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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91 미국 장로교회 해외 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

    발신일: 1919-07-28발신주소: 뉴욕 5번 가 156번지발신자: 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수신자: 한국 선교사 가족 및 친지 제위여러분||지난 3월 24일 한국의 상황에 대한 서신을 보낸 이래로 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에서는 전국적인 소요가 일어났음을 알리는 상당히 많은 정보를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받았습니다. 선교사들이 개인적인 위험에 처해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3월 14일 서울에서 보낸 E. 웨이드 쿤스(E. Wade Koons) 목사님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 있었습니다. “저의 아이들은 시내를 가로질러서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지난 2주일 동안 제가 매일 아침이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후에는 데리러 갔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들에게 무례하게 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전보다 우리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괜찮을 것입니다.” 우리와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워싱턴의 국무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왔습니다. “아직 선교사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공식적인 보고 내용은 없으며|| 국무성에서는 그들이 안전한 상태에 있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선교사들이 몇 명 체포되었고 혁명주의자들을 돕고 있다는 혐의로 가택 수색을 당했으며|| 일부 지역 경찰들이 무례한 행동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치외 법권이 없어진 후로 일본 정부의 정책은 외국인들|| 특히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폭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은 선교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누군가 그런 이유로 고발을 당한다면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거쳐 무죄 방면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정부는 서울에 기민하고 노련한 총영사를 파견하고 있으며|| 도쿄에는 일본인들이 매우 존경하는 유능한 대사가 있습니다. 그간 교환된 서신들을 바탕으로 판단해 볼 때 선교사들은 총영사와 대사와 밀접한 연락을 취하고 있으며|| 교우 여러분들도 아마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완벽하게 보호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계실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폭동에 연루되어 있다는 비난과 관련하여 미국 국무성에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제게 보내 왔습니다.“미국 선교사들이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을 직접적으로 선동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든 증거가 분명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동요의 주요 중심지가 선교본부가 자리한 도시이고||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소요 사태와 관련되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일부 일본인들은 선교사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국외 추방을 요구하고 있지만|| 대체로 조선 총독부(the Government-General)의 의견을 반영하는 준(准)공식 기관으로 간주되는 서울신문(Seoul Press) 3월 14일자 사설에서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바를 보면 안심해도 될 듯합니다.“미국인 선교사들이 기독교의 포교자 역할 외에 정치 지도자나 선동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매우 발전되고 급진적인 형태를 띠는 외국의 정치적?사회적 사상들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한’ 사상들이 전파된 경로는 수없이 다양할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신문이나 잡지|| 서적 혹은 외국 여행자들로부터 전파될 수도 있고|| 일본이나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을 통해 전파될 수도 있다. 발전된 사상의 전파를 문제라고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책임을 묻지 않아야 마땅할 미국인 선교사들을 주 원흉으로 탓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기존 정부에 대한 반란이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롯해 상황의 미묘함을 생각해 볼 때 글쓴이가 명시적으로 발표를 허가하지 않는 한 선교사들의 교신이 발표되어서는 안 되며|| 발표될 경우에도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선교사들이 폭동에 참여하게 된다면 “미국 정부로서는 외국 및 우방국에 거주하는 미국 시민으로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통지 받았습니다. 물론 조선인들에 대한 불필요한 가혹 행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며|| 이것은 뉴욕의 대표 위원회(representative committee)에서도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일꾼으로서 우리는 정부에 대한 폭동 조장과|| 그 폭동을 진압하는 군 당국의 잔인성을 신중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선교사들과 미국 및 영국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의 관심사는 군 당국의 잔인성에 있으며|| 많은 공정한 일본인 지식인들도 그에 대한 우리의 우려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자유롭고 인간적인 정책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일본인들도 상당수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 일본인들을 비난해서 선교사나 조선인들을 돕기는커녕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편견에 불을 붙일 것이 아니라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데 도움이 되고 상황을 더 개선시키기 위해 선의를 가진 일본인들과 협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는 선교사 동료들의 관심에 감사드리며|| 조회 서신이나 전보를 기다리지 않고|| 특별한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우리가 주소를 가지고 있는 관계자들에게 신속하게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미국 시민에게 피해가 있을 경우 미국 총영사나 대사로부터 전보를 통하여 신속한 정보를 받는 미국 국무성이나 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의 검증을 받지 않고 추측에 불과한 선교사들의 위험이나 학대에 관한 신문 보도에 놀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위원회를 대신하여||감사합니다.서기관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

    192 굴릭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11-10발신자: 수신자: 시드니 굴릭(Sidney L. Gulick) 목사님수신주소: 뉴욕|| 이스트 22번 가(East 22nd Street)|| 105번지굴릭(Gulick) 박사님||얼마 전 제게 데부치(Debuchi) 선생님께 편지를 쓰라고 하셔서 제가 8월 14일에 편지를 썼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데부치(Debuchi) 선생님께 보낸 편지 사본 한 장을 선생님께 보냅니다. 데부치(Debuchi) 선생님께서는 8월 15일에 제게 답신을 보내 주셨습니다. 11월 25일에도 제게 편지를 쓰셨는데(필경 5일이라고 쓰신다는 것이 잘못 쓰신 것 같습니다)|| 그 편지의 사본도 동봉합니다.그 편지에 어떻게 답장을 하면 좋을 지에 대해서 박사님의 조언을 받고 싶습니다. 저는 이 문제 전체에 대해 우리들 전부의 입장을 보호해야 할 것 같고|| 박사님은 저보다 더 외교적이시기 때문에|| 제가 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박사님께서 암시적인 답변이라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안녕히 계십시오.

