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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51 엘더 김(Elder Kim)

    요즘 남교회의 엘더 김이 무척 안됐지만 자랑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그는 최고의 영웅이고 애국자이며 그의 이름은 존경받을 만하다 우리는 그가 얼마다 성실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때가 되어 조국에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날이 오자 그는 분연히 일어서서 한국의 옛 영웅들과 같은 길로 걸어갔다. 나는 저 아래 보이는 대구 시장을 보았다. 5,000명 내지 10,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노점 사이에 난 길을 따라 밀려오고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내지르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 울렸다. 그런데 내가 발 디디고 있던 여학교 담벼락 바로 밑 샛길에서 갑자기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무리 지어 시장에 모인 군중 대열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 뒤로 남자들과 아이들이 기다랗게 열을 지어 따라왔다. 이들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장 북부의 끝까지 간 다음 뜀박질을 멈췄다. 시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고함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교복 입은 남학생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시장 사람들 속으로 합류했다. 기마 경관 한 명이 군중 한 가운데 떡 하니 나타났다. 그러자 갑자기 한편에서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서더니 무언가를 나르는 사람들이 그 사이로 들어왔다. 종대를 이룬 사람들이 시장 한 가운데서 멈춰 섰다. 낡은 대한민국 국기를 높이 쳐들자 그 중의 주도자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자! 자! 자!”라고 말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자 아우성치던 군중이 “만세” “만세” 하고 외쳤다. 시장이 들끓으며 포효하는 것 같았다. 외침소리가 한 목소리를 이루지 않고,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뛰어다니면서 손을 쫙 뻗으며 소리쳤다. 한 경찰이 검으로 누군가를 쳤다. 그러자 맞은 사람과 친한 청년 두 명이 번개처럼 그 경찰을 쳤다. 그러자, 경찰이 길 바닥으로 굴렀다. 경찰이 타고 있던 말이 날뛰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만세” 소리는 더 커져 갈 뿐 식을 줄을 몰랐다. 그렇게 약 5분이 흐른 후 중심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군중이 두 사람을 높이 들어올렸다. 한 명은 커다란 깃발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던 B . 씨였고, 다른 한 명은 남교회 소속 엘더 김으로 열기와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마음속에 감춰 둔 조국애를 터뜨리기는 수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제 어떤 위험이 온다 해도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고, 엘더는 목숨을 걸었으며 기꺼이 자신의 생명으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 군중이 엘더 김을 어깨에 들쳐 매자 엘더 김은 앞뒤로 몸을 흔들며 소리 지르고 팔로 허공을 휘저으며 머리까지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위험, 희망, 사랑의 감정에 취한 상태였다. 군중은 ‘와’ 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서대문로(西大門路)를 잇는 다리를 향해 나아갔다. 다리 위를 건너 대로로 나아가는 군중은 마치 살아 흐르는 강물과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떼지어 뒤를 이었고, 함성소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 활기를 띄며 시내 중심이며 광장으로 퍼져 갔다. B . 씨와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재빨리 내려간 후 쫓아가려고 했다. 우리 둘이 시장에 도착하고 나니, 이번에는 군중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경찰들이 굵은 밧줄을 다리에 내걸어서 반 정도 되는 후발 군중이 다리에 못 가게 막아섰던 것이다. 멀리 있던 우리한테도 그 함성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시내 중심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샛길이니 골목길을 지나 있는 힘을 다해 쫓아갔지만 군중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군중은 경찰국을 지나 시내 중심으로 갔다. 그런 다음 돌아서 남대문(南大門)으로 갔고, 금융기관이 많이 있는 길을 끼고 동대문(東大門)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시간 총출동한 시내 경찰 병력이 여학생들을 붙잡고 있었고, 대열에서 처진 사람들이 군중 끄트머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경찰 한 무리가 군중의 이동을 막기 위해 동대문으로 파견되었다. 이 무렵 많은 사람들이 지쳤고 도망간 사람들도 많아서 경찰들은 여전히 열광적으로 “만세”를 외치고 깃발을 펄럭이는 주동자를 붙잡기가 쉬웠다. 중부 교회의 이(Pastor Yi) 목사와 남부 교회의 엘더 김은 여전히 시위군중의 선봉에 서 있었고, 쉴새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경찰에 붙들린 와중에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외쳤다. 이때쯤에 엘더 김이 독립선언문을 빼들고 경찰에 대고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경찰은 시장에 이르러 처음으로 넘어지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어쨌든 어느 순간 엘더 김은 선언문을 읽기 시작했고, 경찰 몇이 엘더 김의 입을 세게 쳐서 심하게 다쳤다. 아마 엘더 김은 선언문을 다 읽지 못했던 것 같다. 동대문에서 엘더 김이 붙잡히는 시점과 맞물려 싸움이 벌어진 것 같다. 남자들 대부분이 구속을 무릅쓰고 시위에 돌입했으며, 그 중 일부는 생명도 불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경찰들이 붙잡는 것을 애써 뿌리치지도 않았다. 아무 무기도 없이 그들은 이게 마지막이라 여기며 자유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어쨌든 엘더 김이 붙들리고 시내에서 법원 서기로 일하는 젊은 아들이 아버지 엘더 김을 구하러 달려왔을 때 분규가 발생했다. 아들은 경찰의 공격에서 아버지를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경찰이 이번에는 아들에게 달려들었다. 엘더의 두개골에 깊은 상처가 났고, 입고 있던 하얀 옷이 금세 붉은 피로 물들어 끔찍한 광경이었다. 아들은 경찰의 가격에 쓰러졌고, 경찰 하나가 무거운 구둣발로 아들의 목 뒷부분을 사정없이 여러 번 찼다. 그렇게 해서 경찰은 동대문에서 이 목사와 엘더 김 그리고 엘더의 아들을 차례로 붙잡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B . 씨는 시위를 하던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고 애썼다. 갑자기 그가 동대문 모퉁이로 향하더니 이 목사를 비롯하여 다른 두 사람을 끌고 경찰서로 가던 경찰에게 곧장 달려갔다. 이 목사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엘더 김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것 같았고, 그 아들은 다리를 절고 있어 다른 사람이 조금 부축하고 있었다. 남아 있던 군중은 있는 힘을 다해 흩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찾아가서 붙잡을 사람을 풀어 주지 않을 거라면 자기들도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시위는 한 시간도 안 되어 끝났고, 이어 경찰은 시위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골목 사이로 모조리 쫓아다니며 도처에서 집과 사람들을 수색했다. 과격한 시위는 약 한 시간 만에 끝나고, 거리는 사람들을 붙잡느라 난장판에다 무자비한 형벌에 대한 공포로 가득했다. 그러나 며칠 안 가 시장 곳곳에서 온 사방 천지에서 이와 비슷한 시위 소식이 들린 것으로 보아 사방으로 ‘확’ 번진 격한 열기는 그걸로 끝이 난 게 아니었다. 그런 다음 군인들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 쇠갈고리(소방기구)로 사람들을 때리고 총을 발포하기 시작했다. 날이면 날마다 온 시골길에서 죄수들을 꼬챙이 끼우듯 줄에 묶어 감옥으로 끌고 가는 행렬이 보였다. 차 한 대당 10명의 죄수를 태운 차들이 끊임없이 다녔다. 죄수들을 길에서 행진하게 했다면 많은 죄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찰의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마음속은 무서운 추측과 경악으로 가득했다.40일 후 법정은 이들을 득달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법정에 선 사람들을 보러 갔다. 단 한 건의 기소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는 사람이 60명이나 되었다. 목사들, 엘더 부자(父子), 교사, 학생을 비롯하여 기독교인 대부분이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하루 온종일 걸렸다. 일본의 재판절차는 우리 미국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곳에는 배심원단이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 재판관은 한국을 지배하는 정부(즉 일본 정부) 조직에 속한 사람으로 외국인(즉 일본인)이다. 소송 대리인은 사람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사전 심의를 했으며, 자백한 내용에 따라 기소를 결정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대개 사실을 자백하였다. 한국인은 그저 ‘국가 평화 방해죄’를 지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죄목이란 게 합병 이전 한국의 옛 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피고인이 한 명씩 불려 나가 이름, 주소, 직업, 나이, 징역 기록은 무엇인지, 시장 시위와 3월 8일 대구 거리 시위에 가담했는지, 한국 독립을 부르짖는 ‘만세’를 외쳤는지, 그런 질문을 받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 지루하였다. 재판관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소송대리인이 제출한 서면 기소장에 나온 조사내용을 근거로 심문했다. 재판관은 한국어를 몰라서 실실대며 뻔뻔스럽기가 하늘을 찌르는 대머리 남자를 통해 사람들을 심문했다. 하루가 다 가고, 어둠이 찾아왔지만 재판은 계속되었다. 소송대리인이 피고에 대해 반대 변론을 할 시간이 되었다. 증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피고측 변호사도 없었다. 일본 변호사는 감히 믿을 수가 없었고, 한국 변호사는 일본 정부에 반기를 들어 사건을 맡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정부에 유리하게 흘러가자 재판관은 피고 가운데 자기 변호를 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재판관이 채 말을 끝내지 못했고, 통역관이 피고 앞에서 통역을 채 절반도 하기 전에 일본어를 알고 있었던 피고들은 대부분 자리에서 일어서 손을 들고 자기 변론을 할 기회를 달라고 주장했다. 죄수들이 모여 있었던 각 자리 끝에 배치되어 있었던 20여 명 되는 경찰과 군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검을 휘두르며 “정숙”을 외쳤다. 이런 가운데 전등이 나갔다. 그러자 군인들이 문을 막고 창문을 닫았다. 문지기는 성냥불을 켜서 잽싸게 양초를 가져왔다. 곧 촛불에 의지해 재판이 재개되었고, 점차 전깃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그렇게 문을 막고 있지 않았더라도 죄수들 누구도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목사가 자기 변론을 할 첫 타자였다. 그는 시위는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며 그저 항의의 표현이었을 뿐이라는 근거에서 소송 대리인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자신이 주동했음을 시인했고, 그에 대해 자신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밝혔다. 서부 교회의 정(Pastor Chung) 목사는 유죄를 부인했다. 그는 시위를 선동하지도 않았으며 “만세”라고 외치지도 않았으며, 다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가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들을 쫓아간 것일 뿐이라고 했다. 엘더 김의 변론은 활기찬 추억처럼 내 마음속에 박혔다. 전에는 그가 그렇게 언변이 좋은 줄 몰랐다. 그날 밤 일본의 지성인들이 그 자리에 있어서 엘더 김의 연설을 들었다면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는 변호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와 시위에 참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나라를 사랑합니다. 따라서 내 나라의 자유 독립을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을 일본 제국이 자랑스러워할 날 바로 영광의 날로 기약하려 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당신네 나라 일본은 보잘것없는 한국에 와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10년 동안 일본 정부의 개화된 행정으로 우리 한국은 많은 혼란을 겪었고 민족에 앞서 우리 국가의 생명을 우리의 높은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당신네 일본은 부유하기가 이를 데 없고, 일본 국민은 우리 한국의 혁신과 재건을 위해 생을 바쳤습니다. 그 노고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당신네가 사는 만큼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일본이 뿌듯해 하는 이상(理想)이 우리 마음속에도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재판장님, 이제 세계 곳곳에 날이 밝았습니다. 끔찍한 세계전쟁은 모든 국가들을 높은 평원으로 이끌었습니다. 군사 독재국가의 압제와 침공은 이제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세계 모든 국가들이 경쟁하듯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결성하여 개발도상국 지원과 식민지 국가의 독립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일본은 세계 5개 열강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위대한 국가이며 똑같이 높은 이상을 품고 있습니다. 약소국가에게 자국의 정부 형태를 결정하고 각자의 인생을 꾸려 나갈 권리를 부여한다는 아주 멋진 말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우리 한국에 매우 기쁜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일본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본을 보여 이렇게 향상된 국가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본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쁩니다. 환호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법을 어겼으며 이 땅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송 대리인의 말은 재판장님이시여, 괘념치 마소서. 그 사람은 평화규약의 보존이 옛 한국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로 보아도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조국을 수호하고 각자 자기 인생을 자유롭게 누리는 사람이라면 어찌하여 지금은 속국인 옛 한국의 존속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든 법에 의거하여 반란죄를 씌울 수 있겠습니까? 존경하는 소송 대리인은 우리 시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세계 역사의 현 시점에서 일본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떨어지는 국가가 아님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일본은 다른 국가보다 더 아량을 베풀 수 있으며 우리가 발전을 공유하고 새로운 동양 국가를 축복할 수 있도록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 엘더 김은 손을 들고 위쪽에 앉은 재판관 앞에서 변론했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엘더 김은 지친 손을 내리며 외쳤다. 그러고는 자기 자리고 돌아갔다. “절대로 당신은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유의 날이 도래하고 우리의 국가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는 마당에 어떻게 우리가 ‘만세’라고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엘더의 말을 모두 그대로 담아 보존하지 못한 사실에 나는 평생 후회하고 살 것이다. 번역은 그가 말한 이상(理想) 이상(以上)을 전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그가 실수한 게 있었다. 어찌하여 그가 법의 마수에서 빠져 나올 수도 있는지, 그 이유를 주장할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그는 그저 조국에 도래할 새 날을 축복해 달라고 말했다. 통역관이 경이에 가득 찬 그의 말을 다 파악하고 통역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분명 엘더가 말한 내용에 대한 재판관 제출 보고서를 번역문으로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적당하다. 동일 언어를 쓰지도 않고 엉터리 통역관이 무력한 피고인들의 고귀한 생명을 두고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데, 어떻게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데 공정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의 모든 공정한 재판관의 심장은 병들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마지않는다. 이처럼 많은 숭고한 애국자들이 날마다 판사 앞에서 아무 득도 안 되는 변론을 하는데, 어떻게 그 재판관들은 마음을 닫아 버릴 수 있는가? 분명, 일본의 잔인한 탄압죄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 버린 목격자가 되어 마음속에서 각자를 비난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어 나와서 자기 변호를 했지만 누구도 엘더 김만큼 고결하지 못했다. 드디어 재판관이 진이 빠져서는 피고인 모두 보고 내려가라고 말하고, 휴정을 선포한 뒤 일주일 후에 판결을 내리겠노라 선언하고는 달아나듯 법정을 나갔다. 우리도 북적거리던 법정에서 쫓기듯 서둘러 나간 뒤 밤 속으로 나갔다. 문을 나서니 그들이 우리 동포에게 수갑을 차게 하고 포승줄로 묶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한마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이럴 수가! 도대체 얼마 동안!”체포될 때 심한 발길질을 당했던 엘더 김의 아들이 빈사 상태로 감옥에서 풀려났으며, 발길질 때문에 생긴 부상이 치명적이라는 소식이 며칠 후 삽시간에 퍼졌다. 6주간 감옥에서 겪은 고통으로 그는 어깨 사이와 목 뒷부분 위쪽이 멍이 들고 심하게 부어오르는 상태가 되었다. 생사를 오락가락하며 고통에 못 이겨 신음하고 있었다. “내 머리 좀 어떻게 해줘. 내 머리 좀 어떻게 해줘”라며 그는 울부짖었다. 교인, 비교인 할 것 없이 이를 안타까워하는 친구들이 이틀을 내리 그의 곁을 지키다가 그가 결국 편안히 세상을 하직하는 것을 보았다. 발표했다. 검시관은 그가 머리 밑부분에 난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고 단언했다. 엘더 김 가족의 불행에 우리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던지. 엘더 김은 바로 그때 중노동 형벌과 함께 2년 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제 엘더 김의 젊은 변호사 아들의 창창했던 인생은 이제 막을 다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와 누이,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살아 있었다. 기독교 친우들은 남은 가족에게 위로는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죽은 자를 살려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시 전체에 애통한 마음 가득했다. 사람들은 “우리네 슬픔을 어디에 하소연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돌아다녔다. 불운한 무언가가 장례식에서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덮쳤다. 그날이 장날이었고, 엘더 김의 집이 바로 시장 끄트머리에 있었다. 교회 관계자들은 시장 쪽에 있는 집에서 예배를 보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관을 관대에 넣었다. 관 위에는 화려한 색의 꽃들로 가득 덮여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열심인 손길이 밧줄을 당겨 존경해 마지않았던 사람의 시신을 들어올렸다. 내가 멀리서 지켜보았을 때 조용한 기도식 행렬 뒤로 사람들이 어깨 위로 상여를 메고 다리를 건너 시가로 나가는 것 같아 보였다. 그에 앞서 6주 전 왕의 장례식이 열렸을 때 관대를 만져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자진 참여한 상여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당시 상여꾼들은 기다란 밧줄을 상여 앞쪽에 묶고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관을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 중 운이 좋은 사람들은 뒤쪽에서 어깨에다 상여를 메었다. 왕의 장례식에서 했던 것처럼 여기 모인 사람들도 엘더 김 아들의 관 앞쪽에다 밧줄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거리를 조용히 지나 중부 교회 묘지로 향했다. B . 씨는 간략하게 예배를 진행한 뒤 기도식 행렬이 서대문 밖에서 출발하여 교회 묘지로 향한 것이었다. 군중의 완전한 침묵이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경찰들이 군중 사이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총검을 든 군인들이 교회 경내 입구에 줄지어 있었다. 기도식 행렬 옆에 군인들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다. 한국의 풍습에 의하며, 한국의 장례식에서는 참석자들이 크게 곡을 하고, 상여를 메고 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만가(輓歌)를 부르고 망자(亡者)를 슬퍼하며 오열을 터뜨린다. 그러나 그때 내 귀에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기독교인도 아닌데 와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슬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거기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슬픔보다는 애국심이 더 타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기독병원(Mission Hospital)을 지나 … (원문판독불가) …를 올라 … (원문판독불가) …를 거쳐서 … (원문판독불가) … 앞의 언덕을 따라 계속 올라가고서 서대문으로 향했다. 기독교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내에서는 침묵을 지켰지만 지금 전원에 와서 슬픈 마음을 터트릴 요량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누가 평화를 깼느니 하며 원망을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하여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의 물결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행렬이 너무 길어서 박자를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 남학생들은 노래가 끝나자 바로 다른 노래를 시작했다. 언덕을 올라 남서쪽으로 향할 무렵, 행렬 가운데 어디선가 다른 노래들이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그와 같은 장례식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몇 천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성인 남자들과 남학생들이 다들 마음에 품은 슬픔이며 나라에 대한 사랑을 내뿜고 있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한국인들이 과연 자유를 얻을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광경을 보며 우리는 마음 깊이 감동했으며, 이처럼 새로운 풍경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우리에게 내려 보내셨으며, 종교적 열정과 평온한 생활방식을 가진 그들을 우리는 벌써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다윗 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수천 년 역사를 가진 한국 땅에 대해 그들이 열의를 품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최근 우리의 가엾은 형제들이 상소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새로운 판사가 이전보다 많은 증거를 검토했다. B . 씨와 나는 법원에 갔고 법정에 들어가기 위해 한 동안 기다렸다. 사랑하는 이들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듣기를 원한 많은 친척과 친구들은 범죄자로 취급되더라도 이야기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결국 장기간 징역으로 감금되기 전 마지막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군중의 숫자가 많아서 우리는 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경찰이 그곳에서 우리 외국인들을 보았고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세 명 혹은 아내와 아버지들은 우리의 옷을 붙잡았고, 경찰에게 만약 외국인들이 들어간다면 그들은 최소한 가까운 친척들을 재판에 입회시키겠다고 외쳤다. 경찰은 결국 곤봉을 사용하면서 그들을 문에서 물리쳤다. 우리는 경찰 호의를 받지 않기로 했고, 그들에게 우리 편에서 투쟁하고 있는 목사와 장로의 몇몇 부인들을 입회시킨다고 말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사랑했고 존경한, 유죄 선고를 받은 가엾은 이들을 보러 가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 그들은 이 목사가 법정에서 멋진 연설을 했지만 김 장로는 의자에서 고통스럽게 견뎌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일부 학생들은 가석방으로 풀려났지만,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그들의 판결을 확인받았다. 이 목사는 3년, 정 목사는 2년, 김장로는 2년 반을 선고 받았다. 그는 "예, 나는 큰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했고 "만세"를 외쳤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그에게 평화 위반으로 2년을 선고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고, 이에 그들은 그에게 출판법 위반으로 6개월을 더 선고했다. 우리는 그들이 다시 한번 대법원에 항소했다고 들었다.하루 전쯤, 수천 명의 죄수 가운데서 환자를 돌보는 감옥의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나타나서 자신이 김 장로를 돌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장로가 왜 자신의 아들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가 석방되었다고 들었고, 그가 나머지 재판에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석방되었다는 소문을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그가 석방되었다면, 그는 왜 재판 보조원임에도 재판을 보기 위해 법정에 한 번도 오지 않았을까. 죄수들에게는 그들이 소처럼 빽빽이 들어차 있는 감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환자에게는 좀 더 많은 자비가 베풀어졌고, 그래서 장로는 아들과 가족에 관한 정보를 그 간호사로부터 얻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괴로움에 싸인 그 가엾은 남자를 보는 간호사는 차마 그에게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내 아들은 밖으로 나갔고 가족을 돌볼 것이다.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가 말했다. "내 생명은 중요하지 않다. 내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받칠 수 있다. 잘 될 것이다." 가엾다! 가엾다! 김 장로. 가엾다! 가엾다! 한국. 당신들 아버지의 죄는 아들들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고 압제자는 자비심이 전혀 없다. 세상 사람들은 진정 그들의 외침을 들을 것인가? 그들은 그 소리를 들은 다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든 그렇지 않든 듣고 있는 하느님이 계시고, 한국인의 목소리는 하느님 앞에 전해졌다. 그리고 하느님은 귀를 기울이실 것이고 정의를 주실 것이다.

