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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국민회 에 대한 전체 4117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691 이종국이 낙클린에게 보낸 서한(1909.2.21.)

    1909년 2월 21일 이종국(李鍾國)이 낙클린에게 보낸 편지이다. 1) 이종군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화재 후 화재민에게 손해금을 분급해 줄 때 자신이 홍콩으로 나가는 바람에 수령하지 못했음을 거론하며, 2) 자신 몫의 손해금이 아직 닉클린의 소관하에 있다고 하니 이를 환송해 주던가 아니면 서필순(徐弼淳)에게 출급해주던가 양단간 처결하라고 요청하였다.

    692 대한인국민회에서 James Rolph Jr. 변호사에게 보낸 서한(1911.9.28.)

    1911년 9월 28일 대한인국민회가 랄프(James Rolph Jr.)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국민회는 1) 랄프가 샌프란시스코시에서 고위직에 선출된 것을 축하하고, 2) 랄프가 샌프란시스코시를 도덕적, 상업적으로나 시민의식 면에서 향상시킬 사업을 추진할 것임을 확신하며, 3) 샌프란시스코시를 발전적인 공동체로 만드는 일을 선도하려는 랄프의 노력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693 Official committee for the Reception of the Fleet가 최정익에게 보낸 서한(1908.4.21.)

    1908년 4월 21일 Officail Committee for the Reception of the Fleet가 최정익에게 보낸 편지이다. 1) 대한인국민회가 미함대환대위원회에 기부금 100$를 희사한 것에 대해 무사히 접수되었으며, 2) 재정위원회는 기부해주신 성의에 깊이 감사하며, 최정익을 통해 국민회에 감사가 전달되기를 희망했으며, 3) 100$에 대한 영수증은 1-2일내에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694 주러공사 이범진이 경성(서울)청년회에 보낸 서한(1910.11.28.)

    1910년 11월 28일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이 경성(서울)청년회에 지원금을 내려주며 함께 보내준 편지이다. 이범진은 1) 한국이 패망해도 구미 열강은 도와줄 생각 없이 수수방관하고 있으나 한국에는 양병흥복(養兵興復)의 방책이 없으며, 2) 망국 후 죽지 못하고 복수를 시도해봤으나 힘이 다하고 말았다고 한탄한 다음, 3) 현재 복수하고 나라를 되찾을 가장 시급한 방책은 청년교육이므로 청년교육을 위해 경성청년회에 500원을 부송한다고 하였다.

    695 주러공사 이범진이 보낸 서한(1912.12.9.)

    1910년 12월 9일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이 서울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범진은 1) 망국 후 오장이 기능을 잃고 백병(百病)이 스며들어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처지라서 총재(總裁)의 중임을 맡을 수 없으며, 2) 백방으로 주선해도 흥복(興復)과 복수의 방책이 없어서 오직 죽고 싶을 따름이라고 한탄하고, 3) 예전에 올린 상소문에는 자신의 우국의 빙책이 담겨 있으며, 4) 근자에 청년회에 편지를 보낸 것은 여생에서 최후의 행동임을 토로하였다.

    696 주러공사 이범진이 고종황제에게 올린 상소문(1903.9.)

    1903년 9월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이 고종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1) 고국을 떠나 구미 5개국을 떠돈 지 8년에 몸은 상하여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해도 팔순의 노모가 자식의 귀환을 고대하고 있으며, 2) 열강의 중병(重兵)정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나 내치를 저버리고 외원(外援)만 추구하는 대한의 정치불립(政治不立)을 가장 우려했으며, 3) 제반 도감 혁파, 토목사업 정지, 매관매직 차단, 기도와 음사(淫祀)의 일체 타파, 재용절약과 재정의 탁지부로의 일원화, 관리등용 신중, 외교정책의 평형감 유지 등 많은 건의사항을 아뢰고 고종황제에게 사직을 청하였다.

    697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지방회 차정석이 북미총회장 강명화에게 보낸 보고서(1913.2.8.)

    1913년 2월 8일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지방회 회장 차정석(車貞錫), 서기 정영도(鄭永道)가 북미지방총회장 강명화(姜明化)에게 보낸 보고서이다. 1) 리버사이드 거류동포는 43명이며, 2) 물품조사 보고가 미흡해 다시 조사토록 했으며, 3) 함남 원산항 거주하던 이약한(李約翰)의 입회를 승낙하고, 4) 모든 회원을 소집하여 정신개량 훈련을 실시하며, 5) 회장, 부회장, 총무 선출을 위해 투표하고, 6) 의무금 수전인 2인을 택정하였다.

    698 한인거류민총회 외무서기 정희원이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에게 보낸 통지문(1910.4.10.)

    1910년 4월 10일 한인거류민총회 외무서기 정희원이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에게 보낸 통지문이다. 1) 김창화가 조기수와 화차 노동 중 사망하여 정희원, 조기수, 이희순, 정문옥 4인이 김창화를 청년회 묘지에 안장하고 변호사를 고용하여 재판을 시작했으며, 2) 재판시작 동기는 피살자 친척에게 구휼금을 마련해주자는 것이며, 3) 현재 재판을 중지한 것은 김창화 가정을 확실히 파악하고, 또 친척에게 소송 대리권을 얻은 후에야 재판을 시작할 것이니, 5) 김창화 가족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가 있으면 통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699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지방회 보고(1913.4.12.)

    1913년 4월 12일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지방회 회장 차정석(車貞錫), 서기 정영도(鄭永道)가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에게 보낸 보고서이다. 3.1-4.12까지의 경과사항은 1) 리버사이드를 떠난 인원 14인, 남은 인원 9인, 학생 3인, 2) 회관을 다시 건설하고, 3) 의자 15개 마련을 결정한 일 등을 보고하였다.

    700 안창호가 이대위와 여러 동지들에게 보낸 서한(1913.4.19.)

    1913년 4월 19일 '최정익사건' 해결을 위해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지방을 시찰 중인 안창호가 이대위와 여러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1) 다뉴바 동포들은 안창호 도착 전 '최정익사건'으로 개회하고 그 결과를 총회에 보고했으며, 2) 안창호는 최정익사건에 대해 상항의 생각대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하고, 4) 다뉴바 동포들은 이미 상항에 보고했으니 '새 의견'에 서명을 못하겠다고 하나, 그중 징역형을 찬동하며 서명한 이가 14인이고, 공회 유지와 신문 간행을 동정하고 서명한 이가 19인이나 되었으며, 5) 안창호는 이 사건을 타지방에서 증명해 보이기 위해 4월 19일 시탁턴으로 떠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