    193 동양 위원회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8-15발신자: 사무관 시드니 굴릭(Sidney L. Gulick)수신자: 동양위원회(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 회원동양위원회(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 회원들께조선의 상황에 대해 방금 받아 본 팸플릿을 한 장 보냅니다. 머리말과 도입 부분 전체를 특히 주의해서 봐 주십시오.애비슨(Avison) 박사께서 7월 초에 있었던 상황에 대해 쓴 최근 서신에서 발췌한 부분도 동봉합니다.일본의 많은 지도급 시민들이 조선에서 군국주의 행정부에 의해 자행된 비극에 대해 서서히 깨닫고 있다는 증거가 입수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여론을 합당하고 진지하고 유도할 수 있다면 일본의 진보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힘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선 뿐 아니라 중국을 위한 희망이 이 반 군국주의 단체의 힘이 얼마나 커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안녕히 계십시오.사무관 시드니 굴릭(Sidney L. Gulick)

    194 조선 애국자들의 사법 처벌

    조선 내 일본 법원이 결정한 형벌에 대한 중요한 진술발신일: 1919-07-09발신주소: 서울----씨께,“요즘 행정 변화가 예상되면서 신문에는 반(半)공식(公式)적인 문구들이 실리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세 가지를 보자면 군인 총독을 민간인 총독으로 대체하는 문제, 헌병대 체계를 개혁하거나 폐지하고 지방 관공서장의 힘을 확대하는 문제, 그리고 각 부문의 장(長)에 조선인을 앉히고 일본인 고문을 붙여 주는 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동봉한 신문 스크랩을 보면 총독의 민정 행정관(civil administrator)인 야마가타(Yamagata) 씨가 퇴직을 앞둔 총독의 정책을 승인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 조선인들이 개혁에 만족할 것인지는 예측하기가 불가능합니다.”“우리는 지금까지 몇 번의 운동을 경험했습니다. 우선 시위가 있었고, 그 후 군인들과 헌병들의 체포와 보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체포된 사람들의 재판과 석방된 죄수들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약 한 달 전 열한 명의 학생들이 시엔춘(Syenchun) 병원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사흘 동안 연속해서 하루에 30대씩 맞아 총 90대의 구타를 당한 후에 풀려났습니다. 구치소 당국에서는 아무런 치료를 해주지 않았고, 그들이 병원에 왔을 때 괴저(壞疽) 정도가 심해서 두 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상당한 치료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어제 우리는 처음으로 열다섯 명이나 되는 구타 환자들을 받았습니다. 루드로우(Ludlow) 박사님이 3월 초 이래로 우리에게 온 환자들을 치료해 왔지만, 이 열다섯 명의 학생들은 서울 서대문 구치소에서 아침에 마지막으로 30대를 맞고 바로 온 것입니다. 그들은 동료 스무 명이 내일 아침 석방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환자들은 빨리 병원으로 왔기 때문에 상처가 감염되지 않도록 하는 치료를 받고 대부분이 며칠만에 퇴원할 수 있습니다. 일단 감염이 되면 상처 부위가 썩기 쉽습니다. 이러한 구타는 대나무나 생가죽 채찍으로 하는데, 보통 엉덩이를 때립니다. 그러나 어깨부터 엉덩이까지 맞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10대를 때릴 때마다 때리는 사람을 쉬게 합니다. 이 형벌은 일본에서는 허용되고 있지 않지만, 당국에서는 체벌이 조선의 오랜 관습이므로 조선의 처벌법에 포함시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석방된 죄수들이 모두 구타를 당한 것은 아닙니다. 평양에서는 연례 회의중에 약 서른여덟 명이 이런 체벌을 받지 않고 풀려난 날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법정에서 이런 체벌을 받도록 판결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재판이 있기도 전에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도중에 구타를 당한 사람도 많습니다.”“총독인 하세가와(Hasegawa) 백작은 며칠 전 일본으로 떠났고, 신문 기사에 의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도쿄 당국이 개혁을 논의하고 있으며 군국주의 당파와 더 자유주의적인 당파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군국주의자들은 식민지에 군사 정부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고, 자신들이 그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면 영향력이 약화될 것임을 아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일본 국내에서 보도하도록 허용할 정도로 강한 정부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인들과 일본의 지식인들은 그러한 불법 행위를 보도한 재팬 어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고베 크로니클(Kobe Chronicle)에 대단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조선의 외국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영사 대리인들이 현재의 사건들을 맡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제라드(Gerard) 대사와 함께 일했던 미국 총영사 베르그홀즈(Bergholz) 씨는 매우 잘 대처했으며, 미국 영사인 커티스(Curtice) 씨는 훌륭하게 지원을 했습니다. 