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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301 아더 브라운이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15발신자: 미합중국 장로교회 해외 선교부발신자: 아더 브라운 수신자: 모우리 목사의 가족 친지들에게친지 여러분:여러분들도 틀림없이 일본 당국이 모우리씨를 한국인들에게 그의 집에서 그들의 혁명 운동 전단을 인쇄할 수 있도록 도와준 혐의로 체포하였다는 전송기사를 신문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워싱턴의 미국무성과 통신을 통해서 전해 받은 이 사건에 관한 전문에 의하면 이와 같은 기사가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이 이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는 한|| 모우리씨는 유죄가 될만한 어떤 잘못된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과|| 또한 서울에 있는 미국 총영사가 그의 권리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이보다 더 자세한 소식을 원하시면|| 국무성에 전신을 통해서 알아 보시기 바랍니다.여러분의 진실한|| 아더 브라운 씀간사장

    302 기독교 세계에 전하는 호소문

    한국의 오십 만 기독교인을 대표하여 서명한 우리 목사와 장로들은 잔인한 일본 정부의 핍박을 견디면서, 여기 모든 나라의 크리스챤 동료들에게 호소하는 바입니다.한국은 1910년 한국 사람들의 뜻과 소망과는 반대로 무력을 사용한 일본에 합병될 때까지, 독립된 국가로서 사천 년 이상을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며 독특한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며 존속해 왔습니다. 합병된 이후로 우리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주된 핍박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세상에 이미 알려진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회의 일은 주목할만한 수준의 성공을 일구어 왔습니다. 그러나 합병이 된 이후로는, 일본이 갖가지 수단을 다하여 이 교회 사업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지속적으로 핍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1912년의 그 악명높은 “불법 공동 모의 사건(Conspiracy Case)”은 법을 빌어 교회를 핍박한 유명한 예인 것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살해당하였습니다. 성경책과 다른 기독교 문학 서적은 불태워지고 파기되었으며, 우리의 어린이들은 선교학교에서 침략자들에 의해서 공격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기독교계의 발전 상황을 저지해 보기 위해서, 일본 당국은 한국의 다양한 이방 미신들을 장려하였고, 더구나 참된 기독교 원리를 믿거나 실행하지 아니하는 유사 기독교 조직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들은 불교와 신도의 사찰 건립을 장려하는 가운데, 또한 언제 어디서나 할 수 만 있으면 기독교 교회 건물은 불태웠습니다.이 모든 핍박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정열적으로 한국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역자를 훈련시키고 교회를 세우며 선교사들을 중국, 일본, 시베리아 그리고 이웃 다른 나라들에 파견하였습니다. 교회가 보다 강하게 성장하면서 일본측의 반대도 더 심해져 갔습니다. 일본 정부는 세계에 한국인은 일본의 통치에 만족해하고 잘 발전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교활하게도 한국인의 순교 사실은 외부 세계로 나가는 것을 숨겨 왔습니다. 이 같은 속박의 세월 속에서도 그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불타는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4년간의 세계 대전 기간 중에 한국인은 연합군 총소리의 메아리를 기쁘게 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소리가 모든 나라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서 나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위대한 자결의 원리를 열정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 대전이

    303 친전(Confidential)

