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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61 선교사 재판 계속

    피고 모우리(Mowry) 측 답변. 숭실대학교(Soong Sil College) 교사의 증인 심문. 미쓰이(Mitsui) 검사의 가차없는 고발. 우자와(Uzawa) 박사와 다른 세 변호사의 주장. 변호사들의 주장에 대한 검사의 반박.첫 재판에서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진 선교사는 당시 머리도 빗지 않고 수염도 깎지 못해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이번에는 옷차림은 그대로였지만 수염을 깨끗이 깎았고 불안한 기색도 없어 보였다. 그는 첫줄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깊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주변의 미국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우자와(Uzawa) 박사는 피고가 이틀이나 사흘 동안 매우 쇠약해져 있는 상태라며, 따라서 심문이 길어지면 피고를 앉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판사도 허락을 했다. 심문은 첫 재판 때와 거의 흡사했다. 피고는 자신의 이력과 이번 문제에 관련된 사람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번 문제가 시작되었을 때 자신의 상황은 어떠했는지를 질문받았다. 피고는 3월 1일 숭덕학교(Soong Duk School)에서 열린 독립운동을 위한 회합이나 추도 의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그 문제에 대해 상의를 한 일도 없다고 말했다. 또한 이보식(Yi Posik)을 비롯한 다섯 명의 한국인들이 자신의 집에서 자긴 했지만, 한 사람의 교사로서 또 좋은 친구로서 자신의 제자들을 데리고 갔던 것일 뿐이며, 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전혀 몰랐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숨겨 준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판사는 경찰서에서 숭덕학교(Soong Duk School)의 교장이 3월 1일 집회에 참여했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지만, 피고측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판사는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해 피고의 의견을 물었다. 이 질문에 피고는 관련된 사실에만 답할 뿐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답변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판사가 평화를 파괴하는 것과 관련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언제든지 자신의 의견을 말하겠다고 대답했다. 판사: “첫 재판에서 검사가 한 말을 보면 당신은 그 다섯 청년들을 집으로 데려가기 전에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어째서 이제 와 다른 말을 하는 겁니까?”피고: 저는 제 증언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판사: 당신은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던 것을 알았는데, 자신들이 체포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몰랐단 말씀입니까?피고: 저는 그들이 체포될까 봐 겁내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판사: 그렇다면 왜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까?피고: 저는 그들이 잡힐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판사: 이인선(Yi Insun)과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당신은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그들을 당신의 집에서 재워 주었습니다. 또 마지막 재판에서 당신은 자신이 상황을 알고도 청년들을 집에 두었다고 말했으며, 하지만 그들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떻습니까?피고: 아이들은 경찰이 자신들을 체포하려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고, 아이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는 말했지만 저는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문제가 발생하던 때 피고의 행동. 나라하시(Narahashi) 씨가 증인으로 질문을 받았다.3월 1일 모우리(Mowry) 씨가 집회에 참여했던 점이 중요한 문제로 보였기 때문에 변호사 오쿠보(Okubo) 씨는 나라하시(Narahashi) 씨를 증언으로 요청했다. 오쿠보(Okubo) 씨는 3월 1일 모우리(Mowry) 씨가 무엇을 했는지 나라하시(Narahashi) 씨가 알고 있으며 재판정에 나와 있다고 말했다. 나라하시(Narahashi) 씨가 증인석으로 올라갔다. 그는 다이쇼(Taisho) 4년(1915) 4월에 숭실대학교(Soong Sil College) 교사가 되었으며, 자신은 물리, 화학, 광물학, 경제학 교수라고 말했다. 질문: “3월 1일 학교에서 교사들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답변: “나중에 들었습니다.”(주의. 이 모임은 분명 대학교 이사회 모임이었으나 한국인 서기관은 이를 교사 모임으로 번역했음. 통역관.)질문: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만세’ 소리를 들었습니까?”답변: “오후 1시쯤 제가 학교에 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질문: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땠습니까?”답변: “제가 집에 돌아온 것은 오후 4시였습니다. 제가 군중들을 처음으로 본 것은 지사 사무실에서였습니다.”질문: “이 문제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습니까?”답변: “몰랐습니다. 2월 28일 학생들이 학장님께 다음날을 휴일로 해줄 것을 요청했고, 제가 모펫(Moffett) 총장님께 여쭈어 보았지만, 총장님은 휴일로 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는 수업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3월 1일 제 수업이 있는 오후 1시에 학교에 갔고, 아무도 없길래 4시까지 혼자서 실험을 했습니다.”질문: “그때 모우리(Mowry) 씨를 만나셨나요?”답변: “제가 한참 실험을 하고 있을 때 모우리(Mowry) 씨가 학교에 와서 타이프라이터가 들어 있는 상자를 열었습니다.”질문: “추모 모임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답변: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질문: “추모 집회에 외국인들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까?”답변: “세 사람이 참석했다고 들었습니다.”질문: “그 이야기는 누가 해 주었습니까?”답변: “모르겠습니다.”질문: “그 세 사람은 누구였죠?”답변: “모펫(Moffett) 씨와 번하이젤(Bernheisel) 씨, 그리고 한 분이 더 있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름을 듣지 못해서 누군지 모르지만 모우리(Mowry) 씨가 그 집회에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질문: “모우리(Mowry) 씨가 어디에 갔다가 학교로 왔다고 생각하시는지요?”답변: “집에서 학교로 왔다고 생각합니다.”나라하시(Narahashi) 씨의 답변은 분명한 것 같지 않았고, 겨우 답하는 것 같았다. 나라하시(Narahashi) 씨는 가능한 한 피고에게 유리하도록 답변했다.검사의 논고검사는 “이 문제를 법의 측면에서 보면 피고가 그 다섯 사람이 범죄자인지를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상관없이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숨겨 준 것은 엄연한 범죄입니다. 피고는 자신이 다섯 사람을 자신의 집에 묵게 해준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이 그들을 숨겨 주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분명합니다. 피고가 그 사람들이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는지는 약간 의심의 여지가 있습니다. 피고는 이보식(Yi Posik)과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질문에서 첫 재판 때와 같은 식으로 답변했지만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피고가 그 학생들의 걱정에 대한 질문에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피고는 학생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지만 그런 답변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검사 사무실에서 피고는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체포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그가 자신의 집에서 그들이 잘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분쟁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도 피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본 검사는 피고가 이 분쟁이 평화를 방해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피고는 오랫동안 한국에 있었고,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숨겨 주는 것이 일본법에 위배된다는 것을 몰랐을 리도 없습니다. 이보식(Yi Posik)과 다른 네 명의 학생들은 평화를 깨뜨리는 분쟁에 참여했고, 체포될까 봐 두려워 숨겨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피고는 이 학생들을 보호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집에서 자게 해 주었고, 그들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피고가 알았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피고는 그 아이들이 무슨 범죄자인지 몰랐다고 말했지만, 이 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3월 1일에 벌어진 시위에 참여했으며 그들이 체포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첫번째 재판에서 학생들을 집에 재워 줄 때 상황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피고는 “그렇습니다”라고 말했으면서 지금은 몰랐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두 대답은 서로 맞지가 않습니다. 형법 제3조에는 범죄자를 숨겨 주거나 체포되지 않고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것은 범죄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피고가 그 다섯 명의 학생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었는지 아닌지가 문제입니다. 정의로운 모든 종교에 따르면 피고는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범죄자를 숨겨 줄 수는 없었습니다. 관청에서는 오후 9시 피고의 집에 범죄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피고를 신사로 생각해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피고의 집에서 독립신문과 기타 물건들이 나왔기 때문에, 피고의 집에서 범죄자들을 수색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갈 곳 없는 범죄자들은 은둔지를 찾고 걱정 없이 독립에 대한 문서를 인쇄했던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피고는 첫 재판에서 인정한 것처럼 상황을 다 알고 그 사람들을 숨겨 준 것이 분명합니다. 저로서는 피고가 항소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으며, 이전에 받았던 6개월 징역과 중노동이 그대로 선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우자와(Uzawa) 박사와 세 명의 변호사는 새벽까지 주장을 했다.변호사는 “첫번째 질문에 관해서 검사는 학생들의 증언에 따라 피고가 상황을 모두 알면서도 학생들을 숨겨 주었고 따라서 범죄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다섯 학생들이 실수 없이 이 말을 했으며, 그들이 증언을 할 때 어떤 장애나 방해도 없이 자신이 아는 대로 대답할 수 있었습니까? 이 점에 대해 저는 의심이 듭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증언을 하는 중에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고 한다 해도, 피고의 행동이 범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우선 학생들이 통역 없이 증언을 했고, 있었다 해도 통역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지, 저는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말이 분명치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학생들이 이 항소 법정에 함께 자리해서 피고와 대면하고 증언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증언에 어떤 비중을 둘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이들 학생들의 증언을 모우리(Mowry) 씨가 학생들을 데리고 갔을 때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채택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항상 피고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던 이금호(Yi Kyumho) 같은 사람을 그 집에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만약 범죄자들이 피고의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어째서 직접 가서 보지 않으셨습니까? 범죄자들이 그곳에 숨겨져 있다고 들었다면, 피고가 체포되기 전에 경관을 한 명 보내서 알아보도록 하는 절차도 없었단 말입니까? 검사는 피고가 신사이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피고의 집에 직접 찾아가 보았는데, 학생들이 있던 방은 공부방으로 길가에 인접해 있어서 쉽게 들여다보이는 곳이었습니다. 피고가 상황을 알고 있었고, 아이들을 숨겨 주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보이는 방에 아이들을 숨겨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판사님께서 이 운동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을 때 피고는 그것이 사실에 관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했고, 이것을 검사는 이례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우리(Mowry) 씨는 그 운동을 돕고자 했기 때문에 답변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으로서 답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답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도 그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더욱이 검사는 피고가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갈 때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한 사실로 피고가 범죄자라고 증명하려고 하고 있지만 당시 젊은이들은 경찰이 학생들을 보기만 해서 무고한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체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실수로 체포된 사람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두가 체포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고, 피고는 학생들을 받아 주었던 것입니다. 검사는 교사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피고가 다섯 학생들이 범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저는 첫 판정이 재고되어야 하며, 피고를 사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위 논고 외에도 우자와(Uzawa) 씨는 훨씬 더 많은 말을 했으며, 그리고 나서 오쿠보(Okubo) 씨는 검사는 피고가 상황을 알고 학생들을 숨겨 주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피고가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추측일 뿐이고, 단순한 추측으로 한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오쿠보(Okubo) 씨는 피고가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주장을 한 시간 가량 했다. 모리오(Morio) 씨는 변호사가 아니라 친구로서 피고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발언을 했다.그는 피고의 과거 행동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고, 그가 어머니가 자녀들을 돌보듯이 제자들을 돌보았다고 했다.103조에 의하면 범죄자의 친척은 범죄자를 도와준 것에 대해 죄를 물지 않는다고 되어 있으며, 그 법 조항에 따르면 모우리(Mowry) 씨는 처벌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예를 들었다.논박미쓰이(Mitsui) 검사는 변호사들의 주장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게 반박했다. 뒤를 이어 변호사들도 반박을 해서 판사가 휴정을 선언했을 때는 벌써 6시 10분이었다. 판사는 17일에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262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 1919년 4월 30일자

