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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41 게이조 미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21발신자: E. 갈루아(E. Gallois)발신주소: 서울, 프랑스 부영사(副領事)게이조 미포(Keijo Mippo) 편집자께,귀하께서 다음 수정 내용을 신문에 실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것은 귀하의 신문사 대표 가운데 한 분과 제가 19일날 인터뷰한 내용에 포함되었던 것입니다.귀사의 기자들이 귀사 신문의 독자들로 하여금 제가 한국 국내 문제에만 관계되는 질문에 관해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생각하게끔 할 수 있는 발언을 제가 한 것처럼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런 문제는 간접적으로도 언급하기를 피하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안입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제가 외국 영사로서 취해야 할 엄격한 중립성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현재 일본에 파견된 프랑스 대사에 대해 제 의견을 말한 것 외에는 어떤 정치적 문제도 논의하지 않았습니다.미리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배상(拜上)E. 갈루아(E. Gallois)타당한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이같이 경솔한 행동은 유치한 책략입니다.프랑스 영사 E. 갈루아(E. Gallois)왕실의 장례식 날 이래로 저는 감기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따라서 현재의 사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특정 국가의 건물과 병원, 교회 수색에 대한 보고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수색의 결과로 몇 가지 중요한 것이 발견되었다는 성명이 발표되었으며, 이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현재의 소동은 유치한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과거의 한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한국은 합병 이래로 큰 혜택을 입었고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국부(國富)도 크게 증대되었습니다. 저는 폭도들이 좋지 못한 꿈에서 깨어 타당한 일을 다시 시작할 것을 심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현재 독립이 논의되고 있으나, 실제적인 힘이 전혀 없는 독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소동이 시작될 때 불량한 한국인들이 영사관으로 몰려와서 내게 만세를 외치라고 했습니다. 나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음을 지적하고 거절하자 그들은 모두 나갔습니다.

    242 순천(Syunchun) 지역의 ‘동요’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간단한 기술(記述)

    우리가 소식을 들은 교회보다 소식을 듣지 못한 교회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이 보고서는 완벽하지 못하지만 이 보고서는 단순히 ‘소문’을 규합한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자산우리는 최소한 여덟 군데 교회에 불이 난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중 한 경우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불을 껐지만 나머지는 건물이 전소(全燒)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티웅주(Tyungju)이 교회는 8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교회로 1917년에 착공하여 1918년 여름에 완공되었다. 오늘날 이 교회를 짓는다면 8, 9천 엔의 경비가 소요될 것이다. 교회를 불태우려는 시도는 세 번 가해졌으며, 앞서 두 번은 한국인들이 와서 불을 껐지만 세 번째에는 일본인들이 며칠 밤을 ‘지키며’ 한국인들이 건물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 교회 여러 곳에 가연성 물질을 쌓고 불을 붙였으며, 한꺼번에 불을 지름으로써 불길이 완전히 진행될 때까지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나서 전체가 불길에 휩쓸리게 되었을 때 일본인들이 자리를 떴지만, 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사실상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쫓겨나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 수도 매우 적었다. 건물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일본인 소방수들과 민간인들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 교회에 불을 지르려고 두 번 시도한 뒤에 한국인들은 그 건물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쫓겨나 버렸다. 불이 난 다음날 (그 전에 이미 감옥에 갇힌) 목사의 아내와 집사, 교회지기가 체포되었고, 교회에 불을 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들은 감옥에 사흘 동안 갇혀 있었으며, 구타를 당했고, 교회에 불을 냈으니 마을에 번진 다른 화재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건을 보고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한 짓을 위장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은 1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혹은 총상이나 구타로 죽은 바로 그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며, 같은 군내에서 군인들은 움직일 수 있는 물건들을 다 꺼낸 뒤 또 다른 교회와 학교를 불태웠던 일도 있었다.오산(Osan)이곳에서는 약 5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 건물과 150명의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 건물이 같은 날 밤 전소(全燒)했다. 교회는 1915년에 지어진 것이고, 학교 건물은 1917년 세워진 건물이었다. 이 두 건물을 세우는 데는 약 1만 엔은 족히 들었을 것이다. 3월 1일부터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모이는 것이 금지되었고,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쫓겨나서 매를 맞았다. 일본군들은 이 두 건물에 불을 내기 며칠 전 손수레로 바닥에 깔려 있던 돗자리와 난로, 벤치, 오르간, 학교의 과학 기자재 등을 꺼내서 군청 소재지로 보냈다고 하는데, 내가 듣기로는 그곳에서 공립학교와 철도역, 경찰서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군들은 또 건물을 불태우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 종을 깨고 문과 창문 그리고 학교 물건들을 깼다. 그 건물에 불을 지르는 사람을 본 사람은 없지만 모두들 군청 소재지에서 온 일본인이 그랬다고 확신하고 있다.곽산(Kwaksan)오늘 일본 신문에서는 1만 엔 규모의 이 공장 화재를 보도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지 못하다.의주 가산 주동(Euiju Kasan Chudong)3월 28일 이웃 지역에서 약 1천 명의 사람들이 가산(Kawan) 군청 소재지의 옥강 헌병대(Ok Kang Gendarmes)로 와서 유니폼을 입은 여섯 명의 한국인 경찰관들의 옷을 벗기고는 다시는 그 유니폼을 입지 않겠다는 내용의 성명서에 억지로 서명을 하게 했다.4월 5일 의주골(Euiju Kol)에서 세 명의 한국인 경찰들과 약 20명의 군인들이 가산 주동(Kasan Chudong)으로 와서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때려부수었다. 한 파견군대는 교회로 가서 교회 건물과 인접 건물을 모두 불태우고, 보관되어 있던 3백 묶음의 관목 더미도 모두 불태웠다. 가재 도구조차도 꺼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근처에 있던 소 두 마리는 총에 맞았다.방산(Pang San)4월 4일 같은 군내에 있는 방산(Pang San) 교회는 인근의 집과 함께 불에 탔다.소욱고(Syouk Kou)4월 2일과 3일 소욱고(Syouk Kou)의 고가(古家) 한 채가 쌓여 있던 곡물 70포대와 함께 불에 탔다.삼하동(Sam Hadong)4월 6일 일요일 오가마동(Okamaadong) 교회는 문이 부서진 뒤 불이 났으나 곧 불길이 잡혀 피해는 거의 없었다.장평(Chang Pyung)북동(Pukdong)군에 있는 교회에 불이 났다.삭주(Sakju)이 교회는 약 6천 엔 상당의 건물이다. 이 교회에도 불이 났다. 이 교회는 지난해에 완공된 새 건물이다.기독교인들에 대한 대우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보다 기독교인들에게 더 철저한 조사를 벌인 사례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으며, 기독교 신자임을 인정하는 즉시 구타를 당했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어느 곳에서는 사람들이 체포되어 모두 재판을 받았지만 기독교인들은 구타를 당하고 밧줄에 묶였다고 한다. 어떤 젊은 남자는 어느 마을을 그냥 지나치다가 지방 철도가 더 이상 가지 않아서 내려서 급행 열차를 기다리게 되었다. 기다리던 중에 그 남자는 조사를 받게 되었고, 그 남자가 기독교인일 뿐 아니라 조수(헬퍼)라는 것이 밝혀지자 구타를 당하고 경찰서로 끌려가 이틀 동안 구금을 당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이 남자는 심한 구타를 당한 나머지 얼굴이 부풀어오르고 며칠 동안 음식을 먹기 위해 입을 벌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 선교사가 그를 본 일이 있었는데, 그가 풀려나고 이틀 뒤에 그 선교사는 그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거의 알아보지도 못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처럼 구타를 당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오. 가장 심한 경우는 목사들과 조수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특히 심한 일을 당한 사제들 가운데 한 사람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본인들은 이 젊은 사제의 성경을 찢고는 찬송을 하고 불경스러운 기도를 올림으로써 그와 그의 종교를 비웃었다고 한다.기독교인들이 많은 어느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예전의 교회를 허물고 새로 큰 교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새 교회를 막 완공하려는 찰나 경찰들과 군인들이 한밤중에 몰려와서는 52명의 사람들을 체포했다. 교회 관리자들과 학교 교사들, 목수, 벽돌공들이 모두 잡혀갔는데, 이 사람들이 한 일이라곤 ‘만세’를 외친 것뿐이었다. 교인들이 예전 건물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완공하기도 전에 군인들이 와서 전등을 부수고 출석부를 가져갔으며, 교회 회계 장부도 없앴다고 한다.병원우리 선천(Syunchun) 병원에 들어온 사상자는 27명이었는데, 그 중 죽은 사람은 한 명이다. 이 사람은 병원에 오기는 했지만 무슨 치료를 받기도 전에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이들 27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서너 명뿐이었다. 여러 사람이 일본인들이 교인들을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증언을 했다. 심한 총상을 입은 한 사람은 철도역까지 왔지만 헌병대가 승차권을 구입하지 못하게 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는 가마를 타고 다음 철도역까지 가서 기차를 탔고, 결국 아주 탈진한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다. 다른 사람들은 선천(Syunchun)에 다른 볼 일이 있다고 경찰에 거짓말을 하고 우리에게 온 사람들이었다. 물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는지를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한 장소에서도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은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볼 때 상당수가 그랬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곳에 도착해서 지역 경찰에게 잡혀 오전 10시 20분부터 오후 5시까지 감금되어 있었다. 그는 미국인 병원에 가지 말고 일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라는 설득을 여러 차례 당했지만 우리에게 왔다.통계한두 명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사제는 열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열다섯 명의 사제가 몸을 피했고, 열 명은 아직 봉직중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일곱 명의 조수들이 감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열네 명이 몸을 피했고, 다섯 명은 순회중이며, 세 명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243 병원에서 부상자를 이동시키는 것에 대한 성명

