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콘텐츠

선택

선택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81 스티븐슨이 브라운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11발신주소: 선천|| 한국발신자: 블랑슈 L. 스티븐스(Blanshe L. Stevens)수신자: 브라운(A. I. Brown)브라운 박사님||이 나라에서 벌어진 주목할 만한 사건에 대해 어떤 소식이라도 모두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 위험을 무릅쓰고 문서 한 부를 보내 드립니다. 이 글은 소요사태의 한 가운데에서 씌어진 것인데|| 이 글을 쓸 때는 지금 병환중인 샤렉(Sharreck) 박사님과 함께 서울에 계시는 샤렉(Sharreck) 부인께 소식을 보내 드리는 것 외에는 사용할 데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제안으로 사본을 약간 만들어서 오늘 최근의 일에 대한 것까지 약간 덧붙였습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곳의 상황을 아시는데 약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의 상세한 보고도 준비했으니 금새 받아 보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독립선언서를 거칠게나마 번역하여 동봉하였습니다. 곧 좀더 부드러운 번역도 했으니 이 역시 한 부를 곧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곳 남부 교회의 김 목사님은 일주일간 괴로움을 당한 끝에 결국 어제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처음 체포되었을 때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담담한 상태입니다. 그가 자유로웠을 때도 그는 늘 경찰에게 불려 가서 이런저런 것을 하라고 지시받았고|| 이런 명령들 중 다수는 양심적으로 그가 행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명령도 그가 그렇게 행하면 그의 신도들이 그에게 화를 낼 것들이었습니다. 구금되지 않은 유일한 책임 있는 교회 지도자였고|| 혹은 현직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일들이 많고|| 생활은 점점 참기 어려워집니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그는 어머니도 없고|| 돌봐 줄 사람도 없는 자식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저희 선교사들은 개인적으로 관련된 점에 있어서는 매우 안전합니다. 처음 며칠간 저희에게 보였던 경찰의 무례한 태도도 더 이상 이곳 선천에서는 없습니다. 제 첫번째 관심은 저희 어머니께서 이런 소식을 아셔서 이제 걱정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편지가 박사님께 무사히 당도한다면 비슷한 다른 편지도 저희 어머니께 도착하겠지만 저희는 지금 이때에 정규 우편이 이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데에 별로 큰 희망을 걸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보고서는 반출되었고|| 우리의 편지들이 갑자기 끊긴 상황에서 그 보고를 보면 우리 친구들을 매우 놀랄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어떻게든 소식을 전하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진정을 담아||(서명) 블랑슈 L. 스티븐스(Blanshe L. Stevens)

