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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이동휘] 에 대한 전체 87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이영일저|| 『이동휘성재선생』(1981.8.1)"

    1.박진순(Пак Чинсун) 2.이동휘(Ли-Донхви) 3.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Ким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4.김아파나시(Ким Афапасаи) 5.문창범(Мун-Чанбом) 처음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하고 세계에서 처음 이상적 노동국가를 창립하고 지도를 주는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전

    2 "이영일저|| 표제미상의 이동휘전기"

    1891년 봄 이독립이는 아버지 이승교의 주선으로 단천군 군청에서 원의 시종을 드는 통인(通引)이 되었다.원의 시종을 드는 통인이 된 이독립이는 원님이하 행청좌수로 비롯하여 지방 토행들까지에 악행을 친견하였고 부자, 양반들은 돈을 주고 벼슬도 사고 관청에 취임도 하지만 돈 없는 농민들과 평민들은 아무리 유식하고 인격이 탁월하여도 출세의 길이 없고 천대와 압박 속에서 고통하고 있는 것을 친히 목견 체험하였다.이에 독립이는 그들을 적대시 하였고 그들의 망행과 악행에 대한 분노심은 아버지에 교훈하여 주시던 사상과 더욱 결합하여졌다.이 시기 홍종후(洪鍾厚) 원님은 자기 생일잔치를 배설하였는데 행청 좌수 이하 지방 토행들과 양반 지주들이 원님 좌우에 좌석을 정하고 읍내에 소문난 기생들과 명창들을 불러 음률을 갖추어 술을 마시며 춤추며 놀던 날이다.이독립이는 다른 통인들과 같이 이 잔치 준비에와 원의 분부와 명령을 실행하노라고 분망히 지내던 날이다.아침부터 이 잔치를 구경하던 태양도 서산으로 넘어갔고 벌써 어두워진 황혼의 나라가 찾아온 초저녁이었다.술이 반취한 주인 홍원님은 딸 같은 기생을 무릎 위에 앉히고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며 추행과 망행을 감행한 후 술상 옆에 청동화로에서 술안주로 굽던 갈비 한 짝을 쥐어다가 싫다는 기생의 입에 밀어 넣는 이 광경을 보는 다혈기지에 이독립이는 더 참을 용기가 없었다.이독립이는 저도 모르게 범같이 뛰어 술상 옆에 놓인 불이 이글이글하는 갈비 굽던 청동화로를 들어 원의 머리에 씌워 놓았다.이독립이는 또다시 범처럼 뛰어서 담장을 넘은 후 어두워진 거리에서 사라져 버렸다.뜻밖에 생벼락을 맞은 홍원님은 정신을 잃고 자리에 쓰러지고 원님 좌우에 앉았던 귀한 손님들은 쥐새끼들이 고양이를 만난 듯이 사방으로 달아났다.통인(通引) 이독립이를 속히 잡아들이라는 홍원님의 명령은 벽력 같았으나 목 떨어지는 대죄를 범하고 달아난 이독립의 종적을 알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었다.1884년 김옥균을 선두로 조선 각 처에서 일어났던 탐관오리를 처단하던 민란과 군인폭동 봉건사회를 개량하려는 선각자들의 맹렬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르던 바 이 “갑신정변” 이후 10여 년이 지나간 1894년에 와서도 농민 전쟁은 비록 진압되었으나 곳곳에서 계속되는 민란과 새 문명을 수입하며 봉건제도를 파산하려는 선각자들의 개화운동은 더욱 맹렬하여졌다.이조 조정에서는 부득한 환경에서 국호를 대한이라 고치고 이왕(李王)은 광무황제라고 변명한 후 국가 개혁안을 접수하였다.1895년 광무황제가 전 조선 내에 광포한 개혁안은 아홉 가지로 편성되었는데 그 중요한 내막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국내에서 양반 쌍놈의 계급을 파탄하고 공사노예의 법을 폐지하매 인신매도를 엄지하고 남녀 조혼을 엄지하는 등 또는 문관 무관과 부귀 빈천에 차별이 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국가에 등용하라는 조건들이다.1895년 단천(端川)군에도 개화의 새 사상을 가진 신원이 도림하였다.