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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71 사례 보고서

    강원도 삼척에 고등 보통 학교에(Government higher common school) 다니는 22살된 ***라는 이름의 청년이 있었다. 1919년 3월 1일, 그는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오후 두 시에 파고다 공원에 모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우리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나서, 우리는 모두 함께 길을 올라가며 “만세”를 외치면서 궁 쪽으로 향했다. 우리들 중 일부는 영사관 쪽으로, 다른 일부는 관청 쪽으로 향했다. 나는 관청 쪽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였다. 우리가 Honmachi 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두 명의 순사가 나를 보더니 체포했다. 그들은 나를 나꿔채자마자 칼집으로 머리며 몸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경찰서로 끌려가면서 나는 일본 민간인들한테도 계속하여 걷어 채이며 얻어맞았다. 어떤 사람은 나무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서 나를 때리기도 하였다.나는 중앙 경찰국(Central Police Station)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나는 별다른 심문을 받지도 않은 채 4일까지 있었다. 심문이 늦어진 이유는 황제님의 장례식이 2일과 3일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날에는 주먹밥을 종이로 말아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그 다음 날부터는 우리에게 접시와 젓가락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장난치듯이 수시로 그것을 주지 않으면서 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저런 개들은 젓가락이노 필요하지 않소다.”3월 5일. 나는 어느 관리들 앞으로 불리어 갔는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1. ‘이 과정을 조종하는 배후는 누구인가?’2. ‘나는 선동자 중에 누구라도 아는 사람이 있는가?’나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나의 뺨을 때렸다. 나는 계속하여 이 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하였다. 그건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나의 손을 뒤로 단단히 묶고, 그 끝을 오른쪽 어깨너머로 둘러 목을 돌더니, 다시 왼쪽 어깨를 돌아 뒤로 돌려 이미 묶인 손으로 줄을 다시 가져가서는 단단히 묶었다. 이렇게 되자 내 머리는 뒤로 젖혀지게 되는 바람에 매우 불편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내게 심문을 하였으나 나는 답해 줄 것이 없었다. 그 관리는 매우 화가 나서 내 얼굴을 계속하여 때리고 쇠로 된 막대기로 갈비뼈를 찔러댔다. 매우 아프기는 하였으나 심각한 상처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수시로 매듭이 있는 밧줄로 머리를 얻어맞았는데 상당히 아팠다.또한 벌주는 방법을 달리하여 의자를 머리 위로 들고 있으라고 하였다. 의자가 상당히 무거워 그것을 떨어뜨리자 나는 또 얻어맞았고, 그들은 나에게 다시 의자를 들라 하였다. 나는 다시 질문을 받았으나, 내가 말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얻지를 못했다.6일 째 되는 날. 나는 심문관인 검사(procurator) 앞에 불리어 갔다. 그는 나에게 나이며, 직업 등을 물었고 또한 현재 총독부에 대해서 만족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대단히 만족하지 않는다.’ 라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나에게 왜 독립을 원하는지를 물었다.밤이 되자 나는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는 내가 입었던 일반인의 옷을 벗게 하고 수의를 입게 하였다. 수의는 속내의와 일본식 기모노였다. 우리는 세 사람이 한 감방에 있었는데 한 담요를 셋이서 함께 써야만 했다.24일. 나는 교도소장(head-jailer) 앞으로 이끌려 갔다. 그는 여러 다른 방법으로 훗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이며, 이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때에는 무엇이 필요한 지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이 소년은 내게 자신은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곧 만세를 불렀노라고 하였다.)나는 우리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을 만났고, 몇몇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학교 건물로 갔다. 학교에 도착하자, 선생님이 몇 가지를 말씀하시고 나서, 감옥에서 받은 고통이 심하였는지 그리고 그 힘든 상황이 우리의 마음을 변하게 하지는 않았는지를 물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다시 말하였다.“너희들이 세계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 독립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나는 다르게 본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 운동이 일어난 이유가 우리가 받은 교육과 선생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의 결과이기 때문에, 나는 배운 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겨 보려 한다고 말했다.교장 선생님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고, 석방될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서울에 머물지 말고, 시골집으로 내려 가 안전을 도모하라고 하였다.