    작성처: 회장 O. R. 애비슨(O. R. Avison) 박사4월 10일 오전 이노우에(Einouye)라는 헌병 하사관이 사무실에 와서 우리 병원에 있는 특정한 부상자들을 경찰에서 조사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그러고는 조사를 위해 그 사람들을 야마도 마치(Yamado Machi) 헌병대 사무실로 보내라고 했다. 이 요청을 보고 받은 애비슨(Avison) 박사는 환자들의 이동 문제는 루드로우(Ludlow) 박사가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사람들을 이송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병원에서 조사를 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조사를 따로 수행할 수 있도록 개인 사무실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조사를 위해 한 사람당 약 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오후에 헌병대 하사관 H. 나가세(H. Nagase)가 아홉 명의 헌병들과 함께 병원에 와서 자신의 신분증과 조사 받을 일곱 사람의 명단을 제시했다. 환자를 병실에서 조사실로 옮겨도 괜찮을지를 결정하기 위해 루드로우(Ludlow) 박사가 호출되었다. 이동이 가능한 사람들은 그 방에서 조사를 받고, 나머지는 병실에서 그대로 조사를 받았다. 조사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나서 오후 5시 30분 경에 모두 마칠 수 있었다.나가세(Nagase) 하사는 후속 조사를 위해 다섯 사람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면서 우리가 환자가 퇴원하기 24시간 전에 경찰서에 보고를 해준다는 조건으로 두 사람은 우리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애비슨(Avison) 박사는 루드로우(Ludlow) 박사를 불러서 이 환자들을 이동시켜도 괜찮을지를 물었다. 루드로우(Ludlow) 박사는 그들 모두 아직 치료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지금 병원에서 옮겨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관은 경찰서에도 처치를 하고 치료를 해줄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루드로우(Ludlow) 박사는 특히 그 다섯 사람 가운데 세 명의 이송에 대해 반대를 했고, 그들은 그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을 남겨 두기로 동의했다. 더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또 한 사람을 병원에 두기로 하고, 다음 세 사람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염명석(Yum Myung-suk) 배와 팔에 총상(銃傷)송영복(Song Yung-pok) 얼굴에 총상(銃傷), 총알을 빼냄.이명귀(Yi Myung-keui) 사타구니와 허벅지에 총상(銃傷)환자들이 퇴원할 준비가 되면 24시간 전에 미리 경찰서에 알리라는 지시와 함께 네 사람은 병원장인 에스테브(Esteb) 여사의 책임하에 남았다. 남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이개동(Yi Kai-dong)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무릎에 총상(銃傷)강용예(Kang Yong-ye) 오른쪽 허벅지가 총상(銃傷)으로 상당 부분 잘려 나감.김일함(Kim Il-ham) 양쪽 허벅지와 볼에 총상(銃傷)류순명(Ryoo Soon-myung) 양쪽 허벅지에 총상(銃傷)두 명의 일본인과 두 명의 한국인 경찰관이 서른다섯 명의 소녀들을 감시했다. 우리는 쳐다보거나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일어서거나 자세를 바꿀 수 없었다. 밤 12시까지 마흔다섯 명의 죄수들이 같은 방에 있었다. 자정이 되자 우리에게 음식과 물을 주고는 먼지가 뒤덮인 널빤지 바닥에 누워도 좋다고 했다. 이곳에서 나는 사흘 동안 연속으로 조사를 받았고, 조사받을 때마다 경찰관이 바뀌었으므로 나는 같은 이야기를 매일 되풀이했다. 둘째날에는 첫째날처럼 많이 맞지는 않았다. 경찰관도 첫째날 나를 조사했던 사람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다. 질문은 첫째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의 내용이었다. 첫째날의 조사 기록이 바로 경관 앞에 놓여 있었다. 첫째날부터 매일 조사에는 비서와 한국인 통역이 자리했다. 첫 조사에서 나는 일본어를 말할 줄 모른다고 했다. 예비 조사가 끝난 뒤 그 경관은 “너는 비도덕적인 삶을 살았지?”라고 물었다.“우리가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걸 물으시는 건가요?”그가 말했다. “체포된 너희들은 모두 처녀가 아니잖아.”나는 “우리는 모두 처녀입니다. 약혼도 하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했다.그는 “너희 부모는 너를 결혼시키지 않았지만 너희는 모두 짐승이야”라고 말했다.“너희들은 지금 모두들 임신하고 있잖아.”나는 “그럼 지금 배를 갈라 보세요”라고 응수했다.그는 “우리가 지금 네 배를 열어 본다고 해도 우리는 알 수가 없어. 의사만 알 수 있지. 어쨌든 네가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기고 있으니, 성경에서는 죄 없는 사람은 옷을 벗고 모든 사람들 앞에 벌거벗고 나서라는 글귀가 있지. 죄 없는 사람들은 벌거벗고 살잖아(아담과 이브를 뜻함)”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경관은 내게 와서 내 옷을 벗기려고 했다. 나는 울부짖으며 항의하고 발버둥치면서 “이런 식으로 여자를 대해선 안 돼요”라고 말했다.그는 결국 단념했다.우리에 대해 이런 상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 그는 한국인 통역을 통하지 않고 엉터리 한국어로 직접 말을 했다. 한국인 통역은 경찰관이 이런 추잡스러운 말을 하는 동안 슬퍼하는 것 같았다. 한국인 통역은 나를 때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여자를 때리느니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경관은 내 어깨와 얼굴, 다리를 주먹으로 때렸다.세 번째 날에도 조사를 받았지만 맞지는 않았다. 예의 그 질문만 다시 했다. 토요일에는 나를 조사하는 경관이 세 개의 금색 채찍을 가지고 왔다. 그 경관은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더니 나를 때렸다. 하지만 첫째날처럼 심하지는 않았다.음식은 오전 10시와 오후 4시 그리고 자정에 주었다. 나는 밤에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3월 9일 일요일 오후 6시 30분 나는 다른 두 소녀와 함께 묶인 채로 서대문 교도소로 끌려갔다. 경찰관 세 명이 우리를 감시했다. 한 소녀는 사설 정부 학교에서 왔고, 다른 한 소녀는 공립 고등학교에서 왔다. 두 소녀는 울고 있었다. 우리는 쳐다보거나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한국인 운전사가 한 번은 우리까지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낙담하고 약해지지 말아라.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은 너희들 정신을 깨뜨리기 위해서 그런 것일 뿐이니까”라고 말했다. 우리는 교도소에 도착했다. 일본인 경찰관이 교도소 사무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 차 안에 앉아 있었다. 학생처럼 보이는 한국인 한 사람이 자동차 쪽으로 오더니 차에 손을 올리고는 우리에게 “힘을 내세요. 계속 죽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살아날 때가 옵니다. 신은 공정하시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사무실로 갔던 일본인 경찰관과 관리가 왔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이름과 소재지, 부모님 이름을 대고, 왜 ‘만세’를 외쳤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한 사람씩 들어갔다. 다른 두 소녀가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문 앞을 지나갈 때 나는 소녀들이 방에서 벌거벗은 채 자기 옷은 팔에 들고 머리를 내려뜨린 채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내가 불려 갔다. 일본인 경관이 내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방에는 한 일본인 관리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일본인 여자 관리 두 명이 거기 서 있었다. 그들은 내 머리를 내리고 머리핀을 빼고는 내 리본을 검사했다. 그리고 나서 내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나는 거부했다. 그들은 내게 옷을 내가 스스로 벗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한참 동안 거부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나는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한참을 지체한 뒤에 나는 억지로 옷을 벗었다. 나는 이 관리가 있는 자리에서 약 10분간 옷을 벗은 채 서 있어야 했는데 훨씬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여자들은 내 옷을 검사하고 있었다. 내 속옷을 검사하던 그 사람들은 내 속옷이 모두 외제라고 언급했다. 그러고는 내게 옷을 가지고 다른 방으로 가라고 했다. 여자 한 명이 나와 함께 갔다. 그 방은 약 1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들은 나를 재촉했다. 나는 그 방에서 나가기 전에 옷을 먼저 입고 싶었지만 그들은 나를 재촉하고 밖으로 내쫓았다. 나는 나오기 전에 치마를 몸에 대충 두르고, 나머지 옷은 팔에 들었다. 첫번째 방에서 나와서 다른 방에 갈 때까지 다섯 명의 한국인 남자 죄수들이 우리를 지나쳤고, 여러 일본인 여자 관리들이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두 명의 다른 여자 죄수들이 있는 감방으로 들어갔다. 그 두 명의 여자 죄수 가운데 한 명은 정부 고등학교에서 왔고, 다른 한 명은 숭명(Sung Meung) 학교에서 왔다. 내 번호는 2027이었다. 기상 시간은 오전 7시, 취침 시간은 오후 9시 30분이었다.한 주일 동안은 완전히 감금된 뒤에 우리는 아침 식사 후 죄수 모자를 쓰고 일본인 여자 관리의 감시하에 15분씩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음식은 콩과 기장, 미적지근한 소금물 반 그릇, 그냥 물 한 그릇이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물을 더 주지 않았다. 콩과 기장은 공 모양으로 아주 딱딱하게 되어 있었다. 화장실은 감방 구석에 있는 뚜껑 달린 상자로, 매일 아침 남자 죄수들이 꺼내서 비웠다.10일 월요일 일본인 여자 관리가 나를 다시 처음 사무실로 데려가서 신체검사를 위해 옷을 벗으라고 했다. 나는 거부했다. 나는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오랜 언쟁 끝에 그들은 내가 아래 속옷은 입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일본인 여자가 내 몸무게를 재고 다른 여자가 기록했다. 아주 젊은 일본인 남자 의사가 서서 보고 있었다. 그는 내 가슴을 검진했다. 그 사람은 청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걸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가슴을 타진(打診)했다. 그는 내 건강에 대해서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 방에서 나와 감방으로 돌아왔다.나는 감옥에 18일간 있었다. 출감한 날은 3월 29일 목요일이었다. 나는 앉거나 서 있는 것이 금지되었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말도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성경을 달라고 요청했다. 성경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한 명 있었지만, 일본인이 빼앗아 가서는 돌려주지 않았다. 3월 29일 목요일 12시에 상급 관리가 내가 있는 감방으로 와서 한국어로 내 이름을 묻더니 내 옷 허리를 끌러서 내 가슴과 등을 검사하고 다시 옷을 입으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다섯 명의 소녀가 있는 다른 방으로 나를 보냈다. 우리 모두는 죄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교도소 내의 다른 건물로 걸어갔다. 일본인 여자 관리가 이 사무실까지 우리와 함께 갔다. 한 관리가 우리 이름을 묻더니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번호를 떼어 냈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선생님과 교장이 찾아왔지만 나는 부모와 집이 없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야 함경도 갑산(Kapsan)에 사는 아주머니밖에 없다고 했기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관리는 유니폼을 입고 땋은 머리를 한 한국인 통역을 통해 말을 했다. 그는 내게 서울에 있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고, 가능하다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서울의 고아원으로 보내 주겠다고 말하고는 내가 있던 방에서 고아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날 밤 7시 고아원에서 사람들이 와서 나를 데려갔다. 고아원에 도착한 나는 그곳에 온갖 종류의 죄수들이 가득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 먹을 수조차 없는 음식을 주었다. 나는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그들은 교도소 당국에 알리거나 혹은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날 데리러 오지 않으면 나를 내보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시내에 있는 먼 친척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편으로 편지를 보내라고 했지만 나는 인편으로 직접 보내겠다고 요청했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 저녁 늦게 내 동료들이 왔지만 나를 데려갈 수 없었다. 고아원 당국에서는 내 동료들이 교도소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하므로 아침에 교도소로 전화를 하라고 했다. 나는 동료들에게 다음날 아침 10시에 다시 와 달라고 부탁했고, 그 다음날 친구들이 왔다. 편지를 쓸 때 나는 동료들에게 자신들이 내 먼 친척이라고 주장해야 한다고 썼으므로 친구들은 그렇게 말했고, 그래야만 그들이 나를 데려갈 수 있었다. 친구들은 다음날 아침에 와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그들은 내가 3년 동안 북쪽 멀리 있는 학교에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내 행실을 책임지겠다고 하고, 나를 갑산(Kapsan)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보내겠다고 했다. 사실 갑산(Kapsan)에 아주머니는 없었다. 대화 내용을 기록한 뒤에 나는 친구들과 함께 나올 수 있었다.그 동안 나는 작은 방에 갇혀 있었고, 그곳에는 15명쯤 되는 다른 여자 죄수들이 함께 갇혀 있었다. 우리는 베개도 없었다. 벼룩이 들끓고 있는 더러운 이불을 덮고 다섯 명씩 잤다. 우리는 아침마다 손과 얼굴을 씻을 수 있었지만 목욕은 할 수 없었다. 일본인 여자 관리들은 한국어를 무척 잘했고, 밤낮으로 우리를 감시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밤에 이불 밑에서밖에 없었고, 그것도 작은 소리로 속삭일 뿐이었다. 가장 잔인했던 것은 똑같은 자세를 하고 계속 있는 것이었다. 자세를 조금만 바꾸어도 매를 맞았다. 다른 죄수들에게 들은 것으로 짐작하건대, 교사들과 지도자급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은 독방에 갇혀 있는 것 같다. -김설죽(Kim Sul Chuk)이라는 죄수.

