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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콘텐츠/대한민국임시정부 [연속간행물] 에 대한 전체 10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독립평론

    윤봉길(尹奉吉) 열사의 의거 12주년을 기념하자 - 윤봉길(尹奉吉) 열사가 시라카와(白川)를 폭사시킨 사건의 진상 9.18의 치욕을 씻지도 못했는데 1.28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 19로군과 제 5군은 용감하게 싸워서 매번 적들의 흉악한 기세를 꺾어놓았지만,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들을 당할 수가 없어 자발적으로 철수하였다. 송호(淞滬)정전협정이 체결되자 4억 5천만 중화의 아들 딸들은 격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매 사람의 마음 속에 모두 비분이 남아있지만 왜인들은 이를 커다란 영광으로 여기고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다. 때는 4월 29일이며 왜국황제의 생일(이른바 천장절)이다. 왜적들은 조계(租界)당국의 경고도 무릅쓰고 상해 홍구공원에서 경축대회를 열고 열병식을 하면서 위세를 나타내려 하였다. 그날 참가한 왜국 군민이 수만이 되고 외빈으로는 상해의 각국 문무 관리들이 초청되어 참가한 외에 기타 사람들은 일체 참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국의 윤봉길(尹奉吉) 열사는 폭탄을 숨겨가지고 그들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왜국대중들 속에 섞여 들었다가 적의 수뇌들이 모두 무대에 모이고 대중을 향해 연설할 때 폭탄을 던졌으며, 폭탄이 폭발하자 무대 위에 있던 자들은 화를 면한 자가 없다.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는 당장에서 배가 터져 죽고 시라카와(白川) 등은 모두 중경상을 입었다. (시라카와는 부상이 심하여 약 한 달 후에 죽어버렸다.) 윤봉길(尹奉吉) 열사는 목적을 달성하자 “대한독립만세!”을 세 번 높이 외치고 왜군에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9일에 적국의 가나자와(金澤)에서 태연하게 순직하였다. 비록 윤 의사가 순직하였지만 그의 위대한 업적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며 그의 의거는 한민족만의 영광이 아니라 일본에게 침략당하고 있는 온 민족의 영광이다. 지금 윤 열사의 거사12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본지(本誌)는 중·한 대중들의 항일정신을 고취하여 전투력을 제고하고 최후의 승리를 신속히 얻기 위하여 특별히 이 문장을 게재하여 본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며 독자들이 헤아려 살피기 바란다. 아래의 문장은 한인애국단이 중화민국 21년 4월 29일에 본 사건이 발생한 후 11일이 지난 다음 상해의 여러 신문에 발표한 영문 문장으로서 본문과 크게 차이가 없으며 “도왜실기(屠倭實記)"에 이미 게재되었다. 본단 단장인 김구(金九) 선생은 언제나 말이 적고, 행실에 충실할 것을 신조로 삼아 큰 일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한 본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폭로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본 사건이 발생한 당일에 왜인들은 지극히 당황하여 한쪽으로는 본 사건의 책임을 프랑스조계 내의 전체 한인에게 덮어씌우고 조계의 관헌과 결탁하여 한인들을 마음대로 수색하고 체포,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갖은 구실을 찾아서 외교상으로 중국을 난처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김구(金九) 선생은 왜인들의 간계를 밝히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5월 10일에 본 사건의 진상을 영문으로 국내외에 광범하게 알렸다. 다음 문장은 영문문장과 거의 같으며 조금 보충한 것이다. 올해 4월 29일 상해에 있는 10만 왜인들은 열광적인 승전의 기쁨 속에서 왜국 황제의 생일을 경축하고 있었다. 이것은 왜인들이 중국 동북을 강점하고 중국 강남을 유린한 후의 처음으로 가진 경축행사였다. 왜인들은 의기양양해 하면서 새벽부터 다투어 홍구공원으로 달려가 경축행사에 참가하였다. 그때, 상해의 한구석에는 두 명의 기이한 인물들이 자동차 옆에 서 있었다. 한 명은 50여세 되는 늙은 노동자이고, 한 명은 30세가 채 되지 않은 의젓한 청년이며 모두 얼굴에 긴장감과 엄숙함을 담고 있는 것이 아마 간고하고도 막중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늙은 노동자는 비장한 어조로 청년에게 “군(君)은 이제 곧 세상과 하직하게 된다.