약 두 달 전 우리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38건의 총상을 다룰 때 베르그홀즈(Bergholz) 씨는 직접 병원에 와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영국 총영사인 로이즈(Royds) 씨도 훌륭하게 대처해 주었습니다. 그는 오늘 아침 병원에 직접 와서 구타 환자들을 보았습니다. 영국 선교사인 존 토머스(John Thomas) 목사가 서울 남쪽에서 일본인 헌병대에게 습격을 당한 일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영국 총영사는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했고, 정부에서는 처음으로 5천 엔을 지급했습니다. 로이즈(Royds) 씨는 군인이나 다른 정부 직원들이 불태운 캐나다 선교회와 관련된 교회에 대해서도 정부로부터 보상을 보장받았습니다.안녕히 계십시오.

    195 미국 기독교 교회연방회의(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선전국(Publicity Service)

    작성일: 1919-08-18작성처: 미국 기독교 교회연방회의(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선전국(Publicity Service) 작성처: 국장 제스퍼 T. 모제스(Jaster T. Moses)일본 정치가들과 언론, 조선에서 잔혹 행위가 아직도 거의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비난미국 기독교 교회연방회의(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산하 동양위원회(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 사무관 시드니 굴릭(Sidney L. Gulick) 목사에 따르면 일본의 최근 신문 보도 및 통신에서 조선에 대한 희망적인 전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7월 10일 하라(Hara) 수상이 이 위원회에 보낸 전보에도 나온 바와 같이 철저한 행정적 개혁을 수행하기로 한 하라(Hara) 내각의 결정은 진행 중이다. 일본 추밀원(樞密院, Privy Council)에서는 하라(Hara) 수상의 제안을 오랫동안 신중히 고찰했다. 군국주의자들로부터 굉장한 반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에 새로운 민정 행정을 적용하기 위한 하라(Hara) 수상의 계획이 상당 부분 받아들여졌다고 대중들에게 단언할 정도로 많은 부분이 진행되었다.그러나 이 사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일본 언론들이 훨씬 자유롭게 조선 내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군대의 검열이 사라졌고, 사실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며, 중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건전한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비극이 벌어진 진정한 원인은 합방 이래로 조선이 군대의 정신과 방식으로 통치되었기 때문이라는 데 실제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것이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조선에서는 사람들의 정치적 집회가 금지되어 있지만, 조선인들은 물론이고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도 군대의 체제를 없애라고 한 목소리로 요구하고 있다.동경의 양대 신문, 지지(Jiji)와 아사히(Asahi)는 7월 중 2주일에 걸쳐 시리즈 기사를 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며 ‘현(現) 체제의 문제점을 집중 분석’하는 기사이다. 다른 것보다도 자주 언급되는 사실은, 일본인들에게는 상황이 숨겨지고 있지만 외국인들은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다음 총독이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논의가 진행 중인데,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몇몇 인사들 가운데에는 최근 미국에서 몇 주간 머물다 현재는 영국에 가 있는 고토(Goto) 남작도 포함되어 있다.개혁이 요구되는 이유 중에는 일본이 외국인들에 대해 공정한 대우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서구에서 형성될 반대 의견도 포함된다. 조선은 일본이 중국을 책임질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시험 장소와도 같다. 시국에 대한 놀랄 만한 발언은 오쿠마(Marquis Okuma) 후작 내각에서 외무상을 맡았던 가토(Kato) 남작이 조선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하라(Hara) 내각을 불신하고 당황시키기 위해 다른 문제들 중에서도 조선의 상황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로 인해 이 발언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이 일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이것은 놀랄 만한 선언이다.(함께 첨부된 서울 주재 선교사의 서신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조선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조선에서는 사법 재판이 벌어지고 있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처벌 없이 풀려났지만, 다른 사람들은 매우 혹독한 처벌을 받고 있다. 대나무 몽둥이로 하루 30대씩 사흘간 계속해서 90대를 때리는 것은 자주 있는 처벌이다. 체벌을 받은 희생자 가운데에는 체벌 결과로 죽은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문명국이라고 주장하는 나라가 그런 처벌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을 일본의 여론이 곧 알게 되기를 바란다.

