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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71 1919년 10월 16일, 시모노세키 ‘이키 마루’의 격리 수용소에서 굴릭(Gulick) 박사님께 보내는 자료

    발신일: 1919-10-16발신주소: 시모노세티 이키 마루(Iki Maru)의 격리 수용소발신자: 수신자: 굴릭(Gulic K)33면. 명산(Maungsan) 사건. 이 이야기를 믿지 마시고|| 거론되는 것을 듣지 마십시오.90면까지는 거의 반복입니다. 정부를 반 기독교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노력은 매우 훌륭합니다. 이 글을 주로 쓴 사람들은 전적으로 진실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일본에 반대하는 사건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어떻게 여러 지역의 첫 회의가 교회에서 열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정부가 기독교를 몰아내고 싶었다면 왜 하세가와 장군은 제암리의 교회들을 재건하라고 1천5백 엔을 하사했겠습니까? 고위 관료들은 반복해서 말하길 사람들은 종교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기회를 얻은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만약 그들이 기독교에 반대했다면 그들은 저와 제 일을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 친구이고 저에게 모든 가능한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 일본인 기독교인들과 선교단들이 나무랄 데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박사님과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박사님께서는 일본 기독교가 어떤지 그리고 우리 선교단이 어떤지 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93면. 많은 일본인들과 관계된 것은 전적으로 위조된 것입니다. 딱 한 명의 술 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윌슨(Wilson) 대통령이 군대와 함께 제물포에 있었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94면. 증거물 27. 전적으로 나쁩니다! 귀 위원회는 이런 것을 통과시켜서는 안 됩니다.증거물 28은 제암리의 반복이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96면. 하단. 많은 구역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전혀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홀드크로프트(Holdcroft) 형제가 평양이나 선천을 덧붙였다면 그의 진술은 맞을 것입니다. 101면. 일본 연방교회는 서울 목사회의에 대표를 보내라고 요청 받았습니다. 저는 이를 이시자카(Ishizaka) 형제와 우리의 서울 목사인 노카무라(Nokamura) 형제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시자카(Ishizaka) 형제에게 선교단들을 데리고 오라고 부탁한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웨인라이트(Wainwright) 박사와 올트만스(Oltmans) 박사를 추천했는데|| 그들이 가능하지 않아서 길버트 보울즈(Gilbert Bowles) 씨가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은 훌륭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약간 진리의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교회에 불지르는 것은 4월 17일 멈췄습니다. 혹 예외가 있다면 불이 난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북쪽의 한 곳뿐입니다. 102면. 2번째 줄. 이 사람은 교회 건물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한국 교회에 ‘정치적’인 요소가 컸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만약 탄압을 받았다면 기독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유 때문입니다. 폭동이 막 일어나자 서울 교회의 가장 큰 목사인 손이라는 사람과 S. S. 전문가인 현 씨는 여학교의 주임 선생인 하 양과 함께 모두 상하이로 가 버렸습니다. 여자 분은 그곳에서 죽었고|| 남자들은 지금도 도피중입니다. 현 씨는 내각(published Cabinets)의 한 명인 외무장관(Foreign Minister)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103면. 두 번째 줄.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은 잘못된 행정부보다는 이번 운동과 더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진정 억압을 느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진실에 눈을 떠 그들의 나라가 더 이상 자신들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대부분 일본의 교육 덕분입니다. 하디(Hardie) 박사는 말씀하시길 “이번 시위에서 벌어진 일은 대부분 일본의 학교에서 가르쳐 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104면. 강간에 대한 이야기는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나쁜 경우라고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습니다.박사님께서는 또 제암리를 반복합니다. 이를 구분하셔야 합니다. 105면. 선교단들은 ‘자주’ 학대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106면. 이미 논의했던 부분입니다. 경쟁이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덜 예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구매하는데 유리합니다. 그러나 한국인 상점주인들은 파는 데 유리합니다. 공립학교는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과서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꿀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이곳의 신문을 전혀 읽지 않았다고 장담하겠습니다. 저는 ‘게이조 니포(Keijyo Nippo)”를 5년간 읽었고|| 이 신문은 세계의 소식에 대해 훌륭한 개요를 전하고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논의는 이미 했습니다. 이 글쓴이는 근본을 떠나 있습니다. 107면. ‘한국인들은 세금을 내고 있다’ - 거짓말입니다. 그들의 세금은 사소한 것입니다. 일본은 늘 학교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일파의 사람들이 정부가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침착하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각 사람들에게|| 남자|| 여자 그리고 세 명의 아이들이 6주 이상 동안 먹을 수 있는 쌀과 다른 곡식|| 귀리 등을 지급했습니다. 그들은 임시 막사와 피난처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씨앗과 농기구를 주고 각 가구당 50엔씩 주었습니다. 협정에 따라 외국인들은 취사 도구와 침구|| 의류를 제공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일본인 기독교인들은 이 재난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했습니다.109면. 중간 부분. “정부가 모든 주도권을 파괴했다”라고 게일(Gale) 박사님이 말했다고요? 또 다른 영국인인 하디(Hardie) 박사님은 이 운동의 원인이 대부분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준 것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후자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역사상 가장 강한 정신력을 보여주었습니다.111면. 밑에서 10번째 줄. 구호시설 외에는 병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생 설비도 없었습니다.112면. ‘일본과 일본인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착취하는 것이 행정부의 목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대규모의 ‘정착민’이 아닙니다. 저는 한국이 오늘날만큼 번영한 적은 없었다고 선교단들이 반복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부분은 이렇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불만에 차 있는 사람은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 일부와 한국을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들 일부입니다.휴 신(Hugh Cynn) 씨는 잡지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다른 잡지처럼 후원이 부족하여 없어져 버렸습니다. 행정부는 불교를 장려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1916년인가 1917년에 쓴 ‘기독교 운동’이라는 글을 보시면 국내 목사가 종교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찾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데라우치 장군조차 한국인들이 일본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황국의 신민’ ‘동화된’ ‘융합된’ 등등으로 만들겠다고 말했습니다. 우사미(Usami) 씨는 말하길 그들은 대영제국의 스코틀랜드인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육당국은 한국인들이 대학에 가게 되어서 기뻐했습니다.113면. 밑에서 12번째 줄. 4개의 대학이 있습니다. Semmon Gatko - 세 개가 아닙니다.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제도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했습니다. 일본인들은 그들 자신의 학교를 크게 후원하며 관리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정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초기에 한국인들은 일본인 학교에 다니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대학이 있었다면 거기에 다니는 학생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훌륭한 새로운 대학인 유니온 기독교 대학이 언더우드(Underwood) 박사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 대학에는 훌륭한 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부의 도움으로 얻게 된 훌륭한 땅에 건물들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학생은 거의 모집할 수가 없습니다. 3년 동안 총장이었던 A. L. 