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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01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의 한국인 부상자 명단

    베시(F. G. Vesey) 목사와의 면담에서 얻은 진술 내용작성일: 1919-03-29(1) 이인옥(Ri In Ok): 열아홉 살. 학생. 안주(Anju) 출신. 왼쪽 다리에 총상. 그는 3월 2일 약 4천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헌병 관사로 향하며 독립을 외쳤습니다. 7명의 일본 헌병들이 밖으로 나와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 총격으로 한국인 8명이 사망하고 20명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한국 시위대는 돌이나 나무 등 어떠한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헌병들은 총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이인옥(Ri In Ok)은 지방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간단한 치료를 마친 후에 다리에 박힌 총알을 빼내야 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기독교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습니다. 3월 5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병원에 입원한 후 곧 외과 의사에게 성공적인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2) 노정윤(No Chong Yun): 예순한 살. 농부. 안주(Anju) 인근 지역 출신. 위의 학생과 같은 시위대에 참여했습니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질문에서 그의 진술은 위의 학생과 일치했습니다. 이 남자 역시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평양(Pyengyang)에 있는 병원으로 가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곳에 가면 일본인들이 그를 체포하고 학대할 것이 두려워 이곳으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3월 5일 병원으로 온 그는 즉시 의사의 치료를 받았습니다. (3) 김남산(Kim Nam San): 스물일곱 살. 패주(PaiJu) 출신. 그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공웅(Kong Ung)이라는 지역의 장이 열리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1천여 명이 모여 독립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6명의 일본인과 2명의 한국인으로 구성된 헌병 부대가 총을 들고 나타나 독립을 외치는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가 본 바로는 4명이 사살되고 33명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이웃 주민들과 도망을 가다가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시위에 참여한 한국인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돌이나 막대기 등 어떠한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교회나 집회에 참석하지도 않는 인물입니다. (4) 고명남(Ko Myen Nam): 스물다섯 살. 황해도(Whanghaido) 출신. 그는 3월 23일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치안 판사의 사무실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몽둥이, 칼, 총을 들고 나와 군중들을 몽둥이로 매질하고 칼로 베었으며 총을 난사하여 적어도 3명이 사망하고 2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 후 군중들은 해산되었습니다. 이 남자는 일본인 병원으로 가지 않고 지역에 있는 한국인 병원으로 갔으나 담당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의사는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으로 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는 3월 24일 이 병원에 도착하여 즉시 의사의 치료를 받아 현재 회복중입니다. 그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 역시 종교가 없으며 교회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5) 이돌사(Ri Tol Sa): 23세. 덕산(Duksan) 출신. 3백 명이 넘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저녁에 마을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들은 헌병대에 가서 폭력은 사용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한 관리가 나와 한국인 통역을 통해 해산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때 3, 4마일(약 5, 6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서울에서 여러 명의 헌병이 탄 자동차가 도착했습니다. 15명의 헌병들이 차에서 내려 갑자기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가 본 바에 의하면 한 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 남자는 발에 부상당했습니다. 그는 15명의 헌병에 포함된 한국인 헌병들도 총을 발사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 군중은 모두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이송된 다음날 아침(3월 28일) 즉시 치료를 받았습니다. 역시 종교가 없으며 교회 또는 집회와 연관된 인물이 아닙니다. (6) 이개똥(Ri Kai Tong): 스물일곱 살. 위의 인물과 동일한 마을 출신으로 개별적인 질문에서 위 인물과 동일한 진술을 했습니다. 다리에 총상을 입었습니다.(7) 염독창(Yum Tok Chang): 서른다섯 살. 위의 인물과 동일한 마을 출신으로 유사한 증언을 했습니다. 팔과 옆구리에 총상을 입었으며 종교는 없습니다.(8) 송윤백(Song Yunk Pak): 스물한 살. 위의 인물과 동일한 마을 출신. 윗입술 관통상을 입음. 위 인물들과 동일한 내용을 진술했음. 종교 없음.(9) 강용이(Kang Yong Ie): 서른여섯 살. 덕산(Duksan) 출신. 근거리 총격으로 인해 한쪽 다리가 완전히 부서졌음. 위와 동일한 내용을 증언했음. (10) 익명의 남자: 머리를 심하게 다쳐 진술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 반무의식 상태로 누워 있음. (11) 차오균(Cha Oh Kyun): 서른여섯 살. 고양(KoYang) 출신. 서울에서 8, 9마일(약 12~15킬로미터) 떨어진 이곳 상점들은 독립운동의 일원으로 모두 폐업했고, 이 지역 일본 헌병들은 다시 상점을 개업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상점주들은 그 명령을 거절했고 다음날 약 70여 명의 마을 남자들과 소년들이 마을 뒤쪽 언덕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일본인 헌병들과 한국인 헌병들은 그들을 따라갔고 일본 헌병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 남자는 총상을 입었고 다른 사람들은 도망을 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돌, 막대기 등 어떠한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다만 태극기를 한두 개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진술에 따르면 이 지역 헌병들은 대체로 친절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나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인물이며 천도교 모임에는 잠시 참여했지만 오랫동안은 몸담지 않았습니다. 3월 28일 병원에 온 후 즉시 치료받았습니다. (12) 안동안(An Tong An): 쉰네 살. 고양군(KoYangKoon) 출신. 그는 몽둥이로 심한 매질당한 후 한쪽 팔을 칼로 찔려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5백 명 이상의 이웃 주민들과 함께 거리를 시위한 뒤 헌병서 밖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일반 주민 복장을 하고 군중들 사이에 있었던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헌병대의 한 관리가 시위를 해산하라며 위협을 했으나 군중들은 두려워하지 않겠다며 시위 해산을 거절했습니다. 곧 5명의 기마 경찰들과 총을 가진 5명의 헌병들과 20명의 주민들(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군중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돌, 막대기 등 어떠한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교가 없으며 3월 28일 병원에 와서 즉시 치료받았습니다. (13) 김광운(Kim Kwang Un): 일흔두 살. 안악(Anak) 출신. 그는 온창(OnChang) 장터에서 5, 6백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헌병 지휘자는 시위를 해산하라고 권고하고 여러 명을 구타하고 심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과 헌병대에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 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두 명의 일본인 헌병과 두 명의 한국인 헌병이 군중들에게 사격을 가했고 세 명이 사망했고 약 20여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격분한 사람들은 헌병대에 돌을 던졌으며 헌병들은 울타리 뒤에서 계속하여 총을 발사했습니다. 이 사람은 서울로 가려 했지만 진남포(Chinnampo)에서 체포되어 두 손이 묶인 채 욕설과 구타당했으며 누가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으로 가라고 했는지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재령(Chai Ryung)읍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그에게 일본인 병원으로 가라고 말했지만 그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자 그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는 장로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서울에 도착한 뒤 즉시 도움을 받았습니다. (14) 송윤복(Song Yun Pok): 스물한 살. 덕산(Duksan) 출신. 