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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31 일본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한국인 가학 행위와 관련한 스테이시 L. 로버트(Stacy L. Roberts) 씨의 목격담

    1. 두 명의 짐승들에 의해 공격당한 한국인서서 ‘만세’를 외치던 여러 명의 남자들과 소년들이 군인들에 의해 장전된 총으로 구타를 당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 가운데 정복 차림의 군인 한 명과 사복 차림의 군인 한 명이 말을 타고 군중들 뒤쪽에서 다가왔다. 이 두 사람은 한 남자를 잡아채려고 그의 반대쪽에서 조금씩 접근해 갔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거의 다다랐을 무렵 한 명이 죽창으로 남자의 어깨를 세게 내려쳤고, 남자는 쓰러졌다. 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절뚝거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쉽게 붙잡혔다. 그 후 네 명의 다른 군인들이 다시 달려왔고, 그 남자를 넘어뜨린 후 발로 차고, 짓밟고, 얼굴을 구타했으며, 개머리판으로 심하게 내려쳤다.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은 그가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2. 집 앞에서 붙잡혀 심하게 구타당한 소년‘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을 해산시키는 와중에 네 명의 군인들이 약 스물두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젊은이를 붙잡았다. 군인들은 우리 집 쪽으로 다가오는 그를 붙잡아 끔찍하게 구타했다. 엄청난 힘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가격했으며, 총의 모서리로 그를 연타하고 넘어진 그를 가혹하게 발로 짓밟았으며, 그의 머리를 계속 내려쳤다. 나는 몇 걸음 떨어져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총과 검으로 무장한 네 명의 군인들의 손아귀 속에서 무기력했던 그 남자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살려 달라고 외쳤으나 그때마다 주먹이 날아 왔을 뿐이다. 그의 친구가 달려와 그는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으며,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간청했다. 물론 나로서는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3. 결박된 채 체포된 어린 소년어제 오후 약 30명의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을 공격했고, 그 중 4명을 체포했다. 그 중에는 약 열네 살 가량의 어린 소년이 있었는데,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포승줄에 묶인 채 머리와 얼굴을 구타당했다.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지만 군인들은 계속 폭력을 행사했다. 군인들은 군중들을 잡기 위해 문 쪽으로 달려갔고, 그쪽에서 나오고 있던 한 노동자를 붙잡았다. 그는 시위대와는 관계가 없는 하급 노동자였다. 군인들은 그를 참혹하게 때렸고, 그 중 세 명의 군인들은 할 수 있는 한 세차고 빠르게 그를 구타한 후에야 그를 놓아줬다. 군인들은 우리 집의 나무문을 뜯어내어 그것으로 어떤 남자를 내려쳤다. 4. 총에 맞고 도랑에 갇힌 여성들군인들은 만세를 외치는 여성들을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여성들은 만세를 그치지 않았다. 나는 한 군인이 두 여성을 개머리판으로 내려친 후 도랑에 쳐 박는 것을 보았다. 한 명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절뚝거렸다. 한 명은 쉰 살 정도로 보였다. 군인들은 무릎을 꿇고 그녀들에게 총을 조준한 후 발사했다. 총은 장전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외에도 나는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질게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132 로버트 목사가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자: 스테이시 로버트(Stacy Roberts)수신자: 브라운(Brown)브라운(Brown) 박사님|| 쉘(Schell) 부부 및 스콧(Scott) 부부께서 방문해 주셔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쉘(Schell) 부부께서는 저희 집에 머무르셨고|| 스콧(Scott) 부부께서는 로스(Ross) 박사 부부 댁에 머물렀습니다. 그분들께서는 저희를 비롯한 이곳의 한국인들과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으며|| 이곳의 실상을 알게 되셔서 만족을 표시하셨습니다. 장로회의 간부회의 및 하계대회로 인하여 저는 평양(Pyeng Yang)의 집행위원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열 개의 순회 예배를 관장해야 했습니다. 이를 담당했던 목사들과 후원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감옥에 있거나 은둔중입니다. 예배가 공석이 되지 않도록 이들의 후임자들을 선임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다면 서기위원들이 동석하는 흔치 않은 기회였던 집행위원회 회의에 불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들께서 선천(Syen chun)에 오시던 날 저는 몇 개의 역을 지나 그곳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희들은 불에 타 재가 되어 버린 8개의 교회 가운데 한 곳을 계획대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분들께서 전소된 교회에 대하여 구두나 서면으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 교회는 800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교회였습니다. 이곳은 제가 빌려 준 250엔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한국인들의 힘에 의해 작년에 준공되었습니다. 전소된 8개의 교회 가운데 큰 곳에 속하며|| 다른 곳들은 작은 규모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이 교회와 관련된 선교 활동 및 요청 사항들을 전달받으실 것입니다. 전소 당시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목사님들도 빠져 나왔으며|| 고참 목사는 투옥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있으나|| 여전히 기도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다시 새로운 건물을 짓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아시다시피 우리는 우리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1년 안에 교회를 다시 짓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대형 교회 세 곳과 규모가 큰 남학교 한 곳이 전소한 이 지역은 기근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곳에는 1년에 한 번씩 우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올 여름에는 사실상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았고||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곳은 평양(Pyeng Yang)부터 이 지역에 이르는 저희 담당 구역입니다. 3|| 40여 년 만의 최악의 기근이 닥쳐왔습니다. 곡식은 말랐고|| 사람들은 이미 떠나고 있습니다. 지난번 어느 구역의 교회 관계자 분이 저를 방문하셔서 곡식을 구입해 사람들을 구휼할 수 있도록 1만 엔을 빌려 줄 수 있는지 문의했습니다. 저는 물론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콧(Scott) 씨 부부와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고|| 즉시 박사님께 편지를 써서 이 상황을 알려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무슨 일이든 해야 하지만 저희가 가진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자금이 있다면 곡식을 만주에서 들여올 수는 있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교회의 재건과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박사님께서 깊은 동정을 베푸시리라 생각하며|| 위원회에서 저희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테이시 로버트(Stacy Roberts) 목사

