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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331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2.9.4)

    月前에 李領抵此後에 上書한 것은收覽하셨는지 回音을 承하지 못하와 問하외다 這間公私多難 하심은 不問 可知이오나 直接間接으로 補助하지 못하오니 愧心悚甚이외다. 此處 凡事는 下不上代格으로 至今까지 延亙하여 月報 第五號까지 發送되었소이다. 最近 可慮者一事는 桂兒歐洲行을 利用하여 一砲聲으로 同抱의 絶望病을 甦起하고자하여 一人을 歐洲까지 派送하는데 旅費가不足하여 西伯里亞臨時地方總會 例納金輸入中에 俄貨百元을 節用하였는데 如意하였으면 無慮이온대 該兒가 中路歸國하므로 空然히 旅費만消耗하였는지라 不久에 在總會代議會가 召集될侔樣인데 該數를 送處하기 極難하여 如是所告하오니 中央總會任員들과 爛商하시와 例納金으로 百元領受하였다는 領收證一張만 繕送하시면 從後로 此處 同志中에서 可及의力이 有한대로 補充하오리다. 不然하여 事實이 脫路되면 厥解가可恐이외다 河諒하시옵소서. 公事는 如斯하고 至若私分上하여는來頭가 茫蒼한 것이 三朔前에 命來者가 入來하여 凡節이 難處한 中에 李領이 詹廬氏를 帶同하고 來此하여 留連하옵는바 美洲通信과 及本□通信을 收한後에 去就를 定하고자하는데 于今까지 美洲通信도 本□通信도 頓無하므로 此處에서 姑留하옵사면 來時에 所帶한金額의 數十元之必數는各處電報費로盡하고 其後自美洲來九十餘元(俄貨)은 在彼得堡時에 典執하였던 冬服을 還退하기에三十元이 消費된 侯에는 留連費에所要된 以爲百數十元은 弟가東取西貸하여 支過하였고 以後로도 亦如 是한 모양이온대 取貸한處라도 繼續할만 하면 좋겠으나 此處에서 更無方法이온대 어찌하면 좋을지 沓沓하외다. 旅費만 有하면 西間島(自已仲伯移寓地)나 海三威方面으로 向하고자하나 此亦是難求이외다 晝夜로 兄主의書信을 待하나이다. 弟는 不多한 財政關係로 信用을 失한가 自恐함이 많소이다. 弟의事情이 如此切迫한데 去去益甚한 모양이 兼하여 身病도 漸漸 重하여 가는 터인데 不可不 速히 渡美한 外에 他方法이 無한줄 自認 하는 터인데도 朴永順(박영순)兄의 감農이 어찌되었는지 其他方面으로도 可及的 알수만 있으면 今冬을 此處에서 經過하지않도록 하여야 될 것이 今冬을 過하면 蝟子의 負苦와 如債務者를 成한 貌樣이외다. 事情이 如此 切迫한 故로 차마 이글을 쓰나이다. 李領을 爲하여 分集한다던 것은 어찌되었는지요. 할 수가 없을 것 같으면 더 消費하지 않도록 편지하시며 去就도 速히 定하여 李領에게도 通知하소서. 貴夫人도 隋時安寧하시며 必立이도 善長하노이까. 朴俊基(박준기) 氏는 어찌 그같이 書信이 頓絶하온지요. 逢則 付送하옵소서.