    일본 경찰의 여성 심문서울의 특파원(correspondent)으로부터, 한국에서 독립 운동 혐의로 특정 지역에서 체포한 한국 여성들을 조사해 알아낸 내용의 기사를 전송 받았다. 그러나 기사 내용의 성격상 이 기사를 그대로 신문에 활자화하지는 않는다. 이 진술은 석방된 용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감옥에서는 여학생들이 얇은 일본 기모노만을 입도록 허용하였다. 그들은 배워서 익숙해진 서양식으로 앉지를 못하고 일본식으로 앉도록 강요되었다. 간수가 지나갈 때마다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고, 이 강요에 따르지 아니할 경우에는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걷어찼다. 감옥에 들어 온 첫 날, 그들은 밤 10시 이후에는 잘 수 있다고 하였으나, 정작 그들이 시간이 되어 자리에 누우려 하자, 간수가 와서는 밤새도록 세워 놓고 심문을 계속하였다. 졸려서 머리가 뒤로 젖혀질 때마다 간수가 뺨을 때렸고, 머리가 앞으로 숙여질 때에는 손에 들고 있는 무기로 등을 내리쳤다. 매일 여학생들 중 몇 사람은 채찍으로 맞거나 구타당했다. 일본 경찰 관리들은 여학생들을 심문할 때마다 강제로 옷을 다 벗겼다. 이런 일은 다른 건물에서도 헌병들을 세워 놓고 그 앞에서 행했으며, 때로는 일본 여성들이 심문하는 자리에 함께하기도 하였다. 이런 심문이 있은 뒤에는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감옥 구내를 가로질러 걸어가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만행의 핑계는, 독립 운동에 참여한 소녀들과 여자들은 창녀들이라고 일본인들이 공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이 창녀라는 말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이들 여성들에게 내뱉었다.사실 그 여성들 대부분은 한국의 양갓집 출신이었으며 … (원문판독불가) … 기독교의 선전 활동에 … (원문판독불가) …. 감옥에 있었던 이들 중 누구도 … (원문판독불가) … 할 수 없었다. 동경의 … (원문판독불가) …는 이에 대해 몰랐고 … (원문판독불가) … 이런 일을 허용하지 않았을 … (원문판독불가) …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책임자를 처벌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평판은 전 세계에서 심각하게 나빠질 것이다.

    263 일본인에 의한 여성 죄수 심문

    발간일: Peking Leader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하여 구속된 여성들의 심문은 참으로 부끄럽고 모욕적인 일이다. 일본인에게는 다른 이성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것이 별로 부끄러운 것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 부끄러운 감정을 가진다. 일본인은 이것을 잘 알아서 한국 여성을 질문대에 세워 욕보이기 전에, 듣기가 거북하겠지만, 여성들을 완전히 누드 상태로 만든다. 그들은 여성들을 취조실로 데려간 후에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감방에서 헌병들이 강제로 행한다. 여성들은 그들의 감방에서부터 구내를 가로질러 걸어가야만 하며, 가는 동안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면 보고 즐긴다. 때로는 일본여성 한 사람이 함께 동행하기도 한다.또 감옥에서 세수를 할 때마다 여성들은 얇은 기모노를 벗어 발가벗겨진 채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세수를 한다고 한다. 이들을 보는 사람들은 물론 남자들이다. 이 심문의 정점은 심하리만치 가해지는 창피한 고통이다. 미혼 소녀들과 기독교 여인들은 집에서 정결하게 살아오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예의 범절을 지키며 살아왔으나, 그들은 이들을 아랑곳없이 함부로 대했다. 길에서 한국을 위해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 때문에 역겨울 정도로 나쁜 여자를 뜻하는 말로 여성들을 불렀다.몇몇 여성들은 몸의 일부를 손으로 가리자, 가리지 못하도록 두 손이 뒤로 묶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한 기독교 여인은 팔이 어깨에서 빠지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일본경찰은 몇 소녀들에게는 심문하는 중에 엎드려 네 발로 기어서 걸어 돌아다니도록 강요했다. 그러면서 거울 위를 걸어다닌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극악한 사람들은 여성들의 배를 걷어차거나 아주 거칠게 다루었다. 마치 암소의 젖을 짜듯이 가슴을 쥐어짜기도 하고, 긴 막대기를 사용하여 묘사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질렀다. 우리는 독일군이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여성들에게 행한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직 그와 같이 깊은 데까지 이르지는 아니하였지만, 그와 유사한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 나라의 일부 지역에서는 벌건 대낮에도 집에 있는 여성들이 안전하지 못하다 한다. 그들은 낮에는 야산에 숨고 밤에만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일본인들은 이에 대한 진실이 누구로부터 흘러나오면 매우 소심하도록 민감하게 반응하여 문제를 삼으므로,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한 내용을 직접 읽고 알 수 있게 하면 좋으리라 본다. 위의 내용은 직접 당한 여성들의 진술임을 서약하며, 필요하다면 출판하여도 좋다. 다른 외국 선교사들도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 일본인들이 여성들을 어떻게 심문한 것에 대한 믿을만한 이야기를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위의 이야기들은 단순한 한 두 가지의 예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문명화된 국제 사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264 경기도 수원부의 팔탄(Pal Tan)읍내에서 4월 16일에 본 언더우드의 증언

    작성일: 1919-04-16작성처: 언더우드우리 일행은 새벽 2시 30분경에 기록인(writer)의 차로 서울을 출발하여 수원과 오산을 지나 총 거리가 약 46마일 쯤 되는 팔탄(Pal Tan)을 향했다. 팔탄에 이르기 2마일쯤 전에 읍내 뒤쪽에서 큰 구름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세웠다. 기록인과 함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까운 마을을 향해 터벅거리며 걷다가 한 농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 뒤:언더우드: 저 연기가 뭡니까?농부: 불타버린 마을이라오.언더우드: 언제 불탔나요?농부: 어제요.언더우드: 누가 이렇게 했죠?농부:(주위를 살피며) 군인들이 그랫소.언더우드: 왜요?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거나 독립만세를 불렀습니까?농부: 천만에요. 저 마을은 기독교인 마을인걸요.언더우드: 여기서는 독립을 기뻐하는 소리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까?농부: 얼마 전 장날에 읍내에서 있긴 있었소.언더우드: 하지만 마을에서는 없었단 말이지요?농부: 없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도 않고서 어떻게 자기들만 그렇게 할 수 있겠소.언더우드: 군인들이 이 마을에 온 적이 있나요? 당신네들은 기독교인입니까?농부: 아니요. 여기에는 기독교인이 하나도 없어요.언더우드: 이 마을 이름이 뭐죠?농부: 채암리요.(Chay amm ni)나는 이어 마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이었다. 덧붙이기를 이 마을을 지나간 외지 행인은 거의 없었고, 그래서 여기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알기가 어려우며, 더구나 지난 장날에는 사람들이 장에도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말했다.점심을 먹은 후, 읍내로 향했다. 읍내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작은 개울을 차가 건너가지를 못해서 차는 그 곳에다 두고 들어갔다. 우리는 두 개의 간선 도로가 읍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만나는 위치에 서있는 경찰서를 지나가게 되었다. 78 연대(regiment) 병사들이 경찰서 앞에 모여 있었다.우리가 지나갈 때, 순사 한 사람이 와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물으며 경찰서 안으로 잠깐 들어오라고 명했다. 우리가 들어 갈 때 두 명의 일본 장교는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어깨의 견장을 보니 붉은 색에 세 개의 별이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많은 하사관(sergeant)의 뱃지라고 들었다.) 우리에게 경찰서로 들어오라고 명했던 순사는 카빈총을 어깨에다 둘러메고 장교들을 따라 나갔다. 곧 이어 그들은 순사의 안내하에 남양 쪽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커티스(Curtice)씨는 그의 명함를 한 장교에게 주면서 일본어로 이야기를 텃다. 나는 일본어를 조금밖에 할 줄 몰랐으나 대화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길, 다리, 서울에서의 만남등을 가볍게 이야기하다가, 커티스씨는 화재 사건에 대해 묻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자가 대답하기를 작은 화재가 있긴 있었는데 그리 큰 것은 아니라 하였다. 소요 상황을 묻자, 그 곳에서 작은 소요가 있었으나 이제는 끝났다고 했다.대화가 더 계속되면서 커티스씨가 그 곳 화재 사건이 진정되어 잘 끝났다면, 우리가 거기에 가봐도 괜찮겠는지를 묻자, 그 우두머리는 무슨 불이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커티스씨는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며 3, 4마일 정도 더 구경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우두머리는 약간 놀란 듯 했으나 허락을 하고 순사 한 사람을 우리와 함께 인력거(riksha)에게로 보냈다. 거기서 우리는 인력거 셋을 불러 함께 떠났다.연기가 올라왔던 마을은 읍내로부터 1마일이 채 되지 않았다. 조금 더 간 후에 인력거를 뒤로하고 언덕 아래쪽으로 걸었다. 그 언덕 옆이 마을이 있던 자리였다. 우리의 짐작으로도 이 곳은 4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국인들이 말하던 바 그 마을이었다. 너댓 집은 서 있었고, 그 나머지는 아직도 여기 저기에서 불씨가 남아 있는 가운데 연기가 올라오는 잿더미였다.이런 말문이 막히는 재난의 광경을 마을 뒤 언덕 위에서 바라보며 앉아 있는 아낙네들, 어린아이들 그리고 노인네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 마을 전체를 돌아보았다. 마을 윗 쪽에서 어느 젊은이의 시체를 발견하였는데, 심하게 불타 어느 건물밖에 버려져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기를 그 자리는 교회가 서 있던 자리였다. 그 곳에서 이 시체의 사진을 찍었다.마을을 둘러보고서 언덕을 따라 돌아 나왔다. 아까 보았던 사람들이 있는 곳에 와서 한 남자를 불렀다. 그가 내게로 오기에 질문을 하였지만, 그는 공포와 충격을 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서 그가 가진 모든 재산과 수 년 간 피땀흘려 모은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를 위로하면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자, 어제 이맘때쯤이라고 했다. (오후 2시)언더우드: 어떻게 시작되었지요?한국인: 군인들이 그랬지 누가 그랬겠어요.언더우드: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거나 다쳤나요?한국인: 군인들이 교회에 있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다 죽였어요.언더우드: 화요일 오후에 그 사람들은 교회에 왜 왔지요?한국인: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쳐서 기독교인들은 모두 나와 교회로 모이라고 했어요. 언더우드: 교회에 여자들도 있었나요?한국인: 아니요. 여자들은 오지 말라고 했어요.언더우드: 그래요.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이자 무슨 일이 생겼나요?한국인: 군인들이 총을 쏘고, 크고 작은칼과 대검을 사용했고, 나중에는 교회에 불을 질렀지요.언더우드: 다른 집들은 어떻게 불이 났죠?한국인: 일부는 교회에서 불이 옮겨 붙었고, 바람이 불어 옮겨 붙지 않은 다른 곳에서는 군인들이 직접 불을 놓았어요.언더우드: 당신은 어떻게 살아 남게 되었지요?한국인: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에요. 기독교인들만 모이라고 했거든요.언더우드: 당신의 집도 불탓나요?한국인: 예. 저기 불탄 집이요. (가리킨다.)언더우드: 몇 집은 남아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이죠?한국인: 불이 붙지 않은 집들입니다. 몇 군데서 불을 놓았는데, 불이 붙지 않는 집은 그냥 놔두어서 남아 있게된 겁니다.언더우드: 대개 몇 명 정도가 교회에서 죽은 것 같습니까?한국인: ...나는 이 한국인을 떠나 다른 사람들에게로 갔다. 그 곳에는 아기들을 안고 있는 젊은 아낙네들과 노파들, 그리고 열 아홉이나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청년이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이었고, 이 교회가 속해 있는 N. Moth 선교부의 노블 박사(Dr. Noble)를 알고 있었다. 나는 앞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던 것처럼 시간, 방법, 죽은 자의 수, 방화 등에 대해 거의 같은 질문을 하였고 같은 대답을 들었다.나는 그 젊은 청년에게 어떻게 살아 남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저녁에 돌아 와 보니, 그의 남자 친구들과 가족들은 이미 죽어 불탄 교회 아래 묻혀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우리에게 교회가 있던 자리를 보여 주었다. 내려오는 중에 다른 시신이 있어 그 사진을 찍었다. 다른 시신들은 아직도 불탄 교회의 폐허 아래에 놓여 있다.이 사람들은 절망적이었다. 여기 저기에 불길로부터 겨우 꺼낸 가재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하지만 살아 남은 이들 몇 사람들도 먹을 양식이라곤 겨우 몇 됫박이 될까 싶은 쌀이나 곡식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내년에 심을 씨앗 곡식은 물론이고, 그들이 의지하고 사는 가축을 포함해서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들의 사진을 찍은 후 인사를 전하고 그 곳을 떠났다.마을에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집으로 갔다. 여기 집주인인 한 노인이 자기 집은 불이 붙지 않았는데,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불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그도 죽은 사람의 수는 잘 몰랐으나 대개 30명 쯤으로 어림했다. 몇 장의 사진을 더 찍고 난 후, 우리는 세워놓은 인력거로 돌아 와 그것을 타고 읍내로 돌아왔다.이 일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다른 곳에서 있었던 비슷한 사건을 보기 위해 3마일 정도를 더 가 보면 어떻겠느냐고 인력거꾼이 물어 왔다. 먼저 그들이 말하기를 한 열 다섯 군데가 더 불탔는데,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과 이 지역을 담당하는 서울의 선교사에게 전해 온 전언과 일치하는 것이었다.군인들은 2주 또는 10일 쯤 전에 자동차로 이 곳에 수송되어 왔고, 그 비슷한 시기에 첫 번째 마을에 대한 방화사건 전언이 있었다. 경찰의 우두머리는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방문했던 마을에서는 어떤 난동이 있었다는 비난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경찰은 다른 곳에서는 난동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경찰에게 작별을 고하고, 우리가 왔던 길로 해서 다시 서울로 돌아 왔다. 돌아 온 시각은 5시 반경이었다.

