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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41 채인환

    채인환(Chey In Whan)재령(Chairyung)에 거주하며 지방 교회의 원로이다. 그는 재령(Chairyung) 서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이 지역을 찾을 때 자주 묵는 한 숙박업소의 주인이다. 3월 9일 재령(Chairyung)에서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그는 그날 몸이 좋지 않아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그래서 시위와 연관된 행동은 전혀 없었으며, 그 집안에 있던 사람 누구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이 집에 들어와 그의 머리를 검으로 (검집 속에 넣은 채) 내려치고, 검 등으로 구타했다. 그 결과 그는 2주일 동안 다리를 절어야 했다. 그는 체포되어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곳에서 취조를 받기 전에 그는 얼굴과 머리를 구타당했으며, 두꺼운 신발로 옆구리를 채이고,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이것은 모두 취조받기 전의 일이었다. 마침내 그의 재판이 끝나 그는 잠시 동안 석방되었으나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불려 갔고, 결국에는 무죄로 풀려났다. 이경운(Yi Kyeng Oon)그녀는 차동골(Cha Dong Kol)에 거주하는 스물두 살의 여성으로 아이 한 명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운칠귀(Oon-Chil-Kui) 마을의 소학교 교사이다. 4월 5일 집에서 조금 떨어진 운파(Oon-Pah)라는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남편은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나 그녀 자신은 이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고 집에 머물러 있었다. 4월 5일 몇 명의 경관들이 집으로 와서 집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물었다. 대답을 들은 그들은 집을 수색하겠다고 말했고, 그녀는 허락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녀에게 태극기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태극기는 알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녀를 수색하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저항했으나 그들은 계속 요구했다. 그러고는 간부 한 명이 막대기와 손으로 그녀를 구타했다. 그녀가 마루에 넘어지자 그는 발로 그녀의 머리를 찼으며,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계속 구타했다. 그는 태극기를 발견하지 못한 것에 실망한 듯 했다. 그는 예순세 살인 그녀의 삼촌도 구타해, 그의 얼굴을 발로 찼다. 이후 그들은 그녀를 운파(Oon-Pah)에 있는 경찰서로 데려갔다. 그녀는 그날 밤을 한 한국인 집에서 보내고, 다음날 다시 소환되었다. 그녀는 태극기와 그녀의 남편의 시위 사실에 대하여 취조당했다. 그녀는 그런 깃발을 만들었다는 남편 소식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날 해질 무렵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김문완(Kim Moon Wan)수왕동(Su Wang Dong)에 거주한다. 4월 7일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재령(Chairyung)으로 들어왔다. 그는 남쪽의 산으로 올라가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산꼭대기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저항은 없었다. 감금된 뒤 곤봉으로 머리를 구타당했다. 군인이 그의 머리 한쪽에 총을 겨누고 세 방을 쏘았다. 그는 정신을 잃었으며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밤새도록 경찰서에 억류되었고 다음날 아침 병원에 후송되었다. 그는 머리에 세 군데 중상을 입었으며, 한 곳은 총검으로 입은 상처로 추정되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 남자는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백봉인(Pak Pong In)통아리(Tongari) 마을에 거주하며, 재령(Chairyung)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들어왔다. 도시의 서쪽 숲에서 모여 있던 군중에 가담했다. 군인 한 명이 그에게 발포했고, 그는 기절해 정신을 잃었다. 이런 상태에서 총검으로 둔부를 찔렸다. 군중들은 폭력을 행사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만세’를 외쳤을 뿐이다. 그는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백채숙(Pak Chai Sook)재령(Chairyung)에 거주하는 기독교인이며 교회 지부를 이끌고 있다. 4월 7일 저녁, 집안에 머물고 있던 그는 시위대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총소리와 사람들이 구타당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러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밤 10시쯤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자정이 막 지났을 무렵 경관 한 명이 하인들이 머물고 있는 사랑채로 들어와 주인이 집에 있는지 물었다. 하인들이 주인은 안채에 있다고 대답하자 경관은 안채로 들어와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고 머리와 어깨에 주먹을 퍼부었다. 백(Pak) 씨가 때리는 이유를 묻자 경관은 “당신이 알잖아, 당신이 알잖아”라고 말하며, 계속 구타했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하인들이 이를 말리려 뛰어들어 그를 구출해서 사랑채로 옮겼다. 경관은 그를 밖으로 나오게 한 후 경찰서로 끌고 갔다. 경찰서장에게 불려 간 그는 자신은 무고하다고 주장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곧 그는 많은 경관과 조수들이 있는 방으로 불려 갔다. 그는 자신이 이런 가혹 행위를 받는 이유를 물었으며, 자신은 그저 ‘국수’를 파는 상인일 뿐이며, 집에서 자고 있었을 뿐이라 주장했다. 그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자 경관들은 “바닥에 피가 흐르니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는 문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그 앞에서 약 20분간 있었으며, 자신이 이런 상태인데도 그냥 놔두며 괴롭혔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시 자신을 구타했던 그 경관에게 불려 가 옷이 온통 피에 범벅이 된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경관은 이 남자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라고 조수에게 명령했다. 조수는 그에게 피를 닦을 것이 있는지 물었고, 그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재차 그가 가혹 행위를 당하는 이유를 물었으나 그 조수는 대답이 없었다. 조수는 그를 풀어 주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갔다. 김옥선(KIm Yok Syen)그녀는 쉰 살의 과부이다. 그의 아들 강숭우(Kan Soong Oo)는 세브란스 의과 대학생이다. 그녀는 전도사였으며, 여자 소학교의 교사였다. 그녀는 4월 3일의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시위에서는 경찰에 대한 어떠한 폭력이나 저항도 없었으며, 단지 국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을 뿐이다. 경찰들이 달려와 약 50여 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였고, 그녀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지방 경찰서에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얼굴에 구타를 당하고 손이 비틀렸다. 그리고 포승에 묶인 채 사리원(Sa-ri-won)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쇠사슬로 묶인 채 구금되었다. 그날 한밤중에 경찰서장과 또 다른 일본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서장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가 사람들을 구타할 때 사용하는 막대기로 그녀의 얼굴을 쳤다. 그러고는 그녀가 확실히 기독교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신의 이름을 불렀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머리를 연달아 구타했다. 그녀가 기도하는 모습을 본 서장은 “신은 당신을 구할 수 없나 보지?”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의 칼을 꺼내 그녀의 가슴 아래쪽을 겨누며 “왜 그런 저열한 말을 하는가?”라고 말했다(신에 기도를 드리는 것은 천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 주셨으며, 그에게 기도드리는 것은 악마의 행동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옆구리를 칼로 겨누며 그녀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그녀를 죽여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옆에 있던 한국인 경관에게 항의하자 그는 서장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그러자 서장은 부삽을 들고 그녀의 몸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발로 차고 몸 위에 올라섰다(그녀는 바닥에 넘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다시 그 한국인 경관에게 술에 취한 서장을 떨어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그녀를 체포당한 수많은 남성들이 모여 있는 바깥으로 데려갔다. 다음날 새벽에 그는 다시 경찰서로 불려 들어갔으며, 4월 7일까지 그곳에 구금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의사에게 보내 달라고 서장에게 요구했다. 그녀의 얼굴은 부풀어올랐고 어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은 네 명의 손자를 돌보고 있으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 아이들은 죽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서장은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계속 항의를 하자 마침내 그는 그녀에게 뜨거운 물과 수건을 주었다. 다음날 저녁 그녀는 취조를 받았다. 취조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세 명의 경관들에게 조사를 받았고, 매번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녀가 기독교인이냐는 질문이었다. 마지막에 그들은 그녀에게 왜 그런 천한 교리를 따르느냐고 물으면서 앞으로 더 이상 ‘만세’를 부르지 말라는 등의 훈계를 하였다. 이때가 4월 7일 저녁이었고, 다음날 그녀는 재령(Chairyung)의 병원으로 갔다.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녀는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피멍이 들었다.

