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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61 세브란스 병원에서 있었던 부상당한 한국인의 이야기

    작성일: 1919-04-011919년 4월 1~5일작성처: 면담자: F. G. 베시(F. G. Vesey) 목사1. 송시웅(Song Si Ung). 포천 사람으로 마흔일곱 살이다. 첫번째 시리즈의 16번에 언급된 사람과 동일한 증언을 했다. 두개골 윗부분에 총을 맞았다. 입원 후 바로 루드로우(Ludlow) 박사가 탄환을 추출했다. 종교는 없다. 2. 이성명(Syung Myeng Ri). 덕산(Duksan) 사람으로 서른두 살이다. 다리에 총알을 맞았고, 루드로우(Ludlow) 박사가 수술을 집도했다. 이 사람은 정상적인 감각이 없었으므로 세부 사항에 대한 조사를 하지 못했다. 위의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의 일부였다. 종교는 없다.3. 산선난(San Syen Nan). 포천군 산면 선달리 사람으로 스물일곱 살이다. 솔무 장날에 장에 갔다가 2백여 명의 사람들과 ‘만세’를 불렀다. 헌병들이 나와 군중들에게 장에서 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위협했으나 군중들은 계속 만세를 불렀다. 군중들은 막대기나 돌을 지니지 않았고, 폭력 행위를 하지도 않았다. 한국인 헌병들은 공중에 발포했으나 일본인 헌병들은 군중에 발포했다. 9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이 사람은 다리에 총을 맞고, 겨우 몰래 세브란스까지 도착했다. 종교는 없다.4. 박윤낙(Pak Yun Nak). 고양군 지토면 도당리 사면교회 신자로 스물다섯 살이다. 마을의 모든 주민들과 다른 마을 사람들이 3월말에 모여 평화롭게 ‘만세’를 부르며 마을에서 행진했다. 그 후 기마 헌병이 서울에서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만세를 중지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했고, 그날은 아무런 폭력사태도 없었다. 5일 후 서울에서 많은 수의 헌병이 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5일 전 ‘만세’ 사건에 동참한 사람이 있는지 탐문하고 다녔다. 이 사람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의 명령에 중지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라고 대답했다. 이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왔다. 총독부(그는 감옥은 아니었다고 말함)에서 그와 다른 사람들은 끌려 나와 채찍질을 당했다. 나는 그의 몸에 난 상처를 보았다. 그는 모두 60대를 맞았는데, 12시에 30대, 2시에 30대를 맞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이 당했다. 그는 지금 입원을 기다리며 병원에 있다.아래의 젊은이들도 같은 증언을 했다.5. 정흥봉(Chung Hung Pong), 열여섯 살6. 이전세(Ri Chun Sai), 스물한 살7. 장오상(Chang OO Sang), 스물네 살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왔다. 채찍질을 당한 후 온 힘을 다해 집으로 돌아왔다.8. 박차교(Pak Cha Kwo). 이천읍 이청문(Ri Chung Moon) 읍내면 방고리(Pang Ko Ri) 사람으로 마흔한 살이다. 4월 3일 병원에 도착했다. 목에 심각한 총상을 입었다. 즉시 병원에 입원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쳤다. 수많은 군중이 모였지만 폭력은 없었다. 저녁 무렵 일본인 헌병이 덮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부상당했다. 이 사람은 목의 상처가 심각했기 때문에 많은 증언을 하지 못했다. 그는 말도 겨우 할 수 있을 정도였다.9. 김금동(Kim Kum Tung). 충청도 사람으로 열다섯 살(서양 나이로는 열세 살) 소년이다. 아버지 등에 업혀서 병원에 왔다. 허벅지와 팔뚝에 총상을 입었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작은 마을 사람들은 4월 1일 저녁 밖으로 나와 독립만세를 불렀다. 자정 무렵 언덕에서 총성이 들렸다. 비명 소리가 나기 시작하였으나 폭력은 없었다. 이윽고 8명의 일본인 헌병이 나타나 20명의 남자와 소년들에게 발포했다. 그 결과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을 당했다.10. 방충호(Pang Choong Ho). 위의 소년과 같은 마을에 살며 스물다섯 살이다.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며 위와 같은 증언을 했다. 그의 남동생인 방신식(Pung Sin Sik)(스물한 살)은 다리와 팔에 여러 군데 총상을 입었다. 그의 형은 사망했다.11. 박성군(Pak Syung Koon). 위의 소년과 같은 마을 사람으로 마흔네 살이다. 그는 총성이 오간 상황에 대해 위와 동일한 설명을 했다. 이 사람은 비비탄(B. B. Shot)에 맞았다. 그는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12. 이복윤(Ri Pok Yun). 수원 사람으로 스물여섯 살이다. 3월 31일 300~350명의 마을 사람들과 이웃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중에 합류하여 마을을 통과하여 면소재지(면사무소)가 있는 곳까지 행진을 했다. 면장도 그들과 같이 있었다. 그들이 경찰서에 당도했을 때 책임을 맡고 있는 한국인 경찰관이 나와서 “나는 정부에 고용되어 있고 경찰복을 입고 있는 경찰이기 때문에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없소.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여러분들과 같소. 계속하시오. ‘만세’라고 외치시오. 나는 우리가 독립할 수 있기를 희망하오”라고 말했다. 얼마 있지 않아 갑자기 3명의 일본인 군인이 나와서 그들에게 발포하여 두 명이 부상당했고, 그들은 쓰러졌다. 다른 시위자들은 도망갔으나, 그들의 이웃 두 명이 부상당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4, 50명의 사람들이 돌아왔다. 이 사람들은 위협을 받고 즉각 체포되어 함께 묶여서 수원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이틀을 지내면서 수색당하고 취조를 받았다. 50대에서 90대 정도 매질을 당했다. 그런 다음 부상당한 두 명과 함께 귀가했다. 이때 일본인 의사가 부상당한 사람들을 보고 환자의 다리를 묶어 놓았다. 총상이었기 때문에 면으로 묶었다. 그는 4월 4일 세브란스로 왔다. 군중들은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단언했고, 단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162 프랑스 영사와 인터뷰한 내용이라 추정되는 문서의 번역문

    작성처: 게이조 니포(Keijo Nippo)“다시 생업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 이러한 무분별한 행동은 유치한 장난과 같다.”프랑스 영사 갈루아(Gallois)의 말.국왕의 장례식 날부터 나는 감기로 꼼짝도 못하고 집에 있었다. 그래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건물과 병원, 특정 국가의 교회가 보고한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진술서가 작성되었고, 그 결과 몇 가지 귀중하지만 매우 불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의 소동은 마치 유치한 장난과도 같다. 독립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나는 이 나라가 예전에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그러나 한국은 합병 이후로 크게 이득을 봤으며 번성하고 있다. 또한 국가의 부도 향상되었다. 나는 반란자들이 그들의 악몽에서 깨어나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현재 독립이 언급되고 있지만, 실제적인 힘이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1년도 지나기 전에 소멸할 것이다. 이 소동이 일어나던 초반기에 불량한 한국인 다수가 공사관 건물로 찾아와 나에게 만세를 부르자고 선동했다. 나는 이것을 거절하고는 그럴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163 갈루아가 게이조 니포의 편집인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21발신주소: 프랑스 부영사|| 서울발신자: E. 갈루아(Gallois)수신자: 게이조 니포(Keijo Nippo)의 편집인선생님||귀하의 존경할 만한 신문에 다음과 같은 수정 기사를 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귀 신문사의 기자와 한 19일자에 실렸던 인터뷰에 관한 것입니다. 귀 신문사의 기자는 독자들이 보기에 제가 한국의 내부 문제에 대해 제 의견을 표현했다고 믿도록 제가 말한 것으로 기사를 썼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 직접적으로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기자는 제가 외국 영사에게서 예상되는 엄중한 중립에서 벗어났다고 한시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신중하게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일본에 부임하는 신임 프랑스 대사에 대한 이야기만을 했습니다.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E. 갈루아(Gallois)

    164 청원서