    244 동양 선교협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 영국 선교사 존 토머스(John Thomas) 목사의 진술

    1919년 3월 19일 수요일 나는 고헤이(Kohei)에 있는 우리 한국인 목사에게 내가 한국의 책임자로 있는 동양 선교협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 소유지를 보러 내일 고헤이(Kohei)로 가겠다고 전보를 쳤다. 1919년 3월 20일 목요일 오후 3시경 나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인 조수와 함께 고헤이(Kohei)에 도착했다. 그곳의 우리 전도사가 이미 내가 그곳을 방문할 것이라고 경찰에 알려 놓았다. 우리는 일본식 호텔에서 차를 마시고 저녁 6시 30분에 저녁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주문했다. 오후 4시쯤에 나는 전도사의 집과 시설을 보러 갔다. 몇 가지 개조를 하기 위해 밖에 서서 토지를 조사하던 중 우리는 다섯 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만세’를 외치며 언덕을 달려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깃발을 흔들며 우리 옆을 지나서 사라졌다. 우리는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몇 분 뒤에 총을 든 군인들이 나타났고, 그 뒤를 여러 경찰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한마디 질문도 하지 않고 설명도 듣고자 하지 않고 무작정 우리를 잡더니 때리고 발로 찼다. 그러고는 우리를 경찰서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나는 나를 거의 질질 끌고 가고 있는 경찰관에게 서울 경찰이 발행한 경찰 인증서와 여권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그것을 자세히 보기는커녕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나는 그것을 집으려고 했지만 머리를 맞고 발로 차였고, 한국인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일본인들로 구성된 군중 속에서 한 일본인 남자가 나와서 남자 팔뚝만큼 두꺼운 긴 몽둥이로 나를 때렸다. 나의 두 한국인 조수는 아주 심하게 맞았고, 그 중 한 사람은 맞아서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경찰서에 도착해서 나는 경찰이 다시 내 한국인 조수들을 때리고 발로 차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혼자 어느 방으론가 끌려갔다.나는 경찰관처럼 보이는 한 한국인에게 항의를 했고, 내 여권을 찾아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오후 5시 30분 그들이 여권을 찾아서 가져다주었다.그리고 나서 (일본인) 경찰서장이 들어왔고, 나는 한국인 경관을 통해 그에게 말을 했다. 그는 내게 굉장히 여러 가지 질문을 한 뒤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에게 호텔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군중들이 아직 밖에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에게 나는 그 소년들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그들은 내가 서 있던 곳을 뛰어서 지나갔을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한국인 경찰관이 다섯 명의 소년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읍내에 외국인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8시 15분 내가 호텔에서 가져온 가방에서 음식을 꺼내 먹은 뒤 경찰서장이 다시 자신들이 실수를 했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어로 씌어져 있는 서류 두 장을 가져와서는 나에게 서명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몰랐으므로 거부했다. 이미 서류에 서명을 한 내 한국인 조수들이 와서 서명을 하면 풀려날 거라며 내게 서명을 하라고 했다. 그들은 약 15분 동안이나 나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기차는 8시 40분에 떠났으므로 그들이 인력거 두 대를 불렀고, 두 명의 경찰관의 호위를 받으며 우리는 철도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타이덴(Taiden)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묵었다.