    332 백원보가 최정익에게 보낸 편지

    건국 4245년 9월 22일복순비래(伏詢比來)보체상(寶體上) 노뇌중(勞惱中) 건강(健康)하시오잇가. 원앙송축(遠仰頌祝)이오며, 제(弟)는 의견이이(依遣而已)이오이다. 당지(當地) 정경(情頃)은 하시(何時)이나 운막(雲幕)을 피산(披散)하고 일월(日月)이 소조(昭照)케 될런지오. 권업회(勸業會)는 오인(吾人)의 아령(俄領, 러시아) 기관(機關이)되며 외인(外人)이 처우(處遇)할 기달(基鐽)이온데 차(此)가 설립(設立)된 후(後)에 하등(何等) 취서(就緖)가 돈무(頓無)하고 단(但) 신문(新聞) 일건(一件) 부지(扶支)하는 것도 유지(維持)키 만난(萬難)하오며, 이상설(李相卨) 공(公) 기(其) 양반(兩班)은 하등(何等) 주의(主義)이온지 서도(西道) 인사(人士)는 축출(逐出)키로 단념(斷念)하고 윤(尹)·구(具) 등(等) 헌병부(憲兵部)에 관련(關連)한 종자(種子)들을 촉(囑)하여 좌월(左月)에 용강인(龍江人) 김치관(金治觀)을 왜(倭) 정탐(偵探)으로 구함(構陷)하여 연추(蓮秋)로 재송(載送)하여 귀국(歸國)케 하온 바 제(弟)가 동행(同行)하여 중로(中路)에서 뽑아 들이옵고 금월(今月)에는 박영갑 씨를 치따에서 착래(捉來)하여 수십일(數十日) 경과(經過)케 한 후(後) 삼일(三日) 전(前)에 우(又) 연추(蓮秋)로 재송(載送)하야 귀국(歸國)하였난데 무린 안정근 형이 적래(適來)하였다가 동행(同行)하였사온데 주선(周旋) 여하(如何)는 고(姑) 미지(未知)이오이다. 원동(遠東) 사세(事勢)를 현상(現像)으로 관(觀)하오면 망연(茫然) 답답(沓沓)하오이다. 피(彼) 구함(構陷)하는 간악(奸惡)한 배(輩)가 어찌 아인(俄人, 러시아인)의 정탐비(偵探費)로 여차(如此) 행사(行邪)하옵니까. 왜금(倭金)을 포식(飽食)하는 행위(行爲)로 우심(尤甚)함이 여차(如此)하오며 기외(其外)에 월송 김형식(月松 金衡植) 등(等) 인물(人物)은 자기(自己) 등(等)에게 사행(私幸)만 영(榮)으로 지(志)하고 시비(是非)를 공언(公言)하는 자(者) 일무(一無)하오니 태식통소처(太息痛笑處)이오이다. 양(兩) 장씨(張氏) 사(事)로는 포와(布哇, 하와이)에서 청왕(請往)하겠다는 문자(文字)만 내도(來到)하고 여비(旅費)는 여하(如何)한 언론(言論)이 고무(姑無)하오이다. 신(申) 박사(博士)는 상해(上海, 상하이)로 행리(行李)를 수진(修趁)코자 하오나 규지(圭地) 신문(新聞)이 유지(維持)하는 경우(境遇)에 졸연(猝然)히 박정(薄情)치 못하여 고유(姑留)하오며 신씨(申氏)는 아직까지 제(弟)와 최신(最信)하는 ●이오이다. 『대도보(大道報)』와 『신한민보(新韓民報)』는 휴간(休刊)없이 계속(繼續)하옵니까. 『대도보(大道報)』는 제삼권(第三卷) 발간(發刊)한[이대창(李大昌) 씨(氏) 주필(主筆)된] 후(後)에 일이호(一二號) 각(各) 이도식(二度式) 내도(來到)되옵고, 기후(其後)에는 일책(一冊)도 내착(來着)이 무(無)하옵다가 휴간(休刊)될 시(時) 제십일호(第十一號)가 일차(一次) 삼십도(三十度)가 내착(來着)하였사오며, 『신한민보(新韓民報)』는 아경(俄京, 모스코바)에서 당금(當今) 떠나신 후(後)로는 일매(一枚)도 부도(不到)하옵나이다. 미포(美布, 미국) 소식(消息)을 좀 알려면 신문(新聞)이나 보아야 하겠사오니 매호(每號) 이삼도식(二三度式)만 부송(付送)케 위탁(委託)하시옷소서. 양(兩) 장씨(張氏)가 도서(渡西)하는 것이 필요(必要)하옵는데, 차지(此地)에 경과(經過)키는 일시(一時)가 민연(悶然)하옵고 독울(獨鬱)하옵지 않겠소있가. 제(弟)가 또한 부득불설빈(不得不說貧)하여야 되겠소이다. 구채(舊債)로 위(爲)하여 금동(今冬)에는 기한(飢寒)의 욕(辱)을 미면(未免)할 경우(境遇)이온데, 하등(何等) 성력(誠力)으로 주선(周旋)하시든지 보조(補助)하여 주시옵소서. 당지(當地)의 착란(錯亂)한 정도(程度)는 가소가탄(可笑可歎)할 처(處)가 만만(萬萬)이오이다. 후일(後日) 장도빈 형(兄)을 친면(親面)하셔서 상문(詳問하시옵소서.) 불비상(不備上).백제(白弟) 배근(排謹)단군건국(檀祖建國) 4245년 9월 23일

