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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01 조선군 사령관의 희망

    작성일: 1919-03-13작성처: 조선국 사령관혼란 상태의 확산으로 무력 진압이 불가피해진 것에 대해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이번 일이 여러분을 비롯한 다른 사령부의 구성원들이 모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최하급의 일병까지 군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히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1. 한국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들의 잘못에 대해 따뜻한 동정심을 보여주어야 하며, 사랑과 지도가 필요한 불운한 동포로 대해야 합니다.2. 무기의 사용은 불가피한 상황이 될 때까지 억제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시위를 하거나 만세를 외치는 등 폭력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는 평화적인 설득으로 군중의 분산을 유도해야 합니다.3.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할 경우에도 무기 사용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4. 무력 사용의 필요성이 없어지면 바로 무력 사용을 중단해야 합니다.5. 불행히도 사상자가 생길 경우 사망자에게 적합한 예의를 갖추어 처리해야 하며, 어떤 모욕이나 무례한 대우도 엄격히 금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망자의 시신을 치우고 옮겨 매장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상황이 허용되는 한 필요한 시설과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6. 부상자의 경우 주의를 기울여 처리하고, 상황이 허용되는 한 상처를 잘 치료해야 합니다.7. 사상자의 가족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말고 깊은 동정으로 대해야 하며, 상황이 허용되는 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8. 어떤 사람을 해치기 위함이 아니라 소동에 참가하지 않게 하기 위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특히 노인과 어린이, 여성의 경우에 주의해야 합니다. 선교사 및 기타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잡히는 등의 아주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심한 주의와 인내가 요구됩니다.9. 여러분의 지휘를 받는 군병 및 장교들이 깨끗한 삶을 살며, 충성심과 용기를 앓지 않으면서 검소하고 예의바른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10. 각 본대의 사령부는 민간 당국과 경찰 기관, 예비군, 기타 본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과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202 1919년 5월 1일 현재 한국의 분쟁 관련 통계 자료

    1. 분쟁이 발생한 지역의 수                           577   (a) 군중들이 해산명령을 받고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해산을 했던 곳   341   (b) 폭동이 일어났던 곳                           236   경찰이 화기를 사용했던 곳                        185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이 일부 있었던 곳                1062. 사상자의 수 경찰과 헌병 한국인 사망 부상 합계 사망 부상 합계 8 120 128 398 830 1288 * 이 수치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집계한 것이다. 경찰에 보고되지 않은 부상자가 많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폭도들이 정부 건물과 학교에 입힌 손해     완파 일부파괴 전소 일부소실 합계 군청     5         5 면사무소 10 25 10 2 47 경찰서 13 29 3     45 우체국 3 7     1 11 일본인 학교건물 2             2 일반인 학교건물 1 3 1     5 지방법원     1         1 세관         1     1