    발신자:수신자: 브라운 박사브라운 박사님께당신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도록 하는 편지를 쓰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편지 내는 시간이 조금 늦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일본 신문을 통해서 또 고향에 있는 친지들로부터 오고 있는 편지를 통해서, 한국에서 돌아가고 있는 최근의 정국에 당신께서도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또 직접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도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이 곳의 사정도 알기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3월 1일에 있었던 시위는 정말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정국이 불안정하고, 한국인들에게는 압박으로 인해서 누적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3월 3일 황제의 장례식을 전후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 날 것을 예견했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을 원하는 시위는 실제 그들의 계획에 따라 장례식보다 이틀 앞당겨진 3월 1일 오후 1시에 일어났습니다. 서울과 평양 그리고 신천(Syen Chun) 지역에서의 시위는 보는 사람의 숨이 턱에 닿도록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에게 그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내가 이 시위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신천에서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교회 종이 울렸을 때였습니다. 나는 조금 이른 시간에 토요일의 정규 교육 과정을 준비하기 위해서 주일 학교 선생들에게 설교가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휴즈 오닐 주니어 학교(Hugh ONeill Jr. Academy)에 다니는 어느 소년이 선교부 건물로부터 시내 쪽으로 달려나가며 “만세”를 외치는 것을 처음 들은 것입니다. 잠시 후에 그 소년을 본 어떤 사람이 병원을 지나 뛰어 가면서, 그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우리는 시내에서 소리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시간 쯤 후에, 우리는 경찰과 군인들이 군중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고 또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후송되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평양에서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시내의 한국인 학교에서는(교회나 선교학교가 아님) 장로교인들이 서거하신 황제를 추모하기 위하여 모였고, M.E.선교부 건물에서 가까운 다른 곳에서는 한국인 감리교인들이 모였습니다. 이렇게 모이는 곳에서는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 기관이 아니라 정치 조직인 천도교에서도 시내 다른 어느 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각 지역에서 이 추모 의식을 마치자, 그 군중들은 그 자리에 앉아 다른 계획을 기다렸습니다. 처음 추모 의식을 담당했던 진행자가 추모 모임을 마치고 군중석으로 돌아가자, 다른 계획을 진행하려는 지도자들이 군중 앞으로 나왔습니다.그들은 이 두 번째 계획을 진행하려는 목적은, 정부(총독부)에 독립을 위한 그들의 의지를 전하려는 데 있기 때문에, 이 시위는 조용하고 질서있게 진행해야 하며 폭력이나 반감의 표시등 부정적인 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독립 선언서의 복사본이 배부되고 선언서가 낭독되었으며 태극기가 배부되었습니다.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만세’라는 낱말은 혁명의 상징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나라 곳곳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법정에서도, 죄수들에게 “만세”를 불렀느냐 아니냐 하는 질문을 시작으로 심리를 하고 있습니다. 모임의 진행이 이 정도가 되자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알게 된 경찰이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경찰은 만세를 외치는 것과 태극기를 흔드는 것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외침은 계속되었고 한국인은 태극기를 계속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태극기를 회수하려 하였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 하다가, 이 모임의 의장이며 우리의 전 장로교 일반 총회 의장(late moderator of General Assembly)인 서대문 교회의 김 선두 목사(Kim Sun Doo)가 태극기는 쉽게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으므로 그들이 원하면 주라는 말이 있자, 군중은 경찰의 태극기 회수에 응했습니다. 경찰의 우두머리는 이어 김 목사에게 군중을 해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시도해 보았으나 군중은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우두머리는 이 곳에 세 명의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추모 의식에 참석하고 나서, 또 어떤 모임이 계속되는지를 보고자 함께 있던 니오페트 박사(Dr. Neoffett)에게, 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을 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니오페트 박사도 시도를 해 보았으나 김목사나 다름없이 별 무효과였습니다. 김씨는 다시 군중에게 자기도 다른 곳(감옥을 말함)에 볼일이 있으니 여러분도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군중은 계속 거기에 머물었습니다. 네 명의 선교사들은 이쯤 되자 이곳을 떠나 감리교가 있는 곳으로 가 무엇이 진행되어 가는지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이 몇 걸음을 채 가기도 전에, 군중은 이들과 함께 길을 따라 걷다가 놀랍게도 만세를 외치며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가는 길을 가득 메우며 태극기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디서 이 많은 군중이 모이도록 계획을 세웠는지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그 날 밤, 평양의 한국인들은 거칠어졌습니다. 대규모 군중이 길에 모여 시가를 행진하였습니다. 여러모로 뛰어난 김 인환이라는 학생이 선두에서 지휘하며 대학교 고적대가 연주하는 “조지아여 영원하라”는 음악에 맞춰 우리가 거주하는 곳을 지나가면서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그 학생은 지금 독립운동에 직접 관여했거나 모임에 단지 모습만이라도 드러내었던 네 명의 목사들과 함께 감옥에 있습니다. 경찰은 현장에서는 체포하지 않겠으나 나중에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는데, 다음 날 아침에 집으로 체포하러 찾아 왔던 것입니다. 토요일의 시위에는 가보지를 못했습니다만, 월요일 아침에 신천에서 와서 역전에서 있을 시위를 보고자 했던 대로, 월요일과 화요일의 시위를 볼 수 있었습니다. 평양에서의 시위까지도 다 보고자 했으나 못보게 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76를 못보았던 것의 일부는 보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나는 여기서도 다른 곳의 시위자들과 다름없이 가지고 있는 같은 정신과, 큰 용기, 그리고 굳은 결의를 보았습니다. 또한 이 운동을 벌이고자 하는 의로운 동기로부터 나오는 확신을 보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참으로 현명하며 그들의 용기는 대단한 것입니다.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 성경 시대에 유대인들이 보여준 것을 제외하고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역사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문에 난 기사가 사실이겠지만, 얼마 전 이집트에서 있었던 시위에서는, 시위대들이 무장을 하고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 한국 백성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들의 지도자들이 “작은 무력이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백성들이 가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요구의 정당성에 의지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믿고 행하는 나라들에게, 이들은 자기들의 희망에 대하여 귀담아 듣고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시위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보다 차원 높은 전능한 힘에 의지하였습니다. “우리편의 수가 저들 편의 수 보다 더 많다.”는 말이 한국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의미는 그들이 믿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오늘날이라고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현대의 여리고성의 벽을 쳐 무너뜨릴 수가 없겠습니까?이 백성들의 호소에 대하여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명백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감옥으로, 죽음과 부상으로, 매질로, 발로 차는 것으로, 그리고 압제와 멸시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은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부정으로 답했습니다. 두 백성간에 커다란 골이 패이고 만 것입니다. 일본의 어느 저명한 출판인은 이에 대해서 이 골은 한국에 사는 선교사의 도움으로만 메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런 식으로 변화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의 이익과는 반대되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두 발로 서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한결같이 묻는 질문은 “만세를 불렀는가?”였습니다. 불렀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곧 감옥으로 가야만 했고, 아니라고 하면 다음에 하는 질문은 “앞으로 만세를 부를 것인가?”였습니다. 어떤 이는 “나에게 지금부터 며칠이고 물어 보시오. (만세를 부를 거라고) 대답을 해 주겠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감옥은 만원이었습니다. 일본 관리는 “만세”를 부른 사람들의 재판을 진행시키는 일로 과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의 관리들은 죄수들이 실토하여 비밀스런 생각들을 말하도록 하고자 매를 치는데, 너무 바빠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가까이 서서 그것을 보고 듣는 우리들에게는 그런 짓이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보다 점잖고 자비로운 방법, 곧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들을 다룰 수 있는 분명히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습니다.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북쪽인 엘리아 지역에서 여덟 개의 교회 건물과 한 개의 학교 건물이 불에 탔습니다. 서울 근교에서는 반경 20마일 이내의 지역에 있는 15개의 마을이 불에 소실되었습니다. 미국 관리 한 사람과 두 명의 선교사가 그 불 탄 마을 중 한 마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곳에서는 46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교회 건물 안에서 불에 타 숨졌습니다. 관리와 선교사들은 불탄 시신들을 보고 그 잔해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들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언덕 위에서 자신의 불타버린 작은 집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서 있던 한 가엾은 여인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다 합니다. 이 이야기에 우리들의 마음은 매우 아팠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일본인들은 위와 같은 사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외국인들이 직접 방문할 수가 있어서 한국인들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상자로 넘치는 병원들, 감옥으로 계속 들어와 사람들로 가득 찬 감방들은, 모두 만연하고 있는 공포 통치의 증거였습니다. 