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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51 상하이(Shanghai)에서 체포된 한국인들

    프랑스인 거주지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일본 경찰 활동 (5월 24일, 고베(Kobe),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14일 상하이(Shanghai) 프랑스인 거주지에서 일본 경찰이 막 도착한 두 명의 한국인 망명자들을 체포했다. 상해 가제트(Shanghai Gazette)에서는 그 두 사람의 한국인 이름이 윤운산(Yun Wun-shan)과 신훈면(Shin Hun-mien)이라고 전했다. 이 두 사람은 상하이(Shanghai)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이 체포된 죄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두 사람은 다른 대부분의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프랑스 자치 당국에게 있어서 정치적 망명자를 인도하는 전례를 세우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일본인들은 프랑스 당국의 허가 없이 신훈면(Shin Hun-mien)을 체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일본인 경찰이 신 씨가 임대한 집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체포할 수 있는 공식적인 서류를 전혀 보이지 못 했다. 신(Shin) 씨는 프랑스 영사의 허가를 요구했으나 일본인들은 이를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두 명의 일본인이 남아서 신씨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허가를 받으러 갔다 왔다. 그로부터 약 세 시간이 경과된 뒤 일본인들이 프랑스 영사로부터 소환장이라는 것을 받아 가지고 왔다. 소환장의 효력에 의해 신(Shin) 씨는 체포되었다. 이것이 오후 3시에 일어난 일이었다.오전 9시에 체포된 윤운산(Yun Wun-shan)의 경우는 달랐다. 유양리(Yu Yang Lee)의 집을 일본 경찰이 포위했고,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가옥 두 채를 수색했다. 이들 집에서 발견된 서적들과 서신들은 모두 조사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들 사이에 상당히 유명한 인물로서 상하이(Shanghai)에 막 도착한 윤운산(Yun Wun-shan)이 체포되었다.여러 일본인들이 미리 대기시켜 둔 차로 그를 데리고 갔고, 서둘러 일본 영사관으로 갔을 것이다.이 한국인들의 체포에 관한 다른 내용은 신(Shin) 씨에게 제기된 죄목이 강도죄였다는 것인데, 그는 한국의 귀족 집안 출신으로서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므로 강도죄라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죄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고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경제 과정을 마쳤다. 그는 4년 전 중국으로 왔고, 현재 한국인 클럽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일본 경찰이 프랑스인 거주지에서 어떤 불법 행위를 했는지를 증명하는 사법 절차도 밟지 않고 사람들을 체포하도록 허가를 받았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보인다.이것은 일본인들이 동양 지역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일본인들에 대한 보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텐진(Tienstien)에서 미군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분란에 대한 보도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 모두가 같은 맥락의 사건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동양의 영혼과 육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절차를 확고히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252 수촌(Su-Chon) 사건 보고

    작성처: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 조사수촌(Su-Chon) 마을은 이전에 대학살이 있었다고 보고된 재암리(Chai-am-ni)에서 4, 5마일 정도 떨어진 아름다운 계곡에 자리한 마을이다. 나는 1919년 4월 17일 오후 4시에 계곡과 마을 어귀쯤에 당도했다. 길 왼편으로 측면에 위치한 높은 둑 꼭대기에 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이곳이 수촌(Su-Chon) 마을인지 물었다. 그녀는 “네, 마을은 언덕 끝에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마을에 관해 두어 마디 더 묻자 여자는 불안정한 목소리로 “기독교인이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신지요?”라고 물었다. 그 여자는 대답 대신 서둘러 길을 건너와서 내 손을 잡고는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우리 마을은 다 타 버렸고, 교회는 부서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상처를 입었답니다. 제발 와서 마을을 좀 봐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온 것이 바로 그래서라고 대답하고, 자전거를 타고 앞장을 섰다. 그 여자는 옆에 서 있던 두 소년에게 나를 소개했는데, 그 소년들은 목사의 아들이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언덕 꼭대기에 서서 군인들이 가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을 무척이나 두려워했고, 군인들이 완전히 가는지 확인하려고 초조해 하고 있었다.마을마을은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로, 여러 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만, 일본인들이 와서 이곳을 잔혹하게 망쳐 놓았다. 좁은 길에는 잿더미가 쌓여 있었고, 마흔두 채 정도 되는 집들 중에서 남은 집은 여덟 채뿐이었다. 아직 잔해를 치우려고 시도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집을 다시 지으면 전처럼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나 있겠는가? 나이 든 아주머니들 몇 명이 얼마 안 되는 가재 도구들 옆에 앉아 있었는데, 슬픔에 잠겨서 맥이 풀린 모습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꺼려하고 불편해 하는 기색을 보였다.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잔인한 화염이 그들의 집을 휩쓸고 지나가고 그들에게서 지상의 모든 안락을 빼앗아 갔을 때 그들이 스스로 자진해 버리기를 원하지는 않았는지 우려했을 것이다.밭에서는 어린아이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먹을 것이 있어야 하지만 쌀과 다른 식량들은 모두 파기되었던 것이다. 