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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11 독립선언서

    다음은 15명의 기독교인들이 포함된 33인의 애국지사들이 서명한 독립선언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한국이 독립된 나라임과 한국 사람이 자주 국민임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서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서 자손만대에 일러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반만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고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터이며, 사람된 양심의 발로로 말미암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분명한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은 지 여러 천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10년이 되었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정신의 발전이 지장을 입은 일이 무릇 얼마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인가!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 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두려움을 없이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가 짓눌려 시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 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속의 칼날을 품으니,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이것을 얻고자 하는데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며, 물러서 계획을 세우는 데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할까!병자수호조약 이후 시시때때로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탓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인은 실생활에서, 우리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이 터전을 식민지로 삼고, 우리 문화 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낼 뿐이요, 우리의 영구한 사회의 기틀과, 뛰어난 이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려 하지 아니 하노라. 자기를 일깨우기에 다급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망할 여가를 갖지도 못하였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에게는 예부터의 잘못을 따져 볼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나를 바로잡는 데 있을 뿐 결코 남을 헐뜯는 데 있지 아니 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을 따라 자기 집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는 일일 뿐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의 감정을 가지고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일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인 일본의 위정자의 공명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이 그릇된 현실을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처음부터 이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두 나라의 합병의 결과는 마침내 억압으로 이뤄진 당장의 평안함과, 차별에서 오는 고르지 못함과 거짓된 통계 숫자 때문에 이해가 서로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도량이 날이 갈수록 깊이 패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번 살펴보라. 용감하게 옛 잘못을 고쳐 잡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바탕한 우호적인 새 시대를 마련하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인 것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또한 울분과 원한이 쌓이고 쌓인 이천만 국민을, 힘으로 붙잡아 묶어 둔다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노릇이 아닐 뿐 아니라 이것이 동양의 평안함과 위대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샘을 갈수록 짙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 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뻔한 터에, 오늘 우리의 한국 독립은 한국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 벗어나 동양을 버티고 나갈 이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피하지 못할 불안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 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우리가 본시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피우리라. 우리는 그래서 분발하는 바이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진하나니,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라.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공약 3장하나.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둘.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셋.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이 문서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한자로 절묘하게 표현된 형식과 아름다움, 그리고 많은 사상의 농도는 영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112 헨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22발신주소: 한국, 센센(Sensen)사랑하는 아버지께아버지께 매주 보내 드리는 서신을 방금 마쳤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일어난 폭동과 일본 군인과 경찰들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에 대해 몇 자 적어 보려 합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이 문제에 대해 말씀드렸듯이 한국인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폭력에 의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를 반드시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곳곳에서 일어난 시위에서는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송도(Songdo)에 있는 여학교에서는 선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경찰들은 교장실로 급히 들어와 여교장에게 여학생들을 학교로 불러들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교장은 학생들이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으며 시위를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교장은 경찰에게 그녀 자신을 체포하고 학생들에게 체포된 사실을 알리면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찰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교장을 체포했습니다. 이 사실이 학생들에게 알려지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뒤이어 많은 군중들도 함께 왔습니다. 그들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 경찰들은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여학생들은 군중들에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마을로 나가 조국의 만세를 외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의지대로 시위를 거행했습니다. 시위가 일어난 첫째날 많은 여성들이 모여 거리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국인 경찰을 만났을 때 그 경찰은 그들에게 멈추라고 명령했습니다. 여성들은 거절하며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청했으나 그는 달아나 버렸습니다. 잠시 후 여성 시위대는 군인들과 마주쳤고 군인들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했지만 공포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의주(Wiju)에서는 한 여인이 체포되어 신의주(New Wiju)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녀는 다섯 차례나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유치장 간수는 그녀를 감금하지 않은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하곤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곽산(Quaksan)에서는 군중들이 막 시위를 시작하려는 때에 경찰과 군인들이 몰려와 그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때 인파 속에서 한 여인이 나와 “여러분 우리의 독립 시위를 시작합시다”라고 외쳤고 군중들은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그 여인은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경찰서의 책임자인 지휘관이 들어왔고 경찰들은 그녀를 시위 주동자로 지목했습니다. 지휘관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던지듯이 방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피가 날 때까지 뺨을 때리고 주먹질을 하며 발로 걷어찼습니다. 잠시 후 그녀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묻는 지휘관에게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이르기를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만 우리 조국에 와서 이런 식으로 우리를 대하는 당신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나라는 신께서 주신 우리 삶의 터전입니다. 누군가 그 삶의 터전에 강제로 들어와 머문다면 그를 사랑하기는 힘들지요. 당신들의 조국인 일본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당신들은 사랑하기가 힘이 드는군요.” 심한 매질을 당한 뒤에 어떻게 이런 대단한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요? 선천(Syenchun)에서 투옥되었던 한 여인은 감옥에서도 조국의 만세를 외쳤습니다. 경찰이 들어와 멈추라고 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며 한국인들은 더 이상 일본의 통치하에 있지 않을 것이며 독립을 선언했노라고 말했습니다.그녀는 감옥에서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한국의 독립을 서둘러 이루어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그곳의 모든 한국인 경찰들은 그녀에게 와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 조국을 위한 일에 도움이 되라는 충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일본 관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녀의 입을 묶고 아랫입술을 양쪽으로 찢어 버렸습니다. 