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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21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

    사본발신일: 1919-09-10발신자: C. R. 애비슨(C. R. Avison)수신자: 아더 J. 브라운(Arthur J. Brown) 박사님수신주소: 해외 선교 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 공보관 미국 장로교회 뉴욕 주 뉴욕친애하는 브라운(Brown) 박사님께||여기에 동봉된 것은 서울신문(Seoul Press)의 오늘자 사본으로서 새 총독의 공식 포고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후에 이루어진 급진적인 개혁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되풀이한 것입니다.우리는 일요일 이후로 90(잘 보이지 않음)대의 매질을 당한 후 거리에 버려진 10명 이상의 사람들을 우리 병원에서 치료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처벌 방식이 어느 정도는 주목을 끌 거라는 희망에서 사이토(Saito) 남작에게 곧 이러한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최소한 이들 가운데 4명이 어린 학생이었습니다.우리들의 보금자리인 남대문 교회에서 일하던 학생 한 명이 오늘 정오에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죄목으로 체포되었는지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교회의 목사님도 지난 3월 이후로 감옥에 수감중이며|| 그의 첫번째 심리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서대문 형무소장이 어제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했습니다.현재의 상황에서는 일부 의학적 치료법에 대해 개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규 학생 이외에 37명의 학생들을 더 받아들였습니다. 4명의 의과대 학생들이 여전히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실정입니다.(서명) C. R. 애비슨(C. R. Avison)재배

    222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23브라운(Brown) 박사님께,뉴욕 알바니(Albany)의 벤자민 왈워스 아놀드(Benjamin Walworth Arnold) 씨께서 한국에 계신 엘리 모우리(Eli Mowry) 목사님을 후원하고 계십니다. 박사님께서 한국 선교단의 서기관으로 일하시는 엘리 모우리(Eli Mowry) 목사님의 체포와 수감에 관련해 아놀드(Arnold) 씨에게 특별히 편지를 써 주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놀드(Arnold) 씨께서 신문을 통해서 잘못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오늘 아침 신문에서 엘리 모우리(Eli Mowry) 씨가 항소 때까지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박사님이 아놀드(Arnold) 씨에게 전해 주신다면 무척 고마워할 것으로 생각합니다.재배(再拜)WPS: MCC22일에 받아 씀

    223 굴릭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9-24발신자: 수신자: 시드니 굴릭(Sidney L. Gulick) 목사님수신주소: 뉴욕 시 이스트 22번 가(East 22nd Street) 105굴릭(Sidney L. Gulick) 박사님께||하시(Harsey) 박사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제가 9월 23일에 이사회 부 출납계원인 러셀 카터(Russell Carter) 씨에게 보내는 ‘한국의 상황(Korean Situation)’에 관한 팸플릿에 대하여 박사님이 보내신 서신을 받았습니다.재배(再拜)AS.

    224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8-06발신자: 스피어(Speer) 씨 비서수신자: 서재필(Philip Jaisohn) 박사수신주소: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체스넛 스트리트(Chestnut Street) 1524웨이트만 빌딩(Weightman Building) 825서재필(Jaisohn) 박사님||스피어(Speer) 씨가 안 계시기 때문에 7월 30일 귀하의 서신에 첨부된 대한민국 초대 의회의 의사록의 수취는 9월에 스피어(Speer) 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보류될 것입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재배(再拜)스피어(Speer) 씨 비서

    225 로버트 스피어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30발신자: 대한민국 정보국(Bureau of Information for the Republic of Korea)발신주소: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체스넛 스트리트(Chestnut Street) 1524웨이트만 빌딩(Weightman Building) 825발신자: 서재필(Philip Jaisohn)수신자: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 박사님수신주소: 뉴욕 주 뉴욕 시 5번 가(Fifth Avenue) 150번지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 박사님께||1919년 4월 14일|| 15일|| 16일에 걸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 의사록 사본을 보냅니다.박사님이 관심 있어 하시는 정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재배(再拜)서재필(Philip Jaisohn)

    226 레이니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17발신자: 수신자: T. W. 레이니(T. W. Rainey) 목사님수신주소: 켄터키 주 뉴포트(Newport) 오버톤 스트리트(Overton Street) 624만세(The Manse)레이니(T. W. Rainey) 목사님께||장로교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홍보부에서 보낸 성명서는 정기 보고서가 아니라 연합신문(Associated Press)에 보내는 뉴스 발표일 뿐입니다. 교회연방회의(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동양 위원회(Commission on Relations to the Orient)에서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 아주 자세하고 신중한 내용의 효과적인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선교 위원회(Mission Board)들이 모두 참여하여 준비한 성명서입니다. 이것을 1백여 개의 주요 신문사에 교정쇄로 보내졌고|| 현재 인쇄되고 있으므로 뉴욕 시 이스트 22번 가(East 22nd Street) 105번지의 교회연방회의 동양 위원회에서 1부당 25센트에 구입할 수 있습니다.배상(拜上)

