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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신채호] [단재신채호전집1권] 에 대한 전체 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朝鮮史(조선사)

      歷史란 무엇이뇨. 人類社會의 「我와 非我」의 鬪爭이 時間부터 發展하며 空間부터 擴大하는 心的 活動의 狀態의 記錄이니 世界史라 하면 世界人類가 그리 되어 온 狀態의 記錄이며 朝鮮史라면 朝鮮民族이 그리 되어 온 狀態의 記錄이니라.  무엇을 「我」라 하며 무엇을 「非我」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主觀的 位置에 선 者를 我라 하고 그 外에는 非我라 하느니, 이를테면 朝鮮人은 朝鮮을 我라 하고 英·露·法·美(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 … 等을 非我라 하지만 英·美·法·露(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 等은 각기 제 나라를 我라 하고 朝鮮은 非我라 하며, 無産階級은 無産階級을 我라 하고 地主나 資本家 … 等을 非我라 하지만, 地主나 資本家 … 等은 각기 제 붙이를 我라 하고 無産階級을 非我라 하며 이뿐 아니라 學問에나 技術에나 職業에나 意見에나 그밖에 무엇이든지 반드시 本位인 我가 있으면 따라서 我와 對峙한 非我가 있고 我의 中에 我와 非我가 있으면 非我 中에도 또 我와 非我가 있어 그리하여 我에 對한 非我의 接觸이 煩劇할수록 非我에 對한 我의 奮鬪가 더욱 猛烈하여 人類社會의 活動이 休息될 사이가 없으며 歷史의 前途가 完結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歷史는 我와 非我의 鬪爭의 記錄이니라.  「我」나 我와 相對되는 非我의 我도 歷史的의 我가 되려면 반드시 兩個의 屬性을 要하나니.  (一) 相續性이니, 時間에 있어서 生命의 不絶함을 謂함이요,  (一) 普遍性이니, 空間에 있어서 影響의 波及됨을 謂함이라.  그럼으로 人類 말고 다른 生物의 我와 非我의 鬪爭도 없지 않으나, 그러나 그 「我」의 意識이 너무 微弱 - 或 絶無 - 하여 相續的 普遍的이 못됨으로 마침내 歷史의 造作을 人類에 뿐 讓함이라. 社會를 떠나서 個人的의 我와 非我의 鬪爭도 없지 않으나 그러나 그 我의 範圍가 너무 狹小하여 또한 相續的·普遍的이 못되므로 人類로서도 社會的 行動이라야 歷史가 됨이라. 同一한 事件으로 兩性 - 相續·普遍 - 의 强弱을 보아 歷史의 材料될 만한 分量의 大小를 定하나니. 이를테면 金錫文(김석문)이 三百年 前에 地圓說을 唱道한 朝鮮의 學者이지만, 이를 「브루노」의 地圓說과 같은 同樣의 歷史的 價値를 쳐주지 못하는 것은, 彼는 그 學說로 因하여 歐洲(유럽) 各國의 探險熱이 狂騰한다, 「아메리카」의 新大陸을 發見한다 하였지만, 此는 그런 結果를 가지지 못함이라. 鄭汝立(정여립)은 四百年 前에 君臣綱常說을 打破하려 한 東洋의 偉人이지만, 이를 民約論을 著作한 「루소」와 同等되는 歷史的 人物이라 할 수 없음은, 當時에 多少間 鄭說의 影響을 입은루소 釖稧나 兩班殺戮稧 等의 電光一閃의 擧動이 없지 않으나, 마침내「루소」 以後의 波濤壯濶한 프랑스 革命에 비길 수 없는 까닭이라.  非我를 征服하여 我를 表彰하면, 鬪爭의 勝利者가 되어 未來 歷史의 生命을 이으며, 我를 消滅하여 非我에 貢獻하는 者는 鬪爭의 敗亡者가 되어 過去 歷史의 陳跡만 끼치나니. 이는 古今 歷史에 바꾸지 못할 原則이라. 