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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31 기독교 탄압에 대한 기록

    군인들이 놀라서 도망쳤다. 일부 젊은이들이 돌을 주워 들고 군인들에게 던져 댔다. 군인들이 몸을 돌려 총을 쏴서 네 명의 젊은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네 사람은 순안(Soon An)에 있는 안식일 재림 병원(Seventh Day Adventist Hospital)으로 갔지만, 그들이 움직일 수 있게만 되면 체포하려고 매일 병원으로 찾아오는 군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며칠 있다가 몸이 조금 나아지자마자 몸을 피했다. 그 중 두 명은 집에서 군인들에게 잡혀 지금 평양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3월 8일과 9일 군인들과 경찰이 교회 사제들과 직원들을 찾으러 왔고, 19일과 24일에는 경찰이 왔다. 그리고 4월 4일에는 일본 헌병과 경찰이 와서 몇몇 여자들에게 남편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그러고는 총과 곤봉으로 여자들 다섯 명을 구타까지 했고, 그 중 한 부인은 온 몸에 멍이 들었다. 4월 10일, 위협에 못 이겨 마을 하층민들이 교회 종을 떼어 냈고, 다음날 헌병들이 결과를 보러 왔다. 18일에는 일본인들이 다시 와서 통역을 통해 사람들에게 연설을 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외국의 악마’들에게 속은 것이라며, 그런 저급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그들을 타락하게 한 미국인들과 함께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성경에는 독립이나 ‘만세’운동 같은 이야기는 없으며, 4천의 기갑부대와 3천 명의 군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모두 처치하러 오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내쫓지 않고 계속 함께 산다면 그들도 총을 맞고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틀 내에 기독교인들을 내쫓지 않으면 죽게 될 거라고 위협을 했다. 그날 밤 전부터 교회를 싫어하던 두 명의 주점 주인들이 반쯤 취한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교인들의 집 문과 창문을 부수었고, 19일 낮에는 기독교인들의 집 가운데 여덟 집의 가족들을 쫓아냈다. 그러고는 기독교인들을 모두 마을에서 쫓아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헌병대에 보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이 보고서를 내면 그들은 헌병대에서 칭찬을 받게 될 것이었다. 내쫓긴 사람들은 사제와 장로, 집사, 학교 교사의 가족들이었고, 그날 밤과 아침에도 여성들과 아이들이 쫓겨났다. 그러나 이전에 헌병대 대장은 10일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마을에서 나갈 것을 명령했고, 마을의 원로에게 그 집의 가재도구들을 즉시 반값에 팔고 사람들을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그 대장은 바로 3월 7일 시위가 끝나고 네 명의 기독교인들을 체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명대로 시행된 후 대부분 남자들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기독교인 열두 가정의 가족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나 도피처를 찾아 떠났다.위 내용은 독자적으로 많은 증인들의 증언으로 확인된 것이며, 분명 사실대로 기술한 것이다.

    232 기독교 탄압에 대한 기록

    장춘(Chang Chun) 마을에서 경찰 지시 하에 대청소 작업4월 27일 일요일 경찰에서는 지역 경찰이 봄을 맞아 대청소를 하기 위해 마을을 방문할 것이라는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그 전에 기독교인들에게는 귀찮은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는 말이 있었다.마을 사람들은 자기들 집을 정성껏 청소했다. 교회의 돗자리도 모두 꺼내 먼지를 털고 바닥을 쓸고 닦았으며, 연단도 청소했다. 목사는 경찰이 오기 전에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일찍 모이라는 전갈을 모두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가 막 집을 나서려는 순간 일본인 책임자와 두 사람의 한국인 순사 그리고 두 사람의 서기와 두 명의 개 도축자들로 구성된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교회로 가서 교회 지도자 두 명을 불렀다. 경찰은 연단 위에 있었다. 일본인은 내려서서 바닥에 손가락을 문질러 보더니 손을 들고 “이 먼지를 좀 보시오”라고 말했다. 일본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바닥에 앉으라고 명령하고는 도리깨질 할 때 쓰는 것 같은 커다란 곤봉을 꺼내서 노인의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분개하여 “일흔 살 먹은 노인을 이런 식으로 때리는 거요?”라고 울부짖었다. 그 일본인은 “뭐, 일흔 살? 이 기독교인 놈이!”라고 대꾸하고는 더 세게 때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구타를 당했다.그러고는 교회 명부를 가져다가 그 마을의 기독교인들 이름을 적어서 집집마다 찾아 다녔다. 그러나 그 집이 깨끗이 청소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보지도 않고 사람들을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마구 때렸다. 어떤 집에서는 여자들을 세워 놓고 때리다가 또 앉으라고 하곤 때렸다. 한 나이든 여자는 구타를 당한 뒤로 병이 들어 있다.사람들은 개 도축자들로부터 자기들 개를 지키기 위해 개를 숨겼지만, 이 도축자들은 개를 찾아내 열 마리 정도를 죽였다. 또 그들은 오는 길에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개를 살 수 있으니 이 마을로 오라고 말해 두어서 그들에게 한 마리당 약 2엔을 받고 많은 개를 팔았다.경찰이 장로의 집에 왔을 때 그 장로는 집에 혼자 있고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나가고 없었다. 장로는 설마 그들이 자신을 또 때리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냥 집에 있었다.경찰은 거기서 다시 그의 온 몸을 때리다가 멀리서 그것을 본 장로의 아들이 참지 못하고 집으로 오자 장로를 두고 그 아들을 때렸다.장로의 집을 떠나 다음 집으로 간 경찰은 집 문패의 이름을 보고 기독교인 집이 아닌 것을 확인하자 바로 또 다음 집으로 갔다. 기독교인 집인 것을 확인하고는 들어가 바로 사람들을 때리기 시작했다.그 노인은 내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우리가 당한 일은 이루 말할 수도 없지만, 그 일본인이 나에게 기독교인 놈이라고 욕을 했을 때 나는 내가 우리 주를 위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233 만국예수교의에게