    196 북미 한국 교회위원회(The Korean Church Council of North America)

    발신일: 1919-03-22발신자: 북미 한국 교회위원회(The Korean Church Council of North America)발신주소: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주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교우 여러분,이제 여러분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그리고 인류애의 이름 아래 한국에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드릴 때입니다.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이 한일 합방 이후로 기독교인들을 매우 심하게 박해해 왔으며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근절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증거는 충분합니다. 최근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참여를 했고, 일본군들은 투르크인들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혹은 독일인들이 벨기에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선인들을 아주 잔혹하고 잔인하게 다루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을 체포했습니다(보도에 따르면 4만 명이 체포되어 일본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교인들은 무자비한 일본군과 정치가들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일본군들은 기독교인들을 거리로 끌고 나와 그들을 고문하고 심지어 나무 십자가에 묶어 두고 “너희 아버지(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졌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까지 함으로써 자신들의 잔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은 조선 독립 시위에 참여했던 어린 소녀가 한 손에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칼로 소녀의 손목을 잘라 버렸습니다. 그 소녀가 남은 손을 들자 일본군은 그 손마저 잘라 버렸습니다. 그와 같은 잔학 무도한 행위가 조선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으며, 일본군에 대항해 싸우거나 저항하지 않는데도, 무력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에게까지 가차없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릅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형제애 정신으로 이 어려운 시기가 빨리 지나가고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살아 남아 평화와 안식 속에서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를 숭배하게 되기를, 또 아버지의 세상이 오고, 조선이 다시 합병 전에 누리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우리 교인들을 위해 함께 기도를 해주십시오.이 나라의 교인들은 고통받는 조선인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기 위해 매일 몇 시간을 따로 할애해 왔고, 이제는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3월 30일에서 4월 6일까지 한 주일을 특별한 기도주간으로 지킬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 주간에는 우리 조선의 교인들을 특별히 기억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한국과 독립운동의 전개에 대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모든 통신은 회장님 앞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재배(再拜)사무관 S. K. 한(S. K. Hahn)회장 B. H. 민(B. H. Min)1919년 3월 22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추신로스앤젤레스의 조선인 복음선교(Korean Evangelical Mission)를 맡은 미국인 목사로서, 저는 앞서 말한 내용과 요청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많은 우리 개신 교회들이 3월 30일에서 4월 6일까지 일주일에 걸쳐 이 문제를 예배 주제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의 고통을 함께 하며,배상(拜上)오거스투스 프리차드(Augustus B. Prichard)

    197 제스퍼 모제스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16발신자: 수신자: 제스퍼 모제스(Jasper T. Moses) 목사수신주소: 뉴욕 이스트 22번 가 105번지제스퍼 모제스(Jasper T. Moses) 목사님께||한국 관련 정보의 발표와 관련하여 우리 위원회 회원들에게 제가 어제 보낸 편지를 동봉합니다. 우탄(Wootan) 씨는 제게 동양위원회(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에 대해 헤럴드(Herald) 지에 보도된 비난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헤럴드측에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탄(Wootan) 씨는 또 위원회 자료가 이번에 굴릭(Dr. Gulick) 박사님으로부터 나오게 되어 있었음을 자신은 몰랐으며|| 한국 관련 정보의 발표에 대해 위원회 이사회에 가해졌던 제한이 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도 했습니다.목사님과 굴릭(Gulick) 박사님이 우탄(Wootan) 씨를 만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우탄(Wootan) 씨는 여러 모로 도움이 되고 싶어하며||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배상(拜上)추신 필라델피아 레이스 스트리트(Race St.) 15번지의 W. J. 