새 원님이 도림한지 얼마 오래지 않아서 이독립이란 통인이 원의 생일잔치 날 원의 머리에 화로동이를 씌워놓고 달아났는데 그의 종적을 알 수 없고, 또 이 이독립이란 통인은 아직 나이 비록 어리나 남아다운 용모를 가지었고 체격이 든든하고 혈기가 양양한 청년으로 당시 소위 날뤼패에 들어 다니나 그의 의상이 남달리 고결하다는 말을 들었다.새 원님은 잠깐 생각한 후에 다음과 같은 방문을 써서 몇 곳에 붙여 놓으라고 명령을 주셨다.대죄를 감행한 이독립이는 엄형을 염려하지 말고 사회개혁의 새 상을 가진 신원이 도림하였으니 서슴치 말고 신원 앞에 출현하라는 공포이다.너매진 가느집 움 속에 숨겨있던 이독립이는 이 방이 붙어진 이튿날 신원 앞에 출현하였다.이독립이를 대면하며 본 신원은 이독립이를 서울에 처음 열리는 한성 군관학교로 파송할 것을 즉시에 결정하였다.죽을 길에 들어섰던 이독립이는 새 세상에 들어서는 첫 길이 열리어졌다.이독립의 부친 이승교는 독립이란 애명 이름을 고치고 새로 동휘(東輝)라고 관명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별호도 성재라고 지어주었다.동휘라고 지어준 이 이름에 뜻은 동녘 동(東) 빛날 휘(輝): 동쪽나라에서 빛나는 인물이 되라는 아버지의 축원(祝願)이다.이동휘 성재 선생은 1899년 우등한 성적으로 한성 군관학교를 필하였는데 즉시로 한국 육군군대 소대장이란 군명 하에 한성근위대에서 복무하였다.1900년에 창덕궁과 경복궁을 옹호하는 수비대 대장이 되었고 1901년에는 벌써 한국 육군군대 참명으로 등급 시키었다. 이와 동시에 조정에 결정에 의하여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순찰 검사하는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지정되었다.광무황제가 전 조선 내에 국가 개혁안을 선포한지 여러 해가 지났고 또 구라파(유럽)의 새 문화를 수입하려는 운동이 시작된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국내 각 처에는 양반귀족들의 흉행과 지주 고관들의 악행은 계속 전개되었다.이런 시기에 이동휘를 삼남검사관으로 파송하는 것도 조정에 선진 유지자들이 개명운동에서 난 활동투쟁이다.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 이동휘는 두 하사(下士)를 데리고 처음 충청도 옥천군에 당도하였다. 검사는 즉시로 옥에 갇힌 죄인들을 검사하여 보았는데 그 중 다수는 고관들과 지주들에 흉행에서 희생된 평민들과 농민들이었다.검사는 즉시에 그들을 무죄로 방송하는 동시에 이 군에서 제일 악독한 흉행을 감행하였다는 고관을 불리었다.검사는 고관을 대하고 과거에 모든 악행을 속임 없이 자백하라고 명령을 내리었으나 고관은 자기의 모든 악행을 부인하고 평민들과 농민들을 도와준 현관이라고 자칭하였다.이 때에 검사관은 자기 가슴에 걸리었던 망원경(望遠鏡)을 벗겨들고 고관을 보이며 이 망원경은 몇 십리 밖을 바라보면 그곳 산천이 눈앞에 와서 보이고 사람의 마음도 들여다보면 그의 모든 과거에 행사와 지금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아내는 신기한 유물이라고 설명한 후 검사는 망원경을 눈에 걸고 엄숙하게 고관을 들여다보았다.고관은 이 망원경을 처음 보았고 또 검사의 하신 말을 믿었다.겁을 집어먹은 고관은 즉시에 과거에 자기 모든 악행을 고백하는 동시에 부녀들과의 비밀관계도 속이지 못하고 다 고백하였다고 한다.이 이야기는 당시 고관들의 소유한 학식과 인격을 잘 표시하여주는 이야기다.삼남검사관 이동휘 성재 선생은 6개월 만에 검사관 책임을 필하였는데 어느 도나 어느 군을 막론하고 불법적 악행을 감행한 탐관오리들은 면직과 파직을 당하였고 엄형에 처하였으며 강탈되었던 토지와 재정은 다시 농민들과 평민들께 돌려주었다.이러한 용감한 활동투쟁에서 농민들과 평민들을 검사의 고귀한 사상과 탁월한 그의 인격을 경애하며 존경하는 반면에 귀족양반들과 고관지주들은 검사를 적대시하였고 복수하려는 분노심은 극도에 달하였다.퇴직과 엄형을 받은 귀족, 고관, 지주들은 조정에 남아있는 대감님들께 호소의 소지를 올리어 삼남검사관 이동휘의 면직과 그의 감행에 엄중한 처벌을 간청하였다.그러나 이러한 호소와 간청을 불구하고 1902년 여름 이동휘 성재 선생은 국방요색지이며 왕의 예비거처지인 경기도 강화도(江華島) 수비대 대장으로 취임시키었다.이동휘 성재 선생은 1906년까지 참령이란 군명 하에 강화도 수비대에서 복무하였다.