    182 3월 7일과 3월 11일 작성된 기록

    3월 7일 금요일이곳에는 더 이상 시위는 없다. 그러나 주위의 시골에서는 비슷한 소동이 벌어진다고 듣고 있다. 사람들은 계속 체포되고 있다. 감옥은 체포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몇 명은 신의주로 보내지고, 몇 명은 풀려났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계속 체포되고 있다. 간호사인 봉도(Pong Do, 인명인지 확실치 않음)가 지난 밤 풀려났다. 여자 죄수들 중에는 북부 교회의 Kimsie Sinsung(역시 인명인지 확실치 않음)만이 오늘까지 감옥에 남아 있다. 아주 끔찍한 행동에 대한 소문들이 우리 귀에 들리고 있다. 그저께 안주(Anju)에서 9명이 총에 맞았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곳에서 너무 심하게 창상을 입었던 한 남자는 한국인들의 보고에 의하면 죽었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길 경찰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가 돈 때문에 다른 한국인과 싸움에 연루되어 상처를 입고 그래서 죽었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성경학교(Bible Institute)의 여성들은 떠날 예정이다. 평양의 신학교는 한 달 동안 폐쇄되었다. 주위는 조용하지만 긴장은 여전하다. 루이즈 체이스 학원(Louise Chase Institute)은 수업을 계속하지만 나는 쉬게 하기 위해 오늘 여학생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흥분과 긴장으로 지쳐 있다. 남학교는 비록 때때로 수업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휴교의 상태이다. 맥쿤(McCune) 씨는 학생이 있는 한 다른 것은 몰라도 ‘도덕’ 과목만이라도 가르치겠다고 보고했다. 웃기는 점은 일본인들이 제국에 대한 충성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도덕’과 같은 단어가 된다는 것이다. 3월 11일 목요일토요일에 또 다른 운동이 있었다. 여기에는 문자 그대로 수천 명의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왔는데, 그들은 분명히 무언가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경찰은 도시 외곽까지 길가 이곳 저곳에 서 있었지만, 사람들이 테르모필레(Thermopylae)의 그리스인들처럼 몰려오는 바람에 경찰도 소용이 없었고, 군중들도 별 어려움 없이 들어왔다. 그들은 흥분한 상태에서 언덕에서 밀려 내려와 떼를 지어 우리 학교 앞을 지나 두 손을 들어 ‘만세’라고 외쳤다. 하루 내내 혼란 상태였고, 군인과 경찰이 잔인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외국인들이 지켜봤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군중들은 그들의 목적과 연관되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는 그들의 고난을 규명하여 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이 외국에서 토요일 도착한다는 소문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어떤 근거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아무도 오지 않자 군중들은 어두워지자 마지못해 해산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녁때까지 주위에 머무르며 누군가 오기를 그때까지 기다렸다. 그날 밤 방문한 우연한 여행객은 기차에서 내리자 대중들의 환호를 들었을 테니 얼마나 놀랐겠는가!예상했던 방문객 대신에 평양에서 160명의 군인이 그날 저녁 도착하여 휴 오닐 학원(Hugh O’Neil)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누군가를 찾는 듯 보였는데,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음날 당국은 매우 대담하게도 교회의 모든 예배를 금지하고,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교회 출입문에 경비대를 세워 놓았다. 수요일 밤에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고, 두 명의 겁먹은 신도가 평상시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모였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지만 그래도 어찌되었건 시도는 해본 것이다. 일요일 한국인들은 그 문제에 대해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였고, 예배는 성경학교와 루이즈 체이스 학원 건물의 교실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몇 사람이 참석했는데,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오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군인들은 무리를 지어 도시 밖으로 진군해 나갔고, 오후에는 사람들은 붙잡아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다른 군인들이 피범벅이 된 도망자들을 기차에 싣고 돌아왔다. 10마일 정도 떨어진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서 일요일에 벌어진 사건을 목격자들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되었다. 군인들은 교회가 시작한 후에 당도하여 설교단까지 걸어나가 만행을 저질렀는데, 다른 것들 중에서도 그들은 설교단 위의 성경을 집어 갈기갈기 찢어서 사람들에게 뿌렸다. 우리가 들은 보고에 의하면 다른 많은 곳에서도 성경을 찢었다고 한다. 또한 우리는 이곳의 남학교 교회에서도 이런 짓이 자행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군인들은 부유한 한국 부인의 집에서 하룻밤 숙박했다. 그녀는 과부였고,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녀는 강압적으로 그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해야 했다. 교회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일을 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구금된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그들이 험악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증언했다.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선천과 평양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한국인들이 체포에 반항하거나 일본인들에게 폭력을 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아무리 극악한 행동을 저질러도 외국인들이 직접 목격하거나 믿을 만한 한국인들의 보고를 들어보면 한국인들의 반항이나 폭력은 없었다. 선교단이 살지 않는 다른 마을에서는 헌병대가 먼저 군중들에게 잔혹하게 공격했는데, 보복의 행위가 있었던 듯도 싶다. 한 마을에서는 경찰의 공격이 저지당했는데, 그들은 다시 돌아와 다른 지역으로부터 군사력을 보강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다시 화난 군중들의 손에 공격을 받았다. 군중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곤봉만을 가지고 일본 경찰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것은 무력을 쓰면 안 되고 독립을 선언하는 데 있어서 질서 있게 한다는 서약을 만든 지도자들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다. 모든 상황을 다룬 이 훌륭한 문서를 뒤에 덧붙였음. 다른 곳에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공격한 군중들에 의해 죽기도 했다. 더 많은 여성들이 감옥에 갔는데, 장 씨 부인은 풀려났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처음에 풀려나지 않은 여성은 ‘교신’했다는 죄목으로 벌을 받았다. 그 벌은 입의 끝 부분이 찢어져서 아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와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신의주로 보내졌다. 이웃 군의 돌산(Tul San, 스펠링 정확하지 않음)에서는 여섯 명이 죽었다. 이들 중 한 명은 임신한 여성이었다. 군인들은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한 남자의 머리를 강타하여 죽였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은 믿을 만한 목격자가 보고한 내용이다. 한국인들이 다른 쪽 뺨을 내어놓으라는 그리스도의 뜻뿐만 아니라 그들 지도자들의 사상을 얼마나 잘 준수했는지 잘 설명하는 한 예로 한 여성이 안주에서의 죽음을 끔찍한 설명과 함께 이야기 해주었다. 동시에 이 사건의 와중 돌산(Tul San, 스펠링 정확하지 않음)의 몇몇 한국인들의 행동에 대해 깊이 뉘우쳤다. “그들은 아주 나쁜 짓을 했어요. 그들이 한 일본인을 때렸어요!”라고 말했다. 보충 군대가 왔기 때문에 경찰 당국이 위협적이고, 또 다른 시위에서 최소의 증거만 가지고도 이렇게 저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선교단들은 거리에 나오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군인이 그들의 총을 사용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허가되었기 때문에 선교단이 거리에 나와 날라 다니는 총탄을 맞는 것은 당국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요한 목적이 우리가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친구라면 우리 앞에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놀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시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들과 비교해 볼 때 이보다 더 값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한국인들에게 벌어지는 일들 말이다. 피범벅의 이야기를 막 해놓고, 이 사건의 웃긴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좀 맞지 않게 보이지만,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렇게 크게 위협을 받은 듯 보이지는 않다. 그들은 오히려 공정한 경기가 치러지지 않는데 대해 분개해 있다. 이는 여성과 아이들에게조차 매우 분명하다. 그들이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문명국의 법은 그들이 총에 맞거나 무기의 공격을 받는 것에서 보호해야 한다. 그들은 아무도 체포에 저항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커다란 죄목은 바로 ‘만세’라고 외친 것과 강연을 듣기 위해 운집했다는 것이다. 어린 소녀들과 여자들은 평양 길거리에서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갔는데, 그들은 전신주에 묶여 맞았고 다른 분개할 만한 일들을 겪었다고 한다.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한 설명은 이를 목격한 외국인들에 의한 것인데, 이들은 한국인들의 절친한 친구들로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이 일을 보고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그들은 여자들을 때렸고, 진흙탕 속으로 던졌다. 그러나 여자들도 남자와 같이 일본인들에게 분개해 있음이 사실이다. 그들은 대개 ‘만세’ 시위의 주모자이다. 최근까지 우리 주일학교의 교사 가운데 한 명이었고 매주 토요일 사전 수업 때 내 앞에 앉아 있었던 한 젊은 여성은 만세를 부르며 잔다르크와 같은 행동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녀는 바닥에 던져지고, 군인들에 의해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들을 밀쳐 내고 나와 “이리 와서 조국을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라고 소리질렀다 한다. 그는 이곳에서 그리 멀리 얼어져 있지 않은 작은 읍내에 살고 있는데, 그곳 교회의 지도자인 남편은 그 당시 그곳에 없었다.전국에서 새로 보고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우리는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이곳 일에 대한 몇몇 설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므로 친구들이 우리가 안전하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편지들을 검열하느라 보류시켜 두어서 많이 놀랐을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날의 새벽을 위해 기도를 할 때지 두려워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이 작은 나라의 커다란 전쟁에 대한 극적인 사건의 증인으로 허락되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로부터 그렇게 하기로 스스로 마음먹었다. 자유언론으로부터 단절된 우리 쪽 사람들은 이 시기 동안 많은 것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감시당하고 억압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들의 친구인 우리는 이 운동에 대해 전적으로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배자도 억압의 방법을 사용할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알려지면 마치 소설처럼 읽히게 될 것이 분명하다. 누가 이 대담한 계획을 세웠는지, 어떻게 그 계획이 그렇게 은밀히 전체 민중에게 알려졌는지, 그렇게 은밀했는데도 또한 어떻게 그렇게 분명하게 알려졌는지 말이다. 사람들은 언제 자신들의 위치에서 독립만세를 외칠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시간에 수도에서는 33인의 용감한 사람들이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들의 작은 시위가 성공해도 경찰은 제 시간에 그들을 잡으러 오지 못했고, 그 식당에 밥을 먹으로 온 사람이 경찰에 그들이 어디에 있다고 알려주고 나서야 왔다. 경찰이 도착하자 그들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라고 요구했고, 그들은 죄수를 체포하는 일반적 방법으로 끌고 가지 말고 차에 태워서 데리고 가라고 조언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감옥으로 끌고 가는 듯 보이면 군중들이 흥분하여 일본 경찰을 공격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이렇게 했다. 한 용감한 젊은 친구는 감옥으로 ‘가야 할 것이 뻔한’ 자동차 안에서 선교단 친구를 지나치자 경찰 수비병에게 기댄 채 자신의 모자를 흔들며 “김 장로, 안녕하시오. 만세, 만세”라고 외쳤다. 이 자동차 사건은 이번 운동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놀랄 만큼 대범하게 착상되고 수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좋은 예이다. 벌써 엄청난 양의 소식이 우리에게 도착했고, 그것을 전부 보고하기는 힘들다.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이 훌륭한 반란자들의 앞에는 어려운 시간이 틀림없이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인들의 시대가 이 땅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사건이 이 나라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최후의 비극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로 인한 정치적 결과가 어떻게 되던 간에 미래의 한반도 정부의 성격이 좀더 공정하고 좀더 인간적이기를 바란다.

