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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81 한국인들의 목표와 염원

    (1) 우리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의 권력은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정부의 권력은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을 위해 집행되어야 한다.(2) 우리는 일반 백성들을 교육함과 동시에 가능한 한 미국의 정부 조직을 본받아 그와 비슷한 우리 정부를 조직하기를 제안한다. 그 다음 일정한 기간 동안은 정부에 보다 많은 권력을 집중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백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스스로 자기 정부를 운영해 보는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백성들을 정부의 일에 광범위하게 참여시킬 수 있을 것이다.(3) 그러나 우리는 대소 지역 의원들을 선출하고, 선출된 지역 의원들이 나라의 입법부인 국회에 보내는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보통 선거권을 제안한다. 국회의원들은 정부 내의 행정 조직과 연계하여 일하는 권한을 가지며, 그들은 국가의 법을 제정하는 유일한 기관이고, 그들은 그들을 뽑아 자신들을 대표하도록 권한을 준 백성들에게만 책임을 진다.(4) 행정부 조직은 대통령, 부통령 그리고 국회가 제정한 법을 집행할 정부 각료들로 구성된다.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선출된다. 대통령은 내각 장관, 도지사 그리고 외국에 보낼 대사를 비롯하여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수행할 관리들을 임명할 권한을 가진다. 또 그는 외국의 원수들과 조약을 맺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나, 국회 상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대통령과 내각은 국회에 책임을 진다.(5)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믿는다. 어떤 종교와 교리도 나라 안에서 국내법과 국가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가르치고 전파할 수 있다.(6) 우리는 세계의 모든 나라와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음을 믿는다. 조약으로 맺어진 모든 나라들의 시민들과 백성들에게 그들과 한국인들 사이에 거래되는 모든 무역과 산업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대등한 기회를 주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한다.(7) 우리는 백성들의 교육을 정부가 수행하는 다른 어떤 정책에 우선한다.(8) 우리는 백성들의 건강이 정책 집행자들의 기초 관심사 중의 하나로 여기며 과학적인 관리를 통한 현대 위생 증진을 추구한다.(9) 우리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믿는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원칙, 기회의 균등, 건전한 경제 정책, 세계 국가들과의 자유로운 교통, 국민 모두의 삶의 질을 최상의 것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온전히 펴나간다.(10) 우리는 사람의 행위나 말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국가의 법과 이익에 반하는 것이 아닌 한, 모든 행위의 자유를 믿는다.우리는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이 주요 기본 사항들을 최선을 다하여 수행할 것을 엄숙하게 서약한다.

    282 한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실패

    작성처: 김서방올해 삼월 일일에 한국에서는 참으로 특별한 혁명의 불길이 당겨졌다. 일본 제국 통치하에 이에 대응하는 심한 재판 과정뿐만이 아니라, 혁명 그 자체의 성격과 수행 방법에 있어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일본 경찰의 광범위한 취조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이천 만 백성들은 며칠 안에 동시에 일어나 일본 관리들을 당황케 하였던 것이다.이들은 “독립 선언서”를 시위가 있는 날 같이 행동하기 위하여 가까운 지역에는 직접 배포하고, 먼 지역에는 일본 우편을 통하거나 손에 들고 전달하는 방식으로 배포하였던 것이다. 이의 배포 후 따르는 시위 방법은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점잖은 저항 수준이었다. 어떤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동서남북 전 국토를 통하여 이 백성들은 독립을 원하는 말을 나누고, 전 왕조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흔들며 또한 “만세”를 외쳐가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삼십삼인은 독립선언서에 그들의 서명을 한 뒤 서울에서 삼월 일일에 함께 모여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이 일을 만찬을 나누며 자축한 뒤에, 조용히 일본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신들을 체포하라고 전하였다. 경찰은 그 때서야 깜짝 놀라며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곧 그들은 각 도에서 전신을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는 전언을 통해서, 주요 중심 지역에서는 모두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비로소 그들 앞에 놓여진 무거운 짐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이들이 공식적으로 말하고 있는 시위의 목적은 일제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과 국제 사회에 한국에서 일고 있는 범 국가적인 정치적 독립에 대한 소망을 알리자는 것이었다. 일본 당국은 놀라움에 완전히 압도되어 군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진압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며칠 동안은 군대가 미친 듯이 날뛰어 살상과 파괴의 혼란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특별한 예외 상황에서 부드럽게 저항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미리 계획했던 대로 극기의 정신과 굴하지 않는 꿋꿋함으로써 인내하였던 것이다.총독은 그의 선언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완전히 합방하여 위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힘으로 우리는 국제 연맹에서 주요 핵심 국가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조화로운 연합과 협조를 위해 두 나라가 힘을 다합시다. 그리하여 세계를 지도하는 국가로서 인간애와 정의를 행하는 위대한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합시다.”그러나 한국인의 마음을 깊이 긁어 놓은 쓰라린 원한은 커서, 이와 같은 선언으로 가라앉을 것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여기 이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특별히 관심을 가져 볼만한 새로운 형태의 점잖은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현 시점에서 두 개의 앵글로색슨 계통의 민족이 자유와 국가주의의 원칙을 주장하며 양대 기둥으로서 함께 서 있는데, 그들은 조약 준수의 의무와 군사 통치로부터 스스로의 자유를 지키는 것, 그리고 작은 나라들의 권리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천 만 한국인들은 이 정신의 핵심에 공감하며 이들 두 강대국에게 이들의 순수한 청원을 전하였다. 이들은 조약에 의해 보호를 약속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나라의 생명을 십여 년 전에 일본에 의해 목이 졸려 잃었던 것이다.지난 십 년 동안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겼으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 염려했던 대로 밝은 태양 아래 그들의 영토를 다시 찾을 것이라는 희망까지도 군사 통치의 발굽 아래 다 잃었던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군사통치와 황국 교육 정책이 민족혼을 말살하는데 성공했다고 믿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장 자신있는 일본 관리들마저 그들이 주장한 “일본과 한국은 일의 대수로써 위대한 한 나라가 되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합방이란 ‘정신’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에서 이 정신의 유대감이 빠진 일본의 통치란 한국인들에게 오히려 잊을 수 없는 상처의 기억만 남긴 채 그들의 정신적 유대감만 멀리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한국은 자신의 역사를 알고 있다.이 나라는 사천 년 가까이 자치 국가였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이 나라가 중국에 오랫동안 예속되어 있었으며, 이 동양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그 문화를 받아 들여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 속에서도 이 나라는 자신의 자치권을 지켜 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 거대한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명장들에 대한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나라 안에 있었던 자기 문화를 이끄는 천재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그들 스스로가 창조하고 계승했던 예술과 과학의 발전을 잊지 않고 있다.중국의 것을 요소로 하여 만들어진 이 문물을 이 한국을 통해서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중국의 고전들을 일본에 최초로 가르친 사람은 한국인 학자였다. 한국인 승려가 국교였던 불교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 또한 일본 관리들의 전통 제복도 한국의 것을 본떠 만든 것이라 믿어진다. 그리고 일본 도공의 공예 기술도 옛 한국으로부터 직접 빌려 간 것이라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몇 세기 동안 한국은 인접한 두 거대한 나라들에 비해 걸음이 뒤쳐져 왔다. 나라의 관리들은 이기적인 탐관오리 군주(despots)가 되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관리들의 전재 통치와 강탈이나 다름없는 다스림은 백성들의 무지와 무능력 위에 군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젊은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또한 과거시대의 그들의 죄가 자신들의 멍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분노를 억누르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중국인들조차도 존경해 마지않던 사천 년간의 자치를, 자기 나라로부터 고대 문물을 전수해 받던 나라, 더구나 그들의 현대 문물이라야 불과 몇 십년 정도 앞선 것에 불과한 일본에게 그들의 자치권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이르면,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합병으로 이끈 과정우리나라가 합병으로 이끌려간 과정은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중일전쟁은 일본을 동양의 강자로 군립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자기 나라의 안전을 위하여 한국은 엄정 중립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에 대해 매년 바치는 조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그런데 다른 위험이 생겼다. 러시아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너무 남쪽으로 전진시키고 있다고 일본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러시아와 일본간에 한국을 독립을 유지시킨다는 것을 서로 약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일본이 한국의 대외 창구를 접수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한국의 보호국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대한 제국의 황제는 일본의 간섭에 반대하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1907년 헤이그 회담에 보내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권능만을 빼앗긴 채 한국은 더욱 일제의 사슬에 억매이게 되고 말았다. 한국인에 의하여 하얼빈에서 이토가 암살당하는 등, 한반도를 통하여 연속적으로 저항하는 일들이 터지자, 일본은 오히려 이를 구실로 1910년에 한국을 일본에 합병시켜 버렸다. 합병이 왜 필요한가라는 이유를 말하며 그것을 구실로 행한 것이다.그 이유란, 한국은 동양 분쟁의 핵심지역이기 때문에, 독립된 국가로서 한국이 스스로 자치능력이 없게 되면, 동양의 평화는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유럽의 힘을 이긴 승리의 여세를 몰아 동양에서 평화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다 할 것임을 주장하면서, 그 새로운 역할을 하는 새로운 시작을 한국을 합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십여 년 동안 이 일에 중재역할을 하면서 성공적으로 평화를 지켜왔다는 것은 마치 아낙네가 여름 과일을 잘 보호해 왔었다는 비유와 같은 것일 것이다. 일본은 그 과일을 나무에서 따내어, 단 설탕을 충분하게 친 뒤에, 일정한 기간 동안 외부로부터 영향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병마개를 단단히 했던 것이다. 이 과일을 가져 갈 것으로 예상되는 소비자에게는 보기에도 좋고 약속된 제품으로서 금상첨화인 셈이었다. 하지만 한 번 병마개가 열리면 발효가 시작되어 끓어오르는 것이다. 일본은 병조림하는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설탕을 절약하지도 않았다. 또한 거기에는 일본 말고는 다른 누군가가 최종 소비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병마개는 열리고 발효가 시작된 것이다.한국에서의 일본의 통치한국에서의 일본 통치는 일본 스스로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행하였다. 일본은 세계의 승인을 받기 위해 혈안이었고, 그 이유로 총독은 지난 아홉 해 동안 한국에서 일본이 행한 개혁과 발전상을 담은 연감을 영문으로 잘 만들어서 발행하였다. 해마다 새로운 출판을 위한 자료들을 수집하였다.일본은 성공적으로 발전을 위한 점진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도로와 철도, 항만시설, 그리고 통신시설 등의 수를 늘리고 성능을 향상시켰다. 그리하여 한국민에게는 감사함을 그리고 외부 세계로부터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기에 이르렀다. 지역 민원 관계와 세금 징수 그리고 법정에서의 잘못도 고쳐졌다. 농업과 무역 그리고 산업이 확충되었다. 병원의 수가 늘어났으며, 보건 행정이 강화되어 위생 상태가 향상되었다. 교육제도의 기한은 연장되고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재정은 보다 안정된 기초 위에 배정되고, 통화 가치는 안정되었다. 이와 같은 개혁은 한국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본에 빚을 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의 통치에는 또 다른 이면이 있었다. 그것은 애국적인 한국인들을 보다 크게 감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계속 한국인들을 먹이는 힘을 행사하는 가운데, 기회만 나면 터져 나올 수 있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고,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한국민의 민족혼과 같은 것을 잠재우려 시도하였던 것이다.군사적인 점령과 군부 행정, 그리고 일본과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 정착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한국인들을 이용하려는 분명한 속셈이 드러나 보이면서, 이러한 것들은 예민한 한국인의 마음을 곪아 아프게 하였고,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그들의 희망을 “민족혼이 궁극적으로 만족을 쟁취할 수 있는” 바로 “그 어느 날”에 두게 하였다.군부 통치는 한국인들의 자유의 흔적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은 경찰에 의해서 감시를 받아 오고 있었다. 모든 공적인 모임과 사회 조직들은 법에 의해 규제되었다. 세계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모임은 아예 불가능했다. 민주적인 발언은 의문의 여지도 없이 관리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언론의 자유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 년 전에 평양 연합 기독 학교 (Pyengyang Union Christian College) 의 세 학생들이 졸업식 고별사에서 자유 발언을 한 이유로 체포되었는데, 이후로 이 학교의 문예 활동은 금지 당하고 말았다. 학교에서의 출판이 금지되었다는 발표도 없이 내린 조치였다. 한국의 어떤 젊은이도 자신의 뜻을 표현할 도구를 가지지 못하였다.한국 젊은 지성의 대표 중의 한 사람인 최남선 (Choi Nasun)군은 다섯 종류가 넘는 잡지를 편집하고 있었는데, 하나씩 폐간 당하고 말았다. 그는 현재 독립 선언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수감 중이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잡지 중에, 한국 내에는 한 두 개밖에 되지 아니하고, 너 댓 종류가 일본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에 의해서 발간되고 있는 정도다. 한국내에 있는 모든 신문은 일본인에 의해서 편집되며, Christian Messenger 경우까지도, 한국인 편집자는 세계적인 관심사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하게 하고 있다.종교의 자유는 일본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으며 합방 조약에도 자유로운 종교 활동 보장이 명시되어 있다. 이 곳에서 이런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마 군부 통치의 본래 특성상 하위 조직의 잘못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간섭은 지방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당국은 국교로서 불교를 권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사건에 따라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반대를 외치는 것은 깊이 내재한 편견의 증상인 것이다. 현재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의심을 받고 있으며,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계의 가식적인 위선이 관리들의 미움을 사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에서의 일제 통치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교육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발견하게 된다.(1) 한국인은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2) 그들에게 기술 교육을 강조한다.(3) 한국인은 일반 고등 교육을 받게 하지 않는다.이 원칙 중 첫 번 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보통 학교의 교과 과정의 핵심은 일본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어를 가르치는 시간이 다른 과목에 비해서 거의 두 배를 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 시간만 빼고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것까지도 일본어로 가르치는 것이다. 한국어 시간은 격일로 두 시간이 넘지 않았다. 그래서 만약 한국 어린이가 한국어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학교 교육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도 무방하다.한국 역사 교육 시간은 없다. 한국 역사는 일본 역사를 배우는 가운데 여기 저기 조금씩 언급을 하며 삽입시키는 수준인데, 마치 영국 역사 시간에 그들의 식민지 역사를 언급하는 것과 유사하다. 일본의 애국적인 노래들은 국가의 혼을 불어넣는 내용으로 만들어졌다. 일본군의 용맹스러운 인상이 젊은이의 마음에 새겨지도록 일본 왕의 상징과 칼찬 일본인 선생에게까지 경의를 표하게 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두 번째 목표인 기술 교육은 그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한국인들도 노동의 신성함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교육적인 목표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분명히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한국인은 나무꾼이나 물긷는 사람이나 되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편견 없는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교육은 상위 수준의 일반 교육도 함께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여기 한국의 교육 제도의 현실을 보면, 이것은 분명히 한국인은 현대사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몰라도 된다는 정책을 추진하고, 또한 일본 당국은 고르게 교육받는 일반 교육을 시키는 것을 두려워 기피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일본 제국주의적인 본성에서 나온 발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법학(law), 의학(medicine) 그리고 공학(technical)을 담당하는 세 특수 대학을 제외하고는, 한국 내 그 어느 곳에도 나라에서 운영하는 일반 전문 학교(academy), 대학(college), 종합대학(university)은 없는 것이다. 