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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81 安麥結이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32 - 1933)

    오랫동안 소식 몰라 답답하던 중에 김유성 씨를 통하여 최근에 서신 한 소식을 듣고 안심합니다. 물론 경제의 고통은 말할 수 없겠지마는 동생들이 학업을 계속한다고 하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숙모님 존체 만강하시고 동생들도 건강한지요. 알고자 합니다. 그리고 필립이는 어떤 상점에서 서기 일을 본다지요. 질녀는 십여 일 전에 경성 가서 숙부님을 면회하고 왔는데 일주일 동안 병중에서 심히 고통을 하느라고 지금까지 상서치 못하고 있다가 조금 차도가 있지마는 아직 병중에서 간단히 소식이나 전하려고 합니다. 비교적 육신이 건강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치아가 잘리지 못한 관계로 소화불량이 아직도 있다고 하십디다. 특별히 미주와 상해 소식을 물으시기에 다 평안하시다고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필립의 혼인기가 멀어가는 것을 퍽 염려를 하십디다. 미주에서 가합한 여자가 있어서 약혼을 한다면 별문제고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내가 조선 안에서 많이 지내 본 여자 중에 가장 덕이 있는 여자를 택해서 사진 교환으로 피차 교제하고 서로 합당히 생각되면 미주로 女子를 가게 하여 혼인케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숙모님께 편지를 하여 좋도록 상의해서 잘하라고 부탁을 하시는데, 할 수 있는 대로 그 말씀을 신중히 생각하여 잘 실행케 하는 것이 숙부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상해에 있는 물건은 숙부님이 출옥하셔서 가져올 것만 가져와야 되겠다고 그냥 그대로 두어두라고 말씀하십디다. 정남수 목사는 五月에 다시 미주에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 아시고 안심하시옵소서. 아무리 근심 걱정한들 안 숙부님의 고생을 백분의 일이라도 덜어드릴 수는 없으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것뿐입니다.내가 면회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상하였지마는 이번처럼 마음이 상하고 쓰린 것은 처음입니다. 머리는 다 밀고 옷은 감옥 옷, 붉은 옷을 입으셨는데 어찌 기가 막혔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숙모님이나 동생들에게 급한 것은 한없겠지마는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보는 편보다 낫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도 저는 감옥을 다녀서 그런지 신경이 아주 나빠져서 아주 성질이 고약한 놈이 되었습니다. 신경이 아프고 흥분된 것을 참고 참았더니 경성 갔다 와서는 신경통과 감기로 인하여 심히 고통하였었습니다. 온몸이 하늘에 번개질하는 모양으로 쏘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고로 오늘까지 상서치 못하고 있다가 오늘 오후부터야 신경이 쏘는 도수가 차도가 있으므로 병석에서 늦은 글이나마 올리나이다. 유치원 방학은 三月 十八日입니다. 개학은 四月 七日인데 방학 동안 강서군으로 가서 쉬고 오겠습니다. 四月에는 아버님이 면회를 가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온 가정에 평강을 비나이다.

    82 韓國革命領袖安昌浩先生史略

    아아, 혁명 지도자이신 안도산(安島山) 선생은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분투하고, 정정 40여 년을 혁명에 애썼으니, 그 업적은 해와 별처럼 찬란하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국민들의 추대를 받아 모든 사람들의 혁명 지도자로서 존경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2년 4월 29일, 상해 법조계에서 일본인에게 호송되어 서울로 끌려가 옥살이를 하고, 석방과 구금을 반복하다가, 금년 3월 10일에 61세의 나이로 옥중 생을 마감하였다. 전국이 슬픔으로 애도하고, 온 국민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업의 초창기에 선생께서 갑작스레 서서하시니, 조국이 어찌 그 실패를 감당할 수 있으랴. 선생의 업적과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83 安聖結이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38.4.22)