    작성처: 자작 김윤식(Kim Yoon Sik), 이용직(Yi Yong Jik)어떤 일을 하는 방법이 시대에 맞아야만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고, 정부는 그 국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만 성공한 정부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 그 시대에 맞지 않다면 그것은 완전한 방법이라 할 수 없고, 정부가 그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면 그 정부는 좋은 정부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이제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결과 과거의 악습이 근절되는 등 국민에게 있어서 적지 않은 이익이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들이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오늘날 독립이 외침이 거리에 울려 퍼지자 1만 명의 목소리가 이에 대답했습니다. 거의 열흘 동안 전국에 그 메아리가 울렸고, 심지어 여자들과 아이들까지도 이 외침에 동참하기 위해 앞을 다투었습니다. 앞줄에 선 사람들이 쓰러져도 다른 사람들이 진심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사람들은 고통과 숨막힐 것 같은 분노를 참고 있다가 곧 터질 것 같고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할 지경이 되자 마침내 표현을 해버리게 되었고, 범람하는 황하처럼 그 물결은 모든 경계를 부순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되자 그 힘은 걷잡을 수 없는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국민들의 표현이라고 부르지만 오히려 신의 뜻이 아니었을까요?작금의 상황을 처리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연화책이고, 다른 하나는 강경책입니다. 관대한 방법이라는 것은 친절하게 말하고, 진정시키고, 위로를 하여 두려움과 의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시위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무력 사용은 쓰러뜨리고, 뿌리째 뽑아 내고, 부서질 때까지 두들겨서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하면 오히려 더 독립운동을 고무시키고 그 정신을 꺾지 못할 것입니다.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현재 분기한 사람들은 한때 자신들의 소유였던 것을 되찾고 싶어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끄러운 노예상태를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들은 맨손과 자신들이 느끼는 분노를 말할 혓바닥밖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의 생각에 사악한 동기가 깔려 있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선하고 수준 높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에 동정을 하고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상황을 애정을 갖고 공감하여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가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체포하여 감옥을 채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곳에 잡혀간 사람들은 채찍질당하고, 맞고, 고문을 당하고 그러다가 비명횡사를 한다고도 합니다. 또한 정부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사용하여 점점 사람들은 죽어 가고, 우리는 이러한 끔찍한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상황은 더욱 심해지기만 하고, 무력을 투입하면 할수록 소동도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어떻게 문제가 일어나게 된 원인은 보지 않고 무력으로 그 징후만 없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분기한 사람들을 아무리 쓰러뜨리고 죽인다 할지라도 사건의 표면만 변화할 뿐 그 본질은 결코 변화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에 ‘독립’이라는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방안에서 조용하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의 숫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까지 체포하여 죽일 수 있겠습니까?사람의 목숨은 길가에 자라는 잡초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맹자가 제 나라의 순 임금에게 말하기를 “폐하가 연나라를 취하여 연나라 백성이 행복해진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하여 백성들을 비참한 상태로 만들게 된다면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맹자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은 모르는 척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마침내 스스로 크게 부끄럽다고 말할 지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진정 한 번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역사의 거울입니다. 현자조차도 그가 살았던 시대에 맞춰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게 되면 그들의 영토도 소유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국의 신하인 우리는 이러한 위험과 어려움의 시대를 맞아 교활하고 부끄러움도 없이 우리나라가 병합될 당시 우리는 귀족 작위와 관직을 받고 치욕스럽게 살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순진무구한 국민들이 온갖 괴로움 속에서 사는 모습을 더 이상 눈앞에서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고로 우리 역시 방안에서 몰래 다른 사람들처럼 ‘독립’을 외쳤습니다. 우리는 무례함을 무릅쓰고 떳떳하게 진심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각하께서 이로써 상황을 잘 이해하여 천황폐하께 보고를 하고, 그리하여 각료들이 이 상황을 고려하여 원인을 바로잡기를 희망합니다. 단순히 듣기에 좋은 말이나 무력으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바라는 소망에 제발 맞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한국을 독립하게 해주고, 조약을 맺고 있는 나라들을 포함하여 전세계가 일본의 공정함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모든 나라들은 이를 칭송할 것이고, 일식 때의 해와 달처럼 일본은 다시 빛을 되찾고 그 앞날은 빛날 것입니다. 일본이 이렇게 한다면 누가 칭송과 칭찬을 하지 않겠습니까?우리는 제국의 신하로서 문을 닫고 그 뒤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인심을 알지 못하고서 우리 불쌍한 나무꾼들의 결심을 국가에 제출하는 바입니다. 만약 제국이 여기에 동의한다면 셀 수 없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한다면 우리 두 명이 고초를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인생을 거의 다 살았고, 그러니 우리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죽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오래되고 힘없는 방안에서 기거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설득력 있게 말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각하께서 우리의 탄원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기원합니다.여기에 적은 말들은 우리의 진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165 청원서

    하세가와(Hasegawa) 백작 각하께,우리의 충심을 담아 이 청원서를 각하께 올립니다. 3월 1일 한국 국민을 대표하여 33인이 서명한 선언서는 몇 사람의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며 그 정신을 표현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도 인정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 33인의 대표는 한국의 2천만을 대신하여 그것을 말했고, 그들의 요구와 희망을 알린 것입니다. 우리는 각하께서 이 점을 염두에 두시고, 우리가 과거 세대의 한국인들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임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과 문명의 개화된 방법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정신은 우리를 움직였고, 우리가 요구한 권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문명은 우리를 고무하고 있으며 이러한 우리 생각의 책임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 국민의 요구인 한국의 독립은 하나님의 선의와 시대의 흐름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권리와도 일치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각하께서는 독립의 요구가 한국뿐만 아니라 극동 전체의 평화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칠 것임을 인지하시길 바랍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을 병합할 때 전세계에 어떻게 발표했습니까? 그 발표에서 한국은 군사력에 무기력하여 양쪽의 더 큰 나라에 휘둘리고 있고 따라서 아시아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각하께서 이 점을 신중하게 생각하시길 기원합니다.세계 역사의 새로운 시대는 군국주의가 진리와 인간성을 파멸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힘의 법칙은 사라졌고 평화와 진리의 시대가 앞에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우리는 한 나라로서 우리의 개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자치의 권리에 입각하여 우리의 주장을 하는 것이고, 인간성에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독립선언에 올바르지 않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어디 있습니까? 