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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이인섭] 에 대한 전체 20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홍범도의 일지

                            1868년  고려 평양 서문 안 문열사 앞에서 탄생하여, 모친은 칠일 만에 죽고 아버지 품에서 여러 분네 유즙을 얻어먹고 자라 초 구세에 아버지 세상을 떠나시니 남의 집으로 다니며 머슴살이로 고생하면서 십오 세가 되므로 내 나이 두 살을 돋우고 평양 중국의 보단으로 호병정 설할 때 우영 제일 대대에서 코코수로 사 년을 있다가 사연을 치고 도망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 종이 뜨는 지막에 와서 종이 뜨기를 배워 삼 년을 뜨다가 그때는 어느 때인고 하니 병술·정해쯤 되었다. 그때 고려나라 동학이 불일 듯할 때입니다.  동학의 등쌀이 무서웠습니다.  지소 주인 놈은 자본가입니다. 삼 년 고삯에서 일곱 달 고삯을 못 찾고 자꾸 내라고 성화치듯 빌어도 주지 않다가 주인 놈이 말하되 네 고삯을 찾으려 하거든 동학에 참여하여라. 그러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네 소원대로 할 데 있으면 하여 보라. 내가 죽어도 동학에 들 생각은 없고 에라 네 놈한테 내 땀나게 번 것을 거저 잘릴 수는 없어 하고 사작살판하고 야간에 그놈의 집에 뛰어들어 그놈들 삼형제 놈을 독하게 벤지하여 다 죽였습니다.  그날 밤 산페로 도망하여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 가서 변성명하고 경기 수원 덕수 이가 지담의 상좌로 삭발 위승하고 중질하였습니다.  햇수로는 양 년이고 달수로는 일 년입니다.  도망하여 강원도 홍양 먹패장골 골 속 사십 리 깊은 페간 속에 들어가 준 삼 년을 물 쥐여 먹고 총노이 공부를 필하였습니다.  그때는 어느 때인고 하니 을미년(1895) 팔월 이십삼 일입니다. 구월 십팔일 장안사 넘어오는 길 영상인즉 단발령입니다. 그 곳 첫 쉬염터 앉아 쉴 때에 황해도 서흥 사는 김수협을 만나 의병할 공론하고 단 두 사람 더 나서 김성창 두장거리에 당진한즉 일병 이백팔 명 당진한 것을 보니 그놈들 멘 총을 본즉 과연 욕심이 나서 못 견디겠습디다.  그날로 함경도 처령 넘어오는 길목에서 두 사람이 앉아 있는데, 일병 천여 명 넘어오니 불질 못하고 앉았으니, 그 이튿날 아침에 일병 십이 명이 원산서 서울로 올라가는 거 둘이나 잡아가지고 안변 학포로 도망하여 와서 그곳서 의병모집하여 가지고 합 십사 인으로 안변 서왕사 절에 와서 철원 보개산 유진석 진과 합하였습니다. 그 진과 합하여 세 번 전쟁에 크게 패하고 그 진이 일패 도주하여 없어지고 김수협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나 혼자 요행 목숨이 살아서 황해도 연풍 널귀 금점판에 들어와 몸을 숨기고 있다가 금점 동학군 놈에게 막혀 일본놈에게 붙잡힐 뻔하였습니다.  그날 밤으로 도망하여 박말령 영상에 당한즉 해가 산등에 올라오니 일본놈 세 놈이 나를 붙들려고 왔던 놈이 원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몰수히 다 잡았습니다.  그 총 세 대를 앗아서 두 대는 땅에다 묻고 철 삼백 개, 그놈들 먹는 과자·쌀 들추어 바랑에 거둬 넣고 지경산 꼭두에 올라 한돈하고 덕원 무달사에 와서 산속에서 자고 덕원읍시 좌수로 있는 전성준 놈의 집에 야밤에 달려들어 일본돈 팔천사백팔십 원을 달래 가지고 무달사 어귀에서 전성준 놈을 쏘고 평양도 양덕으로 넘어가서 양덕으로 성천으로 여원으로 다니면서 산간으로 준 삼 년을 혼자 의병을 하다가 철 없고 의포 없고 신발 없고 고생하다 못하여 그만 변성명 하였던 것을 버리고 저 홍범도로 부르면서 함경도 북청 단양 이가에게 서방 들어 팔 년을 농사하여 먹다가 일본놈과 러시아와 전쟁할 때 갑진년(1904)에…또 내가 다시 구월 초파일에 다시 나섰습니다.  구월 십일일 차량동 동학쟁이 십일일 밤에 동학쟁이 회소에 달려들어 삼십여 명을 죽이고 회소를 불 지르고 그날 밤 솔봉개 안에서 풀밭에서 자고 그 이튿날 휘치령 허리원에서 일병 삼 인을 잡고 총 세 병을 앗고 철 삼백 개 얻어가지고 서쪽골 포수 누기에서 자려고 하다가 그 누기에서 자고 사영 간 포수를 만났습니다.  그 동무들 이름입니다. 제일-김춘진, 제이-황봉준, 제삼-이문협, 제사-박용낙, 제오-온성노, 제육-유기운, 제팔-조병룡, 제구-홍범도, 제십-태양욕, 제십일-노성극, 제십이-원성택, 제십삼-차도선, 제십사-최학선, 합 십사 인으로 합하여 데리고 시월 초구일에 휘치령 말니에서 일병 일천사백 명과 전쟁을 하여 일병이 반수 이상이 죽고 조선인 보조인 이백삼십 명이 죽고 우리 의병 김춘진 죽고 황봉준 죽고 이문형 죽고 조강록 죽고 임승조 죽고 임사존 죽고 제일등 포수들이 여섯 사람이 죽었습니다.  첨이 되다나니 총들 뿌려 던지고 싹 도망하고 한 놈 없이 우리 부자만 깃텃습니다.  부자간도 철 한 개도 없습니다.  두 부자가 공론하고 밤이 들면 우리 둘이 전쟁터에 비밀히 기어들어가 일본 주검에서 철을 얻어야 이곳서 우리 둘의 몸이 빠져 나가야 살지 그렇지 못하면 두 목숨이 죽을 모양이다 하고 둘이 밤들기를 저대하여 죽으면 죽고 요행 살면 우리 앞으로 게영하던 일이 된다 하고 부자간이 기어들어가 수백 명 주검에서 철 수천 개를 얻어가지고 떠나자 하는 때에 일본놈들이 내려다 사격총살이 소낙비 오듯 하는 철을 피하여 도망하여 서쪽골로 그 밤에 어두운 것을 무릅쓰고 사십 리를 피하여 후영동 토기막 옹기가마에 기어들어 두 몸이 자고 새벽에 떠나 엄방골짜기 들어가니까 그곳에 의병 칠십 명이 그곳에 모여서 이제는 철이 없으니 화성대를 모집하노라고 있는 때 우리 부자 지고 간 철을 한 사람에게 일백팔십육 개씩 나눠가지고 그날 밤 지나서 그 이튿날 배승개덕에 나가서 일본놈이 갑산 해산포로 철 운반하는 것을 사십 바리를 앗아내니 일병은 삽십여 명을 잡고 그러다나니 동짓달 이십육일에 응구괫택이 넘어가서 원성택으로 중대장을 삼고 응구사 포수를 모집하여 십이월 십사일 세 시 삼수성을 점령하고 일대 이백구십사 병과 탄환 백육십 궤를 앗아가지고 고려진우대 여든 베르단이 이백육십 대와 철 15궤를 앗아가지고 삼수부사 유등을 목을 베어 쑥꽃대에 달고 삼수읍 군주사를 죽이고 십이월 이십팔일 저녁 일병 양천명과 28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정월 초삼일까지 전쟁을 계속하여 초 4일까지 전쟁하였는데 부상당한 자 : 김동운·성태일·노성극, 새골에 사는 홍병준·임태준 합 5인이 상하고 죽은 동무들 : 최학선·길봉순·이봉준·조기석·홍태준·오기련·박봉준·김일보·최영준입니다.  일본병은 1,033명이 죽고 고려보조원 90명이 죽고 합 1,123명이 죽고 총은 18개만이 얻어오고 철은 한 개도 얻어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중에 행군하여 정평서 들어온 군대와 합하여 가지고 갑산읍에 정월 19일 밤중에 달려들어 일본군 109놈 죽이고 상한 놈 38놈이 있다. 의병 48명이 죽고 또 패진하여 사방을 헤어진 동무들을 다시 모집하여 가지고 등디벨 청지평서 22일 전쟁하여 의병 20명이 죽고 일병 1,013놈을 죽이고 총 3대만 얻었습니다.  이전은 고군 약졸되므로 산간을 웅거지지가 됩니다. 정월 28일에 용문동 더뎅장거리하고 이월 초 8일에 붉은별 전쟁입니다. 대병과 접전하여 의병 2,800명이 일본병 한 놈 죽였습니다. 2월 18일 일진회 회원 도수하는 놈 임재덕·김원홍·최정옥이 소위 귀순시키노라고 일병 103명과 고려노 보조원 80명을 데리고 내 처와 내 아들을 잡아가지고 농구 창평리에 들어와서 주둔하고 내 처가 지식 있는 줄 알고 「네 서방한테다가 글을 쓰되 당신이 일본 천황에 귀순할 것 같으면 천황께서 당신을 공작 벼슬 주자 하니 항복하면 당신께 좋은 공작 벼슬하게 되면 나도 당신 자식도 귀한 사람의 자식이 안 되겠습니까? 내가 시킨 대로 글을 보내려거니와 배약하면 너희 모자는 어육을 만들겠다.」 성황같이 호통이 심해 죽으면 했습니다.  