    133 한국

    위엄 있는 평화회담(the Peace Conference)의 정신이 한국 땅에서 고통받고 있는 무저항 정신의 한국인들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더 이상 참혹할 수 없는 큰 사건들이 이 구원받지 못한 땅의 수백만 한국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수십만 명이 감옥에 갇혔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국 땅에 안정이 찾아온다면 올해는 대학살과 고문, 구금의 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가정은 피난민들로 풍비박산되었고, 재산은 파괴되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만은 용서해 줄 것이라고 믿고 피난을 떠나지만 아내들은 남편의 행방을 추궁받으며 구타당하고 있습니다. 경찰들은 병원의 부상자들을 감옥에 데려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있으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들을 끌고 가 구타한 후 심각한 부상을 입히고 나서야 이들을 다시 병원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감옥은 돌 바닥에 쓰러져 있는 투옥자들로 가득 차 남는 방이 없을 지경입니다. 선교사들은 여성과 소녀들, 노인들에게 따뜻한 의복을 지급하려고 모든 수단을 쓰고 있지만 거절될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히 선별되어 더욱 끔찍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감옥의 독방에 갇혀 있는 불쌍한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낸 후 구타하고 고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통에 못 이겨 정신을 거의 잃을 정도가 되면 문서에 서명을 강요합니다. 그 내용은 첫째, “나는 지금 이 시각부터 기독교인이 되기를 포기할 것이다”, 둘째, “일본 정부에 대한 항의 및 독립 선언과 관련된 일을 다시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입니다. 감옥은 시위가 발발한 초기부터 만원이 되었는데, 일본 경찰들은 더 많은 희생자들을 감옥에 몰아 넣기 위해 먼저 투옥된 사람들을 괴롭히며 쥐어짜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우선 기독교인인지 묻는데, 기독교인일 경우에는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열 배 정도는 더 심한 폭력이 가해집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외래의 신을 믿지 않는다는 표시로 비기독교인들에게 빨간 표시를 해두고 가혹 행위에서 제외시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한 외국인의 집을 나서던 두 명의 여성이 군인들에게 공격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한 명은 구타를 당해 거의 불구가 되었으며, 다른 여성은 얼굴을 맞아 이가 부러졌습니다. 가혹 행위로 고통이 너무 심했던 한 남자는 고통을 멈추기 위해 자신을 죽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이 더 즐겁다고 말했습니다. 한 소녀는 공중전화 부스에 머리채로 묶인 채 매질을 당했으며, 그 결과는 차마 여기서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런 고통들이 국토 전역을 뒤덮었습니다. 도시나 시골, 외딴 지역 할 것 없이 공포와 고문이 지배했습니다. 무력한 외국인들에게 특별한 동정심을 부르는 두려운 일들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어느 시골에서는 한 노인이 길거리에 서 있던 아내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내는 총에 맞았고,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막 대문을 나서던 노인도 총에 맞았습니다. 어떠한 말도, 어떠한 저항도 없었습니다. 어떠한 불평도 없이 오랜 고통을 견뎌 오며, 그들을 자유롭게 할 신의 시간이 오리라 믿어 오던 비무장 민간인들에 대해 무력을 행사하면서 매일매일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마을을 방문하려고 나섰던 한 기독교 여성은 설교를 멈추지 않으면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협박을 당하며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이 여성이 자신을 복무케 한 신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대답하자 경찰은 신과 그녀를 처벌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서를 놓지 않았으며, 그들의 신념과 용기는 감명 깊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신념의 기반과 근거를 제거하려는 온갖 행위가 저질러졌습니다. 한 교구에서는 두 곳의 교회가 불에 탔고, 다른 한 곳도 방화되었으나 다행히 화마는 면했습니다. 각 도시와 시골의 모든 교회가 손상을 입었습니다. 한국인들의 집과 교회 또는 학교에 있는 성경책과 찬송가는 모두 압수되었고, 불태워졌습니다. 한국인들의 수동적 저항이 있을 무렵 신도들의 신앙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던 일본은 신앙의 기반이 자신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온갖 잔혹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에 대한 어떤 불평도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낙인찍힌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악을 몰아냈으며, 이는 구세주 하나님께서 이 고통받는 나라를 위해 사람을 내려 주셨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집이 파괴되고, 고문을 당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을 보며 괴로워하던 이들은 밤낮으로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 자신들에게 선교사들을 보내 주신 이들을 위해 교회와 집에서 쉬지 않고 신실한 기도를 올렸던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은 이제 신을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구금되었던 미국인 선교사들은 감옥에서는 풀려났지만 여전히 친구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친구들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켰다는 이유로 일본인에 의해 ‘범죄자’로 규정된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E. 화이트 얀센(E. White Jansen)

    134 윌리엄 스콧이 암스트롱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10-04발신주소: 간도(Kanto)발신자: 윌리엄 스콧(William Scott)수신자: 암스트롱(Armstrong)친애하는 암스트롱(Armstrong) 씨||한국의 상황에 대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계속 이렇게 혹사당할 수 없으며|| 이 상황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혼란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야 합니다. 일본인들은 공포와 공갈이라는 전형적인 수단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 상황의 원인을 선교사들에 뒤집어씌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다행히도 행정당국이 한국인들의 항쟁에 대해 놀란 만큼 이들도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비록 이 상황이 일본인들에게는 악몽과 같고|| 그렇게 즐거운 것은 아닐 것이라고 제가 잘못 생각해도 말입니다. 하지만 즐거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젊은 한국 청년들의 마음을 사실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상황을 지켜본 결과 선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에 관한 보고문 사본을 보내 드립니다. 