    너무도 소식을 드리지 못하여 죄송하옵니다. 그동안 이곳 소식을 퍽 기다리셨을 것입니다마는 이번에 불행한 일을 당한 우리 온 집안은 아직도 총망한 중에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목 머심 차시에 주은 중 숙모님 기체 만강하시오며 오라버님과 동생들도 다 평안하신지요. 이곳은 다 무고합니다. 질녀는 늘 몸이 약해서 더구나 병환 중에 계신 숙부님을 대하면 신경이 극도로 쇠약하신 숙부님께 기분이라도 상하시면 어쩔까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숙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결이는 내가 올라오라고 할 때 왔다 가라고 하신다기에 그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종시 살아계실 때에도 한번 못 가 뵙고 이번에 세상 떠나셨다는 전보를 받고는 갑자기 몸이 또 괴로워서 마지막 때에도 못 갔습니다. 부족한 딸은 숙부님을 향해서 죄송함과 슬픔은 저 일생의 가슴에 뭉쳐 있어서 내 머리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이 아플 것입니다. 내 마음에 너무도 슬픔을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이번에 아버님께서 산역하시러 가시기에 저도 같이 가서 분묘나마 보려고 갔다 왔습니다마는 무엇이 시원하겠습니까. 자못 꿈 같을 뿐입니다. 숙부님을 모신 자리는 퍽 훌륭합니다. 서울서 삼십 리 가서 망우리 큰 산 인데 남행 판이고 분묘 아래는 숙부님 계실 때 제일 사랑하시던 아들 같은 유상규 씨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번에 비석을 하려고 하였으나 형편상으로 하지 못하고 나무 팻말에 「島山 安昌浩(안창호)之墓」「死亡日 三月 九日」「祭主 安致浩」이렇게 써서 꽂았습니다. 산역은 괜찮게 한 듯합니다. 무덤은 내게 한 길쯤 되고 좌우로 둘러싸고 분묘 앞에는 장미꽃을 심고 좌우로 향나무와 잣나무, 소나무 등을 심었습니다. 앞뒤로는 진달래와 사철화를 심었고 옆에 화단에는 일년초를 심으려고 합니다. 분묘는 제일 찾기 쉽고 그 자리에 서면 서울 한양이 놓여 있고 앞이 쑥 터졌습니다. 사흘 동안 산역을 하고 왔으나 아직 만족치는 못합니다. 앞으로 아버님께서 좋은 나무를 많이 심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버님께서는 숙부님 돌아가신 후로 퍽 더 늙으셨습니다. 세상에서 아버님은 왜 이런 불행한 일만 당하시는지요. 저번에 장례를 하시고 돌아오신 아버님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 가슴 아픔이야 일생에 잊겠습니까. 모두가 일장의 춘몽 같습니다. 아버님께서 숙부님 병원에 계실 때도 여러 번 가셨고 이번 세상 떠나시기 전에도 숙부님께서 오시라고 하여 올라가셨으나 별반 말씀은 없으셨다고 합니다. 형님네 부부는 다 잡혀갔다가 지난 탄일에 형님과 어린 자영이는 나오고 아직 아저씨께서는 못 나오시고 지난달에 형무소로 넘어갔습니다. 형님에서는 이달이 해산달이므로 태생이 되어 장례 때에도 가시지 못하여 더욱 서러워합니다. 드릴 말씀은 많지만 편지로는 다 아뢰지 못합니다. 내내 숙모님 기체 안녕하심과 댁내 평강을 빌고 그칩니다.

    84 宋鍾翊이 安昌浩에게 보낸 서신(샌프란시스코 ; 1919.6.28)

    第三回發起人會草錄을 寫字案에 ?藏하였는데 來月曜夕前에 洪期가 하옵고 斯後이면 通信이 不得了期일 듯이오니 第三回錄은 依草?更繕이 無違이온 즉 第一第二兩會錄은 姜瀋모자 相效修正하심으로 伏望이옵니다. 趙甲錫兄處去欒은 每日五六度를 注入하라 하십시요.今番創立總會에서는 這間에 巡行하신 旅費를 歸正하여 되겠사오니 旅費上에 明細書를 修來하도록 하십시요.姜子大兄은 今朝에 就此入役이라합니다.餘不備上 弟 宋鍾翊(송종익) 拜上

    85 미국감리교 선교회의 안창호 소개 서한(하와이 호놀루루 ; 1924.12.8)

    86 김경상(Jose Kim)이 安昌浩에게 보낸 서신(멕시코시티 ; 1925.1.10)