내 말에 말로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거든 계집 글자로 영웅호걸이 곧이듣지 않는다. 너희 놈들이 나와 말하지 말고 너희 맘대로 할 것이지 나 아니 쓴다고 무수한 욕질한즉 저 악독한 놈들이 발가락 두 사이에다 심지에 불 달아 끼우고 반죽음시켜도 종내 항복지 않으므로 갑산읍으로 잡아 들여보내고 김원홍·임재덕이 자비로 나의 처가 쓴 모양으로 편지를 한 놈에게 주어 용문동 더뎅이에 보낸 후에 농구사 남부여대를 물론하고 청하여 놓고 백성의 원수를 받고 홍범도 잘못한다는 말로 백성들에게 다 흥겁한 거짓말을 하니까 당신네 말씀이 전부 다 옳다 박수갈채가 농구사 창펜이가 깨어질 지경이 되었다.  용문동에 편지 가지고 왔던 왜놈은 그시로 스쳐 치우니까 변방 이틀지간에 편지가 여덟 장 돌아오니 여덟 놈은 다 살았다.  9번 만에 내 아들 양순(홍양순) 놈에게 편지를 주면서 ‘너도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것은 안다만, 이 편지가 너의 원 군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이런 일이 있은 줄 나도 안다만은 그러나 네가 가면 너의 아비가 반가워 할 것이다. 그러면 네게서 편지가 나지면 그때는 네 부가 탄복할 것이다’ 하고 보내니 이놈이 그것을 가지고 나 있는 대장소 문밖에 나온즉 내가 총을 들고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지만은 네가 일본 가옥에 삼사삭을 같이 있더니 그놈의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주자고 하는 놈이야 너부터 쏴 죽어야 하겠다 하고 쏜 후 부관이 나가 본즉 귀방울이 맞아 떨어지고 죽기는 면하였다고 합디다. 2십8일에.  삼월 초 이일에 임재덕·김원홍 두 놈이 일병 190명과 조선인 190명과 더뎅장거리 김치강의 집에 와서 주둔한 그곳 백성에게 전령하되 싸움할 것 같으면 싸움하고 귀순하기 원하거든 세 시 전에 계약을 체결하소.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속사포로 너의 군대를 씨 없이 멸망시키겠다고 서리같은 명령이 돌아오니 온 군대 안에 송구영신입니다.  군대 안에 일등 불 잘 놓고 양기 좋은 군사 칠백 명을 비밀단속하고 여차하라고 단속하고 참모부에 귀수 귀순이 요구된다고 글을 써 나를 주면 내가 가서 교섭하여 그놈들 데리고 흙다리 한판에 들어서거든 여차여차하시오. 제가 변복하고 변성명하고 장거리에 당진하여 김치강 매제 집에 들어가서 편지를 드린즉 김원홍이 받아보고 씩 웃으면서 너의 소원이 그렇다 하면 그렇게 하여 주마 하고 무장을 집안에 세우고 파수 15명으로 파수 세우고 그 나머지 이백여 명으로 영솔하여 흙다리목에 당진하자 더뎅장거리에서 총소리가 콩닥듯하며 사방방천에서 모진 광풍에 불 일어나듯 하여 막재작이를 하여 몰수히 생금하고 장거리에서 의병 고응렬이 죽고 조인각이 부상되고 그 집 식솔 어린 안동이 죽었습니다.  209명을 잡아다가 대장소 앞 김원홍·임재덕 두 놈을 꿇리고 내가 나서면서 너희 두 놈이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 년을 진유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 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 산면에서 보지하여 감자 농사하며 먹고 지내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 옳거든 칠조약·구조약(을사늑약·한일신협약)에 참여하여 나라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될 것이다. 형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다 청한다. 조선 놈들아 너희 놈들도 들어보아라. 너희나 내나 다 조선 놈으로 무슨 일이 달라서 저런 역적 놈과 나를 해코자 하느냐?  일본 놈은 남의 강토를 제 강토 만들자 하니 그럴 수 있다 하자. 너희 같은 놈들은 네 아비 네 어미 다 너와 같이 씨를 없애야 되겠다 하고, 김원홍 놈과 임재덕 두 놈을 말짱을 두 대를 깎아서 들여 세우고 한 놈씩 마주 세워 기둥에다 얽어매고 석유퉁자를 윗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 놓아라 하고, 그 나머지는 포살로 하여 죽이라 하고, 삼월 십육일 농구패택이 이행군하여 십팔일 일병과 접전하여 일병 구 명을 죽이고 약수동에 들어가 자고 십구일 장진 능골 늘구목이에서 일본과 접전하여 일병 여든다섯 놈 잡고 23일 동사다랏치 금점 앞에 두텁바우골서 일본과 싸워 십육 명 죽이고 의병 5인이 죽었습니다. 거기서 함흥 초리장 유채골 동리에 야밤에 달려들어 부자 놈 아들놈 붙잡아다가 일화 이만팔천9백 여 원을 빼앗아 군비에 쓴 일이 있습니다. 28일에 함흥 동교촌 신성리에 자본가 박명장이라고 하는 놈의 집에 달려들어 일화 육천 원을 앗아가지고 그놈의 맏자식이 함흥 일본 놈의 군대에 소대장으로 있었나니 제집에 의병들이 재산을 탈취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병 300명과 보조원 50명을 영솔하여 350명으로 친히 제가 영솔대장이 되어 제 대대장께 연품치 않고 비밀히 달려들어 야심한 밤중에 접전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의병이 588명이 되었으니 그 동네 집집마다 들었습니다. 불시에 사방으로 총소리가 나더니 헤어져 있던 군사가 나갈 곳이 없으니까, 마침 접전이 아침 날 밝도록 싸웠으니 일병이 왔던 군사가 사분지일이 살지 못하고 회진하였으니 박명장의 식솔 하나도 남지 않고 구족이 멸망하였습니다.  그날 밤 날 새도록 싸움하고 그 이튿날 호원 영동으로 행군하여 지산당에 주둔하고 사월 초이일 내가 변복하고 호원읍에 박원섭 집에 가서 그놈의 문간에다 일병 헌병대 사 인을 월급 주고 문간 파수병으로 둔 곳에 들어가 이 댁에 들어가는 글자를 적어 달라고 한즉 조사가 심히 묻는 고로 싸근다리에 사는 백성으로 나의 외편도 되려니와 지원한 일이 있노라고 한즉 들어가라 하기에 들어간즉 함흥 본관 좌수로 있던 이경택과 호원 군수로 있는 홍가와 원섭(박원섭) 세 놈이 앉은 데 들어간즉 네 웬 놈이냐? 그 말끝에 단총을 내어들며 나는 산간에서 나무 밑을 큰집 삼고 지내는 홍범도입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너희가 모르겠느냐 빨리 나의 조처를 빨리 조처하시오. 이번 내 일이 바로 되면 커니와 약 불연이면 이 방 안에 주검이 몇이 될 것을 모르겠소. 빨리 조처하시오. 주인 놈이 제 댁과 얼마든지 통틀어 내오라고 한즉 일화 30천을 내어다 전대에 넣어 허리에 띠고 원섭(박원섭)을 앞에 세우고 나와 싸근다리 고개에 올라와서 부디 안녕히 계시라고 부탁하고 지산당에 돌아와 4월 초 8일 밤에 행군하여 명태골로 장전 여애리 평풍바위 밑에 행군하여 사방에 있는 군대를 불러 모아놓고 군사 점고한즉 1,864명이고 중대장이 11명이고 소대장 32명으로 고쳐 편성할 때 제일중대장 원창복으로 장진 청산령을 지키고 꼭 아적 저녁에 장진군대가 삼수로 넘나드는 놈을 목잡고 있다가 불시에 쏘고 몸을 피하였다가 경부로 비밀히 군사 먹을 것을 걱정하라고 시키시오.  제이중대장 최학선으로 매덕령을 지키고 갑리로 드나드는 놈과 앞 서식대로 하소. 제삼중대장 박용락으로 안장령을 지키고 함흥 장진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제사중대 조병영으로 조개령을 지키고 삼담·단천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제오중대 유기윤으로 새일령을 지키고 통피장골·북청을 넘나드는 놈과 그대로 좇아 하시오.  제육중대장 최창의로 후치령을 지키고 앞서와 같이 시행하시오.  제칠대장 송상봉을 불러서는 부걸령을 지키되 너는 꼭 내가 명으로 시키노라. 남시령을 지키고 길주로 갑산 허리로 드나드는 놈과 싸움을 하되 남을 10명을 죽이지 말고 내 군사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므로 너를 극력 주선으로 부탁하노라.  