獸·草木의 二門으로, 詩文篇을 論文·論詩의 二門으로 나누고 그 各門에 그와 關聯되는 모든 事項을 類聚하였다.『考事新書』. 十五卷 徐命膺(서명응)  本書는 그 全篇을 天道·地理·紀年·典章·儀禮·行人·文藝·武備·農圃·牧養·日用·醫藥 等으로 分類하였으며, 特히 行人部에는 各國과의 使節來往에 關한 記事까지 쓰이었다.『才物譜』. 八卷 李成之(이성지)  本書는 全篇을 天譜·地譜·人譜·物譜로 나누고 自然界 또는 人事界의 온갖 現象에 對한 說明을 더하였다.  이 밖에 作者未詳의 『新編玉叢』 四卷, 『萬家叢玉』 十二卷이 있는데, 그것들도 그 編法이 前書들과의 特別한 差異가 없다.ㄴ. 議論文「首陽山辨」. 徐命膺(서명응)  徐命膺(서명응)은 純祖 때의 사람인데, 그 號는 保晩齋(보만재 서명응)이다. 「海州 有首陽山. 山下, 有伯夷叔齊二子之祠, 成於肅宗卒已, 賜額曰 淸聖廟. 於是, 朝之薦紳大夫, 或碑或板, 各有表章, 然 要皆以爲山名偶同, 而俎豆享之, 如南康武侯祠者. 嗚呼 豈其然乎, 吾嘗以爲中國, 無首陽而爲有, 以文勝也, 我國 有首陽而爲無, 以文不足也. 何哉, 中國, 稱首陽凡四, 在蒲坂者 馬融之說, 而以蒲坂 有雷首之山也, 隴西者 曹大家之說, 而隴西有首山也, 洛陽東北者 戴延之之說, 而以二子, 自岐陽東北 至首陽也, 遼西者 許愼之說, 而以二子之歌, 有西山之稱也, 夫以一首陽而四之, 可見其本無此山, 而惟求必得, 因其近似, 爲之傅會也, 故曰無首陽而爲有, 以文勝也, 若我東之首陽則傳自古昔, 無文字緣飾, 但因古老相稱, 其事質, 其理直, 其爲名, 非出於傅會, 而唐裵矩云 高麗 本狐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李渤云, 朝鮮亦有陽山, 實夷齊隱處, 與箕子有往來之迹. 夫以中國之人能道外國之事, 此必有從古流傳之語. 而特我東, 自新羅後, 離合無常, 國無職方之紀, 野無傳記之述, 遂以二子 中國之人 必不能至外國, 仍自以爲冒稱也, 故曰 有首陽而爲無, 以文之不足也. 夫首陽之稱何始乎, 始於孔子之言, 孔子, 謂齊景公 有馬千駟, 死之日民無德而稱焉, 伯夷叔齊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而不及首陽之在地, 故後之儒者求首陽於成周五服之內, 甚或以爲薇蕨, 亦周之草木, 霑周之雨露, 夷齊不當食, 以是爲二子去就之累, 至于今誚之不止. 然首陽之左何地, 但以孔子之言與二子之行, 而決之, 則蔑不定矣. 當二子之諫伐而逃也, 顧瞻四方求其所適, 則西至流沙, 南至于江漢, 北至于幽薊, 凡禹貢所載盡入周家之版圖, 以二子至潔之心, 與鄕人立其冠不正, 猶且望望然去之, 況能一日安於周家版圖之內乎. 故蹙蹙靡騁東還故國, 則梯航不通於豊水, 土地非周家之土地, 正朔不奉於王城, 雨露非周天之雨露, 當時, 二子之所通 惟我東之首陽而已, 舍乎此則無可往矣. 故夫子將言人之聲稱不在所處之位, 先擧貧富之極而對言之, 餓與千駟貧富之極也, 又擧外內之極而封言之, 首陽與齊外內之極也, 夫以所處之相反如此, 而一傳於後, 一無傳於後, 尤見其莫尙者德也. 若首陽處乎浦坂等地, 與齊同爲內服, 則孔子但取其餓而已, 不必復言其首陽之下也, 使中國有首陽, 而我東無之, 惟當以二子之行, 聖人之言, 推知其必在我東, 況我東首陽之名著於史, 述於雜記者, 又昭昭可徵乎.」(『保晩齋集』 六)  世傳에 梅竹堂 成三問(매죽당 성삼문)이 燕京으로 가던 길에서 夷齊廟碑에다가 아래와 같은 詩 一首를 씀에, 碑에서 愧汗이 흘렀다고 한다. 만일 그로 하여금 夷·齊(백이·숙제)의 隱遯處가 海州의 首陽山임을 알았더면 이런 詩로써 나무렴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거기에 또 愧汗이란 말도 添加되지 않았을 것이다.  「當年叩馬敢言非, 大義堂堂日月輝, 草木亦霑周雨露, 愧君猶食首陽薇.」ㄷ. 儀式文「誓海文」. 秋浦 黃愼(추포 황신)  黃愼(황신)의 字는 思叔, 號는 秋浦(추포 황신), 牛溪(우계 성혼)門人이었다. 甲午에 朝命으로서 明國의 媾和使 沈惟敬(심유경)을 따라서 熊川 倭管에 留한 지 二個年이었다. 그 동안에 明使를 接遇하며, 倭酋를 酬應하면서 때로 賊情을 朝廷에 馳啓하였다. 丙申에는 國信使로서 明의 關酋冊封使 楊邦亨(양방형)과 함께 日本으로 渡往하게 되었다. 그때에 水路가 險惡하고 風濤가 어찌나 甚하였던지 舟人이 다 水疾로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公이 海神에 誓하는 文을 지었다.  「豺虎叢中 旣持二年之節, 蛟龍窟上更乘八月槎, 捐軀是甘, 稽首自誓, 伏念某遭時板蕩, 許國驅馳, 雖險阻艱難備嘗之矣, 然州里蠻貊 可行乎哉, 賴有衷赤之不渝, 可質上蒼之無愧, 四千里行役何敢一毫憚勞, 三十年工夫正宜今日得力, 固王事之靡鹽, 抑臣職之當然, 直掛風帆, 遙指日域, 苟可安社利國死且不避, 如使辱命失身生亦何補, 伏願聖靈 鑑此誠沈, 幸斯言之不誣, 天有知也, 倘一念之或怠, 神其殛之.」  公이 八月 四日에 乘船하였는데, 그 前夜에 이런 詩를 지었다.  「丈夫不怕死, 怕死非丈夫, 白刃猶可蹈, 鼎鑊尙可趨, 所願全吾節, 安得全吾軀, 賢哉鵄述郞, 抵死心不渝.」(『秋浦集』)  『芝峰類說』. 「黃檜原某於丙申年間, 以明使沈惟敬接伴官, 入釜山倭營久處賊中, 又以通信使赴日本危困極矣, 而少無怖色竟得全還. 其誓海文辭甚精工.」  光海 癸丑에 李爾瞻(이이첨)이 國舅 金悌男(김제남)의 謀逆을 誣構하고서 淸流를 網打하려는 그때에 公이 月沙(월사 이정구)·淸陰(청음 김상헌) 等 諸賢과 함께 鞠問을 받다가 마침내 兌津에 귀향 가서 卒하니 象村 申欽(상촌 신흠)이 淸陰(청음 김상헌)에게 보낸 글에,  「秋浦云亡, 蓋無人世之念, 行年五十經歷世變盡矣, 先死者未必非福, 但此公之死非惟私慟, 似此君子人何處得來, 欲作一文字抒余衷, 路遠恐未乘便尤用慨然.」  月沙 李廷龜(월사 이정구)가 淸陰(청음 김상헌)에게 보낸 글에   「去年, 哭思叔, 今年 又哭鼇老, 平生知舊, 零落殆盡, 存者 又落落晨星, 每一念之 忽忽不樂.」