    265 감옥에서 풀려난 여학생의 이야기 3(서울)

    3월 5일, 우리는 학교를 나와 독립운동 시위에 참여할 생각으로 전차를 타고 남대문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차장이 이 차는 서대문으로 가는 전차라고 해서 우리는 내렸다. 전차에서 내려 다른 차를 기다리는데 일본인 순사가 나에게로 와서 나를 붙들고 몸을 조사했다.그러더니 그는 무거운 구두발로 나를 걷어차고 뺨을 때리며 종로 경찰서로 같이 가자고 명령했다. 종로 경찰서에서 나는 남자와 여자 합하여 74명이 수감되어 있는 조그만 감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수감자들은 여기 저기서 얻어맞고 온갖 수모를 겪었지만, 나는 저항하지 아니하고 당하면서 다만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분께서는 필요한 힘을 주셨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75명의 수감자는 이 감방 한 곳에서 지냈다. 수감자 중 35명은 여자이고 40명이 남자였다. 감방 출입구는 두 개였지만 간수는 우리가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수감자에게 식사를 제대로 줄 것을 법으로 보장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마지못해 조금씩 주었는데, 아침 식사는 10시에, 점심은 오후 3시에, 그리고 저녁식사는 밤 10시에 주었다. 그들의 야만적인 습성은 청결을 위한 위생법을 지키지를 않아, 5일 간이나 손을 씻을 물조차 주지 않았다. 반대 심문이 있던 첫 날에, 일본인은 나에게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방 저 방으로 끌려 다니며 조롱을 당하다가 어디론가 끌려 내려 가 작은 방에 수감되었다. 거기서 두 명의 관리가 문을 밀고 들어 와, 나를 가운데에 세워 놓고 그의 가죽 구두로 차고 뺨을 때리면서 물었다.관리: 이제 진실이노 말을 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정말로 죽인다.여학생: 무슨 말을요?관리: 독립이노 만세를 부르자는 생각은 어디서 났소까? 누가 이런 생각을 너의 머리노 속에 집어넣어 주었느냐 말이야? 여학생: 오늘 같은 이런 날에 나도 역시 한국 사람인데, 그런 마음이 안 생기겠어요? 내가 어린애예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를 부추겨서 이런 일을 하게요?관리: 너의 선생이란 자가 학교에서 네 머리노 속에 이런 생각을 심어 주지 않았소까? 그가 누군지 말이노 하라!여학생: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어요.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어떤 다른 사람이 책임이 있는 건 아니예요.관리: 너가 거짓말이노 하는 거 나는 다 알고 있다.그리고서는 관리는 다시 나를 때렸다. 나는 대답하기를,여학생: 정말이예요. 그러지도 않았는데 내가 고통이 무서워서 어느 누가 그랫다고 거짓말 할 수는 없잖아요.관리: 그럼 너희 학생들이노 중에 한 사람이 너를 부추긴 거 아니오까? 너희 학생들은 다 거기에 있었지 않았느냐 말이야?여학생: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다른 학생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해요. 독립만세를 혼자서는 외칠 수 없나요? 그건 말도 되지 않아요.”관리: 사실이노 말을 하라!그는 다시 나를 때렸다. 내가 진실을 말하면 그는 더 때리기만 했다. 그는 다시 묻기를,관리: 너는 독립을 얻기를 바라느냐?여학생: 그건 나의 소망입니다. 나는 한국사람인데 왜 그런 소망이 없겠어요. 나는 우리 나라 독립을 보기를 원해요.관리: 너도 독립이노 만세를 불렀나?여학생: 나도 만세를 부르러 가는 중이었어요. 하지만 아직 그런 기회는 없었어요.관리: (말을 가로막으며) 너 또 거짓말.그는 다시 나를 때렸다. 이런 식으로 나는 5일간 심문을 받았다. 심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온갖 공포를 맛보아야만 했던 것이다.마지막 심문이 있고 나서, 우리는 세 사람이 함께 묶여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는 여자 관리가 심문을 맡았는데, 우리의 옷을 검사하고 나서 우리의 머리를 풀어 내리게 했다. 그들은 우리의 옷을 다 벗기고 나서 우리를 다루어 나갔다. 그런 다음에 남자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살펴보고 우리의 키를 재는 등의 일을 했다. 그리고서 그들은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옷을 벗기고서 온갖 추잡한 짓을 했다. 그들은 우리의 나체를 보았다. 그들 손에 우리의 몸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는 부끄러워 필로 더 써내려 갈 수가 없다. 이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온갖 모욕적인 대우를 우리는 받은 것이다.그런 후에 우리는 다시 우리의 감방으로 돌아 왔다.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우리는 발가락 하나의 움직임까지도 감시를 받았다. 손과 발을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완전히 바른 자세로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조그만 움직임에도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다. 그들은 물도 재어서 조금씩 주어 우리는 매우 목이 말랐다. 변기도 아침에 한 번씩 치웠는데, 항상 우리 곁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나 밤에 잘 때에도 함께 해야 했다.이런 수모를 견디며 우리는 15일을 보냈다. 어느 날 내 정신이 그리 맑지 못하던 때, 여자 관리인지 남자 관리인지의 목소리로 “이리마셍”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 말을 “잠을 자라”는 뜻으로 듣고서 자리에 누우려 몸을 뻗었다. 그러자 간수가 곧 와서 나를 꾸짖고 일으켜 세워 네 시간 동안 서 있으라는 벌을 주었다. 우리를 관장하던 일본 여자들이 높은 관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때 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그 창살 안에 있는 동안도 그들은 밤낮으로 비둘기장 같은 구멍을 통해 우리를 지켜보아서 우리의 영혼이 공포로 질리게 만들었다.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우리에게 아침마다 문의 비둘기장 구멍을 통해 콩죽을 조금 주었다. 우리가 그걸 먹고 있으면 여자 관리들이 와서 우리를 욕하면서 “너희 한국인들은 개나 고양이같이 먹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목욕을 하라고 할 때면 물을 너무 적게 주어서 결국은 112명의 사람들의 때로 물이 탁해지곤 했다. 이런 물을 가지고 어떻게 깨끗해지겠는가? 우리가 목욕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를 지키거나 감시하는 여자 관리들이 한 번에 서너 명씩 와서 우리를 욕하면서 끝날 때까지 지켜보곤 했다. 그건 정망 명목상의 목욕이었고 절대로 목욕이라 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고 계속 서둘러야만 했다. 여러 날 동안 우리는 운동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가 마지막 3일 동안 레크리에이션이라 불리는 것을 했다. 그 동안 3-4명의 일본 여자들이 가까이 있으면서 우리를 욕하고 모욕했다. 우리가 빨리 움직이면 빠르다고 트집을 잡았고 천천히 움직이면 그것을 트집 잡았다. 이런 운동의 성격이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주위를 돌거나 운동장을 걸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누군가가 진실을 말하면 그들은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다리를 평생 불구가 될 정도로 주리를 틀었다. 벌을 받는 중에도 명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석탄으로 불을 피워서 달아오르게 만든 다음 물을 끓이면서 그 물을 우리 머리에 퍼부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은 자로 우리를 때리고 무거운 의자를 우리 팔위에 얹어놓고 한 시간 동안 버티라는 벌을 주었다. 우리는 ----날 풀려나왔다.