    183 잔학 행위

    1919년 3월 29일 오늘 나는 평양에서 동쪽으로 16마일 정도 떨어진 반석(Pan Suk) 마을을 방문했다. 이 마을 변두리의 15채 가량의 집은 교회와 학교 건물이다. 3월 7일 독립집회가 열렸다. 군인들이 찾아와 종탑으로 가서는 종을 부셔 버렸다. 종의 추와, 다른 연장을 가지고 모든 것을 부셨다. 이때 스무 개가 넘는 3X5 크기의 유리창 중 세 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등잔과 설교단교 부셨고, 성경과 찬송과 책을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다섯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를 완전히 벌거벗기고, 총과 몽둥이로 그들을 때렸다. 성냥으로 한 남자의 몸에는 불을 붙였다. 학교 교사의 집은 파괴되고, 그의 옷이 들어 있던 서랍장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옷은 불태워졌다. 몇 명은 체포되었다. 쉰 살에서 예순 살 사이의 한 남자는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3월 26일 즈음에 맞아서 죽었다. 3월 24일 근처의 마을에 군인들이 와서 교회 장로 중의 한 명을 찾았다. 그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그의 부인을 데리고 갔다. 그녀는 서른 살 가량의 밝은 인상의 여인이었다. 그들은 그녀와 두 살 된 아들을 근처 숲으로 데려간 뒤 남편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강요했다. 그녀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알지 못했는지 의심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도망을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를 벌거벗겨서 잔인하게 때렸다. 나는 이 여성과 오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이때 맞은 매로 인해 지금까지도 고생을 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30일 일요일 무어(Moore) 목사님과 그레이스 딜링험(Grace Dillingham) 양이 Kang Syo에 갔다. 그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최악의 상태’를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후 선교단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전 11시에 주일학교를 열었다. 약 25명 정도가 기도를 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들어와 네 개의 유리창틀을 통해 총을 쏘았다. 신도들을 때리고, 4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를 체포했다. 이들은 모두 임원이 아니었다. 임원들은 모두 체포되었거나 예전에 도망갔다.

    184 와이더 홀드가 브라운 목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5-22발신주소: 애틀랜타 시티|| 남일리노이가 22번지발신자: H. 와이더홀드(H. Wiederhold) 수신자: 신학박사 A. J. 브라운(Brown) 목사님께수신주소: 외국 선교단 장로교 위원회 서기 5번 가 156번지 뉴욕선생님께||동봉한 복사물은 제가 뉴저지 애틀랜타 시의 몰론(M. Mollon) 목사님께 보낸 편지입니다. 박사님께서 한국의 상황을 아실 수 있도록 복사본을 보내 드리라고 요청받았습니다. 진정을 담아||H. 와이더홀드(H. Wiederhold) 본국에 있을 경우|| 애틀랜타 시티|| 남일리노이가 22번지