    한 번 작별한 후 존안은 뵈옵지 못하였으나 신문지상으로는 대강한 소식을 들어 알았나이다. 물론 원하시던 바와 경영하시던 바에 원만한 성공은 없다 할 지라도 대사의 기초는 세우신 줄로 믿고 알며 또한 무궁한 고생을 하신 줄 아나이다. 그러나 믿고 바라기는 선생의 심어 놓은 광복의 종자의 좋은 추수할 때가 속히 임함이외다.다시 밝는 바 선생 의례 만안하시며 혼실이 여일하와 사 공사에 많은 재미를 보심이옵고, 제는 늙은 몸도 사람이 근근독성하옴에 고국강산에 한 삼치 흙이나마 보내어야 할 생각을 하니까 심이 답답하올시다. 취빅사무 하라 昨年에 영업상 실패로 몸만 남어 굶기를 먹듯 할 때에 선생의 권유로 내인 주식회사 주금(묵화 백육십오원)이 생각이 나서 본사 총무에게 편지하여 다만 몇 원이라도 구조하는 일체로 좀 보내주시면 몇 날의 죽이나마 끓여 먹을까 하나이다 하였더니, 우금껏 일자 회답이 없으니 어찌된 일이오니까? 아직 주주의 계회사 폐지 통고서를 보내지 않았으니 그냥 있는 모양이오며, 있으면 매년 회계보고서가 있을 터인데 그것도 없으며, 사업에 실패하였더라도 매 주금에 얼마 가량이 되었다든지, 다 없어졌으면 없다든지 빚을 졌으면 얼마 졌다든지, 좌우간 회답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찌된 셈인지 알 수 없나이다. 본 회사 총무 송종익 씨로 말하면 재미한인 중 아니 전체 한인 중 똑똑하고 정당하고 경우 있는 靑年이라 하는데 아직껏 서신 상신 용이 얼마나 중한 것을 알지 못하니 참말 우리 민족과 사회를 위하여 통한할 바 아님이 아니외다. 제는 무식한 늙은이라 무엇을 알리오마는, 듣는 바에 편지 받고 회답 아니하면 편지 도적놈이라고까지 한다 하더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송 자가 아마 정신병이 들렸는지도 모르니, 그 치료비로 얼마를 내이라면 옷을 팔아서라도 좀 보탤 마음이 있나이다. 이는 제에게만 이렇게 무심함이 아니라 한인에게까지 그리하여 사오륙 차 편지하여야 한 번 회답 억지로 한다 하더이다.아니 그도 아닐 듯 하외다. 한인의 편지 사오륙 차도 물론 무슨 청구의 사건이겠고 제의 편지도 재정 청구라 어찌 회답할 리 있으며, 또 宋在美 弟在墨에도 아마 거대한 등분이 있을 뿐 아니라 宋有識 弟無識의 別이 있다 보니 敢이 그 양반의 편지 회답 보자는 弟가 失手지오.然이나 만일 貨 幾 千元을 보낼 터이니 兄意 若何오 라고 편지하였던들 回答은 勿論이고 回電까지 받었겠지요. 아무려나 宋者를 面對하여 問議하였다면 宋派의 모듬 매에 崔德圭(최덕규) 모양이 될 터이었으나 萬幸으로 宋在彼 弟在此가 되었나이다. 사랑하시는 선생님이여, 제의 이같이 苦으로 선생의 뇌를 괴롭게 할까 하여 미안함도 없지 않소이다 만은, 참말 죽을 지경이니까 期限의 未滿도 不顧하고 계속 請求하오니 다만 얼마라도 惠送하심이 어떠하오니까? 물론 선생께서도 곤란하시고 분주하실 줄은 아나이다 만은 이 편지 보시고는 葉書 一枚와 一分錢의 時干을 허비하여 주심을 감히 바라나이다.

    87 李鍾旿가 安昌浩에게 보낸 서신(멕시코 메리다 ; 1925.1.5)