합병 전에 있었던 전문 학교(academies)들은 폐쇄되고 말았고, 그 대신 수준이 한 단계 아래인 ‘고등 보통 학교’(Higher Common School)가 대신 들어서게 되었다.한국인들이 행정 당국을 비난하는 것은 교육 제도의 내용만이 아니라 인구 수준에 맞게 학교의 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해서 차별적으로 많은 학교를 세운 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 다음 표는 1916년에 발표한 총독의 연감 속에 나온 통계와 신교의 선교 학교(Mission School)가 준비한 비교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내 한국인과 일본인을 위한 학교의 비교 통계 (선교 학교의 자료 첨부)한국인 공립학교 일본인 공립학교 기독교학교학교종류 수 학생수 신청 종류 수 학생수 수 학생수보통학교 447 67,629 ---- 국민학교 324 34,100 601 22,542고등 “ 3 537 2,651 중학교 3 375 17 2,125고등“(여자) 2 164 187 여자고등 9 526 14 1,352대학 3 277 844 대학 2 91 4 250정부보조금 Y.602,888 Y.339,660 없음교육인구 1,750,000 300,000 300,000위의 표에서 보면, 한국인의 교육 인구 1,750,000 명을 위하여 정부는 447 개의 학교를 세워서 67,629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전체 인구 비례로 볼 때 300 분의 1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300,000 명의 일본인 학생을 위하여 324 개의 학교를 세워 34,100 명을 수용할 수가 있어, 비율은 한국 거주 일본인 전체의 9분의 1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그들의 자녀들의 교육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총독은 21,800 개가 넘는 옛날식 마을 학교(old type village school:서당)가 있다고 발표를 하였는데 이것은 500,000 명에 가까운 학생을 교육시킬 수 있는 수이다. 여기에 기독교 학교에 다니는 22,542 명의 어린이들을 더하여야 한다.그러나 한국인들이 비판하는 것은 고등 교육에 관한 것이다. 한국에 사는 일본인 소년 소녀들이 한국인들보다 더 높은 고등교육을 받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교육받는 학생의 수에 있어서도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세 개의 대학을 포함하여 보통학교 이상의 학교의 수는 여덟 개로서 978 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서 일본 어린이는 14 개의 학교에 992 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당국이 차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한국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아니한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여기에 다시 한번 한국인들이 고등교육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핑계를 댈 수 없는 자료가 있는데, 그것은 1916년에 978 명이 정원인 고등교육 기관에 3,682 명의 학생들이 응시를 하였다는 자료가 있는 것이다. 상당히 의심받고 나쁜 인식을 받고 있던 기독교에서 이 틈새를 매워, 31 개의 일반학교와 4개의 대학교에서 매년 거의 4,000명 가까운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만약에 일본이 당국은 한국 학생들을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고 주장한다면, 그 대답은 대부분의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유학 비용이 감당할 수 없게 제한적이라는 것을 무시한 것이라는 것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적용된 원칙은 일본인 정착민들의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부가 공공 기금에서 일본 정착민들에게 배정한 것처럼 한국인들에게도 공정하게 배정하기까지는 이 제국 내에서 ‘인종차별’을 행한다는 오명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인종차별’의 또 다른 예는 관리 임용 조직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군부의 정책 수행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런 식의 관리 임용은 교육제도상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대고 있다. 전 왕조의 관리들의 무지와 무능력 때문이라는 이유로 고급 관리직은 전부 일본인으로만 채웠던 일본이었다. 한국인들이 바람직하게 기대했던 것은, 시간이 가면서 그들 중에 보다 나은 사람들이 일본인으로부터 보다 많은 경험을 쌓고 교육을 받아 고급 관리직에 등용될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게도 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행하는 것이 일본의 정책이었다. 1910년에는 열 세 자리의 도지사 중에 여섯 자리에 한국인이 앉았었으나 지금은 단지 세 자리만 한국인이 앉아 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지방 면장직(district magistracy)은 한국인이 임용되었으나, 현재는 큰 지역의 경우 최소 칠분의 일 정도는 일본인 면장이 앉아 있고, 어느 곳에서는 마을의 자치권마저도 일본인 손에 넘어 갔다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배정된 재판관(judgeships)의 수는 매우 적고, 학교의 교장(principals)은 모두 일본인 일색이다. 이런 이야기는 공공 부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차별이 나타나는 곳은 관직 임용의 경우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예우와 봉급을 지급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같은 등급의 직종에서 일하는 경우 한국인 관리보다 일본인 관리가 40%만큼 봉급을 더 많이 받는다. 이것은 같은 학교를 졸업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일본인이 자기 자신을 우월한 민족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하고 탓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육을 받은 층이나 받지 않은 층이나 별 차이가 없다. 가장 높은 한국인 관리라 해도, 낯선 일본인을 만나게 되면, 한결같이 일본 사람들의 우월감을 거슬리지 않게 대하여야 한다. 같은 사무실에서도 한국인 조수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건방진 태도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봐도 역력하다.한국의 통치를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일본인들이 한국을 일본 공무원들에 대한 예비군으로 만들고 한국을 일본과 그 식민지의 이익을 위해 착취하고 있는 목적이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큰 항구에 가보면 선창에 가까운 땅은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인 구역 안에 건물을 지을 권리도 가지지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부는 여러 세대 동안 한국인 농부들에게 영구적으로 임차되던 국유지를, 거의 배타적으로 일본인 거류민들에게 팔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만주로의 이주자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한반도의 은행 체제는 엄청나게 확대되고 진보했으며 점차적으로 국민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한성은행을 제외한 모든 은행의 관리자 모두와 창구 직원 90%가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나타나기 시작한 불만은 이 같이 한국 청년들에게 대규모로 불이익을 주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이것이 “인종 차별 금지”라는 정책을 그렇게도 강하게 주장해 온 민족으로부터 나온 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일본인들의 진심에 대한 비난이 된다. 전체 제국의 정책이 스며들어 있는 차별은 개인 사업에도 적용되고 학교 체제에도 영존해 있다. 일본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은 분리되어 교육 받을 뿐만 아니라, 일본 아이들을 위한 교육의 질이 한국 아이들을 위한 것보다 더 높다. 현재 독립시위운동의 근원은 한국인들의 참고 견디는 정신, 굴욕에 대한 한국인들의 예민한 감정, 현재의 통치가 가지는 과오와 결함 등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다음에 지적할 것이지만, 결코 “잘못된 보고와 몇몇 소수 사람들에 의해 선동된 산발적인 애국심의 부활”은 아니다. 이 운동에는 원래 세 부류만이 참여했으나, 네 번재 부류가 자발적으로 그들을 따랐으며 결국 전국의 모든 한국인들이 이 운동에 휩쓸리게 되었다.(A) 일본측은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은 주로 천도교 때문이라 했다. 천도교의 교리는 두 줄로 된 간단한 것이지만 언뜻 보기와 같이 특색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울님을 모시는 자는 한울님의 힘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며결코 잊지 않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무엇을 잊는다는 것인가? 초심자에게는 이것이 종교적 의미 이상을 가진다. 그것은 제쳐 놓더라도, 이 종파가 천도교란 이름으로 합방 후에 생겼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교인은 백만명을 넘고 있다. 전국에서 모인 교인들은 3일 간 서울에서 대기도회를 가지기 위해, 예배를 보러 모인다고 하나, 실제로는 애국정신을 영속화시키고, ‘그날’이 올 때에 대비하여 결속을 공고히 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종파는 명백하게 정치적인 종교이며 최근 시위에서 이 종파의 사람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이 같은 이유라는 것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B) 한국인 기독교 교회는 이와 사정이 다르다. 여러 해 동안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에서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정치 문제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그들의 신앙에서 주로 신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었다. 일본인 자신들은 기독교 사회에서 말하는 ‘저 세상’에 대해 가혹하게 비판했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관심의 탈을 벗고, 이 나라의 정치문제에 일제히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관리들과 선교사들에게는 적지 않게 놀라운 일이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일본의 해석은 그것이 곧 관리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이들은 한국 민족이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그러한 운동을 계획했거나, 실천에 옮길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능력을 무시하고, 모든 항의를 분쇄해 버리는 것을 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 대해 함부로 굴었다. 기독교 신앙의 고백은 중죄이며, 외국인과 내통하여 일본에 반대하는 자라는 증거로 보았다. 그들은 한국 사람이 독자적으로 사고하여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이 운동에서 현저한 역할을 한 것은 교회가 그만큼 개화되고 민감하게 되었다는 증거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특히 완고한 자들이 아닌 바에야 기독교인으로부터도 정치적 지혜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겠는가?(C) 세 번째 부류는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이다.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에 있는 학생과 사업가들이 현재의 세계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평화회담의 문제는 곧 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들 대부분이 일본의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한국을 떠난 사람들로서, 국내 친지들과의 서신 왕래에서 독립의 ‘그날’을 안타깝게 한결 같이 고대하여 왔음은 불가피하다.(D) 교육받은 한국인들은 위의 부류 중 이 곳 저 곳과 불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번 봉기에서 불교 신자들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지도층 승려 두 사람이 독립선언문에 서명했으며 사찰 여러 곳에서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저항이 시작된 것은 교육받은 계층뿐 만은 아니었다. 일본의 언론 탄압으로 인해 여러 지역이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전역에서 국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봉기했다. 이와 같이 민족의식을 혼수상태로부터 일깨운 것은 풍문만으로도 충분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노인들과 무지한 농부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까마득한 옛적의 예언이 나타나 횡행하였다. “왜왕삼년 가정팔년”이라는 500년 된 오랜 예언은 이제 “일본 왕의 통치 3년”(1907-1910년의 보호정치를 말함)와 “가짜 정부에 의한 통치 8년”(합방 후 8년 간 일본 황제의 지배를 받아 왔음을 가리킴)을 의미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계시는 농민 계층이 주로 사용했으며, 마치 옛 선인들의 성경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은 길 흉조를 열심히 따졌다. 최근에 서울 주변의 산들이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 의한 만세 외침에 반응해 울렸다고 한다. 일본기와 오래된 태극기의 이상한 행동 역시 떠돌았는데 좋은 징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 미신이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나라에서 이러한 미약한 근거로도 혁명이 촉발될 수 있는 현실을 우리는 주목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기회 비슷한 것이 나타나기만 해도 억압적인 지배에서 구출되지나 않을까 하여 열심히 풀이해 보았다.이 봉기가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도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적용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었다. 한국인들은 결국은 세계가 정당한 민족 사상을 되살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느낀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이후 시대가 바뀐 것이다. 한국인들은 2천만 민중의 합당한 열망을 부숴버리는 정부에 의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더 이상 정당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현재의 움직임으로 세계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실상을 알게 될 것이며, 적어도 파리에 모여 있는 정치인들만이라도 이를 알게 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혁명은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들은 한국인들에게 세계 어디에 있건 단결하는 것과 그들의 목적 명시와 평화적 방법을 사용할 것을 촉구하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의 세 가지 핵심 조항은 다음과 같다.(1) 한민족으로서 우리는 정의, 인권, 공정한 생존기회 및 자유적 정신의 발휘를 요구한다.(2) 우리는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우리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세계에 밝힐 것을 다짐한다.(3)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타인을 괴롭히거나, 재산을 훼손하는 일 없이 공명정대하게 한다.이러한 정책을 따르면서 한국인들의 시위는 무저항 혁명이 되었다. 조그만 태극기를 든 손 이외에는 맨주먹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이 운동은 한국인들 편에서는 폭력을 전혀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인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고, 일본 군인들이 무력에 의지한다면 그 처분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놀라운 것은 한국인들이 끝까지 인내했으며 정권이 이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동원한 야만적인 방식에 대해 보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군인들은 여러 곳에 동원되어 가장 무고한 사람들 틈에서 쑥대밭을 만들었다. 교회들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사소한 구실만 있으면 감옥으로 서둘러 끌려갔다. 경찰서에서 심문할 때에도 일상적으로 잔인한 방식을 썼으므로 경찰서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너무 많이 얻어맞고 멍들어서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반란의 범위는 수도에서의 한 두 번 파업, 철시, 학교휴업, 빈번한 독립운동 행렬인데, 수천 명이 투옥되어 있고, 또 수천 명이 그들의 주동자들이 시작해 놓은 일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개혁 약속이 있을 때까지 이런 움직임을 포기할 기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불행히도 무력과 협박으로 이 봉기를 억압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어느 쪽이 이길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한국인들의 자치능력 여부의 문제는 계속 활발히 논의되어 왔다. 일본이 오늘이라도 당장 한국을 떠나버린다면 결과는 무정부상태나 과격주의(Bolshevism)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표해져 왔다. 도당(徒黨)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겠으나, 이 세계에서 당파가 없는 나라가 있을까? 그러나 한국 민족이 극단적으로 흐르리라는 우려는 그들의 평화애호적인 민족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마음속에 품지 않을 것이다. 전(前) 독재정권의 과오를 새로운 한국에 지우려 하는 것은 명백히 부당하다. 세월은 변해간다. 명망과 능력이 있는 한국인들은 일본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적인 이상을 받아들였다. 일본 체제는 큰 인물을 배출하지 않도록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나왔다. 교회의 관리(管理)는 한 나라의 정부와는 많이 다르지만 근본적인 기능은 같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회 지도부에서 보여주는 능력이 기준이 될 수 있다면 국가적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인들의 성공적인 통치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현재의 봉기에서 보여준, 바로 그 효율성과 용기는 그들의 능력을 입증한 훌륭한 증거이며, 전국에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위원회의 지도를 따르는 것 역시 조직의 주목할 만한 단결력과 주도자들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자발적 협조를 보여준다. 한국인들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갈라져 있다. 영국의 자치령 노선을 따라, 일본을 종주국(宗主國)으로 하여, 그 밑에서 자치 형태를 바라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한국과 일본은 상이한 민족정신을 가진 명백히 다른 민족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독립만이 국가 발전을 위한 필요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일본만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 수는 금년에 8백 명인데, 이들은 일본어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일본 학생들보다 더 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일본인들이 봉기 이전처럼 행동한다면 매사는 절대 잘 되어 갈 수가 없다. 결과가 어떻게 되건 간에, 한국인들은 자신들만의 민족노선에 따라 발전해나갈 수 있는 더 큰 기회가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모독하지 말아야 되며, 언어를 존중해야만 한다. 헌병 체제의 총독정치는 물러가야 하고 보편적인 인권이 확보 되어야만 한다. 교육 제도는 한국 젊은이가 출세할 수 있도록 최선의 기회가 부여되어야 하며, 높은 관직으로의 승진 기회가 자극제로 되어야 한다. 결국, 모든 관직은 한국 소년이 장차 큰 뜻을 품고,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것이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의미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일본이 현재와 같은 경우에, 시대의 정신을 따라, 한국인들의 합당하면서도 억제된 항의에 호응할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겠다. 일본은 자신의 울타리 속의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용기를 가다듬고 있다는 징조가 없지 않다. 세계와, 약소한 한국은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에서의 일본제국주의 무단통치가 비난을 받고 있으며, 두 나라가 완전히 결합되기는커녕, 오늘날 어느 때 보다도 사이가 더욱 더 멀어져 있음을 보고 만족해하고 있다.