극동의 평화가 한국의 독립에 달려 있다는 것이 거의 분명하게 진실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은지 중국에 물어 보십시오. 러시아에도 물어 보십시오. 전세계에 물어 보십시오. 이들 가운데 누구라도 이러한 가정이 옳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각하께서 훌륭하시고 개화된 분이시며, 최고의 현명함을 갖추고 계시다면, 이것을 가볍고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시지 마시고, 그만두게 하라고 단순하게 명령하지 마시기를 저희는 기원합니다. 확신하건대 우리의 뒤에는 2천만 명의 한국인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목적과 주장을 지원할 생각이 샘물처럼 솟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전혀 털끝만큼도 무기나 무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정의와 인류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하여 목적한 바를 달성할 것입니다.만약 각하께서 군사력을 가지고 작금의 우리의 진실과 인류애의 샘물을 멈추게 하려 한다면 귀하의 개화된 정신을 반영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본의 명예와 위엄의 반영도 분명히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각하께서 우리가 진심으로 요구하는 바를 겸손하게 고려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선언서의 대표인 11명의 한국인 서명)

    166 존 F. Yeuso가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15발신주소: 한국 서울발신자: 존 F. Yeuso) 수신자: 신학박사 A. J. 브라운(Brown) 수신주소: 뉴욕 시 5번 가 156번지브라운 박사께||얼마 전에 캐나다 위원회(Canadian Board)의 서기인 암스트롱(Armstrong) 씨께서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캐나다로 돌아가셨는데|| 현재 이곳에서 벌어진 문제로 인해 전보를 받고 내일 다시 서울에 도착하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박사님께 이곳의 정보를 보내 드리고 싶어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분께 편지를 보내 그분이 미국에 당도하면 이 편지를 박사님께 붙여 주시라고 하겠습니다. 총영사인 레오 버골즈(Leo Bergholz) 씨께서 이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전체 보고를 국무성에 보냈을 것이고|| 틀림없이 박사님께서도 워싱턴으로부터 공식 정보를 받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자면 우리 미국 총영사님께서 이번에 우리에게 큰 도움과 위안이 되어 주셨습니다.여기에 독립선언서 번역본을 동봉하고 또한 조직위원회(the Organizing Committee)의 ‘고충’에 대한 내용도 동봉합니다. 이후의 서류에 많은 다른 항목을 덧붙일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 다수의 의견입니다. 어느 시기에 상황은 지나칠 정도로 긴장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에 대해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굉장한 소요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우리와 가까운 한국인들은 지혜롭게 이러한 분위기가 어떤지 말해 주지 않음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정부 당국에 의해 선교단이 주목받을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우리에게 그들의 계획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한국인들은 훌륭한 위원회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결되어 있고|| 이 프로그램은 북쪽 끝 지방에서 남동쪽 끝 지방까지 동시에 수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당국도 똑같이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당국에서는 이 상황을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가능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광범위한 조직과 일치된 행동이 증명되었고|| 또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한국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이 이 운동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 신문처럼 위원회에서는 매일같이 게시물을 발간하여 어떠한 폭력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왜냐하면 폭력은 그들의 목적을 좌절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일어난 시위를 보았는데|| 이러한 생각은 믿음직스럽게 지켜졌습니다. 제 일기장에서 뽑은 몇 개의 기록입니다.3월 1일 나는 오후 2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집밖으로 한 걸음 나서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도심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나는 시내 서쪽 편으로 가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른 것은 보지 못했다. 나는 사업차 캐나다 태평양 사무소에 갔다. 그곳에서 궁궐 근처에서 바로 소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원은 그의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두 블록쯤 떨어진 미국 공사관 인근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그 근처에 도착하자 대부분 학생으로 구성된 5백 명 정도의 군중이 뛰어다니고 그들의 모자를 던지며 ‘만세’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만세’는 우리가 환호하는 것과 똑같다. 그들은 우리 옆을 지나쳐 갔다. 우리가 본 것은 입을 벌려 크게 ‘만세’라고 소리치며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감리교 여학교 교정으로 들어가서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다른 공사관으로 떠났다. 이 시위는 국립고등공민학교 옆에 있는 탑골공원에서 시작되었는데|| 내가 집을 떠날 때 그렇게 들었다. 승하한 국왕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도심 안에는 5만 명에서 1백만 명의 방문자가 있었다.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몇 분간 곡을 했고|| 수천 명은 행진하고 구호를 외쳤다. 나는 수많은 국립학교 여학생들이 한쪽 편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학생들이 먼저 외치면 군중이 그들을 따라 외쳤다. 아무도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한국인들은 총기를 소지할 수 없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그들은 매우 질서정연했다. 이 시위는 그렇게 계획되었다. 오후 내내 이렇게 계속되었다. 나는 YMCA 반대편에 있는 집단주택(Tract House)으로 갔는데|| YMCA 건물을 정부 당국이 폐쇄하였기 때문에 외국인 서기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검색을 받고 있었다.집으로 가기 위해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몇 대의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갔다. 나는 그 차에 경찰의 포위를 받은 한국인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 차가 지나가자 한 한국인이 경찰에 기댄 채 영어로 외쳤다. “굿바이--만세!” 그는 세브란스에서 영업부에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행복한 듯 보였다. 그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들은 15명이 기독교인이고|| 15명은 비기독교인이며 3명은 불교도인데|| 한 건물에 모여서 경찰에 알리고 체포되었다. 처음에 경찰은 그들에게 경찰서까지 걸어서 가라고 했는데|| 그들은 불편하니 자동차를 태워서 데려가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독립선언서는 아주 어려운 글로 되어 있어서 우리의 가장 훌륭한 통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가 다뤘던 것 중 가장 번역하기 힘든 것이었다고 했다. 우리의 지도적 기독교 목사들도 이 문서에 서명을 했다. 평양의 시각장애인인 길 목사와 선천의 양 목사 등이다. 그들은 서명을 하기 전에 수일간 단식기도를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한 경찰관이 선언문 한 부를 우리 조수 가운데 한 명에게 주었다. 조수가 그 경찰에게 이것을 당신의 대장에게 갖다 주어 상을 타지 그러느냐고 하자 그 경찰관은 자기도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모두가 들어갈 방이 없어서 그들은 현관문 옆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쓰고 몇 대 맞고|| 뒷문으로 나왔다.3월 2일 일요일은 매우 조용했다. 많은 군인들이 총과 총검을 들고 거리를 지켰다.3월 3일 월요일은 고종 황제의 국상이 있는 날이었다. 장례 행렬은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거행될 예정이었다. 주요 구역은 참석자의 99%가 일본인으로 한 길로 행진하는 것이고|| 다른 구역은 100%가 한국인들로 국왕이 시신이 지나가는 동대문으로 가는 주요 도로에서 다섯 블록이나 떨어진 길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관가(棺架)는 일본인 구역에 있었고|| 시내의 학생들은 함께 행진해야 했고|| 일본인 구역이 보이는 지정된 장소에 있어야 했다. 