    333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건국 4245년 9월 23일伏詢 比來 寶體上 勞惱中 건강하시오닛가? 遠仰 頌祝이오며 제는 依遣而已이오이다. 當地 情景은 何時여야 雲幕을 披散하고 日月이 昭照케 될런지오?권업회는 吾人의 俄領 機關이 되며 外人의 交通할 基錢이온데 此가 설립된 후에 하등 就緖가 頓無하고 단 신문 一件 扶持하는 것도 유지키 萬難하오며 相卨公 其 양반은 하등 主意이온지 西道 인사는 축출키로 단념하고 尹・具 등 헌병부에 관련한 種子들을 囑하야 去月에 龍江人 金治觀을 倭探偵으로 構陷하야 蓮秋로 載送하야 귀국케 하온바 제가 동행하여 중로에셔 뽑아 돌리옵고 금월에는 박영갑 씨를 치타에서 捉來하야 數十日 경과케 한 후 삼일 전에 又연추로 재송하야 귀국하옵는데 무린 安 兄이 適來하얏다가 동행하엿사온데 주선 如何는 姑未知이오이다.遠東 事勢를 현상으로 觀하오면 茫然 답답하오이다. 彼 構陷하는 奸惡之輩가 엇지 俄人의 정탐費로 여차 행사하오릿가? 倭金을 飽含하는 행위로 尤甚함이 如此하오며 其外에 월송(이종호) 등 인물은 자기 등에게 私幸만 榮으로 知하고 시비를 分言하는 者 一無하오니 太息痛哭 處이오이다.兩 張(도빈) 氏 事로는 포와(하와이)에셔 請往하겟다는 문자만 來到하고 여비는 여하한 언론이 姑無하오이다. 신(채호) 박사는 상해로 行李를 修진코져 하오나 당지 신문이 유지하는 경우에 猝然이 박정치 못하야 姑留하오며 申(채호) 씨는 아즉까지 弟와 最信하는 양이오이다.大道報와 신한민보는 휴간 업시 계속하옵나잇가? 대도보는 제3권 발간한(李大爲 씨 주필된) 후에 일・이호 각 二度식 來到되옵고 其後에는 一冊도 來着이 無하옵다가 휴간될 시 제10호가 일차 삼십度가 래착하엿사오며 신한민보는 아경에셔 李令 떠나신 후로는 一枚도 不到하옵는데 김성무 씨 명으로 간간 一度式 來하옵나이다.(북)美布(와) 소식을 좀 알려면 신문이나 보와야 하겟사오니 매호 이삼度식만 付送케 위탁하시옵소셔. 兩 장(도빈) 씨가 渡西하는 것이 필요하옵는데 此地에 경과키는 一時가 悶然하옵고 煩畓하옵지 안켓사오닛가?弟가 또한 부득불 設貧하여야 되게소이다. 舊債로 爲하여 今冬에는 飢寒의 辱을 未免할 경우이온데 하등 誠力으로 주선하시든지 보조하여 주시옵소셔.當地의 錯亂한 정도는 可笑 可歎할 處가 萬萬이오이다. 후일 장도빈 형을 親面하셔서 詳聞하시옵소셔. 不備 上. 白(원보)弟 拜再. 檀祖 建國 4245년 9월 23일

