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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91 1972년 12월 장로교 역사학회(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에서 제출한 사본

    작성처: 미국 장로교회 해외 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1919년 3월 1일 한국 독립운동 특별 서신, 보고서 및 기타 서류ca.1400pp., mss.원본 mss.- PPPrHi본 자료는 장로교 역사학회(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롬보드 스트리트 425번지, 19147)의 서면 승인 없이 복제할 수 없습니다.

    92 크리스틴 캐머론(Christine Cameron) 씨와의 대화 내용 기록

    AJB: N작성일: 1919-08-06캐머론(Cameron) 양은 7월 9일 한국을 떠나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내게 가장 최근의 상황에 관하여 믿을 만한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미국 부영사 커티스(Curtis) 씨에게 한국의 현재 상황이 어떠한지 물었다고 합니다. 커티스(Curtis) 씨는 그녀가 판단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서울을 비롯한 몇몇 대도시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으며, 지방의 경우에도 서울과 비슷하거나 더욱 나쁜 상황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어떠한 위협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혐의자들을 무자비하게 색출하여 체포하고 고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병원은 이렇게 구타당하여 상처 입은 사람들로 넘쳐 나고 있으며 잔인한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일본 경찰은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인지 조사하여 기독교인인 경우에는 가차없이 체포하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교회에 들어와서 체포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경찰들의 이러한 행동은 상부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 행위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자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 민간인 정부(civil administration)를 수립하고 군대의 일부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것을 약속했지만 이러한 약속은 그녀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캐머론(Cameron) 양은 선교사들이 지방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으며 도시 지역에서만 선교 활동을 하도록 제한되었는데, 이러한 것이 미국 총영사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현재 외국인 여성이 한국을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며, 외국인 남성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지만 한국인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캐머론(Cameron) 양은 한국을 떠나기 2주일 전에 부영사 커티스(Curtis) 씨의 부인으로부터 이에 대해 한 가지 사례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버트(Robert) 씨를 포함한 두 명의 미국인 선교사가 한국의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시골 두 군데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첫번째 마을의 교회에는 연로한 교회 장로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회 장로님은 두 명의 선교사의 요구에 따라 저녁 예배에 사람들을 불러모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두 명의 선교사는 두 번째 마을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도 목사님의 나이 많은 어머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저녁 예배에 참석할 사람들을 불러모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마을을 방문한 후 앞서 방문했던 두 마을에 돌아왔을 때, 목사님의 어머님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당하여 방에 내던져져 있었으며, 장로님 역시 너무도 잔인하게 구타당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두 명의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매질당한 것이었습니다.

    93 선교사 대표자 및 일본인들 사이에 열린 첫번째 비공식 회의 보고서

    작성일: 1919-03-22참석자: 와타나베(Watenabe), 카타야마(Katayama), 코쿠부(Kokubu), 세키야(Sekiya), 호시노(Hoshino), 카와바타(Kawabata), 야마가토(Yamagato), 마쓰모도(Matsumoto), 사카이도(Sakaido), 니와(Niwa), 웰치(Welch), 애비슨(Avison), 모펫(Moffett), 게일(Gale), 게레인(Geraine), 하디(Hardie), 브리크맨(Breekman), 휘트모어(Whittemore), 노블(Noble), 벙커(Bunker).(여기서 파란 색 글씨 부분은 명확하게 알아볼 수 없는 이름입니다.)본 회의는 와타나베(Watanabe) 판사와 카타야마(Katayama) 씨의 초청으로 열렸습니다.회장인 와타나베(Watanabe) 판사는 이 회의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유감스러운 소동과 관련된 문제에 관해 토론할 목적으로 열렸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석했지만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한국 민족의 복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와타나베(Watanabe)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판사로서 법정에서 모든 한국인들이 공정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벌을 받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은행가가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재정 상태를 향상시키고 국민에게 보다 나은 금융 체제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국민을 계몽해야 하며, 선교사는 국민의 정신적 개발을 도와야 합니다. 아마도 선교사의 일이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현재 매우 유감스러운 소동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마 관리인 우리가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 즉 은행원들이나 선교사들이 잘못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특히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계시는 휘트모어(Whittemore) 씨와 모펫(Moffett) 박사님이 참석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솔직한 생각을 알 수 있도록 마음을 터놓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앞서 이야기했지만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불평등한 대우입니다. 10년 전 매우 비참했던 이곳의 상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곳에 부임한 후 나는 가장 먼저 재판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알기 위해 법률 기록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찾았지만 법률 기록이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불공정한 판결과 뇌물 수수에 관한 사건들을 은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파기되었던 것입니다. 관리들이 관할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강제 징수가 이루어졌으며 국토의 산림은 벌거숭이가 될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산림의 3분의 1이 훼손되면 사실상 국토가 파괴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의 산림 지역은 2분의 1 이상이 벌목되어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교육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상 학교가 없었으며, 소위 학교라고 하는 곳은 고작해야 한문으로 씌어진 오래된 책들을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이 한국인들을 세상과는 다른 상태로 이끌어 갔기 때문에 우리가 해온 모든 일들은 한국인들을 위한 선의의 차원에서 행한 것이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의 억압 같은 것은 결코 없었습니다. 이 말은 정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부는 적절한 시간이 도래했다고 생각될 때 이러한 불평등을 바로 잡으려고 계획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판사는 토론을 솔직하게 진행하자고 다시 한 번 이야기했습니다.게일(Gale) 박사: 저는 일본 및 한국을 비롯한 극동 지역 전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생을 이곳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직면한 폭동 상황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통제 아래 물질적으로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정신 세계는 물질과는 거리가 멀며, 저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이러한 한국인들의 정신 세계에 합류하려 애썼지만 지금까지도 방관자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세계는 알게 될수록 존경하게 만드는 고대 문명의 세계이며,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자립하도록 만드는 사건, 교제, 이상으로 가득 찬 우리의 세계보다도 더 복잡한 세계이며, 우리 서양과도 매우 다르고 또 일본과도 현저하게 다른 세계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인들을 훈육하기 위해 이질적인 방법으로 억압하기보다는 그들의 문명을 충분히 고려하여 올바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한국의 정신 세계를 간파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정신적 안정이 없는 육체적 편안함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모펫(Moffett) 박사: 저는 30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왔고 그 동안 많은 한국인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그들의 절친한 친구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도덕적?정신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깁니다. 저의 교육 방식은 정신적 성숙도를 고양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대단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선상에서 한국인들이 어디에 가치를 두는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정의입니다. 정의는 그 어떤 물질보다 호소력이 강한 무기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정의가 실현된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심어 준다면 그들은 정의를 가치 있게 평가하고 또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중국에서 비롯된 도덕적?정신적 측면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태도를 가진 한국인들은 물질적 안정보다 인격적으로 대우받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하디(Hardie) 박사: 저는 한국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사랑합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인들은 인격적으로 현저히 발전했으며,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국인들의 인격적 발전은 일본인들과 선교사들의 영향이 큽니다. 일본의 교육 체제는 한국인들의 정신적 발전에 기여해 왔으며, 저는 이러한 일본의 노력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관심 있게 지켜보았습니다. 일본은 아시아의 핵심이라고들 생각합니다. 일본이 한국인들을 인간적인 따뜻한 마음으로 대할 때 한국에서의 사명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발전한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며, 저로서는 한국의 경제적인 번영과 향상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들의 사회가 물질적으로 향상되어 혜택을 받고 있음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전혀 풍요롭지 못합니다. 한국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여 거만하고 억압적인 자세로 대우하는 한 그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에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정신적 감성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의 분노도 증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그들이 느끼는 불신과 불만족에 대한 억압된 감정을 표현하여 의도적이고 강압적인 민족 차별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인들을 강제로 일본 제국의 신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의지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의지의 해답은 육체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자부심이 승리한다는 정신에 있습니다. 우리가 일궈 온 업적을 우리 손으로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화이트모어(Whittemore) 씨는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고 그들에게 적용되는 법률이 너무 많은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유용한 일부 법률을 제외하고는 너무 많은 법률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코쿠부(Kokubu) 씨(법무장관)는 한국인들을 정신적인 방법으로 지도하는 것은 힘들며 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선교사들을 만나 폭동 문제에 관한 선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선교사들이 현재의 폭동을 조장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사실을 조사한 후 언론을 통해 소문을 부인했으며 선교사들이 이번 폭동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이 폭동은 한국 내에 퍼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즉 선교사들이 이 문제를 지켜보는 단순한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정부를 지지하여 폭동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줄 협조자의 역할을 할 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앞으로 더 나은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차원에서 인류와 평화를 위해서도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노블(Noble) 박사는 남부 지방에서 온 사람을 만나 그가 감시하는 1백 개의 교회와 45개의 학교에서는 지금까지 아무런 소동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한국인들이 일본에 종속되도록 교육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느꼈습니다.세키야(Sekiya) 씨(교육부 장관)는 이번 폭동의 책임이 전적으로 학생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학생들이 가담했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따라서 교육부 장관으로서 제게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을 무시했을 수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고의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업무는 한국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펫(Moffett) 박사님은 한국인들이 물질보다는 정신을 중요시한다고 했으며, 선교사의 견해에서 이것은 사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가능한 한 많은 한국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화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정신적 풍요를 위해 모든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부의 목적은 다릅니다. 물질적인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인들은 물질적 풍요에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으며 정부는 내키지는 않지만 이에 대해 강압적인 조치를 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교육부의 입장에서는 산업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물질적인 생활에 비해 정신적인 풍요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결점이 있습니다. 물질 시대에서는 정신적인 측면과 물질적인 측면 두 가지 모두를 장려해야 합니다. 과거의 한국식 교육은 단지 읽기만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경멸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여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식하고 노동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그들이 노동을 하도록 교육하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의 방법을 싫어할지라도 우리의 계획을 수행해야 합니다.한국인들의 또 다른 결점은 너무나 형식을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학교를 그 가치보다 더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일부 선교 학교에도 이와 유사한 결점이 있습니다. 정부는 학교에 과장된 칭호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의 시설과 효율성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한국인들은 한국의 초등학교 과정은 4년인 데 비해 일본은 6년이라는 것에 불만을 표합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초등학교 과정은 4년이었으며, 한국이 이 체제에 따라 학교 과정을 준비할 때 우리는 일본 표준 교육 체제를 6년으로 변경한 것입니다. 또한 한국인들은 학교의 수가 적다는 것에도 불만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국민들에게 세금을 너무 빨리 징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부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도록 학교 증설을 계획하고 있으며 거의 확실한 의회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공정하고 성실하게 이 모든 업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인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진심을 알고 싶습니다.우리의 방법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에 대한 우리의 호의만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국 국민의 특성을 존중하지만 그들의 나쁜 점을 뿌리 뽑는 것이 상책입니다. 나쁜 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쳐야 합니다. 비록 일본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들의 나쁜 점은 없애고 좋은 점은 보존해야 합니다. 한국인들에게 항상 만족스러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가끔은 한국인들의 이해를 얻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일본인들이 너무 엄격하게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경향은 있어도 결코 의도적으로 한국 국민을 억압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방법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인들을 부당하게 대우할 의도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국 크리스천 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 학생들의 졸업을 이번에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그들의 감정을 해친 한 가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정부 조치가 한국인들에게 못마땅하더라도 선교사들이 정부에 협력해 주기를 바랍니다.”벙커(Bunker) 씨는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불의에 대한 증오심이 사무쳐 있다면서 그들을 관리하는 범위 내에서 좀더 폭넓은 행동의 자유를 주는 것이 현명하다고 제안했습니다.카타야마(Katayama) 씨: 한국인들의 행동은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일본 제국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병합은 국제법에 따라 정당하게 수행된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이 독립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대역죄이며 반란을 도모하는 범법 행위로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평등하고 공정하게 대우한다는 사실의 실례를 들자면 한국은행(Bank of Chosen)에서 일본고등상업학교(Higher Commercial School of Japan)를 졸업한 한국인들을 고용하고 그들을 평등의 원칙에 따라 대우하려 애쓰고 있지만 실무에서는 개인의 역량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인들의 능력을 고려하여 적절한 직위를 부여하고 그에 알맞은 업무를 지시합니다. 모든 국민은 법을 준수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합니다. 때로 정당하지 못한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 선교사들이 이점을 지적해 준다면 우리는 선교사들의 의견을 존중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관대하고 자유롭게 대우해야 하지만 그들 역시 정부 정책에 어긋난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오해가 전쟁이나 대립의 결과를 낳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본은 오랫동안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했지만 오해가 전쟁을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우정어린 충고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단합하여 세계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브리크맨(Breekman) 씨: 저는 지난 10년 동안 일본과 한국에서 YMCA 직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우리는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고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주도권을 지키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 스스로의 주도권을 지키는 것이 한국 사회에 평화와 행복, 희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대만 국민은 대만의 권익을 주장하고 한국인들은 한국의 권익을 주장하며 일본은 그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시기가 오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시대가 되어야만 일본이 세계 5대 열강 가운데 하나로서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94 3월 29일 토요일 오후 및 3월 30일 일요일 저녁 세키야(Sekiya) 씨와의 회담에 대한 보고서

