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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1923) |
올 해 癸亥年(1923) 7月 丁巳朔 초8일 甲子는 바로 出系한 亡子 尙鎭(상진)의 終祥이다. 그 本生父 醒心翁은 간장이 끊어지는 듯하고, 정신도 다 떨어진 듯하다. 몇 마디 이야기해 보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父子의 정으로 뜻밖의 窮天之痛을 당하여 한마디 말이 없다는 것도 나로서는 참지 못할 일인데, 하물며 너의 혼령이 만약 나 때문에 떠나가지 않고 머뭇거리게 된다면, 나는 더욱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 전인 癸亥日 아침에 몇 가지 과일과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尙鎭(상진)아'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아아! 오늘은 바로 네가 죽은 날이다. 너의 죽음을 온 천하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말들이 다 한 입에서 나오는 듯하다. 네가 죽던 날, 옥졸은 울먹이면서 "義人이 죽으니 천지가 깜깜해지고 市井에는 점방 문이 모두 닫혔습니다"고 전하였고, 아이 琥(호)가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렀다. 또 번갈아가면서 밤을 새우기도 하고, 金帛과 紙燭으로 돕기도 하여 含歛에 대한 모든절차를 별 지장 없이 치르도록 하였다.장사 지내던 날,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남 모르는 길을 가던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모두들 "죽었어도 오히려 영광이다"라고 하였다. 또 영국인과 우리 조선인 李晩雨(이만우) 金某 등 수십 명은 경관들의 조사를 피하여 15리쯤 떨어진 東村驛前에 와서 통곡하였다. 또 淸泉驛까지 이르러서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하는 소리에 땅이 꺼지는 듯하였다.葬地에 대해서는 鹿門舊山까지 운구할 힘이 없어 그만 너의 장인께서 전에 잡아 놓았던 登雲山 기슭에 장사지내게 되었었다. 발인할 때부터 기마대가 달려와 길가에 늘어서서 오는 손넘들을 휘몰아 쫓았는데, 그 광경이 참혹했었고, 산 위까지 와서 장례에 참여한 사람은 겨우 십여 명 밖에 되지 않았었다. 지난 겨울, 나는 다시 일본 江戶로 건너가 末永節(말영절)의 집에 얹혀 있었다. 末永(말영)은 年前에 너를 죽음에서 구해 주려고 몹시 애쓰던 사람인 때문이다. 그런데 몇 달 후 조선학생 金天海(김천해)가 그 동지 십여 명과 함께 밤중에 찾아와 묻기를,"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으며, 무슨 이유로 저들에게 머물러 계십니까? 더구나 義士의 아버지로서 저들의 집에 얹혀 계신다는 것은 우리들 마음에 아주 불쾌한 생각이 듭니다. 혹 불미스러운 일이 있게 되면 義士에게도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하면서 잠깐만이라도 末永(말영)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하므로 어쩔 수 없이 그만 여관으로 옮겨 버렸다.금년 봄에는 日比谷 詩會에 나도 가서 참석했다. 그 때 중국인 原憲(원헌)은 바로 肅親王의 아들인데, 내가 너의 아비라는 말을 듣자 다시 옷자락을 여미고 끊어앉아 이르기를 "아드님의 훌륭한 義烈과 참혹한 죽음은 중국의 각 신문에도 자세히 보도되었습니다." 하며, 輓詞 一絶을 써서 나에게 주었는데, 아래와 같다.당당한 그 義氣 누가 꺾으랴! 當當義烈孰能移6년간의 감옥살이 세상 모두 슬퍼하네. 六載南冠四座悲韓國에는 오늘날 빼어난 문장이 많으니 韓國如今多健筆기념비 세워도 부끄러울 것 없으리. 也無慚德欲爲碑또 印度人도 이날 소문을 듣고 여관으로 나를 찾아와 통역을 시켜 이르기를, "아드님의 광복에 대한 의거는 4천년 역사를 가진 귀국에서 과연 鳳鳴朝陽이라 할 수 있고, 또 죽음을 당해 만세삼창까지 하였으니, 2천만 동포 중에 第一人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재작년에 英字新聞을 사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고 하면서 그 신문까지 내보였다. 