    266 한국에서의 일본의 탄압 통치

    현대의 취조내가 고문을 받아 죽어도 우리 형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이 말은 이씨 성을 가진 어느 젊은이가 한동안 고문을 받은 후에 일본 경찰에게 한 말이다. 한 고문이 안 들으면 다른 고문을 하다가, 이제는 그를 판 위에 묶어 놓고 무거운 군화를 신은 발로 그의 다리를 위에서 짓밟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다시 그 취조관은 물었다.“네 놈이노 형은 어디에 숨어 있나?”다시 굳은 어조로 이군은 대답했다.“우리 형이 어디에 있는지 죽어도 말 못한다.”이 젊은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사람들이 놀랄만한 중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겠지만, 그가 지은 죄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형의 행방을 이야기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의 형은 선교학교의 교사였는데, 독립을 위한 민족 운동에 참여한 후 몸을 숨기기 위해 달아났던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군이 아주 불한당이 아닌 이상은 당연히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왜 이렇게 고문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간단하게 왜인지 이야기할 수 있다. 이는 벨기에를 지배하던 훈족처럼, 한국을 지배하는 거대한 독일 세력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일본 경찰은 직관적이지도 추론적이지도 않고, 머리회전이 느리고 서툴다. 결과적으로 진짜 능력있는 형사는 적고 있다 해도 멀리 있다. 게다가 셜록 홈즈의 방식이 아니라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일본 경찰은 한국인들을 상자 모양의 널에 집어넣고 뒤에서 크랭크를 걸어 모든 방향에서 똑같이 잡아당기면 정보를 별 문제 없이 짜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고문을 당했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방법이 실패하면 중지에 끈을 묶어서 천장에 매달고 발가락은 바닥에 겨우 닿게 만드는 방법이 경찰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데 놀랄 만큼 도움을 준다. 살이 덩어리가 될 때까지 때리고 관절이 분리될 때까지 비틀어 꺾는 것 역시 도움이 되지만, 이는 고문의 예비단계로 항상 행해지는 일이므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가치는 없다. 물론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고문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당신이 작가로서 망가지고 멍든 몸뚱아리가 그렇게 많은 것을 보면, 공식 발표는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제쳐놓게 될 것이다. 하지만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직 절반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젊은 이군은 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완고하게 거부했다. 잡힌다면 형에게도 이런 고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젊은이는 자신의 형을 보호하려고 한 것 외에는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 두어야만 했다. 경찰은 자신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다른 수법을 시도했다. 역시 어떤 범죄도 저지른 적 없는 이군의 어머니가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왔다. 경찰은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지 알고 있었고, 이는 그들이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시험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군의 어머니는 어느 방으로 끌려왔고 곧 경찰이 이군을 끌고 들어왔다. 어머니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경찰은 이군을 고문했는데, 이번에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를 때까지 그를 구타했다. 그리고 가혹한 경찰은 어머니에게 “큰아들이 어디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라 외쳤다. “어서 이야기해, 아니면 네 아들을 더 때릴테다.” 어머니는 망설였으나 고통으로 인한 비명이 다시 들려오자 마음이 찢길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당황해서 외쳤다. “그만둬요!! 그만!! 지금 당장 이야기하겠어요. 더 이상은 못 견디겠어요.” 아아, 고문자들의 얼굴에 떠오른 그 만족한 미소라니!!! 그들은 결국 원하는 바를 얻었고, 어머니의 마음은 찢겼으며 딜레마 속에서 어머니는 실토했다. 그러나 가엾은 어머니의 고뇌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일 따름이었다. 어머니는 작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큰 아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작은 아들의 떨리는 몸을 보고 고통으로 인한 비명을 듣지 않았던가?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하겠는가? 이 모두는 너무나 끔찍하다. 지금도 세계에서는 이러한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 어느 외국인 숙녀가 이 이야기를 그 불쌍한 청년의 입에서 직접 들었고, 어느 외국인 신사는 이 일이 있었을 때 감옥에 있었던 노인으로부터 상당히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저녁 내가 내 방에 앉아 연로한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방문객이 찾아왔다. 그는 예의바른 사람으로 마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국인이었다. 그는 내 손님을 만날 수 있느냐고 청하면서 자신이 그의 비서였으며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몇 마디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으나 내 바로 뒤에서 크게 말한 것이 아니라 속삭였는데도 몇몇 구절은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사: “왜 여기 서울에 있는 거요?”한국인: “고향에서 시위가 있은 후에 경찰이 저를 쫓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여기 서울에 오면 조용해 질 때까지 숨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의사: “하지만 경찰이 뒤쫓을 만한 무슨 일을 한거요?”한국인: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외국인들과 함께 있었고 경찰들은 교회 및 학교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체포할 것 같아 보였습니다.”의사: “하지만 당신 아내와 가족들은 어쩌오? 그렇게 오래 떠나 있을 수 있겠소?”한국인: “그래서 제가 선생님을 만나러 와야 했던 겁니다. 가족들은 돈이 좀 있고 고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부디 제 아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저는 T---로 가는 밤기차를 타고 제 고향마을 근처의 역에 내려 자전거를 타고 아내와 아이들을 보러 달려갈 겁니다. 집에 하루 동안만 몸을 숨기고 있다가 다음날 밤기차를 타고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말씀 드리건데, 마을에는 제 친구가 있습니다. 한국인 경찰이지요. 그 친구한테 경찰이 여전히 저를 쫓고 있는지를 물어보고 그렇지 않고 형편이 좋아졌다고 하면 그대로 집에 머물 수 있습니다.”이틀이 지났고 그 한국인은 다시 의사를 찾아왔다. 의사: “N씨, 잘 지냈소? 그런데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거요?”한국인: “예,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일본 경찰들)이 많은 사람을 체포했고 안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오늘 밤에는 더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일본인들은 밤 아홉시 이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한국인들을 무차별로 심하게 구타하고 있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제가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제 아내에게 전해주시는 걸 잊지 말아주십시오.”여러분들은 동정심이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혹은 너무 오랫동안 자유 속에서 살아서 이러한 일이 실감나지 않으십니까?주석: 교육을 잘 받은 능력 있는 한국인이었던 이 불쌍한 친구는 결국 체포되어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가 18개월의 강제노동을 선고받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가 했던 거라고는 독립신문에서 몇 구절을 나를 위해 번역해준 것이 다였다. 그러나 그는 이 죄목으로 체포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좋은 교육을 받았고 외국인들과 교류했다. 요즘에는 이는 한국인 한 사람의 목을 매달기에 충분할 만한 죄목이다. 잔인한 장난. 스물 두 살 된 젊은 새댁이 있었다.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자기 마을에서 나가본 적도 없었으며 집 밖에도 잘 나가지 않는 시골 여자였다. 그 새댁이 집에 혼자 있으면서 들판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위해 점심을 지으려고 막 불을 피운 참이었다. 일본군이 들어와서 “성냥을 줘”라고 말했다. 그 불쌍한 여자는 공포에 떨면서 즉각 복종했다. 그녀는 이전에 일본인들을 본 적이 없었고 일본인들이 잔인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만 있었다. 일본군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말했다.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던 사람들은 어디 있나?” 저는 모릅니다,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이 가엾고 순박한 시골 여자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었다. “거짓말하지 마!!” 군인은 총검을 칼집에서 꺼내 날카로운 칼날을 그 여자의 목에 대고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이걸 보라구!” 그는 화약통을 열고 탄피를 꺼내 그 여자의 눈앞에 들이민 후 이를 총에 넣고 노리쇠를 당긴 후 방아쇠에 손을 걸었다. 그리고 총구를 그녀의 턱 바로 아래에 댄 후 말했다. “자, 이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말해!!” 그녀는 말했다. “저는 모릅니다.” 그리고 기절해 마루 바닥에 쓰러졌다. 군인은 떠났다. 그는 그 새댁을 놀리면서 재미있는 장난을 했다고 생각했고 다른 아이들과 여자들을 놀라게 만들기 위해 다른 집으로 건너갔다. 그 불쌍한 여자는 이틀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했고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그 야만인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떨었다. 이 이야기를 읽는 여러분들은 부디 이것이 과장된 이야기라 말씀하시지 말기를 바란다. 한때 나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과장된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그 이후로 경험을 통해 그 야만인들, 공포에 떨게 만들면서 기쁨을 느끼는 동양의 독일군들의 진정한 본성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야만성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주석: 제일 친한 한국인 친구가 이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다. 이야기를 해준 바로 그 전날 그 젊은 새댁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야만적인 **** (필자 자신의 이야기)오후 12시 15분이었고, 나는 파출소에 앉아서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창문을 통해 내다보자 일본 경찰 한 사람이 한국인 한 사람을 뒤에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찰은 그 한국인의 머리를 칼집으로 때리고 얼굴을 가격한 후 마구 걷어차더니 마지막으로 그의 팔을 비틀어 길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한국인의 배, 등, 머리 등 모두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걷어찼다. 그가 보기에 그 한국인은 개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부당한 행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 달려 나갔지만 내가 끼어들기도 전에 다른 경찰이 그 경찰에게 외국인이 보고 있다고 신속하게 주의를 주었다. 이 잔인한 “법의 집행자”이자 “평화의 수호자”는 그 한국인에게 거칠게 꺼지라고 말하고 내 옆을 지나 파출소로 들어왔다. 나는 항의하며 말했다. “도대체 이런 방식으로 공격하고 구타하게 만든 죄목이 뭡니까?” 그 경찰은 그 한국인이 경찰서를 쳐다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죄가 아니라고 말했고 사과를 요구했다. 그 야만적인 겁쟁이는 사과를 하지 않았고,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장교로부터 가슴을 두 차례 얻어맞은 것이었다. 그는 경찰이 아니었고 헌병 중위(?)였다. 그와 함께 나는 내가 거기 있는 것이 달갑지 않으니 어서 꺼지라는 얘기를 아주 확실한 방식으로 들었다. 몇 주가 지난 지금, 나는 한국인들처럼 감히 파출소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근처에 서 있던 총검을 갖춘 일본군인 한 사람이 내게 호랑이처럼 다가왔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는 나를 두 차례나 총검으로 위협한 후 저열하게 “꺼져”하고 말했다. 이것이 일본이다. 그렇게 고상하고 계몽되어 있다고 하며, 5개국 열강과 함께 앉아 문명화된 나라들과 동등한 권리와 특권을 요청하는 나라다. 일본이 없어져야 한다고 요청하는 인종 차별은 일본 자국이 벼리고 있는 사슬이며, 채우고 있는 족쇄다. 일본은 야만적인 군국주의를 포기하고 평화와 정의의 길을 진정으로 따르기 전 까지는 이 자물쇠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현대의 순교자그는 신학교에서 돌아오던 참이었으며, 타이슈(Taishu)에서 완행열차에서 막 내려 잠시 후에 선천(Son Chun)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려던 참이었다.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헌병이 다가와 물었다. “어디로 가나?” “어디서 왔나?” 이 젊은이는 신학교에서 돌아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오, 기독교인이군. 나와 함께 가야겠어.” 이 젊은이는 신자가 되었다는 대단한 범죄를 제외하면 완전히 결백한 상태에서 끌려갔다. 그는 감옥에 투옥되었고 차라리 죽어서 이 모든 고생에서 해방되는 것이 낫다고 바랄 때까지 구타당하고 고문당했다. 감옥에서 일어났던 일의 일부만을 여러분께 이야기하려 한다. 헌병: “그래, 전능하신 하느님의 종놈아, 넌 죽으면 기독교도들은 바로 천당에 간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냐? 하긴, 그걸 몰라도 넌 지금 벌써 천당에 있는 거야. 여기가 천당이다. 넌 천당에 있고 천당의 양식도 있지. 조금만 기다려봐.”그리고 헌병은 주먹으로 그 젊은이의 얼굴 한 쪽을 때렸다. “자, 천당의 양식이다. 어때?”그러자 다른 헌병인지 교도관인지가 말했다.“어이구, 그건 전능하신 하느님의 종을 때리기엔 모자라지. 여기도 있어. 친애하는 사도여, 얼마나 멀쩡한지. 이렇게 잘생긴 놈을 이렇게 대접하다니, 창피한 줄 알라구.”그리고 철썩, 이번에는 다른 쪽 뺨이었다. 이런 신성모독적인 조롱이 거듭 반복되었다. 헌병: “레슬링이나 해보자구. 너의 하느님은 대단한 싸움꾼이라며. 난 내가 질 걸 알아. 인제 보면 알겠지.” 그리고 교도관은 그 젊은이를 움켜잡고 특수한 주짓수(jiu-jitsu) 기술을 써서 그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어이구, 창피해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종놈은 이렇게 대접해야지. 친애하는 사도여, 그 얼마나 멀쩡한지. 이렇게도 잘 생겼는데 말이지.”며칠 후 같은 일이 또 반복되었다. 20일 동안 이런 상황이 세 차례나 있었다. 한 번은 교도관이 “노래를 부르자구”라 하더니 젊은이의 성경책을 집어 들고 노래 부르는 흉내를 냈다. 그 젊은이가 동참하지 않고 그들이 명령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심하게 얻어맞고 걷어차였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를 했고 그 젊은 학생은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름다웠으며, 그들은 여러 차례 기독교인들의 기도를 듣고 무의식중에 그 문장 중 몇 가지를 익혔음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 젊은이는 경찰이 그에게 자신들이 “세 차례나 죽였다”고 주장하는 어느 노인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감옥 생활이 끔찍했고 기독교인들이 지독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젊은이가 감옥에서 나온 후 그를 만난 어느 외국인은 그를 알아보지를 못했는데, 그가 너무 수척하고 여위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들과 하느님만이 이러한 공포 통치가 의미하는 바를 안다. 한국인들 중 다수는 매 시간, 매일 그들을 미치게 몰아가는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물론 많은 이들은 면역이 생겼고, 정말로 거의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삶 자체가 계속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감옥 밖의 삶과 감옥 안의 삶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 차이가 무엇인가? 최근에 내가 아는 한국인 한 사람이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되자 그의 친구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마음이 약했고, 친구들은 그가 고문을 당한다면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는 하루 이틀 만에 심한 고문을 당하지 않고 풀려났고, 그의 친구들은 모두 안전했다. 