제팔중대장으로 삼수 신파 목재 압록강으로 내려가는 것을 쏘아 넘기시오.  제9중대장으로 통팔령을 지키고 흥원·북청으로 드나드는 놈과 앞서 계약한 대로 꼭 그대로만 하면 우리의 성공이 잘 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사중대로 내가 영솔하고 사방으로 다니며 일본과 접전하게 하고 다 분배 후에 우리가 이르지 아니하고는 숱한 군사를 기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고 나는 사방으로 다니며 할 것입니다. 시월 27일 통패장골 쇠점거리에서 전쟁하여 일본 대장 아들 놈 잡고 군사 십삼 명 잡고 일본 군량 닭 50개, 과자 열 궤, 백미 삼십 말 앗아가지고 그날 밤으로 사동으로 하남 안장혈 싸움에 일본 400여 명이나 죽고, 우리 승전은 하였으나 패하여 상남 숫치기 깊은 산골 폐간 속에서 굶어 이틀을 유진하고 있었으니 비는 자꾸 삼사일 쏟아지는 것을 견디어 갑산 간평에 내려와서 귀밀밥을 얻어먹으니 모두 취하여 고생하는 중에 길주서 넘어오는 일병 80명과 쌈하여 일병 3명을 죽이고 의병 8명이 죽었습니다.  5월 초 2일 구름물령 넘어오다가 일병 32명이 오는 것을 목잡고 저대하다가 일시에 쏘아 한 놈도 남지 않고 다 죽이고 총 30개, 군도 두 개, 탄환 300개, 단총 네 개 앗아가지고 갑산 청지평 싸움에 의병 11명 죽이고 일병 90명을 즉살시켰다.  초 사일 괴통병 어구에서 일본 마병 15명 잡고, 말 다섯 필 앗아가지고 약수동 넘어가서 여해산 평풍바위 밑에서 군회를 열고 그 말 잡아 분육하고 회의 결정에 군비는 물론하고 전쟁에 죽은 동포의 가족을 살려 주어야 되겠는데 한 가정에 150원씩 분배시키고 도합을 놓으니 116천 898원으로 분배하고 어찌하든지 재전을 모아야 약환을 외국으로 청구하여야 될 것입니다. 5월 25일로 다시 이곳에서 다 우리가 군회를 불러가지고 재전으로 외국에다 청구하자고 각자 맹세하고 초 9일에 각지로 떠나 사방으로 각산하고 헤어져 간 후 나는 동사다리치 금점에 달려들어 일병 6인을 죽이고 별장놈 죽이고 금 1,994개를 앗아가지고 수동골수로 넘어와 행창에 당진하여 밤을 유하고 함흥 천보산 절로 들어가 4일 유하고 있노라니까, 안변·덕원·연풍 등지에서 수십 번 전쟁하던 노희태 군대 540명과 연합하여 정평 한대골 어구에서 접전하여 일병 190명 잡고 의병 4인이 죽고 한 명 팔 맞아 중상되어 고생하였다.  정평 바맥이에서 500명 일병과 쌈하여 107명 잃고 내 아들 양순(홍양순)이 죽고, 거차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되기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홍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홍양순)이 죽었다. 그날로 떠나서 거사골수로 들어와서 노희태 군사를 데리고 함흥 명태골로 천보사 절로 넘어가고 나는 군대를 데리고 장진 남사로 내려와서 실령 어구에서 접전하여 16명을 일병을 죽이고 총 16개, 철궤 여섯 개 앗아가지고 도로 천보사 절로 가 노희태 군대에 철 2,400개 분배하여 나눠주고 인차 떠나 18일에 홍원읍 앞에 전진포의 홍가집에 달려들어 홍원군수 홍가 자를 붙들어 일화 37,000원을 빼앗아가지고 그날 밤으로 함흥 덕산관 함영문 그놈의 집에 달려들어 너는 시 좌수로 있고 도 군주사로 있는 놈이니까 돈을 내 청하는 대로 받지 않으면 당장에 식구는 오늘밤으로 멸망시킨다 하고 일화 3십만원을 바치라 한즉 극력 주선하여 3만 원을 내어다 주는 형식을 보니 여러 곳에서 대용하여 주기에 받아가지고 인차 떠나 오면서 글을 써서 사방에 돌려놓으면서 덕산 관사는 한영문가 함흥읍을 들어올 것 같으면 남대천 다리목에 일병 300명 있고 성안에 500명 있으니 염려 말고 들어오라 하기에 수일간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그 댁에 와서 연품하되 우리가 어느 날 밤에 들 것을 우리도 비밀이다 하고 간다는 것을 글을 써 누구와 담화하고 있는 듯이 하고 떠나 장진 여래산으로 드니 회의를 모였다가 회의를 못하고 있는 중에 마침 들어가 회의를 열고 앞서와 같이 일화 20천을 정하여 놓고 외국으로 갈 사람을 뽑는데 북청하는 조화여·김충열 그 동무들이 화수야 연추에 주둔하고 있는 이(이범윤) 관리에게 보내면 비똔약을 몇 십 밀리온 치라도 내올 수 있다고 하기에, 김충열·조화여 두 사람으로 20천과 노수로 백 원을 주어 강동 연추 이범윤한테 서사를 다 두 사람에 보냈더니, 이 험한 놈들이 다 잘라먹고 오히려 일본 청탐군으로 몰아 가두고 당금 죽게 되니까 그 갇힌 자들이 본대에 글을 보내니 글을 받아보고 인차 김수현으로 노비를 주어 급속히 들어가 구하라고 보내니 그놈이 또 제가 이(이범윤)가 놈에게 들어와 그 당누와 같이 휩쓸리어 있다 하니 소식이 영 무소식하니 알 수 없어 약철이 없어 일병과 쌈도 못하고 일본이 온다면 도망하여 매 본 꿩이 숨듯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다가 할 수 없어 외국 중국땅 탕해로 10월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올 때에 신파 기름구피 일병 군대와 접전하다가 그날 밤으로 건너와 압록강을 하직하고 너의 수궁이 수천 리 장강인데 내가 무사히 건너 왔다. 부디 잘 있거라. 다시 볼 날이 있으리라고 눈물로 하직하고 탕해로 들어와서 한날 묵어 길림으로 1,300리 되는 곳에 와서 생면부지한 곳에 와서 돈 한 푼 없이 길림성 안 중국 통사 길성익 영변 사람인데 사상이 좋아서 우리 군대 40여 명을 수십 원으로 용비 써서 이틀을 유하고 데리고 온 동무들을 도로 탕해로 보내고 김창옥·열두 살 먹은 자식 용환(홍용환)·권감찰·나 합 4명이 러시아로 들어올 때 노수 한 푼 없이 도보하여 난림창 우수현, 우라개, 우시허 아시허 내도한 즉 술기길을 만나 네 사람이 도보하여 굶어 오길 준 이틀을 왔더니 기한이 들 뻔하다나니 러시아 거사리에 와서 배를 가리키며 먹을 것을 비니까 러시아 산다르미 흘네브[Хлеб(흘렙-빵)] 한 덩어리 내다주니 요기하고 떠나 도보하여 먹으며 굶으며 근근 도보하여 엿새가 되도록 오니까 어딘지 모르고 오다나니 술기길에서 조선 사람 셋을 만나 일만포 얼마나 머냐고 물은즉 그자가 멀다고 하면서 이리로 가면 칠십 리고 술기길로 가면 고려 리 수가 고려 리 수로 150리라고 하면서 질러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니 질러오다가 홍우재 무리에게 붙들려가서 이틀을 자고 대접도 많이 받고 온 일도 있습니다.  12월 6일에 흥더허재 나와서 엿새를 묵어 고려 풍속에서 노수 차려 술기 타고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들어 엿새 묵어 해삼(블라디보스토크) 내려가서 일삭 유하고 1908년에 연추(노우키에프 스코에) 나가서 이(이범윤) 관리라 하는 자를 보고 조선서 김충열·조화여 두 사람을 어떻게 보니까 일본 탐정으로 보셨는가요 한즉 그자의 말이 나는 그런 줄 저런 줄 모르노라고 한즉 그러면 그 사람들 어찌하여 주루만에[тюрьма(쮸리마-감옥)] 가두었든가요. 그 대답에 비쌔기[документ(서류)] 때문에 갇혔다고 대답한 소문이 낭자하니까 연추(노우키에프스코에) 주민들이 이범윤 죽일 놈이라고 누구든지 아니 욕할 자가 없었다.  그 후에 최재형 연추노예 김운경 이자들이 서로 반대파가 일어나므로 1909년에 추풍 허커우 와서 도로 고려로 나가려 하는 때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원세가 올라와서 극력 주선으로 말리며 내가 주선하여 차려 내보낼 터이니 걱정 마시고 계시라고 말리니 할 수 없이 있었으니 최원세 각처로 다니며 원조하여 수천 원으로 모집하여 가지고 허커우 올라와서 박기만으로 총무를 정하고 김제현으로 부총무를 정하고 김왕윤으로 재무를 정하고 1910년 3월 6일로 고려로 나가려고 맹세하였으니 조물이 시기하여 박기만 놈이 원조돈 1,800원을 쓰고 내놓지 아니하므로 재피거우에다 회를 불러놓고 박기만·김왕윤·김재형 절땅 노예 김아부람 다 불러놓고 회의를 불렀다.  1910년 3월 11일에 회의 문제는 각 총무며 재무 각 임원으로서 다수한 금전을 거둔 것을 보고에 얼마나 도합된다는 총무의 보고, 무장을 얼마나 싸서 어디다 둔 것. 