또 百金이나 되는 돈을 香料라 하면서 내게 주고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도 朴尙鎭(박상진)의 소문을 듣고, 잘못된 사람들을 처단하는 기풍을 일으키다가 죽은 자가 수백 인에 달합니다"고 하였다.나는 네가 살았을 때에는 너의 人望이 이와 같았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아!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살았어도 그 시대에 아무 이익이 없고, 죽은 뒤에도 후세에 남길 만한 소문이 없이 그냥 왔다가 그냥 가게 됨은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 일이지만 만약 너 같이 죽는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 하겠다. 내가 왜 어리석은 사람처럼 마음속에 온갖 슬픔을 쌓아 나의 생생한 마음을 傷할 필요가 있겠는가?그러나 네가 죽은 후, 崔君 浚(최준)은 우리 집안 兄弟와 子姪들이 가졌던 농토의 전부를 그가 샀다고 핑계를 대면서 하루 아침에 다 빼앗아 가버렸다. 대체로 생각해 볼 때 농민은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굶게 되고 굶으면 죽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일곱 집안 백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렇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어 네 아내에게 물어 보았더니, 네 아내는 말하기를 "乙卯年(1915) 7월 어느 날 崔浚(최준), 崔浣(최완) 형제가 우리집에 와서 말하기를 '娣氏는 전일의 사치한 생활을 생각지 말고, 지금부터 弟씨의 집안 살림은 우리들이 돌보아 드릴테니, 우리들을 믿고 우리말을 받아들이면 장차 큰 재산을 늘려 복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지금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天運이라 할까요? 아 天運이라 할까요?"라고 하었다. 또 崔浚(최준)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는 말하기를, "朴尙鎭(박상진)이 三井會社에 부채가 있어 저당한 토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하면서 나에게 買受하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값이 시가에 맞지 않아 買受할 수 없다고 했더니, 尙鎭(상진)은 바로 칼을 빼들고 위협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그를 구조하기 위해 억지로 買受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죽을 고비를 당하자 하늘이 부여해준 本性을 잃어버리고 그 아이들을 보내 느닷없이 생떼를 부리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것이 이치에 닿는 말인가? 이 토지는 논이 5백 두락이고 밭이 4백 두락으로, 합치면 모두 9백 두락이며 그때의 원가를 따지면 6·7만圓이 넘는 까닭에 三井會社에서 3만圓으로 저당잡게 되고, 崔浚(최준)은 그 보증인이 되었다. 이는 모르는 사람이 없던 일인데 갑자기 위협이 두려워 1만 2천圓으로 억지로 買受를 했다니, 이것이야말로 생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구조하기 위해 억지로 買受하게 되었다면, 그 농토 전부를 다 빼앗아 그 兄弟子姪의 일곱 집안 식구 백여 명을 감자기 거지가 되도록 만든 것을 과연 구조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너의 장인도 崔浚(최준)에게 꾸짖기를, "네 말은 한마디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많은 농토를 이미 빼앗겼다면, 三井會社에 빼앗겼거나 너에게 빼앗겼거나 간에 尙鎭(상진)에게는 아무 손익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尙鎭(상진)이 꼭 너에게 팔려고 칼로 위협까지 했다면, 그때 네가 딴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그 토지를 3만圓에 저당 잡혔다면 그 원가는 6·7만圓어치가 넘는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는 尙鎭(상진)의 위협에 눌려 1만 2천圓을 주고 사기 싫은 것을 억지로 샀다하니, 그 실제를 따진다면, 尙鎭(상진)이가 그 토지로써 너를 구조한 셈이고, 너는 도리어 尙鎭(상진)에게 구조를 받은 셈이었다. 