    283 사무엘 A. 모페트(Samuel A. Moffett)가 작성한 문서

    미국 장로교 조선 선교부윌리엄 뉴튼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평양, 조선(한국)평양, 조선, 1919년 3월 5일3월 4일 나는 학교 감시관인 야마다씨와 함께 한 대학교 운동장에 운집해 있는 한국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가 시내로 통하는 길로 향했다. 길에는 수천 명의 한국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일본 군인들이 여기 저기에서 보였다. 이따금 한국 사람들은 손을 높이 들어 만세를 외치고 있었고, 군인들은 그들 속에 뛰어 들어 해산시키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는 세 명의 군인들이 두 명의 한국 사람들을 줄로 단단히 묶어 앞으로 밀어붙이며 몰아가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양쪽 눈가 바로 위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다른 곳에서는 군인들이 총검을 들고 사람들을 쫓고 있었다.우리가 돌아와 경찰서 근처로 갔을 때 군인들이 거리 한 가운데 있는 열 다섯 명이 좀 넘는 사람들에게 돌진하고 있었고 군인들 중 세 사람은 길가 가게 처마 아래 조용히 서 있던 대여섯 명의 사람들에게 달려가 총으로 그들을 구타했다. 아주 깨끗한 흰색 코트를 입고 있던 키 큰 젊은이는 장교가 검으로 뒤에서 그의 어깨 바로 아래를 찔렀을 때 5피트 상관으로 가게 아래에서 총을 막 피한 참이었다. 그 젊은이는 우리 앞에서 10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달려 나가 거리를 가로질러 부분적으로 문이 열려 있던 가게로 들어가 코트를 벗었다. 우리가 그의 옆으로 가서 보니 그의 속셔츠에는 구멍이 나 있었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 “병원으로 가게!!”하고 외쳤고 병원은 거리 바로 끝에 있었지만 그 젊은이는 달려가다가 비틀거렸다. 그는 몸을 추슬렀지만 다시 비틀거렸고 그러면서도 계속 걸어 나갔다. 나는 누가 옆에서 같이 가면서 그 젊은이를 부축해주라고 외쳤고 사람들 중 두 사람이 그 젊은이를 양쪽에서 붙잡고 함께 병원으로 갔다. 야마다 씨는 엄청나게 분개해서 말했다. “나는 쿠도 총독(Governor Kudo)에게 내가 지금 본 것을 그대로,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하겠네.”나는 야마다 씨에게 그 젊은이가 길가에 조용히 서 있었을 뿐이며 일어나고 있던 소동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것을 보았냐고 물었고 야마다 씨는 “그랬지”라고 대답했다. 그 직후에 우리는 36명의 어린 소녀들과 여자들이 여섯 명, 혹은 여덟 명의 군인 및 경찰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앞에 서 있는 소녀들은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을 넘지 않은 것 같았다. 서대문 바로 밖에서 나는 야마다 씨와 헤어져서 집으로 왔다. 우리 동네 근처에 닿자 한 떼의 군인들이 신학교 교수 사택동의 문으로 달려 들어가 한 남자를 끌어내 때리고 걷어차면서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 다른 군인들은 문 뒤에서 한 젊은이를 곤봉으로 때리기 시작하더니 그를 데려가면서 꽁꽁 묶고 다시 때리고 걷어찼다. 그리고 다시 세 사람이 더 보였다. 젊은이 둘과 남자 한 사람으로, 등 뒤로 손을 꽁꽁 묶인 채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사람들이 구타당하고 있던 문 근처 집에 사는 내 비서가 생각나서 나는 확인을 위해 교차로까지 달려 나갔다. 그렇지만 네 사람 중 누구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이 교차로에 도착하고 군인 몇 명이 내게서 10피트에서 18피트 정도 떨어져 있게 되었을 때 그 일행은 멈춰 서서 밧줄을 조였고, 묶여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네 사람을 장교 한 사람의 지휘를 받는 20명 이상의 군인들이 앞뒤에서 주먹으로 때리고 양쪽 따귀를 치고 머리와 얼굴을 나무판자로 때리고 다리와 등을 걷어찼다. 이 모든 행동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분노에 사로잡혀 있던 장교는 한 소년의 앞에 서서 양 손으로 칼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 소년과 나 모두가 그 장교가 그 소년을 둘로 갈라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소년이 지른 공포와 고통의 외침이 귀청을 찢는 것 같았다. 걷어차고 구타하면서 군인들은 그 남자들을 데리고 갔다.위 이야기는 모두 내 자신이 목격한 것이며 이 진술의 진실성을 맹세한다. 내가 요 닷새 동안 한국인들과 접촉해보고 도시 안팎에서 군중들을 관찰해 보았지만 한국인 쪽에서의 폭력은 전혀 목격하지 못했다. 서명 사무엘 A. 모페트한국 평양, 1919년 3월 5일3월 4일 한국 남부에서 온 다섯 명의 신학생이 신학교 기숙사에 도착해 들어왔다. 신학교는 그 다음 날 문을 열 예정이었다. 오후 늦게 사람들이 총을 들고 쫓아오며 걷어차고 때리는 군인들을 피해 도망가자 군인들은 신학교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쫓아왔다. 다섯 명의 신학생들은 자신들의 방에 앉아 있었고 군중들과 함께 밖에 있지도 않았으며 시위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군인들은 갑자기 문을 열어젖히고 신학생들을 끌어내 경찰서로 끌고 갔다. 신학생들이 혐의를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짧게 자백을 강요당한 후 커다란 나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양 팔과 다리를 결박당했다. 그리고 벗은 엉덩이를 회초리나 몽둥이 같은 걸로 모두 뼈가 부러지고 멍이 들 때까지 29대 씩을 맞았다. 그리고 나서야 그들은 풀려났다. 다음날 신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한 학생만 제외하고는 모두 기숙사에서 교실까지의 짧은 거리도 걸어갈 수가 없었다.이 문제와 모든 학생이 이유 없이 체포되고 구타당할 수 있다는 위험으로 인해 신학교 개학이 연기되었고 한국 전역에서 모여든 80명의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지난밤 소방대원들이 전문학교 학생들이 많이 살거나 하숙하고 있는 마을에 출동해 자정 가까운 시간에 각 주택에 침입해 젊은이들을 끌어내 구타했으며 보고에 의하면 모든 학생이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전문학교와 대학이 전 황제의 장례식 이후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전문학교에서는 단 두 명, 대학에서는 여덟 명만이 등교했었고 양 학교는 이달 말까지 문을 닫았다.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위 이야기는 모두 사실만을 진술한 것이다. 서명 사무엘 A. 모페트친애하는 블레어 사본을 위원회에 보내거나 그 외 당신이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건 사용하셔도 됩니다. 저는 이곳의 일본 관리들과 서울 S. A. M. 의 관리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친애하는 브라운(Brown) 박사님 위 내용은 모펫 박사로부터 받은 편지의 사본입니다. 진심을 담아 윌리엄 N. 블레어

    284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한국인 부상자들의 이야기

    작성일: 1919-03-29작성처: 베시(Vesey)목사가 접견(1) 이인옥(Ri In Ok): 학생. 19세. 안주 출신.왼쪽 다리에 총알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3월 2일 그는 약 4,000명 정도 되는 다른 많은 건장한 사람들과 함께 운동에 참여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헌병대로 접근해 오는 이들 군중에게 일본 헌병 장교 일곱 명이 나와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을 쏘아 대어 한국인들 중에 여덟 명이 죽고 스무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이 총질은 폭력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돌멩이나 다른 어떤 무기도 지니지 아니한 군중들에게 행해진 것이었다. 이 젊은이는 다리에 총을 맞은 후 가까운 한국인 병원에 갔으나 간단한 치료를 해 준 후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독교 병원으로 가서 총알을 찾아 제거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는 3월 5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곧 바로 입원을 허락받아 의사로부터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다. 믿는 종교는 전혀 없었다.(2) 노공윤(No Cong Yun): 61세. 농부. 안주 근교 거주.위의 학생과 함께 시위 대열에 있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접견을 하였으나 이 사람의 진술은 위의 학생의 것과 내용이 일치하였다. 이 사람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왜 평양에 있는 병원으로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거기에 있는 일본인이 자기를 혹시 다시 체포하여 고통을 줄까 염려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람도 어느 특정한 종교적 믿음은 없으며 국내외의 어느 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3월 5일에 병원에 들어 왔으며 곧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다.(3) 김남산(Kim Nam San): 27세. 파주(Paiju) 출신.그는 가까운 공웅(Kong Ung)장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나와 장터로 갔다. 거기에서 약 1,0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독립을 소리 높이 외치고 있었다. 곧 일본인과 한국인 헌병 병력 여섯 명이 함께 나타났다. 일본인 헌병들만이 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군중이 계속하여 소리 높이 외치자, 일본인은 총을 쏘기 시작했다. 네 사람이 죽고 세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그가 본 범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아 나는 도중에 그는 어깨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한국인들은 어떤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의 손에는 무기도 막대기도 돌멩이 하나도 들고 있지 않았다. 이 사람도 어떤 종교도 없으며 어느 교회나 조직에 속해 있지도 않았다. (4) 고면만(Ko Myen Man): 25세. 황해도 거주. 그는 3월 23일에 면소재지(Magistrates town)에 나가게 되어 수 백 명의 시위대를 만나 함께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헌병과 경찰은 곤봉과 칼 그리고 총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뛰어 들어 곤봉과 칼로 사람들을 치고 찌르며 총을 쏘아, 최소한 세 사람이 죽고 20여 명이 넘게 부상을 당하였다. 따라서 군중은 도망을 갔다. 이 사람은 일본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고 그 지역에 있는 한국인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의사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의사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그는 24일 병원으로 와 곧 바로 입원하게 되어 치료를 받고 회복 중이다. 그는 허벅지 위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어떤 종교적인 믿음도 없었고 다니는 교회도 없었다.(5) 이돌쇠(Ri Tol Sa): 23세. 그는 밤에 300명 내외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들은 헌병대로 진행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아니하고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소리를 높였다. 헌병대 장교들은 통역자를 시켜 물러가라고 요구하였다. 이 상황이 계속되자 서울로부터 (3-4마일 거리를 두고 있음) 헌병들을 실은 차가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15명의 헌병들이 내리면서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한, 한 사람이 죽고 열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본인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한국인 헌병들도 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도 총을 쏘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시위자 모두는 노동자 출신들이었다. 그는 병원으로 왔으며 다음 날 아침 곧 치료를 받게 되었다. (3월 28일) 이 사람도 어느 교회나 파에도 속하고 있지 아니하다.(6) 이개똥(Ri Kai Tong): 27세. 위의 사람과 같은 마을에 거주하며 증언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이 사람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7) 염독장(Yum Tok Chang): 35세.위의 사람과 같은 마을에 거주. 비슷한 증언. 이 자는 어깨와 옆구리에 총상을 입었다. 종교는 없다.(8) 송윤백(Song Yunk Pak): 21세.같은 마을. 위 입술에 총상을 입음. 위의 증언과 같음. 종교 없음.(9) 강용예(Kang Yong Ie): 36세.총으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다리가 으스러지다. 위와 비슷한 증언을 하다. 종교은 없음. 덕산(Duksan) 출신.(10) 이 사람은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어떤 증언도 할 수가 없다. 그는 반 혼수 상태로 누워 있다.(11) 차오균(Cha Oh Kyun): 36세. 고양(Ko Yang)출신. 서울에서 8-9마일 거리에서 살고 있다. 왼쪽 팔 아래에 부상을 입었다. 마을의 상점들이 모두 독립의 열망에 부응하여 문을 닫았다. 일본 헌병대는 다시 열도록 명령을 하였다. 그들은 상점을 여는 것을 거부하고, 다음 날 약 7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지역 헌병대가 와서 그들 중 일본인이 발포하였다. 이 사람은 총에 맞았고 다른 사람들은 달아났다. 한국인들은 어떤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돌멩이나 막대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오직 태극기를 하나 둘 손에 들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말하기를 이 지역 헌병들은 평소에 상당히 친절했다고 한다. 그는 한 때 천도교에 다닌 적이 있으나 지금까지 한 동안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아직 어느 교회나 교파에 속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3월 28일 병원에 와 즉시 치료에 들어갔다.(12) 안 동(An Tong): 54세. 고양군 출신.검집으로 팔을 맞고 쓰러져 있는 동안에 곤봉으로 다시 두들겨 맞았다. 500여 명의 사람들이 이웃에 함께 모여 행진하면서 헌병대 주위에서 독립을 외치고 있었다. 수명의 일본인 헌병들이 (그의 기억으로는) 민간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곧 이어 다섯 명의 말탄 경찰과 총을 가진 다섯 명의 헌병들 그리고 스무 명의 민간인(민간 복장을 한 경찰들)들이 군중들 속으로 뛰어 들었다. 헌병들이 총을 들이대며 위협을 하면서 돌아가라고 권했으나, 군중은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다고 말하자, 그들이 총격을 가했다. 한국인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막대기나 돌멩이를 던지지도 않았다. 그는 병원에 3월 28일에 들어 왔으므로 즉시 치료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는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13) 김광언(Kim Kwang Un): 72세. 안악(Anak) 출신.온창(On Chang)시장에 가서 500-600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21) 유 영근(yu Yung Kun): 42세.파주군(Paiju)에 있는 신산리(Sin San Lee)의 장로교회 지도자. 서울로부터 65리의 거리에 위치함. 약 1,000명 가량의 사람들이 맨손으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 달아나는 가운데 일본 헌병이 쏜 총에 맞았다. 세 사람이 죽고 세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람은 목 주위에 총상을 입었다.(22) 구 천면(Koo Chun Myun): 34세. 농부.광주읍에서 3월 27일 오후 1시경, 300-600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왔다. 헌병이 발포하여 턱을 관통하였다. 세 사람이 죽고 이 사람은 심각하게 부상을 입었다.다음 사람들은 베시(Vesey) 목사가 1919년 4월 1일부터 5일 까지 접견하다.(1) 송시웅(Song Si Ung): 47세. 포천(Po Chun)출신.앞의 사람과 비슷한 증언을 했다. (16번의 사람) 이 사람은 두개골 상부에 총상을 입었다. 루드로우 박사의 집도로 총알을 제거하였다. 종교는 없다.(2) 성명리(Syung Myeng Ni): 32세. 덕산(Duksan)출신.다리에 총상을 입고 루드로우 박사가 수술을 하였다. 이 사람은 정신이 비정상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접견을 하지 않았다. 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군중과 함께 소리치며 참여하였다. 종교는 없다.(3) 손선난(San Syen Nan): 27세. 포천 신탄리 출신.장날 설무(Solmoo) 장터에 가 200여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헌병들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장에 와서 그렇게 외치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계속 외치고 다녔다. 그들은 막대기나 돌멩이를 들지 않았으며, 그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헌병은 총을 발사하였다. 아홉 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람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는데, 몰래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도록 조치하였다. 종교는 없다.(4) 박연낙(Pak Yun Nak): 25세. 고양군 지도면 도당리 (Chi To Myen, Totangri)사면(Sa Myen) 교회의 회원. 그는 모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일부는 서울로부터 온 헌병들을 만났는데, 헌병이 그들에게 행진하며 외치는 것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그 날은 폭력이나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5일 후, 서울에서 온 헌병들이 마을 집들을 돌면서, 만세를 부르던 날 만세를 외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묻고 다녔다. 이 사람은 “예”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 사람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끌려 갔다. 총독부에서 (그는 감옥이 아니라 함) 그와 다른 사람들은 매질을 당하였다. 나는 그의 몸에 난 멍들을 보았다. 그는 12시에 30대의 태형을 받고 오후 2시에 또 30대를 합해서 모두 60대의 태형을 당했다. 많은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태형을 받았다. 그는 현재 병원에서 치료를 대기하고 있다. 다음의 젊은 사람들은 똑 같은 증언을 하였다.(5) 정흥봉(Chung Hung Pong): 16세.(6) 이천살(Ri Chun Sal): 31세.(7) 장외상(Chang Oe Sang): 24세.(8) 박차귀(Pak Cha Kwo): 41세.이천읍(E.Chun Ub) 읍내면 고리(Umnai Myan, Ko Ri)목에 심한 총상을 입고 4월 3일에 병원에 도착했다. 즉시 치료에 들어가 목숨을 건졌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장날에 만세를 외쳤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었지만 폭력은 행사되지 않았다. 밤에 일본 헌병에게 공격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목의 부상 상태가 나빠 말을 거의 할 수가 없어 많은 증언을 들을 수가 없었다.(9) 김근동(Kim Kung Tung): 15세 소년(서양식 나이는 13세). 충청도 출신.아버지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들어 왔다. 허벅지와 팔의 앞부분에 총상을 입었다.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었다: 작은 마을에서, 계획한대로 4월 1일 밤에 나와 만세를 불렀다. 한 밤중에 불을 밝히고 야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폭력은 어느 곳에서도 행사되지 않았다. 이에 여덟 명의 일본 헌병이 나타나 이 스무 명의 어른과 아이들에게 발포를 하였다. 이 결과로 한 사람이 숨지고 열 세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10) 방춘호(Pang Choon Ho): 25세. 위의 사람과 같은 마을 사람.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위와 비슷한 증언을 하였다. 그의 동생 방 설식(Pang Sul Sik)은 21살인데 다리와 팔에 많은 총상을 입었고, 그의 형은 죽었다고 하였다.(11) 박성근(Pak Syung Koon): 44세. 위의 사람과 같은 마을 사람.총을 쏘던 장면이 위의 증언과 같다. 이 사람은 BB총(공기총의 일종)에 맞았다. 여러 곳에 총상을 입었다.(12) 이복연(Ri Pok Yun): 26세. 수원.3월말에 이웃 300-350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들은 여러 마을을 거쳐서 면사무소(District Local Office)에 이르렀다. 거기서 면장도 시위자들과 함께 경찰서로 갔다. 책임자인 한국인 경찰이 나와서 말하기를, “저는 정부에서 주는 제복을 입고 녹을 먹는 공인이므로 몸은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는 없으나, 마음은 함께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만세’를 외치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기를 고대합니다.” 라고 격려했다. 조금 더 가니까, 세 사람의 일본 헌병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다른 시위자들은 도망을 가다가 두 사람의 동료가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것을 보자, 오십 명 중 사십 명이 돌아 왔다. 이들은 곧 모두 체포되었고, 위협 속에서 모두 묶이어 수원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이틀을 지내며 조사와 심문을 받으며 60에서 90대의 매를 맞았다. 그런 후에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두 부상자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가운데 일본인 의사는 부상자를 보며 총상을 입은 환자의 다리를 면으로 된 천으로 싸매 주었다. 그는 4월 4일 세브란스 병원에 후송되어 왔다. 그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이 폭력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만을 외쳤다고 주장했다.