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위대한 희생을 자처한 군의 혁혁한 성공은 군의 정신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당부하자면, 우리의 적은 왜구 뿐이고 오늘의 거사는 심중하게 하여 절대 왜구 이외의 다른 나라의 인사들을 상하게 하지 말라. 오른 폭탄 두 개를 군에게 줄 테니 하나로 적장들을 폭사시키고 다른 하나로는 자신의 생명을 끊어라.”고 하였다. 청년은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선생께선 나라를 위하여 몸을 잘 돌보시고 끝까지 투쟁하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늙은 노동자는 다시 “군이여, 내세에 다시 만나자.”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악수를 하였고 헤어지면서 뜨거운 눈물을 비 오듯이 쏟았다. 이 날 이 때에 이렇게 장엄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일본민족은 원래 법치도 없었으며 옛적부터 야만하고 잔인하였다. 칼을 찬 사무라이들은 마음대로 약탈, 간음, 살인하여도 다른 사람들이 감히 간섭하지 못한다. 사무라이들이 때로는 중·한 연해지구에 출몰하였는데 이들을 왜구라고 불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새로운 과학을 이용하여 무력을 키우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으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일약 가장 문명한 일등 강도로 도약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일본정치가 군벌들의 독재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연고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위정자들은 이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들은 일이 생길 때마다 총칼을 앞세워 위협적인 위세를 떨치며 인민들을 탄압한다. 국내에서 이러한데 더군다나 국외에서는 축하행사를 열며 4억 5천만 대중들의 격분을 자아내고 있다. 4월 29일 왜인의 경비는 미증유였다. 탱크, 비행기, 장갑차, 대포, 기관포 등 병기들을 모두 나열하였으며 홍구(虹口), 갑북(閘北), 강호(江湖) 일대가 모두 경계선 안에 들었다. 수천 명의 무장대오가 말을 타지 않으면 도보로 공원 안팍을 순시하고 있어 바늘이 들어갈 구멍조차 없어 보였다. 중국인[한간(漢奸-적과 내통하는 이들)은 제외]은 물론이고 외국인도 초대장이 없는 자는 공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견고하기가 금성철벽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일등국 대군벌의 권위가 한 청년의 위대한 정신을 막지 못하는 것이 정말 이상하다. 청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늙은 노동자와 헤어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4월 27일에 공원에 와서 세심하게 계획하였으며 다시 홍구에 나와서 시라카와(白川)의 사진을 얻었으며 일본국기를 사서 품에 넣었다. 29일 아침에 양복을 입고 군용물통(안에 폭탄이 있음)을 메고 도시락(안에 폭탄이 있음)을 들고 공원에 왔으나 일본군대와 경찰은 그가 한인인 것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이것으로부터…(원문누락)… 청년이 차를 타고 공원으로 간 후, 늙은 노동자는 급히 모처에 돌아갔다. 그때 상해주재 일본 최고 문무관원들이 모두 상해공원의 경축 무대에 모였으며 일본 교민들이 무대 아래에 둘러서서 의기양양하게 국운의 지속적인 흥성과 황제의 만수무강을 함께 축하하였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궂은 비가 내렸다. 이 청년이 손을 쳐들자 도시락이 무대 위로 날아갔으며 우레가 울고 천지가 진동하며 무대 위의 사람들은 소리와 동시에 분분히 쓰러졌다. 때는 오전 11시 40분이다. 가와바타(河端)는 당장에서 배가 터져 죽었다. [가와바타(河端)는 일본거류민단장이며 일본상업회의소 소장 고메사토(米里)와 함께 상해사변의 민간 흉수이다. 사복경찰 대장이고 사무라이를 조종하여 삼우(三友)실업공사 공장의 방화살인사건을 일으켰다.] 상해를 침략한 적의 총사령 시라카와(白川)는 204개의 큰 파편과 무수한 작은 파편에 맞아 5월 26일에 상해에서 죽었다.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 중장은 눈알이 튀어나와 한쪽 눈이 실명되었으며 제 9사단장 우에다(植田) 중장은 두 다리가 부러졌으며 주중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도 다리가 부러졌다. 이들은 죽음은 면했지만 모두 불구가 되었다. 