    六載의 長世月을 爲國 安民의 目的으로 彈誠 竭力하시다가 第 二 故鄕인 美洲로 還施하시니 閤內는 勿論 在留 全數 同胞의 歡悅 踴躍할 光景이 此地에 蟄居한 鍾旿(이종오)의 心裡에도 悅感 無此이외다. 何時에나 先生 明哲하신 咸敎를 奉聞하여 보올지 賤齡이 今 五十有六이라 餘年 이 不遐함으로 長嘆할 따름이외다. 勢也 奈何 鍾旿(이종오) 自 五年 以來로 勞働은 廢止하옵고 어느 農庄에서 食物商으로 爲業하야 八九 眷率이 僅僅히 糊口는 하는 皃樣이외다. 鍾旿(이종오)의 殘弱하온 身分으로 諺하오면 來頭는 何如 하왔든지 今日까지는 ●으로 滿足을 느낍니다. 그러하오나 介中에 所謂 團友라 各稱하는 一箇 惡分子가 此 商業을 猜忌 하야 八九 食率 老弱의 生脉을 絶所하여 自己의 목숨을 이으라는 不與天의 (以下는 不美하온 言辞가되오므로 先生께서 憂慮하실까 恭하와 消息합니다.) ●漢이 日夜로 接尾轉目합니다. 原來 美 團報가 金基昶(김기창)君에게로 來到하면 各 團友가 一一 分見이옵든바 不意 昨 八月号가 本人에게로 卽送을 하였기에 或者 編輯部로서 무슨 便益을 爲하야 各各 分送을 하는가 하고 尋常 置之 하였습니다. 其 後 九月부터 于今까지 合 四箇号가 永爲 杜絶이 되었습니다. 十月分에 其 裡許를 알기 爲하와 宋鐘翊(송종익)君에게 片紙까지 하였으되 于今까지 無一言 半辞이외다. 此 團報를 一層 歡迎하옵기는 先生이 遠東에 계셔서 本團 事業 發展에 誠心 誠力을 註하신 結果 入團 同志가 日加月增이되오니 吾團에 對하와 豈不獻賀이오리까 所以로 此 團報를 届期 若待하든 處地이올시다. 金基昶(김기창)君 處에 續号 未到이니 豈心疑許處耶歲末에 臨迫하도록 大會 日字는 何如하며 準備 節目은 如斯히 하라는 指令도 不來이오니 무슨 事件을 因하야 그러 하온지 再昨年에 維加舟의 大會 記事라고는 볼 수 없었고 昨年에는 大會에 對한 公文은 來到하였으나 班長의 指揮가 無한즉 그저 지나고 말았으며 今年에는 이것도 저것도 寂然無聞이오니 自夲部로 大會 日字를 頒布치 아니 하셨나, 不然이면 此處에 班長에게는 通知가 有하나 흐지부지 하고 말았나 神聖하다는 團体의 行令이 自上達下가 되지 못하고 五里霧中이 되고 보온 즉 실로 섭섭하기 非至一再이외다. 鍾旿(이종오)로 言하오면 所謂 團友 各色으로 各項 義務도 履行치 못한나 바에 果然 開口키 不能합니다. 그러하오나 本報 代金을 領收하고 團報는 分傳치 아니하면 그것은 報紙 自身이 信意를 損失할까 함이외다. 乞請 此件을 編輯部員에게 下問하시와 何如한 事件으로 停報가 되였는지 回敎之地를 千萬伏望已上列擧하온 말씀은 誰也某也의 愆過를 所毛覓疵함이 決코아니고 本團 事業의 發展을 爲하야 忠告이오니 特爲 恕諒하소서.宋君의 回書를 屈指하다 못하와 다시 先生께 懇告합니다.

    88 張德秀가 安昌浩에게 보낸 서신(웬스코트 ; 1927.7.26)

    市俄長에서 주신 글월은 반가히 捧讀하였사오며 이炎苦에 國家民生을 爲하여 各地로 巡遊하니는 中 氣體는 萬康하신 것을 感祝하나이다. 書翰은 뉴욕서 이곳으로 回送되어 ●●間 遲滯되었사오나 仰回가 이와 같지 늦어진 것은 忙中執筆의 ●●가 없는 까닭이오니 海良하시기를 바라오며 生의 心中에는 다만 先生의 前途에 光明이 爀登하고 至作가 奇原하시기만 기도하나이다. 不通의 乃無는 어찌 可히 난삭한 해이오리까? 下問하신 先生 過激派한에 對하여는 特別한 ●處를 ●●하기는 어려우나 先生 入國에 對하여 米國도 ●省에서 매우 꺼린다는 말은 許殷氏에게서 들었사오며 또 其他 몇 사람에게 들은 것까지 生覺하나이다. 이것이 勿論 米國官里의 先生에 對한 ●●이나 이 ●●로 因하여 先生 大衆에 方●이 生하면 弟도 그같이 ●●될 새가 없다 하나이다. 善筆은 ●究 하시니 白日後 動이 ●●를 이르시기를 바라고 비나이다. 그러나 餘● 先生의 次階舞● 枉東이온즉 一日이라도 速히 還東하시는 것도 無防할가 하나이다. 이를 機會하리니 過激之●에 對한 硏究를 一層深今하라 하셨으면 어떠하겠나이까? 前日에 申●湜兄으로 더불어 ●●登居에 對한 筆과 先生에 對한 仰慕의 ●草에 對하여 屬한 不通이 있겠사온 바 同兄은 이미 同壬職에 對하여 深奧한 學識이 있는 것 같사오며 우리 ●登●여 對하여 切亡한 患處已不禁하는 것 같사외다. 先生의 말씀과 같이 ●悲●個씩 ●이 드물고 또한 우리 ●를 爲하여 ●●은 要●할 이같이 旱●에 ●에 올 사람과 같은 이날에 申兄과 같은 ●●은 不通으로라도 相見케 된 것은 ●은 無限껏 거하나이다. 目下 先生이 卽處에 ●●●하시는지 不明하여 이 글을 桑港으로 登送하옵거니와 歸羅城하시면 申兄과 같지만 引待而聞●히 ●至納에 對하여 討論하시기를 바라오며 生에게로 그 結果를 下敎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어느 때에나 米國은 尙登하셔서 歸東의 程에 오르시겠사오며 歸東하신 後 事業에 對하여는 무엇으로부터 結●을 차리실런지 敎示하시면 生●●●歸東 하신 階會의 榮光을 얻을가 하나이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많고 많사오나 어찌나 ●●로써 할 수 있사오리까? 다만 順詩大安만 祝하옵고 이만 失禮하나이다.