勝利者가 되려 하고 失敗者가 되지 않으려 함은 人類의 通性이거늘, 매양 豫期와 違反되어 勝利者가 아니 되고 失敗者가 됨은 무슨 까닭이뇨? 무릇 先天的 實質부터 말하면 我가 생긴 뒤에 非我가 생긴 것이지만, 後天的 形式부터 말하면 非我가 있은 뒤에 我가 있나니. 말하자면 朝鮮民族 - 我 - 이 出現한 뒤에 朝鮮民族과 相對되는 苗族·支那(중국)族 等-非我-이 있었으리니. 이는 先天的인 것에 屬한 者이다.  그러나 만일 苗族·支那(중국)族 等 - 非我 - 의 相對者가 없었다면 朝鮮이란 國名을 세운다, 三京을 만든다, 五軍을 둔다, 하는 等 - 我 - 의 作用이 생기지 못하였으리니. 이는 後天的인 것에 屬한 者라. 精神의 確立으로 先天的의 것을 護衛하며 環境의 順應으로 後天的의 것을 維持하되, 兩者의 一이 不足하면 敗亡의 林에 歸하는 故로 猶太의 宗敎나 突厥의 武力으로도 沉淪의 禍를 免치 못함은 後者가 不足한 까닭이며, 南美의 共和와 埃及(이집트) 末世의 興學으로도 衰頹의 患을 救치 못함은 前者가 不足한 까닭이니라.  이제 朝鮮史를 敍述하려 하매, 朝鮮民族을 我의 單位로 잡고  (가) 我의 生長發達의 狀態를 敍述의 第一 要件으로 하고 그리하여    (一) 最初 文明의 起源이 어디서 된 것,    (二) 歷代 疆域의 伸縮이 어떠하였던 것,    (三) 各 時代 思想의 變遷이 어떻게 되어 온 것,    (四) 民族的 意識이 어느 때에 가장 旺盛하고 어느 때에 가장 衰退한 것,    (五) 女眞·鮮卑·蒙古(몽골)·匈奴 等이 본디 我의 同族으로 어느 때에 分離되며 分離된 뒤에 影響이 어떠한 것,    (六) 我의 現在의 地位와 興復 問題의 成否가 어떠할 것 等을 分敍하며,  (나) 我와의 相對者인 四隣 各族의 關係를 敍述의 第二의 要件으로 하고 그리하여    (一) 我에서 分離한 匈奴·鮮卑·女眞·蒙古(몽골)이며, 我의 文化의 襁褓에서 자라온 日本이 我의 巨×이 되던 아니 되어 있는 事實이며,    (二) 印度는 間接으로 支那(중국)는 直接으로 我가 그 文化를 輸入하였는데 어찌 하여 그 輸入의 分量을 따라 民族의 活氣가 여위어 疆土의 範圍가 줄어졌나,    (三) 오늘 以後는 西歐의 文化와 北歐의 思想이 世界史의 中心이 된바, 我朝鮮은 그 文化思想의 奴隸가 되어 消滅하고 말 것인가? 또는 그를 詛嚼하며 消化하여 新文化를 建設할 것인가? 等을 分敍하여 右의 (가), (나) 兩者로 本史의 基礎를 삼고,  (다) 言語·文字 等 我의 思想을 表示하는 연장의 그 利鈍은 어떠하며 그 變化는 어떻게 되었으며,  (라) 宗敎가 오늘 以後에는 거의 價値 없는 廢物이 되었지만, 古代에는 確實이 一民族의 存亡盛衰의 關鍵이었으니 我의 信仰에 關한 趨勢가 어떠하였으며,  (마) 學術·技藝 等 我의 天才를 發揮한 部分이 어떠하였으며,  (바) 衣食住의 情況과 農商工의 發達과 田土의 分配와 貨幣의 制度와 기타 經濟組織 等이 어떠하였으며,  (사) 人民의 遷動과 繁殖과 또 疆土의 伸縮을 따라 人口의 加滅이 어떻게 된 것이며,  (아) 政治制度의 變遷이며,  (자) 北伐進取의 思想이 時代를 따라 進退된 것이며,  (차) 貴賤貧富 各 階級의 壓制하며 對抗한 事實과 그 盛衰消長의 大勢며,  (카) 地方自治制가 太古부터 發生하여 近世에 와서는 形式만 남기고 精神이 消亡한 因果며,  (타) 自來 外力의 侵入에서 받은 巨大의 損失과 그 反面에 끼친 多少의 利益과,  (파) 匈奴·女眞 等의 一次 我와 分離한 뒤에 다시 合하지 못한 疑問이며,  (하) 從古 文化上 我의 創作이 不少하나 매양 孤立的 斷片的이 되고 繼續的이 되지 못한 怪因 等을 힘써 參考하며 論列하여, 右의 (다) (라) 以下 各種 問題로 本史의 要目을 삼아 一般 讀史者로 하여금 거의 朝鮮 面目의 萬分 一이라도 알게 될까 하노라.