저는 한국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실패할 것이라는 결론을 확고히 갖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짐짓 자만하는 제목을 달게 되었습니다. 행복하고|| 감사할 줄 알며|| 번영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성공을 증명할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귀하께서도 직접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전역을 방문하다 보면 매우 분노하실 것입니다. 현재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 은사이신 팡원성(Pang Wonsung) 선생님은 그저께 일본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의 도착 소식은 선생님의 기대대로 이미 전보로 알려졌고|| 선생님은 그 사실을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체제이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두 번이나 체포되었지만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전에는 채찍으로 맞기도 했습니다. 멍청이 같은 일본 헌병 한 명이 선생님에게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농장 일을 하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체포당하고 있으며|| 질문을 하기도 전에 2인치 너비의 막대로 구타당하고 있습니다. 박사님과 저는 며칠 전 지방 영사관에서 올라온 두 명의 남성을 오늘 보았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나흘 전 석방된 이후로 오늘 처음 집밖을 나섰습니다. 그는 심각하게 난타당하여 어깨에 끔찍한 외상을 입었습니다. 최대한 원시적인 방법으로 고문이 자행되었고|| 그보다 좀 덜한 괴롭힘도 행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신학교의 교사 한 분이 어젯밤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자 일본인들은 그의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꽁꽁 묶고 펜으로 그사이를 찔렀습니다. 한번 해보시면 그 고통이 어떤지 아실 것입니다. 팔다리를 자르지는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극도의 고통을 주는 뻔뻔스러운 악마였습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나치들입니다. 저희 기독교 신자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근거는 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한국의 영원)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매우 많습니다만 아마 쉽게 믿을 수 없으실 것입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겠습니다. 네 명의 신도들이 평양(Pyeng Yang)에 도착하던 첫날 시위가 처음 벌어졌고|| 그들은 그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학교 학생들이었고|| 기숙사에서 일본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십자가에 묶인 채 39대씩 매질을 당했습니다. 일본 군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받았으니|| 너희들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며|| 너희들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못된 학생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떠오릅니다.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귀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관련된 이야기들을 들으시겠지만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일본은 동방의 야만족을 자처하고 있으며|| 어떠한 재활도 이루어질 수 없도록 괴롭히는 싸움 대장입니다. 한국인들은 심각하게 구속당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시고 선교 활동과는 관계없이 출판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시면|| 그렇게 해주십시오.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캐나다(Canada)에서도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해주십시오. 만일 출판하게 되면 저자는 ‘김소방(Kim Sobang)’으로 해주시거나 익명으로 해주십시오. 만일 출판이 어려우시면 최소한 한국인의 처참한 상황을 캐나다에 알릴 수 있도록 어떤 방법으로든 노력해 주십시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로부터 가능한 한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시고|| 우리 종교가 어두운 구석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줘야 할 권리를 거부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출판이 전부이며||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간도(Kando)에 있는 우리들은 한국 본토에서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 우편국을 통해 서한을 보내 드립니다. 저희 지부는 모두 무사합니다. 병원은 밤낮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립을 외치던 바로 그날 이곳에서 40명이 중국 군대에 의해 총상을 입었고|| 그 중 17명은 사망했으며|| 나머지는 회복되고 있습니다. 저희 병원은 이들을 돌보는 일에 전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만큼 기독교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기회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일본 영사관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으며|| 열정도 잃고 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이곳에는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여전히 교회에서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인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습니다. 윌리엄 스콧(William Scott)

    135 재령(Chairyung) 시위

    재령(Chairyung) 주민들은 시위를 기도하였지만 경찰은 거리를 샅샅이 돌며 이 계획이 실행되기 이전에 이들을 해산시켰다. 시위는 제대로 준비되기 전에 이미 알려져 있어서 사전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4월 6일 일요일 도시는 고요했고 우리는 평소와 같이 교회에 출석했다. 교회에 들어가자 이교도들이 예배 직후 시위를 시작할 것이라는 소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이들은 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을 활용할 예정이었다. 교인들은 일요일에 시위를 벌이는 것을 반대했지만, 이교도들은 이를 확정했다. 목사들은 이에 반대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예배는 평소보다 한 시간 반이나 지연되었다. 설교가 끝난 후 교인들은 예배를 시작했고 늦게 끝났다. 이후 목사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도록 주의를 준 후 먼저 보냈다. 그러고는 남아서 기도를 드리거나 아니면 원치 않을 경우 집으로 돌아가거나 자신은 개의치 않겠다며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자 약 과반수의 신도들이 돌아갔다. 한두 마디의 기도가 더 있은 후 남은 사람들은 흩어졌고 묵묵히 언덕을 내려갔다. 이런 방법으로 일요일 시위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결국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밤 몇몇 사람들이 다시 모여 만세를 외쳤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장날인 다음날은 많은 사람들이 장터로 몰려들기 때문에 우리는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보슬비가 내렸고, 장터에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아 실질적으로 장이 서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후에 날이 개었고, 저녁 날씨는 매우 아름다웠다. 