이 잔인한 행위는 마치 벨기에에서 독일군 병사들이 저질렀던 행위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시위가 발생한 첫날인 3월 1일 선천(Syenchun)에서도 시위의 혼란이 일어났을 때 한국인 경찰은 교사와 학생들이 있는 학교로 달려와 그 중 한 교사를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때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가 경찰의 어깨를 잡고 “우리를 체포하겠다면 그렇게 하겠소. 하지만 한국인 경찰이 아닌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한국인 경찰은 돌아가 버렸습니다. 일본인들의 행각이 알려지면서 우리는 일본 경찰의 취조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평양(PyengYang)에서 일본 경찰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좋아하는 사람들이므로 십자가에 대해 설교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십자가 형틀에 그들을 묶어 가혹한 구타를 가했습니다. 군인들은 교회를 향한 그들의 악의를 십분 발휘했습니다. 제가 확실히 들은 두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일본 군인들이 교회에 침입하여 그들의 손길이 닿는 모든 기물들을 파괴했습니다. 램프를 집어던지고 성경과 찬송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습니다. 교회 건물을 부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뒤 저의 교회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직까지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목사님과 임원들은 체포되었거나 피신했을 것입니다. 조만간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여기 선천(Syenchun) 교회의 김 목사님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아 처음에는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주일 전에 군인들이 목사님의 집을 급습하여 성경과 책들을 난폭하게 파기해 버렸습니다(제가 이 광경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경찰서로 끌려간 목사님은 처음에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공립학교에서는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학교의 졸업식과 진급식이 있던 날 일부 학생들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졸업장을 받지 못하자 그 졸업장을 학생들 집으로 보냈습니다. 강제로 졸업장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 편지가 아버지께 전달되어 가능한 한 널리 이 편지의 내용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아들 헨리(Henry) 올림

    113 버그홀즈씨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07 한국 평양(PyengYang)발신자: 수신자: 경애하는 레오 버그홀즈(Leo Bergholz) 미국 영사수신주소: 한국 @/k@서울@/k@친애하는 버그홀즈(Leo Bergholz) 미국 영사께||3월 4일 저녁 몽둥이를 든 소방대원들이 학교 기숙사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때리며 끌고 가 버렸기 때문에 학생들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채 졸업장을 받았으며 재학생들은 생각보다 이른 3월 5일에 방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방학이 끝난 후 4월 4일에 대학 및 기타 학교들의 신학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4월 2일과 3일에는 마을에 철저한 수색이 있었고 선교학교 학생들이 체포되거나 구타당했으며|| 일부 학생들은 곧 풀려났으나 아직도 감금당한 학생들이 있습니다. 경찰서장이 저희 학교 일본인 교사에게 전한 바에 의하면 앞으로 학교에 입학하게 될 신입생들은 모두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들이 학생이나 시민들을 체포할 때면 반드시 구타가 동원되며 취조나 조사를 하기도 전에 심한 학대를 하기 때문에 신입생을 입학시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학교에는 두 명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재학생이고 다른 한 명은 신입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칼을 찬 경찰 국장과 그의 통역관이 학교 개교에 대해 조사를 하기 위해 온 후로 학생들은 학교에 오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대학교에서도 한 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경찰서장이 그 학생에게 무언가를 말한 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개교를 방해하려는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학생들이 학교를 오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4월 4일 오후 4시 30분경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기도 모임을 위해 홀드크로프트(Holdcroft) 부인의 저택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휘장을 두른 경찰과 헌병들이 선교사들의 집을 급습하여 물건들을 어지럽히며 수색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곧 집으로 향했습니다. 저희 집 현관은 닫혀 있었으며 헌병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20여 명의 경찰과 헌병들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 보니 제 아내와 아이들이 16~20명의 경찰과 헌병 그리고 조사관들이 행정관과 통역관의 지시대로 집을 수색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 개의 방을 수색한 뒤였습니다. 저는 행정관에게 수색영장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수색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자 그는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강제로 수색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저의 동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상관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 행정관은 제 동의가 없이 수색할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있는 국장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저의 집 여기저기에 흩어져 수색했습니다. 서재와 모펫(Moffett) 부인의 침실에서는 책상|| 서랍|| 장롱|| 서류|| 편지 등 심지어 사적인 부부생활 물품까지도 샅샅이 검사했습니다. 경찰과 헌병들은 무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들도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 집에서 20여 명의 조사관|| 행정관|| 경찰|| 헌병들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물건을 뒤지는 모습을 참는다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제 서재에 있는 사무관 책상 서랍에서 다음과 같은 서류를 찾았습니다. 1. 한국어로 기록한 이(Yi) 왕자의 추모식 및 3월 1일 독립운동 계획서 사본.2. 안주(AnJu)의 여러 지역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명단과 살해된 사람들의 명단이 한국어로 적힌 조그마한 쪽지.3. 다섯 장의 독립신문 사본과 함께 우표와 직인이 찍힌 신학교로 보낸 편지 봉투. 이 봉투는 제가 서울에 있을 때 한국인에게서 받은 편지로서 사무관의 책상에 놓아둔 것이었습니다. 저는 위의 물건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행정관과 통역관의 말에 따르면 제 사무관 역시 위의 물건 가운데 처음 두 가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다고 합니다. 집안 수색을 마치고 그들은 집밖을 수색했습니다. 현관 아래쪽에 있는 손님방과 비어 있는 한국인 방을 수색했습니다. 이곳은 교회 여신도들과 그의 아들|| 제 사무관이 여러 해 동안 살던 곳으로 최근 다시 살 수 있도록 제가 허락한 곳이었습니다. 손님방의 문을 열자 그 곳에서 제 사무관이 자다가 일어난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며칠 간 그곳에서 머물렀던 흔적이 역력했습니다(그가 전에 머물렀던 한국인 방에 2월부터 다시 살도록 허락은 했지만 손님방에 그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 방이 저희 집 현관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경찰과 헌병들은 사무관을 체포했습니다. 제 두 아들의 말에 따르면(저는 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사무관이 코피를 흘릴 정도로 때리고 발로 찼으며 어떤 경찰은 작은 채찍으로 그를 때렸습니다. 그들은 비어 있는 한국인 방에서 얇은 종이로 된 등사인쇄 사본이 동그랗게 구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조사관이 제게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한국인 방에서 인쇄된 통지서와 제 서재의 등사판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한 소년이 자백했다고 합니다. 물론 저는 모르는 사실이며 설령 사실이라면 제가 서울을 떠나 있었던 3월 17일부터 25일까지 9일간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저희 집을 수색하는 동안 스눅(Snook) 양|| 모우리(Mowry) 씨|| 질리스(Gillis) 씨|| 맥머트리(McMurtrie) 씨|| 레이너(Reiner) 씨|| 베어드(Baird) 박사의 집과 외국인 학교 기숙사도 수색당했습니다. 버츠(Btts) 양은 그들이 그녀의 집을 수색하러 왔을 때 수색영장이 없고 행정대리권도 부족하며 경찰에게는 대리권이 없으므로 수색을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그들은 수색을 포기했습니다. 스눅(Snook) 양 집에서는 여자 요리사와 샐먼(Salmon) 양의 사무관인 젊은 남자를 체포했고|| 샐먼(Salmon) 양의 방을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모우리(Mowry) 씨 집에서는 도시 교회학교(City Church School)의 교사 한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교장인 모우리(Mowry) 씨를 만나 학교 개교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그 집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방금 풀려난 학생이 그의 출감 소식을 전하려 이 집에 왔었습니다. 교사는 이야기를 마치고 일본 경찰이 왔을 때 막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학생 역시 체포되었을 것이며 경찰들은 모우리(Mowry) 씨 사무관을 찾지 못한 것에 실망했을 것입니다. 질리스(Gillis) 씨 집에서는 2주일 동안 그 집의 정원에서 일하던 소년과 신학교 학생|| 서울 의대생|| 이전에 이곳 학교의 학생이 체포되었습니다. 세 명의 학생은 모우리(Mowry)씨가 기도 모임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 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된 것입니다. 레이너(Reiner) 씨 집에서 누군가 그의 집 현관에 서 있다가 일본 헌병들을 피해 달아나려다가 발각되어 수차례 매질을 당하고 머리를 발로 채어 결국 쓰러져 버렸습니다. 베이어드(Baird) 박사의 집에서는 그의 사무관 역할을 했던 대학생이 체포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지금까지 저희들 거처나 집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공포에 떨고 있으며 구타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서리를 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찰이 나타나면 죄가 없어도 숨거나 도망치려고 합니다. 