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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21 1919년 3월 10일 작성된 기록

    작성일: 1919-03-10여러분 모두에게 급히 전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타이핑한 글을 보내드리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외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한국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신문 등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다면 현재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태를 조용히 덮어두고자 하는 노력에서 언론은 억압받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무엇보다도 이를 공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한국인들이 더 이상 인내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정권에 대항하여 봉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수년간 무장 해제된 상태였기 때문에 무력 투쟁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이들의 지도급 인사들은 수개월 전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이끌어 내기 위해 한국인들의 행동을 고취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들이 한국에서 계획을 수립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해외의 인사들도 평화 회담에 대표자들을 파견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여 자국의 자유를 외치는 수십만 명의 한국인들이 서명한 선언서를 지니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 이 나라에 민중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독립 선언문에 서명한 인사들이 서울에 모였으며, 일본의 압제에 맞섰습니다. 민초들의 집회가 계획되었고, 엄청나게 많은 곳에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곳에서의 항쟁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도자들이 모든 계획을 세웠으며, 신호가 내려지자 서울의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달려나와 자유를 외쳤습니다. 학교들도 이에 동참하였으며, 엄청난 열기로 뒤덮였습니다. 한국인들은 매우 신중히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흥분된 열기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만 평화 회담(Peace Conference)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는 소식은 매우 무미건조하게 보도되었습니다. 토요일에 항쟁이 발발한 순간(보이지 않음, 일부러 지운 듯함)은 대학 위원회(College Board) 회의에 참석하느라 집에 없었습니다. 오후 한 시쯤 거센 함성이 들려 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고요한 땅 한국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열기를 분출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던 적도 없었습니다. 아이들과 나는 집 뒤의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경찰서와 행정관서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경찰과 군인들이 그들을 압박하는 중에도 그들은 함성을 지르고 연설을 했습니다. 이 행렬을 본 후 곧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사태의 추이가 속속 보고되기 시작했습니다. 교사 한 명이 총검에 찔려 중상을 입었고, 여러 명의 학생들이 다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총대에 맞고 사정없이 몽둥이로 구타당했습니다. 세 명의 군인들이 현관 앞에 서 있는 나에게 총을 겨누고 집안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에게 총을 겨눈 군인 세 명과 함께 자기 집 현관을 들어서야 하다니, 얼마나 이상한 감정이 들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나로서는 그들을 집안에 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집안에 들어오자 이 방 저 방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설령 한국어나 영어를 할 줄 안다 해도 너무나 흥분해 있었고, 또 일본어를 그들만큼 잘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들이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느질을 하고 있던 한 여자에게 이곳에 한국인이 있는지 묻는 것 같았고, 나에게는 태극기를 가지고 있는지 묻는 듯했습니다. 이들은 다음날에도 다시 찾아와 집안을 수색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놓을 필요도 없고, 저항할 이유도 없다고 영사가 조언해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들 누구도 그럴 권리가 없다”는 뜻의 일본어를 배워, 다음에 혼자 있을 때 그들이 들이닥쳤을 때에 대처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 후 열흘 동안 우리는 하룻밤이나 한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분위기는 고조되었으나 싸우고 싶어도 가지고 싸울 무기가 없었습니다. 물론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은 한국인들의 계획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반항과 폭력을 삼가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압제 밑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현 일본 정권의 한국 강점에 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저항의 원인 중 하나는 일본 당국에 의해 매우 세심히 ‘감시’당하던 전 국왕이 사망했을 때 국왕의 임종을 지켜 본 왕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모두 국왕이 독약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시종 한 명이 매수되어 수랏상에 독을 넣었고, 왕이 “나는 독살되었다”고 외친 후 발작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습니다. 또한 시종 두 명이 죽은 국왕이 남긴 음식을 먹고 모두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왕후 역시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국민들이 믿고 있었으며, 이같은 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규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첫해에 우리가 보았던 것과 비슷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일본 총독이 그 당시에도 한국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 당시 목격했던 것과 같은 수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무고한 남자들과 여자들, 아이들이 교수형을 당하고, 칼에 찔리고, 총에 맞고, 창에 찔려 비명 횡사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일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지난 주말 (보이지 않음, 일부러 지운 듯함)와 나는 상황을 목격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병원 수용소로 향하는 다리 위에 잠시 멈춰 있었습니다. 그 아래 거리에서 들리는 구령 소리가 점점 사라지더니 남녀 시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왜 거기에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물을 새도 없이 사람들을 붙잡아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으로 패고, 옷과 모자를 벗기고 발로 차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도달한 군인들은 교회 관리인에게 무언가를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관리인의 아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잘생긴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그 야만적인 군인들에게 다가서는 것을 보고 있던 나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했습니다. 그들은 총으로 그를 내려치고, 구둣발로 짓밟으며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곧 달려 나왔지만, 그녀는 주먹으로 머리를 맞고 발로 채였습니다. 덩치 큰 군인 한 명이 그녀를 총부리로 짓찧었습니다. 우리는 급히 달려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폭력을 가한 후 그의 귀를 잘라 냈습니다. 언제나 닫혀 있었던 교회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병원으로 실려 갔으나 머리를 심하게 다친 상태였고, 안면이 흉칙하게 부어 올라 있었습니다. 그녀의 체온은 무서운 속도로 급강하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을 접해 본 적이 없는 매우 얌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본 후 우리는 성경학회(Bible Institute)로 돌아왔습니다. (보이지 않음, 일부러 지운 듯함)와 나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내려갔습니다. 군경 당국은 다음날인 일요일까지 우리가 사태를 지켜보는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후 심부름꾼이 와서 경찰서장이 가능하면 거리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며 그러한 내용을 다른 외국 단체들에게 알려줄 것을 요청하는 전갈을 전했습니다. 또한 현재 거리에 군인들이 너무 많이 있으며, 우리가 거리에 나설 경우 경찰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므로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전했습니다. 일요일에 모든 교회를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교회마다 군인들이 배치됐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은 우리 성경학회(Bible Institute)와 앤 제미슨(Ann Jamison) 강좌 건물을 열어 놓고, 들어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건물들은 모두 꽉 찼습니다. 군인들은 거리를 순찰하고 다녔으나 우리의 활동을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의 가호와 안내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22 맥레이첸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21발신자: 수신자: 존 맥레이첸(John McRachen) 목사수신주소: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 래포드(Raeford)친애하는 맥레이첸(McRachen) 목사님|| 귀하께서 지난 18일 서한을 통해 한국의 사태와 관련하여 문의하신 내용은 현재 교회연방회의 산하 동양위원회(the Federal Council’s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에서 검토중입니다. 또한 서기(Secretary)인 시드니 L. 굴릭(Sidney L. Gulick) 목사님에게도 귀하의 서한을 전해 드렸습니다. 서기께서 귀하와의 대화에 기꺼이 응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123 맥머트리가 마르퀴스에게 보낸 편지

    복사본 발신일: 1919-03-10발신주소: 평양(Pyeng Yang)발신자: 로버트 맥머트리(Robert Mcmurtrie)수신자: 마르퀴스(Marquis)친애하는 마르퀴스(Marquis) 박사님|| 이 서한이 시카고(Chicago)에 도달하기 전에 귀하께서는 한국 사태와 관련한 급전신을 받아 보실 것입니다. 자세한 사항을 모두 전달해 드리고자 했습니다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정규 채널을 통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저희가 파견한 특사가 중국을 거쳐 귀하께 서한을 전달해 드릴 것입니다. 아래에서 현재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방 신문에서는 현재의 사태를 저희들의 책임으로 호도하고 있으나 외국인들의 신변은 안전합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밤마다 외국인 거주 지역을 교대로 순찰하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 이 상황과 관련하여 언론에 언질을 주신다면 이 Hunized(보이지 않음) 야만인들을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서명) 로버트 맥머트리(Robert Mcmurtrie)

    124 미국 장로회 선교사업단이 보낸 편지