    3 "러문|| 이영일저|| 『이동휘 성재선샌』(1981.10.15)"

    5-6층…(원본판독불가)…

    4 "이영일저|| 『이동휘성재선생-출생일백십주년을 기념하면서-』(19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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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영일저|| 『이동휘선생서거 50주년을 기념하면서』(198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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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영일저|| 『이동휘선생 약력』(1985.1.31)"

    7 "이영일저|| 『김승화선생이 저작한 쏘베트국내의 거류하는 조선민족력사록을 읽어본 후 나의 참고와 비판』(1981.7.13)"

    본사 주소와 전화번호 480002, 알마아따시 레닌 대통로 제7번 r.AΛMA-ATA, npocnekt ΛEHHHA, 7

    8 "러문|| 메뜨베이김|| 「이동휘」|| 『원동에서 소비에뜨권력을 위한 투쟁에서의 한인국제주의자들|| 1918-1922』(1979) 附 : 번역문"

    이동휘는 조선에 침략을 강화하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의 파고가 민중 속에서 높아가고 있던 20세기 초에, 대단히 유명한 조선의 사회운동가였다. 이 불굴의 투사가 혁명사업을 위해 행했던 열정적인 강연은 조선 인민에게 커다란 인기를 모았다. 이동휘는 1873년 6월 20일 함경도 단천읍의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국왕친위대에 근무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1907년까지만 해도 그 역시 강화도의 국왕친위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강화도는 옛부터(전쟁과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국왕과 군신의 예비거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1905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조선침략은 점차 강화되었다. 곧 조선은 일본의 보호통치국이 되었다. 1907년 일본은 조선 봉건제도의 통치자들에게 조선군대의 해산동의를 얻어냈다. 나라의 운명은 식민지 착취자들의 손아귀에 들어 갔다. 이동휘는 이 사건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그 뒤 그는 다른 애국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당면한 비극을 눈여겨 보았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그를 일본 식민주의자들과 조선 봉건제도의 매판도당에 반대하는 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중요한 원인이었다. 1907년 이동휘는 강화도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폭넓은 계몽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공통의 이념들이 학교 주위에 모인 진보적 인텔리겐치아들을 결속시켰다. 점차 강화도는 조선 전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계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동휘는 이 운동으로 대단히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이동휘는 활동을 강화도에만 한정하지 않고, 여러 도시에 지부를 두고 있는 애국적인 「신민회」조직에 가담했다. 이동휘의 영향 하에 이 조직은 조선을 영구히 예속시키려고 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1911년 초, 조선합병 이후 일본인들은 신민회의 활동에 관한 단서를 발견해 냈다. 조선에 있는 이 단체의 회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었고 만주에서는 일본인들의 요구에 따라 체포가 진행되었다. 이 당시 볼셰비키 신문, 「즈베즈다(별)」는 만주에서의 조선인 애국자들의 대량체포는 조선 내부의 혁명운동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라고 기술했다. 체포된 혁명가들은 일본 고위관리들을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기소당했다. 사실 그런 계획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단체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민족독립의 회복과 조선에서 일본인들을 축출하는 것이었지 테러는 아니었다. 1912년 6월 예심은 「신민회」회원의 지지자만도 10만여 명에 달한다고 확인했다. 이 단체에 대한 괄목할 만한 인기는 이 단체의 목적 – 일본의 식민통치를 근절시키는 것 – 이 조선 인민의 진정한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신민회 지도자들 중에서 양기탁, 임치전, 김구, 안태국, 이승훈 등이 형을 선고 받았다. 체포를 면한 단체의 회원들은 만주로 망명했다. 이 당시 신민회 지도부에서는 차후 투쟁방법에 대한 문제로 심각한 갈등이 나타났다. 이동휘와 이갑이 지도하던 ‘급진파’는 항일무장시위의 빠른 전개와 간도와 연해주에 사는 조선인들의 인적 물적 자원의 규합을 지지했다. 안창호를 수반으로 하는 ‘점진파’는 이러한 행동이 시기상조라고 여기면서 우선 충분한 역량을 결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창호는 미국의 도움을 염두에 둔 조선해방안을 구상했다. 이동휘파는 만주와 러시아 극동지방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차후 투쟁의 근거지로 선택했고, 안창호파는 미국과 상해에 근거를 두었다. 