    작성일: 03-293월 29일 토요일 오후, 3월 30일 일요일 저녁웰치(Welch) 주교와 애비슨(Avison) 박사가 요청한 세키야(Sekiya) 씨와의 회담이 3월 29일 토요일 오후 4시 세키야(Sekiya) 씨의 자택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통역은 우에다(Ueda) 씨가 맡았습니다. 이 회담에서 웰치(Welch) 주교와 애비슨(Avison) 박사는 한국인들의 시위를 일본 경찰과 헌병이 과잉 진압한 사실에 대해 세키야(Sekiya) 씨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며칠 전 와타나베(Watanabe) 판사가 초청한 회합에서 관계 당국은 모든 보고서를 허용할 것이라고 세키야(Sekiya) 씨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잔인한 시위 진압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도 되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정당한 이의가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며 두 번째는 이 보고서가 작성되면 누구에게 제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우선 경찰 및 헌병대의 조직 구성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세키야(Sekiya) 씨는 군 책임자는 우소노미야(Utsonomiya) 사령관이지만 경찰 및 헌병대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실제 책임자인 코지마(Kojima) 장군의 지시에 따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원래 상황에서라면 경찰이 우소노미야(Utsonomiya) 사령관의 특명을 받지 않고 시위를 진압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우소노미야(Utsonomiya) 사령관이 경찰에게 특명을 내리려면 회의를 소집하여 코지마(Kojima) 장군에게 특명을 하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군 조직의 규칙과 다소 유사합니다.두 번째 질문은 웰치(Welch) 주교와 애비슨(Avison) 박사가 관심을 두고 있는 시위 과잉 진압에 대한 것입니다. 세키야(Sekiya) 씨는 특정 지역에서 시위에 대해 과잉 진압이 있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한국 시위대가 수적으로 열세에 있던 경찰과 헌병들에게 먼저 폭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경찰과 헌병을 보호하고 정부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투입해야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인들의 불법 폭력 행위에 대한 경찰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보충 설명을 했습니다. 폭력 진압 보고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의향이 있는지에 관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보고서를 관련 당국에 제출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검토하겠다며 세키야(Sekiya) 씨 본인에게 제출할 것을 제의했습니다.그런 다음 한국인들에게 영향이 큰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시위를 중단하고 일상 생활로 돌아가도록 해주기를 바라는 이전의 요청을 다시 한 번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일을 하기에는 정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세키야(Sekiya) 씨는 현 상황에서 정부에 건의할 사항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애비슨(Avison) 박사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정부에 건의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으며 만약 건의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언급하겠다고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가 없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부에 요구할 수 있도록 서로 상의조차 못하고 있다는 상황을 건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왜냐하면 그들이 집회를 갖고 정치적인 발언을 한다면 즉시 체포되어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금처럼 폭동을 일으키며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울부짖음은 정부와 외부 세계의 관심을 끌고 한국인들을 단합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는 현재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에게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부여하고, 자유로운 만남을 가져 상호 의견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의견을 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의견을 수렴하여 정부에 요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세키야(Sekiya) 씨는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자유를 부여하면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이라 생각하느냐고 애비슨(Avison) 박사에게 물었습니다. 박사는 한국인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모르지만 이 시위를 당장 진압하려면 그들이 자유롭게 모여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한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세키야(Sekiya) 씨는 이 제안에 관심을 보였으며 다시 만나자고 말하며 본 회담을 마쳤습니다. 두 번째 회담은 일요일 저녁 7시 30분 한국호텔에서 갖기로 했습니다.두 번째 회담첫번째 회담에 참석했던 인물들이 두 번째 회담에 다시 참석했습니다. 세키야(Sekiya)씨는 국민들에게 독립적 활동을 허용한다는 것이 교육적 측면과 재정적 측면으로 인해 어렵다는 것을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정부는 국민들이 생업인 농사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정부의 입장은 국가의 예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많은 한국인들의 재산을 증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정부가 공식적인 교육보다는 농업 교육에만 전념하고 고등 교육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정부 부처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은 점에 대한 잘못도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처음부터 실행했다면 현재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애비슨(Avison) 박사는 그러한 정책들이 유용하지만 실제 상황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세키야(Sekiya) 씨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문제는 이전에 언급하셨던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자유를 의미하시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으며 박사는 그렇다고 말했습니다.그들은 경찰국 제2의 실권자인 마예다(Mayeda) 대령의 제안으로 호텔 거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세키야(Sekiya) 씨는 한 사람씩 과잉 진압에 대한 사례를 마예다(Mayeda) 대령에게 보고하자고 제안했습니다.마예다(Mayeda) 대령은 경찰 및 헌병이 38개 지역에서 무기를 사용하여 과잉 진압한 사례를 보고받았으며 거의 모든 상황에서 세 명에서 다섯 명의 경찰들 또는 한두 명의 일본인들에게 한국인들이 먼저 폭력을 행사했다고 말했습니다. 즉 수많은 한국인들이 경찰서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손했기 때문에 경찰들은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기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 네 명의 일본 헌병만 배치된 지역에서는 한국인들의 공격으로 네 명의 헌병이 모두 살해당했고, 한 헌병 부인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총을 사용했으며 한국인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예다(Mayeda) 대령의 전반적인 의견은 한국인들의 폭력에 맞서 일본 경찰 및 헌병들이 필요 이상의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일본 관리의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남부 지역의 토머스(Tomas) 씨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 마예다(Mayeda) 대령은 토머스(Tomas) 씨를 구타한 것은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아니라 일본 시민이라고 말했습니다. 외국인들이 이 폭동을 주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화가 난 일본 시민들이 체포되었던 외국인을 구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경찰의 의무가 아니냐는 웰치(Welch) 주교의 말에 대령은 너무 많은 시민들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저지할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웰치(Welch) 주교는 천주교 신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Pyang yang)에 갔던 다섯 명의 신학교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십자가 형틀에 묶여 29회나 구타를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예다(Mayeda) 대령은 경찰이 혐의자를 체포하여 조사를 계속할지 즉결 재판을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합법이며, 이 과정에서 경찰은 어느 정도의 처벌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29회의 구타는 지역의 특성상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애비슨(Avison) 박사는 학생들은 어떠한 폭동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한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예다(Mayeda) 대령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평양(Pyang yang)으로부터 완전한 보고서를 받지 못했으며 현재 조사중이라고 대답했습니다.회담이 끝나기 전에 마예다(Mayeda) 대령은 폭동이 일어난 후 한국인들은 더욱 난폭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경찰간에 잦은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폭동이 더욱 난폭해질수록 경찰과의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없음을 우려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보고서도 허용하여 주의 깊게 조사하겠다고 말했습니다.이것으로 회담을 끝마쳤습니다.