달은 막 상현을 지나고 있었고, 간간이 부는 바람을 제외하고는 평온하고 고요한 날이었다. 8시쯤 되어 한국인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가족과 함께 모두 거실에 있었다. 8시 20분경 거리에서 혼잡한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들이 우리 집 현관으로 다가와 시위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현관으로 나왔고, 아래쪽의 거리 한복판에서 ‘만세, 만세’ 하는 외침이 들려 왔다. 소리는 짧은 시간 안에 점점 커져 왔고, 그 후로 몇 달은 들리지 않은 것 같다. 시위는 우리 집에서 계곡 하나를 건너 있는 남서쪽 끝에서 이내 시작되었고, 상당히 커다란 규모로 변했다. 곧 시위가 처음 시작된 지점에서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총소리가 들려 왔다. 계곡 건너편에 있는 민가 쪽에서 연발 사격 소리가 들렸고, 구타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귀를 찢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그 후 서쪽의 민가 쪽에서 함성이 시작되었고, 구타당하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경찰과 군인들이 사방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고, 함성 소리는 시 외곽의 민가 쪽에서 퍼져 나갔다. 나는 이를 더 자세히 관찰하고 함성 소리를 더 분명히 듣기 위해 집 뒤쪽의 언덕에 올라갔다. 재령(Chairyung)의 위치에 대해 잠시 설명하기로 하자. 이 도시는 구릉지대의 북쪽 끝자락을 차지하고 있다. 이 구릉지대는 서쪽으로 약 0.3마일 길이의 낮은 계곡을 형성하고 있으며, 재령(Chairyung)은 이 계곡에 위치해 있다. 우리 집은 이 계곡의 북쪽 지대에 있는 낮은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도시의 서쪽 끝에 있다. 계곡의 남쪽 건너편으로는 산이 있으며, 산이 드문 우리 집 뒤쪽인 북쪽으로는 두 개의 산이 있다. 남쪽을 제외하고는 사방으로 널리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드문드문 낮은 언덕들이 있다. 이 평야 지대에는 10여 개에서 1백여 개에 이르는 작은 집촌들이 형성되어 있다. 나는 서 있던 언덕에서 남서쪽, 서쪽 그리고 북서쪽으로 뻗은 평야지대로 눈을 돌렸다. 함성 소리는 점점 커져 왔다. 민가 곳곳에 횃불이 밝혀졌다. 감격적인 광경이었다. 도시에서 1마일 정도 떨어진 민가에서 “만세, 만세” 하는 소리가 높아 갔으며,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고는 5마일 정도 떨어진 남서쪽에서도 “만세, 만세”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으며, 곧 8, 9마일 정도 떨어진 북서쪽에서도 “만세, 만세”의 메아리가 들려 왔다. 그 보다 훨씬 먼 곳에서도 어렴풋이 “만세, 만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도시 인근의 한 마을에서도 ‘만세’ 소리가 퍼졌으며, 북쪽 산 뒤의 마을도 “만세, 만세”의 함성에 동참했다. 동쪽과 남동쪽, 북동쪽은 높은 언덕으로 막혀 있어서 함성 소리가 퍼져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지만, 그쪽에서도 함성 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도시 각 방향에서 군중들이 밀려들었다. 때로 함성 소리는 잦아들어서 잠시 동안 침묵에 잠기기도 했지만, 곧 더 큰 함성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 숙소로부터 200야드 조금 못 미친 곳에는 작은 숲이 있고, 그 가장자리에 몇몇 민가들이 있었다. 일단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만세”를 외쳤다. 우리 숙소 아래쪽 길에서 경찰과 군인들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숲 근처에 도착하자 발포가 시작되었다. 이 연발 사격으로 14명이 총에 맞았다. 연이어 구타하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구타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소리를 지르고 저주를 퍼부었으며, 사람들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무거운 물체를 잡고 구타를 했으며, 그것들은 이루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잠시 후 사람들이 모여 있던 북쪽 산 정상 쪽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아래쪽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구타당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가격당하는 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곧이어 남성과 여성, 시위 참여자와 비참여자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구타당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나중에 일본 민간인들이 곤봉으로 무장한 채 거리를 뛰어다니며 맞닥뜨리는 사람들을 구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날 공립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그 전날 자신이 권총을 들고 밖으로 나가 몇 명의 한국인들에게 발포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소리도 들었다. 민가도 수색당했고, 주민들이 구타당했음은 물론이었다. 구타당한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생생히 들려 왔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과 발포도 시위를 멈추지는 못했다. 우리 숙소 동쪽에 인접한 민가에서 남성과 여성, 아이들이 함께 소리 높여 “만세,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또 다른 민가는 고요했다. 나중에 이곳은 어떻게든 시위에 연루될까 봐 두려워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주거지임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이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무리의 지도자처럼 보이는 그는 우리 앞을 가로질러 갔다. 밤새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선고 나팔 소리와 같은 목청으로 “대한독립(한국 독립)”을 선창하였고, 곧이어 군중들은 “만세, 만세”를 외쳤다. 가장 엄청난 시위 장면은 남동쪽의 계곡 건너편에 있는 남쪽의 산기슭에서 벌어졌다. 어린 나무들로 뒤덮여 있는 이 산기슭에 대규모의 군중이 운집했다. 경찰과 군인들이(이들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군중들을 때리고 있었고, 이들이 언덕으로 올라가자 소총과 권총의 불꽃이 보였다. 군중들은 흩어졌다. 이곳 정상 부근에서 두 명의 남성이 사살 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음날 아침 네 명의 남성이 총상을 입고 우리 병원에 후송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지금까지는 사상자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다. 한국인들의 시위는 전적으로 평화적이었다. 돌을 던지지도 않았고, 기물을 파괴하지도 않았으며, 저항도 없었다. 이는 지도자들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 시위로 인해 부상당한 일본인 군인이나 민간인은 없었다. 현재까지는 한국인들은 전적으로 평화적인 시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위가 얼마나 넓게 퍼졌는지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며칠 동안 입수된 새로운 소식을 종합해 볼 때 시위는 재령(Chairyung) 동쪽 10마일에서 서쪽으로 30마일, 북쪽 10마일에서 남쪽으로 17마일에 걸친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은 평화적 시위를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불만과 자국의 독립 열망을 표출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던 것이다.