    227 뉴욕시 해외 선교위원회 서기관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15발신자: 제일 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만세(The Manse)수신자: 뉴욕 시 해외 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서기관님께,한국의 상황에 관한 보고서를 즉시 제게 보내 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사실을 알리기 위한 위원회의 노력을 진심으로 치하하는 바입니다. 이제 국민들에게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로 비극적인 상황을 알릴 때입니다.그러한 홍보와 전세계의 단호한 도덕적 비난만이 일본인들로 하여금 고통받는 한국인들에게 정의를 돌려주게 할 수 있습니다.배상(拜上)T. W. 레이니(T. W. Rainey)

    228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위원회에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14수신자: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위원회(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수신주소: 뉴욕 5번 가(Fifth Avenue) 156위원회 회원들께여러분, 토요일 석간과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일요일자 조간에 ‘일본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는 공포 정치’라는 제목으로 긴 성명서가 실렸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미국의 장로교 본부’에서 발표한 내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해외 선교위원회 사무실에서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에 문의한 결과, 이 자료는 연합신문(Associated Press)에서 받은 것이라고 하였고, 연합신문에서는 이 자료를 새시대운동(New Era Movement) 홍보부에서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새시대운동의 우탄(Wotan) 씨와 클라크(Clark)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와 같은 성명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 근거는 첫째로, 한국에 대한 장로교의 생각이나 태도를 언급하는 것을 보내려면 해외 선교위원회의 검토를 받아야만 하며, 둘째로 이 성명서는 오늘 배포한 동양 위원회의 성명의 효과를 약화시키기에 적절한 시기에 나왔다는 점, 그리고 셋째로 이것이 사려 깊고 현명한 주장이 아니며, 넷째로 그와 같은 정보에 대해 장로교와 선교사들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전 기독교 교회를 대신해서 우리는 처음부터 열심히 노력해 왔다는 점을 주장했습니다.우탄(Wotan) 씨와 클라크(Clark) 씨는 실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동양 위원회의 성명서 홍보를 도와줌으로써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동양 위원회가 신중하게 고려하여 작성하고 현재 배포하고 있는 성명서는 거의 40면에 달하는 긴 내용의 자료이며, 매우 조심스럽고 온건하면서도 단호하고 솔직한 내용의 성명서입니다.재배(再拜)

    229 1919년 10월 27일 헬렌 휘트모어(Helen C. Whittmore)가 화이트(White)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

    발신일: 1919-10-27발신자: 수신자: 화이트(White) 박사10월 5일자로 한국에 있는 남동생이 보내 온 편지를 지금 막 받았습니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서울과 북쪽에서는 다시 문제가 생겼고|| 그들의 요리사인 젊은 남자가 대부분 서른 살 미만의 여러 젊은이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체포된 이들의 수는 20명에서 8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왜 체포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경찰에서 시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230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발신일: 1919-07-07미국의 신문들은 이미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잔학한 행위에 대해 많은 기사를 쓰고 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원인과 이유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 사설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다. 제2의 벨기에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누군가 사실을 알리고 이후 건설적인 개혁의 근간을 형성해야 한다. 이 사설은 그런 의도를 염두에 두고 씌어진 것이다. 지금 여기에 보고되는 내용은 한국 내 수십 군데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보고 받은 내용 가운데에는 지금 우리가 보고하는 내용보다 훨씬 비참한 내용의 것도 있다. 그러나 충분한 증언을 토대로 확립하지 못한 내용은 생략하고, 한치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실이라고 알려진 사건에만 보고를 한정한다. 이 보고서 대다수는 매우 불쾌한 내용이며, 독자들은 우리가 이런 사건을 직접 목격했을 때처럼 분개하여 피가 끓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평은 거의 없이 사실만을 제시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여지를 남길 것이다. 상황이 실제로 있었던 그대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에 보고서의 내용은 아주 길어질 것이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한 내용이 될 것이다.한국 내 경찰 예비 조사 결과구둣방 점원인 어느 소년의 이야기(병원에서 한 외국인이 직접 소년을 인터뷰한 내용)“이 ‘구둣방 소년 점원’의 이야기는 읽는 사람이 진저리를 치도록 만드는 여러 가지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는 약간 마르고 소심한 열아홉 살의 기독교인으로 여러 해 동안 시내에서 신발을 만들고 있는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돌아다니며 구두를 팔고 있었다. 한국에 폭동이 일어나면서 그는 거의 생명을 잃을 뻔했다. 그는 어떤 부자의 집에서 일시적으로 머물고 있던 중 어느 날 밤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 한국 독립운동의 성공에 무척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의심을 받던 그 사람에게 염탐꾼이 따라 붙었고, 어느 날 그 구둣방 소년 점원과 함께 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그 부유한 집안의 남자가 먼저 취조를 받았는데, 비밀리에 간행되던 ‘독립 뉴스(Independent News)’라는 간행물을 배포하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하면 풀어 주겠다고 했다. 취조는 그 남자가 받았지만 벌은 구둣방 소년 점원도 함께 받았다. 그리고 곧 그 소년은 죽기 직전에 이르기까지 지독하게 매를 맞았다. 나는 그에 관해 무척 걱정이 되었다. 