경찰과 군인들이 떠나자 사람들은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모두들 자신들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 주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처음의 충격 상태에서는 벗어났지만 군인들이 다시 돌아와서 자신들의 집을 파괴했던 것처럼 또 잔혹한 행위를 할까 봐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4월 6일의 사건 개요날이 밝기 전 사람들이 모두 자고 있을 때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엉 지붕에 불을 붙였고, 이 불은 급속히 번져 집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사람들은 서둘러 나와 온 마을이 불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몇몇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시도했지만 군인들이 그들에게 총을 쏘고 총검으로 찌르고 때리면서 그들을 막았다. 사람들은 그저 옆에 서서 마을이 불타 재로 변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끝낸 뒤 군인들은 떠났다. 죽은 사람은 한 명뿐이지만 중상을 입은 사람이 많다고 했다. 나는 집집마다 불이 옮겨 붙은 것이 바람 때문이었는지 물었다. 사람들은 “한 번에 마을 여러 곳에 불을 놓았고, 군인들이 성냥을 가지고 다니면서 여러 집의 이엉에 불을 붙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을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어떤 집들은 몇 야드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바람으로 모든 집에 불이 옮겨 붙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더구나 마을은 작은 계곡과 언덕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 세 군데 모두가 파괴되어 있었다. 내가 부상자들을 보고 싶다고 하자 사람들이 어떤 집의 안쪽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그 안에는 아주 심각한 상태의 중년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 남자의 왼쪽 팔은 팔꿈치 아래부터 원래 크기의 두 배로 부어 있었고, 넝마로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안에서는 메스꺼운 냄새가 났다. 그 남자는 기독교도였고, 마을에 불이 났을 때 밖으로 나왔다가 군인 한 명의 공격을 받아 검에 찔렸다고 했다. 그 남자는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했고, 심하게 아프다고 했다. 호흡은 1분에 약 36회였고 맥박은 120이었다. 그는 무척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고, 수척해져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를 즉시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 상처를 씻고 깨끗한 붕대를 감아준 뒤에 나는 그 불쌍한 사람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과 앞으로도 치료해 주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다행히도 그 다음날 우리는 그를 정부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지역 경찰이 그를 병원으로 옮기기 전에 집에서 보고는 바로 “우리가 한 짓이 아니다”라고 했다. 나는 “당신이 그랬죠”라고 대꾸했지만, 그는 끝까지 우기면서 “이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반대했지만 그 경찰은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다.내가 그 집을 떠날 때 한 노인이 막대기를 들고 와서 심한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나는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웃옷을 걷어올리자 위쪽에 5, 6개의 구멍난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그 노인은 불이 나던 날 아침 한 군인이 총검으로 찌른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내게 여기저기 초록색으로 남아 있는 상처를 보여주면서, 다른 군인이 총으로 내려치면서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그가 골치 아픈 짓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위협이 될 사람 같지는 않았다. 나는 또 다른 집으로 가서 바닥에 조용히 누워 있는 두 남자를 발견하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우리를 심하게 구타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들은 마을 밖으로 끌려가 길 한쪽에서 곤봉으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들의 몸을 보았는데, 멍든 상처가 실로 소름끼칠 정도였다.교회에 대해서는 확실한 말을 할 수 없었다. 교회에 우연히 불이 났는지 일부러 방화된 것인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다.나는 이제 가야겠다고 말하고, 부상자들의 생명을 구하려거든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사람들은 내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군인들이 언제나 갈까요?” “언제나 사람들이 와서 도와줄까요?”라고 물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고, 아직도 화재나 발포, 체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작별을 고하고, 다음날 부상자들을 도와줄 사람과 함께 올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다시 와 달라고 부탁했다.비고이런 일을 당할 정도로 이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이 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만세’를 외쳤을 뿐이지만 그것은 한국인 전체가 한 일이다. 그리고 헌병이 살해당했지만 그것은 몇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있었던 일이고, 그 일이 있었던 마을은 이미 불탔다. 이것은 그들의 정복자가 하는 일이며, 마을 사람들은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런 잔혹한 일이 왜 벌어졌는지를 물을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다. 그들은 노예나 한낮 개일 뿐이고, 자신들을 무력으로 통치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자비심으로 자신들을 살려줄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우리를 이렇게 취급하는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 죽든지 아니면 자유를 찾을 때까지 일본에 대항할 것이다”라고 말했다.주.그 다음날 여러 선교사들이 그 마을을 방문했지만 경찰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53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한국인 부상자들의 사례