    95 미국 교회연방회의 산하 동양위원회(The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의 한국 상황에 대한 성명서

    작성처: 미국 교회연방회의 산하 동양위원회미국인들은 한국이 독립을 위해 폭동을 일으킨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당국의 잔혹한 가혹 행위에 대한 일부 보고서에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암스트롱(Rev. A. E. Armstrong) 씨가 위원회에 보고한 것이며 그 진상은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위원회는 심사숙고한 결과 미국 국민의 권익을 위해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캐나다 장로교 해외 선교위원회의 연합 서기관인 암스트롱(Armstrong) 씨는 10개월에 걸쳐 일본, 한국, 중국을 방문했으며, 1918년 가을에는 3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렀습니다. 1919년 3월 14일 미국으로 가기 위해 요코하마(Yokohama)에 머물러 있던 암스트롱(Armstrong) 씨는 서울로 즉시 돌아와 달라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서울로 돌아간 그는 미국, 캐나다, 영국인으로 구성된 30여 명의 선교사들과의 회합에서 한국에 독립운동이 발발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 국민 모두가 일반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한국인들의 무계획적인 독립운동과 소극적인 저항 방법에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무장하지 않은 한국의 많은 애국열사들과 남녀노소가 함께 자유에 대한 열망을 외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이틀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던 암스트롱(Armstrong) 씨는 수많은 한국의 군중들이 저항하지 못한 채 체포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영국 정부를 대표하는 영사들과 미국 및 영국의 사업가들과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일본 경찰의 잔인한 시위 진압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들었습니다. 또한 미국과 영국에도 보낸 이 사건에 대한 진술서를 영사관에서 확인했습니다. 암스트롱(Armstrong) 씨는 이러한 모든 정황을 본 위원회에 보고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미국과 캐나다 교회에 보고하는 차원에서 끝내지 않고 일본 제국 정부가 모든 문명 정부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고려하지 않고 공권력을 남용하여 한국인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철회하라는 한국의 여론이 일본 정부를 설득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영국인들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대로 이 사실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여론을 형성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앞서 서신으로 확인된 사실과 미국 및 전세계의 일반적인 상황에 비추어 본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1. 다음 성명서는 한국에서의 일본 제국 정부의 정치적 문제와는 무관함을 밝힙니다.2. 한국에서 일본 민간 정부가 국토와 국민의 권익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질서가 유지되고 농업, 상업, 공업이 발전했으며 교육 환경이 고무되어 국민들의 부와 복지 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인정합니다.3. 지금까지 선교사들은 단체 또는 개인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목적인 소위 독립운동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증거가 없습니다.4. 지난 10년간 선교사들의 경험으로 볼 때 세계적인 정치적 불안과 재조정의 시기를 맞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설립하는 시점에서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수호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세계의 관념과 이념에 호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폭력과 정신적인 억압이 아닌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획입니다.5. 하지만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정부가 불가피한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수의 군중들은 폭도로 변하여 폭동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 당국이 가혹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난폭해지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한국인들과 정부의 근본적인 차이를 충분히 인식해야 합니다.6. 한국과 일본의 안녕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현재로서는 상황을 완전히 안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유언비어로 인해 단순한 폭동이 수백 명의 군중을 선동할 수 있습니다.7. 그 동안 수정되어야 할 가혹 행위가 있었음은 명백합니다. 그러한 가혹 행위가 얼마나 일반적으로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경찰 및 군 당국이 한국인들을 체포하여 죄를 자백하게 하고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행했던 가혹 행위에 대해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명 정부들은 한결같이 이를 부인했습니다.8. 뉴욕에 있는 일본 고위 관리들은 고문 행위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위원회를 납득시켰습니다. 하지만 고문이 법으로 금지되었다면 고문을 행한 자들을 처벌해야 합니다.9. 이전에 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들에게 잘못을 탓하는 군법은 민법과 명백히 구분하여 그들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이들은 전세계에 보여주었던 일본 군국주의의 특성과 똑같은 정신과 방법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암스트롱(Armstrong) 씨는 “영사, 사업가,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들이 1910년부터 한국을 지배했던 군국주의 체제에 의해 억압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0. 본 위원회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되었거나 체포될 한국인들에게 일본 경찰 및 헌병들이 불필요한 고문 행위를 자행하지 않도록 1천 8백만 교회의 신자들을 대표하는 31명의 대의원들의 정직한 기대와 신념을 대변할 것입니다. 또한 일본 제국 정부가 경찰 당국에 고문 행위의 책임을 묻고 공식적인 이의를 제기하여 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처벌할 것을 믿습니다.11. 본 위원회는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폭력적인 시위를 하지 않겠다고 한 데 대해 정직한 기대와 신념을 표명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질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폭력으로 인해 무질서가 야기된다면 일본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개혁은 성취될 수 없습니다.12. 이와 마찬가지로 본 위원회는 미국 국민이 불필요한 가혹행위를 저지하는 한편, 평등한 법의 심판과 공정한 분별력을 유지하도록 정직한 기대와 신념을 표명할 것입니다.