    대한예수교도 50만 명을 대효한 우리는 만국예수교우에게 삼가 글을 올리옵나이다.슬프게도 우리 한국은 위급존망의 때를 당하였으며 어육잔포의 화를 만나 이에 인도의 정의를 가지고 사해를 일가로 아는 여러분을 향하여 피를 뿌리며 눈물을 머금고 정성으로 호소하나니, 상대의 인의를 본받으며 인류의 행복을 도모하시는 여러분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밝히 살피시어 유력한 협조를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우리 한국은 해동의 오랜 나라로 단군이 개국한 이래로 4천년의 역사를 가지며 2천만 국민의 결사를 고수하던 바 상대에서 은혜에 은혜를 더하시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지 불과 30여 년에 50만 명의 교도가 구름 같이 일어나며 3천여 개의 교당이 전국에 들어섬으로써 동양을 기독교화 하는 데 한 큰 원천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만나 병합을 당한 후로 선교의 자유가 박탈되며 교육기관이 유린되어 일국의 생사가 엄엄하더니 1911년에 허무한 암살안은 예수교 박멸의 주의에서 나온 바 목사 장로 등 105인의 인도자를 3년간 무죄수감하야 혹형이 여지없다가 세계의 공론을 의지하야 악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매 그 독수와 음모가 갈수록 심한지라 우리 대한 민족은 깊이 참고 굳게 견딤으로 기회를 기다리드니 요행히 독일의 군국주의가 파괴되고 민족자결의 복음이 세계를 진탕하는도다. 우리의 쌓이고 가득하였던 불평은 일시에 폭발하야 전국일치로 독립을 주창하며 자유를 회복하고자 할 때 한 곳도 폭렬한 행동이 없고 평화적 수동적 반항을 계속할 뿐이어늘 저 완명무도한 일본인들은 악독하게도 살생과 구타를 가하며 감옥에 집어넣을 틈이 없도록 인민을 체포하며 심지어 어린아이와 약혼한 부녀자까지 말할 수 없는 능욕과 악형을 당하고 있으며, 교회당과 학교를 불살라 버려 남은 수가 1백여 개에 불과하다. 그 잔학한 행동과 처참한 경향은 도저히 이와 같은 짧은 글에 기록할 바가 아니므로 이에 그치며 다만 이 형언할 수 없는 것 외에도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오직 전지전능하진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실 줄을 믿는 고로 이같이 여러분께 간구하오니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다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라오며 동시에 여러분의 심후한 도덕적 원조를 바라옵니다.

    234 만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호소함

    잔인한 일본 정부로 박해를 받고 있는 한국의 50만 기독교도를 대표하여 아래에 서명한 우리 목사들과 장로들은 만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삼가 호소하는 바입니다.한국은 독특한 언어와 문화와 문명을 지닌 채 4천 년 이상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존재해 왔으며, 1910년 대다수 한국 국민들의 의지와 희망에 반하여 총칼을 앞세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습니다. 병합된 이후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비참한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세계에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의 기독교 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병합된 이후로는 교회의 사업은 일본인들의 온갖 수단에 방해를 받아 왔고, 기독교인들은 계속해서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1912년의 악명 높은 ‘음모 사건(Conspiracy Case)’이 교회에 대한 불법 박해의 명확한 예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살해당했습니다. 성경과 다른 기독교 문헌들은 불태워지거나 파기되었으며, 선교 학교에 다니는 우리의 아이들은 침략자들에 의해 온갖 수모와 조롱을 당해야 했습니다.일본 당국은 기독교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한국에서 다양한 이교도적 활동을 부추겼으며, 진실한 기독교 원리를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가짜 기독교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불교 사원과 신사(神社)의 건립을 권장하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든 기독교 교회는 불태우고 있습니다.이러한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국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꾼들을 교육하고 교회를 짓고 중국과 일본과 시베리아와 그리고 이웃한 여러 국가들로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더 강건하게 성장할수록 일본의 박해는 더욱 거세져 가고 있습니다.일본 정부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통치에 만족하며 번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한국의 선교에 대한 진실을 교묘하고 영악하게 은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단통치의 시기 동안에도 한국의 기독교도들은 조국인 한국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4년간 지속된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한국인들은 연합국의 승전 소식을 듣고 환희에 넘쳤으며, 모든 국가의 자유와 권리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윌슨(Wilson) 대통령이 옹호한 민족자결이라는 위대한 원리를 열렬히 환영하며 믿었습니다. 그래서 세계대전이 민주주의 국가의 승리로 끝났을 때 한국인들은 한국이 승리한 기독교 국가들의 도움으로 정의를 되찾을 수 있는 시기가 왔다고 믿었습니다.1919년 3월 1일 우리는 한국 전역에서 일본의 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여기에는 2천만 민족의 한결 같은 목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결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결단코 어떠한 법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단속했습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만세’를 외쳤을 뿐입니다.그렇지만 우리 한국인들이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인들은 더 없이 극악하게 우리 민족을 학살하고 고문했습니다. 위로는 총독으로부터 아래로는 하급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은 무장한 채 우리의 독립운동을 짓밟으려고 결정했던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이전부터 주둔하고 있던 4개 사단 이외에도 2개 이상의 보병 사단과 6개 대대와 4백 명의 헌병을 한국에 진주시켜 비무장 상태의 한국인들을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일본 군인들은 워싱턴의 선교 이사회와 국무성에 부분적으로 보고된 바 있는 모든 종류의 야만적인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주요한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야만적인 군인들은 기독교인들의 집에 난입하여 노파들을 구타하고 유약한 어린 소녀들을 욕보였습니다. 그들은 선교 학교의 여학생들을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긴 다음 거리 곳곳을 끌고 다녔습니다. 많은 교회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고, 대부분의 선교 학교들은 폐쇄되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기독교인의 집에서 성경을 탈취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지도자급 목사들과 장로들이 감옥에 수감되거나 살해되었습니다.이 모든 사실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며, 외국인 선교사들이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의 기도와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발신일: 1919-05-01