    142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28발신주소: 한국 재령친구들에게,한국에 큰 소란이 있었다는 소식은 신문지상을 통해 읽었을 거라 확신하지만, 그래도 혼란의 소용돌이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목격한 내게서 자세한 소식을 듣고 싶을 거라 생각하네.우리가 지난 9월 휴가를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한국은 그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평온한 곳으로 보였네. 하지만 곧이어 한국에 돌풍이 몰아닥쳤고, 끔찍했던 지난 4년 반 동안 신문에서 본 대로 그러한 상황 속에 처해 있다네. 자네들도 알겠지만 일본은 1910년 한국을 병합하는 마지막 조치를 취했고, 그렇게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여 한국 땅이 일본 제국의 영토에 속하게 되지 않았나.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시시콜콜하게 말할 수야 없겠지만, 병합 결과 한국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일본이 한국 땅에 들어와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는 말해야겠네. 한국인들 가운데 일본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기운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로도 내 목적은 다한 거나 다름없겠지. 이 한국인들은 일본의 압제하에 핍박받으며 살아왔다네. 그러다가 끝내는 당장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지. 각기 다른 지역에 있던 33인의 한국인들이 3월 1일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모여 일본의 통치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염원을 담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이런 분위기는 정점에 달했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공포되었고, 이에 호응하듯 한국 전역에서 시위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 그 동안 전국 곳곳에서 준비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네.시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네. 한국인들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네. 한국인들은 무기도 없었으니 방어할 힘도 없었고, 총독부에 감히 저항하겠다는 뜻도 없었지.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비폭력을 지향했고, 타인의 기물을 파괴하지도 않았다네. 그들은 일본 경관에 붙들려 감옥에 갇힐 때에도 저항하지 않았다네. 그들이 자신들의 원칙을 지켜 나간 모습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네. 사실을 알려고만 들었다면 금방 확인이 되었을 거라 믿네. 시위자 가운데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네. 무자비한 경찰과 군인들의 횡포로 시위자들이 극단적인 절망 상태에 빠져들다 보니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한 사례가 있긴 했지만, 규모를 갖춘 장소가 거의 없었을 뿐더러 그런 데에서는 시위가 단 한 건도 없었고 지난 8주 동안 볼 때 고작 몇 군데에서 여러 차례 시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폭력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걸세. 한국인들의 이런 시위는 무장도 하지 않은 양민들이 일본을 비롯해 전세계에 자국민이 처한 운명에 대한 불만을 알리고자 목소리를 낸 것에 불과하다네. 그래서 한국이 독립된 민족이자 독립 국가의 운명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탄원을 한 셈이지.총독부가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지 있지도 않을 테지. 우리가 정치판에 끼여들려고 여기 한국에 와 있는 것도 아니니, 그 문제가 전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로 남아 있었다면 굳이 어느 한쪽에 편파적으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을 걸세. 하지만 한국인의 탄원은 단순히 정치적인 범위를 벗어나 인도주의의 문제였네. 비인도적 행위와 잔인성에 맞선 한국인의 무저항 비폭력 이야기라면 그보다 중립적일 수는 없을걸세. 총독부는 이처럼 평화로운 시위에 대해 처음부터 무자비한 공격 태세를 갖추었네. 그리하여 말 그대로 공포 정치가 실시되었고, 한국인들을 협박하고 위협했지. 한국인 가운데 알고 지내는 중년의 학식 있는 사람들이 몇 있네. 이들은 당시까지 시위에 참여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일본 경찰한테 두들겨 맞았네. 자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이곳에서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날이면 날마다 구타가 벌어진다네. 무고한 사람들을 판자에 묶고는 벌거벗기고 까무러칠 때까지 몽둥이로 매질을 한다네. 의식을 잃으면 찬물을 들이붓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매질을 시작한다네. 그런 식으로 매질을 계속한다네.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그렇게 매질을 당하다가 팔다리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다네. 남자고 여자고 어린 아이고 할 것 없이 총대를 맞고 총검에 찔린다네. 일본인들은 교회만 골라 분노를 터뜨리기 일쑤고, 기독교 교인에게는 특히 박해가 심하다네. 어떤 곳은 교회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네. 딱 한 군데만 그랬지만 어떤 지역은 15개 마을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기도 했지. 그리고 잿더미로 변한 이런 마을들 가운데 한곳에서는 36명의 남자들을 교회 건물에 몰아넣고 총살한 사건도 있었다네. 그런 다음 교회에 불을 질렀는데, 창문으로 빠져나가려던 부상당한 양민들을 군도(軍刀)로 찔러 댔다지 뭔가.한국인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네들은 우리가 보기에 기적이나 다름없네. 여기 한국에 와 있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아 한국인들이 뛰어난 민족임을 알게 된 우리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네. 한국인들의 자제력, 불굴의 용기, 인내, 용감함은 어느 민족도 보여줄 수 없을걸세. 미국인인 나는 어릴 적 1876년의 독립정신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여기 타국에 와서 그 정신을 보았다네. 그것도 피부색이 황색인 한국인들에게서 말일세. 요즘엔 “한국인이 자랑스럽다”라고 말하는 외국인이 한두 명이 아니라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우리도 모르지만 총독부는 한국 땅에서 평화 비슷한 거라도 되찾을 의사는 없는 것 같아 보이네.나라 밖으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 한국 땅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거짓으로 퍼뜨리는 데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네. 이렇게 쓰는 편지는 외국으로 가는 보통 우편 속에 끼여 나가지는 않을 걸세. 편지 사본을 여러 부 만들어서 친분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보낼 생각이라네. 그러니 자네들에게 부탁하니, 혹시 이 글 내용 가운데 무언가를 공개할 경우가 생긴다면 말일세, 인명이나 지명은 빼 주게나. 이렇게 청하는 이유는 자네들도 짐작하고 남을걸세.