비커(Beeker) 씨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는 지금 미시건 주의 힐사이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이 교육 문제는 과장되었고|| 113면과 114면의 내용은 진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실을 대변하지도 않습니다. 115면. 한국에 있는 대학은 모두 한국인을 위한 것입니다. 예외인 한 대학은 도쿄 교게이(Toyo Kyokei)입니다. 이 대학은 상업학교이므로 115면의 첫 문단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그런 것처럼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일본에 가야 합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판단한다면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15면. 마지막 문단. 중상모략입니다. 116면. 저는 다이이치 은행을 잘 알고 있고|| 역시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예금한 것을 모두 찾을 수 있습니다.한국인 소년은 한국에 있는 일본인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기원” - 이것은 중요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117면. “믿음을 갖는 것은 중대한 범죄”. 엄청난 과장입니다.120면. 저는 외국에서 공부한 한국인 다섯 명의 이름을 댈 수 있습니다. 유(Yur)|| 신(Cynn)|| 김(Kim)|| 야렉(Yareg)|| 백(Pack)입니다. 그리고 네브라스카의 웨슬리얀(Wesleyan)에서 온 리(Lee)가 있습니다.124면.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해외에 나갈 수 있고|| 저는 귀국할 수 없었던 혁명가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2.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매춘에 대해서는 논의했습니다. 만주의 한국인들은 대개 잘살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거의 판매를 하는데 그 이유는 좋은 값을 받기 때문입니다. 각처에서 땅값은 그저 오르고 있습니다.한국과 일본의 차이점 세 가지.선교단1. 일본인 선교단들은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을 사랑한다. 한국인 선교단들은 소수의 개인들만 사랑할 수 있다. 2. 일본인 선교단들은 일본 내부에서 투쟁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을 믿고|| 종국에는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 선교단들은 일본이 제2의 독일이라고 생각한다.3. 일본인 선교단들은 그들이 뭐라고 쓰고 말하건 일본의 명예를 존중한다. 한국인 선교단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장로교의 쉘(Schell) 씨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너무 강렬합니다. 위원회는 소래 해변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길 그는 이곳에 친일본적으로 왔는데|| 한국 선교단과 사흘간 지내고 나서 반일본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172 굴릭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0-01-10발신주소: 서울|| 한국발신자: 프랭크 헤론 스미스(Frank Herron Smith)수신자: 시드니 L. 굴릭(Sidney L. Gulick)수신주소: 뉴욕 시 22번 가 이스트 105번지굴릭 박사님께||저는 박사님께 편지 두 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11월 3일자이고|| 다른 하나는 11월 21일자입니다. 지금 박사님께서 어떤 종류의 팸플릿을 마음속에 두고 계신지 물론 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든 저는 박사님께서 언급하신 문제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박사님의 또 다른 팸플릿은 크나큰 실수라 생각하고|| 박사님께서 그것으로 하신 일을 원상태로 돌리실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이곳에서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모든 거짓말과 잘못된 보고를 고치는 것에 대한 유용성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 좋은 계획이 아니라고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놔두고|| 날마다 일어나는 새로운 일에 대해서만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결국에는 진실이 승리할 것입니다. 현재 제 마음속에 있는 일반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독립을 선언하고 그와 같은 종류의 독립시위를 하다니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어리석습니다. 어리석다라는 표현은 충분히 강한 단어가 아닙니다. 그들은 케이크나 사탕을 달라고 우는 아이와 같습니다. 사실 강력하고 희망적인 아이이지요. 우리는 밝은 미래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일 뿐입니다. 그들은 홀로 설 수 있는데 필요한 자격을 전혀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교회에서 그러한 많은 시위를 했고|| 지금도 교회를 이용하려 합니다. 한국 교회는 실제적으로 늘 그래 왔듯이 다소간 정치적입니다. 선교단들은 전체적으로 교회에서 정치를 없애려고 양심적으로 노력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독립선동을 지속할 만큼 어리석습니다. 그렇게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상하이와 미국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사용한 무기에 대해 용의주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만이 한국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과 다른 몇 명(후발주자로 온 영국인 선교단과 몇 명의 젊고 성미가 급한 미국인 선교사들)은 그러한 전쟁을 바라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이 폭동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적어도 한국에 있던 관료들은 그러했고|| 그들은 너무 거칠게 진압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일본은 그들의 방법을 지지하거나 승인하지 않았고|| 하세가와 장군과 모든 주요 관료들을 소환하였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은 한국에서 꽤 잘했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방법으로 개혁이 요구되었다면 그들은 의심할 필요 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구제도는 그때에 맞게 쓰고||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준비하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개혁에 대해서는 다른 부분에서 다루겠습니다. 이제 박사님의 편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자료들이 밖으로 나갔는지 제가 알고 있었더라면 저는 분명히 박사님과 계속 연락을 취했을 것입니다. 저는 연방회의를 생각했으나 박사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고|| 일본에 대해 온당한 일을 하실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제야 저는 박사님께서 제대로 된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불리한 위치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스(North) 박사님께서는 그러한 자료를 사용하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옳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출처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박사님께서도 제가 상당히 고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미 글을 쓰셨을 하디(Hardie) 박사님이나 노블(Noble) 박사님과 같은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한국에서 일본의 계획에 관한 팸플릿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감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판단을 내릴 방도가 없습니다. 서신 왕래에 있어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보내 드릴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저는 선교단 회의와 일본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가기 전에 박사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그 회의에서 저는 5월 1일 디모인(DesMoines)에서 열리는 총회에 일본 대표로 뽑혔습니다. 우리는 4월 9일에 고베에서 배로 출발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저에게 한 번 더 편지를 쓸 시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해드릴 일이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이토(Saito) 남작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길 박사님께 편지를 받으셨다면서 인쇄물을 보내셨다 했습니다. 이제 11월 21일자 박사님의 편지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저는 관료들에게 폭동에 관한 통계자료를 부탁했고|| 그들은 외교부서의 제2인자인 이마무라(Imamura) 씨를 통해 그 자료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고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우선 숫자를 공개해도 좋은지 이야기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고 현명한 방법인지 말입니다. 저는 그에게 그것들을 공개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는 애비슨(Avison) 박사로부터 숫자를 공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또한 저도 애비슨(Avison) 박사가 숫자를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그에게 부탁했습니다. 숫자는 그리 크지 않았고|| 일본은 책임을 부정했으며 어찌되었건 방법이 나빴다고 비난했습니다. 