문제는 그뿐.  총무의 보고에 전후 4,980원으로 무장 30병에 2,180원이 들었다고 보고에 나타나고, 탄환 3,800개를 1,100원 주고 산 것입니다. 그 나머지 남은 것은 의병들 비쌔기 300장에 800원 주고 내게 하였고, 그 남아 있는 돈 내가 한 달 통영하고 썼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우리의 일은 망태기 되었구나 하고 내가 밸이 뿔이 나서 회의고 뭐고 이 종자들 모조리 때려죽이고 말아야 하겠다 하고 달려들어 박기만을 단개에 쳐서 주검을 만들고 회의가 망태기 되었다. 그 며칠 후에 추풍 사사원 호놈들 추겨 가지고 나를 죽이자고 취군하여 올 때 이범윤의 군사적 관리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군대가 척후병이 되었었고 다리안재 안준현이고 육성 최순경이고 허커우 김가네 다수고 박가네 다수고 문창범 도수하여 250여 명이 취군 작정하여 자피거우 박문길 집에 달려들어 나를 결박하여 가지고 왕거우 유새장 집에다 가두고 무수한 매를 치면서 이범윤에게 보고를 써서 해삼(블라디보스토크)으로 보내되 이 홍범도를 죽이는데 관리자의 명령이 있고야 죽이겠습니다. 써보내니 그 보고를 깔고 회답도 하지 아니한 고로 14일을 죽지 않으리만큼 수천 매를 맞고 14일 만에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군대 사단장이 알고 까삭까 8인을 왕거우 어구서부터 총질하면서 올라와 나를 결박한 것을 풀어놓고 30여 명을 붙잡아 갔으니 요행 목숨이 살아 데리고 다니던 군사 30여 명을 죽게 만든 동무들 데리고 총을 사가지고 고려 무산에 나가 일병 놈과 쌈하여 군사 17명을 죽이고 일병 하나 죽고 패하여 산간으로 도망하여 이틀 먹지 못하고 굶어죽게 된 때에 북사령으로 갑산 있던 일병 42명이 넘어오는 거 목을 잡아다가 한 개도 남지 않게 다 잡고 두 사람 죽고 열네 놈 생금하여 싹 죽이고 무장 40개, 단총 4개, 코코 두 개, 폭발 14개, 군량 세 바리, 탄환 칠천 개, 탄자 50개 앗아가지고 깊은 산페에 들어가 4일을 그놈들에게 앗은 구벙이개에다 끓여 먹으면서 있다가 그 남은 것을 나눠 지고 무산 왜갈림에 나와 야밤 삼경 일본 병참소 달려들어 폭발로 치며 총질하여 죽이고 불을 놓아 놓고 밤으로 도망하여 백두산으로 행하여 장백부로 행하다가 종성읍에서 20리 나와 그곳이 모를 데인데 일병과 접전하여 진종일 쌈하다가 그놈들에게 포위되어 의병이 다 잡혀 가고 나는 빠져 도롱봉으로 하여 내도산으로 안도현으로 길림에 들어와서 차 타고 도로 러시아에 들어와서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와서 부리딴에서 커우대 메기 시작하여 삼·사삭을 벌어먹다가 금점 딴뚠(안군)에 들어가 양년을 금점하여 번 돈이 1,400원을 가지고 나와 추풍 당미재 골짜기에서 약담배도 심고 곡식도 심었다가 미깔래 어리방이까 가서 일 년을 벌다가 구리바로점(Курбадт,꾸르바트)으로 중구식가점으로 비양고점으로 연드리스까점으로 돌아다니며 번 돈이 3,050원을 가지고 이만 나와서 오연발 한 개에 탄환 100개씩 끼워 9원씩 주고 사서 중국놈에게서도 사고 고려 놈에게서도 사고 러시아에서도 사서 의병을 모집하여 17개를 싸매고 봉미산 김성무 집팡에 가서 고려로 나가지 못하고, 1915년 7월 26일부터 산지 작녹을 잡아먹기 시작하여 햇수로 이태 반을 사냥하다가 그 총을 밤으로 운반하여 추풍 당어재 골짜기 최의관 병준 집에다 묻어 놓고 농사를 시작하여 한 해 농사짓고 18년 전 고려 독립만세가 불일 듯하므로 농사고 뭐고 나가자 하고 묻어두었던 총을 끄집어내어 일변 닦으며 일변 의병 모집과 탄환 모집과 일변 원조하여 의병들 입힐 것과 천리경 그러한 것을 갖추었으니 1919년 8월 8일에 밤에 떠나 앵덕이 106인이 무장을 메고 앵덕에 당진하니 저녁때가 되므로 거기서 자고 가려하려고 하고 있는 때 불연간 러시아 빨치산 6명이 우리 유하는 곳에 당진한즉 통변을 청하여 물은즉 수청 등지에서 쌈하다가 패하여 9명이 요행 목숨을 보전하여 왔으니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여승당거리 와서 폐간에서 굶어 자다가 세 놈이 간 곳 없이 도주하여 없어지므로 그 동무를 찾는 중에 백파(백위파)들에게 투항하고 우리 6인을 잡아주려고 다짐까지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목숨을 도주하여 왔으니 고려 빨치산이 이곳에 있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나도 고려 빨치산과 같이 다니면 어떻겠습니까 한즉 우리는 고려로 나가는 의병이니까 같이 갈 것 같지 못합니다. (답) 나도 어느 국이나 빨치산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네 말도 모르겠는데 어찌 같이 다니겠습니까? 우리를 믿어 주시면 말 모르는 것이 관계 없습니다. 하나 그러나 우리와 같이 못 가겠습니다 하고 우리 군인을 데리고 한 삼리 거리 되는 곳에 집사가 있는데 따로 자다가 샐 녘이 되니까 그 동무들 유하는 곳에서 총 소리가 콩닥듯 소리가 나므로 우리 군대를 사방으로 산조시켰고 저 물방아 거리서 동네다 총질하는 놈들을 사격하라고 명령하고 나는 개안에서 쏘다니니 물방아 거리에 있던 놈이 13명이 죽고, 말 세 필 죽고, 그놈들이 퇴진하여 양재거우 등으로 도망하는 것 보고 그 동네 수색하러 들어간 즉 먼저 왔던 그 동무 말과 같이 투항한 놈들이 같이 다니던 동무를 잡으려고 백파(백위파)를 데리고 온 놈이 분명하다. 그 동무들이 6인 중에 세 사람 죽이고 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무들과 성명을 물은 즉 (답) 이와노우츠·완실네꼬싸·까리면니츠 헐벗고 신발 없이 된 것을 차려 입히고 같이 중국 땅 차무정재 서쪽골 깊은 골에 주둔하고 밤 잘 지간에 홍우재 70명 달려든 것을 잡아치우고 먼 고개 방축령 깊은 개웅덩에서 홍우재 90명 잡고, 총 50병, 철 1,300개, 약담배 여섯, 봉우재천 190자, 대양 300원, 일화 700원 앗아 군인들 나눠 가지고 러시아 3인을 대양·일화 합하여 500원으로 체급 주니까 아니 가지겠노라고 하는 것을 억지로 주고 그 이튿날 행군하여 나재거우로 중국 하마탕 예수촌에 야밤에 들어가 무장을 벗고 19년 10월 14일부터 20년 3월 초 3일에 무단봉에 나가 사흘 유숙하고 있다가 행군하여 봉오골 최진동 진과 연합하여 1920년 시월 초 3일 일병과 접전하여 일병 370명 죽고, 저녁편에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운무가 자욱하게 끼어 사람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게 끼었는데, 일본 후원병 100여 명이 외성으로 그 높은 산 뒤로 영상에 올라서자 봉오골서 쌈하던 남은 군사 퇴진하여 오던 길로 못 가고 그 산으로 오르다가 신민단 군사 80명이 동쪽산에 올랐다가 일병이 저희 있는 곳으로 당진하니까 내려다 총질하니 일병은 갈 곳이 없어 마주 총질한즉 올라가는 철에 후병이 몇이 죽으니까 속사포로 내려다 부치니 신민단 군사 한 개도 없이 죽고, 일병이 수백 명 죽고 서로 코코 소리 듣고 총소리 끊어졌다. 그때 왔던 일병이 오륙백 명 죽었다. 