    235 -

    발신일: 1919-04-23발신주소: 한국 평양벌써 1개월째다. 나는 과거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또 이런 일이 있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나는 정의를 위해서 정의를 사랑하는 미국과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분명히 알기를, 만약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나라와 식민 정부 체제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과 한국에 있는 일본 정부라는 것을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미국의 신문과 잡지들은 과거 여러 곳에서, 특히 벨기에에서 독일이 자행한 끔찍한 일들을 4년 동안 무수히 전했다. 독일의 자리에 일본을, 벨기에의 처지에 한국을 끼워 넣으면 지금 이곳에서 10년 동안 벌어져 온 일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며,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실제로 그보다 더 끔찍하다는 것뿐이다. 정부와 법도 일본인들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대립하는 경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동전을 던져 볼 필요조차도 없이 너무도 뻔하다. 더욱이 최근 일본이 평화 회담에 참가하여 독일인들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정치적인 문제를 모두 제외하더라도 일본에게는 다른 나라를 지배할 권리가 없다. 이것은 1백 년 전의 피지 섬 주민들이 당신들의 본국을 지배할 권리가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만약 피지 섬 주민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당신들의 나라도 이곳의 한국인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이곳의 모든 정부 청사의 상징은 칼(劍)이다. 경찰은 물론이고 학교 교사들이나 우체국 직원들, 법무관들도 모두 칼을 차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그 칼을 상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통치하고, 정의를 집행한다. 더욱이 이 상징은 항상 정복자의 상징일 뿐 절대 수호자나 협력자의 상징은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되었던 한 가지 작은 예만 들어도 정의가 어떻게 집행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한국인 여관 주인이 며칠 동안 일본인 손님을 받았다. 일본인은 돈을 지불하지 않고 그냥 들어오려 했기 때문에 한국인 여관 주인이 그를 붙잡아 세웠다. 일본인은 며칠 안에 돈을 가져오겠다고 했고, 한국인은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옥신각신하는 것을 들은 다른 일본인이 경찰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들은 지방 법원으로 가서 재판을 받았다. 일본인은 풀려났고,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돈을 받지 않고 들여보냄으로써 존중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인이 일본인들에게 항상 존경심을 보이고 대우를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훈계를 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모든 일이 그런 식이었다.그리고 정부 소유의 회사는 체계적인 토지 인수 계약을 실행해 왔다. 구 한국 정부는 한국인들에게 오랫동안 토지를 빌려주고 곡식에 대해 5분의 1 비율의 소작료를 받았다. 지금 사람들은 수확물의 2분의 1에서 3분의 1을 소작료로 내야 하며, 그나마도 밀려서 내고 있다. 그러면 땅은 매각에 붙여지고, 한국인들에게 살 기회가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땅을 살 수가 없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어 만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왜 그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고향을 떠나 북으로 가는지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있다. 유일한 답이 있다면 그것은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이득이 있다고 해도 혹독한 기후 때문에 만주는 한국인들에게 결코 좋은 곳이 못 되지만, 오직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들 그리로 가는 것이다. 내년부터는 한국어로 진행하던 학교 수업도 모두 일본어로 진행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모두 일본어를 듣고 있지만 경찰 직원들은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국민들은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지만 정부의 일에는 대표권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정부는 학교 교육을 위한 세금 대부분을 일본인 아동을 위한 특수 학교 운영에 사용하곤 한다. 부유한 한국인들은 1년에 두 번씩 정부 관리의 감사를 받아야 한다. 우리 선교 학교에서도 한국인은 정부 허가 없이는 가르칠 수 없으며, 모든 사제들과 교회 관리들 그리고 교회는 거의 매달 보고를 해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모든 면에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다.이러한 모든 것이 비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말해질 수도 있다.담배는 정부가 독점하고 있고, 흡연률은 증가하고 있으며, 담배를 피우는 젊은 남자들에게 많은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매춘이 허가되어 정부의 보호 아래 번성하고 있다. 지난 여름 시 당국 관리들은 여러 부유층 사업가들을 회의에 불러 내빈 접대를 위한 시설이 너무 낙후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 댄스홀을 짓기 위해 사업가들이 각자 약 1천 엔씩을 기부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오락 유형이다. 일본에서는 호텔 숙박비를 지불하면 밤에 시중들 여자까지 붙여 주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 관습은 한국에 재빠르게 도입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식 관습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미래는 밝을 수가 없으며, 오히려 사람들의 피로 얼룩질 뿐이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거나 권력을 쥔 당이 축출되고 더 인간적인 정당이 들어서지 않는 한 미래는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합방이 이루어지기 전 퇴위한 후 자신의 나라를 일본인들에게 넘겨 버렸다. 한국인들은 모두 그의 정신적 상태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당시 그의 고문은 역사상 가장 큰 매국노로 여겨진다. 어린 아들은 아홉 살 무렵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 가 일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살았다. 그는 1월 자신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한 바로 며칠 뒤 일본 공주와 결혼을 해야만 했다. 황제의 죽음은 그로부터 며칠 후 국민들에게 알려졌는데, 사인은 공식적으로 뇌졸중으로 보고되었다(여기서 ‘공식적’이라는 단어에 유의하기 바란다. 일본인들은 공식적인 것은 무엇이든 진실이며, 따라서 아무리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말을 모두 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는 황제가 자살을 했거나 혹은 일본이 평화회담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보내고자 한 거짓된 성명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돌았다. 어쨌든 약소국의 자결권에 대한 논쟁이 심해지고 있던 심리적인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전 황제의 장례식은 3월 3일과 4일에 치르게 되어 있었고, 정부 부담으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서울 시내 행렬은 일본인들이 맡았고, 동대문에서 무덤까지 약 17마일은 한국인들이 맡았다.외국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몰랐지만 2월 마지막 주쯤 사회 불안감이 크게 고조되었다. 