그로부터 33일이 지나 나는 시내의 장로교 교회 여성 신자들과 만나 그 소년이 공립 병원에서 죽어 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편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최소한 목숨은 건지게 되길 바라고 있다가 어제 병원으로 그를 보러 갔다. 그가 병원에 있게 된 것은 경찰이 자기들 수중에서 그 소년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가 기적적으로 회복되면 다시 고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가 내 카드를 보여주고 그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경찰의 방해는 없었고, 그곳에서 나는 무척 놀라게 되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아주 여윈 병자 소년이 있었다. 5주 전만 해도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는가? 나는 분명 하나님께서 나를 그곳에 보내신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그곳에 거의 한 시간 반 정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나는 몇 차례 찬송을 하고 그와 함께 기도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은 그가 해준 이야기이며, 그가 살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가 체포된 바로 다음날 그는 한국 독립운동에 연루되었는지 심문을 받았다. 사건에 대해 밝히기를 거부하자 그는 여섯 시간 동안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계속되는 고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는 상체가 크게 꼬일 때까지 팔을 팔꿈치 위로 올리게 했다(보통 구타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그리고는 그가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구타가 계속되었다. 그가 쓰러지면 경찰은 그에게 찬물을 먹이고 몸에 물을 끼얹어서 그를 다시 깨웠다. 그러고는 다시 질문을 퍼부었지만 다시 사실을 밝히기를 거부하자 육체적인 고통이 시작되었다. 나는 다리 윗부분에 있는 상처가 빨간 금속으로 5인치 정도 갈라진 것을 보았다. 그런 상처가 네 군데나 되었다. 심한 구타로 피부가 죽어 있었고, 한쪽 손은 원래 크기의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고 했다. 한 손가락의 두 마디와 두 개의 손가락 끝만 보아도 그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는 맞아서 아직도 욱신거린다고 한다. 곧 의사가 정기 검진을 했고, 그는 검사만 받아도 큰 고통을 느끼는 듯 했다. 그는 내게 가슴과 폐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의 가슴이 아팠던 것은 추위에 노출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가 검사를 위해 옷을 벗었을 때 나는 배 부분 전체에 상처가 난 것을 보았다. 총검으로 벤 것인지 의사의 치료로 인한 상처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상처가 나아가고 있었다. 의사가 처음에는 촉진부터 시작했지만 이 소년은 가슴에서 사타구니, 엉덩이까지 조금만 건드려도 견뎌 내질 못했다. 몸은 뼈까지 많이 쇠약해져 있었고, 그 소년은 겨우 몸을 일으켜서 앉아 있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경찰서에서 나흘 동안 고문을 당하고 또 이틀 동안 아팠지만, 의사가 그를 진찰하러 간 것은 세 번뿐이었다. 소년은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길 죽여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신은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계셨다. 병원에 20일 동안 있으면서 그는 회복될 가능성을 보였다. 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 인력거를 탔고, 그에게 달걀 몇 개와 분유, 그리고 베개를 씌울 깨끗한 천과 옷을 주었다. 그 소년이 입고 있는 옷에는 그가 겪은 일들의 표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병원 방문 중에는 한 한국인 간호사가 간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더렵혀진 그의 옷은 가져가려고 둥글게 말려 있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나서 내가 방을 나설 때 한 노동자가 문 밖에서 나를 막아섰다. 그는 병자에게 말을 하고는 “기다려요. 지금 가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 남자는 내가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라, 내게 어떤 혐의를 씌우려 하고 있었을까? 내가 그 소년을 내 인력거에 태워 데려가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나를 체포하려고 했다. 우리는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30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곤란한 상황을 상상해 보라. 나는 저녁거리로 이미 생선을 산 데다,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시간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자에게 생선과 메모를 주어서 보내 놓고는 참을성 있게 앉아서 기다렸다. 동양에서는 절대 당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확실히 주의를 끄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를 데려가려고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올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내 명상을 깬 것은 무장한 군인들이 아니라 평복을 한 일본인 형사로 나를 인터뷰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아는 것을 모두 말했고, 그는 내게 매우 얌전하게 대했는데, 그는 바로 그 ‘구둣방 소년 점원’을 거의 죽을 지경으로 고문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알려져 있는 첩자로 우리 학교의 아이들을 고문한 사람이었다. 인터뷰는 간단했고, 그 소년이 아직 죄수이므로 내가 그를 방문하려고 한다면 우선 경찰에 허가를 요청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마치 얇은 얼음을 보는 것과 같이 상황을 빠짐없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분명 감옥 안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했다. 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리는 전화가 왔고, 내가 돌아왔을 때는 벌써 법률 위원회 회원이 경찰서로 막 가려던 참이었다.현재 일본과 미국의 협약 아래에서 우리 외국인들에게 자유는 거의 없으며 안전하다고 할 수도 없다. 미국 정부에 물어 보라!위의 사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수십 수백의 비슷한 사례가 있으며, 구체적인 실증을 들 수도 있다. 경찰서는 지구상의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런 잔학한 행위를 다 열거하자면 혀에 물집이 생길 지경이다. 