    작성일: 1919-04-01작성처: F. G. 베세이(F. G. Vesey) 사제 면담1919년 4월 1~5일1. 송시웅(Song Si Ung), 포천(Po Chun), 마흔일곱 살앞사람(1부 16번 사례 참조)과 같은 증거를 제시함. 이 남자는 두개골 위쪽에 총을 맞았음. 루드로우(Ludlow) 박사가 총알을 뽑아 냄. 종교는 없음.2. 성명리(Syung Myeong Ri), 덕산(Duksan), 서른두 살다리에 총을 맞고 루드로우(Ludlow) 박사의 수술을 받음. 이 남자는 정상적인 의식(意識) 상태가 아니므로 자세한 조사가 불가능함. 위 사람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는 데 참여. 종교는 없음.3. 산선난(San Syen Nan), 포천(Po Chun) 산면(San Myen) 선달리(Syen Tal Li), 스물일곱 살장날에 솔무장(Solmoo Chang) 시장에 갔다가 약 2백 명의 다른 이들과 함께 ‘만세’를 외침. 헌병들이 와서 사람들에게 시장에 가서 만세를 부르지 말 것을 경고하였지만 군중들은 계속 ‘만세’를 외쳤다. 사람들은 막대기나 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전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인 헌병들은 허공에 발포를 했지만 일본인 헌병들은 사람들을 향해 발포를 했다. 아홉 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남자는 다리에 총을 맞고 몰래 세브란스까지 도망 왔다. 종교는 없음.4. 박윤낙(Pak Yun Nak), 고양군(Ko Yang Koon) 치도면(Chi to Myen) 도당기(Totangki), 스물다섯 살 사면(Sa Myen) 교회 신자. 마을 사람들 전체와 다른 마을 사람들이 3월 31일 모두 모여 ‘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행군했다. 폭력은 쓰지 않았다. 그 후 기마 헌병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만세와 행군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사람들은 그대로 했고, 그날은 아무런 폭력이나 문제도 없었다. 5일 뒤 서울에서 여러 헌병들이 내려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그 전날 ‘만세’를 외쳤는지 조사를 했다. 이 남자는 “예. 그렇지만 우리는 명령대로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남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형무소가 아닌) 총독 관저 근처에 있는 경찰서로 끌려가 매질을 당했다. 나는 그의 몸에 있는 멍 자국을 보았다. 그는 12시에 30대, 2시에 30대씩 60대를 맞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는 현재 병원에서 치료를 기다리고 있다.아래 젊은이들도 정확히 일치하는 증언을 했다.5. 정훙봉(Chung Hung Pong), 열여섯 살6. 이준새(Ri Chun Sai), 스물한 살7. 장우상(Chang Oo Sang), 스물네 살그들은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왔지만 매질을 당한 뒤 이곳으로 왔다고 말하고 있다.8. 박자구(Pak Cha Kwo), 천읍(Chun Ub) 이정문(Ri Chung Moon), 우매면(Umai Myen) 방고리(Pang Ko Ri), 마흔한 살4월 3일 병원에 도착. 목에 심한 총상. 바로 치료에 들어가 목숨을 건짐.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장날에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폭력은 전혀 없었다. 저녁에 일본이 헌병들이 그들을 공격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을 입었다. 이 남자는 목에 심한 상처를 입어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증언을 하지 못했다.9. 김금동(Kim Kum Tung), 충청도(Choong Chong Do), 열다섯 살(만 열세 살)아버지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왔다. 그는 허벅지와 팔에 총을 맞았다. 다음 증언은 그의 아버지가 한 것이다. 작은 규모의 그 마을 사람들은 4월 1일 저녁에 약속한 대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한밤중에 언덕에 불을 밝혔지만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여덟 명의 일본인 헌병들이 와서 20명 가량의 이 마을 사람들에게 총을 발포했고, 그 결과 한 사람이 죽고 열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10. 방충호(Pang Choong Ho), 같은 동네, 스물다섯 살위와 비슷한 증언.그의 동생 방신식(Bang Sin Sik), 스물한 살다리와 팔 여러 군데에 총상.그리고 그의 형은 죽었다.11. 박성군(Pak Syung Koon), 같은 마을, 마흔네 살발포에 대해 위와 비슷한 증언. 이 남자는 쇠 총알을 맞았다. 그는 여러 군데 타격을 입었다. 12. 이복윤(Ri Pok Yun), 수원(Suwon), 스물여섯 살그는 3월 31일 300~350여 명의 이웃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위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마을에서 면사무소까지 행진을 했다. 그곳에서 면장이 그들과 합류한 뒤 모두 함께 경찰서로 갔다. 담당 한국인 경관이 나와서 “나는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경찰이고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은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계속 ‘만세’를 외쳐 주세요. 우리가 독립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조금 더 가서 돌연 세 명의 일본군들이 총을 발사했고, 두 명이 맞아 쓰러졌다. 나머지 시위자들은 도망쳤지만 이웃 두 명이 부상당한 것을 보고 4, 50명의 사람들이 돌아왔다. 이들은 바로 체포되어 묶여서 수원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곳에 이틀 동안 구금되어 있으면서 수색을 당하고 조사를 받으며 50~90대를 맞고 풀려났다. 부상당한 두 사람도 집으로 보내졌다. 한편 한 일본인 의사가 부상자들을 진료하고 총상을 입은 이 환자의 다리를 탈지면으로 감싸주었다. 그는 4월 4일 세브란스 병원으로 왔다. 그는 시위자들은 전혀 폭력을 쓰지 않았고, 단지 한국 국기를 흔들면서 독립을 외쳤을 뿐이라고 주장했다.1919년 4월 5일 이후 면담 자료13. 송수동(Song Soo Tong), 양평 구읍(Yang pyeong, Koo Ub), 30세4월 3일 5, 6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독립을 외쳤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헌병대에 가서 그들을 풀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 다시 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여러 명의 헌병들이 도로 옆 언덕에 숨어 있었다. 헌병들은 총을 발사했고, 그 결과 여섯 사람 가운데 다섯 명이 죽었으며, 상당수가 부상을 당했다. 군중들은 흩어졌다. 폭력적인 장면이나 폭력 행위는 전혀 없었으며, 돌이나 막대기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14. 이양주(Ri Yang Choo), 수원(클락(Clark) 박사가 보고할 것임.)15. 가인준(Ka In choon), 서울(쿤스(Koons) 씨가 보고할 것임.)16. 윤준(Yun Choon), 양주(Yanju), 서른여섯 살3월 18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역 헌병대에 가서 ‘만세’를 외쳤다. 헌병대에서 세 사람을 체포했고, 그 때문에 한국인들이 다시 모여 그들을 풀어 줄 것을 요청했다. 경관들은 사람들에게 흩어지라고 하고, 사람들이 떠나지 않자 그들에게 발포를 해서 약 20명이 쓰러졌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사람들은 도망쳤고, 이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으나 나중에 일어나 겨우 집으로 도망쳐서 4월 15일까지 숨어 있었다. 그가 세브란스로 왔을 때 몸은 아주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헌병들이 먼저 폭력을 쓴 뒤에 한국인 시위자들이 막대기 등을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254 부백(Pupaik)에서 쫓겨난 기독교도들