3월이 되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위가 있다면 아마 서울에서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월 1일 오후 전국 약 10개 주요 도지에서 똑같은 유형의 집회가 일어났다. 이곳 평양에서도 그런 집회가 세 번 있었다. 모두 죽은 황제의 추모식으로 인해 시작된 모임이었다. 여기 사람들 가운데 세 명이 그 중 한 집회에 참석했는데, 단순하고도 보기 좋은 의식(儀式)이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독립선언서 낭독이 이어졌고, 진행 계획과 방법이 정해졌다.이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특별한 점은 신체적인 위해나 모욕 혹은 일본인들이 할 만한 어떤 저항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공식적인’ 보고와는 달리 아주 훌륭하게 실행되었다. 특정 정치 단체가 다수를 차지한 몇몇 지역에서는 일본인들 사이에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한 한국인 경찰의 말에 의하면 한 건의 자살 사건이 보고되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에게 보복 행위는 야만적인 행위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보복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공고가 여러 개 나붙었다. 이 동안 한국인들이 저질렀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범죄가 있다면 서로 모여 ‘만세’라고 외치며 독립을 성원한 것뿐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일체 조용하고 질서 있는 행위로서 하나의 온화한 대규모 집회라는 측면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극도로 온순하고 비저항적인 태도에 일본인들은 크게 분개하여 살인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사례는 너무 우습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어느 곳에서는 한 거구의 한국인이 경찰 뒤에 서서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는 동안 잠시 그를 팔로 감아 붙잡고 있었다.또 경찰이 고개를 너머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저지하려고 할 때의 일화도 있다. 그날은 시골 사람들이 무더기로 오고 있었는데, 경찰은 두세 명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경찰들을 잡아서 묶어 놓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앞서 가던 사람들이 경찰을 잡고 나머지 사람들이 지나가기도 했다. 이 집회가 심각한 범죄가 되는 이유는, 한국인들에게는 집회를 갖거나 자유로운 언론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형의 모임에서는 심지어 우리 신학 모임에도 첩자가 있다. 올 겨울에 있었던 겨울 성경 교실에서 다섯 명의 남자들이 부흥을 위해 기도를 했는데, 그 소식이 알려지자 그들은 체포되어 무슨 부흥을 빈 것인지 말하라면서 구타를 당했다. 자유나 독립, 민주주의 같은 단어는 모두 터부시되고, 그런 말을 사용하기만 해도 의심을 받으며, ‘위험한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 신문에는 이런 ‘위험한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람들 이야기가 끊임없이 실리는 것을 볼 수 있다.한국인들의 상태를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사례가 있다. 어떤 시골 마을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헌병대와 일반 군인, 소방대원까지 포함하는 의미의) 경찰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연설을 했고, 몇몇 일본 농부들도 왔다. 약 여덟 명의 헌병들이 총을 들고 있었으며 10여 명의 농부들은 몽둥이 따위를 들고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해서 듣지를 않자 헌병들은 마구 총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한국인들이 총을 빼앗자 일본인들은 모두 도망을 쳤다. 그리고 나서 사기가 오른 군중들이 헌병들이 더 빨리 도망가나 보려고 뒤를 쫓았다. 헌병 대장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총을 꺼내 뒤로 발사했고, 한 사람이 배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군중들이 바로 헌병 대장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교회의 장로이기도 했던 죽은 남자의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저지했다. 그 노인은 죽은 사람이 자기 손자라고 하면서 어떻게든 일본인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은 독립운동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군중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 후 약 사흘이 지나 그 시체를 증거로 유지하기 위해 외국인 의사가 불려 갔으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한국인들이 사용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상점을 닫는 것이다. 서울과 이곳에서는 몇 주 동안 한국인 상점 전체가 문을 닫았다. 대체로 일요일마다 열리던 장날에도 훨씬 조용하다. 학교에도 교사들이 없다. 그러나 정부가 운영하는 학교에는 사람들이 약간 있다. 학교로 돌아온 사람들 대부분이 강제로 그랬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어떤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조국의 인구를 물었다고 한다. 바로 2천만이라는 답변이 나왔는데, 이것은 한국의 역사적인 인구이다. 나라 면적을 묻는 질문에는 한국만 따진 답이 나왔다. 결국 일본인 교사는 포기를 했다.현재 이곳의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어떤지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아주 일부 이야기만 하더라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며칠 밤을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곳에서는 나라 밖으로 나가기 전에 모든 것이 검열되기 때문에 정규적인 경로를 통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진실을 담은 서신이 처음에 의도했던 목적지에 닿을 가능성은 없다. 우리들의 편지를 외국으로 내보내 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왔고, 우리는 그 방법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진실은 쓰디쓴 약과도 같은 것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진실을 증오한다. 미국 사람을 화나게 만들려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라는 말이 있지만 일본인들을 화나게 하려면 진실을 말하라고 하면 된다. 이 나라에서 유일한 영어 신문의 편집자인 일본인에게 어떤 선교사가 쓴 사설에 잘못된 것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사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나중에 그는 어떤 여성에게 자신도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지난 2개월 동안 몇 번이나 사임하려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고 했다. 결국 그런 신문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일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감옥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 모든 사람은 고발을 당하기도 전에 매를 맞았다. 사실은 진정한 재판이라곤 없으며,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에 형벌이 정해져 버린다. 더욱이 지난 10년 동안 한국인들은 변호사나 친구들이 경찰 허락 없이 만나러 올 수도 없었다.그리고 마찬가지로 재판도 경찰 마음대로 연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아주 무고한 사람이 재판을 받기까지 몇 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이제 이곳 감옥과 경찰서에는 사람이 하도 많이 잡혀 있어서 누울 자리도 없을 정도이며, 앉기라도 하려면 서로 어깨가 부딪쳐야 한다.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아주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만 하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불려 나가서 아무데나 구타를 당한다. 