    발신자: 미국 장로회 선교사업단(Presbyterian Mission)발신주소: 한국 평양(Pyeng Yang)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소위 문명국이라는 한 국가가 일으킨 전쟁으로 많은 국민들을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행히도 위해를 당하지 않고 우리의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맑은 하늘에 번개가 치듯이 한국은 혁명의 횃불에 휩싸였습니다. 목포(Mokpo)에서 백두산(Paik-to-san)에 이르기까지 촌부들까지 나서 무자비한 침입자로부터 독립과 해방을 외쳤습니다. 아마도 혁명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만큼 특이한 경우는 없었을 것입니다. 경찰의 감시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이 항쟁을 권총이 발사되듯이 순식간에 이루어 냈습니다. 함성 소리가 방방곡곡을 메웠지만 일본인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조금도 모르고 있었습니다.민간인들은 완전한 무장 해제 상태였습니다. 한 자루의 총도, 한 자루의 칼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누구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살인이 있었다면 그것은 일본인들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었으며, 분명 그들은 살인을 했습니다. 일본은 전세계의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구실 아래 동맹국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식민지를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이 식민지 국민들의 유일한 잘못은 (잘못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지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화답은 총과 검, 창이었습니다. 많은 점을 비교해 볼 때 벨기에(Belgium)에서 벌어졌던 것과 유사한 사태가 우리의 선교 지구에서도 벌어졌습니다. 한국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관계자들이 투옥되었습니다. 남녀 학교와 대학교에 대한 경찰의 폐쇄 명령이 내려졌고,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여성 성경학회(Woman’s Bible Institute)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회 신학교(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도 문을 닫았습니다. 군인들이 교회 문을 가로막고, 회합을 금지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업무는 마비되었습니다.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한국인들은 평화를 애호하는 국민들입니다. 이들은 세계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일본군의 무자비함 속에 방치되어 있는 위선적인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설명 드리자면, 수백 면은 족히 될 것입니다. 일본의 속셈이 독일의 속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복사판이라는 사실을 전세계가 상세히 알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한국 평양(Pyeng Yang)미국 장로회 선교사업단(Presbyterian Mission)

    125 한국|| 함흥(Hamheung) 사건에 대한 D. M. 맥레(D. M. McRAE) 목사의 성명서

    작성일: 1919-03-20작성처: D. M. 맥레(D. M. McRAE)(캐나다 장로교 선교단 회원)함흥(Hamheung)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전인 1919년 3월 2일 밤과 3일 아침에 기독교계 학교의 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습니다. 3월 3일 월요일에 경찰은 상점의 폐쇄를 명령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수의 인파들이 대로에 모였습니다. 누군가 호각을 불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외치며 깃발을 흔들었습니다. 각 학교의 학생들이 참가했으며, 이들 다수가 체포되었습니다. 이날 일본인 소방수들은 갈고리 창 모양의 소방 기구를 들고 나타났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습니다. 3월 4일 12시 30분경 거대한 함성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인 소방수들은 도끼, 쇠창살, 쇠막대, 각목, 곤봉, 갈고리 같은 무기를 들고 군중 속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머리를 가격하고, 무차별적으로 갈고리를 휘둘렀습니다. 이로 인해 심각한 부상자들이 발생했으며,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 소방관들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채규새(Chai Kyusae)라는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그는 학생이었고, 그의 형은 경찰관이었습니다. 그는 심한 고통에 울부짖었고, 얼굴 왼쪽 편에 끔찍한 상처를 입은 채 피를 흘리며 한쪽 벽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며칠 후 중태에 빠진 상태로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두 명의 일본인 소방관에 의해 경찰서로 질질 끌려 왔습니다. 그의 얼굴 전체에 구타의 흔적이 역력했으며, 얼굴 형태가 완전히 일그러진 채 얼굴 왼쪽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왼쪽 다리 역시 벽에 매달려 있었으며, 신음을 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 쉰 살 가량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며칠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별다른 제재 없이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채학성(Chai Haksung)입니다. 경찰서로 끌려온 사람 가운데에는 박이신(Pak Yichin)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비기독교계 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두개골이 심각하게 함몰되어 있었고, 며칠 후 빈사 상태에서 친구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날, 최소한 일곱 명의 한국 남자들과 많은 여자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경찰과 헌병대는 체포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비춰졌으나 무기를 든 채 한국인들을 체포하던 소방관들을 경호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저항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각목을 들지도, 돌을 던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욕설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3월 6일에도 함흥(Hamheung)의 상점들은 여전히 폐쇄된 상태였고, 다수의 군중들은 다시 거리로 몰려 나왔습니다. 이들은 우시장 옆에서 다시 만세 삼창을 외쳐 댔습니다. 일본인 소방관들은 다시 각목을 들고 군중 속으로 몰려갔습니다. 다수가 구타당하고 체포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 편응관(Pyon Eung Kwa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각목으로 머리 뒷부분을 가격당한 뒤 거의 사망 상태로 경찰서에 끌려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어느 누구 하나 돌을 던지거나 각목을 휘두르지 않았으며, 욕설 한마디 들려 오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편(Pyun) 씨는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풀려 나왔습니다. 그 뒤 며칠 후 함흥(Hamheung) 인근 도시에 장이 서던 날 함흥(Hamheung)에서처럼 한국인들이 만세를 외쳤다는 신빙성 있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경찰이 이를 제지하지는 않았으나, 곧 경찰 당국이 몇 마디 하자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3월 13일에는 신흥(Sinheung)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경찰은 무방비 상태였던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네 명이 죽고 네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망자 가운데에는 물동이를 머리에 얹고 지나가다가 총에 맞은 여성도 있었습니다. 사상자들의 피로 범벅이 된 거리에서 분노한 한국인들은 헌병대를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함흥(Hamheung) 인근의 성독(Sungdok)에서는 네 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가운데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상이 3월 15일까지함흥(Hamheung) 및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사태에 대한 간략한 정보입니다. 이상과 같이 저는 3월 4일 발생한 사건들을 자세히 목격했습니다. 1919년 3월 20일, 서울 D. M. 맥레(D. M. McRAE)(캐나다 장로교 선교단 회원)

    126 오웬스가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5-24발신주소: 세브란스 의대, 서울, 한국지금 한반도는 브리스(Bryce) 자작(Viscount)의 조사 위원회(investing commission)에서 조사할 것이 너무나 많은 상태이다. 요동하는 현재의 국제 정세가 한반도에도 미치고 있으며, 이에 국민들은 자유를 요구하며 봉기하고 있다. 지난 3월 1일 이후 일제가 보여준 행동은 최근 유럽을 휩쓸었던 프로이센(Prussian)의 전쟁광들의 행동과 같았다. 벨기에(Belgium)에서 벌어진 잔혹 행위들이 이곳 한반도에도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한 신문에 의하면 현재 감옥과 구치소에 투옥된 한국인들은 6천 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실제보다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다 많은 자유를 쟁취하려는 운동이 국토 전역을 뒤덮었다. 주동자들 가운데에는 개신교도인 기독교인들, 천도교(Chuntokyo) 신자 및 불교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공립학교의 학생들 역시 기독교계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리고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가혹 행위들이 매일 시민들에게 가해졌다. 일본의 식민제도 일본은 1908년 한국에 대한 섭정을 시작했고, 1910년 공식적으로 한국을 병합했다. 병합 직전 한국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일본은 가혹한 억압 정책으로 침묵과 질서를 유지했다. 곧 이어 천연자원을 반출하기 시작했고, 사법 체계를 세웠으며, 교육의 기초를 다지고, 통신 설비를 발전시켰으며, 향상된 공중 위생 체계를 갖추었다. 일본의 원조 아래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시행 방법에서는 민심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독재 체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의 통치 체제의 핵심은 독일과 유사하다. 식민 통치에 있어서도 그들은 영국식 통치 모델보다는 독일식 모델을 채택했다. 칼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군인, 헌병, 경찰뿐만 아니라 공무원들과 남자 교사들도 칼을 찼다. 실제로 모든 관공서 근무자들이 권위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있었다. 군사정권을 지지하기 위하여 거대한 스파이 조직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따라서 집회와 연설, 출판의 자유는 없었다. 면책 특권도 없어 청원의 권리도 없었다. 자치에 의한 참여도 보장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나중에는 마을의 촌장조차도 일본인만이 할 수 있었으며, 이들의 주된 임무는 세금 징수였다.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소송을 걸 수도 없었다. 인신 보호 영장 제도는 있지도 않았다. 정부는 피의자를 법정에 세우기 전까지 2주일 동안 감금할 수 있었으며, 보호 연장의 명목으로 추가로 열흘을 더 감금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음먹기 전까지는 피의자를 석방할 필요가 없었다. 피의자는 변호인을 접견할 권리도 없었으며,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고문은 자유롭게 행해졌으며, 피의자는 무죄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무조건 유죄였다. 한국인들은 정부 관할 관공서에서 임금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경찰과 헌병대에는 소수의 한국인들이 있었지만 다른 공직에는 거의 없었다. 한국은 일자리를 찾는 일본인들에게는 천국이었다. 젊은이들에게 악영향을 주기 위한 온갖 시도들이 관리들에 의해 행해졌다. 상업적 매춘이 몰려 들어와 도시에서 시골까지 전역에 퍼졌다. 독립 단체들에 접수된 국민들의 청원은 다음과 같다(첨부 문서 Ⅰ 참조).학교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키자 한국인들이 심한 반발을 했다. 교육 과정에서 일본어를 주언어로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로 취해진 이러한 강제 조치는 1920년부터 시행되었다. 한편 남부 지방에서 한국인들을 추방하려는 조직적인 시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방은 좀더 기후가 온화한 곳으로서 일본은 이 지역 거주민들을 만주(Manchuria)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려 하고 있다. 