    136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6-04발신주소: 재령(Chairyung)|| 한국발신자: 수신자: 신학박사 A. J. 브라운(A. J. Brown) 목사수신주소: 뉴욕(New York) 시친애하는 브라운(Brown) 목사님|| 지난 5월 29일 저는 극동아시아의 현재 상황에 대한 저의 의견서 및 일본 신문 발췌본을 귀하께 보내 드렸습니다. 2|| 3일 뒤 이 신문은 알버투스 피터스(Arbertus Pieters) 교수가 쓴 ‘일본의 도덕적 실패’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었습니다. 이 논설에서 그는 제가 지난번 편지에 말씀드린 관점을 견지하였고|| 특히 현 시기의 일본인들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 기사문을 함께 보냅니다. 피터스(Pieters) 씨는 ‘음모의 사건(Conspiracy Case)’이 한창일 때 한국에 오셔서 귀중한 도움을 주신 분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그는 일본 선교단 내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가 일본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수년 동안 그가 함께 해왔고 자신의 생애를 바친 이들의 의견을 대신할 수 없도록 처벌을 받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인들의 도덕성 결핍에 주목하라는 그의 주장에 대해 귀하께서도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 한국에서 목격한 일본인들의 행위는 결국 한국인들의 항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그가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그러한 도덕성 결핍으로 인해서 일본인들은 해결책을 찾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의와 권리에 대한 어떠한 요구에도 귀를 막고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어떠한 정권이라도 ‘이익 창출’을 할 수만 있다면 도덕과 정의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할 것입니다. 또한 지난 6월에 소개된 ‘한국 전장’이라는 글의 사본을 보내 드립니다. 귀하의 정보에서 누락되지 않도록 여기에 함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스스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니체(Nietzshe) 및 트라이치케(Treitschke)를 비롯한 여타의 독일 철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저희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광인들의 헛소리처럼 들릴 뿐이었으며|| 그들이 세계를 상대로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인들의 마음을 형성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동봉한 문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믿고 있는 바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으며|| 일본인들이 어떠한 정신적 부산물을 먹고 자랐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천(Syenchun) 제1 교회 목사이신 양(Yang) 목사님과 다른 원로 목사님들 가운데 한 분이 지난 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옥에서 총살을 당하셨다는 루머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볼 때 이는 매우 가능성이 높은 일이지만|| 사실이 확정될 때까지 이를 기정 사실화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저희 집에서 일하던 한 젊은이에게서 그의 경험담을 들었습니다. 그는 바로 얼마 전에 감옥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다른 사례들과 크게 차별되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이곳 재령(Chairyung)에서 시위가 일어나던 때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 그는 체포되었고|| 그 후 재판이 끝날 때까지 약 한 달 정도 구금되었다고 합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그가 체포되었던 때와 체포된 후의 이야기들입니다. 물론 이것은 ‘재판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체포된 다음날 그는 감방에서 나와 ‘고문실’로 끌려갔습니다.그는 발과 손을 끈으로 묶인 채 천장에 달린 링에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매달린 채 그는 구타당했고||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습니다. 같은 날 오후 그는 다시 불려 갔습니다. 그들은 끈으로 그의 머리에서 눈썹까지 감은 후 다리도 똑같이 묶었습니다. 그리고 양쪽의 끈을 등 쪽으로 돌린 후 그의 머리가 가능한 한 등 쪽으로 제쳐지도록 양쪽 끈을 묶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그는 바닥에 누워 있었고|| 세 명의 일본인들이 다가와 그가 의식을 다시 잃을 때까지 발로 차는 등 구타를 했습니다. 그는 한밤중에 다시 불려 갔고|| 얼굴과 머리를 구타당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팽팽하게 부어 올랐고|| 이후 닷새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문을 하면서 일본인들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 실토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런 고문은 재판의 증거물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듯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신은 ‘만세’를 불렀으며|| ‘독립신문’ 사본을 낭독했다고 사실대로 말하며|| 그 이상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위는 거의 끝났습니다. 중앙위원회(the Central Committee)로부터 그 결과에 대한 지침이 수주일 전에 하달되었습니다. 이 서한은 그 지침의 첫 단계입니다. 이 나라 국민들이 이처럼 분기하고|| 단결하며|| 단호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와 같은 삶이라면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노인은 이 나라 국민들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눈을 가려 우리는 앞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귀를 가려 듣지 못했으며|| 우리의 입을 막아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짐승처럼 대했다. 우리 아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다면 차라리 우리의 절반은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한국인들의 정신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이를 방관했습니다. 많은 일본인들이 이 문제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일본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공보 기관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공식 보고를 만들어 외국에 알리기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그것은 공정해 보였고|| 많은 것들을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약속에 대해 전혀 신뢰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양 국민 사이에는 더 이상 잃어버릴 애정도 없지만|| 양자간의 관계는 현재 더 소원해졌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오류와 부정의|| 방탕과 무법|| 사기와 만행|| 야만의 화신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비난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아래의 사례는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를 보여줍니다. 한국인 목사 한 분은 독립운동에서 한동안 물러서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평화주의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소극적 저항에 대해서도 신중히 망설였고|| 참여에 의문을 표명했습니다. 한국인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 원리를 지키기 위해서 본국과 논의했습니다. 논의 후 그는 먼 곳으로 옮겨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는 돌아온 다음날 자신의 의무는 명백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조국을 위해 이 운동에 몸을 바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평양(Pyeng Yang) 학교에서 열리는 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내일 평양(Pyeng Yang)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사태는 시급합니다. 감사합니다.

    137 세계 평화를 위한 제언

