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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61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2

    금년 1960년은 필자가 조국을 떠나서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구라파(유럽) 등지에서 가는 곳마다 망국노의 천대를 당하면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시작하던지 만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누구든지 만일 자기 친족을 상실하면 7년 동안을 울지만, 조상나라를 상실하면 한평생을 운다.”는 러시아 격언이 있다. 누구든지 과거에나 현재에도 자기 조국을 잃고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체험하였거나 체험하고 있는 정치적 망명자라면 이 격언을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나는 72세 된 늙은 사람이고 소련국가 개별적 은급수령자이다. 1917년 위대한 사회주의 10월혁명 전야와 국민전쟁 당시에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들과 어깨를 같이하여 가지고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적위군에 참가하여서 조선민족해방운동을 사회주의 혁명운동으로 전환시키고 소비에트 주권을 옹호하여 미국·일본 기타 무장 간섭자들과 힌파(백위파)들을 반항하여서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지대에서 거주하던 조선인 중 부유한 어른들-계급적 원수들은 우리를 가리켜서 ‘두 번째 일진회원’이라고 “의붓애비 홍패를 메고 춤을 춘다.”고 비소하며 발악하였다. 이것은 당시 악명 높던 《대한국민의회》였다.  그런데 오늘은 나의 태바린 조선에서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었고 조선노동당에는 백만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  까마득하게 지나간 사변들을 회상하면 소련지대에서는 적위군, 붉은 빨치산, 그 다음에는 붉은 군대, 조선과 중국에서는 의병, 독립군, 유격대 나중에는 인민군으로 되었는데 이것은 자기국내에 있던 자본가·지주·민족반역자·변절자들이 미국․일본 기타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가지고서 무산 계급들을 강압하던 시기에 노동자 농민 기타 무산대중이 공산당 지도하에 결속되어서 악전고투한 결과에 쟁취한 산물이다.  혁명이 성공된 후에는 우리 선조들이 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서 투쟁하던 사변들을 기록하여서 『조선해방 투쟁사』를 편찬하고, 『조선노동당 역사』를 편찬하여서 우리 후진들을 혁명적 경각성 있게 교양하는 문제가 나서고 있다.  인류사회 발전에는 선조가 없는 후손이 없고, 선진이 없는 후진이 없다. 그래서 과거 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하던 투사들의 회상담을 수집하여서 그를 이상에 직적하는 역사연구소들에 제공하는 것이 필요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어떠한 친구들은 말하기를 몇 해를 두고 글을 쓰니 돈을 많이 번다고도 말하고, 어떤 친구들은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는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도 말하고 심지어 글을 쓴다고 슬그머니 심술을 쓰는 친구도 있고 비소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나한테는 관계가 없다고 간파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자료는 소설과는 판이하다. 오늘에 소용이 없는 듯하나 내일에는 귀중한 참고가 되고, 지금에는 그다지 필요치 아니하나 장래 적으면 50여 년이나 수백 년 후에라도 필요한 참고가 되리라고 나는 깊이 인식하고 있다. 지금에도 소련에서 간혹 출판되는 역사 문헌에는 내가 기록한 회상기 구절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나는 만족하게 여긴다.

    62 늙은 빨치산들 회상기

    늙은 빨치산들 회상기 4편Воспоминания (추억)Пак Носун(박노순)Кан Хое(강호여)Пак У(박우)1. 강호여 회상  1-612. 박노순      62-913. 박우 동지 약력  92-