    272 풀려난 남자 죄수의 고문 이야기

    1919년 3월 5일 아침 9시에 시위는 시작되었다. 남대문역에서 시작하여 남대문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달려나갔다.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마침 나는 근처에 있었는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려 군중 속에 섞여서 함께 얼마 동안 걸어갔다. 나는 기차 역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곧 순사들이 내 이마와 목에 나있는 땀을 보더니 나를 시위자라는 혐의로 붙들었다. 이 일본인 군인들이 경찰국으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서 감방에서 하루를 지냈다.다음 날 아침 9시경, 나는 심문관 검사(procurator) 앞에 불려 나가 심문을 받았다. 검사: 너는 왜 만세를 불렀소까?나: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너무 좋아서 만세부르는데 함께 끼었어요.검사: 누가 너더러 이렇게 하라고시켰소까?나: 아무도 시킨 사람은 없어요. 나 혼자 생각으로 거기에 간 거예요.검사: 그래. 그렇다면 너는 모르고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진짜 폭도로구만. 너는 죄노 대가를 받아야만 하오다. 암, 그렇고 말고.나: 법에 따르겠습니다.검사: 너는 기독교인이오까 아니오까?나: 예, 맞습니다.이 심문이 있은 후 그들은 나를 다른 방에 이틀 밤낮 동안 가두었다. 셋째 날 아침 열 한 시 경, 몇 마디 충고를 주더니 석방시켜 주었다. 석방된지 이틀 후, 나는 친구의 방문을 받았고 그와 함께 저녁을 함께 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친구 한 사람으로부터 받은 편지에 대해서 그와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자기가 그 편지를 읽어 볼 수 있겠는지를 묻기에 편지를 보여 주었다. 그는 편지를 자기가 가져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으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내게 그 편지를 주면 그것으로 YMCA 근로학교 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싶네. 나는 수 천 명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거든. 그 학생들이 모든 곳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담배 공장 사람들도 만날 수가 있네. 이 편지 하나가 독립 운동을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가 있을 것 같은데.”나는 편지를 줄 수가 없어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를 배웅했다.다음날 아침 열 시 경, 두 명의 헌병들이 우리 집에 들이 닥쳐 나를 체포해 갔다. 나는 그들과 함께 경찰국으로 가 전에 갇혔던 감방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세 시간 정도 갇혀 있다가 나는 심문관인 검사 앞에 끌려나갔다. 검사가 묻기를,검사: 네 죄가 무엇인지 아오까?나: 아니요. 무슨 죄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그는 화가난 소리로 말했다.검사: 너는 미국에노 있는 친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말이노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큰 벌을 받을 것이오다.나: 우리는 절대로 무슨 나쁜 말을 나눈 적이 없어요.가까이 서 있던 군인들이 내 얼굴을 주먹으로 함께 때렸다. 그들의 행동에 분개한 나는 그들을 발로 다 차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더 심하게 구타하였다.심문관은 경찰이 구타하는 것을 말리고 나를 다른 독방으로 보내었다. 그 곳에는 고문 기구들이 있었다. 나를 그 고문 기구 가운데에 똑바로 세워 놓고 나서, 뒤쪽 바퀴 나사 부분를 돌려 등쪽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 나에게 다시 사실을 말하라고 강요했다. 나는 계속 결백을 주장했다. 내 입장을 지키면서 ‘죽일테면 죽여라.’고까지 말했다. 그들이 계속 기구를 돌려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거의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나는 나의 결백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이놈은 악종이니 죽여야겠다고 말했다.이런 과정이 한바탕 지나고 나자, 그들은 내 오른 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단단한 밧줄로 묶어, 그 줄 끝을 천장에 있는 대들보 너머로 넘겨 다시 쥐더니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하였다. 오로지 가운데 손가락만이 묶인 채, 발끝만 겨우 바닥에 닿을 듯한 상태로 허공에 매어 달린 것이다. 나는 점차 의식을 잃어 갔다. 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나는 내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이마가 진땀으로 젖어 있었다. 몸을 겨우 움직일 수 있다고 느껴지자, 편한 자세로 누우려 애썼다.다음날 아침 열 한 시 경에, 나는 다시 그들 앞에 심문을 받으려 불려 갔다. 그들은 나를 또 한 번 훈계를 하더니 두 번 째로 석방시켜 주었다. 그 사이에 그들은 우리 집을 수색하였으나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을 찾아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내 손은 잔뜩 부은 상태가 되어 며칠 동안이나 한국인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별다른 차도가 없어서 나는 세브란스 의무실을 찾아 가 수술부에서 치료를 받았다.주: (이 사람은 서울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의 초기 졸업생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몇 년 동안 전도를 하였으나 지금은 보험 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매우 지적인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 고문 기구는 캐비넷 모양인데, 어떤 기구의 윗 부분을 개조한 것이었다. 보통 인쇄 기계의 주된 부분 위에서 작동시키는데, 바퀴 나사를 돌리면 사방으로부터 조여 오는 그런 기구였다.)