그 뒤 이동휘는 「독립협의회」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이 단체는 1908년 말에 서울에서 창설되었다. 공식적으로 이 단체는 문화교육조직이었다. 이것은 조선애국자들이 합법적인 방패막이 뒷편에서 조선에 대한 외국침략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애국선전활동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동휘는 앞에서 거론된 조직들에서 체계적으로 활동하면서, 외국식민주의자들의 축출과 조선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었다. 경찰은 이동휘에게 미행을 붙였다. 곧 그는 체포되어 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유형도 그의 투쟁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동휘는 1912년에 풀려나자 더 커다란 열정으로 선전활동에 참가했다. 이로 인해 그는 대중들에게서 폭넓은 명망과 진정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1912년 이동휘가 원산시민들과 만났던 집회를 목격했던 사람들은 그 집회가 얼마나 열렬한 기쁨으로 들끓었는가를 회상하고 있다. 시민들은 당황한 이동휘를 보호하면서 이 집회에서 저 집회로 안내했다. 노동자들의 그와 같은 열광은 일본 정권과 경찰의 이동휘에 대한 한층 더 긴장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추적이 강화되자 이동휘는 1912년 말 만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간민회」에 가담했는데, 이 단체는 조선의 북부지방과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지방세포의 폭넓은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단체의 지도부는 지따고우 시(市) (만주)에서 「대종(大鍾)」이라는 신문을 발간했다. 단체의 회원들은 일본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빨치산 부대에 모든 원조를 다할 의무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일본부대와 헌병대에 대한 빨치산 부대의 기습과 소규모 전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청진에 있던 러시아 부영사, 뜨로이쯔끼는 다음과 같이 이 단체의 활동을 평가했다. “…이 단체는 대단히 영향력이 있어서 자기 조직을 폭넓게 확장해 갔다. 이 단체는 정치적 태도에 있어서 반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 듯이 항일운동에 해당하는 모든 사업을 이 단체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1911년 12월 남부 중국의 일련의 도시가 만주왕조의 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선전했을 때, 「간민회」는 중국혁명정권과, 상호지원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에 관해 협정하기 위해 상해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일본 식민정권은 긴장해서 이 단체의 활동을 계속 추적했고, 특히 이동휘를 포함한 지도자들을 감시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는 단서를 잡아서 그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13년 이동휘는 만주에서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건너가서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권업회」와 밀접한 관계를 확립했다. 성격적으로는 쁘띠부르주아적인 이 단체는 연해주 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경제적 권익을 주장하는 「권업신문」을 발간했다. 이동휘는 이 단체에 지대한 이념적 영향을 끼쳤다. 이 단체의 비용으로 만주와 조선의 인접지역에서 싸우는 빨치산 부대에 대한 실질적인 물적 원조가 충당되었다. 일본정권은 연해주에 있는 온건한 권업회가 항일활동의 중심지라고 하는 허위정보를 유포하여 차제에 항일운동의 중심지를 와해시키려는 여러가지 조치를 강구했다. 1916년 초에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이동휘와 이 단체의 다른 운동가들이 중국의 독일 첩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듯 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외교적 통로를 따라 적절한 압박이 가해졌다. 결과적으로 연해주 지방의 제정(帝政) 관리들은 「권업신문」을 폐간시켰다. 1916년 12월 「만주리아 데일리 뉴스」(중국에서 간행)라는 신문은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연해주 지방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이 작성한 듯한 「동청철도 파괴공작」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공작의 작성자들 가운데 이동휘가 거론되었다. 일본첩자들은 이 기사가 실린 신문을 좀 더 빨리 연해주 지방에 있는 러시아 헌병대의 손에 전달하려고 애썼다. 1917년 초에 이동휘는 체포되었다. 이동휘에게 치명적 위험이 닥쳤다. 일본의 외교관들은 그의 인도를 요구했다. 2월혁명 이후 연해주 지방의 러시아 임시정부 대표자들은 이동휘를 석방하지 않았다. 단지 노동자와 병사대표 극동소비에뜨의 완강한 요구로 인하여 이동휘는 석방되었다. 그는 즉시 만주로 가서 라오쯔이고우 시에서 빨치산 부대를 위한 사관학교 창설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성공했다. 이 학교에는 일본 식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빨치산부대의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들이 집결했다. 