남자들은 구타당해 죽어서 친척들이 시체를 가져다 묻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불구가 될 정도로 맞아서, 풀려나서는 죽을 때까지 가족에게 짐이 된다. 또는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나서 재판을 받고 수감된다. 이런 경우는 자주 일어나는데, ‘구둣방 소년 점원’의 경우처럼 재판이나 수감 생활을 하기 위해 먼저 병원에서 몇 주를 있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그 ‘구둣방 소년 점원’은 내가 인터뷰를 하기 전에 이미 병원에 33일이나 입원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소년이 재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그런데다가 그는 9개월 동안 감옥에 있게 된다. 이것은 실제로 재판이 일어나기도 전에 경찰들이 결정한 것이다. 법원에서는 그저 재판의 형식을 거치고 경찰이 제안한 대로 판결을 내릴 뿐이다. 가끔은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는 대신 대나무 몽둥이로 90대만 때리고 풀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90대를 한번에 맞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사흘 동안 매일 30대씩 때리게 된다. 현재 개인 병원에 오는 많은 환자들이 바로 그런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모든 일이 전 세계를 향해 자신들이 현대 문명을 완전히 이루었으며 세계열강들의 동맹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과연 언제쯤이면 이 같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종식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우받는 날이 올 것인가?경찰 예비 조사에서 여성에 대한 끔찍한 대우다음 이야기는 1919년 4월 22일,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이 진술하고 서명한 것이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된 여성에 대한 조사는 가장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성이 있는 자리에서 벌거벗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과 한국인 여성들은 유럽인들과 똑같은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성에게 노출되면 크게 수치심을 느낀다. 일본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한국 여성들을 심문할 때는 우선 옷을 다 벗게 한다. 여성들은 취조실에 들어간 뒤에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감금된 방에서 헌병들이 옷을 벗긴다. 그러고는 여기서부터 야외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야 하는데, 이때 누구나 원하면 그녀들을 볼 수가 있다. 때로는 일본인 여성이 데리고 가기도 하지만 아닐 때도 있다. 그녀들은 몸을 씻을 때도 감옥에서 입는 얇은 기모노를 벗고 남들이 보는 데서 벗은 채로 있어야 한다.”“조사를 받을 때는 물론 남자들 앞에 서게 된다. 조사를 하는 내내 긴장과 굴욕의 고통이 따르게 된다. 고상한 집안에서 자라 항상 여성으로서 존중을 받는 데 익숙하던 여자들과 처녀들이 모두 난폭한 대우를 받았다. 그녀들은 거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아주 지저분한 욕설을 들었다.”“자기 몸을 가리려고 하던 일부 여성들은 뒤로 손이 묶였다. 어떤 소녀들은 조사를 받는 중에 바닥에 엎드려 기라는 강요를 받았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말하기 너무 지저분한 이야기이지만, 올바른 판단을 위해 알려야만 하겠기에 망설이면서도 사실대로 기술한다.) “그러고는 거울 위에서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라는 말까지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극악무도한 남자들은 어떤 여자들의 배를 차거나 거칠게 다뤘다. 여자들의 가슴은 마치 암소처럼 비틀어 짜졌고, 막대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방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가운데에는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독일인들이 여성을 끔찍하게 대우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그에 버금가는 끔찍한 일들이 여기서도 벌어졌다.” “이 나라의 어떤 지역에서는 여성들이 대낮에 집에 있는 것조차 안전하지가 않다. 여자들은 낮이면 산에 가서 숨어 있다가 밤에만 집에 내려온다.”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대단히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필요할 때마다 전해질 수 있게 하겠다고 맹세했다.”일본군들이 기독교인을 살해하고 있다. [1919년 4월 29일 동경,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다음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로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이다. 미국 부영사(副領事)와 영국 대리 영사도 직접 그 장소에 가서 그와 같은 행위에 대해 항의했다. 총독은 결국 그것이 실수였음을 인정했고, 전반적인 사실은 다음과 같다.서울에 있는 선교사인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씨가 4월 16일 경기도 수원의 팔탄 시장(Pal Tan Market) 근처로 가던 중 진술한 내용.일행은 내 차로 오전 9시 30분에 서울을 떠나 수원과 오산을 거쳐 팔탄(Pal Tan)으로 갔다. 총 46마일이 조금 넘는 거리이다. 팔탄(Pal Tan)에 도착하기 약 2마일 전에 시장이 있는 동네 뒤쪽에서 커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세워 두고 나는 근처에 있는 인가로 가서 한 농부에게 말을 걸었다.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저 연기는 뭡니까? 농부: 마을이 불에 탄 연기입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언제 불이 났죠? 농부: 어제입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어쩌다 불이 났나요? 농부 (겁에 질려 주위를 돌아보면서): 군인들이 그랬습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왜 그랬나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만세를 불렀나요? 농부: 그게 아니라 그 마을이 기독교인들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그럼 여기선 독립 시위는 없었나요? 농부: 얼마 전에 장날 시장에서 시위가 있었습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마을에서는 없었단 말씀이죠? 농부: 없었어요. 사람들도 모이지 않는데 자기들끼리 무슨 만세를 부르겠습니까?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이 마을에도 군인들이 왔나요? 당신은 교인이신가요? 농부: 아닙니다. 