우리 집안은 옛날 조상 때부터 정당치 못한 일에 대해서는 한 평의 땅도,한 푼의 돈도 몸에 붙이지 않았었다. 너도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빼앗은 농토를 되돌려주어야 옳을 것이다"라고 했었다. 그러나 崔君 형제는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兩代의 분묘가 계신 山坂까지 제 소유로 만들어 지금 은행에 저당했다 한다. 네가 살았을 때 崔君과 더불어 어떻게 했기에 그 욕스러움이 조상에게까지 미치며, 또 나로 하여금 이 궁지에 빠져 徹天之寃을 하소연해도 아무 반응이 없도록 하였느냐?한밤중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나는 네 나이 40세에 이르도록 왜 가정을 돌볼 생각이 없었는지, 그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원망스럽기만 하다. 너는 그때 5년 年賦라는 일 때문에 부산과 서울을 몇 차례나 오르내렸다. 이는 모두 가정을 돌보려고 한 일이었는데, 왜 조상에 대한 香火도 생각하지 않고, 늙은 부모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어린 처자들도 걱정하지 않았느냐? 일곱 집안 식구가 먹고 사는 농토를 아무 까닭없이 浚(준)에게 넘겨 주었으니, 이는 浚(준)의 父兄과 叔姪에게 물어본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럴리가 없다 할 것이다. 또 네가 죽을 때 적었다는 유서에는 다만 이르기를, "小川貴(소천귀)가 竹內銃彦(죽내총언)에게 소개하여 잘 처리하도록 했기에 賣買하지 않았다. 이 일은 三井會社 사원 일동이 모두 알고 있다"고만 하였다. 이 사실은 琥兒가 河姪과 함께 너를 따라가 그 일을 주선하게 된 까닭에 환히 다 알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年賦를 마감하던 날, 崔浚(최준)이 무슨 이유로 제 명의로 이전하게 되었으며, 三井會社에서도 무슨 이유로 이전서류에다 날인하게 되었었느냐? 이런 이유를 알기 위해 琥兒를 京城支店에 보내 물어 보도록 하였으나, 모두 옛날 직원들이 아니어서 홀대하기가 아주 심하였으며, 부산에 가서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河姪을 시켜 부산으로 가보도록 하였으나, 釜山支店은 벌써 폐지되어 물어볼 곳 조차 없었으니 두 아이들은 결국 헛걸음만 했을 뿐이었다.이에 남들이 모두 내게 권하기를 "東京支社에 가서 탐문해 보면 그 사실 여하를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고, 나도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작년 겨울, 다시 東京으로 건너가 본사를 찾아갔는데, 그곳은 거대한 건물과 여러 층으로 된 樓閣(빌딩일 듯), 그리고 전혀 다른 옷과 말씨로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내 말도 통하지 않고 그들의 글도 내가 해득할 수 없었으며, 나의 行色을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서로 말 없이 보기만 할 뿐이었다. 層樓에 오래도록 머뭇거리다가 다행히 그들 중에 조선어를 아는 사람을 만나, 비로소 물어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小川貴(소천귀)와 竹內銳彦(죽내총언)이라는 두 사람은 그만둔 지가 벌써 5·6년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외지에 가 있다" 하며, "文簿는 9년 전에 보던 것이어서 어느 서고에 쌓여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만약 찾아보아 발견하게 되면 우편으로 보내 드릴테니 여관에 돌아가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대답이었다.그러나 망망한 섬나라에서 竹內와 小川, 이 두 사람을 어디로 좇아가 만날 수 있었겠는가?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들은 잘 알려진 사람이 아닌 까닭에 모두들 모른다고만 하니 내 마음은 더욱 답답하기만 했었다. 누가 이런 심정을 알았겠느냐? 그러나 금년 봄에야 비로소 荏原郡 平壕村까지 찾아가 竹內(죽내총언)란 자를 만나게 되었고, 초여름에는 兵庫縣 武庫郡까지 찾아가 小川貴(소천귀)란 자도 만나게 되었었다. 