    245 한국에 파견된 일본 군대

    작성일: 04-19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2개 사단이 파견되다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4월 18일 - 오늘 미국에서 발행되는 일본 신문의 도쿄 통신원으로부터 받은 전보에 따르면 일본군 2개 사단이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한국 부산에서 발행되는 신문사에 도쿄를 거쳐 전달된 또 다른 전보에 따르면 부산에 일본군 6천 명과 헌병대 4백 명이 도착했다고 한다.일본 정부는 미국 선교사들을 체포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뉴욕, 4월 18일 - 도쿄에서 전해진 공식 전보에 따라 이곳 뉴욕의 일본 총영사 조노수케 야다(Chonosuke Yada) 씨는 오늘 일본 정부는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운동에 한두 명의 선교사들이 연관되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이 문제 처리에 있어서는 가장 신중한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선교사는 단 한 명도 체포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이 전보 내용은 평양에서 “한 일본군이 미국인 여성 선교사를 총 개머리판으로 때렸다”는 보도 내용과 “우리 군인들이 미국인 선교사의 집을 수색하고 그들을 아내의 침실로 몰아 넣었다”는 모후루 가와(Mohuru Kawa)의 보도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평양 사건의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그 보도는 자기 총을 이용해서 군중들을 저지하려던 한 일본 군인의 행동 때문에 나온 이야기”였음이 밝혀졌다고 말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의심을 받고 있다이 폭동들은 천도교라는 종파의 우두머리로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불온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손 헤일리(Son Heili)가 후원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계속 보고하고 있다.“선교 단체의 특정한 부서에서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당국은 언제나 신앙의 자유를 존중해 왔으며,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를 폐쇄한 적은 전혀 없다. 현재의 폭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한국인 선교사들과 천도교 종파 지도자들만 체포했다.”국제연맹을 오해하다이 메시지 내용은 본토의 기독교인들과 한국인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그들이 국제연맹과 민족자결주의의 중요성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폭동 지도자들은 “대중적인 공감을 얻기 위해” 위협을 통해 폭도들에게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고 덧붙였다.한국인들에게 잔인한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보도 내용을 부인한 뒤 이 전보는 무력은 “경찰력이 부족한 특정 외딴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공식 성명을 통해 “군인이 소녀의 팔을 잘라 버렸다는 등의 보도는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사실 현재 군인들이 소지하고 있는 검은 워낙 무뎌서 팔을 자를 수도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미국인 선교사가 체포된 적이 없다는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4월 8일자 도쿄발(發) 연합통신 급보에서는 일본 내무성 관리들이 평양에서 오하이오 주 메인필드(Manefield) 출신의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엘리 M. 모우리(Eli M. Mowry) 목사가 체포되었다는 보도를 확인했다고 전했다.

    246 비공식 회의 1차 회기 보고서

    작성일: 1919-03-22참석자: 와타나베(Watanabe), 가타야마(Katayama), 고부쿠(Kobuku), 세키야(Sekiya), 호시노(Hoshino), 가와바타(Kawabata), 야마가타(Yamagata), 사카이도(Sakaido), 니와(Niwa), 웰치(Welch), 애비슨(Avison), 모펫(Moffett), 게일(Gale), 거딘(Gerdine), 브로크만(Brockman), 휘트모어(Whittemore), 노벨(Nobel), 벙커(Bunker) 씨이 참석자들은 와타나베(Watanabe) 판사와 가타야마(Katayama) 씨의 초청으로 모였다.와타나베(Watanabe) 판사가 회장으로서 유감스러운 현 사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이 모임의 목적을 설명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한국 국민들의 복지라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한 사람의 판사로서 나는 모든 한국인들이 법정에서 정의로운 판결을 받기를 바라며,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처벌을 받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은행가의 첫째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재정적인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재무 체계를 제공해야 할 것입니다. 교사의 목표는 사람들을 계몽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선교사의 목표는 사람들의 영적 계몽을 돕는 것이어야 하며, 아마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아주 유감스러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은행가나 선교사 그 외 각종 공직자로서 우리가 무언가 실수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우리의 초청에 이렇듯 모두 와 주신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특히 모펫(Moffett) 씨와 휘트모어(Whittemore) 씨는 서울에 있지 않으셔서 오지 못하실 것으로 생각했기에 더욱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께서 자신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서 서로 솔직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현 문제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불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10년 전 존재했던 상황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제일 처음 했던 일 가운데 하나는 법정이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보기 위해 법적 기록을 살펴본 것이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법정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판사의 뇌물 수수를 감추기 위해 기록들은 모두 고의적으로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이 나라의 초목은 모두 벌채되어 산이 민둥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한 나라의 표면 3분의 1이 노출되면 실제로 그 나라는 훼손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곳은 국가 전체 면적의 2분의 1 이상이 벌채되었습니다. 교육 쪽으로는 학교가 사실상 없었습니다. 소위 학교라는 것들은 중국 고전을 가르치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인들의 지위를 떨어뜨렸고,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 선의로 모든 일을 했습니다. 정부의 압제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될 때 이 불평등을 고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판사는 다시 한번 논의의 정직성을 역설했다.게일(Gale) 박사“저는 일생 동안 이곳에서 일본과 한국 양국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어 왔고, 또한 극동 지역 전체에 호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습니다.한국인들은 분명 일본인들의 통치로 인해 물질적으로 많은 혜택을 입었고, 이에 대해서는 감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상당히 유리(遊離)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한국인들이 누리고 있는 이 세상은 제가 속한 세상과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30년 동안 저는 그 속에 편입되려고 노력해 왔지만 지금까지도 저는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한국인의 세계는 고대의 현실 세계이며, 저는 그 세계에 대해 더 알게 될수록 더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제가 속한 세상보다 한층 더 복잡하게 돌아가고, 여러 가지 일과 이상을 통해 한 인간이 그 자신이 되게 하는 세상으로 제가 속한 서구와는 상당히 다르며, 또한 일본인과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 문명에 어울리는 방식을 택해야 하며, 한국인들에게 이질적인 무언가를 강요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기반 위에 쌓아올리려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인의 이런 정신적 세계로 가는 열쇠가 바로 문제의 해결책으로 가는 열쇠입니다. 육체는 편할지 모르지만 마음의 안식이 없다면 한국인들에게는 육체적 안식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모펫(Moffett) 박사“저는 한국에서 30년을 살아 왔으며, 한국인 친구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공감합니다. 한국인들의 아주 친한 친구이자 그들을 찬양하는 한 사람으로서 말합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교육은 이것과 괘를 같이해 한국인들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정의이며, 한국인에게 있어 정의는 물질적인 어떤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에게 정의를 주면 그들은 그 가치를 알고 감사히 받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도덕적?정신적 측면의 문명은 중국과 같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인간으로서 대우받는 것을 감사하며 신체적인 안락보다 인격과 가치를 훨씬 더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하디(Hardie) 박사“저는 한국인들을 매우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지난 몇 년간 그들이 이룬 인격적인 발전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발전은 일본인들과 선교사들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교육 체제는 한국인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저는 일본인들의 노력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이루어 나가는지를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일반적으로 아시아로 가는 열쇠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은 국민들에게 공정하고 인간적인 통치를 함으로써 한국에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나라의 발전을 기뻐했고, 경제적 번영과 향상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이런 물질적 발전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감정은 대체적으로 이런 발전이 전적으로 자신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자신들이 열등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위압적인 억압을 당하는 한 이런 혜택들은 결코 만족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인격적인 성장에 비례하여, 분노감도 증가했고, 이제 우리는 그 표출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그들이 느끼기에 인종 차별이라는 고의적이고 강압적인 형식에 반대하는 반항과 불신과 불만이 쌓여 있다가 처음으로 표출된 것입니다.무력으로 한국인들을 제국에 충성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어내야만 합니다. 그 마음으로 가는 길은 몸이나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정신에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신임을 얻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손으로 이룬 과업을 스스로 망치지 말도록 합시다.”휘트모어(Whittemore) 씨는 한국인들은 종교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사법 당국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느끼고 있으며, 법정 자체는 옳은지 모르지만 너무도 많은 부분이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있다고 발언했다.고쿠보(Kokubo) 씨(법무부 장관)는 한국인들을 정신적인 방식으로 이끌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선교사들에게 현(現) 단체를 만나서 최근의 폭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점을 들려주라고 부탁했다. 그는 지금의 문제를 선교사들이 부추겼다고 들었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가 조사를 했지만 선교사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선교사들이 정부와 협력하여 노력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선교사들은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분들이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큰 도움이 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들은 평화와 인도주의를 위해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세키야(Sekiya) 씨는 학생들이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따라서 교육부 장관으로서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정부에서 한국인들의 생각을 무시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고의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동안 그들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펫(Moffett) 박사께서 한국인들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존중한다고 말씀하셨고, 정부의 목표와 선교사들의 목표가 다른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은 많은 한국인들을 모아서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선량한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복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으며, 정부에서는 국민들이 기꺼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조치를 강요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육부에서는 산업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정신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물질적인 삶을 희생시킨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현대의 물질주의 시대에는 정신적인 것과 함께 물질적인 측면도 장려해야만 합니다. 이전의 한국인 교육법은 독서 교육만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노동을 천시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하고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일이란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또 한 가지 한국인들의 약점은 형식에 지나치게 구애받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학교를 지나치게 고귀한 이름으로 부릅니다. 선교 학교 가운데에도 그런 유사한 약점을 가진 곳에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학교에 그렇게 고귀한 의미의 이름을 붙이지 않지만 학교 시설을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초등학교 교육 과정이 6년이고 한국에서는 4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일본에서도 10년 전에는 초등학교 과정이 6년이 아니라 4년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또 학교 수가 너무 적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것은 기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국민들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정부에서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고, 학교를 더 세우기 위해 예산을 확보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진지하게 수행해 왔습니다.한국인들이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방법상으로는 틀렸는지 모르지만 그들을 동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한국 국민들의 특성을 존중하지만 그들의 단점을 뿌리뽑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들을 일본화 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들의 특성 가운데에 나쁜 것은 없애야만 합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할 방법만 택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각오하고 일을 추진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일본인들이 통치에 있어서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엄밀했는지는 모르지만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국민들을 억압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닐지라도 정부와 협력해 정부 시책을 따라 주기를 바랍니다.”가타야마(Katayama) 씨“한국인들이 행동한 방식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국이 제국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합병은 국제법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국제법을 위반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합병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또 사실상 정당한 것이며, 독립에 대한 견해를 표방하는 한국인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크게 반역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범인들에게는 정의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했습니다. 일례로 일본의 고등상업학교(Higher Commercial School)를 졸업한 조선은행의 한국인 직원들을 다루는데 있어 저희는 평등 원칙에 따라 대우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각 개인의 지위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 한국인들을 적당한 자리에 앉히고 적절한 업무를 주며, 그들의 발전 단계를 고려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법을 지켜야 하고 평화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일부 경우에 위반 사항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정의에 반하는 것이고 선교사들이 이런 경우를 지적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견해를 존중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관대하고 자유롭게 대해야만 하지만 그들도 정부 정책에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나 갈등을 불러올 수도 있을 정도로 상당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여러 해 동안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해 왔지만 오해로 인해 전쟁이 유발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친절한 조언을 결코 잊지 않고 전세계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브로크만(Brockman) 씨“저는 10년 동안 일본과 한국의 YMCA에서 일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협조와 한국인들 사이에 한국 정신을 지키는 것을 이상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것은 한국인협회(Korean Association)에 희망을 가져다주고,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저는 대만(Formosa)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만인들과 한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국인, 모국을 대변하는 일본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 제국의 대표들이 일본 제국을 이루는 날을 어서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은 전세계 5대 열강 가운데 하나로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벙커(Bunker) 씨(세키야(Sekiya) 씨 뒤)“한국인들의 마음에 부당하다는 생각이 사무쳤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이 스스로 통치에 더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노블(Noble) 씨(고쿠부(Kokubu) 씨 뒤)“남부에서 온 한 사람이 지금까지 그곳에선 자신이 감독하던 1백 개의 교회와 45개의 학교에서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는 한국인들에게 당국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한국인들은 현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247 비공식 회의 2차 회기 보고서