    285 출한국인의 기독교인화

    발간일: NEW ERA MAGAZINE출한국인의 기독교인화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겪고 있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교 사업에 대한 열정은 결코 식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스스로 일본의 통치에 반대하는 혁명적인 운동을 펼쳐 가고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로 이주하고 있다.펜실베니아주 와이아루싱에서 온 쿠크 목사와 전에는 뉴저지 주 리버톤에 살다 쿠크 목사의 부인이 된 모드 쿠크 여사는, 장로교의 선교사로서 만주 목천(Moukden)에 있는 만주 기독교 대학에 머무르며, 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내었다. 곧, 한국으로부터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한국인의 만주로의 이주가 계속되고 있어, 이주해 오고 있는 이들 한국인들은 이미 대부분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도움을 일부 받으면서, 다른 지역과 함께 간도 지역 전체를 기독교인화 할 수 있는 커다란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간도는 한국의 거대한 북서 영토의 한 부분이다. 지도의 빗금친 부분은 거의 대부분 최근 10년 간 한국인들이 이주한 서부지역을 표시한다. Hinking과 Hsinpinpu는 미국의 장로교와 스코트랜드 장로교가 접하는 지역으로 전자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고 후자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포교하고 있다. 미국 장로교는 여기에 4,000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고, 40개의 자립한 교회가 분포하고 있다. Hinking은 우리 간도지역의 중심적인 전략 요충지로서, 영구적인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구역을 개발하기 위한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용정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를 중흥시키는 중심 구역이다. 여기는 42퍼센트의 인구가 한국인이며, 만주는 중국 땅이고, 모든 것은 중국의 책임하에 있으나, 만주의 철도 부설권만은 일본에 있다. 한국인은 이 땅이 옛 자기 조상들의 땅으로 언제인가 다시 돌려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있다. 장로교는 이 땅 전체가 그리스도의 땅으로 돌려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쿠크 박사는 일제의 통치를 피해 나온 한국인들이 낳은 영웅적인 희생을 내용으로 한 극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만주로 온 한국인 이주민들의 아직 알려지지 아니한 고난, 곧 이들이 겪어온 역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이에 필적할 만한 고난은 두 번 다시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하 사십도로 내려가 죽음의 겨울이나 마찬가지인 날씨에도, 흰옷을(white-clad) 입은 자들의 조용한 물결이 미끄러운 산의 눈길을 따라 열 명, 스무 명, 쉰 명씩 무리를 지어 생존을 위하여 새로운 세계를 찾아 기어가고 있었다. 나무와 돌로 덮인 산악지역인 만주의 거친 땅에서 맨손으로 스스로를 이기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아 갈 길을 기대하면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지치지 않는 노력으로 그들은 메마른 산악 지역을 밑둥치를 자르는 도끼와 곡괭이로 일구고, 손으로 심고 갈며, 삶을 영위하기에는 너무도 열악한 조건에서 삶을 추구해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불충분한 영양으로 죽어 갔다. 여자와 어린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조차도 얼어죽어 갔던 것이다. 질병도 또한 이런 조건에 내몰린 사람들 속에 기승을 부렸다. 한국인들은 강가 나루터에서 2피트 깊이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폭이 상당한 강을 건나가기 위해서 깨어진 얼음판 위에 맨발로 서서 바지통 자락을 말아 올렸고, 강을 건너면 맞은 편에서 서둘러 말아 올린 옷을 내리고 신발을 다시 신는 모습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옷을 충분히 입지 못한 여인들은, 몸의 일부분은 드러낸 채, 어린것들을 등에 들쳐업고서 적으나마 체온을 함께 나누며 걸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실상을 보면, 그 어린것은 싸맨 담요 밖으로 발이 삐져 나와 얼어버렸고, 나중에는 곪아터지면서 자그마한 발가락들은 서로 얼어 붙어버리고 만 것을 보고는 했다. 남녀 노인네들은 굽은 허리와 주름진 얼굴로 불평 없이 더 이상 늙은 사지가 말을 듣지 않게 될 때까지 수 마일을 걸어갔다.“늙은이와 젊은이, 약한 자와 강한 자, 또 크고 작은 사람들이 한 가족으로서 함께 하였으며, 한 두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 도중에 여인숙에서 아기들을 낳았으며, 잔혹하게 추운 세계 속으로 그들의 고난의 순례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었다.“이러한 길을 따라 작년 한 해 동안에 75,000명의 한국인들이 이 곳 만주의 서부와 북부 지방에 들어 와, 이제는 거의 총 오십 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쿠크 부인은 먼 만주 땅에서 장로교 새 시대 운동 본부, 해외 선교부에 다음과 같이 인사를 드린다: “우리가 매우 바람직한 결과에 접하게 되자, 우리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새 시대 운동에 긍정적인 호응을 보내주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교회가 여기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교회가 이제 막 끝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었더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하면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가을에 우리는 심한 독감이라는 재앙이 만연하여 우리의 사업이 심각한 정체 상태를 맞이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지난 5월 1일 이후로 우리는 또 다시 우리의 일하는 손들이 묶여버리고 말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정치적인 상황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생각컨대 여러분은 이 곳은 중국 땅이므로, 우리가 만주에서 새로이 시작한 이 일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체포의 열풍은 불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 시기는 우리가 품위와 인내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적은 분명히 괴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가장 큰 임무가 만주로 이주해 오는 한국인들 가운데서 일하면서 우리의 잘 준비된 계획을 수행하는 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86 모우리씨|| 항소심에서 이기다.

    발간일: Peking News대법원에서 사건을 기각, 재심을 위하여 반송하다.석방 판결 예상서울. 8월 18일: 모우리 목사는 대법원에 올린 그의 항소심 재판에서 오늘 승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판결은 모우리씨를 유죄로 인정한 원래 평결을 파기하고, 재심을 위하여 전 법원에 다시 반송되었다. 평양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모우리씨는, 한국에서 있었던 시위 초기에 시위 참여자로 여겨져 경찰에 의해서 수색 중이던 젊은 한국인 도피범들을 숨겨준 혐의로 구속되었었다. 이 소년들은 모우리씨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들 중 몇 사람은 이 봉기가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서 잠을 자오곤 했다고 한다.그는 평양 법정에서 십 개월 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었다. 서울에서의 항소심에서는 그의 유죄 평결은 재확인되었으나, 형량은 삼개월로 감형되었고 집행유예 기간도 3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모우리씨는 이에 결코 유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형량은 물론 집행유예까지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서, 법에 따라, 이 사건을 대법원에 항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거기서 그는 앞서 있었던 재판에서의 불법성을 주장했는데,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여기에서 과거 일반적인 여론은, 이 사건은 상소심에서 기각(dismiss)되거나, 무죄 평결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287 한국에서의 일본