제가 도쿄에 있었을 때 하라(Hara) 씨는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저에게 부탁하고는 말하길 일본은 한국에 문명화된 행정부를 주기로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그 비용이 얼마만큼 들던지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는 사이토(Saito) 남작과 미즈노(Mizuno) 박사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못할 경우 그들은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도쿄에서 저는 한 달 동안 머물렀는데|| 많은 지도적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그들 모두의 결정을 요약했습니다. 저는 군대 쪽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어찌되었건 그들은 이제 힘이 없습니다.첫번째 보낸 통계자료는 폭동 기간 동안의 것으로 3월 1일부터 7월 20일까지입니다. 경찰과 헌병에게 체포된 사람 전체 : 28||934명이들 중 13||185명은 대리인에게 보내졌음.4||065명은 훈방1명이 실형을 받아 감옥에 감.530명은 단기간 감옥에 수용.293명은 가벼운 벌금형9||073명은 태형1||782명은 아직 조사중(경찰은 약식 재판을 수행할 수 있었음. 즉 그들은 작은 문제는 재판하고 판결을 내려 태형이나 가벼운 벌금형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음.)법원의 보고는 10월 말까지 연장됨. 대리인에게 조사를 받은 사람의 전체 수는 17||999명(위에 언급된 13||185명 포함)이 중 재판을 받은 숫자는 8||993명 재판 없이 방면된 사람은 7||116명1||838명은 고등법원으로 보내짐52명은 아직 재판중 재판을 받은 사람 가운데 5||156명에게 실형이 선고되어 감옥으로 보내짐. 이 중 282명은 모범 행동으로 형이 감면됨(집행정지).11명은 벌금형. 8명은 단기간 구금과 가벼운 벌금형1||514명은 태형. 51명은 무죄판결. 7명은 재판에서 면제됨. 박사님께서는 폭동 때 죽은 사람의 수를 물어 보셨습니다. 9명의 일본인이 죽고|| 186명이 부상당했습니다(여기에는 ‘선한’ 2명의 한국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폭동자도 죽었습니다. 보고된 바로는 553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재조사를 해본 결과 631명이 죽었습니다. 폭동자들의 부상에 대해서는 1||409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되었고|| 나중에는 1||415명이라고 보고되었습니다. 209채의 건물과 사무실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거의 정확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기어 다니다가 죽었습니다. 벌거벗겨진 여학생은 기껏해야 1|| 2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불에 탄 마을에 제공된 구제책과 관련하여 할말이 많습니다. 지방 관료들은 제가 그들에게 해달라고 부탁한 모든 것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우선 적십자에 부상당한 사람과 아픈 사람들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재민을 위한 식량을 부탁했습니다. 약 6|| 7주 동안 혹은 밀이나 보리 수확을 할 때까지 그들은 화재를 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한 사람이 하루에 먹을 양질의 쌀을 평균 3회씩 지급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거친 음식에 익숙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쌀과 함께 대량의 귀리 등을 지급했습니다.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임시 거처와 막사가 지어졌습니다. 잔해는 모두 치워졌습니다. 그들에게 무료로 벼 종자와 농기구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재건할 준비가 되자 정부는 각 가정 당 50엔씩 주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비용의 평균 1˜4배일 것입니다. 정부는 또한 모든 여러 적십자 단체가 준 물건을 무료로 옮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1월 12일 월요일41개의 교회 모두 전체적으로 혹은 일부 파괴되었습니다. 이 교회들은 네 구역 안에 있었습니다. 수원 구역에서는 7개 교회인데|| 6||000엔 정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평양 구역에서는 감리교회 6개와 장로교회 18개입니다. 감리교의 손실은 800엔이고|| 장로교의 손실은 4||000엔입니다. 최대의 손실은 선천(syenchun) 근처의 최북단 지역에서 있었습니다. 태수(Teishu)의 손실은 약 15||000엔에 달합니다. 가구산(Kakusan)은 10||000엔이고|| 오산에서 교회는 8||000엔|| 학교는 10||000엔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삭주(Sakchu)에서는 12||000엔|| 위주(Wiju)와 가까운 네 지역에서는 7||000엔입니다. 이 건물들의 시가를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추정액은 과장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하세가와 장군과 제가 면담을 할 때 우리는 수원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손실액을 1천5백 엔 정도로 추정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전액을 그의 개인 재산에서 주었습니다. 노블(Noble) 박사님과 미국 영사인 버골즈(Berghols) 씨는 이 일을 일본 신문에 알렸고|| 이로 인해 하세가와는 즉시 소환되게 됩니다. (그가 돈을 주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그가 이 사실을 승인했으므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로) 북부 지방의 헌병과 경찰들은 대단한 거짓말쟁이로 자신들이 그곳의 화재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적어도 상당한 부분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일본인기독교회연합을 통해 이 교회들을 재건하도록 4||200엔을 보냈습니다. 이시하라(Ishihara) 형제와 저는 12월 초에 답사를 하여 마지막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저에게 돈을 주면서 배분해 주라고 했습니다. 저는 2||050엔은 선천 지부에 보내고|| 800엔은 평양의 장로교 모펫(Moffett) 박사께 보내고|| 360엔은 평양의 감리교 무어(Moore) 박사께|| 890엔은 수원 지역의 노블(Noble) 박사께|| 400엔은 남쪽의 감리교에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이토(Saito) 남작께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캐나다인 거주 지역에는 지방 정부는 약간의 도움만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동안 화재가 난 마을의 문제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어제 저는 그 지역에서 현재 우리 일의 책임을 맡고 있는 폴 그로브(Paul Grove) 씨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길 마을은 거의 재건되었고|| 이방인인 그 자신도 그 마을이 불탔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혹시 그곳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냐고 물어 봤고|| 그는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극빈층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을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정직한 관찰자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그는 말하길 정부에서는 가장 피해가 심했던 마을인 경다리(Kyungdari)에 새 학교를 세우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경찰 조사관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저는 연관된 목사들과 장로들에 대한 박사님의 질문에는 대답하려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몇몇의 한국 선교단에서 이 숫자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 숫자를 말하면 저는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연루되지 않은 목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짓 목사들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몇 주일 전에 모펫(Moffett) 박사가 평양에서 제게 말해 준 바에 따르면 평양의 길(Jil) 목사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과는 반대로 억지로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이제 감옥의 추위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스티져(Stidger) 박사님과 함께 감옥 중 한 곳을 가 봤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충분한 담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들만큼 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건강에 해로울 정도로 추위에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감옥을 방문해 본 외국인이 불평을 하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곳의 장로교 선교단인 쿤스(Koons) 씨를 법무대신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하고|| 제가 보증을 서서 그가 감옥에 있는 장로교도들을 방문할 수 있는 허가를 받게 해주었습니다. 후에 저는 다른 교파의 다른 3명의 사람들에게도 같은 허가를 받아 주었습니다. 제 자신은 아무 때나 아무 감옥을 방문할 수 있는 허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저는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은 없습니다. 형벌에 관해 말하자면 헌병 제도 전체가 없어졌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업무와 권위는 완전히 그들로부터 이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코지마(Kojima) 장군은 전국 조직의 수장이었고|| 총독을 제외하고는 그보다 더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현재 그는 아무런 권력도 없습니다. (헌병은 아직도 이곳에 있습니다. 적어도 몇 명이 남아 있는데|| 일본 본국에서 하는 일과 동일한 일을 이곳에서도 합니다.) 최근까지 시수오카 켄(Shisuoka Ken)의 지사였던 아카이케(Akaike) 씨가 현재는 경무부의 수장이 되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일본에 보급된 제도와 같은 것이 도입되었습니다. 즉 각 지방 사무소마다 경무부가 있으며 이들은 지사의 휘하입니다. 