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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국민회 [문서류] [서한] 에 대한 전체 698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김제선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사무원 강영소에게 보낸 서한(1919.4.29.)

    1919년 4월 29일 김제선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사무원 강영소에게 보낸 서한이다. 김제선(金濟善)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사무원 강영소에게 태극기 2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신한민보 광고비로 2원을 보냈다.

    2 이승만과 정한경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1919.3.7.)

    1919년 3월 7일 이승만과 정한경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이다. 프랑스 파리에 가 있는 미국대표단 단장 랜싱 국무장관의 말에 의하면 한인 대표는 현재 파리에 올 수 없다고 밝히고 있어 한인 대표인 이승만과 정한경은 프랑스로 건너갈 계획을 일단 정지하고 우리 사정을 각 신문에 광포할 계획으로 우선 정한경을 먼저 뉴욕으로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파리에 있는 미국대표단을 통해 파리강화회에서 한국문제를 공식으로 다루어 줄 것을 희망하여 한인대표의 이름으로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미 국무부에 제출했음을 알렸다.

    3 차정석이 김병연에게 보낸 서한(1944.5.3.)

    1944년 5월 3일 차정석이 김병연에게 보낸 서한이다. 차정석이 부인 차정성의 장례 때에 많은 한인들이 위로해 준 데 감사를 표하고 특별히 대한인국민회에서 장례비로 150원을 보내준 데 대해 무척 감사하다는 사례를 대한인국민회 중앙상무부 총무 김병연에게 보냈다.

    4 이상길이 김병연에게 보낸 서한(1944.11.4.)

    1944년 11월 4일 이상길이 김병연에게 보낸 서한이다. 새크라멘토에서 벼농사를 하는 이상길은 의무금 15원, 신문대금 5원, 상조금 3원해서 총 23원을 납부함을 대한인국민회 중앙상무부 총무 김병연에게 알렸고, 그 외 자신이 작성한 시 한 수를 추가해 보냈다.

    5 박원걸(朴元傑)이 황사용, 강영소에게 보낸 서한(1919.7.19.)

    1919년 7월 19일 박원걸(朴元傑)이 황사용(黃思溶)과 강영소(姜永韶)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보내온 몇 가지 공문을 전달할 것이며, 임시정부의 기타 공문과 안창호(安昌浩)의 편지는 위원회에서 검토한 후 간추려서 보내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상해 임시정부의 공문과 서울에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마이어스(Myers) 양의 발언에 의하면, 이승만(李承晩)의 대통령 명의 사용은 잘못된 것이며, 이는 일제가 신흥우(申興雨)를 시켜 한국 국민들이 찬동하지 않는 대통령 명의를 이승만이 사용하게 함으로써 한국인들을 분쟁하도록 만들려 하는 책동에서 나온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6 이대위가 백일규에게 보낸 서한(1919.8.)

    1919년 8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지내다가 이승만(李承晩)의 구미위원부에서 위원을 맡아 활동하던 이대위(李大爲)가 국민회 중앙총회장 대리 백일규(白一圭)에게 국민회와 기타 제반 문제에 대해 조언한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이대위는 정한경(鄭翰景) 대우문제, 중앙총회장의 사무장 업무를 겸섭문제, 신한민보 주필 선임문제, 애국금 담당 재무 임명문제, 시카고 국민회의 구타펠(Minerva L. Gutapal) 고용유지문제, 하와이지방총회의 애국금 수합문제, 특파위원 황사용과 강영소 소환문제, 강영소의 워싱턴 구미위원부 배치와 자신(이대위)의 국민회 귀환문제, 애국금 수합시 중앙총회의 국채표 발송문제, 윤병구(尹炳球)가 중앙총회장에 피임시 발생할 분란문제, 구미위원부에서 자신을 대신할 적임자 선임문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워싱턴 구미위원부 간의 소통방안 강구문제, 상해 소식의 신속한 통지문제 등등 국민회와 미주독립운동의 중요 문제들을 백일규와 상의하였다.

    7 백일규가 황사용, 강영소에게 보낸 서한(1919.8.15.)