    185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브라운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4-21발신자: 수신자: 브라운박사님께우리는 저녁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다음날 아침 한국의 부산항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두 번이나 제 여권을 보여 달라고 요구받았습니다. 저는 제가 한국을 통과해 가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던 한국-중국 육로여행열차에 탔습니다. 차내와 식당칸은 우리가 보기에 괜찮았습니다.우리가 차창 밖으로 바라본 풍경은 하룻밤 새에 변해 있었습니다. 좋은 풍광은 황무지와 다름없는 풍광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옷차림새도 화려한 일본 의상에서 한국인들의 밋밋한 흰색 옷으로 바뀌었습니다.저녁 8시에 우리는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저희는 일본인들이 기독교인과 선교단을 파괴한다는 이야기를 이전에 들었기 때문에 이곳에 내려 우리 스스로 조사를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서울은 상당한 도시였고|| 호텔도 훌륭했습니다. 아침에 우리는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선교단을 찾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력거꾼은 우리를 감리교 단지로 데려갔습니다. 예배당 안에 한 한국인이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 미국인 숙녀 교사가 우리 인력거꾼에게 장로교 단지로 데려가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들어간 건물은 병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감독관인 뉴욕에서 온 에스텝(Esteb) 양이 우리를 맞았습니다. 우리가 찾아온 용건을 들은 그녀는 우리에게 정말로 끔직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일본인들이 방어력 없는 한국인들을 살해하고 폭행한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상반되게 강압적으로 일본에 합병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본보다 더 오래되고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잔혹한 대우를 받고 있고|| 모든 종류의 모욕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도 없습니다. 평화회의가 열리자 그들은 그들의 독립을 요구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의 연설로 힘을 얻었습니다. 그 연설의 내용은 전세계의 모든 민족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3명의 유력한 한국인이 서명을 한 독립선언서를 냈습니다. 일본은 즉시 서명한 사람들을 모두 구속하고 그들을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의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언론은 이 운동의 주모자로 선교사들과 기독교인을 고발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기는 했습니다.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전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선교사들과 교사들은 여기저기에서 이유 없이 체포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신문을 사보고 저는 알았습니다. 미국인 장로교 목사가 피소되어 6개월간의 중노동을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축축한 지하실에서의 이런 노동은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 중노동과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 그 정도의 기간이면 사람이 거의 죽습니다. 즐거운 부활절 일요일에 우리가 본 장면과 들은 박해의 이야기로 인해 제 피는 뜨거워졌고|| 저는 이 편지를 박사님께 서둘러 쓰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이 편지를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씁니다. 박사님께서는 이 사실을 전세계에 알려 주십시오. 우리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문을 두들기면서 자신들도 문명국들과 똑같은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우리의 동맹국이 공격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비무장 상태인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보통 사람들에게 공정을 기하기 위해 말한다면 이 모든 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라 저 빌어먹고 저주받을 군대 탓입니다. 그들은 독일을 보고 따라 했으며||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이 이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되고 망했듯이 일본도 똑같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딱한 군사제도가 폐지되어야 동방의 우리 이웃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병원의 감독관인 에스텝(Esteb) 양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2주 전 7명의 사람들이 시골에서 병원으로 실려 왔는데|| 그들은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25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운송되어 왔으며|| 매우 비참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총에 맞고|| 아주 엉망이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 군인과 헌병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이 기독교인이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총검에 의해 그러한 상처를 입었는데|| 그는 병원 문을 들어서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제가 한 장 갖고 있습니다. 그녀는 또한 그들의 상처에서 뽑은 탄환과 폭발성 미사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또 말하길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던 5개의 마을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불탔다고 합니다. 근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차후에 조회할 예정입니다.저는 이 끔찍한 이야기를 목격자로부터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사흘 전 병원 주위에 있던 일본인 헌병이 들어와 간호사들의 방을 모두 조사하고 그들에게 온갖 불명예스러운 짓을 했습니다. 그들이 에스텝(Esteb) 양에게 명령을 했을 때 이 자기 희생적인 미국인 여성은 그녀의 사무실을 열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완강하게 거절했고|| 자신은 미국 시민이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대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욕설이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불쌍한 한국사람들이 총에 맞아 누워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말하고는 감옥에 갈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에스텝(Esteb) 양은 거부하면서 의사를 불렀습니다. 의사들이 그렇게 하면 죽는다고 말했지만 그들 가운데 세 명은 실려 가고|| 거의 죽음에 다다른 네 명은 겨우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에스텝(Esteb) 양이 그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우리는 죽음을 앞에 둔 딱한 사람들의 침대가로 가서 그들의 상처를 봤습니다.우리는 이 광경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밀정이 감시를 하고 있다면 체포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는 침대를 함께 밀고 가서 3회나 치료를 했습니다.그러나 불빛이 너무 약해서 치료가 잘 되었을지 걱정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대학 교수 가운데 한 명이 사람들도 꽉 찬 교회에서 한국어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다음으로 우리는 대학의 총장인 애비슨(Avison) 박사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캐나다 출신으로 33년 전 이곳에 왔고|| 그의 부단한 노력과 캐나다와 미국에 있는 좋은 친구들의 재정적 원조로 이렇게 훌륭한 의과대학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시내에서 2마일 떨어진 곳에 다른 학과가 있는 대학을 세우는 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명성이 높은 언더우드(Underwood) 씨가 75||000||000달러를 보내 와 그의 형제인 언더우드(Underwood)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언더우드 홀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이곳에서 30년이 넘는 세월을 성심으로 일했고|| 그의 미망인은 지금도 이곳에서 살고 있으며 그의 아들은 대학의 교수입니다. 병원은 커다란 기부를 한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세번(Severn) 씨의 이름이 붙여졌는데|| 한국 서울의 세브란스 유니언의과대학과 병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본인 깡패|| 군인|| 헌병들의 이야기를 모두 해주셨습니다. 주초에 보고가 서울에도착했습니다. 그 보고에는 북쪽의 몇 마을이 불에 탔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길 미국 영사 레이먼드 S. 커티스(RaymondS. Curtis) 씨가 금요일에 이를 조사하기 위한 방문을 했는데||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첫번째 마을에서는 작은 오두막 세 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불탔습니다. 살해되거나 불타지 않은 사람들은 산으로 피난을 갔고|| 거의 모든 이들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알아낸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헌병이 아침에 마을에 와서 사람들에게 몇 명의 개종인들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지은 작은 교회로 오라고 했습니다. 11명의 기독교인과 27명의 마을 주민(여자와 아이들 포함)이 왔는데|| 그들이 모두 오자마자 헌병들은 문을 닫고 창문을 통해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고는 건물 전체에 불을 놓았습니다. 커티스(Curtis) 씨는 입구 근처에 반쯤 탄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길 한 의사가 다른 다섯 마을을 갔는데|| 거기서는 기독교인들이 살았던 그 마을들에서는 집에 횃불을 들이댔다고 합니다. 이 나라의 집들은 지붕이 전부 짚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그렇게 하면 쉽게 불이 붙습니다. 거주민이 도망가려 하면 그들은 총검으로 찌르거나 발포했다고 합니다. 커티스(Curtis) 씨는 워싱턴에 전체 보고서를 제출했고||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박사님은 우리를 오후 4시 30분 열린 연합부활예배에 초대하셨습니다. 이 예배는 웰치(Welch) 주교가 집전하셨습니다. 그는 중국|| 일본|| 한국을 담당하고 있는데 훌륭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배 후에 박사님은 저에게 유력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특히커티스(Curtis) 씨가 다녀온 그 마을에 며칠 전 다녀온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동차 두 대에 타고 다녀왔는데|| 대학살 이후 살아 남은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갔고|| 그들은 먹고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언더우드(Underwood) 교수가 그날 사람들을 조직해서 의료품과 식량을 산으로 가지고 가서 불쌍한 이재민들을 도운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보시면 너무 열광적인 보고로 보이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께 맹세코 이 이야기는 모두 사실입니다. 예배 전에 저는 일본인 YMCA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미국인이 성경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국인 YMCA에 갔을 때 문은 닫혀 있었고|| 그 건물의 사진을 한 장 찍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우리나라의 존 와너메이커(John Wanamaker)가 본관을 기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힘없는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명령으로 건물을 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녁 때 호텔에서 저는 즐겁게도 우리의 영사 커티스(Curtise)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본 모든 것들이 너무 끔찍하게 느꼈으며 당황하고 무기력하게 느껴 그것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고 하는데|| 그 사진들을 베이징으로 저에게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일본인들이 모든 우편물을 검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들이 저에게 도착하기만 하면 이 편지도 박사님께 등기우편으로 봉함하고 표시하여 상하이를 거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제안을 하나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박사님께서는 마음이 넓으시고 또 교회도 박사님 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해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저도 10달러 내는 것으로 해주시고|| 모금한 금액의 수표를 베이징의 은행으로 보내십시오. 일본인 은행은 안 됩니다. 한국|| 서울의 세브란스 유니언 의과대학과 병원의 애비슨(O. R. Avison) 박사 앞으로 해주십시오.저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지금은 선교사로 있는 전 변호사가 저에게 준 문서를 동봉합니다. 제가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현 상태를 이해하시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열차가 선천에서 멈췄을 때 우리는 적어도 25명 정도 되는 불쌍한 한국 사람들이 엄청난 감시를 받으며 어느 감옥인가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기차를 탄 한 선교사가 그의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저에게 그 사람들은 일본의 박해의 희생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길 그들 가운데 두 명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히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그들을 아는 척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도 그들처럼 체포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이런 상황입니다. 우리를 자신들의 동맹국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우리 기독국가가 언제까지 이런 가당치 않은 위장을 참아 줘야만 합니까.제 아내와 함께 박사님과 가족 분들께 안부를 여쭈며||진심을 담아추신말하는 것을 잊어버렸는데|| 애비슨(Avison) 박사에게 피젼(Pidgeon) 박사의 이름을 말하니|| 그 목사님이 박사님의 친구라고 하시더군요.저는 또한 카톨릭 성당에도 가 보려 했습니다. 여기에도 살상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프랑스어와 한국어만을 할 줄 알아서 서로 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가지 않기로 결정을 봤습니다. 저는 또한 한국 잡지를 발간하는 S. A. 벡(S. A. Beck) 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현재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발간하지 말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문은 엄격한 검열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저에게 말하길 그저 발행을 연기하고 있고|| 한국의 현 상황에 대해 발표하기 위해 워싱턴에 갈 작정이라고 합니다.저는 베이징에 있는 우리 총영사관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또한 저는 로이터통신의 대표와 약속을 했고|| 영국 대사인 존 조단(John Jordan) 경을 만날 예정입니다.