    152 브라운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05발신주소: 한국 서울발신자: 수신자: A. J. 브라운 목사수신주소: 뉴욕 시 5번 가 156번지브라운 박사에게지난 3월 15일 편지를 보내고 난 뒤 서울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습니다. 3월 17일 세브란스 의대 건물에 있는 내 사무실로 당국이 들이닥쳐 샅샅이 수색을 하고 갔습니다. 사무상의 서신|| 개인적인 서신|| 통신문|| 보고서|| 진술서를 비롯하여 온갖 기록들을 조사했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제 사무실에서는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았습니다. 50여 명 되는 경찰들이 주변 지대를 에워싸고 있었고|| 경찰|| 형사|| 소송 대리인 등 도합 70여 명의 사람들이 대학 건물|| 병원|| 한국인 간호사 숙소|| 외국인 간호사 숙소를 뒤졌습니다. 그들은 세 시간 반 가량을 그렇게 수색에 열중했습니다. 그들이 수색을 시작하기 전|| 수색영장이 있는지 애비슨 박사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그런 뒤 박사는 영국 총영사|| 미국 총영사의 이름으로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사의 항의를 무시했습니다. 마치 우리에겐 아무 권리가 없으며|| 허락 여부 상관없이 당국은 와서 멋대로 할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선천에서 그들은 한밤중에 선교사 숙소에 들이닥쳐 수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지 미 국무부에서 알아낼 수 있으십니까? 그들이 우리에게 기밀 서류 제출을 강요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행동이 공적인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파리에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부하는 문건을 전달하는 게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언론이 강한 반미 태도를 드러냈고|| 일본 국민도 즉각 항의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일본인들이 무법자처럼 총|| 몽둥이를 비롯해 온갖 무기를 갖고 직접 벌하겠다고 다니는 통에 밤에 길거리를 다니는 것은 위험합니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일본인들은 당국의 사주를 받아 그렇게 날뛰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한 영국인 선교사는 교회를 둘러보던 중 붙잡혀 구타와 몽둥이 매질을 당하고|| 여권을 빼앗겼습니다. 그 선교사는 정녕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선교사란 이유로 그런 수모를 당한 것이었습니다.이 나라에서는 한국인이 기독교인이면 체포되었습니다. 우리 목사들과 지도자급 기독교인들 가운데 지금 감옥에 안 간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 박해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언론출판의 자유를 금지할 경우 어디선가 폭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기도 소지할 수 없고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한국인들이 속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출구는 바로 “만세”라며 소리를 지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이런 행동을 하면 바로 몽둥이가 날아오고 검이 달려들고 총이 발표됩니다. 이것은 더도 덜도 말할 것 없이 분명 학살입니다. 저는 벨기에의 잔혹 행위에 대한 글을 읽고서 속이 메스꺼웠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보는 것과 같은 광경을 이렇게 글로 읽고 나니 내 몸을 흐르는 피는 싸늘해졌다가 동시에 분노로 들끓었습니다. 저는 유럽인인 벨기에의 고통과 압제를 폭넓은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독일제 기계|| 우리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계에 난 표시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계가 그토록 최선으로 박멸하고자 했던 군국주의가 바로 이곳 한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무척이나 질서정연하게 말입니다.세브란스 병원에는 부상자로 북적였습니다. 복도와 통로에도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에스텝(Miss Esteb) 양은 더 많은 진료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현관에서 진료를 했습니다. 우리 지역 적십자는 갖은 노력을 다하여 병원에 긴급 물품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력한 이들은 심하게 학대를 받았고|| 그 중 대부분이 한 일이라곤 “만세”라고 외친 게 전부였습니다. 이곳에 입원한 성인 남자들은 두개골이 앞으로 툭 튀어나올 정도로 머리에 베인 상처(동봉 사진을 참조할 것. 우리가 보낼 수 있는 견본 사진으로는 이게 유일하다)|| 목이 깊이 베인 상처|| 온몸에 난도질당한 자국|| 눈을 들쑤신 상처|| 다리에 총상|| 손이 찢어진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열두 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도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병원에 왔습니다.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치명적인 부상으로 입은 사람들이 병원에 도착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저 세상으로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사망 확인서에는 사망 원인을 적어야 하는데|| 외국인 의사 가운데 한 명이 “나는 사망원인에다 ‘일본 정부’라고 적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소총에 맞아 다리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 실려 왔습니다. 군인과 경찰은 소총을 쓰지 않습니다. 관리들은 이런 환자들이 병원에 못 오게 막는다는 얘기를 우리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요전날 밤 병원 주변에서 몇 백 명의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윌슨 만세!” “미국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관리들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 두 남자가 병원 정문 근처에서 몽둥이로 죽도록 두들겨 맞았습니다.학교는 모두 폐교하였고||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일요 저녁 예배를 시간을 앞당겨서 대여섯 시에 했습니다. 전국에 시위물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서울에서는 가게들은 판자를 대서 25일 동안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경찰과 군인의 강제로 문을 열었습니다. 가게문을 열게 하려고 각 블록마다 15명에서 20명의 경찰이 배치되었고|| 문을 열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서너 개 가게마다 라이플로 무장한 경찰 한 명을 배치시켰습니다. 한국인이 주인인 가게 몇 곳이 경찰의 강제로 문을 열었고|| 그런 지역은 당국이 관리해야 했습니다.연행된 여학교 학생들 가운데 일부가 겪은 사건을 같이 동봉하는 바입니다. 이 여학생 가운데 네 명은 여기 서울에 있는 학교 출신인데|| 차를 갈아타다가 붙들렸습니다. 이 여학생들은 각자 다른 방에 들어가서 진술서를 쓴 후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는 진술서를 들고 겐소 부인 앞에 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진술서가 사실이며 거짓이 아님을 맹세합니다”라고 서약했습니다. 양가집 출신에 제대로 보호를 받고 자란 이 여학생이 이런 식의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네 딸들과 누이들이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양반 출신인 두 사람의 탄원서도 같이 동봉합니다. 탄원서를 낸 두 명 가운데 하나는 김윤식으로 여든다섯 살이고|| 다른 사람은 60대입니다. 그들은 한국의 유수 가문과 유학자들을 대표하며|| 이들 양반출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외세를 배척하고|| 이것이 한국 전체의 뜻임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탄원서를 제출하고 나서 김윤식 옹의 친척 몇 명이 연행되었고|| 김윤식 자택 부근에 경찰 감시단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윤식보다 나이가 젊은 다른 사람은 곧바로 감옥에 갇혔습니다.독립신문(獨立新聞)은 지금도 발간되고 있지만|| 당국은 신문이 어디서 흘러 들어오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튼 널리 보급되고 있는 신문입니다.이 편지를 언제 보낼 수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한국을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편에 보내겠습니다.글린 F. ???(이름 모르겠음) 배상