학생들은 이 계획을 듣고|| 가는 것을 거절했다. 나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형식부터 사상까지 그들의 관습에 맞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한국인 구역을 볼 수 있는 계획은 없었다. 당국은 이것을 듣고 우리에게 말하길 학생들이 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두 명의 선생이 가야 한다고 했다. 루이스(Lewis) 양이 병이 난 이후 젠소(Genso) 부인이 여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함께 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무도 가지 않았다. 우리는 오전 7시 20분에 집을 떠났다. 행렬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다. 경찰 간부들을 태운 자동차|| 기마병|| 해병|| 육군|| 신사 사제|| 황제의 장식물||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운반하는 관가(棺架)|| 황족|| 공무원들|| 특별초대손님|| 육군|| 공군|| 경찰 순이었다. 7천 명 정도의 행렬에서 한국인은 5백 명 이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국인 구역을 보았는데|| 화려한 만장과 깃발|| 영혼의 의자|| 가짜 관가(棺架)|| 조객 등이 있었다. 이전의 구역을 본 한국인들은 별로 없었는데|| 모든 사람들은 이 한국인 구역을 보기 위해 나와 있었다.화요일은 조용했다. 3월 5일 수요일 나는 앞으로 결코 잊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오전 9시 세브란스 의과대학 앞에서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두 명의 학생들이 인력거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역에 거의 당도하자 깃발을 꺼내 외쳤다. 그들은 역에 당도했고|| 뒤돌아 남대문을 향해 돌아왔는데||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며 외쳤다.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 학생들은 학생 교복을 입고|| 군중의 선두에 서서 깃발을 흔들었는데|| 남대문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잘 알고 있었다. 경찰은 이 비무장한 군중을 마주하고는 무자비하게 곤봉을 내리쳤다.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붕대를 감기 위해 우리 약국으로 실려 왔고|| 그들 가운데 몇 명은 병원으로 갔다. 한 소년은 두개골에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의사가 그의 상처 부위를 꿰맬 때 마취도 받지 않았다. 위아래로 뛰어서 밀정이 군중 속으로 들어왔고|| 학생의 코트에 표시를 하여 결국 이들은 체포되었다. 이들은 왕궁으로 가려 했고|| 같은 시간에 비슷한 무리의 사람들이 시내의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왕궁에서 만나기로 했다.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나는 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B&F 성경협회(B&F Bible Society)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1백여 명의 사람들이 경찰에 의해 끌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 가운데 80명은 열네 살 가량의 어린 여학생들이었다. 외국인들은 일본인들이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고 때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보복은 없었다.그날 저녁 우리 학교의 여학생 몇 명이 사라졌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 찾으러 경찰서를 순회했다. 우리는 없어진 8명 가운데 6명이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여학생들은 아무도 풀려나지 않았는데|| 책임을 지고 있는 경관이 말하기를 그들은 여전히 독립을 원한다고 주장할 만큼 열성적이라고 했다. 젠소(Genso) 부인은 수건|| 빗|| 비누|| 칫솔 등의 물건을 감옥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당국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군인들이 철통같이 거리를 지켰다. 다음날 밤 그들은 1백 야드마다 배치되어 있었다.한국인들은 모두 이 운동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상점 주인들은 일주일간 상점 문을 닫았다. 볼 수 있는 길 양쪽의 모든 상점이 문을 걸어 잠갔다. 경찰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매일 아침 그들은 문을 두드리며 상점을 열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게 비무장한 사람들에 의한 질서 있고 조용하며 수동적인 시위는 정부 당국의 신경을 자극했다. 전차는 수일 동안 운행하지 않았다. 전차를 타는 사람은 조롱을 당했다. 한 곳에서는 경찰이 그들의 모자|| 코트|| 칼 그리고 바지를 벗고 자신의 대장에게 “이것들과 월급 7달러를 가지고 가시오”라고 말하고는 군중들에게 섞여 속옷을 입은 채로 행진을 했다.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선천 지부의 로버츠(Roberts) 씨는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체포되어 거리를 지나 군인들과 함께 경찰서까지 걸어갔지만 곧 풀려났습니다.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우리 선교단 앞에 서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총으로 평양에 있는 여자 선교사들 두 명의 등을 때렸습니다. 평양에 있는 목사들은 모두 감옥에 있고|| 서울은 한 명 빼놓고 모두 감옥에 있습니다.이곳 서울에서는 군인들이 밤중에도 사람들을 협박하기 위해 총을 쏘면서 다닙니다. 낮에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멈춰 서서 독립과 관련된 문건을 가지고 다니는지 검문을 당합니다. 한국의 신문과 일본의 신문은 이 모든 일에 대해 선교단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서울과 평양에서는 국립학교의 학생들이 먼저 독립 시위를 시작했습니다.우리는 서울에 있어서 매우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의 상황은 끔찍했습니다. 군국주의가 이미 광폭한 도를 넘어섰습니다.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250명이나 되는 남녀가 살해당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폭행이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들어가 가구를 던지고 성경과 찬송가책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독일군이 벨기에에서 저질렀던 악행을 아무것이나 뽑아 독일군 자리에 일본군을 대입시키면 이곳에서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계에는 아직 민주주의가 안전하게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한 한국인이 나에게 말하길 “윌슨 대통령은 독일을 죽였지만|| 독일의 자식은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위의 보고는 북쪽에서 온 것이고|| 그곳에 있는 우리 회원들이 틀림없이 이런 일들을 박사님께 설명할 것입니다. 그들은 미국 총영사 앞에서 맹세한 증언을 하였고|| 이것은 워싱턴으로 전달될 것입니다. 선천에 있는 우리 선교단의 본부는 수색을 당했고|| 그곳의 상황은 끔찍합니다.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며칠 전까지 저는 한국인들은 2|| 30년이 지나야 독립할 준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번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저는 매우 희망적으로 그들이 좀더 짧은 시간 안에 준비가 될 것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바로 독립을 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꼭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들은 독립을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 그들은 청원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도 없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학교에서 폐지되었고|| 그들은 자유롭게 집회를 할 수도 없습니다. 군국주의는 죽었는데도 군사 규율은 지금도 한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상황에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일본의 개화된 사람이 발언을 하여 도쿄 정부가 이곳의 행정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 스스로 한국인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이러한 표현은 인도되어야 하지 말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이것을 말살할 수도 없습니다. 저에게는 많은 훌륭한 일본인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수가 이 운동에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이번 기회에 이 글이 박사님께 꼭 전해지기를 기원하며|| 위트모어(Whittemore) 씨가 꼭 전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안녕히 계십시오.존 F. Yeuso추신: 박사님께서 받아 보실 수 있도록 편지를 매우 급하게 썼습니다. 하지만 암스트롱 씨가 이 편지를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급히 써서 전달해야 했습니다.