여긴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저 마을 이름은 뭐죠? 농부: 제암리(Chay amm ni)라고 합니다.그 다음 나는 마을에서 다른 사람을 하나 더 만나 똑같은 질문을 했고, 그 사람도 앞서 농부가 한 말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다만 거기에 갔던 사람은 거의 없었고, 지난 장날에는 사람들이 시장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는 말을 들었다.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마을로 갔다. 동네 입구에 있는 개울을 건널 수가 없어서 차는 두고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마을로 들어가는 큰 길 두 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경찰서를 지나갔다. 78연대의 군인들이 경찰서 밖에 서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 지나갈 때 한 일본인 경찰이 나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더니 우리에게 경찰서로 들어오라고 했다. 우리가 들어가자 두 명의 일본인 장교들이 일어나서 나갔다. 우리 모두는 그 사람들의 어깨에 묻은 견장을 보았는데 빨간색에 별이 세 개 있었다(이것은 중사 계급장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경찰서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던 경찰이 어깨에 카빈총을 메고 장교들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경찰을 앞세우고 남양(Namyang) 쪽으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 커티스(Curtice) 씨가 경관에게 카드를 보여주고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일본어를 말하지는 못하지만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대화의 상당 부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이 알고 있는 서울의 지인(知人)부터 거리, 교량 등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커티스(Curtice) 씨는 화재에 대해 물었다. 경찰서장은 작은 화재가 있었지만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소동에 대해서 묻자 그는 그 지역에서 작은 소동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다 끝났다고 대답했다. 커티스(Curtice) 씨는 잡다한 담화를 좀 더 나누다가, 잠시 둘러보면서 화재 현장을 보고 싶은데 마을에서 인력거를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서장은 “무슨 화재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커티스(Curtice) 씨가 “근처에서 일어난 것 말입니다”라고 말하고, 시골길을 3-4 마일쯤 가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장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알겠다고 말하고, 경찰을 한 명 같이 보내서 우리를 인력거 타는 곳까지 안내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인력거 세 대를 빌려 탔다. 연기가 피어오르던 마을은 읍내에서 1마일도 떨어져 있지 않았고, 우리는 잠시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그 마을이 있었던 언덕 아래쪽을 돌아보았다. 그 마을에 인가가 약 40채 있었다는 한국인들의 말과 우리 추측은 맞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너덧 채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화염에 재가 되어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여자들과 어린이들, 노인들이 마을 위쪽 언덕에 앉아서 절망스럽게 폐허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을을 가로질러 약 절반쯤 가다가 한 젊은 남자의 시체가 심하게 불에 타서 어떤 건물 바로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 건물은 바로 교회였다. 우리는 그 시체가 누워 있는 채로 사진을 찍었다. 마을 끝까지 간 다음에 우리는 언덕 쪽으로 다시 돌아와서 앞에서 말한 그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과 수년간에 걸친 노력의 결과가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언제 화재가 났는지 물었다. 그는 “어제 이맘때(오후 2시) 쯤 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화재가 처음 어떻게 시작된 거죠? 한국인: 군인들이 불을 질렀습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많은가요? 한국인: 교회에 있던 교인들을 군인들이 전부 다 죽였습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화요일 오후에 그 사람들은 왜 교회에 있었던 건가요? 한국인: 군인들이 와서 교인들은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교회에 여자들도 있었나요? 한국인: 아니요. 여자들은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그럼, 교인들이 교회에 모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한국인: 군인들이 그 사람들에게 총을 쐈고, 칼과 검, 총검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교회에 불을 질렀습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다른 집들은 어쩌다 불이 난 거죠? 한국인: 교회에서 불이 옮겨 붙은 집도 있었고, 바람에 화염이 옮겨 붙지 않는 쪽의 집들은 군인들이 불을 질렀습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당신은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나요? 한국인: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교인들만 모이라고 했거든요.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그런데 당신 집도 불탔나요? 한국인: 그래요. (가리키며) 저기 저 불탄 곳이 우리 집입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몇 군데는 남은 집도 있는데요. 어떻게 된 거죠? 한국인: 따로 떨어져 있는 집이어서 여러 군데 불을 질렀어도 옮겨 붙지 않은 겁니다. H. H. 언더우드(H. H. Underwood): 교회에서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한국인: 30명 정도입니다. 나는 그 한국인과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걸어갔다. 그쪽에는 몇몇 젊은 여자들이 아기를 데리고 있었고, 나이든 여자들과 약 열 아홉에서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로, 이 교회가 포함된 교구의 N. 감리교 선교회(N. Meth Mission)의 노블(Noble) 박사를 알고 있었다. 나는 시간과 방법, 사망자 수, 화재 등에 대해 거의 같은 질문을 다시 했고, 다시 같은 대답을 들었다. 