    96 한국을 위한 청원

    가혹한 억압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의 울부짖음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들은 일본과의 합병 이후 궁지에 몰리고, 무시당하고, 구타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한국에 머물렀지만 한번도 그들의 불행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나라에서는 어린 소녀들이 매춘부로 팔려 나가 거리로 나와 젊은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허가된 매춘 행위가 만연하고 관련 질병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에게 모욕적인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이 신문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하지만 미국 국민들이 알아야 할 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일본에 현대 의학 기술을 전수했으며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사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의술을 학습할 수 있는 학교도 도입했다는 것입니다.한국에서 발행되는 일본 신문에서 발췌“평양(Pyeng Yang)의 외곽 지대에 서양인들이 사는 악마의 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약삭빠른 서양인들이 몰려 사는 이곳에는 벽돌로 지은 집, 한국식 집, 높은 집, 낮은 집 등 1백여 채의 집이 있다(이곳에 13명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표면상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베푼다고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음모와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이곳에 머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인 혼란을 선동하고 한국인들 사이에 헛소문을 퍼뜨려 문제를 야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악마의 행위이다. 이들의 지도자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만큼 신봉하는 모펫(Moffett) 박사이다. 그는 30년 전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한국에 온 후 외국인 공동체를 설립하고 이 공동체에 초등교육 기관부터 대학교 및 병원을 세우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다. 이들은 한국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한국인들의 병을 치료하는 한편 음흉한 계략을 숨기고 있으며 한국인들조차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인 공동체가 바로 한국 폭동의 중심지이다. 교회 부속 학교, 대학교, 여학교, 외국인들이 포함된 단체 등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 공동체는 대단히 야비한 집단이다.”기독교 공동체의 각 단체 회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일본에 대항하여 어떠한 위법 행위도 하지 않은 무고한 모펫(Moffett) 목사를 체포하여 감금한 일본인들의 처사에 누구라도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은 같은 신문의 또 다른 기사를 인용한 글입니다.“미국 선교사들의 업무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폭동을 선동하는 것이다. 선교사들 가운데에는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많으며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악하게 하여 민주 국가의 씨를 심고 있다. 그들은 윌슨(Wilson)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면서 그들의 종교 뒤에 숨어 한국인들을 선동하고 있다. 선동 행위의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흉계를 꾸미는 망령이 숨어 있다. 이 망령은 매우 가증스럽고 흉폭한 것이다. 이러한 검은 망령의 탈을 쓴 사람은 바로 한국에 있는 외국 선교사들이다. 그들의 지식, 특성, 성향은 미국의 하찮은 쓰레기에 불과하며 연간 3백 엔(Yen)의 월급으로 그들 자신을 팔고 있다(1엔은 50센트). 또한 파충류 같은 그들은 한국까지 기어왔다. 그들의 지식, 특성, 성향을 비유하는 데는 이 말이 가장 적절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그들은 돈만을 추구하여 사리 사욕을 채우는 데 여념이 없다. 세상의 나쁜 일들은 이러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 의해 시작된다. 그들은 수치스러운 임무를 도모하는 아주 비열한 짐승과도 같은 사람들이다.”그밖에도 이 신문에는 모욕적인 내용의 기사가 많이 실렸습니다.“한국이 자치정부를 이끌어 나갈 능력이 없다면 한국을 지배할 적합한 나라는 일본이니다.”다음은 일본이 저지른 잔인한 폭력 행위입니다.수많은 교회가 일본 헌병과 군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탔으며 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처벌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피신해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자유가 박탈되었고 날마다 무수한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군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무참히 짓밟았으며 성경책과 교회 기록들을 강탈하여 파기했습니다. 경찰과 군인들은 길을 가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체포하고 탄압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일본군 지휘관이 이웃 마을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기독교인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을 구타하도록 명령했습니다.평양(Pyeng yang)의 장로교 신학교(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가 3월 5일에 개교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대구(Taiku)에서 올라온 다섯 명의 남자들은 이날 오전 자신들의 방에 있었습니다. 경찰들은 이들을 매질하여 체포한 다음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다섯 명의 남자들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경찰들은 그들에게 공안법을 위반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무자비하게 29대의 채찍질을 가했습니다.선교 병원 근처에 있는 집에서 일본 경찰이 위임한 감시원들에게 두 소녀가 머리채를 붙들려 끌려 나와 전봇대에 머리채가 묶인 채 심한 구타를 당한 뒤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가장 잔혹한 행위는 일본 경찰들이 거칠고 무책임한 감시원들을 사주하여 한국인들을 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시원들은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달아 맨 긴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무기에 머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이송되어 왔습니다. 그의 머리는 쇠꼬챙이가 관통하여 일시적으로 몸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일본 경찰들은 감시원들로 하여금 한국인들에게 무참한 폭력을 가하도록 했습니다.일본은 3백 명의 일본 막노동꾼들을 고용하여 한국에서 노상 강도질과 살인을 저지르도록 지시했습니다. 총영사관은 정부 장관에게 외국인을 보호할 의향이 있는지 24시간 내에 서면으로 응답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서면 응답을 받은 후 이러한 살인 행위는 사라졌습니다.외국인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수시로 체포되었습니다. 부산에서는 두 명의 영국 여성이 두 소녀를 시위에 참가하도록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기소되었습니다.또 다른 영국 선교사는 일본 경찰이 그를 미국인으로 착각하여 심하게 구타당했습니다. 이 영국 선교사의 여권이나 선교 허가증을 보려 하지도 않고 심한 구타를 한 사람들은 시민이 아닌 일본 경찰들이었습니다. 결국 영국 영사가 개입한 후에야 일본은 사과했으며, 미국 영사관에 사과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많은 선교 학교의 교사들과 여학생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저지른 일본인의 만행은 차마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학생들과 여교사들은 발가벗긴 채로 남자들 앞에서 조사받았으며 나체 상태로 유치장에서부터 경찰서 앞마당을 지나 취조실까지 걸어가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이 광경은 외국인이 목격한 사실입니다. 그 여학생들은 사랑스러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한 여학생은 자신의 몸을 팔로 가리려고 애썼지만 일본인들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저지했습니다. 이러한 참혹한 만행은 말할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주검과 상처 입은 사람들이 함께 그들의 친척들에 의해 땅에 묻혀져야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47명의 남자들을 총살하고 교회에 버린 뒤 교회를 불태웠습니다.한국인들의 재판은 비밀리에 열렸고 그들의 일가 친척들은 참석하지도 못했으며 그 친척들도 언제 재판에 회부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많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법정에 세워 재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재판’은 이미 결말이 난 재판이었습니다. 검사는 형식적인 기소를 한 후 판사에게 구형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두 시간 내내 이야기한 후 피고인들에게 할말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피고인들이 할말이 있다고 하자 검사는 자신의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어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야비한 정의입니다.일본 군대는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에도 침범하여 위독한 환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남자는 자신의 종기를 치료할 수 있도록 일본인들을 이해시키려 애썼지만 결국 그들은 그 남자의 목에 총을 쏘고 말았습니다.한 내과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하고 자신의 병원에 실려 온 소년들의 사망 신고서를 작성하려 했습니다. 그 의사는 행정관에게 불려 가 헌병의 구타로 소년이 사망했다는 소견을 작성하려 했다는 이유로 1시간 45분 가량 행정관 앞에 서서 질문 공세에 시달렸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지만 행정관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내과 의사는 환자의 사망 원인을 총상 또는 자상(刺傷)으로 사망 신고서를 작성하려 하자 일본 관리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사망 신고서를 작성하겠다고 했습니다. 일본인들이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잔인함을 개선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더욱 더 극악무도한 행위만을 생각하고 저지르는 악마와 같은 존재입니다.모든 문제를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의 탓으로 돌리는 독설적인 신문 기사는 그들을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사악한 존재로 전락시켰습니다.서울 근교의 한 마을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참혹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일본 군인들이 그 마을의 기독교인들을 교회로 불러모아 총으로 그들을 살해한 다음 교회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근처의 집들 역시 일본 군대에 의해 불타 버렸습니다. 서울의 높은 지역에 있던 세 명의 외국인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현장의 사진을 찍어 놓았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저지른 짐승 같고 비인간적인 수많은 만행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또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일본이 이러한 만행이 일어나는 것을 계속 허용한다면 세계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의와 권리는 이 미개한 땅에서 떠나고 부정, 잔혹함, 박해, 억압, 고통, 죽음만이 남았습니다. 세계는 이 땅의 국민들이 어떤 끔찍한 억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행위, 부정의, 일본인들이 길들여진 것처럼 보이는 교묘한 억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97 일본인들의 구타로 인해 병원에서 숨진 한국 소년들의 죽음에 대한 선교사들의 서신에서 발췌한 내용

    작성일: 1919-06-12소년들의 사망 신고서에서 의사는 사망 원인이 일본 헌병의 구타로 인한 것이라는 소견을 밝혔으며 소년들의 병이 발생한 시기에 대한 질문에 ‘구타 이후’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행정관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담당 의사에게 날짜와 시간을 정해 주면서 법원에 출두하라는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의사는 명령대로 지정된 날 오전 11시에 법원에 출두했으나 2시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2시에 다시 법원으로 간 의사는 의자에 앉아 통역사를 통해 소년들의 죽음에 관한 질문을 퍼붓는 검사 앞에 1시간 45분 동안 서 있어야 했습니다. 검사는 “한국 소년들이 출옥할 당시 다른 한국인 의사는 그들의 질병이 감기라고 판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의사는 어떻게 그들의 사망원인을 다르게 판명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감기라는 소견을 말한 의사는 일본인의 보복이 두려워 그렇게 대답한 것일 수 있다는 말에 검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법정 조사는 만족하지 못한 채 끝났으며 그 의사는 늦은 밤에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제가 보내 드릴 담당 의사의 보고서에는 새로운 의료 규정에 따른 그의 소견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하찮은 일본 관리들에게조차 매번 불려 나가 그의 소견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데 시간을 빼앗겼습니다. 참고로 이 의사는 한 달 평균 3백 명의 환자를 치료하며 훌륭한 수술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친구가 보낸 돈으로 그는 병원 설립을 계획한 후 이 병원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 병원에서 그가 양성한 훌륭한 외과 의사를 비롯한 약사, 간호원들이 한국의 곳곳에 파견되어 환자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 의술을 베풀기 위해 2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습니다.영국인 토머스(Tomas) 씨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정부의 허가증과 여권을 가지고 설교하기 위해 한국에 있는 한 교회를 방문했고, 설교 도중에 일본인들에게 공격받고 구타당했습니다. 그는 설교할 수 있는 허가증과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 영국 영사관에 이 사실을 보고했으며, 영사관에서는 즉각 조치를 취해 사과를 받았습니다. 토머스(Tomas) 씨를 구타한 사람은 그를 미국인으로 착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토머스(Tomas) 씨는 약 2천5백 달러에 해당하는 5천 엔을 보상금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인 로버트(Robert) 씨와 트윙(Twing) 씨 체포 사건에 대한 우리 영사의 항의에 일본인들은 사과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 영사는 합리적이며 호의적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군대가 영국 군대보다 부족한 점이 있습니까? 저는 일본의 법 아래 우리 미국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일본의 부당하고 폭력적인 행위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6월 XX일 오늘 모우리(Mowry) 씨 재판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그는 정치범들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3월 XX일 평양에서 체포되어 변호인조차 없이 법정에 불려 왔습니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쫓겨 공포에 떨고 있던 몇몇 한국인들을 자신의 집에서 재워 주었습니다. 그 한국인들은 그가 아는 한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한국 소년들은 오래 전부터 습관적으로 그와 함께 산책하곤 했습니다. 4월 19일 그는 6개월형을 선고받은 후 대법원에 수없이 항소했습니다. 그 결과 3백 엔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습니다. 항소심 전 재판에서는 중노동을 하는 대신 4개월의 감형을 받았습니다. 이후 대법원에 항소하게 되었고, 우리 선교사들은 그를 변호할 변호사를 선임하는 데 많은 돈이 들었지만 그는 결단코 무고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지난 주 재일본 연방선교위원회(Federal Council of Missions in Japan)에서 세 명이 저희를 방문했습니다. 한 명은 미국인이고 나머지 두 명은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보고들은 사항을 모두 철저히 조사하면서 너무도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고 거의 2백 명의 사람들이 학살된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이 교회의 일꾼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했고 연방선교위원회에서 나온 사람들을 역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뼈가 부러지도록 심하게 구타당했습니다. 다음날 그 교회 일꾼이 저희 병원에 왔으며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조사 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마을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의심할 여지가 있었다면 일본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일본인들은 방문자들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잔혹한 행위를 가한 것입니다. XXX 씨와 그의 가족이 몇 주일 전에 저희에게 와서 아주 귀한 물건을 윌슨(Wilson) 대통령께 전달해 달라며 맡기고 갔습니다. 그것은 저희 학교 책임자가 비단에 수를 놓아 만든 한국의 지도였습니다. 이 지도에는 한국의 모든 교회를 동그라미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한 지역에는 빨간색 십자가 표시를 하고 교회가 불타 버린 지역에는 분홍색 십자가로 표시했습니다. 이것은 한국 여인들의 지혜였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우리를 항상 놀라게 합니다.일본 신문은 한국에서의 실제 상황에 대해서는 함구하면서 우리 미국 선교사들에게 모욕적인 기사를 계속 보도하고 있습니다.이 땅에 정의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1919년 6월 12일 한국에서검열되지 않은 모든 서신은 일본 우편을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보낸 것입니다.