    발간일: 일본 신문 ‘니로쿠(Niroku)’ “세계 평화의 보존과 인류 복지의 증진은 일본 제국의 사명이다. 신은 일본 제국에 이 사명을 수행할 모든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 이 사명을 완성할 수 있는 자는 인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가진 자이며, 영원한 통치의 특권을 가진 자이다. 일본 제국은 신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을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일본 제국은 박애와 정의의 화신이다. 제국의 제1 원리는 국민의 이익이다. 일본 제국은 그 6백만 신민뿐만 아니라 지상 인류의 부모이다. 제국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인종은 어떤 논쟁도 초월하여 동일하다. 따라서 모든 인류의 논쟁은 완전한 일치에 안착될 것이다.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려는 국제연맹의 제안은 제국을 그 최상에 둘 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제연맹은 초국가적?초인종적 공권력을 지녀야 할 것이며, 이는 오직 일본 제국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138 브라운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5-29발신주소: 재령(Chairyung)|| 한국발신자: 수신자: 신학박사 A. J. 브라운(A. J. Brown) 목사수신주소: 뉴욕(New York) 시친애하는 브라운(Brown) 목사님|| 지난 5월 22일 일본 신문에 게재된 기사 스크랩을 보내 드립니다. 흥미로울 것입니다. 이 글의 저자는 최근 이곳의 사태들이 발발하기 전 귀하의 저서에서 밝히신 의견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며|| 최근의 사건들이 발생한 후 귀하의 의견은 수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이곳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귀하께 약간의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마도 상당수의 선교사들이 귀하의 전반적인 견해에 동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위대한 교사와 같아서 우리는 과거의 교훈으로부터 최근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일본의 정책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으며|| 일본 문명의 실체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정책과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의 독일의 정책밖에 없습니다. 저는 일본의 정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독일에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처럼 현재 일본에도 통치자들이 수행해 온 정책 방향에 대하여 반대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아무리 존중해도 그들은 일본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지 않으며|| 국가 정책 형성 과정에 어떤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칼 애커만(Carl Ackerman) 씨께서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에 게재하신 기사를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최근의 기사에서 그는 시베리아(Siberia)에서 일본이 한 행위에 대하여 매우 명확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 그는 일본의 ‘평화당(Peace party)’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일본 신문의 편집자는 그가 평화당(Peace party)의 세력을 과대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의 현재의 목적은 1914년 독일의 목적에 필적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주변국들을 정복하여 세력권 안에 둔 후|| 세력을 뻗어 다른 나라들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저는 ‘황색의 위기(yellow peril)’에 대하여 학문적인 호기심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한 시간 동안 실질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서 줄곧 ‘인종 차별’ 및 그와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강하게 문제제기를 고집해 온 것은 그 이후의 행보로 볼 때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독일이 독일의 ‘문화’를 전세계에 강조했던 것처럼 일본이 자신들의 ‘문화’의 우수성을 부풀리고 그것을 전세계에 펼치겠다고 허장 성세를 보이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고 들어왔습니다. 현재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곳은 중국입니다. 일본은 산동(Shantung) 반도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단지 일본의 우세가 ‘짐작’될 뿐이기를 진정으로 바라며|| 연합국들이 중국의 통일과 독립 보장에 동의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어부지리로 대륙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며|| 중국과 시베리아의 인적 및 물적 자원을 통제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그 대가로 우리는 놀랍도록 짧은 시간 안에 독일의 군국주의 대신 일본의 군국주의를 대면하게 되는 원치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만일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좀더 약한 악마인 독일 쪽을 택하겠습니다. 이제 괴수의 베일은 벗겨졌고|| 날이 갈수록 일본의 적의는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고|| 하루가 어떻게 바뀔지 우리는 모릅니다. 최근의 변화들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급격한 상황 변화는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귀하께서 저서를 통해 밝히신 의견은 마치 고대 역사책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귀하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현재 사건이 귀하의 견해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귀하와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그러한 저자와 연설가들을 미숙한 변명가로 일본 군국주의 추종자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귀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고의 변화는 거의 믿지 못할 정도입니다. 일본계 후손인 게일(Gale) 박사의 태도 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의 급격한 상황 변화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분명 동일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군국주의적 사고가 발달하면서 강건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지배하는 땅에서 선교단이 당할 험악한 상황들을 생각하면 즐겁지 않습니다. 점점 성장하고 있는 일본에 대하여 이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본이 자신의 군국주의적 사고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고|| 서구 세계의 사상 반열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즐겁고|| 이렇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만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군국주의는 그 승리와 함께 점점 성장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중국과 시베리아에서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는 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획득한 것들에 만족하면서 계속 이를 지지할 것입니다. 이 상황은 혁명에 비견될 만한 것이며|| 현재로 봤을 때 이는 평화적 혁명은 아닙니다. 지난 2년간 러시아를 앞서간 일본을 보면 그렇습니다. 일본은 평화적 혁명을 만들어 낼 만한 균형과 자기 통제|| 폭넓은 교육을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한반도에서 행해진 억압은 언젠가는 끔찍하게 폭력적으로 분출될 것입니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될 때 혼란이 지배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한국의 독립도 예전같이 환상적인 믿음일 수만은 없습니다. 반대로 한국은 구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넉 달 전 어느 누군가가 한국의 독립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면 저는 그것은 허황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황 전개로 보았을 때 일본의 한국 지배는 무기한일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한국인들의 이해 문제는 그렇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의 정책적 실패는 햇빛을 보듯이 명확해졌습니다. 일련의 우연한 상황들을 통해 한국의 독립은 곧 필연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넉 달 전만 해도 어느 누구도 한국인들이 자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한국인들은 20년 전의 한국인들이 아닙니다. 한국은 그 우방국들조차 놀랄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중히 계획된 선전 활동을 통해 세계의 민족들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은 퇴보한 국가이며 진보와 자치가 불가능한 나라라는 생각에 의문을 던져 주었습니다. 