    작성일: 1919-03-14참석자: 가타야마(Katayama), 고쿠부(Kokubu), 세쿠야(Sekuya), 히시노(Hishino), 가와바타(Kawabata), 사이토 노와 (Saito Nowa), 마쓰모도(Matsumoto), 사카이도(Sakaido), 야마가타(Yamagata), 웰치(Welch), 벙커(Bunker), 게일(Gale), 모펫(Moffett), 애비슨(Avison), 휘트모어(Whittemore), 거딘(Gerdine), 해리드(Haride), 브로크먼(Brockman) 씨, 에그버트 W. 스미스(Egbert W. Smith) 박사가타야마(Katayama) 씨가 이 회의는 지난 토요일에 열린 회의에서 계속되는 것으로 모두가 당시에 논의되거나 토론한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출하라고 말함으로써 회의를 시작했다. 그는 개회를 맡아 줄 것을 요청받았다.니와(Niwa) 씨가 웰치(Welch) 주교나 애비슨(Avison) 박사께서 시작해 달라고 부탁했다.웰치(Welch) 주교“우리 모두 이것이 전적으로 비공식적인 회의에 불과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우리 선교회나 한국인 동료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며, 우리가 발언하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저는 지난번 회의에서 우리의 의사록을 공표하지 않을 것으로 결정된 것을 기억합니다만 이 회의를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발언하는 데 있어 솔직하려면 우리의 발언이 절대 발표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발언한 것은 물론 우리가 이런 회의를 가졌다는 사실조차 발표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인과 일본인 양측에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초대받아 이곳에 온 우리는 적절한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외국인으로서의 우리들의 지위로 인해 어떤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국가에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일 것입니다.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모두의 친구로서 모든 선교사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방관자의 위치를 지켜야만 합니다. 선교사들이 작금의 운동을 부추기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운동은 기독교도들의 운동도 아닙니다. 이것은 국민들과 현 정부 사이의 논쟁이며, 국가적인 운동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부나 한국 국민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합니다. 물론 그러한 논의에서도 외국인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을 제외하고 우리가 여기 모이신 분들과 이해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선교사가 여기 계신 분들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이곳의 모든 상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기꺼이 전할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저희가 발표를 하는 것보다는 질문과 답변 형식을 취하는 것이 더 편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를 떠나서 인도주의적인 질문이 관련되어 있지만 여기에 와서까지 이 문제에 다른 문제를 끼워 넣을 생각은 없습니다.”마스모도(Matsumoto) 씨“제게 현재의 문제에 관련된 발언을 들을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토요일의 발언을 통해 저는 여러분 대부분이 오랫동안 이곳에 살아오셨고, 어떤 분은 30년 혹은 20 몇 년간이나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산 지 7년이 되었으니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있은 편이고, 여러분들처럼 한국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더 오래 계셨던 분들은 한국인들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계시지만 때로는 그것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으로서 저의 판단이 얕은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오히려 어떤 직관적인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문제에 관련해서 저는 이것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자신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 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독립운동이라고 선언되고 있고, 발표된 성명서를 통해 볼 때 정치적인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이것이 정치적 문제라기보다는 감정적인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말과 명목으로 인해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운동이 독립운동이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이것은 일본인들이 ‘하이칼라’라고 하는 외국식을 따르는 일종의 유행과도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제 말은 그 사람들이 정말로 하이칼라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외부적인 사건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시위 운동가들이 독립을 부르짖고는 있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차별적인 대우를 폐지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불평등한 대우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은 관리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일본인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시위에 참여했던 한 한국인 중학생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부친이 혼을 내자 그 학생은 자신들의 요구가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대우가 얼마동안 계속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그에 복종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는 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사례는 바로 한국인들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구는 합당한 것이며, 우리 일본인들도 평화회담에서 인종적 차별을 폐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에 저는 한국인들에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들의 이같은 요구는 논리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실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관리들과 종교 활동에 관련된 사람들도 협력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한국인들도 일본인들을 차별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자신들의 내적인 생각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재의 문제에 대해 비관적이기보다는 낙관적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총독의 교육 정책이 성공했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자신들의 권리의식에 눈을 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전에는 그런 일을 할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정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선교사들도 그들이 정의 의식에 눈을 뜨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것은 물론 성공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의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저는 낙관적이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한국인들이 교육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사람들이고 정치적? 산업적으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형제 자매로서 크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문제가 썩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많은 예기치 못한 것들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내적인 마음을 감추어 왔지만 이 문제가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우리들의 행동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주저 없이 말하고 무엇이 옳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법률가로서 저는 한국인들이 우리를 차별한 사례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일본인들과 법률 소송을 벌일 때 그들은 소송을 끝까지 끌고 가며, 한국인 변호사가 한 편에 있고 일본인 변호사가 반대편을 맡으면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문제까지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차별을 없애야만 합니다. 학교 교육으로는 부족합니다. 특별한 교육을 통해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만나 자유로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모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외국인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제안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세키야(Sekiya) 씨“저는 이 차별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몇 개월 전 저는 두 명의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러 함흥(Hamheung)에 갔었습니다. 한 친구는 판사이고 다른 친구는 검사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과 아주 친했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자기 위치에 대해 무슨 불평이 없는지 묻자 그들은 대중 목욕탕 문제를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예는 이외에도 더 있습니다. 저는 충주(Chungju)에 갔었는데, 거기서도 똑같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오후 9시가 될 때까지 목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대중탕에서의 차별에 대해 긴 발언이 계속됨.)선교사들은 간섭할 수 없다는 웰치(Welch) 주교님의 발언에 대해서는 그분들이 이사회 대표로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기독교에 대해 저도 아는 바가 많지만 그에 대해 몇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웰치(Welch) 주교님은 선교사들은 정치적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방관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너무 이기적인 바람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의 법을 어기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 진정한 의무를 다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을 막으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들의 정신적인 아버지로서 그저 옆에 서서 그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시위가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동안에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지만 최근에는 시위자들이 경찰서를 공격하고 집과 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가 정말 나쁜 정부라면 선교사들의 이런 태도가 적절한 태도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현 정부는 이전의 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직합니다. 우리가 실수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국민들도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노력하고 있고,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사들은 기존 정권하의 상황이 어땠는지 잘 알고 계시며,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국인들이 조금쯤 인내심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 직선적이고 과감하게 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권능’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계율을 가르쳐야 할 때가 아닙니까? 평화시에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지금 같은 불안한 시국에는 필요합니다. 지금은 바울(Paul)이 로마인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복종하라고 말해 줄 때가 아닙니까? 저는 웰치(Welch) 주교님과 애비슨(Avison) 박사께서 허물없이 발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웰치(Welch) 주교“제가 세키야(Sekiya) 씨의 질문에 답하겠지만 우선 세키야(Sekiya) 씨께서 예로 든 사례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배우기 위해 여기에 모였고, 저는 사실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세계의 판정은 사실에 근거해서 이루어질 것이며, 저는 그 사실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의 슬로건이 ‘비폭력’이라고 알고 있으며, 한국인들이 시위를 할 동안 그들은 전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치명적인 무기로 먼저 공격을 당하기 전에는 한국인들은 어떤 폭력도 쓰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인들이 먼저 공격을 한 곳이 있었다면 예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누가 사실을 알고 계시는 분이 말씀을 해주십시오.”