    98 한국의 여학생들이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 참석하는 지도자들과 참석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발신일: 1919-03-10발신주소: 한국발신자: 수신자: 평화회담에 참석하는 지도자들과 참석자파리 평화회담(Paris Peace Conference)에 참석한 많은 지도자들이 모든 것에 대한 원칙과 만인의 권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므로 저희 한국의 어린 학생들은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으로 여러분들께 도움을 청합니다.저희 여학생들은 수치와 모욕적인 언행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 달라고 어디에서||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까요?이 나라의 국민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외치고 있습니다. 저희 어린 여학생들을 비롯한 한국의 남녀노소는 고통스러운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곳곳에서 한국의 독립을 외치고 있습니다.하지만 정의와 인류애는 간 데 없고 한국 국민들은 날카로운 총칼 아래 머리채를 휘어 잡히며 구타당하고 감금당하고 있으며 가옥은 파괴당하고 있습니다.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기독교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구타당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들고 이 나라의 자유와 권리를 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여러분|| 한국 국민을 불쌍히 여기시고 한국의 독립에 힘이 되어 주십시오. 일본의 무자비한 박해와 부당한 대우를 멈춰 주십시오.이 편지가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여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 전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어린 학생의 무례한 편지를 용서하십시오. 저희를 도와줄 사람은 없지만 저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저희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한 가지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한국 국민들 가운데에는 일본의 강압적인 폭력에 대항할 힘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병합에 동의하여 조약에 서명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그들의 진심이 아니라 일본의 계략입니다.위대한 나라 미국의 윌슨(Wilson) 대통령 각하|| 저희는 대통령 각하를 아버지처럼 존경합니다. 저희의 소원은 한국의 독립 선언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것입니다.