    2 간행사

    단재 신채호 선생은 언론인·사상가·역사학자·독립운동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한국근대사의 거목입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단재(신채호)의 자취가 여전히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남다른 기개와 포부, 투철한 독립의지를 가졌던 단재(신채호)는 후대는 물론 당대에도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 단재(신채호)의 저작을 모은 자료집이 이미 발간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빠진 것도 많고, 오류도 보여 전면적인 보완, 개정 작업이 요구되어 왔습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단재(신채호)의 순국 70주년을 맞이한 2006년부터 단재(신채호)의 유고와 논찬을 총망라한 전집 편찬을 계획, 추진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구국운동기와 일제 강점하 독립운동기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고,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꿈꾼 대표적 민족지성인 단재(신채호)의 고뇌와 투쟁의 역정을 후대에 길이 전하려는 소명의식도 함께 작용했습니다.  광범위한 활동영역과 심오한 사상, 다양한 이념 편력을 가진 단재(신채호)이기에 그 자료를 집대성하여 전집을 편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계의 권위자로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찬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내외에 산재한 미 발굴 자료를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하고, 기존 자료에 대한 엄정한 고증을 거쳐 정성껏『단재 신채호전집』발간을 추진하여 왔습니다.  그 첫 결실로 우선 역사, 전기 편 4권을 발간합니다. 올해는 광무황제가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과 인류 평화를 호소한 지 1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당시 누구보다도 앞장서 언론과 사회단체, 그리고 역사연구를 통해 힘차게 구국운동을 펼친 단재(신채호)이고 보면, 올해 전집 편찬이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상황은 단재(신채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더욱 깊게 합니다. 발밑에서는 과거 한국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일본의 역사왜곡이 계속될 뿐만 아니라 동양의 맹주로 발돋움하려는 군사대국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는 중국이 중화주의로 회귀하면서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의 역사까지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의 망치소리가 머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위아래로부터 한국사가 협공을 당하고,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갈구했던 인도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전집』 역사, 전기 편 4권의 발간이 지닌 민족적 함의는 이로 인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한국사 연구를 통해 민족의 활로를 개척한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거기에 담긴 민족지성의 고뇌와 혜안을 통해 민족 통일과 자존의 길을 찾아가는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전집』 발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윤병석 편찬위원장과 편찬위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전집 간행을 위해 애쓴 연구원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입니다.2007년 8월독립기념관장 김삼웅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한시준

    3 편찬사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한국근대사학을 선도한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또한 그는 애국계몽운동과 그를 이은 항일민족언론을 주도한 언론인이며, 저상하는 민족정기를 환기하는 민족문학을 개창한 문인이다. 그보다도 불요불굴의 민족주의 사상을 견지한 단재(신채호)는 일제 침략으로 유린된 국권의 회복과 조국 광복을 위하여 강직하고도 철저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이다.   단재(신채호)는 1880년 충청도 대덕군 산내(山內)에서 태어나 조실부형하고 8세 때, 고향 청원군 낭성(琅城)으로 이사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낸 조부 신성우(申星雨) 밑에서 전통 한학을 공부하여 14세 무렵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나 인근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18세 때에는 개화파 재상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며 그가 소장한 신구서적을 섭렵하고, 그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 3년간 관내에서 기숙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에 머문 것이 아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고 불교에도 일가견을 이룬 것이었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대담하게 신사조를 수용하여 개화혁신과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근대 계몽사상가로 급부상하였다.   26세 때인 1905년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신규식·신백우 등과 산동학당(山東學堂)을 개설, 신교육운동에 솔선하였다. 