한국인 농장 소유자들에게 불리한 가격으로 토지를 팔 것을 종용하여, 이들의 가족이 새로운 토지를 찾아 북쪽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 일본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책은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는 반(半)정부 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Oriental Development Company)가 담당하고 있다. 한 선배 전도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러한 상황을 신랄하게 요약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철로를 개설하고, 도로를 확장하고, 교육을 장려하며, 공중 위생을 개선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독일인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일본의 개혁 경향한마디로 일제 정권의 통치 체계는 전반적으로 독일과 흡사하다. 이로 인해 정부의 민간인 행정부는 군사 정권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지난 9월에는 테라우치(Terauchi) 총독의 관료 정권이 실각하고, 하라(Hara) 정권이 들어섰다. 새 정권은 일본의 언론으로부터 일본 역사상 최초의 민주 정부로 갈채를 받았고, 그들의 행동으로 볼 때 이러한 명칭을 부여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각이 구성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모 장관은 새 정권의 식민 정책에 대한 답변을 통해 제국의 칙령으로는 더 이상 통치를 유지할 수 없으며, 새로운 방법을 구상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그 시기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언론 보도에 의하면 내각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민간 세력들은 한국의 군사 정권을 민간 정권으로 대체시키기를 원하고 있었으나, 군국주의 세력들은 어떠한 변화도 원치 않았다. 군국주의 세력들은 강제 징집 제도를 철폐하려는 평화회담(the Peace Conference)의 대표자 파견에 대해서도 비준할 수 없다고 일간지에서 떠들어댔다. 그렇지만 3월 1일 성인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거대한 민중 집회가 도쿄(Tokyo)에서 일어났다. 며칠 뒤 하라(Hara) 정권은 참정권의 확대에 관해 의회의 비준을 받은 새로운 선거법을 공포했다. 이를 통해 볼 때 전제 정권에도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식민지의 밝은 앞날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한국 독립운동의 기원그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로 한국에서 위기 상황이 고조되었다. 그 시초는 평화회담(the Peace Conference)에서 제창된 민족 자결주의(the doctrine of self-determination of races)였다. 한국총독부(the Government General of Chosen)의 내무장관이 선교사 단체 대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어느 한국인이 윌슨(Wilson) 대통령이 파리(Paris) 강화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Paris)로 떠나기 직전 그와 인터뷰를 했고, 한국 문제를 회담의 의제로 제기할 수 있는지 질문했다고 하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말했다. 윌슨(Wilson) 대통령은 강화 회담은 전쟁에 연관된 국가만을 의제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나라의 평화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질문자는,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상황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는지, 또 그렇다면 이를 강화 회담에서 논의할 수 있는지 질문했다. 그러자 윌슨(Wilson) 대통령은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논의가 가능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정보를 통해 볼 때도 이는 매우 신빙성 있는 사실이다. 현재 미국 서부, 하와이(Hawaii), 시베리아(Siberia), 중국 전역에 수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며, 이들 한국인 밀집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강화회담은 또 다른 일련의 부산물을 낳았다. 약소 국가들의 민족자결 권리를 전파하며,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 국가들을 전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탄생이 그것이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존재는 한국 지식인층의 상상력을 한층 불타오르게 했다.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사태는 국민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1월 20일 한국의 전 국왕이 서거했다. 왕세자와 일본의 공주가 혼인하기 전날에 발생한 일이었다.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라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전 국왕의 죽음은 자살이거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찬성한다는 문서에 국왕이 서명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이러한 문서가 전 국왕에게 보여진 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전 국왕의 죽음과 관련한 소식은 며칠간 보도가 금지되었다. 도쿄(Tokyo)의 의회는 국왕의 장례식 비용으로 10만 엔의 지출을 의결하고, 애도의 표시로 휴회했다. 1894년 암살당했던 전 국왕의 왕비는 서울의 동대문 외곽에 묻혀 있었다. 국왕은 서울에서 약 17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안장하기로 하고, 한국의 관습에 따라 왕비는 그 옆에 안장하기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왕비의 묘는 이장되었다. 2월 12일에 이장의 예식이 치러졌고, 장대한 행렬이 이어졌다. 이 모든 비용은 한국 국민들이 부담했다. 이 일을 통해 한국인들은 치욕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국왕의 장례식은 3월 3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서울 안에서의 예식은 일본식으로, 서울 외부에서는 한국식으로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일본식의 장례 예식이 한국인들의 진심 어린 동의를 받지 못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위의 발발분위기는 경직되어 갔다. 당국자들은 무언가 계획이 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각 학교의 교장들은 시장의 명령으로 시청에 집합했고, 일본의 한국 학생들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학생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경고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그해 2월에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있던 한국 학생들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운동을 시작했으며, 결국 대규모로 투옥되었다. 3월 1일 토요일 파고다 공원(Pagoda Park)에서 대중 집회가 있을 예정이라는 공고가 거리에 나붙었고, 33인의 대표자들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에 이 대표자들은 한 한국 식당에 모였다. 이들은 일본 당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들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밝히고, 현재 있는 곳을 알렸다. 당국은 체포대를 급파했다. 경찰 당국은 이들 주모자들이 자신들의 음모를 위한 축배를 드는 순간 이들을 포위했다고 신문에서 밝혔다(선언서는 증거품 Ⅱ를 참조).그 동안 많은 학생들을 포함한 군중들이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대로(大路)로 나아가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질서 정연하게 행진을 하면서 두 손을 높이 올려 “만세”를 외쳤다. 이 말은 ‘만 년 동안’을 의미한다. 이들은 경찰서 같은 공공 건물이나 각국 영사관 앞에 멈춰 서서 모자를 벗어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영사관에서는 서한과 함께 독립 선언서를 전달했다. 어떠한 무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병대들은 군중 속으로 돌진하여 칼로 사람들을 베기도 했다. 경찰은 잡을 수 있는 만큼 사람들을 잡아들였으며, 이날 오후와 다음날인 일요일에 걸쳐 시위에 연계되었다는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가택에서 체포하였다. 33인의 대표자 가운데 15명은 민족 종교인 천도교(Chuntokyo)인이며, 15명은 기독교인, 그리고 3명은 불교도였다. 기독교인의 다수는 여러 도시의 교회 목사들이었으며, 모두 대학 교육을 받았다. 한 명은 YMCA의 서기였으며, 또 한 명은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후 매일 체포가 진행되었고, 목사가 투옥되지 않은 교회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일요일인 3월 2일에는 다음날이 국왕의 장례식인 관계로 시위가 없었다. 일본식 장례 행렬을 따라 학생들이 곳곳에 배치되었다. 상급학교와 공사립, 기독교계 학교를 대표해 참석한 사람은 교원들뿐이었다. 학생들은 이 행사를 외면했다. 장례식은 군대 행렬이었다. 첫번째 행사는 육군과 해군의 파견대로 구성된 행렬이었다. 마지막 대열이 시작점을 통과하는 데에만 18분이 걸렸다. 두 번째 행사에는 신토(Shinto)의 사제와 관료, 정부의 대표자들 및 공무원들이 참석했으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세 번째 행사는 군인들과 수병들의 행렬로서 첫번째 행렬만큼이나 길었다. 다음날 서울에는 행사가 없었으며, 장례식은 서울 이외의 도시에서 한국식으로 치러졌다. 이 이틀간 각급 학교는 휴교했다. 다음날인 3월 5일 상급학교 학생들은 출석하지 않았다. 한국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은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학생 대표들을 통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모든 상급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런 소문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3월 5일 수요일 오전 9시를 기해 커다란 소요가 철도역 앞의 대로에서 일어났다. 상점과 골목에서 뛰쳐나온 젊은이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철도역으로 향했다. 순간 인력거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일어나 군중들이 에워싸고 있는 남대문으로 향했다. 높이 든 손에는 빨간 끈을 잡고 있었고, 남대문을 지나 구시가로 들어서서 왕궁으로 달려갔다. 이 행렬은 대부분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행진이 이어지자 여고생들도 참여했다. 경찰이 그들과 대치할 무렵 그 행렬은 반 마일이나 이어져 있었고, 이에 경찰 당국은 매우 놀랐다. 왕궁 앞의 대규모 광장에서 경찰은 시위대와 대치하였고, 장도로 군중들을 공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성별에 대한 고려도 없이 여학생들도 거칠게 다루어지고 맞았다. 학생들은 어떤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분명한 목적은 단지 그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에 있었으며, 조국을 위해 체포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행렬이 거리를 지나갈 때 세브란스(Severance)의 간호학생들도 모두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구급품을 들고 있었으며, 필요할 경우 적십자 활동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15명이 체포되었으며, 이들은 정오까지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었다. 이들은 학교의 교장(선교사들)이 선동했는지 여부를 집요하게 추궁당했다. 이들은 오후 늦게나 되어서야 풀려났다. 이때 여학생들은 모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어린 여고생들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여전히 구금되어 있었다. 감옥에서 그들이 당한 고통에 대해서는 이후에 서술하도록 하겠다. 유사한 시위들이 계속 발생했다. 전차 설비 근로자들은 항의의 뜻으로 수일간 파업을 했다. 한국인 상점 주인들은 문을 닫고 3주 동안이나 폐업했다. 지식인들은 청원서를 준비했다(증거물 Ⅲ 참조). 기독교와 비기독교도들이 총독부에 이를 구두로 전달하려고 했다. 총독부에서는 이를 경시청에 전달하라고 했다. 그들이 이 말에 따라 경시청으로 갔으나 곧 체포되었다. 이 청원서와 독립 선언서는 웅장한 문체로 서술되었으며, 한반도를 ‘공포정치’로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자비의 정신이 숨쉬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수도 외곽 지역에서의 시위서울에서의 사태에 규합하여 유사한 성격의 시위가 전국 각지의 대도시에서 일어났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시위는 모두 질서 정연했다. 그러나 사태를 관찰할 외국인이 거의 없는 다른 도시들에서는 법의 앞잡이들이 극도의 포악함을 보였다. 군중들은 불에 타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북부 도시에서 발생한 두 번의 총탄 사건으로 발생한 부상자들이 세브란스 병원으로 실려 왔다. 