    작성처: THE CHRISTIAN WORK최종적인 진실Y. M. C. A.에서 일하는 어떤 이는 젊은이들 사이에 두드러지게 실망의 감정이 퍼져 있다고 최근 말했다. “젊은이들은 최근 몇 년간의 모든 고생을 통해 새롭고 더 나은 세상이 올 수 있을지에 대해 분명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최근에 와 이전보다 훨씬 세상이 더 어렵고 실망스러워졌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입니다.”우리가 정신적인 이상을 세우려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대단히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계가 겪은 끔찍한 경험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닻을 잃은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믿음이 박살났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이들도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중이다. 평화 회담은 분명히 대단히 실망스럽다. 국제 연맹의 규약에는 희망적인 요소가 있지만 조약 자체는 그것만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결국 평화는 헛된 꿈이었습니다. 인간은 싸우는 동물입니다. 인간은 늘 싸워왔고 우리는 항상 전쟁에 시달릴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존재로 만들어 졌습니다. 자신의 길을 찾아가면서 인간은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만약 우리가 이런 우울한 전망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어디로 물러나야 할까? 물론 세계의 드러난 역사를 보면 우리가 물러날 수도 있다는 근거는 많이 있다. 전반적으로 우리는 역사가 더 높은 곳을 향한 우리의 신념을 고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신념 쪽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과 그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을 같이 정렬시켜본다면, 그리고 어느 한 쪽의 입장에서 균형을 잡아본다면 이는 다소 불확실한 문제가 된다. 우리의 경향이 어떤 사실 목록을 선택할지를 대부분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더 확실한 쪽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이들이다. 되돌아보면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지켰던, 영적 이상을 추구한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린도의 바울은 자신의 이상을 절망에 빠뜨리는 수많은 사실에 부딪혔으나 영혼의 선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가닿지 않는 이들, 즉 당대의 신에게 눈멀어 주 예수의 복음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의 매혹이 영원한 영광을 흐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혼은 감각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물질의 족쇄는 신념의 모험을 방해했다. 바깥 복도의 번잡함이 사람들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볼 수 있는 이들은 적었고 눈먼 이들은 많았다. 교회 안에도 실망스러운 일은 충분했다. 물론 반대 방향에 있는 일들도 있었고 바울은 여기에 대해 눈감지 않았다. 고린도에서 그는 이교도의 불순한 생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씻겨지고” “신성해지는” 것을 보았다. 변화시키는 힘이 생겨나고 작용한 일이 많았다. 항상 이런 종류의, 영적 일꾼들을 고무하는 사실이 있었으며 우리는 우리에게 반하는 사실이 우리의 편에 있는 사실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삶 속에 존재하심을 보여주셨다. 인류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비난도 옳은 것이 아니다. 성스러운 구제자는 많은 이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산다. 최악의 삶 속에서조차도 무엇인가 보여주는 것이 있다. 동시에, 세계의 무리한 사실들은 우리가 낙담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계속하기 위한 수단, 지속적인 노력을 유지하는 것은 그러한 사실로 인해 물러나지 않을 만큼 강한 지식과 인식으로부터 끌어내지는 것이다. 우리의 태도가 결과에 대한 의식적인 대차대조에 의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는 거의 모든 순간 이러한 대차대보표가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대의를 포기하라고 이야기했다. 세계가 너무나 희망 없이 그들을 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세계에서 약하고 멸시당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으나, 하나님을 통해서는 힘과 지혜가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그 뒤에 영원한 가치와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대담하게 무모하고 무한한 자기중심주의였다. 여기에서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는 그들이 자신들을 붙잡아 주는 가치의 감각을 수혜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의 영혼 속에 부정할 수 없는 이 가치를 소유하며 이것이 세계를 위해 자신들에게 맡겨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의 기독교적 신념은 그들이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들 뒤에 있는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는 그들 안에 있는 존재, 그리고 성령과의 위대한 통합에 뒤따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변화시키는 힘을 그들 자신이 직접 체험해본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다다르면 의심의 여지없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거대하고 보편적인 힘을 그들은 자각하게 된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며 세계가 그들을 몰아대어도 확실히 좌절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것이다. 이는 낙담을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근거하지는 않은 생각이나 느낌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는 방식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견딜 수 있고 모든 것에 희망을 걸 수 있다. 그 말씀은 항상 화해의 말씀이다. 그 비전이 그들이 죄를 범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그 죄를 최종적인 난점으로 치부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세계를 스스로에게 융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과 융화되는 것,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우리 형제들과 융화되는 것,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적의를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세계의 현재 상황이 어떠하던 간에 이러한 이상을 전파할 성직을 그대들이 부여받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적 지식의 힘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현실이 우리를 낙담시킬수록 쇠하지 않는 열정으로 우리의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더욱 더 필요해진다. T. R. W.더 옵저버(The Observer)주간 편지(이 면은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본 그 날의 중요한 사건 및 움직임을 기록하는 주간 편지이다.)한국에서의 일본지난 달 초, 여러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들의 중국 주재 대표부로부터 불안한 내용의 편지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진압하기 위하여 일본은 잔인한 수단들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월에는 한국에서 봉사하고 있는 선교사들로부터 편지가 도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전문들이 사실임을 확인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대단히 무섭고 야만적인 사건과 관계있는 내용과 고문을 행한 이야기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엾은 한국인들에게 가한 이 잔인한 진압 방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캐나다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사무관인 암스트롱 목사가 사월 중순에 미국에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극동 지역에서 십 개월 동안 봉사를 하고나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바로 온 것이다. 그가 도착한 직후 암스트롱 씨의 증언을 듣기 위하여 교회 연합 평의회 동양 담당 위원회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 모임을 소집하였다.암스트롱 씨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혁명은 역사상 비슷한 유례가 없는 방식이었다고 전했다. 온 나라가 일본을 반대하는 대열에 서 있었음에도 어떤 종류의 무기나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의 젊잖은 혁명이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일본인 학교에 등교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모든 일본 기관들을 보이콧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것 외에는 별다른 혁명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일본군과 헌병대측은 무력으로 바로 맞설 수 있는 실제적인 봉기보다 이와 같은 방식에 오히려 더 화가 난 듯 듯하였다. 암스트롱 씨는 많은 선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에게서 듣기를, 선교사들은 혁명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지 않았으며, 한국이나 일본 어느 쪽에 조금이라도 연관된 일에는 연루되지도 않았다고 전하였다. 그러나 물론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회원이거나 선교사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하였다. 한동안 일본은 선교사들이 혁명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취소하고 선교사들의 무고함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혁명의 젊은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모우리 씨라는 이름의 선교사 집으로 피신해 왔던 것이다. 이 젊은이는 이 곳 모우리 선교사의 집에서 잡히게 되었고, 사월 사일 모우리 씨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십구 일까지 지내게 되었다. 그 사이에 모우리 씨는 육개월 간의 중노동 형을 받고 사안이 계류중에 있을 때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게 되었다. 모우리 씨의 혐의는 한국인 범죄자를 숨겨 주었으며 그의 집 안에서 범죄자들이 혁명을 선동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한국인들 중 한 사람은 혁명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한때 모우리 씨의 비서로 일을 했던 적이 있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재판에서 모우리 씨는 다섯 사람들이 각각 서로 다른 날에 그의 집에서 잠을 잔 것은 시인하였으나, 경찰이 그들을 뒤쫓고 있었거나 그들이 경찰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부정했다.암스트롱 씨는 모우리 씨가 재판받고 형을 선고받은 고압적인 방식에 대해 한국 내에서도 선교사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비판이 컸다고 말했다. 사실 이는 거의 재판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재판은 고지도 되지 않고 시작되었고 그래서 모우리 씨가 변호사를 확보하거나 재판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급했던 것이다. 암스트롱 씨는 위원회에 진술하기를 자신이 많은 선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증언이 일치할 뿐 아니라 의심을 하기에는 너무 사실이 잘 뒷받침되어 일본인들은 독일인들이 벨기에에서 채택한 방식에 쉽게 비겨지는 방식을 동원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선교사들 사이에서 일본인들의 한국에서의 방식을 훈족의 방식에 비기는 습관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한국은 종종 제 2의 벨기에라고 일컬어진다. 암스트롱 씨는 자신은 남녀 모두 구타당하고, 여자들은 수치스러운 폭행을 당하고, 누가 혁명의 주모자인지에 대해 자백이나 증언을 얻어내기 위해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논란의 여지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암스트롱 씨의 이야기가 한국에서 만연한 야만적인 방식에 대한 유일한 증거였다면 위원회는 즉각적인 조처를 취하는 쪽으로 그렇게까지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 본인, 특히 장로교 및 감리교와 관계된 쪽으로부터 온 편지에서 추가 증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암스트롱 씨의 이야기에 더해 이 편지들에 대해 듣게 되자 이 문제가 아무 조처 없이 지나가기에는 너무 심각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위원회는 뉴욕 시의 가장 저명한 일본인들 몇몇과 약속을 정했고 파리로 가는 길에 미국에 들렀던 일본의 저명 정치인 몇 사람도 이에 더해 위원회와의 오찬에 초대했다. 위원회는 일본인 손님들에게 입수한 증거를 제시했고 대부분이 일본의 자유당(위원회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의 군국 정당의 방식에 반대하는) 소속인 이 일본인들은 이 증거에 완전히 당황한 것 같았고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들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이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동원하겠다고 즉각 말했다. 그중 몇몇 사람은 일본 정부에 당장 전보를 보냈으며 그러한 일들이 사실이라면 정부는 당장 이를 멈추게 하기 위해 조처를 취하겠다는 보장을 받아 냈다. 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스스로 모든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식이 한국에서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하는데 즉시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고 거기에 만족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한국으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편지가 더 쏟아져 들어오고 중국으로부터도, 그리고 일본에서조차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있는 이들로부터 전갈이 오기 시작했다. 그 소식들에는 야만성과 잔인성이라는 면에서 이전 위원회에 제시되었던 내용을 훨씬 더 능가하는 증언이 담겨 있었다. 노인들이 총을 맞아 죽었다. 즉, 노인 한 사람이 총을 맞아 죽자 그의 아내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기 시작했는데, 그 아내조차도 죽임을 당했다. 그 부부의 딸은 다음날 헌병 한 사람에게 검으로 난자당했다. 3월 상반기, 마웅산(Maungsan)의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외친 다음에 56명의 사람들이 헌병대로 끌려갔다. 그들이 모두 헌병대 안에 있는 동안 헌병들은 벽을 타고 올라가 위로부터 그 사람들 모두에게 총을 쏘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총검으로 찔렀다.그 편지들에는 고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침 열 시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다음 혁명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을 당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그는 심하게 구타당한 후 독방에 갇혔다. 그리고 도구들이 들어와 그는 똑바로 묶여 있게 만드는 기구에 묶였는데, 이 기구의 측면에는 등을 내리누르는 바퀴가 달려있었다. 그는 다시 사실을 이야기하라는 강요를 들었다. 그가 계속 무고함을 주장하자 그는 다시 고문 기계에 묶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오른손 중지를 튼튼한 끈으로 묶고 그 끈의 다른 한 쪽 끝을 천장에 가깝게 달려있는 판자에 묶었다. 끈을 잡아당기자 그의 몸 전체는 발끝이 마루에 겨우 닿은 채 손가락 하나로 지탱되게 되었다. 그러면 그는 의식을 잃었고 그가 의식을 잃은 동안 끈이 풀리곤 했다.온갖 폭행의 대상이 되었던 소녀들의 이야기는 활자화할 수도 없다. 어느 소녀는 얼굴을 걷어차이고 칼로 얻어맞아서 거의 의식이 없어졌다. 그녀는 얻어맞아서 시퍼렇게 멍들었고 의식을 찾았을 때는 아주 많은 숫자의 젊은 남녀로 가득 차 있는 방이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그들 중 몇몇이 대단히 야만적인 취급을 받았고 그녀 자신이 그렇게 구타당했다면 더 고생했을 거라고 알아차렸다. 그녀는 무릎꿇림을 당하고 질문과 대답마다 번갈아 얼굴을 얻어맞았다. 일본인들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고, 온갖 모욕적인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들은 그녀의 손가락을 묶고 무자비하게 잡아당겼다. 나머지 이야기는 굳이 다 하지 않겠다. 선교사들로부터 온 편지들 중에서 수십 통 이상이 이러한 종류의 사건 이야기로 가득하다. 증언은 명망 있는 이들로부터 나왔고 완벽하게 서로 일치해서 그 출처가 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중 많은 편지가 개인에 대한 야만적인 처우 외에도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단체로 학살당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암스트롱 씨의 증언에 이어 이러한 편지가 도착한 후 위원회는 더 이상은 침묵할 수 없다고 느꼈고 일본 정부가 처음 전문에 대한 반응으로 약속했던 개혁을 완수할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일본인들과 여러 차례의 회합이 더 있었고, 여기에서 일본인들은 자신들도 위원회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그런 종류의 일들이 모두 중단되고 일본 정부의 좋은 평판이 유지되기를 소원한다고 말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일본에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정당이 있고 그 중 군국주의적 정당은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식민 정부의 방식을 신봉하고 있으며 다른 자유 정당은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뉴욕을 지나가면서 위원회와의 회합에 참가했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자유당 출신이었다. 일본인들은 거듭 거창하게 정부와의 소통을 시도했고 연합 국가의 승인에 부합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인을 받았다. 최종적으로 6월에는 위원회가 직접 일본 수상 T. 하라(Hara) 경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조선에서의 악습과 관련된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니 후의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상황은 더 이상 보류할 수 없습니다. 수상께서 악습을 중단하고 적절한 행정 개혁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공식 발표를 하시는 것이 시급합니다. 이런 전문을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양 …(원문판독불가)… 연합 위원회, 연합 교회 평의회 보냄”7월 10일 수상으로부터 이 전문에 대한 답이 도착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일본 정부의 대리인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악습 보고에 대단히 심각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조사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고 개혁이 즉시 시작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수상은 자신과 동료들이 한국 동포들의 복지를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모든 악습을 교정하기 위해 권한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의 외무부장관으로부터 또 다른 전문이 도착했는데, 하라 수상이 조선의 행정부 개혁을 도입하는 것을 종종 대단히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애용이었다. 그들은 연합 평의회가 이 문제에 접근한 우호적인 방식에, 그리고 한국에서의 악습을 중단시킬 뿐 아니라 일본 정부의 좋은 평판도 유지해주려 한 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진심이라는 것에 감사해했다. 그리고 위원회는 이제 7월 16일에 언론에 한국으로부터의 증언을 여러 페이지 분량으로 공개했고 이제 모든 사실이 사람들 앞에 잘 드러나게 되었다. 전체적인 문제는 이제 두 가지 점에서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 첫 번째는 다음과 같다. 군사 정부는 한국에서 고압적인 방식을 추구하고 있고, 이는 군국주의 정당이 거의 모든 식민주의 종속국에서 익숙하게 시행하고 있는 방식이다. 군국주의는 그 핵심에 잔인성과 야만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잔학한 행위에 대해 일본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 자신이 우리가 여기 미국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어떤 일이 전개되고 있는지를 더 자세히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사실 그 소식은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일본인들에게는 미국인들에게 이상으로 놀라운 일일 것이며 그 잔인성으로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 정부가 이 모든 일을 당장 그만두는 일이다. 일본은 지금 이 시점에 자신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의심을 감당할 수 없다. 세계는 전체적으로 산동 문제에 대해 씁쓸해 하고 있으며 일본이 국제연맹의 연합국들에게 협조에 대한 가격을 제시함으로써 평화 회의에서 용납되지 않는 이익을 취했다고 느끼고 있다. 그 가격이 산동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어디에서도, 그리고 유럽의 자유당들 사이에서도 이 조처에 대해 비난 외의 다른 것을 찾기 힘들다. 일본은 바로 이 시점에 자국에 대한 다른 비난을 감당할 수 없다. 일본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는 한국에서의 잔인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되기를 희망한다. 두 번째는 이러하다. 한국은 지금 어느 국가건 식민지 사업에 들어가면서 생겨나는 문제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한 나라가 식민지가 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각 나라들은 식민지를 동경하고, 식민지를 가지기 위해 전쟁을 하고,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온갖 잔인한 행동을 자행한다. 일단 식민지를 확보하고 난 나라는 그 식민지에 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큰 근원이 된다. 어느 나라건 상식을 갖추고 있다면 식민지를 포기하고 식민지에 즉각적인 독립을 허용할 것이다. 일본은 세계의 눈에 지난 한 해 동안 일본이 잃은 것으로 보이는 것과 비등한 것을 한국에서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독립을 허용한다면(우리가 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본이 산동 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고 자국 내에 머무르면서 공업과 상업을 발달시키고 세계의 모든 다른 민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면, 일본은 즉시 훨씬 나은 상황이 될 것이다. 미국은 이를 알았고 필리핀에서 그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자양분을 주고 자기 방어를 가르치려 시도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 가능한 한 신속하게 필리핀에 완전한 독립을 주는 것이 미국의 소망이었다. 이 점에서 미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현명했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지는 본국을 부유하게 만들고 종속적인 정부는 필요한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일본은 한국을 미국이 필리핀에서 시행했던 것과 같은 정신, 같은 방식으로 다스리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필리핀인들이, 그 일부가 독립을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전 영국 식민지들이 대영제국에 대해 가졌던 것과 비슷하게 미국에 대해서 가장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다른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종속국을 다스리는 방식은 다양한 것이다. 주간 설교마음을 드높이 주를 향하여(Sursum Corda) 존 A. 허튼 (John A. Hutton). D. D항상 우리를 도와주는 이런 속담이 있다. “소가 없으면 구유가 깨끗하다.” 여기서 우리는 소요와 혼란을 이해하려는 견해를 가지고 소요와 혼란이 너무 많이 진전되어서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 동안에도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를 가지도록 우리들 스스로에게 권한다. 