얼굴에 총을 맞아 위턱뼈 뒤에서 반쯤 잘려진 총알을 빼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덕산(Duksan)에서 온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증언을 했습니다. (15) 구낙소(Koo Nak Saw): 신체가 심하게 절단된 상태로 병원에 와서 몇 시간 후 사망했습니다. 어떠한 증언도 받지 못했습니다. (16) 이남기(Ri Nam Kee): 스물두 살. 파주(Paju) 출신. 몽둥이로 너무 심한 구타를 당하여 심한 상처로 인해 진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3월 29일 토요일에 입원하여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에 사망했습니다. 빌링스(B.W.Billings) 목사와의 면담에서 얻은 진술 내용(17) 성용(Sung Yong): 16세. 혐성리(Hyum Sung Li) 부근 강가에 거주. 이 소년은 3월 23일 저녁 10시 ‘만세’를 외치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약 20명의 일본 군인들이 그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흩어졌지만 이 어린 소년은 뒤에 쳐져 있었기 때문에 먼저 달려온 군인의 검에 의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 뒤 두 번째 군인이 이 소년의 배를 검으로 찔러 오른쪽 복부에 4, 5인치 가량의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훈상 학교(Huun Sang School) 3학년 학생으로 그의 할머니는 장로교인이며 어머니는 종교가 없습니다.(18) 이한봄(Yi Han Bom): 서른두 살. 서울 서소문(Little East Gate) 안의 시기문안(See Ki Moon An) 거주. 3월 22일 돌이나 몽둥이를 들지 않고 단지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에게 일본 군인이 총격을 가했으며 그는 총에 맞아 실명의 위기에 있습니다.(19) 미선명(Mi Syun Myung): 서른세 살. 탈곡 업무 종사. 두검(Tukum)에서 무장하지 않은 5백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으며 네 명의 헌병들이 시위 현장에 와서 총격을 가했습니다. 한 명이 숨지고 그를 포함한 여덟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도 천도교인도 아닙니다. 한 개의 총알이 그의 두 다리를 관통하여 중상을 입었습니다.(20) 정영희(Chung Yung Heui): 서른네 살. 파주(Paju) 출신. 3월 28일 오후 1시, ‘만세’를 외치는 4백여 명의 군중들에게 일본 헌병이 총을 발사했습니다. 군중들은 돌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총격으로 여덟 명이 사망했고 그는 목에 총알이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21) 유영군(Yu Yung Kun): 마흔두 살. 서울에서 65리(약 26킬로미터) 떨어진 파주(Paju)의 신산리 장로교회(Sin San Lee Presbyterian Church) 총무. 아무런 무기도 없는 빈손으로 약 1천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습니다. 달리는 시위 군중을 따라오며 일본 헌병들이 총을 발사하여 세 명이 숨지고 세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는 목 측면 부위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22) 구천명(Koo Chun Myun): 서른네 살. 농부. 그는 3월 27일 오후 1시 광주(Kwangju)읍에서 5, 6백 명의 군중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헌병들의 총에 세 명이 사망하고 이 남자는 턱을 맞아 턱 대부분이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베시(F. G. Vesey) 목사와의 면담에서 얻은 진술 내용작성일: 1919-04-011919년 4월 1~5일(1) 송시웅(Song Si Ung): 마흔일곱 살. 포천(Po Chun) 출신. 위의 이남기(Ri Nam Kee)와 같은 내용의 증언을 했습니다(16번 참고). 이 사람은 두개골 상단에 총을 맞았습니다. 루드로우(Ludlow) 박사의 수술로 총알을 제거했습니다. 종교 없음.(2) 성명니(Syung Myeng Ni): 서른두 살. 덕산(Duksan) 출신. 다리에 총을 맞아 루드로우(Ludlow) 박사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닌 이유로 특정 조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종교 없음.(3) 산선난(San Syen Nan): 스물일곱 살. 포천(Po Chun) 산면(San Myen) 선탈리(Syen Tal Li) 출신. 솔무창(SolmooChang) 장날에 약 2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 헌병들이 나와 시위대가 장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군중은 시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들은 돌, 막대기 같은 무기도 없었습니다. 한국인 헌병들은 공중을 향해 총을 발사한 반면 일본인 헌병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했습니다. 아홉 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남자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며 몰래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종교 없음.(4) 박윤낙(Pak Yun Nak): 스물다섯 살. 고양(Ko Yang)군 치두면(Chi To Myen) 도당기(Totangki) 출신. 이 사람은 산면 교회(San Myen Church)의 신도로서 3월 말일 그의 마을과 이웃 마을의 주민이 모두 모여 ‘만세’를 부르며 폭력을 배제한 거리 시위를 했습니다. 서울에서 온 몇몇 기마 헌병들이 시위와 만세를 멈추고 해산하라고 했습니다. 군중들은 그의 말에 따라 시위를 해산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은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닷새 후 서울에서 온 여러 명의 헌병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집주인들이 닷새 전 시위에 참여하여 ‘만세’를 외쳤는지 조사했습니다. 이 사람은 만세를 불렀다고 시인하면서 헌병이 요구한 대로 시위를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조사를 마친 후 이 남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갔습니다.그의 말에 따르면 그와 체포된 다른 사람들은 감옥이 아닌 정부 장관의 사무실에 불려 가 채찍질을 당했다고 합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60대의 채찍질을 당했는데 30대는 12시에, 30대는 2시에 맞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맞았습니다. 그는 현재 치료를 기다리며 병원에 입원중입니다. 다음 젊은이들은 정확히 동일한 증언을 한 사람들입니다. (5) 정흥봉(Chung Hung Pong), 열여섯 살.(6) 이천세(Ri Chun Sai), 스물한 살.(7) 장오상(Chang Oe Sang), 스물네 살.(8) 박차교(Pak Cha Kwo): 마흔한 살. 이천(E. Chun)읍 이청군(Ri Chung Koon) 읍내면(Umnai Myen) 방고리(Pang Ko Ri) 거주. 4월 3일 목에 심한 총상을 입고 병원에 온 후 즉시 치료를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장날에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대규모 군중이었지만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일본 헌병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 사람은 목에 심한 총상을 입었기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 많은 증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9) 김금동(Kim Kum Tung): 열다섯 살 소년(만 열세 살). 충청도(Choong Chong Do) 출신. 이 소년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왔습니다. 허벅지와 팔 앞부분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그의 마을 주민들은 계획한 대로 4월 1일 저녁 만세를 외쳤습니다. 한밤중이 되어 언덕에 불을 지펴 신호를 보내자 주민들은 언덕으로 올라가서 만세를 외쳤으나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8명의 헌병들이 나타나 20명의 마을 남자와 소년들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 결과 한 명이 숨지고 13명이 부상당했습니다. (10) 방춘호(Pang Choon Ho): 스물다섯 살. 위 인물과 같은 마을 출신.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며 위의 내용과 유사한 진술을 했습니다. 스물한 살인 그의 남동생 방신식(Pang Sin Sik)은 팔과 다리 여러 부위에 총상을 입었으며 그의 형은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11) 박성군(Pak Syung Koon): 마흔네 살. 위 인물과 같은 마을 출신. 총격 사건에 대해 위와 유사한 내용의 진술을 했습니다. 그는 쇠알맹이가 든 총알에 신체의 여러 부위에 맞았습니다. (12) 이복윤(Ri Pok Yun): 스물여섯 살. 수원(Suwon) 출신. 3월 말에 이웃 마을 주민 300~350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마을을 지나 면사무소까지 행진하였습니다. 이 시위에는 면장도 참여하여 경찰서로 갔습니다. 경찰서에 근무하는 한국인 사무원이 나와 “저는 정부를 위해 일하는 경찰이기 때문에 여러분들과 동참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만은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계속 만세를 부르십시오. 저도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길 빌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세 명의 일본 군인들이 나타나 총을 발사했습니다. 주민들이 도망가는 중에 두 명이 부상당해 쓰러져 그들을 구하려고 돌아온 4, 50명은 위협을 당하며 체포된 후 함께 묶여 수원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체포된 주민들은 그곳에 이틀 동안 감금되어 심문을 당하고 50~90대의 매를 맞은 후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일본인 의사는 부상당한 두 명의 주민을 살펴본 후 총알이 박혀 있는 부상자의 다리에 솜을 대고 묶은 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들은 4월 4일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으로 왔습니다. 이 마을 주민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단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을 뿐입니다.