(『秋浦集拾遺』)ㄹ. 騈體文募粮檄. 鄭經世(정경세)  鄭經世(정경세)는 宣祖 壬辰亂(임진왜란, 1592)의 사람인데 그 號는 愚伏(우복 정경세)이다. 「醜虜 逞豺豕之毒, 有生 方憤於共天, 疲兵急庚癸之呼 相死敢望於詞志, 聽下風之慕義, 託簡書而傳情, 興言社稷之深羞, 罔極臣民之長痛, 腥煙燻染於鍾簴漂泊十三廟英靈, 殷血濺汚於衣冠 板蕩二百年文物, 金城失千雉之壯固, 玉輦困一隅之風霜, 戎疾不殄於讎邦傷心 四郊多壘, 皇天尙慳於悔禍瞥眼 三時已窮, 顧惟環海蒼生, 本是誰家赤子, 揮涕念行在 雖切少陵之忠誠, 仗劍出全師 奈無丞相之權力, 糾合摧山之, 健卒 額不滿千, 捕斬陸梁之凶徒 馘纔半百, 縱不能扶天傾而雪主辱, 亦庶幾有進死而無退生, 第此兵燹之彌年, 正値民産之掃地, 箕斂而餉 敢言居有積倉行有褁糧, 道包而炊, 其奈軍無見糧 士無生氣, 愁看楚卒之半菽, 願借周瑜之二囷, 竊聞諸君義不後君, 忠恩益國, 玆念秦飢, 幸物越視, 胡命其能久 是稔惡就誅之辰, 富人不愛錢 乃撥亂戡禍之策, 嗚呼, 一片葵薺誠悃 非緣食祿不食祿而有深淺, 七尺草芥身軀 當看除賊未除賊而爲生死, 未洩公私之積痛, 更立天地而何顔, 一膝難屈於讎庭 已分寧蹈東海, 萬鱗方困於涸轍 惟願急激西江.」(『愚伏集』 八)「廣寒殿 玉樓 上樑文」. 許景樊(허경번)  許景樊(허경번)의 字는 蘭雪인데, 그 兄 篈(허봉)·筠(허균)과 함께 文으로써 海東에서 鳴하였다. 그런데 이 上樑文은 그가 八歲에 지었다고 한다.  「述夫 寶蓋懸空 雲輧超色相之界, 銀樓耀日 霞楹 出迷塵之壺, 雖復 仙螺運機 幻作璧瓦之殿, 翠蜃吹霧 噓成玉樹之宮, 靑城丈人 玉帳之術 斯殫, 碧海王子 金櫝之方 畢施, 自天作之 非人力也, 主人名編瑤籍, 職綴瓊班, 乘龍太淸 朝發蓬萊 暮宿方丈, 駕鶴三島 左挹浮邱, 右拍洪厓, 千年玄圃之棲遲, 一夢人間之塵土, 黃庭誤讀謫下無央之官, 赤經結緣, 悔入有窮之屋, 壺中靈藥纔下指於玄砂, 脚底銀蟾 遽逃形於桂宇, 笑脫紅埃赤日, 重披紫府丹霞, 鸞笙鳳管之遊 喜續舊會, 錦幙銀屛之孀宿 悔過今霄, 胡爲日官之恩綸, 俾掌月殿之牒奏, 官曹淸切 路踐八霞之司, 地望崇高 名壓五雲之閣, 寥生玉斧 樹下之吳質無眠, 樂奏霓裳 欄邊之素娥呈舞, 玲瓏霞佩 振霞錦於仙衣, 熠熠星冠 點星珠於人勝, 仍思列仙之來會, 尙乏上界之樓居, 靑鸞引玉妃之車 羽葆前路, 白虎駕朝元之使, 金綬後塵, 劉安轉經 捘雙龍於案上, 姬滿逐日 駐八鳳於山阿, 霄迎上元, 綠髮散三角之髻, 晝接帝女, 金梭織九紋之綃, 瑤池衆眞會南峰, 玉京群帝集北斗, 唐宗踏公遠之杖 得羽衣於三章, 水帝對火仙之碁, 賭寰宇於一局, 不有紅樓之高構, 何安絳節之來朝, 於是移章十洲, 馳檄九海, 囚匠星於屋底 木宿掄材, 壓鐵山於楹間, 金精動色, 坤靈揮鑿 騁巧思於般倕, 大冶鎔爐 運奇智於鍾範, 靑赮垂尾 雙虹飮星宿於河, 赤霓昻頭六鼇戴蓬萊之島, 璇題燭日 出彤閣於煙中, 綺綴流星 駕翠廊於雲表, 魚緝鱗於玉瓦, 雁列齒於瑤階, 微連捧旗 下月節於重霧, 鳧伯樹纛 設蘭幄於三辰, 金繩結綺戶之流蘇, 珠網, 護雕欄之阿閣, 仙人在棟氣吹彩鳳之香臺, 玉女臨窓 水溢雙鸞之鏡匣, 翡翠簾 雲母屛 靑玉案 瑞靄霄凝, 芙蓉帳孔崔扇 白銀牀 祥蜺盡鎖, 爰設鳳儀之宴, 俾展鷰賀之誠, 傍招百靈, 廣延千聖, 邀王母於北海 斑麟踏花, 接老子於西關靑牛臥草, 瑤軒張錦紋之幕, 寶簷低霞色之帷, 獻靈蜂王紛飛炊玉之室, 含果雁帝出入薦瓊之廚, 雙成鈿管 晏香銀箏 合鈞天之雅曲, 婉華淸歌 飛瓊巧舞 雜駮空之靈音, 龍頭瀉鳳髓之醪, 鶴背捧麟脯之饌, 琳筵玉席光搖九枝之燈, 碧藕氷桃 盤盛八海之夥, 獨恨瓊楣之乏句. 緊致上仙之興嗟, 淸平進詞 太白醉鯨背之已久, 玉臺摛藻長吉 笑虵神之太多, 新宮勒銘山玄卿之雕琢. 上界鐫璧 蔡眞人之寂寥, 自慚三生之墮塵, 誤登九皇之辟剡, 江郞才盡, 夢退五色之花, 梁客詩催 鉢徹三聲之響, 徐援彤管, 笑展紅牋, 河懸泉湧 不必覆于安之衾, 句麗文道 未應類謫仙之面, 立進錦囊之神語, 留作瑤宮之盛況, 置諸雙樑, 資於六偉,抛樑東, 曉騎仙鳳入珠宮, 平明日出扶桑底, 萬縷丹霞射海紅.抛樑南, 玉龍無事飮珠潭, 銀牀曉起花陰午, 笑喚瑤妃脫碧衫.抛樑西, 碧霞零露彩鸞啼. 春羅玉字邀王母, 鶴馭催歸日已低.抛樑北, 溟海茫洋侵斗極, 鵬翼擊天風力掀, 九霄雲垂雨氣黑.抛樑上, 曙色微明雲錦帳, 仙夢初回白玉牀, 臥聞北斗回杓響.抛樑下, 八堎雲黑知昏夜, 侍兒報道水晶寒, 曉霜已結鴛鴦瓦.伏願上樑之後, 琪花不老, 瑤草長春, 曦舒凋光 鄕鸞輿而猶戲. 陸海變色 駕颷輀而尙存. 銀窓壓霞 下視九萬里 依微世界, 璧戶臨海 笑看三千年 淸淺桑田, 手回二霄日星, 身遊九天風露.」(『明人詩綜』)明末의 戲曲大家 尤侗(우통)의 지은 「朝鮮竹校詞」「柳花渡口杏花紅, 八道歌謠東國風, 叢憶飛瓊女道士, 上樑曾到廣寒宮.」  여기에 이른바 飛瓊女道士는 許蘭雪(난설 허경번)을 가리친 것이니 그런즉 이 上樑文은 우리 海東에서뿐 아니라, 漢土에까지 그 聲價가 높았던 것을 넉넉히 알겠다.二. 韻文(詩)  李朝 時代에는 詩學에 直面한 風尙이 더욱 甚하여 漢學의 素養이 있다는 사람은 詩를 吟詠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흔히는 人生의 實生活에 別로 關與가 없는 것으로서 江南風月을 嘯弄함에 지나지 못하였음에, 아마 「齋狗三年에 能風月이라」는 웃음머리의 말까지도 있은 모양이다. 그러나 詩는 情에서 나오는 것이라. 自家의 情은 表現하고 景을 敍述함에 있어는 많은 評價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浮華纖巧만을 힘 쓰라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實生活에서 떠나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떤 個人의 文集에나, 그 他 書類에나 詩가 重要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여기로부터 아래와 같은 詩의 撰集이 또한 있게 되었다.