초 6일 그곳에서 떠나 일낭거 지나 천보산 늣투거우 석탄고로 당진하니 시거우 들어갔다 나오는 일병 100명이 마주쳐 접전하여 일병이 술을 잔뜩 먹고 오던 놈들과 접전하여 몰신 다 잡고 무장을 앗아가지고 뫼일거우로 들어가 허영장 군대와 연합하여 한 달 유숙하고 있었으니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서 글발이 나오되 붉은 주권이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점령하였다고 글발이 나오니 러시아 동무 삼 인이 들어가길 요구한즉 군사 30여 명으로 그 동무들 보호하여 보낼 때에 중국 군대가 접어든 것을 보고 우리 군대서 총질하여 중국인 5명이 죽었으니 그놈들이 너희 군대는 우리와 상관 없는 이려 우리에 불질할 이치가 무엇이냐고 시비가 일어나 그놈들이 배상금 한 놈에게 800천씩 물지 않으면 너희를 무장으로 쏘겠다고 고성대독하니 물마하고 대답은 하였으나 물 것이 없음으로 비밀운동하여 운툴나재에 삼경에 접어들어 중국 군대에 사격하려고 차부하는 시에 출장 나갔던 기병 30여 명이 본 영문으로 들어오던 대장이 말에서 내려 이것이 어쩐 일인가 하고 물으니까 전후 사실을 말한즉 그럴 듯하다고 하면서 조금 지체하소 하고 영문으로 들어가더니 대대장 오패라 하는 대장이 나와 우리 영문에서는 그런 것을 전후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군사의 법은 세계 어디든지 꼭 같으니까 그럴 듯하다고 하면서 보의탄 한 장을 청하여 물은즉 제 군대가 도적 잡으러 갔다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한즉 탄장을 책망하여 놓고 인차 서로 양국이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조선이 없어지니까 중국도 순망거치라 고생한다 하면서 누가 잘못이든 거우 군대에는 서로 좋은 낯으로 화친 화친하자 하고 서로 손길 쥐고 서로 헤어진 일이 있다.  4월 28일에 떠나 천보산 뒤로 어랑촌을 지나 말리거우에 들어가 유진하고 한 달 유하고 투두거우 일본영을 야심 삼경에 달려들어 재작하고 그곳에서 어딘지 모를 곳에 조선인 예수촌에서 오라 하기에 행군하여 간즉 군사들을 쇠잡고 분육하여 먹인 후에 내복 한 벌씩 주니까 타 입고 떠나 말리거우로 돌아오니 구월이 되었다. 일병이 러시아에서 철병하여 나오는 놈이 수만 명이 북간도에 푹 덮였다. 그런데 고려에 있던 일병이 몇십 명이 종성 와서 고려 포수 수십 명을 청하여 놓고 너희 중에 백두산 사냥꾼이 몇이나 되느냐고 물은즉 반수 이상이 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한 달에 50원씩 줄 것이니 말니거우에 홍범도 군대가 있다니 누가 그놈의 목을 바치면 상금으로 오천 원 상금으로 줄 것이니 그럴만한 자가 있으면 손을 들어 맹세하라 한즉 몇 놈이 손을 들어 맹세하고 무리를 지어 백두산으로 들어 밤낮 페속으로 단체하고 야지골 당진하여 그날 밤으로 말리거우 조분 고려 둘러싸고 날 밝기를 저대하는 중에 내 심정이 솔난하여 밤중에 군사를 취군하여 말리거우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밤을 새는 중에 날이 금시 밝자 대포소리 한 방 나더니 사방으로 이야 소리가 천지진동하면서 사격소리가 끊기지 않고 단번에 말리거우 인가촌에 달려드니 인적이 고요하고 아무 것도 없으니 물론 어떤 웅덩이던지 몰수히 없어서 나갈 방수를 얻는 중에 내에 군인 520명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벼락치듯 막 사격하니까 종천강 종지출 못할 것을 그려놓았다. 밤이 삼경 되도록 진을 풀지 못하고 답새우다나니 다 잡았다.  총 240병과 탄환 500발 받아가지고 조선 놈 사복하고 몸 빠져 나가는 놈 여섯 놈 붙들어 뒷짐 지어 가지고 높은 산으로 잡아 가지고 올라와서 초사를 받으니 개개 직고하되 재전 사람을 죽입니다. 저희는 의병으로 몇 달 다니었습니다. 그놈들을 코를 꿰어 가지고 저녁 굶고 아적 굶고 페간으로 샘물 곳에 가서 산에서 샘물골 백성을 청하여 돈을 많이 주고 음식을 지어다 먹고 소미 한 섬에 일화 백 원씩 주고 사 올려다가 조금씩 나눠주고 떠나서 소밍미거우 왕닌에 형의 집팡에 와서 소미 두 섬에 일화 300원 주고 사서 나눠 넣고 어구로 나와 군정서 청산리에 있다 하니까 연합하여 고려로 나갈까 하고 찾아가는 길에 어구의 큰 길에 나가 서자마자 하여 보초병이 뒤물러 서면서 일병이 수천 명이 당금 당진하였다 한즉 할 수 없이 고려 나가 쓰자던 뿔니묘트를 걸고 일병 대부대에다 내두르니 쓰러지는 것이 부지기수로 자빠지는 것을 보고 도망하여 오른 길로 산페로 들어와 코 깬 놈 죽이고 9월 11일 밤에 추운 산간에서 불도 놓지 못하고 떨었더니 날 밝은 후에 군사를 점구한즉 세 사람 없어졌다. 찾아보니까 나무 밑에 엎어져 죽었다. 굶고 얼어 죽었다 하고 그 산속에 묻어 놓고 떠나 큰 봉미거우 지나 훈신장 앞덕이에 올라서자 청산에 들여다 보니 청산·갑산 어구에 일병이 수천 명이 모여 서서 장교 놈이 군대에 여차여차하여야 포로로 잡을 모계를 가르치느라고 서서 공론할 때에 뿔니묘트 걸어놓으니 막 쓰러지는 것 보고 철이 없어 놓지 못하고 도망하여 천리송 밭을 께여 동남창 안도현 가는 골로 70리를 도망하여 오다가 홍우재 굴을 만나 때려 부수고 대양 7만 원과 소미 석 섬을 얻어 나눠지고 우두양창으로 안도현을 향하여 가다가 날이 저물어지므로 우두양창 막치기에서 불을 놓고 유하게 되니까, 내가 분부하되 우등 앞에서 불 쪼이지 말고 대거리마다 쬐되 등화불면이므로 도적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 명심하여라고 명령하고 밤을 지내는 때 마침 일병 뒤를 쫓아오다가 홍우재를 만나 그놈들과 의병 간 길을 알려주면 돈을 많이 주마 한즉 그놈들이 우리도 그놈들을 잡자고 쫓는 중이다 하고 같이 뒤를 쫓아 와서 우등 놓은 우등에다 속사포를 막 놓으니 우등 앞에 불 쪼이던 군사는 씨도 없이 다 죽고 그 나머지는 사방으로 일패 도주하니 다시 갱무여망이 되었다. 숱한 탄환을 피하여 부딪치고 산간으로 기어 올라간즉 부지하처라 갈 바를 모르고 헤매는 중에 한 곳에 간즉 묘한 바위가 날 새도 출입 못 할 곳에 들어간즉 늙은 포수 하나씩 둘씩 모여드니 40여 명이 모여들어 날 밝기를 저대하고 있다가 사방을 살펴보니 과연 천작으로 생긴 곳이다 하고 우등 놓은 것을 내려다보니 일병과 홍우재 섞여 다니는 것을 본즉 견딜 수 없어 내 총질하니까 일병과 중국 홍우재 죽는 것이 환하게 보이니까 자꾸 쏜즉 얼마 죽은 것은 모르나 누렇고 검은빛이 많이 보이더라. 그놈들이 막 우리 있는 곳으로 기어 들어오는 놈을 자꾸 놓다나니 수십 명이 썩어지니 기병이 올라 달려오는 것을 쏘았으니 올라온 놈은 한 개도 살지 못하였다. 그렇게 하여 밤낮 사 일을 쌈하였더니 우리 양식이 진하여 죽게 되니까 마가목 열매를 따 먹고 있다가 9월 30일 저녁에 불시로 뇌성벽력이 천지를 깨어치듯 하더니 불시로 소낙비가 막 쏟아지면서 천지를 분별치 못하게 쏟아지는 때 틈을 타서 그 짬에 나와 물개안에 내려와 소낙 소리 날 때면 기어 얼마쯤 가다가 서쪽 산으로 올라간즉 날이 새었다. 안도현 쪽으로 향하여 갔더니 제일중대장 이천호를 만나 합이 200명으로 안도현을 향하여 얼마쯤 가다나니 페간으로 내다보니 흰풍이 보이길래 점점 가까이 간즉 일병 대장놈이 군사 15명으로 파수를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데 달려들어 멸망시키고 군량·군복·탄환·전화통 한 개·과자 여러 가지 앗아가지고 안도현 싸닌방으로 행하여 간즉 어느 때인고 한즉 동짓달 14일이다. 그곳에서 두 달을 유하다가 인차 러시아로 들어올 때 오동청 앵무현 태성 영고탑을 지나 모무거우진이―투형동서 한 달 지워 홍우재와 쟁토하고 12월 19일 떠나 봉밀산 내려와 십여 일을 유하고 양무강 수리더우 호림현 도무거로써 이만 싸인발 와서 정월 26일 이 군대에게 무장을 바치고 2월 6일 자유시로 들어올 때 무장 몇 개를 준 것을 기록한즉 말진 일대 709병이고 노식(러시아식) 4개이고 철 사만7천 개이고 폭발 2,804개이고 코코 6개, 단총 40개고, 전후 다 이 군단에 넘기고 자유시 들어와 까란다시 유일니와 연합하여 양 삭만에 이르쿠츠크 들어와 있다가 모스크바 1921년 12월 11일에 이르쿠츠크서 떠나 모스크바 당진하여 객저에서 개를 열고 전기부려 사진찍고 첫 번 트로츠키 놈이 나와 보고한 후에 심야식까 몽골국 기 간부에 취식시키고 칼리닌 나와 보고하고 그담에 일본 가다야마 축하 삼아 몇 마디 말하고 그 나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회관에 돌아와 그 이튿날 계속 대회를 열고 스탈린 집행부 회장으로 선임되어 회를 처리하였다. 나도 레닌의 후원을 많이 받았다. 회의가 필되지 못한 것은 페트로프스크 가서 회의를 필하려고 미상하였다. 