    143 아틀라스(ATLAS) 마이크로필름 서비스(수정판)

    아틀라스(ATLAS) 마이크로필름 서비스수정판

    144 윌리엄 뉴튼 블레어가 보낸 편지

    발신자: 미국 장로교회 해외선교단발신주소: 한국 평양(平壤)그리고 연방 이사회 위원회(Federal Council Commission)에서 책자를 발행하고 있다는 소식에 기쁘더군요. 책자 20부를 확보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무료 책자를 여러 부 보낼 수 없다면 기꺼이 돈을 내고 살 용의가 있습니다.오하스 E. 샤프(Ohas E. Sharp) 목사님께서 편지를 보내어 받아 보았는데, 무척 강한 어조로 씌어져 있더군요. 목사님께서는 한국인의 고통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3월 28일자 소인이 찍힌 이 편지가 등사판으로 인쇄된 것으로 보아 그쪽 사무실에도 한 부가 전달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혹시라도 편지가 가지 않았다면 바로 편지를 보내 드릴 터이니 알려주십시오. 모펫(Moffett) 박사님의 ?사건(incidents)?에 들어 있었던 한국인 소년이 겪은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또한 이 소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영특하고 씩씩한 소년으로 평양(平壤)의 기독교인인 구두닦이 밑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선할 신발이 있나 보러 우리 집에 오곤 했습니다. 에스더 스왈렌(Esther Swallen) 씨가 제 여식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소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늘상 우리 주변을 떠돌던 구두닦이 꼬마 기억하시죠? 일본인들이 그 꼬마 아이를 거의 족치다시피 했답니다. 일본인들 생각으로는 그 아이가 뭔가 알고 있다고 본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다 아는 것을 대라며 고문을 했습니다. 도리스(Miss Doriss) 양은 한국총독부 병원에 그 아이가 입원해 있는 것을 보았답니다. 아이의 온몸에 상처가 났더랍니다. 큼직한 화상 자국도 여럿 있더랍니다. 어제 숙시(Suksie)가 하는 말로는 그 아이는 폐가 부어 올랐는데 그 문제 때문에 아이가 목숨을 건질지 어떨지 알 수 없답니다.”윌리엄 N. 블레어(William N. Blair) 배상

    145 독립운동 관련된 몇 가지 사건

    1. 우리 교파의 브라이언(Dr. Brian) 박사께서 교회 등사판을 사용하여 인쇄물을 인쇄하도록 허락한 혐의로 잡혀갔다. 박사는 온몸이 묶인 상태에서 매질을 당했다. 결국 학생들에게 등사판을 제공했으며, 독립운동을 도와주는 대가로 모우리(Mr. Mowry) 씨의 돈을 받았다고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브라이언(Dr. Brian) 박사는 가로 14피트에 세로 8피트 되는 방에서 7일 동안 6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는 앉거나 누울 수 없어서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식사할 때도 잠을 잘 때에도 서로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 작은 방 안에서 60명의 사람들은 자연적인 모든 욕구에 대해 서로 도움을 준 셈이었다. 16일 동안 감금된 뒤 브라이언(Dr. Brian) 박사는 풀려났고, 혐의도 벗었다.2.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 집에 있다가 붙잡혀서는 20일 동안 경찰서에 잡혀 있었다. 석방될 때 경찰서에 가서 그 학생을 만나 보았는데, 가슴뼈가 앞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가슴을 압박해 숨을 거의 쉬지 못할 때까지 밧줄을 묶고 세게 조인 자리인 듯 어깨와 팔에 벌건 상처가 깊게 나 있었다. 피부가 찢어지거나 출혈이 일어나지 않는 대신 깊은 상처가 나는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종이를 두른 대나무 몽둥이에 어깨며 팔을 하도 맞아서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맞아서 상처가 난 곳을 연이어 며칠을 맞다 보니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척이나 아픈 반응을 보였다. 내가 상처 난 곳에 손가락을 대 보았더니 학생은 아픈 듯 눈을 찡그렸다.학생은 그곳에 갇혀서 고문을 당하고 있는 동안 천도교 교인인 한 남자가 여덟 번인가 열 번인가 까무러치면서 계속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소년 한 명이 바닥에 심하게 내동댕이쳐져서는 한 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발길질을 당하다가 끝내 의식을 잃는 것도 보았다.어느 날 보도된 바로는 학생은 심한 구타로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for no was the boy afterwards visited in the hospital(이 부분 이해 안 됨) 도리스 양은 학생을 진찰하다가 빨갛게 달군 다리미로 지져서 생긴 듯 살갗에 12cm 가량 난 화상 자국을 발견했다. 이런 식의 상처가 4개나 있었다. 도리스 양이 진찰할 바로는 학생의 두 손이 채찍에 맞은 듯 검게 피부가 죽어서는 원래 손 크기보다 두 배 정도로 부어 있었다고 한다. 학생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발길질을 당하고 맞았는지 도리스 양에게 말했다. 학생의 얘기로는 매질을 하다가 의식이 흐릿해지면 물을 마시라고 주고 벌거벗은 몸에도 물세례를 해서 정신을 차리면 다시 온갖 질문을 퍼부어 대고, 쓰러질 때까지 대나무 몽둥이로 매질을 했다고 한다.3. 3월 7일 평양(平壤)에서 북쪽으로 2? 마일 정도 떨어진 부백과 산감 마을에서 독립운동 시위가 있었다. 시위에는 이곳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했다. 시위가 있고 다음날 네 명의 군인과 한국인 순사 한 명이 찾아와서는 교회의 목사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목사를 잡지 못하자 이들은 학교 선생을 잡아다가 칼로 두 차례 얼굴을 베고 다시 다리를 두 차례 찔렀다. (삽입된 영어 무엇인지 모르겠음????) 이런 횡포를 보다 못한 교회의 노인인 나서서 항의했다. 그러자 일본인 군인이 칼로 노인의 팔과 허리를 찔렀다. 상처를 입은 두 양민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졌다. 한국인 경찰이 이를 보고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 그리고 일본인 군인들은 목사관을 샅샅이 뒤졌지만,