    186 한국 독립선언문

    우리는 여기에 우리 한국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한국 사람이 자주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서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서 자손만대에 일러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고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터이며, 사람된 양심의 발로로 말미암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은 지 여러 천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10년이 되도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정신의 발전이 지장을 입은 일이 무릇 얼마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인가!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 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두려움을 없이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가 짓눌려 시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 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속의 칼날을 품으니,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이것을 얻고자 하는데 어떤 힘인들 꺽지 못하며, 물러서 계획을 세우는 데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할까!병자수호조약 이후 시시때때로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탓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인은 실생활에서, 우리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이 터전을 식민지로 삼고, 우리 문화 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낼 뿐이요.우리의 영구한 사회의 기틀과, 뛰어난 이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려 하지 아니 하노라. 자기를 일깨우기에 다급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망할 여가를 갖지도 못하였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에게는 옛부터의 잘못을 따져 볼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나를 바로잡는 데 있을 뿐, 결코 남을 헐뜯는 데 있지 아니 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을 따라 자기 집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는 일일 뿐,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의 감정을 가지고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일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인 일본의 위정자의 공명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이 그릇된 현실을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처음부터 이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두 나라의 합병의 결과는 마침내 억압으로 이뤄진 당장의 평안함과, 차별에서 오는 고르지 못함과 거짓된 통계숫자 때문에, 이해가 서로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도량이 날이 갈수록 깊이 패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번 살펴보라. 용감하게 옛 잘못을 고쳐 잡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바탕한 우호적인 새시대를 마련하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인 것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또한 울분과 원한이 쌓이고 쌓인 이천만 국민을, 힘으로 붙잡아 묶어 둔다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노릇이 아닐 뿐 아니라, 이것이 동양의 평안함과 위대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 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뻔한 터에, 오늘 우리의 한국 독립은 한국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 벗어나, 동양을 버티고 나갈 이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피하지 못할 불안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 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봄이 온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우리가 본시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피우리라. 우리는 그래서 분발하는 바이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진하나니, 남자?여자,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라.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공약삼장하나,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인도?생존?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하나,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하나,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대중 집회3월 1일 정오 한국의 모든 대도시에서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여러 분야에서 주도적이고 영향력 있는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배포되었고, 또한 대도시의 대중집회에서 낭독되었다. 여기에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 3분의 1은 기독교인이었는데,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이 중 한 집회가 평양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약 2천 명의 한국인들이 참석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목사는 군중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질서정연하게 여러분들의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가야 할 곳이 또 있습니다.” 그는 감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울의 주도자들은 대중 집회가 끝난 후 저녁을 먹고서 경찰에 전화를 걸어 그들이 감옥에 갈 준비가 되었다고 알렸다. 수천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대중 집회가 끝난 후 수천 명이 대오를 정렬하였다. 남자와 여자, 남학생과 여학생이 종이로 만든 옛 한국의 국기를 들고 행렬을 지어 거리를 지나며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다. 곧 경찰과 군인들은 많은 이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아주 잔혹하게 때렸다. 물론 그들이 체포하리라고는 예상을 했다. 그러나 남자들뿐만 아니라 저항하지 않는 여자와 아이들을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건 그냥 서 있는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발로 차로 때리는 것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일본인들의 방법3월 5일 평양에서 뻔한 속임수가 시도되었지만 실패하였다. 사업계와 교회 지도자들로 구성된 20명 정도의 지도급 인사들이 지방장관의 사무실로 불려 갔다. 일본인들은 그들에게 서류를 하나 보여주고는 거기에 서명하라고 했다. 그것은 서울에서 온 서류였다. 그 서류에는 한국의 유력한 인사들의 서명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려 했다. 거기에 씌어져 있는 내용은 독립선언서는 한국 국민들의 감정이나 소망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몇몇 무식한 사람들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신뢰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20여 명의 한국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강력하게 요청을 받았지만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부인하는 문서에 서명하려 하지 않았다.일본인들은 평화회의를 상당히 신경 쓰는 듯 보인다.