    다음의 이야기는 먼저 한국인들이 평양의 선교사들에게 전해 준 이야기를 듣고, 두 번째로 모펫(Moffett) 박사와 가일(Giles) 씨, 레이노(Reinor) 씨가 5월 16일 그 장소에 직접 다녀와서 전해 준 이야기이다.4월 22일경 부백(Pupaik)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거나 체포되었던 기독교인들이 모두 마을에서 쫓겨났다는 보고가 평양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지독한 일이라서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젊은이의 입으로 직접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은 모두 “그럴 리가 없어요. 뭔가 잘못된 거겠죠”라고들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직접 가서 조사를 하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다. 지금까지 기회가 없어 오늘에야 그곳에 가게 된 것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신께서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 분명하다.우리는 오전 5시 급행열차로 평양을 떠나 순안(Soonan) 역에서 내려 마을까지 약 15리를 걸었다. 마을에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해서 논쟁을 했는데, 우리에게는 아무런 지식도 안내인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순안 교회로 갔는데, 그곳에서 운 좋게도 한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다른 마을에서 온 기독교인으로 막 우리가 가려던 방향으로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우리 짐도 들어주고 우리에게 정보를 주었다. 그는 자기 일을 제쳐 두고 오후 내내 우리를 도와주었다.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줄 수 있었던 사람은 거기 그 사람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마을로 출발했는데, 돌연 그 지역을 맡고 있는 조수와 마주쳤다. 그는 우리와 함께 가겠다고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었다.우리는 마을에 도착해서 마을에서 쫓겨났던 사람들 상당수가 그 전날 밤에 돌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를 보고 그들이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그리고 지사를 만나러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그 마을 이장을 만났다. 그 지역의 지사도 그날 마을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딱 맞춰서 그곳에 간 셈이었다. 우리로서는 모든 일이 착착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하루만 더 일찍 갔어도 우리는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위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럼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하겠다.3월 초 부백(Pupaik) 마을 사람들은 독립 시위를 벌였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을 제어할 정도로 경찰이나 헌병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그 일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한 달도 더 지나서 군대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헌병대장이 마을로 와서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으고 연설을 했다. 그는 한국어를 매우 잘했기 때문에 통역을 두지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했다.그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한 마을에서 함께 사는 것은 분명 나중에 위험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바로 다음날 달갑지 않은 사람들(기독교인들)을 모두 몰아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군인들이 와서 마을 전체를 ‘마구 쏠 것’이기 때문에 결백한 사람이나 죄를 지은 사람이나(즉 비신자와 신자를 뜻함) 모두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회의를 열고 그 문제를 논의했다. 그날, 즉 4월 18일 밤 모든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몇몇 사람이 고생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결국 기독교도들이 모두 쫓겨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정쯤에 모여 일을 시작했다. 그 비열한 짓을 하기 위해 특정한 사람을 뽑았는지 어쩐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아마도 여러 해 동안 기독교인들을 못마땅해하던 한 사람과 마을의 술집 주인 두 명이 사람들을 내쫓는 일을 맡았던 것 같다. 게다가 사람들을 쫓아내는 방식도 그다지 신사적이지 않았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깨워 당장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4월 19일 아침 일찍 기독교도들은 아이들까지도 모두 떠나라는 강요를 받았다. 몇 가지 개인적인 물건들은 이웃에 맡겨 둘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산들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아마 나중에 우인(友人)들이 격자를 엮어 마당 문을 만들어 달고, 주어진 상황에서 가능한 한 보호를 해주었지만 이 불쌍한 사람들은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며칠 전 그렇게 쫓겨난 한 젊은이가 마을로 돌아와 이장에게 마을에 돌아와 봄 농사를 시작할 권리를 부여하는 서류에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장은 농사를 짓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을 쫓아내라는 명령은 자기가 내린 것이 아니라 헌병대장이 내린 것이니 만큼 서류에 서명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헌병대장이 그런 허가를 내려 준다면 좋은 일이지만 자기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헌병대장에게 가서 허가 서류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헌병대장은 사람들을 쫓아낸 것은 마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허가 서류를 내주는 데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불쌍한 젊은이는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고, 기독교인들은 단체로 다시 돌아와 어제 요청했던 것을 다시 요청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오늘 우리는 마을 이장을 불러 사건의 전말을 물어 보았다. 