    273 시골 여인에 대한 만행

    한천(Han-chun)에서의 증언시위에 이어 체포가 잇따랐다. 소영목(Soh Yong-mok)이라는 이름의 한 지도자가 경찰서에 잡혀왔는데, 그는 자신이 이 모든 일의 책임자라고 진술했다. 이 사건을 시작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운동을 기획했으며 시위를 이끌었다고 말했다.송천국(Song Chun-kuk) 이라는 사람의 아내도 또한 붙잡혀 왔다. 그녀는 허리에 매를 맞고 두 손은 뒤로 묶인 채로 두 손을 공중에 매달렸다. 이렇게 매달린 상태에서 일경은 또 매를 때리며 누가 그녀에게 이 시위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는지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또 태극기를 만들었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만들지 않았다고 대답했고, 누가 만세를 부르라고 말했는지 대라는 질문에는 또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계속 때리면서 누가 이 시위의 지도자들인지 말을 하라는 추궁에도 여전히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대답만 계속 할 뿐이었다.그녀의 시아버지께서 그녀를 두 번 보았는데, 말하기를 며느리는 다섯 시간 동안이나 매달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녀가 매달린 곳에서 내려졌을 때, 그녀는 팔을 앞으로 들 수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팔을 억지로 맞추어 놓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시켜 데려 가게 하였다. 그녀의 두 팔은 푸르게 멍들고 마비된 상태였으며 온 몸은 멍들어 있었다. 시아버지가 그녀를 보게 된 것은 이런 매를 맞은 후 삼 주일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팔에 혈액 순환은 되고 있으나 아직도 손가락을 못쓴다고 한다.의세촌(Woi Sye-chon) 에서의 증언어린 소년 한 사람이 붙잡혀 와 한천 마을에서 누가 이 시위에 참여하였는지를 말하라고 추궁 당했다. 의세촌은 한천에서 6마일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소년은 그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는 얻어맞으며, 그 사건에 참여한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을 대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때리는 것을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그가 말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교회의 집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장로의 아들이었다.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었다.두 사람은 경찰에 불려가 시위에 참여한 내용에 대하여 취조당했다. 늙은 집사는 그 일에 대해서 대답하기를, 죽는 한이 있어도 사실을 말하자면, 시위가 있는 날에 그는 집에만 있었노라고, 그래서 그 시위에는 조금도 참여하지 않았노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가 너무 노쇠하였기 때문에 일경은 이 집사를 석방하기로 하였다. 장로의 아들인 다른 젊은이는 자신도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만세도 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사람을 열 대를 때리고, 젊은이도 열 대를 때리고 방면했다.Tong Moru에서의 증언감리교회에서는 잘 알려진 한 늙은 목사가 어느 날 저녁에 이 마을에 왔을 때, 그는 이 마을에 사는 친구인 늙은 집사 집을 방문하였다. 누군가가 방문했다는 말에 집사는 매우 겁을 내다가 방문자가 그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안도하였다. 목사는 자기가 매우 피로하니 하루 밤을 묵고 갈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집사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목사는 그러면 먹을 것이라도 좀 있느냐고 물었고, 집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주겠다고 하였다.방문자로서 목사는 집사가 매우 겁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른 곳으로 가 봐야겠다고 하였다. 그가 떠나기 전에 사람들은 목사에게 마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잡혀갈 것이 두려워 집을 비우고 떠났다고 말하였다. 순사들이 수시로 들이 닥쳐 교회 지도자들이 혹 오지 않았나 감시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집사의 부인인 ***도 옷이 다 벗겨진 채 두 손은 뒤로 묶여 매달리어 온 몸을 얻어맞았다고 하였다. 다른 여자들도 맞았으나 집사 부인만큼 맞지는 않았다고 하였다.Kai Moru에서의 증언방문자가 여러 사람들이 구타당한 가이모루에서 숙소를 찾았다. 그는 특별히 잡히지 않으려 숨어있는 다른 집사 *** 에 대해서 말했다. 경찰에서 그를 잡으러 왔다가 그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들은 집사의 아내와 장모를 심하게 때렸다. 여인들의 손을 뒤로 묶고 매달았다. 장모는 허리까지 옷을 벗기고 매질을 했고, 젊은 이 아내는 옷을 모두 벗기고 손을 뒤로 단단히 묶은 채 공중에 매 달았다. 그들은 이 가엾은 젊은 여인을 심하게 매질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몸의 은밀한 부분을 담뱃불로 지지기도 하였다.Pan Syuk에서의 증언이 곳은 모든 문과 창문이 깨어지고 남포불마저 다 부서진 어느 교회였다. 거기서 여덟 사람이 뜰에서 묶여 매이고 옷은 다 벗겨진 채로 매질을 당한 곳이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성냥불로 지지는 고통을 당했다.여기서는 세 사람의 여인들이 순사들에 의해서 완전히 옷이 벗겨진 상태로 야만적으로 매질을 당했다. 그 중 두 여인들은 이 매질로 인해 몇 주 동안이나 앓아 누워 있어야만 했다. 나머지 한 여인은 말하기를 순사들이(한 사람은 일본인이고 또 한 사람은 한국인) 자주 이 곳에 나타나 *** 장로를 붙들어 가려 한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그 장로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라고 다그쳤다. 그녀는 자기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가 있는 곳을 말해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낼 수 가 없게 되자, 그들은 그녀를 인근 마을 뒤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끌고 들어 가 옷을 모두 벗겼다. 그녀가 반항을 하자, 그들은 그녀의 웃옷을 강제로 벗기고 나서 다시 나머지 옷을 벗으라고 강요하였다. 어쩔 수 없이 옷을 다 벗자 땅바닥에 맨몸으로 앉히더니 마구 그녀를 구타했다.다음 날 저녁 무렵 나이 든 목사 중의 한 사람이 이 길을 가다가 그의 옛 친구 집을 방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친구의 집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 마을의 첫 번 째 집에서 물어 보았다. 그렇게 묻자, 집안에 있던 식구들이 뒷문 밖으로 서둘러 빠져나가더니, 어디론가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겨우 어떤 사람을 만나 친구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그는 매우 나이가 많은 장로를 그의 옛 친구로서 찾아보았다. 장로와 그의 부인은 그를 보자 매우 반가워하였으나, 그것도 잠시뿐, 그가 머무를까 또는 저녁 식사를 대접해야 할까에 대해서 매우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는 그들이 왜 이렇게 겁을 내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와서, 교회가 있는 가까운 다음 마을로 갔다.다른 장로의 집에 머무를 것을 기대하며, 그 장로의 집을 찾으려 어느 집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그 집에 있던 어느 여인은 대답도 없이 쏜살같이 도망을 가고, 이어서 어린 여자 아이도 그녀를 뒤따라 달려나갔다. 그는 그 여자아이를 부르며 자신은 목사라고 일러주고 ***장로님이 어디에 사는지를 물었다. 그 여자아이는 어느 집을 가리키며 장로가 사는 집을 일러주었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을 붙여 볼 사이도 없이 그 아이는 달려 가버렸다.그는 그 장로의 집에 갔으나 장로는 없고 그의 아내만이 집에 남아 있었다. 얼마간 흥분된 기분으로 그녀와 몇 마디를 나누고 나서, 그가 어디에서 이 온 밤을 날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아는 한 그가 머무를 만한 곳이 따로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는 삼 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교회에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 혹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곳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그 부인은 어느 집을 소개해 주었다. 그 집은 가족들이 다 떠나 버리고 미망인 혼자서 사는 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하룻밤 묵을 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 준 것이다. 그는 그 미망인의 집으로 안내되어 갔다. 밤이 이미 깊어서 누구에게 들킬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그 집에 도착해 보니 그 곳은 비어 있었고 매우 어두운 집이었다. 목사는 들어 가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조금 있자, 이 빈집을 임시로 사용하던 어느 객이 돌아 와, 모르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용하던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서는 매우 놀랐다. 누구인지를 묻자, 목사는 이 집은 나의 것도 나그네의 것도 아니니 함께 머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그 밤을 지냈다.다음 날 아침, 그 남자는 목사에게 그의 아침 식사를 목사님과 함께 나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러하냐고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음식을 주면 이 소문은 곧 주위에 알려질 것이고, 그러면 순사들이 이곳에 다시 왔을 때 이 소문을 듣게 되면, 나는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기 때문이에요.”그래서 이 목사는 하는 수 없이 삼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교회에 가서 식사를 구해 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 백성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을 의미하는 것이다.K ** 장로의 부인과 그의 딸은 심하게 매질을 당하고 나서 감옥에 갇혔다. 그 곳에서 두 모녀는 자기의 남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대지 못한다는 이유로, 두 달이 넘도록 갇혀 있었다. 딸의 남편은 학교 선생이었다. 순사들이 그를 붙잡으러 왔다가 아무도 없어 헛탕을 치자, 방으로 들어 가 가재 도구들을 깨부수고, 옷을 다 끌어내 책과 함께 마당에서 불태워버렸다.