램프스(W. J. Lamps) 목사님께 보내고 있는 한국에 대한 자료를 한 부 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 자료는 팸플릿 형식으로 발행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목사님이 발송하고 있는 판형으로 한두 부를 더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8 로버트 스피어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14발신자: 제스퍼 모제스(Jasper T. Moses)수신자: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수신주소: 뉴욕 주 뉴욕 시 5번 가 156번지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 박사님||언론에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하려는 새시대 운동(New Era Movement)측의 움직임은 특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굴릭(Gulick) 박사님과 제가 한국 문제를 널리 알리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우탄(Wootan) 씨와 상의해 보았는데|| 그는 우리가 이번 달에 그 문제를 발표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헤럴드에 난 기사의 서두에 동양위원회(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가 한국 관련 이야기를 보류한 점에 대한 비난이 포함되어 있기에 특이한 경우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탄(Wootan) 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면 그 기사에는 거의 신뢰할 수 없을 것이 뻔합니다.저는 우탄(Wootan) 씨가 표리부동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기에 이 뉴스 기사가 다른 출처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라면 더 없이 다행으로 여길 것입니다.배상(拜上)제스퍼 모제스(Jasper T. Moses)

    199 미국 장로교회 해외 선교위원회 회원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14발신자: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수신자: 미국 장로교회 해외 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수신주소: 뉴욕 5번 가 156번지위원회 회원들께여러분,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일요일 조간과 토요일 석간 신문에 ‘미국 장로교회 본부에서’ 대중에게 밝혔다는 취지 하에 ‘조선의 참사, 일본의 책임’이라는 긴 기사가 헤드라인으로 실렸습니다. 이것은 해외선교위원회 사무국에서 보낸 것이 아닙니다. 뉴욕 타임스에 문의해 본 결과 이 자료는 연합신문(Associated Press)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며, 연합신문측에서는 새시대 운동(New Era Movement) 홍보부에서 자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제가 새시대 운동의 클락(Clark) 씨와 우탄(Wotan) 씨와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저는 우선 조선에 관한 장로교회측의 태도나 감정을 언급하는 자료는 해외선교위원회의 확인을 받아야 하며, 둘째로 이 발언이 오늘 발송된 동양위원회 발표의 효과를 약화시키고 혼란시키기에 딱 적절한 시기에 나왔다는 점, 셋째로 그 발언이 균형 잡히고 분별력이 있는 효과적인 표현이 아니었으며, 넷째로 그런 정보에 대해 장로교회와 선교사들이 책임을 지게 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해서 이같은 발언에 대해 항의를 하고, 전 기독교를 대신해서 우리가 처음부터 열심히 노력해 왔다는 점을 주장했습니다.클락(Clark) 씨와 우탄(Wootan) 씨는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동양위원회의 성명서를 게재함은 물론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습니다.동양위원회가 매우 신중하게 준비해 발표하려는 성명서는 거의 40면에 달하는 상당량의 자료로 매우 주의 깊고 적절하게 준비되었지만 동시에 단호하고 솔직한 내용입니다.배상(拜上)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

    200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공포 통치

    공포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으로의 여행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국 이야기와, 자유를 얻기 위한 한국인들의 투쟁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인구 1천6백만 명의 작은 나라로서 전혀 무장도 하지 않고 외부 세계와의 소통도 없이, 5대 열강 가운데 하나로 규모는 작지만 독일의 군사력에 준(准)하는 효율성과 형식을 지닌 일본이라는 적에 맞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해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실로 “윌슨(Wilson)은 독일을 처치했지만 독일의 자식인 일본은 아직 처치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지금까지 3개월 동안 한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생소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전혀 무기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한국의 적인 일본은 완전무장을 갖추고 있다. 이 작은 반도국에 군대와 헌병대, 경찰이라는 세 가지 다른 방위 체제가 갖추어져 있으며,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무서운 스파이 체제가 있다는 것이다.3월 1일 한국인들은 10년의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어,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한국으로서는 얼마나 굉장한 날이었던가, 그들은 이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0년 동안 한 번도 내뱉지 못하다가 어느 날 당신의 동료들과 이웃들이 모두 나와 압제자들의 귀에 대고 목청껏 만세를 외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고, 가혹한 군국주의는 그 같은 수치스러운 일이 오래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3월 1일 하루 동안만도 수많은 이들이 살해되고 쓰러졌으며, 수백 명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이미 물꼬는 트였고, 이후로 몇 주 동안 전국의 모든 단체들이 자기 몫의 저항을 했고, 이제 이 나라는 하나로 뭉쳐 새로운 한국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하나의 목적, 하나의 감정, 하나의 고통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거지들은 행진을 했고, 간호사들도 행진을 했다. 