세키야(Sekiya) 씨“제가 알고 있는 한 몇 군데에서는 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다른 데서는 처음부터 헌병대 초소와 경찰을 공격했습니다. 최근에는 더 폭력적이 되었지만 장소의 이름을 댈 수는 없습니다.”고쿠보(Kokubo) 씨“저도 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독립운동 자체가 법에 저촉되는 것입니다. 만세를 외친다는 사실 자체가 범죄이며, 자주 충돌이 일어납니다. 경찰이 그들을 저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도시와 읍에서 시위자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의 말을 따라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여러 마을에서는 폭도들이 처음부터 폭력을 쓰거나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 준 사례가 있었습니다. 시위가 법을 위반하기는 했지만 평화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째서 선교사들은 그런 위반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까? 옳지 않은 것이라도 법은 법이며, 따라야만 합니다. 그 법이 앞으로 고쳐져야 할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법이 효력을 지닌 동안에는 그 법을 위반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친구인 선교사들이 사람들이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 생각을 여러분께서 심사숙고 해주십사 하고 말씀드릴 뿐입니다.”웰치(Welch) 주교“그 말씀은 사실과 정부측 태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왜 개입해서는 안 되는지를 제가 답해도 되겠습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선교사들이 개입한다고 해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며, 원하는 결과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시위자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의 영향력 밖에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우리의 조언을 묻지 않은 사람들은 그에 반하는 우리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둘째로, 전체로서의 그 사람들은 우리의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선교사들은 자신이 그 사람들의 신임과 사랑을 받을 때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면 그 결과는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사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입니다. 선교사나 외국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합당한 것으로 일단 인정이 된다면 그들이 어느 쪽을 택하든 인정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우리가 정부에 반대하는 편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국내 문제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영사가 이 문제를 처리합니다. 히사미즈(Hisamidsu) 씨는 학교 교장들에게 학부모에게 시위에 대한 총독의 성명서를 읽어 주고 설명해서 자녀들이 학교에 출석하게 하도록 지시하고, 선교사 교사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한다고 경고하는 장관의 서신에 나타난 입장을 지지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웰치(Welch) 주교는 전임 장관 실(Sill)이 1897년 미국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경고한 지시문을 읽었다.)거딘(Gerdine) 씨“故 이토(Ito) 후작은 선교사들이 정치적 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적절치 못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견해입니다. 우리가 어떤 견해를 따라야 합니까?”야마가타(Yamagata) 씨는 3월 15일자 베이징 데일리 뉴스(Peking Daily News)에 실린 선천(Syenchun)의 한 선교사가 썼다는 서신을 인용했다. 그는 ‘한국의 비극’을 인용하면서 이 서신이 일본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증오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서신은 또한 총독 하세가와(Hasegawa) 경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이다. 그는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선동했다는 어리석은 비난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서신이 발표되면 일부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있다는 의심을 피하기는 어렵다. 이런 서신은 잘못된 생각을 가진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감정을 부추기기 쉽다.모펫(Moffett) 박사는 자신이 평양에서 본 것에 대해 써야 한다면 자신이 반일본주의자라고 생각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본 일들로 인해 정부와 국민들에 대해 크게 심려하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불법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을 보았기 때문에 영사에게 항의를 전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꼈지만, 그 지역의 지사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사에게 먼저 보고하기 전에는 영사에게 진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법은 법이며, 정부가 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고쿠부(Kokubu) 씨의 생각에 동의했다. 군인과 헌병대, 경찰 및 소방수들의 잔인하고 불법적인 행위에는 아무도 대항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말하기를 꺼렸지만 감정이 격해져서 말을 전했다. 그런 것을 듣는 것은 그다지 즐겁지는 않은 일이다. 그는 “그러나 저는 동료로서, 특히 여러분들 대부분이 기독교도이기에 우리가 솔직해야만 하며, 제가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여러분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군인들이 대로에서 사람들을 체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차고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본인 신사와 함께 동행하면서 저는 한 경관이 구경꾼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고, 저와 동행한 사람도 저만큼이나 분개했습니다. 그때 제가 동행한 사람은 세키야(Sekiya)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야마토(Yamato) 선생님이었습니다. 한 번은 군인들과 헌병들이 우리 막사 근처에서 사람들을 때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내 비서 같아서 확인하려고 가까이 가 보았지만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거의 3미터 근처까지 갔었습니다. 그들은 세 명의 소년과 한 남자를 묶어서, 77연대의 군인 20명인가 30명인가가 그 네 사람을 발로 차고 몽둥이와 총으로 수차례 때렸습니다. 못이 박힌 곤봉을 든 소방수들은 여자들과 아이들을 놀리면서 이쪽 저쪽으로 쫓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제 가장 친한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이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보았을 때 제가 느낀 분노가 어떠했을지 아실 것입니다. 법이 시행되는 데 있어서 제가 요구하는 것은 법을 지키기 위해 다른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은 한국 최고의 엘리트들입니다. 저는 그들이 지혜로운지 어리석은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그들도 인간이며, 이 나라 최고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보실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애비슨(Avison) 박사“영국인으로서 저는 미국인 친구들보다 어떤 면에 있어서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가 여기서 영국인의 생각을 표현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마음속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하셨고,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세키야(Sekiya) 씨로부터 솔직한 말을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세계대전을 치렀고, 그 동안 일본은 자유라는 위대한 원칙을 위해 동맹국들과 싸웠습니다. 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얻은 것은 독일을 부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라는 원칙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계는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국제연맹을 조직하고 있고, 일본은 5대 열강 가운데 하나로서 그 생각을 지지하는 데 합류했습니다. 저는 인간의 자유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언급할 것이며,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자유롭다고 볼 수 없습니다.1. 민족 정신을 소중히 여길 권리. 이것이 위험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영국인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캐나다에서 살았기 때문에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제 생각을 말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에는 영어 사용 인구도 많지만 프랑스어 사용 인구도 많습니다. 실제로 캐나다의 일부는 거의 원래의 이주민인 프랑스인 후손들만 사는 곳도 있으며, 그들은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민족정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영국인들만큼이나 캐나다 정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프랑스 출신 캐나다 수상인 윌프레드 로리에(Wilfred Laurier) 경이 한 번은 연설에서 “나는 프랑스인이며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만 또한 캐나다인으로서 영국 정부에 충성을 다합니다. 그 이유는 영국이 우리에게 제국 내에서 민족정신을 키울 수 있는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각 민족의 민족정신이 완전히 개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민족정신이 우선 전체 제국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범위에서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2.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권리를 지닙니다. 이 권리가 없으면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캐나다에서 우리는 두 가지 언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이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3. 발언의 자유는 또 다른 권리입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가져야만 합니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없다 해도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며 그 생각을 표현할 출구 없이 생각을 계속하게 되면 억압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이 폭발이 일어날 때가옵니다. 발언의 자유 권리보다 더한 안전책은 없습니다. 4. 이와 매우 유사하게 보도의 자유가 있습니다. 앞의 발언의 자유와 다른 점은 생각이 말의 형태가 아니라 활자화된 형태도 표현된다는 점뿐입니다. 5. 위 두 가지 자유와 관련해 결사의 권리와 국민의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면 어떤 문제라도 자유롭게 토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유명한 영국 역사가로, 한때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고 후에는 캐나다 토론토의 트리니티 대학 교수로 있었던 골드윈 스미스(Goldwin Smith)는 캐나다와 미국의 통합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스미스 교수는 수업에서 이를 가르치고, 이를 자유롭게 발언하고, 신문에 기사를 쓰고 책도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역으로 간주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때 캐나다에는 세 개의 정당이 있었습니다. 한 정당은 미국에의 병합을 원했고 다른 정당은 완전한 독립을, 세 번째 정당은 식민지로 영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정당들은 반역자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공포 없이 자신들의 견해를 자유롭게 토론했습니다. 캐나다가 독립이나 병합을 요청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은 영국 정치인들은 “캐나다는 무엇이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며, 본국과 캐나다 사이의 유대가 끊어진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유감스럽겠지만 무엇이 가장 이익이 될 지를 정하는 것은 캐나다 자국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캐나다가 대영제국 곁에 남기를 원하게 되었으며 30년이 지난 지금 다른 어떤 때보다 캐나다는 영국에 충성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6. 모든 자유민은 정부에 참가할 권리를 부여받습니다. 