    203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공포 통치

    현대식 취조“내가 죽을 때까지 고문을 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우리 형이 있는 곳을 말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이것은 벌써 몇십 분째 자신을 고문하고 있는 일본 순사들에게 이(Yi)가 한 유일한 대답이었다. 계속해서 여러 가지 고문을 받던 그는 마침내 판자에 묶였고, 무거운 장화를 신은 일본 경찰이 그의 다리를 짓밟았다. 그리고는 다시 심문이 시작되었다. “네 형제 놈이 숨어 있는 곳이 어디냐?”한결같은 대답이 다시 한번 나왔다. “나는 내 형이 있는 곳을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이 젊은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할 정도로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가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질렀는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라. 전국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해서 작은 역할을 했고, 숨은 곳을 말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 그의 죄이다. 하지만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악한이 아니고서야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벨기에에서 벌어진 것과 상당히 흡사한 방식으로 이 잔인한 독일식 고문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경찰은 직관적이거나 추론적인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고력은 느리고 서툴러서 진정한 수사력을 지닌 순사는 거의 없다. 더욱이 셜록 홈즈 식보다 훨씬 더 쉽게 정보를 얻어내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일례로 일본 경찰은 한국인을 상자 모양의 관 속에 집어넣어 두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정보를 빼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이런 고문을 당했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 고문이 먹혀들지 않으면 중지에 끈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발가락은 겨우 바닥에 닿게 하는 고문을 하는데, 이 고문은 경찰이 원하는 정보를 빼내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살이 다 벗겨지도록 때리고, 관절이 거의 어긋날 때까지 비트는 것도 효과가 있지만 이런 것들은 거의 모든 고문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할 것도 못 된다.물론 일본은 공식적으로 고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나처럼 고장나고 상처 입은 몸을 많이 보다 보면 공식적인 발언 따위는 무시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Yi)라는 젊은이는 자신이 잡히는 순간 고문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자기 형제가 숨은 곳을 말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이 젊은이가 자기의 형제를 보호하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혀야 하겠다. 자기들의 고문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순사는 이제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역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무고한 이(Yi)의 어머니를 체포해서 감옥으로 데려 왔다. 그들은 어머니의 사랑과 염려를 잘 알고 있었고, 그 마음을 이용해 이런 고문을 했다. 경찰은 어머니를 방으로 데려다 놓고는 그 아들을 앞세워 들어왔다. 그녀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닫기도 전에 경찰은 아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고통으로 소리를 지를 때까지 때리는 고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가혹한 경찰은 그녀를 보고 “아들이 어디 있는지 말해 보시지?”라고 재촉했다. 서둘러 말하지 않으면 더 때리겠다고 위협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망설였지만 가슴을 찢는 듯한 비명을 다시 들었다. “그만, 그만 해요. 지금 당장 말하겠습니다.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그때 고문을 하던 이들의 얼굴에는 분명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원하던 것을 얻어냈고,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졌다. 그러나 그 가련한 어머니에게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형을 희생시켜야만 하는 고통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린 아들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그냥 내버려둘 수 있었을까?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차마 믿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에 아직도 그런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곳이 있을 리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 여성이 그 불쌍한 아이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이며, 한 외국인 신사도 그 일이 벌어졌던 바로 그 때 감옥에 있었던 노인에게서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공포어느 날 저녁 내가 예전에 선교사였던 분과 내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손님이 왔다. 그는 40대의 한국인으로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 전 선교사의 비서였다면서 그를 만나서 몇 마디만 전할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다. 나는 그 대화를 엿듣고 싶지 않았지만 바로 내 옆에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약간은 듣게 되었다.박사: 어째서 이곳 서울에 계시는 겁니까?한국인: 저희 읍에서 시위가 있은 후 경찰이 절 뒤쫓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여기 서울에서 소요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박사: 무슨 일을 하셨길래 경찰이 쫓고 있다는 겁니까?한국인: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영어를 할 줄 알고 외국인들과 함께 지냈었기 때문에 교회나 학교와 관련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체포하려는 것 같습니다.박사: 하지만 부인과 가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오래 떠나 계셔도 되나요?한국인: 바로 그 문제 때문에 박사님을 뵈러 온 것입니다. 