    167 존 F. Yeuso의 메모

    편지 사본(역주: 필기체로 쓴 메모인데, 번역할 수 없는 단순 메모임. 번역불가)

    168 조이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10-03발신주소: 서울|| 한국발신자: 수신자: 조이(J. R. Joy) 씨수신주소: 뉴욕 시친애하는 조이(Joy) 박사님께||박사님의 귀한 신문이 몇 주간 저를 찾아 이 나라의 외딴 곳까지 와서 7월 24일자 신문이 며칠 전에야 저에게 도착하였습니다. 박사님께서 쓰신 한국에 대한 논설은 우리가 뉴욕 애드버킷(New York Advocate)으로부터 기대한 수준과 맞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대해 마구 비난하고|| 잔학 행위를 과장하는 것은 이 나라의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10년간 한국은 그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은 그 정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정부가 아니었고|| 어떠한 면에서 부족한 부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3월 1일 일련의 소요사태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대부분 해외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잘 조직된 혁명가 집단이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 호놀룰루 그리고 미국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동은 점차 전국적으로 퍼져서 아주 대규모가 되었습니다. 하세가와 총독은 잔인하고 단호하게 경찰|| 헌병|| 군인 등을 투입하여 질서를 회복했고|| 지금까지 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관련된 관료들과 일본의 정부 당국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며 사용된 방법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토에 제출된 잔학 행위에 대한 보고서는 크게 과장되었고|| 여러 점에서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염려하기를 선교단과 관련하여 이러한 보고서 가운데 가장 심한 부분은 캐나다인에 의하여 제출된 것입니다. 한 명의 위원회 서기가 제출한 것인데|| 그는 일본인에 대한 나쁜 감정을 조장하여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을 발발하게 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하세가와 장군도 또한 박사님께서 묘사한 것처럼 폰 비싱(Von Bissing)이 아닙니다. 제가 노블(Noble) 박사님|| 하디(Hardie) 박사님과 함께 소위 ‘수원 학살’이라고 불리는 일과 또 다른 일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려 찾아갔을 때 그는 군인들이 명령에 대해 정도를 넘어 수행을 했고|| 양민의 죽음은 끔찍했으며|| 그런 일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 자신이 이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했고|| 그리고 며칠 뒤에 불탄 교회를 재건하라면서 1천5백 엔을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일본 적십자사에서는 부상당한 사람을 돌봐 주었고|| 지방 지사는 몇 주 동안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했으며 그들에게 임시 거처를 지어 주었고|| 종자와 농기구를 주었으며 파괴된 집을 재건하라고 각각 50엔씩 주었습니다. 한 명의 일본인 경찰이 살해당하고|| 한 명의 형사가 돌에 맞아 죽은 곳이 바로 이 일반 구역에서였습니다. 한국과 벨기에의 경우는 공통점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제2의 독일이 아닙니다. 일본은 하세가와 장군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였습니다. 새로운 총독은 좀더 인간적인 사람인데|| 부임하면서 훌륭한 개선계획을 세워 왔습니다. 박사님께서 하신 그러한 비교는 도발적인 읽을거리일 뿐 진실은 아닙니다. 일본이 “한국인에게서 언어를 빼앗아 가려고 한다”라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일본어를 배워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일본어가 사회에서 더 많이 쓰이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지만|| 한국인들이 그들의 일상생활과 종교생활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1년 전 8월 교육부에서는 공립학교에 있는 일본인 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학부모들에게 자유롭게 말하고 학생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국의 관습은 어찌되었든 거의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결혼 연령은 진보하였고|| 점쟁이의 조언에 따라 아무 곳에나 시신을 매장하는 풍습은 금지되었습니다. 미국 학교에서 영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이 한국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치지는 않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모든 중요한 관직은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저는 열세 명의 도지사 가운데 다섯 명이 한국인이고|| 한국인들은 수천 개의 다른 관직에 종사하고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박사님께서는 “교육제도가 차별적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세키야(Sekiya) 씨는 이토(Ito) 공처럼 저의 절친한 친구 가운데 한 명인데|| 한국의 진정한 후원자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임무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외에 실제적인 학교가 하나도 없는 나라에 교육제도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본국에서 받은 재정은 제한되어 있었고|| 한국인들은 교육비를 지불하기에는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는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교사도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결정하기를 제 생각에는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는데|| 재정의 대부분을 공립학교 교육에 써서 여덟 살부터 열두 살까지의 아이들을 교육시키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능한 가장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각 지방의 중앙에 고등공립학교를 세워서 4년 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서울과 수원에 4개의 전문학교를 세웠는데|| 의학|| 법학과 경제학|| 기술 그리고 농업학교였습니다. 덧붙여서 많은 단기 과정의 농업|| 산업|| 상업 학교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는 한국인을 위한 일반 교육이 일본인들은 11년인데 비해 영원히 8년으로 제한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과 돈이 가능하게 되면 곧 한국의 학교도 일본과 똑같이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일본 대학의 학년과 똑같은 학년의 대학을 만들고|| 여기에 11년을 교육받은 일본인 소년들 대신 점차 8년의 교육밖에 받지 않은 한국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의 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잠정적인 방편으로만 간주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투자가 예상되고|| 이보다 더 짧은 제도도 일본 정부의 크나큰 후원 없이는 지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 학교는 일본 본토에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 자신이 내는 세금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더 무겁습니다. 아무리 작은 주거지라도 그들의 조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 서울의 제가 작년에 가르쳤던 중학교에서는 (이 중학교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일본인 학교입니다) 한국인들도 일본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에는 언제나 많은 수의 한국인 학생이 있습니다. 말하는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에 의하면 너무 많이 제한적인 것이긴 하지만 20여 년 전까지 아무런 공공 집회가 없었고|| 18년 전까지는 신문이 없었던 나라에서 언론의 자유에 대해 논하는 것은 미국에서 그에 대해 논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과 일본에서 여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한 조건은 둘 다 동일했습니다. 우리의 ‘신사 협정’은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한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미국에서 오는 것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사업 기회가 한정적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국이 지난해처럼 번성했던 적도 없고|| 또 서울에는 그 역사상 오늘날 가장 번성하는 한국인 회사가 있다고 대답합니다.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가장 좋은 금광을 30년간 차지하고 있고|| 일본은 좋지 않은 예를 뒤쫓아 석탄광산과 철광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허가받은 악이 장려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10년간 한국을 여행했는데|| 저는 여러 번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백 번 한국인들은 길가에 나와 “부인|| 부인”이라고 속삭였는데|| 일본인들은 한 번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생각하는 분리 계획을 사용하여 젊은이를 유혹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2년 전까지 서울에는 매춘을 하는 사설 한국인 집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요청에 그 당시 경찰대장이었던 미야다테(Miyadate) 씨는 이들을 어느 특정 구역으로 이주하게 하여|| 호객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였습니다. 이러한 허가받은 지역은 밝게 조명을 비추고||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인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불공정합니다. 적어도 서울에서 일본이 이 집들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심각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이 아편중독을 조장한다”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경찰은 마약 흡입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는데|| 이는 중국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해에 한국의 어떤 지역에서 양귀비가 재배되는데|| 그러나 아편은 한국에서 제조되지 않고|| 또 아편을 피우다 발각되는 한국인에게는 커다란 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일본이 일본의 이익을 위해 한국인들을 착취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일본은 양 국민의 상호적 이익을 위해 한국을 개발하고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만약 일본이 한국인들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한국인들이 20년 전에 정신을 차려서 요 몇 달간 보여주었던 것처럼 정신력을 보여주었다면 한국인들은 오늘날 자유로운 국민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들의 자유를 보장했던 이토(Ito) 공을 살해했고|| 외국인 고문이었던 스티븐스(Stevens) 씨도 살해했습니다. 또한 지난번에는 그들을 도와주려 하는 사이토(Saito) 남작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폭동을 진압하는 방법에 대한 박사님의 비난은 저도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우매했을 뿐만 아니라 잔인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대개 비난받았고|| 특히 기독교인 사이에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번 반란 기간 동안 죽었던 사람보다 서너 배 많은 사람들이 지난 몇 주간의 콜레라로 인해 죽었는데|| 이 상황도 매우 심각했습니다. 