    334 백원보가 최정익에게 보낸 편지

    건국 4245년 10월 8일구월 이십 삼일 修上한 제십호 書까지 無漏入覽하셧사오닛가? 팔월 이십일 際까지 下付하신 兄函을 拜承하엿소이다. 伏詢 此來 보체 공무 惱勞中 恒健하시오며 諸 동지도 均安하시옵고 공무는 大小事間 善就되옵는지 遠外 仰祝이오이다.當地 정황은 前書에 告함과 如히 不好하고 착란하오나 열성 堅志者의 상상으론 장래 희망점만 看破하오리다. 무용의 인물 幾個가 이천만의 좀이되여 방해가 無常하니 此는 我 동포 전체의 몽매한 소이로 如此하고도 誅戮을 不被이오이다.朴永甲 형은 중국領地로 往到케 하엿사오며 아즉 훈춘 지방에 留하옵나이다. 秋汀(이갑) 형은 歸國의 策을 全罷하고 강형 잇는데서 過冬할 세이온데 왕왕 불측한 충설로 俄・倭 交界로 모모씨를 欲捉 云云이 多하오니 차지에 在하야는 絃上의 鳥와 同하오이다.여하간 한인의 一團으로 認증하는 권업회가 善進하여야 될터이온데 사업가의 주관이 못되고 성실치 못하야 悶歎萬萬이오이다. 此地 情形은 개량키 極難이 無한 듯하고도 齊力키 難하온즉 실시 능력 乏少이로소이다.兩 張(도빈) 氏의 事로는 포와(하와이)로 兩次 委書하엿사옵거니와 該地 풍량이 如何케 되엇사오며 兩氏에게 如何케 운행코져 하나닛가? 前者에 顧聘하겟다는 書字만 來到하엿소이다. 신한민보와 團報가 無病 장수하옵나닛가? 근일에는 단보까지 未來하야 疑慮이오이다. 민보 幾枚式이라도 부송하면 破沓되겟소이다. 弟의 사정은 前書에 設貧을 多告하엿사옵거니와 今冬에는 飢寒의 辱이 급박하오이다. 舊債로 인하야 하등 방책을 정할 수 無하오니 사실은 目目者한 동지가 아니면 難測이오이다. 불비 상. 白(원보)弟 拜再.건국 4245년 10월 8일.故 李儁 씨의 子 鍾昇 씨를 위하야 미주로 입학케 하자는 발기인이 有하여 弟等 該 發起에 參涉되엿사옵고 장차 제등에게 私簡을 청탁할 터이온데 공익에 多用하신 미포 동지가 엇지 또 찬조할 수 有하오릿가?사실을 預燭하시오며 安의사의 三弟 (안)恭根 씨는 현금 俄京에셔 입학할 豫備는 已修되엿사오나 상당한 자본금 幾백원이라도 有하여야 상당한 학교에셔 工課할 勢이온데 此 將奈何오? 안 씨로 논하면 아경의 유학이 二天萬에 게好及됨은 姑舍하고 吾輩에게 긴급한 事가 아니오닛가?時年 구월에 포와(하와이)에셔 당지 공동회로 委書하기를 (안)공근 씨를 미주까지 여비만 擔送하면 학비는 포와(하와이) 공동회에셔 전담하겟다 하엿드니 這間 여하케 결정되엿사온지 奔忙하신 중이라도 調探하시와 가급적 면려하심을 伏望.할 수 잇는 대로 李儁 씨 자제에게 동정을 표하면 好영향이 他地에도 生할 듯하오이다. 此書가 서백리아를 경유하는지 詳考하시옵고 胎呈하는 外封대로 일차 回示하시옵소셔.然하면 俄文은 未知하는 美郵에서 영문대로 뉴욕을 經하여 俄國으로 송처할 듯하와 試驗的이오이다. 弟에게 특사하신 위임장도 伏受하엿소이다. 朴永甲 형은 중국 지방에서 質定한 주소가 姑無하오이다.正 제십이호건국 4245년 10월 31일本月 팔일 修上한 십일호 書는 照覽하엿사오닛가? 팔월 사일 修上하엿든 제구호 書는 外封에 誤書가 有하야 뉴욕에셔 還退를 當하엿사온데 구월 이십 삼일 修上한 십호 書는 落失된 誤錯이 無하와 信傳되엿사온지오?구호 書函 중에 別히 요점의 사실은 頓無하오나 金成武 씨의 託送하엿든 信書를 동봉하여 轉達하엿다가 還來함으로 今에 更히 同封以上하온즉 差晩한 失信이 多大하오이다. 敬詢 爾來 보체 惱勞中 건강하시오며 僉位 兄候均安하시온지 遠仰頌祝이오이다.弟는 滾樣한 其狀이 形達키 難하오니 십호 십일호 書에 旣告함과 如히 今冬에 여하할 관계를 眞的히 親覽하심과 躬被하심으로 此前 尤燭하시오며 십일호 書中에 告함이 有하엿사옵거니와 故 李儁公 傳記 간행과 其 令允 유학시킬 목적으로 발기한 該事에 대하야 此處 신문을 考覽하셔도 洞悉하려니와 차처에서 義捐 募集會로 정재관・황공도・이상설 諸氏가 연설하는 其 동시에 백여원이 즉 수습되엿사온지라.然이나 外邨에셔든지 혹 本港 등지에셔 收合되는 것으로는 목적한 其 수효에 달할 금액이 될넌지 難測한 중에 況且 李儁公의 事로 我韓 동포가 其 誠力대로 義捐하는데, 누락되면 其 동포의 심사가 自愧 自悶할 경우이온즉 何방면으로든지 열사와 義人 숭배하는 표준도 作하며 풍습도 造하야 吾人의 사상계를 개량함도 可하옵고 又는 李儁 公의 令允으로 乞客의 行을 冷視하고 其 可尙한 인격을 수양치 못하면 所謂 指名하는 我韓 志士의 가치가 若何하오릿가?望須 我兄은 誠力을 盡하샤 貴 신문에 고취하는 長文 短篇을 게재하시고 互相 면려하실 동지와 輪議하야 俄人의 장래 행복을 做하시옵소셔. 此事에 대하야 (북)미・포(와) 兩地에셔 誠力대로 금액이 수집되면 막대한 好영향은 盡達키 難하오이다. 餘는 姑待賁回 不備 上. 白(원보)弟 元普 배재.檀祖 建國 4245년 10월 31일.再. 僉位 諸兄에게 各達치 못하옵고 我兄에게 全仰하오니 此漢의 書가 或生 될넌지오. 同封한 金成武・崔東和 씨 등 書도 信傳焉.