가족들에게는 돈이 좀 있어서 고생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 아내에게 걱정할 것 없다고, 가능하면 제가 T-로 가는 야간 열차를 탈 것이고, 자전거를 이용해서 가족들을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좀 전해 주십시오. 하루 집에서 숨어 지내고 다음날 밤에 기차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니면 읍내에 한국인 경찰이 한 사람 있는데, 경찰들이 아직도 저를 쫓고 있는지 그에게 물어 보아서 아니라고 하면 집에 계속 있을 겁니다.이틀 후 밤에 그는 박사를 만나러 다시 왔다.박사: 안녕하세요. 집에는 아직 안 가신 겁니까?한국인: 아직 가지 않았습니다. 일본 경찰들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어서 안전하지 않다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박사님, 오늘밤까지만 머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집에 가야만 합니다. 일본인들이 오후 1시 넘어서 길에서 발견하는 한국인들을 모두 때리고 있고,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제 아내에게 제가 안전하니 걱정 말라고 꼭 좀 전해 주십시오.여러분은 이 상황에 공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너무도 오랫동안 자유를 향유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일을 믿을 수가 없는가?주: 고등교육을 받은 이 불쌍한 한국인은 결국 잡혀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는 중노동 18개월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나를 위해서 독립신문을 몇 번 번역해 준 것뿐이었지만, 그가 체포된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어를 말할 줄 알고 교육을 잘 받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외국인들과 교분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으며, 이런 죄는 오늘날 한국인을 교수형 시킬 정도의 유죄가 된다.야만인의 농담3책 2교 완성그녀는 이제 스물두 살의 젊은 아내로 고향에서 한 번도 떠나 본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동네를 벗어나 본 일도 없고 자기 집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던 시골 아낙이었다. 그녀는 혼자 집에 남아 밭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위해 점심을 지으려고 불을 지피고 있었다. 일본군 한 명이 들어와 “성냥 좀 주시오”라고 말했다. 이 불쌍한 여자는 겁을 잔뜩 먹고 재빨리 말을 들었다. 그녀는 일본인들과 그들의 잔인성에 대해서 듣기만 했을 뿐 그 전에 일본인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p. 26그 일본군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여자에게 물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사람들은 다 어디 있나?” 순진한 시골 여자는 “저는 몰라요”라는 대답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일본군은 칼집에서 칼을 꺼내서는 날카로운 날을 그녀의 목에 갖다 대고 다시 물었다. “자,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불쌍한 여자는 벌벌 떨며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일본군은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는 “거짓말하지 마라. 여길 봐라”라고 말했다. 그는 탄약 주머니를 열어서 일부러 여자에게 탄피가 보이도록 총에 집어넣고 노리쇠를 당겼다. 그러고는 총구를 여자의 턱 바로 아래에 겨누고 다시 “자, 이제 말해라.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친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나?”라고 물었다. 여자는 “저는 몰라요”라고 말하면서 바닥에 쓰러져 실신해 버렸다. 그 일본군은 결국 떠났고, 자신이 그 여자를 멋지게 놀려 줬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른 동네에서도 어린아이들이나 순진한 여자들에게 겁을 주러 돌아다녔다. 그 불쌍한 여자는 이틀 동안이나 전혀 잠도 못 잤고, 조그만 소리만 나도 일본군이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세상에, 과장된 이야기겠지’라고 생각하지는 말길 바란다. 나 자신도 한때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야기가 과장되게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동양의 독일군이라 할 수 있는 일본군들이 정말로 아주 지독한 일을 기꺼이 저지르고 야만적인 행동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주의:(이 이야기는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친한 한국인 친구가 그 여자를 직접 보고 온 바로 다음날 내게 이야기해 준 것이다.)잔인한 폭행(저자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오후 12시 15분. 경찰서에 앉아 경찰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한 일본인 경찰관이 한국인을 뒤에서 때리고 있었다. 일본인 경찰관은 자기 칼집으로 그 한국인의 머리를 때리더니 얼굴을 치고 마구 걷어차다가 결국은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땅바닥에 누운 채로 그 한국인은 배, 등, 머리 할 것 없이 온갖 곳을 차였다. 그 일본인 경찰관의 눈에는 그 한국인이 한 마리 개 정도로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달려나가 그런 비겁한 짓을 말리려고 했지만, 내가 끼여들기 전에 다른 경찰관이 먼저 그에게 외국인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 잔인한 ‘법의 집행자’이자 ‘평화의 수호자’인 경찰관은 한국인에게 거칠게 꺼지라고 소리치면서 내 옆을 지나 경찰서로 들어갔다. 나는 “그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식으로 때리는 것이냐?”고 항의했다. 그 경찰관은 그 한국인이 경찰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심하게 맞을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비겁하고 야만적인 경찰관들이 사과를 하기는커녕 영어를 할 줄 아는 경찰관이 내 가슴을 가볍게 두 번 때렸다. 그는 사실 경찰관이 아니라 헌병대의 중위였다. 그리고는 내게 모호한 말투로 그곳에 내가 있는 것이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으니 나가 달라고 했다.그로부터 몇 주일 후 나는 그때 그 한국인처럼 대담하게도 경찰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총검을 든 일본군이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총검으로 찌르겠다고 두 번이나 위협을 하다가는 낮은 목소리로 ‘꺼져!’라고 말했다. 이것이 세계의 5대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계몽된 나라로서 문명국들과 똑같은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이다. 