    146 알 수 없는 이에게 보낸 편지

    알 수 없는 이에게이 편지를 누가 받아 볼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들려 보내니, 이 편지가 무사히 당도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한국에 무슨 일을 하든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거든 무슨 전갈이든 좋으니 가능하면 다 보내 주기 바랍니다.제게는 22일과 28일자 원장(平壤)이 있는데, 아무런 사항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한국총독부는 한국을 제멋대로 통치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훈족만큼이나 기세가 등등한 일본한테 어쩌지 못해서, 난국에 빠진 소국, 한국을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멋대로 결론내렸습니다. 이는 온통 기만입니다! 끔찍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인들은 머릿기름까지 바르고 때깔 나게 차려입고는 자존심은 나 몰라라 하고 타락의 길, 일본군을 따르고 있다고 누군가 전하더군요. 그러니 당연히 한국인들은 되도록 조속한 시일 내에 문제를 바로잡고 그리하여 문제를 없앨 태세이지요. 하지만 일본이 러일전쟁과 관련하여 일부 권한만 허락하는 데 한국인들은 동의했습니다. 어찌하였든 한국은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으니까요. 일본이 한국을 통치한 지도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한국은 저항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아무 명분 없이 그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들의 말로 ‘독립’을 위해 그토록 필사적으로 희생을 불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이렇게 10년을 더 견뎌야 한다면 어떨까요? 한국인들이 비록 지금은 흙으로 만든 초가집에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많은 생각이 있습니다.세계사는 선의의 기독교인을 증오하고 박해하는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평양(平壤)에 교인이 눈에 띄게 빠르게 증가하면서 일본군의 타깃이 된 겁니다. 평양(平壤)의 경우 교인들은 형기가 갑절로 무겁습니다. 교인 중 한 명이 2주형을 판결받았지만 지금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습니다. 주변에 감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도망가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잡히기 십상입니다. 지금이 우리한테는 가장 분주한 시기일 터인즉,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있지 못합니다. 기독교로 개종하려 했다간 바로 잡혀가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교인을 박해하는 가장 끔찍한 형벌로 화형선고, 약탈, 고의살해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46명의 남자들이 총검 끝에 작은 감리교회 건물로 끌려 들어간 뒤 총살을 당하고 교회에 불을 지른 일이었습니다. 불에 타지 않은 가옥은 모두 군인들이 일부러 불을 지르곤 했습니다. 영사인 커티스(Mr. Curtice) 씨가 바로 그 현장에 있었고, 웬만큼 사건을 목격한 그는 지난 주 토요일 사건 내용을 제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속이 뒤집힙니다. 한국인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소리 죽여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교인들이 스스로 우리를 믿고, 기도를 통해 한국이란 나라를 격하와 치국의 위치에서 구제할 수 있다는 사실 외에 한국인들에게 다른 동조를 얻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자기네들이 월등한 국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민족적 자부심은 지금껏 독일인에게서나 볼 수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부심을 일본 후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저는 부상 입은 많은 한국인들을 보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등에서 어깨를 관통하고 심지어 폐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지만 살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총상으로 그 즉시 두개골이 날아갔습니다. 그 사람을 ‘만서’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들은 무슨 수를 쓰든 복수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대를 이기는 게 이들의 뜻은 아니었나 봅니다. 한 어린 소녀가 목이며 여기저기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를 일일이 열거할 시간이 없군요. 일본인들은 여자에게 특히 잔인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러니 저마저 벨기에 공포를 다 이해할 듯도 싶습니다.예배 보는 중 한국인 열에 하나는 교회 현관에서 패대기를 당했습니다. 지난 일요일 저는 예배에 참석중이었는데, 한국인 경찰과 일본인 경찰, 두 명이 들이닥쳤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다가가 무엇 하러 왔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다 쓸데없는 허세였지만 하나님이 있기에 두려움을 잊고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있었던 거죠. 저는 한시도 제게 질문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되려 말로서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그 중 한국인 경찰은 예전에 기독교 교인이었습니다. 저는 그 경찰들에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였고, 두 경찰도 제 말을 경청했습니다. 얘기를 하는 중에 우리는 웃기도 했습니다. 윽박지르고 꾸짖으면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누구를 책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한국인 경찰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기독교인일 수 있다면 갈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의, 음, 당신네 궁전을 무엇이라 하오?” 이에 저는 대답했습니다. “주변에 항시 첩자니 경찰이니 군인이 있기 때문에 경찰 본부에서 여왕 관저를 찾아가는 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이죠. 저는 “저희 예배를 뒤엎으려 오후 시간에도 오실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오늘밤에 오실 겁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보다 더 잔인한 이들이 명령한 바를 이행해야 할 테죠.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평온한 위엄을 가진 것을 안다면 모두들 놀랄 것입니다. 제가 한국인에게 너무 기운 것일까요?이제 여러분도 한국인들이 어떻게 순교자처럼 꼿꼿이 이겨내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 말씀에 예가 있습니다. 한국인은 당한 만큼 복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조용하게 감내하지요. 이 점이 일본인들은 격분케 하지요. 아무런 소송도 열리지 않았고, 변호사를 둘 처지는 되었지만 변호사를 사지 않았습니다. 재판 결과를 미리 공지하면 한 차례 질문이 있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형기를 결정하고 알려주었습니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지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방마다 꽉 들어찼습니다. 그곳에서는 잠을 잘 때에도 누울 자리가 없어 서로의 몸에 기대어 잠을 이루곤 합니다. 하지만 러시아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최후의 심판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까이 계십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 맙시다. 다만 기도하며 기다리고 주시합시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소서!진실은 전해지게 마련이다.

    147 북경 매일 신문 - 사설

    발간일: 북경 매일 신문 - 사설‘모우리 씨 건 판결’한국 내 독립운동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목사인 모우리 씨가 노역형과 함께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에 우리 모두 기뻐했다. 이 사건에 대해 그 이상 명쾌하게 다룰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모우리 씨에게 지워진 혐의가 그다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인하기로 가장 명확한 주장이라면 목사가 범죄자를 숨겨 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사건이 아직 심리중이고, 모우리 씨가 판결에 불복, 항소했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평결이나 사건 자체를 논의한답시고 경솔하게 굴 수는 없다. 우리에겐 기뻐할 일이기에 모우리 씨가 유죄인가 무죄인가는 떠돌이 양철공이 내뱉는 욕설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나중에도 이 평결이 그대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와 상관없이 항소가 열릴 때까지는, 다시 말해 지금 이 글이 인쇄되기 바로 전까지는 모우리 씨는 유죄 상태라 기쁘다. 그리고 미국의 주일학교마다 미국의 가가호호마다 그 주제와 관련하여 교훈이며 설교가 떠돌 테니 또한 기쁘다. 미국 선교사회에서는 그 문제에 대해 좀더 주도면밀하게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교인들 모두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테고, 신문들도 앞다투어 기사를 실을 것이다. 당분간 평화전당의 열기는 점차 식어 갈 것이다. 수백만 달러 보상금이 누구 손에 돌아갈 것인가 하는 것보다 미국 시민인 모우리 씨의 앞으로의 운명에 더욱 관심이 기울 전망이다.미국인 선교사, 모우리 씨의 구속과 유죄 판결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는 훌륭한 광고효과가 될 것이다. 일본 당국이 한국에서 겪은 실패를 세상에 어떤 식으로 드러낼까 고민되어 밤새 잠도 못 이루고 방도를 찾아 다녔다면 모우리 씨를 구속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과 같은 훌륭한 방법을 당국에서는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모우리 씨에게도 일부 공로를 돌려야 한다. 모우리 씨가 잠자코 판결을 받아들였다면 정말 확실하게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는 셈이 되었을 텐데, 1차 판결에 항소하여 그러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항소한 덕분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관심이 식지 않고 있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까지 한국에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던 수백만 사람들이 이제 바로 한국에 관심의 눈길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신문지상에 장문의 기사도 실릴 것이다. 한때 자유로운 나라였으나, 서서히 외세의 손아귀에 잠식되어 이제는 결코 행복하지 못한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기사가 실릴 것이다. 최고다. 어느 모로 보나 최고다.또한 한국은 프랑스 파리에 한국사절단을 보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보낸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고문, 대학살을 비롯하여, 총질하고 흥이 나서 떠들어대는 등 한국인들에 대한 학대 관련한 이야기에 대해 파리에 주재하는 수천 명의 미국 신문 통신원들이 아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다지 흥미가 끌리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지금 살아 있는 미국인이 6개월 노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이야기에는 관심을 둘 수도 있겠다. 물론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결코 범죄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 사건을 두고 아주 펄쩍 뛸 테고, 한국 사절단은 대중 앞에서 발언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아마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런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렸으니(물론 지금 당장 우리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에서 볼 때 분명 모우리 씨를 비롯하여 일본 당국에 열렬히 감사할 일이다. 소위 ‘한국 음모 사건’라 부르는 이 사건에 연루 의혹이 있는 사람들을 고문하는 것과 관련하여 안타까운 일이 한 가지 있으니, 일본 당국은 완곡어법으로 소신을 펼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재판중 여러 차례 일부 미국인 선교사에게 불리하게 변론이 이루어졌고,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재판 출정을 요청해 놓았지만 기소 이유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당국은 수완도 없었던지 정말이지 일을 분별없이 처리했다! 지금 같으면 모든 관심이 프랑스 파리로 몰렸다고 생각하고는 아무런 처벌 없이 상황이 마무리될 수도 있다. 예전이라면 처벌을 내릴 경우 위험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무사통과를 기대하고 있다면 일본 당국은 금방 실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모우리 씨가 최고 법원에 항소하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다. 또한, 재판 과정이 더욱 길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확실히 모우리 씨에게는 조금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대의를 위한 것이라면 모우리 씨도 별로 괘념치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한 가지 있다면 일본 당국이 기소를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고통받고 난 뒤 소위 ‘음모’에 의해 기소가 철회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흠잡을 데 없는 한국 내 일본 당국(즉 한국 총독부)이 실제로도 실수를 자인하면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일본 당국이 일본의 신민인 한국인과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더욱 기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당국은 모우리 씨 기소 사건에 대해 매일 이런 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일본 당국에 더 많은 권한이 있기를.(1919년 3월 29일 복사)