    153 풀려난 소녀 죄수의 이야기(1)

    3월 5일 아침 나는 마음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9시에 집을 나서서 종로로 가는 전차를 탔다. 그리고 차를 갈아타기 위해 종로에서 하차하였다. 한 경찰이 다가와 나를 체포하고는 물었다. “왜 나왔나?” 그는 나를 살펴보고는 내가 붉은 띠를 지니고 있는지 조사하였다(붉은 띠는 대의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맹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이리와”라고 말하면서 우격다짐으로 나를 끌고 갔다. 그는 억지로 나를 데려가는 동안 주먹으로 내 머리를 치고 따귀를 때렸다. 그는 또한 나를 뒤에서 밀어 바닥에 팽개치기도 했다. 마침내 우리는 경찰관들이 입구에 양쪽으로 늘어 서 있는 종로경찰서에 다다랐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내 뺨을 때렸고, 어떤 이들은 머리를 때렸다. 어떤 방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끌려갔다. 그 방에서 대여섯 명의 경찰관들이 나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그들은 내 발을 밟았고, 나의 가녀린 몸이 가눌 수 없게 될 때까지 때려서 나는 방의 한쪽 구석으로 뒹굴었다.그들은 체포해 온 사람들을 하루종일 때리고 발로 차고 모든 종류의 모욕적인 행위를 가했다. 75명이나 되는 체포된 사람들(여자 35명과 남자 40명)이 하나의 작은 방에 수용되었다. 방문은 약간의 틈도 없이 꽉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수감자들은 거의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고, 그런 표정이 무의식적으로 밖으로 드러났다.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남자와 여자들이 이 방으로 마구 처넣어졌다. 그리고 나서 남자들은 위층으로 올라가고 35명의 여자들만 남아 진흙 바닥에서 잠을 잤다.우리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질문을 받았다. 나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너는 독립을 외치러 나온 것인가?”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너에게 독립을 외치고 이 시위에 참가하라고 지도한 사람이 누군가?”“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무엇 때문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나는 대답했다.“너는 독립을 바라느냐?” 그는 더 질문을 했다.“진심으로 바란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아니겠느냐?”그는 물었다. “너희들은 독립을 바란다면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총이 한 자루라도 있나? 칼이 있나? 아니면 군인이 한 명이라도 있나, 아니면 동서양의 문물을 가져올 상선이 한 척이라도 있나? 다스릴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물이 있기라도 한가? 너희들이 무엇이 있어서 독립을 할 수 있겠는가?”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총과 칼은 소용이 없다.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는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이 독립을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바라고 있다. 너희들도 우리에게 겨우 이것밖에 못하는데, 우리가 자치를 할 수 없을 것 같은가? 우리는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내가 이렇게 말하자 나에게 질문을 한 장교는 주먹으로 나를 다시 때리고, 지휘봉의 머리부분으로 치고, 뺨을 비틀었다. 나는 넋이 나가서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그는 다시 때리고 질문했다. “왜 대답은 안하고 이렇게 앉아만 있나?” 그는 더 말했다. “너는 이 일을 위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 그게 누구냐? 어떤 학생이 너에게 이런 일을 시켰나? 누군지 우리에게 말해 주면 너를 풀어 주도록 하겠다.”나는 이 말에 화가 나서 내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것은 나 스스로의 생각에 의한 것이며, 남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니다.”내가 특히 좋아하는 여자 친구도 이런 취조를 당했는데, 그녀는 취조를 받는 한 시간 동안 무거운 막대를 쥔 채 팔을 올리고 있어야 했다. 팔이 아파 떨어뜨리면, 그들은 그녀를 때리고 마구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그녀를 무릎을 꿇고 앉게 하고는 뼈에 금이 갈 때까지 한 쪽으로 다리를 비틀었다. 그녀는 정신이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조사관에게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계속해서 그녀의 얼굴에다가 침을 뱉었다. 그는 뭐라고 더 말하고는 그녀의 머리에다가 끓는 물을 붓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부어라, 부어! 나는 두렵지 않다”라고 답했다.“아주 용기 있는 계집이군. 안 그런가?”라며 그는 그녀를 욕보이기 시작했다. “너희 엄마는 매춘부고, 너도 남자들과 관계를 했지. 그래서 지금 임신하고 있지.” 이런 식으로 그는 갖은 욕설을 다 퍼부었다. “너는 천한 계집이야. 남자들이랑 어울려 길거리에 나와 독립을 외치다니.” 그러고는 그는 내가 언급할 수도 없는 욕지거리를 하며 계속 모욕을 가했다.우리는 3월 --일 정오에 자동차를 타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우리는 다섯 명씩 하나의 밧줄에 묶여서 갔다. 우리가 지나갈 때 수백 명의 국민들이 길 양옆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는 길에 나는 우리를 위협하기 위해 칼을 지니고 있는 보초병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형무소에 도착하자 우리는 우리를 보기 위해 집합한 남자 여자 장교가 모두 있는 앞에서 옷을 벗고 머리를 풀었다. 그렇게 한 다음 그들은 우리를 방으로 보냈다.다시 우리는 남자 앞에서 모두 옷을 벗고, 그들이 우리의 몸에 무슨 표시가 있는지 살피고, 키와 몸무게를 재는 동안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시련이었다.벌거벗고 있는데, 형사부의 경찰관이 나에게 말했다. “거울 위를 네 발로 고양이처럼 걸어가며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 형상인지 봐라.”비록 그들이 나를 계집아이처럼 발가벗기고, 고문을 했으며,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말하라고 했지만, 나는 마음속에서 조금의 분노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 나라를 위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것을 달게 받기로 했다. 간수에게는 아무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밤에 그들이 자라고 명령을 하기 전에는, 아무도 감히 자리에 눕지 못했다. 한 번은 ‘정숙!’이라는 말을 ‘취침!’으로 잘못 알아듣고 우리가 모두 누운 적이 있었다. 그들은 와서 우리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누가 자라고 했나? 당장 일어나서 벌로 오늘 밤 내내 일어서 있어라.”라고 했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개, 돼지인 것처럼 말을 했다. 그리고 갖은 모욕을 다 주었다. 그들은 “너희들은 남자가 있냐? 너희들 술 마시지?”라고 소리쳤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우리를 화나게 하려고 했다. 목욕할 때는 1백서너 명이 한 곳의 물을 써야 했다. 간수들은 우리를 지켜보고 비웃으며 즐겼다. 우리가 춥다고 하면 그들은 “그럼 죽어 버려”라고 말했다. 목욕이 끝나고, 몸이 마르기 전에 옷을 입으려 하는데, 한 간수가 내 등을 쳐서 바닥에 쓰러 넘어뜨렸다. 대답을 하다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짐승처럼 맞았다. 우리가 당했던 일들을 이루 다 말할 수도 없다. 또한 남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심한 고문을 당했다. 경찰서에 처음 잡혀 왔던 남자들은 우리 눈앞에서 맞고, 군화발로 짓밟히고, 칼집으로 찔리고, 머리를 마구 맞았다. 정말 끔찍한 광경이었다. 나는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내 눈을 감아 버렸다. 우리는 감옥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일어서거나 운동을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되었다. 하루 종일 꿇어앉은 채로 식사를 받았다. 식사는 약간의 물과 콩이었다. 이외에 목이 말라도 물을 얻기는커녕 욕만 얻어먹었다. 심지어 어린아이가 물을 원해도 마찬가지로 무시당했다. 감옥 안에는 노인과 장애인들도 있었다. 그들이 함부로 취급당하면 내 마음은 찢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모두 괜찮으리라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내 심장에서 끓고 있는 피를 보고 기뻐하시며 가장 열렬한 소망을 알고 계실 것이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154 풀려난 소녀 죄수의 이야기(2)