만일 미래에 세계가 몇몇 강대국들의 세력권으로 묶이지 않고|| 소규모 국가들이 서로 독립하여 신이 부여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면 한국인들이 빠른 시일 안에 스스로 자치 정부를 수립하지 못할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더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는 강력한 군국주의가 아니면 혁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브라운(Brown) 여사께 샤프(Sharp) 여사와 저의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139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28발신주소: 재령(Caairyung), 한국친애하는 친구들에게,의심할 여지없이 여러분들께서는 이곳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하여 신문을 통해 알고 계시리라 믿으며, 그 현장에서 상황들을 목격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9월 휴가를 이용해 이곳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폭풍은 우리들을 휩쓸어, 4년 반이라는 무단 통치 기간 동안 신문에서만 읽어 왔던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던 1910년 그들은 결국 흡수의 마지막 단계를 밟으며, 한국을 일본 제국의 부속 지역의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그 병합의 결과 일어난 일들과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저지른 일들에 대하여 이곳에서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무력으로 이곳을 지배했으며, 한국인들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정점이었던 지난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33인이 서울에 모여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담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를 위한 준비가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서울에서 선언이 낭독되자 이에 대한 동조의 뜻으로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군중들은 한 곳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한국 독립을 위한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완전한 비무장 상태였으며, 전적으로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당국에 저항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지도부들은 어떤 종류의 폭력도 행사하지 말고 어떤 기물도 파괴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으며, 체포당해 감옥으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폭력은 행사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놀라울 정도로 이 지침을 잘 따랐습니다. 이를 실례로 증명할 수만 있다면(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만), 폭력이 발생한 시위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리라 확신합니다. 시위대들이 일본 경찰과 군대의 잔혹함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몰릴 경우 폭력으로 이에 저항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는 지난 8주간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고, 또 어떤 곳에서는 수많은 시위가 발생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수입니다. 시위대들은 단지 일본과 전세계를 향해 자신들이 현재의 운명과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독립된 민족과 국가로서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항의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하게 정치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우리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항의 시위는 단순한 정치적 영역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비인도적이고 잔혹한 행위 앞에 약하고 희망이 없는 이들의 상황을 보면 우리로서는 중립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일본 당국은 처음부터 이 평화로운 시위를 극도의 잔인함과 엄청난 폭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 보았는데 고등교육을 받은 중류 계층인 그들은 그 당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경찰의 명령으로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에서 수백 야드 떨어진 곳에서도 구타 소리는 매일 매일 이어졌습니다. 희생자들은 형틀에 묶인 채 의식을 잃을 때까지 알몸으로 매질을 당했습니다. 정신을 잃으면 찬물을 끼얹었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매질을 반복했습니다. 이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팔과 다리가 부러졌다는 믿을 만한 정보도 들어왔습니다. 남성과 여성, 아이들은 총에 맞고 칼에 베였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분노의 표적이 되었고, 기독교인들은 특별히 고통을 겪었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은 불에 탔습니다. 총 가구수가 15가구밖에 안 되는 어떤 시골에서는 36명의 남성들을 교회 건물에 몰아 넣은 채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습니다. 부상당한 채 창문으로 기어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베었습니다. 이곳에서 몇 마일 떨어진 한 마을에도 한 무리의 군인들이 쳐들어가 남성들에게 떠나라고 (여성들을 남겨 둔 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성들만을 남겨 두는 것을 염려하여 여성들을 먼저 도망치도록 했습니다. 이 때문에 남성들은 구타를 당했습니다.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여성이 인력거를 타고 가고 있다는 보고가 입수되었습니다. 그녀는 네 명의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한 한국인이 군인들의 이와 같은 행위를 그 지역 담당 군사령관에게 신고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령관은 신고했다는 이유로 그를 구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다른 마을에서는 한 여성이 발가벗긴 채 여섯 시간 동안 엄지손가락을 천장에 매달린 채로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그녀의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를 추궁했습니다. 그녀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8주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 셀 수도 없습니다. 대략 6, 7백 명에서 4, 5천 명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대략 2천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독일 치하에서 벨기에인들이 당했던 것과 거의 같은 비탄과 신음소리가 지난 4년간 우리들의 귀를 채웠습니다. 정확히 그렇습니다. 최근 벨기에 정부는 독일인들이 6천명의 시민들을 지배하던 5년의 시간이 이제 종말을 맞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 평화적이고 구원받을 길 없던 2천 명의 남성과 여성, 아이들이 7주 만에 종말을 맞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결론을 내려도 좋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여러 시위지 가운데 하나인 재령(Caairyung)과 이곳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한 마을에서의 시위에 대한 목격담으로 보내 드리며, 이는 또한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내용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의 13개 도 중에서도 재령(Caairyung)이 속해 있는 도가 다른 곳에 비해 화를 덜 입은 편이라는 말이 들립니다. 다른 곳의 상황이 어떠할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보기에 한국인들은 놀라웠습니다. 이곳에서 수년간 거주한 우리들도 그들에게 그러한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들의 자기 절제, 불굴의 정신, 인내 그리고 영웅적 행위는 좀처럼 능가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미국인으로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76년의 정신’에 대하여 익히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정신을 황인종인 이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최근 몇 명의 외국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국이 자랑스럽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미래가 올지 알지 못합니다. 일본 당국은 이 고요한 땅에서 환영을 쫓아 갖은 만행을 다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한 정보를 계속 수집하고자 활발히 노력할수록 현재의 실질적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이 서한은 정기 경로를 통해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서한의 사본을 친구들에게 보내겠습니다. 이 서한의 내용을 인용하여 알리게 될 경우 모든 성명과 지명을 삭제해 주실 것을 분명히 요청드립니다. 감사합니다.

    140 동창(Tong-Chaing)에서의 시위