경찰서에서 약 10일간을 있다가 나온 한 소년이 몇 가지를 말해 준 일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한 차례밖에 맞지 않았지만, 그 한 번의 구타가 무척 심했다고 한다. 그는 팔을 있는 대로 뒤로 당겨서 묶인 다음 두 시간을 그대로 있었다. 그 소년은 가슴에 고통이 너무 심해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며, 그때가 최악이었다고 했다. 그는 맞는 동안 여러 번 정신을 잃었는데, 일본인들은 얼굴에 물을 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한 뒤 다시 때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안됐다며, 자기들이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모든 것을 다 실토하면 훨씬 더 나은 대접을 받을 거라고 했다고 한다. 또 한 남자도 구타당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대나무 몽둥이로 스물아홉 대를 맞는 벌을 받았다고 했다. 한 일본인이 열두 대 정도를 때리고는 지친 나머지 다른 사람을 불러야 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 와서 또다시 매질이 계속 되었다. 사람들이 묶여 있는 고문대는 십자가 형태였는데, 그들은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의 십자가를 감수해야 한다고 수차례 말했다고 한다. 상당히 우스운 농담이다. 평양에서 감옥에 있는 중에 죽었다고 알려진 사람만도 여럿이다. 내가 들은 한 사례는 매를 맞아서 그 사람의 옷이 갈기갈기 찢기고 팔은 어깨까지 꺼멓게 변하고, 한 쪽 다리는 부러졌으며, 손가락 끝이 모두 없어졌다고 했다. 또 한가지 고문 방법은 사람들의 손톱을 살로 밀어 넣거나 혹은 손가락 끝을 태우는 것이다. 어떤 여성은 허리를 몇 시간이나 묶여 있어서 풀려난 뒤에도 몇 주 동안이나 손과 팔을 사용하지 못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만세’를 외치지도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일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신문들은 이 한국인들을 ‘절반만 문명화된 인종’이라고 한다.감옥에 있는 소녀들은 끊임없는 감시를 당한다. 감옥에서 풀려 나온 한 소녀는 감옥에 있는 동안 수차례 옷을 다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 중 의료 검진을 위해서 그랬던 적은 한 번뿐이었다고 했다. 당시 그녀는 아무런 취조도 받지 않았다. 소녀들이 화장실에 갈 때조차 감시인이 따라 붙었다.그런 모습이 보인 것은 처음 며칠이었다. 그 후에는 도시에서도 그다지 움직임이 없었고, 시골로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경찰에서는 헌병대와 군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군인들은 총검을 차고 와서 마음대로 휘둘렀다. 한 외국인 의사는 머리와 몸에 총검으로 벤 자국이 여덟 군데나 되는 환자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방어와 평화 유지 목적 외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부정하고 있다. 이곳에서 사람이 잡히면 지나치는 일본인마다 심지어 일반 시민들까지도 일본인이면 누구나 그 사람을 때리고 발로 차고 총으로 내리친다. 소녀들은 머리를 전신주에 묶인 채로 맞았다. 한 노인은 나이든 여자들이 쓰러진 것을 보고 도와주려고 갔다가 잡혔다. 일본 교회에서 예비 조사를 받고 나왔을 때 그 노인은 걸을 수도 없었고 집으로 가기 위해 인력거에 앉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신학 강좌가 3월 5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3월 4일, 아직 여기처럼 시위가 벌어지지 않았던 남쪽 지역에서 다섯 명의 남자가 왔다.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기숙사 앞에 서 있거나 안에 있다가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다. 다음날 아침, 약 60미터 거리의 신학교 건물로 걸어서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뿐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구경꾼일 뿐이었고 아무런 혐의도 없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일에 대해 아무런 배상도 요구할 수 없다. 더 지독한 것은, 무고하다는 것이 밝혀지면 며칠 내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골 지역에서는 사람들에게 총이 발사되었기 때문에 여기보다 더 심했고, 여러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5일에는 약 12명이 이곳 병원으로 실려 왔다. 모두 총상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한 쪽 팔을 잃었고, 한 사람은 다리를, 또 한 사람은 뒤에서 배에 총을 맞은 열두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53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한 외국인 의사가 40여 명의 부상자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총상이었다고 하며, 실제로 모든 총알은 뒤에서 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여전히 방어의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소녀는 다리에 총을 맞고 이틀 동안 경찰서에서 물도 음식도 없이 감금되어 있었다. 일본인 의사가 무슨 치료라도 해주었느냐고 묻자 소녀는 의사가 검사를 했다고 대답했다. 상처는 의사가 당시 재검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부푼 상태였다. 이틀간의 치료 끝에 총알이 빠져 나왔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 이상 소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헌병대는 계속 이 병원에 와서 한국인들에게 4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정부 병원으로 가라고 재촉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외국인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알게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내가 가장 잔인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처음에 소방대원이 투입되었던 부분이다. 그들은 집에 불이 났을 때 지붕을 잡아당기는 데 쓰는 긴 소방용 낫으로 무장하고 있었다.이곳에서 이 갈고리는 사람들 머리를 잡아채는 데 사용된다. 병원에서도 그런 경우가 한 번 있었다. 동해안에 갔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곳에서 지독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이 갈고리가 ‘암흑 시대’의 새로운 무기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과 갈고리가 합쳐졌다. 그야말로 기막힌 생각이며, 분명 기막힌 방식으로 사용될 것이다.그 모든 사건들의 결과로 이제 학교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신학교의 수업도 이틀이나 사흘 열렸다가 닫아야 했다. 신학 수업을 열었다간 학생들을 위험하게 만들거나 분명 체포되게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3월 1일 이후 대학은 두 번이나 문을 열려고 했지만 경찰에서는 그렇게 될 경우 학생들을 체포하겠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게다가 아직 체포되지 않은 교사도 두 명 정도밖에 없었고, 우리가 모두 체포되었다가는 다시는 가르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했다. 거의 모든 사제들과 장로들, 교회 조력자들이 이 나라에서 일할 가능성은 없으며, 창문과 의자, 종들이 모두 부서지고 책은 불탄 교회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교회 난로와 성찬식 도구들도 모두 부서졌다. 어느 곳에서는 일본인들이 일요일 아침에 종을 치고는 교회 마당에 모인 사람들을 붙잡았다. 다른 곳에서는 교회에 불을 질렀고, 그 수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본 최악의 이야기이며, 여러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도 직접 가서 정보를 얻은 영국과 미국의 영사관들도 확인해 준 바이다. 물론 나는 지금 중요한 사실만 말할 수 있을 뿐이지만 언젠가 분명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올 것이다.서울 남쪽, 수원 근처에서 있었던 일이다. 4월 5일과 6일