    3월 5일 나는 독립을 외치러 나가기 위해 남대문으로 가는 차를 탔다. 종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가 탄 차가 서대문으로 가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다. 그때 갑자기 일본인 순사가 나를 체포했다. 그리고 나서 길바닥에서 나를 검문하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짚신을 신고 있는 걸 봐서 너는 분명히 독립을 외치러 나왔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거운 군화발로 나를 걷어찼고, 여러 명이 나에게 몰려와서 얼굴을 쳤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잃고 중앙경찰서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어떤 방으로 넣어졌는데, 20명이 넘는 경찰들이 모두 손으로 내 머리를 치고, 따귀를 때리고, 발로 걷어찼다. 그들은 힘을 모아 나를 벽으로 던졌고, 나는 아무 생각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채로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두들겨 맞고 한동안 그렇게 내버려졌다. 40명의 남자와 35명의 여자, 이렇게 75명이 작은 방에 함께 갇혀 있었다. 우리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되었고, 그들이 문을 열었을 때도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나는 머리가 아팠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밤 10시가 되자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고, 남자들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리를 뻗고, 그날 밤은 맨 땅에서 잠을 잤다. 나는 3회에 걸쳐 교차 질문을 받았다. 내가 취조실에 들어갈 때마다 그들은 내가 짚신을 신고 있다는 이유로 내 머리를 막대기로 쳤다. 나는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그들이 물었다.“너는 왜 짚신을 신고 있느냐?”“내가 짚신을 신고 있는 이유는 고종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상중에는 짚신을 신는다.”“거짓말이다.” 취조관이 말했다. 그러고는 일어나 내 입을 잡고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피가 났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거짓말이 아니라고 버텼다. 그가 대답했다. “너희 기독교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다.” 그리고 그는 내 팔을 잡고 잡아당겼다. 나는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으면서 이런 식으로 때리고 있다. 당신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대답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질문하라”라고 대답했다. 그는 “너는 독립을 외치고자 했다. 그런데 독립이 무엇이냐?”라고 말했다.나는 대답했다. “독립은 행복한 생각이다.”“그러나 너희의 왕이 죽었고, 슬퍼해야 할 시기인데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나?”“우리 국민은 국상으로 인해 진정 슬퍼하고 있지만, 우리의 슬픔을 내보였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 분을 기억할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 이것은 정해진 법칙이다. 누군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가 슬퍼하고만 있으면 무엇이 이루어지길 바랄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나는 한국이 결국 자유롭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이 생각이 나를 기쁘게 한다.”취조관은 나의 웃옷을 찢고, 비열하게 말했다. “축하한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때리고, 내가 기절할 때까지 막대기로 쳤다. 그는 다시 물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인가?”나는 대답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나는 성인인데, 왜 내가 나의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가? 누군가 시켜서 내가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다.”그는 말했다. “외국인이 시켜서 한 것이 아닌가?”나는 대답했다. “나는 학교 교장 선생님 외에 외국인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우리의 계획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팔아 여기서 빠져나갈 생각은 전혀 없다.”그러자 취조관이 말했다. “거짓말 뿐이야. 거짓말!”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은 없다. 오로지 진실뿐이다.”그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역시 모든 종류의 고문을 다 받았다. 고문 가운데 하나는 팔 길이 만한 널빤지를 들고 한 시간 가량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다리를 비트는 고문도 행했다. 그들은 우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들은 또한 우리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이런 명령을 받았을 때 한 명이 대답했다. “나는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왜 내가 너희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느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진짜 죄가 있다면 옷을 벗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죄가 없음을 보이기 위해 옷을 벗어라!” 한 학생이 “그럼 내 옷을 벗겨라!”라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 얼굴에 또 침을 뱉었다. 최조관들은 대답했다. “가만히 놔둬라.” 모든 경찰관들은 다같이 침을 뱉었다. 한 명이 말했다. “네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버리겠다” 이런 식으로 소녀들은 모든 고난을 다 겪었다. 3월 --일, 나는 다시 고문과 함께 취조를 당했다. 나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너는 독립을 원하는가?”“그렇다. 나는 독립을 원한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왜 독립을 원하는가?”라고 그가 물었다.“내가 독립을 바라는 것은 그것이 모든 민족의 권리이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대답했다.“그러나 네가 원하는 물건을 사고, 네가 원하는 것을 먹고, 네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독립이 아닌가?” 이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이런 질문은 아무것도 의미하는 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대답을 하기에는 너무 피곤한 상태에 있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은 나를 비웃었다. 그는 다시 질문하지 않았다. 그의 질문이 진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대답을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그가 물었다. “너는 매일 독립을 원하는 마음이 드는가?”나는 대답했다. “독립을 향한 내 마음을 매일같이 되새길 필요가 없다. 내가 언젠가 자유로워지겠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내린 결정이다. 이 마음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매일같이 ‘나는 자유롭다. 나는 자유롭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뿐이다.”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런가? 이제 가라.”나는 나왔다. 20명이 넘는 경찰들이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조롱하며 비웃었다.종로경찰서에 있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 한 욕지거리를 모두 열거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말하기엔 너무나 음란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의 은총으로 나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어떻게 고초를 겪었는지 생각하고 안정을 찾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도움을 주실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도와주실 것이므로 나는 부끄러워하거나 비참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경찰서에서 겪은 일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다. 3월 --일 오후에 우리는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우리는 각각 손목이 묶이고, 함께 연결되어 묶였다. 감옥의 간수들이 우리의 옷을 벗길 때, 그들은 우리를 발가벗기고, 가장 말할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 이 시련을 겪는 동안 우리 소녀들의 마음에는 고통의 눈물이 흘렀으나, 우리는 우리조국을 위한 일을 했으므로 감사하게 치욕을 감내했다. 만약 다른 일 때문에 그런 일을 겪어야 했다면 우리는 아마 죽어 버렸을 것이다. 이 치욕을 어디에 비견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감옥에서의 둘째 날 취조를 하면서 남자 간수가 또다시 우리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감옥에서는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닌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나에게 큰소리를 쳤고, 할 수 없이 나는 옷을 벗었다. 내가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후 어떤 일을 겪었을지 당신은 아시리라. 감옥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무릎을 꿇지 않고 다른 식으로 앉아 있으면 우리는 그 벌로 네 시간 동안 똑바로 서 있어야 했다. 몇몇 사람들이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해서 15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는 이유로 저녁 9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7시까지 잠을 자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종종 우리는 방안에서 아무 운동도 못하고 꼼짝없이 무릎을 꿇은 채 있어야 하기도 했다. 밥을 먹을 때도 무릎을 꿇고서 먹어야 했다. 때문에 우리는 커다란 고통에 시달렸다.우리의 비참함 가운데에는 104명이 한 욕조에서 목욕을 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한 번에 몇 명씩 말이다. 따라서 그 더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목욕하면서 나는 어지러워서 쓰러졌다.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 쓴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감옥에 있는 동안 우리는 가끔 아침에 15분 동안 운동을 하곤 했다. 종종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무엇을 썼다. 이렇게 그 시기 동안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몇 가지만 말해 보았다.우리는 3월 5일 체포되어 --일에 풀려났다. 석방되면서 우리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너희들을 잡아 두어 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겠다. 나가서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라. 다시 잡혀 오면 더 무겁고 엄중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훈계를 받았다. 기쁜 마음으로 나는 나왔다. 이것은 우리가 겪은 일에 대해 대강을 말한 것이다. 내가 전부 쓴다면 기록으로 남기기에 너무 불결한 내용일 것이다. 한 번은 기도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는데, 간수가 이를 알아채고 졸았다는 이유로 세 시간 동안 서 있는 벌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기도를 할 자유조차 없었다. 고개를 숙였다가 들면 “왜 자느냐?”라고 그들이 물었다. “나는 잠을 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한 것이다”라고 말하면 “거짓말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나는 여러 번 발각이 되었다. 나는 감옥에서 하나님이 아주 가까이 계심을 알게 되었다. 또한 감옥에서 지냈던 사람 가운데 여러 명이 출감한 후 기독교인이 되었다. 나는 이 때문에 매우 기뻤는데, 주님의 도움으로 그들 역시 즐거워했다. 감옥 안에서도 주님의 영광은 함께 한다.