경찰들은 저희 집 요리사도 수색했으나 체포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경찰들은 체포한 사람들을 고의로 학교 기숙사에 데리고 와서 등사판을 몰수하고 교수들이 모이는 남부 장로교 거처의 유리창을 부수는 등 난폭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곳에서는 한 남자가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세 명의 일본인들이 제게로 와서 제 서재의 등사판을 가지고 가겠다고 하여 저는 등사판을 가지고 간다는 증명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저녁에 경찰서에서 등사판을 찾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7|| 8시에 모우리(Mowry)씨가 제게 전화를 걸어 경찰서에서 사람이 왔는데 제가 경찰서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저의 집 앞에서 만났고 함께 경찰서로 갔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했더니 세 명의 경찰들이 작은 방에 앉아 있었고 우리는 취조를 위해 모우리(Mowry) 씨가 호출되기 전까지 35분 동안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경찰이 오더니 이곳에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저는 “우리가 체포된 이유는 무엇이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는 “신경 쓰지 마시오. 괜찮을 거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물론 괜찮겠지요”라고 대답한 뒤 다시 우리의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모우리(Mowry) 씨가 취조실로 불려 간 뒤 한 시간을 기다린 뒤 저도 취조실로 불려 갔는데|| 그곳에는 저의 집을 수색했던 행정관과 통역관이 있었으며 신문기자와 중년의 관료도 있었습니다. 그 중년의 관료는 잠시 동안만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매우 정중하게 질문을 했으며 3월 1일의 독립운동에 대해 아는 것이나 연관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집에 있는 제 비서관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비서관이 저의 집의 열쇠를 제 허락 없이 사용할 수도 있는지|| 등사판이 사용된 것을 제가 알았는지|| 저의 서재에 있는 비서관의 책상에서 발견된 세 장의 서류|| 제가 서울을 떠나 있었던 사실|| 여신도와 비서관의 급료에 대해 물었으며 제가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며 부유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제 개인 재정 상태에 대해서도 질문을 했습니다. 한 시간의 심문 끝에 그들은 조사중인 사건들에 관해 제가 지시하거나 아는 바가 없으며 제 비서관 및 다른 사람에 의해 일이 추진된 것으로 인정하고 등사판 문제 역시 비서관이 그의 업무 수행을 위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내와 아이들이 아파서 제가 서울을 떠나 병원에 있었던 사실|| 제 명의로 되어 있는 땅들은 선교 단체나 교회|| 학교의 소유임을 파악한 뒤 심문을 마쳤습니다.저녁때가 되어 저와 모우리(Mowry) 씨가 집으로 갈 때쯤 저는 경찰의 호위를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근래 철길에서 두 명의 일본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선교사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많아 밤에 외국인들이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말했으나 선교사들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낸 일본 신문 기사의 내용과 하급 일본인 노동자들이 선교사들에 대해 얼마나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호위를 해 주겠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며 경찰서의 중앙 사무실로 안내하였습니다. 그곳에는 그날 오후 체포되었던 학생들과 비서관들|| 그리고 전날 밤에 체포되었던 베어드(Baird) 박사의 통역사였던 학생이 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20분쯤 기다리자 행정관과 통역관이 들어와 경찰이 호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모우리(Mowry) 씨를 기다리겠다고 하자 그의 취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모우리(Mowry) 씨를 만나 먼저 가겠다고 하고 그를 기다릴 부인께 걱정하지 않도록 잘 이야기하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조금 후에 그를 경찰과 함께 집으로 보내겠다며 만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 경찰관이 “지금 그는 조사를 받는 중이니 그 얘기는 나중에 내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인 경찰과 함께 경찰서를 나왔으나 밤이 늦어 모우리(Mowry) 씨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저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머리가 몹시 아파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습니다. 아침 7시에 맥머트리(McMurtrie) 씨는 모우리(Mowry) 씨 부인의 전화를 받았는데 모우리(Mowry)씨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맥머트리(McMurtrie) 씨가 저의 집으로 와서 혹시 그를 만났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곧 번헤이즐(Bernheisel) 씨와 함께 경찰서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만약 모우리(Mowry) 씨가 체포되었다면 경찰서에 가서 그 이유를 묻고|| 영사님께 전보를 보내고|| 모우리(Mowry) 씨를 만나 음식을 전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번헤이즐(Bernheisel) 씨가 영사님께 글을 보낼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일이 발생하여 영사님께도 걱정스런 편지를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4월 5일 토요일 오후 스눅(Snook) 양의 여자 요리사|| 샐먼(Salmon) 양의 비서관|| 도시학교(City School) 교사|| 질리스(Gillis) 씨의 정원을 관리하는 소년|| 베어드(Baird) 박사의 사무관이 석방되었고|| 다음날 일요일 오전에는 베어드(Baird) 박사의 통역사가 풀려났습니다. 이 통역사의 말에 의하면 그는 구타를 당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조사중에 모욕적인 언행을 참아야 했다고 합니다. 3월에 대학을 졸업한 모우리(Mowry)씨의 비서관이 토요일 오후에 맥머트리(McMurtrie) 씨를 찾아와 경찰에 자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곧 무어(Moore) 박사와 번헤이즐(Bernheisel) 씨가 경찰서로 간 다음 경찰관들에게 모우리(Mowry) 씨를 석방시키면 그 비서관이 자수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모든 학생들과 모우리(Mowry) 씨의 비서관인 이보식(Yi Po Sik) 학생을 아는 일본 비서관이 무어(Moore) 박사의 자동차로 맥머트리(McMurtrie) 씨의 집에 도착했고 그 비서관은 자수했습니다. 맥머트리(McMurtrie) 씨는 그 학생과 조사관을 자동차에 태워 경찰서로 함께 갔으며 우리는 학생이 구타를 당하지 않도록 당부했습니다. 이렇게 이보식(Yi Po Sik) 학생은 솔선하여 경찰서로 간 것입니다. 그는 저에게 충고를 부탁했고 저는 그 자신을 위한 일을 결심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금요일에 경찰이 왔을 때는 학생이 도주한 뒤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아는 모든 상황입니다. 다음에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우리(Mowry)씨는 결코 법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재배서명추신: 이 편지의 사본 세 장을 함께 동봉합니다.

    114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21발신주소: 한국 평양(PyengYang)발신자: 수신자: 브라운(A. J. Brown D. D.) 목사님수신주소: 뉴욕 5번 가 155 친애하는 브라운(A. J. Brown D. D.) 박사님께||요즘은 바빠서 서신을 보내 드리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 아셔야 할 내용의 성명서의 사본 두 장을 동봉합니다. 읽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4월 19일 모우리(Mowry) 씨의 재판이 열려 6개월의 징역 선고를 받았습니다. 갑작스런 재판과 판결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 변호사를 선임하여 항소를 준비하고 보석금 신청서를 작성했습니다. 모우리(Mowry) 씨는 19일 2시에 보석금으로 풀려났습니다. 이 재판에 미국 부영사도 참석하셨습니다. 아마 항소심은 5월 1일에서 10일 사이에 열릴 것이며 그 결과가 미국에 통보될 것입니다. 총영사님께 보내 드린 정보는 국무성을 통해 박사님께 전달될 것입니다. 정치적인 압력으로 증거와는 상관없이 법원에서 그를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는 이상 모우리(Mowry) 씨는 무죄임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미묘한 시대와 상황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모릅니다.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겠군요.이 편지가 박사님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재배필기체 부분 해독 불가

    115 한국의 평양(PyengYang) 지방 법원에서 열린 모우리(E. M. Mowry) 목사 재판에 관한 보고서

    4월 10일 목요일 저는 일본 행정관인 이타노(Itano) 씨에게서 11일에 모우리(Mowry) 목사를 만나도 된다는 승낙을 받았으며, 그는 모우리(Mowry) 여사에게 12일에 모우리(Mowry) 목사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를 통해 아직 모우리(Mowry) 목사에 대한 조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사가 끝나고 모우리(Mowry) 목사가 법정에 서게 되면 제게 알려 달라고 부탁을 해놓았습니다. 11일 저는 모우리(Mowry) 목사를 만났고 15˜20분 동안의 면회가 허락되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한 조사관은 모우리(Mowry) 목사가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로 이송된다고 말했습니다. 12일 모우리(Mowry) 목사는 그 조사관을 만나 자신이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14일 월요일 오전 메스 병원(Meth Hospital)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우리(Mowry) 목사의 재판이 내일 15일 오전 10시에 열린다는 사실을 제게 알리기 위해 일본 헌병이 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간단하게만 그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저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15일 아침에 번헤이즐(Bernheisel) 씨와 저는 10시가 다 되었을 즈음 법원에 도착했고 그날 오전에 법정이 열린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10시가 조금 지난 뒤 우리는 법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판사, 검사(헌병)가 있었고 긴 의자에는 통역관과 서기가 앉아 있었으며 그들 뒤에는 군인들이 몇 명 서 있었습니다. 아래쪽에 앉아 있는 모우리(Mowry) 목사 옆에는 여섯 명의 헌병과 경찰들이 있었고, 방청석에는 세 명의 일본 기자들, 3, 40명 가량의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모우리(Mowry) 씨는 일어서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다음은 판사가 통역관을 통해 모우리(Mowry) 씨에게 질문한 사항입니다.Q. 이름이 무엇입니까?A. 모우리(E. M. Mowry)입니다.Q. 나이는? A. 서른아홉 살입니다. Q. 직업은 무엇입니까? A. 선교사입니다. Q. 거주지는 어디입니까? A. 평양(PyengYang) 시 신양리(Sin Yangli)입니다. Q. 미국에서의 본 거주지는 어디입니까? A. 미국, 오하이오(Ohio) 주 맨스필드(Mansfield) 시입니다.판사는 다음과 같은 혐의 사항을 낭독했습니다. “경찰이 당신의 집을 수색한 결과 이균호(Yi Kyunho), 김태술(Kim Taisul), 이인선(Yi Inayun)은 4월 2일부터 4일까지, 이보식(Yi Posik)은 열흘 동안 길진경(Kil Chinkyung)은 여러 날 동안 피고의 집에 머물도록 허락했음이 밝혀졌습니다.”Q. 