    335 정경오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伏詢此時에 旅體節이 萬旺하시오며 一切 幹務에 無惱神하시온지 仰頌且祝이오며 弟는 去初夏에 緊한 事를 帶하고 치타行을 作하야 黑龍江 沿岸에 在留하는 各處 同胞를 視察하고 一個月前에 海港에 還하얏소이다.此處 業會는 月松(이종호) 君이 主張하야 如干施設이 有하나 形式에 不過하고 精神的 團結이 未有하니 心惜하는 바로소이다.弟與幾個同者는 一方面으로 月松(이종호)의 事業을 贊成하며 一方面으로 秘密히 精神團結으로 尤極擴張하야 海港 以外의 裡面人心勢力은 十의 八九를 收得한 貌樣이외다.然이나 俄領은 本히 着服 奠基할 地가 아니라 吾兄의 務圖하던 中 領經營을 繼行코저 하야 日夕不邂한 結果로 去初에 黃菊保 氏가 八面洞地百日耕를 買得하고 現에 許大和 氏도 該地에 移住 耕作하기를 許하얏고 또 去夏에 個人 移住한 者 二天餘戶라.自然 一村落을 成하게 됨에 敎會와 學校를 設立함이 必要함으로 眞實 敎師와 敎人을 委遣하기로 內決하고 且 常日 吾兄의 硏究하던 地方自治制를 實行코져하야 張道斌 氏와 同히 該規則을 起草하는 中이오다.常히 (俄領情形)과 官人及金錢勢力에 見屈하야 大經綸을 未伸하니 心甚畓畓이로소이다.且重托事 許泰和 氏에게 一次 致書하시와 耕作 經營을 奬勵하시옵소서.餘立候回音 不備42?? 11月 18日 弟 鄭敬五 拜島山(안창호) 兄 閣下至緊한 方略을 敎示하옵소서. 崔正益・黃思溶 兩氏에게 一切 言及하시옵소서.