    63 동청철도사변 40주년을 맞으면서

    1969년은 동청철도사변이 발생한 지 40주년 되는 동시에 ОКДВА(Особая Краснознаменная 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Армия, 붉은기 특별 원동군단) 붉은기 원동 특별군단이 편성된 지 40주년을 맞게 되는 해이다.  1929년 중국 남경정부에는 장개석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1925년에 중국 손일선 혁명정부 요청에 의하여 우리 소련정부에서 파견하였던 중국 인민 혁명 군대 고문단장 В.К. Блюхер(블류헤르) 지도하에서 북벌을 시작하여 전국을 해방시키고 1927년 3월 24일에는 남경을 해방시키자 미·영(미국·영국) 기타 제국주의자들이 20여천 무장대를 상해에 상륙시키고 중국 인민군을 반항하는 위협을 시위하는 동시에 장개석에게 60밀리언 중국 지폐를 주자고 약속하자 그는 4월 12일에 군사정변을 시작하여 중국공산당과 유일 전선을 파괴하고 공산당원들과 혁명군 지도자 간부들을 학살하던 중국의 인민이 변절하고 중국혁명에 반역자로 되었다.  이와 같이 장개석이 임시로 정권을 쟁탈한 지 1년이 되던 1928년 8월 12일에 중화인민공화국 형정원 교육부 부장 장몽린(藏夢麟)과 차장 마서륜(馬敍倫)이 서명하고 출판한 중등학교용 표해 설명 중화 최신 형세도 제국지도(중화 경계 변천도)에는 汗富汗(Афганистан, 아프카니스탄)·尼泊(Непал, 네팔)·緬甸(Бирма, 미얀마)·安南(월남, 베트남) 기타 지대는 불란서(프랑스)와 영국에게 상실하였고, 중아시아 일부와 원동 아무르주·연해주 Сахалин(사할린) 기타 지대는 차르 러시아에게 상실하였고, 조선·유리 군도(오키나와)·대만은 일본에게 상실 당하였고, 지금 있는 중국 지대만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지도 표해 설명에는 타국에 조차를 주었던 향항(홍콩)·구룡·광주만과 대련·여순 기타 지대는 조차 기한이 지나서도 도로 찾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서 이미 상실한 지대를 도로 찾는 관념을 두고 이 지도를 편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상실한 영토에 대한 역사를 후진들에게 알려주어 그들이 지리에 대한 관념을 두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 지도-교과서를 출판한 지 1년이 지나서 이미 기한이 된 조차지인 향항(홍콩)과 천진 기타에 대하여는 침묵을 지키면서 1929년에 동청철도를 무력으로 강점하자는 것은 우연한 도발이 아니었다.  당시 동삼성 수부 봉천-Мукуден(무꾸덴)에는 일본 군벌들 비호하에서 만주 일대를 강탈-강점하였던 항마적(훙흐쯔) 괴수 장작림 아들-일본사관학교에서 공부하였던 장학량(張學良)이 일제 비호 아래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데 소련에서 도망친 꼴차크 힌파(백위파) 잔당들이 만주에서 음모하고 있었다.  동청철로는 차르 러시아에서 건설하고 단독으로 관할하고 철도변에는 수천 명 철도 종업원 가족들이 생활하였고, 차르 군대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1918-1922년 국민전쟁 당시에는 힌파(백위파) 대장들이 그 철도변에서 힌파(백위파) 군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소비에트 주권에 반항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중국 고용병들도 있었다.  1924년에 소·중(소련·중국) 양국 조약에 의하여 동청철로는 소·중(소련·중국) 양국에서 공동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주 정거장에서 장춘 정거장까지 Харбин(하얼빈) 정거장에서 Пограничное(뽀그라니츠노예 역) 정거장까지 철도 관리국에는 중국 종업원들도 사업하였다.  그런데 1929년 7월 10일에는 중국 군벌들이 동청철도국 전신전화국을 강점하고 철도국에서 사업하던 소련국민들을 축출하고 직업동맹 공리사 기타 문화 기관을 폐지하고 책임 간부들을 감금하고 러시아인 힌파(백위파) 잔당들을 채용하여 발악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변에 격분한 소련인민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군중대회를 소집하며 시위를 조직하였는데 그중에는 소련에서 생활하는 중국 근로자들도 있었다.  국민전쟁 당시에 붉은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소비에트를 옹호하고 외국 무장 간섭자들과 힌파(백위파)에 반항하던 빨치산들은 자원적으로 붉은 군대에 참가하였는데 그중에는 필자도 있었다.  레닌당 지도하에서 우리 붉은 군대와 빨치산들이 연해주를 해방시키자 제대하여 무기를 놓고서 전 연맹 공산당 연해주 당 간부 선전-선동부에서 사업하던 필자는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서 떠나서 소황령[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당도하여 26조격 사단 참모부에 당도하여 사단장 Пошкович(빠쉬코비치) 명령 하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소련정부에서는 조성된 동청철도사변을 조직하려고 시도하며 순한문으로 『동청철도사변』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고 원동 여러 도시에 조직된 중국인들 기관은 막론하고 중국 영사관들도 보호하였으나, 중국 측에서 국경지대에서 농사하는 꼴호즈원들을 총살하여 한가이 호수에서 어장을 하던 이창기 조합원들을 선박까지 납치하는 등 도발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소련 주권에서는 국방에 대한 대책을 취하게 되었다. 1929년 8월 6일에 소련 원수 국방상 К.Н.Ворошилов(바로쉬로프)는 명령하기를; 원동 지대에 배치된 각종 군력을 연합하여 군단을 편성하고 그를 ‘원동특립군단’이라 칭하고 그 군단 총지휘관으로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바실리이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를 임명하니 신속히 자기 군무에 취임할 것이라 하였다.  중국에서 돌아와 우크라이나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던 В.К. Блюхер(블류헤르)는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에 당도하여 원동특립군단을 Приморская группа(연해주 그룹) 집단·아무르 집단·짜바이갈 집단 3개 집단으로 편성하였는데 연해주 집단 사련장으로 Пошкович(빠쉬코비치)동지가 임명되어 필자도 Приморская(프리모르스카야, 연해주) 집단 참모부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우리는 원동특립군단 정치부에서 발간하는 『Тревога(뜨레보가, 경보)』를 계속 받아 연구하게 되었다.