이 두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年賦를 마다 갚은 후에는 그 토지를 채무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므로, 이 두 사람의 증명서를 받아 가지고 다시 본사로 들어가 文簿를 조사해 보니, 어떤 도적이 그 중간에서 당초부터 간계를 부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賊反荷杖이란 말이 바로 이런 일을 이른 것이 아니겠느냐?네 유언에 따라 지금 법정에 고소까지 하였으나 法吏의 생각이 또 어떨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오늘은 네가 늘 말하던 小川貴(소천귀)와 竹內銳彦(죽내총언) 이 두 사람의 증서를 너의 靈卓에 펴놓고 너로 하여금 분명히 알도록 한다. 아마 너는 지금 깜깜한 저승에서 잠자고 있을 터인데, 혹 기억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은 죽음을 슬퍼하고 情誼를 되새기는 마당에 길게 이야기할 것은 아니나, 내가 이토록 번거로운 말을 싫어하지 않고 전후의 내용을 다 적어서 네게 고하는 것은 나중 자손들로 하여금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원수 놈의 땅으로 다시 건너갔으며, 너 또한 무엇 때문에 온 집안을 거지가 되게 했는지, 그 이유를 다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저 崔浚(최준) 형제가 만약 그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하늘도 두렵지 않고, 귀신도 무섭지 않다고 여기는 때문이라 하겠느냐? 아아! 우리 집안은 요즈음 몇 해 이래 세상이 바뀜에 따라 온갖 풍상을 다겪었다. 너의 생모 貞夫人을 장사지내기 바로 전날, 너는 감옥으로 끌려갔었다. 그 때의 상황이 워낙 위험하고 참혹하여 겨우 집 근처에 權窆으로 그냥 끝내고 말았었다. 그후에는 힘이 모자라 아직까지 딴 곳으로 옮기지도 못했는데, 또 3년이 채 못되어 伯嫂氏 淑人이 우리 집에 계시다가 세상을 버리셨다. 初終에 쓸 壽服諸具는 네가 준비해 놓은 것이 있어서 아무 유감없이 치렀다. 그러나 너는 경성감옥에서 그 부고를 듣고 엎드려 울면서 밥도 먹지 않다가 결국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었으니, 더욱 슬픈 일이었다. 아, 우리 형제는 모두 자식이 없어 우리 부모께서 밤낮으로 걱정하셨다. 뒤늦게 네가 태어나자, 겨우 백일이 지난 후 淑人께서 데려다 잘 길러 키우기를 마치 자기가 난 것처럼 하셨으므로, 너는 워낙 어려서 貞夫人에게 태어난 것을 미처 알지도 못했었다. 밤이면 우리 어머님께서 끌어안고 주무셨으며, 낮이면 우리 아버님께서 등에 업고 놀기도 하셨는데, 마치 손바닥 속에 든 구슬처럼 여기셨다.네가 겨우 다섯 살이 되던 해, 담 밑에서 여러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였다. 어떤 노파가 바가지에 나락을 담아 가지고 문을 나서며 이르기를, "이처럼 좋은 집안에서도 거지에게 주는 곡식은 돌이 반이 넘는다"라고 하였다. 너는 그말을 들은 즉시 노파를 이끌고 들어와 우리 어머님께 여쭙기를, "거지에게 주는 곡식은 하찮은 것에 불과한 것인데, 왜 돌이 섞인 나락으로 주셨습니까? 좋은 곡식으로 더 주십시오" 하므로, 어머님께서는 너의 등을 어루만지며 "어린 종년이 몰라서 그렇게 했구나" 하셨고, 아버지께서도 네 말을 아주 기쁘게 여기시어 "이는 다섯 살 되는 아이의 말이 아니구나" 하시며, 좋은 곡식 한 말을 내주셨다. 그 노파는 이런 내용을 떠돌아다니는 곳마다 전파했으므로, 너에게 축하하는 자가 많았다.7 8세에 이르러서는, 아이들 중에 떨어진 옷을 입은 아이가 있으면 입었던 옷을 벗어 입히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므로 淑人께서는 너의 의복은 늘 여유가 있도록 많이 만들어 보관해 두셨으며, 우리 부모님께서도 너를 사랑스럽게 여기어 늘 무릎 앞에 있도록 하셨다. 不肖한 나로서도 부모께서 너를 사랑해 주시는 것을 알고 역시 사랑스럽게 여겼으며, 너도 나를 염려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내가 혹 어려운 일을 네게 시켜도 너는 어렵게 여기지 않고 늘 시키는 대로 했으며, 내가 너의 행동을 貞夫人에게 이야기하면, 貞夫人은 너를 효자라고 칭찬하기도 했었다.아! 