한국말을 알아듣습니까? A. 꽤 알아듣는 편입니다. Q. 한국어로 재판을 진행하는 것에 이의가 있습니까? A. 아니오. Q. 훈장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A. 아니오. Q. 처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A. 아니오. Q. 종교는 무엇입니까? A. 기독교입니다. Q. 무슨 종파입니까? A. 장로교입니다. Q. 학력 사항에 대해 이야기 해보십시오. A. 오하이오(Ohio)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우스터(Wooster) 대학을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주 피츠버그(Pittsburg) 시에 있는 서양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습니다. Q. 재산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까? A. 약 2천 엔 정도 있습니다. Q. 가족 사항은? A. 아내와 두 아들이 있습니다. Q. 그들이 이곳에 살고 있습니까? A. 예. Q. 언제 한국에 왔습니까? A. 1909년에 왔습니다. Q. 한국에 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A. 선교 활동을 위해 왔습니다. Q. 직접 왔습니까? A. 예. Q. 평양(PyengYang)으로 직접 왔습니까? A. 예. Q. 평양(PyengYang)으로 온 뒤 피고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A. 숭실학교(Syoong Sil School, 기독교연합 대학)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Q. 교회와 어떤 관계입니까? A.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Q. 학교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A. 숭실학교(Syoong Sil School) 교사이며, 숭덕학교(Soong Tuk School, 남자 중학교)와 숭현학교(Soong Hyun School, 여 중등학교)의 교장입니다. Q. 숭실학교(Syoong Sil School)에서는 얼마 동안이나 학생들을 가르쳤습니까?A. 1911년부터 가르쳤습니다. Q. 계속해서 가르쳤습니까? A. 미국에 있었던 1년을 제외하고 계속 가르쳤습니다. Q. 대학과 학교 양쪽에서 가르쳤습니까? A. 대학에서만 가르쳤습니다. Q.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A. 동물학, 생리학, 지질학,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Q. 신학교에서도 가르쳤습니까? A. 아니오.Q. 숭덕학교(Soong Tuk School)에서 가르쳤습니까? A. 예. 영어를 조금 가르쳤습니다. Q. 이보식(Yi Posik)을 압니까? A. 예. Q. 그를 가르쳤습니까? A. 예. Q. 그와 가까운 사이인가요? A. 예. 제 비서관입니다. Q. 얼마 동안 알고 지냈습니까? A. 약 6년 정도 됐습니다. Q. 언제까지 그가 피고의 비서관 업무를 수행했습니까? A. 제가 체포될 때까지입니다. Q. 그의 학비를 조달했습니까? A. 예. 약 5년 동안 조달했습니다. Q. 길진경(Kil Chinkyung)을 알고 있습니까? A. 예. Q. 어떤 관계입니까? A. 그를 잘 알고 있으며 그의 형이 저의 친한 친구입니다. Q. 그의 형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A. 길진형(Kil Chinhyung)입니다. Q.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까? A. (대답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Q. 길진경(Kil Chinkyung)에게 학비를 조달하거나 특별 지도를 한 적이 있습니까? A. 아니오. Q. 이균호(Yi Kyunho)를 알고 있습니까? A. 예.Q. 특별 지도를 한 적이 있습니까? A. 예. Q. 가까운 사이입니까? A. 예. Q. 그가 피고의 집을 방문했습니까? A. 예. Q. 이인선(Yi Inayun)을 알고 있습니까? A. 예. Q. 그와 가까운 사이입니까? A. 제 학생입니다. 그와 저는 중앙교회(Central Church)에도 참석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Q. 학비를 조달하거나 특별 지도를 한 적이 있습니까? A. 아니오. Q.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까? A. 예. Q. 김태술(Kim Taisul)을 알고 있습니까? A. 예. Q. 그 역시 피고의 비서관이었습니까? A. 예. Q. 학비를 조달했습니까? A. 비서관으로서 급료만 지불했습니다. Q. 급료는 얼마였습니까? A. 시간으로 계산했습니다. 시간당 10엔이었습니다. Q.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A. 음악 복사 및 번역 등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Q. 그가 낮에만 피고의 집에 머물러 있고 밤에는 그의 집으로 돌아갑니까? A. 그가 알아서 했습니다. Q. 그가 피고의 집에서 자는 경우도 있었습니까? A. 아니오. Q. 언제부터 그가 피고의 비서관이 되었습니까? A. 1월 19일부터입니다.Q. 3월 1일에 숭덕학교(Soong Tuk School)에 갔습니까? A. 아니오. Q. 이(Yi) 왕자의 추모식에 참여했습니까? A. 아니오. Q. 당신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서 회합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A. 회합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초대되지는 않았습니다. Q. 한국인들이 학교에서 추모식을 하겠다고 요청하여 이를 허락했습니까? A. 아니오. Q. 그 추모식과 연관이 있거나 책임자에게 추모식에 대해 동의했습니까? A. 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책임자가 있지만 그가 동의했는지 여부를 모릅니다. Q. 추모식 이후에 독립 시위가 일어난 사실을 알았습니까? A. 예. 그 사실을 오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Q. 독립 시위를 위해 기독교인들과 학생들이 그곳에서 만난 사실을 알고 있나요? A. 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Q. 그들이 독립선언문을 읽고, 연설을 하고 태극기를 흔든 사실 등을 들었습니까? A. 예, 들었습니다. Q.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외치며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A. 예. 그 사실을 들었으며 보기도 했습니다. Q. 시위 주동자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A. 아니오. Q. 누구에게 그러한 사실들을 들었습니까? A. 여러 사람들에게 들어서 개별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Q. 학생, 외국인, 기독교인들에게 들었습니까? A. 예. 그들 모두에게서 들었습니다. Q. 몇 시에 거리에 나와 시위를 보았습니까? A. 오후쯤에 대학교 큰 거리에서만 보았습니다. 읍내로 갔지만 그곳에서의 시위는 보지 못했습니다.Q. 이 다섯 명의 학생 가운데에 ‘만세’를 외친 사람을 보았습니까?A. 아니오. Q. 그렇다면 그들이 ‘만세’를 외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A. 아니오.Q. 그들이 시위에서 ‘만세’를 외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A. 아니오. 저는 그들에 대해 특별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Q. 시위에 참여했던 모든 학생들을 경찰이 수배한 사실은 들었습니까? A. 예,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Q. 언제 들었습니까? A. 4월 4일 저희 학교 개교일에 모든 학생이 체포될 것이라는 것을 나라하시(Narahashi) 씨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Q. 모든 학생이 체포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라하시(Narahashi) 씨에게 들었습니까? A. 그에게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교사 회의 시간에 그가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고들 말했습니다. Q. 대학교와 학교 학생을 체포한다는 것이었습니까? A.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Q. 3월 5일 이보식(Yi Posik)이 피고의 집에 찾아 와서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까? A. 그가 저희 집에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저희 집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사항은 잘 모르겠습니다. Q. 머물 곳이 없기 때문에 피고의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했습니까? A.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Q. 3월 5일에서 14일까지 그가 피고의 집에 머물면서 같이 식사도 했습니까? A. 예. Q. 피고의 집에서 그가 잠을 잘 수 있도록 이불이나 기타 물품을 제공했습니까? A. 예. Q. 그리고 그가 피고인의 집에 있는 특정 방에서 하루밤 잠을 잤습니까? A. 예.Q. 그가 항상 피고의 집에 머물고 외출을 하지 않았습니까? A. 아니오. 외출은 했습니다. Q. 밤에도 낮에도 외출했습니까? A.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Q. 이보식(Yi Posik)은 자신이 피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피고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까? A. 그는 제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짐작은 했습니다.Q. 그가 피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을 했다면 그를 숨겨 준 것입니까? A. 주인으로서 손님을 대접하는 차원에서 그를 머물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법에 위배되는 일을 하여 피신하고 있다면 저는 보호해 줄 수 없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Q. 그가 피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보호해 줄 수 없다고 말하고서 그를 머물게 했습니까? A. 예. Q. 3월 7일 밤 길진경(Kil Chinkyung)이 피고의 집을 방문했습니까? A. 그날 일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Q. 피고는 그가 수배되어 도주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A. 예. Q. 피고의 집에 그를 머물도록 승낙했습니까? A. 그를 머물게 해줄 수는 있어도 보호해 줄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Q. 그의 어머니가 그의 신변을 걱정하여 피고의 집으로 보내서 피고는 그가 머물도록 허락했습니까? A. 그렇다고 생각이 되지만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Q. 그는 겁에 질려 피고의 집에 왔습니까? A. 아니오, 그는 저희 집에 일찍 와서 그날 밤을 지내고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Q. 길진경(Kil Chinkyung)이 어머니와 살고 있음에도 외국인의 집에 와서 잔다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A. 아니오. 한국인들이 종종 저희 집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Q. 이보식(Yi Posik)과 길진경(Kil Chinkyung)이 같은 방에서 잠을 잤습니까? A. 예. Q. 길진경(Kil Chinkyung)에게 음식을 제공했습니까? A. 예. Q. 그 세 명의 학생들이 모펫(Moffett) 박사 자택의 빈방과 신학교에서 등사판으로 무언가를 인쇄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A. 아니오. Q. 그 사실을 몰랐다면 그들이 비밀리에 인쇄한 성명서를 배포하였으며 경찰이 그들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A. 경찰이 그들을 체포하려 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들이 성명서를 배포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Q. 경찰이 그들을 특별 수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겠군요. A. 아니오. Q. 그렇다면 경찰이 그들을 특별 수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들었습니까? A. 아니오. 듣지 못했습니다. Q. 세 명의 학생들이 4월 1일에 피고의 집을 방문했습니까? A. 