다른 한 무리가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메리 메리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귀여워하던 사랑스럽고 밝고 예쁘고 영리하고 매력 넘치는 소녀였다. 그녀는 그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하루 이틀 전에 서울에서 고향마을로 내려갔다. 헌병은 당연히 그녀를 의심했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녀는 특히 미움을 샀다. 메리는 시위가 있던 날 집 밖에 나가지 않았고 경찰은 그녀에게 불리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경찰은 메리를 미워했고 그녀를 체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광(Kwang)이라는 마을 소년 하나를 붙잡았다. 광은 겨우 열두 살 먹은 어린애였다. 헌병들은 “메리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다 말해”하고 광을 을렀다. 광이 싫다고 하자 그들은 광을 찰싹찰싹 때렸고 그래도 여전히 싫다고 하자 심하게 구타했지만 광은 여전히 싫다고 했다. 결국 헌병들을 광을 들어 올려 곡물자루처럼 방을 가로질러 집어던졌다. 어린 광은 겁을 먹고 메리가 자신에게 태극기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증언의 정확성은 의미가 없었다. 가엾은 메리는 다음 날 체포당했고 며칠 후 마치 범죄자처럼 18마일 떨어진 감옥으로 끌려갔다. 일본이 드러내다이런 이야기, 이런 비극은 계속 이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감옥에서 나체의 소녀들에게 행해진 비열하고 추잡한 행위에 대해, 총을 맞고 살아있는 채로 불태워진 사람들에 대해, 심지어 총검으로 찔린 여자들(적어도 한 여자)에 대해 거듭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음울한 취향의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 일본의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세계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독일의, 그리고 다른 어느 나라의 군국주의보다 더 사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악한 책모와 모두 함께 하는 그 군국주의적 체제가 전 세계의 눈앞에 드러나고 신뢰를 잃어야 한다. 일본은 여론만큼 두려워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여론이 일본의 군국주의 독재에 반대해 통합될 때 일본의 개혁이 확실해질 것이다. 대구 기록 5월 5일 도착시위는 3월 8일에 있었다. 군인들은 당시 여기 없었고 행렬을 이끈 사람들은 혹독한 취급을 받았다. 그런 취급으로 인해 그들 중 한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시위는 가장 온건한 수준이었고 대처 역시 아마도 온건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밧줄로 군중들을 갈라놓으려고 애썼다. 시위가 벌어졌을 때 시장 광장에 2천에서 3천명정도가 있었다고들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그 숫자를 최소화하려 애썼다. 관립학교 학생들이 선두에 서고 공립학교 학생들이 시장 광장에서 만세를 외쳤으며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서 합류했다. 첫날 200명 정도가 체포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체포는 그 후에도 며칠간 계속되었다.내가 도착한 그 밤에 180명의 나이든 죄수들이 만세운동 죄수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리를 좁혔다. 감옥과 구치소는 붐볐고 평소에는 10명씩 수감하던 공간에 30명씩을 밀어 넣었다. 죄수들은 일본식으로 앉아야 했는데, 이는 이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에게는 잔인한 짓이었다.교회 중 한 군데의 장로인 어떤 사람은 만세를 부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체포되었다. 그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말이다. 나는 거리에서 구경만 했는데도 체포된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었고, 어떤 이들은 만세를 불렀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기독교 교회에서의 지도력 때문에 체포되기도 했으며 ***역시 처벌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 달 동안이나 재판까지 가지도 못했다.시위의 추정 이유아마도 다섯 명의 신학교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받았던 처벌을 이야기 한 것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학생들이 받아야 하는 것보다 더 이상의 처벌을 받은 ****** 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한국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는 법정이 검사가 요구한 그러한 처벌을 내리기에는 불가능한 성격의 것이라고 그들은 변론했다. 마산포 이야기. 미혼 여성들군인들이 와서 손에 넣다.큰아들위성(Wee Sung)군 말코레(Malkore) 마을, 젊은 새댁 두 사람이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들은 신고를 위해 개인적으로 가까운 헌병대로 갔지만 그들이 군인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해서 강간을 저지른 것이 군인들인지 아니면 다른 무리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의 진정을 받아들일 수 없고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체포된 여자들의 처우에 대한 증언은 계속 나오고 있다. 남편들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여자들은 자주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간다. 여자들에게 남편의 소재를 말하게 만들기 위한 가장 주된 방법은 여자들을 나체로 만들어 마당에, 즉 경찰과 다른 사람들이 오가면서 쳐다볼 수 있는 경찰서 구내에 세워놓는 것이다. 여자들이 부끄러움에 못 이겨 남편의 소재를 이야기 할 때까지 말이다. 여자들은 구타당하기도 하고 며칠을 감옥에 갇혀있기도 한다. 오직 남편들이 만세를 부르고 달아났다는 이유로 말이다.대구에서 북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인동(Indong)에서는 일본인들의 통제를 받는 시간인 한밤중에 군인들이 가정집으로 들어와 여자들이 꿰매고 있던 바느질감을 던져버리고 옷을 벗겼다. 이는 남편들이 같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에 대한 정책은 일본인들 사이에는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감옥 고문 방법물을 적게 주는 것은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물을 이용하는 방법 중 한 가지다. 종이 울리고 밥을 먹는 데 15분의 시간이 주어지는 순간부터다. 밥을 먹는 데는 4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물이 없으면 밥이 목구멍에 달라붙어서 한국인들은 숨이 막히는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은 숨을 쉬려고 자기 오줌을 마시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작은 창살에 다리가 결박되어 있고 그 창살을 통해 죄수들에게 음식이 주어진다. 음식을 준 다음 그들은 창살을 들어 올렸다가 발목뼈 위로 다시 내린다. 소리를 내면 그들은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이건 아니건 무조건 번호로 불러서 벌을 준다. 다른 경우에는 손을 묶고 관절을 때리거나 손가락 사이에 철로 된 열쇠를 끼워 넣어 손끝은 그대로 모아놓은 채 열쇠의 넓은 면을 돌린다. 그럴 때의 엄청난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간수들이 가지고 다니는 철로 된 커다란 열쇠의 끝으로 피가 흐를 정도로 머리를 때린다. 흙바닥에는 난방도 없고, 이는 집에서 온돌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큰 고통이다. 경산군 하양읍에서는 동양척식회사가 소작료를 평균 20부셀 중 15부셀로 올렸고 경우에 따라는 17부셀까지 받았다. 농민들은 그렇게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양척식회사는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수확량의 특정 퍼센트를 내는 것으로 소작료를 지불할 수 있도록 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그런 특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동양척식회사의 운영은 농민들이 참아내야만 하는 가장 큰 재난이었다. 보통의 경우 소작료는 수확량의 절반이었고 농민이 나머지 절반을 가졌다. 여태까지 한국인들은 항상 직접 쓰기 위해 상당한 목화를 재배해 왔으나, 이제 일본인들이 일본 목화 종자를 재배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 목화는 자신들이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국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당장은 재배하지 않을 것이다. 대구에는 총독에게 독점을 허가받은 면직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목화를 재배하는 사람들은 모두 지역 관리에게 수확물을 팔아야만 하고 지역 관리는 이를 대구의 면직공장 소유자에게 보낸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작물을 절반 가격에 팔아야만 한다. 이전에는 50엔 받던 작물을 지금은 24엔 받고 있는 것이며, 지금은 이것이 최고가이다. 또한 예전에는 스스로 면직물을 짜서 썼던 것에 비해 지금은 독점 기업가로부터 일본 면을 구입하거나 혹은 시장에서 일본 면으로 만들어진 상품을 사야만 한다. 벼의 타작에 대해서도, 한국인들은 예전에 하던 방식으로 하루에 세 가마의 벼를 타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고 이는 속도가 훨씬 더 느리다. 이는 단순히 화물 피대(皮帶)의 문제로, 한국인들은 타작을 방해받지 않는 밤에만 해야 한다. 이는 강요된 것이지만 가마마다 5엔씩이 든다. 일본 통치를 옹호하는 청원에의 서명. 일본 통치 하에서 관직에 있는 한국인들이 많지만, 그 관직의 임기는 이제 곧 끝난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주인 없는 개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인들은 이번이 이러한 한국인들을 소위 “자제 협회(Self Restrict Society)”라는 체제를 밀어붙이는데 이용하는 좋은 기회라고 보았다. 일본인 시장은 도시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고 유명하고 평판 좋은 이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초청장을 받은 이 중 절반이 참석했고 나머지 절반은 하인을 보냈다. 시장은 내륙에서 시위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것이 사업 및 다른 이익에 상당한 손해를 끼치고 있다고 선언했다. 시장은 자제 협회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제안했고, 협회에는 회장이 필요하며 전 도지사였던 박씨를 그 자리에 추천했다. 박씨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앞잡이라고 보고 보통 일본의 개라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는 연설을 했고 시위가 중단되어야 하며 협회의 회원들이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원들은 어떤 시위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으며 가능한 경우 시위를 저지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경찰에 알리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청중의 반응은 침묵이거나 한국인들이 이야기할 때는 자신들의 코를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에는 문서에 열 개의 도장이 찍혔지만, 주인을 대신하라고 그 자리에 보내진 하인들은 이의를 제기한 후 자신들의 손도장을 문서에 찍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당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회합에 대한 발표에는 조금이라도 명성이 있는 70명의 이름이 들어갔다. 그 다음에는 시장이 일본의 손아귀에 있다고 알려져 있는 다섯 명에서 여섯 명의 한국인들이 선전위원회를 구성해 주변 지역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협회에 참가하고 그 이익을 위해 노력하도록 설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원래 명단에 있던 이들 중 절반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 문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그 자리에 참석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피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사람은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처럼 꾸몄으나 경찰이 그를 붙잡아 회의장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군인들이 회의장을 둘러쌌고 시장은 일본 당국을 대표해 참석한 이들에게 협회 규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하려는 의도였다. 선전 위원회의 위원들에게는 각각 시장 사무실에서 나온, 제복을 입고 칼을 찬 비서가 배정되었다. 캠페인 계획은 각 마을 별로 세워졌다. 선전 위원회가 자신들의 업무를 마치고 나면 각 마을의 촌장이 그 문제를 맡는다. 일본인들에 의해 지명된 이 촌장들은 거의 모든 경우 일본의 앞잡이다. 촌장들은 마을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서, 사람들이 무지할 경우 그냥 서류의 빈칸을 보여주고 거기에 도장을 찍으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서명하고 있는 종이가 무엇인지를 물으면 만세를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는 답변을 듣는다. 그리고 도장을 찍지 않을 경우 경찰에게 체포되어 투옥될 수 있지만 도장을 찍으면 그런 사태에서 면제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내가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만, 나는 독립을 원한다. 이전에는 평화 상태를 깨뜨린 것에 대한 투옥 기간이 *년이었는데 현재는 10년으로 늘었다. 내 친구 중 한 사람은 철로를 따라 위치한 기차역에 일본인 경사로부터 지시가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지역의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고 군인들에게 누구건 만세를 부르는 사람은 현장에서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누구건 사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은 팔에 붉은 완장을 둘러서 구별되었다.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의 숫자는 상당했다. 긴센(Kinsen)에서는 넓은 시장터에 경찰이 도시에서 제일 이름이 알려진 상인 60명을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헌병대에 와) 앉으라고 했다. 상인들 주변을 60여명의 군인들이 둘러쌌다. 헌병 대장이 만세를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서류에 도장찍는 것을 거절하는 이는 누구건 다시 일어서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누구도 일어설 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다.잠시 후 기독교 교회를 포함해 도의 모든 지역에 협회가 성공 이상이었으며 실제로 모둔 사람들의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었다는 발표가 전해졌다. 이번 달 5일 경찰이 또한 4,000가구 이상이 도장을 찍었다는 발표를 내놓았다. 내가 보고 있는 서류는 그때 돌려진 것이다. 합천에서 온 보고로는 그 곳에서는 70명 이상의 사람들이 총에 맞았다고 한다. 고령이라는 군에서는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서명을 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도장을 모두 망가뜨려 버렸다.안동의 한 목격자가 이야기하기를, 4월 1일 경에 일본인이 한국인 한 사람을 죽였고 슬픔으로 넋이 나간 그 한국인의 아내는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남편의 시체 위로 몸을 던졌다. 그 일본 군인은 앞으로 나가 총검으로 아내와 아이를 둘 다 찔러 죽였다. 다른 사례로는, 어느 한국인이 부상만 입은 상태로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지나가던 일본 군인은 그 한국인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시골에서 온 죄수의 말로는 감옥이 포화상태라고 한다. 200명의 죄수가 다시 타이든(Taiden)으로 보내졌다.체포되거나 감옥에 있는 이들의 숫자는 5천에서 6천에 이른다. 현재 2000여명의 죄수가 있다.체포에 대한 포상이 현금으로 주어지며 이로 인해 일이 빨라지고 있다.여자들은 감옥 안마당에서 발가벗겨지고 채찍질당했다. 한국의 모든 가문에는 승인된 수장, 즉 종손이 있는데, 그는 가문 시조의 직계 자손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시골에서 모든 종손들의 도장을 받겠다는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청풍 김문의 종손에게 찾아가 그가 일본의 통치를 승인한다는 도장을 찍게 만들려고 했다. 이를 피하려 한참 노력했으나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의 설득 하에서 종손은 도장을 찍어야만 할 상황이 된다. 보통 한국에서 남자들이 쓰는 방의 뒤쪽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여자들의 처소다. 현재의 상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일본 관리가 도착하자마자 집안의 여자들은 걱정에 차서 일본 관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고 창문으로 엿듣고 있었다. 일본 관리가 왜 찾아왔는지를 알았고 서류에 도장이 찍힐 상황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종부는 방으로 달려들어가 도장을 남편의 손에서 뺏어들고 달아났다. 일본 관리는 즉시 종손을 체포해 감옥으로 끌고 갔고 종손은 아직 감옥에 있다. 이 이야기는 신속하게 한국인들 사이에 퍼졌고 그 결과로 지금은 모든 가문의 종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종손들은 안전을 위해 숨어 있다.