『大東詩林』. 七十卷 柳希齡(유희령)『國朝詩刪』. 七十卷 權韓(권한)『海東遺珠』. 一卷 洪世泰(홍세태)『海東遺珠』는 閭巷間 詩律의 刊集되지 못한 것을 編한 것이오. 이 밖에 또 詩學의 論述이 있으니『東人詩話』. 徐居正(서거정)『惺叟詩話』. 許筠(허균)文章篇. 李睟光(이수광)의 『芝峯類說』文學篇. 金堉(김육)의 『類苑叢寶』詩文篇. 李瀷(이익)의 『星湖僿說』文藝篇. 徐命膺(서명응)의 『考事新書』  李朝 五百年間의 詩學은 세 個의 時期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第一期는 李太祖(이성계)로부터 仁宗의 때까지를 이름이니 이 時期에는 詩人들의 大部分이 宋의 蘇·黃[蘇軾(소식)·黃庭堅(황정견)]을 尙하였다. 第二期는 明宗으로부터 光海의 때까지를 이름이니 이 時期의 詩人들은 다 崔·白[崔慶昌(최경창)·白光勳(백광훈)]을 尙하였는데, 崔·白(최경창·백광훈)은 唐을 學한 까닭이다. 第三期는 仁祖로부터 高宗의 때까지를 이름이니 이 時期의 特色은 功令의 詩體이었다.ㄱ. 第一期의 詩學登百祥樓. 趙浚(조준)  趙浚(조준)은 일찍 「滌蕩東溟當有日, 居民拭眼待澄淸」의 詩로써 自負心을 表示하였겠다. 麗末의 大司諫으로서 累萬言의 疏書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그 中에 私田革廢疏는 가장 時宜에 砭切한 것이었다. 그런데 突然히 變節하여 李氏를 臣事하는 中에서 明使 祝孟(축맹)의 館伴으로 되어 百祥樓에서 이 詩를 지어 隋兵의 沒敗를 嘲笑하였다. 祝孟(축맹)은 그 嘲笑를 中國人의 羞恥로 하여 詩思까지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薩水蕩蕩漾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話, 不滿征夫一笑餘.」(『國朝人物志』)「嗚呼島弔田橫」. 鄭道傳(정도전)  鄭道傳(정도전)의 號는 三峰(삼봉)이었다. 麗末에 判三軍府事까지 되었다가 李氏를 推戴하는 功臣 中의 한 사람으로 되었는데, 그의 著書로는 『心理學三篇』·『經濟文鑑』·『經國大典』 等이 있었다.  秦始皇이 田齊를 倂呑한 後에 田橫(전횡)이 東으로 走하여 우리의 西海島中에 그 몸을 던지었던데, 그가 漢太祖의 부름에 依하여 「薤露歌」로써 最後를 告한 後에 그 島名이 嗚呼로 된 것이다.  「曉日出海東, 直照孤島中, 夫子一片心, 正與此日同, 相去曠千載, 嗚呼感予衷, 毛髮豎如竹, 澟澟吹英風.」(『明人詩綜』)「和端宗 子規詩」. 曺尙治(조상치)  端宗은 十二歲의 弱齡으로 王位에 올랐다가 그 叔父인 首陽大君(世祖)에게 그 位를 빼앗기고 寧越에 遷囚하였을 때, 바로 十六 歲되던 그 해의 봄에 子規소리를 듣고서 「一自冤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夜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의 詩 一首를 지었던 것이다. 그에 應하여 曺尙治(조상치)가 아래와 같은 詩를 읊조리었다.  「子規啼, 子規啼, 夜月空山何所訴, 不如歸不如歸, 望裏巴岑飛欲度, 看他衆鳥摠安巢, 獨向花枝血謾吐, 形單影孤貌憔悴, 不肯尊崇誰爾顧, 嗚呼, 人間冤恨豈獨爾, 義士忠臣激不平, 屈指難孟數.」(『國朝人物志』)「和鍾陵山居詩」. 金時習(김시습)  東峰 金時習(동봉 김시습)은 난 지 八月에 能히 수시로 글을 쓰고 三歲에 詩를 지은 神童的 秀才이었다. 그의 著作 中에는 詩 萬餘篇(『師友言行錄』)이 있었다는데 지금에 傳하는 것으로 『梅月堂集』 十七卷 九冊뿐이다.  栗谷(율곡 이이)云 「人體天地之塞, 以淸濁厚薄之不齊, 有生學知之別, 此以義理言也, 若於時習者於文天得, 則文字亦有生知矣.」  「蛺蝶雙雙飛藥畦, 山禽饒語竹籬西, 一叢枸杞花初遍, 三椏人蔘葉已齊, 翠竹林中香麝睡, 紫荆枝上畫肩啼, 千峰昨夜疎疎雨, 泛濫南溪漲小溪.」(『列朝詩集』)「登鳳山樓 次韻」. 許琮(허종)  許琮(허종)은 明使 董越(동월)의 館伴으로서 서로 唱和하는 中에서 이 詩를 지었다.  「獨倚雕欄㡌影斜, 客中衰鬢已非鴉, 不禁杜宇聲聲苦, 啼盡東風第一花.」「所串館道中卽事」. 許琮(허종)  「數株官柳野橋傍, 飛絮紛紛揆馬香, 工雨欲來龍氣黑, 水風吹作十分涼.」(『皇華集』)  董越(동월) 許公詩序에 音律偕暢, 蕭然出塵.「征野人凱旋」. 申叔舟(신숙주)  申叔舟(신숙주)가 世祖 五年에 野人 李滿住(이만주)를 破하고 巢穴까지 獲하는 中에 이 詩를 지었겠다.  「虜中霜落塞垣寒, 鐵騎縱橫百里間, 夜戰未休天欲曉, 臥看星斗正闌干.」「鏡浦臺」. 崔澱(최전)  崔澱(최전)의 字는 彥沈 인데, 八歲부터 詩에 能하여 十八歲에 進士에 登하고 二十二歲에 歿하였다.  「蓬萊一入三千年, 銀海茫茫水淸淺, 鸞笙今日獨飛來, 碧桃花下無人見.」  栗谷(율곡 이이)云 「彦沈詩 似丹穴鳳雛, 聲纔出穴已足駕人, 讀之, 風露爽然, 殆非食煙火人語.」  愚伏 鄭經世(우복 정경세) 云 「信口吐詞, 皆成瓊屑.」  疎菴 任叔英(소암 임숙영) 云 「服膺盛唐, 其詩 淸越俊逸.」「春日」. 崔澱(최전)  「楊柳依依江水生, 杏花如雪落無聲, 靑霞捲盡畫樓出, 中有玉人吹玉笙.」(『明人詩綜』)  明 成祖의 妃는 朝鮮 權永均(권영균)의 妹로서 簫를 嬴吹한 까닭에 「璚花移入大明宮, 一樹凝香倚晩風, 贏得君王留步輦, 玉簫嘹喨 月明中」이라는 王彩司의 宮詞가 있었으니, 이 宮詞에다가 「中有玉人吹玉笙」을 비추어 보는 것도 趣味없는 일은 아니겠다.「讀離騷經」. 金麟厚(김인후)  金麟厚(김인후)의 號는 河西(하서 김인후)인데 仁宗 때의 사람이었다. 五歲부터 綴文에 能하여 그 名聲이 一世에 膾炙하였다.  「靑楓江上未招魂, 白日何時得照寬, 荷蓋水車消息斷, 夕陽揮淚灑乾坤.」(『國朝人物志』)ㄴ. 第二期의 詩學「客懷」. 