조건이 다르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유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참가하는 법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 그는 자유로운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지난 모든 세월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제가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정부의 상징으로 칼이 계속 나타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항상 칼을 차고 있는 사람을 누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세키야(Sekiya) 씨를 퇴근 후에 집으로 찾아갔을 때, 세키야(Sekiya) 씨는 제복을 벗고 칼을 차지 않고 있어서 그 인자한 표정을 보고 그를 제 친구처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세키야(Sekiya) 씨를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세키야(Sekiya) 씨는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어서 저는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세키야(Sekiya) 씨가 칼을 정말로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세키야(Sekiya) 씨: 예, 저는 칼을 차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애비슨 박사: 그래서 저는 일본이 인류의 자유를 위해 연합국과 마지막까지 함께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세키야(Sekiya) 씨: 저는 모팻 박사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일본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귀 기울여 들을 것이며 그가 우리와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우호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저는 그가 항상 정부 당국에 솔직하게 말해주기를 희망합니다. 업무상 저는 자주 외국 인사들과 만나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이 그 이야기 때문에 저를 외국인들에게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처럼 저도 귀하를 일본에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외국인인 귀하들께 한 가지 제안해도 된다면, 아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망설이지 말아 주십시오. 귀하들은 정부에 직접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모팻 박사는 우리가 그를 일본에 반대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나라에 30년간 살아오신 분이 일본인들보다는 한국인들에게 동정적인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애비슨 박사의 이야기에 저도 대단히 공감하며, 일본이 그렇게 폭넓은 시각을 가지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한국을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게일 박사가 짧은 발언으로 끝을 맺었다.1919년 3월 29일 토요일 오후 및 3월 30일 일요일 저녁 세키야(Sekiya) 씨와의 회의 보고서 웰치 주교와 애비슨 박사가 세키야(Sekiya) 씨에게 그가 편한 시간에 만나자고 요청했다. 우에다(Ueda) 씨가 통역관으로 회의에 함께 했다. 회의의 목적은 세키야(Sekiya) 씨에게 경찰들과 헌병들이 한국인 시위대에 행했던 잔혹 행동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 와타나베(Watanabe) 판사의 초청으로 열린 모임에서 세키야(Sekiya) 씨가 당국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보고이건 환영한다고 말했으므로 웰치 주교와 애비슨 박사는 이를 결심한 것이었다. 두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세키야(Sekiya) 씨의 의견으로는, 우리가 잔혹행동에 대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보고서가 도움이 될 것인가? 둘째, 만약 보고서가 작성되어야 한다면, 누구에게 보내져야 하는가?세키야(Sekiya) 씨는 우선 경찰과 헌병 부서의 조직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군대의 사령관은 우소노미야(Utsonomiya) 장군이며, 경찰과 헌병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경찰과 헌병은 코지메(Kojime) 장군의 지휘 하에 있다. 세키야(Sekiya) 씨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경찰이 총독으로부터의 특별한 명령 없이 나라 전역의 질서를 유지할 책임을 지지만, 총독이 경찰에 특별 명령을 내리고자 원하면 코지메 장군을 불러 회의를 하고 그러한 명령을 내린다고 말했다. 군대에 대해서도 그와 유사한 규칙이 적용된다. 대화는 몇몇 지역에서 일어나 주의를 끈 잔혹 행동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세키야(Sekiya) 씨는 모든 경우에 한국인 시위대가 먼저 폭력을 행사했으며 전국에서 수적으로 불리한 경찰과 헌병을 공격한 한국인들의 행동으로 인해 경찰과 헌병들은 정부 자산에 대한 공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인들의 폭력행위에 대한 경찰의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우리가 그 앞에 내놓은 사례에 대해 반박했다. 잔혹행위의 사례를 보고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자신에게 직접 전하면 해당 당국에 전해지도록 하겠다고 말하며 우리를 격려했다.그리고 세키야(Sekiya) 씨는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국인들에게 시위를 멈추고 평소의 조용한 상태로 복귀하도록 설득해 달라는 이전의 요청을 언급했다. 선교사들의 입장에서의 현 상황의 어려움에 대해 거듭 설명이 이루어졌다. 세키야(Sekiya) 씨에게 선교사들이 정부가 원하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보여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번보다 한결 더 자세히 이야기했다. 세키야(Sekiya) 씨는 현재와 같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부에 권할 만한 조처가 있는지를 물었다. 애비슨 박사는 자신은 정부에는 어떤 충고도 할 수 없지만, 그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자유 발언의 권리도 출판의 권리도 결사의 권리도 가지지 못한 한국인들이 정부에 무엇을 요청해야 할지를 서로 논의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인들이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만났다면 그들은 즉시 체포되어 처벌을 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한국인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수단은 그들이 지금 하고 있듯 항의하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부와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한국인들 자신을 통합하기 위해 그들에게 가능해보였던 유일한 외침을 그들이 행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원래의 생각은 한국인들에게 자유 발언, 자유 논의, 자유 회합에 대한 금지가 해제되고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만나 서로 논의하고 체포의 공포 없이 자신들의 견해를 널리 읽히기 위해 출판할 수 있으며 이로써 서로의 의견을 파악하고 자신들이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떻건 만장일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라 말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키야(Sekiya) 씨는 애비슨 박사에게 이 모두가 한국인들에게 허용된다면 한국인들이 무엇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애비슨 박사는 자신은 한국인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신이 그러한 입장에 있다면 일단 시위를 멈추고 회합과 토의 허가가 주는 이점을 누리고 정부에 사람들 다수의 의견을 대표하는 청원을 하리라는 것은 안다고 대답했다. 세키야(Sekiya) 씨는 이 제안에 흥미를 보였고 우리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회의는 일요일 7시 30분 조선호텔에서 하는 것으로 예정되었다. 2차 회의이전 회의와 같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세키야(Sekiya) 씨가 교육 및 재정과 같은 분야에서 독립을 허용했을 때 국민들이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고 정부가 교육적, 농업적으로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려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세키야(Sekiya) 씨는 정부의 원래 생각은 한국 내의 가장 다수집단, 즉 농부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국민들이 워낙 빈곤했으므로 사람들이 좀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로써 국가의 전체적인 富가 증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농민 계층에 지나치게 주의를 많이 기울이고 관리 계층과 가장 적은 비율인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신경을 거의 쓰지 않은 것이 실수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후자는 아마도 많은 수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정부는 이미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 변화를 계획하고 있지만, 정부가 처음부터 그렇게 했었다면 현재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애비슨 박사는 이는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세키야(Sekiya) 씨는 “귀하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압니다. 귀하는 이전에 말씀하신 발언의 자유 및 인간의 자유와 관련된 다른 문제들과 같은 자유 쪽의 큰 계통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지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일행은 호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경찰부의 지휘 체계에서 2인자인 마에다(Maeda) 경시감을 만났다. 세키야(Sekiya) 씨는 우리가 우리 앞에서 벌어졌던 잔학 행위 사례에 대해 마에다 경시감에게 개인적으로 전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우리는 몇 가지 사례를 전했고, 마에다 경시감은 경찰은 헌병과 경찰이 무기를 사용한 38군데 지역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으며, 모든 사례에서 한국인들이 먼저 폭력을, 아마도 세 명에서 다섯 명, 가끔은 한 두 명의 일본인들에 대해 사용했다고 말했다. 군중이 몇 백 명, 몇몇 경우에는 몇 천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로 경찰서로 몰려와 경찰서를 부수려 했고 경찰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고 국가 시설을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그 중 한 명만이 일본인이었던 4명의 헌병이 근무하고 있던 지역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인들의 습격 결과로 헌병 네 명이 모두 살해되었으며 일본인 헌병의 아내는 피스톨을 가지고 할 수 있는 한 스스로를 방어하다가 결국 물러나 한국 옷으로 갈아입은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에다 경시감의 전반적인 어조는 일본 당국의 의견으로는 시위대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해 촉발된 것 이상의 큰 잘못을 경찰이나 헌병이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토머스(Thomas) 씨의 사례가 언급되자 경시감은 경찰이 토머스 씨를 구타한 것이 아니지만, 그는 주변에 서 있던 일본인 시민들에게 구타당했음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그 일본인들은 어느 외국인이 그 지역에서 시위를 조장했다는 이야기에 흥분한 상태에서 한 외국인이 체포당하는 것을 보자 너무 흥분해서 토머스 씨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웰치 주교는 그런 경우에 죄수를 보호하는 것이 경찰의 의미가 아닌지를 물었고 마에다 경시감은 경찰들이 노력했으나 시민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그 경우 죄수를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신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와서 신학교 교실에 조용히 앉아 있던 다섯 명의 신학생이 체포되고 구타당한 것에 대해 물었다. 경찰은 그 학생들을 경찰서로 데려가 각각 그런 경우에 사용되는 십자가에 묶어 놓고 29번씩 구타했다. 마에다 경시감은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한 후 그 사건이 조사를 더 하기 위해 이관되어야 하는지 혹은 즉결 처벌로 끝날 지를 결정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며 그러한 경우 경찰은 어느 정도의 처벌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아마도 29번이라는 숫자는 분명히 경찰의 권한 이내의 것이었을 거라고 설명했다. 애비슨 박사는 잘못된 행동과 처벌 행정에 있어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폭동도 없었는데 왜 조사도 전혀 하지 않고 처벌이 내려져야만 했는지를 물었다. 경시감은 평양으로부터 아직 완결된 보고서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현재 조사 중이라고 답했다.회의를 마치기 전 마에다 경시감은 한국인들은 시위 마지막 즈음에는 점점 더 폭력적이 되었고 그로 인해 한국인들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더 많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시위가 점점 더 폭력적이 되어 사람들과 경찰 사이에 당연히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아마도 피해갈 수 없을 더 잦은 충돌과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는 언제든지 환영받을 것이며 그러한 보고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조사될 것이라고 말했다.