그는 헌병대장이 사람들을 내쫓으라고 명령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또 마을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원한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문제에 관해서 자신은 방해를 할 생각도 없으며, 그들을 다시 쫓아낼 의도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쫓아내라는 명령이 내려온다면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증거가 너무도 명백했다. 그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헌병대장이, 독립 시위가 있은 지 한 달도 더 지나서 이 불쌍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집에서 쫓아내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중에 돌아오게 허가해 달라고 한 요청에도 확인을 해주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 것도 바로 이 헌병대장인 것이다.사적인 견해.이것은 야비하게 통치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흔히 쓰이는 수법이다.법을 대변하는 한 개인이 전체 사회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면 그는 항상 그 책임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다음 사람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넘길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또 책임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미룰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책임은 끝없이 전가된다. 우연히 그 중 한 사람이 ‘증거를 잡히면’ 바로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는데, 100번 중에 99번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해직되어 다른 자리, 그것도 더 높은 자리로 옮겨진다. 더욱이 이런 비열한 관행에 대해 한국인이 불평을 하면 그는 바로 감옥에 수감된다. 관리들이 잘못을 했다거나 개선할 점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용감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찰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논리.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부분이다. 정부는 범죄를 저지를 리가 없다. 정부는 절대 틀릴 수가 없다. 이 땅의 법은 ‘황제의 인가’를 받았고, 그러므로 잘못이란 있을 수 없다. 그에 비해 국민들은 하찮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짐승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권리란 없다. 이번 경우가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경관들이 저지른 범죄임이 분명한 평안북도 티웅주(Tyungju) 교회의 화재와 서울 남부 재암리(Chai-amni)의 기독교도들 살인 사건과 관련해 이번 사건은 정부의 진실과 정직성에 의심을 품게 한다. 이곳에 정의나 인간주의, 진실은 없다.주의. 3월 초 독립 시위가 벌어졌을 때 두 명의 경찰과 세 명의 군인들이 진압을 하러 왔었다. 아무도 저항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쏴 네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 후 경찰은 마을을 엄중히 감시하면서 기독교인들을 구타했다. 그 중 세 명의 여자들이 심하지는 않지만 구타를 당했다. 우리는 그 중 두 사람을 직접 보고 사진을 찍었다.

    255 동창(Tong Chaing) 시위

    동창(Tong Chaing) 마을에는 약 350 가구가 살고 있다. 그곳의 젊은이들은 일찍이 시위를 벌이고 싶어했다. 그러나 교회 장로인 한(Han) 씨와 다른 교회 관계자들은 시위중에 폭력이 행사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를 만류했다. 마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5백 명 규모의 광산 노동자 단체가 그 기회를 빌어 경찰에 반항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장날이어서 외곽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3월 29일, 일부 어린이들이 시위를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이 가세해 곧 4, 500여 명의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읍내를 행진하게 되었다. 시위는 전적으로 평화로운 것이었고, 돌을 던지거나 경찰에 반항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경찰이 나와서 17명을 체포하였는데, 이 중 절반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다섯 명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더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경찰서로 끌려갔다. 여기서부터는 대체로 이 여자들 가운데 세 명의 경험에 근거해서 이야기가 계속될 것이다.정정열(Chung Chung Yul)은 동창(Tong Chaing)에 살고 있던 미망인이다. 한국 나이로 서른네 살로 슬하에 아이가 하나 있다. 그녀는 군중 속에 섞여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인 경관에게 체포되었다. 경찰서로 끌려가던 중 경찰이 그녀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경찰서 사무실로 끌려 들어간 뒤 경찰이 그녀의 겉옷을 벗기고 속옷만 남겨 놓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속옷을 벗기기 시작했고, 그녀는 이에 항의했다. 그러자 경찰들은 멍이 시퍼렇게 들도록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때렸다. 그래도 그녀가 계속 속옷을 못 벗기게 하자 경찰들은 그녀의 몸과 옷 사이에 나무 판자를 넣어서 억지로 벗기려 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팔과 다리를 나무판자로 때렸다. (아래 한 줄 안 보임)경찰관들은 구타를 멈추고 앉아서 일본식 떡을 먹으며 차를 마셨다. 그러면서 옷을 벗고 서 있는 그 여자를 조롱했다. 그 방 안에는 남자들이 여러 명 있었다.약 한 시간 뒤 그들은 여자에게 옷을 입게 한 뒤 체포된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는 옆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저녁에 불을 밝힐 즈음 그 여자는 다시 사무실로 불려 갔다. 