이외에도 상해주재총영사 무라이(村井), 거류민단 서기 도모노(友野) 및 왜인부녀 5인 등이 모두 부상을 입었다. 21발의 예포도 한번에 터져버렸고 장엄한 경축대회가 순식간에 처참한 염라지옥이 되었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의 몰락을 알리는 조종이고 살인 방화하는 흉악한 범죄자를 징벌하는 벼락이다. 이 커다란 폭발소리를 듣고 통쾌함을 느끼는 사람은 3천만 동포들뿐 아니라 4억 5천만 중국인, 상해전투에서 죽은 수만 명의 생명들도 이 때로부터 구천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필부(匹夫)도 뜻이 있다면 수많은 군대를 이길 수 있다.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자라면 지금 위급한 시기에 어찌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투쟁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 청년이 바로 국내외에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윤봉길(尹奉吉)열사이다. 열사는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에 한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이 과인하고 신동의 소리를 들었다. 천성이 반항적이어서 어른이라도 무리하게 압박하면 꼭 이치를 따져가며 변론하였으며 다른 사람과 싸우면 절대로 양보한 적이 없다. 15세 때 벌써 중문 시를 지었다. 어느 날 마을의 늙은이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려고 운을 주어서 시를 짓게 하였다. 열사는 바로 “불후명성사기명,사기명명만고청, 만고청심도재학, 도재학행불후성(不朽名聲士氣明, 士氣明明萬古青, 萬古晴心都在學, 都在學行不朽聲).”라고 시를 지었다. 열사는 16세에 일문을 독학하여 1년 만에 대화할 수 있었으며 17세에 고향에서 무산자제들을 가르쳤으며 19세에는 야학까지 꾸려서 일년 정도 지난 후, 이런 산골농부들이 어찌 신사조(思潮)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가 생겼다. 왜인들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매우 세밀하며, 한인들은 경제적 착취로 인하여 사람들이 날로 굶어 죽는데 대해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열사는 크게 한탄하고 나서 죽음으로 나라를 위해 보답하여 동포들을 도탄 속에서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감시 하에 모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23세에 단연히 조국을 떠나 상해로 갔다. 열사의 부친의 성함은 윤황(尹璜)이며 올해 42세, 모친 김원상(金元祥) 여사는 올해 44세이고, 부인 배용순(裴用順) 여사는 26세, 장자 막순(模順)은 6세이고, 둘째 담(淡)은 3세이며, 둘째 동생 봉석(奉錫)이가 23세, 셋째 동생 영석(永錫)이가 16세이다. 집에 유산이 없고 생계가 매우 곤란하며 농사로 살아가고 있었다. 효도하고 사랑하면서 가정을 버리고 싶지 않지만 나라를 위하여 고루 돌볼 수가 없기에 천륜지정을 아픔을 참고 끊어버렸으며 그 기개가 자못 비장하였다. 나라를 떠나려 하는데 여비가 없어서 부득이 자신이 꾸린 학교의 경비에서 수십 원을 꺼내가지고 압록강을 가만히 건너가지고 청도(靑島)에 갔는데 수중에 돈이 떨어졌다. 타향에서 떠돌아다니면서 갈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치욕을 참고 일본인 나까하라(中原)밑에서 세탁일을 하면서 지냈다. 일년 이후에 모은 돈으로 올 때 가지고 왔던 학교에 돈을 부쳐 보내고 나머지 돈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으며 1932년 5월 8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 도착한 후, 열사는 매우 기뻐하였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빈곤에 시달려 어느 물자회사에서 근무하였는데 월급이 10 여원 밖에 되지 않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공장주의 압박에 분개, 홍구시장에서 남새상을 하였다. 열사는 항상 낡은 옷을 입고 큰길로 다녔기에 한인들도 그를 업신여겼지만 참고 견디면서 조금도 후회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김구(金九) 선생에게 발견되었으며 천하지사(天下之事)를 담론하면서 서로 마음이 맞아 선생은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이 선생이 바로 앞에서 말한 늙은 노동자이다. 열사는 4월 26일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4월 29일에 그의 평생의 큰 뜻을 이루었다. 그의 위업은 일월과 밝기를 다투는 격으로 위대하며 한민족의 영예일뿐더러 전세계 피압박민족의 영광이기도 하다.