    155 풀려난 소녀 죄수의 이야기(3)

    3월 5일 나는 학교를 출발하여 독립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남대문으로 가는 전차를 탔다. 가는 길에 운전사가 그 전차는 서대문으로 간다고 하여 우리는 갈아타기로 했다. 우리는 다른 차를 타기 위해 내렸는데, 그때 일본인 순사가 나에게 와서 붙잡고 검문을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무거운 군화발로 나를 차고, 내 얼굴을 치고, 종로경찰서까지 같이 가자고 명령했다. 그곳에서 74명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한 작은 방에 감금되었다. 우리는 여기저기를 구타당했으며, 온갖 고문을 당했다. 나는 묵묵히 이를 당했는데, 내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면 주께서는 필요한 힘을 나에게 주셨다. 아침 9시에서부터 밤 9시까지 35명의 여자와 40명의 남자로 구성된 75명의 사람들이 한 방에 있었다. 방에는 문이 두 개 있었는데, 간수는 문을 열어 두지 않았다. 죄수들이 굶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전 10시에 아침을, 오후 서너 시에 점심을, 그리고 밤 10시에 저녁을 주었다. 그들은 어떤 위생법에도 맞지 않는 야만적인 행동으로 우리에게 닷새 동안 씻을 물은 주지도 않았다. 첫날 교차 심문을 하면서 일본인들은 나를 20여 명의 남자들이 있는 위층으로 데려갔다. 나는 이 방 저 방으로 다니며 농락을 당했고, 마침내 작은 방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두 명의 취조관이 들어와 나를 가운데 두고서 가죽군화발로 차고, 내 얼굴을 때리고 말했다. “이제 진실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나는 대답했다. “내가 무엇을 대답해야 하느냐?”그는 물었다. “독립을 요구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디서 얻게 되었느냐? 누가 너에게 그것을 시켰느냐?”나는 대답했다. “너희들은 모르겠느냐. 오늘 같은 때에 나 역시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느냐. 꼭 누가 시켜야 이런 일을 할 만큼 내가 어린애인줄 아느냐?”다시 그는 물었다. “너희 학교의 선생이 이런 생각을 네 머리 속에 넣어 준 것이 아니냐? 누군지 말해라.”나는 대답했다.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 하더라도 아무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꺾지 않겠다.”그는 말했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때렸다. 나는 대답했다. “내 대답은 사실이다. 고통의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도 않은 사람을 그렇게 했다고 말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그는 계속했다. “하지만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 너를 꼬드기지 않았느냐? 학생들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 아니냐?”나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학생 집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 혼자서 독립을 외칠 수도 있지 않은가. 비록 혼자지만 나는 독립을 요구할 수 있다. 비록 혼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쳐 외칠 수 있다.”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취조관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 이제 진실을 말해 봐라.” 그리고 또다시 나를 구타했다. 내가 진실을 말하면 그들은 나를 더 때리기만 했다. 다시 그가 물었다. “너는 독립을 희망하는가?”나는 대답했다. “그것은 나의 희망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내가 독립을 바라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나는 독립을 희망한다.”그는 다시 물었다. “너는 독립을 외쳤는가?”나는 대답했다. “나는 독립을 외치러 가는 중이었다. ‘독립만세’라고 외쳐 본 적은 아직 없다.”그는 내 말을 막았다. “너는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나를 또 때렸다.이런 식으로 나는 닷새 동안 취조를 당했다. 취조를 하면서 나는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마지막 취조를 받은 후 우리는 세 명씩 묶여서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여자 간수가 우리의 옷을 조사하고 머리를 풀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발가벗기고 다루었다. 그리고 나서 남자들이 합류했는데, 그들은 우리를 조사하고, 키 등을 쟀다. 그리고 우리를 발가벗기고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우리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다. 그 남자들은 우리의 벗은 몸을 쳐다보았고, 우리는 그들의 손을 거쳤다. 이렇게 글로 쓰기에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다. 글은 이렇게 쓰고 있지만 읽는 사람들은 나머지를 추측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온갖 모욕을 다 당했다.그리고 나서 우리는 감방에 들어갔다. 아침 7시에서 저녁 9시까지 우리는 발톱도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손발도 움직이지 못하고 고정된 자세로 있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였다 가는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들은 아주 정확히 양을 재서 우리에게 물을 주었다. 우리는 자주 갈증을 느꼈다. 변기통은 아침에 한 번만 비워졌고, 하루종일 우리와 함께 있었다. 우리는 그 옆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밤에도 방안에 있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활을 15일 동안 했다. 어느 날 분명하지는 않지만 남자인가 여자 간수가 ‘정숙(I-ri-ma-sen)’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를 ‘취침’으로 알아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자 간수가 와서 나를 꾸짖고는 네 시간 동안 서 있는 벌을 가했다. 우리를 담당하고 있는 일본인 여간수가 높은 직위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소리를 지를 때 보면 마치 하늘과 땅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철창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작은 구멍을 통해 우리 영혼이 두려움으로 녹아 버릴 때까지 밤낮으로 우리를 지켜보았다.음식에 있어서 그들은 아침에 작은 구멍을 통해 한 줌의 삶은 콩을 주었다. 우리가 그것을 먹으면 그 여자들은 “너희 한국인들은 마치 개나 고양이처럼 먹는구나”라며 우리를 조롱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목욕을 시킬 때 아주 조금의 물밖에 주지 않았다. 결국 그 물은 112명의 몸에서 나온 때로 걸쭉해져 버렸다. 이런 물로 어떻게 깨끗해지길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목욕할 때 여자 간수들, 보초병이 한번에 서너 명씩 와서 우리가 끝낼 때까지 욕설을 하고 우리의 흉을 봤다. 이것은 말로만 목욕이라 할 수 있을 뿐이지 진짜 목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주 잠시 동안 몸을 담그고는 서둘러 나갔다. 며칠 동안 우리는 전혀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3일 간 우리는 소위 ‘오락’이라는 것을 했다. 그러는 동안 서너 명의 일본인 여자들이 가까이 와서 욕을 하고 우리를 모욕했다. 우리가 빨리 움직이면 이것을 흉봤다. 우리가 느리게 움직이면 또 그것을 흉봤다. 개화된 사람들은 그렇게 운동을 하나? 나는 의심한다. 우리는 마당을 따라 빙빙 도는 것만을 허락받았다.우리가 진실을 말하면 그들은 그것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일생 동안 불구로 지내야 할만큼 우리의 다리를 비틀었다. 벌을 받는 중에도 명령이었다. 그들은 석탄불을 피우고 불꽃을 내어 물을 데웠다. 그러고는 우리 머리에 부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들은 자로 우리를 때리고 벌로 한 시간 동안 의자를 들고 있게 했다. 우리는 --일에 석방되었다.

    156 풀려난 소녀 죄수의 이야기(4)

    내가 3월 5일부터 --일까지 겪은 이야기.그날 나의 목적은 학생회와 합류하는 것이라 남대문에서부터 독립만세를 외치며 출발하였다. 나는 이 목적에 동의하였는데, 왜냐하면 나는 한국의 1천만 여성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독립을 외쳤다. 이런 만세운동을 통해 일본인들의 형언할 수 없는 10년간의 압제에 대한 우리들의 솟구치는 분노를 문명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총칼도 없이 나는 대의명분에 내 인생을 맡겼다. 나는 3월 5일 9시에 학교를 떠나 남대문으로 가는 전차를 탔다. 한 구역을 지났을 때 우리는 서대문으로 가는 전차를 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전차에서 내렸다. 다른 차로 갈아타려 하는 순간 일본인 순사가 내 뒤에서 나타나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나는 “남대문으로 가는 중이오”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의 말도 없이 그는 나를 붙잡아 검문을 하고, 내 옷을 뒤졌다. 그러나 의심할 만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자 내가 신고 있는 짚신을 꼬투리로 삼아 경찰서로 끌고 갔다. 나는 “평화롭게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왜 경찰서로 데리고 가는 거요”라고 말했다. 그 순사는 많은 군중이 있는 가운데서 나를 마구 구타했다. 그리고 소리쳤다. “가라.” 만약 내가 정말 죄가 있다면 경찰서는 진짜 끔찍한 장소겠지만, 나는 죄가 없으므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순사를 따라 본서까지 따라갔다. 그곳에는 칼을 찬 순사가 양쪽으로 늘어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나를 때렸다. 양쪽 귀를 가로질러 때려서 내 뺨은 부풀어올랐다. 그들은 무거운 군홧발로 내 발가락이 그 군홧발 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나의 발을 짓이겼다. 양쪽을 보니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모두 아주 많이 있었다. 그들은 여학생들의 귀를 때리고, 발로 차고, 구석으로까지 걷어찼다. 그들 중 어떤 순사는 여학생들의 머리를 잡아채 앞뒤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창문으로 내던져 얼굴 양옆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몇몇 남학생들은 밧줄로 꽁꽁 묶어서 그들의 머리가 다리 사이에 고정되게 하였다. 그러고는 그들을 군화발로 걷어차고, 남학생들의 눈이 퉁퉁 붓고 피가 흘러내릴 때까지 얼굴을 찼다. 그리고 나서 모든 학생들을 앉게 하였다. 들어온 각 순사들은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대로 돌아가면서 구타를 했다. 그 방은 작았는데도, 40명의 남자와 35명의 여자가 있어 모두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작은 공간에 있는 것이었다. 공기는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두통이 났고, 정신이 아득해지며 어지러웠다. 그렇게 우리는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를 보냈다. 그 후 남자들은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이때부터 우리 여자들은 남자들과 떨어져 여자들끼리만 있게 되었다.교차 심문을 받을 때에도 분노를 자아내는 일들은 계속되었다. 그 대략적인 내용을 말해 보겠다. 그들은 처음에 이런 질문을 했다. “너 혼자만의 생각으로 나온 것이냐, 아니면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나온 것이냐?”“나는 절대로 누군가의 선동을 받고 나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로 나온 것이요”라고 나는 대답했다.그가 다시 물었다. “너희 학교에 있는 선생이나 외국인이 한국의 경우가 평화회담에서 거론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나?”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대답했다.“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나를 주먹으로 치고, 막대기로 때렸다. 다시 그가 물었다. “너는 한국의 독립을 원하느냐?”“마음속으로부터 원한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다시 물었다. “일본과 한국이 합병된 이후로 생활이 크게 향상되었다. 다른 모든 것도 그와 같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감사는커녕 독립을 바라는 것이냐?”나는 대답했다. “나는 이 문제에서 한 가지 점만 본다. 만약 일본과 한국이 정말로 한 나라였거나 처음부터 한 나라였다면 이런 소망은 내 마음속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4천 년 동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 너희 일본 정부가 세계의 인정도 받지 않고 야만적인 무력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 너희들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교육의 기회도 주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을 바라는 나의 희망은 극히 자연적인 것이다.”취조관은 대답했다. “아하! 그 말을 듣고 보니 이것은 너의 생각이 아닌 네 선생이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진실이 아닌 바를 나에게 말하는가?” 그는 얼얼해질 정도까지 내 머리와 얼굴을 때렸다. 나는 뭐라고 말할지 몰랐다. 그는 다시 말했다. “너는 착한 여학생이다. 감옥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느냐. 너는 정말 딱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고집부리지 말고, 나에게 진실을 말해라. 한 번만 미국인 선생이나 한국인 선생의 이름을 나에게 말해 주면 너를 풀어 주마.”나는 대답했다. “내가 죽어도 좋다. 어떤 선생님도 나에게 이 일을 하라도 선동한 적이 없다.”“너는 거짓말을 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두 손으로 내 입을 잡았다. 나는 내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는 내 입에서 피가 나도록 잡고 있었다. 그가 또 물었다. “너는 왜 끈으로 된 신발을 신고 있느냐?”나는 대답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고종께서 승하하신 이후로 내내 이 신발을 신고 있다.” 그러자 그는 막대기로 내 입을 때려 내 입술은 부풀어오르고 다시 피가 났다. 그는 또다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할 때까지 나를 때렸다. 이런 식으로 나는 모두 네 번 교차 심문을 받았다. 나와 같이 심문을 받은 사람들 중 몇 명은 고문을 당하고, 몇 명은 한 시간 동안 무거운 것을 팔에 들고 있어야 했다. 몇 명은 옷이 벗겨지고 괴롭힘을 당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체벌과 고통을 겪었다. 경찰서에 있었던 5일 동안 우리는 이빨을 닦거나 씻을 기회가 없었다. 5일부터 9일까지 우리는 교차 심문을 받았고, 9일에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우리는 손목에 끈으로 함께 묶여졌다. 감옥으로 이송되자 우리 모두는 남자와 여자 간수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그 추운 날에 우리는 옷을 벗고 있어서 추위에 떨었고, 발은 거의 꽁꽁 얼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살피고 조사하는 몇십 분 동안 그러고 있어야 했다. 그런 후 그들은 우리에게 옷을 입으라고 하고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으며,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제대로 무릎을 꿇지 않거나 졸면 네 시간 동안 서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어느 날 밤 나는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했다.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방안에 있던 나무로 만든 변기통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냄새가 났다.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을 했다. 욕조 하나에 물이 담겨 있었는데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물로 목욕을 해야 했다. 몇 명이 한 번에 들어가서 목욕해야 했다. 감옥의 경비병이 옆에 서서 쳐다보며 욕을 하고 음란한 말을 했다. 방은 비좁았으나 15명이 함께 있었다. 밤에 우리는 비스듬히 눕거나 포개져 누워 있었다. 너무 좁아서 돌아눕지도 못했다. 누군가 기도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 졸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고 호통을 들었다. 우리는 열 시간 정도를 잤고, 나머지 열네 시간 동안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고통 속에서 나는 성경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결코 성경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나는 한 번도 읽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렇게 우리는 풀려날 때까지 엄청난 고난을 경험했다.