나는 일찍이 멀리 나가 여러 해를 보냈는데, 너를 꿈에 본 다음날 아침이면 반드시 너의 편지가 이르곤 하여, 내가 이것을 징험으로 삼자, 옆에서 보는 이들은 내게 前知之鑑이 있다고 하기도 했었다. 내가 경성에 있을 때나 瀋陽에 가 있었을 때, 또 네가 옥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지난 해 내가 東京에 가 있을 때에도 너를 꿈에 세 번이나 보았는데, 역시 세 번 다 편지가 왔었다.첫 번째 편지에는 "몸을 깨끗이 갖고 죽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어찌 구구한 짓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또 두 번째 편지에는 "죽으면 죽었지, 저들과 더불어 삶을 구한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본래부터 이렇게 결정한 저의 마음을 왜 모르십니까?"라고 하였으며, 또 세 번째 편지에는 "만약 제가 불행하게 되면, 먼 만리 밖에서 허탈해 하실까 늘 밤낮으로 걱정입니다. 빨리 돌아오셔야만 한 번 만나 뵙고 永訣 말씀을 여쭐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소원입니다"라고 했기에, 나는 즉시 돌아와 옥중으로 들어가 너를 만났었다. 그랬더니 너는 눈물만 철철 흘리면서 "저의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졌습니다"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東京에 건너가 있으면서 꿈에 너를 보았는데도 다음날 아침에 편지가 오지 않으니, 네가 정말로 죽었나 보다. 네가 죽었는데도 지금 나는 머리가 백발이 된 이 늙은 나이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네가 죽은 忌日을 두 번이나 맞이하였으나 나는 참으로 너를 잊었나 보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본래 내가 하고 싶은 바이나, 조금 잊을 만하면 지나간 浚(준)의 일이 늘 나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갑자기 너의 몸이 내 눈앞에 서 있는 듯하고, 네 음성이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여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맺혀진 恨이 불처럼 일어난다. 마치 미친 듯이 땅바닥을 두들기며 울음을 터뜨리고 공연히 나의 정신만 손상시키게 되니, 이는 잊으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잊을 수 없도록 하는 셈이 되는구나. 아아, 다 끝나고 말았으니, 이 모두를 다 천운이라 할까? 아아, 내가 東京에 있을 때에 여비를 구하기가 어려워 돌아오지 못하던 중 아버님의 忌日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밤에 잠을 잘 수 있었겠느냐? 다시 몸을 닦고 관복 차림으로 앉아 새벽 닭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었다. 닭이 운 후, 의자에 기대서 잠깐 졸게 되었는데, 갑자기 꿈을 꾸었다. 우리 父母·諸父·淑人·貞夫人이 모두 한 마루에 계셨는데, 너는 靑袍와 烏冠 차림으로 기쁜 모습을 지으면서 그분들을 모시고 섰다가 나를 보자 옛날 살았을 때처럼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러한 꿈을 깨고 슬픔을 견딜 수 없어 詩를 지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네가 지금 내 부모 앞에 서 있으나 吾父母今置汝前이승에서 맺은 부자지정 이미 끊어졌어라 人間偏愛斷因緣아! 까마득한 저승에서 於乎漠漠泉臺下끝없는 이 원통함을 누구에게 전하랴 此恨無窮孰可傳아! 너는 깜깜한 저승에서 잠들어 있으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이토록 나를 잊어버리지 않았건만, 나는 도리어 너를 잊어야겠다는 것으로써 내 몸만 보호할 비결을 삼으려고 하였으니, 나는 참으로 너를 차마 잊을 수 있는 사람일까? 아! 너는 우리 부모께서도 사랑스럽게 여기셨고, 또 淑人께서도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지금도 저승에서 기쁜 모습으로 모시는 낙을 얻게 되었으니, 이 인간 세상에서 千辛萬苦를 겪으면서 살고 있는 나보다 도리어 더 낫다 할 수 있겠다.