대도시인 평양(Pyeng Yang)에서는 소방관들이 불탄 이엉을 벗겨 내는 데 쓰이는 갈고리로 무장을 한 채 군중들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선교사들이 전해 왔다. 심각한 부상이 발생했다. 병원에 있던 총상자 중 다섯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당국은 이 사건으로는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북부 지역에서 당국이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려고 마음먹은 듯 교회들이 무자비하게 파괴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경찰들이 기독교인인지를 묻고 이를 시인하는 사람들만을 잡아들였다. 부유층들은 33인의 지도자들이 하층민들이라는 성명에 사인하도록 종용 당하였다. 이를 거부할 경우 이들은 결국 항복할 때까지 수일간 탄압 당하였다. 부유층들 역시 경찰 당국의 정기 회계 감사를 위해 개인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당했다는 점도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한반도에 미온한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캐나다 장로회의 교당이 있는 동부 해안도시 함흥(Hanheung)도 상황은 평양(Pyengyang)과 유사했다. 곤봉으로 무장한 소방관들과 저임금 노동자들이 시민들을 폭행했다. D. M. 맥래(D. M. McRae) 목사의 목격담을 싣는다(증거물 Ⅳ 참조). 이곳에서 당국은 부상자들을 기독교계 병원으로 후송하자는 요구를 거절했다. 맥래(McRae) 목사는 경찰서에 갈 일이 생겼고, 이때 갈고리를 든 소방관들과 곤봉을 든 저임금 노동자들이 시민들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기다리며 텐트 속에 있는 것을 보았다. 이들이 경찰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를 안심할 수 없었다. 외국인들을 겁주기 위해 경찰국장은 비기독교인들에 의해 그들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협박했으나, 맥래(McRae) 목사는 이를 일각에 거절하고 모든 외국인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경찰서장에게 밝혔다. 다른 곳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해서는 모두 기록하기가 어렵다. 위에서 밝힌 것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사태의 공정한 실례들이다. 사태의 상황을 기록할 외국인들이 없는 곳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 기관지들은, 특히 초기에 인쇄된 신문들은 이 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선교사들을 추궁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일에 관여되었다는 기사들이 나왔다. 다른 집단들에 의한 행동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이 동원되었다. 경찰 기자들은 공립이나 불교계 학교의 학생들이 관여한 사실은 축소시키고, 기독교계 학교의 관여에 대해서만 기사를 써 댔다. 미국 영사관측의 요구에 의해 일본 정부는 선교사들의 선동 사실과 관련해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으나 경찰 관련 보도와 지방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계속해서 누명을 씌웠다. 경찰의 잔학성구타와 고문은 경찰의 주된 수단이었다. 체포 시에는 수갑을 채우고, 피해자를 여러 명의 경찰이 발로 찼다. 3월 5일의 집회에서 한 학생은 자신의 약혼녀가 여러 명의 경찰관에게 공격을 받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를 구출하려던 그는 동시에 여러 명의 경찰관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심하게 맞았다. 구금 후 3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아직 석방되지 못했다.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이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한국인 시위자들을 붙잡아 치욕적으로 대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이런 일들은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Pyeng Yang)을 비롯한 곳곳에서 일어났다. 석방된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고문과 잔혹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한 학생은 주동자가 누군지 추궁받았는데, 경찰은 그의 기억을 돕기 위해 손톱을 잡아 뺐다. 같은 질문을 추궁하면서 어떤 사람은 손가락 끝을 태우기도 했다. 어떤 이는 직립 압축기에 매달려 있었다. 이 기계는 나사 하나로 조정이 되었는데, 나사를 돌려 압박을 더욱 강하게 주면서 경찰은 원하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 답변을 추궁했다. 이렇게 고문을 준 후 이 사람의 가운데 손가락에 질긴 끈을 동여매고 그가 발가락 끝으로 겨우 지탱할 때까지 끈을 당겨 손가락을 천장에 매달았다. 그는 제정신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상처에 연고가 발라져 있었고, 이미 모든 추궁에 순순히 응한 상태였다. 그는 손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 석방되었고, 피고름을 짜내야 했다. 여성들은 더 비참했다. 체포 후 며칠 동안 그들은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었다. 조사된 바로는 여성 구금자를 위한 여자 간수는 없었다. 물론 이 구금자들은 친지나 친구들과 접견할 수도 없었다. 한 여성 피해자가 진술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체포된 지 몇 시간 후 그녀는 경관 한 명에게 불려 갔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경관이 그녀의 얼굴과 어깨와 다리를 가격했다. 다음날 또 다른 경관이 같은 폭력을 썼다. 셋째날 그녀는 다른 경관에게 불려 갔다. 그는 그녀에게 상스런 말을 하면서 그녀와 다른 여성 구금자들이 임신을 했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녀는 “내 배를 갈라서 확인해 보라”며 반발했다. 그러자 그는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 죄악이 없는 인간은 모두 나체라며(아담과 이브의 구절을 인용) 그녀에게 옷을 벗을 것을 명령했다. 그녀가 울자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맞았다. 넷째 날에도 또 다른 경관에게 답변을 추궁당하고 다시 맞았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시간 동안 무거운 판자를 팔에 매달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팔이 떨리면 또다시 맞았다. 여성 구금자들은 화장실에 갈 때도 간수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다섯째 날에 그녀는 서대

    127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09발신주소: 한국사랑하는 어머니께, 우리는 참혹한 한 주일을 보냈습니다. 잔인함이 뿌리 깊이 박힌 프로이센주의(Prussianism)가 지난 주말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 전모를 모두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대략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평화 시위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폭력이나 폭동을 일으키지 말도록 주의하였습니다. 마치 우리 고향의 평화로운 독립기념일 행사와 같았습니다. 토요일 밤 군중들은 다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했고, 세 명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비무장 상태의 평화로운 군중들에게 발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선교사 지도부들이 한밤중에 경찰서장에게 불려 갔습니다. 경찰서장은 다음날인 일요일 교회 예배가 열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대부분의 교회를 포위하였습니다. 교회 문을 잠근 채 감시했으며, 어떤 사람도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아무 곳에도 갈 수 없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보여준 판단의 한 일례일 뿐입니다. 그곳에서 시위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오직 정기 교회 예배일뿐이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언덕 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이들이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군인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고, 신도들이 기도를 위해 무릎을 꿇자 군인들이 무리의 바깥쪽에 있던 사람들을 개머리판으로 내리 찧는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은 아름답고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이날 사람들은 신학교의 운동장과 뒷산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군인들이 이곳에 소집되었습니다. 신도들의 무리가 너무 커진다고 생각하면 군인들은 총칼을 들고 사람들 속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말의 ‘후라(hurrah, ‘만세’ 하고 외치는 소리)’에 해당하는 ‘만세(Mansie)’를 부르면 군인들은 더욱 가혹해졌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진 그 참혹한 광경들은 차마 묘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희망 없고 불쌍한 이들, 남성과 여성, 소년과 소녀들에 대한 테러 행위가 벌어졌습니다. 이들은 붙잡힌 남성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차고 짓밟고 쓰러뜨렸습니다. 아, 그 짐승 같은 모습이라니. 어느 선교사는 약 30명 정도의 분대원들이 남성 한 명을 붙잡고 돌아가며 가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후 그 우두머리는 칼을 머리 위로 빼들고, 그 남자를 두 토막 내었습니다. 저는 두 명의 군인이 넘어져 있는 한 남자를 때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일어서려고 애쓰고 있었고, 몇 발자국을 걸어갔지만 그때마다 군인들은 그를 구타하고, 넘어뜨린 후 마침내 그를 질질 끌고 거리로 나아갔습니다. 거리 양쪽에 한 명씩 서서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격을 했습니다. 이 군인들은 아마도 곤봉이나 총을 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그를 발로 짓밟았습니다. 군인들이 두 명의 할머니를 도랑에 쳐 넣고, 개머리판을 휘두르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이들은 마치 총으로 위협하는 듯했습니다. 할머니들을 위협하기 위해 실제로 공포탄을 발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짐승 같은 군인이 어린 소년의 머리를 구타하고, 다른 군인은 소년의 팔을 구타하는 장면을 본 분도 있습니다. 저희 신도 한 분은 네 명의 군인들이 넘어져 있는 젊은 신도 한 명을 개머리판으로 구타하는 것을 보았고, 다른 분은 한 노인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군인들은 노인 한 명이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 발로 밟고, 그의 아내가 이를 항의하자, 그녀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며 끌어내었습니다. 이후 소방관들이 군인들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이들이 입은 복장은 흡사 악마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이들은 가벼운 복장을 하고, 끝에 갈고리를 단 긴 막대를 들고 바람과 같이 달려들었습니다. 실로 무서운 장면들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불쌍한 한국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일본군의 잔혹성을 샅샅이 제 두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들은 토끼처럼 달렸습니다. 사람들을 쫓아 우리의 터전 곳곳을 휘저었습니다. 체포에는 방법이 따로 없었습니다. 노인, 여성, 소년소녀는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체포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반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흉악함은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자유를 원할 뿐인 불쌍하고 무력한 민족을 위협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 목사님들과 후원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첫째 날에는 남학생들 대부분과 여학생 몇 명을 잡아갔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풀려났으나 일부는 여전히 구류중입니다. 일본인들의 감옥과 유치장은 꽉 찼습니다. 무력 지배는 수요일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매일 군인들의 흉악성은 도를 더해 갔습니다. 더 이상 사태를 용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우리는 서울에 있는 우리나라 영사에게 대표자를 보냈습니다. 