    336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敬詢 比來 寶體候 만녕하시오며 공무도 日增 新鮮하야 善准하옵나이가? 遠仰 頌祝이오며 제는 객상이 依遣하오니 他何更告리오?당지 사정은 권업회 임원을 更選하야 신문에까지 發布하고 其餘 사실도 略布하엿사오나 崔레포로 의장을 선정하엿더니 强辭함으로 이종호 씨로 갱선하엿사며 본년도 예산안은 부족액이 구십여원인데 月松(이종호)이 自擔하야 六차에 분납할 줄로 증명하엿사나 該氏가 자본이 여하한지 現 貯金이 全無하야 신문사 기본도 처치하지 못함으로 신문 제1호 발간이 장차 長壽無恙할지 의려이오이다.然하온데 (이)상설・(이)종호 양씨가 洽和한 기미가 少하고 就緖의 不善으로 정재관 형은 타처로 向코져 하는 事勢이오이다.(월송(이종호)이 타인의 債負도 수십원이온데 鄭(재관) 형과 (이)상설과 협의 一同되는 것으로 憚疑도 하야 事事不善함으로 정(재관) 형은 好결과가 無한 것을 預量하고 아즉 모처에셔든지 거처를 택하는 중단지에서 數朔 경과에 기막히는 곤란을 당하엿사온데 재정은 순환할 道가 전무한즉 奈何 奈何?)弟亦 식비로 인하야 被捉以過 하옵는데 전후에 何방면이든지 참관할 경우가 못되여 직접 간접 찬성치 못하엿소이다. 근일 內地로 從來하는 소식을 得聞하온즉 玉觀彬 씨가 賊倭의 惡刑을 不勝하야 九泉에 歸하엿다 하며 梁(기탁)・林 씨 등도 死地에 已在한 양이라 하엿사오니 此가 眞的지 못한 풍설이오나 옥(관빈) 씨 棄世는 십상팔구인 듯하외다. 內地・西道 소년及지사와 無名한 純民이 거개 타진을 당하오니 寧欲無言이오이다.張基榮・張道斌 양씨를 포와(하와이)로 천거코져 하옵는데 (장)도빈 씨는桑港으로 행코져 하는 중에 겸하야 상항에셔도 주필을 구하옵든 터이옵기 포로 보내는 서신을 崔正益 씨게로 胎送하야 조처케 하오니 考覽하신 후 장도빈씨를 상항으로 請케하시게스면 俄京까지 행할 여비는 此地로(錢 백원) 電付하시고 餘는 崔廣 씨게로 付送하시옵소셔. 도빈 씨가 일전에 候上한 書를 照覽 하셧사오가? 餘姑不備 上. 弟 白元普 拜再.

    337 장석천이 安昌浩에게 보낸 서신(하와이 하나 마우이 ; 1912.12.26)

    敬告者 본 국민이 기호를 의정하온 바 우심하오나 금정위원 각하에 들리온 즉 궁금하심 절망망망 해석一 왈 다섯가지를 四처로 버려 놓았으니 이수이 견고한 배 그 배는 수중에서 더 견고하올 배는 부당이언이와 二千만 인구 원을 얻을 배요 우리도 또한 차배와 같이 동심합역하면 곧 차 견고한 배와 같이 단체가 되면 우리 三千里 江山을 회복하며 二千万 인구가 자유와 완전한 독립을 세워 千축만대 우리에 복락이 곧 있겠은즉 행복이라하외다. 二왈 四처에 다섯가지는 곳 四方을 응하고 靑띠 두른 것은 二千万인 청청한 근역이오며 홍띠는 성혈로 비하옵고 복판은 곧 우리에 중황을 이로운 것으로 도정하온 바이온즉 제위 선생께서 깊이 궁구해 보옵소서