일본 신문은 사건의 진상을 숨기는데 급급하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언론은, 이런 소요에 대해 시위가 있은 지 7일이 지나기까지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다가, 내용을 기사화하기 시작하였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사실을 축소시켜 발표하는데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나중에야 그 심각했던 운동에 대해 발표를 하였지만 그나마도 언론에 발표한 그 내용의 진상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습니다. 독립 운동 초기에, 우리 지역 안에서 있었던 시위에서 20명이(그 중 두 사람은 여자이고 한명은 9살 난 어린이) 총에 맞아 숨졌는데, 신문은 두 명이 총에 맞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목숨을 바쳐 이 일에 참여 하였는지를 언제인가는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어느 한국인 여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군인은 군인을 상대로 싸운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기도 가지지 않은 맨손인 사람들과 총칼로 싸운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한국인 지도자들은 이 독립 운동에 들어 가기 전에 자신들은 감옥 생활이나 다른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중에 어떤 사람도, 경찰이 사람에게 총을 쏘는 것, 여자에게 더구나 어린아이에게까지도 총을 쏘며 깔아뭉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것으로 볼 때, 왜 그 작은 벨기에가 끝까지 버티어 나갔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일처리는 사람들의 결심을 더욱 굳히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봅니다.내가 끓어오르는 마음을 자제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알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더 많은 내용을 써 나갈 수가 있습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놀라운 인내심으로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시련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모우리씨(Mr. Mowry)의 재판 판결을 듣기 위해 법원에 갔을 때, 나는 참으로 애처로운 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진행 상황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건물밖에 서 있었는데, 그 때 경찰이 83명의 남자 한 무리를 감옥으로부터 법정으로 호송하여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죄수들은 모두 얼굴까지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있어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만, 거기에는 틀림없이 우리가 아는 얼굴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이 걸어오는 그 사람들의 대열로 달려 가 그들의 남편, 아들, 형제들을 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얼굴은 가려서 안 보였지만 그들이 입은 옷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이들 가족들은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었으나, 나중에는 몇몇 여인들이 가족 친지들의 재판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으로 여인들은 몇 주 동안이나 떨어져 있던 자기의 사랑하는 피붙이들을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중앙 교회 (Central Church)의 장로들 중 한 사람은 그의 아내를 잃었습니다. 남편이 잡혀 간지 2-3주 후에 그 아내는 죽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일본은 독립운동의 배후에는 선교사들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일본계 언론은 솔직하게 이 운동의 배후에는 선교사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고 섰습니다. 한국인들이 이런 운동을 생각하고 추진해 나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성이 있다고 믿을 수는 없으며, 누군가가 뒤에서 도와주어야만 가능한데 그렇게 도와준 사람들이 선교사들일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한국인들이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한국에서 생긴 이런 사건이 일본이 반미 감정을 가지는 유일한 이유는 물론 아닙니다. 또한 보다 더 큰 사건의 도화선이 되지도 않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여기서 일단 중단하였습니다. 도시의 교회에서는 정규적으로 모이고 있으나, 교회 중에 오직 한 곳에서만 여자 목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장로들과 집사들이 네 명의 목사들과 함께 감옥에 가 있습니다. 이 소요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특별히 심한 고난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들은 참으로 잘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깊은 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보듯이 신앙이 약하여 흔들리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느 지방 교회에서는 현재는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한 때는 기독교인으로서는 실패한 자로 알려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는 훌륭한 기독교인으로서, 그 교회의 사역자들과 관리들이 감옥에 갔거나 피신해 있는 상황에서도, 교회를 굳게 지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몇 달 전 만해도 100여 명의 정규 회원만이 참석하던 교회에 이제는 300명의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몇 군데 다른 곳에서도 많은 증가 소식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교회에서는 열 명중에 한 명 꼴로 신자들이 죽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흩어졌으며, 어느 곳에서는 공포스런 시련으로 모이는 것을 무서워하는 교회도 있다 합니다. 이런 일은 히브리서 11장의 마지막 부분을 생각나게 합니다. 백성들의 상태는 아직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 불행한 사태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것과 다름이 없는 선교사들의 견고한 입장에 관련하여 미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보다 더 인내하며 지켜보아 갈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인 4월 13일에, 중앙 교회의 주일 학교 교사 중 한 사람이 2월 이후로 처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시위가 있던 3월 1일 밤에 그녀는 시위 군중에 합류하기 위해 길로 나갔습니다. 갑자기 불을 끌 때 사용하는 끝에 날카로운 쇠고리가 달려 있는 긴 봉을 든 소방대원들이 군중을 덮쳤습니다. 이 여교사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방대원에게 쫓겨서 중앙 교회 언덕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길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결국 소방대원에서 붙잡혀서 그 흉측한 무기로 상처를 입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없어졌고 그녀는 혼자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가 되었고 상처로 인해 통증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녀가 아픔으로 인해 몸을 숙이고 벽에 의지해서 몸을 추스르려고 애쓰고 있을 때 여자 한 사람이, 다행히도 같은 기독교도 친우인 이가 지나가다가 그녀를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도움을 청해 그녀를 동대문 근처의 병원으로 옮겼고 그 여교사는 병원에서 약을 먹고 좀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오래 집을 비웠으므로 가족이 걱정할 것이라 생각해서 가족들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곧 친구들이 와서 그녀의 퇴원 수속을 밟았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녀는 좋아지지 않았고 불편함과 통증이 지속되었습니다. 한국인 의사들은 그녀가 갈비뼈가 부러져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25일간 집에만 머물러 있었지만 겨우 잠시 동안 일어나 앉을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말했습니다. 4월 13일 일요일은 시위가 있은 후 6주일이 더 지난 때였지만 그녀는 아직도 창백하고 병약해 보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이곳에서 보고 듣고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다른 일들에 비하면 별 일 아닌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적이고 고결하며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무지하고 반만 문명화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본 언론들은 세계의 눈앞에 한국 사람들을 무지하고 반만 문명화된 이들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지배하기를 원하는 나라의 민족성을 다른 민족들 앞에서 얕잡아 보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4월 15일 경찰청은 구 도시 성벽 바깥, 우리의 주택지 근처에 있는 마을에 집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칼을 찬 경찰과 헌병이 아침마다 눈에 띄게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 시기 동안 경찰과 헌병 세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 이 마을의 집들을 방문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경찰과 헌병들이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보다 우리 이웃 지역에서 한결 더 가혹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마을의 집 대부분에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러한 일정의 유래를 이야기해 준 한 권사는 자신의 이웃 중 두 사람이, 그 중 한 사람은 50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구타를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일장기를 조심스럽게 접어놓지 않았고 경의를 가지고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녀 자신도 가까스로 구타를 피했습니다. 그녀 역시 일장기를 그런 방식으로 접어서 주름이 생겼음에도 말입니다. 다림질을 해 주름을 펴서 그녀는 겨우 일장기를 보기 좋은 상태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구타당한 노인은 팔을 못 쓰게 되었고 목 근육까지 퉁퉁 부어올라 맞은 지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고개를 돌리는 것도 고통스러운 상태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가족 한 사람마다 파리채를 구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여성 역시 아기 둘만 제외하고는 전 가족에게 각각 파리채를 하나씩 준비해 주었습니다. 경찰은 그녀에게 혹독하게 욕설을 퍼부은 후 아기들에게도 파리채를 하나씩 주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집을 청소하라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고 우리에게도 득이 된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저런 치사한 독재까지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이웃한 다른 기독교 여성의 집에서는 집주인과 마당을 같이 쓰는 세 든 사람이 일본 깃발을 경의를 가지고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 기독교인 여성의 젊은 아들은 경찰과 헌병이 세 든 사람을 집주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람을 더 이상 매 맞지 않게 하려고 달려가 말했습니다. “내가 이 집 주인입니다. 그 사람을 그만 때리십시오.” 경찰은 즉시 그에게 돌아서서 그를 심하게 구타했습니다. 세입자는 이미 맞아서 녹초가 된 상태였습니다.