학생들이 저희 집에 오긴 했지만 언제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이인선(Yi Insyun)과 이균호(Yi Kyunho) 학생이 저희 집에 와서 잠을 자겠다고 해서 저는 그렇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Q. 경찰이 그들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까? A. 그날 밤은 별 생각이 없었으나 다음날 그들이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저의 집에서 잠은 재워 줄 수 있지만 그들이 법을 위반한 사실이 있다면 보호해 줄 수는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Q. 그들에게 이불과 음식을 제공했습니까? A. 이불만 제공하고 음식은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Q. 이인선(Yi Insyun)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4월 1일 피고에게 갔고, 피고는 그가 도주중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으며 피고의 집에서 잠을 자도록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4월 2일에 그가 피고에게 도주중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또한 4월 5일 도리스(Doriss) 양의 집에 있던 김태술(Kim Taisul)을 피고의 집에 머물도록 했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A. 이인선(Yi Insyun)을 저의 집에 머물도록 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태술(Kim Taisul)에 대한 진술은 모르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인선(Yi Insyun)은 그가 경찰을 피해 도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제게 전혀 말하지 않았습니다. Q. 경찰이 김태술(Kim Taisul)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가 피고의 집에 머물도록 허락했습니까? A. 경찰이 그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Q. 그러면 추측은 했습니까? A. 예, 그가 불안해 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는 있었습니다. Q. 그들이 피고의 집에서 1일부터 3일까지 사흘 동안 머물렀습니까? A. (대답이 들리지 않았음)Q. 한 명은 사흘 동안, 한 명은 이틀 동안, 한 명은 하루만 머물렀습니까? A. 예. Q. 피고의 서재에서 두 명의 학생이 잠을 잤습니까? A. 예. Q. 3일에는 두 명의 학생이 침실에서 잠을 잤습니까?A. 예. Q. 그들에게 이부자리와 음식을 제공했습니까? A. 이부자리만 제공하고 음식은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Q. 그들은 어디에서 식사를 했습니까? A. 모르겠습니다. Q. 같은 집에 있었으면서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모를 수 있습니까? A. 모릅니다. Q. 그들도 먹어야 할 것 아닙니까? A. 정말 모릅니다. 저의 집에서는 먹지 않았습니다. Q. 피고의 집에 한국인 요리사가 일을 하고 있습니까? A. 예. Q. 누구입니까? A. 김동협(Kim Tunghip)입니다.Q. 그가 피고의 집 근처에 살고 있습니까? A. 예. Q. 그가 학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했습니까? A. 모릅니다. Q. 그 요리사에게 월급은 주지만 음식은 제공하지 않습니까? A. 예. Q. 세 명의 학생은 그 요리사로부터 매 끼니마다 돈을 주고 음식을 제공받았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A. 아니오. Q. (질문이 들리지 않았음)A. 모릅니다. Q. (이 질문 역시 들리지 않았음)A. (대답이 희미하게 들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너무 많은 손님” 그리고 “모릅니다”라는 소리가 들렸음) Q. 앞서 호명한 다섯 명의 학생들을 경찰이 수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했지만 그들이 피고의 집에서 잠을 자겠다고 요청했을 때 피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허락했습니다. 피고는 미국인으로서 다섯 명의 학생들과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까? A. 없습니다.Q. 그들과는 안면이 있는 학생과 교사 관계입니까? A. 예.통역관이 학생들이 진술한 증언을 낭독했습니다. 다음은 이 증언을 요약한 것입니다. 김태술(Kim Taisul)은 4월 1일(날짜가 잘 안 보임) 이인선(Yi Insyun)과 함께 피고의 집에서 잠을 잤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인선(Yi Insyun)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도주하는 중이었으며 피고의 집에서 잠을 청했고 피고가 허락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길진경(Kil Chinkyung)은 피고의 집에서 이틀 밤을 지냈고 그곳에서 이보식(Yi Posik)을 만났으며 그와 함께 잠을 잤다고 진술했습니다. 길진경(Kil Chinkyung)은 자신이 모우리(Mowry) 씨 집에 갔었는데 피고가 그의 도주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보식(Yi Posik)도 모우리(Mowry) 씨가 그의 도주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으며 “저는 3월 OO일에 그곳에 있었습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이균호(Yi Kyunho)는 4월 어느 날 모우리(Mowry) 씨의 집에서 하루 밤을 보냈으며 피고가 그의 도주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진술했습니다. 그 역시 이인선(Yi Insyun)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보식(Yi Posik)은 세 번째 취조에서 진술하기를 피고의 집에 있는 작은 방에서 지내다가 침실에서 길진경(Kil Chinkyung)과 함께 또 다른 하루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길진경(Kil Chinkyung)은 작은 방에서 하루 밤만 자고 침실에서는 이보식(Yi Posik)과 함께 지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균호(Yi Kyunho)는 4월 1일에 그곳에서 잠을 잤다고 진술했습니다. 증언 낭독이 끝나고 판사는 이 증언에 대해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Q. 피고는 자신의 집에 그들을 머물게 했습니다. 피고가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A. 저는 그들을 손님으로서 저의 집에 있도록 한 것이지 도망자를 숨기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에게도 숨겨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며 그들이 저의 집에서 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되며 숨겨 주거나 보호하지 못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Q. 그렇다면 만약 그들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피고에게 이야기했고 숨겨 달라고 말했다면 피고의 행동이 범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A. 경찰이 그들을 수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숨겨 주었다면 잘못된 일이겠지요. 하지만 전 그들이 범죄자들인지도 몰랐습니다. 경찰이 그들을 체포하려고 하는데 그들을 숨겨 주었다면 잘못된 일이겠지요. Q. 경찰이 그들을 체포하려고 왔을 때 피고는 그들을 숨기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피고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해 변론할 말이 있습니까? A. 그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관해서 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들에게도 미국인으로서 그 운동과 관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Q. 또 할말이 있습니까? A.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저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했으며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Q. 피고의 한국 이름은 무엇입니까? A. 모오리(Mo Oi Ri)입니다. 대리인이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증거 및 피고의 진술에 따라 다섯 명의 학생들은 경찰이 수배하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그들이 피고의 집에 피신하고 있었음을 피고는 부분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진술에 따르면 피고에게 피신을 부탁했다고 하지만 피고는 그들이 보호를 요청하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피고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과 같으므로 죄의 경중은 다르지만 학생들과 피고 모두 법을 위반한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피고에게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백 엔 이하의 벌금형을 선고하는 바입니다. 3월달 동안에는 서울에서 평양(PyengYang)에 걸쳐 발생한 시위에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어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한국인을 선동하여 한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도록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역시 유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와이(Hawaii)의 미국 영토와 필리핀에서 윌슨(Wilson) 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일본인들이 그들을 은닉했다면 미국의 행정 관리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일본인들이 그러한 정치 선동자들을 은닉한 사실은 그곳에서도 분명 죄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피고는 학생들의 법 위반 사실 및 그들을 피고의 거처에 머물게 한 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모른다고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명백히 유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가 연루되었고, 피고가 독립운동을 선동한 자들을 은닉해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입니다. 피고의 죄는 막중하지만 인간애와 친절의 발로로 갈 곳 없는 학생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따라서 6개월의 징역을 선고합니다.”(박사님께서는 이 형량이 가벼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선고는 듣지 못했습니다.)이 말이 끝나고 통역관이 “대리인의 말을 이해했습니까?”라고 말하자A. 잘 이해했습니다. (대강 들었소)Q. 논증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까?모우리 씨는 대리인의 6개월 선고 요구를 분명 잘못 이해하고, "어떤 판결이 내려졌습니까? 6개월이 판결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Q. 당신이 유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A. 그들을 숨길 의도가 없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저는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그들을 체포하려는 요망에 대한 어떤 정보를 받고 그들을 숨겼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겠지만, 그런 정보가 제게 주어진 적이 없었고 체포하려는 시도도 전혀 없었습니다.Q. 당신 이름에서 'E. M'은 무엇을 뜻합니까?A. 제 정식 이름이 엘리 밀러 모우리(Eli Miller Mowry)입니다.그런 다음 판사가 "재판이 끝났습니다. 