그리고 레닌께서 저를 불러오라고 사단이 내려오므로 제 레닌께 들어가서 뵈온 일도 있고 말씀에 대답한 일도 있다. 자유시 사변(1921)을 묻는데 몇 마디 대답한 일이 있었다. 활동사진 제일신을 돗처 가지고 활동사진 몇 시간 논 사실이 있었고 그리고 페트로브스크에가 회를 필하고 1922년 정월 초 6일 떠나 21일 만에 이르쿠츠크 나와 유하다가 1923년 4월 3일에 치타 나와서 사·오 삭 유하다가 8월 초 일일 블라고베셴스크 나와 수일 유하다가 배에 앉아 하바로프스크 나와 내린 즉 14일에 삭클니 아른닷때에 있던 김창수·김오남 이놈들이 합동 군대 까란다시 군대와 쌈할 때에 나를 쌈하지 않았다고 나를 죽이자고 불시로 피짱으로 나를 치니까 두대 부러지므로 레닌이 체급 준 싸창으로 그 두 놈을 죽이고 칠일 주르만에[тюрьма(쮸리마-감옥)] 갓기웠다가 레닌께서 회의 나온 일이 있소. 레닌 심야쓰까 깔린 그녀분 겹서 증명을 얻어가지고 나온 것 다 찾아 가지고 이만 싸인발 나와 농사 삼 년을 하다가 왼첨으로 양봉 알쩨리(조합) 조직해 가지고 이리를 하다가 스바스크 진동촌 와서 빨치산 알쩨리(조합)를 조직하여 농사하다 달레사 소브호즈에서 물을 잘 주지 않아 추수 후에 회계해 본즉 소브호즈 빚진 것이 500원을 진 것을 그나왈[канал(카날-수로)] 쳐서 그 빚 물고 그곳에서 떡가미나 어리발 빡끌로 토지를 얻어가지고 마소 한 개 없이 회원들 어깨에다 멍에를 걸게 만들어 메고 후치로 째고 조이 21헥타르, 콩 두 헥타르로 8년도에 농사하여 대작으로 되었는데 까멘나 어리발놉 홍투애 기관에서 홍범도 알쩨리(조합) 선봉조합을 다른 곳으로 가라 하면서 어디든지 지시도 없이 가라한즉 모스크바 칼리닌 선생께 청원 올렸더니 변강 크라이에 명령하되 홍범도 몇천 날가리라도 요구하는 대로 획정하여 주라고 내리므로 천 헥타르를 떼어 가지고 광개 공사하여 열두 주모자리 나쏘쓰 걸고 70헥타르 논을 내어 벼를 심어 내니 한 헥타르에서 80쩬트녜르씩 생산이 났습니다.  그 이듬해 31년입니다. 직커우재 꼼문나를 정하여 연합고는 102헥타르 하여 벼를 심으니까 이따위 회원놈들이 노다리[лодырь(로드리-게으름뱅이)] 축이 다수이므로 가슴을 명심하지 않다나니 논밭이 낫 대일 것 한 헥타르도 없이 모두 묵어 회원들이 기한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놈들에게 농사지어 그놈들 속에 집어넣고 씬두히츠에 나와 수랍씨까는 20헥타르를 농사하다가 물에 패하고, 1934년에 수청 쓰꼬또브 “레닌길” 조합을 연합하여 3년 만에 1937년도 7월 초 8일 딸린(스탈린) 명령에 의지하여 카자흐스탄 얀꾸르간시리다리 강을 건너 사나리크 쎌쏘베트에 와서 10월 11일, 12월, 1938년도 4월 초에 크슬오르다(Кызылорда, 크질오르다)와서 2백 원 주고 집 하나 얻어 가지고 삽니다.  1938년 5월 초 7일입니다. 크질오르다 당 군부에다 당월 연금을 물려고 아침 십일 시에 가서 당 간부 책임서기 없어 새로 두 시까지 대하다가 당 간부 맞은 칸에 들어가 그 사실로 말한즉 역세를 내놓고 열흘날 와서 물라고 하시면서 월 연금 받는 사람 오지 않았다고 하기에 곧 쏘유즈에 가서 침켄트에서 깔또치까[карточка(카드)] 왔으면 생활비 탈까 하고 그곳에서 세 시나 있다가 오지 않았다고 하시므로 제 집에 온즉 새로 다섯 시가 되었습니다. 점심을 얻어먹고 앉았노라니까 밀리채[милиционер(밀리찌아녜르-경찰관)] 두 분이 와서 총을 내놓으라고 성화같이 재촉한즉 총을 내어다 주었습니다.  본래 내 나이 70 먹은 늙은 몸이 소용 없는 총을 집에다 둘 수 없다 하고 보내기는 하나 내 사랑하던 30여 년 총입니다. 1903년 3월 초 8일 후치령 허리원서 나 혼자 일병 마군 세 놈을 잡고 앗은 총입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삼 년을 사용하다가 1905년 러시아로 들어올 때 간으로 도망하여 왔다가 또다시 무산 땅에 나갔다가 그동안 산간에서 삼 년을 고생하다가 다시 1908년에 다시 러시아로 들어와서 그 총을 가목을 잘라 추풍 당어재골 최병준 집에다 묻어두고 농사하기도 하며 밋깔내 우여주만네 어리바이깨[рыбалка(르발카-낚시)]도 가 있었고 여러 금광에도 다니다가 1919년에 다시 그 총이 세상에 나와 다시 일본놈의 몸에다 철을 뿜었습니다.  그런 총으로 모스크바 동양 민족 대회에 젤리가태[делегат(젤레가트-대표)]로 갈 때도 그 총을 메고 갔던 것입니다.  원동서 해삼(블라디보스토크)·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수청·쓰꼬또브 각처로 다녀도 면목이 있는 곳이므로 다니면서도 의심하여 각 고로대 경찰관에 총을 내어달라고 호송도 많이 하였습니다. 일이 없다고 하시므로 그 총을 명심하지 않다가 까산스크 이주하여 올 때에 쓰꼬또브 구역 경찰관에 가디올리였습니다.  경찰서 서장께서 가지고 가라고 하기에 가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등한하였습니다. 원동서 각 경관께서 사랑하는 것만치 믿고 있었습니다.  이 무식한 놈의 행사로 제가 책임졌습니다.  시월 초 8일에 경찰서에 가서 밤중 새로 네 시에 당책 앗기고 주루만[тюрьма(쮸리마-감옥)]에 세 미노대[3минуты(3분)] 앉았다가 제집에 와서 자고 1938년 5월 11일에 당책·빨치산책·생활비·크니시까[книжка(크니즈카, 책)]·목필책·혁대·철필·옷측까[очки(아치키-안경)]·망원경 찾아내왔습니다.  절 두고 경관에게 호송한 계집은 사돈입니다. 그 계집이 1908년도부터 이력을 제가 잘 압니다. 나지바또[Владивосток(블라디보스토크)] 있을 때도 술장사로 제 몸을 매음녀와 같이 팔아먹으며 숱한 노동자를 등쳐먹고 살았습니다. 또 그리고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올라와서 나부사리[базар(바자르-시장)] 곁에서 집을 얻어가지고 그런 행위로 장사하다가 양딸 돈을 받고 두 번이나 팔아먹은 모양입니다. 첫 번 주었던 서방재에게 숱한 재산을 그년이 술 먹자 떡 먹자 신발 없다 삼사 년을 뜯어 먹다가 그자가 재산이 끝나니까 저와 깜빠니 되는 계집에게 주고 몇 해 지간 살았습니다. 19년 밋꼬식까 일병이 점렴하고 있을 때에도 일본놈들 군대에 다니는 보조원 통변 놈들이 그 계집의 집에 속아 다니며 그년을 내세워놓고 장단 갖다 놓고 매일 육싼표육에 거들거리고 잘 살았습니다. 또 이곳 와서 항상 원동서 놀던 버릇을 잊지 않고 본 남정 죽어 양색이 되지 않아 다시 서방을 얻되 경찰서 허가 없는 채장놈을 얻어가지고 매일 장취로 육싼표립으로 지우기만 하여도 과연 아니겠는데 제가 경찰서에서 허가 얻은 듯이 그라신이 고로대 윤파리 계집과 술장사 떡 장사하여 먹으라고 권면하여 시킨 일이 시금 있습니다.  그리고 사일 만이면 와서 눈깔에 술비지가 나오도록 먹고 제 맘대로 주정을 하다나니 홍범도가 경찰서에 왔다 갔다 한 일입니다. 끝은 1938년 5월 11일에 끝입니다. Хон Помдо(홍범도)  1938년 5월 14일에 영제부 겡치수 낌한테 서마리야의 죄목을 전수 기록하여 영제부 겡치수 낌에게 드린 일도 있었다. 1938년 6월 18일부터 녹똘간[больница(볼니짜-병원)] 거리울네[караул(카라울-보초)] 매삯에 90원씩 받고 석 달 선 일도 있다.  1938년 6월 24일 우뽀로호사에브 쎄쎄르 소비에트 후보로 선임될 때에 우리 두 늙은 부처가 투표찌 부친 일도 있다.  1927년 3월 초 6일 이만고로서 양참 알쩨리(조합)로 일 년 반을 있다가 1928년 7월에 콜호즈를 조직하여 가지고 스빠스크진 농촌 달리사 소브호즈에 나와 20헥타르 떼어 가지고 일 년을 농사하니 물이 말라서 가을에 전후 회계를 보니 소브호즈 기관 빚을 이천 원을 지고 도랑 파서 싹전으로 그 빚 물고 깜미나 어리발롭으에 알쩨리(조합)를 데리고 빠끌로 땅을 뗄 때에 칼리닌 선생께 청원 올리고 800헥타르 허가하시므로.                      끝.  계속이 더 없기에 끝입니다. 이것은 그의 일기대로 등서한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필자 (서명)Ст. Уш-Тобе(우씨-토베 역)16/ⅳ-58г.(1958년 4월 16일)