다행히 신의 도움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영사는 이곳에서 그 동안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이제 전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본인들은 모든 사실을 은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말씀드린 것은 모두 우리가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한국인들로부터 더 참혹한 이야기들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일본인들은 단순히 조국을 위해 기운을 북돋우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감리교 병원에는 열두 명의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당한 사람들입니다. 한 어린 소년은 이제 막 열두 살이 되었고, 한 명은 사망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군인 한 명이 그냥 길가에 서 있던 한 구경꾼을 등뒤에서 칼로 베고는 피를 흘리는 그를 뒤로 한 채 지나가는 것을 본 신자도 있습니다. 어제 약 1백여 명의 신자들이 포승줄에 묶여 서로 엮인 채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옷은 진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어떤 이들은 절뚝거렸습니다. 나는 요리사에게 거리로 나가 쌀을 사오게 했으나, 그는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그를 경찰서로 끌고 가 그가 왜 거리에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 밖에 있었다고 대답했으나 그들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며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때리는 것은 그들이 흔히 저지르는 일반적인 행동입니다. 경찰들은 그에게 “만세”를 불렀느냐고 묻고,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뺨을 때렸습니다. 다시 “그렇다”고 대답하면 다시 뺨을 때렸습니다. 그러고는 “우리는 더 이상 가둘 곳도 없다”며 그를 밖으로 차냈습니다. 그는 그 거리를 걸어 왔습니다. 사실 수요일 이후로는 군중들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경찰과 군인들은 여전히 그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찰서에서 무자비하게 맞았습니다. 경찰들은 사람들을 거리에서 체포하고, 집으로 찾아가 붙잡아 오면서 위협하고 있습니다. 신학교 학생 가운데 다섯 명이 체포되어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시위에 참가한 적도 없습니다. 그 중 두 명은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두 명의 감리교 여신도(미국인)들이 병원에 들어갔지만, 군인 한 명이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그들을 제지했습니다. 그들이 돌아서자 그는 등뒤에서 총으로 그들을 구타했습니다. 다른 여신도들은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군인 한 명이 막아서더니 그들을 밀었습니다. 다른 병사 한 명은 등뒤로 다가와 그들을 밀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잔인하게 대했으며, 시골에서는 정도가 더욱 심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교회를 손상시키고, 보이는 모든 성경책을 압수해 파손시켰으며, 성찬대를 파괴했습니다. 한 한국인이 우리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떠나자 기마대 군인 한 명이 그 한국인을 불러 그가 외국인 목사와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물었습니다. 그에게 기독교인인지를 묻고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를 때렸습니다. 더 써야 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반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략적인 사태의 추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문제와 이 문제를 연관시키고 싶지 않으며,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독립 문제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도적인 관점에서 대항하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영사가 있습니다. 저는 이 편지에서 더 자세한 것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편지가 ‘펠리시테인(일본인)’의 손에 들어갈까 두렵습니다. 이 편지는 우회적으로 전달될 것입니다. 만일 이 편지를 받게 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무력한 민족을 짓밟기 위한 일본군들의 잔인함으로 인해 정의와 자비를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하여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잔혹함이 멈춰질 수 있다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펠리시테인(일본인)’들은 이야기의 공개를 두려워하며, 사실 은폐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할 것입니다. 체포자와 사망자의 수를 정확히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일본 당국은 학생들로부터 소요가 시작되었고, 이를 ‘폭동’이라고 불렀으며, 경찰이 이를 제압했다는 문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평화로운 시위였으며, 군인들에 의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폭동도 없었습니다. 폭동이 일어났던 한 시골 지역에서는 병사들이 군중들에게 총을 발사했습니다. 이들은 단지 “만세”를 외쳤을 뿐입니다. 군중들은 흥분하였고, 병사들에게 대항했습니다. 아, 더 많은 이야기들을 쓸 수 있지만, 어머니께서 잠자리에 들지 못할까 봐, 아니면 악몽을 꾸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저는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습니다. 제가 보았던 그 잔인한 악당들, 야만인들이 다시 보입니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고, 한국인들은 무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슬픕니다. 군인 두 명이 마침내 저희의 손님이었던 미국인(남성) 두 명을 잡아갔습니다. 이들은 신전 안쪽에서 군중들을 보고 있다가 경찰서로 잡혀갔습니다. 여섯 명의 군인들이 이들을 감시하며 따랐습니다. 다행히도 이 중 한 명의 미국인은 일본어를 잘할 줄 알았습니다. 이들이 경찰서에 도착하자 군인들은 이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경찰서장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자기 땅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기만 했던 미국인들을 붙잡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들을 붙잡아 온 군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서장은 “여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는 것을 선동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들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여학생들은 만세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여학생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두 명의 미국인들 옆을 지나 조용히 운동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군인들이 이들을 총으로 위협해 언덕 밑으로 끌어내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즉시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어를 잘하는 그 미국인에게는 몇 마디 경고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그들에게는 두려운 실수임이 분명하고, 이런 일이 곧 다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일본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만일 일본이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평화회담(Peace Conference)도 그들에게 통치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교회에 알려주십시오. 수요일 이후 군중들은 모이지 않았지만 무력 지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정찰자들은 빽빽이 널려 있습니다. 제가 다시 이렇게 우회적으로 편지를 쓸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무력이 이 땅을 떠나지 않아도 다시 편지를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포토맥(Potomac) 강 위에서 모든 것은 고요합니다”라고 쓴다면 사태가 잘 풀린 것이고, 부정적으로 쓰게 된다면 그 반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 이 억압받는 이 불쌍한 한국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제 피는 끓고 있고, 마음은 고통스러우며, 제가 본 장면들이 저를 상처 입게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얼마나 힘들지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이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저희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안전합니다. 신은 우리편이며, ‘자유의 땅’ 미국의 정부가 우리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최근 저에게 일어난 일들입니다. 사랑을 담아 모두에게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또 이 잔혹함에 대하여 가능한 한 널리 알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로부터

    128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25발신주소: 평양(Pyeng Yang)|| 한국발신자: 수신자: A. J. 브라운 (A. J. Brown) 목사수신주소: 뉴욕(New York) 주 뉴욕 시 친애하는 브라운(Brown) 박사님|| 제가 지금까지 입수하여 몇몇 분들께 보내기 위하여 복사한 서류들을 동봉합니다. 박사님께서도 흥미 있어 하실 것입니다. 박사님께서 보시는 대로 이 자료는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다만||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쓴 사람의 이름도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작성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시기 때문에 그 문제에 관해서는 할 이야기가 없겠지만 저는 이 전신에 제 이름이 거론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시면 작성자를 아실 수 있을 것이며|| 이 편지의 내용이 그 추측을 뒷받침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료를 세 개의 파일로 나누었고|| 그 중 하나는 박사님께 보내기 위해 분류하였습니다. 이 자료를 박사님께 보내 드릴 것이며|| 자료가 이 편지와 함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곧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자료는 12개 부분으로 개별 분류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제 개인적인 견해는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자료를 수집하기만 했습니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이 원할 경우 이 자료를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정보들은 속속 입수되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자료들은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앞으로 보내 드리는 자료는 앞서 분류한 체계대로 나누어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적당한 파일에 보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미국의 신문에 보도되는 내용은 매우 무시무시한 소식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도되는 것조차도 실상의 반도 그리지 못한 것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외국인이 거주하는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시골의 군인과 헌병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극악무도한 이야기들에 비교하면 양호한 편입니다. 무리 없이 제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마도 시골 주민들은 그 험악한 이야기들을 외국인들에게 함으로써 외국인들의 동정심에 힘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시골로 내려가 사태를 목격할 때까지 이 문제를 사실로 여기려고 합니다. 로버트(Roberts) 씨께서 충주(Tyungju)에 있는 자신의 토지와|| 역시 그의 소유인 오산학교(Osan School)를 방문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박사님께 말씀드릴 것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가 일본인들의 사주에 의해 어떻게 불타 없어졌는지|| 또 경찰과 헌병들에 의해 오산학교가 어떻게 불탔는지 로버트(Roberts) 씨께서 박사님께 말씀드릴 것입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분들은 우리 소유의 땅에서 열다섯 채가 넘는 집들이 군인들에 의해 불탔다는 사실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평양(Pyeng Yang)에서는 군인들에 의해 18개가 넘는 교회가 불탔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장로교회만을 포함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감리교회가 같은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야만족의 행위라는 표현 외에 우리가 목격한 일들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는 보도된 내용만을 믿도록 이끌려 왔습니다. 제가 지금 보내 드리는 자료들과 앞으로 보내 드릴 자료에 있는 모든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우리는 이곳에 머물며 계속 상황을 보고할 것입니다. 무분별하게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작업에 방해가 됩니다. 라이너(Reiner) 여사께서 귀하와 브라운(Brown) 여사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29 한국 독립운동