    1919년 8월 1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대리 백일규(白一圭)가 전권특파위원 황사용(黃思溶)과 강영소(姜永韶)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에 백일규는 1919년 7월 28일 청원서와 8월 5일 보고서를 받아보고 몇차례 논의를 거쳤으며, 금일의 시세가 황사용과 강영소가 하와이로 건너갈 때와 달라져서 이승만과 중앙총회의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인 상황을 보이는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할 필요가 생겼으며, 워싱턴 특파원 이대위(李大爲)가 국민회에 보낸 편지를 동봉하여 보내니 깊이 살펴보고 처리하여 대한인독립단 여러분께 낙망의 영향이 없을 것 같으면 지부 설립을 취소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만약 이대위의 서신을 참고한 후에도 기어이 지부 설립의 필요성이 있을 경우는 다시 전보로 보고할 것이며, 황사용과 강영소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속히 미주 국민회로 귀환할 준비를 하도록 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8 이대위가 백일규에게 보낸 서한(1919.8.8.)

    1919년 8월 8일 미주 본토의 대한인국민회를 대표하여 워싱턴에서 구미워원부의 설립에 참여하고 있던 이대위(李大爲)가 국민회 중앙총회장 대리 백일규(白一圭)에게 보낸 편지이다. 미국 상원이 한국독립운동에 큰 동정을 표하는 등 워싱턴에서 외교독립운동이 원활히 추진되고 있고, 헐버트(Homer B. Hurbert) 박사가 한국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많은 곳에서 연설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유럽에서 활동중인 김규식(金奎植). 여운홍(呂運弘) 양인이 8월 20일 미국에 도착할 예정이며, 서재필(徐載弼)이 자신(이대위)의 워싱턴 체류를 강하게 원하고 있고, 이승만(李承晩)이 자신에게 대소사를 맡길 생각을 품고 있으니 이는 국민회에 크게 다행한 일이다 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9 윤병구가 이대위에게 보낸 서한(1919.6.16.)

    1919년 6월 16일 윤병구(尹炳求, P. K. Yoon)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사무장 이대위(李大爲, David Lee)의 6월 9일자 편지에 대한 회답 편지이다. 윤병구는 이대위의 그간의 도움에 감사하며 자신이 구상하는 사업을 위해 이대위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한 적이 없다는 점, 워싱턴에는 2천만 한국인을 돕기 위한 조직적인 노력을 찬동하는 분위기가 강하다는 점, 한국을 돕기 위해 창설된 한국친우회가 워싱턴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자신이 워싱턴 한국친우회의 결성을 통해 미국 친구들을 돕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 워싱턴의 부유하고 저명한 인사들을 한국친우회에 가담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 이대위가 사직서를 제출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국민회가 해 오던 사업을 계속하기 바란다는 점 등을 전달하였다.

    10 윤병구가 이대위에게 보낸 서한(1919.7.14.)

    1919년 7월 14일 윤병구(尹炳求, P. K. Yoon)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사무장 이대위(李大爲, David Lee)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한국 관련 뉴스를 전송하자는 주장은 지난 편지에서 이미 말했기 때문에 재론하지 않을 것이며, AP통신을 비롯한 통신사들은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미국과 타국의 유력 언론사들도 워싱턴에 특파원을 두고 있으며, 미국 이외 지역에서는 신문기자도 거의 없기 때문에 뉴스를 전 세계인에게 최대한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뉴스 전송을 제안했으며, 뉴스 전송은 비용 대비 파급 영향력이 훨씬 클 것이라는 것 등을 언급하였다. 이어 승용환(承龍煥) 문제와 관련하여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미본토로 가기 전 하와이지방 총회장 이종관(李鍾寬)이 이승만에게 승용환을 만나면 그를 국민보(Korean National Herald) 주필로 임명하려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점, 승용환은 이승만의 부탁이 아니라 하와이 한인들의 부탁을 받고 국민보 주필이 되었다는 점을 언급했으며, 이승만의 하와이 지도자 모욕문제와 관련해 이승만은 절대로 그런 일을 범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이승만은 전보와 편지로 하와이 한인들의 우호 증진을 역설하고 통합을 촉구했다는 사실, 따라서 이승만이 승용환과 손창희(孫昌熙) 문제 때문에 비판이나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 등을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