    304 미국 여자 선교사가 쓴 편지 사본

    발간일: 1919-05-26어머니;오늘 밤 저의 마음이 매우 아프고 무거워요. 오늘 병원에 갔었는데, 거기서 한 아름다운 젊은이의 침대 머리맡에서, 고통속에서 그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는 이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상의 한 희생자이지요. 그는 xxx 감옥에서 우리 병원으로 후송되어 온 열 한 명의 젊은 죄수들 중에서 삼일만에 두 번 째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들 중에 몇 명은 지난가을에 내가 가르치던 사람들이었어요.그들은 독립 운동을 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독립 운동에 관한 전단을 뿌린 혐의로 체포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감옥에 몇 주 동안 갇혀 있다가 겨우 “재판”에 불려 갑니다. 일본 군사 정부가 말하는 그런 재판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흔 대의 태장형(stripes)을 언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상고할 뜻을 비쳤습니다만, 거칠게 거부당하고 벌을 받도록 조치했습니다. 5월 16일 처음으로 삼십 대의 태형을 집행하였는데, 세 명의 일인이 각각 열 대씩 온 힘을 다해서 내리쳤습니다.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목과 손목, 허리, 발목을 십자가 모양의 나무 형틀에 업드려 매어 달고서 때렸습니다.경찰이 행한 태형의 방법은 법적으로 금지된 방법이었습니다. 법이 정하는 바에는 태장을 든 자세는 봉이 때리는 자의 어깨로부터 앞이거나 평행선상에서 때려야 한다는 것인데, 이 젊은이들의 상처의 모습에서 어떻게 때렸는지를 잘 볼 수가 있었습니다. 때리는 힘이 최대가 되도록 봉을 가능한한 멀리 높이 들었으며, 다리도 들어올린 상태로 내리 친 것입니다.5월 17일, 그 다음 날, 맨살에 피가 흐르는 상처 위로 삼십 대의 태장이 또 내려졌습니다. 5월 18일, 그 다음 날에도 나머지 삼십 대를 같은 방법으로 때렸습니다. 오늘 병동의 침대에서 들은 한 사람의 증언과 다른 사람들의 확인에 의하면, 그들은 감옥에서 치료를 받기는 고사하고 상처에 바를 약 하나도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5월 18일에 그들은 나와서 여관으로 가 지내며 상처가 나아 일어나 걸어다닐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5월 22일까지 그들 중 6명은 상처에 회저병이 생기게 되었고 5명은 회복되고 있습니다. 세 사람은 현재 걸을 수 있게 되어, 심하게 나빠진 6명의 동료들을 병원으로 데려오기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더 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기차로 두 시간 거리에서 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내가 ***에서 있을 때 나의 비서로 일하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이나 매일 오후가 되면, 내가 가르치는 반을 위하여 그가 쓴 개요를 구술하여 주고, 등사판 인쇄물을 복사해 주는 등 함께 일을 해온 터여서 잘 알고 있는 사이랍니다.처음 죄수들 한 무리가 들어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내가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들이 들어온 다음 날, 내가 영어반을 가르치는 것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박사님이 그의 현관에서 나를 부르더니, 죄수 중 한 사람이 나의 비서인데 살기가 힘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이 소년은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를 안다고 하면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나는 바로 그를 만나러 갔는데, 가는 도중에 이제 막 병원에서 나오던 ***양이 나를 보고서 그 소년이 죽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잠자듯 누워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윈 모습이었으나 잘 다듬어진 조각품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마에 깊은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겪은 고통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몸에 난 깊은 상처들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갔어요. 그의 조국을 위해 만세를 외치고 평화로운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마치 개처럼 맞아 죽었는데, 분명히 이것 외에 다른 어떤 잘못도 이 소년이 범한 것은 없었답니다. 다른 사람들도 살펴보러 가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걸을 수가 있었는데, 복도에서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하더군요. 그의 안색은 창백하고 몸은 약해져 보였습니다. 비록 그는 동료들의 생명을 빼앗아 간 그 회저병의 독을 피하기는 했지만, 태장 아흔 대를 맞았으니 그럴 수 밖에요. 그와 함께 병동으로 돌아 와 보니, 네 명의 소년들이 고통 속에 신음을 하며 누워 있었고, 또 한 명의 소년은 살아날 가망성이 매우 희박해 보이는 가운데 다른 방에 홀로 누워 있었습니다. 크고 검은 눈동자에 잘 생긴 모습의 한 젊은이는 나를 보더니 매우 기뻐하였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얼굴이었습니다. 어제 그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내 기억에 남아있는 이 사람은 심하게 아파 고통을 받고 있었고, 담당 의사 선생님은 살아 날 가망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죽게 하지 않으려고, 그는 다른 독방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전 날 보았을 때도, 나를 알아보고는 그렇게 기뻐하기는 하였지만, 너무 병이 중해져서 지쳐있는 관계로, 나와 함께 오랫동안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깥일을 보고 오후 6시경에 다시 찾았을 때, 의사 선생님은 저녁이 되었는데 그의 생명은 오래 갈 것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를 알아보았고 나는 그의 침대 맡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의 실제가 임재하시어, 그의 신체적인 고통을 덜어 주고 그의 마음의 평화를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있노라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고통은 아주 심하여 그는 빨리 죽기를 원했습니다. (peritonits가 발전하여 이미 얻은 상처로 인한 고통을 더 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는 아름다운 그의 삶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제 그가 저 세상으로 가야만 한다면, 더 이상 이 고통 속에 시달리기보다는 빨리 가기를 원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오후에 *** 의사 선생님에게 그의 단 한가지 아쉬운 것은 조국이 자유를 찾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지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오후에 한동안 그의 새끼손가락 끝을 물어 뜯(고 무언가를 쓰는)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 행동은 조국의 자유를 위해 그들의 생명을 서약한 사람들이 그 서약을 흐르는 피로 인봉하는 표시였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그가 내게로 와서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놀라운 힘으로 내 손목을 잡았습니다. 내가 일어서자 자기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의 고통은 너무 심해서 수시로 몸의 위치를 바꾸어 고통을 덜도록 하였습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집에 왔다가 다시 병원에 갈 때, 서른 일곱 살쯤 되는 외국인 간호원 ***양과 함께 갔습니다. 병원 문을 막 들어서자, 그의 형제 하나가 ***로부터 자전거와 기차로 이제 막 도착하였는데, 우리 옆을 빠르게 지나며 그의 형제가 죽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보이며, 그 소년이 누워있는 병실로 달려갔습니다. 죽어 가는 소년은 몸을 일으켜 세워, 그의 형제에게로 몸을 돌리며 팔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형제가 우는 것을 본 이 소년은 “울지마, 나는 죽지 않고 살거야. 우리 오늘 밤새도록 이야기하자.” 라고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어렵다고 했었지만, 그는 정말로 죽지 않을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방에서 다 내 보내고 그 형제들만 남아서, ***양이 환자를 간호하는 가운데, 마지막 유언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기 위해 다음 병실로 갔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그의 형제가 몇 분 동안 잠깐 밖에 나와 있는 사이에, ***양과 내가 들어가 죽어가는 그 소년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소년의 생명은 빠르게 소진되어 갔습니다. 그는 우리의 손을 잡으려 손을 내밀더니, 몸을 돌려놓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의 형제가 돌아 와 부채를 들고 그의 침대 곁에 앉았습니다. 그의 교회의 지도자이며 열 한 명중의 한 사람인 조사(Chosa)라는 사람이 아직 낫지 않은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들어와 그 병원침대 끝머리에 섰고,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 중에 이 환자의 친척이며 크리스마스시기에 나와 함께 ***에서 내려 왔던 한 여학생도 도와주시는 분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형제가 슬픔 속에 들고 있던 부채를 떨어뜨리자, 죽어 가고 있는 그 소년은 그것을 주워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이 소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주워 그의 숨이 멎기까지 부쳐 주었습니다. 내가 잡아주고 있던 그의 손목은 맥박도 멎고 차가워져 갔습니다.조사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 소년이 눈이 분명히 이해하는 모습으로 불타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으려 내가 몸을 굽혀 그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의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힘을 얻었는지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었습니다. 그는 작은 손가락을 깨물면서, 그의 빛나는 검은 눈동자에 분명하게 쓰여진 메시지를 담고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곧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에 자신의 피묻은 삶으로 맹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가엾은 그 소년은 이미 그의 피를 주었습니다. 그의 침상은 이미 잔인한 그 대나무 몽둥이로 맞아 흐늘거리도록 뭉개진 그의 등과 엉덩이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젖어 있었습니다. 조사가 그의 기도를 마치고, 다시 안경을 끼었습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소년을 부르고는 “믿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분명한 대답으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의 형제가 “신을 믿느냐?”고 다시 묻자 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것이 이 지상에서 그의 마지막 의사 표시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갔습니다. 또 한 사람은 아마 내일 갈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들의 무서운 고통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겪은 고통은 문명화된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사형 집행에서 받는 것보다도 더 혹독한 것이었습니다.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주장하기를, “일본의 법은 다른 선진국의 법과 똑 같다. 그리고 우리 합쳐진 두 나라는 한 마음이 되어 우리의 법을 준수한다.”다시 나는 상처 치료를 위한 의료 혜택을 받아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간 사람들과, 무장하지도 않은 군중이 장날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200명이 학살되었던 것처럼, 아직도 우리의 이웃 땅 어느 곳에서는 그들을 위협하는 공격의 공포로 비참하게 숨어 지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나라 안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재판”이라는 것을 거쳐서 감옥에서 맞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밖에서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가 아무 증거도 없이 얻어 맞았다는 수 백 - 더 정확히 말하면 수천 - 의 경우를 기억합니다. 참으로 알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끔찍하지만, 나는 이제 이렇게 되어 가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 소년들의 사진과 나의 간증으로 썼지만 실은 그들이 내게 말한 자세한 증언을 적어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나의 국기 아래 “동맹” 관계로 맺어진 나라 안에서 어떤 사건의 잔학함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다고 짐짓 말하면서도, 이같은 공포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한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실입니다. 나는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그 많은 사건들 중에 내가 접하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 지상의 어떤 사람도 그 진실의 전부는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피로 부르짖는 아벨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 어두운 시대에 죄없이 흘린 피에 복수를 해 주실 것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사랑하는 딸로부터,후기: 그 두 소년은 월요일에 매장되었어요. 한낮의 밝은 태양 아래 슬픔에 잠긴 동료들은 장례식을 위해 잠시 머무는 동안에 운구행렬의 진행에 따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우리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배기에 있는 ***소속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감옥에서 20일 간이나 갇혀 있었던 우리 교회의 목사가 이 의식을 집행하였습니다. 소년들과 같은 고향에서 온 조사라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잘 알고 있는 두 소년들의 개인 역사를 전하는 순서에서 그들을 영적인 지도자로 높이 추켜세웠습니다. 같은 고향에서 온 목사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최근에 건강 악화로 은퇴하였는데 폐의 출혈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소년이 자신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슬픔을 전하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한 집사는 기도를 하면서 슬픔으로 떨리며 더듬는 목소리로 “오 주여, 왜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하며 외쳤습니다. 조용히 속으로 우는소리가 무리를 뒤덮었습니다. 다른 한국 이방인들이 울듯이 “아이고, 아이고”하며 울지 않고 그 큰 슬픔의 표현을 깊은 속울음으로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희망을 담은 찬송가 “In the Sweet Bye and Bye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함께 있던 우리 외국인들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그 행렬은 봄날 햇볕 아래 푸른 잔디가 자라나는 아름다운 골짜기를 지나고, 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기름진 전답과 푸른 산의 전경을 바라보면서, 언덕을 넘어 진행하였습니다. 거기, 동쪽 언덕이 바라보이는 곳에, 그들은 두 소년의 관을 나란히 양옆에 있도록 내렸습니다. 어느 한국인 여자가 그 곳에는 일인 첩자가 와 있어 결과가 어떻게 될거라는 것을 알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태극기를 가슴에서 꺼내어 그가 죽어 가면서도 조국에 맹세하고 하나님을 믿음을 간증했던 그 소년의 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충고를 받자 이 여인은, “그들은 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일을 이 소년에게 했습니다.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할 방법도 이제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이것을 원할거라고 믿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서명:*** ***