    64 40주년되는 중동철도 사변을 회상하면서

    40주년 되는 중동철도사변을 회상하면서  1969년은 동청철도사변이 발생되었던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29년 그 사변이 발생되던 당시에 봉천·길림·흑룡강 세 성인 동삼성 수부 봉천(심양)에는 일본 사관을 필한 장학량(張學良)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동시 중국 남경정부에는 장개석이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1925년에 중국 손일선(中山 孫逸仙) 인민혁명정부 요청에 의하여 우리 소련정부에서 파견되었던 중국 인민군대 고문단장 В.К. Блюхер(바실리이 블류헤르) 동지(가린 Галин(갈린, 가린) 장군) 지도하에서 북벌을 시작하여 거의 전국을 해방시키고 1927년 3월 24일에 남경을 해방시키자 미·영(미국·영국) 기타 제국주의자들이 20여 천 군력을 상해항에 상륙시키고, 중국인민혁명군에 반항하려는 위협을 시위하는 동시에 장개석에게 60밀리언 중국화폐를 주자고 약속하자 그는 4월 12일에 군사 정변을 시작하여 중국공산당과 유일 전선을 파괴하고 공산당원들과 혁명 군대 지도 간부들을 학살하고 정권을 쟁탈한 변절 매국 악당이었다.   1928년 8월 12일에 중화 인민 공화국 행정원 교육부부장 장몽린(藏夢麟)과 차장 마서륜(馬叙倫)이가 서명 출판한 중등학교용 표해 설명 중화 최신 형세도 제7지도-중화 경계 변천도에는 阿富汗(Афганистан, 아프카니스탄)·尼泊(Непал, 네팔)·緬甸(Бирма, 미얀마)·安南(월남, 베트남) 기타 지대는 불란서(프랑스)와 영국한테 상실되었고 중아시아 일부와 소비에트 원동 아무르주·연해주·Сахалин(사할린) 기타는 차르 러시아에게 상실 당하였고 조선·유리군도(오키나와)·대만은 일본에 상실 당하고 지금 지도에 남아있는 지대만 남아있다고 붉은 선으로 표하였다. 그리고 표해 설명에는 지적하기를 이미 상실한 지대를 도로 찾자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영국에 조차를 주었던 향항(홍콩)·구룡·광주 및 기타와 일본에 조차를 주었던 천진·대련·여순 기타가 이미 기한이 되었는데도, 도로 찾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이 교과서가 출판된 지 1년 되는 1929년에 기한이 된 조차지들을 찾자는 관념은 없이 동청철도를 강점하자는 것은 우연한 사변이 아니었다.   중동철도는 차르 러시아에서 단독으로 건축하고 관할하였는데 만주 정거장에서 Пограничное(뽀그라니츠노예) 정거장까지 활빈(하얼빈) 정거장에서 장춘 정거장까지 철도변에는 철도 종업원들 가족들이 사는 가옥들과 그 철도를 보위하는 러시아 병영에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1918~1922년 국민전쟁 당시에 이 철도는 꼴차크 힌파(백위파) 대장들이 미·일(미국·일본) 외국 무장 간섭자들 방조 하에서 힌파(백위파) 군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소비에트 주권을 반항하였는데 그 군대에는 중국 고용병들도 있었다.   원동 변강에서 국민전쟁이 필하고 소·중(소련·중국) 국교가 성립된 후 1924년 소련과 중국 간 조약에 의하여 중동철도는 두 국가에서 공동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철도 관리 기관에도 중국 지도자들이 함께 참가하였고 종업원 가운데도 중국 차부들이 같이 공작하게 되었다.   1929년 7월 10일에는 중국 군벌들이 무조건하고 철도국 전신 전화국을 강점하고 철도국에서 사업하던 소련 공민들을 축출하고 직업동맹 공리사, 도서관, 기타 기관을 폐쇄하고 책임 간부들을 체포 감금하고 러시아 힌파(백위파)들을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정부에서는 조성된 사변을 평화적으로 조절하려고 하였으나 중국 군벌들은 국경선에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국경지대 우리 콜호즈 농민들을 총살하며 아무르와 우수리강에 내왕하는 기선과 목선에 사격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만행에 격분된 우리 인민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군중대회와 시위운동을 조직하였는데 중국 노동자들은 중국 영사관을 포위하고 무슨 이유로 소비에트를 반대하여 전쟁을 하는지 말해달라고 하였다.   당 단체 소비에트 기관 기타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종사하던 이전 빨치산들이 자기들은 징병된 전투원으로 인정한다고 성명하고 군대로 가는데 필자도 있었다.   전 연맹 공산당 연해도 당 간부 선동-선동부에서 사업하다가 26조격사단 참모부에 당도하여 사단장 Пошкович(빠쉬꼬비츠) 명령 하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8월 6일에 소련국방상 К. Н. Вороши́лов(버로쉴로프)는 “원동 지대에 배치된 각종 군력을 연합하여 군단을 편성하고 그를 ‘원동 특립군단’이라 칭하고 그 군단 총사령관으로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바실리이 꼰스탄찌노비치 블류헤르) 동지를 임명하니 그는 속히 자기 군무에 취임할 것”이라고 명령하였다.   중국에서 돌아와 우크라이나군 관구 부사령장으로 근무하던 В. К. Блюхер(블류헤르)께서는 Хабаровск(하바롭스크)에 당도하여 원동 지대에 있는 각종 군력을 3개 집단으로 편성하였는데 짜바이칼 집단·아무르 집단·연해주 집단이었다.   제26 조격사단장 Пошкович(빠쉬꼬비츠) 동지가 Приморская группа(쁘리모르스까야 그루빠) 사령장으로 임명되어 필자도 연해주 집단 참모부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원동 특립군단 정치부에서 발간하는 『Тревога(트레보가-경보)』를 제1호부터 우리는 접수하여 낭독하고 연구하였다.