    148 경찰서 구류 관련한 일본의 예심 방식

    작성일: 1919-05-03‘구두닦이 소년’ 이야기는 읽으면서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그런 흔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구두닦이 소년은 마른 체형에 키가 크고 수줍은 성격이었다. 열아홉 살 정도로 보인 이 소년은 시내 신발가게 주인 밑에서 일하며 길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 그 소년은 우리와 마주치면 공손하게 모자를 벗어 즉시 눈을 내리깔고는 “신발 수리할 게 있으신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우리는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소년은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음 번에 또 그렇게 만나는 것이었다.하지만 한국에 일어난 시위로 소년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나도 어제야 이야기 일부를 전해 들었다. 소년은 임시 거처하는 집에 있다가 밤중에 붙들려 갔다고 한다. 돈깨나 있는 이 집의 식구 가운데 한 명이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의심을 사서 밀착 미행이 따라 붙었다. 결국 이 남자는 구두닦이 소년과 같이 붙들려 갔다. 경찰 본부는 돈 많은 남자에 대해 조사를 먼저 시작하고,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는 자가 누구인지 불면 풀어 주겠노라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자백했고, 소년은 남자의 수작으로 결국 두 사람 분의 형벌을 대신 받게 되었다.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구두닦이 소년’이 흠씬 두들겨 맞고는 거의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나는 사건이 있고 얼마 안 있어 전해 들었다. 나는 끔찍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소년의 소식에 무척 괴로워했다. 소년의 음성이 계속 귓가에 울렸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서도 매우 선명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33일이 흘러 시내 제5 교회의 어떤 여자 분들과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구두닦이 소년이 보건소에서 생사를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후 소년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소한 소년이 잔인하고 치명적인 고문을 딛고 목숨만은 건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하느님의 교회로 한국의 군사력, 바로 경찰이 꼼짝 못하게 했으면 하고 바랐다. 어제는 소년을 보러 병원에 갔다. 어찌하여 소년이 병원에 입원한 걸까? 경찰측에서는 소년이 자기들 손에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거나 고문을 계속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 어찌하였든 소년은 기적적으로 회복하는 중이다. 나는 본관으로 들어가서 신분증을 내밀었더니 놀랍게도 경찰은 아무 제지도 하지 않았고, 그냥 나를 병실로 들여보냈다. 병실에 들어갔더니 3주 전 만난 게 틀림없는 바로 그 소년이 병색이 완연하여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나는 하느님이 나를 소년에게 인도했음을 알았다. 나도 안면이 있는 여자 분이 소년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병실에서 거의 한 시간 반 가량을 있었다. 소년이 겪은 일을 알게 된 뒤에 나는 찬송가를 몇 곡 불러 주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한 뒤 나는 집으로 왔다.이제 나는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소년이 죽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소년은 경찰서에 끌려가고 다음날 일본 통치를 전복시키려는 독립운동에 연루된 사실이 있는지 심문을 받았다. 그 일과 관련하여 소년이 일체 대답을 거부하자 여섯 시간 동안 ‘조사’, 즉 고문이 시작되었다. 팔꿈치 위에 쇠고랑을 달아 팔을 묶어서 상체가 심하게 비틀렸다. 이는 매질을 하기 전 준비 과정이었다. 이어 구타가 이어졌다. 결국 몸이 여린 소년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찬물을 마시게 하고, 아직 날씨가 쌀쌀한데도 벗은 몸에 물세례를 퍼부었다. 그런 뒤 다시 심문이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소년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 답변을 거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나무 몽둥이로 더욱 가혹하게 매질했고, 또다시 소년은 쓰러졌다. 대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진단은 그저 흥미로운 일이리라. 내가 무엇을 하는지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 소년을 살펴보았다. 벌겋게 달군 다리미로 지져서 생긴 듯 살갗에 12cm 가량 길이의 화상 자국이 나 있었다. 다리 위쪽에 이런 자국이 네 군데 있었다. 소년의 두 손은 채찍에 맞은 듯 검게 피부가 죽어 있었다. 소년의 말로는 한쪽 손이 두 배나 부었다고 한다. 손가락 관절 가운데 두 곳과 손가락 끝 두 곳을 보니 그 얘기가 사실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소년은 구타로 인해 욱신거리는 두통이 여전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곧이어 의사가 회진차 와서 소년을 진찰하더니 내게 가슴과 폐가 많이 나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가슴이 아픈 것이 추위에 노출되어서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 얘기를 꺼내겠다. 의사는 소년의 옷을 더 들추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복부 전체에 난 상처를 보았다. 총검에 찔려 생긴 건지 고통 완화 차원에서 의사가 절개수술을 해서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배에 난 상처는 아물고 있는 듯했다. 의사는 우선 가볍게 눌러보는 것으로 진찰을 시작했다. 하지만 33일이 지난 뒤 소년은 가슴에서 사타구니에 이르는 부위와 두 볼기짝을 가볍게 스치듯 만지기만 해도 고통을 견디지 못했다. 열 내리라고 이마에다 얼음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소년은 기력이 대부분 소진된 상태여서 겨우 앉은 자세를 취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흘간의 고문과 이어 열흘 연속 경찰서에서 괴로움에 시달리고 나니 진찰하는 의사도 소년을 보는 게 세 번까지만 허용되었다. 소년은 곧 죽을 운명으로 보였고, 의사는 경찰에 안락사를 간청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하느님은 계획한 바가 따로 있었는지 소년은 20일간 병원에 입원해 있더니 회생 가능성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오늘 나는 병원에 누워 있는 소년에게 주려고, 정장으로 입을 수 있는 옷 두 벌과 함께 양말을 샀다. 그런 다음 병원으로 향했다. 어제는 경찰이 과연 면회를 허락할까, 아니면 괜히 소년을 찾아갔다가 손수건 두 장과 자기 칫솔 지참만 건지고 쫓겨날까 의문이 컸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로 경찰한테 거의 붙잡힐 뻔해서 주머니에 손톱줄만 넣고 갔다.시간이 얼마 없어 인력거를 타서 계란, 사과, 분유, 깨끗한 베갯잇을 실어 날랐다. 불행의 시간이 묻어 있는 옷을 입고 있던 때와 비교해서 변화는 시작부터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 면회를 갔을 때에는 한국인 간호사가 간호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더러워진 옷은 나갈 때 가져갈 수 있게 말아 두었다. 우리는 함께 기도를 한 뒤 일어서서 병실을 나섰는데, 마침 그때 병실 밖에 있던 막일꾼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소년에게 “넌 기다리고 있어라. 아직 가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막일하는 남자는 내 옆에서 내가 누굴 좀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도대체 그네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인력거를 타서도 소년과 멀찍이 떨어져 앉으려고 했다! 나는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네들의 뱃속이 환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체포될 몸이었다. 사실 나도 잘은 모른다. 우리는 순순히 인력거에 올라타서 경찰 본부까지 갔는데, 인력거 주변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들어 내가 달아나지 못하게 에워쌌다. 저녁 만찬에 쓰려고 생선을 사 두었는데 손님들과 얼마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할 것 같아 난처했던 일말고는 반시간이 지나도록 별일은 없었다. 대신 나는 한국인 간호사 편에 생선과 쪽지를 들려 보냈다. 그러고 나니 지금은 마음이 편안하다. 신의 은혜로 완벽한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동양에서 완벽한 평온이란 기대할 수 없다. 공교로움이 존재하는 곳이 동양이다.나는 분명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존재였나 보다. 차에 태워서 갈 때도 있었고 걷게 해놓고 데려 가기도 했는데, 나를 끌고 가려고 군인들이 몇이나 왔는지 모른다. 머릿속에서 오가던 즐거운 생각은 방해물이 나타나서 막을 내렸다. 방해한 사람은 칼과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이나 경찰과 같이 카키색 제복을 차려 입은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일본인이었다. 평범한 옷을 입은 이 일본인은 나를 면담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아는 것은 다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무척 자상하게 굴었다. 여러분에게 시인하건대 그 일본인은 경찰서에 있는 사람이었고, 생명이 거의 다하도록 우리의 ‘구두닦이 소년’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인의 정보를 빼내는 첩자로 정평이 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일본인 관리는 공공기관의 총체적인 업무와 경찰서 본연의 업무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면담은 금방 끝났고, 그 일본인은 아픈 소년은 지금도 자신이 맡은 죄수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후 소년을 만나고 싶으면 경찰서에 허락을 받기 위해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내가 주저앉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를 시험하다니 그네들은 정말 얼음처럼 냉랭했다. 나는 실망했다. 이번에는 분명 내가 감옥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단에서 전화가 왔는데, 내용인즉슨 나의 실종 소식이었다. 한 여성 기독교인이 실종된 나를 찾기 위해 급파되었다. 리갈(Ligal??) 위원회 회원이기도 한 이 여성은 막 경찰서로 찾아가려고 했을 때 내가 돌아왔다고 한다.우리와 같은 외국인 거주자들은 자유라는 것을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현 일본과 미국 간에 맺어진 합의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부에 호소해 보자!봉사와 희생을 다하며A. S. D.1919년 5월 3일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그대들,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기독교인이 모조리 뿌리뽑히는 이 상황을 수긍하시겠나이까?아멘!진실은 전해지게 마련이다.