저는 헌병 개개인이 실직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 관점에서 보면 그들 중 다수가 벌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수원의 대학살에 책임이 있는 중위는 정규부대 소속이었고 벌을 받을 만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군사 법정의 최고형을 받고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10월에 하라(Hara) 씨를 방문했을 때 그가 말하길 그들은 이에 불복하였으며|| 그 젊은이는 군사법정으로 보내졌고|| 판결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4월에 하라(Hara) 씨를 다시 볼 예정인데|| 다시 물어 볼 것입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그가 명령을 어기지는 않았지만 명령을 과도하게 수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법정을 열 수 없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헌병이나 경찰에게 “법을 위반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이곳의 관료들에게 이 말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폭동자들이 법을 위반했고|| 강경한 방법을 써서 이를 통제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박사님께서 요청하신 바대로 저는 광산(Kwangsan)에 대한 특별 조사를 했습니다. 이곳은 박사님의 팸플릿 33면에 나와 있습니다. 공식적 보고에 따르면 3월 10일에 수백 명의 천도교 교도들이 돌과 바위를 던지며 헌병대를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본인 헌병 한 명을 죽였고|| 한국 헌병은 심하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헌병들은 폭도들에게 발포를 했고|| 40여 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실일 것으로 믿습니다. 헌병들도 화가 나지 않고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통치 방식의 정신이 저를 감동시킨 것처럼 이제 이에 대해 몇 마디의 말을 하겠습니다. 저는 사이토 남작을 개인적으로 매우 잘 알게 되었고|| 여러 번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는 진지하게 한국인들에게 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행정부를 갖게 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와 미즈노(Misuno) 박사는 훌륭한 팀입니다(미즈노 박사는 그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서 두 달여 간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에서 병을 앓고 있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바는 사이토 남작이 귀가 얇아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잘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의 모든 주요한 자리에 그의 사람을 심어 놓았고|| 이는 성공적입니다. 사실 성공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를 믿지 않고|| 그를 믿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또한 온갖 힘을 다해 선교사들도 그를 불신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기술적인 개혁에 대해 자세히 쓸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박사님께 보냈던 인쇄물에 이러한 방법들은 요약되어 있습니다. 물론 헌병제도를 없애고 공무원들 휘하에 경찰을 투입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고|| 개혁이 주로 집중한 곳입니다. 일부 헌병들은 경찰로 바뀌었는데|| 다 합쳐서 수백 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가 헌병의 제복만 바꾸었을 뿐이라는 것은 너무한 거짓말입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조직 전체가 바뀌었습니다. 남작이 처음으로 한 또 다른 일은 제복을 없애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공무원들의 금줄 무늬가 있는 제목과 착검을 폐지했습니다. 제가 12월에 이시자카(Ishizaka) 형제를 위해 개최한 회의에서 한 급진적 선교단이 말하기를 한국의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준 유일한 개혁은 (1) 묘지법(외국인들이 조롱했던 개인 묘지를 허락하는 법으로 한국의 고위층들이 사이토 남작에게 부탁하여 남작이 이를 특별히 들어준 최초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 모든 식용 동물은 조사를 위해 공공 도축장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법의 완화 (3) 초등학교의 교장으로 수십 명의 한국인을 임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이것이 부분적으로라도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선교단들이 다른 면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사태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세 개의 한국 일간신문이 이곳 서울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두 개만 지원을 하는데 저는 이 모든 신문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사이토 남작은 독립신문(Independent)에 그의 개혁에 대한 요약과 생각을 담은 훌륭한 기사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12월에 나올 것입니다. 저는 귀찮게 이를 논평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세 번에 걸쳐 태형을 없애겠다는 명령을 발표하라고 요청했고|| 그는 10월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선교단들에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는지 박사님께 써 보냈다고 확신합니다. 그와 미즈노 박사 모두 영어를 잘하고|| 어떤 선교단이나 한국인이든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는 올라가서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교육과 종교를 담당하고 있는 시바타(Shibata) 씨는 오사카 지방사무소에서 왔습니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교회의 지방 목사인 다테(Date) 씨를 그의 사무소 관원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예전에 하와이 이민 판무관이었고|| 미국에 수년간 머물렀습니다. 그는 근무 시간에 선교단과 목사를 만나서 그들의 생각을 듣습니다. 종교과에 그들은 또 다른 지방 목사인 요시카와(Yoshikawa) 씨를 임명했습니다. 그는 가나사와(kanasawa) 출신입니다. 그들은 또 다른 기독교인 비서를 채용했는데|| 그녀는 한국에 온 지 3주 만에 죽었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유형의 일본인 기독 여성이었습니다. 외국담당 부서에는 세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한 명은 새로 온 사람이고 두 명은 이전부터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경무부에는 열렬한 기독교인을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그들은 또한 외국인 자문을 고용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두 번 제의를 했지만 저는 지금 하는 대로도 더 많은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는 제가 지금 하는 선교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홋카이도에서 오래 있었던 로우랜드(Rowland) 박사를 천거했습니다. 박사님께서도 그를 아시리라 확신합니다(그는 미국위원회에 있습니다).제가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는 그들이 경찰서에서 불필요하게 잔인한 모든 것을 없애도록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것은 남아 있는 가장 악독한 일입니다. 일본 교회연합에서 온 이시하라(Ishihara) 형제가 12월에 두 번째 방문을 했을 때|| 우리는 아무런 불평이 없는 많은 곳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불평이 있었던 최악의 모든 사례들을 채택했고 아케이케 씨(Mr. Akaike)가 그것들을 정력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폭동 초기에 저는 애비슨 박사(Dr. Avison)와 게일 박사(Dr. Gale)에게|| 한국인들은 그들이 맡을 만하거나 맡기에 적합한 것보다 더 많은 공직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자치를 할 준비를 하자마자 그들에게 그것을 줄 것이고|| 그들이 할 일은 훌륭하나 어려운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선동자인 구사펠 양(Miss Guthaphel)과 벡 씨(Mr. Beck)|| 그리고 제가 알지 못하는 헐버트 씨(Mr. Hulbert) 또한 한국의 적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도움을 주는 것보다는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웰치 감독(Biship Welch)은 어제 여기서 우리의 난제들을 푸는 방법으로 "신앙과 한결같은 전진"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는 이곳 이런 선교사들을 위해 그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들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만 하며|| 그러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런 혼란스런 여러 말들이 당신께 약간의 가치라도 지니기를 희망하고 몇 달 내에 당신을 뵙기를 기대합니다.경구||(서명) 프랭크 헤론 스미스(Frank Herron Smith)저는 믿음직한 친구가 제게 미즈노 박사(Dr. Misuno)가 도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병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편지의 봉투를 열었다. 사이토 남작(Baron Saito)이 며칠 안에 갈 것입니다. 그가 도쿄 군중들을 위해 너무 빠르게 혹은 너무 느리게 일을 진행할지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지 않거나 간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게 말한 여성은 Mochiji 부인이고|| 그녀는 방금 사이토 댁을 방문하고 왔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제이신 쿄쿠 초(Jeishin Kyoch Cho)이고||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연로한 고위 관료입니다. 어쨌든 무슨 일인가 꾸며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편지를 받기 전에 그것을 전신으로 받아보게 될 것입니다. F. H. S.