    248 정치 선동가에 대한 새 법령

    며칠 전 예견된 바와 같이 4월 15일 총독이 새로운 법령을 선포했다. 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제1조정치적 변화를 목적으로 여러 사람과 함께 평화와 질서를 침해하려는 시도를 하는 선동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구금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형법 2조 2장의 규정에 속하는 경우 이 법령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사람들이 앞 절에서 언급된 행동을 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들을 선동하는 자는 동 절에 언급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제2조상기 조항에 언급된 범죄를 저질렀지만 참여가 발각되기 전에 스스로 자수한 자는 처벌을 줄이거나 완전히 면제될 수도 있다. 제3조이 법령은 제국 영토 밖에서 제1조에 언급된 범죄를 저지른 제국 국민에게 적용될 것이다.총독의 법무장관인 고쿠부(Kokubu) 씨는 한국 내 정치적 범죄는 지금까지 원래 구 한국 정권하에서 제정되어 법령 통합 이후 새로이 인정된 평화유지법의 효력에 의하여 처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법 아래 설정된 최고의 처벌은 2년 징역으로 당국에서는 법률상의 목적에 적합치 못하다고 보고 있다. 더욱이 그 법은 조선을 벗어난 곳에서는 효력을 지니지 않으며, 일본인이나 외국인들에 대한 통제력도 없다. 이번에 제정된 법령은 이 모든 단점을 보완하여,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외국인들과 일본인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기존의 평화유지법도 그대로 효력을 지닐 것이다.

    249 평양 선교사들의 편지

    발간일: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평양 신문에서는 벌써 두 차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생각을 교환할 기회를 갖자고 평양의 선교사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러한 회의를 갖고 싶어하는 생각은 이전에도 표명되었다. 우리측의 요청에 대해 선교사들은 그러한 회의를 거절하는 내용의 서신을 다음과 같이 보내 왔다.(평양 선교단이 보낸 편지 사본이 이어짐.)

    250 신문 기자들과 선교사들의 회의 제안

    발간일: 웨스트 조선 데일리 신문(West Chosen Daily Newpaper))몇몇 신문 기자들이 평양의 선교사들을 회의에 초대했으나, 선교사들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신문 기자들의 초청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언가 깊은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문 기자들은 진심 어린 대화를 원하고 서로 우호적인 방식으로 만나고자 했을 뿐이다. 우리는 함께 서로를 더 잘 알게 된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밖에 다른 뜻은 없었다.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관해 우리는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고(思考)의 근원이 선교사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문제에 대해 미심쩍은 일들이 많이 있다. 선교사 한 명이 법정에 피고로 선 일이 있었다. 이밖에도 미심쩍은 일은 꽤 많다. 우리는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종교를 허용해야만 하고, 이것은 원칙적으로 한국인들 모두에게 관련된 일이 되겠지만, 이 종교를 전하는 사람들이 만약 일본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적절치 못한 것이 될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거의 없다.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본인들이 이 나라에서 어떤 일을 하든 선교사들은 그들과도 우호적이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선교사들의 일은 좋은 결과를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신문은 선교 활동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신문 기자들과의 회의를 사소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이 문제에 관여하고 있지 않으며, 신문 기자들은 정부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선교사들을 만나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려는 생각 외에 다른 의도는 없었다.종교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미움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이 나라의 현재 상황 때문에 이 회의에 관심을 갖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이 회의에 꼭 참석할 이유는 없지만 모요카(Moyoka) 변호사가 말한 대로 양측이 만나 서로 솔직한 생각을 나눈다면 굉장히 좋은 일이 될 것이다.1분 동안 울리게 된 교회 종(1919년 5월 21일, 세이센 니포(Seisen Nippo))평양에서 교회의 종들이 너무나 오래 시끄럽게 울리기 때문에 교회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매우 불편해 하고 있다. 가장 큰 침해는 남대문로(South Gate Street)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이미 보도된 바에 따르면 그곳에 사는 많은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서명을 해서 교회 종소리로 인한 침해를 막아 달라고 경찰서로 청원서를 보냈다고 한다. 경찰서에서는 세 가지 조건을 고려할 때 불평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해 교회 대표 카히 통군(Cahi Tongun)을 소환해서 그에게 주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종 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지만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칠 정도로 오래 치지는 않도록 할 것이라고 대답했고, 결국 향후로는 1분 동안만 종을 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