    157 풀려난 소녀 죄수의 이야기(5)

    3월 5일 수요일 아침 10시에 나는 만세를 부르며 종로에 있었는데, 두 개의 금장 띠를 두르고 옆구리에 장검을 찬 일본 순사에게 잡혀 35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내 옷과 머리에 매고 있던 끈을 찢어 버리고는 나를 종로경찰서로 데려갔다. 그곳 마당에서 기다릴 때 경찰들은 나를 때렸다. 그날 밤 12시까지 그들은 우리에게 음식도 물도 주지 않았다. 화장실에 갈 때도 보초병과 같이 가야 했다. 오후 4시쯤 금장 띠를 두른 경찰 간부 앞으로 불려 갔다. 그는 나의 이름과 주소를 묻고, 학생이라면 어디서 공부하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인지도 물었다. 나는 허위의 이름을 대고, 3월 1일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나는 공부를 하러 왔고, 외국인들과 공부를 하는데 도움을 받으려 학교에 다니려 한다고 했다. 나는 기독교를 믿고 있다고 했다. 간부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품행이 나쁜 계집이다. 너는 남자와 같이 왔음이 분명하다. 왜 ‘만세’를 외쳤느냐? 누가 너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나는 말했다. “나는 한국의 자유를 위해 외쳤다.” “왜 한국의 자유를 원하느냐?” “나는 한국인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한국의 자유를 원한다.” 처음에 그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말했다. “10년 동안 너희들은 우리를 압박했고, 우리에게서 말할 자유를 빼앗아 갔다. 이 외침은 우리의 슬픈 마음의 외침이다.” 그가 말했다. “너는 한국이 진정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실 거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다.” “이것은 너의 진심이 아니다. 외국인이 너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라고 그가 말했다. “어떤 외국인도 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은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나는 18살이나 먹었고, 지금까지 내 스스로 알아서 살아왔다. 그러니 내가 왜 외국인의 말을 듣겠는가? 나는 엄청나게 많은 문제들을 보아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늘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외치기 위해 나왔다.” “네가 일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고, 일본이 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무엇을 알고 있느냐. 네가 어떻게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느냐?”라고 그가 말했다.“너희들이 나를 죽을 때까지 때리더라도 너희가 말하는 것처럼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들은 나에게 그만 말하라고 했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람 팔만한 길이의 무거운 봉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내 팔이 떨리면 간부는 나를 다시 때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약 한 시간 동안 그들이 나의 다리와 어깨 그리고 발을 매우 때린 후 나는 방을 나가도 좋다고 허락받았다. 질문을 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내 어깨와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나는 걸을 수가 없고 길 수만 있었다. 그들은 나를 약 1백 피트 떨어져 있는 다른 방으로 끌고 갔다.나는 35명의 여학생이 수용되어 있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곳은 두 명의 일본인 순사와 세 명의 한국인 순사가 지키고 있었다. 일본인 순사는 금장 띠를 두르고 있는 간부였다. 우리는 긴 의자로 분리되어 있었고, 서로 쳐다보거나 말을 할 수 없었다. 혹은 일어서거나 자세를 바꾸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밤 12시까지 45명의 남자들도 같은 방에 있었다. 자정에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갔고, 우리는 음식과 물을 제공받았다. 그리고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는 나무 바닥에 누워도 된다고 했다. 이곳에서 계속 나흘간 지냈다. 나는 매번 다른 간부에게 취조를 당했다.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둘째 날 나는 처음 맞은 것보다는 덜 맞았다. 내가 첫째날 취조를 당한 간부보다 더 계급이 높은 간부였다. 질문은 첫날과 거의 똑같은 순서였다. 첫날의 기록이 그 간부의 앞에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첫날과 이어지는 그 다음날들에도 서기와 한국인 통역자가 참석하였다. 처음 취조에서 나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고 했다. 예비심문이 끝나고 난 후 간부가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문란한 인생을 살아왔느냐?”“당신은 내가 당신이 묻고 있는 것처럼 불명예스러운 사람으로 보이느냐?”라고 대답했다. “체포된 모든 계집아이들은 처녀가 아니다”라고 그가 말했다.“우리는 모두 처녀이고, 약혼도 하지 않았다.”“너희 부모님들이 혼례도 시켜 주지 않았는데, 너희들은 모두 짐승이다”라고 그가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모두 임신중이다.”“그렇다면 우리의 배를 갈라 보거라.”라고 나는 반격했다.“우리가 그렇게 해도 알 수 없다. 의사만이 알 수 있다.”라고 그가 말했다. “어찌되었건 네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주장을 하니 내가 성경에서 본 바와 같이 너에게 아무 죄가 없다면 옷을 모두 벗고 사람을 앞에 나체로 나가 보거라. 죄가 없는 사람은 나체로 산다. 아담과 이브를 봐라.”그런 다음 그 간부는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와서 내 옷을 벗기려 했다. 나는 울부짖으며 반항을 하고 몸싸움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여자를 이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만두었다. 우리들을 욕할 때 그는 한국인 통역사를 통하지 않고 서투르고 잘못된 한국말로 말했다. 한국인 통역사는 간부가 이런 욕을 할 때 슬픈 듯이 보였다. 그는 한국인 통역사에게 나를 때리라고 시켰다. 그 통역사는 자신은 여자를 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먼저 깨물었다. 그래서 그 간부는 자기 주먹으로 내 어깨와 얼굴, 다리를 때렸다.셋째날 나는 또다시 취조를 당했으나 맞지는 않았다. 셋째날에는 일반적인 질문들만 물어 보았다. 토요일에 나를 심문한 간부는 세 개의 금띠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일반적인 질문만 받았으나, 그 간부는 나를 때렸다. 그러나 첫날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오전 10시, 오후 4시, 그리고 자정에 음식이 나왔다. 나는 밤에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일요일인 3월 9일 오후 --시에 나는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묶여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세 명의 경찰이 우리를 포위하고 갔다. 다른 여학생들은 울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거나 말을 해서는 안되었다. 한국인 운전자가 우리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말했다. “용기를 잃지 말고, 건강을 잘 지켜라. 너희들은 아직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저 너희들의 사기를 꺾어 놓으려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형무소에 다다랐다. 일본인 순사가 형무소 사무실로 들어가고, 우리는 자동차 안에 있었다. 학생인 듯 보이는 한 한국인이 자동차로 다가와서 그의 손을 차 안으로 넣고 말했다. “용기를 내시오. 우리는 늘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살아야만 할 때가 왔고.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오.” 그 말을 한 후 그는 사라졌다.금띠를 한 간부와 사무실로 들어간 일본인 순사가 들어왔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름과 주소, 부모님 그리고 왜 ‘만세’를 불렀는지 질문받았다. 우리는 한 명씩 들어갔다. 다른 여학생들이 나보다 앞섰다. 다른 여학생들이 안으로 모두 들어갈 때까지 나는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이 문을 지날 때 나는 방을 떠나는 여학생들이 그들의 옷을 손에 들고 나체인 채로 머리카락을 모두 등에 풀어놓은 것을 보았다. 나도 불려 들어갔다. 일본인 순사가 나에게 그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한 일본인 간부가 책상 뒤에서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두 명의 일본인 여성 간부가 그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내 머리카락을 푸르고 나의 머리핀을 가져가고는 나의 머리끈을 조사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나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나는 거부했다. 그들은 내가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오랫동안 거부했다. 그들이 내가 유죄 판결받은 죄수로 이송되었다고 해서 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가끔씩 지체를 하고, 머뭇거리며 나는 옷을 벗었다. 나는 이 간부가 있는 앞에서 약 10분 동안 옷을 벗은 채로 서 있어야 했다. 그 시간은 훨씬 길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여자 간수가 내 옷을 조사했다. 그들이 나의 속옷을 조사할 때 그들은 그것이 모두 외제인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옷을 입고 다른 방으로 가라고 했다. 한 여자가 나와 같이 갔다. 약 100야드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빨리 가라고 했다. 나는 방을 떠나기 전에 내 옷을 모두 입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재촉했고, 나를 밀었다. 나는 나가기 전에 치마로 몸을 둘렀다. 그리고 나머지 옷은 팔에 안고 갔다. 그 방을 떠나 다음 방에 도착하기 전에 다섯 명의 한국인 남자 수인이 우리를 지나쳤다. 그리고 몇 명의 일본인 여자 간부가 지나가는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서 나는 두 명의 다른 여학생이 있는 감방으로 보내졌다. 한 명은 공립고등학교의 학생이고, 한 명은 숙명학교의 학생이었다. 나는 ----번이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기상 시간은 오전 7시이고, 취침 시간은 오후 9시 30분이었다. 일주일간의 폐쇄 감금 후 그들은 아침식사 후 15분간의 운동을 허락했다. 수인모자를 쓰고 일본인 여자 간수의 감시를 받았다. 식사는 콩과 기장과 미적지근한 소금물이 반 대접과 한 대접씩 나왔는데 맹물이나 다름없었다. 식사 시간 이외에 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 콩과 기장은 둥글게 만들어졌는데 딱딱했다. 변기통은 감방의 구석에 있었다. 뚜껑이 덮인 상자였는데, 매일 아침 남자 간수에 의해 비워졌다. 월요일인 10일에 일본인 여자 간수가 첫날과 같은 사무실로 나를 불러내어 건강진단을 한다면서 옷을 벗으라고 했다. 나는 거부했다. 나는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긴 실랑이 끝에 그들은 나에게 제일 마지막 속옷은 벗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한 명의 일본인 여자가 내 몸무게와 키를 쟀고, 한 명의 일본인 여자를 그것을 기록했다. 아주 어려 보이는 일본인 의사가 이를 쳐다봤다. 그는 내 가슴을 타진했다. 청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 건강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 방을 떠나 다시 감방으로 돌아왔다.나는 감옥에서 --일간 있었다. 나는 3월 --일에 풀려났다. 나는 앉거나 일어서지 못했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은 채 있어야 했다. 또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성경책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성경을 가지고 있는 여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에게서 성경책을 빼앗아 돌려주지 않았다. 3월 --일 --시에 금띠를 한 간부가 감방으로 와서 내 한국어 이름을 묻고는 허리까지 옷을 벗으라고 했다. 내 가슴과 등을 살펴보고 다시 옷을 입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를 다른 몇몇 여학생이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모두 수인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형무소 운동장에 있는 다른 건물로 걸어갔다. 일본인 여자 간수가 우리를 그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간수는 우리의 이름을 묻고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수감번호를 떼어 냈다. 다른 여학생들은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데리러 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도 계시지 않고 집도 없으며 북쪽에 사는 고모 한 분 외에 가까운 친척도 없다고 했기 때문에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수는 통역자를 통해 말을 전했는데, 그 통역자는 금띠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서울에 머물지 말라고 했다.내가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여학생들이 최대 15명까지 나와 함께 감금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우리는 베개도 없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해충에 감염된 누비이불을 함께 덮고 잤다. 우리는 손과 얼굴만을 씻을 수 있었다. 목욕은 허가되지 않았다. 일본인 여자 간수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는데, 우리를 밤낮으로 감시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밤이었는데, 이불 밑에서 아주 작게 속삭여서 대화를 했다. 몸의 자세를 바꿀 수 없는 것이 가장 참기에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자세를 바꾸면 맞거나 팔 길이의 무거운 봉을 들고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 다른 수인들로부터 들어서 판단하건대 내가 아는 한 교사들이나 우두머리로 지목된 사람들은 독방에 감금되어 있다.