상점 주인들은 가게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시위를 했다. 농부들은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시장에 모였다. 상류 인사들은 상당수가 이미 일본 침입자들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매수당했기에 당연히 가장 나중에 움직였지만, 그들도 “자신들도 국민들과 함께 했다”고 강대국들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군국주의는 이같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이 반역이고 동조자들은 반역자이며, 맨 손으로 자유를 갈구하는 한 나라가 폭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군국주의는 이해를 못 할 뿐 아니라 의문을 품지도 않는다. 그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한 가지 대응밖에 하지 않는다. 그래서 희생자들의 목에 야만적인 폭력과 칼, 총검, 총, 군화 뒷굽을 들이댈 뿐이다. 결국 한국도 3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벨기에가 당했던 고통을 그대로 겪었으며, 투르크라는 야만적인 적들로부터 아르메니아가 당했던 대학살을 당했다. 이 무력한 영혼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앞으로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일본인 중위의 명령으로 한 곳에서 23명의 사람들이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마을 부근에서는 한 가족의 세 아들과 세 손자가 끈으로 묶여서 산허리를 따라 수 미터를 끌려 다닌 끝에 총검으로 찔려 거의 도살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늙은 할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자기 아이들만은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눈이 뒤집힌 군인들이 노인의 호소를 듣고 살육을 멈출 리는 만무했다. 노인은 차라리 자신도 아들들과 함께 죽여 달라고 말했지만 공포 통치를 일삼는 이들의 계획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백발을 하고 노려보는 노인은 그토록 작은 마을에서 아무도 다시는 만세를 외치지 못하게 할 가장 좋은 광고가 되는 것이다.그러나 나는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내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동안 나의 여행 이야기를 여러분께 전해야 하겠다.농부 이야기우리는 T-로 가는 기차를 탔고, 거기서부터 약 12마일은 시골을 가로질러 자전거를 타고 갔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요즘의 상황을 잘 알기 위해서는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나는 동료보다 조금 앞서서 가고 있었는데, 황소 한 마리 옆을 지날 때 이 불쌍한 소는 자전거라는 이상한 물건을 보고 놀라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소를 몰던 사람은 “워, 워!” 하고 외치며 뛰어갔지만 결국 소를 따라잡기를 포기했다. 내가 문제를 일으켜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 사람은 “소가 알아서 집으로 갈 것이니 걱정 마세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길가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었는데, 그는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아, 외국 신사 분께서 여길 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예요.”그리고는 “선생님, 정말 끔찍합니다. 우리 가족만도 세 명이 살해를 당했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강으로 내려갈 테니 강둑 뒤쯤에서 만나 모든 걸 얘기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전거를 타고 계속 가서 강에 도착했을 때 폭풍으로 다리가 끊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친구와 내가 어떻게 하면 강을 건너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체구가 작은 남자가 왔다. 그는 “옷을 벗지 마세요. 제가 강을 건네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신세를 너무나 많이 지고 있으니, 제가 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승낙하고 그 사람 어깨에 올라탔고, 그가 나를 옮겨 반대편에 안전하게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다시 건너가서 내 친구에게 제발 자기가 옮겨다 주게 해달라고 또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내 친구가 거절하자 그는 내 자전거를 가지고 다시 왔다.나는 앉으면서 “자 이제 빨리 여러분 이야기를 해주세요”라고 재촉했다.“우리가 T- 읍내에서 독립 시위를 한 날 저희 형제 둘과 아저씨가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우리에겐 무기라고는 작대기나 돌도 없었고 그냥 맨손이었지만 시장에서부터 ‘대한독립만세’,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군인들은 경고 한마디 없이 우리에게 달려와서 무조건 총을 쏴대기 시작했습니다. 오른쪽, 왼쪽에서 쏴대면서 총검과 칼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도 가장 끔찍한 일은 우리가 도망을 갈 때 일어났습니다. 다섯 명의 남자가 우리를 따라 와서는 집에 화재가 났을 때 벽을 무너뜨리는 그 갈고리 모양의 긴 장대로 우리를 잡았습니다. 그때 생긴 상처만 해도 심했습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거두기 위해 멈출 겨를도 없이 무조건 도망을 쳤습니다. 나중에 시체를 치울 수 있게 되었는데, 그날 죽은 사람만 거의 80명이나 되었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겨우 집까지 기어오거나 사람들에 의해 옮겨졌지만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말 좀 해보세요. 그들이 우리 모두를 죽일 거라고 보시나요? 그들이 어떻게 할까요? 어쨌든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군인들이 언제쯤이면 물러갈까요? 우리가 결국 독립을 하게 될 거라고 보시나요? 평화협상(Peace Conference)이란 걸 그들은 모르는 건가요?”