젊은 남자에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물었는데, 그는 자신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밤에 돌아와서 보니 자기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두 죽어서 교회 잔해에 묻혀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교회가 서 있던 자리를 보여주었고, 우리는 내려와서 또 다른 시체를 발견해 사진을 찍었다. 다른 시체들은 아직도 교회 잔해에 묻혀 있었다. 그 사람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로 여기저기 불탄 곳에서 가재도구를 꺼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 전체가 가진 것을 합해 봐야 아주 조금의 쌀이나 곡식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년을 위한 종자와 큰 의지가 되던 가축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잃었다. 우리는 사진을 찍은 후 이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마을을 가로질러 아직 서 있는 집으로 다가갔다. 그 집주인은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고 자신의 집만 아직 서 있고 불에 타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습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건에 대한 노인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일치했다. 그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30명 정도의 숫자를 말했다.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은 후 우리는 인력거로 와서 다시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인력거꾼은 우리를 3마일 떨어진 다른 마을로 데려가주겠다고 제의했다. 수혼이라는 그 마을에서도 며칠 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15군데 정도의 마을이 불탔고, 그 대부분은 기독교 중심지였다고 자진해서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및 서울의 이 지역을 관할하는 선교회로 보내온 보고서와 일치했다. 2주일에서 10일 정도 전에 군인들이 자동차를 타고 왔고 첫 마을이 그 당시 불탔다는 것이다. 경찰서장은 그런 사건은 예전에 끝났다고 보고했고 우리는 우리가 방문했던 마을의 한국인들이 그런 폭력사건이 있었다고 고발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경찰은 폭력은 다른 마을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경찰에 작별인사를 하고 갔을 때처럼 자동차로 서울로 돌아왔다. 5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총독은 그런 범죄를 저지른 부대의 책임자였던 중위가 처벌받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처벌이라는 것이 그를 현재의 지위에서는 물러나게 만들고 어딘가의 더 높은 지위로 승진시켰다는 의미가 아닌지를 알고 싶다. 정주교회 방화기독교 교회에 불을 지르는 것은 현재의 경찰을 포함해 과거의 군대의 취미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인들을 싫어해서 몰아내고자 했던 비 기독교인들에 의해 방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군대가 그 배후에 항상 주둔해있으면서 범죄가 일어났을 때 정당하게 분개하게 하는 한편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근거는 너무나 분명하다. 맞다. “기독교도 살해와 화형”에 대한 기사에서도 볼 수 있는 사례가 있으며 여기서도 그 행동을 그들 자신이 했다. 우리는 여기 평안북도 정주의 교회 방화에 대한 기사 두 가지를 제시하려 한다. 하나는 정부가 통제하는 신문인 『서울 신문』에 실린 기사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의 목사로, 교회를 관찰하고 주의 깊게 조사한 미국인 선교사에 의한 기사다. 여기에서 어떤 결론을 끌어내는지는 독자의 몫이다. “기독교 교회가 불타다”(『서울신문』, 1919년 4월)화요일 오전 6시 한국 평안북도 지역 정주의 한 기독교 교회에서 화재가 일어나서 건물이 전소되었다. 손해액은 10,000엔으로 추정된다. 목적 없는 소요를 혐오하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교회를 희생시키는 방화를 저지르지 않았는지가 의심된다.『서울신문』 1919년 4월 13일다음은 교회 목사가 서술한 내용이다. 정주교회 화재“4월 8일, 경찰들이 정주의 새로 지은 큰 교회로 와서 돗자리와 다른 가구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러더니 그들은 불을 껐다. (기독교인들은 이 건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고 이 건물에 대한 비용을 지불했다.)”“4월 9일, 즉 4월 8일 밤 그 경찰들은 가연성 물질을 대규모로 설교단 앞에 쌓아놓고 거기에 불을 붙였다. 교회의 집사 한 사람이 종을 울렸고 교인 몇 명이 달려와 불을 껐다. 다음날 아침 경찰은 교회 근처에 집이 있는 기독교도들에게 이주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교회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 이유였다.”“4월 10일, 가연성 물질을 교회를 빙 둘러 놓았고 석유가 끼얹어진 후 불이 붙여졌다. 다시 종을 울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고 교회는 전소되었다.”“4월 11일, 목사의 아내와 교회 임원 몇몇이 불려가 교회 화재에 대해 책망을 당했다. 그들은 한 사람도 불을 끄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며 기독교도들이 얼마나 야비한 악당인지에 대해 연설을 늘어놓았다. 사실은 밤에 거리에 나타난 사람은 누구건 심하게 구타당하거나 다른 학대를 당했던 것이다.”“일본 언론에는 기독교인들이 독립 운동에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렀다는 취지의 언급이 있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선교사들은 책임이 없다. 위의 인용문들과 연관된 국제적 문제들은 매우 중요하다. 3월 14일 정부는 선교사들이 현재의 소요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전 세계에 고했다. 이 발표 이후로,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련의 가장 악랄하고 명예훼손적인 사설들이 일본 언론과 한국 언론에 등장했다. 어떤 문명화된 정부도 이러한 기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면서 문명화되었다는 평가를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허용했고 동시에 진실한 기사를 금지시켰다. 거짓만이 검열을 통과했다. 4월 29일 『저팬 애드버타이저』(동경)에는 선교사들에 대한 또 다른 “공식 면죄”기사가 나왔다. 그 이후로 명예훼손은 실제로 숫자상으로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발표가 이루어진 후에도 외국인들에 대한 최악의 기사 중 몇 가지가 나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아래에 그런 기사의 몇 가지 실례와 “면죄” 발표가 이어진다. “선교사들은 책임이 없다. “한국의 관리들은 선교사들이 혁명을 도왔다고 했던 보고를 후회하고 있다.