한 중년 남자와 그의 아내가 책임을 맡고 그녀가 호출되면 오도록 교육을 했다. 그 후로 일주일간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내야 했고,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표학순(Pyo Hak Sun)은 서른두 살의 미망인으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녀도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한 경찰관에게 체포되었다. 경찰서로 끌려가던 중 그녀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지만, 팔을 비틀려 탈구되었다. 경찰서 사무실로 끌려 들어가서 경찰관에게 손으로 뺨을 맞았고, 앉아서 머리를 발로 차였다. 그녀가 쓰러지자 경찰관은 그녀를 계속 발로 찼다. 그리고 나서 경찰관은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옷을 벗게 했다. 그녀는 겉옷을 벗었지만 속옷은 입고 있었다. 속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녀는 벗지 않았다. 이때 거리에서 다시 격노의 함성이 들려 왔고, 많은 경찰들이 사람들을 더 체포하기 위해 나가게 되었다. 그녀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체포된 사람들이 구금된 옆방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거기에 밤새 구금되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 위의 여성과 함께 풀려났다.위 두 여성은 모두 한국에서 노동자 계층이 아니라 중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 모두 똑똑하고 지적인 여성들로 성경 수업에 여러 번 참석했다.이표승(Yi Pyo Syung)은 신효범(Syn Hyo Pum)의 아내이다. 신효범(Syn Hyo Pum)은 선천 남학교(Syen Chun Boys’ Academy)의 교사이다. 이표승(Yi Pyo Syung)은 스물여덟 살로 서울 장로교 여학교(Presbyterian Academy for Girls’ in Seoul)를 졸업하고 현재 동창 여자초등학교(Tong Chaing Girls’ Primary School)의 교사로 재직중이다. 그녀는 매우 똑똑하고 지적인 여성이다.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나 있으며,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지 아마 2, 3개월 정도 되었다. 그녀는 시위에 잠시 참여했다가 딸이 체포되어서 슬퍼하고 있는 표학순(Pyo Hak Syun)의 모친을 위로하기 위해 표학순(Pyo Hak Syun)의 집에 갔다. 그녀가 집밖으로 나왔을 때 경찰과 군인 여럿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그녀가 학교 교사라는 것을 알고 학교에서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부인했지만 경찰은 그녀가 숨으려고 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그녀가 ‘만세’를 불렀는지 물었다. 그녀는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업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했고, 그녀는 명령대로 했다. 그녀가 경찰서 문 앞에 서 있을 때 한 경찰이 뒤에서 그녀를 세게 찼고, 그녀는 앞쪽 방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자 한 경찰관이 그녀의 목을 발로 찼다. 그러고는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머리와 얼굴을 여러 차례 때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옷을 묶은 끈을 잡아챘다. 그녀가 망설이는 동안 그 경찰은 옷을 억지로 벗기면서 그녀를 계속 발로 차고 때렸다. 또 커다란 몽둥이와 판자로 그녀를 때렸다. 그는 결국 여자의 속옷까지 벗기고는 그녀의 가슴을 발로 차고 때렸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을 심어 줬다고 비난하면서 그는 여자가 죽을 때까지 때릴 심산이었다. 그녀는 벗겨진 속옷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려고 애썼지만 옷을 빼앗겼다. 그녀가 앉으려고 하면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는 계속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다. 그녀는 그 방에서 남자들로부터 돌아서려고 했지만 계속 억지로 남자들 쪽으로 서게 시켰다. 그녀는 자기 손과 발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한 남자가 그녀의 손을 뒤로 붙잡고 있는 동안 구타가 계속되었다. 그녀는 온 몸을 맞아서 무감각해지기 시작하고, 고통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굴은 붓고 몸은 온통 멍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 혼자 서 있을 수가 없었고, 학대는 계속되었다. 결국 그들은 구타를 멈추고 그녀를 방 한쪽에 그대로 두었다. 그러고는 정정열(Chung Chung Yul)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그 후 그녀는 옷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옆방으로 옮겨졌다. 오후 9시경 위에 언급된 세 여자와 체포된 다른 두 여자가 다시 사무실로 불려 갔다. 그러고는 ‘만세’를 외친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깨달았는지, 다시 또 그런 일을 할 것인지를 질문 받았다. 그리고 세 여자들은 풀려났지만 표학순(Pyo Hak Syun)과 이표승(Yi Pyo Syung)은 계속 잡혀 있었다. 이 두 여자들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밤을 보낸 옆방에 다시 갇혔다.다음날 아침 죄수들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남자들이 조사를 받았다. 그 동안 여자들이 당한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마을에 퍼졌고, 오전에 약 5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을 학대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경찰서를 공격하자고 했다. 그러나 한(Han) 장로는 폭력을 사용하거나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결국 침착함을 되찾자는 의견이 우세해서 항의를 하기 위해 두 명의 대표를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두 사람이 선정되었고, 그 중에 기독교인은 없었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이들 두 사람은 경찰서로 들어갔고, 군중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불법임을 항변했다. 경찰서장은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일본법에 따르면 그것이 허용된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들이 불법적인 기록들을 찾고 있다고 했다. 대표들은 그렇다면 왜 나이든 여자들은 빼고 젊은 여자들만 옷을 벗겼으며, 왜 옷을 벗긴 뒤에 구타를 하고, 남자들은 벗기지 않으면서 여자들만 옷을 벗겼는지를 물었다. 