李達(이달)  李達(이달)의 號는 蓀谷(손곡 이달)이요, 明宗 때의 사람이었다. 詩로서는 李朝 三唐의 한 사람이로되 庶流라는 名目下에서 一生을 不遇坎軻하였다.  「此身所復計西東, 到處悠悠逐轉蓬, 同舍故人流落後, 異鄕新歲亂離中, 歸鴻影度千峰雪, 殘角聲飛五夜風, 惆悵水雲關外路, 漸看芳䒤思無窮.」(『明人詩綜』)「紅流洞」. 李達(이달)  「中天笙鶴下秋霄, 千載孤雲已寂寥, 明月洞門流水在, 不知何處武陵橋.」  여기에다가 一蠧 鄭汝昌(일두 정여창) 紅流洞詩를 집어넣고서 對照하여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孟頭流千萬疊, 孤帆又下大江流.」「海上詩」. 李達(이달)  「碧海波空雲影涵, 白鷗無處上苔巖, 山花落盡不歸去, 家在石峰江水南.」(『國朝人物志』)漁父. 朴文昌(박문창)  朴文昌(박문창)은 明宗 때의 사람인데, 郭山 雲興館 畫屛에 이 詩를 쓰었다.「萬頃滄波欲暮天, 穿魚換酒柳橋邊, 客來問我興七事, 笑指蘆花月一船.」(『明人詩綜』)「花煎詩」. 白湖 林悌(백호 임제)  白湖(백호 임제)는 俗離山에 숨어 있는 成大谷(성대곡)에게서 詩를 배웠으며, 벼슬은 評事에 지나지 못하였다.  「鼎冠撑立小溪邊, 白粉淸油煮杜鵑, 雙箸執來香滿口, 一年春色腹中傳.」「閨怨」. 白湖 林悌(백호 임제)  「十五越溪女, 羞人無語別, 歸㯤掩重門, 泣向梨花月.」(『明人詩綜』)  象村 申欽(상촌 신흠)은 매양 白沙(백사 이항복)로 더불어 白湖(백호 임제)를 論함에 「胸中에 凝滯가 없이, 蜃樓가 架空한 듯한 奇男이며, 詩는 三舍를 避하여야 되겠고, 建鼓登壇하며 狎主度盟하기는 白湖(백호 임제) 그 사람밖에 없다」고 하였다.(『白湖集』序)「夜吟」. 李舜臣(이순신)  忠武公 李舜臣(충무공 이순신)은 文武兼全한 大偉人이었다. 그러나 世上에서 李舞臣(이순신)이라면 空前絶後한 海軍界의 大戰略家로만 認定하고 空前絶後의 大詩人인 것을 아는 이가 적은 듯하다.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겠다. 그의 詩名은 武功에게 파묻히운 까닭이라 하노니 그의 詩는 悲壯沈鬱한 杜甫(두보)의 詩를 읽는 맛이 있다.  「蕭蕭風雨夜, 耿耿不寐時, 懷痛如抽膽, 傷心似割肌, 山河猶帶慘, 禽鳥亦吟悲, 國有蒼黃勢, 人無任轉危, 恢復思諸葛, 長驅慕子儀, 經年防備策, 今作聖君欺.」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耿耿不寐夜, 殘月照弓刀.」「贈宣居怡」. 李舜臣(이순신)  「北去同勤苦, 南來共死生, 今夜一杯酒, 明日別離情.」(『忠武公全書』)「言志詩」. 金德齡(김덕령)  金德齡(김덕령)의 字는 景樹(경수)인데, 光州 石底村에 있었으므로 後日에 石底將軍(倭놈은 돌구멍에서 나왔다)이라는 稱號까지 얻었다. 自少로 儒를 業하여 甚히 謙恭한 까닭에 누구든지 그의 勇力이 絶倫한 것을 몰랐었다. 姊夫 金應會(김응회)가 起義하기를 자주 勸하였으나, 그는 어머니의 계심을 因하여 應하지 않았다. 癸巳에 어머니가 歿하시고 또는 그에게 孔明(제갈공명)의 智와 關羽(관우)의 勇의 있다는 李景麟(이경린)·李貴(이귀)의 力薦으로써 그는 마침내 義兵將으로 되었다. 그래서 倭賊은 그의 智勇을 무서워 湖南을 敢히 犯치 못하는 그 一方에 그를 嫌忌하는 者가 朝廷에서 생기게 되었다. 甲午에는 그가 犯法한 軍人 하나를 斬한 거기에 對하여 起兵한지 二年에 寸功을 세우지 못하고 人命만 殘酷히 殺害한다는 誣告를 받아, 拿囚되었던 일이 있었으며, 丙申 秋에는 鴻山 土賊 李夢鶴(이몽학)과의 聯絡이 있었다는 誣陷을 입어서 일찍 詩로써 表示하였던 素志를 이루지 못하고 杖斃의 魂이 되고 말았다.  「絃歌不是英雄事, 劍舞要須玉帳遊, 他日功成歸去後, 江湖漁釣更何求.」(『東國名將傳』)「三壯士詩」.  三壯士는 金千鎰(김천일)·崔慶會(최경회)·黃進(황진)을 이름이니 그들이 死에 臨한 그때에 이 詩를 지었다.  「矗石樓中三壯士, 一杯笑指長江水, 長江萬古流滔滔, 波不竭兮魂不死.」  「癸巳六月, 倭圍晉州 八日而陷, 牧使 徐元禮, 判官 成守璟, 倡義使 金千鎰, 本道兵使 崔慶會, 忠淸兵使 黃進, 義兵復讎將 高從厚等 皆死, 死者 六萬餘人, 牛馬鷄犬不遺, 賊皆夷城, 塡壕, 堙井, 刊木以快前憤, 時癸巳 六月 二十八日也, 時外援不至, 又千鎰所率皆,京城市井召募之徒, 又與徐元禮不相能, 主客相猜, 號令乖迕是以甚敗…」(『牧民心書』 三, 禦寇條)  「王辰亂에 晉州判官 金時敏(김시민)이 數千에 지나지 못하는 殘軍으로써 能히 十數萬의 大敵을 擊退하고서 城을 保全하였다. 그런데 丁酉再亂(癸巳의 誤)에는 牧使 徐元禮(서원례)와 倡義使 金千鎰(김천일) 等의 거느린 兵이 六萬에 이르렀으니 前에 比하면 十倍라. 사람마다 城을 지킴에 아무 걱정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州妓 論介(논개)는 혼자 근심하였다. 千鎰(김천일)이 그것을 알고 請하여다가 물으니 論介(논개)가 대답하되 前者에는 軍士가 비록 적으나 將卒이 서로 사랑하고 號令이 한 곳으로서 나온 까닭에 이기었거니와 지금에는 軍士를 統한바가 없어서 將이 兵을 알지 못하고, 兵이 將을 익숙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근심하노라 하였다. 千鎰(김천일)이 그것을 妖言이라 하여 斬하려 하다가 곁 사람의 勸告로서 그만 두었다. 城이 陷落됨에 미쳐 將士와 軍民이 다 屠戮을 當하였는데, 論介(논개)가 凝粧盛服으로 矗石樓의 아래, 峭巖의 위에 섰다가 敵將의 引進을 따라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潭水에 떨어지어 죽었다.」(『五百年奇譚』)陪吳參軍 子魚 登義城. 許筠(허균)  「平野垂天末, 長江接海流, 雨餘多牧笛 風急少舟行, 獨鶴穿雲去, 雙鳧就渚浮, 相憐無限意, 空憶仲宣樓.」