    187 새디 N. 웰본(Sadie N. Welbon)이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3-20발신주소: 평양, 한국나의 친구들에게,내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11월 10일에 보낸 것으로 중국을 경유하여 보냈습니다. 나중에 소식이 전하여 오길, 그 친구가 베이징에 무사히 도착하여 그에게 맡겨진 엄청난 편지 뭉치를 부쳤다 하더군요. 이곳에서는 우리의 모든 편지가 개봉됩니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소식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언론에 소개되지 못하거나 혹은 실제보다 많이 경감되어 소개가 됩니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 모두가 월터 웨일(Walter Weyl)이 하퍼스(Harper’s) 2월호에 쓴 ‘한국의 국권 상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으셨길 바랍니다. 사실 글쓴이는 선교사가 아닌데, 그로 인해 이 글에 무게를 더해 줍니다. 왜냐하면 본국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오로지 선교사들의 눈을 통해서만 목격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학교들은 공립학교와 선교학교 모두 폐쇄되었고, 이 나라에 있는 어느 누구도 순회 설교를 하거나 수업을 하지 못합니다. 시골 사람이나 여성을 위해 열렸던 대규모 수업도 안 되고, 성경 강습회도 안 됩니다. 3월 13일에 열기로 했던 남자 신학교는 4월에 개강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감옥은 사람들로 꽉 차서 붐빕니다. 재소자들은 드러누울 공간도 없는 돌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소녀들이나 여성, 노인들을 위해 두꺼운 옷을 넣어 주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집이나 거리에서 그들이 입고 있는 얇은 옷차림 그대로 잡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옷을 넣어 주는 것은 언제나 거절당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도들보다 훨씬 더 심하게 대우를 받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간수가 있는 방으로 끌려와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매를 맞거나 고문을 당합니다. 그들은 문서에 서명을 하라고 강요당합니다. 거기에 서명을 하면 풀려납니다. 그들이 서명하라고 강요당하는 문서의 제1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기독교를 믿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은 이렇습니다. “앞으로 일본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것을 맹세하며 앞으로 독립선언과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지난 일요일 모든 도시의 교회에서 예배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남자 선교사들은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파견되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살폈습니다. 지난 주에는 한국인 옷을 입고 한국인처럼 변장을 한 일본인이 우리 선교사 집의 바깥쪽 숙소에 와서 어느 곳이 선교사들이 자는 방인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밤에 불침번을 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우리는 몇 날 밤을 남자 선교사들이 돌아가며 두 명씩 선교단지의 순찰을 돌았습니다. 우리는 거의 다 비교적 낡고 안전하지 않은 가옥에 살고 있습니다. 이 집의 높이는 지표면과 같습니다. 침실은 모두 지층이고, 침실의 창문은 열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찌되었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밤중에는 우리가 두려워하며 목숨을 위협받은 사람이 특별히 더 보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안심이 됩니다. 어제 우리는 시골에서부터 감옥으로 한 줄에 묶여 걸어가고 있는 20여 명의 사람들 무리를 또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인 여자 교사인 하우스(Haus) 양이 베이징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웰슬리대(Wellesley)를 졸업했으며, 선교단이 미국과 파리로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여학생들뿐 아니라 여학교의 여자 한국인 교사 두 명도 이곳 평양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학교, 교실, 건물, 병원, 교회에 일본인들이 서슴없이 들어와 수색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개인 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천에 있는 우리 선교사들의 가정에는 한 부대의 군인들이 한밤중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독립선언서의 사본, 태극기 또는 도망자들을 찾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며칠 전 많은 수의 군인들이 이곳의 병원에 들어와 모든 환자들을 들것에 실어 응접실로 내려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군인들이 그들을 보기 위해 병동을 돌아다니면 왜 안 되는 것인지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한국인 젊은 의사가 담당이었고, 그는 명령받은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아래로 옮겨졌습니다.이곳은 아직 3월의 날씨가 아닙니다. 눈이 약간씩 내리고, 바람은 차갑습니다. 문을 연 가게는 매우 적고, 거리에는 노점상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물건을 계속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 때문에 교회가 고통을 겪을 것으로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지난 일요일에 새로운 신자가 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알리는 대가로 매를 맞아도 좋다고 했습니다. 또한 시골에서 총에 맞아 병원으로 실려 온 한 남자도 병원에서 그를 위해 찬송을 해주자 그것을 듣고 신자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군인들이 시골에 있는 몇몇 교회에 들어가서 찬송가책과 성경과 기록된 책들을 찢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개인 집에도 마찬가지로 군인들이 들어와서 성경과 다른 책들을 가지고 나가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의 교회를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늘 성심을 다해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우리는 한국에서 또 한 번 긴박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립선언서 한 부를 동봉합니다. 드디어 때가 오기는 했는데, 일본인들이 놀란 것처럼 우리에게도 커다란 놀라움이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압제를 영원히 참지는 않을 것이라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유를 선언할 시간은 우리 선교단과 일본인들 모두에게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져 있었던 것입니다.약 몇 주일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난 1월 21일 한국의 전 국왕이 갑작스럽게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이 일본인 왕족 공주와 결혼하기 겨우 사흘 전의 일입니다. 종래의 관습에 따라 아들이 상중이므로 앞으로 3년 동안 결혼은 할 수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상류층들은 모두 이번 혼인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러나 이 왕족의 결혼은 우리를 염두에 둔 것도 아닙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계층들은 이에 유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번 혼약은 일본인들이 계획한 것입니다. 왕의 승하는 우연히 일어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주 건강했던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이때를 맞아 죽다니 거기에 대한 주의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전 국왕이 이 결혼에 대해 반대를 했다고 하더군요.왕이 죽자 준비가 이루어지고 조용히 왕비의 시신을 임시 무덤에서 몇 년 동안 그녀를 기다리던 새 무덤으로 옮겨갔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1895년 10월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기억하고 있을 만큼 충분히 이곳에 오래 있었습니다. 칼과 검으로 찔리고 베어진 그녀의 시신이 어떻게 정원으로 끌려 나와 기름이 부어지고 불에 태워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이 장소는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왕비의 시신이 불태워졌던 왕궁의 그 장소를 사람들이 찾아갔을 만큼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왕궁을 관광하면서 보니 작은 현판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고, 근처의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건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한 작은 일본인이 영어 안내인이었는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이 우리를 안내해도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틀림없이 우리를 관광객 집단으로 본 모양이었습니다. 유명한 연못에 다다르자 우리의 나이 드신 선교사께서 해주신 이야기들이 떠올랐습니다. 초기에 그들은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도록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왕족들이 한 번도 스케이트 타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안내인은 그곳에 멈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연못은 한국의 이전 왕비가 자신의 몸을 던져 자살했던 곳입니다.”일본인들은 전 국왕의 장례를 장엄하게 치르는 데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반면 과도하게 무거운 세금을 한국인들에게 징수하여 여기에 드는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장례식은 3월 3일이었습니다. 이전 며칠 동안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지난 주 토요일까지 서울로 왔습니다. 기차역에서는 서울로 가는 한국인들에게 표를 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서울이 인파로 넘치고, 손님들은 길가에서 자는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말하길 그들은 조용하고 질서 있는 군중이었습니다. 구식 한국인들은 왕궁 문 앞까지 순례를 하려 했습니다. 왕궁에는 왕의 시신이 누워 있었습니다. 땅에 엎드려 곡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지요. 한국에 있는 모든 학교는 장례식 이후 금요일부터 목요일 혹은 수요일까지 휴교를 했습니다. 선교사를 위한 작은 학교조차도 휴교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두 명의 교사를 서울에 보내 그곳의 일을 보고 오게 했습니다. 