세계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요, 갈등, 동요는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징후는 아닌 것이다. 인류가 그 에너지를 모두 잃고 가축과 같은 향상심 없는 삶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 지독한 둔감함과 어리석음, 만족이 더 나쁜 것이다. 사람에게 나타나건 나라에 나타나건 조용함과 길들여짐, 변하지 않음은 그렇게 좋은 징후가 아니다. 이는 죽음의 징후일 수도 있다. 사람은 항상 그가 붙잡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있는 것에 손을 뻗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이는 그 사람 안에 불멸의 표식이 전혀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이야기하듯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변화함으로써만이 이는 똑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는 우리에게 울타리가 잘 쳐진 목장과 같은 삶만을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영웅심을 요구하고 심지어 비극을 위한 재료와 기회도 제공하는 삶도 준비시킨다.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더 나은 것을 꿈꾼다는 점이 바로 인간의 차이점이다. 이 모두는 그 별스러운 성서에서도 나오는 얘기다.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깨끗한 구유 혹은 마구간을 가지는 방법이 하나 있다고 명랑하게 이야기된다. 즉, 소를 키우는 것을 그만두면 된다는 것이다. “소가 없으면 구유가 깨끗하다” 이는 확실하다. 하지만 소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 구유는 왜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에게 삶의 질서정연한 증후를 두려워하는 것을 허용하는 데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시기에 있어서 삶의, 그리고 새로운 삶의 가장 진실한 표식은 자연스럽게 젊은이들, 우리가 “성장하는 세대”라 부르는 이들로부터 나오므로, 우리는 젊은이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더 이야기하자면, 우리 입장에서의 젊은이들에 대한 공포나 의심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 자신도 한때 젊었으며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도 무엇인가를 바꾸고 무엇인가를 없애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자리를 만들려는 정열을 느낀 적이 없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젊은이들의 어깨 위의 오래된 부스러기는 슬픈 광경인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새롭고 열성적인 무엇인가에 대해 호의적으로 보는 방식을 키워나가야만 한다. 어느 시인이 얘기했던 것처럼 “환호하며 보지 못했던 것을 맞아야” 한다. 무덤 아래 있어서 못 보았던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물려져 내려오고 우리 바로 앞에서 자라난 보지 못했던 것, 즉 새가 울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새로운 자연의 세계처럼 피할 수 없이 와야만 하는 새로운 도덕적, 지적, 사회적 세계를 말이다. 우리는 모든 길을 갈 수 없으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위대한 이상은 커다란 위험을 내포한다. 자유는 거대한 위험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의 목적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그래야만 한다. 어려움은 적어도 우리가 이미 시작했고 그 길을 많이 왔다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앞으로 닥쳐올 일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 공포가 습관이자 강박이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포에 저항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이 나이들어 간다는 다른 표식에 저항하고, 또 저항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또한 신실한 종교인인 우리들에게 있어 이러한 공포가 우리의 믿음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망치거나 깎아먹지 못하도록 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신뢰를 제외한다면 무엇이 믿음이며 하나님 아래 있는 우리가 …(원문판독불가)… 한 이들을 제외한다면 세계의 행동에 대해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나이들어 간다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우리가 성장하는 세대의 충동의 …(원문판독불가)… 를 방해하는 것과 지금 젊은 사람들의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을 …(원문판독불가)… 어둠 속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것을 결합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다 해도 이러한 성공은 …(원문판독불가)…한 패배보다 아마 더 대가가 클 것이다. 우리는 깨끗한 구유를 가질 수 있지만 소는 없는 것이다. …(원문판독불가)…한 것은 우리의 날들을 섬기고 우리의 사회생활에 우리가 죽은 …(원문판독불가)… 침묵과 유사한 것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죽으면 …(원문판독불가)… 우리는 지금 신선하게 부단히 활동하는 세대를 향유하고 초대하고 존중하고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가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평화이지만, 침묵의 광야만이 남았다. 타키투스(Tacitus)가 말하기를, “행복은 연대기가 없는 국가다”라고 했다. 이러한 경구의 의미가 아주 명료하던 시기가 있었다. 타키투스의 시기가 그런 시기였다. 인간에게 훌륭한 점은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분위기 전체가 …(원문판독불가)… 로 가득하던 타키투스의 시대에는 누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매일매일 기록할 것이 없는 국가를 타키투스가 부러워하는 것에 대해 이상해하지 않았다. 성서로 돌아가면, 이 …(원문판독불가)… 점에서 삶이, 최고의 삶이 생각된다. 성서에서 혼란스러운 존재보다 우월한 인간을 …(원문판독불가)… 하려 시도하는 이러한 이상에 대한 방어가 …(원문판독불가)… 한다. 성서에서는 모든 일을 ****하도록 하고 광야로 물러나는 것을 크게 고무 …(원문판독불가)… 한다. 엘리야(Elijah)는 힘든 시간을 보낸 후 …(원문판독불가)… 로부터 물러나 그가 …(원문판독불가)… 한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그곳에 있지 못하겠다고 생각될 때까지 그를 지치고 소모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일로 돌아가게 …(원문판독불가)….주 예수의 시절에 에세네(Essene)파 신도들의 종교 공동체가 있었는데, 세상에서 떨어져 사는 은자들의 공동체로 흰 린넨 로브를 입고 자신들의 영혼의 까다로움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의 삶에서의 충돌과 …(원문판독불가)… 를 피해 살았다. 그들의 공동체는 예수님이 노동하시고 고생하시고 스러지신 곳에서 겨우 몇 마일-대략 이야기하자면- 떨어져 있었을 뿐이지만 우리 주님은 그들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신 적이 없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주님이 건설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소용이 되는 이들에 포함시키지 않으셨다.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에는 너무 섬세하고 까다롭고 소심했던 것이다.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모든 시대에 걸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처음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계승되고 …(원문판독불가)… 하면서 너무 넘쳐서 그들이 무엇인가를 하던지 혹은 죽던지 …(원문판독불가)… 하는 오순절의 힘이 …(원문판독불가)… 그들은 …(원문판독불가)…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황야에서 집을 구하지 않았다. 그곳에서라면 그들은 발코니에 나와 앉아서 지나가는 대상 행렬을 보고 그들 자신의 꿈을 즐기고 풍자시로 서로를 즐겁게 해 주었을 것이다. …(원문판독불가)… 그들은 세계의 도시로 갔다. 글래스고가 나쁘고 런던이 나쁘고 …(원문판독불가)…, 그 나머지도 …(원문판독불가)… 하지만 성 바울 시절의 고린도, 성 **의 시절의 에페수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와 비교하면 이는 성자들의 비밀 집회였다. 이러한 곳에서 순수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원문판독불가)…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의 …(원문판독불가)… 습관에 도전하고 사회의 모든 관습과 …(원문판독불가)… 에 도전했다.(101, 102페이지 결락)........“목사님, 멋진 예배였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에 예쁜 꽃들, 영감을 주는 설교...목사님의 기도는 저를 천국의 문 앞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내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건강하시구요.” 이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교회 밖의 교회!” 모든 성직자들에게 얼마나 기운 나는 문구인가. 우리는 거의 천년왕국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매 일요일 아침마다 나는 해변을 참배하러 가는 우리 회중들을 태운 자동차로 길이 붐비는 것을 본다. 내가 신약성서의 교회를 계속 믿고 있는 몇몇 뒤떨어지고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내 구식의 목소리를 드높힐 때 나는 교회 밖의 교회의 떠들썩한 소리를 듣게 되어 기쁘다. 그 구성원들이 나보다 훨씬 빠르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빛나는 낙관주의의 순간에는 나는 새로운 교회가 세계에 하느님의 왕국을 수백 수천년 앞당길 것이라는 것을 거의 믿게 된다. “교회 밖의 교회!” 우리는 백년 동안이나 뉴 잉글랜드를 재앙 속으로 몰아넣었던 유해한 반쪽짜리 서약을 반복해야 하는가? 악화는 양화의 입지마저 흔들리게 만든다. 교회의 전사들은 예수 이후로 스스로를 포기하는 십자가를 듣지 않고는 앞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 역사가 그 자체로 어떻게 반복되는지!!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건의 필요성에 가장 잘 부합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이들이 있었다. 토론 와중에 시오도어 울시(Theodore Woolsey) 대통령은 “미래의 종교”에 대해 설교하면서 이는 죄의 사실에 직면하고 용서와 영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신에 대한 사랑이 성격의 중심이고, 삶 속에서 그런 감정이 힘의 커다란 원천 중 하나가 되도록 촉구된다면 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고 용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종교가 아름다운 삶을 구축할 능력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이 그 취약함 자체로 인해 망가지거나 경멸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신은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없는 문명은 끔찍한 딜레마에 처하게 될 것이다....미래의 세계는 나쁜 운명을 맞을 것이며 미래의 종교는 인간성이 붕괴된 이후에는 비극적, 고정되지 않은 부표가 되어 인류의 희망과 행복을 세대에 따라 끌어내리게 될 것이다."재건된 기독교! 우리가 시야를 너무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에만 좁게 한정시켰을 수도 있지만, 성스러운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위대한 교사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과거와의 단절은 주된 재보인 신약성서를 공허하게 만들고 우리에게서 구세주를 앗아갈 것이다. 고대 교회의 한 교부는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으니,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라 말했다.그리스도는 불확실한 옥좌에 앉지 않으시며놓아둔 그대로 빌리지도 않으신다그리스도 없이는 세계를 정의와 형제애로 나가게 만들려는 꿈은 개선 행진을 위한 적막한 저습지, 옹색한 노반으로 끌려갈 것이다. 백일몽의 무봉은 철로를 고정시킬 수 있는 그 무엇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우리 앞에는 혹독한 사명이 남아 있으며, 희석된 복음으로는 철을 피에 담그지 못한다. E. R. 실(Sill)은 믿음을 잃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광휘를 잡는 것은 얼마나 확실한 결론이었는가!” 하버드의 팔머(Palmer) 교수는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에게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 간 적이 있었다. 브룩스와 한 시간 정도 이야기 한 후 그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마음이 강해져서 걸어 나갔다. 집으로 반 정도 간 다음에 그는 멈춰서서 외쳤다, “말하건데, 애초의 질문을 하는 것을 잊었다!” 이는 이미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이신 주님E. 허먼(Herman)사람의 마음속에는 뿌리 깊은 두 가지 감각이 있다. 자신이 보는 모든 것의 기원을 찾으려는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과 신선하고 새롭고 더럽혀지지 않은 것에 대한 필생의 사랑이다. 우리는 모든 것의 기원이 무엇인지 찾아내야만 할 정도로 열망을 키우지는 않는다. 종교적인 영혼에게는 존재의 세계가 그 창조자의 눈에 처음으로 비치는 순간, 즉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것을 보시고 그것이 좋았더라, 고 하시는 순간에 독특한 전율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빛의 광휘가 온다. 이는 순수한 기쁨이 폭발해 놀라게 되는 순간이며 아침별이 함께 노래하고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이 즐거움으로 외치는 순간이다. 신선한 것, 원래의 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 역시 그 열렬함을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 우리 생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어린 아이였을 때 첫눈을 보았을 때, 혹은 풀 사이에서 제비꽃을 발견했을 때, 조폐국에서 막 나온 반짝이는 동전을 손에 꼭 쥐었을 때, 오래된 옷이 새 옷으로 바뀌었을 때 우리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던, 너무 강해서 오히려 고통스러울 정도였던 그 기쁨의 놀라운 생생함을 회상할 것이다. 처음 취하게 만들 정도이던 기쁨의 예리함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젊은이들, 즉 그 이슬 맺힌 꽃봉오리가 서서히 덮쳐오는 세상의 더러움으로 아직 오염되지 않은 부드러운 존재들을 보면서 바로 감동을 느낀다.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믿음이 깨진 이에게도 초원의 봄꽃, 혹은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믿음 깊은 얼굴은 바로 창조주의 손길을 끌어낸다. 그들의 때묻지 않았음이 눈물샘을 터뜨리고 반쯤은 잊었던 갈망을 자극한다. 그들의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심지어 가치 없다는 느낌이 드는 동안에도 오랜 희망을 되살린다.기독교인에게는 예수님의 생각이 첫 번째, 즉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가 왕이시며 모든 것의 완성이며 신선한 숨결과 희망과 함께 오시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폭넓게 만들어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바로 창조의 맥박으로 삼는 주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찬란하고 짙푸른 세상의 아름다움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손을 따라가게 만든다. 이는 신앙의 시야를 넓혀 주가 우리 대신 돌아가신 것이 뒤늦은 것이 아니라 사물의 처음 시작에 있었던 일임을, 홍수 위에 세상이 세워지고 도살당한 양이 신전 한가운데 놓여 있기 전의 일임을 알게 만든다. “나는 처음이니라” 라고 영광스러운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마 위에서 청춘의 이슬은 여러 세기가 지나도 바래지 않는 금강석 왕관이 된다. 시간이 있기 이전에 주가 계셨기 때문이다. 세계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 인생의 정복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순간, 시간의 죽지 않는 희망, 이 모두가 여러 세대를 이끌어가는 주에게서 체화되며 주 안에서 각자의 삶이 새로운 시작을 맞는다. 주는 자석처럼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이시며 주의 오랜 순교의 길에서 2인자나 3인자는 모두 젊은이, 처녀, 어린 아이였다.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는 예수님을 인생의 첫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의 미래가 작가의 펜을 기다리는 깨끗한 하얀 종이 같은 사람들에게 주로 현신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우리의 새로운 운동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에게 매혹되도록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교회 신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심하고 딱딱하고 둔감한 중년층을 포기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실을 관습적으로 그저 받아들이기만 함으로써 지나치게 자기 기만적이며 세속적이고 전혀 영웅적이지 못한 단조로운 생활에 너무 강하게 매몰되어 있어서 기독교적 훈련의 클라리온에 영향을 받기가 어렵다. 그들은 방종에 너무 몸을 맡기고 저열한 이상과 너무 타협해버려서 희생과 도전의 소명에 반응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이러한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는 대부분의 개종이 청년 시절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용하고자 한다. 또한 그들의 첫 번째 선택이 세계인 이들에게 가까이 가는 전도사나 스승, 그들의 발달시기를 섬김 속에서 보낸 이들은 비통에 빠지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견해를 확인해주는 것이 많다. 사실 이는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이며 또 마지막이라는 사실이다. 주의 성스러운 권한은 단순히 모든 일의 처음 시작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끝나는 마지막 사건까지 기다리며 서 있다. 지상의 다른 것들이 물러나고 권리를 주장하는 다른 모든 이들이 끝을 맺을 때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주 예수의 구원의 힘에서 이는 마지막보다 더 마지막이며 죄보다 더 깊고 모든 인간의 저항보다 더 영속적이다. 주 예수가 처음이라는 사실은 젊은이들을 주의 발 아래로 불러 모은다. 그러나 주 예수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은 오래 머물다가 마지막에 주께 온 이들에게 경이로운 개인적 운명을 보장해 준다. 공허한 물질문명에 신물이 나고 오랜 파산 끝에 주께 돌아온 나라건,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 모든 희망이 허사가 된 후 겸허하게 무릎으로 기어서 천국의 아버지께 온 사람이건, 이 모두에게 기다리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환영하는 눈길 속에서의 황금의 미래가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나라에 대해서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에 비해 개인에 대해서는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죄많고 사치스러운 길로 너무 많이 간 나라들이 하루 아침에 생겨났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세계대전의 가혹한 교훈으로 현명해진 영국이나 미국이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환영한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원하고 환영하는 사건에 있어 우리에게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종종 더 높은 곳에서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낮은 이들에 대한 오랜 도제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개인에 대한 문제가 되면 다르게 느껴진다. 비교적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말년에 주에게 돌아선다. 그리고 이 적은 숫자 중 이곳 저곳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열렬하고 대담한 기독교적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이들의 여파는 인생에서 모든 에너지를 이전 삶의 방식의 결과를 상쇄하는데 쏟고 긍정적 발전의 여지는 별로 남겨놓지 않는, 부러진 날개 같은 모습이 된다.그러나 상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것이 늦은 개종에 잠재되어 있는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금지시키는 극도의 어려움에 대한 선입견 때문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삶의 후반에 주님께 돌아선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과 회개하는 영혼이 험하고 척박하고 수확이 없는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가정이다. 우리의 시야를 협소하게 만들고 우리의 시야를 복잡하게 만드는 대중적인 종교적 미신인 것이다. 실제로 젊은 시절 이후에 주님께 돌아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려움이 장애가 될 필요는 없으며, 어디건 영혼이 주님께 가는 길에는 어려움이 따라붙는다. 그 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관대함을 허락하시고 특별한 은총을 내리시는 것이다. 예수가 진정 마지막이시며 젊고 열렬한 이들에게 무엇이 되건 은총을 주신다고 하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탕진하고 마지막 허위의 재산까지 자신들의 무게 아래 깨어져 버린 이들이 어려움과 낙망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께 왔을 때 역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주께서는 독특한 계시를 내리신다. 이러한 이들에게 주께서는 안식의 힘을 가지고 나타나시며, 어느 교회도 아우구스틴(Augustine)처럼 “너무 늦게” 주를 사랑하게 된,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자리를 채우기에는 너무 늦지 않은 이들과 관련된 특별한 증인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다른 조력자들이 실패하고 다른 이상이 흩어졌을 때만 하나님께 돌아선다는 것은 항상 어렵고 씁쓸한 일이다. 주께 반쯤은 닳아버린 영혼, 그 불꽃이 재만 남은 정신, 헛되이 사랑하다가 이제 사랑의 힘을 거의 잃은 심장을 바치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다. 죽어가는 침대에서 주님께 돌아섰던 드러몬드(Drummond) 교수의 학생은 낭비해온 인생의 마지막 찌꺼기를 창조주께 드리는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착한 마음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충동으로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엎질러진 컵의 마지막 한 방울이라 해도 주님께 가지 못하도록 막을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 한 방울의 영광으로도 이는 천사들의 포도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이신 주님께서는 이를 오랫동안 기다려 오셨다. 이는 주님께는 찌꺼기가 아니다. 주님의 눈은 컵이 비어 있는지 차 있는지 보지 않고 이를 바치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용기 있는, 온 마음을 다하는 섬김이 주님께 귀중하다면 이는 그것이 지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오랜 기간 동안의 섬김을 바쳤다는 사실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진심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완전한 섬김은 지쳐버린 중년의 나이에도 가능하다. 선물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손상된 적 없는 활력의 도약과 진폭이 아니라 그것이 부추기는 목적의 단순성이다. 인생의 이정표가 드물어지는 “마지막 4반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최후의 한 마디는 우리가 헤매고 다닌 긴 세월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에 서있는 주님, 그 사랑이 그보다 오래 가고 그의 변화시키는 힘으로 모든 쓸모없는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디서나 나타나는 특성을 시로 표현하면서 에드워드 실리토(Edward Shillito)는 스스로의 손으로 패배하고 망쳐진 사람들이 남겨져, 그들의 망가지고 부서진 삶의 마지막인 주 예수와 얼굴을 맞대게 되었을 때의 축복을 노래했다. 검을 손에 쥐고, 그는 땅을 치네방패를 내던지고, 얻어맞아 무릎을 꿇네자신이 적들을 위에 올려놓은 것을 보네이제 그에게는 나 밖에 없네성들은 무너지네. 그의 발 아래희망은 깨어져 이제 그는 볼 수 없네폭풍 속에 벌거벗겨지고, 죽음은 가까이 와 있네이제 그에게는 나 밖에 없네 꿈의 포악함으로부터 그의 자존심은 만들어졌네최후에 그에게는 나 밖에 없네그러나 그에게는 내가 있네. 마지막 환상도 사라지고트럼펫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네. 그대, 자유를 찾으라.그에게는 여러 사랑이 있었지만 이제 오직 하나 뿐이네폭풍 앞에서는 그의 여러 신들도 달아나버리네그의 빛은 스러져가고, 그의 때는 끝났네그러나 마지막에 그에게는 내가 있네