    267 진술

    3월 8일 이곳에 시위가 일어나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김 용해(Kim Yong Hai)라는 젊은이는 제 3교회에서 장로를 돕는 사람의 아들이자 같은 교회의 신자였는데, 일인 관리에게 체포되어 바닥에 내던져진 후, 머리와 목뒤를 여러 번 걷어 채였다. 경찰서에 이끌려 왔을 때 그는 피를 심하게 흘리고 있었다. 다음은 이 사실을 목격한 사람의 이야기이다.그는 감옥에 2주 동안 갇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위에서 언급한 증인은 옆 감방에 수용되어 있다가 나중에 석방되었는데, 이 젊은이가 감옥에서 그에게 가해진 고문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머리를 때리거나 감방의 열쇠로 고통을 주는 형태의 고문은 흔히 있는 방식이었다. 며칠 후 이 젊은이는 석방되었는데 곧 그는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그가 당한 고통이 매우 심했던 것을 호소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머리 한 쪽이 사라진 것처럼 감각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헛소리를 하게 되고 아픔이 더 심해지다가 열흘쯤 지나서 죽었다.죽는 날 밤, 그는 정신이 혼미하여 헛소리를 하는 중에도 자신은 죄가 없으며, 그가 받은 벌은 너무 가혹했다고 말하였다. 그 날 그를 맡은 의사의 사망 진단은 머리에 받은 충격이 주요인 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몸과 목덜미 그리고 두개골 아래 부분이 검게 색깔이 변해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일인 법률가의 비서였으며 읍내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뚱뚱한 아버지는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으며, 다른 가족들도 거의 죽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여기에서 가까운 면소재지(magisrtal town)에서 있었던 시위에서 세명이 총에 맞아 죽었으며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하고 40-50명이 감옥에 갇혔다. 나는 부상자 중 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었다.조금 이른 오후에 시위가 있었고 몇몇은 체포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그 사람과 열 댓명의 다른 사람들이 부상자가 쓰러져 있는 여관 앞에 서 있었다. 세 명의 일본 군인과 여덟 명의 일경이 함께 다가오더니,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이 곳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나에게 말을 전해 준 사람의 형제가 묻기를 무장도 안한 무죄한 사람을 총으로 쏘는 것은 어찌된 일이냐고 항의했다. 한 군인이 총으로 그를 두들겼다. 형제가 당하는 것을 보고서 그가 항의를 했던 것인데, 그런 그의 옆구리에다 그들은 총을 쏘았다. 상처로부터 피가 흐르는 가운데에도 또 다시 그가 불평을 하자, 그에 대한 대답으로 또 한 발의 총을 머리에다 쏘았다. 정규 관리가 최소한 10여명이 있었고, 모여 있는 사람들이 15명 정도밖에 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이번 두 번째 총격은 그 지역에 사는 일본 상인이 쏜 것이었다. 알게 된 바로는, 그 날에 있었던 총격은 모두 두 명의 일본인 민간인이 가했는데, 그들은 이런 사실을 자랑을 하고 다녔다.다른 석방된 사람의 증언으로는, 열쇠를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손가락을 단단히 맨 후 팔이 마비되어 쓸 수 없을 때까지 열쇠를 돌렸다. 이것은 고문을 직접 목격한 자의 두 번째 증언이었다.우리가 들은 총격 사망 기사는 모두 축소되어 보도되었다. 그리고 사망과 매장에 관한 기사는 아예 없었다.나는 4월 11일 온종일을 70여명의 기독교인들을 재판하는 법정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 중에 6개월을 구형 받은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그들은 단지 군중 속에 있었으며 아무 소리도 외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모든 과정이 정도 이상으로 심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68 석방된 여자의 이야기