판결은 19일 10시에 언도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이후 용수를 모우리 씨의 얼굴과 머리에 씌우고, 한 경찰관이 그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우리는 그 재판에 있은 사람이 아닌 대리인 이타노 씨(Mr. Itano)에게 즉시 가서, 일본법에 따라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변호사를 선임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당신들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나는 당신들에게 어제 오후에 재판이 오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재판이 오늘 개최된다는 것을 모우리 씨가 언제 알았는지를 물었습니다.그러자 그는 "어제 오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우리 씨가 변호사를 원하는지의 질문을 받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아니오, 그것은 중대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관례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재판이 그처럼 갑작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재판의 연기를 요청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정보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일본법에서 새로운 재판을 요청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고, 그는 "아니오, 하지만 판결이 언도된다면 항소를 할 수 있고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석방된다면 우리가 변호사를 선임할 기회는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유죄 선고를 받는다면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는 모우리 씨와 변호사에 관해, 혹은 연기 요청에 관해, 혹은 그 사건과 관련 있는 어느 것에 관해서든 의논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허용된 면회에서 우리가 그의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것도 말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 당했기 때문입니다. 대리인은 그들이 그의 감금을 연장시키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위해 그 사건에 대한 고려를 재촉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다음 전신국에 가서 그 사실들에 관한 진술을 총영사에게 전보로 통지했습니다.사무엘

    116 번헤이즐이 레오 버그홀즈 총영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자: 번헤이즐(C. F. Bernheisel) 수신자: 레오 버그홀즈(Leo Bergholz) 미국 총영사수신주소: 서울|| 한국총영사님께모펫(Moffett) 박사는 모우리(Mowry) 씨가 평양(PyengYang) 경찰서로 끌려간 경위에 대해 영사님께 서신을 꾸준히 보내 드렸습니다. 이제 그날 이후|| 즉 4월 6일부터의 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영사님께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토요일 오전 아침 식사 시간에 경찰서로 간 모우리(Mowry) 씨는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맥머트리(McMurtrie) 씨와 기자가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경찰서로 갔습니다. 그들은 모우리(Mowry) 씨가 전날 밤 조사를 받은 후 죄가 밝혀져 교도소로 보내졌다고 저희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죄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고 모우리(Mowry) 씨가 투옥된 교도소의 재판소에서 상황을 더 알아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교도소로 가는 도중에 우체국에 들러 모우리(Mowry) 씨가 투옥된 사실에 대해 영사님께 전보를 보냈습니다.교도소에 도착해서 모우리(Mowry) 씨를 만났으나 그는 저희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고 다만 공인 대리인에 대해서만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공인 대리인을 만나서 모우리(Mowry) 씨가 투옥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대리인은 이 문제가 현재 조사중에 있으며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특별한 내용은 말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모우리(Mowry) 씨가 오랫동안 교도소에 감금당할 것 같은지 저희가 묻자 그는 조사를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교도소 관계자들을 만나 교도소 안에서 모우리(Mowry) 씨와 면회할 수 있는 허가증을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맥머트리(McMurtrie) 씨는 집으로 돌아갔고 저는 교도소로 가서 한 시간 이상 기다린 후에야 모우리(Mowry)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우리(Mowry) 씨와 저는 그곳에서 한국어로 대화를 해야 했으며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모우리(Mowry) 씨가 말하기를 한쪽 구석에 악취가 나는 변기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매우 좋은 방에 혼자 수감되어 있으며 교도관들도 친절하여 대접을 잘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자신은 잘 지내고 있으니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도록 그의 부인에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면회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한 교도관이 모우리(Mowry) 씨가 사용할 물건을 교도소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잡지 등은 교도소 안으로 반입할 수 있었지만 코트|| 의자|| 약병 등은 반입할 수 없었습니다. 교도소 관계자들은 교도소 내에 의사가 있기 때문에 모우리(Mowry) 씨가 아플 경우 담당 의사가 진료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재배서명 번헤이즐(C. F. Bernheisel)

    117 모우리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07발신주소: 평양(PyengYang), 한국친애하는 친구들에게,이 편지는 한국이 아닌 중국을 통해서 자네들에게 보내게 되네. 이 서신의 내용은 일본 정부가 국외로 새어나가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세계에 알려야 할 내용이네. 내가 다시 편지를 보내게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은 외국인에게는 큰 위험은 없는 곳이니 미국에 있는 친구들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토요일에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네. 이 시위에 대한 몇 가지 중국 신문 기사와 독립선언서를 동봉하며, 시위의 원인에 대한 세부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네. 한 달 전 한국의 전 국왕이 사망했네. 전 국왕은 한국인의 평화와 행복을 파괴할 일본의 한국 통치에 관한 내용의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는 소문도 있고 자살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네. 그 문서는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도 제출된 바 있네. 지난 월요일에 전 국왕의 장례식이 치러진 다음 토요일 오후 1시에 대규모 시위가 전국에서 발생했다네. 하지만 그 시위는 평화적이었으며 어떠한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네. 이 나라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고 싶네. 독립선언서에 33인이 서명을 했고 그 중 11명이 기독교인들이었네. 소문에 의하면 시위에 관련된 것은 다름아닌 교회라고 하네. 하지만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총 시위에는 전국민이 참여했다네. 교회가 시위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은 많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으로서 그들이 나라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며 중대한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의논할 단체가 없는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네.토요일 오후 1시에 대규모 집회가 모두 열렸으며, 이 집회는 한국인들의 자유를 부르짖는 시위로 막을 내렸다네. 평양(PyengYang)에서는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집회가 열렸고, 또 다른 집회가 감리교회 앞마당에서 열렸다네. 이러한 전국적인 집회 및 시위에 정부는 매우 놀랐다네. 이곳 초등학교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몇 가지 연설과 독립선언서 낭독,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네. 일본 경찰들이 학교로 몰려와 군중들에게 해산을 명령했지만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았다네. 그때 집회의 지휘자가 군중들에게 자신은 경찰에게 체포될 것이니 돌아가라고 말했네. 그 집회에는 세 명의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모펫(Moffett) 박사도 있었다네. 경찰서장이 모펫(Moffett) 박사에게 말하기를 군중들을 해산시키라고 했고 박사는 사람들에게 그 말을 전했으나 모두들 돌아가지 않았다네. 잠시 후 군중들은 집회의 지휘자를 둘러싸고 자신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자고 했다네. 그들 모두는 정의와 권리를 실현한다는 각오로 침착했다네. 나는 대부분의 군중들이 자리를 뜨고 나서 거리로 나왔다네. 경찰서 앞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고 태극기를 빼앗는 경찰들에게 그들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네. 그곳에서는 감리교회에서 온 세 명의 남자가 체포되었고 또 다른 연설이 있었다네. 도시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4시경에 대규모의 군중들이 자유를 외치며 선교사 거주 지역을 지나 시내로 향하고 있었네. 이 도시 한쪽에는 강이 있고 선교사 거주지는 그 맞은편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회는 대학 교정에서 열렸다네. 토요일 저녁 대규모 군중들이 대학 도서관 앞에 모였고 학생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가두 시위를 벌였다네. 군중들은 시내에서 경찰과 마주쳤고 오후의 시위 이후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체포되었다네. 군중들은 10시경에 해산했다네. 토요일 밤에 모펫(Moffett) 박사와 무어(Moore) 박사가 경찰서로 호출되어 일요일 교회 예배를 볼 수 없으니 모든 교회 관계자들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네. 다음날 일요일에는 교회 예배가 없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작은 언덕에 올라 일요학교를 열었고 예배도 드렸다네. 그날 저녁에는 나도 경찰서에 불려 가 월요일 아침 나절에 학교 건물에서 있었던 다른 집회를 알리는 삐라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네. 경찰서장은 전형적인 잔인한 인물로서 내가 학교 교장으로서 그러한 삐라가 외부로 유출되게 한 점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며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당부했다네.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네. 다음날 오전 나는 학교에 갔었고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경찰과 군인들이 아침 일찍부터 대학 교정에 주둔해 있었지. 11시경 드디어 일이 터졌다네. 대학 근처에 있는 동산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었고 경찰들은 그들을 쫓아 다느니라 여념이 없었다네. 