일본이 없애라고 요청하고 있는 인종 차별은 일본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는 사슬이고, 자기 자신을 옥죄고 있는 구속이며, 이 사슬은 일본이 이 잔인한 군국주의를 버리고 진정으로 평화와 정의의 길을 따를 때까지 일본을 붙들어매고 있을 것이다.현대의 순교자한 사람이 집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후에 오는 선천(Sen Chun)행 급행열차를 잡아타기 위해 타이슈(Taishu)에서 완행열차를 내렸다. 그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한 헌병이 다가 와서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인가?”라고 물었다. 그 젊은 남자는 집회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그러자 헌병은 대뜸 “아, 기독교인이군, 그렇지? 나를 따라 와”라고 말했다. 기독교 신자라는 것 외에 아무 잘못도 한 일이 없는 이 순진한 젊은이는 그 헌병을 따라갔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고, 그냥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고문을 당한 뒤에야 풀려났다. 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적어 보겠다.헌병 : “그래, 가장 위대한 신의 훌륭한 하인, 안녕하신가? 기독교인이니까 죽으면 바로 천국으로 간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너는 지금은 모르겠지만 여기가 바로 천국이야. 여기가 천국이라고. 천국에 가면 ‘천국의 빵’을 먹는다지, 여기 좀 먹어 보지 그래.” 그리고 그 헌병은 젊은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이게 바로 ‘천국의 빵’이야. 맛이 어때?” 그리자 다른 헌병인지 교도관인지가 와서 “세상에, 주님의 하인을 그렇게 때려서야 안 되지”라며 “그리스도의 제자여, 얼마나 사랑스러운 젊은이인가. 당신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다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이번에는 다른 쪽 뺨을 있는 대로 때리고서 다시 모욕적인 조롱을 계속했다.헌병 : “나랑 씨름 한 판 해보면 어때? 자네가 믿는 그 신은 굉장한 투사니까 당연히 내가 지겠지. 자, 한 번 붙어 보자구.” 그 교도관은 젊은이를 잡아채고는 일종의 특별한 ‘유도’ 기술로 그를 바닥에 내리 꽂았다. 그러고는 다시 일으켜 세워서는 “이런, 이게 무슨 일이야. 가장 위대한 신의 하인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다니. 그리스도의 제자여, 얼마나 훌륭한 젊은이인가”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고, 20일 동안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때로 그 교도관은 “오늘은 같이 찬송을 하자”고 하면서 젊은이의 찬송가책을 가져와 노래하는 체하기도 했다. 젊은이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심하게 매를 맞고 발로 차였다. 그러고는 기도를 하면서 젊은이보고 자신들이 한 말이 아름다웠다고 말하게 시켰다. 그들은 아마도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자주 한다고 듣고, 무의식적으로 기도문을 조금 배우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때 경찰관들은 그 젊은이에게 자기들이 ‘세 번 죽였다’는 한 노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감옥 생활은 두려움 그 자체였고, 기독교인들은 지독한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그 젊은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어떤 외국인은 그가 갑자기 너무 초췌해져서 거의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이러한 공포의 통치가 진정 어떤 것인지는 한국인들밖에 모를 것이다. 한국인들 가운데에는 매일 매일을 이런 긴장 속에서 살다 보니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아주 면역이 되어서 목숨에 대해 아예 미련을 거의 두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계속해서 수감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감옥 밖에서 사나 안에서 사나 불안하고 끔직한 일을 당하기는 거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 한국인이 체포된 것을 알고 그 동료들이 공포에 사로잡힌 일이 있었다. 체포된 사람은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고문을 당하면 자기가 아는 것을 다 말해 버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인지 그 남자는 심한 고문도 당하지 않고 체포된 지 하루인가 이틀 만에 풀려나서 동료들이 모두 무사했지만, 묘하게도 곧 그 그룹의 다른 사람이 붙잡혀서 무서운 심문을 당하게 되었다.많은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메리(Mary)라는 소녀가 있었다. 아주 밝은 성격에 똑똑하고 예쁜 데다 나름대로 매력도 있는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 소녀는 서울에 있다가 지역 시위가 벌어지기 하루 이틀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헌병은 당연히 그녀를 의심했고, 더구나 기독교인이던 그녀는 특히 더 미움을 받았다. 그녀는 시위가 있던 날 대부분 집안에 있었기 때문에 경찰관에게 꼬투리를 잡힐 일이 없었다. 그러나 메리(Mary)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경찰관은 결국 그녀를 체포하기로 했다. 그들이 쓴 방법은 이러했다.그들은 마을의 광(Kwang)이라는 어린 남자아이를 데리고 갔다. 그 아이는 겨우 열두 살 먹은 어린애에 불과했다. 헌병은 남자아이에게 메리(Mary)에 대해서 아는 대로 다 말하라고 했다. 아이가 거부하자 그들은 그를 때렸다. 그래도 싫다고 하자 계속 때리다가, 결국은 헌병이 아이를 짐짝처럼 들어서 방 끝으로 던져 버렸다.겁을 먹은 아이는 메리(Mary)가 자기들에게 깃발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아무런 혐의도 되지 않는 그 말 한마디에 불쌍한 메리(Mary)는 바로 다음날 체포되었고, 며칠 뒤에는 대단한 범죄자라도 되는 것처럼 감옥까지 18마일을 끌려갔다.일본인들의 만행이런 비극적인 이야기는 언제까지라도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쌓여 있지만,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사례만 보아도 명백한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감옥에서 소녀들을 발가벗긴 비열하고 추잡한 짓이나, 사람들을 산 채로 태운 이야기, 여자들을 총으로 쏘거나 총검으로 죽인 이야기를 더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쓰는 것은 병적인 취향을 지닌 사람들을 위해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를 지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잔학성을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독일이나 그밖의 다른 어떤 악폐 못지않게 나쁘다는 것을 전세계가 알아야 한다. 일본군의 사악함이 전세계인들에게 알려져서 망신을 당해야만 한다. 일본은 여론을 가장 무서워하기 때문에, 일본의 군국주의 독재에 반대하는 여론이 하나로 뭉치면 분명 일본을 개혁시킬 수 있다.