    작성일: 1919-03-28오늘은 1919년 3월 28일. 21살 전후의 한 여자가 우리 집에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나는 평양의 어느 길에서 3월 3일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었다. 서에는 남자와 여자가 많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담배를 피웠는지, 술을 마셨는지, 또 기독교인은 아닌지 등을 물었다. 곧 다른 사람들은 벌을 받지 않거나 받아도 가벼운 벌을 받고 다 풀려났는데, 계속 구금되어 있게 된 사람들은 12명의 감리교회 여자 신도들과, 2명의 장로교회 여자 신도들 그리고 한명의 천도교 여자 신도였다. 세명의 감리교 여자들은 성경 여신도(Bible women)들이었다. 이 여자들 모두는 많은 남자들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졌다. 그들이 나에게 둔 혐의는 오직 길에서 “만세”를 외쳤다는 것뿐이었다.그들은 내 온 몸에서 진땀이 날 때까지 때렸다. 진땀이 나는 것을 보자 그들은 “아, 더운가 보구만.” 하면서 벌거벗은 내 몸 위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 손은 뒤로 묶여 있어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 때리기 시작했고 또 진땀이 나면 찬물을 끼얹었다. 그런 다음 이제는 춥지 하면서 담뱃불로 내 몸을 지졌다. (어떤 사람은 뜨거운 다리미로 지졌다.)태극기를 만든 사람들과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당한 고통에 비하면 내가 받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절할 때까지 얻어맞았다. 어떤 젊은 여자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생리중에 있었다. 그녀는 옷을 벗기는 것을 거부하였는데, 그들은 오히려 더 심하게 옷을 잡아 찢고 때렸다. 찬물을 끼얹는 일은 하지 않았다.4일이 지나자 우리는 감옥으로 보내졌다. 여기서 우리는 한 방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수용되었다. 어느 날, 어느 나이 많은 남자가 맞아 죽었다. 성경 여신도(Bible woman) 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 옆에 있었는데, 그의 죽은 모습을 보고서 치워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도록 그 주검을 곁에서 보고 있도록 강요했다. 성경 여신도 한 사람은 손만이 아니라 발까지도 묶여 있었다.그들은 우리에게서 성경책을 치워버리고, 기도하거나 말을 하는 것까지도 못하게 금하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나쁘고 고상하지 못한 말들을 사용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인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비록 한국인 순사도 방안에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때리거나 폭력을 행사라는 일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일본인들은 성경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혔고, 성경에 나오는 감옥에 갇혔던 바울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는 없는지를 묻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외국인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물었다. 외국인 선교사와 접촉이 있었던 사람이나 미션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던 사람들은 참으로 잔인하게 취급하였다. 어떤 여자는 너무 변하여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만큼 변해 있었다.후에 이 여자들 중의 한 명은 감옥에서 죽었다. (확인되지는 않음)Rev. J.Z. Moore에게 보냄. 한국 평양에서.두 번 째 이야기.4월 1일. 일경 한 사람과 형사 한 사람이 우리 집에 와 주인마님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이 집의 주인 마님은 시골에 다니러 내려 갔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요구하기를 곧 전보를 쳐서 경찰에서 그를 지금 보고자 한다고 전하라고 하였다. 관리는 이어서 내가 먼저 그들과 함께 임시 경찰국(Provisional police beureau)에 가자고 했다. 곧 따라 갈테니 먼저 가라고 하였더니 같이 가야 한다고 다그쳤다.파출소에 도착하자 그들은 어디론가 전보를 쳤다. 집주인이 출타 중이므로 머슴을 데려 왔는데 괜찮은지를 묻는 것이었다. 대답이 좋다고 하자, 그들은 나를 임시 경찰국(PPB)으로 데려 갔다. 그곳에 들어가자, 장터에 있는 많은 가게 주인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에게 말을 하더니 자세히 읽어보라고 무언가를 주기에 읽어보았다. 이어서 우리들은 지난 한 달 내내 가게를 닫고 열지 아니하는 등 법을 심하게 어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아니 한다고 약속을 하면,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범법을 한다면 법에 따라 심하게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약정서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받았다:“당국이 우리를 돕고 보호하여 준다면 곧 가게문을 열 것을 약속합니다.” 이 약정서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석방되어 집에 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하였다. 내가 아는 한 모두가 서명에 응하였다.감시자 하나가 나를 따라 가게까지 따라 와서는, 문을 열지 않으면 당장 다시 서로 데려 갈 것이라고 위협을 하였다. 나는 마지못해 문을 열었는데, 잠시 후 일본인 한 사람과 한국인 한 사람이 감시원으로 우리 가게에 들어앉아 문을 닫는 시간까지 앉아 감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1919년 4월 2일. 가게문을 열기 위해서 나는 아침 늦으막하게 나왔다. 도착하였을 때, 자물쇠는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문은 열쇠 없이 열 수가 있었다. 가게에 있자 얼마 안있어 (한국인) 순사가 와서 Kurigai에 있는 파출소로 출두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나는 가게 주인 아들과 함께 그를 따라 갔다. 우리는 왜 아침 일찍 가게문을 열지 않았는지를 추궁당했다. 나는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 열 수가 없었노라고 대답을 하였다. 내 대답에 일본인 순사가 내 얼굴을 때렸다. 가게 주인의 아들도 상당히 얻어맞았다. 나는 몇 차례만 맞았다. 파출소의 관리들 중 한 사람이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나는 아침 8시에 가게문을 열 것을 약속합니다.” 이렇게 적힌 서류 위에 나는 서명을 해야만 했다.4월 3일. 아침 9시에 내려 와 가게문을 열었다. 곧 이어 순사가 와서 물었다. “약속했던 대로 왜 8시에 가게문을 열지 않았느냐?” 나는 핑계를 대었고, 그는 다시 파출소로 오라 하였다. 이번에도 꾸짖었으나 때리지는 않았다. 다른 종이에 또 “8시에서 9시 사이에 꼭 가게문을 열 것을 약속”하는 글을 적고 서명을 하게 하였다.4월 4일. 8시에서 9시 사이에 가게문을 열었다.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세 번 째 이야기.유씨의 경우독립 운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서, 나는 수많은 다른 가게 주인들과 마찬가지로 가게문을 닫았다. 이것은 거리에서 만세를 외쳤던 수많은 내 동포들처럼 나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독립 만세를 부르는 나의 의지를 표현하려는 것이다.길거리를 내달리며 만세를 부르다가, 백성들의 독립 만세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당국에 의해 그냥 체포되는 것의 효과가 무엇일까를 생각하였다. 나는 감옥에 가는 것이 싫어서 길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는 것을 피하는 대신에, 똑같은 효과가 있다고 믿으며 가게문을 닫기로 했다. 지난 달 초에 문을 닫았을 때는, 경찰이 와서 문을 차고 두드리면서 내가 가게문을 열도록 하였다. 나는 가게문을 안 열기로 마음을 먹었으므로 내 아내의 친정집으로 피신하였다.4월 3일. 목요일. 경찰은 지속적으로 가게 문을 열도록 문을 두드리고 부실 듯이 하므로, 나의 늙으신 어머니께서 가게 뒷 쪽에 나 있는 집 마당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한동안 가게 안으로 들어오려 온갖 방법을 쓰다가 안되니까, 문이 잘 잠겨지지 아니한 곳을 발견하고 그것을 부수고 가게로 들어왔다. 그들은 마침내 문을 부셔 열고 가게를 열게 하여 73세인 나의 늙으신 어머니에게 가게를 보도록 맡기고 갔다.네 번 째 이야기김씨의 경우:4월 1일. 월요일. 경찰은 수 백명의 상인들에게 경찰국으로 출두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지시를 받은 총 인원 중에 49명만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는데, 그들 중에 얼마는 그들의 집으로부터 경찰이 직접 데려 와야만 했다. 사람들이 모이자, 경찰과 정부 관리가 말을 하였다. 상인들이 상점을 닫은 것에 대한 죄를 묻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고, 이번만은 용서해 주겠으나 다음에도 반복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또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그들에게는 심한 벌이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그들은 가게문을 곧 바로 열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도록 강요당했다. 상인들은 경찰이나 형사 한 두 사람의 감시 하에 함께 일하는 가게로 갔다.김씨 자신의 증언:내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안 가게문을 몇 주 동안 닫았다. 4월 1일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가게로 와서 자물쇠를 제거하고 가게문을 열었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살지 아니하므로, 경찰에서 나를 찾아내기까지 이웃집에서 가게를 대신 보게 하였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경찰은 파출소에 전화를 하여 내가 곧 가게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으나 내 동생이 집에 있었으므로 그가 가게에 나가 일을 보도록 명령을 받았다.4월 2일. 가게문을 오후 2시에 열었다. 오전 중에 경찰은 가게문을 열도록 여러번 시도를 하였다. 내가 자물통을 두 개를 달아매는 바람에 경찰은 문을 열기를 실패했던 것이다. 가게문을 열자 얼마 안 있어 경찰에서 와서 왜 가게 문을 아침에 열지 아니하였는지를 물었다. 다른 곳에 바쁜 일이 있어서 그랬노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들은 가게를 아침 8시에 열고 밤 10시에 닫기를 명했다.(보통 보다 한시간 늦은 시간) 말을 듣지 아니 하면 심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을 하였다.4월 3일. 공휴일이다. 다른 상인들처럼 나도 일장기를 가게에다가 달기를 강요당할까 싶어, 나는 일찌기 가게문을 열지도 않은 채 시골로 내려 가 버렸다. 오후 4시에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경찰 5-6명이 두 번이나 3시에서 4시 사이 에 방문하였다고 하였다. 아내는 따라 오라는 명령에 집 볼 사람이 없고 열쇠도 없기 때문에 지금 따라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경찰로부터 아내가 받은 치 욕에 대해 묻는 것에 대답을 하였다.) 아내의 말을 듣자 나는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될까 두려워서(시위를 격려하는 한국인 선동자 때문이 아니라) 가게문을 열었다. 그 후로 매일 가게문을 열게 되었다.주: 이 이야기는 비통과 복수의 심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을 담고 있음.수천의 상인들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가게 주인이 만약 한국인 선동자가 무서웠다면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러 경찰에 갔을 것이다. 그러면 경찰은 적극적으로 보호를 약속하며 가게문을 열 수 있도록 하였을 것이다. 사실을 보면, 직간접으로 시위를 격려하는 한국인 선동자의 힘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가게 주인들이 개인적인 생각과 스스로 내린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미리 어떤 사람과 함께 의견을 나누었거나, 이 운동에 관련하여 한국인 선동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순수한 애국심을 폄하하는 것에 대해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다섯 번 째 이야기: 재미있는 사건이씨는 일본의 국경일인 4월 3일이 되어 일장기를 달아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싫어 좋은 꾀를 내었다. 그는 가게문을 열지를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가게문에 “제사지내러 시골에 갔음”이라는 쪽지를 내붙였다. 늦은 아침나절에 그는 같은 거리에 있는 다른 가게에 전화를 하여 가게문이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불행인지 일본 순사가 그 전화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가게의 문들이 다 열렸다.”고 대답을 하며 전화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서 와서 가게를 열라.”고 촉구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가게 주인 이씨는 가게로 돌아 왔고, 거기서 경찰의 손에 거짓말한 죄로 잡혀가게 되었다. 순사는 왜 시골에 갔다고 했느냐고 물었다. 그가 그럴만한 구실을 대지 못하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이틀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이것은 결코 일본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의 또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어떤 독자는 한국인들은 거짓말을 잘 하기 때문에 그럴듯한 이야기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는 이런 경험은 흔히 보고 겪는 일이다.

    269 화수리의 살인 사건

    고통스러운 광경을 보고 또 그 슬픈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하루하루 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이 그토록 무섭고 고통스러웠던 경험들을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고, 무디어지고, 무감각하게 되어 가는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처음에 무죄한 사람을 때리고 총을 쏘며, 평화로왔던 집에 불을 지르고, 남자와 여자들을 학살하고, 또 고아들의 고통을 보았을 때는, 사람들의 피가 끓고 보는 이마다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직접보고 들은 때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감각이 무디어졌는지 느낌이 없어졌고, 가슴은 더 이상 의분에 끓지 않게 되었으며, 맞대응할 자세는 수그러들었을 뿐만 아니라, 슬프게도 무의식적으로 인내로 견디어 가려는 모습만 보였다.내가 이들 파괴된 화수리 마을을 둘러보았을 때, 파괴되어 휑한 모습이 이제는 거의 아무렇지도 않은듯 자연스러워 보이고, 불탄 집들의 광경과 공포에 떨었던 사람들은 감정이 죽어 있었다. 새로운 것은 발견되지 않고, 살인과 잔혹함은 먼 다른 곳에서 있었던 일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잔인한 군인들의 행동은 악귀의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그 잔인하고 야만적인 행동은 이제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되고 말았다.폐허가 된 마을화수리의 경우는 야만스러운 일황 군대가 잿더미로 만들어 놓은 표본 마을이었다. 그 마을은 기름진 논밭이 펼쳐진 아래를 바라보며, 숲이 우거진 언덕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기와지붕에 큰 대문이 있는 상당히 좋은 양반네 집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깨어진 기와 조각 더미와 먼지 그리고 무너진 담벼락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 집주인은 도망을 갔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갔을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이 지주(squire)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40여 채의 집중에 18-19 채만이 남아 있었다. 그 악한 불길은 - 그 불길 속에는 일본 군대의 보다 적나라하게 확실하고 잔인한 살의로 가득 찬 손길이 뻗치고 있었는데 - 더 이상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의 진실한 증언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바로 여기에 불탄 집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는 불탄 집과 안 탄 집이 번갈아 가며 서 있었다. 불탄 집과 안 탄 집의 거리는 대개 수 피트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보통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김치나 물을 담는 항아리들이었다. 장독대의 토기들과 불탄 부지깽이, 재, 타다 남은 것과 같은 폐허의 흔적들은 이곳들이 행복하고 단란한 집들이었다는 증거였다. 화마로부터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용납되지 않을 일이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 이 같은 범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숟가락, 그릇, 쌀가마, 이부자리들이 참혹한 죽음이 있는 곳에서 건질 수도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어떤이는 이 같은 경우는 가엾은 난민들의 빈곤이라고 규정하며 합리화하려 할지도 모른다. 자기의 집들이 불에 타버린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다행히도 불타지 아니한 이웃의 착한 사람들의 집에서 이부자리와 밥과 불을 나누어 쓸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작은 초가 움막 아래에서 지내거나, 정부에서 다른 지역 감화소(penitentuary)의 높은 벽 뒤에 마련해 준 거처에서 지냈다.범죄 이야기이야기는 주위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4월 4일 장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이미 다른 곳에서 한 두 번 정도는 이런 시위에 이미 참여 한 적이 있었으나, 모든 것이 평화롭게 진행되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별다른 소요도 없는 가운데 경찰서 앞에서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고 분하게도 일본인 경찰국장은 총을 쏘게 하여 사람을 죽이고 또 부상케 한 것이다.그것은 과잉 반응이었다. 일경은 그 잔혹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행했던 것이다. 이 같은 사태로 치닫자, 그들은 순사를 공격하게 되었고, 화가 나서 때려죽이며 경찰서를 방화하게 되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폭력 자체는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나, 화가 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이었다.그 후로 더 이상 아무 일이 없다가 4월 11일 이른 아침 동틀 무렵에 마을 사람들은 불타는 소리와 냄새로 인해 자다가 일어 나는 소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먼저 군인과 순사들이 불을 지르고 사람들에게 총을 쏘거나 때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놔둔 채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달아났다. 어른과 아이들 할 것 없이, 어머니들은 아기들을 들쳐업고, 아버지는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서 모두 산으로 피해 달아났다. 그러나 이미 그 과정에서 세 사람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숨졌고, 많은 사람들은 얻어맞았으며 수명의 사람들은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이것은 이해하기에 길고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일의 상황을 생각해 보고 그 과정을 떠 올려 보라. 여러분의 집이나 여러분의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어떻겠는가. 그 어두움 속에서의 총질, 구타 그리고 여인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생각해 보라. 불타는 화염과 잔인한 군인들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또 어머니가 아기를, 아버지가 어린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 가엾은 백성들이 그들의 집들을 염려하는 것은 여러분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보라.마을 사람들내가 막 마을에 들어설 때에 어떤 젊은이가 인력거를 타고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아들이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그를 맞이하러 나온 어머니에게 그 젊은이는 절름거리며 걸어갔다. 둘 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누구도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어떤 이유인지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고 풀려나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따뜻이 맞이하고 나자, 나는 그에게 무슨 일로 잡혀가 감옥에서 맞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 젊은이는 이렇게 말했다.“마을이 군인들에 의해 불에 타자, 나는 집밖으로 뛰쳐나왔는데, 곧 체포되었습니다. 수원까지 끌려 가 며칠을 구금 상태로 있는 가운데 얻어맞게 되었으며 후에 집으로 돌려 보내지게 된 것입니다.” 그가 얻어맞은 자리는 잔인했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도 그는 걷기가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멍들고 얻어맞는 중에 그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열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떤 작은 친구 한 사람은 그의 옷 앞에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크게 써넣고 다니는 번호가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그 *** 번호는 왜 있는거죠?”“나는 감옥에 끌려가 얻어 맞고 나서 이 번호를 받아 풀려났죠.” “몸을 좀 볼 수 있을까요?”그가 옷을 벗어 보이자, 노란색과 녹색 또는 검은 색의 커다란 멍들이 여러 군데 나 있었다. 구타가 얼마나 잔인했던지를 알 수 있었다. 몽둥이로 여든에서 아흔 대의 태장형은 보통이었다. 순사들의 이러한 구타로 인해 죽은 나이도 많고 약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그 작은 친구에게 무슨 일로 잡혀갔는지를 물었다. 그는 특별한 것이 없고 단지 다른 사람들처럼 “만세”를 불렀을 따름이라고 했다. 열 네 살 된 이 어린 소년은 죄인을 뜻하는 큰 글씨의 ** 번이라는 숫자를 달고 다니는 것이었다.순사나 군인들이 없는 사이에 이 마을에 도착할 수 있게 된 나는 내가 원하는 정보를 다 얻을 수가 있어 매우 행운이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군인들이 다시 돌아 와 마을을 불지르거나 총을 쏘아 더 많은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 속에서 살고 있었다. 짐작이 가겠지만, 남자보다 여자가 더 고통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작고 아담한 집이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맨 땅에서 짚으로 엮은 거적을 덮고 자기에는 너무 추웠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차가운 밤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우리의 대화가 거의 끝나가는 무렵에, “일경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30여명쯤 되는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 백성들이 사는 이 곳에 항상 테러의 위협이 상존하는 이런 상태를 우리는 인식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엾은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하소연하며 도움을 요청했다.“이 세상 어디에선가 이처럼 엄청난 핍박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정말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집과 안전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까지도 빼앗기고 있는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요?”이렇게 묻는 말에 대해서, 나는 그들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오신 전능한 자가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곳을 떠났다. 희미한 빛줄기 같은 소망만을 그들에게 남긴 채로 떠나왔다. 어쩌면 그들 어깨의 무거운 짐 아래 작은 소도구 하나만을 가지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절망과 슬픔은 어찌하지도 못하고 남겨 놓고 떠나 왔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내면의 고뇌와 고통은 삶을 더욱 추악하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말았다.