    102 구낙소(Koo Nak Soh)

    3월 20일 오후 9시 많은 젊은이들이 서울과 안동(Andong)에 모여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 경찰, 헌병, 군인들이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킬 때까지 그들의 외침은 계속되었습니다. 구낙소(Koo Nak Soh)라는 인물은 시위가 해산된 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뒤에서 그의 등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쓰러졌습니다. 그를 공격한 사람은 다름아닌 경찰이었습니다. 그 경찰은 군중 속에서 그를 보고 뒤따라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를 공격했습니다. 경찰은 그를 땅에 내동댕이친 후 칼을 뽑아 마치 나무꾼이 굵은 참나무를 도끼질하듯 난도질을 했습니다. 그의 두개골은 잘려 나가 뇌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 상처는 같은 부위를 적어도 세 번 이상 칼로 내리쳐 벤 것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처참하게 베어졌으며 왼쪽 손목은 뼈까지 잘렸습니다. 그의 시체를 본 사람은 스무 곳의 칼자국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사진에는 열 곳으로 나왔습니다.무방비 상태였던 그를 공격한 경찰은 도망갔으며 그는 몇 분 동안 처절한 죽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곳을 우연히 지나가던 한국인들이 그를 발견하고 가까운 한국인 병원(국제 병원)으로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들것에 그를 싣고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세브란스 연합 의대(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병원으로 급히 가는 도중에 혼마치(Honmachi) 경찰서의 경찰들이 그들을 멈춰 세웠습니다. 경찰들은 한국인들이 외국인 병원으로 가지 못하도록 위협하면서 환자의 상처가 심각하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병원으로 가게 되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 가까운 일본인 병원으로 갈 것을 충고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사건을 외국인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져 있었습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의 시신은 실로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머리와 손에는 너무도 많은 칼자국이 있었으며, 그의 옷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절대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다음날 선교 여학교에 다니는 그의 사촌 여동생이 시체 보관소에 찾아왔습니다. 그의 시신 앞에 서 있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그녀에게는 어떠한 것도 위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자유를 위해 또 한 사람의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가엾은 모습을 보시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심판을 내려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참고: 지금까지 약 1천 명이 사망했고 약 6천 명이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들은 총이나 칼 같은 무기를 지니지 않았으며 단지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느님을 향해 외쳤으며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세브란스(Severance) 병원의 부상자 축출에 대한 진술서작성일: 04-10작성처: 애비슨(O. R. Avison) 병원장4월 10일 오전 이노우에(Inouye)라고 하는 헌병 상사가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경찰의 특별 조사가 필요하니 환자들을 야마도마치(Yamadomachi) 헌병 사무실로 보내 달라고 애비슨(O. R. Avison) 박사에게 요청했습니다.박사는 환자를 이동하는 문제는 외과 의사인 루드로우(Ludlow) 박사가 결정할 일이며 그렇게 하는 것은 위험할 수가 있으니 경찰 조사를 병원에서 하라고 제의했습니다. 헌병들은 이 제안에 동의했으며 개별 조사실을 마련하여 개인적으로 조사할 수 있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조사 시간을 1인당 한 시간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날 오후 나가세(Nagase) 헌병 상사가 아홉 명의 헌병과 함께 병원으로 찾아와 그의 명함과 조사 대상자인 일곱 명의 명단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루드로우(Ludlow) 박사를 불러 명단에 있는 환자들을 조사실로 이동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일곱 명은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병실 침대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 시간은 예상보다 짧아서 5시 30분경에 끝났습니다. 나가세(Nagase) 헌병 상사는 더 조사할 사항이 있다며 다섯 명은 데리고 가고 나머지 두 명은 병원에 머물게 했습니다. 이 두 명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병원측이 24시간 그들의 상황을 경찰서에 보고하라고 했습니다.애비슨(Avison) 박사가 이 환자들을 안전하게 이송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루드로우(Ludlow) 박사는 현재 이 환자들은 이송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헌병 상사는 경찰서에도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볼 수 있는 의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루드로우(Ludlow) 박사는 경찰서로 갈 다섯 명의 환자들 중 세 명은 이동할 수 없다고 했으며 잠시 후 헌병 상사는 그 세 명 가운데 한 명을 남겨 두기로 했고 또다시 논의한 끝에 다른 한 명도 병원에 머물도록 하여 결국 다음과 같이 세 명을 경찰서로 호송했습니다. 염명숙(Yum Myung Suk), 복부와 팔에 총상송영복(Song Yung Pok), 얼굴에 총상, 총알 제거이명귀(Lee Myung Keui), 사타구니와 허벅지 총상다음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병원 관리자 에스탭(Esteb) 씨가 24시간 감시하여 경찰서로 상황을 보고한다는 전제로 병원에 남겨진 환자들의 명단입니다. 이개동(Yi Kai Dong),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무릎에 총상강용이(Kang Yong Yi), 허벅지에 총상, 허벅지 상당 부분이 찢겨졌음류순녕(Ryoo Soon Nyung), 양쪽 허벅지에 총상수감된 후 석방된 한 남자의 고문에 대한 증언1919년 3월 5일 9시, 시위대는 서울 남대문 역에서 남대문(South Gate)으로 향하며 만세를 외치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시위가 시작된 남대문 역 부근에 있다가 애국적 충동심으로 군중과 함께 시위에 얼마간 참여한 다음 기차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몇몇 경찰들이 제 이마와 목에 땀이 나는 것을 보고 시위자로 저를 체포했습니다. 세 명의 일본 헌병들이 저를 경찰서로 끌고 가서 그날 밤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저는 행정관에게 불려 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심문과 대답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행정관: 왜 ‘만세’를 불렀는가?본인: 한국의 독립을 외치는 소리에 기쁜 마음에 시위에 참여했다.행정관: 누가 시위에 참여하라고 지시했는가?본인: 아무도 지시한 사람은 없다. 스스로 참여한 것이다. 행정관: 너는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지만 폭도이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본인: 법에 따라 처벌하라.행정관: 기독교인인가?본인: 그렇다.심문을 마치고 저는 이틀 동안 밀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아침 11시경에 저는 훈방조치 되었습니다.석방된 지 이틀이 지난 후 저희 집에 한 친구가 찾아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미국에 있는 저의 친구가 보낸 편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친구가 편지를 읽어보겠다고 하여 저는 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편지를 읽은 그는 자신이 그 편지를 가져가겠다고 했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그는 “내가 이 편지를 가져가면 YMCA 산업학교 학생들을 움직여 볼 수 있다네. 그 학생들은 여러 회사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수천 명의 사람들을 모을 수 있지. 담배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학생들도 함께 말이야. 이 편지를 독립운동에 활용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하고 그를 돌려보냈습니다.다음날 오전 10시경 두 명의 일본 헌병들이 저희 집으로 찾아와 저를 체포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따라 경찰서로 간 뒤 감금당했습니다. 세 시간 뒤 저는 행정관에게 불려 갔습니다. 행정관과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행정관: 네 죄를 아는가?본인: 모른다.행정관: (화를 내며) 미국에 있는 네 친구와 내통한 사실을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다.본인: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때 제 옆에 서 있던 헌병들이 손으로 저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화가 난 저는 그들을 발로 찼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심하게 매를 맞았습니다. 행정관은 그들에게 그만 하라고 지시했고 저는 고문 기구들이 가득 들어 있는 독방에 감금당했습니다. 잠시 후 그들은 저를 직립 자세로 압착기에 넣었습니다. 이 압착기 뒤에 있는 바퀴를 돌려 사방에 있는 측면을 조여서 저를 눌렀습니다. 그런 다음 자백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굴하지 않고 “나를 죽여라”라고 소리치며 계속 저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저는 또다시 압착기에 넣어졌고 조여 오는 압착기에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지독한 놈”이라며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이 고문을 끝내고 그들은 저의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을 끈으로 단단히 돌려 묶은 다음 끈 끝을 천장에 달려 있는 선반을 통과하도록 걸어 제 발가락이 간신히 바닥에 닿을 정도로 몸이 선반 쪽에 매달려 늘어지도록 손가락에 묶은 끈을 잡아당겼습니다.저는 점점 의식을 잃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마는 땀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최대한 편한 자세를 유지했습니다.다음날 아침 11시경 다시 행정관에게 불려 가 훈계를 받은 후 두 번째 석방 조치되었습니다. 그들은 저희 집을 수색했지만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손이 너무 많이 부어 올라 며칠 동안 한국인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았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브란스(Severance) 병원 외과를 찾아갔습니다.