토요일과 월요일에도 추모예배가 한국 전역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일주일 동안 날씨는 한국 북부의 3월 초치고는 전례가 없이 아주 맑고 햇볕이 따뜻하며 건조했습니다. 지금은 예전과 같은 3월 날씨로 돌아갔습니다. 오늘만 해도 북서쪽에서 눈보라가 있었고, 몇 시간 동안 강풍이 불었습니다.토요일 이곳 평양에서 추모예배가 끝난 후 신호가 주어지자 군중들이 갑자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수천 명이 대오를 정렬하여 길거리를 행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가지고 있었고,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있는 건물에서는 거리와 주변의 시골이 잘 보입니다. 군중들은 질서 있었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명령이 내려졌는데, 체포할 때 반항하지 말고, 아무도 다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헌병들과 경찰들이 왔는데, 그들 중 몇 명은 말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중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와서 그들에게 총을 쏘고 여기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총과 검으로 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이렇게 체포된 사람들로 감옥은 꽉 찼고, 처음 들어온 사람은 실컷 맞다가 다음에 들어온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는 집으로 풀려났습니다.저는 여러분께 소문이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있는 우리 선교사들이 직접 목격한 바를 쓰고 있습니다.우리는 또한 우리의 편지가 개봉되어 검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써서 보내거나 중국으로 편지를 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체포된 모든 사람이 제일 처음으로 받는 질문은 기독교인이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는 비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가혹한 처우를 받습니다. 어떤 마을에서 헌병들은 붉은색 분필로 비기독교인의 흰색 윗도리 뒤에 붉은색 표시를 하고는, 그들은 그냥 풀어 주거나 가벼운 질책만 하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웰본(Welbon) 씨의 시골 지구에서 공부를 하던 두 명의 여성분은 길거리를 지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도랑으로 밀어서 한 명은 치아 두 개가 부러지고, 한 명은 구타를 당해 불구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아 혼잡한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선교공동체는 지금 평소보다 커져 있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의 신학교가 지난 수요일에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육을 보조해 줄 남부 장로회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의 선교단 선교사들이 이제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들 중 몇 명은 지난 6월부터 가족을 데리고 와 있습니다. 지난 주에 다섯 시간이 걸려 대구와 그 근방에 사는 5명의 남성들이 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기숙사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검을 빼어 내고는 들어와서 거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자들을 찾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들은 싸움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왜 체포되는지 알려 달라고 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경찰서에 도착하자 그들은 기독교인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들 모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라고 대답했습니다.그러자 일본인들 가운데 복음서를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공부를 했으면 알겠지만,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겪었다고 한다. 여기 너희들을 위한 십자가를 우리가 준비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각 학생들은 차례로 옷이 벗겨진 채 십자가 형태의 나무에 올려져 매를 맞았습니다. 한 명 빼놓고, 모든 사람들이 29대를 맞았습니다. 예외였던 사람은 그가 1학년이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는 27대를 맞았습니다. 어린 여학생은 전신주에 머리카락이 묶인 채로 매를 맞았습니다. 한 시골 교회에는 군인 45명이 들이닥쳤습니다. 유리와 종이로 된 창문은 모두 부서지고, 교회종과 영성체 세트도 망가졌습니다. 그러고는 성경과 찬송가책을 있는 대로 찾아내어 모두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교회에 다니는 한 한국인들 불러내 가장 무자비한 방법으로 고문을 했습니다. 그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몇 차례 더 고문한 뒤 죽였습니다. 같은 교회의 한 여성은 혹독하게 맞았는데, 그 이유는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시골 교회에서는 한국인 목사의 집에 군인들이 새벽녘에 쳐들어 왔습니다. 목사는 평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갔고, 부인 혼자 남겨졌습니다. 그 집에서 등불을 켜고 검을 들이댄 채 샅샅이 뒤져 모든 성경과 찬송가책을 찾아내어 마당에서 불살랐습니다. 어제 우리는 교회 건물 아래에 있는 대로에서 75~1백 명 가까이 되는 죄수들이 시골에서 이곳으로 끌려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치거나 한국 국기를 가지고 다니면 체포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잔인성에 반대합니다. 독일인의 방법 같은 고문에 반대합니다. 웰본(Welbon) 씨는 한국인 여성과 어린 소녀들이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려 7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틀림없이 한국 국기를 가지고 있었거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을 것입니다. 혹은 감히 저항하지 못한 이유로 끌려가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병원의 외과에는 한 열두 살 먹은 소년에게서 1인치나 되는 탄환을 제거했는데, 그는 행진을 보기 위해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한 시골 마을에서는 어떤 할머니가 거리에서 쓰러져 그녀의 남편이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가던 중 남편도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모든 학교는 폐쇄되었습니다. 우리 선교학교뿐만 아니라 대학과 신학교, 공립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한국 학생들이 한국 교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여러분들 가운데 다수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 선교회에서는 우리 선교학교에서 종교적 가르침을 없애 버리라는 일본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요청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학교 문을 닫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시간이 이제 곧 다가올 듯합니다. 우리 선교회에서 교육사업을 하고 있는 남녀들은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즉 그들이 더 이상 장로교 학교에서 주님에 대해 가르칠 수 없다면 은퇴하고 현장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조국에 있는 동포들이여. 한국에 나와 있는 우리들은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자주 말해 주는 것처럼 북부 감리교파는 그렇게 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주교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지, 선교회 만장일치의 의견은 아닙니다. 몇 년 동안 은퇴 상태였던 이 주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선교사였고, 일본의 주교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주교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는데, 이곳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노인 신사 분인 바로 이 주교를 일본인들은 평화회의에 한국과 일본의 대표자로 파견했습니다! 한국인들은 평화회의에서 공정한 청문회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서울의 총독이 보낸 인쇄물에는 “한반도에 일본제국의 통치권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확립되었고, 앞으로도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이와 같은 불법적인 행동을 그치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또한 평화를 위협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엄중한 벌을 내릴 것이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두 명의 일본인들이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한 명이 “선교사들이 모두 이 나라에서 나가고, 또 기독교인들이 모두 나간다면 우리 일이 잘 될텐데 말이야”라고 말했습니다.두 명의 M. E. 선교회 여성들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군인들이 와서 총 뒷부분으로 그들을 쳤다고 합니다. 우리 선교회의 미혼 여성 한 분도 거리를 걷고 있다가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두 명의 군인이 고의적으로 그녀가 걷고 있던 곳으로 길을 건너와 그녀가 거의 길 옆에 있는 도랑에 빠질 뻔하게 두 명이 연달아 밀었다고 합니다.모피트(Moffitt) 박사님께서는 “우리는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일들을 보면서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일본인들 중에서도 좋은 친구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으나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뒷짐지고 보기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편지가 개봉되어 읽혀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파손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여기에 쓴 것도 아닙니다. 또한 본국에 있는 사람들이 이 편지에 씌어져 있는 내용을 읽는 데 대해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계신 분들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의 통치하에서 불행하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일본이 지금 한국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한국인들이 자유로워질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진심을 담아,새디 N. 웰본(Sadie N. Welbon)