    305 에드나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21발신자: 에드나수신자: 가족들에게가족들로부터 한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하던 차에|| 뱅쿠버에서 편지 한 통이 토요일에 일본으로 왔다고 하니 오늘이나 내일쯤이면 그 편지를 받아 볼 것 같아요.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긴장 속에 있어요. 교회 지도자들은 거의 일년에서 삼년까지 감옥살이를 언도받았고|| 나와 함께 배를 타고 물을 건너온 선교사들은 육개월을 언도 받고 복역 중이랍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에 관여되어 있어요.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많이 관여되어 있다고 하지만 다른 한국인들 쪽에서 더 많은 폭력이 있었을 거라고 봐요. 그런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비기독교인들은 풀려나오고 있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형을 언도받고 있어요. 매일 일본과 한국 신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 기사가 게제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떠나가기를 원하고 있으나|| 그들이 강제로 몰아내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떠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번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이 소요에 대해 우리 선교사들을 비난하고 있어요. 일본 신문은 우리가 한국인들이 우리를 좋아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많은 돈을 섰다는 것이며|| 그런 목적으로 쓸 돈이 아주 많다는 것이에요. 그들은 저를 매우 피곤하게 만들고 있어요. 한달만에 170||000 명이 구속되었고 적어도 2||000명의 한국인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무장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어요. 아무 무장도 하지 않고 폭력이라고는 전혀 쓰지도 아니하면서 단지 독립만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총을 쏘아 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중세에 스페인이 하던 행위를 그대로 이 곳에다 옮겨 놓은 듯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피를 끓게 합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우리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어요. 이미 많은 아스파라가스와 배추|| 대황이 있어요. 피어 있는 꽃을 보니까 복숭아|| 호도|| 살구|| 버찌|| 사과|| 배 그리고 딸기가 많이 열릴 것 같아요. 올 해에는 어쨋든 많은 과일과 채소를 수확할 것 같습니다. 올해가 지나면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될지 저는 모르겠어요. 어쨋든 우리는 현재 우유와 과일|| 전기 같은 것이 다 떨어질 때까지는 즐겁게 살 것입니다. 공부는 여느 때처럼 진행되고 있고 우리도 또한 잘 있습니다. 우리 숙소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한 번은 아파 고생을 했거나 아니면 지금도 아픈 사람이 있는데|| 우리들은 아직은 괜찮답니다. 포네임스는 베이스 음자리표를 연습중에 있기에 그녀는 곧 찬송가를 연주할 수가 있을 것 이예요. 강시(Kangsi)는 예전처럼 요리를 한답니다. 우리 가족이 이 곳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가 있다면 좋겠어요. 이 곳에서는 때가 불확실한 시기여서 모든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편지를 쓰는 것조차도 매우 어렵답니다. 앉아서 보는 것조차도 어려워요.가족들로부터 온 편지를 곧 받게 될 것 같으니까|| 여기서 잠시 안녕을 고하고 내일 다시 이 편지를 부치도록 할께요. 우리 둘 다 함께 우리의 큰사랑을 전합니다. 이번 여름에는 가족들과 함께 리덴드에서 함께 보낼 수가 있으면 좋겠어요. 에드나로부터||추신: 4월 23일|| 현재 편지를 못 받았기 때문에 이 편지를 먼저 보냅니다. 편지가 오면 정말 좋겠어요. 저의 사랑을 전하며|| 에드나 씀.