    103 이치노미야씨에게 보낸 편지

    AJB:AM발신일: 1919-03-14수신자: 요코하마(Yokohama) 특수 은행발신자: 수신자: 이치노미야(Ichinomiya) 씨수신주소: 뉴욕 시 브로드웨이 120 친애하는 이치노미야(Ichinomiya) 씨||중요한 동봉 자료와 함께 보내신 열두 번째 서신을 잘 받아 보았습니다. 자료를 보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재배

    104 한국 자유 수호 협력을 위해 윌슨(Wilson)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국인 탄원서

    작성일: 1919-02-20파리 강화회의(Paris Conference)가 개최되기 전에 한국 상황을 윌슨(Wilson) 대통령에게 알리고 일본의 사악한 통치에 대해 자세히 밝힌 한국독립위원회(Korean Independence Committee)의 편지다음은 차오 유 푸(Chao Yu Fu), 치 티엔 푸(Chi Tien Fu),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대표하는 한국독립위원회(Korean Independence Committee)의 한국인 임원들이 미국 장관에게 제출한 서신입니다. 이 탄원서는 얼마 전에 제출한 것이지만 한국독립위원회(Korean Independence Committee) 대표자들이 지역 언론기관에 본 서신의 사본을 제출한 오늘까지는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서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신 내용친애하는 장관님,중국에 망명중인 저희 한국인들은 중국에 계신 미국 장관님께 저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피눈물로 삼가 도와주실 것을 부탁하며 본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일본이 한국을 강탈한 이후로 한국 국민들은 거의 몰살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날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유럽 전쟁이 종결되고 거대한 적은 파멸되었습니다. 인간의 권리를 지지하는 위대한 나라 미국의 대통령은 민족자결의 권리를 선언하셨습니다. 가슴속 깊이 고통을 갖고 있는 한민족은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서 2백만 명의 억압된 국민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아픔을 헤아리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도를 미국 정부에게 전하도록 경애하는 각하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탄원서와 동봉한 자료는 한국인들의 요구 사항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입니다. 본 자료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4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국은 독립 국가였습니다. 이 탄원서는 그 역사를 바탕으로 합니다.2. 한국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중국에 조의를 표했지만 중국은 한국에 내정 간섭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완전한 독립국가를 유지했습니다.3. 한국의 독립이라는 허울좋은 명목 아래 1894~1895년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시모노세키(Shimonoseki) 조약은 한국의 독립을 허용했고 서양의 여러 열강들 역시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협력은 상처 입은 한국의 내정을 강탈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뿐입니다. 4. 또다시 일본은 한국의 독립 유지라는 핑계로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일본의 조약 위반5. 결국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습니다. 이 병합은 모든 국제적 자존심을 버리고 조약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며 모든 도의적 원칙을 철저히 무시한 행위였습니다.즉 이 병합은 어떠한 나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한국에 대한 연민을 표하지 않고 정당화된 행위였습니다.6.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의 국왕은 국가의 주권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7. 단지 한 사람, 매국노 이완용(Le Wanyung)만이 이 병합 행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일개 개인이 졸개 짓을 하여 한 국가를 다른 나라에 팔아 넘긴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간의 법적 상호작용이 아닌 강탈입니다.8. 일본은 그들의 꼭두각시 군대의 무리들을 한국 국왕의 왕실에 배치했으며 수많은 첩자들을 여기저기 흩어 놓아 한국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일본 군인들은 병합을 반대하는 의견을 말하는 한국인들에게는 가차없이 구타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떤 한국인들은 그들의 분노를 일본인들을 향해 발설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으며 일본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강도 행각의 결과라며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비극적인 일입니다. 9. 일본은 돈으로 한국인들을 매수하려 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더러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고 그로 인해 투옥되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사악한 일본 행정1.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색출되어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압 받는 동안 그들은 억압받고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많은 기독교도 지식인들 역시 학대를 받았습니다. 한국인들에게서 기독교를 뿌리뽑기 위해 일본은 모든 가혹한 처사를 저질러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명부에 강제로 등록해야 했으며 기독교 교리를 설교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허가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밖에도 수많은 방법으로 기독교 신자들을 괴롭히며 탄압했습니다. 2. 한국 왕실 소유의 영토는 소작농이 일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병합 이후에는 일본의 식민 사회에 그 영토가 귀속되어 소작농들은 땅을 몰수당했고 그 자리에 일본인들이 정착했습니다. 생계수단을 잃은 한국의 소작농들은 대대로 살아오던 집을 떠나 혹독한 눈보라가 치고 기아와 추위로 수백 명이 죽어 가는 만주(Manchuria)로 강제 이민을 떠나야 했습니다.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이 우리의 잘못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쓰디쓴 고통을 하늘에 호소할 뿐입니다.3. 일본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가산을 낭비하도록 부추기고 아버지와 아들이 법정 소송에까지 휘말리게 하여 재산을 탕진하게 하는 등 모든 한국인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살아가도록 했습니다.패륜 조장4. 일본인들은 한국의 결혼 제한 풍습을 없애고 정식 절차나 나이에 상관없이 결혼을 허용하여 부도덕한 풍습을 조장했습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도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병합 이후에는 한국에서 약 8만 건의 이혼 사례가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수입의 일원으로 중국인들이 사는 도시에서 한국 여인들의 매춘 행위를 조장했습니다. 대부분의 매춘부들의 나이는 고작 열네 살에서 열다섯 살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한국 민족을 말살하고 파괴하려는 일본 정책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부디 신께서 이러한 사실을 알아주시길 기도합니다. 5. 일본 정부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료 목적이라는 핑계로 아편 판매 사무소를 설립하여 한국과 대만 사람들을 아편 재배에 활용했습니다. 아편은 비밀리에 중국으로 수송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아편 정책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아편에 중독되었습니다.6. 일본은 한국인들을 위한 중등교육 이상의 고등교육 과정을 금지했습니다. 그나마 선교 단체가 설립한 고등학교는 엄격한 통제를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비롯된 극동 지역의 문명은 한국으로, 그런 다음 일본으로 전파되었습니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많은 고대 서적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병합 이후 일본은 한국의 고대 서적들을 파괴하여 한국인들이 고대의 사실들을 배우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서적을 태우고 문인을 살해하는 일본의 ‘분서갱유’ 행위는 한국 민족을 격하시키고 한국의 고대 문명을 파멸시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기타 억압한국에 있는 모든 외국 영사관 관계자들과 선교사들은 일본이 한국에서의 저지른 다양한 억압 행태와 부당한 행정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한국 민족이 말살정책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일본 정부가 호의적이라 해도 다른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악한 일본 정부는 한국의 민족을 말살하려는 존재일 뿐입니다.거룩한 하늘의 뜻에 따라 유럽 전쟁이 종결되었고 신의 의지대로 위대한 나라 미국의 윌슨(Wilson) 대통령은 모든 민족이 자치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한국이 자유와 민족 주권의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한국의 가련한 현실을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 호소하는 바입니다.