    2 조선의용대 통신

    본사평론 중국국민당 제5차 중앙전체회의의 성공개최를 축하하며 일본파쇼 강도가 무한(武漢)과 광주(廣州)를 점령한 후, 계속하여 서북(西北)지구와 서남(西南)지구를 진공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며, 적의 수상 고노에(近衛)가 대 중국성명을 발표하자 왕조명[(汪兆銘)본명 왕정위(汪精衛)]이 타협하자는 전문(電文)을 발표하여 국내외의 시선을 현혹시키고 있는 이 시기에, 중국민족의 전위대인 중국국민당은 1월 21일에 위대한 지도자이신 장개석(蔣介石) 총재의 지도 하에 제5차 중앙전체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의 결과는 당면 중국의 항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뿐더러 전세계의 정치형세에도 중대한 작용을 일으켰다. 때문에 전 중국인민과 전세계의 중국문제를 관심하는 인사들을 모두 이 회의의 성과에 대하여 세심하게 주시하고 있다. 이렇게 중대한 의의가 있는 제5차 중앙전체회의는 10일간의 의사일정을 거쳐 중요한 제안 16개를 통과시키고 1월 30일에 성공적으로 폐막하였다. 회의기간에 지난 18개월간의 항전경험을 엄밀하게 검토하고 당면의 국제정치형세를 정확히 분석하고 나서 장기항전의 국책을 수립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회의에서는 전국인민들에게 단결을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건설을 다그치자는 3대 임무를 제기하였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이번 회의는 위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첫째, 이번 회의에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새로운 진공에 대하여 강력히 반격한다고 하였다. 이번 회의에서의 단결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 항전한다는 국책으로 하여 적들이 무한과 광주를 점령한 후에 실시한 모든 군사적 진공과 정치적 음모는 철저히 분쇄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둘째, 이번 회의 후, 국민당내부의 일치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였으며, 전국인민의 항일건국의 신념을 굳게 하였다. 더욱이 비관적이고, 동요하고, 타협하는 자들에 대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왕조명(汪兆銘)이 타협하자는 전문을 발표한 후에 일시적으로 현혹되었던 사람들도 항전의 태도를 명확히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인민들의 국민당에 대한 신심과 기대가 더욱 커졌다. 셋째, 이번의 회의는 동방의 피압박민족과 전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와 인민에게 중국국민당의 전국인민을 지도하여 철저히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려는 결심을 다시 한번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전세계의 중국을 사랑하는 국가와 민족들이 더욱 힘을 합쳐 중국의 항전을 지원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이번 회의는 성공하였다! 중국국민당의 이 위대한 성공은 중화민족의 해방전쟁의 최후의 승리를 좌우할 뿐더러 일본제국주의 통치하에 있는 피압박 인민들의 혁명투쟁의 최후의 승리를 좌우한다! 우리 조선의용대는 전조선의 2천 3백만 동포들을 대표하여 조선민족의 명의로 중국국민당 제5차 중앙전체회의의 위대한 성공을 삼가 축하한다! 동시에 위대한 중국민족의 지도자이신 장개석(蔣介石) 선생과 국민당의 여러 동지들에게 가장 친절한 혁명적 경례를 보낸다!

    3 한민

    한민- 김구(金九) 본 간행물은 이미 내정부(內政部), 중앙선전부에 등기를 신청하였으며, 본 기의 심사 증은 잡자(雜字) 169호이다 대한민국 22년 4월 25일 출판 중화민국 29년 4월 25일

    4 한국 청년(2)

    "한국청년" 창간호 목차 표지-사청천(沙淸泉) 발간사 장견인(張堅仁)선생의 훈사- 장로 필기(張路筆記) 한중청년은 손을 맞잡아야한다.-서양옥(徐良玉) 우리의 임무-라월환(羅月換) 우리가 중국항전에 참가하는 의의- 하우(何友) 번역 유럽 대전과 세계경제 체제의 대변혁- 일본 요미우리신문 지역(智) 번역 1940년 일본 경제의 전망- 일본요미우리신문 사설-가양군(歐陽君) 번역 적 후 서신 적군 중 한 한국 청년이 보내온 편지-●●보냄. 작생(作生)번역 압수당한 6개의 서신- 하역(何)번역 특별 원고 박동운(朴東云) 동지 탈출기-성유(星流) 성장 중인 새싹-담(淡) 우리의 하루-열부(烈夫)

    5 조선의용대(3)

    조선의용대 본기 목차 2주년 헌사......달(達) 모든 반일역량단결하자……김약산(金若山) 2년간의 본 대오 활동의 총결……박이삼(撲李三) 2년간의 교훈과 앞으로의 활동……한지성(韓志成) 2주년 된 조선의용대……교한치(矯漢治) 축 조선의용대 2주년……유계광(劉啓光) 2년의 인식……문치(文治) 조선혁명 과정 중 조선의용대의 지위에 대하여 논하다……여송(如松) 본 대오 성립 2주년 기념에 대한 감언……석정(石正) 민족해방의 선봉대……왕휘지(王輝之) 극동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기 위한 투쟁……마의(馬義)

    6 광복(2)