    204 암스트롱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1-03-22발신자: 수신자: A. E. 암스트롱(A. E. Armstrong) 목사님수신주소: 캐나다 토론토(Toronto) 연합 생명 빌딩(Confederation Life Building) 439암스트롱(A. E. Armstrong) 목사님께||3월 18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일에 대해 써서 보내 주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워싱턴에 갈 때 그 편지를 가지고 가서 사람들에게 읽어보게 할 생각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들은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고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재배(再拜)

    205 에르드만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0-01-03발신자: 수신자: 찰스 에르드만(Charles R. Erdman) 목사님수신주소: 뉴저지 주 프린스턴(Princeton)에르드만(Erdman) 박사님께||셸(Schell) 씨를 통해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 기사가 동봉된 12월 29일자 박사님의 서신을 보았습니다. 그에 대해 공식적인 답변을 하는 것이 좋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헤럴드에서는 아마도 답신을 보낸다 하더라도 신문에 게재하지는 않을 것이며|| 만에 하나 게재를 하더라도 구석진 면에 조그맣게 몇 줄 내는 것에 그칠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어쨌든 외국에 나가 있는 장로교 선교사 가운데에 헤럴드를 받아 보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박사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답변이 씌어지길 원하신다면 박사님의 의견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제 경험으로 보건대 그런 것은 무척이나 금방 잊혀지기 때문에 상당한 피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다시 상기시키거나 신문에 논의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재배(再拜)