    65 한인사회당-한인공산당

    1917년 2월혁명이 성공하여 러시아에서 차르정체가 붕괴되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수파-에쎄르들은 유산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가지고 차르 없는 자본가와 지주들이 주권을 장악하였고, Р.С.Д.Р.П./б/. 다수파들은 노동자 농민 무산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소비에트 주권을 창립하여 한 국가 안에 두 계급 주권이 성립되어 계급투쟁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1917년 5월에 гор. 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서는 러시아 에쎄르-주권 임시정부 지지하에서 ‘전로한족총회’가 조직되었는데 러시아 차르 당시에 러시아 공민이 되어 불운하게 생활하던 조선인 부르주아 집단이었는데 그 집단 총회장 조선인 토호 괴수 문창범은 조선 해방 전선 반대자였고 부회장 한명세는 에쎄르 당원이었고 위원들도 조선 부르주아들이었다. 1917년 위대한 В.И.레닌의 직접 지도하에서 사회주의 10월 혁명이 성공하자 1918년에 гop.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에서 온 러시아 다수파들 지도와 원동 소비에트 주권 적극적 방조하에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는데 중앙 간부 위원장은 조선민족 혁명운동에 저명한 직업적 혁명자 이동휘였고, 그 간부들은 모두 정치 망명자들이었고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시당 책임 비서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김(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 직접 방조하에서 사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인민들 사회도 레닌당 지시하에서 사업하는 ‘한인사회당’과 에쎄르들 지시하에서 공작하는 ‘전로한족총회’가 대립하여 계급 투쟁 조선민족 어간에서 계속되었다.

    66 망명자의 수기

    이인섭亡命者의 手記망명자의 수기ЗАПИСКИПОЛИТИЧЕСКОГОЭМИГРАНТАЛи Инсеба (정치적 망명자인 이인섭의 메모 )

    67 망명자의 수기에서 “모스크바에서 해삼까지”

    亡命者의 手記에서 “모스크바에서 해삼(블라디보스토크)까지”一九二○年一九二四年까지.