(『明人詩綜』)ㄷ. 第三期의 詩學「登洲 次吳秀才韻」. 金尙憲(김상헌)  金尙憲(김상헌)의 號는 淸陰(청음 김상헌)인데,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에 斥和說을 極力主張하다가 瀋陽으로 잡혀 가서 拘囚까지 當하였다.  「淡雲微雨小姑祠, 菊秀蘭衰八月時, 無限旅愁消不得, 因君好句重相恩.」「寄友」. 金瑬(김류)  金瑬(김류)는 仁祖 反正의 때에 大將으로 되었고,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에는 崔鳴吉(최명길)과 함께 主和說을 堅執하였던 것이다.  「楊花落盡草萋萋, 楚客傷離思轉悽, 佳節一年寒食過 亂山千疊子規啼, 虞翻去國身全老, 王粲登樓賦謾題, 想得天涯回白首, 昭陽江上夕陽低.」(『明人詩綜』)「臨溟大捷歌」. 洪良浩(홍양호)  洪良浩(홍양호)의 號는 耳溪(이계 홍양호)요, 二十九歲에 庭試文科에 登하여 翰林으로 選補되었다. 英祖의 器重함을 받아 顧問에 應하는 일도 많았는데, 正祖 初年에는 洪國榮(홍국영)에게 擯黜되어 慶源府使로 있으면서 「放雁辭」을 지었다.  鄭評事, 奇男子, 微爾盡黔北人齒, 時有長鯨怒鬣閃㸌若火熾, 滄海爲沸東天紫, 三京焚燒八路崩, 翠華遙遙鴨水沚, 其酋淸正最黠鷔, 萬隊橫行遂北指, 快劍如霜彗日芒, 毒丸如雷洞人髓, 元戎旆折鐵嶺上, 三軍潮退未敢發一矢, 鳥言卉服滿朔野, 腥氛慘憺興王里, 磨天重險掉臂過, 九鎭諸郡望風跪, 桀奴叛吏爭倒戈, 處處飜成囚長吏. 王子大臣亦囚縛. 國何汝負乃忍爾. 箕封千里爲戎矣. 關北曾無一義士, 維時蓮幕隻身跳, 山行草伏形容㥓(毁), 彷徨岐路誰與歸, 邂逅同志崔姜李, 揮涕飮血仰天誓 一百義旅投袂起, 裂裳爲旂鋤爲兵, 白面將軍杖尺箠, 鳴鼓徐行入鏡城, 士女歡迎惟命俟, 南樓嶪嶪建牙纛, 磔斮鞠豎懸街市, 軍聲一朝震北路, 叛賊次第束身死, 蕃胡伺釁乍蠢動, 若崩厥角咸率俾, 蠻兒聞之捲甲來, 肉薄登埤如附蟻, 城上一鼓箭如雨, 僵尸盈壕不旋趾, 官軍追奔到吉州, 三戰三北皆離披, 長坪雙浦數百里, 提戈棄鉦何累累, 驕虜膽破若無骨, 蝸縮蛇盤土窟裏, 端川大兵自來迎, 半夜含枚將南徙 草山偃旗截歸路, 前有角分後有犄, 白塔之原臨溟野, 健兒賈勇如虎兕, 紛紛鼠竄與兎脫, 往往裂䐉而折臂, 髠頭祼足化京觀, 長繩簇簇貫左耳, 刳肚攉腸立如堠, 醜類狂顧那嚮邇, 倭酋大哭走踰嶺, 頭雖戴矣魂已褫, 陣雲初霽白楡社, 血刃浮洗靑海水, 朔方二十有三州, 寸地皆還我疆理, 可憐堂堂三壯士, 功成身殞馬前墜, 蠟紙遙飛奏行在, 至尊動容悲且喜, 璽書寵嘉進官秩, 賜齎便蕃及衣履, 藩臣擁兵但自衛, 君父蒙塵越人視, 奈何恥已無功嫌人, 有媒孽其短反掩美, 公議百年竟得伸, 贈誄輝煌邦人祀, 武溪之上禦亂里, 山川鬱鬱環古壘, 昔日金尹拓疆土, 國威兵力是憑倚, 公遭板蕩喬空拳, 屹若狂瀾障一砥, 不然不惟豆江以南非吾有, 荐食上國從此始, 如公樹立更卓然, 千載睢陽可幷擬, 生前落拓死時煩冤俱莫恨, 巍巍名與白山齊高峙, 我過戰地起感慨, 彈劍長歌爲變徵, 彈劍歌聲激烈, 邊風獵獵鳴不已. (『農圃集』 六)  「大捷歌」에 對한 參考로서 『農圃集』의 記事를 이에 紹介하여 둔다.  先生, 遂錄長坪·臨溟·端川·白塔四大捷, 鎭定六鎭之勳, 使崔配天 懷狀啓聞于行在, 以前後捷勳, 皆歸之於諸將佐, 等級有差, 專不爲己功.  監司卓然, 怒先生擅自錄功啓聞, 移文詰責語多無倫. 先生, 卽馳報牒辨柝甚明, 卓然益大恚, 欲以軍法害先生, 遂拿致先生將佐, 酷加榜掠, 窮索先生過失, 而將士抵死, 不貳於先生, 卓然無所得, 乃作誣啓 構捏益甚, 而前後捷功 反其實而聞, 先生雖使配天啓聞, 而朝廷卓然 以道臣之啓 歸重敢實, 故先生前後奏捷, 一未朝家所知. 卓然恥以外藩重臣 未嘗一有擒一賊之功, 而嫉先生聲績掩己, 責勞其本一幕佐 , 不當自爲大將而違已節度, 且北道胡亂 不爲馳報, 四次推考, 先生據理辨析不爲遜, 卓然大怒, 反其實而聞行在.「閱地圖有感」. 鶴洲(학주 김홍욱)  「曾聞楛矢貢明堂, 肅愼遺墟此一方, 雪立白山南走遠, 天連黑水北流長, 完顔偉烈呑遼宋, 大定豊功壓漢唐, 坐對地圖長歎息, 古來豪傑起窮荒.」  나는 『鶴洲集』 第二卷을 얻어본 일이 있는데, 鶴洲(학주 김홍욱)란 그 號만 알게 되고 그의 姓名이 누구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의 年譜까지 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가 어느 年代의 사람인 것은 알게 되었다. 詩文이 실린 第二集에서 市南 兪棨(시남 유계)와의 唱和한 詩를 보고서 그가 孝·顯(효종·현종) 時代의 사람인 것을 알았으니 그것은 兪棨(유계)가 顯宗 五年에 歿한 까닭이다. 永春 龍穴灘에서 그와의 唱和한 詩가 二首인데 「雁塞當年勞夢想, 龍灘此日喜逢迎, 春江淥淨深無底, 不及平生爾我情.  春風同泛木蘭舟, 洗盡胸中萬斛愁, 安得與君乘興去, 掛帆西下漢江流.交河. 鶴洲(학주 김홍욱)  長洲煙月泛扁舟, 萬古江聲入海流, 篷底不成孤枕夢, 荻花楓葉使人愁.贈浮石寺僧廣敏. 二首 鶴洲(학주 김홍욱)昔年曾宿西峰寺, 淸景如今尙記知, 山杏花間明月在, 子規啼到五更時.崎嶇世路飽經過, 暫向林間一放歌, 明日尋僧扶杖去, 靑山何處白雲多.金笠(김립)의 詩.  金笠(김립)은 洪景來(홍경래)에게 投降한 宣川 防禦使 金益淳(김익순)의 孫子, 金炳翼(김병익)의 別名이었다. 益淳(김익순)은 純祖 十二年(1812年)에 叛逆罪로 死刑을 當하고 炳翼(김병익)은 그 兄 炳淵(김병연)과 함께 谷山에 退居한 世奴의 집으로 가서 依托하고 거기에서 공부하였다. 炳翼(김병익)은 二十歲가 금방 넘자, 弊衣被笠의 乞客으로 八道에 流浪하였다. 그렇게 乞食하는 中에서 詩를 짓게 되었는데, 口頭에서 나오는 말마디가 다 詩句이었다. 그의 作才로 말하면 韻을 부른즉 부르는 卽時에 곧 應對하였고, 느낌을 받은 즉 받는 그 瞬間에 곧 吟味하였다. 