    274 산동지역(SHANTUNG)에 관한 질문과 미국 (SEISAN NIPPO|| 1919년 5월 9일)

    발간일: SEISAN NIPPO미국이 항상 소요를 일으키며 우롱하는 계략을 쓰는 일에 대하여현재 상해에 있는 야마토 마사오가 북경의 영자 신문인 Kong Moon Po의 기자로서 지난 8일 평양역에서 기자를 만난 후 북경으로부터 Seisan Nippo로 보내진 전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일본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북경의 학생들은 Cho Yi Rim의 집을 불태우고 Chang 장관에게 위해를 가한 것으로 안다. 나는 그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계획에 따라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는 산동지역에 관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나라들처럼 중국도 이 전쟁에서 독일을 적으로 싸우게 된 이후로, 평화협상에서 중국은 일본과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되었으며, 독일에 대해서도 같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 말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미국이 비밀리에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계략에 찬 말을 한다는 것은, 그들 미국인의 속마음이 검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우리 나라가 많은 생명을 잃고 우리의 힘이 뿌리채 소진되기를 그들은 바란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또한 분명한 것은 중국은 그들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미국의 위험한 손위에서 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경제적인 분야나 철도부설에 관한 분야, 그리고 중국의 내정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재정 지원도 없을 것이며, 오직 정의에 입각하여 행동할 것이라고 항상 말해 왔습니다.“하지만 현 시점에서 볼 때, 미국의 마수는 숨기지도 아니하고 뻗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이 말하기를, 일본이 이미 만주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산동지역을 일본이 점령하게 된다면, 두 지역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관계로 두 지역과 함께 그 사이의 바다까지도 점령하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일본이 산동지역 (Shantung)을 접수하는 것을 우려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더 나아가 만약에 일본이 철도 부설에 대한 관심마저도 가지고 있다면, 미국은 대단히 겁을 낼 것이라 하면서, 그러한 이유로 미국은 중간에서 어부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계략으로 미국은 중국과 일본이 서로 적대시하도록 기회를 타 이간질을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신문을 이용해 왔으며, 바늘을 봉으로 둔갑시켜 가며 중국을 화나게 만든 것입니다.“조선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도 미국은 독설어린 필로 일본을 공격하면서 동양에서 일본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또한 미국은 인종 평등주의를 거부하고 말살하고 있으며, 남태평양의 섬들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 문제의 본질에서 비켜 가버렸습니다. 한국 문제에 관해서도, 미국은 하와이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킨 것처럼 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맨 먼저 그들은 선교사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어서 결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미국에 통합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하와이를 편입시킬 당시에 나는 미국에 있었으며 그 진행 상황을 나의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비록 미국이 한국도 이와 같이 하려 하지만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선교사들이 이것을 이루려 시도하였으나 현재의 사태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하고 넘어야 할 많은 산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통합이 어려움을 미국이 알게 되었습니다만, 적어도 미국이 한국인들을 부추기고 훈련시켜 그들의 생각과 신념 속에 일본을 거부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275 한국 정세의 불안