    288 일본인이 한국인 361명 살해

    교회 평의회는 모든 잔학함의 책임은 경찰에 있음을 상세히 설명53명의 학살의 전모한국인 여자 기독교인은 “의심의 여지 없는 진실”이라 밝히다동경 당국은 개혁을 약속하라 총리와 우치다 외무대신이 평의회에 보장.서울과 다른 도시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잔인한 핍박이 가해졌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이야기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기독교 평의회 연합은 하라 총리와 일본 반군부파의 대표가 한국에서의 행정개혁을 단행할 것을 보장했다고 어제 발표했다. 일본의 우치다 외무대신이 평의회에 이에 대한 메세지 전문을 보내왔다. 이에 의하면, 외무대신과 이 나라를 둘러보았던 많은 정치인들은 속국에 새로운 개혁을 위해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한국에서 운동 기간 중에 발생한 이 잔학상을 드러내어 주장하는 기사가 장로교에서 발행하는 ‘신시대운동’(New Era Movement)에 지난 토요일에 발표되었다. 삼십 개의 교회 대표로 구성된 평의회 협의에 의해서, 한국에서 봉사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관찰에 관한 보고를 동양 담당 위원회를 통해서 어제 발표한 것이다. 이 위원회의 책임 목사인 윌리엄 헤이븐 박사와 보조 서기관 목사인 시드니 굴릭 박사가 이에 대한 내용을 미리 언급한 바 있다.헤이븐 박사는 한국에서의 모든 개혁에 관한 호소는 일본 관리들의 성실한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밝혔다. 또한 덧붙여서, “하라 총리와 그 내각은 잘못을 시정하고, 한국에서 새 시대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 줄 것을 믿을만한 많은 증거가 있다”고 말하였다. 다음은 어제 일본 총리가 잔학상의 주장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미리 표명한 전문이다.“나는 여러분들에게 확신을 주고자 합니다. 곧, 한국에서 일본 정부의 관리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잔학상에 대하여 들었으며, 그러한 잘못들은 실제 사실에 따라 처리해 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일어나고 있는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십년 전 두 나라의 합방 당시에는 그 시대에 맞는 내각 행정부가 취임하여 일을 해왔으나, 이제 바뀐 나라 상황에 맞게 알맞은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 내각은 이번 구월이 그들의 임기를 마치게 되는 시기이므로, 이에 따라 한국에서 필요로 하는 새로운 행정 개혁을 위해 책임을 가지고 임하고 있는 것 입니다. 새로운 조직에 대해 납득할 만한 계획은 이미 가시적인 범위 안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한반도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혼란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개혁을 일시에 실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그러나 최근 상황이 개선되어 가는 조짐이 보이고 있는 마당에서, 나 개인적인 견해로는, 심사숙고하여 마련한 개혁을 이제 안전하게 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법적인 조치만 완비가 되면 바로 실 행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완전한 계획의 발표는 현재로는 유보 상태에 있으나, 한국의 형제들을 위한 영속적인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나라의 현저한 개선을 위해 우리 내각과 나 자신이 노력하고 있는 우리의 확고한 결심을 오해하거나 잘못 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총리의 이 전문은 연합 평의회가 그에게 한국에서의 잘못과 잔학함이 이 나라와 일본 간의 좋은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 다음에 그 답으로 보내온 것이다. 평의회는 이보다 앞서 일본 외무대신으로부터 개혁이 검토 중이라는 점과 “안정되고 온건한 자세를 지켜줄 것을 요구”하는 전문을 받았었다. 이와 같은 개혁이 지연되고 있다고 믿으며, 연합 평의회는 기사의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사실이 여기 일본인에게 알려지면서, 이에 관한 출판물을 인쇄하여 언론에 배포하기 직전에 총리의 전문이 도착한 것이다.수많은 증거자료가 확인되다“한국으로부터 지난 수개월 동안 보내온 기사들 중에, 한국 백성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잔학한 처우에 관한 기사가 수많은 증거 자료를 통해서 사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라고 미국 성경 학회의 간부인 헤이븐 박사가 전하였다. 이어서 그는, “위원회가 밝히기를 원하는 것은, 미국 교회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의 정서를 대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한국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를 입에 담는 것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아 언로가 막혀있는 속에서,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학살과 만연된 잔혹함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조용히 입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라고 밝혔다.“이 기사는 그 책임에 대하여 말하기를, 한국에서 행하고 있는 일본의 식민 정책은 군사적인 심각함과 그 지역 백성들에게 행하는 처우에 있어서 거의 프러시아를 닮았다고 구체적으로 증거 하였다. 한국 전역에서 칼이 곧 권위의 상징이라고 말하고 있는 정도이다. 군 간부들과 군 경찰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일본인 민간 관리들과 하다못해 학교에서 가르치는 남자 선생들까지 교실에서 이 칼을 차고 있다는 것이다.”“많은 일본 관리들의 한국인들에 대한 태도는 지나치도록 권위적이다. 최근에 있었던 독립을 위한 운동은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자기 백성들에게 사라져가는 나라를 되찾아 주고 최소한의 기본권을 돌려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진행해 갔던 것이다. 그 기본권이란 곧, 자기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출판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집회의 자유로서 일본에 의해 거부되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소극적인 저항방식의 평화로운 시위를 통해서 한국인이 원하는 것은, 정복자에게는 파리 평화회담에서 그들이 왜 이 운동을 벌이는지 그 이유와 주장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주의를 끄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윌슨 대통령의 유명한 14개항에 따라 다른 약소국들과 함께 나라의 자결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희망인 것이다.”“소위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일사불란한 진행 과정을 통해서 국가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만세를 부르면서 힘을 결집시켰던 것이다. (만세란 일본어로는 Banzai 영어로는 Hurrah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혁명 당사자들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무기를 들고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일본측은 수없이 방어 수단을 가지지 않았던 이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사람들을이 죽이고 부상을 입혔던 것이다.또 다른 경우에는 한국의 자유를 외치기 위해 이 시위 과정에 참여한 어린 중학생까지도 남녀를 불문하고 붙들어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하였다. 시위 군중을 총칼로 위협하고 살해하는 일이 주춤해지면서, 일본군에 의해서 어린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매질을 가하며 다른 여성들을 가혹하게 다룬 경우는 부지기수였다.”“나라의 독립을 선언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삼십삼인 중에 열 다섯 명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 운동의 진압을 위해 그들의 전투력을 한국의 기독교계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그 마을의 기독교인들을 모두 한 교회에 불러 모은 뒤에 일본군은 그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교회 건물에는 불을 질러 내부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태워버렸다. 남편들의 생사가 궁금하여 달려온 여인네들도 마찬가지로 학살당하고 말았다. 조사단은 한 언덕에서 아홉 개의 마을이 불탄 것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었다.”361명의 학살 사실이 드러나다“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 한국인 361명이 학살당하고 800명이 부상을 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가한 가혹행위도 드러났는데 특히 모우리 목사를 체포하고 감옥에 가둔 사실은 이미 미국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공공연하게 시위하는 것은 그쳤지만, 경찰들에 의해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공포 통치는 확산되고 있다고 전한다.”“소식에 따르면 한국에서 있었던 조사 활동과 모임과정을 밝히고, ‘위원회는 한국에서 독립 운동과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것은 ‘일본에서 점진적으로 일고 있는 반군사 정책을 지원하는 가장 강한 도덕적 지원일 것’이라고 미국인들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되었다.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이 전하기를 학교 정문을 나와 한국의 독립을 외치며 거리를 걸어가는 학생 군중에 일본 측이 공격을 가했다고 하였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수백 명의 학생들을 일본 소방대원들이 창과 도끼로 심하게 부상을 입혔다고 한다. (그들은 경찰이 할 일을 대신해 도와 준 것이다. 또한 경찰은 부상자들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도록 막아 희생을 더 크게 하였다.) 그리고 다른 몇몇 도시에서도 경찰이 시위 군중들에게 총뿌리를 들이대고 시위 군중 남녀를 쏘아 죽이고 부상을 입혔다.53인의 한국인 학살 전모이 기사는 마웅산(Maungsan)으로부터 전해온 소식이다. “삼월 초순에, 이 지역 사람들이 독립을 외치고 나서, 56명의 사람들이 헌병대에서 출두하라는 명을 받고 그 곳으로 갔다. 그들이 명을 받은대로 헌병대 구역 안으로 들어서자 대문이 굳게 닫히고 나자, 헌병들이 담 위로 올라가더니 들어왔던 사람들 모두를 쏘아 죽였다. 그리고는 내려와 죽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총검으로 다시 찔러 죽였다. 56명중에 53명이 그 곳에서 학살당했는데, 세 사람은 나중에 그 주검의 더미에서 기어 나와 탈출하였다. 그들이 계속 살아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한 여성 기독교인이 며칠이 걸려 여행한 끝에 그의 외국인 친구에게 위의 사실을 전해 주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기사는 안주에서는 일곱 명이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몇 사람들은 심각하게 얻어맞았다고 전했다. 반석(Pan Suk)에서 나온 주장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들이 옷이 벗겨진 채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구타당했으며, 60세 정도의 어느 노인은 경양(Kyengyang)으로 끌려가 심하게 얻어 맞아 곧 죽었다. 또한 다른 선교사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도 고개(Kokei)에서 다른 일본 경찰에 의해서 얻어맞았다고 하였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 선교사가 선교부 구역 안에 서 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국 독립을 외치며 그 곳을 달려 지나갔다. 이 무리를 쫓던 일본 경찰은 선교사와 그의 한국인 후원자 두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선교사의 여권을 검사한 후 그들은 그를 다른 마을로 가는 기차에 태웠다.”기독교인 죄수들 전체가 여러 차례 고문을 당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발표에 의하면 학생 세 사람은 …(원문판독불가)…에서의 소요 소식을 듣고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학생 하나는 남대문 역에서 세 명의 일본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본부로 끌려갔다. 그가 풀려나기 위해 친구 한 사람이 미국인 친구로부터 편지를 한 통 요청한 것이 한국 독립운동을 선전하는데는 도움이 되었다. 한국의 고문 …(원문판독불가)…“다음날 아침 10시경 두 명의 헌병이 나를 체포하러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가서 경찰서 본부에 갇혔습니다. 갇힌 지 세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원문판독불가)…앞에 끌려갔습니다. 검사가 물었습니다. “너의 죄를 아는가?” 저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저는 제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검사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너는 미국에 있는 친구와 너 사이에 오갔던 편지에 대해 털어놓아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저는 거기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내 옆에 서 있던 헌병이 손으로 내 얼굴을 후려쳤습니다. 이는 나를 화나게 만들었고 나는 거듭 그들에게 …(원문판독불가)…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나를 심하게 구타했습니다. 검사가 이를 중단시켰고 나는 독방에 갇혔습니다. 고문 기구가 근처에 놓여 있었습니다. 곧 나는 똑바로 세워져 있는 압축기에 밀어 넣어졌습니다. 뒤쪽에 있는 바퀴가 돌아가면서 기구의 측면이 나를 눌러댔습니다. 나는 사실을 이야기하라고 다시 강요당했지만 계속 나의 무고함을 주장했습니다. 나는 …(원문판독불가)… 했고 “계속 그렇게 굴면 죽여버리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다시 압축기로 끌려들어갔고 숨을 못 쉴 정도로 다시 눌려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나의 무고함을 주장했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 놈 지독하네” 그리고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을 다시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내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질긴 끈으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 끈 다른 끝을 천장 가까이의 판자에 묶고 끈을 잡아당겨 내 온 몸이 발끝이 마루에 살짝 닿은 것 외에는 손가락 하나로 지탱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점점 의식이 없어졌고 깨어났을 때는 마루 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매달려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며 내 이마는 …(원문판독불가)… 로 젖어 있었습니다. …(원문판독불가)… 했으므로 나는 할 수 있는 한 편하게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다음날 아침 11시경 나는 다시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 나갔고 그 후에 …(원문판독불가)…