    89 廉光燮이 安昌浩에게 보낸 서신(북미 ; 1925.10.6)

    這間 夏期 放學 后 安先生께 片紙 一張 올리기를 生覺하였지만은 너무도 奔忙 中 此日彼日하여 今日까지 왔습니다. 그러하나 安先生을 弟의 同志로 믿고 安先生을 사랑하고 安先生을 仰慕하는 深誼는 恒常 完實합니다. 弟는 每年 八月 二十五日 頃쯤 始作하야 한 三週日間 特히 여름감기로 困難을 當합니다. 이 病은 市俄古(시카고)에서 얻은 것인데 今年에는 特히 尤甚하였습니다. 그런 故로 夏期 放學되는 翌日로 卽時 市俄古(시카고)를 떠나서「위스칸신」道北方 無人 森林中으로 가서 每日 낮에는 빨리 흐르는 풀램보 江水에서 片舟타고 내려오며 낚시질도 하고 無人 深山에 旅行도 하며 저녁때 되면 片舟는 江邊에 매어놓고 저녁 지어먹고 불피고 이야기하다가 산중에서 자고 다시 그곳을 떠나 흐르는 물을 쫓아 片舟를 타고 南向하매 漁夫 生活을 한 二週日간 하며 지냈는데, 一行은 다만 二人이었습니다. 弟와 同行한 親友는 英文科에 助授로 있고 不遠間 博士를 받을 美國사람이올시다. 弟의 感氣는 勿論 山中에 들어가는 길로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늘 旅行하였고 또는 無人村인 森林이라 郵便局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팍폴스 라는 小市를 떠나 山中으로 들어간 后에 二週日間 사람이라고 만나 보기는 三人 旅行의 一行 一次뿐이었습니다. 그 后 市俄古(시카고)에 돌아와서는 또 분주히 지내는 것이 今日까지 올시다. 우리 米布時局에 對하야 人心이 眩感되는 이 가운데서 安先生께서는 沈黙과 仁愛의 態度를 가지신다 하신 말씀에 弟는 깊이 贊成하며 安先生의 高見을 同情합니다. 勿論 常識이 有한 者는 누구를 勿論하고 現時局을 米國 俗談과 같이 웃어버릴 수밖에 없소이다. 李 大統領은 늘- 一平生을 大統領으로 있을 模樣. 이러한 無限 大統領은 참 世界에 처음 되는 일이요 政府 없는 大統領도 우습지만 現米의 外交를 맡았다는 所謂 現米 委員部는 또 新出인지 再出인지 인 一個 政黨의 總團部가 된 模樣이 더 우습소이다. 우리 所謂 대통령이 아주 말할 수 없이 無識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거나 또 그렇지 않으면 無識에 狂症을 兼하였든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인 것은 分明합니다. 그러하나 이 미친 사람 아래서 따라 허튼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不少한 것을 본 즉 우리 時局에는 狂人과 無識人이 너무도 많은 것은 事實이요 幼兒의 作亂과 같소이다. 時局은 그러하고-貴 宅內에는 從氏의 婚禮의 慶事에 對하야 弟는 深原한 祝賀를 올립니다. 從氏를 만나 보았는지 弟가 記憶은 하지 못하나 安先生의 從弟는 卽 弟의 從氏와 같이 看做하는 生覺 下에서 從氏에게 致賀書를 올리려 합니다. 우리 興士團의 主意와 精神을 一層 又 一層 더 發達시키기 爲하야 우리 團友된 同志들은 이 神聖한 事業에 對하야 할 수 있는 대로 깊이 硏究하고 努力할 必要와 責任이 있는 줄로 弟는 깊이 生覺합니다.