    236 길버트 뱅크스가 보낸 편지

    발신자: 교회 국제친선촉진위원회(Committee for the Promotion of International Friendship throughout the Churches)한국의 선교사님들께,약속했던 대로 동경으로 돌아온 뒤 제가 받았던 인상에 대해 간략한 편지를 씁니다. 연방 선교이사회(Executive of the Federated Missions)에서 제 보고를 듣고 그 신뢰도에 대해 논의하려고 두 번 모인 적은 있었지만 아직 공식적인 성명에 대해서는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내용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곧 또 한 번 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한편 이곳에 있는 다른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위원회 회원들은 일본인들이 명확한 행동을 취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저의 한국 방문을 돌이켜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 교회연방(Japanese Federation of Churches)의 초청을 받은 연방 선교회(Federated Missions) 대표로서 제가 우리의 모든 조사 활동에서 교회연방(Church Federation)의 이시자카(Ishizaka) 씨와 일본 평화 협회(Japan Peace Society)의 가와카미(Kawakami) 씨와 협력할 수 있었고, 실제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 아닌가 합니다. 처음에는 확실히 깨닫지 못했지만 저는 저와 함께 가서 그 모든 상황에 직접 맞닥뜨리고 경험한 일본인들이 앞으로 만나는 다른 일본인들도 한국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가장 좋은 제안을 해결책으로 내놓을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제 진정한 사명이라고 믿습니다.저희는 일본 교회연방(Japanese Federation of Churches) 이사회에 두 차례 보고를 했고, 연방 선교회(Federated Missions) 이사회에도 두 차례 보고를 했으며, 몇몇 일본인 단체들과 개인들에게도 보고를 했습니다. 저희는 일단 시작을 한 것 혹은 호의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촉진한 것 외에는 아직 명확한 결과를 들이댈 수는 없습니다.이틀 전 저는 우리의 신념에 대해 이시자카(Ishizaka) 씨와 가와카미(Kawakami) 씨와 다음과 같은 성명에 동의했습니다.1. 한국인들이 겪은 고통에 대한 선교사들의 전반적인 발언은 공명 정대한 여론의 재판을 거쳐야 할 것이다.2. 한국 선교 조직의 전반적인 경향은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다른 자유 세력들이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줄 정도로 충분히 영향력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 대한 확실한 증명을 항상 기대하면서 일본에 기대하는 것이다. 3. 대체로 정보 부족으로 인해 대다수 일본인들은 한국의 독립운동이 선교사들의 조장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오해를 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한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4. 기독교인과 비(非)신자들, 상당히 많은 일본인들이 이제는 한국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적인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면 기꺼이 희생을 하려고 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 더 나은 새 정권을 세우는 것에 대해 일본이 하루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일본과 한국 양국에 모두 손해이며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는 의식이 깊어지고 있다.5. 일부 민감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전세계를 향해 자신들이 현재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관심이 없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전혀 무기력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도 노력은 하고 있으나 곧 나타날 성공적인 결과가 아직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우리 한국 대표단이 세 개의 대표적인 일본인 단체에 보고를 했을 때 가까운 미래에 무언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제 개인적인 신념은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그 중 한 단체에는 전임 장관이 두 명이나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아직은 뭐라 말할 단계가 아니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해 제가 접한 모든 소식은 현재까지 이런 신념을 강화해 주는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제가 가와카미(Kawakami) 씨에게 상술한 다섯 가지 성명을 읽어 주었을 때 그는 괜찮다면 한국의 선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덧붙이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한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인 우선’이라는 말을 하게 된 상황은 이해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인들도 우선’이라는 의식도 함께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태도야말로 전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앞당기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위와 같은 메시지가 전달되자 일본 교회연방(Japanese Federation of Churches) 이사회에서는 최근의 한국 파견단이 알아낸 일부 정보들을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종교 신문에 발표하고 다음으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일반 신문에 발표될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하위 위원회를 지정해 일본 평화 협회(Japan Peace Society) 및 기타 단체들의 대표들과 협력할 한국 내 근거지로서 정보국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6월 28일아마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것은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현재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한국의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를 벌이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 이시자카(Ishizaka) 씨는 시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회 두 군데에서 최근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일들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발언을 들은 한 선교사는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참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6월 26일 저녁에는 동경 YMCA에서 공개 회의가 열렸으며, 대부분 대학교의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여섯 명의 일본인들이 모여 전반적인 한국 상황을 아주 솔직하게 논의하고, 취해져야 할 조치에 대해 광범위한 제안을 했습니다. 이 회의를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하나의 예로 든다면 일본에서 이제 시기가 무르익었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릴 새로운 날이 밝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재배(再拜)길버트 뱅크스(Gilbert Banks)

    237 한국에 신도주의(Shintoism)를 펼치고 있는 일본인들

    전국적으로 많은 사당에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 증가작성일: 1920-01-07일본인들이 대규모로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신도주의(Shintoism)가 유입되었으며, 이는 기독교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많은 곳에서 산꼭대기가 신도(Shinto) 사당으로 덮이고 있다. 토착민들에게 있어 이 사당은 ‘존재하는 힘’을 의미하며, 사당이 세워지는 것은 이러한 힘에 대한 지지를 의미한다.현(現) 네이자(Neija) 천황을 위한 거대한 신도(Shinto) 사당을 서울 남산에 세우기 위해 1백만 엔 이상이 모금되었다. 새 총독 관저 자리에도 사당을 세울 계획이다. 국내에 세워지는 모든 정부 청사에는 사당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신도(Shinto) 의식은 국경일에 치러진다. 정부는 이러한 의식이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도주의가 하나의 우상 숭배라는 생각이지만 공식적으로 확정될 수도 있다. 공립 학교에서는 도덕이 주요 과목 가운데 하나로 조상 숭배를 가르치고 강조한다. 매일 아침 학교에서는 반(半)종교적인 절을 하면서 일과를 시작한다. 이 학교들에서는 신도 의식을 모든 휴일에 열며, 어린이들은 천황의 사진에 절을 한다. 신도주의의 한 측면으로 일본의 불교도들은 한국의 불교도들을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서울 시내에는 이슬람 사원이 세 개 있다. 대학교도 있고 초등학교도 많이 가지고 있다. 현재 잡지를 하나 발행하며 현대 문학을 출판하고 있다. 아주 큰 규모의 불교 수도원이 인근 마을에 포교당을 열었다. 감옥에서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죄수들에게 봉사할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불교도들에게만 이러한 것이 허가되고 있다. 법정 선서는 불교 승려가 진행한다.한국은 ‘활짝 개방되어 있으며’, 최근 전해진 바에 의하면 경찰에서 한 본토 한국인 성직자를 불러 교회에서 담배 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힐책했다고 한다.