    105 주의사항 번역서 - 3월 3일 월요일 발행

    작성일: 03-033월 3일 월요일작성처: 한국독립단“추가 주요 공고한국독립단(Independent Korean Band)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본인을 욕되게 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으며 잔혹한 행위를 하는 일본인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를 삼가 요청합니다. 누구든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면 한국의 독립에 저해가 될 것이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주의사항을 명심하도록 해주십시오.(서명) 한국독립단(Independent Korean Band), 정보.”

    106 1919년 3월 6일 작성된 기록

    작성일: 1919-03-061919년 3월 6일 목요일심한 구타를 당한 노인저와 드윙(Thwing) 씨는 홀드크로프트(Holdcroft) 씨 집 근처에서 심한 상처를 입은 한 노인을 보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형극(Cho Hyung Keuk)이며 나이는 예순다섯 살이고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시위가 발생한 목요일 오후에 선교 학교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참여하여 만세를 외쳤습니다. 경찰과 군인들이 그의 길을 막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때리고 발로 찼습니다. 그런 다음 노인은 서대문(West Gate)에 있는 소방서로 끌려가서 가혹 행위를 당했습니다. 노인의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뒤틀려 서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인을 인력거에 실어 집으로 돌려보냈고 다른 수감자들은 경찰서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노인에게 구타를 할 때 노인은 “왜 때리느냐? 무슨 법으로 나를 때리느냐? 자, 죽여라”라며 가슴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이제 기독교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기둥에 머리채를 묶인 여학생들다음은 선교병원의 의료진들이 진술한 내용입니다.목요일 험악한 소방대원들이 커다란 갈고리를 가지고 병원 근처에 있는 한국인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두 여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집밖으로 끌고 나와 심한 구타를 한 뒤 커다란 기둥에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묶어 버렸습니다. 잠시 후 군인들이 여학생들을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부상자들을 군인들이 저지근래에 군 관계자들이 한국인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지방에서 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는 사례에 대한 진술이 매우 많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잔인한 행위의 증거를 숨기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헌병의 총에 맞은 사나이오늘 저와 드윙(Thwing) 씨는 기념관병원(Hall Memorial Hospital)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헌병의 총에 맞아 부상당한 열두 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p. Y.의 p. S. 근처에서 총을 맞았고 또 다른 한 명은 강소(Kang Syo)에서, 다른 한 명은 금채(Keum Chey)면에서 총상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지역에서는 공포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헌병들은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을 향해 너무도 태연히 총을 발사했습니다. 강소(Kang Syo)에서는 독립 시위를 가진 후 작고한 전 한국 국왕의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이 만세를 외치자 곧 헌병들이 나타나 사격을 가했습니다. 현재 병원에 입원중인 한 소년은 도주하다가 등에 총을 맞았으며 한 남자는 머리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그리고 세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군중에 의해 파손된 건물이나 재산 피해는 없었으며 그러한 의도 역시 없었습니다. 금채(Keum Chey)면에서는 더욱 상황이 나빴습니다. 월요일 거대한 군중이 독립 시위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헌병들이 나타나 선량한 군중들을 향해 이성을 잃고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는 네 명의 헌병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명이 한국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일본인이었습니다. 군중들은 헌병을 덮쳤고 한국인이 숨지고 일본인은 헌병 사무소로 도망갔습니다. 군중은 그 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일본 헌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일본 헌병이 나타나자 군중은 그를 즉시 살해했습니다. 군중들은 헌병이 그들에게 사격하기 전까지는 해를 끼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군중들 가운데 두 명이 즉시 살해당했고 다섯 명은 심한 부상으로 나중에 목숨을 잃었으며 스무 명은 부상을 당해 기념관병원(Hall Memorial Hospital)으로 왔습니다.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은 부상이 심해 곧 사망할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 한 명만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다음은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의 명단입니다. 홍찬익(Hong Chan Ik): 스물아홉 살. 무릎 아래 총상으로 뼈가 부러져 절단해야 했음. 종교 없음.김명호(Kim Myun Ho): 열아홉 살.김형노(Kim Heung Nyo): 예순 살.서영석(Syo Yung Syok): 스물세 살.윤창도(Youn Chang To): 서른일곱 살. 척추 총상으로 척추뼈 한 개 손실. 마비 상태로 곧 사망할 것 같음.이태하(Lee Tai Ha): 스물세 살.이성목(Lee Syung Mok): 마흔여섯 살. 어깨 골절상. 즉시 수술 요.차익추(Cha Ik Chew): 서른아홉 살. 이치백(Lee Chi Paik): 스물아홉 살. 차평규(Cha Pyung Kyoo): 서른여섯 살.이 사람들 가운데 마취 상태에서 수술을 마친 한 사람이 마취에서 깨어난 후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간호사가 그를 멈추려 하자 그는 계속 만세를 외치며 “당신은 나를 치료하지 못합니다. 내가 회복이 된다면 그것은 신의 뜻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소방대원에 의한 뇌 손상토요일 시위대는 돌을 던져 p. S.의 유리창을 깬 후 p. S. 근처에 모였습니다. 이 시위대에 서른 살의 이동근(Lee Tong Keun)이라는 사람도 참여했습니다. 소방대원들은 소방용 갈고리 장대로 군중들을 몰아붙였습니다. 이 갈고리 장대가 이동근(Lee Tong Keun)의 머리에 맞아 그의 두개골을 관통해 뇌까지 파손되어 반신 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입니다. 야마다(Yamada)의 회견 요청오늘 오후 이 지방 장학사인 야마다(Yamada) 씨가 저와 드윙(Thwing) 씨와의 회견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현재 상황의 원인에 대해 외국인인 저의 의견을 물었으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고자 했습니다. 이 회담은 두 시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저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후에 드윙(Thwing) 씨를 불러 회담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현재 상황의 원인에 대한 야마다(Yamada)씨의 질문에 저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원인을 말했습니다. I. 주요 원인1. 군 정부2. 일부 일본인들의 자애 부족3.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의 불평등II. 부수적 원인1. 한국의 언어 박탈2. 한국의 역사 박탈3. 한국인의 참정권과 선거권 박탈4. 한국인의 탄원권과 호소권 박탈5. 한국인의 이동 및 여행의 실질적인 박탈그는 모든 사립학교 교육을 종교에서 분리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현재의 독립운동 배후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에 유감을 표시하고 기타 여러 가지 관련된 질문을 했습니다. 일본 관료들이 외국인들의 의견을 몹시 알고 싶어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매우 심각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시민과 군 관계자들간의 불화는 결코 평탄치는 않았습니다.