그럼에 五十이 넘어서, 同福(全羅道)의 客鬼로 되던 그때까지 三十餘年의 동안에 갖가지의 形式으로 表現한 그의 詩가 몇 수 몇 萬의 首로 되었을 터인데, 不幸히 口口相傳하다가 遺失된 것도 많고 지금까지 殘存되었다는 것도 訛傳이 또한 적지 않다. 하물며 그 時代의 사람은 그에게 對한 同情이 極히 薄弱하였다. 金삿갓이라면 平凡하게 乞食詩人인 줄만 알았고, 天日을 보기에 부끄럽다 하여 삿갓을 쓰고 다니던 그 內容은 전혀 몰랐다. 그뿐 아니라, 그의 이름이 炳翼(김병익)인 것도 또한 몰랐던 모양이다. 지금의 우리로서 본다면 農民革命에 加擔하였던 사람의 孫子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건마는 그 當時의 國情이 그런 부끄러움을 그에게 지어주었다. 그는 一世의 棄物이었고 世人은 果然 魚目이었다. 그래도 간 곳마다 賤待를 받던 그의 詩句가 그만큼이라도 殘存된 것은 實로 萬幸이었다.  나는 蘇東坡(동파 소식)의 詩―「生前富貴, 死後文章」을, 다시금 읊었다. 김삿갓의 生前에 누구가 推仰하였더냐? 그의 死後에, 實로 지금에 와서야, 그의 文章이 朝鮮의 大詩人인 것을 評定하게 되었다.  「山名松岳豈無薪, 邑號開城何閉門, 黃昏逐客非人事, 禮義東方子獨秦.」  金笠(김병연)이 開城의 어떤 집에서 하룻밤 자기를 要請하는 때, 그 主人은 客室에 擧火를 못하였다는 핑계로 門을 잠그고 許치 아니함에 이 詩를 지었다고 한다.  「坐彼老人不似人, 何年天上降仙眞, 眠前三子皆爲賊, 偷得蟠桃善養親.」  金笠(김병연)이 어떤 甲宴에 乞食하려 들어간즉 여러 來賓들이 晬宴詩를 한창 짓는 中이었다. 나도 文字를 粗解함에 한 首 짓는 것이 어떠냐고 金笠(김병연)은 물었다. 座中이 다 그의 行色을 보고 心中으로 冷笑하면서 겨우 應諾하였다. 그래 金笠(김병연)은 그들의 짓는 韻字에 따라 「坐彼老人不似人」의 第一句를 불렀다. 이것이 甲翁에게 얼마만한 侮辱이 되는가? 그래서 그의 子孫과 座賓들은 그를 怒目視하면서 다음의 句를 어떻게 맞추는가 하는 때, 金笠(김병연)은 「何年天上降仙眞」의 第二句를 부르니 그제야 滿座의 怒氣가 氷釋하였다. 그 다음에 金笠(김병연)은 「眼前三子皆爲賊」의 第三句를 불렀다. 이것이 甲翁의 三子에게 얼마만한 큰 恥辱이 되는가? 그래, 三子가 다 憤憿하는 때, 金笠(김병연)은 「偷得蟠桃善養親」의 第四句를 부르니 座中이 모두 그의 傑作을 驚歎하고 갖은 飮食으로써 그를 善待하였다고 한다.  「四足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 主人莫道淸如許, 我愛靑山自倒來.」  이 詩는 어떤 집에서 멀건 죽을 乞食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主人呼韻環目銅, 我不以音以鳥態, 정주一飯어서進, 今夜 내기 자네 蚣.」  金笠(김병연)이 어떤 집에 들어가서 乞食한즉, 主人이 自己의 부르는 韻에 應하여 卽時, 詩를 지으면 飮食을 주기로 내기하고 「銅·態·蚣」의 三韻을 불렀다. 이것은 實로 强韻인데, 金笠(김병연)은 그 소리에 應하여 이렇게 詩를 지었다고 한다. 이 詩를 訓解한다면 「主人의 부르는 韻이 고리고 또한 구리니, 나는 音으로 아니하고 새곰(鳥熊)으로 하노라, 정주의 밥 한 그릇을 어서 내오라, 오늘 밤 내기에 자네가 지네(蚣).」란 말이다.  「晉州元塘村, 人心天下不 朝鮮國於初, 慶尙道之一, 童來有病傳, 奴出無主曰, 虛閣長夜臥, 過客朝夕乙.」  金笠(김병연)이 元塘村에서 留宿을 請하는 때, 어떤 집에서는 病患이 있느니, 어떤 집에서는 主人이 없느니 하면서 甚히 防客하였다. 그래, 金笠(김병연)은 할 수 없이, 어떤 집의 虛閣에서 굶어 자게 되었다. 잠도 이루지 못하고 悄然히 누워서 글을 읽었다. 主人이 글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이 그러는가 하고 나가서 보니 아무 보잘 것 없는 弊衣蘆笠의 乞人이었다. 그래, 이런 强韻을 불러 詩를 지으라 하였는데, 金笠(김병연)은 應口輒對로 이 詩를 지어 그 地方의 人心이 고약한 것을 痛罵하였다.  「好在阿斯達, 明年四月來, 綠水聲中立, 白雲影裏回, 新詩多少軸, 濁酒二三杯, 更言今日事, 握手共徘徊.」  이 詩는 金笠(김병연)이 九月山을 구경하다가 同伴에게 後約을 주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白石看看虎, 靑松立立神, 少鳥東出白, 萬象悉歸眞.」  金笠(김병연)이 金剛山을 구경하다가 밤에 길을 잃고 헤매이던 것을 詩로써 그렸다고 한다.  「項在胸中膝在肩, 世皆平直爾胡然, 臥如心字無三點, 立似彎弓絶一絃, 擧目不能觀白日, 側身纔始仰靑天, 痛哭千秋歸去路, 分明棺槨是方圓.」이 詩는 曲背 姜進士를 두고 지었다는데, 곱장이의 몰골을 絶妙하게 그렸다.  「二十樹下三十人, 四十家中五十飯.」  이 詩는 어떤 집에서 쉰밥을 얻어먹고 스무 나무의 아래에 앉아서 지었다고 한다. 이 詩의 內容을 訓解한다면 「스무 나무 아래에 서른 사람이요, 마흔 집 가운데 쉰 밥」이란 말이다. 다시 말하면 「三十人」은 섧은 사람이요, 「四十家」는 망할 놈의 집으로 알아야 한다.  「吉州非吉州, 許家不許家.」  이 詩는 吉州의 許氏家를 두고서 지었다고 한다. 그 뜻을 解釋한다면 「吉州非吉州」는 좋은 고을인데, 좋은 고을이 아니라는 말이요, 「許家不許家」는 許한 집인데 집을 許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疎飯蠅穿人, 塞羹魚浴去.」  이 詩는 어떤 집의 疎飯寒羹을 乞食하고서 지었다는데, 그 뜻을 자세히 解釋한다면 밥을 얼마나 성글게 담았던지 밥알과 밥알의 틈으로는 파리가 드나들고, 국은 물고기의 국인데 물고기는 없다는 것이다.  「飛來片片三春蝶, 踏去聲聲六月蛙.」  