    99 제목 해독 불가

    발신일: 1919-04-07(날짜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습니다)발신주소: 도쿄(Tokyo)|| 일본발신자: 수신자: 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 D. D.) 목사수신주소: 5번 가 156번지|| 뉴욕 주|| 뉴욕 시|| 미국친애하는 브라운(Brown) 박사님께||박사님이 이미 한국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소식을 들어 아시리라 믿지만 검열 때문에 지금까지 편지를 보내 드리지 못하여 아직 모르고 계실까 걱정됩니다.집행 위원회의 지시로 4월 2일 우리는 미국 대사와 의논하기 위해 한국을 떠났습니다. 해당 위원회에 믿을만한 정보를 전달하고|| 가능하면 한국의 실상을 알릴 수 있는 선교사|| 기독교인|| 일본인 등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리스(Morris) 대사와 두 번의 긴 회담을 가진 후 검열을 피해 박사님께 서신을 보낼 방법을 찾았습니다.현 상황을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 일본은 한국의 왕위 계승자인 왕자 이(Yi)와 일본 공주와의 결혼을 계획했습니다. 이 결혼은 한국과 일본 두 민족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날짜를 1월 25일로 결정하고 준비를 하는 중에 1월 22일 전 국왕인 왕자의 아버지가 미묘한 상황에서 타계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결혼은 연기되고 이때부터 한국 국민의 마음속에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파리(Paris) 평화회담은 이 사건을 신중히 고려했으며|| 한국 국민은 한국에 적용할 ‘민족자결’ 원칙을 명백히 호소했습니다. 중국|| 하와이|| 미국 등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한국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한국의 지도자들과도 연락을 취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이 얼마나 정확히 실행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상호 협력 활동의 결과 첫번째 시위가 3월 1일에 일어났습니다. 이날은 전 국왕의 장례식이 거행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수천 명의 의지를 모은 독립선언문에 전국에서 모인 33명의 대표자가 서명을 했습니다. 이 중 15명은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병합하기 직전부터 병합한 이후에도 수년 동안 ‘동학(Tong Hak)’과 ‘일진회(Ill Chin Whei)’ 운동을 펼친 ‘천도교(Chun Do Kyo|| ‘거룩한 모임’)’의 지도자들입니다. 또 다른 15명 가운데에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인물인 평양의 조길선(Kil Sun Chu) 목사|| 신천(Syenchun)의 백양천(Yang Chun Paik)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며|| 나머지 세 명은 불교 신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독립선언문에 천도교의 지도자가 제일 먼저 서명한 후 조길선(Kil Sun Chu) 목사가 두 번째로 서명했습니다.33명의 대표자들은 3월 1일 서울에서 회합을 갖고 그 중 한 명을 많은 사람들이 모인 한 공원으로 보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한 후 나머지 대표자들은 일본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한국의 7|| 8개 도시에서 비슷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위에서는 기독교인|| 천도교인|| 불교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나 되어 행동할 것을 결의했습니다.또한 시위 참가자들은 이 운동이 어떠한 재산도|| 일본인을 비롯한 그 누구도 다치지 않는 소극적인 저항 운동임을 밝혔습니다. 성명서를 발표한 후 운동을 펼친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소극적 저항의 운동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은 이와는 반대되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후 모여 있던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었습니다.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작고한 전 국왕의 장례식을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서울에 몰려들었습니다. 거리는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질서정연한 모습이었습니다. 외국인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평양을 비롯한 기타 도시에서도 수천 명이 참가한 시위에서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몇몇 도시에서는 교회 예배가 금지되었지만 일요일인 다음날은 시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다시 세 번째 시위가 여러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시위를 벌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 국왕의 장례식을 엄숙하게 치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이 독립운동은 선교사들도 일본의 비밀 경찰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계획되었습니다. 더욱이 이 운동을 주도해 나갈 효과적인 조직력이 명백히 드러나 보였습니다. 이 운동은 매우 짧은 시일 내에 도시를 비롯하여 산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전국에서 일본 경찰|| 헌병|| 군인들이 소집되어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도자들을 체포했습니다. 그들은 시위가 일어난 처음 며칠간은 거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후|| 특히 지방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시위대를 저지하였습니다. 남자|| 여자|| 어린이를 짓밟고 총부리로 때리고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습니다. 선교 병원과 공공 병원|| 개인 병원은 심각한 상처를 입거나 신체의 일부가 절단된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병원에서는 침대와 간이침대를 복도에까지 놓아 환자를 치료해야 했습니다.모든 환자들은 시위 군중이 어떠한 폭력도 쓰지 않고 단지 독립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그들에게 총을 난사하거나 구타를 했다고 한결같이 증언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일본 헌병들이 군중에게 총을 난사한 뒤 군중들이 반격하여 네 명의 헌병이 살해되었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헌병 주둔지가 파괴당했습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 군중을 체포하려는 시도도 어떠한 경고도 하지 않은 채 군중이 독립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무차별하게 총을 발사한 사례가 많았습니다. 또한 여성들의 옷을 전부 벗겨 공개적으로 심한 구타를 했습니다. 군인|| 헌병|| 경찰들은 주민들의 집에 침입하여 여자와 아이들의 머리채를 끌고 밖으로 나와 때렸습니다. 또한 불을 사용하여 고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야만적인 행동들로 인해 모두의 가슴속에 분노가 일어났으며 일본인들을 무력으로 징벌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위와 항의하는 방법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예로 현재 서울과 평양의 상점들은 한 달 동안 폐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불매운동을 거행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파업하여 세금을 납부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일본의 잔인한 진압이 계속되면 한국인들은 비록 무기는 없지만 반드시 보복할 것입니다.일본은 시위를 진압하면서 단순히 기독교인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에 시위의 책임을 떠넘기고 국민들을 탄압하는 동시에 지방 교회의 모든 관계자들을 체포했으며 시위가 발생한 달에는 예배를 금지시켰습니다. 특히 평안(Pyengan)도 남부 지방에서 이러한 사실이 두드러졌습니다.물론 처음에 선교 학교의 젊은 학생들도 이 운동에 열정적으로 가담했습니다. 그 결과 선교 학교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화 학당(Ewa Haktang)을 제외한 모든 선교 학교가 3월 1일부터 폐교당해야 했습니다. 선교 학교가 폐교된 것은 정부의 직접적인 압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한국의 혼란 상태를 짐짓 평온한 체하고 마치 정상적인 모습인 것처럼 가장해야 했기 때문에 강제 폐교 조치는 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 학교의 폐교 원인은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체포되었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그들의 시위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는 수업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학교를 영구히 폐쇄할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일본 정부는 이 기회를 노려 필요한 수업을 하지 못하도록 하여 결국 학교를 영구히 폐교시키기 위한 압력을 가했습니다. 적어도 두 곳의 학교에 이미 이러한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관리하는 공립 학교의 상황도 선교 학교와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공립 학교에서는 교사들의 회의를 통해 수업이 ‘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불합리하고 모순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이 독립운동을 대폭 지지한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독립운동이 이 두 단체에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떤 지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했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은 선동적인 신문의 보도 기사처럼 지역에 국한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온 나라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각계 각층의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운동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욱이 2주일 전에는 친일적인 사상을 갖고 일본의 병합을 찬성했던 신흥 귀족들과 문인들조차 정부에 독립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보내 결국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1886년에 한국의 전 국왕에게 일본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서구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제의했으며 일본을 옹호하는 그의 친일 사상으로 인해 일본 황제에게 높은 직위를 하사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부가 각계 각층의 국민들이 독립운동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탄원서 제출은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기독교인들이 취했던 입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기독교인들은 영향력 있는 최고 행정 당국에서 내려오는 보고서를 중시해야 합니다. 이 시위를 일으키기 전에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이 모인 회담에서 기독교인들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정부를 개혁하고 탄압과 침해를 바로잡기 위해 탄원서를 계속 제출하자는 의견을 내세운 반면|| 천도교인들은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독립을 선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독립을 선언하자는 의견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일본의 한 주요 관리는 기독교인들이 시위에 참가했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우리는 이 사실을 정부 관료들과의 회담에서 제기할 것입니다.이 혼란에서 피할 수 없는 책임 문제가 선교사들에게 떠넘겨졌습니다. 일본은 선교사들이 시위 전체를 주동하고 사주했다며 선교사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한국에 있는 일본 신문도 독기 서린 기사를 통해 일본의 주장을 지지했습니다. 서울의 미국 영사는 이러한 기사에 대해 정부 관료들에게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기사들은 공식적으로는 ‘철회’되었으나 일본은 물론 한국 전역에 보도되었습니다. 따라서 강력한 반(反) 외국인 감정|| 특히 반미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존 토머스(Jhon Thomas) 경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는 시위를 선동한 미국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과 군인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습니다. 사실 일본인들이 일부 선교사들을 ‘구타’할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으며|| 몽둥이와 칼을 지닌 일본 자객들이 말을 탄 군사를 앞세워 서울의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한국인들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폭동을 일으키고 비밀 작업에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혼란의 시기를 틈타 짐짓 이들의 행동을 묵과하는 교활함을 보였습니다. 일본 관료들은 외국인에 대해 신문 기자에게 말하기를 외국 선교사들은 담배를 피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밤에 길에서 담배를 핀다면 그는 외국 선교사로 오해받을 일이 없으므로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영국인 홀드크로프트(Holdcroft) 씨의 경우에는 밤에 기차역에서 몽둥이를 든 두 명의 남자가 그에게 다가와 국적|| 직업|| 목적지 등을 물었다고 했습니다.평양(Pyengyang)|| 선천(Syenchun)|| 기타 지역에서 외국인들이 목격한 일본 군인들이 저지른 만행의 사례들을 보도한 베이징-텐진 타임스(Peking-Tientsin Times)|| 노스 차이나 스타(North China Star)|| 차이나 프레스(China Press)의 기사를 보셨을 것입니다. 원래는 이러한 기사를 어떤 형태로든 보도하지 않으려 했으며 일본인과 일본 정치 선전을 반대하는 선교사들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이름|| 날짜|| 장소를 기피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단체와는 관련이 없는 한 분별력 없는 선교사가 중국 북부에서 이러한 기사를 수집하여 보도했습니다. 그는 한국 시위가 발생한 첫 2주일 동안 한국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동료들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자료를 그에게 위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 국경을 넘자마자 중국에서 그 기사를 보도했고 구체적인 이름까지 밝히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 사회에서 선교사의 명예가 훼손되고 반(反)선교사 감정을 자극하게 되므로 우리는 매우 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고 다만 미국 영사관측에서 일본 관료들과 지방 신문 관계자들에게 그러한 내용의 기사로 미국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 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선교사가 없길 바랍니다. 앞서 설명드린 차이나 프레스(China Press)에 보도된 기사로 인해 우리는 지방 순회 설교도 하지 않고 가능하면 집에서 조용히 지내고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밤에는 외출을 삼가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현재 서울의 미국 영사관의 서류에도 기록된 실제 사건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중국에서 보도되지 말았어야 합니다.한국의 독립운동이 한국의 교회에 미친 가장 근본적인 영향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교회에 대한 억압을 저지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께 기도하고 이 시련이 세계 역사상 혼란의 시대에 국민을 보호하고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여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신의 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시위가 발생한 뒤 한국총연합회(Korea General Assembly) 의장 및 지도자들이 체포되기 전에 그들에게 들은 것입니다. 정부 관료들의 말에 따르면 천도교의 활동은 전면 금지되었고 교회는 현재 규모의 절반으로 감소했다고 합니다. 군정부가 한국에 계속 머물러 있고 이 운동이 실패로 끝나면 앞으로의 전망은 매우 어둡습니다. 반면에|| 지난 9년 동안 국민을 회유하는 정책이 실패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민간 행정 및 정부 정책은 개혁될 것이며 호전적인 반(反)기독교인 활동은 없을지라도 기독교인들을 속박하고 제한하는 선전은 분명 계속될 것입니다. 혹독한 시위 진압 방법이 한국 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직접 가해졌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남부 지방에서는 15개의 교회에서 일본 헌병과 사주 받은 자객들이 성경책과 가구|| 기물을 파괴했으며 여러 지역에서 교회 관계자들을 색출하여 체포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시위를 주동한 주요 인물들이라고 생각하고 그 혐의를 정당화한 행동임이 분명합니다.또한 이 독립운동이 선교 활동에 미친 영향 역시 매우 심각합니다. 정부는 이 시위는 정부와 선교사들 모두에게 놀라운 것이며|| 그 책임을 선교사들에게 전가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는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투옥된 사람들을 조사하고 고문하여 선교 단체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옥에서 풀려 나온 사람들이 밝힌 사실이며 감옥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선교사들은 시위와 연관되지 않았고 그 책임도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일본인들은 1912년 ‘음모 사건(Conspiracy Case)’에서 사용했던 방법으로 투옥된 한국인들을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우리(Mowry) 씨가 최근 평양(Pyengyang)의 자택에서 선동적인 글이 배포되도록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체포한 근본적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가 독립 선언서를 번역하기 위해 복사한 사본과 신문이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거나|| 그의 비서가 지방 시위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의 허락 없이 등사기를 사용하여 복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상황입니다. 두 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 여성들은 시위에 참여한 자신들의 여학생들을 찾아내기 위해 갔다가 시위에 참여했다는 오인을 받고 체포되어 이틀 동안 감금당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 보여주는 것입니다.세 번의 비공식 회담이 정부 대표자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첫번째 회담에서 우사미(Usaami) 씨는 게일(Gale) 박사|| 애비슨(Avison) 박사|| 하디(Hardy) 박사|| 노블(Noble) 박사|| 쉐록스(Sharrocks) 박사|| 번헤이즐(Bernheisel) 씨|| 벙커(Bunker) 씨|| 거딘(Gerdine) 씨|| 휴 밀러(Hugh Miller) 씨를 위시한 선교사 단체에 현재 한국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들은 솔직히 대답했고|| 특히 게일(Gale) 박사(오랫동안 친일 사상을 갖고 일본을 위해 노력했지만 일본의 군정이 실패했음을 명백히 밝힘)는 지난 9년 동안 한국인들은 테러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회담에서는 와타나베(Watanabe) 판사|| 세키야(Sekiya) 씨|| 니와(Niwa) 씨|| 서울신문의 야마가타(Yamagata) 씨|| 그 외 다른 시민들|| 지난번 회담에 참석한 동일한 선교 단체와 더불어 모펫(Moffett) 박사|| 화이트모어(Whittemore) 씨|| 웰치(Welch) 주교가 참석했고|| 세 번째 회담에서는 에그버트 스미스(Egbert Smith) 박사도 참석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핵심 내용은 선교사들이 정부와 협력하여 현 소동을 진정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웰치(Welch) 주교는 세 가지 이유로 인해 중립적인 역할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첫째|| 한국의 독립운동을 중지시키는 것은 선교사들에게 소용이 없는 일이고|| 둘째|| 선교사들이 개입을 하면 한국인들이 분노할 것이며|| 셋째|| 이러한 일을 선교사들의 본국에서 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반 공영 신문인 서울신문을 통해 선교사들이 명분상의 지위를 던져 버리고 실제적인 정부 업무에 협력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하였습니다. 이 상황의 미묘함과 어려움을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회담에서는 시위 현장에서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모펫(Moffett) 박사는 개인적으로 목격한 그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모펫(Moffett) 박사와 서울신문 편집장인 야마가타(Yamagata) 씨가 가진 개인적인 회견에서는 야마가타(Yamagata) 씨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잔혹 행위가 사실임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신문에 보도된 사실 부정은 ‘공식적인’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회견에서 세키야(Sekiya) 씨는 애비슨(Avison) 박사와 웰치(Welch) 주교에게 현재의 ‘관대한’ 진압 방법을 앞으로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바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웰치(Welch) 주교는 한국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면 서방 국가들에게 반감을 줄 것이라며 세키야(Sekiya) 씨를 설득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회담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더 나아가 이해의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독립운동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선교사들의 개인적인 판단은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세계 정세로 봐서는 거의 상상할 수는 없지만 국제적인 외부 개입이 없이는 앞으로의 행정 개혁도 자치정부 수립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군사 행정과 그들의 결심을 완전히 전복시키지 않고서는 그들은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혁명은 맥없이 실패하고 보안은 허술히 무너질 것입니다.대사와의 회견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중국의 신문 기사에 대해 부정하는 그의 입장(우리도 진심으로 동의하는 사항임)과 도쿄(Tokyo)로 가려는 우리의 목적을 잘못 설명한 내용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입니다. 사실 모리스(Morris) 씨는 우리와 상담을 원하는 우에무라(Uemura) 씨와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상황을 논하자는 것이 아닌 잔인한 혁명 진압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선한 일본인들과의 협력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개입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혁명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금지 명령도 내릴 수 없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온 나라 곳곳에서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다루며 그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필요는 없지만 만약 행정이 개혁된다면 한국에서의 진정한 종교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각 단체에게 가해