    149 한국의 소년 몇 명이 일본인의 고문으로 입은 상처 때문에 병원에서 사망한 뒤 한 선교사가 쓴 편지에서 발췌한 내용

    그(선교사)는 사망 확인서에 서명 날인을 하면서 아이들이 구타에 이어 괴저 발병으로 사망했다고 적힌 내용을 보았다. 그리고 괴저의 발병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질문에 그는 “매질할 때”라고 답했다. 물론 당국에서는 이 문제로 골치 깨나 썩고는 그에게 몇 날 며칠에 법정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그는 병원 일을 뒤로하고 오전 열차를 타서 명령대로 11시에 법정에 출두했는데, 2시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소송 대리인 앞에 꼼짝없이 1시간 45분 동안 서 있었다. 소송 대리인은 치안판사 좌석에 앉아 통역관을 대동하여 그에게 소년들의 죽음과 관련해 반대심문을 했다. “소년들이 감옥에서 나온 모습을 본 한국인 의사들은 소년들의 질병이 ‘독감’이라고 보고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의사는 독감이라 거짓 보고한 것인가?”라고 대리인은 물었다. 대리인은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니냐 묻고 나니까 그쪽으로 더 이상 변론할 게 없었다. 심문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그래서 그날 밤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비용 일체를 그 자신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이제 곧 보내려는 그의 보고서를 보면 그가 의료 개정법에 대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세한 내용을 물으러 하급 관리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진료 시간이 많이 뺏겼다(이 의사는 매달 평균 3,0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며 기적적인 수술을 실시했다. 이 병원은 미국에서 보내 온 자금으로 의사 본인이 입안한 계획을 따라 건립되었다. 이 의사는 유능한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를 교육, 배출했다).토머스(Mr. Thomas) 씨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했던가? 그는 정부 관청에서 발급한 허가서 한 장과 여권을 지참한 뒤 교구 교회에 가서 설교했다. 설교하던 그는 자신에게 설교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과 구타를 당했다. 그는 영사에게 자신이 영국인임을 알렸다. 그러자 영사는 지체없이 일을 맡았다. 이어 사과가 있었고(그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사람은 그를 미국인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토머스 씨는 5,000엔(2,500달러 상당)의 보상금을 받았다. 영사 로베르타(Mr. Roberta) 씨와 쓰윙(Mr. Thwing) 씨의 구속사건을 맡았을 때 한국측에서는 사과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으나, 이들은 결코 사과하지 않았다. 영사는 사리판단이 뛰어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미국 군대는 영국 군대에 미치지 못하는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일본법 가운데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 정부가 부당한 조치와 폭력에 분개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오늘이 서울에서 열리는 모우리(Mr. Mowry) 씨 재판 첫날이다. 우리는 모우리 씨의 변호사를 고용했다. 선교단이 부담하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모우리 씨는 누가 뭐래도 무죄이니까.지난 주 일본에서 우리를 찾아온 사람이 셋 있었다. 이들은 일본 내 연방 선교 위원회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미국인이고, 두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정밀 조사에 나선 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든 것을 가슴 아파했다. 교회는 불에 탔으며 많은 이들이 옥에 갇혔고 무려 200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교회의 한 관계자가 당시 사실을 방문객에게 털어놓고 이들을 역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중 멍이 들도록 흠씬 두들겨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교회 관계자는 다음날 시골에서 병원으로 찾아왔고, 부상 소식을 들은 조사단이 교회 관계자를 찾아와 이들의 면회를 허락했다. 사람들은 일본인 둘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의심이 앞섰지만 교회 관계자가 이들과 동행한 덕에 의심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이 교회 관계자는 친절하고 예의바른 성품 때문에 전날 조사단에 붙여진 사람이었다.한 남자(이름 알 수 없음)와 그 가족이 몇 주 전에 왔는데, 이들은 윌슨 대통령에게 바칠 소중한 물건을 맡고 있었다. 그 물건은 우리의 ~(지워져 있음)을 책임지는 사람이 공단에다 수를 넣어 만든 한국 지도였다. 지도를 만든 사람은 지도에다 교회인 곳에 동그라미를 표시했으며, 교인이 살해된 교회에는 빨간 색으로 X표를 했고, 교인이 불타 죽은 교회에는 분홍색으로 X표를 했다. 이것은 우리 교회 여성 교도의 아이디어였다. 한국인들이 생각해 내는 것은 무척 놀랍다.일본인 서류에는 선교단을 비방하는 글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이 처한 실제 상황과 관련한 언급은 간략하게만 하고 많이 생략되어 있었다. 세상에 한국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150 블레어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수신주소: 1919년 4월 30일 수령 확인아버지에게스위처 양이 내일 미국으로 갑니다. 그래서 스위처 양이 증기선에 오른 다음에 도착할 수 있게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자칫 다른 사람 손에 편지가 들어갔다가 우리가 앞으로 이곳 한국에서 하는 일이 지장을 받을 수도 있기에 자세한 사항은 편지에 적지 않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이곳 실정이 벌써 세계에 알려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의견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고자 아버지에게 이곳 상황에 대한 제 의견을 적어 보냅니다. 상하이에서 온 전보는 믿을 만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황당한 소문이 많이 돌고 있으니 더욱 그러합니다.독립운동 시위에 가담하고 있는 선교사들 이야기라면 사실인 게 없습니다. 우리는 대개 사건이 저만치 물러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압니다. 교회 관계자들(목사 등)이 그런 상황에 처한 지금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들어볼 요량으로 사람들을 많이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그 문제에 가담하지 말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독립운동과 연루될 경우 교회 건물이 파괴되는 것은 다반사라고도 말했습니다. 또한 한국 독립에 대한 염원이 목숨을 잃고 억압이 심해지는 것 이외에 다른 성과로 이어지기는 힘들 게 뻔하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목사들이 워낙 많이 운동에 가담하는 바람에 당국이 교회 지도자들을 볼 때 우리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 내에 복잡하지만 정교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는 단적인 예에 불과합니다. 내가 들은 바로 교회 조직은 결코 공식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선전 목적으로 교회의 정기예배 모임이나 교회 사무실을 이용했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믿음을 확보한 이후 전국 어디나 교인들간에 맺어진 상호 신뢰와 친분 덕택에 돈독하고 효율적인 정치적 활동 경로가 마련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3인 가운데 평양의 길선주 목사와 선천의 양한묵이란 이름은 한국 곳곳의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관리들은 이 두 사람의 공로는 무시하고 대신 선교사들의 공로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은 방법, 정신, 관리, 세 가지 면이 고루 갖춰진 운동이 되었습니다.