네 아내가 낮에도 가끔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나의 心肝을 마치 칼로 도려내는 듯하며, 우리 형님은 흰머리를 날리면서 고독한 생활로 남에게 얹혀있게 되었으니, 내가 목석이 아닌 만큼 이 쌓이고 쌓이는 慢이 먼 우주까지 뻗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 참으로 비참한 신세이다. 네가 죽은 후 몇 달이 안되어 道孫(도손)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임신했다는 말은 네가 옥중에 있을 때 들었을 줄 아나, 그가 태어난 일은 네가 모르겠기에 지금 들려주는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浩東(호동)이라 지었는데, 생긴 眉目이 아주 청수하고 살결도 마치 玉雪처럼 깨끗하다. 지금 나이는 세 살인데, 말도 할 줄 알고 걸음도 제법 걷는다. 하늘이 부여한 자질이 매우 剛明하게 보이니, 참으로 우리 집 아이라 하겠다.나는 이 아이를 끌어안고 희롱 삼아 이르기를 "너의 할아비는 내게는 바로 아들이었고, 너의 아비는 나를 從祖라고 불렀다. 너는 나를 從曾祖라고 불러야 하며, 내가 죽은 후에는 너는 媤服을 입어야 하는데, 옛날 성인이 이렇게 마련한 禮制는 인정에 따라 후하고 박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죽은후 제사를 지낼 때에 이 말을 잊지 않고 늘 제사에 참여하겠느냐?"고 하였다. 우리 형님도 이 아이를 끌어안을 때면 마음속의 울화증을 풀고 약간이나마 웃음을 지으시며, 네 아내도 그 손자를 안으면 울음을 그치고 억지로 밥도 먹으면서 이 저주할 세월을 보내고 있다. 세상의 興廢와 성쇠란 서로 바뀌어지는 바가 시대에 따라 한이 없다. 이로 본다면 앞으로 우리 집안이 중흥될 조짐이 이 아이에게 있다고 하겠다. 나는 이것만을 기대하면서 자위하고 살아갈 뿐이다.아! 맨 처음 네가 구속되어 갈 때에 나를 돌아보면서 따라오라고 한 말은 나를 지극히 염려한 때문이었고, 내가 너를 따라다니게 된 것 또한 잊을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다. 바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한 부탁이었는데, 아비된 나로서 어찌 저버릴 수 있었겠느냐? 그러므로 경주에서 대구까지, 대구에서 공주까지, 공주에서 경성까지 따라가게 되었고, 또 경성에서 다시 대구까지 따라가기도 했었다. 5년 동안 남쪽과 북쪽으로 수 없이 쫓아다닌 것은 너의 목숨을 꼭 살려보려고 한 것인데, 너는 끝내 죽음을 당연한 일로 알고 그만 후회 없이 가버렸다. 이로 본다면 너의 죽음이 오히려 나의 산 것보다 낫다 하겠다.나는 지금 南中에 있는데, 몇 달 동안 脚氣症이 더 심해져 몸에 살이 빠지고 뼈만 남았으며, 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으니 이것은 末症인 듯하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 이미 63세나 되었으니, 죽은들 무엇 아까울 것이 있겠느냐? 머지않아 저승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는 慈情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한 번 작별한 것은 순식간에 불과할 뿐이나 지하에서 만나게 됨은 장차 한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네가 오늘 아침 나의 이 말을 듣고 반드시 슬퍼하지 않으며, 또는 내가 가는 날 기쁜 모습으로 미리 기다리게 되지 않겠느냐? 너를 장사지내던 날에는 내가 갑자기 눈이 어두워지고 귀도 들리지 않아 붓을 잡을 수 없었으며, 또 소상에는 마침 설사를 앓고 있어 누워 있느라 제문을 쓰지 못했다. 지금 三霜이 되었는데 끝내 한마디 말이 없다면 父子間 恩情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마음속에 쌓인 생각을 글로 표현하다 보니 이처럼 장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은 네가 양해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오직 이 祭文은 내가 너에게 이별을 말하는 바요. 이 술과 음식은 오직 내가 너에게 먹고 마시도록 권하는 바이다. 너는 감격스레 여기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고 흠향하기 바란다. 오호! 가슴 아프다! 많이 들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