    100 오웬스가 작성한 보고서

    작성일: 1919-03-24작성처: 세브란스 연합 의대(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작성처: 오웬스(H. T. Owens)한국에서의 소요 사태지금 한국에서는 또 다른 브라이스(Bryce) 자작 조사 위원회가 부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에 혁명운동이 발발하여 모든 국민들이 자유를 외치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이 시작된 3월 1일부터 일본 군정은 이전에 유럽을 강타했던 모든 프러시아 독재체제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벨기에에서 행해졌던 많은 극악무도한 행위들이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6천 명이 감옥에 감금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자유를 위한 혁명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한국 전통 종교인 천도교를 비롯하여 기독교인, 불교인 모두가 참여했으며 선교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공립학교 학생들까지도 동참했습니다. ‘법과 질서’라는 이름 아래 인간성을 상실한 수많은 범죄 행위들이 날마다 자행되고 있습니다. 일본 식민 체제1908년 일본은 한국에 보호령을 내리고 1910년 공식적으로 한국을 병합했습니다. 병합 이전의 한국의 정세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본은 엄격한 통제와 억압으로 상당한 평정과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천연 자원 개발을 시작했고, 사법부를 설립했고, 체계적인 교육 제도를 실시했고, 통신 체제를 향상시켰으며, 공중 건강 및 위생에 기여했습니다. 일본인의 후원 아래 이러한 많은 사회 개혁이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한국을 지배하는 방법은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영악한 일본인들은 독재 체제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일본 경찰은 독일의 경찰과 철저히 닮았으며, 그들의 식민 정책은 영국이 아닌 독재 체제의 프러시아를 그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검(劍)은 권력을 상징합니다. 군인, 헌병, 경찰뿐만 아니라 일반 공무원, 학교의 모든 남자 선생님들도 검을 차고 다녔습니다. 사실 정부와 관련된 임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권력의 상징으로 검을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군대는 조직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첩자를 고용했습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집회, 연설, 출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충을 호소할 권리도 없으며, 자치정부 참여라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법정에서 일본인이 한국인을 고소하면 한국인에게는 항변의 기회가 없습니다. 하비스 코퍼스(Habeas Corpus)는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 부서로서 수감자를 법정에 세우기 전에 2주일 이상 감금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보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임의로 열흘을 더 감금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할 때까지 수감자를 법정에 세우지 않아도 됩니다. 수감자는 변호사와 상담할 수도 없으며 친구들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또한 수감자에게 마음대로 고문을 가했으며 수감자가 결백을 증명할 때까지는 유죄로 단정지었습니다. 정부 관할 업무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은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 경찰과 헌병도 있지만 한국인을 고용한 다른 행정부서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은 일본 구직자들에게는 천국과 다름없습니다. 상업적인 매춘이 수도에서 지방으로 만연되고 있는 등 정부 관료들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독립 위원회(independence committee)가 발행한 성명서에는 이러한 국민들의 슬픔을 다음과 같이 대변하고 있습니다(부록 I 참조).한국인들의 가슴에 상처를 준 또 다른 슬픔은 일본이 학교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다는 것입니다. 1920년에는 학교에서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법령이 선포되었습니다. 폴란드나 기타 국가들의 교훈이 일본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따뜻한 한반도 남부 지역을 강탈하기 위해 조직적인 시도를 했으며 지역 주민들을 만주(Manchuria)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지주나 소작농들에게 헐값으로 땅을 매도하도록 하고 추운 북부 지역으로 거주지를 이동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동양개발(Oriental Development)이라고 하는 준 공영기업이 주관하였습니다. 얼마 전 한 선교사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꼬집었습니다. “철도를 세우고, 길을 개량하고, 교육을 촉진하며 국민 건강에 기여하는 것이 독일의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일본의 개혁 성향한마디로 말해 일본의 제국주의 정치 체제가 독일의 정치 체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현재의 일본 정부는 군대의 지배를 받고 있는 민간인 부대라는 의미입니다. 지난해 9월 육군상 출신인 테라우치(Terauchi) 씨가 물러나고 새 수상으로 하라(Hara) 씨가 부임하였습니다. 일본의 신문은 대서특필하여 일본의 첫 민주주의를 이룰 이 새 장관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국회 연설을 간단한 마치고 식민 정책을 어떻게 펴 나갈지에 대한 질문에 새 장관 가운데 한 사람이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 법령으로는 더 이상 식민지를 통치할 수 없으므로 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 영향력을 묻는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민간 당국측은 군 정부를 민간 행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군 당국은 이를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내부 분쟁이 이후에 신문에 발표되었습니다. 현재 군 당국은 징병제도 철폐에 관한 평화회담(Peace Conference) 사절단의 활동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일간 신문을 통해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3월 1일 도쿄(Tokyo)에서 성인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며칠 후 하라(Hara) 수상은 선거 개혁 법안을 제안하고 일반 국민들의 선거권을 확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은 제국의 중심에 서서히 민주주의가 확산되어 식민 국가에 밝은 앞날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 독립운동 발생 배경한편 한국을 위기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민족 자결의 원칙을 전파하는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의 활동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음은 한국의 내무 장관이 선교 대표사절단에게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파리(Paris)를 떠나기 전에 어떤 한국인이 윌슨(Wilson) 대통령과 회견을 했다는 정보를 정부가 입수했다고 했습니다. 이 한국인은 윌슨(Wilson) 대통령에게 현재 한국의 문제를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 제기할 것인지를 물었고, 그의 물음에 윌슨(Wilson)대통령은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은 전쟁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 관한 문제만을 다룰 수 있고 한국과 같이 평화시에 있는 국가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 한국인은 현재 한국 국민들이 고충을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라도 회담장에서 제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윌슨(Wilson) 대통령은 긍정적인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소식통에 의하면 이 혁명운동은 마치 소설처럼 한국을 중심으로 미 서부 지역, 하와이(Hawaii), 시베리아(Siberia),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에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것입니다.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은 이 사건 발생의 연결 고리를 형성했습니다. 민족 자결을 위한 소국의 권리와 전쟁의 억압하에 있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역시 한국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습니다. 한국인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의 전 국왕이 그의 아들과 일본 공주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바로 전날인 1월 20일에 서거하였습니다. 그의 사망 원인은 뇌졸중이라는 공식 발표가 있었지만 사실은 자살이나 독극물에 의한 살해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전 국왕은 한국을 일본 통치하에 두겠다는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공식적으로 부인되었으며 전 국왕의 죽음에 대한 보도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신문도 이 사건에 대해 다루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준비가 이루어지고 도쿄(Tokyo) 국회는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의회를 휴회했으며 10만 엔을 장례식 비용으로 기부하였습니다. 1894년에 암살당한 전 국왕의 왕비는 서울의 동대문(East Gate)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매장되어 있었고, 전 국왕의 무덤은 서울에서 17마일(약 27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 풍습에 따라 국왕의 무덤 옆에 왕비의 무덤을 마련하기 위해 왕비의 시신을 발굴하여 2월 12일 엄숙한 행렬로 재매장 의식이 시작되었으며, 모든 비용을 한국인들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국가적 치욕으로 사무치게 되었습니다. 전 국왕의 장례식을 3월 3일로 결정하고 서울에서는 일본인들이, 서울 외부에서는 한국인들이 의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은 진정으로 한국과 협력하여 이 의식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위 발생긴장이 고조된 분위기였습니다. 관료들은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학교 교장들은 시청에 불려 가 일본에 있는 한국 학생들이 집단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예의 주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실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던 한국 학생들은 2월 한 달 동안 민족자결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많은 한국 학생들이 투옥되었습니다. 3월 1일 토요일 파고다 공원(Pagoda Park)에서 대중 집회를 연다는 공고가 서울 거리에 붙었으며 33인의 서명이 담겨 있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이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태화관에 모여 행정 당국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을 선언했다고 알리고 그들이 있는 장소를 말해 주었습니다. 곧 행정 당국자들은 그 장소에 와서 그들을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독립선언의 주모자들이 식당에서 계략 성공을 위해 축배를 드는 동안 그들을 체포했다고 신문에 보도했습니다(성명서는 제출자료 II 참조). 