    173 사카타니가 길버트 보울즈씨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9-01발신주소: 하라마치|| 코이시카와(Hara Machi|| Koishikawa)|| 도쿄발신자: Y. 사카타니(Sakatani)수신자: 길버트 보울즈(Gilbert Bowles)선생님||새로운 한국 총독 사이토(Saito) 남작의 행정부가 출범되는 이 시점에서 귀하의 친절한 정보와 시의적절한 제안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명하는 것이 저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하께서는 저에게 직접 연락을 하시거나 카와카미(Kawakami) 씨를 통해 몇 달 전 한국의 폭동자들에 대한 우리 관리들의 부적절한 행동뿐 아니라 한국 행정부에 대해서도 생각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귀하께 이런 제안을 듣자마자 저는 긴급하게|| 아마도 귀하께서 자신 있게 알고 계시듯이 저희 각료들을 설득하여 한국인들에게 행한 잘못된 점을 시정하기 위한 즉각적이고 합의된 단계를 시작하게 했고|| 한국의 행정부를 좀더 진보적이고 대범한 방법으로 개혁했습니다. 즉 고지식한 군사주의를 폐지한 것이지요. 제 생각에 우리의 수상이신 하라(Hara) 씨는 한국의 실제 상황을 올바르게 볼 만큼 충분히 현명했고|| 개혁을 이루는데 그의 모든 힘을 다 사용했습니다. 중앙정부 입장에서의 이러한 재빠른 행동은 일본이 전세계적인 혹독한 비난의 도가니에 빠지는 것을 가까스로 구했습니다.저는 일본이 앞으로 잘해 나갈 것이고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신임 총독은 저의 좋은 친구입니다. 비록 그는 해군이지만 대범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가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우리의 공무원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이 즉각 일본 정부의 진지한 의도를 충분히 알게 되어 매우 만족하고 최근의 폭동 시위에서 나타난 오래 지속된 불만이 평정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더 이상 폭동이나 폭력은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진정 기대합니다. 선의의 행동이 표출된다면 한국 행정부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새로운 진보적 정책의 실패를 찾고 군사주의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는 반동 정책도 나타나게 될 것인데|| 이는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 결과는 더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이 될 것이고|| 이는 일본인과 한국인 모두에게 비참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영국의 아일랜드와 같은 문제가 일본에도 생기도록 만들 것입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인내심을 갖고 부와 교육이 진보하기를 기다렸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인들은 일본제국하에서 자치 행정부에 적합하도록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5월 10일에 귀하의 집에서 한국에서 온 귀하의 몇몇 친구들과 함께 토론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저는 한국 문제에 대한 제 행동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저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저의 진심을 그들에게도 전해 주시고|| 또 감사하다고도 전해 주십시오.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진지한 마음을 담아||Y. 사카타니(Sakatani)