    306 한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증언. 직접 목격한 미국인 선교사가 윌슨 대통령과 미 정부에 보냄.

    발신일: 1919-04-18수신자: 윌슨 대통령대통령 각하: 워싱턴 D.C. 각하 :제가 미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각하와 미국 정부 앞에 한국 문제를 상정해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고난 속에 있던 유럽 지역의 국민들에게만 유일하게 적용되었던 그 원칙, 곧 당신께서 그토록 옹호하시는 자국의 일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 주의의 원리에 입각해 볼 때, 파리 평화 회담은 한국 문제에 관한한 적용되고 있지 아니하다고 봅니다. 이 원칙을 담은 기록의 진실성이 의문스럽습니다. 최근의 전보에 의하면, 도움을 요청하는 한국의 요청을 들어주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기는 합니다. 그러나 파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대통령 각하와 미국 시민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그토록 평화를 사랑하기에 오늘 날 한국인들처럼 혹독하게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라는 자동차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최근에 출판된 지난 3월 3일자 각하의 편지에 필리핀 선교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화 회담에서 논의한 사안들 중에는 중요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비록 비중이 작게 여겨진다 해도, 제정에 따르는 위험 요소를 줄이면서, 약한 국민이 가야할 길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저는 이 말이 한국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한국의 현정세저는 극동지역에서 여러 해를 살아 보았고 또 한국인과 일본인과도 함께 일을 해 왔습니다. 양쪽 나라의 말도 합니다. 독립운동이 일고 있는 시기에 한국에서 살고 있고, 한국인을 보며 그들과 말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살면서 저는 현재 제가 한국의 실제 모습을 잘 아는 입장에 서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이 독립운동은 한국의 모든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 이 운동이 끝날 것 같은 기미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예상치 않았던 방법으로 독립 운동을 하는 기술과 용기와 조직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저는 놀라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에서의 일본의 군사 통치는, 그들이 다스려야 할 적당한 이유나 정의로움도 없이, 잔인하고 포악한 통치일 뿐이라는 것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실을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 관리들(하급 관리)과 군인들은 평화로운 혁명이라는 이 독특한 상황에서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다루어야 할 터인데도, 마치 법도 없는 야만인들처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찰과 군인들은 늙은이와 어린아이들까지 잡아다가 잔인하게 때리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평화롭고 순수한 열정으로 일본이 엄숙하게 약속한 독립을 외친 이들은, 단지 소리를 외치고 종이로 만든 한국의 국기를 들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열 살 난 어린 여자아이들과 일반 여성들, 그리고 학교에 다니는 어린 여학생들까지, 그 모습을 묘사하기에도 참으로 부끄러운 상태로 몸을 드러내 놓도록 강요했고, 신체적인 고통과 체벌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미국인들이 목격한 야만적 행동이는 3월 한 달 동안 한 두 사람만이 아니라 수 십 명의 선교사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보고 증언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약에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분명히 압제 아래 있는 이 백성들의 고통스런 외침을 귀담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세계가 이 사실을 알까 두려워 모든 수단을 다해서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많은 편지들을 보내 온 어느 도시로부터 한 가지 소식이 이제 막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선교사들이 진실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고서는 출국 절차를 제대로 밟아 주지 않고 있다는 보고서인 것입니다. 미국인 선교사 한 사람이 이곳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다음의 것들은 저의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한 것들입니다.1. 일본 군인들이 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들을 잔인하게 때려 눕혔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구속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야만적인 속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2. 군인들은 멈추어 서서 여학생들과 일반 여성들만 있는 군중들을 겨냥하여, 단지 “만세”를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발포하였습니다.3. 열 살 난 어린 소년의 등에 총을 쏘았습니다.4. 몇 명의 일본 군인들이, 저항을 할 수도 없는 육십 오 세의 노인을, 밟고 차고 때려 걸어 다니지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5. 아무 소리도 외치지 않고 조용히 그들의 길을 가고 있던 약 이십 명 정도의 여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인이 뒤에서 쫓아 달려와 창으로 공격하고 발로 차서 포학 무도한 광경을 보는 자로 하여금 피가 끓게 하였으며,6. 일본의 소방대원들은 긴 쇠갈쿠리를 가지고 남녀와 어린 아이를 추격하며,7. 한 한국인 의원(醫院)에서는 마목증(痲木症)[근육이 굳고 감각이 없어지는 병으로 문둥병 증세 등]으로 앓는 병자를 쇠갈쿠리로 그 머리를 때려 부쉈으며,8. 중상을 입어 거의 죽어가는 남녀를 창으로 등을 맹렬히 치고 찌르며,9. 한인 두 명이 중상하여 행동도 못하는 것을 판차(板車)에 묶어 실어 옥중으로 끌어가며,10. 한국인 약 백 명이 전신의 옷이 다 찢기고 온 몸둥이가 피투성이로 더럽혀진 것을 밧줄로 단단히 묶어 옥에 투입하였으며,11. 운동에 참여도 아니하고 방관하는 자도 일병에게 난타를 당하였으며,12. 미국인 선교사는 자기 집에서 밖을 내다보며 구경하다가 또한 붙잡혀 갔으며,13. 부녀자들을 창으로 때려 눕히고 구렁창에 발길로 차서 쳐넣습니다.이러한 일들과 그 외의 많은 일들은 제가 제 눈으로 본 것입니다. 다른 외국인들도 비슷한, 혹은 더 심한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일본 대표가 지금 평화회의에 있으면서도 인도·정의와 종족의 평등을 담론하고 있는데도 한국에 이러한 공포정치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인간애, 정의, 평등의 말뜻을 모릅니다. 경찰서와 감옥에서 행해지는 고문과 처벌은 훨씬 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나무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려 구타당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잔인한 처벌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들은 폭동도 하지 않으며, 체포에 거역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위험한 무기 때문도 아닙니다. 한국인들은 그런 무기를 휴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저 독립을 위한 자신들의 소망을 소리 내어 외치고 종이로 만든 깃발을 흔들 뿐입니다. 일본인과 한국인 밀정일본인들은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책략과 음모를 밝혀내려고 한 결과, 그들은 심지어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발기했으며 이를 믿는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일본인의 정탐들은 한복을 입고 한국인들이 회집하는 곳에 잠입해 들어갑니다. 일본인들은 또한 한국인의 밀정들을 외국인들의 집에 들여보내려 합니다. 그들을 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일본인들은 미국 선교사들의 집을 수색하고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을 알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내가 머무르고 있던 집에서 요리사와 한국인 서기를 잡아다가 그들을 구타하면서 온갖 질문을 다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최근에 잘못을 저질러서 해고된 이들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들을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한 마을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우리 일행은 기차역에서부터 어느 한국인에게 미행을 당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 사람은 마을 최고의 정탐”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런 정탐들을 미워합니다. 당연히 정탐이 되려면 정보를 가져다주어야 하는데, 정탐들은 가져다 줄 정보가 없으면 정보를 종종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체포되어 피를 흘릴 때까지 잔인하게 구타당했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일반적인 원칙대로 재판이 이루어지기 전에 자주 사람들을 구타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체포한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힘을 보여주기에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증오와 미래의 불화를 가져올 씨앗은 넓게 뿌려졌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심한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는 이번 시위가 일어나는 동안 여러 지역을 방문했는데, 어디서건 비슷하게 잔인한 군국주의적 무법이 횡행했습니다. 한국인 목사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우리를 소나 돼지처럼 구타하지만, 우리는 인간입니다.” 한국인들은 오직 평화적인 수단에만 의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시위를 시작했지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심하게 다루고 자극한 결과로 현재(4월 1일) 한국인들은 거칠고 무모해졌습니다.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모릅니다. 현재의 상황이 절대로 이대로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폭동이 몇 안 되는 성급한 불평분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합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믿기가 쉽지만 말입니다. 이는 압제에 시달리던 18,000,000명의 사람들이 이 불행한 땅에 일본 정부가 강제한 전제적이고 억압적인 군국 통치의 방식에 저항하는 심사숙고한 움직임인 것입니다.” 이번 사태에 대한 우리의 의견에 기반한 정보가 선교사들, 즉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에게 허용된 설교에서는 한 국가의 정치적 측면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근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유럽인 체류자들의 숫자가 적고 군국주의의 검열체계가 강요되며 지긋지긋한 스파이 시스템이 있으며 무력한 대중들을 종속시키기 위해 기능하는 어두운 힘이 누손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공식 조사가 엄격합니다. 이 모든 요소들로 인해, 우리는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정치적 발언을 금지 당했으므로 대중이 실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길을 선교사들에게서 찾아야만 하거나 혹은 선교사들만이 이러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나라에서는 양심 때문에라도 침묵을 지킬 수가 없으며 침묵은 같은 하느님의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와도 부합되지 않습니다.자유롭게 태어나고 자유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한국인들이 시달리고 있는 이 수많은 명백한 부자유와 잔혹함이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발은, 선교사들이 폭로한 것의 절반만이 사실이라 해도 철저히 증명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것의 절반밖에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혹한 폭력행위의 대부분은 알려질 수도 없습니다. 저는 여기에 한국의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온 편지를 동봉합니다. 인간애와 압제받는 이들이라는 대의에 입각해 귀하께서 이를 널리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존경을 담아