    작성일: 1919-09-30오늘 시내의 상황은 평일보다 훨씬 많은 경찰 병력과 헌병들이 길을 메우고 있고, 무기를 휴대한 채 대기 상태이며, 군인들은 총을 들고 시가를 행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군병력의 시위는 한국인들의 기를 제압하여 독립의 여망으로 하여 벌일 수 있는 그들의 새로운 시위 가능성을 사전에 미리 막아 보자는 것으로 보인다.지난 24시간 안에 의심스러운 약 2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체포되었으며, 지난 두 주일 동안에 체포된 자의 수는 모두 2,000명이 넘는다. 일본인은 한국인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그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는 모습이다. 재판이나 증거를 제시하는 법절차는 완전히 무시한 채, 잔인하게 사람들을 때리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예방 조치라고 말한다.당국은 아무리 빨리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 해도 이미 감옥은 만원이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혐의자는 때리는 벌로 대신하여 석방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스파이 조직은 참으로 잔인무도하다. 하지만 한국도 그에 대응하여 그 조직과 능력에 있어서 그들의 것과 맞먹을 만큼 발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인들의 정보 수집량은 많지 않다.시위는 더욱 많아져 갈 것으로 보인다. 10월 1일에 또 다른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오늘자 (9월 30일) 서울신문 (SEOUL PRESS)의 사설에는 이 주제를 다루었는데,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논평을 달았다. 만약 또 다른 소요사태가 올 경우, “한국인들을 복속시켜 지배하기 위해서 가차없는 수단을 사용할 전망만 있을 뿐”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최후의 수단).연방 선교 위원회(Federal Council of Mission)의 정기 연례 회의를 막 마쳤다. 그곳에서 총독 대리는 인사를 하고, 온화한 말을 쓰며, 약속이란 것을 발표했으나, 같은 시각에 감옥에서는 힘없는 한국인들을 고문하고 있었다. 어느 한국인이 말했듯이, 새 총독의 말은 실제 행동과 일치하지 않았다. 연방 위원회는 실질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한국인에 대한 야만적인 대우를 시정하라는 강한 결의를 통과 시켰다.10월 4일. 시위는 매우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한국인들은 서울에서 가게를 닫는 시위를 벌였다. 군인들과 경찰 병력은 총과 무기를 들고 와서는 문을 다시 열라고 강요했다. 한국인들을 충성하는 신민으로 만들며 일장기를 흔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 언론은 폭도들을 진압하는 것을 옹호하였다.

    276 Scott씨의 편지와 Schell씨 부부의 편지에서 발췌

    발신일: 1919-08-25발신주소: 평양으로 가는 길에한국에서의 2 주일모든 면에서 한국을 떠받치고 있고 또 뒤덮고 있는 주요 관심사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나라 안은 온통 비참한 상태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참으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열망에 따라 무기도 없이 질서있게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잔인 무도함 때문에 국민들의 마음은 슬프고 격분한 상태에 있다.우리는 석방된 정치범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감옥에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체포와 재판을 기다리는 과정에서도, 그들에게 가해진 고문과 핍박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명망있는 목격자로부터 일본 헌병들과 군인들의 행위에 대한 엄숙한 증언을 들었다. 또 우리는 병원에서 우리의 눈으로 죄수들에게 가해진 눈뜨고는 못 볼 상처들을 많이 보았다. 우리는 불타버린 교회들의 폐허의 현장을 둘러보고, 다른 곳에서의 방화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하는 이런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 한국인들이 인내하고 견디어 내야 할 고통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마음속에 의문의 여지가 없이 분명해 보였다. 특히 지난 두 달 간 가해졌던 고통과 지금도 계속 인내해야 하는 상황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한국인들이 경험하고 견디어 낸 이 무서운 경험들은 자연적으로 교회에도 궁극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수십 명의 목사, 장로 그리고 다른 교회 성직자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여러 곳에서, 경험은 부족하지만 그러나 헌신적인 남자와 여자들에 의해서 교회가 인도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인 모두는 100년만에 맞는 큰 가뭄으로 또한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고, 또한 만주로부터 콜레라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신천에서 있었던 장로교회의 모임에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이 나라가 “핍박과 기근과 역병이라는 세 가지의 어려움”으로부터 구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장내는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것이다.한국의 모든 교회는 항상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최근에 기근이 기승을 부리자, 국민들의 힘은 저하되었으나, 기금을 마련하려는 의지는 식을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한국의 교회는 미국 기독교인들의 지속적인 기도와 형제애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미국에 대하여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도 정의와 형제애를 구하고 있다.

    277 한국

    발간일: Evangelical Mission발간처: 스위스 바셀오랫 동안 노예와 같은 상태에서 신음하며 살던 한국인들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노력에 의해서 열광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에, 기독교계에서는 매우 기뻐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서, 일본 군 당국은 전쟁성 장관을 통해서 발표하기를, 데라우치 총리와 그 정부는 이 나라(한국)의 해체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특히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교사 및 지도자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왔다.그 이후로 수 년 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한국으로부터 별다른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현재 우리 앞에는 한국인들과 한국 거주 미국인들이 쓴 서른 네 개의 원문 기사를 모은 작은 책이 놓여 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은, 먼 극동 지역에 역사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는 한 세계가 있는데, 이 나라는 이제, 국제 연맹에 관한 정보와 자기 나라의 일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자주의식을 가지게 된 작은 나라들이 새로운 권리를 찾고 있다는다는 소식에, 이 나라에서도 이같은 정신이 불붙고 있다는 소식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올해 삼월에, 전체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기는 하였지만, 대단히 정열적인 시위가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것이다. 전 세계에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개인적인 자유와 공공의 자유를 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나라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남녀 학생들과 모든 계층의 남녀들이 다 함께 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철도 직원들과 상인들도 참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원서로 그들의 주장을 폈다. “만세”를 범 국가적으로 외치며 서양식으로 시위를 진행하면서 한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이 운동의 요인과 책임이 기독교계에만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의 전통 종교와 불교계 그리고 기독교계가 거의 비슷하게 이 시위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데라우치가 이미 개발한 소름끼치는 징벌을 수단으로 하여, 일본 정부는 경찰과 군대을 앞세워 이 운동에 대응했다. 군중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동시에 여성들을 말할수 없이 부끄럽게 다루었으며, 또한 마을을 방화하였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유럽에서 있었던 몇가지 예와 비교될 수 있는 공포 바로 그 자체였다.이 “믿을만한 증언”을 전한 사람은 이런 식의 통치 방법을 “독일식 식민지 구조”라고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증언은 또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기독교 선교사업과 기독교계를 용납한다고는 하였지만, 한국민의 독립 운동을 저지하는 것이나, 이곳의 정부를 도구화하려는 분명한 경향은, 기독교계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는 동시에 기독교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 하였다. 시위를 제압하고자 하는 그들 편에서는, 특별히 기독교인들을 매질하거나 투옥하였다. 투옥된 사람들의 핵심은 목사와 원로 그리고 교사들이었다. 비록 그들은 소요를 일으키는 시위에는 참여하지도 않았는데도 삼년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을과 도시의 거주자들 중에서 기독교인들을 특별히 가려서 징계하고 있다.이것은 결국 많은 교인 집단의 파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학교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특별히 미워했던 이유는, 이 곳에 강한 영적인 힘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지난 십 년 기간은 한국인들에게는 공포의 기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발표된 그대로 모든 공직 관리들은 일본인들이다. (열 세 명의 도지사들 중에 단 세 명만이 한국인 출신이다.) 주요한 지역의 도지사는 다 일본인 차지이며 한국인들은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일본은 300,000명의 일본인 거주민들을 위해서 운영하고 있는 학교 수가 324개인데 반해, 천 칠백 만 명의 한국인들을 위해서는 447개 학교에 불과하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는 고등교육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부족한 부분은 미국의 선교부가 그들의 기관을 통하여 수용하려 힘쓰고 있을 뿐이다.서론 부분에 언급하기를 최근에 이르러서야 (1919년 6월) 데라우치 군사 통치 다음을 이은 일본의 새로운 자유 내각은, 하라 총리를 통해서 한국의 상태는 개혁을 통하여 보다 나은 상태로 발전되기를 희망한다는 (참으로 애매한 약속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새 총리 내각의 유연한 계획의 한 부분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본인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지배받는 백성을 향한 무력 조직을 제거하거나 힘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성실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내는 뜻일 수도 있다.