그러는 동안 많은 학생들을 포함한 군중들이 파고다 공원에 모여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그들의 행렬은 질서정연했으며 두 손을 높이 올려 1만 년의 세월을 의미하는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습니다. 경찰 본부나 영사관 같은 공공 건물 앞에서는 모자를 벗어 흔들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들은 영사관에 독립선언서와 함께 서신을 들여보냈습니다. 이때 기마병들은 군중을 비난하며 칼을 휘둘렀습니다. 경찰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마구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과 그 다음날인 일요일까지도 시위에 참여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의 집을 들이닥쳐 그들을 체포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5인은 기독교인, 15인은 한국 종파인 천도교인, 나머지 3인은 불교인이었습니다. 이 기독교인들 대다수는 대학 교육을 받은 여러 지역의 교회 목사였으며 그 중에는 YMCA 비서관과 세브란스 병원(Severance Hospital)과 관련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날부터 서울의 모든 교회 목사를 체포할 때까지 경찰들의 횡포가 날마다 끊이지 않았습니다. 3월 2일 일요일에는 전 국왕의 장례식 전날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의 장례 의식 행렬이 경유할 장소가 학교로 결정되었습니다. 상급학교, 공립, 사립, 선교학교 학생들과 모든 교직원들이 참여했습니다. 학생들이 의식을 시작했습니다. 장례 행렬은 군대의 행렬을 방불케 했습니다. 첫번째 구역은 해군과 파견 부대로 구성되어 지정된 지역을 행렬하는 데 18분이 걸렸습니다. 두 번째 구역은 일본 종파 신도(Shindo) 교인들과 관료, 정부 대표자들 및 공무원이 있었으며 규모는 크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구역도 첫번째 구역과 마찬가지로 군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다음날 서울은 조용했습니다. 한국인들이 주관하는 장례식이 서울 외곽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이 있던 이틀 동안은 모든 학교가 휴교했습니다. 다음날인 3월 5일은 상급학교에 학생들이 한 명도 출석하지 않았고 한국의 독립을 이루는 날까지 학생들이 학교에 출석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한 달 전인 그때부터 지금까지 상급학교에서는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3월 5일 수요일 아침 9시 정각 기차역 앞 대로에서 큰소리가 났습니다. 젊은이들이 점포며 골목길에서 떼지어 나와 만세를 외치며 기차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인력거에 탄 한 남자가 군중에 둘러싸여 남대문(South Gate) 방향으로 서둘러 출발했고 군중들은 붉은 띠를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옛 궁궐로 향했습니다. 이 시위대는 거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고등학교 여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경찰과 대치하기까지 거의 반 마일(약 0.8킬로미터)을 뛰어온 시위대를 보고 경찰도 놀랐습니다. 궁궐 앞 광장에서 경찰은 시위대에게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습니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여학생들에게조차 거친 폭력과 심한 구타를 가했습니다. 많은 여학생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지만 학생들은 어떠한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시위를 하는 것이었으며 조국을 위해 체포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이 거리를 지나갈 때 세브란스 병원(Severance Hospital)의 거의 모든 학생 간호사들이 그들을 돕기 위해 붕대를 가지고 거리로 뛰쳐나와 동참했습니다. 학생 간호사들 가운데 15명이 체포되어 오후까지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간호원들에게 시위에 동참하게 한 기관(선교단체)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집요하게 물었으며 어린 여학생들에게도 온당치 못한 대우를 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들이 감옥에서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이후에 다양한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철도 직원들은 항의의 뜻으로 며칠간 파업했으며 한국의 상점들은 3주 이상 폐업했으며 문인들도 탄원서를 작성하여 기독교 전도사들과 비기독교인들을 통해 정부 관료에게 전달하였습니다(부록 III 참조). 탄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정부 당국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관료들은 이러한 탄원서는 경찰서에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이 경찰서로 가면 즉시 체포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와 탄원서의 내용은 한국을 정신적인 ‘공포 시대’로 몰아넣은 일본인들을 향해 위풍당당한 문체로 강한 동포애를 격렬하게 표현했습니다. 그 후 또 다른 탄원서를 준비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일본의 병합으로 인해 일본으로부터 고위직을 하사받은 사람으로서 1866년 한국의 전 국왕에게 일본과의 조약에 서명하고 서구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든 살이 넘은 고령으로 침실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남자 친척들은 모두 감금당했으며 그의 자택은 군인들의 비상 경계로 차단되었습니다. 탄원서를 제출한 나머지 한 사람 역시 즉각 체포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자작의 지위에 올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도 외곽에서의 시위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서도 이와 유사한 시위가 동시에 발생했습니다. 지방에서의 시위 역시 서울과 마찬가지로 질서정연했습니다.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국인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그러한 광경을 목격한 외국인들이 적었지만 독재의 앞잡이들은 이들에게 수많은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군중들이 불에 타 숨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총상을 입은 사람들은 북쪽 지역인 평양(Pyengyang)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Severance Hospital)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 평양(Pyengyang)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목격한 외국인들에 의하면 일본의 소방대원들은 지붕을 이는 이엉을 긁어모으는 데 사용하는 갈고리로 군중을 공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 병원에서 다섯 명이 총상을 입고 숨졌지만 정부 관계자는 그들의 사망원인이 총상이었다는 것을 발설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북부 지역의 관료들은 기독교인들을 단죄하고 교회를 무자비하게 파괴했습니다. 경찰들은 시위자들에게 기독교인인지를 묻고 기독교인임을 시인하면 즉각 체포했습니다. 24명의 부유층 한국인들에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이 하급 인물들이라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명을 거부했고 따라서 며칠 동안 경찰의 억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언급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부유층 사람들은 개인 재산 상태에 대해 정기적인 경찰 회계 감사를 받도록 강요당했습니다. 한국에서 타협적인 정책은 없습니다.캐나다 장로교 선교기관이 있는 동해안 지역의 함흥(Hamheung)에서도 평양(Pyengyang)에서와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소방대원들과 몽둥이를 든 일본인 하급 노동자들이 한국 국민들에게 난폭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이를 목격한 맥레이(D. M. McRae) 목사는 이 사건들에 대한 성명서를 작성했습니다(부록 IV 참조). 이곳의 관료들은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선교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시위가 발생하던 중에 경찰서에 간 맥레이(D. M. McRae) 목사는 갈고리가 달린 장대를 손에 쥔 소방대원들과 몽둥이를 든 일본인 하급 노동자들이 천막 안에서 시위 군중을 공격하라는 출동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찰의 명령 아래 움직이는 그들에게는 대항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경찰서장은 비기독교인들로 인해 외국인들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하면서 외국인들과의 중재를 시도했지만 맥레이(D. M. McRae) 목사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만약 외국인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불행한 일이 생길 때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찰서장에게 말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건을 여기에서 모두 언급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건들은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사례입니다. 목격한 외국인들이 없어 그 사실이 보고되지 않은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의 진실은 결국 밝혀질 것입니다. 공식적인 신문 보도에서 선교사들, 특히 초기에 활동했던 선교사들을 공공연하게 시위의 주동자로 몰아 비난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경찰의 첩자들은 공립학교 학생들과 불교인들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교묘히 속여 기독교 학교 학생들을 농간했습니다.미국 영사의 항의로 선교 단체가 시위를 주동했다는 내용의 기사는 공식적으로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경찰 보고서와 일본의 신문에는 계속하여 그러한 내용의 글이 실렸습니다(이와 관련한 기사 내용은 부록 V를 참조하십시오). 잔인한 정책한국에서의 구타와 고문은 경찰의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혐의자를 체포할 때는 그에게 수갑을 채워 여러 명의 경찰들이 발로 차기도 합니다. 3월 5일 시위에서 한 남학생은 그의 약혼녀가 여러 명의 경찰들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경찰들에게 대항하다가 심하게 구타당했습니다. 그 남학생은 체포되어 약 3주 동안 감금당한 채 아직까지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민간인 차림의 일본인들이 경찰의 면전에서 시위 참여자들을 체포하여 치욕적인 언행으로 그들을 다루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평양(Pyengyang)에서 있었던 일이며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감옥에서 풀려 나온 사람들로부터 들은 잔인한 고문에 대한 이야기들은 일본인들의 만행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학생에게는 시위의 주동자를 자백하라며 그의 손톱을 뒤로 밀어 뽑아 내었으며 또 다른 수감 학생에게도 시위의 주동자를 자백받기 위해 그의 손가락 끝마디를 불에 태웠습니다. 똑바로 선 채로 등뒤에서부터 나사로 조여 신체를 압착하는 수직 압력 고문을 받은 이도 있었습니다. 이 고문은 나사를 조이면 네 개의 면이 좁혀지고 이 압착기가 강해질 때 취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정보를 짜내는 방법입니다. 이 고문을 당한 후에 그는 오른쪽 손 가운데 손가락을 튼튼한 끈으로 감아 매고 천장에 걸려 있는 고리에 끈 끝을 걸어 통과시킨 후 그가 발가락 끝으로 간신히 서 있을 때까지 몸을 끌어올리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 고문을 당하면서 의식을 잃은 그는 깨어나 보니 그의 상처에 연고가 발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손을 즉시 절단해야 할 정도로 손이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