    338 서초・최광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도산(안창호) 안 선생 전.해항에서 우리 泰斗와 같이 앙모하는 도산(안창호) 선생을 拜辭하온 후로 일개년 동아능 絶島와 같이 雪山에서 재미있게 지내고 본년 오월 경에 흑룡강 북안 흑룡주 수부되는 블라고메센스끄에 하래하여 당지에 재류하는 청녕 동포로 더불어 여름을 지내는데 해지에 국민회와 학교가 유함으로 있는 동안 힘있는 데까지 도왓사오나 효력은 별무하옵고 또 아령의 사세를 제 방면으로 관찰하여도 아국 문언을 功修함이 필요한 감각이 생하여 추정(이갑) 선생에게 상서하엿삽더니 마침 허락하시고 또 지도를 여하심으로 진즉 차지로 향하라 하엿사오나 해지에서 졸연이 출발하기 난한 사정이 有하여 三昨日에야 차지에 才到라얏슴니다.그 동안 선생께 삼차 상서하엿사오나 다 中沈되고 차지를 경하여 遞去한 一度 書가 겨우 入鑑된 것을 차지에 와서야 알앗사오며 선생의 그 동안 경과하신 대개도 차지에 와서 的聞하엿슴니다.또 추정(이갑) 선생에게 작일 래도한 선생의 華函을 보옵고 또 선생의 近節을 알앗사오며 生등의 도미에 대하여 말슴하셧사오나 생등은 아령에 재하여 獻誠하기로 결의하엿슴니다.생등이 노동계에 재하여 동포의 상태와 지리 풍토에 관한 경력 급 관찰이 유한 것과 및 俄 文言을 전수코져 하는 이유는 추후 暇日을 대하여 記事的 문자로 품달코져 하나이다. 현금 차처에서 경과하는 제절은 이(갑) 선생 서에 備有하오나 이 선생의 환후는 기거를 자유로 하시기 어렵사오며 형용이 초췌하신 것은 형언할 수 업사나이다.의사의 말슴이 거금 일년간은 치료하여야 완복 되리라 하오며 매일 병원에 가서 마찰 치료하고 삼일 일차씩 전기 목욕을 행하며 매일 사차씩 환약을 잡숩니다.그런데 경비의 곤란을 인하여 주부를 해고하고 생등이 작식함에 식찬이 다 합당치 못함으로 此 一款이 더욱 민망하고 송구하오이다. 올 때 치타에서 정(재관)・리(강) 양선생을 뵈었는데 伊時에 정(재관) 선생도 뇌증이 발하여 불녕하시옵더니 근일은 하여하온지 알지 못하나이다.伊間은 가져 와서 각처 통신이 浩繁함으로 祥稟치 못하옵고 다만 선생 기체 내내 건강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옵니다. 흑하(불개미스그)에는 생등이 떠난 후에 朴禮澈・金申 양씨를 가 있게 하엿슴니다. 기타 해항 부근에 재한 제동지를 흑룡강 연안으로 이주하도록 주선하엿슴니다.건기 4244년 10월 21일 서초 최광 등 재배.生等이 노동하던 모양으로 박은 사진 一度를 송상하옵나이다. 생등의 도미에 대하여 말슴하셧사오나 생등은 아령에 재하여 헌성하기로 결의하엿슴니다 하는데 대하여 徐超는 오대영・김진헌 형과의 관계가 有함으로 아령에 재하여 헌성하기로 결이한 이유를 追後 備陳하려 하옵나이다.

    339 李甲이 安昌浩에게 보낸 서신(러시아 ; 연도미상)

    經海敬兄은 奉垂察焉 하소서. 此가 弟의 前途崎嶇함인가 苦盡甘來의 資料가 되려함인가 前生에 積惡이니 今生에 作孼의 報答이 됨인가 現此惟固莫甚焉이외다. 弟가 本시 漢學力의 素養도 不贍하므로 身外無物이란 一節의 解釋을 一身의 犧牲으로 할 일이 百千萬物에도 지내는데 此는 冒險性不足한 腐儒의 卑怯한 말이니라 誤解하였든만 身病 이차에 至함이 一身을 犧牲하여야 할 때는 百千萬物을 一事도 不能하리니 正히 身外無物이외다. 弟가 他方面으로 自學하는 일은 別無하였으나 至於冒險하여는 決코 他에 讓步하지 않을 줄로 自信하고 不遠好機會에 우리獨立戰爭에 馬革裹尸할줄로 自期하였던만 오늘날 同志의 可矜的 愛致로 藥술이나 米飮 그릇에 이몸을 버리기는 참말 寃痛하외다. 何如間 目下情況으론 一線生脈에 惟在於 在半 諸同志之另力而已외다. 急

    340 김성무가 안창호 등에게 보낸 편지

    4247-04-22(음)안창호・李大爲・黃思溶 座下.수년래 修成하지 못하였스오니 不勝未安이외다. 謹詢此來 三兄 體度 만안하오며 所看事 如何이오닛가? 제는 省率姑依이오니 這間 此事는 근근 경과 而在美諸君의 소망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害損之境에 不至케 할 듯하외다.現 興凱湖岸 快當別 지방에 商務가 흥왕하여 俄地 수출이 居多하여 得利之事가 多有하오니 재미 동포는 일차 更試하와 미화 삼천원만 股集하시와 使弟遂意하심을 務望.此 액수를 고집하지 못하면 일천 오백원이라도 似好이외다. 삼천원 이상 금액을 모집할 수 없으면 제가 일차 渡美爲計하나이다. 餘只祝台安.4247년 음 4월 22일. 제 김성무 배상.봉투 : 送美國行 안창호・이대위・황사용 三兄 均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