    307 일본군|| 한국 교회와 학교에 방화

    다음은 한국에 사는 한 외국인이 보낸 편지를 요약한 것이다. 최근에 받은 전보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정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이 편지는 1919년 4월에 보내 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서운 시기에 이 나라 안에서 일본 군인들이 독립을 위하여 시위를 벌이던 이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 기술된 믿을만한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 일본측 발표에는 언제나 한국인들이 폭력을 썼거나 쓰려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 발표는 사실과는 다르다. 최소한 시위를 시작하던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몇몇 경우에는 이 백성들이 군대의 포악한 힘을 더 이상 인내할 수가 없어, 그들에게 맞서기도 하였다. 일본은 전신 내용까지도 그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변경하여 전달하였다. 예를 들면, ‘한국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산에 있는 굴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전갈이 있자, 군인들이 나와서 그들에게 총을 쏘았다.’ 라는 글이 있으면, “돌멩이를 던지며”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일본의 기사는 신뢰할만한 사람의 보명이 없이는 믿을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의 집과 교회가 군인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주된 대상이었다. 삼 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소속 교인중 몇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의주의 방산에 있는 교회가 불타버렸다. (다른 외국인의 기사에 의하면 그의 지역 내에서만 열 다섯 채의 교회가 부서졌다고 한다.) 이 교회의 관리장의 집도 역시 불탔다. 이 방화에 따라 한국인 몇 사람이 총에 맞았다. Bexton의 집도 역시 불탔다. 이웃 구역인 Samhadan에 있는 교회도 불이 났으나, 지붕이 기와인 탓에 전소되지는 않았다. 군인들이 떠난 사이에 교인들이 불을껏던 것이다. 오산 학교의 화재 사건에 관한 증언“삼월 칠일날, 군인들이 오산 학교에 진입하여 문을 부수고 들어와 창문을 깨뜨렸다. 이 학교는 온전히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십일. 헌병들과 도지사(Magistrate)의 일인 비서를 포함한 지역 군 관리들이 학교에 들어와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인 교사의 환송 선물을 사기 위해 40 엔을 요구했다. 학교측은 그에게 충분히 대접을 하였으므로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오르간과 화학 기구들을 끌어내다가 팔아 그 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십팔일. 헌병들이 들어와 난로와 책상, 의자 그리고 책장까지 끌어갔다. 이십 오일. 헌병이 와서 깨지지도 않은 유리 창문을 떼어 갔다. 그들은 또한 건물 지붕의 기와까지도 많이 빼내어 실어 갔다.이십 팔일. 헌병들이 다시 들어왔다. 종탑을 헐어 내리더니 종을 부셨다. 종은 학교와 조금 떨어져 있는 교회를 위해 사용되었었다. 사월 이일 밤. 학교와 교회 건물이 불탔다. 아무도 방화자를 목격하지 못했지만, 그 배후가 어디인지 물어서 무엇하랴?”

    308 한국에서의 일본군의 만행(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으로부터 온 편지)