한국의 독립운동 핵심에 기독교 교회가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상당히 유력한 목사, 연장자, 학생을 비롯하여 저명한 기독교인 등 많은 사람들이 지금 감옥에 수감중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그네들이 영향력을 떨치고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야말로 국제 상황과 그래도 소통이 되는 사람들로 약소 국가들의 민족자결주의가 이같은 전략적 시기를 맞아 한국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참여와 노고가 없었다면 호소와 항의와 소란 등 비폭력주의 독립운동은 총기전만큼 강력하게 전국을 강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희망이란 희망은 다 앗아가겠다 협박했는데도 용감하게 맞선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들이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정의 실현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몸소 실감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사람들은 대규모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그리고 길만 뚫린다면 앞으로 나아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 세력은 만주 경계 지역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그곳은 독립운동 투사들이 가장 빨리 몸을 피할 수 있어 운동가들이 많이 피신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져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의 선봉대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교단체에 알리지 않고 그리한 것입니다. 심지어 시위가 시작된 후에도 교인들간에 매우 가까운 사이라도 가담 사실을 전혀 모르기도 합니다. 선교사 가운데에는 칼이든 총이든 여타 금전적 지원 또는 든든한 정치적 연줄 하나 없이 세계 최대 군사 강국 가운데 한 나라와 싸워 보겠다고 덤벼들 정도로 신념이 투철하고 무모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대로 사느니 죽음도 마다 않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한 사람들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인들 코앞에서 저항의 뜻을 표방하며 자살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동양적인 저항 방식입니다. ‘자결주의 또는 자멸’이 한국 독립운동의 정신입니다.p. 201독립운동의 범위에 관해서 두 가지 견해가 모두 가능합니다. 밤낮으로 데모가 있었습니다. 특히 장날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체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날 장날만큼은 꼭 데모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소년들도 시위에 나섰는데, 학생들은 경찰이 통제에 나서 학교로 돌아가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학생들은 다들 학교에다 핑계를 대고 나왔습니다. 농부들도 대거 모여 농작물의 추수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상인들은 어쩔 수 없이 폭력 때문에 문을 열기 전까지는 가게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서로 연락이 끊기는 바람에 현재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2개월간 데모가 끊이지 않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감옥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든 소규모 촌락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읍에 속하는 촌락들이 자체 청년들을 한날 중앙시장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시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중앙시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같이 관청으로 가서 “대한민국 만세!”하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데모가 열렸습니다. 지위 고하, 빈부, 기독교, 불교, 유교니 하는 종교의 차이, 기독교 학교, 일본 공립학교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선뜻 시위에 가담하여 죽음이든 투옥이든 매질이든 불사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은 물론 가족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었지만, 일본 압제 치하의 한국인이 이렇게 하나 되어 목소리를 내면 자비로운 하느님의 귀에까지 닿아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에 모든 것을 바친 한국이란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 모두들 믿었습니다.이런 데모를 막고자 무자비한 수단이 동원되었습니다. 사실 독립운동이 이만큼 확산하게 된 것은 관리들의 진압 방식이 잔인한 것이 큰 이유였습니다. ‘추악함’은 지금까지 우리 주변 상황을 잘 나타내 주는 단어입니다. 몽둥이, 칼, 총, 주먹, 채찍으로 때리면서 시위자들을 진압하였습니다. 군중이 험악하게 굴 것 같으면 죄의 여부 따지지 않고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여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을 검거하고 난 뒤에는 이들에 대한 처리방법도 잔인했습니다. 명목상의 재판이 열렸고, 아예 대놓고 구타를 일삼았습니다. 구타당하고 있는 사람의 시위 가담 여부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만은 같은 생각이었으니, 제멋대로 마구잡이 처벌을 하고 있지만 하지도 않은 일로 처벌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위 주동자인데 도망가서 잡지 못하면 이런 아들, 손자, 주변 인물을 대신해 나이든 사람이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남편을 유인하려고 대신 아내를 구타하고 감옥에 넣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많은 농부들은 매질이 있은 뒤 농사일을 할 수 있도록 석방해서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농부들은 곤장 90대를 맞았는데, 두들겨 맞은 데가 심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들것에 실려 갔습니다. 요즘은 강간 소문도 심심지 않게 떠돌고 있습니다.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 내는 일도 흔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정확히 몇 명이 즉사하는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합니다. 여기 지역에도 그렇게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수감되고 나면 대부분 총살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 도시에서 죽은 유일은 기독교인은 검거되던 중 목 뒷부분을 맞고 죽었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처음으로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으며, 장례행렬이 군인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지나가자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들에 합류하여 같이 가스펠 송을 불렀습니다. 여기 교구에서는 불탄 교회가 없었지만, 여기서 북쪽에 위치한 여러 교구에서는 대형 교회 건물들의 방화사건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면 있는 수원에서 열린 야만적인 사건은 입증된 경우입니다. 20명에서 25명 정도의 기독교인들을 교회 건물에 감금한 뒤 총질을 하고 건물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군에 갓 들어온 신병들이 저질렀다는 주장입니다. 한국인 여성 한 명이 옷을 발가벗겨 알몸을 드러내느니 죽겠다 했습니다. 