일본인들의 부단한 노력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입니다. 콜레라가 만연한 동안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서울에서만 하루에 1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일본인들은 한 가지 일에서는 잘못했지만 한 가지 일에서는 칭찬받을 만합니다. 우리는 비난만 받고 칭찬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지난 폭동에서 여성이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했던 것에 대한 신뢰할 만한 사건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서울의 서대문 밖에서 일본 여성이 한국 사람들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몇몇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이 선발되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3월 1일 제가 머물고 있었던 평양에서는 교회에서 큰 집회가 열렸습니다. 돌아가신 국왕을 위한 추도 기도를 한다는 이유로 허가를 얻은 상태였습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우리 선교단의 한 명인 지역의 지도 감독자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간에 이와 같은 대규모 집회가 장로교에서도 열렸는데||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마당에 모여 있어야 했습니다. 3월 2일 제가 머물고 있었던 진남포에서는 폭도들이 항상 우리 교회의 건물에서 모였습니다. 경찰과 헌병이 선교단은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선교단들이 체포되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딱 한 명만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다섯 명의 한국 젊은이들을 재워 준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영사의 요청에 의해 저는 한 청문회에 참석했는데|| 모우리(Mowry) 씨는 말하기를 이 젊은이들이 이번 폭동에 가담했고 경찰이 그들을 찾고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풀려날 것입니다. 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처음부터 그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많은 교회가 불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10개의 교회가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종교적 탄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량 학살’은 딱 한 건이 있었는데|| 관청에서는 이에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잔인성과 고문|| 비인간적 대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곳으로 새롭게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그러한 상황은 개선될 것입니다. 박사님께서 표현하신 것과는 달리 일본은 터키가 아니고 한국은 아르메니아가 아닙니다. 이곳 한국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 우리가 애드버킷(The Advocate)에 원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오직 사랑의 정신이 담겨 있는 진실일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169 굴릭 박사에게 보낸 편지

    (사본)발신일: 1919-10-07발신자: 감리교 감독교회|| 캔자스 의회|| 일본 선교단발신주소: 한국|| 서울발신자: 프랭크 헤론 스미스(Frank Herron Smith)수신자: 시드니 L. 굴릭(Sidney L. Gulick) 목사님수신주소: 뉴욕 시굴릭(Gulick) 박사님께||박사님께서는 저를 잊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카루이 자와(Karui zawa)에서 베이스를 부르던 고지식한 스미스(Smith)입니다. 저는 10년 동안 한국에서 우리의 일본 사업을 감독했고|| 지난 1914년 2월부터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국인 선교단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 이곳에서의 제 지위는 약간 까다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폭동이 시작된 이후 저는 아무런 글도 쓰지 않고|| 본국으로도 거의 보고서를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모스(Morth) 박사님께는 간략하게 두 번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웰치(Welch) 주교님이 스스로의 정신적 지주로부터 떠밀려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진실을 알도록 도와주려 했습니다만|| 주교님께서 애드버킷(The Advocate)에 쓴 기사를 보니 제가 성공한 것 같지 않습니다. 주교님은 저에게 ‘한국의 상황’ 사본 한 부를 빌려주었고|| 그것을 읽어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교님은 지금 이곳에 있고|| 저는 그분에게 제가 세 가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조이(Joy) 박사의 논설에 대해 답장을 쓰는 것|| 둘째|| 팸플릿을 검토하여 제가 보기에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점을 당신께 알려 드리는 것|| 셋째 이 운동의 중심부에 있었던 제가 경험한 바를 글로 쓰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사정을 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은 제가 그렇게 해서 공개적으로 선교단의 반감을 사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중도적 입장에서 박사님께 몇 개의 자료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이 자료를 박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용하십시오. 그러나 당분간은 비밀로 해주십시오.우리는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들과 많은 선교단들이 우리를 전적으로 불신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솔직히 별로 개혁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원하고 있고|| 일본인들이 반드시 세계의 외면을 받게 될 정도라면 즐거워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최근의 소요사태로 그들이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과장이 그렇게 많았던 주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교단들은 일본이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할 것 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일단 두고 볼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3월 1일 이후 매우 잘 대처했다는 것이 공정한 판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일본의 친구들인 우리들은 일본을 믿고|| 일본이 지금부터 더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하건 간에 일본은 이시사카(Ishisaka) 형제의 표현대로 “자신의 생존을 희생하면서까지” 한국을 포기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곳의 연방교회회의에서 베리(Berry) 씨는 일본에서 온 우리의 형제 대표인데||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의 요점은 첫번째는 분개의 메시지이고|| 두 번째는 공감의 메시지|| 세 번째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조언을 했습니다. 첫째|| 군사 정당과 자유 정당을 구분할 것|| 그리하여 일본인들을 일반적으로 비판하지 말 것|| 특히 해외에서 말입니다. 둘째|| 새로운 행정부를 믿고 그들이 약속을 지키도록 지지할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연설을 듣고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명은 마지막에 그를 공격했습니다. 그는 말하길 다니엘이 사자의 동굴에서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알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주요한 개혁은 헌병제도를 폐지시킨 것입니다. 이 제도는 과거 행정부의 가장 나쁜 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헌병들은 공무원의 휘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고|| 특히 국외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금장식을 하고 줄무늬가 있는 제복도 없어졌습니다. 또한 칼도 없앴습니다. 경찰과 철도원만이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물론 칼을 차고 제복을 입는 제도는 없애야 할 만큼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칼을 차지 않는 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창고에서 나온 복장을 보고 나면 제복에 관한 것은 확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재단비가 저렴한데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것입니다. 묘지에 대한 새로운 법률도 또한 시행되어 각 가족들은 자신들만의 구역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총독에게 매우 사소한 첫 단계로서 채찍질을 없앨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습니다. 좀더 중요한 개혁들은 연구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채찍질을 없애는 것은 즉시 시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후에 사이토(Saito) 남작의 개인 비서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채찍질은 늦어도 4월 1일까지는 폐지될 것이라고 저에게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좀더 많은 감옥을 지어야 합니다.)대부분의 급진적인 선교단이 캐나다 사람들이라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들은 일본과 미국 사이의 좋은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토론토의 암스트롱(Armstrong) 박사께서는 분명히 이곳의 상황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돌려서 말한다면 그는 ‘괴짜’입니다. 미국에 있는 벡(Beck) 씨는 전에 미국성경협회(American Bible Society) 소속이었는데|| 이들의 조력자이며 왕성하게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의 판단은 전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저는 개인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요전 날 스코필드(Schofield) 박사가 사이토(Saito) 남작에게 편지를 써서 그가 지금 책을 저술하고 있으며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의 비서가 어떻게 할지 물어 보려 저에게 그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저는 인터뷰를 하라고 했고|| 앞으로 개혁할 것에 대한 모든 설명을 준비해서 제공하라고 했습니다. 애비슨(Avison) 박사와 게일(Gale) 박사도 또한 캐나다인입니다. 또 다른 캐나다인인 하디(Hardie) 박사는 그나마 아주 정상적입니다. 그는 지금 미국에 있습니다. 때때로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즉 과거는 그 부정확성|| 과장성과 함께 흘러가 버리게 내버려두고 미래에는 핵심만 남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은 거짓을 믿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제게서 자료를 가져가셔서 놀라지 마시고|| 가장 유용한 곳에 사용하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일본이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제2의 독일이 아니고|| 결국에는 옳은 일을 할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프랭크 헤론 스미스(Frank Herron Smith) (서명)