    68 망명자의 수기(원동에서 카자흐스탄까지)

    1936년 3월 25일에 ЦК ВКП/б/(전소련방 공산당 중앙위원회(볼쉐비키)) 에서는 당표 검열을 다하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광포하였다. 그리하여 범적으로 당증 검열은 끝을 막은 듯하다. 사실에는 Молотов(몰로토프)·Каганович(까가노비치)·Маленков(말렌코프) 등 정권 악용자들이 결속하여 늙은 당원들 진정한 레닌 주의자들 10월 혁명(1917)과 공민전쟁에 헌신적으로 참가하였고 소비에트 주권을 수립하는데 몸 바쳐 투쟁하던 선진들이 만일 무조건 복종하지 아니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체포되어 희생을 당하게 되던 스탈린 개성숭배 시기였다.  1929년에 시작된 ВКП/б/(소련방 공산당(볼쉐비키)) 큰 청멸 당시에는 사실 우리당 대열에 기만적으로 끼어들었던 자들이 많이 출당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민 당원들 대오에서 출당을 당하였던 소위 지도 일꾼으로 행세하던 채동순·남만춘·김정규 이전 흰파(백위파) 장교들 김하석·임호 기타 소위 국민의회-이르쿠츠크파들은 사실 당을 기만하고 우리 당 대열에 끼어들어서 당 사업 대신에 종파 싸움만 하던 것이 당시 사실이다.  그러나 스탈린 개성 숭배 당시 당표 검열을 한다고 시작되었던 사변은 한심천만하게 당원 군중들 참가도 없이 수다한 당원들을 원동에서는 일본제국자들과 연락이 있는 듯하다고, 우크라이나 지대에서는 독일 군국주의자들과 연락이 있는 듯하다는 (죄명)을 씌워서 그들을 가족까지 자기 살던 지방에서 축출을 시켰는데 원동 사람들은 Казахстан(카자흐스탄)으로, Украина(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원동으로 강제 이동시키었다. 그리하여 당표를 앗기운 당원들은 당원이 되었던 (죄)이지만 그들 식구들은 당원들 식구인 (죄)로 Казахстан(카자흐스탄)으로 무기한 정배를 오게 되었다. 이 사변을 열광적으로 동정하는 자들은 이전에 남의 노력을 착취하던 토호나 자산가의 류 분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제야 (쌍통을 한다.) 남을 못살게 굴던 당원 놈들이…  1936년 3월 20일 경이었다. 나는 원동 변강 내무 인민 위원회 (УНКВД по ДВК(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внутренних дел, 연해주 내무인민위원부 관리국) 총국에서 오라는 명령을 받고서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해서 스탈린을 말마디 마다 탄압하던 보그란노가 지도하는 ВКП/б/(전소련방 공산당(볼쉐비키)) 당 기관에서 당표를 앗기우고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필자는 Безродный(베즈로드느이)라는 당표 검열원과 10여 일을 걸려서 담화라고 할는지 심사라고 할는지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 며칠 동안에 어느 파 상해·이르쿠츠크 М.Л.(엠.엘)그라파에 속하였는가를 질문하다가 당시에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상해파와 М.Л.(엠.엘)파, 소황령(소왕령,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이르쿠츠크파나 해삼(블라디보스토크) 감옥에 있는 국민의회파가 모두 자기파는 아니라는 회답을 받게 되자 당신은 오랜 당원으로 아무 종파에도 참가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당신이 참가하는 다른 종파가 있을 것이니 그 종파를 자백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1918년 당시에 한인사회당 간부들인 이동휘·김립·이한영 기타들은 이미 세상에 없으며 1920년 당시 조선인들 간의 종파 싸움이 시작될 당시에는 조선인 사회에서 사업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동지들 지도하에서 사업하였는데 1920·1921년에 극동 공화국(ДВР) 원동 공화국 외무성에서 A.M. Краснощеков(크라스노쇼코프)와 Я.Янсон(얀손), K. Харинск(하린스크)와 В.К.Блюхер(블류헤르), 당시 원동 Бюро ВКП/б/(소련방 공산당 뷰로(볼쉐비키)) 책임에서 Пшиничнов(쁘쉬니치노프) 지도하에서 사업하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증명되자, 그는 “한인사회당”이 반 혁명당으로 소비에트 주권을 이용하려던 반 혁명당이라고 강요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만일 그렇다면 우수리 전선에서 싸우다가 죽은 근 100명 되는 조선 근로자들이나 흰파(백위파) Калмыков(칼므코프) 악당들에게 희생을 비인간적으로 당한 우리 지도자 А.П.김-Станкевич(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도 소비에트 주권을 이용하다가 희생된 것으로 당신은 생각하는가고 강요하였다.  1936년 4월 11일에 필자의 당증 061666을 앗아내고 출당한다고 그는 선고하였는데 그날에 내가 수비하던 국경선에는 일·만(일본·만주) 군벌들이 침입 공격하여 나와 같이 그 지점을 수비하던 군인 3명이 전사하였고, 적군 6명이 죽었다는 것을 그 후 3일 만에 알게 되었다.(不亡文日노)