얼마 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초빙되어 격렬한 항일 논설로 구국언론을 펴기 시작하였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이 빌미가 되어 그 신문이 폐간되자 양기탁이 주관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옮겨 박은식을 이어 대한제국 최후의 구국언론을 선도하였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대한매일신보』에 새로운 ‘조선사(朝鮮史)’의 정립을 시도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 민족주의 사학의 단초(端初)를 열었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전기물 『을지문덕』·『수군제일위인이순신』·『이태리건국삼걸전』을 저술, 구국을 위한 애국심 고양에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단재(신채호)는 양기탁·이동녕·박은식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하여 대한제국 최후의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단재(신채호)는 31세 때인 1910년 국망을 앞두고 신민회 동지와 전후하여 망명길에 올라, 그해 6월 청도회담을 거쳐 국치일 전후 러시아 연해주에 첫 망명지를 정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그 곳에서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를 계승한 『대양보(大洋報)』를 어렵게 간행하다가 권업회 창설에 가담, 언론부장으로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을 맡아 국외에서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또한 서북간도와 국내를 연계하는 광복회(光復會)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3년 남짓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단재(신채호)는 1913년 여름 신규식의 초청에 따라 북만주를 거쳐 중국 상해로 활동지를 옮겼다. 그 후 단재(신채호)는 1936년 2월, 57세를 일기로 일제의 여순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4반세기 동안의 망명생활을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때로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지인 남만주 서간도 지방을 왕래하면서 조국 광복투쟁의 최전선에서 헌신하였다. 그 중 3·1운동(1919) 이전에는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면서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청소년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어 1914년에는 윤세복의 초청으로 고구려의 흥기지인 서간도 회인(懷仁)에 가서 대종교에 입교도 하고, 『조선사(朝鮮史)』를 지어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1년 남짓 머문 그 곳에서 원근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을 비롯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 실측하고 백두산에 올라 고대사의 영광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그 후 북경에 돌아와 『중화보(中華報)』와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여 호구하면서, 국사연구에 전심하였다. 그런 중에도 조국광복을 위한 망국민의 애국심을 분발시킬 중편소설 『꿈하늘(夢天)』과 『용과 용의 대격전』을 비롯하여 망명전 국내에서 발표한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의 뜻을 이어가는 애국 시문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40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1919)을 맞은 단재(신채호)는 조국독립을 확신하고, 상해에 달려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이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여운형·장덕수 등의 ‘도일행적’ 등에 반대하여 임시정부를 떠나,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임시정부의 외원중시의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하였다. 1921년에는 북경에서 박용만·고일천 등과 제이 보합단(普合團)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의 강화를 기도하는 한편 김창숙과 『천고(天鼓)』를 창간, 독립사상 고취와 한중공동항일투쟁에 진력하였다. 한편 박용만·신숙 등과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 감투하는 독립군의 군사통일운동을 일으켜, 독립전쟁의 결행을 통한 혈전(血戰)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1923년 초부터 그 해 5월말 까지 국내외 각지에서 모인 국민대표자들은 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의 이념과 전술, 지도체제 등 여러 현안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두고 개조파와 창조파로 갈려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 때, 단재(신채호)는 박용만·신숙 등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도 섞인 창조파의 주동자로 활동하였다. 창조파는 개조파의 퇴장 불참속에 회의를 속개하여 새로 창조하려는 한정부(韓政府)의 헌법까지 제정하고 기존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문에 추대되고 김규식을 수반으로 한 ‘조선공화국정부’도 결국 해체되어 독립운동사상 큰 상처만 남겼다.   단재(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보다 약간 앞서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의열단선언(義烈團宣言)」이라고도 하는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 독립운동사상 불후의 문자를 남겼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전후에 걸쳐 그의 민족주의 사상을 이론으로 전개한 명론탁설(名論卓說)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민족주의 사상 내지 민족운동의 전술로 극치를 이룬다고 논찬되는 이 「조선혁명선언」은 민족주의 운동이 ‘민중(民衆)’의 기반 위에 서야 할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폭력(暴力)’만이 그 단계에서 가장 유효적절한 전술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이른바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은 물론이요, 이른바 ‘외교호국론(外交護國論)’까지도 철저하게 비판하고, 