    170 프랭크 헤론 스미스가 굴릭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10-15발신주소: 부산|| 한국발신자: 프랭크 헤론 스미스(Frank Herron Smith)수신자: 시드니 L. 굴릭(Sidney L. Gulick)수신주소: 뉴욕 시굴릭(Gulick) 박사님께||저는 콜레라 격리 수용으로 인해 지금 이곳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박사님께 편지를 쓰며 시간의 일부를 보낼까 합니다. 경찰들은 콜레라와 싸우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울 북쪽에 있는 송도의 북쪽 경계인 신기수(Shingishu)와 시모노세키에서 모든 사람들의 발을 묶어 두고 있습니다. 9천여 건이 넘는 감염이 있었지만|| 이제는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저는 사이토(Saito) 남작을 방문하여 몇 가지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면담을 끝내면서 저는 채찍질을 폐지시키자는 것을 다시 한 번 건의했습니다. 저는 하나의 ‘orinage’로 여겨지고 있는 그러한 명령을 일본으로 가져가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후에 그의 개인 비서인 모리야(Moriya) 씨를 통해 말을 전했는데|| 그 다음달인 4월 1일까지는 분명히 폐지될 것이고 제가 원한다면 아무에게나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더더욱 그와 새 행정부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번 주에 그는 한국인과 일본인 관료들에게 똑같은 월급 범위를 적용하게 했고|| 다른 결정된 개선점도 실천했습니다. 영사님께서 저에게 모우리(Mowry) 씨의 재청문회가 열리는 서울 항소법원에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모우리(Mowry) 씨는 공정하게 다루어졌으며|| 모든 것은 정확하게 통역되었습니다. 평양에서의 청문회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진행되었던 것 같고 그래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우리(Mowry) 씨는 소요 기간중 다섯 명의 각기 다른 학생들을 재워 주었고|| 그들 가운데 몇 명은 한 번에 며칠씩 자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학생들이 이번 폭동과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과 경찰이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단호히 부인했습니다. 다른 선교단들은 그와 같이 한국인들을 재워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모우리(Mowry) 씨는 괴상한 사람입니다. 다섯 명의 학생들은 모두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습니다. 그들은 평양에서 검사에게 자신들의 연루 사실과 경찰이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모우리(Mowry) 씨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말하길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은 모든 한국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밤에 잡혀가면 특히 더 구타를 많이 당했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로 그들이 자신과 함께 있기를 바랬다고 했습니다. 오쿠보(Okubo) 변호사는 ‘조서’에 있는 여러 가지 실수를 찾아내고 고쳐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다섯 명의 학생들은 다시 심문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전에 심문을 받을 때 자신들의 죄목에 대해서만 심문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우리(Mowry) 씨 집과 대지의 지도를 수정하여 더 넓게 보여주었는데|| 그 학생들이 잔 방은 길가에서도 훤히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저는 모우리(Mowry) 씨가 은신처를 제공했거나 그들을 ‘숨겨’ 주었다는 위법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가 곧 풀려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왜 모우리(Mowry) 씨와 벨(Bell) 씨를 기소해야 했을까요? 벨(Bell) 씨의 사건에서 저는 매우 초기에 우사미(Usami) 씨를 만났는데|| 그는 이를 중지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미 재판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벨(Bell) 씨는 수원에 있는 검사로부터 기소를 당했습니다. 그곳은 ‘대량 학살’의 책임으로 관료들이 벌을 받은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다른 관료들도 큰 압박을 받고 있는 곳입니다. 제 생각에 그들은 복수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평양은 오래된 선교단들이 진심으로 일본인들에 반대하고 있고|| 또한 일본인들도 이를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모우리(Mowry) 씨를 못살게 군 것은 그들이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선교단들은 비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서 적절한 관심이나 혹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그들은 ‘요주의 인물’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한국인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즉 윌슨(Wilson) 대통령은 한국인들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지금 당장 독립할 희망은 없다고 말입니다. 맥쿤(McCune) 양 같은 경우 저는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화를 부르는 쪽으로 조장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우매한지 상상도 못하실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 부산역 호텔에 있는 “보이”가 저에게 와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인이고 기독교인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는 모우리(Mowry) 씨에 대해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두 명의 한국인 부호가 상하이의 음모자들에게 돈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어제 체포되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주 심각하게 독립이 금세 오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들이 독립을 감당할 때가 될 때까지는 적어도 50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유치합니다.이제 저는 박사님의 보고서를 거론하고 거기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하겠습니다. 5면-검열. 제 기억에 의하면 이것은 3|| 4일간 지속되었습니다(모든 뉴스를 막은 것 말입니다). 3월 1일부터 4일까지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제 모든 우편물이 곧바로 배달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것도 조금도 지체되지 않고 왔다고 저는 분명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읽혀졌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쓰는 것에 대해 보증인을 세우는 데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나라의 기사거리를 얻기 위해 다양한 방법에 의지했습니다. 박사님의 글도 내용 자체가 읽어보면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 노스(North) 박사님께서도 저에게 이상하게 감추어진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셨습니다. 저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A. E. 암스트롱(Armstrong) 목사님께서는 공정한 판단을 하지도 않고 편견에 빠져 계시지도 않습니다. 저는 폭동이 시작되기 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곤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캐나다인이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 분란을 조장하는 것보다는 토론토와 런던에 보고하는 그의 노력을 제한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주요한 연락처는 또 다른 캐나다인인 스코필드(Schofield) 박사입니다. 노블(Noble) 박사님은 그분을 ‘거친 사람’이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는 이곳에 약 2년 동안 나와 있는데|| ‘괴짜’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암스트롱(Armstrong) 씨의 정보가 충분하고 정확하다고 하셨습니다. 부디 그에게 저와 이야기를 했는지|| 혹은 일본인과 이야기를 했는지 여쭈어 보십시오. 저는 그의 정보가 심하게 한 쪽 면만 부각시키고 편견에 빠져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6면 마지막 줄. 한국에서 ‘잔혹한 고문과 비인간적 대우’가 있었고|| 적어도 한 번의 ‘대학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종교 탄압’이 있었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편지로 저는 요전 날 박사님께 교회가 어떻게 이용되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는 목사들이 어떻게 연관되었는지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정치에서 자유로웠다면 정부와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 8면. 한국인들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역주: 누가복음 19장 26절)라는 구절을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 국가를 거치는 동안 한국의 지배자들은 그 국민을 타락시켰고|| 파괴했습니다. 국민들은 뛰어난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하고 잘 속는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동양에서 가장 뒤떨어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과 영국이 한국에서 가장 좋은 금광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딱 한 명의 한국인 금광기술자를 알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철광과 석탄광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들 독립의 수호자인 이토(Ito) 공작과 외국인 고문인 스티븐스(Stevens) 씨를 살해했습니다.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의 앞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그들이 독립을 잃은 것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비수처럼 일본의 심장을 향해 있습니다. 한국은 중심을 잡아야 했습니다. 이제 한국은 인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독립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신(Cyn) 씨와 윤치호입니다. 이들 둘 다 우리가 일본의 감리교에서 일본인 장로(Bucho|| ?)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는 것의 기준에는 못 미칩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보채는 것과 같이 독립을 부르짖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한국은 수천 만 명의 인구를 교육해야 하고 그러자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9면. 제복과 마찬가지로 모든 칼은 없어졌습니다. 데라우치 총독 시절에도 국가적 사건이 아니면 칼은 잘 보관되었습니다. 하세가와 총독은 주요 개혁 내용으로 칼을 다시 한 번 없애라고 명령했습니다. 집회의 자유가 전혀 없다는 것 등은 사실이 아닙니다. 제한되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박사님의 표현은 너무 강합니다.