    158 풀려난 소녀 죄수의 이야기

    작성처: 무어(J. Z. Moore)오늘 1919년 3월 28일 스물한 살 먹은 여학생이 우리 집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3월 3일 평양 시내에서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잡혀 와 있었다. 순사들은 우리가 담배를 피우는지, 술을 마셨는지, 그리고 기독교인인지 질문했다. 곧 모든 사람들은 거의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는데, 열두 명의 여자 감리교인들과 두 명의 여자 장로교인들, 그리고 한 명의 여자 천도교인은 남아 있게 되었다. 여자 감리교인 가운데 세 명은 먼 지역들을 걸어다니며 성경을 나누어주고 말씀을 가르친 여인들(Bible women)이었다. 경찰관들은 많은 남자들이 있는 앞에서 모든 여자들의 옷을 벗겼다. 그들은 내가 길에 있었다는 것과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 외에 다른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내 벗은 온몸에 땀이 나도록 그들은 나를 때렸다. 그러면 그들은 “아, 너는 더운 모양이구나”라고 말하며 내 벗은 몸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 두 팔은 등뒤로 꼭 죄게 묶여져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내 몸에서 다시 땀이 나도록 때렸고, 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춥냐고 말하고, 담배의 불이 붙은 끝부분을 내 몸에 댔다. 담뱃재가 뜨거운 인두처럼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받은 고문은 깃발을 만들거나 독립운동 등에 관여한 사람보다는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 몇 명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 한 어린 여성은 마침 월경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옷이 벗겨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그녀의 옷을 찢고, 더 세게 그녀를 때렸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았다. 나흘이 지난 후 나는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수용되어 있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맞아서 죽게 되었다. 한국 초기 교회의 첨병 역할을 담당했던 여인들(Bible women)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그 옆에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밤새도록 시신을 쳐다보고 있으라고 했다. 그 여인들(Bible women) 가운데 또 다른 한 명은 두 손뿐 아니라 두 발에까지 차꼬를 차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성경책을 빼앗아 갔고, 말을 하거나 기도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욕을 해댔다. 이 모든 것이 일본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다. 비록 한국인 순사도 있었지만, 한국인들은 때리거나 욕을 하는데 동참하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은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 그리고 감옥에 간 바울(Paul)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지 않았느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이 뭐라고 말했느냐고 질문했고, 선교단과 함께 있거나 선교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더욱 심하고 잔인하게 대했다. 몇몇 여학생들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나중에 위의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은 감옥에서 죽었다고 한다(미확인).평양에서 무어(J. Z. Moore) 목사의 보고 내용

    159 한국 함흥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노라스(D. M. Noras) 목사의 진술

    작성일: 1919-03-20작성처: 노라스(D. M. Noras) 목사1919년 3월 2일 밤과 3월 3일 이른 아침 아직 함흥 시에서 시위가 발생하기도 전에 기독교 학교의 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다. 월요일인 3일 경찰이 상점 주인들에게 상점을 닫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중심가에 모여들었다. 군중 속에 있던 누군가가 나팔을 불었고, 이를 신호로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외쳤다. 시내의 각기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 참석하였는데, 이 중 많은 수가 체포되었다. 이날 일본인 소방수들이 소방용 갈고리 창을 가지고 나왔는데, 아무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3월 4일 12시 30분경 한국인들의 우레 같은 만세 소리가 또 들렸다. 이 만세 소리에 일본인 소방대는 갈고리를 울부짖는 군중들 속으로 던졌다. 일본인 소방수 가운데 어떤 사람은 곡괭이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다른 소방수들은 길다란 소화용 갈고리 창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소방수는 쇠몽둥이를, 어떤 사람은 단단한 나무나 소나무 곤봉을, 어떤 사람은 갈고리 모양의 곤봉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머리를 곤봉으로 내려치고, 갈고리 창으로 이곳저곳을 잡아챘다. 삽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소방대로 인해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온 피가 경찰서까지 흘러 이어졌다. 그렇게 당한 사람 중에 최규?(Chai Kyu???)라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학생이었는데, 한국인 경찰의 동생이었다. 그는 굉장한 고통으로 울부짖었는데, 왼쪽 머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그의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이 사람은 며칠 후 심각한 상태로 집에 돌아갔다.다른 남자는 두 명의 일본인 소방수들이 경찰서까지 질질 끌고 왔다. 야만적인 폭력의 흔적을 그의 머리에서 확실히 볼 수 있었고, 그의 얼굴은 왼쪽 편을 세게 얻어맞았는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는데, 맞은 곳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왼쪽 다리도 절뚝거렸는데, 고통으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고, 나이는 약 쉰 살 정도였다. 그는 병원에서 며칠간 치료를 받은 후 무죄로 풀려났다. 그의 이름은 채학성(Chai Haksung)이다. 경찰서로 끌려온 또 다른 사람은 박기진(Pak Kichin)이었는데, 그는 비기독교계 학교의 학생이었다. 그의 두개골은 너무나 처참하게 금이 가서 며칠 후 그는 명백히 위독한 상태에서 그의 친구들에 의해 집으로 보내졌다. 같은 날 적어도 일곱 명의 한국인 남자들과 많은 여학생들이 경찰서로 잡혀 왔는데, 그들은 부상을 당해 가엾은 상태였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일본인 경찰과 헌병들은 체포에 가담하지 않고 일본인 소방수들이 한국인들을 구타하고 체포하는 것을 지켜 주기만 했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본인들에게 막대기를 들거나 돌을 던지지도 않았고, 일본인들에게 욕을 하지도 않았다. 3월 6일 함흥의 상점들은 여전히 문이 닫힌 상태였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었다. 우시장 근처에서 또 만세 함성이 들렸고, 이에 일본인 소방수들이 또 곤봉을 들고 몰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곤봉에 맞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 가운데에 변응관(Byon Eung Kwan)이 있었다. 그는 뒷머리를 맞고서 경찰서로 끌려왔는데 분명히 거의 죽어 가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인들은 막대기나 돌을 들지 않았다. 또한 욕을 하지도 않았다. 며칠 후 변(Byon) 씨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풀려났다. 며칠 후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하면 함흥에서 약 1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장날에 한국인들이 함흥에서 한 것처럼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은 경찰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았고, 그들이 만세를 부른 후 경찰 간부는 몇 마디 친절한 말을 했고,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한 3월 13일에는 신흥에서 장날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경찰은 비무장 상태인 군중들에게 발포를 했고, 이 중 네 명이 죽고 네 명이 부상을 당했다. 죽은 사람 가운데에는 여성도 있었는데, 그녀는 그때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있었다고 한다. 피투성이가 된 채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본 한국인들은 격분하여 헌병들에게 돌을 던졌다.함흥에서 가까운 성곡(Sunggok)에서도 네 명의 한국인이 죽었다고 보고되었다.요 며칠 동안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다수가 기독교 지도자들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3월 15일까지 함흥과 그 근교 지방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간략한 보고이다.나는 위에서 언급된 3월 4일에 벌어진 일을 직접 목격했다.1919년 3월 20일, 서울에서노라스(D. M. Noras) (서명) (캐나다 장로교 선교단의 일원)