나도 그 사람보다 더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그 사람의 질문에 전혀 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이런 일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을 거라며,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들이 이 모든 고통과 범죄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일본에게 한국에 더 많은 자유를 주도록 요구하게 될지도 모르니 희망을 가지라고 말했다. 그때 저쪽에서 망을 보고 있던 내 동료가, 아직 멀긴 하지만 헌병대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는 걸 보았다. 우리는 서둘러 이별을 고했다.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할 수 있다면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을 겁니다”였다.그 헌병이 와서 약간 권위적으로 내가 누구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을 물었다. 그는 계속 우리를 따라 왔지만 몇 마일 가다가 우리가 교차로에서 길을 잘못 들어 헤어져 버리고 말았다.우리는 멋진 교회와 학교가 다 타 버린 O-라는 동네로 가고 있었다. 그 학교는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학교였다. 전체 학교가 한국의 기독교인들 소유로 교인들이 돈을 모아 전국민들이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최고의 학교를 세워서 운영하고 있던 학교였다. 교사들도 일본에서 서구 사람들처럼 철저하게 제대로 훈련받은 최고였다. 그러나 창설자와 교사들은 모두 ‘애국자들’, 즉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 마음을 두고 있어야 했기에 이곳은 불운한 곳이 되었다.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O-에 있는 학교가 다시 문 열었니, 아니면 시위 때문에 아직 닫혀 있니?”라고 물었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는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무슨 말이니?”라고 물으면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학교는 다 타서 없어졌어요.” “학교가 어떻게 해서 불탔니?”라고 물으면 두 가지 대답이 나왔다. “일본군들이 태웠다”거나 아니면 “저는 몰라요”라는 대답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일본군들이 그토록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대답했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든 애들은 그런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겁먹은 얼굴로 “잘 모르겠어요. 밤에 일어난 일이거든요”라고 답했고, 더 물어 보면 “잘은 모르지만 한국인들이 한 짓은 아니에요”라고 했다. 일본군들이 했느냐고 물으면 “우린 몰라요. 어떤 사람들이 그러는데 일본군들이 그랬대요”라고 했고, “한국인들이 학교랑 교회를 불 태웠니?”라고 물으면 한결같이 아니라고 했다.그곳에 도착해서 기숙사로 가 보니 황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입구에 멋지게 세워져 있던 종탑은 쓰러져 있었고, 종은 간데 없이 사라졌으며, 아마도 값어치 나가는 것이라면 모두 챙겨 간 군인들이 가져간 것 같았다.안뜰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부서진 오르간, 창세기 표지, 모자, 신발 몇 켤레 등이 뒹굴고, 유리창은 모두 깨지고 문은 뜯겨져 있었으며, 틈새에서는 벌써 풀이 자라나고 있었다. 무자비한 파괴자들이 훼손하고 부순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음산해 보였다. 나는 성서 한 면이 찢겨 있는 것을 보고 집어 올렸는데, 누군가 그 신성한 종이 조각을 손수건으로 사용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그날 본 이런 증오스러운 짓을 한 것이 일본군들이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일본인들은 종이를 손수건으로 곧잘 쓰곤 하지만, 한국인들은 절대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 몇 명이 학교 운동장 터로 몰래 들어왔다. 두 아이들은 겁에 질려서 계속 마을 쪽으로 난 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도 화재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는 주변 이웃들이나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들은 자기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모두들 집안에 있으라고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어림짐작을 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무서운 짓을 한 것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밖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그런 비겁한 대답에 대해 다그치자 그 아이들은 슬쩍 가서는 자기들 생각에 이야기를 해줄 것 같은 사람을 데려왔다. 문 옆에 서서 바깥 상황을 내다 볼 수 있었다는 그 남자는 내가 알고 싶어하던 것들을 터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사람들이 전부 사력을 다해서 도망쳤는데, 나는 곧 그들이 길 저 아래에 첩자일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얼굴에 비쳤던 공포와 그 불타 버린 학교 건물로 몰래 숨어 들어오던 불안한 모습, 서로를 초조하게 바라보던 것, 모두들 내게 진실을 말하고 싶어하지만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했던 그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 정도의 젊은 청년들이 멀리서 코트와 양복바지를 입고 커다란 막대기를 든 남자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모두들 달아나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나는 이 첩자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사악하고 비열하며 교활하고 잔인해 보였으며, 언제든 다른 사람의 등에 비수를 꼽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 역시 내게 그 건물들을 불태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했고, 모든 일이 유감스러울 뿐이며 정부에서도 사실을 알아내려고 노력중이라고 했다.