    107 다섯 명의 신학교 학생 체포에 대한 보고서

    다섯 명의 신학교 학생 체포에 대한 보고서3월 4일 화요일 오후 12시 30분경 장로교 신학대학 기숙사(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Dormitories)에서 경상도(Kyeng Sang Province)에서 온 다섯 명의 학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된 학생은 박덕일(Pak Tuk Il), 박용홍(Pak Yung Hong), 박문찬(Pak Moon Chan), 염봉남(Yum Bong Nam), 배은희(Pai Eun Hi) 이상 다섯 명으로 모두 경상도 출신입니다.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이들 가운데 박문찬(Pak Moon Chan)과 염봉남(Yum Bong Nam)은 자신들의 방에 있었으며, 나머지 세 명은 학교 언덕에서 시위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경찰서에 끌려가 네 명은 한 사람당 29대씩, 나머지 한 명은 27대를 맞았습니다. 그들은 매를 맞을 때마다 몸부림을 쳤으며 손으로 맞거나 머리, 팔, 등을 맞을 때마다 반항했습니다. 또한 둔부가 노출되도록 옷을 벗겨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여 매를 맞았습니다. 구타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 경찰들이었습니다. 한국인 경찰은 비교적 수감자들에게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네 명의 학생들은 이 가혹한 형벌에 대해 항변했고 법원에 호소할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비웃으며 그런 법은 없으며 경찰 형법에 의하면 폭도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며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다섯 명의 학생들은 3월 5일 수요일 오전 11시 30분에 신학대학 기숙사(Theological Seminary Dormitories) 내의 숙소에서 네 명의 선교사들과 대화를 가졌습니다. 박덕일(Pak Tuk Il)은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부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참석한 외국인들에게 상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처참하여 피가 끓어오를 정도였습니다. 사방 1인치 가량의 살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멍은 살 깊숙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 상처는 살을 무자비하게 잡아 찢지 않고는 생길 수가 없는 상처입니다. 박문찬(Pak Moon Chan)과 염봉남(Yum Bong Nam)은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고 나머지 두 명도 상처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만세를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혼잡한 시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그들의 숙소에 있었을 뿐이며 경찰에게 저항하거나 도주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이 회견에는 부산진(Fusanchin)의 앤젤(G. Engel) 목사, 선천(Shenchun)의 로버트(S. L. Roberts) 목사, 재령(Chairyung)의 샤프(C. E. Sharp) 목사, 평양(Pyengyang)의 레이너(R. O. Reiner) 목사 등 네 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했습니다.구타 사건의 세부적인 설명박덕일(Pak Tuk Il), 약 마흔 살.그는 경상도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하루를 보내고 화요일 오전 4시에 평양(Pyengyang)에 도착했습니다.그는 기숙사의 경상도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화요일 오후 기숙사의 전라도관 옆에 서 있었는데, 신학대학 언덕에서 시위가 발생하여(두 명의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음) 경찰이 출동했을 때 시위를 지켜보던 그와 다른 학생은 위험을 느끼고 그들의 숙소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때 경찰들이 그를 붙잡아 시위에 연루된 공범으로 몰았습니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그를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그는 경찰 형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29대의 매를 맞는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일본인 경찰은 온 힘을 다해 그를 10~12대를 때렸습니다. 그가 지치자 한국인 경찰이 뒤를 이어 그를 계속 때렸지만 그는 일본인보다 매질의 강도가 약하다며 다시 일본인 경찰이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머리와 신체 부위를 맞을 때마다 소리지르고 몸부림쳤습니다. 매질이 끝난 뒤 그는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둔부는 딱딱하게 굳어 쓰리고 아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살갗이 벗겨지지는 않았지만 상처 부위는 사방 1인치는 족히 되었습니다.그는 시위대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으며 시위가 일어났을 때 만세를 외치지도 않았고 이전에도 시위에 참여하여 만세를 외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시위대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경찰로부터 도주하지 않았고 단지 조용히 숙소로 돌아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회견하는 동안 상처로 인해 부축받지 않고는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박용홍(Pak Yung Hong), 약 스물다섯 살그에게 왜 평양(Pyengyang)에 왔느냐고 묻자 다섯 명의 학생들 모두 공부하기 위해 신학대학(Theological Seminary)에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한 조사관이 그에게 기독교인이냐고 물었고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조사관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통을 이겨냈으니 너도 십자가에서 고통을 이겨내야 된다. 20대의 매로 처벌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사관이 십자가에 비유한 것은 그를 묶어 매를 때릴 형틀의 모양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때리는 사람들이 20대를 잘못 알아들어 그는 27대를 맞았습니다. 배은희(Pai Eun Hi), 약 서른 살그의 설명은 박용홍(Pak Yung Hong)과 비슷합니다. 그는 29대를 맞았지만 박용홍(Pak Yung Hong)과 마찬가지로 상처는 크지 않았습니다. 염봉남(Yum Bong Nam), 약 마흔 살당시 그는 자신의 숙소에 있었는데 경찰이 칼을 들고 방에 들어와 그를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29대를 맞았으며 상당한 고통을 받은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박문찬(Pak Moon Chan), 약 마흔 살역시 방에 있다가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경찰서에서의 심문중에 “한국의 독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독립이 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옆에 서 있던 한국인 경찰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그는 29대를 맞았습니다.