    2 조선인민의 전설적 영웅 홍범도장군을 추억하면서

            洪範圖 將軍        정치역사 소설        망명자의 수기           제1편         李仁燮       1951~1959年까지

    3 중령에서 진행된 조선해방운동(1907년~1919년 3·1운동 전후)

    中領(중국)에서 進行된 朝鮮解放運動(一九○七年~一九一九年 三·一운동 前後)柳東烈(류동렬)[春槁(춘고)] 平南 박천군人.부인 劉英淑(유영숙) 平壤人.몽골 고륜에 있다 暗殺당한 의사는 李奎植(이규식). 서울人이다.(최명옥 회상).Колчако(콜차코)는 1919年 12月 28日 총살을 當하였다.한경세 同生 한수엽, 한수동.目次1) 中領(중국령)에서 進行되던 朝鮮解放運動.      1~34頁. 김승빈.2) 獨立團(독립단)과 新興學校, 正義府(정의부).     35~40頁. 尹哲奎(윤철규).3) 間島 十五萬円 事件.                          41~62頁. 최계립.4) 원수산, 만주 反日 革命軍 제7軍을 回想하면서.  63~83.5) 원수산, 간도공산당 검거사건과                김하석. 84~89.6) 황운파, 간도국민회 기타.                     90~96.7) 강근. 군정서에 대한 회상.                     97~108.8) 최계립. 나재거우 사관학교.                   109~1~34. 김승빈. 1919年 3.1운동 動後에 進行되던 총화.35~40. 윤철규. 남만(남만주)에서 進行되던 獨立團(독립단)와 新興학교.41~62. 최계립. 15만원 事件.63~83. 원수산. 滿洲에서 反日 人民革命軍 第七軍에 對한 回想記.84~89. 間島共産黨(간도공산당) 檢擧 事件과 김하석.90~96. 間島國民會(간도국민회). [黃雲波(황운파)].97~108. 軍政署 軍隊 (강근).

    4 조선민족 해방운동에 참가하던 빨치산 회상기

    이 수기의 서차1. 윤동섭 의병대                                    10-102. 한인사회당 적위군                                11-143. 솔밭관 공산당 군대                               15-264. 공산당선전 삐라를 누가 일본군대에 산포하였는가    27-375. 동청철도사변을 회상하면서                        28-557. 백전불굴하던 이홍파의 회상기                     56-898. 안우치나에서 채현 빨치산 부대                    90-989. 레닌기치 부주필 김세일께 보낸 회서               99-100

    5 조선인민의 전설적 영웅 홍범도장군을 추억하면서

      참고자료와 회상기

    6 류진규|| 이동휘를 추억하면서

    1) 류진규2) 이동휘    이동휘 가족  1. 부인 강씨 자습하여 성경을 잘 보아요.  2. 첫딸 인순(이인순)·정창빈, 1917년경 해삼(블라디보스토크)서 사망. 인순(이인순)이 죽으니 남편 정창빈 자살.    경성 “정신여중교” 졸업.  3. 둘째딸 의순(이의순)도 “정신여중학교” 졸업생 13년에 졸업하고, 13年에는 “명동여학교” 교수.    남편은 남공선(남선·김립 후 국무비서).    이동휘 식구는 1914년에 연길 국자가 이사하여 왔다. 그곳 애국자들 “간민교육회”의 도움으로 생활하였다.  4. 아들 이우석[영일(이영일)] 1907년생 해삼(블라디보스토크)동양대학을 졸업하고 호레즘에 와서 Хлебкомбин(흘렙꼼빈)에서 사업하다가 스탈린 당시 정신병자병원에 있었다.  5. 셋째딸 예순(이예순) 남편 김정하

    7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1

    革命의 불꽃이 떨어진 곳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야 말고, 혁명이 일어난 곳에서는 혁명이 성공하고야 만다.  공산주의 꽃씨는 무산 군중에게 떨어만 지면 어떠한 풍상이던지 이기고서 꽃이 피며 결실하고야만 만다.  싸리끝에서 싸리가 나는 것처럼 종파로써 출세한 자는 종파로써 종신하고야 만다.  혁명 사업을 하기 위하여 당에 든 것이 아니라 혁명을 말살하기 위하여 당에 든 자는 당 사업 대신에 종파사업을 시작한다.1) 김병하 “치머우 군대”  1~122) 유학관 윤동섭 의병대  13~313) 유학관 임병극-군비단  32~364) 유학관 솔밭관 공산당 군대  37~475) 최진일 사하린 군대  45~576) 박춘봉 다반군대 강창호 Алексей Кан(알렉세이 강)  59~637) 김표돌 이만빨치산  64~658) 유학관 함정포 습격9) 김재규 의군부  75~86,98~10910) 이해룡 솔밭관 군대  87~9711) 이종학 홍범도 군비단  111~12612) 고상준 수청군대  127~13813) 오성택 국민전쟁 회상담  139~14114) 허용하 혈성단과 수청 군대  142~14515) 한운용 약사와 이만전투  154~15516) 엄주필·김이직  156~15917) 김희영 안무군대  161~16418) 김하경 이용군대 회상  165~17319) 최계립 이만빨치산  173~186