    69 김관수 의병대

    “보국(강보국)이(나)는 평양서 나서 자라다가 갑오년 일·청전쟁(청일전쟁, 1894) 당시 7세 되던 때에 부모가 피난하여 맹산에 가서 자라났습니다. 구학을 공부하고는 평양 친척들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을 시작하였다.  1906년이었다. 평안남도 맹산읍에도 일진회원 악당들이 모여들어 일진회관을 설립하고 매국행동을 감행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된 주민들은 사발통문을 돌리고서 ‘민란’을 일으키어, 일진회관을 부수어 치우고, 일진회원들을 모조리 잡아서 처벌하고, 시경축출을 하여 버리었다.  그 후 우리 학생들은 이러한 창가를 부르면 남녀노소들이 박수하고 앙천대소하였다.시천주 좋다더니 보시보시 죽어 보시영세불망 망해구나 일진회원 죽어 보시지기금시 원망마라.  이것은 일진회원들이 회관에 모여들어서 정화수라는 냉수를 떠다 놓고서 일제히 합창하던‘시처주 조화정영세불망 만사지지기금지 원위대강’이라고 외우던 것들을 저주하는 노래였다.  1907년 가을이었다. 맹산읍에는 김관수가 조직한 의병대가 당도하였다. 이것은 평안도에 처음 조직된 반일 무장투쟁이었다.  김관수는 당시 평안남도 순천군 산북창과 용둔 두 어간에 있는 ‘대치’라는 전부 김씨들만이 사는 농촌 유교에 저명한 학자였다. 그는 이미 삼남에서 유명하던 최익현·이강년 제씨들과 유교로 인하여 연계를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는 반일 구국 의병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그는 자기 촌에서 40∼50명 무장대를 영솔하여 가지고 맹산읍에 당도하였다. 동시에 이미 그와 연계를 가지고 기회를 엿보던 맹산지대 애국자들이 단지 포수로만 조직된 부대를 영솔하고 그와 합류하여 200∼300명 무장대가 집합되었는데 무기는 화승대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맹산 외남면 지붕리에 사는 애국청년 張達英(장달영)이는 1906년 일진회를 박멸하던 민란의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 그 후 피신하여 함경도로 가던 중로에 임관옥 포수(고향 사람)를 만났다.  임관옥이는 다년간 삼수갑산에 가서 산짐승을 잡는데 ●병도와 같이 의병에 참여하였다가 성천포수 차도선이와 같이 오는 것을 만났다.  그들은 양덕 오강능에 가서 그 산면에서 사냥하는 포수들을 모집하여 의병대를 조직할 것을 상론하고 장달영이는 맹산으로 돌아왔다.  그 후 장달영은 대치 김관수를 찾아가서 상론한 결과에 맹산읍을 차지하고 군고에 있는 무기를 가지고 기병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맹산읍 군고에 있던 화승대 쓸 만한 것은 갑오년에 삼남에서 궐기하였던 의병대들이 청국으로 떠나갈 때에 모두 가져가고 남은 것뿐이었다.  김관수 의병대장은 맹산군 도원에 참모부를 정하고 부하들을 八(팔)면에 파견하여 자원병과 매호 한 사람씩 징모하였다. 결과 불과 10여일 사이에 무기 없는 농민 수천 명이 맹산읍에 모여들었다.  동시에 전군에 있는 야장들을 모집하여 낡은 총을 수리하고 군도와 창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평양과 안주 등지로 인원을 파송하여 일군이 오는 것을 탐문하였다.  불과 10여일 후에 안주성내 있던 일본군대가 김병섭이란 통역을 데리고 산북창으로 떠났다는 첩보를 받았다. 그 후에 받은 첩보에는 단지 장총으로만 무장한 일본 군인이 모두 17명이고 무기 없는 일진회원이 10여 명이라고 하였다.

    70 저명한 애국자들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동지들을 추억하면서

    저명한 애국자들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동지들을 추억하면서조선민족해방을 위하여 백절불구하고 투쟁하다가 왜적들에게 학살을 당한 40주년을 제하여(1920년-1960년)소련 중아시아에서 이인섭 1960년 조선해방 15주년을 맞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