그들이 한 무리를 이룰 쯤 어디선가 또 다른 군중들이 합세하여 군중의 규모는 더욱 커졌지. 이에 경찰들은 더욱 잔인하게 군중들을 다루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쳤지만 다행히 사망한 사람은 없었네. 평양(PyengYang) 근처의 다른 지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희생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네. 이곳에는 마치 작은 독일이 나타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잔인한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어 몇 가지 적어 보려 하네. 내가 직접 목격한 사건도 있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본 사건과 믿을 만한 소식통에서 나온 사건들도 있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거리에 서 있었던 한 남자에게 경찰이 뛰어와 칼로 그의 등을 찔렀던 사건,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거리에 서 있었던 한 노인에게 군인이 달려왔을 때 그 노인은 그의 웃옷을 열어 보이며 자신을 죽이라고 말했다네. 군인은 노인의 머리를 두 번 때리더니 머리가죽이 벗겨지도록 양쪽 머리의 피부를 절단했다네. 서대문 밖에서 체포된 한 학생의 경우에는 여덟 명의 경찰이 그의 웃옷을 벗긴 후 총검으로 난도질을 한 다음 두 명의 경찰이 몽둥이를 들고 그 학생이 땅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매질을 했다네. 그리고 나서 그 학생은 경찰서로 끌려 갔다네. 여자들과 어린 소녀들에게도 경찰과 군인들은 거리에서 잔인한 행동을 하거나 총검으로 찌르는 일도 많았다네. 열한 살쯤밖에 되지 않은 소년은 경찰에 쫓겨 집으로 도망하던 중 그 경찰의 총검에 너무나도 심한 구타를 당했다네. 지면이 허락한다면 이밖에도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적고 싶다네. 그리고 이러한 잔인함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행해졌던 것이네. 경찰이나 군인들이 군중들을 체포하려 했다면 그러한 학살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체포했을 것이네. 얼마 전에 공립 초등학교의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교복이 벗겨진 채로 학교에 남겨져 있었던 사건도 있었다네. 오늘 저녁에 들은 얘기로는 경찰 국장이 20여 명의 영향력 있는 한국인들을 그의 사무실로 호출하여 일본 정부 아래서 한국인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내용의 성명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고 하더군. 경찰국장은 한 사람씩 불러 날인을 강요했지만 한국인들은 모두 거부하고 돌아갔다고 하네. 또한 경찰국장은 그 한국인들에게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서 한국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해도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런 결정을 포기할 때까지 전세계와 싸우겠다고 말했다네. 그리고 오늘은 상공회의소의 일본인 회장이 20여 명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한 명과 여러 지역의 신문 기자들을 불러 한국인들에게 다시 날인하도록 강요했지만 역시 거부당했다네. 아마도 신문 기자들은 이 사실에 대해 그들 임의대로 기사를 날조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유력층의 한국인들이 날인을 거부한 것은 분명하네. 이 도시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이런 식으로 일본인에게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네. 일본 정부는 해리스(Harris) 주교(이전의 일본 및 한국의 주교)를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 보내 한국인들이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 제출하려고 하는 탄원서를 사전에 막으려고 하고 있네. 이 주교가 서울에 왔을 때 한 학교 교장에게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성명서에 날인을 하도록 설득하면서 날인을 하지 않으면 교장의 직위를 박탈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그 교장은 어쩔 수 없이 날인을 했으며 현재는 신변 보호를 위해 은신하고 있다고 들었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을 감추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해리스(Harris) 주교는 우리 외국인들 모두를 대표하여 모든 외국인들이 현 정부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는, 그 누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거짓말을 할 것이네. 더 쓰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만 줄이겠네. 하느님께서 이 서신보다 더 많은 내용을 자네들에게 알게 해주실 것이네. 이 서신을 배포할 때는 내 이름은 거론하지 말게나. 이곳에서 하염없이 기도하는 가련한 민족을 기억해 주게. 이곳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상황이 나쁘다네. 누군가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좋다고 보네. 벗으로부터(서명)모우리(E. M. Mowry)

    118 메가피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22발신자: 수신자: 렙슬리 메가피(Lapsley McAfee D. D.) 목사수신주소: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 버클리(Berkeley) 2Y32 힐리거스 애비뉴(Hillegass avunue)친애하는 메가피(McAfee) 박사님께||박사님의 열여섯 번째 서신을 받아 보았습니다. 한국의 상황에 관해 동봉한 자료와 서신을 보내 주시는 사려 깊은 박사님의 마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수많은 정보를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박사님께 보내 드렸습니다. 이 편지들은 선교사들 자신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다룬 내용입니다. 박사님께서 언급하신|| 즉 제가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위원회로부터 전체 상황에 대한 많은 정보를 받고 있으며 위원회에서 조만간 공식 성명서를 발표할 것입니다. 한국의 상황은 매우 심각한 상태이며 저희는 이 문제를 깊이 고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모든 정보를 박사님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재배

    119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16발신주소: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 버클리(Berkeley) 2732 힐리거스 애비뉴(Hillegass avunue) 목사관(Pastor’s Residence)발신자: 수신자: 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 목사님수신주소: 뉴욕 시 5번 가 156- 친애하는 브라운(Brown) 박사님께||한국에서 온 두 통의 서신 사본을 박사님께 동봉해 드립니다. 박사님께서 원하시면 서신을 작성한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서신을 작성한 사람들의 안전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박사님께도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서신들은 이번 주 월요일에 캘리포니아(California)로 전달된 것이며 가장 최근의 것입니다. 두 통의 서신은 중국을 통해 온 것들입니다. 제게는 이 서신들의 또 다른 사본이 있습니다. 이전에 어려웠던 한국의 상황에서 중국에서 수행되었던 좋은 활동을 생각하며 이 사본을 공식 발표하도록 중국으로 보낼까 생각해 봤지만 이 문제에 대해 박사님께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선교사들에게도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박사님께서 이미 최근에 중국에서 보내 온 사본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원본은 저의 처남인 조지 맥쿤(George McCune)이 보낸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서신을 공식 발표하게 되면 또 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하원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 현재 버클리(Berkeley)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가 원한다면 이 서신의 사본을 그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그가 이 서신의 사본을 워싱턴의 국무성에 전달할 것입니다. 그는 신뢰할 수 있으며 현명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서신의 작성자를 아무에게나 밝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재배

    120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09 사랑하는 어머니께,마치 프러시아의 야만적인 독재 체재가 이곳에서 부활한 것 같은 무시무시한 한 주를 보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대강 어떻게 된 일인지 글로 적어 보려 합니다. 지난 주에 보내드린 편지에는 이곳에서 독립을 위한 평화적인 시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시위 지도자들은 군중들에게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주지시켰습니다. 마치 미국에서 있었던 7월 4일의 행렬과도 같았습니다. 토요일 저녁 시위 군중들은 밖으로 나와 거리 행진을 시작했지만 일본 군인들이 군중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세 명이 총에 맞았습니다. 어머니, 무기도 갖고 있지 않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던 군중들에게 총을 난사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어요. 그날 밤 한 선교사가 경찰서장의 호출을 받아 경찰서로 갔는데 경찰서장은 그 선교사에게 다음날인 일요일에 교회 예배를 금지한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는 군인들이 보초를 서며 감시하고 있었고 교회 문은 잠겨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왔던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일본인들의 결정을 보여준 본보기였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정식으로 교회 예배를 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으므로 몇몇 사람들은 근처 언덕에 올라 간단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었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군인들이 언덕에서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을 동그랗게 포위하여 총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구타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은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군중들은 우리가 사는 지역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과 신학교 뒤의 언덕에 다시 모였습니다. 물론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 역시 그곳으로 가서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더욱 난폭해져 가는 군인들은 여기저기에서 군중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본 광경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공포의 장소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무런 힘도 없는 가련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총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그들을 짓밟았습니다. 