    3월 1일 발발하여 좋은 기대감 속에 두 달째 지속되고 있는 한국 독립운동은 동아시아의 ‘발칸 문제’의 진지한 발현이다. 근동 아시아와 극동아시아의 발칸 문제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많지만, 그 문제의 핵심은 동일하다. 즉 기형적인 무력 통치, 영토의 비정상적인 조정, 자연스런 민족적 인종적 특질에 대한 무시, 관습과 편견, 시민에 대한 원치 않는 무력의 행사, 그들의 의사에 반하는 법과 협약 등 이 모든 것은 열강들의 조약과 협의 아래 동의되고 인가 받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매우 짧지만 매우 비극적이었다. 1876년 이전에 이 나라는 명목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은자의 땅’이었다. 1876년과 1885년 사이 열강들은 ‘개항’을 무력으로 강요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점차 많은 나라들이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명목상으로 한국은 수년 동안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였다. 봉신의 위치에서 매년 공납을 했다. 그러나 국가의 행정권과 다른 나라에 대한 외교권은 절대적으로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다. 1894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한국은 봉신인 동시에 자유독립국가라는 이중적인 상황에 놓였다. 이 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Shimonoseki)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의해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한국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를 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러시아가 한국을 세력권 안에 두게 됨으로써 1904년 러일전쟁을 촉발시켰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결정적으로 한국에 대한 우월한 권리를 갖게 된다. 이후 사태는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1907년 일본은 프린스 이토(Prince Ito)를 통감으로 파견하면서 섭정을 시작한다. 이 통감 정치는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공식적으로 완전히 병합되면서 종결된다. 다른 강대국들은 공사를 철수시키고, 모든 외교 업무를 영사 업무로 이관하면서 이를 인정하게 된다. 한국은 동아시아 문제의 핵심이다. 모든 혼동과 오해, 30년간에 걸친 전쟁은 결국 근본적인 원점인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에 관한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 문제에 천착하게 되면, 동아시아의 상황 전반에 대해 정통하게 됨으로써 동양에서의 문제들이 드러나게 된다. 일본은 한국인들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무시하고, 현실적인 노예의 상태에 종속시킬 수 있다. 일본은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의 정의와 권리의 확립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 되어 버렸다. 이 글의 목적은 이 문제에 관한 정치적인 양상을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 상태에 대한 조망을 도우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일본이 현재의 형태로 통치를 계속해야만 하는지의 도덕적 권리에 관해 어떠한 추론으로든 입장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한국인 봉기에 관한 개요봉기는 3월 1일 1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일본인들의 감시가 모든 사고와 행동, 삶의 곳곳에서 빈틈없이 행해졌지만, 조직적인 단체들에 의해 이 계획은 주도 면밀하게 진행되었다. 10여 개의 도시에서 집회가 개최되고,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독립선언서 참조). 그리고 그 당시에는 당장 손안에 쥐어질 것 같이 독립에 대한 생생한 기쁨이 울려 퍼졌다. 지도부는 이날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특별 공지’를 통해 폭력을 행사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아래는 그 발표문의 일부이다. ‘부가 중요 공지’“훌륭하고 고귀하며, 독립적인 한국 시위대는 어떤 경우라도 일본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돌을 던지지 말고, 주먹으로 치지도 말라. 이는 야만인의 행동이다. 그러한 행동은 독립운동의 근거를 훼손하여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므로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매우 주의해야 한다. (서명) 한국 독립단(Korean Independent Band)”이 계획을 이행하는 동안 군중들은 인간의 한계 이상으로 자제력을 보였다. 환희에 차 시위를 벌이는 동안 한국인이 폭력에 의지하는 모습을 본 확실한 목격자는 없었다. 단지 일본 경찰과 헌병대, 군인들만이 폭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저항은 없었다. 이러한 행동을 ‘야만인의’ 행동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소극적 저항’ 지침이 내려졌으며, 이러한 지침이 아니었어도 그들은 어떤 무기나 탄약도 갖고 있지 않은 완전 비무장 상태였다. ‘공식 보고문’은 지속적으로 “폭도들이 군인들을 공격하고 최후의 경우 자기 방어의 일환으로 폭력을 휘두르도록 종용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에 반하는 증거가 널려 있어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주장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인들의 허위성은 자연스럽게 이 ‘공식 보고문’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려던 실례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AP 통신(Associated Press) 서울 지부는 소위 폭동 사건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전신을 도쿄(Tokyo)의 일본 협약사에 전송했다. “저녁 퇴근길에 있던 사람들은 언덕을 달려 내려와 조그만 태극기를 들고 만세(후라 Hurrah)를 외쳤다. 상부의 지시를 받고 있던 협약사에서는 이 보도문을 그대로 실었으나,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고, 각목으로 경찰을 구타했다. 경찰은 자기 방어의 차원에서 폭도들을 공격해야 했다.’” 이는 말 그대로 ‘소극적 저항’이었다. 한국인의 결사 능력과 자기 결정 능력을 수년간 무시해 온 일본인들은 놀랍게도 물러서야만 했다. 3월 9일 관리들과 외국인 선교사들 사이에 열린 한 회의석상에서 한 연설자는 한국인은 “자기 인식을 하는 상태에 이르렀으며, 이제 한국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할 기회를 갖기를 원한다”고 발언했다. 한국인들의 자기 인식은 날로 깊어지고 있다. 사실상 이를 확대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은 공권력에 의한 무력지배와 참을 수 없는 불의이다. 이 운동은 학생들 사이에서부터 불이 붙었고, 현재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제 일본계 후손의 자취를 찾기는 힘들다. 물론 경찰과 공공 기관에는 일부 분포되어 있지만 이들은 독립을 고대하며, 여러 방면으로 정권에 의해 기소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정권에 복종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지위를 포기하고 사사로운 개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지만 업무를 계속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어 들어가는 것보다 나오는 것이 더 어려운 상황이다.이 운동은 한국 전역으로 널리 퍼졌고, 그 결과는 매우 분명했다. 모든 기독교계 학교는 문을 닫았다. 교사들은 체포되거나 구타당했으며, 매우 겁을 먹고 안전한 곳을 찾아 피신했다. 교회들도 문을 닫았다. 규모가 큰 곳은 헌병과 군인들에게 파괴당했다. 그들은 몇몇 교회들을 불태우도록 선동하고, 직접 불을 지르기도 했다. 거의 모든 목사와 관리인들이 체포되고 처벌되었다. 많은 이들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그나마 안전한 이들도 예배를 드릴 수는 없었다. 교회 신도들은 매일 욕설을 듣고 다양한 방법으로 모욕을 당했다. 군인들은 기도하기 위해 머리를 숙인 사람들을 고의적으로 짓밟았다. 그들은 신도들에게서 성경책과 여러 권의 기독 서적들을 압수하여 그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웠다. 또 교회의 여러 자료들도 압수하여 파기했다. 교회 학교 한 곳은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몇몇 교회 건물들은 경찰의 선동에 의해 완전히 불탔으나 신도들은 복구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고 고문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차별받고 있다. 경찰과 군인들은 길거리의 시민들을 잡아 기독교인인지를 묻고 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구타하고 대부분 체포하고 있다. 어느 마을에서는 군 관계자가 주변 마을의 대표들을 모아 놓고 집회를 열었다. 이들이 모이자 기독교인들을 서 있도록 명령한 후 다른 사람들을 보냈다. 남은 기독교인들은 학대와 고문을 받았다. 최근의 박해는 봄 청소 기간에 일어났다 매년 봄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집과 뜰을 대청소해야 하는데,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며 생산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을 감독하는 경찰들은 올해 특별히 기독교인들을 추려 내어 천대하면서 가혹하게 대하도록 지침을 만들었다. 이같은 명령은 곧 실행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욕설을 당하고 구타당했으며, 경찰의 지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혹사당했다. 옆집에 살고 있는 비신도들은 기독교인보다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신문에는 모든 문제를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의 탓으로 돌리는 악의에 찬 기사와 사설들이 실렸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비열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 대한 가장 비열한 짓은 며칠 전 서울 근교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났다. 군인들은 이 마을에 들어와 기독교인들을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기독교인들은 이에 복종했다. 이후 군인들은 고의적으로 이들을 사살했다. 그 후 교회는 불에 탔고, 죽은 사람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이 모두 불에 타 재로 변했다. 근처의 민가에도 불이 붙었다. 불이 붙지 않은 집은 군인들이 불태웠다. 이 이야기가 며칠 후 서울에 전해졌지만 아무도 믿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고위급 외교 사절단 세 명이 이곳을 방문하였고, 모든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들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그 후 또 다른 사절단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는데, 그 보고서는 아직 입수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상황을 특수한 경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이 최근에 벌어진 잔인한 행동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우리가 이런 야만족들과 상대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끔찍한 정책위에 서술한 일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위의 상황보다 인간이 더 잔인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을 더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이 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1. 