    90 동업계약서 (필립안||칠래정등)

    동업계약서1926년 4월 24일 제1 당사자인 칠레이 정(Chillay Jhung)과 필립 안(Philip Ahn), 제2 당사자인 J. R. 쉐머(J. R. Scheimer), 제3 당사자인 J. V. 고든(J. V. Gordon)은 이 동업계약서를 작성하여 계약 관계를 체결한다.위의 당사자들은 1926년 한 해의 벼 재배에 있어서 동업자 관계를 협정하는 데 동의하고, 동업관계에 따른 각각의 배분은 다음과 같이 한다. 제1 당사자는 벼 재배로 인한 이익과 벼에 대한 권리를 17/28 만큼 갖는다. 제2당사자는 벼 재배로 인한 이익과 벼에 대한 권리를 7/28 만큼 갖는다. 제3 당사자는 벼 재배로 인한 이익과 벼에 대한 권리를 4/28만큼 갖는다. 위의 동업관계의 이름과 형식은 ‘고든’, ‘정’, ‘쉐머’, ‘안’ 이라고 하며, 벼 수확을 마치고 창고에 가져갈 때까지 지속된다. 위의 당사자들은 경지를 정리하고, 관개용수를 대며, 비료를 뿌리고, 씨앗, 볏단 묶기, 곡식 털기, 운반 등 기타 모든 필요한 경비에 현금이나 이와 동일한 가치의 자금을 낼 것을 숙지하고 동의한다. 그 비율은 다음과 같다. 제1 당사자는 17/28, 제2 당사자는 7/28, 제 3당사자는 4/28이다. 위의 당사자들은 제 2당사자가 벼 재배 관리를 맡고, 이런 조건 아래에서 그가 항상 위 동업관계의 당사자들과 벼 재배에 대해 의논할 것을 숙지하고 동의한다. 위의 당사자들은 이 동업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제 2당사자가 회계 원장부와 목록장부를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숙지하고 동의한다. 이 장부에는 소유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기입해야 하며 위의 구성원들에게는 언제라도 공개가 되어 조사할 수 있어야 한다.위 계약의 벼가 다 익으면 탈곡을 하면서 논에서 나누어 각 구성원들은 자신의 몫을 스스로 가져갈 것을 동의한다. 비율을 다음과 같다. 제1 당사자는 17/28, 제2 당사자는 7/28, 제 3당사자는 4/28이다. 그리고 위의 당사자들이 창고까지 이 수확한 벼를 가져가는 비용은 각자가 부담한다. 위의 당사자들은 제 1당사자의 17/28, 제 2당사자의 7/28, 제 3당사자의 4/28로 나눈 몫 외에 투자를 한 경우가 앞으로 있을 때, 위 동업관계의 이익분배는 이전의 분배몫이 아닌 실제로 투자를 한 만큼 나누도록 할 것을 숙지하고 동의한다. 위의 당사자들은 1926년 2월 4일자로 위 동업자들 간에 맺었던 계약은 무효이며 상호간의 동의하에 폐기되었다는 것을 숙지하고 동의한다. 위의 벼가 재배될 땅은 캘리포니아주 코루사(Colusa)와 글렌(Glenn) 카운티의 일부이다. 다음에 임차관계가 더욱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1926년 1월 4일 임차 계약 맺음. 임대인은 J. F. 말론(J. F. Mallon)과 마미 H. 포터(Mamie H. Porter) 이고, 임차인은 칠레이 정(Chillay Jhung), J. V. 고든(J. V. Gordon), J. R. 쉐머(J. R. Scheimer), 필립 안(Philip Ahn)이다. 1926년 1월 4일 임차계약. 임대인은 E. M. 고든(E. M. Gordon)이고 임차인은 쥬웰 고든(Jewell Gordon), 칠레이 정(Chillay Jhung), J. R. 쉐머(J. R. Scheimer), 필립 안(Philip Ahn)이다.1926년 2월 1일 임차계약. 임대인은 서부생명보험주식회사이고 임차인은 J. R. 쉐머(J. R. Scheimer)이다. 이 계약의 증거로 1926년 4월 26일 위의 당사자들은 여기에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는다. (서명) 칠레이 정(Chillay Jhung)필립 안(Philip Ahn)제 1당사자J. R. 쉐머(J. R. Scheimer)제 2당사자J. V. 고든(J. V. Gordon)제 3당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