이어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武器)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악수하며 부절(不絶)하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朝鮮)을 건설할 지니라”라고 하는 ‘민중의 직접 폭력혁명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당시 승승장구하던 일제와의 투쟁에서는 단연코 여러 가지 민족주의 운동 가운데서도 빛나는 혁명이론으로 칭예(稱譽)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말 이래 단재(신채호)의 ‘신민론(新民論)’을 기반으로 한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을 민중의 직접 혁명이론으로 진일보시킨 전술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1925년 전후로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에 경도하기 시작하여 1927년에는 동방 9개국 대표가 모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그 대회 선언문까지 작성하였다. 또한 그 대회 결의에 따라 실천운동에도 가담, ‘외국위체변조사건’에 연루되어 대만 기륭(基隆)항에서 일제 경찰에게 잡혀 공판정에서 10년 형을 받고, 한말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그 여순감옥에서 8년여를 복역하다 옥사 순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 운동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독립’을 전제로 하고, 그를 성취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의 이념과 전술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최후 공판 진술에서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라고 의연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망명지에서 남긴 돌출한 단재(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저술과 웅혼한 역사문학의 작품들은 이와 같은 격동과 혈투의 독립운동 시절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진 것이다. 더욱이 망명 직후부터 항상 신변에 뒤따른 신병과 궁핍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민족주의 사상의 정립을 위한 남다른 각고 속의 이룩한 연구 결정들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1924, 5년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를 비롯한 일련의 연구 논술인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와 1931, 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및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등은 단재(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작으로 논찬되고 있다. 또한 문예 작품면에서도 1916년에 창작한 항일 독립의식을 형상화한 『꿈하늘(夢天)』을 이어 1928년에 이르면 민중혁명의 꿈과 이념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용과 용의 대격전』이란 우화적 사상소설을 창작, ‘문호(文豪)’의 위상을 보였다.   단재(신채호)는 죽음에 이르게 한 열악한 환경의 옥중에서도 역사 연구의 열정은 식지 않아 출옥하면 『조선사연구초』 등 국내 신문의 연재물의 보완 수정을 기약하였고, 그 때까지 기술하지 못한 『대가야천국고(大伽倻遷國考)』와 『정인홍공략전(鄭仁弘公略傳)』 등의 복고(腹藁)도 간직하고 있었다.   단재(신채호)가 옥사한 후 『신동아』, 『삼천리』, 『조광』 등 언론 잡지에서는 그의 지우와 동지들인 정인보·홍명희·안재홍 등의 단재(신채호) 논찬 글들이 모아져 추모특집이 마련되었다. 특히 단재(신채호)의 성균관 동학인 변영만에 의하여 단재(신채호) 전기도 쓰여졌다. 또한 한용운·최범술·신백우 등에 의하여 『단재신채호유고집』의 간행도 시도되었다. 그러나 식민지하 주변사정으로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국내외에서 단재(신채호)의 기념사업과 유고집 간행사업이 활기를 띄었다. 또한 학계에서 단재(신채호)의 연구성과도 쌓여가게 되었다. 순국 36년을 맞이한 1972년에는 ‘단재전집간행위원회’에서 문화공보부의 지원을 받아 『단재신채호전집(丹齋申采浩全集)』 상하 2권이 간행되고, 곧 『보유편』 1권도 속간되었다. 이어 1977년에는 이를 보완하여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중하 3권과 『별집』이 천관우의 교열을 거쳐 간행되어 단재(신채호) 연구의 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60주년을 넘기는 현시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단재(신채호)의 헌양사업과 연구업적에도 불구하고 ‘사학의 거벽’이며 ‘문예의 문호’로 칭예되는 단재(신채호)의 학덕과 ‘민족언론의 선봉’이며 ‘독립운동의 전범(典範)’으로 지목되는 그의 사상과 행적 입증에는 불비하고 미진한 면이 적지 않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아무래도 그의 국내외에서 저작한 유문의 수집정리와 애국적 행적 추구가 철저하고 완벽하지 못한 점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해방과 더불어 밀어닥친 좌우의 이념대립과 남북분단 그리고 6·25 전란 등을 겪고도 그대로 지속된 냉전체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행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서냉전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아 망명지 러시아 연해주와 남북만주를 포함하는 중국과의 학술적 교류도 열렸다. 한편 몹시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북한과의 왕래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지난 2006년 온 국민의 관심이 크며 남북한이 함께 존경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60주기를 맞아 현 시점에 알맞은 새로운 『단재신채호전집』의 편찬, 간행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예산 확보와 함께 다음과 같이 독립기념관 연구진과 학계의 전문학자들로 ‘단재신채호 전집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내외에 걸친 철저한 자료수집과 체계적 전집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다.   