“현재 최근의 소요에 대한 조선 선교사들의 태도는 한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공정하며 그들에 대한 모든 의심은 사라진 것이 확실하다“고 서울에서 발행되는 지방신문인 『케이조 니포(Keijo Nippo)』가 “어느 영향력 있는 인사”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유해한 소문이 도는 것을 유감스러워하고 있었다. 『케이조 니포(Keijo Nippo)』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이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고려할 때 기뻐해야 할 사안이다. 양국간의 우호 관계는 지난 반세기 동안 달라진 적이 없으며 태평양만큼이나 깊은 것이다. 양국의 상호 감정은 이시이 렌싱(Ishii Lensing) 협약으로 더 강해졌고 전통적인 우호관계가 친밀하게 계속 증진될 것이라고 믿을 만 한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미국 내의 몇몇 한국인 선동가들은 현재의 문제점과 관련해 파리로 가고 싶어 했지만, 미 국무부는 그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이는 워싱턴 정부가 일본에 대해 보이는 우의의 증거다.”『케이조 니포(Keijo Nippo)』는 앞의 인사의 말을 계속해서 인용했다. “세계 곳곳에 파견되어 있는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최근 불만 소요에 참가했고 한국인들의 움직임을 지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인 선동가들이 무지한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 간의 관계를 오도할 수 있는 어떤 기회이건 잡으려 할 위험성은 있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행동과 발언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로써 한국인들의 도구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한편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에 대한 태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한국인들의 불만으로 인해 다양한 루머가 퍼지도록 조장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인들에 의해 오도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한국의 개혁 필요성 (『야마토(Yamato)』, 1919년 4월 30일).........“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폭도들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사실일 수 있지만, 한국을 외국인들의 선동에 좌우되는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선교사들이 폭동을 부추기는 것은 범죄 행위지만, 한국의 통치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총독이며 그 지배가 증진되도록 모든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이는 면죄와 그렇게 비슷한 것 같지 않다.“황제(Kaiser: 독일 황제의 호칭)” 윌슨(Wilson) [『코치(Kochi)』, 1919년 4월 20일]“윌슨 씨의 오만함이 전 세계에서 비판받고 있다. 그는 대다수가 지지하는 인종 수정조항을 자의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5개국 열강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독일 대표의 초청을 발표했으며, 이탈리아 수상을 무시하면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연설했다. 윌슨 씨의 오만함에 대한 증거는 지나치게 많아서 다 열거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그가 제 2의 카이저라 말한다. 그의 임기는 곧 끝날 것이며, 이로써 그가 전(前) 카이저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그에게는 행운이다. 위선자 윌슨 [『추오(Chuwo)』 1919년 4월 30일]“소위 정의와 인간애의 진짜 성격이 그 원칙이 국제연맹이 승인한 먼로 독트린을 포함하고 있다는 발의에서 드러났다. 산둥 문제에 대해 일본은 또 다른 3국 간섭, 즉 영국, 미국, 프랑스의 간섭으로 위협받게 될 것이다. ......... 국제연맹은 겉치레를 이제 완전히 벗어던졌다. 윌슨 씨가 세계 평화라고 묘사한 것의 기조가 있다면, 영국과 미국의 이기심이다. 이것이 태평양을 건너 윌슨 씨를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해왔던 일본인들이 받은 인상이며, 이제 그는 말로만 천사이고 행동에서는 악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영-미 계획 [『요로쥬(Yorodzu)』, 1919년 4월 30일]........“윌슨 씨는 평화회담에서 마치 자신이 전 세계의 전제군주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는 점점 제멋대로가 되어 심지어는 독일 대표를 초청하는 문제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론이 있을 수가 없다. 현재 미국의 전제주의로 인해 미국은 여러 가지 당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야마토(Yamato)』는 5월 1일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윌슨 대통령은 전반적으로 일관성이 없으며 단순히 이기적인 국가 이익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귀하가 국제연맹을 정의와 인간애의 원칙 위에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만들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귀하가 국제연맹 헌장에 먼로 독트린을 확인하는 문구를 넣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사실로 인해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해졌습니다. 연맹의 운영을 완전히 밀어붙일 수 없고 그 원칙에 미(美) 반구가 통제될, 미국의 이기적인 원칙을 승인하는 것은 국제연맹의 근본을 흔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귀하가 국제연맹을 망쳐놓으려고 한 행동은 이것만이 아니며, 귀하는 수많은 모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윌슨 씨, 동양 속담 하나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생선 냄새 나는 중에게 신자들을 맡기지 마라”(불교의 특정 종파에 속하는 승려들은 교의에 충실하기 위해 생선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생선 냄새”는 이러한 절제를 지키지 못한 이들을 말합니다)는 것입니다. 이 동양 속담과 정의와 인류애에 대한 귀하의 원칙, 그리고 국제 연맹에 대한 귀하의 계획을 비교해 볼 때 귀하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위에 인용된 부분은 기사에서 이전에 인용된 “공식적인” 면죄에 대해 이전에 나온 기사와 비교하면 너그러운 편이다. 다음은 지난 두 달 동안 일본 언론에 나왔던 내용에 대한 적절한 시각을 보여준다. 