    174 한국 국민의회(The Korean National Council) 성명서

    작성처: 한국 국민의회(The Korean National Council)우리 한국의 국민들은 손병희를 포함한 33인을 대표로 하여 정의와 인류애를 근거로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선언의 권위를 유지하고, 독립의 기반을 굳건히 하며, 인간의 선천적 필요를 부합하는 관점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집단과 지방 대표를 규합하여 한국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이제 이를 세계에 선언하노라. 우리 한민족은 4천2백여 년의 역사 동안 스스로를 다스려 온 독립된 국가로서 독특하고 창조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우리는 세계 문명의 수혜자와 인류 진화의 공헌자가 될 권리를 주장한다. 특유의 세계적인 영광의 과거와 건강한 국가정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타민족의 비인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학정이나 융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또한 정신적 문명이 우리 보다 2천 년이나 뒤떨어져 있는 일본인들에 의한 물질적 종속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일본이 과거에 맹서한 조약을 위반하고 우리에게서 존재의 권리를 박탈했다는 사실은 전세계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인들이 과거에 저지를 잘못을 논하거나 그들의 축적된 죄악을 주시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우리 존재의 권리 보장, 자유와 평등의 확장, 정의와 인류애의 수호, 동방의 평화 유지, 전세계의 공정한 복리 존중을 위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이것은 진정으로 신의 뜻이며, 진실의 동기이며, 정당한 주장이며, 합법적인 행동이다. 이에 세계의 진실은 승리할 것이며, 일본의 비탄은 앞당겨질 것이다.세계의 평화를 한때 위협하던 군사주의가 굴복하고 세계가 영속적인 평화를 위해 재건되고 있는 이때에 일본만이 자성과 자각을 거부할 것인가? 시대와 자연을 거스른 잘못에 완강하게 매달려 있는 것은 두 민족의 행복을 감소시키고 세계평화를 위험하게 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이 의회는 모든 진심을 다해 일본 정부가 가능한 조속히 비인간적인 침략정책을 버리고 극동의 3각 관계를 굳건히 수호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좀더 정식으로 일본의 국민들에게 경고한다. 우리에게 찾아온 야만적인 일본군사력의 잔악무도한 행위를 인류의 양심이 조용히 지켜볼 수만 있는가? 우리의 행동은 문명 위에 세워진 생명의 권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우리 2천만 명의 피와 헌신은 이렇게 불공정한 탄압하에서 결코 멈추거나 마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이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들의 방법을 스스로 수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최후의 한 사람이 최후의 시간까지 가는 최후의 행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한국은 완전한 독립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정의와 인류애를 향해 전진해 나아가는데 어떠한 적이 방해할 것인가? 우리는 최대의 헌신과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세계 앞에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자주를 요구한다. 한국 국민의회(The Korean National Council)13개 지방의 대표들이만직, 이용규, 강훈, 김려,이내수, 유식규, 김흥선, 김식,박한용, 유장욱, 유근, 추익,박장호, 송지훈, 강지영, 홍승욱,이양준, 이동욱, 장승, 장준,최준구, 김탁, 김현준, 정담구,박탁결의안임시정부를 조직한다.일본 정부에게 그들의 행정부와 군사 조직을 한국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요청서를 작성한다.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대표단을 뽑는다.일본 정부에 고용되어 있는 한국인들은 사직한다.국민들은 일본 정부에 내는 세금을 거부한다. 국민들은 일본 정부에게 청원서나 소송을 제출하지 않는다.

    175 선언

    선언국민의 뜻에 따른 한국 국민의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대표단을 선출하며 임시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다음과 같이 공표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통령 - 이승만국무총리 - 이동휘외무장관 - 박영만내무장관 - 이동영전쟁장관 - 박인로재정장관 - 이시영재정차관 - 한남수법무장관 - 신규식교육장관 - 김규식통신장관 - 장범문노동국 총국장 - 안창호직원 책임자 - 현동율직원 부책임자 - 이세영행정의회구정, 이규풍, 신채호, 손친흥,이범영, 정현식, 손정도, 박은식,박경종, 이규갑, 박찬익, 조성환,현상근, 윤해, 정양필, 한남수,김진용, 현순파리평화회의 대표단이승만, 민찬호, 안창호, 박용만,이동휘, 김규식, 박인로

    176 임시법

    1장. 국가는 공화국으로 한다. 2장. 대표제를 도입한다.3장. 국가의 근본 원리는 권리, 자유의 유지와 세계의 평화, 복리 수호이다. 4장.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다룰 권한을 갖는다.1. 행정부 내부에 속해 있는 모든 사항.2. 외무부 업무에 속해 있는 모든 사항.5장. 한국의 시민은 다음과 같은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1. 세금2. 국방6장. 임시법은 정식 의회가 소집되어 헌법을 채택할 때까지 유효하다.

    177 경찰에 체포된 한국 소녀의 경험

    나와 다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자유를 위해 남대문에서 집회를 연 날은 3월 15일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우리는 붉은색 허리띠와 손에 붉은색 띠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기차역에서 종로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덕수궁 근처에 왔을 때 갑자기 일본인 경찰관이 머리 뒤에서 나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거세게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는 군홧발로 여러 번 나를 찼다. 이에 나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내 머리채를 잡아끌고 서둘러 종로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의 입구에 20명이 넘는 일본인 경찰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나를 차고, 그들의 검으로 때렸다. 그들이 내 얼굴을 여러 번 때려서 나는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떤 경우 그들이 너무 잔인하게 대해서 나는 그들이 나를 때리는 것인지,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참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손과 다리에서는 심하게 피가 났다. 그들의 구타로 인해 전신에 멍이 들었다. 나는 어떤 방으로 끌려갔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다시 전과 같이 잔혹하게 나를 다루었다. 그들은 나를 마루에 집어던졌고, 얼굴을 때렸으며 검으로도 때렸다. 그들은 나를 방의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이때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한다.정신이 돌아오자 나는 내가 다른 젊은 남자 여자들과 함께 한 방에 갇혀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 중 몇 명은 너무도 잔혹하게 다뤄져서 그들이 맞는 것을 보기만 해도 내 가슴은 찢어졌다. 얼마가 지난 후에 우리는 경찰관에 의해 한 명씩 교차 취조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교차 취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쓰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마룻바닥에 앉았다. 각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면 그들이 얼굴을 때리는 것이 이어졌다. 그들은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욕을 하면서 침을 뱉었는데 가장 저질이었다. 그는 “이 창녀야, 천한 것, 임신한 여자!”라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가슴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내가 거절하자 그들은 내 상의를 찢었다. 그리고 나는 온갖 비인간적인 말을 들었는데, 이 때문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내 손가락을 함께 묶어서 갑자기 획 비틀었다. 이것은 마치 내 손가락들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루에 쓰러졌다. 그러자 취조관은 크게 화를 내며 다시 전처럼 꿇어앉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나에게로 달려들어 내 가슴을 쥐고는 거세게 나를 때렸다.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와 비교될 만한 것이 또 있을까. 그리고 나서 그는 말했다. “너는 독립을 원한다. 엉! 터무니없는 생각이지. 감옥에 갇혀 있으면 독립을 얻게 될 것이다. 네 인생은 검에 맞아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내 머리채를 심하게 흔들어 댔다. 그는 내 귀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도 만족이 되지 않았는지, 그는 무자비하게 막대기로 내 머리를 때렸다. 그들은 나에게 팔을 뻗어 무거운 의자를 들고 있게 했다. 떨어뜨리면 회초리로 내 팔꿈치를 때렸다. 그는 다시 내가 무릎을 꿇고 창문 근처에서 전과 같이 의자를 들고 있게 했다. 의자가 밑으로 내려오거나 창문틀에 닿으면 그가 와서 나를 때렸다. 이런 식으로 약 한 시간 이상이 흘렀고, 계단으로 내려가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나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뒤쫓던 직업 밀정꾼 한 명의 도움을 받고도 힘겹게 마룻바닥을 기었다. 나는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첫 걸음을 내디디자 나의 기력은 완전히 없어져서 계단 끝까지 굴러 버렸다.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나는 방으로 기어서 들어가야 했다. 그 방을 담당하고 있던 경찰관은 내가 방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보며 매우 즐거워했다. 그는 나의 비참한 광경을 보고는 크게 비웃었다. 그러자 나는 기도했고, 예수님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많은 위안을 얻게 되었다. 나는 이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위안에 감사한다. 나는 경찰서에서 모두 닷새 동안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벌거벗겨졌고, 남자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 옷을 입어도 좋다는 명령을 받고 방으로 인도되었다. 내 힘이 닿지 않을 만큼 나는 비웃음을 당했고, 욕을 먹었다. 이 방에는 나와 비슷한 16명의 사람이 갇혀 있었다. 방은 크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는 서로 비좁게 있었다. 변기는 돼지우리처럼 방안에 있었다. 그 방은 너무도 더러워서 심지어 돼지도 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콩과 소금을 먹으라고 주었다.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때때로 간수가 우리를 쳐다보고는 온갖 욕을 해댔다. “이 개들아, 돼지들아”라면서 말이다. 이튿날 경찰 의사가 방문하여 몇 명이 와서는 완전히 나체로 된 나의 몸무게를 쟀다. 그들 역시 나를 비웃었고, 나에게 침을 뱉었다. 때때로 간수는 나에게 공개적으로 재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를 무척 위안으로 삼고 기다렸는데, 왜냐하면 그때 내 사건을 모두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 재판도 받지 않고 또한 내가 당한 모욕의 성질이나 합법적 모욕이 있었다는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풀려났다.