    278 한국 백성의 고뇌와 악한 일본 내각

    발간처: 독립운동 조직위 발행1. 우리 한국이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긴요한 두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곧,a. 한국은 두 나라 관계에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국가조직이 구성된 역사로 볼 때 4,300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우리 한국이 훨씬 선배이다. 그 역사 기간 동안에 한국은 중국 조정에 공물을 보낸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두 나라의 황실 가족간의 대외 교류였을 뿐이다. 우리 한국은 한국민을 유일하게 그 백성으로 삼고 살아왔으며, 실제 그 어느 외국이나 외래 통치 실세의 실질적인 지배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b.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국인과는 완전히 다른 민족이다. 그들은 섬나라 백성들 이며, 그들 육신과 정신의 헐벗음은 지난 과거 수세기에 걸쳐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받은 문화로 그 벗음을 가리게 된 백성들이다. 그들의 관습, 문학 일상적인 의복들은 한국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그들의 현대 문명이란 최근 수 년에 이르러서야 서양 문명이라는 화장을 그들의 얼 굴에 덧칠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동양의 회칠한 무덤같은 위선 자(whited sepulchre)가 되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도덕적인 힘이 있다는 어떤 증 거도 없다. 우리 나라에게 가한 그들의 행동은 잔혹함 그 자체이다. 이로써 일 본과 한국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하다는 증거는 충분한 것이다.2. 일본이 한국에 행한 다섯 가지 정의에 반한 행위a. 개가 길러준 주인의 손을 문 격이다.1890년의 중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엄숙하게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천명했고, 이어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러시아도 공감하며 같은 내용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증거로 일본과 위에 언급한 나라들은 이 독립을 보장하는 조약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한국민은 이에 만족을 표하였으며 마음으로부터 개혁 작업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 시점에 이르러, 러시아는 그들의 무력을 남진시키며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전을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한 거부의 힘이 집결되어 일본은 한국과 힘을 합하여 러시아의 위협을 군사적인 힘으로 막았던 것이다. 이처럼 진실성을 믿고 일본을 가까운 관계로 인식한 한국은 나라 전체가 최선을 다해 서 재정적인 지원과 육체적인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을 마다하지 아니하였고, 일본 군대를 수송하는 과정에서는 한국인은 그들을 믿음과 명예로운 군대로 환대를 하였다. 거의 모든 한국 영토 안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으며 이와 같은 협력의 결과로 일본은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그러나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나게 되자 일본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한국 전토를 집어삼키려 획책하기 시작하여, 결국 우리 황실을 위협하는 동시에 매국노 이완용의 반역적인 행동에 의해서 합병문서를 손에 쥐게 된 것이다.b. 깨어진 약속합병 선언문에는 분명하게 “일본은 대한 제국의 황가의 영예를 존중할 것이며, 한국민의 권리를 보장할 것임”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후 실상은 어떠한가? 일본은 우리 황실을 해체하였고, 우리 나라 땅은 그들 나라의 남아도는 인구를 하치시키는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나라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c. 법의 잘못된 집행우리 나라 백성은 평화로운 기질의 백성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법정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일본 인을 상대로 소송이 벌어졌을 때는 정당한 재판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이다. 그리고 경찰의 심문이 있을 경우에도 우리 백성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인내하여야만 한다. 또 우리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정책이 집행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담배를 피우지 않거나 술을 마시지 아니하는 젊은이들을 “반항자이거나 “반일본적”이라 칭하며 그들의 높은 도덕률을 추락시키려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부랑자를 일소한다는 법을 집행하면서 삶의 표준이 높은 많은 젊은이들을 잡아가 그들을 타락시키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도처에서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d. 자유의 파괴언론은 자유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열 명 또는 스무 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그 모임의 성격을 임의로 판단하여 깨거나 해산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진 형사들의 입회가 없이는, 그 모임은 불허되었다. 출판의 자유도 또한 없다. 독자들의 인식을 잘못 인도하거나 혼란시키는 것이 아닌 그 어떤 신문이나 책이 출판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교육 과정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 우리 학생들의 지성을 계발하려는 생각은 없고, 학생들이 배워서 아는 것을 제한하려는 의도만 보이는 것이다. 독이 묻힌 손으로 어린 나무들을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e. 33인의 구속일본은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을 구속하였다. 또한 33인이 받은 정의롭지 못한 처우에 분개한 수 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어린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을 구속하였다. 이 수 백 명의 사람들은 한 번에 2-3일 씩 투옥되고 음식을 제공받지 못하였으며, 저들이 가한 잔인한 고문의 상처를 온 몸에 남기게 되었다. 우리를 압제하는 자들의 인간애에 호소한다. 그들은 정의로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하나,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3. 한국의 미래.우리들이 벌이고 있는 시위와 엄숙한 선언은 외부의 영향을 받아 일으킨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나라 안의 영적인 힘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일본 관리들은 이 국가적인 운동에 누가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지도자인지를 알려 주는 사람에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 저들은 그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모른다.왜냐하면 그 지도자는 곧 하나님이시며 이 운동의 뿌리는 이천 만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려있기 때문이다.우리의 젊은이들은 소년이거나 소녀이거나 할 것 없이 이러한 이유로 구속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기에는 너무 어리며, 단합된 우리 나라의 깊은 영적인 운동에 동참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을 뿐인 것이다.우리는 이것이 나라 전체로서 우리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국가적인 자결권을 다시 찾도록 주장할 수 있는 기회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때가 바로 일제의 통치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시기이다. 우리는 진실하게 지상의 모든 나라들에게, 우리의 가엾은 이 상황이 여기서 끝나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부여받은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게 도움을 주도록 호소한다. 우리의 확신과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있다.오 하나님이시여, 여기 저희들을 압제자로부터 구해 주소서. 당신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며 구원이시니이다. 오 하나님, 우리를 도우시는 당신을 믿사옵니다. 아멘.