그러나 이동휘는 몇 달 지나고 난 뒤 다시 연해주로 돌아 가서 아무르지방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인 주민들과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계속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수행했고, 여러모로 애국적 분위기의 성장을 촉진했다. 위대한 사회주의 10월혁명에 관한 소식은 이동휘를 기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고무시켰다. 그는 직업혁명가의 감각으로 전(全)세계를 위한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했고 동요없이, 혁명에 승리한 러시아 노동계급의 편에 섰다. 10월혁명 이후 이동휘는 당조직과 직접적인 접촉을 확립하면서, 연해주지방의 혁명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동휘는 이미 1918년 4월 A. P. 김(스딴께비치)과 함께 「한인사회당」의 창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조직은, 그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여러 지방의 조선인들이 새로운 생활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었다. 1919년 5월 이동휘는 중국으로 떠났다. 그 해 여름 광동에서 손문과 만났다. 같은 해 6월 이동휘는 상해에 도착했다. 그곳은 당시 조선인 정치망명의 중심지들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훨씬 전에 조선인 망명정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동휘는 부재중인 상태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상해에서 조선인 망명객들은 이동휘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에게 연설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연설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조선인민의 자유와 완전한 독립을 지지하는 민족해방투쟁의 전면적 확대를 호소했다. 이동휘는 조선인 정치망명객들에게 그들이 조직한 정부를 완전한 혁명세력으로 이루어진 혁명집행위원회로 생각하자고 제안했다. 이동휘는 연설에서 독립투쟁의 가장 중요한 표어와 더불어 조선독립정부의 상징과 관계가 있는 제의를 했다. 특히 그는 「대한」이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조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또 국기를 푸른 천에 세개의 붉은 별이 있는 것으로 대체하자고 말했다.상해에 있는 몇몇 조선인 망명객들은 이동휘의 사상이 대단히 급진적이라고 생각했다. 상해에서 이동휘를 대하는 태도는 점차 대단히 소극적으로 변했다. 이동휘는 자신이 타국에서 동포들 간의 반목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명정부의 총리자리를 포기했다.이로 인해 이동휘는 1920년 조선공산당 창설준비에 전 역량을 투입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목적하에 동지들의 집단을 결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업은 늘 성공적으로 진척되지는 않았다. 정당을 결성하는 데 따르는 이론과 경험이 부족했다. 그 당시 이동휘는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 집행부에 충고와 원조를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이동휘를 수반으로 하는 사절단이 서구유럽을 통하는 우회적 통로로 러시아에 파견되었고 1921년 11월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내전에 참전한 노병 아. 아. 김(A. A. Kim)의 조선인 사절단이 모스크바에서 체류한 것에 관한 회고담이 보존되고 있다. “… 때는 1921년 11월 이었다. 나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의 관계를 위해 도착했던 조선인 사절단의 비서 자격으로 모스크바에 갔다. 우리 공산당의 차후 활동과 관계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우리는 이제 극동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떠나기 이전에 우리의 경애하는 지도자, 블라지미르 일리치를 만나보고 싶었다. 우리의 이러한 소망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의 전화신청에 대해 곧 레닌이 조선혁명가인 우리 사절단의 대표, 이동휘와 만나고 싶다는 회답이 왔다. 회견은 저녁 5시로 정해졌다. 회견에 늦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한시간 전에 끄레믈리(모스크바의 내성, 크렘린이라고도 함)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네 사람이었다. 이동휘, 홍도, 박진순, 그리고 나……. 우리는 커다란 방으로 통하는 레닌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우리 모두는 대단히 흥분했다. 여러 반대자들과 투쟁했던 백발의 이동휘도 흥분했다. 다른 동무들도 흥분했다. 나 역시 흥분해 있었다. 내 임무는 통역이었다. 문이 열렸다. …… 막역하고 자애로운 블라지미르 일리치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꿈을 꾸듯이 지도자의 손을 잡았다. 레닌은 우리의 손을 두 손으로 쥐면서 우리 모두와 따뜻하게 인사했다. 그는 조선식 악수예법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나서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조선 공산당원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등나무 팔걸이 의자에 앉더니, 그는 손짓으로 우리에게 반대편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 우리에게는 30분동안의 회견시간이 주어 졌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곧 회견에 들어갔다. 