    238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선교회(Australian Presbyertain Mission) 패튼 기념 병원(Paton Memorial Hospital)

    작성일: 1919-04-24작성처: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선교회(Australian Presbyertain Mission) 패튼 기념 병원(Paton Memorial Hospital)3월 21일 밤 탄성(Tansung)에서 사람들이 실려 오면서 우리 구역 내에서 최초의 발포 소식이 전해졌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이 정부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지만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받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음과 같은 경로를 거쳐 증거를 입수하게 되었다. 3월 22일 저녁 부상자가 너무 많이 실려 온 관계로 우리 의사들은 그들을 모두 치료할 수가 없었다. 일반 진료 시간이 지난 시각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정부 병원의 한국인 의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하자 이들이 자진해서 와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또 한 번 부상자들이 한꺼번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 당시 우리 의사들은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약 30리 떨어진 곳까지 왕진을 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 도움을 청하면 즉시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 의료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보려고 내가 직접 갔다. 그때도 역시 업무 시간이 끝난 뒤였기 때문에 나는 원장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직 중이던 담당자는 자기들은 만세를 외친 환자는 치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병원에서 부상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내게 의료진의 도움을 받고 싶으면 먼저 원장에게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던 한국인과 나는 인력거꾼에게 한국인 의사 중 가운데 사람의 주소를 받아서 그 의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병원 업무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즉시 올 수가 있었고, 기꺼이 와 주었다.다음날 정부 병원에서 일하는 다른 한국인 의사가 원장 대신 와서 전날 저녁 도와주기를 거절한 것에 대해 사과를 했고, 약 두 시간 후 그 원장이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는 직접 사과를 했다. 그는 자기 병원에서 일부 부상자들을 돌려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몰랐던 일이었으며, 환자를 돌려보낸 직원들은 징계를 받았다며,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도와줄 것이며, 우리가 환자를 돌볼 여력이 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정부에서 돌봐 주겠다고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 사과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 이곳의 적십자사 회장으로 있는 지방 지사가 우리에게, 치료비를 낼 수 없는 환자들에 대한 의료비는 적십자 기금에서 지불하겠다고 제의하고, 치료해 준 것에 대해 우리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뒤인 4월 7일 제1 부지사가 개인 비서와 정부 병원 관리자, 한국인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는 정부에서 전국적으로 적십자 본부를 세우기로 했다며, 다른 곳보다도 특히 진주(Chinju)에서는 앞으로 어떤 부상 환자도 받거나 치료하지 말고 지금 치료하고 있는 환자들도 병원에서 내보내라고 했다. 그는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부상자들이 폭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제안에 동의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첫째 병원은 누구든 치료를 받기 위해 오는 사람은 모두 치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부상자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고, 둘째로 우리가 그들을 돌려보낸다면 우리가 환자들을 돌려보낸다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고, 그런 보도가 나가면 병원의 존립 자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부상자들이 폭도들이었다 하더라도 경찰에게는 언제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설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부지사는 내가 자신의 제안에 따르지 않으면 자신이 이 문제를 서울에 보고할 것이며 그럴 경우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치료를 받기 위해 온 부상자들을 돌보지 말라는 제안에 따르기를 거부한 것이 우리 본국에 알려진다면 본국의 사람들은 우리의 태도를 칭찬할 것이 틀림없다고 응수했다. 결국 그는 우리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적십자 기금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경우에 한해 그 문제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우리는 그 문제를 그대로 두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4월 11일, 헌병대와 경찰 총경, 그리고 여러 경찰관들이 와서는 병동들을 다 돌아다닌 뒤(이미 여러 차례 행해진 일이었고 그럴 때마다 모든 시설을 제공해 주었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몇몇 사람들을 경찰서로 데려가서 조사를 한 뒤 조사가 끝나면 되돌려 보내겠다고 했다.상태가 심각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네 명은 들것에 실려서 보내야 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체온이 39.4도였다. 조사가 끝난 뒤 그들은 우리에게 돌려보내지지 않고 정부 병원의 적십자 병동으로 보내졌다. 이 병동은 정부 병원 길 건너에 있는 한국식 여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정부 병원 의사들이 가서 진료는 하지만 수술은 할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에는 우리 병원에서 환자들을 데리고 가서 그곳에 보내는 것은 결국 그들을 정부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우리 의사들에게 상당히 심각한 위반 행위가 되는 것이었다.그러므로 나는 다음날 데이비스(Davies) 박사와 함께 경찰 본부장을 만나러 가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는 조사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며,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사람들을 우리 병원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게다가 조사가 끝나면 그 사람들이 우리 병원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적십자 병동으로 돌아갈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조사가 끝나면 사람들을 우리에게 돌려보내겠다는 일전의 약속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그들이 어떤 종류의 ‘선택권’을 가지게 되었는지 말할 수 있을 만큼은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이 일이 있은 후 경찰은 정기적인 정부 조사에서 우리가 항상 제공해 왔던 병원 운영 정보와 우리 직원들에 관한 모든 정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데이비스(Davies) 박사는 업무 허가를 내주는 서류는 자신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리는 인증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정식 허가를 받은 한국인 의사들과 함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고 부상자가 워낙 많이 들어와 바쁜 중에만 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지난 금요일까지는 꽤 조용했다. 그날은 이런 식으로 처음 소동이 벌어졌을 때 체포된 사람들의 예비 공판이 있던 날이었다. 법정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그날 일이 끝나자 사람들에게 죄수들과 그 간수들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검(劍)을 꺼내 명령에 협조하게 했다. 사람들은 물론 그 요구에 따랐고, 자리가 마련되자 간수들이 죄수들을 데리고 나와 감옥으로 가는 길로 데리고 갔다. 그 뒤를 가족들이 울면서 따랐고 구경꾼들도 따라갔지만, 전체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전혀 폭력 시도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군인 세 명이 감옥으로 가고 있는 행렬의 뒤에 따라 붙더니 총을 쏘았다. 우리 건물은 법정과 워낙 가까워서 총성 같은 소리는 다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소란이나 환호 같은 것은 전혀 없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군인들이 총을 위쪽으로 발사했다고 하지만, 한 사람은 발에, 또 다른 사람은 다리에 상처를 입어서 뼈가 부러졌고, 몸을 관통하는 상처로 죽은 사람도 있었으므로 총이 다 위로만 발포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리가 부러진 그 환자가 우리 병원에 막 들어와서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헌병대와 경찰이 와서 우리에게 그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그 사람을 경찰서로 데려가 조사를 하려고 한다고 했다. 다리가 부러져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말이다. 그러고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하려면 붕대를 모두 벗겨야 한다면서 우리가 응급 처치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에게 응급 처치도 하지 않고 그를 이송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의학적 지식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후 정부측 의사가 현장에 와서 환자를 옮기기 전에 응급 치료를 할 것을 권했다. 경찰은 부상당한 우리 환자들을 대기실 밖으로 내보냈고, 역시 정부 병원 적십자 병동으로 보냈다.이런 무례한 행동 외에도 지역 신문과 서울신문(Seoul Press)에는 부상자들이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적십자 병원으로 가지 않고 하루 60엔을 지불해야 하는 선교 병원(Mission Hospital)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적십자 병원이 의심을 받게 될 거라는 내용의 공고가 실렸다. 그러나 현재 적십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는 열다섯 명이 있으므로 의심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경찰은 우리 환자들 열 명을 데려가서 그들을 적십자 병동으로 보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알기로 우리 병원으로 오는 중이었던 두 사람도 그곳으로 쫓아 보냈다. 게다가 치료비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도 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무료로 치료를 해주고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돈을 받는다. 그러나 적십자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수는 15명이지만 우리 병원의 입원 환자 수는 39명이다.어제 서울에서 관리가 내려와 우리에게 현재 폭동 중에 경찰이나 기타 관리들의 행동과 관련해 할말이 없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그에게 이 편지에서 내가 쓴 내용 대부분을 말해 주었다.처음에 적십자 병원을 찾아가지 않은 것이 분명한 부상자들에 대한 신문 공고에 관해서는, ‘처음에는 정부 병원에 적십자 병동이 없었으며’ 정부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 환자들은 쫓겨간 사람들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 이것은 물론 명확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최근의 일은 우리 여자 학교와 관련된 일이다. 우리는 나가서 만세를 부른 교사들을 해고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사실 당시 경찰에서는 그들에 대해 고발을 접수하고 재판에 회부할 가치가 있다기보다는 풀어 주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239 감옥에서의 일제 탄압