    178 한국인들이 상점을 다시 열고 장사를 재개하게 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

    4월 1일 일본인 경찰관과 형사가 나의 집으로 와서 주인을 보자고 했다. 나는 이 집의 주인은 시골에 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주인에게 전보를 쳐서 경찰이 보자 한다고 전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지방 경찰 사무소까지 그들과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들에게 곧 뒤따라가겠으니 먼저 가라고 했다. 이에 그들은 “우리와 함께 가야만 한다”고 대답했다.파출소에 도착하자 경찰관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여 주인은 출타중이고 고용인 가운데 한 명을 데려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됐냐고 물었다. 대답은 “그렇다”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들과 함께 지방 경찰 사무소로 연행되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많은 사업가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공지를 배부받고, 이를 주의 깊게 읽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우리에게 말하길 우리는 법을 어겼으며, 한 달 동안 가게문을 닫은 것은 매우 나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헌데 이러한 특별 용서를 받았는데도 다시 가게문을 열지 않는다면 우리는 법에 의해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서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귀하께서 부디 저희를 돕고 또한 보호해 주신다면 우리는 즉시 우리의 가게를 열겠습니다.” 이 문서에 서명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풀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사람들이 서명을 했다.한 첩자가 나와 함께 우리 가게까지 따라와서는 가게문을 열지 않으면 다시 경찰서로 데려 가겠다고 나를 위협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열었다. 얼마 안 되어 한 명의 일본인 첩자와 한 명의 한국인 첩자가 와서 문 닫을 시간까지 가게 주위에 머물렀다. 1919년 4월 2일 나는 아침 늦게까지 가게에 나가지 않았다. 내가 도착해 보니 자물쇠는 비틀려져 있고, 꺾쇠도 부서져서 문을 열 수 있었다. 가게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인 경찰이 내게로 와 나에게 구리개(Kurikai)에 있는 파출소에 보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경찰관과 함께 갔는데, 주인님의 아들이 우리와 동행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왜 가게문을 일찍 열지 않았냐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특별한 일이 생겨서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 일본인 경찰은 내 얼굴을 쳤다. 주인님의 아들도 아주 빈번하게 맞았다. 나는 몇 번만 맞았다. 파출소에 있던 경찰 한 명이 종이에 글을 썼다. “나는 아침 8시에 가게문을 열겠다고 맹세합니다.” 나는 이 종이에 지장을 찍었다. 4월 3일 나는 오전 9시에 가게에 나와서 문을 열었다. 곧 경찰관이 와서 말했다. “왜 약속한 대로 아침 8시에 열지 않았는가?” 나는 몇 가지 변명을 했다. 다시 파출소에 같이 가게 되었다. 또 한번 나는 꾸지람을 들었으나 맞지는 않았다. 경찰관은 나에게 늦어도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에 가게문을 열도록 허가받았다는 또 다른 진술을 써야 한다고 했다. 4월 4일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에 가게문을 열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179 한국의 현 소요사태의 기저에 깔린 몇 가지 이유