    206 1921년 2월 23일자 뉴욕 타임스에서 발췌

    발간일: 뉴욕 타임스발간처: 1921년 2월 23일자‘최고의 증오 대상’인 한국인, 도쿄에서 암살되다!빙겐 쇼쿠(Bingen Shoku)는 일본 정부로부터 참정권을 얻어내기 위해 일본에 왔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가 암살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도쿄, 2월 18일 - 한국인 참정권 운동의 한국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한국과 일본의 동화 및 공존 정책의 강력한 옹호자로 알려져 있는 빙겐 쇼쿠(Bingen Shoku)가 어제 머물고 있던 도쿄의 한 호텔에서 암살되었다.도쿄에서 교육받았고 먼저 사망한 이토(Ito) 왕자의 천거로 한국 내무부의 관료로 임명된 후 서울 주재 공사가 된 바 있는 빙겐 쇼쿠(Bingen Shoku)는 일곱 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인들의 참정권을 청원하기 위해 도쿄에 왔다. 청원서에는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악한 운동이 모든 한국인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성명서가 첨부되어 있었다.청원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일반적인 한국인의 감정이 표현되어 있었다. “다수의 한국인을 포함하여 서명한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일본의 정책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새로운 정부가 한국인들에게 가져다 준 은혜에 충심으로 감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간단히 말해 암살 직후 일본정부는 민원식(Bingen Shoku)에게 서보쌍광장(瑞寶雙光章)을 추서하였다. 대신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이후 시신은 매장을 위해 서울로 운구되었다.반관적(半官的)인 『서울 프레스(Seoul Press)』의 편집자인 M. 야마가타(M. Yamagata)는 오늘 한국인이 가장 증오하는 인물이 민원식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독립을 기대하는 혁명적인 목적 대신에 일본의 동화 정책을 수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야마가타는 현재 도쿄에 있다. 야마가타에 따르면, 일본 통치를 지지하는 다른 주도적인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저명한 일본인들이 비밀리에 죽을 운명에 처해 있었다.

    207 피치가 보낸 전보

    발신주소: 상하이(Shanghai) 14중국 만주의 한국인 피난민이 수십만 명에 달합니다.굉장히 어려운 처지이며, 즉각적인 구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죽을 것입니다.기아 구제를 위한 기금이 급히 필요합니다. 해외 선교사 이사회에 급히 요청해 주십시오.적십자에서 구제 봉사자를 보내 주십시오. 미국 적십자사 상하이 지부.피치(Fitch)

    208 명함

    (명함)호텔 맥알킨(Mcalkin)헨리 정(Henry Chung) 공보관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 워싱턴 지부워싱턴 D. C. Loutinewtal Lrust 빌딩 905 (파란색 글씨는 원문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곳임)

    209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1-01-08발신자: 찰스 에르드만(Charles R. Erdman)발신주소: 뉴저지 주 프린스턴 신학교(The Theological Seminary)발신자: 찰스 에르드만(Charles R. Erdman)수신자: 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 목사님수신주소: 뉴욕시브라운(Brown) 박사님께||선교사들의 영향에 대한 신문 기사에 관해서 주신 서신에 감사드립니다. 현재로서 어떤 특정한 답신을 하는 것이 그다지 소용이 없을 거라는 데는 저도 박사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사설은 혹시 앞으로 소용될 수도 있으니 계속 가지고 있어 주시기 바랍니다.재배(再拜)찰스 에르드만(Charles R. Erdman)

    210 오웬스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1-01-07발신자: 수신자: H. T. 오웬스(H. T. Owens)수신주소: 대한민국 서울 시 세브란스 연합의과대학(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오웬스(H. T. Owens) 씨께||12월 9일자 편지와 함께 동봉해 주신 자료는 잘 보았습니다.굴릭(Gulick) 박사께 보낸 선생님의 편지 사본과 서울신문(Seoul Press)의 사설을 관심 있게 보았고|| 그 다음날 도착한 12월 12일자 서울신문의 우편엽서 발췌본도 잘 보았습니다. 제가 쓴 이사회 편지 가운데에서 선생님처럼 감사하게도 제게 특별한 정보를 가끔 보내 주시는 선교사님들께 감사하는 내용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와 굴릭(Gulick) 박사가 자주 회의를 갖고 있으며||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이 문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부인께 안부 전해 주시고|| 저도 두 분을 자주 생각하며 기도드리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