    289 THE NEW YORK TIMES

    한국의 공포, 일본의 책임기독교에서 살인과 고문에 관한 공식 기사를 전해기독교인 마을 방화조사관에 의하면 최소 30명이 한 교회에서 살해됨미국 장로교회 본부에서 어제 한국 내에서 일본이 행한 잔혹함을 주장하는 기사를 공식 발표했다. 미합중국 장로교 한국 대표들이 행한 조사에 의한 것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그들 선교사들 일부가 체포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한국으로부터 온 이 정보는 일본 검열관의 검열을 피하는 수단으로 전달되었다. 수천 자에 달하는 이 보고서에는 장로교측에 의해 다음과 같은 서문과 함께 서술되어 있다.“미국의 신문들은 이미 한국에서 일어난 잔혹한 사건에 대한 기사로 넘쳐나고 있다. 이 사건의 기원과 이유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나, 이 글의 주제로는 다루지 아니한다. 제 2의 벨기에가 전 세계의 관심권 안에 들어 와 있는 현재, 누군가에 의해서 이 일의 상세함을 전해야 하며, 이것을 기초로 해서 건설적인 개혁이 후에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기사는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작성하였다.“이 곳에 발표된 기사는 한국내 수많은 지역에서 복사할 수 있다. 우리가 입수한 내용에 의하면 현재 발표하고 있는 이 내용보다 더 고통스러운 기사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사 중에 믿을만한 확실한 증인의 증거가 확보되지 아니한 것은 발표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 대신 증거에 의해 사실임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사건만을 한정하여 보도하는 자세를 취한다.“이 많은 기사들 중 극단적인 것은 제외하였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어 나가면서 이 사실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노의 피가 끓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가지의 경우만 예를 들어 전할 것이며, 이 사실 내용을 통하여 교훈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에 일어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면, 이 기사는 참으로 길고 무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정치범의 고문“독립운동에 연루된 한국인들에 대한 초기심문 단계에서 경찰이 시행한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꾸며진 잔학성”이 조사단의 보고서에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또 남자들을 때려서 죽이는 것과 여자들은 그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추악한 방법으로 어떻게 부끄럽게 다루었는가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 언급된 것을 보면 비교적 약한 벌이라는 게 죄수를 대나무로 만든 태장으로 아흔 대의 태형에 처하거나 구두발로 많이 걷어 차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 벌을 준 다음에도 아직 살아 있으면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병원으로 보내어졌다.“이처럼 벌을 받은 사람 중에 열 아홉 살 먹은 젊은이로 몸이 호리호리하고 순한 기독교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구두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재력이 있는 어느 한국인 한 사람과 함께 당시에는 혁명적인 출판물이라 할 수 있는 독립신문을 돌린 혐의로 붙들려 왔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경찰 본부에서 경찰은 재력이 있는 부자부터 심문하였다. 그에게 만약에 누가 비밀리에 출판한 이 독립신문을 돌렸는지를 말하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말하자, 그는 사실을 다 말하였다. 이에 따라 단지 그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이 구두닦이 소년이 두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혼자 다 받게 되었다.“이 구두닦이 소년이 무섭도록 얻어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 곧 바로 들어왔다. 나는 이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33일 후에 나는 장로교 제 오 교회에서 어느 여자들을 만났는데, 그 소년은 거의 죽어 가는 모습으로 병원에 누워 있다고 전해 주었다. 그 사이에 아직 죽었다는 소식은 없었으므로 나는 그가 제발 목숨만이라도 건질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나는 그를 보기 위해 어제 그 병원을 찾아 가 보았다.“그가 그 병원에 있도록 한 이유는 내 생각에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나는 경찰이 자신들이 죽였다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그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을 때 고문을 다시 계속하려는 것이다. 나는 병원 사무소를 거쳐 신분증을 보여 준 뒤 경찰의 감시를 피해 그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 방에 들어 가 내가 본 것은 그토록 야위고 병든 소년으로 5주전에 내가 본 그 사람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나는 분명히 하늘이 나를 그에게 가 보도록 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와 함께 거의 한 시간 반을 보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나는 찬송가 몇 장을 그에게 불러 주고 함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다음은 그가 내게 전해 준 이야기이다. 그가 체포되고 나서 그는 독립운동에 연루된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다.젊은 애국자의 시련“그가 사건에 관해 말하기를 계속 거부하자, 장장 여섯 시간 동안이나 수시로 고문을 가하면서 그의 팔꿈치 윗부분의 팔을 고리에 끼우고는 상체가 매우 뒤틀려질 때까지 심문을 지속하였다. 이것은 보통으로 매질을 하기 위한 전 단계였다. 매질과 구두발 차기는 그가 정신이 혼미하여 바닥 위로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면 차가운 물을 마시게 하고 또 그 차가운 물을 그의 몸에 끼얹어 다시 제자리로 데려와 앉혔다. 그런 후에 다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대답하기를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다시 바닥으로 쓰러져야만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나는 그의 허벅지 부분에 나있는 화상 자국을 보았다. 그것은 5인치 정도 길이였는데 빨갛게 달군 다리미로 지진 화상이었다. 이런 화상이 네 군데나 되었다. 나는 그의 손에 매질로 인해서 생긴 죽은 피부 자국이 길게 여러 군데 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말하기를 그의 한 쪽 손이 한 때는 보통 손보다 두 배 정도로 부어 올라 있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였다. 한 손가락의 두 마디와 다른 두 손가락의 끝 부분을 보면서 지금까지 들었던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다. 머리는 고문 때 받은 매질로 인해 아직도 그는 고통을 호소하였다.“곧 이어 의사가 정기 회진을 도는 시간이 되었다. 의사가 와서 그를 살펴보았는데, 진찰하는 과정에서 대단히 큰 고통을 지켜보게 되었다. 의사는 나에게 환자의 가슴과 허파가 많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가슴이 아픈 이유는 찬 공기에 노출되어서 그런 것인지를 내가 묻자, 의사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의사는 그의 옷을 벗겨 더 자세히 진찰하였는데, 나는 그의 배부분 전체가 상처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상처가 대검으로 찔려 생긴 것인지 아니면 의사가 수술을 위한 절개 집도로 인해서 생긴 것인지는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의사는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는 상처부위를 만지고 눌러 보고 하였으나, 33일이 지난 후인 지금은 이 소년은 가슴에서 허리 사이와 엉덩이와 엉덩이 사이에 조금만 손이 닿아도 아파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얼음주머니는 열을 식히기 위해 항시 머리맡에 준비되어 있어야 했고, 몸은 뼈만 앙상하게 보이도록 말라 있었으며,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아 있는 시늉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선교사가 의심받다.“경찰서에서 있었던 나흘 간의 고문과 이어 계속된 이틀 간에 걸친 고통 속에서도 의사는 단지 세 번만 그를 볼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는 차라리 죽기를 원하였고 자기를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이십일 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회복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조금 시간이 나면 나는 인력거를 타고 그에게 달걀이며 사과, 분유 그리고 깨끗한 베개보와 옷들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회복세는 매우 양호한 것이었다. 그가 입은 옷에는 처음부터 그가 겪어 온 고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가 방문할 때마다 한국인 간호원이 배석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그의 흙 묻은 옷을 가져가기 위해서 둘둘 말아 놓았다. 우리는 함께 기도를 하고, 나는 일어나 그 방을 나오자 바로 문 밖에서 인력거꾼을 만났다. 그는 환자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기다려. 너는 가면 안돼.”나한테는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려 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내가 그 소년을 데리고 나가 인력거에 태워가려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체포를 기다려야만 했다.“그는 조용히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 아무 일도 없이 삼십 분이 지나갔다. 심각한 곤경에 빠진 나를 생각해 보라. 나는 생선을 사와서 저녁을 준비하여 손님을 맞이하려 하였던 것이다. 정말 시간이 없었다. 나는 급히 어느 여자를 시켜 생선과 쪽지를 들려 먼저 보냈다. 그리고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동양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나는 분명히 요주의 인물이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와서 나를 체포해 갈까, 또 나를 차에다 태워갈 것인가 아니면 걸어가게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상상해 보았다. 나의 이와 같은 즐거운 생각은 카키색 군복에 무장한 군인들이 아니라 평복을 한 일본인 형사가 나를 접견하러 들어오면서 깨어지고 말았다. 내가 아는 바를 모두 그에게 전하자 그는 매우 부드럽게 나를 대해 주었다. 그는 경찰서에서 우리의 구두소년을 거의 죽도록 고문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외국인들과 우리 학생들을 고문하는 관리로 알려진 첩자였던 것이다.“접견은 간단하였다. 이 소년은 아직도 죄수 신분이니 앞으로는 그를 만나보고 싶거든 허락을 받도록 신청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언제 꺼질지 모르는 살얼음 위를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분명히 잡혀가 감옥 안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렇게 되지를 않자 오히려 실망하였다. 내가 돌아와 보니 난리였다. 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지역 전화 연락망을 통해 듣게 되어 곧 법적인 위원회를 구성해 경찰서에 보내려고 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미국과 일본 사이의 조약 아래서는, 우리 외국인들이 이 땅에서 자유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미국 톰 아저씨에게 이에 대해서 물어 보라.수많은 고문 사례“이 고문 사례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 십 수 백 가지의 비슷한 고문의 예가 회자되고 있고, 또한 완전히 실증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경찰서는 이 땅 위에 실제하는 생지옥이다. 인간이 계획적으로 고안해 낼 수 있는 잔악함은 모두 거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그같은 잔인함은 사람의 입으로 말하는 것조차 마치 잘못을 저지르는 것처럼 불쾌하게 만들었다. 남자 죄수들은 매질을 하여 죽으면 그 시신을 친척들에게 넘겨 땅에 묻도록 하였다. 다른 죄수들은 평생을 기어다니도록 두들겨 맞아, 석방된 뒤에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가족 친척들에게 평생 짐이 되게 만들었다.“이미 33일 동안이나 병원에 누워 있던 그 구두닦이 소년을 만나던 상황을 다시 보자. 언제나 그의 건강이 회복되어 재판 받을 준비가 되겠는가. 아직도 그는 아홉 달 동안 교도소 생활을 채워야 한다고 알고 있다. 이와 같은 판결은 사실상 정식 재판에 회부되기도 전에 경찰 관리들에 의해서 내려진 것이다. 재판소란 형식상 거치는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재판소는 경찰이 제시하는 판결 내용을 그대로 선고할 뿐이었다.“때때로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대신에 대나무 태장으로 아흔 대의 태형에 처하고 석방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벼운 형벌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한번에 그 많은 태형을 인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흔 대의 태형을 셋으로 나누어 하루에 서른 대씩 연속 삼 일에 걸쳐 맞도록 되어 있었다. 개인 병원에 치료를 위해 오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 매를 맞은 사람들인 것이다.“이 모든 행위들은 전 세계 나라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위대한 협력자로 칭하는 어느 나라가, 한 편으로는 현대 문명을 온전히 받아들였다고 자랑을 하면서,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땅에서 이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이 같은 웃음거리가 중단될 것이며, 또 이런 일을 행한 자들은 무엇이라고 불릴 것인가.여성들에 대한 잔혹함“다음은 1919년 4월 22일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 미국인이 서명한 진술서이다.“독립운동에 관련하여 활동을 하다가 붙들려 온 여성들을 심문하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고 낯이 뜨거울 따름이다. 꼭 알아야 할 것은 일본인은 이성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한국인과 중국인 여성들은 유럽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섬세한 느낌을 가진다. 그들은 자기의 몸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대단히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일본인은 이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이 한국인 여성을 심문대에 세울 때는, 유죄 판결이 나기도 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심문하는 방에 데리고 들어 가서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방에서 헌병들에 의해서 옷이 벗겨진 다음 심문하는 방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그들이 감방으로부터 걸어 나오면, 누구든지 보고자 하면 볼 수 있도록 감옥 안 통로를 걸어 지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때로는 일본인 여성이 함께 따라 가기도 했다. 또 한가지 말할 것은, 그들이 목욕을 해야 할 때에는 감옥에서 입고 있던 얇은 기모노를 벗어야 했는데, 목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목욕을 마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체인 상태로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상 유무를 가리는 곳은 물론 남자들 앞이었다. 그리고 심문의 핵심은 가능한 한 보다 큰 치욕감이라는 고통을 안겨 주자는 것이었다. 미혼의 소녀들은 성경 여신도(Bible women)들과 마찬가지로 각 가정에서 다소곳이 근신하며 살아 왔으며, 여성이라는 신분 때문에 점잖은 예우로만 대우를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길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심한 욕 중의 하나인 ‘나쁜 년’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었다.“몸을 가리려고 하는 여인들은 손을 뒤로 묶어버린다. 어느 성경 여신도는 이 과정에서 어깨뼈가 빠져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배를 걷어 채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악마같은 사람들에게 다른 방법으로 아주 거칠게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우리는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독일군이 여성들에게 가한 가혹한 행위를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아직 그만큼 처참한 것은 아닐지라도 같은 고문 수업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이 나라 어느 곳에서는 대낮에 자기 집 안에 있어도 여인들이 안전하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낮에는 야산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집에 들어 온다고 한다.“일본인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진실이 흘러 나와, 누군가가 그것을 읽거나 알게 되는 것을 꺼려하는 대단히 까다로운 사람들이다. 여기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하며 필요하면 언제라도 발표하여도 좋다고 서약한 어느 여인의 진술이 있다.기독교인 마을이 사라지다“기독교인들이 일본군에 의해서 살해되고 불태워지다.”-일본 신문 표제. 동경. 1919년 4월 20일.“다음 이야기는 지금까지 확인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이다. 미국 부영사와 영국 영사대행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현지를 방문하고 나서 그같은 행위를 비난하고 나섰다. 총독은 이 같은 공격 사실을 시인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그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서울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는 언더우드씨가 4월 16일 경기도 수원부 내의 팔탄면(Pal Tan) 소재 상가를 직접 방문하고 나서 기술한 내용임.“우리 일행은 오전 9시 30분경에 기록인(writer)의 차로 서울을 출발하여 수원과 오산을 지나 총 거리가 약 46마일쯤 되는 팔탄(Pal Tan)을 향했다. 팔탄에 이르기 2마일쯤 전에 읍내 뒤쪽에서 큰 구름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세웠다. 기록인과 함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까운 마을을 향해 터벅거리며 걷다가 한 농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 뒤:언더우드: 저 연기가 뭐지요?농부: 불타버린 마을입니다.언더우드: 언제 불탔나요?농부: 어제요.언더우드: 누가 이렇게 했죠?농부: (주위를 살피며) 군인들이 그랫소.언더우드: 왜요?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거나 독립만세를 불렀습니까?농부: 천만에요. 저 마을에는 기독교인 마을이지요.“점심을 먹은 후, 읍내로 향했다. 읍내로 들어 가는 길에 작은 개울이 있었는데, 차가 그 개울을 건너지를 못해 그 곳에다 차를 세워 두고 들어 갔다. 우리는 두 개의 간선 도로가 읍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만나는 위치에 서있는 경찰서를 지나가게 되었다. 78 연대(regiment) 병사들이 경찰서 앞에 모여 있었다.우리가 지나갈 때, 순경 한 사람이 와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물으며 경찰서 안으로 잠깐 들어 오라고 명했다. 우리가 들어 가는 길에 두 명의 일본 장교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어깨의 견장을 보니 붉은 색 바탕에 세 개의 별이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상사(first sergeant)의 뱃지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경찰서로 들어 오라고 명했던 순경은 카빈 총을 어깨에 메고 장교들을 따라 나갔다. 곧 이어 그들은 한 순사의 안내하에 남양 쪽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커티스(Curtice)씨는 그의 명함를 한 장교에게 주면서 일본어로 이야기를 텃다. 나는 일본어를 조금밖에 할 줄 몰랐으므로 대부분의 대화를 따라 듣기만 하였다. 길, 다리, 서울에서의 만남등을 가볍게 이야기하다가, 커티스씨는 화재 사건으로 말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경찰서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대답하기를, 작은 화재가 있었지만 그리 큰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단지 “조그만 소란”“소요 상황에 대하여 묻자, 그 곳에서 단지 조그만 소란이 있었으나 이제는 진정되었다고 말했다. 대화가 더 계속되면서 커티스씨가 그 곳 화재 사건이 진정되어 잘 끝났다면, 우리가 가 봐도 괜찮겠는가를 묻자 그 우두머리가 무슨 불이냐고 되물었다. 커티스씨는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며 3, 4마일 정도 더 구경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우두머리는 약간 놀란 듯 했으나 허락을 하고 순사 한 사람을 우리와 함께 인력거(riksha)꾼에게로 보냈다. 거기서 우리는 세 인력거를 불러 함께 떠났다. 연기가 올라왔던 마을은 읍내로부터 1마일이 채 되지 않았다. 조금 더 간 후에 인력거를 뒤로하고 언덕 아래쪽으로 걸었다. 그 언덕 옆이 마을이 있던 자리였다.“우리의 짐작으로도 이 곳이 한국인들이 말하던 바 40여 가구가 살았다는 그 마을이었다. 너댓 집은 멀쩡하게 서 있었고, 그 나머지는 아직도 여기 저기에서 불씨가 남아 있는 가운데 연기가 올라오는 잿더미였다. 마을 위 언덕 위에서는 아낙네, 어린 아이 그리고 노인네들이 이런 말문이 막히는 재난의 현장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우리는 그 마을 전체를 돌아보았다. 마을 윗 쪽에서 어느 젊은이의 시체를 발견하였는데, 심하게 불탄 채 어느 건물밖에 내다 버려져 있었다. 그 자리는 교회가 있던 곳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곳에서 이 시신의 사진을 찍었다.“마을을 둘러 보고서 언덕을 따라 돌아 나왔다. 아까 보았던 사람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한 남자를 보게 되어 그를 불렀다. 그가 내게로 오기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는데, 그는 공포와 충격을 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서 그가 가진 모든 재산과 수 년 간 피땀 흘려 모은 것을 모두 다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를 위로하면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자, 어제 이맘 때 쯤 이라고 했다. (오후 2시)“언더우드: 어떻게 시작되었지요?“한국인: 군인들이 교회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언더우드: 화요일 오후에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건가요?“한국인: 군인들이 와서 기독교인들은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명령했어요. “언더우드: 교회에 여자들도 있었나요?“한국인: 아니요. 여자들은 오지 말라고 했어요.“언더우드: 그래요.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이자 무슨 일이 생겼나요?“한국인: 군인들이 총을 쏘고, 크고 작은 칼과 대검으로 찌르고, 나중에는 교회에다 불을 질렀지요.“언더우드: 다른 집들은 어떻게 불이 난 건가요?한국인: 어떤 집들은 교회의 불이 번졌고, 바람 방향이 달라 불이 번지지 않은 다른 집들은 군인들이 따로 불을 질렀어요. 언더우드: 당신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던 건가요?한국인: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만 교회에 모이라고 명령을 받았어요.언더우드: 당신 집도 역시 불에 타버렸나요?한국인: 예, (손으로 가리키며)잿더미만 남았네요.언더우드: 그런데 남아있는 집들도 있군요. 어떻게 된 건가요?한국인: 저 집들이 남아 있는 건 기적입니다. 여러 군데서 불이 퍼진 후에, 나머지 집이 군인들의 눈에 띄지 않아서 불이 나지 않았던 것이니까요.교회에서 30명이 살해됨언더우드: 교회에서 몇 명이나 죽은 건가요?한국인: 서른 명입니다.나는 이 한국인과 헤어져 다른 한국인 무리에게로 걸어갔다. 아기를 데리고 있는 젊은 여자 몇 명과 나이든 여자들과 19살이나 2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인이었고 북감리교 선교회의 노블 박사를 알고 있었다. 불 타 버린 교회는 박사의 관할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위와 거의 같거나,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시간·방법·죽은 사람의 수·불을 지르는 상황 등에 대해 같은 대답을 들었다.나는 그 젊은이에게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물었더니, 그는 나무를 하러 멀리 산에 올라갔다가 밤에 내려와 보니 모든 친구들과 남자 친척들이 죽거나, 교회의 불더미 속에 파묻혔다고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교회가 있던 곳을 가르쳐 주어, 내려가 보고, 또 한 구의 시체를 발견, 사진을 찍어 두었다. 다른 시체들은 여전히 교회의 폐허 속에 묻혀 있었다.남은 사람들은 아주 궁핍한 상황이었다. 여기저기 불에서 겨우 끄집어낸 가재도구가 보였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두 먹을 수 있는 쌀이나 다른 곡식도 한 그릇 정도밖에 없어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식량과 농사지을 씨앗, 종자를 잃었고 그들이 크게 의존하던 가축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그들의 사진을 찍은 후 작별을 고하고 마을을 지나 아직 남아있는 집들 중 한 집에 가 보았다. 그 집주인은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는데, 자기 집이 홀로 남아있는 것은 불이 옮겨 붙지 않은데다가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화당하지 않은 것 이라고 말했다. 그가 설명한 사건의 전말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든 면에서 일치했다. 그도 역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약 30명 정도의 숫자를 말했다.사진을 서너 장 더 찍고, 인력거 있는 곳으로 돌아와, 읍내로 떠났다. 인력거군들은 5킬로 쯤 떨어진 서흥(瑞興)이란 곳으로도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서흥에서도 제암리 사건과 같은 일이 2, 3일 앞서 일어났었다. 이들은 약 15군데가 방화되었으며, 대부분이 기독교인 근거지라고, 묻지도 않는데 말해 주었다. 이 말은 다른 이야기들과도 부합되며, 해당 지역 담당 선교사들이 서울에 보낸 보고와도 부합했다. 군인들은 약 2주 혹은 10일 전 자동차에 실려 투입되었으며, 최초로 마을들이 방화된 것은 그 때였었다. 주임은 얼마전 혼란이 끝났다고 보고했었으며, 우리가 방금 방문한 이 마을의 주민들이 폭력을 썼다는 비난은 듣지 못했다. 경찰은 다른 곳에서는 폭력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경찰에 작별을 고하고, 올 때처럼 서울로 돌아갔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하오 5시 30분경이었다.총독은 그런 범죄를 저지른 부대의 책임자였던 중위가 처벌받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처벌이라는 것이 그를 현재의 지위에서는 물러나게 만들고 어딘가의 더 높은 지위로 승진시켰다는 의미가 아닌지를 알고 싶다.정주교회 방화기독교 교회에 불을 지르는 것은 현재의 경찰을 포함해 과거의 군대의 취미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화가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고 몰아내고 싶어 한 비기독교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군대가 그 배후에 항상 주둔해있으면서 범죄가 일어났을 때 정당하게 분개하게 하는 한편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근거는 너무나 분명하다. 맞다. 위의 “기독교도 살해와 화형”에 대한 기사에서도 볼 수 있는 사례가 있으며 여기서도 그 행동을 그들 자신이 했다. 우리는 여기 평안북도 정주의 교회 방화에 대한 두 가지 발표문을 제시하려 한다. 하나는 조선총독부에서 감독하고 있는 기관지 『서울 프레스』의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불타는 현장을 목격하고 주의 깊게 조사를 한 그 교회 목사인 미국인 선교사의 발표문이다. 어느 것이 정당한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기독교 교회가 불타다”(『서울프레스』, 1919년 4월 18일)화요일 새벽 6시 평안북도 도청 소재지 정주(定州)에 있는 한 교회에서 불이 일어나 교회 건물이 모두 재로 변했다.손해액은 10,000엔으로 추정된다. 그 불은 교회의 이름을 빌어 소요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모욕을 느낀 사람들이 불을 질러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다음은 교회 목사가 서술한 내용이다. 정주교회 화재 4월 8일, 경찰들이 정주의 새로 지은 대규모 교회로 와 돗자리와 다른 가구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들이 불을 껐다. (기독교인들은 이 건물에 모든 힘을 쏟았고 이 건물에 대한 비용을 지불했다.)4월 9일 밤에도 8일과 마찬가지로 목사의 설교단에 다량의 발화 물질을 쌓아 놓은 뒤 불을 질렀다. 그 교회의 집사가 종을 울려 몇 명의 신자들이 달려와서 불을 껐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은 그 교회 근처에 집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을 불러 교회에 불을 질렀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 다른 곳으로 이사하라고 명령했다.4월 10일 교회 주위에 가연물질을 쌓아 놓고 기름을 끼얹은 다음 다시 불을 질렀다. 그들은 또한 종을 울렸지만 아무도 모이지 않아 교회는 결국 재로 변하고 말았다.4월 11일 목사의 부인과 교회의 간부들이 경찰서에 불려가 교회가 불타버린 데 대해 견책을 받았다. 경찰은 그들에게 교인들이 저질의 악당들이라고 교훈을 주고 불이 났을 때 단 한사람도 불을 끄려고 나오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사실은 그 날 밤 거리에 나온 사람은 심하게 구타당하고 무기에 찔렸던 것이다.일본어신문에는 화인(火因)으로서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을 강요하는 교회 지도자에게 반발을 느껴 교회에 불을 질렀다고 내세웠다. 더 이상의 논평이 필요 없게 되었다.몇몇 일본 언론에 무자비하게 반미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기사가 난 이후의 결론에서, 장로교인들의 보고서는 조사 결과 …(원문판독불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기사는 그들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그러한 내용이 활자화되는 것을 허락하게 되면 독자들이 언론의 태도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언론은 항상 정부의 감시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활자화되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정부의 책임이 된다. 진실은 금지되고 거짓과 명예훼손은 허용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은 관련된 양국 정부 사이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 뿐이다.

    290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1919년 5월 19일모우리 씨 재판 항소선교사가 일본 대법원에 항소하다한국 평양. 5월 18일. (연합 통신):일본 항소 법원은 어제 항소심에서 오하이오주 맨스필드 주에서 온 장로교 선교사 엘리 모우리(Elly Mowry) 목사에게 시위를 선동한 한국인들을 숨겨준 혐의로 징역 4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모우리 목사는 즉시 대법원에 항소하기로 결정하였다.모우리(Mowry) 목사에 대한 변론의 주된 요지는, 그가 자기의 집에 머물도록 한 한국인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모우리(Mowry) 목사는 4월 말 하급 법원에서 6개월간의 징역 및 중노동을 선고받은 바 있었다. 그는 이 판결에 대해 항소 법원에 항소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