장로회 신학대학은 3월 3일에 개강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개강을 준비하기 위해 개강 이틀 전에 학교에 모여들었다. 집회는 사흘 동안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3일 아침 대구(Taiku)에서 올라온 학생 다섯 명은 각자의 방과 건물 밖에서 집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시위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이날 새벽 5시에 기차로 올라왔기 때문에 집회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도 없었다. 경찰이 이들에게 다가왔고, 이들이 도망가지 않자 붙잡아 구타했다. 그러고는 이들을 경찰서로 끌고 가 경찰의 평온을 방해했다는 명목으로 각각 태형 스물 아홉 대씩을 쳤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공정한 일이지만 믿을 만한 참고인들이 이들을 방문하여 확인한 정확한 사실이다. 2. 4월 3일은 일본의 국경일이다. 이날 사람들은 일장기를 문에 걸어 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했지만 이를 거부한 사람은 체포되었고, 15일 동안 구금되었다. 또한 상점들도 문을 열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상점들은 일본의 한국 강점에 대한 항의로 3주간 문을 닫고 있었다. 경찰들은 거리 곳곳으로 나가 이 두 개의 명령이 이행되는지 각자 조사했다. 이들이 평양(Pyeng Yang)의 대로변으로 나갔을 때 그들의 뒤쪽 멀리서 약 열다섯 살 가량의 소년 한 명이 갑자기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격앙된 목소리로 “일장기를 내리고, 상점 문을 닫아라”라고 소리쳤다. 물론 경찰은 매우 놀랐지만 정신을 차려 이 소년의 자전거를 잡기 위해 추격했다. 이 소년은 체포되었고, 조사를 받기 위해 구치소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간수들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독방 감옥은 긴 복도를 따라 늘어서 있었고, 독방과 복도 사이에는 격자 무늬의 문이 있었다. 간수 한 명이 복도 쪽에서 다가와 소년에게 팔을 밖으로 뻗으라고 명령했다. 소년이 간수의 말에 따르자 간수가 각목으로 소년의 뻗은 팔을 내려쳤다. 간수는 다시 팔을 내밀라고 명령했고, 다시 각목으로 내려쳤다. 소년의 팔이 끔찍한 상황이 될 때까지 이같은 짓은 계속되었다. 3. 몇몇 여자 기독학교의 교사들과 여학생들은 서로 다른 시간에 체포되어 끌려 왔다. 이들이 당한 처사는 차마 말로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대강의 사실이라도 말하자면 여학생과 여교사들은 남성들 앞에서 옷을 벗은 채 조사받도록 강요받았다. 또 독방 감옥에서 조사실로 옮기면서 옷을 입지 않은 채 남자 간수들 앞을 지나도록 강요되었다. 이 사실은 한 외국인이 목격한 것이고, 의심할 여지없이 정확한 사실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이들이 당한 수치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차마 말하기도 끔찍하다. 4. 군인과 헌병들이 마을 한 곳을 급습했다. 이들은 이곳 주민들의 소유물을 파괴하며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먹는 주요 음식 가운데 하나인 ‘김치(피클 종류)’가 담긴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다. 군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목적을 위해 이 음식을 돼지도 먹을 수 없을 만큼 더럽혔다. 밥을 땅에 버리기도 했다. 어떤 곳에서는 의복도 압수하여 불태웠다. 이 학대자들은 그들의 기호에 맞지 않는 서적과 문학서들도 불태웠다. 5. 병원 근처에서 두 명의 여학생들이 머리를 잡힌 채 어느 집에서 질질 끌려 나오는 장면을 본 적도 있다. 이 여학생들은 몸을 피하기 위해 어느 집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악질 가운데에서도 악질인 두 명의 소방관들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시위 초반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의 머리를 질질 끌고는 구타하고 발로 찼다. 그리고 이 여학생들을 전화선으로 결박했다. 경찰관이 그들을 감옥으로 끌고 갈 때까지 그들은 그런 상태로 있었다. 6. 선교 활동의 개척지 가운데 하나인 강계(Kangkei)에서 군인들은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에게 발포했다. 일단의 군인들은 시위 장소에서 나와 민가 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시위 장소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한 민가 앞에 두 명의 여성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군인들은 이들을 조준하여 발포했다. 한 명은 즉사했고, 다른 한 명은 탈출했다. 사망한 여성은 이 지역 종교 서적상의 아내였다. 7. 또 다른 곳에서 군중들이 독립운동 시위를 벌이기 위하여 모였다. 군인들이 몰려와 지도자를 체포하고, 그를 헌병대로 넘겼다. 분노한 군중들은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군인들을 뒤따라갔다. 군인들은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했으나 다수의 시민 행렬이 이어졌고, 마침내 헌병대에 다다랐다. 이 헌병대는 높은 돌담으로 둘러 쳐져 있었고, 출입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56명의 사람들이 이 출입문으로 들어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군인들은 이 문 앞에 있던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발포했다. 그 중 세 명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아 담을 타고 넘어와 탈출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미 숨진 이들은 아랑곳하지도 않았고, 경상을 입은 이들은 6˜8명의 군인들에게 감시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8번이 없음)9. 단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이들이 행한 가장 비열한 짓은 난폭하고 책임감 없는 소방관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들은 시위 첫날 경찰관들로부터 시위를 진압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소방관들은 긴 막대의 끝에 날카로운 금속 갈고리를 달고 사람들을 뒤쫓았다. 이런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되었는데, 갈고리가 그의 두개골을 관통하여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 사람은 이후 회복되었다. 소방관들은 민가에 접근하도록 허용되었고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며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10. 일본인들이 자행한 최악의 만행은 비천한 일본인 저임금 노동자들을 고용한 것이다. 쇼시(Shoshi)라 불리는 이들은 한국으로 들어와 강도와 살인을 저질렀다. 300여 명이 이와 같은 목적으로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고되었다. 총영사가 총독을 방문해 정부가 외국인을 보호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고, 24시간 내에 서면 답변을 요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그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영사관은 외국인들의 보호를 위해 외국 군대의 출동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답변이 왔고, 쇼시(Shoshi)들은 대부분 물러갔다. 11. 외국인들은 최소한의 이유나 근거도 없이 다수가 체포되었다. 부산(Pusan)에서는 두 명의 영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이틀간 감금되어 있었다. 경찰 관계자가 주장한 이들의 체포 근거는 이들이 여학생들의 시위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여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시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곳에서는 또 다른 영국인 선교사가 미국인으로 오인받아 붙잡혀 심하게 구타당했다. 경찰은 여권이나 경찰 허가증은 보지도 않고 그를 심하게 구타했다. 이들은 민간인 복장이 아니었다. 어떤 외국인은 단지 한국인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들을 숨기거나 은폐한 것도 아니었다. 12. 한국인들에 대한 모든 재판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심지어 친척들조차 참석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재판 날짜가 언제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느 외국인이 재판에 대해 알리자 한 저명한 한국인 인사는 “그것은 재판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판결’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은 법 절차의 형식적인 준수 이상이 아니었다. 많은 죄수들이 최종심을 받고 있던 어떤 재판정에서는 검사가 선고를 하면서 두 시간 동안 발언을 하였다. 이후 죄수들은 최후 진술을 할 것인지 질문받았고, 모든 죄수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판사는 시계를 보더니 “미안합니다만 시간이 없어서 최후 진술은 어렵겠군요”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지독한 정의라 할 수 있지 않은가? 13. 군인들은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갈 수 없도록 가능한 모든 짓을 다했다. 그들은 부상자들을 집으로 보내 죽게 만들었다.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보초선을 통과하려고 애를 쓰던 어떤 사람은 종기가 났으니 나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답이라고는 ‘단지’ 총알이 그의 목을 관통했을 뿐이었다. 14. 죄수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상식을 초월한다. 우리가 본 것은 실상의 반도 안 된다고 믿고 있다. 악의 정교함은 경이로울 정도이다. 그들은 단지 새로운 잔인함과 악마성을 창출하기 위해 고용된 것이 틀림없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만행들은 끊임없이 추가될 것이다. 더 이상의 말도 필요 없다. 일본이 이런 만행들에 대해 동의하고 허용한다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세계는 일본에 동의하지 않고 일본을 제재하게 될 것이다. 정의와 권리는 날개를 달고 이 어둠의 땅을 떠났다. 부정과 잔혹, 학대와 억압, 고통과 죽음만이 남았다. 이 땅의 국민들이 어떠한 끔찍한 상황에서 살아가도록 강요당하는지 세계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정치 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일본이 자행하는 비인간성과 부정, 정교한 억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한국인들의 요구 한국인들의 요구가 무엇이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타당하다. 그들이 이미 공식적으로 표명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를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한국인들이 발표한 성명서를 아래에 싣는다. I. 독립선언서 우리는 이에 우리 한국이 독립한 나라임과 한국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5천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족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다.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키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시작된 지 몇 천년 만에 처음으로 딴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우리 민족의 명예에 입힌 손상이 그 얼마이며, 우리의 독창성이 문명의 진보에 기여하거나 일조하는 기회의 상실이 그 얼마인가.우리가 과거에 대한 원한에서 해방되고, 현재의 고통에서 해방되며, 미래를 위해 폭력에서 벗어나고, 현재 억압당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의식을 다시 한번 일깨우거나 타락한 상태를 진정한 노력으로 끌어올리며, 모든 사람들에서 품성을 올바르게 발달시키고, 우리의 불운한 아이들에게 부끄러움과 비탄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며, 미래 세대들이 언제나 축복의 극치를 향유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확보해야만 한다.그렇다면 인간 본성과 시대의 양심이 권리의 수호자이자 인류의 옹호자로서 우리를 돕고 있는 이때, 2천만 우리 민족의 모든 영혼이여, 마음속에 칼을 품고 나가자.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모든 반대 세력들을 극복하고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획득할 수 있다.우리는 1876년 우리와 매우 우호적인 조약을 체결했던 일본이, 중요한 협정의 여러 조항을 수차례 위반한 사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또 연단에서 말하는 그들의 지식 계급과 관리들이 우리 조상들의 유산을 그들 자신의 군체로 간주하거나 우리 문명을 미개한 것으로 거론하면서 보인 일본의 부정직함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오직 그들이 우리를 매질하여 복종하게 하고, 우리 사회의 기초와 최고의 정신적 노력들을 부끄럽게 만들 때, 일본을 탓할 것이다.스스로를 질책할 특별한 필요성을 갖고 있는 우리는 타인의 잘못에 시간을 소비해서는 결코 안 된다. 