경찰서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군중 대표는 확고했고, 군중들은 점점 더 흥분을 해서 시끄러워지고 있었다.사람들은 자기들도 구금하든지 아니면 죄수들을 모두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서장은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네 명을 제외하고 전체 죄수들을 풀어 주기로 동의했다. 표학순(Pyo Hak Syun)은 나올 때 한쪽에 부축을 받아야 했다. 이효승(Yi Hyo Syung)은 어떤 남자의 등에 업혀서 나와야 했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이런 상태로 실려 나오는 것을 보고 연민을 느끼고는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야만적인 대우를 받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울부짖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맨손으로 경찰서를 공격하여 경찰서장을 잡아 옷을 벗긴 뒤 죽을 때까지 때리자는 강력한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한(Han) 장로와 여러 현명한 지도자들이 설득을 하여 사람들이 폭력을 쓰지 않게 했고, 결국은 사람들을 해산시켰다.하루나 이틀 뒤 그리 멀지 않은 광산에서 6백 명의 광부 대표들이 한(Han) 장로에게 와서 사건의 개요를 물었다. 그들은 그런 야만스러운 일을 참아 넘길 수는 없으며, 경찰을 습격해서 보복을 하겠다고 했다. 한(Han) 장로는 그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 사람들 가운데 최소한 한 명은 술을 마시고 있었고, 마침내 참지 못하고 한(Han) 장로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그러나 한(Han) 장로는 끝내 그들을 설득해 최소한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은 폭력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으니 그들이 풀려나든지 다른 곳으로 보내질 때까지는 기다리도록 했다. 나중에 이곳에서는 시위가 한 차례 더 있었고, 최소한 두 사람이 총에 맞았다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일과 특별한 관련은 없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지는 않겠다.

    256 한국인들 깨어나다

    발간일: 오사카 마이니치(Osaka Mainich)발간일: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이번 문제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의 진상을 목격하고 최근 한국에서 돌아온 외무부 요시자와(Yoshizawa) 씨의 진술(1919년 5월 11일, 오사카 마이니치(Osaka Mainich), 1919년 5월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에 요약문이 실림)처음에는 요시자와(Yoshizawa) 씨가 열흘 동안 한국의 사건을 조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난 뒤 본국에서는 3주일간 조사를 더 진행할 것을 전보로 알려 왔다. 도쿄로 떠나기 전에 산요 호텔(Sanyo Hotel)에서 머무는 동안 있었던 면담에서 요시자와(Yoshizawa) 씨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했다.시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신문에 보도되고 있고, 외국 언론에 난 기사들은 거짓이 아닙니다. 총독에 대한 불만은 오랫동안 쌓여 온 것으로 민족자결주의의 확산과 평화회담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이같은 문제가 표면화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교사들이 모두 폭도들을 돕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군인들의 주둔으로 인해 표면적으로 조용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무식한 하층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약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을 비교한다면 한국인들이 오히려 더 새로운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과 비교한다면 훨씬 더 앞서 있습니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또한 한국의 시위는 갑작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헌병 조직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물론 차별 정책은 사라져야 하며, 통치하는 사람들과 통치를 받는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야 합니다.모든 억압적인 통치는 빨리 경감되어야만 합니다. 이뿐 아니라 지금부터는 정부 행정 체계가 뿌리부터 바뀌어야만 합니다. (마지막 한 줄 안 보임)

    257 한국 소요의 진실

    발간일: 반도 신문(Peninsular Newspaper)발간일: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1919년 5월 15일자 반도 신문(Peninsular Newspaper), 1919년 4월 25일자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에 ‘한국인들의 불만의 원인, 일본인 관찰자의 견해’라는 제목으로 요약문이 실림국회의원 모리야(Moriya) 씨는 한국 문제에 대한 조사에 관련된 담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제 한국에서 소요가 일어난 원인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대만에서 이루어지는 농업과 제조업을 생각해 보면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작금의 이 문제까지 있습니다. 저는 식민지의 지사 사무실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면사무소에도 갔고,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도 모두 가 보았습니다. 지금 분쟁은 13개 지역으로 번졌고, 하루에 열 군데가 넘는 곳에서 분쟁이 일어났으며, 한 장소에서 10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총에 맞았습니다. 저는 이 폭동의 원인이 여섯 가지라고 생각하며,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크로니클(Chronicle)에 실렸던 다섯 가지 원인이 이어지고, 천도교와 기독교 교회에 대한 공감이 여섯 번째 원인으로 덧붙여진다. 다섯 번째 원인에 대한 논의는 크로니클(Chronicle)에 실렸던 것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원인을 여기에 소개한다. 여섯 번째는 크로니클에서 세 번째로 실려 있다.)한국인들 사이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널리 퍼지고, 일본이 한국을 재정적으로 돕지 않고 자급 자족하는 식민지로 삼을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한국인들 사이에는 상당한 의심이 야기되었고, 그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가 야기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재정적 원조를 거부하는 일본의 행동을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고 있는 미국의 행동에 비교하게 되었고, 일본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천도교와 기독교 교회와 집회 장소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소들에서 그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었고, 교회에서는 분쟁에서 이들에게 공감을 보였습니다. 결국 애초에는 종교에만 관심이 있었던 교회 내에서 정치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들은 소위 정의로운 행정부를 조금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이같은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258 미국과 중국의 관계