    108 특별 공표

    특별 공표동포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자손들이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자손들이 어디에서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하늘을 찌르고 땅을 울릴 만큼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우리의 충성을 선언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붉은 피는 우리가 하나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시아가 어떻게 다른 민족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법에 따라 인류가 정반대로 나뉠 수 있단 말입니까? 장대한 평화의 정신과 인류의 권리가 세상에 퍼져 나가는 이때 우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잠재된 능력과 뼛속 깊이 자리잡은 사상을 정확하고 명백하게 내 비췄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어찌 당신(일본인)들은 사악한 감정을 표출하고 총검으로 우리를 기만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그렇게도 견딜 수 없이 심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우리가 겪어 왔던 억압과 상처들이 사소한 것이라면 오늘의 이 거사로 인해 얼마나 더 많은 억압과 상처를 받을까요? 조금씩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마르더라도 정신만은 찢어질 수 없습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헤아려 죽어 가는 우리 동포 앞에 맹세했듯이 죽을 힘을 다해 우리의 목적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강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무지하나마 동포 여러분께 간략히 글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시작한 거사를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 나갈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서명) 한국독립단(Korean Independence Band)추신: 어제 서대문(West Gate) 밖에서 수백 명의 여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서울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의 애국열사들이 이 여학생들의 기백을 기억하여 애국의 열정을 펼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충성 공표아아 슬프도다! 4천 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이 어찌하여 지난 10년 동안 노예의 속박에서 살아왔는가? 동포 여러분, 현재 우리가 자유를 얻지 못하면 앞으로도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 이 경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현재의 생활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만세를 외치십시오. 육신의 상처와 재산의 피해가 따르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리와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소식이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 전해질 3월 28일까지 멈추지 말고 만세를 외치십시오. 우리는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목석이 아닙니다. 우리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기 때문에 앞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왜 용기를 잃고 뒤로 물러서야 합니까? 모든 힘을 다해 만세를 외치십시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됩니다. 비록 나는 죽어도 내 자식, 내 손자들은 이 땅에서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세, 만세, 만세. 레드너 쿡(Redner Cook) 체포그는 생필품을 사기 위해 도심으로 가던 중 경찰서로 끌려가서 만세를 불렀느냐는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또다시 만세를 부르겠느냐는 질문에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경찰에게 그런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라는 질책을 받고 난 후 경찰서에서 풀려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와 그의 동료들은 한 한국인 경찰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 경찰에게 당장 그 제복을 벗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돌아가라는 충고를 하자 한국인 경찰은 두려워하며 도망갔습니다.여학생 체포여러 명의 여학생들이 경찰서에 끌려가 어두워질 때까지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경찰들은 학생들에게 심한 질타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을 풀어 주며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우리 한국 풍습에 여자들은 밤늦게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경찰의 호위를 받아야 한다”라며 집으로 가기를 거절했습니다. 경찰은 다시 나가라고 명령했지만 여학생들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아 결국 경찰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안평균(An Pyung Kyun)그는 3월 4일 화요일 재령(Chairyung)에 있는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물색하기 위해 재령(Chairyung)에서 왔습니다. 그가 찾고 있던 교사는 추형일(Chyu Hyeng Il)이었습니다. 그는 면담을 나누기 위해 추형일(Chyu Hyeng Il)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때 경찰이 그 집을 급습하여 두 사람을 끌어내어 옷을 벗기고 수색했지만 죄를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안평균(An Pyung Kyun)을 심하게 구타하며 ‘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는 그 당시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법에 위배되는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조합교회를 임시 감옥으로 사용한국 조합교회 건물이 임시 유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수감자는 경찰서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구타와 질타를 당하고 발로 채이며 위협 당하고 있습니다. 3월 6일 이 조합교회 건물을 지나던 한국인이 건물 마당과 건물 여기저기에 많은 군인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두 명의 미국인 선교사 체포3월 4일 화요일 제가 로버트(S. L. Robert) 목사의 집에 잠시 들렀을 때 한 무리의 한국인 여성들이 집 근처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그들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집 쪽으로 다가오더니 기숙사 뒤에 있는 언덕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 일본 군인들이 그들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간 뒤 총으로 거칠게 그들을 밀어내며 다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만세’ 소리가 들렸습니다. 언덕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던 우리는 다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언덕을 내려갔습니다. 그 순간 한 일본 군인이 언덕을 올라와 로버트(S. L. Robert) 목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드윙(Thwing), 난 체포되었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두 명의 일본 군인들이 그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돌아와 그는 단지 보고만 있었을 뿐이니 놔주라고 일본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두 명의 일본 군인들은 저를 붙들고 “경찰서로 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저희 둘을 거칠게 잡아끌었습니다. 저희는 여섯 명의 군인들과 함께 한국인들이 줄지어 서 있는 대로를 지나 중앙 경찰서로 갔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저는 군인과 민간인 관리가 있는 안쪽 사무실에 들어가 우리를 체포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이며 우리의 집 근처에서 단지 시위를 보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저께 일본인들이 두 명의 미국 여성에게 저지른 난폭한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고 일본의 명성에 해가 될 것이며 그런 행위는 법에도 위배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과 나이를 기록하라고 하면서 이번 한국인 여성들의 시위를 주도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저는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시위를 보고만 있었고 그 사실을 군인들에게도 말해 주었습니다”라고 하자 그들은 우리를 석방했습니다. 군인들은 우리를 경찰서로 끌고 가는 중에 거칠고 폭력적으로 다루었으며 가련한 한국인들을 때리고 가두었습니다.

    109 헨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12발신주소: 센센(Sensen), 한국사랑하는 아버지께,한국 독립선언서(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의 번역문을 동봉합니다. 번역문이 아버지께 도착하면 다른 사람들도 보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발표되는 것을 찬성할 것입니다. 이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또 다른 번역문이 미국에 전달될 것입니다. 더 자세한 번역문과 함께 평양(PyengYang)의 번헤이슬(Bernheisel) 목사와 드윙(Twing) 씨가 겪었던 힘든 일들에 대해 함께 작성한 번역문도 전달될 것입니다.이 편지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아일랜드인 허드슨(Hudson) 양을 통해 보내 드립니다. 그녀는 오늘 저희와 함께 지낸 후 오늘 밤 기차로 휴가차 캐나다로 떠날 겁니다. 그녀는 이 편지를 캐나다에서 보낼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의 독립운동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모든 편지를 검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일본 우편을 통해서는 보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실, 특히 일본 군 당국과 정부가 독립운동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세상에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일본인들은 독일이 벨기에와 남부 프랑스에서 저질렀던 만행을 똑같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포 시대를 만들기를 원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한국인들의 사랑을 얻는 좋은 방법이겠죠.지난 며칠 동안 여기 센센(Sensen)은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평양(PyengYang)에서는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며 그들을 모욕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러한 사실을 많이 알수록 좋겠지요.3월 5일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적은 편지를 보냈는데 받으셨는지 궁금하네요.이만 줄이겠습니다. 헨리(Henry)