현재를 조직할 필요가 있는 우리는 과거에서 잘못을 찾으려고 일분의 시간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의 책임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지, 타인들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양심의 명백한 명령과 조화를 이루는 우리의 의무는 우리 새로운 운명의 미지를 일구는 것이지, 오랫동안 억제된 원한이나 일시적인 분노를 통해 잠시라도 반대자를 원한에 사무쳐서 공격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우리의 바람은 낡은 사상과 지난 날의 영향력에 얽매여 있고, 부자연스럽고 비합리적인 잘못된 방식으로 행동하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명성에 대한 사랑의 희생자인 일본 정부를 움직여서 좀 더 나은 무언가로 바꾸는 것이고, 공명정대한 길과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순결한 곳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우리 민족의 요청과 무관하게 일어난 결과는 억압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시간 보내기 수단, 즉 잘못된 수치에 근거를 둔 편견 없는 통계로 사용되었고, 두 민족 간의 손익 계산에서 참으로 진실한 것의 역을 보여주고자 했다. 따라서 일본이 멀리 가면 갈수록 일본은 우리들 사이에 원한의 참호를 더 깊이 파는 것이고, 그래서 화해의 다리가 전혀 놓일 수 없다. 오늘날 그 결과를 보라! 용감한 사람들이여, 잘못을 바로잡고, 공감에 기초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우호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여, 불행을 극복하고 양 민족 사이에 축복을 가져오도록 하자. 각별히 일본이 이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가득찬 분노와 터질 듯한 원한으로 터질 듯한 2천만 민족을 점령하는 것은 극동의 평화를 위협하는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점령이 강화되면 될수록 4억 중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 또한 증가시킬 것이고, 의심할 바 없이 동아시아 전체에 보편적인 파괴라는 슬픈 운명을 야기하는 것으로 종결될 것이다.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독립은 한국에 당연한 정당한 명예를 의미하는 동시에, 일본이 부당한 방식에서 벗어나 중국에서 같은 부당한 공포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극동의 보호자라는 막중한 책임을 진정으로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이 같은 꿈에서 헤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또한 극동의 평화가 인류 전체의 중요한 일부로 간주되는 전세계의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디딤돌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사소한 감정에 좌우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독립운동 조직위원회가 제기한 한국인과 일본의 사악한 통치에 대한 불만I.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요구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1. 두 민족 중에서 한국이 훨씬 유서가 깊다. 왜냐하면 한국은 4,300년이 넘는 조직된 정부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구한 시기 중 일부기간 동안 한국은 중국 황실에 조공을 바쳤지만, 이것은 두 민족의 황실 간의 관계를 대외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은 언제나 한국 민족의 독점적인 소유지였고, 그 어떤 이민족이나 정부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은 적이 결코 없었다. 2. 일본 민족은 한국인과 전혀 다른 민족이다. 그들은 섬 사람이고, 그들의 육체와 정신의 결핍 상태는 오직 과거 수백 년 동안 그들이 한국과 중국에서 받은 문명으로 가릴 수 있었다. 그들의 관습, 그들의 문예, 그들의 의복 자체는 한국을 통해 전래되었다. 최근에 그들은 이것들에 서구 문명이라는 포장을 덧입혔다. 따라서 그들은 동양의 하얗게 칠한 무덤이 되고 있다. 그들은 도덕적 힘의 아무런 증거도 드러내지 못하며, 우리 민족을 향한 그들의 행동은 잔인함의 화신임을 입증했다. 일본 민족과 한국 민족의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증거는 완벽하다.II. 일본들이 한국인에게 행한 다섯가지 분명한 불의가 있다. 1. 개는 먹을 것을 준 주인을 물어뜯었다. 1894년 중일 전쟁의 결과,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진지하게 인정했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또한 그것을 반복해서 인정했다. 이것의 증거로 일본과 다른 나라들은 독립을 보증하는 조약들을 명명하고 조인했다. 한국인들은 이것을 기뻐했고 열의를 갖고 개혁과 국가 발전의 과업에 착수했다. 불행하게도 이 시기에 러시아가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고, 동양인과 한국의 안전을 위협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한국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에 군사력으로 대적했다. 일본과 맺은 친선 관계 때문에, 모든 한국인은 재정적 도움이든 물리적 노동이든 그 최선의 것을 일본에게 제공하였고, 수송과 관련하여 일본군은 훌륭한 대우를 충실히 받았다. 대부분의 군사 행동은 한국 영토에서 일어났고, 이런 협력의 결과, 일본은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전쟁이 종결되자, 일본은 한국 전체를 삼키려는 잔혹한 의도를 드러냈고, 마침내 우리 황실에 대한 개인적인 위협과 반역자 이완용(Yi Wanyung)의 행동을 통해서 합병의 계약을 손에 넣었다. 2. 파기된 약속들.일본이 한국 황실에 대단한 존경을 표하고 한국인의 권리를 보호할 것이란 점은 병합 조항들에서 매우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일본은 우리 황실을 철폐했고, 한국 전역을 자국의 과잉 인구를 해소하기 위한 쓰레기 처리장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민족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 3. 법의 실정(失政) 우리 민족은 기질 상 평화를 애호하지만, 이것이 우리를 절반만 개화된 민족으로 잘못 간주하는 이유가 결코 될 수 없다. 법정에서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대항했을 때, 그리고 경찰 조사 중인 우리 민족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고통을 강요할때 정당한 대우를 받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수행된 분명한 정책이 있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은 완고하고 일본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이들의 삶의 원칙을 손상시키기 위한 부단한 시도들이 취해진다. 게으름뱅이를 일소함으로써 도시를 깨끗이 정비한다는 미명하에 고상한 원칙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을 타락시키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그런 사례들이 많이 있다. 4. 자유의 파괴. 언론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선택한 어떤 모임이든 그것을 해산시킬 권한을 가진 형사가 참석하지 않은 모임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 심지어 10명이 모인 모임도 가질 수 없다. 출판의 자유 또한 부정된다. 독자의 지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현혹시키는 것을 제외한 그 어떤 신문이나 책도 출판을 허가받지 못한다. 교육 계획은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이다. 우리 학생들의 지성을 연마하기보다는 지식을 제한하는 조항이 있다. 유해한 손이 젊은 나무들을 뽑아내고 있다. 5. 33인의 체포. 일본인들은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들을 체포했다.(선언서는 이것 바로 앞에 있다.) 그들은 또한 수백 명(지금은 수만 명)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33인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 분개한 남녀 학생들을 체포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투옥되었고, 한꺼번에 2,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으며, 참혹한 상처를 견뎠다. 우리는 압제자에 반대하여 인류에게 호소한다. 그들은 신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III. 한국의 미래. 우리의 현재 시위들과 엄숙한 선언서는 외부의 영향에 자극받지 않았다. 그것들은 우리 민족 내부에 실재하는 정신적인 힘에서 나왔다. 일본 정부는 이런 민족 운동의 주모자들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돈을 제공했다. 일본은 이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하느님이시고 이 운동은 2천만 한국인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젊은이, 우리의 소년 소녀조차 이런 대의를 위해 기꺼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외부의 영향에 감동을 받기에는 너무 어리지만, 하나가 된 우리 민족의 깊은 정신적 운동에 응답했다.우리는 이것이 우리 민족이 자기 표현을 하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민족 자결권을 거듭 주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우리가 일본 압제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에게, 우리의 처량한 처지에 한계를 설정하고 우리가 인류 공통의 권리를 획득하기를 진심으로 호소한다. 우리의 확신과 기도는 하느님께 향한다. 하느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우리를 압제자에서 구해주소서. 당신은 우리의 힘이고 구세주이십니다. 하느님, 우리의 구조자,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130 한국이 독립해야 하는 열 가지 이유

    발간일: 베이징 앤 텐진 타임스(Peking and Tientsin Times)1. 일본이 병자수호조약에서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했기 때문이다.2.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이 한국의 독립과 극동아시아의 평화를 보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3.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미국이 한국의 영토보전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4. 일본은 전쟁의 승리로 한국을 점령한 것이 아니다. 일본은 사기술로 한국의 독립을 강탈했을 뿐이다. 중국이 안남(Annam)을 프랑스에 넘기고, 스페인이 필리핀(Philippines)을 미국에 넘기고, 영국이 버마(Burma)를 정복하면서 인도를 점령한 것과, 한국의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을 영토로서 주장할 근거가 없다.5. 세계 여러 나라들이 그 동안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깨달은 진리를 인식한다면,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 6. 4천년간 웅대한 문명을 유지해 온 한국이 거세되고 억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가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독립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2천만 민족의 통곡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7. 연합국은 수세기 동안 노예 상태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Czecho Slovaks)의 독립을 보장하고, 벨기에(Belgium)와 세르비아(Serbia)에서 독일을 몰아내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비참한 상태에 빠진 한국만이 무시되어야 하는가?8. 한국은 극동아시아의 핵심 지역이다. 만일 한국이 독립되지 않는다면 한국인이 서구인들의 진심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며, 서구인들이 아시아와 유럽에 이중적인 정의 기준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9. 연합국들이 ‘살아가기에 평온한 세상’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또 한반도에서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그 무엇보다도 진실이 우선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인들은 서구인들이 일본을 두려워하고, 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엄중한 책무를 회피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10. 또 다른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한국의 독립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고, 극동아시아가 세계대전 이전의 발칸(Balkans) 반도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반복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여기서 말한 것은 그 일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