    279 청원서

    수신일: 1919-03-14발신자: 수신자: 하세가와하세가와 총독 각하! 우리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각하께 이 청원서를 올립니다. 지난 삼월 일일에 발표되고 한국민을 대신하여 삼십삼인의 대표들에 의해 서명된 그 선언문은 단지 몇몇 소수 사람들만의 뜻을 담은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양심과 백성들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것을 용납하실 것이라 믿습니다.“삼십삼인의 뒤를 이어서 우리는|| 이천만 한국민을 대신하여 우리의 요구와 소망을 전합니다. 각하께서는 우리가 구 세대의 한국인이 아니라||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과 개화된 문명의 길을 아는 새로운 시대의 사람임을 마음에 새겨 주시기를 바랍니다.새 시대의 정신이 우리를 움직였으며 우리가 청하는 요구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명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하며 우리의 생각의 책임을 지도록 요구합니다. 이 백성의 요구인 한국의 독립은 인간 본연의 권리요 요구 사항으로서 이 시대의 정신과 하느님의 목적과도 맥이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각하|| 이 독립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우리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극동 지역 전체의 평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실을 거듭 고려해 주십시오! 한국이 합병되었을 때|| 전 세계는 무어라고 발표하였습니까? 모든 발표에서 그들은 한국은 군대의 힘이 불충분하여|| 그 운명은 강한 나라에 자비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이 나라는 아시아의 평화를 흔드는 요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각하께서 이 사실을 신중히 생각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세계 역사 속의 이 새로운 시대는 진리와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는 인본주의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군대의 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힘의 법칙은 물러 가고 평화와 진리가 앞으로 나아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우리는 개인적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무력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을 자유와 스스로를 다스리는 자주의 정신과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어디에 우리의 독립 선언이 정의와 합당성에 반하는 것이 있습니까? 극동 지역의 평화가 한국의 독립에 달려 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중국에 물어보십시오. 러시아에 물어 보시고|| 전 세계에 물어 보십시오. 그 어느 나라가 이 제안이 옳지 아니하다고 말하겠습니까?“각하! 제왕으로서의 선함과 지혜와 능력으로|| 간절히 바라건대|| 이 청을 가볍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겨버리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이천 만 한국 백성이 뒤에서 우리를 떠받치며 그들의 뜻이 샘물처럼 솟아나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주장을 지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켜 나갈 정의와 인간애의 법 이외에|| 다른 어떤 무력의 힘을 믿고 의지하지 아니합니다.만약에 각하께서 잠시라도 이 흐름을 막기 위해서 군대의 힘에 의지하려 한다면|| 우리의 편에 서 있는 진리와 인간애의 밝은 샘은|| 당신의 깨인 선각자로서의 정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비추어 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본의 명예와 위엄을 비추어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각하께서 우리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기위해 굽어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280 자작 김윤식과 이용직의 청원서