    동창(Tong-Chaing)에는 약 3백 가구가 있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이전부터 시위를 벌이려고 했으나 이 지역 교회의 원로인 한(Han) 씨를 비롯한 교회 관계자들은 시위대 일부에서 폭력 사태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 행동에 반대했다. 이곳에는 약 5백여 명 정도의 광부들이 있었는데, 폭력 사태는 이들이 경찰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을 때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날이었던 3월 29일 외지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자 아이들이 시위를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이에 가담하여 시위대는 4백 명에서 5백 명 규모가 되었다. 이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시위는 전적으로 평화로웠으며, 공권력에 대한 투척이나 저항도 없었다. 경찰이 출동해 17명을 체포하였으며, 그 중 과반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5명의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남성이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제부터 3명의 여성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하겠다. 정정열(Chung Chung Yul) 씨는 동창(Tong-Chaing)에 사는 서른한 살(한국 나이)의 과부로, 아이 한 명이 있다. 그녀는 ‘만세’를 부르는 군중 속에 있었고, 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경찰서로 들어갈 때 경관은 그를 등뒤에서 발로 찼다. 경찰서에서 경관은 그녀의 겉옷을 벗겼고, 그녀는 속옷 차림이 되었다. 그 후 경관들은 그녀의 얼굴을 피멍이 들 때까지 손으로 구타하였다. 그녀가 옷을 꼭 붙들고 있자 경관들은 그녀의 몸 사이에 나무 막대를 집어넣어 속옷마저 벗겼다. 그들은 그녀의 팔과 다리를 막대로 구타하였다. 구타는 상당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 경관들은 구타를 멈추고, 벗겨진 그 여성을 웃음거리로 만들며, 앉아서 일본 케이크와 차를 마셨다. 그 방안에는 많은 남성들이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그들은 그녀에게 옷을 입도록 허락한 후 그 옆의 감방으로 보냈다. 이곳에는 체포된 많은 사람들이 구금되어 있었다. 저녁 무렵 전깃불이 밝혀지자 그녀는 다시 불려 갔고, 한 노인과 그의 아내에게 그녀가 법정에 소환될 때까지 책임지라고 명령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있어야 했으며, 걸어다닐 수 없었다. 표학선(Pyo Hak Syun) 씨는 두 명의 아이가 있는 서른두 살의 과부이다. 그녀도 역시 시위에 가담하였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서로 가는 동안 그녀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는데도 경관들은 그녀의 팔을 비틀고 갔다. 경찰서로 들어가자 경관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구타하였으며,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한 후 그녀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녀가 넘어졌는데도 경관은 계속 걷어차면서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겉옷을 벗었으나 속옷은 벗지 않았다. 경관은 속옷도 벗으라고 명령했으나 그녀는 벗지 않았다. 이때 거리에서 커다란 만세 소리가 퍼졌고, 대다수의 경관들이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 나가면서 그녀에 대한 가혹행위는 중단되었다. 그녀는 다시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옆에 있는 구치소로 옮겨졌다. 그녀는 그곳에서 하루 동안 구금된 후 다음날 아침 다른 한 여성과 함께 풀려났다. 두 여성은 모두 중류 계급이었고(하류층이 아니었다), 매우 총명한 여성들이었다. 두 여성 모두 몇 년간 성경 학교를 다녔다. 이효성(Yi Hyo Syung) 씨는 신효범(Sin Hyo Pum) 씨의 아내였다. 그는 선천 남학교(Syen Chun Boys Academy)의 교사였고, 그녀는 연못골 여학교(Yun Mot Kol Girls Academy)를 졸업하고 동창 초등여학교(Tong Chaing Girls Primary School)의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스물여덟 살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매우 똑똑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네 살 난 아이를 두고 있었고, 임신 2개월 또는 3개월째였다. 그녀는 시위에 소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표학선(Pyo Hak Syun) 씨의 체포로 심란해 하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가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려 하였다. 그녀가 그 집에 다다르자 몇 명의 경관들이 마당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그녀가 학교에서 근무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녀를 찾으려 학교를 수색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그곳에 숨으려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고, 그녀는 이를 부인했다. 경관들은 다시 그녀에게 ‘만세’를 불렀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관들은 그녀가 업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자신들과 같이 갈 것을 명령했으며, 그녀는 이에 따랐다. 그녀가 경찰서 문 앞에 다다르자, 경관들은 그녀의 뒤쪽에서 세차게 발로 찼으며, 그녀는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조사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벌벌 떨면서 바닥에 엎드리자 경관은 그녀의 목을 발로 짓눌렀다. 그러고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여러 차례 구타했다. 그는 그녀의 옷고름을 홱 당기고 그녀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그들은 그녀를 발로 계속 걷어차면서 포악하게 옷을 벗겼다. 그들은 무거운 막대와 판자로 그녀를 가격했다. 그들은 그녀의 속옷까지 벗긴 채 그녀가 아이들에게 일본인을 미워하도록 가르쳤다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며 가슴을 계속 구타했다. 그녀는 속옷으로 알몸을 가리려고 했지만, 경관들은 옷을 빼앗아 갔다. 그녀가 앉으려고 하자 경관들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손과 발로 구타를 계속했다. 그녀는 경관들로부터 돌아서려 했으나 그들은 그녀가 방안에 있는 남자들 쪽을 보도록 붙잡았다. 그녀가 손으로 몸을 가리려고 하자 경관 한 명이 그녀의 손을 뒤로 비틀어 묶고 계속 때렸다. 온 몸에 맞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결국 감각이 없어져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얼굴은 부어 올랐고, 몸은 창백했다. 그녀는 두 손을 들고 있어야 했고, 고문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구타를 중단하고, 그녀를 방 한 구석에 한동안 두었다. 그러고는 정정열(Chung Chung Yul) 씨 이야기를 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그 후 다시 그녀에게 다시 옷을 입으라고 명령한 후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곳에 그녀를 구금하였다. 오후 9시경 위에 말한 세 명의 여성과 다른 세 명의 여성들은 다시 조사실에 불려 갔다. 경관들은 그들에게 ‘만세’를 부른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느냐며, 또다시 시위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중 세 명을 석방하였으나 표학선(Pyo Hak Syun) 씨와 이효성(Yi Hyo Syung) 씨는 계속 구금되어 있었다. 이 두 여성은 다시 구치소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루를 더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도 피의자들에 대한 심문이 계속되어 몇몇 남성들이 먼저 심문을 받았다. 여성들이 받은 고문에 대한 소식이 그 동안 마을에 퍼졌고, 약 5백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 중에는 여성들이 당한 고문에 대해 복수하러 경찰서를 공격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Han) 노인은 폭력을 비롯한 위법적인 행동을 하지 말도록 권고했다. 결국 온건한 분위기가 우세해 항의의 표시로 두 명의 대표자들을 보내기로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그 두 명은 모두 기독교인들이 아니었으며, 그 중 한 명은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이들이 경찰서로 들어가 있는 동안 군중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자들은 여성들의 옷을 벗기고 위법 행위를 한 점에 대하여 항의를 했다. 그러자 경찰서장은 그들이 잘못 알고 있다며, 그런 행동은 일본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두 대표자들은 그렇다면 왜 나이든 여성이 아닌 젊은 여성들만 구타하고 옷을 벗겼는지, 또 남성들은 그대로 둔 채 왜 여성들의 옷만 벗겼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경찰서장은 이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후 꽤 오랫동안 대화가 진행되었다. 이 대표자들은 매우 단호했으며, 밖에 있던 군중들은 점점 참을성을 잃고 소란해지면서 그들을 석방시키지 않으려면 자신들을 모두 잡아넣으라고 요구했다. 경찰서장은 결국 이에 굴복하여 네 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하는 데 동의했다. 표학선(Pyo Hak Syun) 씨는 양쪽에 부축을 받고서야 걸을 수 있었고, 이효성(Yi Hyo Syung) 씨는 한 남자의 등에 업혀 나왔다. 이 광경을 보는 순간 연민의 감정이 사람들을 휩쓸었으며, 모두 한꺼번에 눈물을 터뜨리며 흐느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야만인들 밑에서 살 바에야 죽는 것이 낫다”고 소리쳤으며, 맨손으로 경찰서를 공격하고, 서장을 붙잡아 때려죽이자고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나 한(Han) 노인을 비롯한 마을의 유지들은 이러한 행동을 막았으며, 결국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다. 하루나 이틀 뒤쯤 광산에 있는 6백 명의 광부 대표자 두 명이 멀리서 한(Han) 노인을 찾아와 몇 가지 문제를 상의했다. 이들은 이와 같은 포악함을 더 이상 견딜 수는 없다며, 경찰서를 공격해 복수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한(Han) 노인은 그들과 잠시 동안 말다툼을 벌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음주를 하고, 인내심을 잃어 노인의 사타구니를 찼다. 그러나 한(Han) 노인은 결국 그들을 설득하여 최소한 그곳에 억류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이 풀려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질 때까지 만이라도 참아 달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폭력에도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시위가 있었고, 최소한 두 명의 남성들이 총에 맞은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그 내용은 위에 짧게 설명한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