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인들은 내무대신인 우사미(Usami) 씨를 통해 청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세가와 총독은 접근하기 힘들었지만 데라우치 총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자치정부에 참여하지 않음’ - 선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일하는 한국인은 수천 명에 달합니다. 또한 ‘추수임(Chusu Im)’이라는 한국인 정치가들의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서 정치적 문제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그들은 입법 제안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법정’에 대해서 공격을 하셨습니다. 저는 법원의 수장인 와타나베 판사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공정한 법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공정하게 말해 이 법정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있었던 법정보다 천 배는 더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 모두 공명정대합니다. ‘한국인들은 봉급을 받는 관직을 누리지 못한다.’ - 거짓말입니다. 저희 집 응접실에서 저는 게일(Gale) 박사님과 애비슨(Avison) 박사님께 한국인들은 현재 그들에게 합당하거나 적합한 것보다 더 많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인들도 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무소에 한국인들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가능한 많은 한국인들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공 서비스에 관한 조사는 항상 그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한국인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려는 노력이 행해져 왔다.” - 역시 거짓말입니다. 어떤 공무원이 한국인들에게 술을 권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한국인을 타락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타락 행위에서 격리시키는 제도를 적용해 왔습니다. 이 제도는 박사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저는 이 제도가 서울의 상황을 향상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는 악명 높은 집들이 문자 그대로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한국인 지주들과 다른 사람들은 우둔해서 돈을 빌려 놓고 종종 저당으로 인해 그들의 재산을 잃어버립니다. 정부는 이들을 보호하고 도와주려 했습니다. 일본은 한 번도 대규모로 거주민을 데려온 적이 없습니다. 매년 수백 가구만이 들어오는데|| 약 250명에서 4백 명 정도입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그리 큰 규모가 아닙니다. 높은 문명 수준에서 낮은 문명 수준으로의 이민은 없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법칙입니다. 이곳에서 얼마간의 자본 없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자명한 이치입니다. 만주의 한국인들은 번성하고 있고|| 그래서 그들은 그곳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땅 값은 지금 너무나 비쌉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터무니없는 값에 땅을 팔고 정착이 덜 된 지역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동양척식회사가 자선 기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회사는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 이익을 바라는 회사일 뿐입니다. 일본에게 독일의 딱지를 붙이려 하는 것은 중상모략입니다. 조이(Joy) 박사님의 기사에서 다루어진 내용입니다.10면. 옛 정부가 가장 잘못했던 일은 경찰과 헌병이 공무원들 휘하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제일 처음으로 고친 일입니다.11면. 제일 첫 부분. 이 회의는 저희 집에서 열렸습니다. 해외로부터 선동된 것이 아니라면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12면. 아랫부분. 처음에 영사님이 어떻게 느꼈을지 알려 드리기 위해 저는 레이먼드 커티스(Raymond Curtice) 씨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지금 워싱턴에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영사관에 온 것에 대해 너무도 화가 나서 그 주모자의 턱을 주먹으로 쳐서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다음과 같은 관료들이 저의 증인입니다. - 미국인 밀러(R. S. Miller)|| 영국인 아서 하이드 레이(Arthur Hyde Lay). 그리고 폭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파견된 선교단들은 일본인 행정부에 대해 아주 높게 평가했습니다. 요전 날이 되어서야 단기 휴가에서 막 돌아온 레이(Lay) 씨가 저에게 왜 게일(Gale) 박사님이 그렇게 날카로운지 왜 그가 과거 10년 동안 지지하던 것을 완전히 배척하는지 물어 봤습니다. 저는 경찰과 헌병의 잔인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13면. 9번째 줄. “대학이 사람들을 훈련시킨다.” 매우 오도된 것입니다. 외국에서 미국이나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이번 사건과 연관되지 않았습니다. 천(Cyun)|| 김(Kim)|| 윤치호 등 모두가 관망하고 있습니다. 장로교 신자들은 교육을 목적으로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의 교사인 팩(Pack) 씨를 제외하고는 외국인이 사람들을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그는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일한 다른 ‘대학’은 무디(Moody) 학원의 한 부류인 평양에 있는 장로교 학교입니다. 평양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대부분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 재림이라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외국에 공부하러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는 한국인들이 타락하지 않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껏해야 이들은 겨우 반 정도만 교육받습니다. 평양의 단체는 온 힘을 다해 서울신학대학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12명의 학생들과 14명의 교사가 있습니다. 훌륭하게 교육을 받은 한국인 관료들은 이번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한국인 교사들과 관료들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참여한 사람들은 급이 낮은 몇 명의 경찰관들뿐입니다. 14면. 3월 8일 저희 집에서 열린 회의에서 애비슨(Avison) 박사님께서는 우사미(Usami) 씨에게 한국인들이 청원서를 제출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물론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우사미(Usami) 씨에게로 가는 대신 한국인들은 하세가와 장군에게 직접 청원하려 합니다. 물론 아무도 심지어 저까지도 그 당시에는 하세가와 장군에게 직접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한국인들은 체포되어 주의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15면. 당국은 4백여 명 이상이 죽었다고 보고했습니다. 15번째 줄. 만약 이 보고자가 공정하고 정직하기를 원했다면 그는 왜 북쪽에서 이와 같은 대규모 집회는 교회에서 일어났고|| 실질적으로 모든 폭도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을까요. 17번째 줄. ‘많은 경우’. ‘어떤 경우’가 맞습니다. 저는 그 부유한 사람이 경찰에게 결산서를 제출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 함흥의 형제는 연방회의의 베리(Berry) 박사님을 공격했던 사람입니다. 베리(Berry) 박사님은 말씀하시길 다니엘이 사자 동굴에서 어떻게 느꼈을지 알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폭력적인 형제도 캐나다인입니다. 16면. 10번째 줄. 공식 보고서는 선교단을 연루시키지 않았습니다. 신문만 그러했을 뿐입니다. 3월 8일 저희 집에서 열렸던 회의에서 저희는 우사미(Usami) 씨에게 선교단들은 선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사법부의 코쿠부(Kokubu) 씨와 내무장관 야마가타(Yamagata) 씨는 모두 이 영향에 대한 공공 면담을 했습니다. 미국 영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경찰 첩자’ - 이 나라에 이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흔히 희생자는’ 등등. - 때때로 그렇습니다. 17면. 한국 여학생들은 학대받았다 - 틀림없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적어도 그들이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장교들에게 욕보일 테면 그렇게 해보라고 도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감옥에서 그들의 받은 대우는 좋았습니다. 저는 두 번 가서 보았습니다. 이들에 대한 대우가 가장 나빴던 곳은 경찰서와 헌병대에서의 사전 취조 때였습니다. 19면. 로버츠(Roberts)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트윙(Thwing) 씨는 ‘불쾌한 사람’입니다. 또다시 인신공격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Shikata ga nai’입니다. 존 토머스(John Thomas) 씨는 훌륭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는 ‘신앙심 깊은 형제’입니다. 20면. 한국인들이 20년 전에 자신들의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대항하여 그러한 운동을 시작했다면 그들은 오늘날 자유를 구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심지어 학생조직조차 없었습니다.21면. 7|| 8개 도시에서 성명서 낭독이 있었음을 인지하십시오. 믿을 수 있는 전국적인 불만은 없었습니다. 지도자들이 농촌 지역까지 ‘시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렸습니다. 22면. 다시 글쓴이가 공정하길 원했다면 왜 그는 어떤 지역에서는 일본인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을까요?27면. 우사미(Usami) 씨는 이 집단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사미(Usami) 씨에게 제가 제안을 했고|| 그는 이에 찬성을 했습니다. 거기에 나와 있는 명단은 잘못된 것입니다. 게일(Gale)|| 애비슨(Avison)|| 노블(Noble)|| 하디(Hardie)|| 밀러(Miller)|| 셔록스(Shoroocks)|| 베른하이젤(Bernheisel) 그리고 제가 참석한 것이 맞습니다. 저는 그 후에 일본에 가야 했기 때문에 언급된 다른 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이 그때 언급된 모든 것을 한국인에게 허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판단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등사본으로 만들어져서 한국에 배포되었고|| 중국에서도 인쇄가 되었습니다.나중에. 제 비평은 28면까지 있습니다. 제가 시간이 된다면 내일 더 쓰도록 하겠습니다. 사이토(Saito) 남작은 선교단을 장려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쏟고 계십니다. 저의 제안에 그는 연방회의 구성원들을 위한 리셉션을 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각 구성원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램버쓰(Lambuth) 주교를 환영하였고|| 그에게 식전 기도를 올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웰치(Welch) 주교님과 트롤롭(Trollope) 주교님 그리고 두 명의 프랑스 주교님들을 영접했습니다. 여기에서도 그는 기도를 올렸고|| 웰치(Welch) 주교님과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실망하게도 술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이 정보과 관련해서 제 이름을 사용하지 말아 주십시오.안녕히 계십시오.프랭크 헤론 스미스(Frank Herron Smith)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