金笠(김병연)이 雪後에 어떤 집으로 들어가려 한즉 그 主人이 門걸쇠를 붙잡고, 「蛙」韻를 부르면서 雪을 두고 詩를 지어야 드리어 놓는다고 하였다. 그래 金笠(김병연)은 그의 입에서 韻이 떨어지자, 곧 應하여 이 詩를 지었다고 한다.  「今日偶來見, 人家不居有.」  金笠(김병연)이 비를 그으려고 어떤 書齋에 들어갔다. 그런데 學究가 隣家로부터 돌아오더니만, 아이들에게 「비」라는 글題를 내어주면서 먼저 본보기로 이런 詩를 부른다.  「今日雨來見, 隣家不去遊.」  이것을 解釋한다면 「오늘 비오는 것을 보니, 이웃집에 가서 놀지 못하겠다」라는 말이었다. 金笠(김병연)이 보기에 너무도 幼稚함에, 그 詩의 音을 그대로 取하여 위의 詩를 壁上에 써놓고 갔다고 한다. 그것을 解釋한다면 「오늘에 우연히 와서 보니, 사람의 집에 살려두지 못하겠다.」라는 말이다.「利原侍中臺詩」  「百劫三韓國, 將軍獨此臺, 何年胡北走, 無限海聲來.」  이 詩는 侍中 尹瓘(윤관)의 四十七代孫인 咸興선비가 지었다는데, 女眞을 쫓아내고 九城을 쌓은 將軍의 偉功을 追慕하는 詩로서는 보다 深長한 意味가 있다.三. 不世出의 女詩人들  前代에는 女詩人이란 말도 없었는데, 李朝에 이르러서야 壬辰亂(임진왜란, 1592)을 前後로 하고 그런 말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壬辰亂(임진왜란, 1592)의 前에는 위에서 提示한 黃眞娘(황진이)뿐이 있었으나, 壬辰亂(임진왜란, 1592)의 後에는 많이 나타나섰다. 詳言한다면 우리의 軟文學이 全盛期로 昻上하던 그 前後에, 光海로부터 純祖에 이르는 그 中間에 著名한 女詩人이 輩出하였다는 것이다. 育兒·食事를 本職으로 삼던 婦人 中에서, 또는 勸酒·歌唱을 習性으로 알던 娼妓 中에서 女詩人이 出現하였다는 것은 漢文學이 極度로의 進展을 說明하는 것이다.「望仙謠」.(二首中의 一) 許景樊(허경번)  「王喬招我遊, 期我崑崙墟, 朝登玄圃峰, 遙望紫雲車, 雲車何煌煌, 玄圃路茫茫, 倐忽湊天漢, 翻飛向扶桑, 㧋桑幾千里, 風波路阻長, 吾欲捨此去, 佳期安可忘, 君心知何許, 賤妾徒悲傷.」「次伯兄 高原 望高臺韻」. 許景樊(허경번)  「層臺一柱壓嵯峨, 西北浮雲入塞多, 鐵峽覇圖龍已去, 穆陵秋色雁初過, 山迴大陸呑三郡, 水割平原納九河, 萬里登臨日將暮, 醉憑靑嶂獨悲歌.」  明尙書錢牧齋云, 許筠與其兄筬, 筠, 以文鳴海東. 景樊其妹也.(『列朝詩集』)「謾興贈郞」. 李淑媛(이숙원) [趙瑗(조원)의 妻]  「柳色江頭五馬嘶, 半醒半醉下樓時, 春紅欲瘦臨粧鏡, 試寫纖纖却月眉.」秋思. 同人  「翡翠簾疎不蔽風, 新凉初透碧紗籠, 涓涓玉露團團月, 說盡秋情草下虫.」「詠雪次韻」. 李淑媛(이숙원)  「門閉何妨高臥客, 牛衣垂淚未歸身, 雲深山徑飄如席, 風捲長空驟若塵, 渚白非沙欺落雁, 窓明忽曉劫愁人, 江南此日梅應發, 傍水連天幾樹春.」陳臥子云許氏與李氏之作有盛唐之風.「別贈」. 兪汝舟(유여주)의 妻  「恨別逾三歲, 衣裘獨禦寒, 秋風毆短鬢, 寒鏡入衰容, 旅夢風塵際, 離愁關塞重, 徘徊思遠近, 流歎滿房櫳.」「送行」. 妓 德介(덕개)  「琵琶聲裏寄離情, 怨入東風曲不成, 一夜高堂香夢冷, 越羅裙上淚㾗明.」(以上은 『明人詩綜』)「送別」. 平壤妓 芙蓉(부용)  「關西細柳綠如絲, 願以佳緣更結之, 情話在心徒脈脈, 離杯到手故遲遲, 生前無限相思日, 別後那堪獨處時, 爲雨爲雲知未易, 江南夜夜夢中隨.」「相思詩」. 芙蓉(부용)  이 詩는 다른 長短句體와 달라서 第一聯에 一字씩, 第二聯에 二字씩 그렇게 每聯에 一字씩 漸次 增加하여 末聯에는 十八字씩으로 되었다. 그런데 이 詩를 緋緞에다가 繡 놓아서 愛人에게 보냈다고 한다.  「別, 思.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紈扇無期. 香閣鍾鳴夜, 練亭月上時. 依高枕, 驚香夢, 望歸雲 悵遠離. 日待佳期手屈指, 晨開情札泣支頤. 顔色憔悴對鏡下淚, 歌聲嗚咽撫胸含悲. 挈銀刀斷弱腸 非難事, 躡珠履 送遠瞬 更多疑. 昨不來 今不來 君何無信, 朝遠望 暮遠望 妾獨見欺. 浿江 成平陸後 鞭馬歸來否, 長林變大海初 乘船欲渡之. 好緣短惡緣長 世情無人可測, 別時多見時少 天意有誰能知. 一段香雲 楚臺雨 仙女之夢 在某, 數曲良簫 秦樓月 弄玉之情 屬誰. 不思自思 日上浮碧樓 可惜紅顔老, 欲忘難忘 更登牧丹峰 每難綠鬢衰. 孤處孀閨 然將欲舒 三生佳約寧有變, 獨守空房 淚縱如雨 百年貞心白不移. 攬香衣 推玉枕 送歌舞冶郞 總是無情客, 罷春夢 開竹窓 送花柳少年 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 待人難 甚矣君子薄情胡如時, 三時 出門望 出門望 哀哉 賤妾苦心果何其. 惟願寬厚大丈夫 决意渡江 舊情燭下 歡共對, 莫使 軟弱兒女子 含怨歸天 哀魂 月中泣相隨.」  大體로 娼妓의 詩는 怨別·相思 그 두 가지에 지나지 못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文章으로 보아서 詩 一首를 또 더 記入하는데, 作者를 모르는 것이 遺憾이다.  「霧宿花叢去, 枝枝別淚㾗, 車遲知我重, 添載一人魂.」四. 科詩  科詩의 一名을 功令이라 하는데, 그것은 登斗出身을 專主한다는 意味에서 나온 것이다. 括論에서 그 詩體의 大槪를 말하였거니와 거기에 懸韻, 排●, 起頭, 敍目의 規定이 ●히 嚴正하여 專業者가 아니고는 可能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詩人에는 英祖 때의 申光洙(이광수), 正祖 때의 趙秉三(조병삼)·桂德海(계덕해) 『國朝人物志』, 純祖 때의 金炳翼(김병익), 羅변강이 가장 著名하였으니 그러나 그 詩가 世道時務에는 아무 裨益도 없는 一種의 浮華만을 尙하는 것이라 하여 性理學派의 排擊을 當하다가 甲午更張(1894年)의 前夜에 科制와 함께 埋葬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數百年의 사이에 士人을 거기에 編入하여 「堂上書生空白頭」의 歎을 하도 많이 發하게 하던 그 詩體임에, 이제 두어篇을 들어서 後人하게 보이려고 한다.