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하고 그가 갔을 때, 나는 길모퉁이를 돌아서 근처 농가의 안마당에서 한 여자가 문 옆으로 내다보는 것을 보았다. 동료가 내게 말해 준 바에 따르면 그 여자는 아주 좋은 사람으로 남편이 교회에서 장로를 맡고 있었는데, 남편은 매를 맞고 체포되었고 차마 사랑하던 가족과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남편과 가족들은 모두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었다. 대담하게도 그에게 말을 걸다가 매를 맞은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내 동료에게 내가 가서 말을 한두 마디 걸어 보아야겠다고, 아무도 보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참으라고 했지만, 나는 위로의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떠날 수는 없었고, 첩자도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집으로 갔고, 그 여자는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날 맞으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둘러 집으로 달아났다. 나는 재빨리 쫓아가서, 그 여자의 흰 치맛자락이 서너 개의 작은 방을 지나 마지막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계속 쫓아가서 문을 열어 보니, 그 여자는 구석에 쪼그리고 있었다. 내 결심을 확인한 그 여자는 나와서 인사를 하고 “이렇게 도망친 것을 용서해 주세요. 저도 너무나 부끄럽지만, 우리는 정말 너무도 무섭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그 여자는 너무 걱정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 너무도 많은 사람이 매를 맞고 체포되었고 학교와 교회는 불에 타 버렸다며, 이제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최악의 상황은 이제 끝났을 거라고 말하고, 언젠가는 그녀가 믿는 공정한 신께서 이 모든 잘못을 바로잡아 주실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화재와 공포스런 통치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고, 누군가 자신이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본다면 또 매를 맞게 될 것이 너무도 무섭다면서 이제 그만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곳을 떠났지만, 여자와 어린아이들, 그런 순진한 사람들을 잔인한 군인들의 수중에 남겨 두고 오는 것은 정말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다.내 친구가 알기로 그 큰 마을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멀리서 우리를 본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그쪽으로 가기도 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나는 그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겁에 질려 있는지를 훨씬 더 소상히 말하고 싶지만, 그러려면 글이 너무도 길어질 것이다. 우리는 T-로 돌아갔고, 가는 길에 머리에 커다란 짐을 지고 있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그 할머니는 “선생님이 지난번 오셨다 가신 후로 헌병대들이 사람들을 때렸지요. 그래서 제가 원래 약속하셨던 일요일에 여기 오지 마시라고 쪽지를 보낸 겁니다. 일요일에 오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제가 저희 집에서 몇몇 사람들이랑 조그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헌병대가 와서 나를 잡아갔고, 매를 때렸죠. 그들은 내가 감히 그런 일을 다시 벌이면 한 사람을 체포해서 죽이겠다고 했어요. 전 너무나 두려워서 그날 밤 바로 짐을 꾸려서 이렇게 시골을 배회하고 있답니다. 마을에서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하루나 이틀씩 머물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빛나는 얼굴로 “목사님께 평화를”이라고 하고 내게로 돌아서서 “친구에게 평화를!”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떤 집 뒤에 숨어서 짧은 대화를 나눴지만, 그녀는 자신이 외국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누군가 보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나는 친구에게 그녀에 대해 물었다. 친구는 그녀가 한국 최초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기 교구에서 가장 신실한 신자라고 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어디를 가든 찬송까지는 못해도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 소규모의 예배 집회를 가졌다고 했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5천 달러를 모아서 커다란 교회를 짓고 있을 때 그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떤 사내들보다도 더 열심히 일을 했다. 그녀는 또 직접 자기 몫으로 25달러를 빌려 오기도 했다. 이제 그 교회는 모두 먼지와 재로 돌아갔고, 그녀는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방랑하고 있었다. T-에 도착해서 우리는 또 하나의 훌륭한 건물이 폐허로 변한 곳을 둘러보았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우리를 보러 나와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들 감옥에서 죽음이나 구타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6, 700명의 회합이 있었지만 내 동료가 그 폐허에 대해 설교를 했을 때 모였던 사람은 수백 명 가운데 10명에 불과했다. 그 예배가 끝난 후 이들 대부분은 구타를 당했다.이제는 글을 마쳐야 될 시간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 ‘공포스런 통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를 했는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들 무력한 수백만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잔인하고 무서운 군국주의가 동서양 모두에서 사라지고 그 희생자들이 해방되어 다시 한 번 평화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기원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