이동휘는 조선어로 말했다. 그는 우리가 레닌의 추종자로서 블라지미르 일리치를 만나러 왔기 때문에 레닌과 대단히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레닌은 미소를 띄면서 솔직하게 대담하자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 뒤 레닌은 직선적이면서도 공손하게 자신은 극동지방의 제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조선과 인접국가들의 상황에 관해 상세하게 알려줄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간결하게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의 정보전달은 간간이 블라지미르 일리치의 예기치 않은 질문으로 중단되었다. 회담과정은 대단히 푸근하고 격의없는 분위기에서 이루어 졌다. 레닌은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일본이 조선에서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식민정책에 관해 주의깊게 경청했다. 우리는 책상에 놓여 있는 지도를 펼쳐서 조선의 철도배치와 철도구간을 블라지미르 일리치에게 설명해 주었다. 또 전차노선의 부설,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공장개설 등도 알려 주었다. 레닌은 회견 중에 미래의 혁명적 사건에서 철도노동자와 전차종사자들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1923년 여름 조선 철도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발발했을 때, 나는 레닌의 의견이 예언적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블라지미를 일리치는 조선 공산주의 지하단체의 활동에 관심을 표명했다. 레닌은 1919년 3·1 봉기의 패배원인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나서, 이동휘에게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조건에 관해 캐물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문화의 중심지에서 살고 있는 이 때에 당신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추적을 당하면서 산악과 숲을 따라 표류하고 있구려. 그대들을 위해 국제적 원조를 조직해야겠군요.’ 이 때 한 여성이 들어오더니 회견시간이 지났다고 알려주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회견시간을 25분 연장하겠다고 말했다. 레닌의 책상에는 문서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서 나는 예전에 발송했던 우리의 정보문서를 지적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통 그것을 볼 시간이 없었다고 사과했다. 레닌과의 회견은 이동휘를 고무시켰고, 그가 러시아의 소비에트정권 확립을 위한 투쟁에 새로운 힘을 기울이게 했다. 또 이동휘는 이 회담을 통해, 조선인민은 단지 소비에트 러시아 노동계급의 지지와 후원으로만 사실상 독립적일 수 있다는 점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1922년 10월 19일 웨르흐네우진스끄 시에서 고려공산당(이르꾸츠끄파와 상해파)의 통합대회가 열렀다. 131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이동휘가 개회사를 했다. 그는 개회사에서 두 개의 조선공산당이 대회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모든 대표자들이 「고려공산당」의 미래의 유익한 사업을 위해 과거에 이루어졌던 오류에서 교훈을 추출해 내자고 호소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날과 조선노동대중은 이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휘는 극동지방에 사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정치선전 사업을 계속 펼쳐 가면서, 늘 일본식민주의자들의 압제에서 허덕이는 자신의 조국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될 수 있도록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자고 동포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열정적인 조선 공산주의혁명가, 이동휘는 조선해방의 기쁜 날까지 살지 못했다. 이동휘는 죽기 전까지 확고한 국제주의 투사로 남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1935년 1월에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이 조선혁명가의 영웅적 과업에 대한 추억은 오늘날까지 조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서 그렇듯이 소비에트연방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9 "러문|| 이억세|| 『메뜨베이김의 ′이동휘′에 대한 수정과 보완글』(1994) 附 : 번역문"

    57페이지 위에서 5줄 65페이지 밑에서 7줄“홍도” … “이고루(이극로)”로 정정되어야 함.47페이지 밑에서 12줄(46페이지 밑에서 9줄 … 반)“1921년 11월에” … “1921년 10월에”

    10 "러문|| 김아파나씨|| 「레닌 동무를 접견하던 감상문」(1929.1.22)"

    이영일(Ли-Енир)의 개인 기록에서1970년우르겐치일리치(Ильичем)와 우리의 만남 김 아파나시(Афанесий Ки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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