    8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2

    금년 1960년은 필자가 조국을 떠나서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구라파(유럽) 등지에서 가는 곳마다 망국노의 천대를 당하면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시작하던지 만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누구든지 만일 자기 친족을 상실하면 7년 동안을 울지만, 조상나라를 상실하면 한평생을 운다.”는 러시아 격언이 있다. 누구든지 과거에나 현재에도 자기 조국을 잃고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체험하였거나 체험하고 있는 정치적 망명자라면 이 격언을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나는 72세 된 늙은 사람이고 소련국가 개별적 은급수령자이다. 1917년 위대한 사회주의 10월혁명 전야와 국민전쟁 당시에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들과 어깨를 같이하여 가지고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적위군에 참가하여서 조선민족해방운동을 사회주의 혁명운동으로 전환시키고 소비에트 주권을 옹호하여 미국·일본 기타 무장 간섭자들과 힌파(백위파)들을 반항하여서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지대에서 거주하던 조선인 중 부유한 어른들-계급적 원수들은 우리를 가리켜서 ‘두 번째 일진회원’이라고 “의붓애비 홍패를 메고 춤을 춘다.”고 비소하며 발악하였다. 이것은 당시 악명 높던 《대한국민의회》였다.  그런데 오늘은 나의 태바린 조선에서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었고 조선노동당에는 백만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  까마득하게 지나간 사변들을 회상하면 소련지대에서는 적위군, 붉은 빨치산, 그 다음에는 붉은 군대, 조선과 중국에서는 의병, 독립군, 유격대 나중에는 인민군으로 되었는데 이것은 자기국내에 있던 자본가·지주·민족반역자·변절자들이 미국․일본 기타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가지고서 무산 계급들을 강압하던 시기에 노동자 농민 기타 무산대중이 공산당 지도하에 결속되어서 악전고투한 결과에 쟁취한 산물이다.  혁명이 성공된 후에는 우리 선조들이 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서 투쟁하던 사변들을 기록하여서 『조선해방 투쟁사』를 편찬하고, 『조선노동당 역사』를 편찬하여서 우리 후진들을 혁명적 경각성 있게 교양하는 문제가 나서고 있다.  인류사회 발전에는 선조가 없는 후손이 없고, 선진이 없는 후진이 없다. 그래서 과거 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하던 투사들의 회상담을 수집하여서 그를 이상에 직적하는 역사연구소들에 제공하는 것이 필요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어떠한 친구들은 말하기를 몇 해를 두고 글을 쓰니 돈을 많이 번다고도 말하고, 어떤 친구들은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는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도 말하고 심지어 글을 쓴다고 슬그머니 심술을 쓰는 친구도 있고 비소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나한테는 관계가 없다고 간파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자료는 소설과는 판이하다. 오늘에 소용이 없는 듯하나 내일에는 귀중한 참고가 되고, 지금에는 그다지 필요치 아니하나 장래 적으면 50여 년이나 수백 년 후에라도 필요한 참고가 되리라고 나는 깊이 인식하고 있다. 지금에도 소련에서 간혹 출판되는 역사 문헌에는 내가 기록한 회상기 구절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나는 만족하게 여긴다.

    9 늙은 빨치산들 회상기

    늙은 빨치산들 회상기 4편Воспоминания (추억)Пак Носун(박노순)Кан Хое(강호여)Пак У(박우)1. 강호여 회상  1-612. 박노순      62-913. 박우 동지 약력  92-

    10 동청철도사변 40주년을 맞으면서

    1969년은 동청철도사변이 발생한 지 40주년 되는 동시에 ОКДВА(Особая Краснознаменная 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Армия, 붉은기 특별 원동군단) 붉은기 원동 특별군단이 편성된 지 40주년을 맞게 되는 해이다.  1929년 중국 남경정부에는 장개석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1925년에 중국 손일선 혁명정부 요청에 의하여 우리 소련정부에서 파견하였던 중국 인민 혁명 군대 고문단장 В.К. Блюхер(블류헤르) 지도하에서 북벌을 시작하여 전국을 해방시키고 1927년 3월 24일에는 남경을 해방시키자 미·영(미국·영국) 기타 제국주의자들이 20여천 무장대를 상해에 상륙시키고 중국 인민군을 반항하는 위협을 시위하는 동시에 장개석에게 60밀리언 중국 지폐를 주자고 약속하자 그는 4월 12일에 군사정변을 시작하여 중국공산당과 유일 전선을 파괴하고 공산당원들과 혁명군 지도자 간부들을 학살하던 중국의 인민이 변절하고 중국혁명에 반역자로 되었다.  이와 같이 장개석이 임시로 정권을 쟁탈한 지 1년이 되던 1928년 8월 12일에 중화인민공화국 형정원 교육부 부장 장몽린(藏夢麟)과 차장 마서륜(馬敍倫)이 서명하고 출판한 중등학교용 표해 설명 중화 최신 형세도 제국지도(중화 경계 변천도)에는 汗富汗(Афганистан, 아프카니스탄)·尼泊(Непал, 네팔)·緬甸(Бирма, 미얀마)·安南(월남, 베트남) 기타 지대는 불란서(프랑스)와 영국에게 상실하였고, 중아시아 일부와 원동 아무르주·연해주 Сахалин(사할린) 기타 지대는 차르 러시아에게 상실하였고, 조선·유리 군도(오키나와)·대만은 일본에게 상실 당하였고, 지금 있는 중국 지대만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지도 표해 설명에는 타국에 조차를 주었던 향항(홍콩)·구룡·광주만과 대련·여순 기타 지대는 조차 기한이 지나서도 도로 찾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서 이미 상실한 지대를 도로 찾는 관념을 두고 이 지도를 편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상실한 영토에 대한 역사를 후진들에게 알려주어 그들이 지리에 대한 관념을 두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 지도-교과서를 출판한 지 1년이 지나서 이미 기한이 된 조차지인 향항(홍콩)과 천진 기타에 대하여는 침묵을 지키면서 1929년에 동청철도를 무력으로 강점하자는 것은 우연한 도발이 아니었다.  당시 동삼성 수부 봉천-Мукуден(무꾸덴)에는 일본 군벌들 비호하에서 만주 일대를 강탈-강점하였던 항마적(훙흐쯔) 괴수 장작림 아들-일본사관학교에서 공부하였던 장학량(張學良)이 일제 비호 아래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데 소련에서 도망친 꼴차크 힌파(백위파) 잔당들이 만주에서 음모하고 있었다.  동청철로는 차르 러시아에서 건설하고 단독으로 관할하고 철도변에는 수천 명 철도 종업원 가족들이 생활하였고, 차르 군대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1918-1922년 국민전쟁 당시에는 힌파(백위파) 대장들이 그 철도변에서 힌파(백위파) 군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소비에트 주권에 반항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중국 고용병들도 있었다.  1924년에 소·중(소련·중국) 양국 조약에 의하여 동청철로는 소·중(소련·중국) 양국에서 공동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주 정거장에서 장춘 정거장까지 Харбин(하얼빈) 정거장에서 Пограничное(뽀그라니츠노예 역) 정거장까지 철도 관리국에는 중국 종업원들도 사업하였다.  그런데 1929년 7월 10일에는 중국 군벌들이 동청철도국 전신전화국을 강점하고 철도국에서 사업하던 소련국민들을 축출하고 직업동맹 공리사 기타 문화 기관을 폐지하고 책임 간부들을 감금하고 러시아인 힌파(백위파) 잔당들을 채용하여 발악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변에 격분한 소련인민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군중대회를 소집하며 시위를 조직하였는데 그중에는 소련에서 생활하는 중국 근로자들도 있었다.  국민전쟁 당시에 붉은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소비에트를 옹호하고 외국 무장 간섭자들과 힌파(백위파)에 반항하던 빨치산들은 자원적으로 붉은 군대에 참가하였는데 그중에는 필자도 있었다.  레닌당 지도하에서 우리 붉은 군대와 빨치산들이 연해주를 해방시키자 제대하여 무기를 놓고서 전 연맹 공산당 연해주 당 간부 선전-선동부에서 사업하던 필자는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서 떠나서 소황령[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당도하여 26조격 사단 참모부에 당도하여 사단장 Пошкович(빠쉬코비치) 명령 하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소련정부에서는 조성된 동청철도사변을 조직하려고 시도하며 순한문으로 『동청철도사변』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고 원동 여러 도시에 조직된 중국인들 기관은 막론하고 중국 영사관들도 보호하였으나, 중국 측에서 국경지대에서 농사하는 꼴호즈원들을 총살하여 한가이 호수에서 어장을 하던 이창기 조합원들을 선박까지 납치하는 등 도발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소련 주권에서는 국방에 대한 대책을 취하게 되었다. 1929년 8월 6일에 소련 원수 국방상 К.Н.Ворошилов(바로쉬로프)는 명령하기를; 원동 지대에 배치된 각종 군력을 연합하여 군단을 편성하고 그를 ‘원동특립군단’이라 칭하고 그 군단 총지휘관으로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바실리이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를 임명하니 신속히 자기 군무에 취임할 것이라 하였다.  중국에서 돌아와 우크라이나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던 В.К. Блюхер(블류헤르)는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에 당도하여 원동특립군단을 Приморская группа(연해주 그룹) 집단·아무르 집단·짜바이갈 집단 3개 집단으로 편성하였는데 연해주 집단 사련장으로 Пошкович(빠쉬코비치)동지가 임명되어 필자도 Приморская(프리모르스카야, 연해주) 집단 참모부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우리는 원동특립군단 정치부에서 발간하는 『Тревога(뜨레보가, 경보)』를 계속 받아 연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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