    110 헨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는 아버지께: 이 편지는 또 다른 목적으로 제가 작성한 것이며 이 편지의 사본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내는 방법은 편지를 받아 보시면 아실 겁니다. 편지 하단에 몇 가지 다른 사건들에 대해 적었습니다. 발신일: 1919-03-05발신주소: 한국, 선천(Syenchun)담당자 귀하,이곳 선천(Syenchun)에서도 시위가 발생했으므로 한국에서 발생한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여러 소식통에 의하면 일본 관리들은 그 시위운동의 배후가 외국인 선교사들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3월 1일 토요일에 한국인들이 시위를 거행하려는 계획에 대해서 저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시위가 거행될 그 시점에 한두 명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겠지만 저희 단체의 모든 임원들은 저와 마찬가지로 알고 있는 사항이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파리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서 선언한 결의, 특히 모든 군소 국가에 민족 자결의 권리를 부여하는 선언을 충실히 따랐다고 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소식은 일본 신문에서 얻은 내용입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뒤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신문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특히 인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궁금해했습니다. 평화회담(Peace Conference)에서 선언한 결의안은 한국인들에게 기회를 부여했으며 한국인들은 지금이 아니면 자신들의 소원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한 사항에 대해 알고 있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곳의 선교사들은 시위를 주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제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일은 한국인들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여 그에 따른 고통도 그들이 받고 있으며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계획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폭동의 원동력은 기독교인들과 학교 교사 및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3월 1일 토요일은 시위가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학회장인 맥쿤(McCune) 박사는 대학위원회의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교사와 학생들의 의도나 계획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캠벨(Campbell) 씨가 오전 수업이 끝난 뒤 오후에 돌아왔을 때 사실상 거의가 기독교도인 모든 학생들은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지정된 장소인 시장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연설이 끝난 후 한국인들은 이날을 위해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조국을 위해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 군인들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지만 치명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전의 약속대로 한국인들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으며 모두 자진하여 경찰서로 갔습니다. 더 많은 한국인들이 체포될수록 그들은 만족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굳은 결심을 했는지 전세계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총검으로 머리에 심한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중인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과 학교 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군인들은 시장 터에서 군중을 해산시킨 뒤 한국인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집밖으로 거칠게 끌어내어 체포했습니다. 시위에 참석한 사람이나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체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병원 수간호사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총검으로 무장한 네 명의 군인들이 위압적인 자세로 우리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들보다 앞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무척이나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반역의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돌아갔습니다. 거의 모든 가옥이 수색 당했으며, 일요일 새벽 1시경에 수색당한 집도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어린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나 기숙사와 한국 여학교도 모두 수색했습니다. 물건을 모두 엎어놓고 모든 편지를 읽는 등 철저히 검사했습니다.일요일에 교회 예배를 금지하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예배를 갖기로 했습니다. 군인들이 예배당에 들어와 감시하는 것에 누구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일요일은 서울에서 전 국왕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여기 선천(Syenchun)에서는 12시 30분에 추모식을 치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북부 교회(North Church)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모든 사람들은 교회 앞 거리로 나와 독립을 외쳤습니다. 토요일 시위에서 빼앗기지 않았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대로를 따라 시장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군인들이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왔지만 폭력 행위는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그들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의지를 외쳤으며 일본 군인과 경찰들 면전에서 태극기를 흔든 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곧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화요일은 장이 서는 날이었고 장터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선천(Syenchun)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서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의 규모는 이전보다 매우 작았습니다. 이러한 감시 속에서 사람들은 안전하게 들어왔습니다. 이날 오전 공립학교 학생들은 일본인들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한 몸이 되어 장터로 들어와 독립을 외쳤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시위가 선교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이며 수요일인 오늘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제 오후 상인들과 여러 지역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독립을 외쳤습니다. 이것은 일본 관리들이 저지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인과 경찰은 또다시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며 총검으로 부상당하며 처참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고수했습니다. 군인들의 총검이 그들 앞을 가로막을 때면 그들은 가슴을 내밀어 당당함을 보였습니다. 일본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이었습니다.맥쿤(McCune) 박사는 일본인 교사 @/k@사토(Sato)@/k@ 씨, 캠벨(Campbell) 씨, 맥쿤(McCune) 부인, 스티븐스(Stevens) 양과 함께 교사의 자격으로 학교를 재개했습니다. 오늘은 수업을 하지 않았지만 내일 다시 수업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여학교도 점차 정상화되고 있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배한국인들은 온 힘을 다해 독립을 외친 후 그들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온갖 사악한 방법을 동원하여 전력을 다해 시위를 진압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저지를 행동에 대해 여러 장에 걸쳐 장황하게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몇 가지만 이야기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3월 9일 일요일인 오늘 일본인들은 교회의 예배를 금지시켰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이 예배 모임을 시위의 기회를 삼을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다른 지방에서 온 한국인들은 어제 이곳에서 시위를 하려고 했습니다. 일본 군인과 경찰은 이 사실을 알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수천 명의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와 조국의 독립을 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칼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어제의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은 없었으나 목요일에 부상당한 사람은 사망했습니다. 평양(PyengYang)에서도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한 한국인 경찰이 일본 경찰과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의 등을 때렸고 한국인 경찰은 모자를 벗어 일본 경찰 앞에 집어던지면서 “가져가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의 옷을 벗고 그 옷에 총을 발사하면서 “모두 가져가시오, 내 급료도 가져가시오”라며 속옷 차림으로 조국의 만세를 불렀습니다. 일부 소방대원들은 일본 지휘관으로부터 군중들에게 물대포를 발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들 역시 옷을 벗어버리고 군중에 합류했습니다. 어제와 그저께는 이곳에서 10마일 가량 떨어진 지역에서 여섯 명이 사망했습니다. 네 명은 성인 남자이며 한 명은 어린 소년이고 한 명은 어린아이가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인내의 한계를 느끼는 경우도 있었기에 군인과 경찰들을 마을에서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선천(Syenchun)은 군인들로 가득 메워졌고 그들은 점점 포악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지도자들이 모두 감옥에 있더라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끝까지 목적을 고수했습니다. 한국인의 명예에 대해 한국인과 일본인 간에 명백한 대비가 나타났습니다. 이 근방에서 상당히 유명한 목사님이 심한 구타를 당하여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너무 부어 있었고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번 시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일본인들은 그가 시위를 주모하려 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만행이 이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입니다.서울에서 한 일본 경찰이 한국 여성을 때리고 있는 것을 미국 영사가 보고 그를 저지하였기 때문에 체포되었으나 일본 경찰은 곧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습니다. 평양(PyengYang)에서는 두 명의 감리교 여성 선교사들이 일본 경찰의 총부리로 매를 맞았고 한국인 여학생들은 머리채를 기둥에 묶인 채 그 여성 선교사들보다 더 심한 구타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지고 프랑스 관계자들도 알게 되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어떻게 이용하실 지는 귀하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제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본은 그들의 통치에 모든 한국인들이 완벽하게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이러한 편지가 국외로 나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통치에 만족하는 한국인은 단 한 사람도 알지 못하며 오히려 일본의 법에 복종하느니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의 상황이 미국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왜곡된 사실이 보고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수많은 서약자들이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귀를 열어 세심하게 들어주십시오. 일본인들은 우리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독립운동에 함께 동참하지는 않지만 그 형태나 방법 등과 같은 여러 방면으로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헨리(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