    160 세브란스 병원에서 있었던 부상당한 한국인의 이야기

    작성일: 1919-03-29작성처: 면담자: F. G. 베시(F. G. Vesey) 목사(1) 안주에서 온 열아홉 살 된 이인옥은 총탄에 맞아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3월 2일 그는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독립을 외치는 약 4천 명의 군중에 합류하여 헌병사무소로 몰려갔다. 7명의 일본인 헌병은 헌병사무소에서 나와 군중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수히 발포를 했고, 한국인들 중 8명이 죽고 2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발포로 인해 군중은 흩어졌지만, 그들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돌이나 막대기나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이 젊은이는 그 지역의 한국 병원으로 갔으나 간단한 처치를 받은 후 서울에 있는 기독병원으로 옮겨가라는 조언을 들었다. 이곳에 가야 만족스런 처치를 받고 탄환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3월 5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입원하여 주재하는 외과의의 집도로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는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았다.(2) 예순한 살인 농부 노종윤은 안주 외곽에 살고 있는데, 위의 학생과 같은 군중들 사이에 있었다. 그의 진술과 위 학생의 진술은 각각 다르게 조사되었지만 일치했다. 이 사람 역시 오른쪽 다리에 총알을 맞았다. 왜 평양의 병원에 가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그곳에 있는 일본인들이 두려웠다고 대답했다. 그곳의 일본인들이 그를 체포하여 더 고문을 할까 봐 말이다. 이 사람 역시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고, 교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3월 5일 병원에 와서 즉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3) 패주(Paiju)사람인 스물일곱 살의 김남산은 이웃 사람 여러 명과 함께 공웅(Kong Ung) 장날에 장을 보러 온 참이었다. 그곳에서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6명의 일본인과 두 명의 한국인으로 구성된 헌병대가 나타났는데, 일본인들만 총을 가지고 있었다. 군중들이 계속 만세를 외치자 일본인들은 여러 차례 발포를 하였고, 이 와중에 4명이 죽고 3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그는 도망을 가다가 어깨에 총알을 맞았고, 곧 쓰러졌다. 한국인들은 아무런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고, 무기도 없었으며 막대기나 돌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이 사람은 아무런 종교도 믿고 있지 않으며 교회나 집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4) 황해도에 사는 스물다섯 살의 고면만(Ko Myen Man)은 3월 23일 읍내에 왔다가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는 수백 명의 군중과 합류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에 헌병과 순사들이 곤봉과 칼, 총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군중들 속으로 달려들어가 곤봉과 칼로 많은 이들을 내려치고 총으로 발포를 했다. 이로 인해 적어도 3명이 죽었으며 2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군중은 도망갔다. 이 사람은 일본인 병원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한국인 지역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의사는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의사는 그에게 세브란스로 갈 것을 권유했다. 그는 3월 24일에 왔고, 즉시 입원하여 지금은 회복중이다. 그의 다리 위쪽에 총알을 맞은 상처가 있다. 그는 아무런 종교도 믿고 있지 않으며, 교회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다.(5) 덕산(Duksan)에 사는 스물세 살의 이돌사(Ri Tol Sa)는 어느 날 저녁 3백 명 정도의 마을 사람들과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이웃 마을로 행진했다고 한다. 그들은 헌병대로 갔는데, 그곳에서 아무런 폭력도 없이 그냥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헌병들은 한국인 통역자를 통해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3, 4마일 정도 떨어진 서울에서 자동차가 한 대 도착했는데, 그 안에는 많은 헌병들이 타고 있었다. 순식간에 15명의 헌병들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총을 쐈다. 그가 아는 한 1명이 죽었고, 12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발에 부상을 입었다. 몇몇 한국인 헌병들도 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발포를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군중들은 모두 노동자 계층이었다. 그는 그 다음날 아침 (3월 28일) 병원으로 와서 즉시 치료를 받았다. 이 사람은 교회나 혹은 다른 종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6) 같은 마을 사람인 스물일곱 살의 이개똥(Ri Kai Tong)은 위의 진술을 확인했다. 이들 둘은 다른 병실에 있었다. 이 사람은 다리에 총을 맞았다.(7) 역시 같은 마을 사람인 서른다섯 살의 염독창(Yum Tok chang)은 유사한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팔과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종교 없음.(8) 같은 마을 사람인 스물한 살의 송영박(Song Yunk Pak)은 입술 위쪽에 총을 맞았다. 또한 위의 진술을 뒷받침하였다. 종교 없음.(9) 서른여섯 살의 강용이(Kang Yong Ie)는 가까운 곳에서 총에 맞아 상처가 심하여 다리가 산산조각 났다. 역시 위와 같은 진술을 했으며 종교는 없다. 그는 덕산(Duksan)에 산다.(10) 머리에 심하게 부상을 입은 한 남자는 자신의 사고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반(半) 무의식 상태로 누워 있다. (11) 서울에서 8, 9마일 떨어진 고양에 사는 서른여섯 살의 차오균(Cha Oh Kyun)은 왼쪽 아래팔에 부상을 입었다. 그 마을의 상점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의미로 상점 문을 닫았는데, 그 지역의 일본인 헌병들이 다시 열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거부했고, 그 다음날 약 70명의 남자들과 소년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인들과 한국인들로 구성된 지역 헌병들이 나왔는데, 일본인 헌병이 발포를 했다. 이 사람은 총에 맞았고, 다른 사람들은 도망갔다. 한국인들은 폭력이나 돌멩이, 막대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한두 개의 태극기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은 지역 헌병들이 예전에는 아주 친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에 다니거나 종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가끔 천도교 집회에 참석했는데, 요즘은 여기에도 별로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3월 28일에 병원에 와서 즉시 치료를 받았다. (12) 고양군에 사는 54세의 안동안(An Tong An)은 칼집으로 팔을 맞았고, 땅에 쓰러져 있는 동안 곤봉으로 구타당했다. 그는 5백여 명의 사람들이 이웃 마을에 모여 둥글게 행진을 하며 헌병대 밖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많은 일본인 헌병들이 평상복을 입고 그 안에 있었는데, 갑자기 5명의 기마 경찰관과 총을 든 5명의 헌병과 20명의 사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군중들에게로 몰려나왔다. 헌병이 군중들에게 돌아가라고 이야기를 한 후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는 권총으로 군중들을 위협했지만, 그 옆에 있던 군중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막대기나 돌을 지니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3월 28일 병원에 와서 즉시 치료를 받았다. 그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13) 안악(Anak)에 사는 일흔두 살의 김광운(Kim Kwang Un)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장에 나왔다가 약 5백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헌병대장은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몇 차례 훈계하다가 욕을 하며 그들을 모욕했다. 이에 군중들이 밀려와 왜 사람들을 때려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때 헌병대 안에 몇 명의 사람이 구금되어 있었는데, 그들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군중들이 해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명의 일본인 헌병과 두 명의 한국인 헌병이 나와서 발포했다. 그리하여 3명이 죽고, 약 20여 명 정도가 부상당했다. 그러자 분노한 한국인들은 헌병대로 돌을 던졌고, 헌병들은 담 뒤에서 계속 발포를 했다. 이 남자는 어깨에 총을 맞았다. 그는 서울로 오려다가 진남포에서 체포되어 두 손이 꽁꽁 묶이고, 구타당하고 모욕당했으며, 누가 세브란스로 가라고 했느냐고 취조당했다. 같은 일이 재령읍에서도 벌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일본인 병원으로 가라고 말해 본 후 그들은 그가 경계할 만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된 후에는 그를 보내 주었다. 그는 서울로 와서 즉각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는 장로교 신자이다.(14) 두산(Dusan)에 사는 스물한 살의 송윤복(Song Yun Pok)은 얼굴에 총을 맞았는데, 위쪽 턱뼈 뒤에서 반 조각난 총알이 추출되었다. 덕산(Duksan)에서 온 사람들과 같은 진술을 하였다.(15) 구낙서(Koo Nak Saw)는 끔찍하게 불구가 된 상태로 입원하였는데, 몇 시간 후 사망했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특별한 사항을 받아 적지 못했다.(16) 파주(Paju)에서 온 스물두 살의 이남기(Ri Nam Kee)는 곤봉으로 심하게 맞아 부상을 입게 된 경위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3월 29일 토요일에 입원하여 일요일 오후에 사망했다.B. W. 빌렝스(Billengs) 목사가 보고한 사례(17) 혐성리(Hyum Sung Li) 강 근처에 사는 열여섯 살의 성용(Sung Yong)은 3월 23일 저녁 10시경 ‘만세’를 부르는 남자들과 소년들의 군중 속에 섞여 있었다. 약 20명의 군인들이 그들을 해산시키려 왔다. 대부분의 군중들은 흩어졌다. 이 소년은 뒤쳐졌고, 한 군인의 손에 들린 총검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나서 다른 군인이 뒤에서 나타나 소년의 아랫배에 총검을 쑤셔 넣었다. 상처는 복부의 오른쪽에 약 4, 5인치 깊이로 나 있었다. 그는 한성학교 3학년이었고, 장로교회에 다니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 자신은 몇 차례 정도만 교회에 나갔다. 그의 어머니는 신자가 아니었다. (18) 서울의 동소문 안쪽인 시구문안(See Ki Moon An, 역주: 광희문의 또 다른 이름이 ‘시구문(屍軀門)’이었는데, 서울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See Ki Moon’이라는 발음과 가장 유사하므로 이를 택했음)에 살고 있는 서른두 살의 이한봄(Yi Han Pom)은 3월 22일 손에 돌이나 곤봉도 들지 않은 수백 명의 남자들과 함께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 군인들이 와서 이들에게 총을 쐈다. 그도 총을 맞았고, 아마도 한쪽 눈을 잃을 것 같다.(19) 정미소를 하는 서른세 살의 미선명(Mi Syun Myung)은 투금(Tukum)에서 5백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네 명의 헌병이 이 자리에 나타나 발포를 했다. 한 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도 부상을 입은 8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천도교 신자도 아니다. 그는 총알 하나로 양쪽 다리에 모두 부상을 입었다.(20) 파주군에 살고 있는 서른네 살의 정영희(Chung Yung Heui)는 3월 28일 오후 1시 4백여 명의 군중과 ‘만세’를 불렀는데, 일본인 헌병이 발포를 했다. 8명이 사망했으나, 그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돌멩이로도 무장을 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목에 총상을 입었다.(21) 유영군(Yu Yung Kun)은 마흔두 살로 서울에서 65리 떨어진 파주군 신산리 장로교회의 지도자이다. 1천여 명의 사람들이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기 위해 나왔는데, 그는 일본인 헌병에게서 총상을 입었다. 그 헌병들은 사람들이 뛰어가는데도 발포를 멈추지 않았다. 세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당했다. 이 남자는 목 옆쪽에 총상을 입었다.(22) 구준면(Koo Chun Myun)은 농부로 서른네 살이다. 3월 27일 오후 1시 광주읍에서 5, 6백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헌병이 총을 쐈고, 이 남자는 턱에 총탄을 맞아 턱뼈의 대부분이 으스러졌다. 세 명이 사망했고, 이 남자는 중상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