    작성처: H. M. 브루엔(H. M. Bruen) 목사시위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던 3월 8일 제3 도시 교회(Third City Church)의 장로님 아들이자 정규 회원인 김용해(Kim Yong Hai)라는 젊은이는 일본인 관리에게 잡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머리와 목뒤를 여러 차례 발로 차였다. 그는 경찰서로 끌려 왔을 때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위 내용은 직접 그 장면을 본 목격자로부터 들은 것이다. 그 젊은이는 2주 동안 감옥에 잡혀 있었다. 그 동안 옆 감방에 잡혀 있던 그 목격자는 풀려났고, 그 젊은이가 감옥에서 받은 형벌의 고통으로 여러 차례 울부짖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는데, 감옥의 쇠 열쇠로 머리를 자주 때렸다고 한다. 풀려나서도 그는 머리의 고통을 호소했다. 풀려나고 며칠 뒤에 그는 병이 났고, 머리가 너무나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머리 한쪽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결국 헛소리까지 하다가 약 열흘을 앓은 끝에 죽었다. 그가 죽던 날 밤 그는 착란 상태에서 자신이 무고하며 처벌이 너무 심하다고 항의를 하고 있었다. 그를 간호했던 의사는 그의 사인(死因)이 머리를 맞은 것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도 사체와 목을 직접 보았는데, 두개골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는 일본인 변호사의 비서로 시내에서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부친은 아직도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며, 또 다른 가족 일원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이곳에서 가까운 행정 소재지에서 있었던 시위 참가자 가운데 세 명이 충에 맞아 죽었고, 부상자가 상당 수 발생했으며, 약 4, 50명이 잡혔다.부상자 가운데 내가 진찰했던 한 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오후에 시위가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오후 늦게 그를 비롯하여 열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부상당한 사람이 있는 여관에 도착했다.일본군 세 명과 경찰관 여덟 명이 와서 그 부상자에게 떠날 것을 명령했다.내게 이야기를 해준 그 사람의 동생이 어째서 무장도 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에게 총을 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군인 한 명이 총으로 그를 내리쳤다. 동생이 맞는 것을 본 그 사람은 이의를 제기하다가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상처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런 대우에 항의했다가 목에 또 총을 맞았다. 그곳에는 최소한 열 명의 정규 관리들이 있었고 모여 있던 사람들은 열다섯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목에 총을 쏜 것은 일본인 상인이었다. 그날 총을 쏜 것은 그 두 명의 일본인 민간인이었던 것 같다.감금되었다 풀려난 사람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가 또 있다. 그 사람이 얘기해 준 바에 따르면 손가락 사이에 쐐기를 넣고 손가락 끝을 묶는다고 한다. 그러고는 팔이 마비될 때까지 그것을 돌린다. 이런 식의 고민을 직접 보고 증언한 것만 벌써 두 번째 들었다. 총상으로 죽은 사람들 숫자는 축소되어 보고되고 있으며, 사망자 기록이나 매장은 전혀 하지 않는다. 4월 11일 나는 약 70명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재판에 참석하느라 하루 종일 법원에 있었다. 그 중에는 군중 속에 끼여 있기만 했을 뿐 만세를 부르지도 않았다고 증언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검사는 6개월형을 구형했다. 모든 일이 아주 심하게 부풀려지는 것 같았다.

    240 경상남도에서 있었던 독립운동 시위와 관련되어 발생한 사상자(1919년 4월 21일까지)

    경상남도의 북동부에서 많은 사상자가 있었지만, 믿을 수 있는 정보가 없는 이유로 위 수치에는 북동부 사상자 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음.경상남도 통계의 뒷이야기여기에는 낙동강 북동쪽의 수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일본인들에게 미츠요(Mitsuyo)라고 알려져 있는 밀양군(County Miryang)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곳과 기타 인접 지역에는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다. 말 편자 모양을 하고 있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의 커다란 계곡에서 대한민국 최악의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독립을 간절히 원하던 많은 마을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 지역 관리들은 군대와 경찰력이 증강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시위가 있고 얼마 후에 계곡 입구를 막고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무사히 빠져 나온 사람들 말에 따르면 학살이 이어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산허리가 너무 가파른 나머지 빨리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파른 산허리를 오르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무사히 도망친 사람들이 전해 준 이야기는 정말 끔찍한 이야기였다. 어떤 이들은 죽은 사람 수가 50명에서 1백 명에 이른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1백 명이 넘게 죽었다고 말한다. 이 사건에 관한 정보는 네 가지 다른 정보원을 통해 들어오는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똑같다. 그들이 미리 공모하고 그랬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일본 당국이 이 지역의 외국인 출입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문제에 대해 외국인 증인은 확보할 수가 없다. 강간, 고문, 기타 잔혹한 사례들도 보고되고 있다. 이 지역은 부산(Fusan)에서 북쪽으로 38마일 떨어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