    다음의 서류는 한국의 현 소요사태의 가장 중요한 잠재적 원인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간략한 진술이다. 여기에 나온 모든 이유는 선언문, 청원서, 한국에서 발행된 통문 등의 형식을 통해 이미 보여진 것이고, 한국인들이 주장을 했던 바이다. 이 진술은 일본과 한국의 친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보이는 것들만을 담았다. 평화 회의의 결과 ‘민족자결주의’ 사상의 확산, 외국에 있는 한국인들의 활동, 한국 전 황제의 죽음 등이 관련되었다는데, 이런 소문은 이번 봉기의 촉발 요인은 아니라는 것 또한 말해야 하겠다. I. 독립의 열망타민족과의 동화는 아무리 잘해도 힘든 일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특히 이 경우 단일 민족으로서 한국민은 진심으로 합병에 찬성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힘들었다.II. 군사정부의 가혹함한국인들은 문관 행정부의 통치를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제국 정부에 대한 그들의 전체적 생각은 군사통치의 경험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1. 합법적 행정부 내에서 헌병과 군인으로 경찰을 조직하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경찰을 두려워하고 그들을 공무원이나 보호자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압제자로 생각한다. 2. 이러한 인상은 법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 거칠고 획일적인 방법으로 했기 때문에 더 깊어졌다. 1918년 7월 총독에 의해 발행된 보고서에 의하면(이 보고서는 1916년부터 1917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경찰의 약식 재판’에서 다루어진 82,121건의 죄인 가운데 952명이 사면되었고, 81,139명은 실형을 받았다. 오직 30명만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 선천적으로 평화롭고 유순한 사람들이 지속적인 테러의 상태에서 살게 된 것이다. 3. 밀정을 두는 제도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더 위협을 받았다. 대개 낮은 계층의 한국인 밀정은 어느 곳에나 있다. 언제 혹은 어떤 형식으로 유해하지 않은 행동이나 말을 당국에 보고할지 아무도 모른다. 4. 체포된 사람을 취급하는 태도는 두려움과 경찰에 대한 증오를 더하게 한다.5. 모든 경우에 무력을 보이기 때문에 자극을 더 받게 되었다. 공무원들은 초등학교 교사조차도 착검을 하고 있다.6. 이 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행정이 (역주: 한 줄 잘렸음) 하다고 믿게 했다. III. 국민성 박탈1. 한국인들은 별개의 역사, 전통, 이상, 윤리, 관습을 가진 별개의 민족이다. 현 행정부는 한국의 전통적인 많은 것을 없애고 그 자리에 새롭고 낯선 것을 대치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충성을 얻으려는 체계적인 시도는 없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바꾸려는 시도만 있는 듯하다.2. 학교, 법정, 공문서에서 한국어를 없애 버린 것은 그들을 자극한 커다란 원인이다. 언어의 문제는 정부의 문제를 대표한다고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현 정책이 한국인의 가슴에 미치는 영향은 최소화될 수 없다.3. 학교 교육체계에서 한국 역사를 제외시킨 것도 자극의 원인이다. 한국인들은 한국 역사 과목의 존재는 그 중요성이 보장하는 것만큼 충분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다고 느끼고 있다.IV. 한국인들은 그들의 정부뿐만 아니라 입법부과 사법부에서 아무런 실제적 몫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보장할 아무런 희망도 그들에게는 없다.1. 몇몇 한국인들은 관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개 중요하지 않은 자리이고, 만약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흔히 낮은 등급의 일본인들에게 좌지우지될 수 있다.2. 한국인 학생들에게는 일본인들보다 낮은 교육이 제공되기 때문에 미래에도 경쟁력을 갖추어서 이런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보장이나 희망이 없게 된다.V. 한국인에 대한 차별1. 정부 기관, 기업체,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해도 봉급에 차별이 있다.2. 공립학교에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은 교육 과정이 다르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교육 과정이 2, 3년 짧다. 모든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영어에 있어서도 일본인들은 5년 동안 일주일에 4일간 배우는데, 한국인들은 2년 동안 일주일에 2시간만 배울 뿐이다. 교육제도에 있어서 정부는 이와 같은 차이를 설명하면서 아직까지 충분한 과정을 제공하는데 정부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에 매우 고초를 겪고 있고, 그리하여 분노를 하고 있다.3. 태형은 한국인에게만 법적으로 집행된다.4. 다른 많은 분명한 작은 일에서도 차별이 있다. 작은 일이지만 이는 분명히 문제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기차 승무원이나 아카보(akabo)로는 거의 고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인 인력거꾼은 기차역에서 가장 좋은 위치를 제공받는다. VI. 말할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가 없음.(한국인 기독교인들은 영성적 전도집회에서 기도 소리가 들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당국은 그 집회는 정치적 집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VII. 제한된 종교적 자유1. 정부의 개정교육법령에 의해 사립학교에서 종교는 가르칠 수 없다. 이 법령은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간에 차이는 인정하지 않는다. 2. 기독 신앙의 경우 1915년 3월 이후로 개교한 사립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 1915년 이후 세워진 학교는 모두 다 그렇다.3. 한국인들의 양심에 위반되는 듯한 의식(儀式)이 요구된다. 4. 지방 관료들은 기독교인이나 앞으로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협박한다. 이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방해하려 하는 듯 보인다.VIII. 한국인들의 해외유학과 여행을 실질적으로 금지1. 한국인들은 일본의 번영이 대부분 메이지 유신 초기부터 외국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발전을 위해 같은 기회를 갖고 싶어한다. 몇몇 특별 호의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인들은 해외에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또한 해외에서 공부를 한 사람은 귀국이 허락되지 않는다. 2. 일본에서 공부를 한 한국인들조차 한국으로 돌아오면 경찰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고, 이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제대로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IX. 국왕 소유지의 몰수한국인들은 몇 세대에 걸쳐 적당한 토지임대료를 내고 한국 국왕 소유지의 많은 부분을 소유 경작해 왔다. 많은 경우 이러한 토지의 임차권은 토지의 전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가치를 지녔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는 많은 경우 동양척식회사로 인계되고, 이전의 소유자들에게 엄청난 임대료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그들은 일본인 정착민을 지원하는 정부의 뜻대로 이 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X. 새롭게 도입된 풍속문란의 영향1. 모든 도시와 소도시에서 공창이 허용되어 이러한 풍속문란한 일이 사람들에게 더 개방되고, 더 쉽게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더욱 확산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풍속문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2. 모르핀 주사가 계속적으로 판매되고, 많은 지역에서 금지사항이 아니다. XI. 만주로의 강제 이주일본 농부들이 한국 중남부 지방으로 대규모 이주해 오고, 또 그들이 불공정하게 안전한 토지를 소유하는 바람에 수천 명의 한국인들은 덜 개발되고 덜 좋은 만주로 이주해야만 하게 되었다. XII. 발전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쪽은 한국인이기보다는 일본인이다.1. 산업이 발전해도, 즉 벌채산업이 대규모로 발전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아무런 추가 이득이 없었다. 오히려 목재의 값은 예전보다 더 올랐다. 2. 상업 발달도 소용없다. 한국인 상인들은 근대의 상업 훈련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본인 상인과의 무한대 경쟁에서 버티기 힘들다.3. 많은 경우 허가받은 독점기업들로 인해 한국인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이에 분개를 한다. 즉 대구(Taiku)의 면화 독점과 (보이지 않음)의 비료 독점이 그렇다.

    180 교차참조문서

    파일번호: 1769주제: (수기로 씌어져 있어서 읽기 힘듦)파일번호: 21-62블랑슈 L. 스티븐스(Blanche L. Stevens) 씨의 편지날짜: 1919년 5월 20일 (이후의 수기는 읽기 힘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