위원장 윤병석(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위원 김삼웅(전 독립기념관 관장), 김영호(유한대학 학장), 김용달(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김주현(경북대학교 교수), 박걸순(충북대학교 교수), 신용하(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이호룡(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책임연구원), 최광식(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최기영(서강대학교 교수), 최원식(인하대학교 교수), 최홍규(전 경기대학교 교수), 한시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간사 박민영(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조범래(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김주용(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윤종문(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그 후 편찬위원회는 현재까지 10여회에 걸친 편찬위원회의를 개최하며 자료수집 방향과 편찬방침 및 편찬분담, 편찬물 교열 등을 심의하였다. 그 중 편찬방침은 첫째, 이미 편찬 간행된 전집 내용과 그동안 독립기념관에서 수집한 자료를 정밀 점검하면서 국내외에 걸친 미수집 자료의 수집정리에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특히 최초 망명지였던 연해주와 오랜 활동지였던 중국 및 근년에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 소재 자료수집에 유념하여 가능한 수집 방법을 여러모로 모색하게 되었다. 『용과 용의 대격전』을 비롯한 여러 문예 작품과 그 밖에 유고들이 적지 않게 북한에 전래되고 또한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의 단재(신채호) 연구와 저작류들이 발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들 자료들을 가능하면 남북공동편찬이라도 추진하여 간행하는 방법까지도 모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외자료의 수집을 위하여 연구소의 박걸순·김주용 연구원은 몇 차례 관계지역을 출장하여,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아직은 성과가 나타자지 않았다.   둘째, 단재(신채호) 전집에 수록 범위는 그동안 간행·미간행을 물론하고 단재(신채호)가 남긴 시문을 비롯한 모든 저작을 종합하여 역사와 전기·사론·논설·문학 등으로 분류, 편찬하고, 한편 『신대한(新大韓)』, 『천고(天鼓)』 등과 같이 단재(신채호)가 직접 집필도 하고, 편찬간행한 신문잡지도 원형대로 수록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의 애국적 행적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애국계몽운동 이래 망명 후 연해주와 남북만주를 포함하는 중국 대륙에서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도 종합 수록하였다. 아울러 단재(신채호) 사후 단재(신채호)의 지기와 동지들의 단재론도 정리, 연보와 함께 수록하였다.   셋째, 편찬방법은 단재(신채호) 저술의 원고와 처음 활자화 한 원전을 중시하여 원고는 물론, 신문·잡지 또는 단행본 등으로 활자화된 것과 필사본까지도 원전대로 영인수록하고, 독자의 판독을 돕기 위하여 그 저작 말미에 컴퓨터 활자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띄어쓰기한 직해본을 붙였다.   편찬위원회는 이와 같이 지난 2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단재 신채호의 저술 유문과 행적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는 새로운 『단재신채호전집』 편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연차사업으로 착수한 이 사업은 지난해 8월에 먼저 제1권 『조선상고사』와 제2권 『조선사연구초』, 제3권 『독사신론』 『대동제국사서언』 『조선상고문화사』 등 3권의 역사편과 제4권 『을지문덕』 『수군제일위인이순신』 『동국거걸최도통』 『이태리건국삼걸전』 등의 전기편을 편찬, 간행하였다. 또한 금년들어 제5권 신문·잡지, 제6권 논설·사론, 제7권 문학, 제8권 독립운동, 제9권 단재론·연보를 편찬하여 이제 전 9권의 새로운 『단재신채호전집(丹齋申采浩全集)』 간행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하나 같이 단재(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을 대표하는 중요 저술들과 웅혼한 역사문학을 포함한 유문을 집대성한 것이다. 또한 단재(신채호)의 국내외에서의 애국적 자취를 밝힐 관련 자료를 수합한 것이다. 그 중 제3권의 『대동제국사서언』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의 필사본을 처음으로 수집, 수록한 것이고, 이밖에도 제5, 6, 7권에는 종래 알려지지 않았던 단재(신채호)의 갖가지 유문이 국내외에서 새로 수집, 정리된 것이 포함되었다.  각 권의 편찬·교열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담당연구원과 관련위원이, 해제는 제1권 이만열, 제2권 박걸순, 제3권 신용하, 제4권 최홍규, 제5권 최광식, 제6권 김삼웅, 제7권 김주현, 제8권 윤병석, 제9권 최기영 위원이 각각 담당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에서 새로 간행되는 이 『단재신채호전집』이 단재(신채호)연구를 크게 심화시킬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수난과 혈투 속의 자존’으로 상징되는 한국근대사를 올바로 체계화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2008년 4월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위원장 윤병석

    4 범례

    • 목차는 원전을 그대로 따랐다. 원전에서 순서가 달리 나올 경우 바로 잡아 정리하였다.• 『朝鮮史』는 1931년 6월~10월까지 『朝鮮日報』에 연재된 것을 영인 수록하였다.• 『朝鮮上古史』는 1948년 鐘路書院에서 간행한 것을 영인 수록하였다.• 새 활자본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원전을 활자화한 것이다.• 새 활자본 『朝鮮史』는 『朝鮮日報』에 연재된 것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1948년 종로서원에서 발행한 『朝鮮上古史』를 참조하였다.• 새 활자본은 원전을 훼손하지 않고 단락, 구두점, 띄어쓰기만 현대식으로 바꿨다.• 한국, 중국 고전에서 인용한 자료의 내용이 틀렸을 경우 이를 각주로 처리하여 바로 잡았다.• 색인은 새 활자본에 국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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