한국 여인들은 이곳 관습상 알몸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여성 교인들을 데려다 옷을 벗긴 뒤 발가벗을 몸에 매질을 하는 등 굴욕을 느끼게 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저속한 쾌락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건을 그저 사람을 찾아 수색하다가 일어난 일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는 한국인 전체를 격분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p. 202준공직자 언론인 대부분과 공직자 일부는 이런 말썽을 일체 성직자 탓으로 돌리기 위해 눈에 뻔히 보이는 일을 행했고, 몇 가지 결과를 보았다. 모우리 씨 검거되자 전국에 국민 감정이 생겼습니다. 언행을 삼가는 옛날 양반사회는 이 사건 때문에 전에 없이 술렁거렸습니다. 이들도 선교사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애국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박해를 받게 된 게 전에 없이 포교의 문을 활짝 여는 기폭제가 되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에게 구타는 다반사였고, 치욕적인 대우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언론인이 사람들의 조롱을 받은 것은 바보천치라도 그보다 생각이 있을 텐데 한국인을 이와 같은 투쟁과 유혈로 이끌다니, 이는 미국인 선교사가 총체적으로 잘못하는 것이라고 언론인들이 거짓 의견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그런 신문 기사는 시위자들을 갖고 놀리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의 진짜 역할은 한국에 대한 논의를 부각시키는 부분이 크고, 우리가 꿈꾸는 대의의 미덕이 가장 중요합니다. 요즘 보면 교회가 가장 큰 피해를 겪은 것 같습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기독교와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 지금은 온 국민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인들 대부분이 형제자매 교인들의 선봉 역할을 해야 하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유일하게 진실한 생활방식이라 믿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감히 행할 수는 없었던 종교적인 생활을 온전히 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경찰의 득세가 심한 곳일수록 교회 참석이 두 배로 늘었다는 소식이 더 많았습니다. 지도자들이 모두 감옥에 가 있는 일부 교회의 경우 사실상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 교회의 경우 선교사들이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대체로 복음전파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경찰 한 명이 혼자서 해당 지역 소재의 교회를 탐색하는 작업을 맡고 있었는데, 그 경찰관은 지금이야말로 기독교로 개종할 기회라고 주민들을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어제 들어온 소식으로는 인근 시위 가운데 한 곳에서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인 경찰이 일본 경찰에게 총을 건네 받고 명령대로 발포를 했는데, 처음에는 공중을 향해 쏘다가 마찬가지로 명령을 따라 총기를 몽둥이처럼 휘둘렀다고 합니다. 한국인 경찰은 미친 사람인 양 총을 치켜들고 방어할 능력조차 없는 나이든 할머니에게 돌진하더니 할머니 옆에 있던 돌로 된 담벼락에다 총을 내리쳤습니다. 총기의 개머리판이 떨어져 나갔고 총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시위가 정당한지 여부를 놓고 누군가가 의문을 걸어올 수 있다. 일본 때문에 지난 10년은 한국인들이 자각을 하는 시간이었음은 모두들 동의하는 바입니다. 일본이 아니었다면, 한국인들은 100년이 지나도 스스로 자각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가는 깨끗한 정부, 개선된 상업활동, 철로와 자동차도로, 우편 전신 서비스, 신문과 공립학교, 법정과 믿을 수 있는 법률을 일본이 하루아침에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업과 일본 침략, 이 두 가지 요인으로 한국인들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반 경찰이 가택수색 혹은 몸수색을 할 경우 이에 항의하고, 재판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매질 처벌을 받을 수 없노라 강력히 주장하고, 상태가 양호한 도로의 건물에 대해 정부가 아무 보상도 하지 않고 개인의 토지를 압수할 경우 이를 적극 저지하고, 자국의 이해가 걸린 곳이라면 어느 나라든 가서 소위 믿음이 가는 깨끗한 정부를 무너뜨리는 일을 일삼는 일본의 만행에 분개할 수 있는 시대가 이제 도래한 것입니다. 준공직자 조직이 각 지역마다 강제 실시하는 공개 매춘 제도를 한국인은 혐오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한국의 정절을 망치고 있습니다. 편지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보이면 즉시 압수합니다.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한국인들을 일본 지주의 경제적 노예로 전락시키는 상황입니다. 공정한 경쟁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공립학교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일본을 찬미하고 고대 한국의 영광을 무시하는 역사를 한국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공립학교는 교과서를 다 갈아치웠습니다. 죄다 거짓말인 것들을 정말 싫은 언어, 일본어로 가르치는 일본 공립학교에 자신의 아이들을 어쩌지 못하고 보낸다고 아버지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기독학교, 비기독학교 할 것 없이 다 파괴되었으며, 기독학교에서 성경을 모두 없애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신문은 온통 정부가 만들어서 정부가 검열한 기사로 가득해서 편집자는 그처럼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 있는지, 힘있는 자들의 강요에 못 이겨 그런다는 것을 인정하는 반면, 기사를 그처럼 왜곡시키려고 인간성을 버린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새로 건설한 도로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적정 보수도 받지 못하고 도로 건설에 폭력에 못 이겨 강제노동으로 끌려간 한국인들은 새 도로를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이상의 훌륭한 고등교육 기관을 건립할 권리를 일본이 제약할 뿐더러 더 나아가 동경에서 일본이 감독하는 소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자식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것도 금하는 데 대해 한국인들은 당연히 분노를 느낍니다. 정부 전체적으로 동일 직종에 근무하는 남자의 경우 일본인 월급은 한국인이 받는 월급의 두 배입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는 사람은 한국인입니다. 지팡이를 짚은 일본인 신사가 시원하게 하려고 기모노 옷자락을 벨트 안에다 쑤셔 넣고 다리와 허리를 훤히 다 드러낸 채 다니는 모습을 본 한국인은 저렇게 야만스런 풍습을 가진 일본 민족이 어찌하여 동양을 지배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워 합니다. 일본이 세계를 다 밟아 본 민족으로서 눈을 크게 뜨고 외형적인 성장을 하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한 자를 눌러서 이룬 것임이 분명합니다. 일본의 이해가 개입하면 정의는 돌연 가장 더러운 부정(不正)으로 변합니다. 배가 파도를 타며 순조롭게 항해하고 있어 모든 게 훌륭해 보이지만 붙들려서 노를 젓는 노예한테는 배는 결코 참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p. 203우리가 한국에서 강제 이송되길 원치 않으신다면 편지에 제 이름이 들어 있는 상태에서는 복사하지 마십시오. 평생을 둔 사업을 희생시킬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이라면 저 또한 주저하지 않겠으나, 이름을 넣지 않더라도 똑같이 선을 행할 수 있으므로 여기 남아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한국인)을 도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 편지가 여러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사사로운 일들은 쓰지 않았습니다.당신의 사랑스런 아들 H. E. 블레어(H. E. Bl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