실로 처참하고 잔인한 광경이었습니다. 한 선교사는 한 남자가 군인에게 체포되었는데 한 부대를 이룰 만한 30여 명의 군인들이 돌아가면서 차례로 그 남자를 발로 찬 다음 군인의 우두머리가 칼로 그를 두 조각을 내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저는 두 명의 군인들이 땅에 넘어진 한 남자를 계속하여 때리고, 그 남자는 여러 차례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그때마다 군인들은 그를 때려 다시 땅에 넘어지게 하여 마침내는 그 남자를 땅바닥에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 명의 군인들은 한 사람씩 남자를 밟았고 한 군인이 먼저 몽둥이나 총으로 때린 다음 발로 밟으면 다른 사람이 그 남자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군인들은 나이가 많은 두 명의 여인네들을 도랑에 몰아 넣고 총으로 심하게 구타를 했습니다. 그 여인들은 마치 총을 맞고 죽기를 바라는 모습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이 여인들에게 공포탄을 발사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이밖에 다른 사람들이 본 사건들도 있습니다. 한 명의 군인이 어떤 소년의 손을 묶고 있는 동안 다른 군인은 소년의 머리를 때리는 장면, 땅에 넘어진 가련한 젊은이를 네 명의 군인들이 총으로 구타하는 장면 등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임원 가운데 한 사람이 본 또 다른 처참한 광경이 있었습니다. 그 임원은 한 노인을 만나러 갔는데 그의 집에서 군인들이 노인을 죽을 정도로 발로 차고 있었고 이를 말리던 노인의 부인을 총으로 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군인들은 소방대원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소방대원들의 특유한 복장은 지옥을 연상케 했습니다. 소방대원들의 복장은 가벼워 보였으며 끝에 철로 된 고리가 달린 장대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도망을 가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이 장대를 사람들에게 던졌습니다. 처참한 광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 모습이 전달되었는데 저는 제 눈으로 충분히 확인했기 때문에 잔인한 군인들의 행태에 대한 가련한 한국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군인들은 한국인들을 마치 토끼 사냥을 하듯 궁지에 몰고 있습니다. 방어 능력도 없이 여기저기 도망가는 한국인들, 그들을 잡으려는 군인들! 우리는 일본 군인들이 한국인들을 체포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지만 군인들의 잔인한 행동은 너무나도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독립을 원할 뿐인 가련한 민족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은 시위가 발생했던 날 밤 일부 목사님과 교회 관계자들을 체포하여 아직까지 석방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 경찰서와 감옥은 체포된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습니다. 그들의 잔혹한 행위는 수요일 저녁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서울의 미국 영사에게 대표단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으며,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느님께서도 아시고 계실 겁니다. 물론 일본인들은 모든 사실을 은폐하려 하고 있습니다. 제가 편지에 써 보내 드리는 사건들은 우리 모두가 목격한 사실이며 한국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더욱 처참한 사건들도 많습니다. 이 나라에서 일본인들은 조국의 안녕을 외치는 한국인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있어요. 감리교 병원에는 총상을 입은 환자 열두 명이 동시에 입원을 했습니다. 이들은 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인 것 같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고, 또 한 사람은 이미 사망했으며 회복이 전혀 불가능한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 군인이 단순한 구경꾼마저 칼로 베어 피를 흘리는 그를 두고 가 버린 장면을 목격한 선교사도 있습니다. 어제 1백 명의 죄수가 한데 묶여 끌려갔습니다. 그들의 옷은 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요리사에게 시내에서 쌀을 사오라고 부탁했는데 군인이 그를 잡아 경찰서로 끌고 간 다음 요리사에게 왜 거리에서 서성거리느냐고 물었습니다. 요리사가 식품을 사러 가는 중이었다고 하자 경찰들은 거짓말이라며 그의 뺨을 때렸습니다(뺨을 때리는 것은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만세”를 불렀느냐고 요리사에게 묻자 그는 “예”라고 대답했고 다시 뺨을 때렸습니다. 똑같은 질문과 대답이 반복될 때마다 요리사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를 집어넣을 감방이 없다”라고 하며 그를 내보냈습니다. 그는 단순히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한국인들은 수요일부터는 집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들과 군인들은 한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며 길을 가고 있는 사람, 집으로 가고 있는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 잡아 가두고 있습니다. 다섯 명의 신학교 학생이 경찰서에 끌려가서 무자비하게 짓밟혔고 그 중 두 명은 너무도 심하게 짓밟혔습니다. 이들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학생들이었습니다. 두 명의 미국 감리교 여성이 병원으로 가던 중 군인들을 만났을 때 군인들은 그들을 병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두 여성이 돌아가려고 뒤를 도는 순간 군인들이 그녀들의 등을 총으로 때렸습니다. 또 다른 미국 여성은 길을 가고 있던 중 길 건너에서 한 일본 군인이 오더니 그녀를 밀어 버렸고 다른 군인은 뒤에서 그를 세차게 밀어냈습니다. 일본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잔인하게 굴었고 그 잔인성은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심했습니다. 교회를 부수고 성경책을 파기하며 성찬식 집기들을 모조리 부수었습니다. 한 한국인이 우리 동료에게 말하기를 말을 탄 일본 경찰이 그를 부르더니 외국인과 무슨 대화를 했으며 그가 기독교인인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 한국인이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하자 경찰은 그를 구타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건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 반도 말씀드리지 못한 것 같군요. 하지만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머니께서 충분히 아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아니고 독립에 관한 문제를 지지하는 것도 아닌 진정한 인간애 측면을 옹호하여 이러한 잔인성에 항의해야 합니다. 우리 신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영사님이 계시니까요. 세부적인 내용은 말씀드리기 곤란하네요. 왜냐하면 이 편지가 잔인한 일본인들 손에 들어갈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는 간접적인 우회 방법으로 어머니께 전달될 것이니 편지를 받으시는 대로 제게 알려주세요. 정의와 자비를 받지 못하고 의지할 데 없는, 학대받는 민족인 한국인들을 위해서 잔인한 일본 군국주의의 통치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잔인함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지해야 합니다. 일본은 그들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사실을 은폐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지만 경찰들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신문에 발표했으며 이 시위를 ‘폭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폭동이었겠지만 이 시위는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의 의지를 나타내는 평화적인 시위였으며 폭동이 아니었습니다. 폭동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헌병들에게 분노한 군중들이 헌병들을 공격한 사건밖에 없습니다. 더 말씀드릴 수는 있지만 어머니께서 이 이야기로 인해 주무시지 못하거나 악몽에 시달리시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저 역시 제가 보았던 처참한 광경과 마치 독일인과 같은 잔인한 무법자들이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더욱이 이곳은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며 한국인들은 무장을 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두 명의 잔인한 일본 군인이 두 명의 미국 선교사들을 체포하여 현재 경찰서에 감금해 놓고 있습니다. 그 미국인 선교사들은 선교사 거주 지역에서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여섯 명의 군인의 호위 속에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다행히도 한 명의 미국인이 일본어를 매우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한 군인이 그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경찰서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선교사 거주 지역에서 군중들을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인데 체포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경찰서장은 호위병과 잠시 이야기를 한 후 “당신들이 여학생을 선동하고 만세를 부르지 않았나?”라고 말했고 미국인들은 즉시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게다가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지도 않았으며 군인들이 총으로 여학생들은 둘씩 짝지어 밀어내며 언덕을 내려오고 있을 때 두 명의 미국인들은 근처에 서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곧 풀려났지만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미국인에게조차 한마디 사과의 말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크나큰 실수이며 또다시 실수를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이 사건으로 얻은 것이 없으며 일본이 국민들을 공정하게 다루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은 일본의 통치권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수요일부터 군중들은 집회를 갖지 않았지만 일본의 잔인한 만행과 감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는 우회 방법이 없으면 편지를 보낼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곳 상황에 대한 내용을 더 이상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라도 편지에 “포토맥(Potomac) 강이 조용합니다”라고 써 보내면 이곳 상황이 다소 진정되었음을 의미하며 부정의 문장을 써 보내면 상황이 반대임을 의미할 것입니다. 어머니, 억압 속에 살아가고 있는 가련한 한국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그들이 느끼는 고통을 함께 느껴 주세요. 하느님께서 그들의 속박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안전하니 걱정 마세요. 하느님은 우리편이며 우리에겐 훌륭한 국가, 자유의 나라 미국이 있으니까요. 자유의 나라라는 의미는 최근에 제게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진심 어린 기도를 부탁드리고 일본인들의 만행을 가능한 한 널리 알려주시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사랑하는 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