이 내용을 읽은 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안에 내포된 경향을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는 빠르건 늦건 일본 정부의 입장이 될 것이며, 이는 전쟁을 의미한다. 반일 선전 [『요로쥬(Yorodzu)』, 1919년 4월 18일]“...일본은 성실하게 신사협약을 지켰고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숫자는 줄어들지는 않았다 해도 의미가 있을 정도로 늘어나지도 않았다. 일본인들의 자유에 제한을 가해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현재 미국에서 제안되고 있는 다양한 반 일본인 조치로 인해 일본인들에게 흑인들에게와 같은 차별적 처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것이 터키에서의 미국인들에 대한 학대를 고발하고 러시아의 유대인들을 대신해 인간애의 원칙을 설교하는 미국인들의 적절한 태도라 이야기할 수 있는가? 미국 측의 이러한 행동에 일본인 누구라도 어떻게 모욕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국인들의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미국인들의 행동은 그들이 훈족과 같다고 경멸했던 독일인들의 행동보다도 더 비열하다. 미국인들은 최소한 우리 문화보다 훨씬 더 낮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야만인들이다. 정의와 인류애의 의미에 관해 미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배워야 할 처지에 있다. 한국의 학교 [『코치(Kochi)』, 1919년 4월 13일]“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는 한국의 학교가 한반도에서의 소요의 주요 근원이라는 사실이 거듭 입증되고 있다. 이 사실이 입증됨에 따라 일본 당국은 그 학교 모두의 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내려야만 한다.” 이 내용은 이 기사 앞부분에 인용된 선교사들에 대한 “공식적” 면죄와는 대단히 다르다.한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서도 최상의 매트(mat, 한국인들의 기호에 맞는)에 대한 기사가 등장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평양 서문 밖의 사악한 마을, 현명한 군중[『오사카 아사히(Osaka Asahi)』, 1919년 3월 17일]“평양 서문 밖에는 높고 낮은 몇몇의 벽돌집과 한국식 집이 여러 채 있다. 이는 외국인들의 집이다. 그들은 모두 100명 정도 되며 기독교 선교사들이다. 평온한 봄날이면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쨍쨍거리는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표방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음모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전도를 위해서 거기 온 것처럼 꾸미고 있지만 비밀리에 정치적 소요를 선동하고 있으며 바보스럽게도 한국인들과 헛된 말을 주고받으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조장하고 있다. 그곳은 진실로 악마들의 소굴이다.“그 무리의 수장은... 그곳의 기독교인들은 마치 예수에게 복종하듯 그에게 복종한다. 메이지 29년 누구에게나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고 그 때에... 기독교인들에게 종교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30년 이상 평양에서 살았고 많은 땅을 사들였다. 그는 사실상 외국인 공동체를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이 공동체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의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다. 그들은 한편으로 한국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한국인들의 병을 치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간교한 그림자를 감추고 있었고 한국인들 자신도 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곳이 최근의 소요의 중심지다. 서울이 아니라 평양인 것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는 평양의 교회 학교, 특정 대학과 여학교, 그 외국인들의 공동체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이 외국인 공동체는 정말로 몹시 나쁜 곳이다. 3월 17일자 『조선신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한국인들의 마음을 자극한 것은 미국인 선교사들이다. 이번 소요는 그들의 작품이다. 소요의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2-3명의 선교사들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천박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상당히 많고 그들이 한국인들이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으며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이번 소요의 뒤에서 우리는 손을 흔들고 있는 귀신같은 형체를 본다. 이 귀신은 정말로 증오스럽고 심술궂고 사납다. 짙은 색 옷을 입고 있는 이 귀신은 누구인가? 선교사들과 천도교인들(반정치 반종교적인 조직으로 최근 사태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했음)이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학문, 성격, 특질은 모두 미국이라는 나라의 질 낮은 쓰레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1년에 300엔이라는 낮은 임금에 스스로를 판 것이며 파충류들처럼 배를 깔고 기어서 한국이라는 먼 곳까지 온 것이다. 그들의 학문, 성격, 특질에 좋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 하느님의 사자들은 오직 돈을 쫓아 온 것이며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 자신들의 집 근처에 앉아 있다. 세상의 모든 나쁜 것은 모두 이들과 같은 쓰레기에게서 시작된다. 그들은 이 더러운 작업을 계획했으며 천도교와 동맹을 맺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보면, 그 선교사들은 모두 지긋지긋한 짐승 같은 놈들이다.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기사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정부가 이러한 내용이 활자화되는 것을 허락했을 때의 언론의 태도를 독자들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언론은 항상 검열 하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활자화된다면 즉 이는 정부가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은 금지되고 거짓과 명예훼손은 허용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은 관련된 양국 간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