「登岳陽樓 歎關山戎馬」. 申光洙(신광수)  이 詩는 石北 申光洙(석북 신광수)가 甲科에 登하던 ●●●데, 『大東樂府』에까지 실리어 ●●叢中에 오랫동안 流行하던 것이다.  「秋工寂寞魚龍冷, 人在西風仲宣樓, 梅花萬國聽暮笛, 桃竹殘年隨白鷗, 烏巒落照倚檻看, 道北兵塵何日休, 春花故國濺淚後, 何處江山非我愁, 新浦細柳曲江路, 玉露丹楓夔子洲, 靑袍一上萬里船, 洞庭如天波是秋, 無邊草色七百里, 自古高樓湖上浮, 秋聲乍依落木天, 眼方初窮靑草洲, 西垣梧竹舊拾遺, 泣聽江南紅荳謳, 靑山白首寡婦哭, 苜蓿葡蔔胡馬啾, ●●斗酒不勝醉, 無限風●錦囊●…」「●管帳中 問置妾何地」. 金炳翼(김병익)「帳外起問劉郞家, 天地恢恢●●●, 任人一死萬古恨, 大王平生今日淚, 馬●靑上載去●, ●●三更●月四, 章草●燭問住約, 置妾中●●一地, 江山土幅好家居, 雲雨三上甘夢●, 銀●珠帳今, ●●●年王家歌舞侍, 英雄運去妾命薄, 紅淚孤城殘月●, 芳情●感九●簫, ●魂飜驚四面幟, 江東子弟盡散歸, 渠亦鄕●室家事, 靑油纔罷劍舞戲, 楚雁荆南寒語至, 君王別後寂寬魂, 男女生前慷慨觶, 乾坤窄窄楚今夜, 風雨殘粧何處寄, 輸嬴天下不幸運, 生死人間無限意, 寒衫九月妾無家, 楚小吳山如夢翠, 芳緣夜碎玉精神, 別恨春長花意思, 紅粧願成一男子, 潰圍中霄南出騎, 香魂若蹈劍頭節, 漠地靑山葬亦●.」附言  本書의 小說部門에 있어는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서 그 一般的 材料를 攝取하여 隨意分定한 것이 적지 않다.

    10 간행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1987년 開所 이래 체계적인 독립운동사 연구를 수행하는 한편, 독립운동사 자료총서를 매년 발간하여 독립운동 자료의 보급에 노력해 왔습니다. 이는 독립기념관에서 수집·전시·보존하고 있는 자료를 발굴하여 학자와 일반인들에게 널리 공개함으로써 국내외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우리민족 독립운동의 실상을 재인식케 하고, 遺失되기 쉬운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영구히 기록으로 남기려는 기록보존 사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今年에는 국내는 물론 만주와 연해주·중앙아시아 등지에서 國史 및 國語 연구와 독립운동·교육운동·언론운동에 투신했던 桂奉瑀(계봉우) 선생의 저술을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총서』 제10집으로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광복 50주년이었던 1985년 8월 한국을 방문한 계봉우 선생의 4남 桂學林(계학림) 씨와 독립기념관인 『계봉우 자료집』을 간행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국내에서 출판되는 모든 계봉우 관련 책자의 판권을 독립기념관이 갖기로 한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이번에는 우선 계봉우 선생의 저술 가운데 일부인 『꿈속의 꿈』과 『조선문학사』를 간행하고 연차적으로 나머지 저술도 자료집으로 간행할 예정입니다. 『꿈속의 꿈』은 계봉우 선생의 회고록 겸 자서전으로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선생의 귀중한 경험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학계에서도 이미 그 중요성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조선문학사』 역시 海外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文學과 民族文化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던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國學에 대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아무쪼록 이 두 저술을 시작으로 온갖 어려운 조건 가운데서도 뚜렷한 민족의식과 조국애를 바탕으로 훌륭한 國學 연구업적을 쌓으신 桂奉瑀(계봉우) 선생에 대한 재평가와 독립운동사 연구가 더욱 촉진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자료의 解題를 작성해주신 국민대학교의 趙東杰(조동걸) 교수님, 또한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선뜻 제공하신 尹炳奭(윤병석)·潘炳律(반병률)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간행을 담당하여 애쓰신 연구소 및 출판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도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1996년 12월독립기념관 관장 朴維徹(박유철)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鄭濟愚(정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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