    광복 제1권 제1기 목록 대한민국 23년, 중화민국 30년 2월 1일 출판 겉표지 창간사 조(趙) 부장 성환(成煥) 제사 태(態) 주임 무(珷) 제사 손(孫) 총사령 위여(藯如) 제사 곡(鵠) 부주임 정정(鼎正) 제사 팽(彭) 비서장 소현(昭賢) 제사 갈(葛) 교육장 무계(武棨) 제사 경매구(景梅九) 선생 제사 한국광복군의 과거와 미래 - 이청천(李靑天)- 한국 독립당과 함께 싸울 분들에게 고하는 글 -- 곽자준(郭紫峻) 중·한 양대 민족이여 손에 손을 잡고 -- 왕덕박(王德薄) 한국 광복군의 성립과 중국 항전 -- 황학수(黃學秀) 한국광복군의 당면 과제 -- 김학규(金學奎)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 특집 대회 주례 김구 선생의 개회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선생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보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 홍진(洪震) 선생의 훈사 한국 독립당 중앙 집행 위원 조완구(趙琬九) 선생의 축사 한국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답사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약력 존경하는 장(蔣) 위원장께 드리는 글 중화민국 군사들에게 삼가 아뢰는 글 전방의 군사에게 드리는 글 현재의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 -송호(宋虎)- 왜적은 지금 남태평양 공격에 착수할 것인가? -안훈(安勳)- 미묘한 독일과 소련 관계 -이복원(李復源)- 일본과 소련 관계에 대한 전망 -이웅(李雄)- 근위내각의 위기 -김광(金光)- 중국 항전의 새로운 단계 및 우리의 당면 임무 -위명(衛明)- 3년래 일본 전시 경제 개관 -소붕(笑鵬)- 단신 한국 청년 전쟁 공작대가 한국 광복군 제5지부로 편입하다.

    7 한국 청년 4호(제1권 제4기)

    한국청년 목차 제1권 제4기 단결복국- 송동산(宋東山) 건군건국- 나월한(羅月換) 독.소 전쟁에 관하여- 유일자(劉一字) 미국과 일본전쟁의 3개 진공노선- 한상(韓尙) 번역 일본의 기회주의 아래에서의 1918년의 역사재현- 김희류(金姬劉) 민족부흥과 부녀해방- 피이서(皮以書) 한국혁명의 회고- 김극인(金克仁) 한국 국내 혁명운동 약사- 민야(民野)-속편 한중 문제 검토- 진국치(陳國治) 한국청년의 공개 서신- 하야(夏野) 망국의 생활- 김해성(金海星) 일본군으로부터 탈출- 그래그(A.Grag) 여사 작 몽평(夢萍) 번역 혁명에 참가한 경과- 배아민(裴亞民)

    8 조선의용대 제4기(제3주년 기념 특간)

    조선의용대 30주년 기념 특별 간행물 제 40기

    9 조선의용대 제41기(13주년 기념 특간)

    조선의용대 제41기 조선 "3.1"운동23주년 기념 특별호 목차 영광의 승리와 장렬한 희생…… 정호(貞浩) 형제민족께 위로와 격려를 보내드립니다…… 양한조(梁寒操) 조선 "3.1" 대혁명운동 간략사……이정호(李貞浩) "3.1"운동 기념과 우리의 임무…… 징우(澄宇) 축 "3.1"혁명 기념……아오야마 카즈오(靑山和夫) 등 태평양전쟁과 조선혁명 …… 이원(李遠) 관내운동의 특수임무 ……왕통(王通) 애엽 홍덕 동지(悼葉鴻德同志)…… 왕원비(王遠菲)

    10 광복

    광복 제1권 목요(目要) 단평 광복 논단 중국의 항전 5주년기념, 국내외 동지 및 동포들에 대한 고별서, 김구(金九) 대한민국 독립당 강령에 관한 해석, 사평(西平) 한일 2000년 전쟁사 중요사건요약, 안훈(安勳) 중국 동북에서의 30년 동안의 한국 혁명운동, 김학규(金學奎) 우호국 동태 국제정치 적군상황 연구 일본의 남진(南進)전략에 대한 추측 군사학 적군의 트릴형(錐形) 전법에 대한 연구 및 이후 대책, 고급 교관 왕제통(王際通) 설명, 전술반(陳述班) 마유룡(馬有龍) 기록 유방(遺芳) 기록 박백암(朴白巗) 선생과의 필담(筆談) 추억록(追憶錄), 노매(老梅) 이순신(李舜臣) 전기, 박백암(朴白巗) 편저 광복문예 편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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