    N.B. 김 윤식(Kim Yoon Sik)은 80세가 넘은 분으로1866년에 국왕전하께 일본과 조약을 맺고 조선의 문호를 서양에 열어야 한다고 청원을 하였던 사람이다. 그와 60세가 넘은 이 용직(Yi Yong Chik)은 항상 친일적인 인물들로서 일본 국왕으로부터 자작(viscount)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 청원서가 제출된 직후 곧 바로 이용직은 체포되었고, 김윤식은 너무 늙어 그의 방에서밖에 나오기조차 어려워 감옥에 갇히는 것은 피했으나 그의 집은 군인들에 의해 포위되어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그의 다른 남자 친척들은 모두 구속되었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구속으로 볼 때 이 운동은 기독교인의 부추김만이 주요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자작 김 윤식과 이 용직의 청원서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 일이 시대와 맞아야 좋은 것이며, 또 정부의 통치는 그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때만이 성공하는 것이라 봅니다. 만약 그 길이 시대와 맞지 않으면 온전치 아니한 것이며, 또 만약 정부가 백성을 편안케 해주지 아니 한다면 그 역시 좋은 정부는 아닐 것입니다.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지 십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동안 백성들에 대한 잘못된 다스림을 고침으로써 얻은 유익이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지도 백성들이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오늘 독립을 요구하는 소리가 거리에서 울리자 수 만 명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화답하였습니다. 십여 일 정도가 지났을 때에는 온 나라가 그 화답의 함성으로 메아리치게 되었으며,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함께 이 외침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전열에 선 자들이 쓰러지면 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와 그들의 자리에 서서 외쳤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우리가 보는 관점은 고통과 숨막히는 듯한 원한으로 인해 잉태되어 이러한 폭발 지점까지 이르렀으며, 이것을 더 이상 진압할 수가 없게 되면서,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펴 보이게 되었으며, 황하강이 흘러 넘치는 것처럼 그 물결은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한번 무너진 둑은 더 이상 흘러가는 물의 흐름을 되돌리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백성들의 참마음의 표현이라 보며, 더 나아가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 당신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오늘날 이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너그러운 유화책이며 다른 방법은 강한 진압책입니다. 너그러운 방법은 부드럽게 대하는 것입니다. 달래고 위로하여 백성들의 두려움과 오해를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시위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무력을 써서 그들을 넘어뜨리고, 뿌리를 뽑아 해체하며, 제거하는 등의 방법을 쓰게 된다면, 그로 인한 결과는 더 많은 시위를 유발시킬 뿐, 그들의 정신은 결코 제거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원인을 찾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결코 풀어내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이 백성들이 이제 행동으로 일어났는데, 그들이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노예상태의 부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무기라고는 맨손과 그들이 느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입뿐입니다. 이것으로 당신께서는 그들의 생각의 이면에 그 어떤 악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선하고 도량이 큰 사람이라면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듣기로는 사방에서 사람들을 구속하여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매를 맞고 고문당하여 그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관리들은 무기를 사용하여 죽이며 주검들을 나란히 쌓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들리는 이들 무서운 이야기들에 대하여 참고 있기가 어렵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나라는 더욱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진압하기 위하여 더 큰 무력을 쓰면 쓸수록 혼란은 더 가중될 뿐입니다. 각하가 그 원인을 보지 아니하고 무력으로 그 현상만을 자르려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비록 각하가 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을 누르고 죽일지라도, 그들의 겉모습을 잠시 바꿀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마음은 결코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 “독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조용히 집에서 마음으로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도록 많습니다. 그들 모두 체포하여 죽일 생각입니까?사람의 목숨이란 들에서 자라는 잡초처럼 대할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맹자는 (Mencius) 제나라의 순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약에 나라를 손에 넣어 연나라(Yun) 백성을 편안케 해 줄 수 있거든 그 나라를 취하십시요.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소유하는 것으로 그 백성들이 비참하게 되겠거든 그 나라를 취하지 마십시오.”맹자가 이렇게 말하였지만 왕은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 왕은 크게 부끄러워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 역사라는 거울을 비추어 보아 우리가 배워야할 것입니다. 현자(sage)일지라도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거슬러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태도 속에서 우리는 하늘의 마음을 읽습니다. 역사의 교훈은 백성이 편안치 아니하게 될 것이라면, 그 땅을 취할 일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당신의 종들은 위험하고 어려운 이 시대에 이렇게 나아와 있습니다. 늙고 부끄러움을 모르도록 추해진 저희들은 우리 나라가 병합될 때 훌륭한 작위를 수여 받았으며, 관직을 받고 부끄럽게 살아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 없는 이 백성들이 물과 불의 고문 속에서 견디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처럼 우리들도 혼자서 우리 집 방안에서 독립을 외치는 것입니다.우리에게 가해질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두려움 없이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에 있는 것을 거침없이 토로합니다. 곧, 그것은 각하께서 순리에 따르며, 천황께 알려 이 내각이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여 단지 입에 바른 말이나 폭력으로가 아니라 위 하늘의 뜻과 백성들이 말하는 소망에 따라 그 원인을 찾아 바르게 고치도록 희망한다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일본은 한국에 독립을 허락하고, 자신과 동맹관계로 함께 협력했던 나라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 자신의 정의로움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모든 나라들은 이에 지지를 보낼 것이며, 일식이나 월식으로 가렸던 해와 달처럼 일본은 다시 자신의 빛과 환함을 비치게 될 것입니다. 각하의 이와 같은 행위에 어느 누가 찬사와 칭찬을 아끼겠습니까?우리 당신의 종들은 닫힌 문안에서 병들고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서 또한 세상 물정도 잘 모른 채 이렇게 미약한 청지기로서의 진언을 나라에 올리는 바입니다. 이 진언에 공감하는 정책을 펴 나간다면 수많은 백성들이 편안해질 것이며, 그렇지 아니하다면 우리 두 사람은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생명의 한계에 거의 달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생명을 이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려 합니다. 비록 우리가 죽게 된다 하여도 불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나이가 가져다 준 노쇠함으로 인해 아픈 몸뚱이가 놓여 있는 이 방 안에서 어떻게 설득력있는 말을 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각하께서 이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글은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