    270 감옥에서 풀려난 여학생의 이야기 (4)

    이것은 내가 3월 **일부터 **까지 겪은 이야기이다.그 날의 나의 계획은 학생들과 함께 남대문에서 시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려는 것이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천만 한국 여성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역시 독립을 외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런 외침으로 문명 선진국들에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압제 하에 그들의 총과 칼을 무서워하면서 십년이 넘게 살아 온 우리들, 이 가슴속에 쌓여 온 원한을 알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나의 목숨을 이런 목적에 바칠 것을 각오하고, 나는 3월 **일 오전 아홉 시에 학교를 떠나 남대문을 향해 전차를 탔다. 한 구역을 지나자 우리가 탄 전차가 방향을 남대문이 아닌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차장이 남대문 쪽으로 가는 손님은 여기서 내려 갈아타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내려서 다른 전차를 타려고 하는데, 일본 순사가 내 뒤로 오더니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나는 남대문으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더 이상 묻지도 아니하고 그는 나를 체포하더니, 위아래를 만져 보고 옷을 수색하였다.그러나 아무 것도 의심스러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내 짚신에 달린 끈을 가리키며 그것을 구실 삼아 경찰서로 가자고 명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왜 그냥 길을 가는 사람을 경찰서로 가자고 하는거예요?”그 순사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군중 속에서 내 얼굴을 이리저리 때리더니,“따라가잔 말이다.” 하고 소리를 쳤다.나는 속으로 내가 정말로 잘못이 있다면 경찰서는 무서운 곳이 되겠지만, 잘못을 저지른 것이 없으니 겁낼 것은 없다고 자위하였다. 나는 순사를 따라 경찰 본부로 갔다. 거기에는 무기를 든 순사들이 양편에 늘어서 있었다. 나는 조그만 방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나를 구타하고 귀를 가로질러 때리는 바람에 볼이 부어 올랐다. 그들은 단단한 징을 박은 구두발로 내 발을 밟고 짓이겼다. 나는 거의 발가락이 짓이겨지는 듯한 고통을 당했다.양편에는 학생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다들 어린 소년 소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소녀들의 귓바퀴를 때리고, 발로 차며, 구석으로 굴리며 내던져 버렸다. 그들은 또 다른 소녀들의 머리채를 휘어 감고서는 앞뒤로 흔들다가 창문으로 내 던지듯 부딪쳐 양쪽 얼굴에서 피가 흐르게 만들었다. 어떤 남학생들은 밧줄로 묶인 채 머리를 그들의 다리 사이로 밀착시켜 붙이게 한 뒤, 무거운 구두발로 짓밟고 얼굴을 걷어 차 눈이 부어 오르고 피가 흐르게 만들었다. 그들은 우리 모두를 앉으라고 명했다. 들어오는 순사마다 돌아가며 마음대로 때렸다.방은 좁아 터졌지만, 그래도 그 안에 마흔 명의 남학생과 서른 네 명의 여학생들을 수용했다. 공기는 탁하여 내 머리는 아프고 어지러웠다. 우리는 아침 아홉 시부터 밤 열 두 시까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얼마 후에 남자들은 다른 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우리 여자들은 우리들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게 되었다.우리를 대질 심문을 할 때 그들은 끊임없이 난폭하게 다루었다.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나를 제일 먼저 심문하였는데,순사: 그래, 네가 길거리로 나왔는데, 그래 정말 너는 혼자노 생각으로 스스로 나왔단 말이지? 정말이노 다른 어떤 사람이 너더러 이렇게 나오라고 하지 않았단 말이무니까?나: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란다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내 스스로 생각으로 나온거예요.순사: 다른 어떤 선생이나 외국인이 학교에서 말하기를 한국이노 문제가 평화노 협상에서 논의 될거라고 하지 않았단 말이무니까? 나: 그런 이야기는 여기서 처음 듣는 소린데요.순사: 거짓말이노 하지 마라.그는 나를 주먹으로 때리고 곤봉으로 치며 다시 물었다.순사: “너는 한국이 독립을 하기를 바랍무니까?나: 그건 제 소원이에요.순사: 일본과 한국은 합방이 되어서 백성들은 더 살기가 좋아졌으무니다. 다른 모든 것도 그렇게 좋아졌는데, 왜 그것에 대하여 감사노 하기는 고사하고 반대로 독립을 바란단 말이무니까?나: 내가 아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하자면요, 만약에 일본과 한국이 정말로 한 나라가 되었거나 또는 처음부터 한 나라였다면, 이런 소원이 내 마음에 생기지도 않았을거예요. 하지만 한국은 이미 사천 년이라는 평화로운 역사가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건 무력으로 하는 것이죠. 법적으로도 옳다고 세계가 인정하지 도 않아요. 또 일반 교육의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어요.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독립을 원하는 나의 소원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순사: 아하! 이렇게 말을 잘하는 것을 보니까, 네 생각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으로부터 배워서 말한다는 걸 알겠으무니다. 왜 거짓말을 하오까?그는 내 머리와 얼굴을 계속 때려 몸의 감각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는 다시 말했다.순사: 너는 훌륭한 여학생이무니다. 이 감옥이노 생활을 어떻게 견딜 것이무니까? 참 가엾소다. 이러지 말고 사실이노 말을 하라. 네가 한 번만 미국인이노 선생이나 한국인이노 선생의 이름을 대면 집에 돌려보내 주겠소다.”나: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어떤 선생이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어요.순사: “거짓말이노 하지 마라.그러면서 그는 두 손으로 내 입을 틀어쥐는데 나는 내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듯이 아팠고, 그가 손을 놓았을 때는 내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다시 내게 물었다.순사: 너는 왜 끈달린 신발을 신었었지?나: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황제께서 승하하신 이후로 매일처럼 신었어요.그는 다시 내 입을 곤봉으로 때려 내 입술은 부어 터지고 피가 흘렀다. 그는 내 머리를 때려 감각이 없어졌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심문을 네 번이나 받았다.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심문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심한 고문을 받았고, 어떤 사람들은 팔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몇 시간이나 견뎌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옷이 벗겨진 채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아픔을 겪었다. 우리가 닷새 동안 경찰서에 있는 동안에도 칫솔질이나 세수도 한 번 해보지 못했다. 닷새 째부터 아흐레 되는 날까지 우리는 반대 심문을 받았는데, 아흐레 날 우리는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우리들의 손은 줄줄이 함께 묶이고 밧줄로 허리까지 묶인 채 호송되었다.형무소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남자와 여자 관리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만 했다. 그 추운 날에 우리는 벌거벗은 채로 추위에 떨었고, 우리들의 발은 거의 얼어 버리는 듯 했다. 우리는 한 동안 그렇게 있으면서, 우리를 조사하듯이 살펴보고 다루는 것을 참고 보아야만 했다. 그런 연후에야 옷을 입도록 허용하였다. 그후 우리를 작은 방으로 데려 가더니, 들어가서는 무릎을 꿇게 하였다.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에 누구라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을 힘들어하거나 졸기라도 할라치면, 네 시간동안 서서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았다.어느 날 저녁, 나는 목이 말라 물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나는 매우 목이 말랐다. 가장 참기 힘든 것은 감방에 있는 변기였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이 통에서 나오는 참기 힘든 냄새를 맡으며 지내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을 했다. 물이 한 목욕통에 부어지면, 그 한 통의 물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다 목욕을 해야 했다. 몇 사람씩 한꺼번에 들어 가 목욕을 하도록 강요했다. 간수는 곁에 서서 지켜보면서 욕지꺼리며 나쁜 말로 소리를 치곤 했다.감방은 작았고 여전히 열 다섯 명이 들어 있었다.밤에는 우리는 사이사이로 또는 엇갈려 포개진 채로 지내야만 했다. 너무 붐비는 좁은 공간이어서 살짝 돌아눕기조차도 힘들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기도를 하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기라도 하면, 조는 줄로 알고 벌을 받고 야단을 맞았다. 우리는 열 시간은 자고, 나머지 열 네 시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지내야만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는 성경책을 넣어 주기를 요청했다. 매일처럼 성경책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결코 주지는 않아 감옥에 있는 동안에 성경을 읽을 기회를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했다. 우리가 석방될 때까지 이 같은 다양한 어려움들을 많이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