    발간일: 오사카 마이니치(Osaka Mainichi)현재 미국은 행정적?경제적으로 중국과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은 푸초우(Fuchow)에서 은행과 자기 회사로 사업을 시작했고, 여기에 사용된 2백만 달러는 미국에서 올 예정이다. 텐진(Tienstin) 내 일본의 경제적 강세를 손에 넣기 위해 영국과 미국, 중국인들이 상업 동맹을 형성했고, 전쟁중에나 휴전중인 지금이나 중국에 있는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은 우리나라에 크게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노력의 결과로 경제적 부(副)가 선언되었다. 우리는 영국과 미국인들의 사악한 의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중국인들이 일본에 반대하는 외국인들의 제안을 따르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중국은 외국에서 너무 많은 돈을 들여왔기 때문에 그 돈을 자국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돈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있다. 일본이 중국에서 교역을 할 수 있게 하는 문제는 영국과 미국인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이지만, 그것이 중국인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까? 일본이 중국에서 교역을 하지 못하게 하면 영국과 미국의 상업에는 도움이 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중국은 더 비싼 제품을 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일본인들이 중국 전역에서 교역을 하게 된다면 중국은 일본과도 교역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겠지만 중국이 일본에만 반대를 하고 영국과 미국에게 더 큰 권리를 준다면 중국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중국에서 일본의 경제적 힘이 확장되면 중국의 경제력도 일본 전역에 퍼지게 된다. 영국과 미국 상인들은 온갖 종류의 계략을 동원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지역적?자연적 이유 때문에 일본을 중국에서 몰아낼 수는 없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현재 행동을 허용할 수 없으며, 중국과의 교역을 끝내지도 않을 것이다. (맨 앞 줄 안 보임.)중국인들은 지금 이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주 보고되는 이런 일들에 대해 주의해야 하며, 유럽 내 갈등이 끝나고 미국이 경제적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중국 시장에 이미 진출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59 모우리(Mowry) 씨와 미국의 언론 본국 위원회|| 경악을 표하다

    발간일: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평양에서 선교사가 체포된 일에 관해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1919년 5월 6일, ‘모우리(Mowry) 씨 재판. 미(美) 국무부 논의’라는 제목으로 서울신문(Seoul Press)에 실렸던 내용이 이어짐)모우리(Mowry) 씨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어제 뉴욕 해외선교위원회(New York Board of Foreign Missions)에 전해졌고, 위원회에서는 놀라움을 표명했다. 한국 담당 서기관 브라운(Brown) 씨는 “모우리(Mowry) 씨 부부는 1909년 선임된 선교사들로 당시 동양으로 갔다. 그들은 현재 두 자녀를 두고 있다. 모우리(Mowry) 씨는 오하이오 주 맨스필드(Mansfield, Ohio)에서 태어나 우스터 대학(Wooster College)을 졸업했다. 우리는 아직 정확한 보고를 받지 못했지만 이런 일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260 모우리(Mowry) 씨의 항소에 대한 판정

    작성일: 1919-05-07작성처: 항소 법원 판사작성처: 헤이조(Heijo)죄인 은닉죄에 대한 재판장의 판결피고에 대한 판결은 정상을 참작하여 징역 6개월에서 4개월로 감형되었고,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고소 내용피고는 장로교 목사로서 1911년부터 신양리(Sin Yang Ri) 숭실대학교(Soong Sil College) 교수로 재직했다. 피고와 계속 왕래해 왔던 이보식(Lee Posil), 이금호(Yi Kyumho), 길진경(Kil Chinkyung), 이인선(Yi Insun) 등은 숭덕학교(Soong Duk School) 운동장에서 3월 1일에 있었던 시위에 참여했다. 이 다섯 명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학생 및 기독교도들과 함께 손병희(Song Pyung Heui)를 비롯한 33인이 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깃발을 내걸었는데, 이 다섯 명도 깃발을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를 행진했다. 이는 평화유지법에 의해 엄격히 규제되고 있는 것이다.이 다섯 명은 경찰에서 공공 평화를 방해한 자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피고가 미국인이므로 신양리(Sin Yang Ri)에 있는 피고의 집에 숨으면 체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고에게 자신들을 그의 집에 숨겨 달라고 부탁했고, 피고는 경찰 당국에서 그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찬성했다.피고는 3월 5일부터 14일까지 이보식(Yi Posik)을 숨겨 주었고, 7일부터 9일까지 길진경(Kil Chin Kyung)을 숨겨 주면서 그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다. 또한 4월 1일부터 4일까지 이인선(Yi Insun)을 숨겨 주었고, 4월 1일부터 2일까지 이금호(Yi Kyumho)를, 4월 2일부터 4일까지는 김태설(Kim Tai sul)을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다. 이는 지역 법정에서 범인 은닉죄로 결정된 바이다. 판정이는 법에 따르면 형법 제103조와 55조에 해당되나, 정상을 참작하여 처벌이 감형되어 피고는 4개월 징역 판결을 받았고, 25조에 따라 집행유예 2년에 처해진다. 압류된 물건들은 형법 261조에 따라 피고에게 반환될 것이다.판정은 1919년 5월 7일 언명되었다.항소 법원 판사 헤이조(Hei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