    발신일: 1919-04-14한국에서 보내온 이 기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일본군은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해서 쓰여져 있다. 일본 신문에 군인들의 행동에 대해서 기사가 날 때마다, 그 기사는 언제나 한국인들이 폭력을 행사했거나 쓰려 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기사는 거짓이다. 최소한 이 운동의 처음 시작되던 과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몇 몇 경우에는 군인들과 그들의 방화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까지 간 것을 본다. 몇 사람은 다치고 건물들은 무너졌다. 전보내용까지도 군인들의 폭력행사에 대해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조작하였다. 예를 들면, 전보 내용에 어느 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한국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내려올 때, 군인들이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내용을 전신으로 보낼 때, “돌멩이를 던지면서”라는 말을 “언덕을 내려오면서”라는 말 뒤에다 덧붙이는 것이다. 일본 측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기사도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보증을 받지 아니하면 신뢰할 수가 없다.“한국인들이 무력을 쓰거나 폭력을 행사했다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일본이 그렇게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무력이나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다.“기독교인들과 그들의 집과 교회가 특히 폭력행사의 대상이었다. 3마일 떨어진 곳에서 몇 명의 교인들이 운동에 참여했다가 헌병대에 끌려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소유물이 불탄 것이다. 특히 기억해 두어야 할 사항은, 한국인들은 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면서 외진 한쪽 구석에서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경찰서나 헌병대 앞에서 아니면 면사무소 같은 공공시설 앞에서 행했던 것이다. 이들은 먼저 일본에게 그리고 전 세계에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 같은 외침 때문에 방산 교회가 불탔고, 그 교회의 관리장의 집과 곡식을 비롯해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이 다 불타버린 것이다. 이 관리장은 일본군이 그를 쫓고 있고 사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군인들이 오자 그는 언덕으로 달아났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군인들은 그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두 채의 건물이 불타는 과정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사고로 총에 맞았다. 이 교회 근처에 있는, 윤봉에 있는 다른 교회도 역시 불탔다. 이 교회에 근무하는 교회지기의 집도 불탔고 그가 모아놓은 목재더미 역시 불탔다. 교회지기가 소유한 모든 것이 사라졌고 그는 빈손으로 남았다. 삼하단에 있는 다음 교회는 문과 창문이 부서지고 교회 안의 가구가 다 망가졌으며 역시 불이 붙었다. 그러나 지붕이 초가가 아니라 기와였으므로 교인들은 교회가 피해를 많이 입기 전에 불을 끌 수 있었다. 군인들은 이미 떠났다.전국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내가 들은 중 가장 잔혹하고 살벌한 이야기는 청주에서 일어났다는 일이다. 이곳에서는 처음에 계획되었던 시위가 초기에 좌절되었고 그 교회의 목사는 거의 곤죽이 될 만큼 구타당했다. 그러나 무엇도 사람들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고 장날이 되어 애국 시위가 일어났다.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같은 시위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죽음의 불길이었다. 근처 언덕에서 죽은 6명을 제외하고도 51명 혹은 52명의 사람들이 그날 즉사했다. 그 몇 배의 사람들이 다쳤고 그 중 20명 이상이(어느 보고서에서는 60명이라고 한다) 어제까지 추가로 사망했다. 일본 적십자의 친절함을 보고자 한다면, 여기 다음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부상자 중 누구도 다른 마을의 병원으로 치료받으러 가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청주에는 유명한 외과의사가 한 사람 있었는데, 한국인으로 서울의 국립병원에서 수학한 사람이었다. 그의 병원은 당장 환자로 가득 찼다. 그 의사는 군인들이 병원으로 들어섰을 때 총알을 꺼내고 상처를 봉합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그 의사를 심하게 구타하고 문과 창문을 부수고 약품을 내던지고 수술도구를 망가뜨려버렸다. 그 의사는 그 도시에서 추방되어졌고, 그 지역에는 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어 치료받기 위해 병원을 찾은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죽음을 기다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정보는 한국인들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확실하고 믿을만한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실상은 위에서 이야기 한 것보다 더 끔찍할 것이다.

    309 한국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만행

    특별 통신이 편지는 “한국의 어느 곳”에서 4월 14일에 보내온 것이다. 최근 한 외국인으로부터 받은 믿을만한 소식으로 일본군이 무방비 상태의 한국인들에게 가한 무서운 만행이 적혀 있다.“내가 언급한 이러한 일들은 한국내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보고는 확인이 되었으며 신뢰할 만하다. 실제 상황은 여기에 서술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참혹하고 피에 굶주린 듯한 만행 중에 하나가 정주에서 일어났다. (이 사실에 대한 간략한 기사는 지난 주 로이터통신에 의해 기사화되었다.) 여기에서는 첫번째 시위에서 싹부터 잘린 형편이 되고 말았다. 한국인 성직자들은 군인들에게 얻어맞아 피바다가 되었다. 아무것도 시위자들의 위세를 억누르지 못했다. 이들은 애국적인 운동을 시행하기 위해서 장날을 택했다. 그러나, 이들은 즐거운 축제를 위해 거리로 걸어 나오면서 단지 ‘대한 독립 만세’ 만을 외쳤을 뿐이지만, 이들을 맞이했던 것은 죽음의 총성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중 51명의 한국인이 죽었고, 가까운 산에서 6명이 더 죽었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들 중에서 20여 명이 넘게 그 부상으로 인해 죽어 갔다. 일본은 부상자들이 다른 어느 병원으로도 후송되는 것을 막았다. 정주에는 한국인 의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국립 대학 병원에서 공부하고 수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응급처치를 하며 총탄을 빼고 상처를 치료하느라고 바빴다. 그런데 일본군이 이 병원에 들이닥치더니 그를 심하게 때리고, 문과 창문을 때려 부쉈다. 또 그가 사용하던 약들을 내던져 버리고, 사용하던 의료 기구들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도움의 손길이 끊어진 이 부상자들에게 집으로 돌아 가 죽으라고 하였다.이러한 혹독한 핍박을 받는 주된 대상자는 기독교인들이었다. 교회와 학교 그리고 성직자들의 집들이 군인들에 의해서 불타 무너지고 있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무법 천지로 활개치는 일본군한국에서 4월 14일 송고된 기사: “경찰과 군인들이 집집마다 들어 가, 온 집안을 뒤지고 다녔다.”다른 도시에서 온 기사도 위와 거의 유사함:참혹한 만행“일본군은 한국인의 집에 가가호호하며 수색을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집안에 있던 여자들이 거의 안전하지 못하였다.”일본 편년사 4월 11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림2“의회의 지난 회기 중에 어느 의원이 행한 기록 수정 과정에서, 한국에서 상류층의 어느 검찰관 한 사람이 진술한 한 보고서의 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였다. “헌병들이 한국인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것은 예사이다. 그들은 들어와서 부녀자들을 욕보이고, 그들의 기호에 맞는 것들이 있으면 찾아내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이런 만행을 당한 한국인들은 이것을 시정하거나 보상받을 길이 전혀 없다. 당국에서는 이러한 일을 저지른 자들을 처벌하는 일을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당국은 오히려 헌병들이 행한 범죄에 대해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주며 두둔하였다.”

    310 정주 교회의 화재

    4월 8일, 정주시에 새로이 지은 큰 교회에 헌병들이 들어왔다. 군인들은 침대의 매트를 비롯한 다른 가구들을 함께 한 곳에 모으더니 거기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또 그 불을 껐다. (교인들은 이 교회를 짓기 위하여 필요한 노동과 재원을 마련하는데 온 힘을 다 했었다.) 4월 9일, 전날(8일) 밤과 마찬가지로 연단 주위에 불에 탈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쌓아 놓고 나서 불을 질렀다. 집사가 종을 울렸다. 그러자 몇 사람의 교인들이 뛰어 나와 불을 껐다. 다음날 아침, 경찰은 교회에 가까이 사는 교인들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교회에 방화를 하기 위한 전제 조치였다! 4월 10일, 교회 주위에 불에 탈 수 있는 것들을 쌓아 놓고 석탄 기름을 뿌리고 나더니 그 위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또 교회 종까지 울렸다. 아무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고 교회는 불에 타 무너졌다. 4월 11일, 목사의 아내와 교회 관계자들이 불려가 교회 화재에 대해 책임을 추궁당했다. 그들은 또한 한 수 가르치기를, “너희 기독교인들이란 자들은 얼마나 천하고 비열한 불한당들인가, 교회가 불타고 있는데도 아무도 나와 불을 끄려고 하지를 않았다”며 호되게 나무랐다. (사실은 누구든지 밤에 길을 가는 사람은 잡혀서 심하게 얻어맞거나 벌을 받는다.) 일본 신문에는 이 방화에 대해서 말하기를,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교회 지도자들에게 불만이 있는 교인들이 방화를 하였다고 뒤집어 씌웠다. 이들의 작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