    188 모든 장교와 사병에게 보내는 훈령

    작성일: 1919-03-18작성처: 타로 우츠소노미야(Taro Utsonomiya)한국 육군사령관두 나라의 합병이 이루어진 이래로 우리 행정부의 10년 가까운 노력이 이제 막 결실을 보려 하고 두 나라의 국민이 서로 동화되는 방향으로 발전이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참에 현 상황과 같은 사태가 벌어져서 나는 참으로 유감스럽다. 이번 상황은 소동을 미연에 방지하고 억제하기 위해 나의 명령에 따라 전국에 작은 집단의 무력배치가 요구되었다. 주요 목적은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아예 단절시켜 이와 같은 소동을 방지하자는 것임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애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강압은 더 많은 힘을 요구한다. 우리가 다루어야 할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근본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반란자들은 대부분 소수의 불만족한 사람들에게 잠시 홀렸거나 선동을 당했거나 협박을 당한 순진한 희생자들이다. 그러므로 소동을 제압하는 데 있어 가능한 온건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며 정말로 꼭 필요한 경우에만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모든 장교와 모든 사병은 이 점은 지속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서 동떨어진 행동은 허가되지 않는다.반란자들 가운데 사상자가 생기는 경우 인정을 베풀어 불행하게 죽거나 다친 사람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이와 같이 행동을 하라. 제군들의 행동은 우리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무사도의 전통에 입각하여 가장 훌륭한 것의 모범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바이다.타로 우츠소노미야(Taro Utsonomiya)한국 육군사령관1919년 3월 18일

    189 한국 육군사령관의 요청

    작성일: 1919-03-18소란사태가 더욱 퍼져서 이를 막고 제압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어서 귀관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매우 유감이다. 이 기회를 빌어 나의 강력한 요청을 귀관들 앞에서 표명하고 싶다. 나는 귀관들과 각기 다른 본부의 성원들이 다음의 사항을 명백하게 각 부대의 모든 이들에게 성심껏 전해 주기를 희망한다. 가장 낮은 계급인 일병에게까지 말이다.1. 한국인들이 비록 공격을 하긴 했지만 잘못을 저지른 한국인들에게 따뜻한 동정심을 보일 것. 불행한 사람으로 대우해 줄 것. 이곳 사람들은 사랑과 인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2. 최후의 꼭 필요한 때까지 무기의 사용은 멀리할 것(예를 들어 단지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하는 집회이면서 폭력이 없는 경우 평화로운 방법으로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3. 마지막 방법으로 무력이 사용되었어도 최소의 범위로 한정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4. 무력을 사용해야 할 시기가 지나면 사용을 바로 중지한다.5. 불행하게도 사상자가 발생했을 경우 사망자는 예의를 갖춰 대우를 해주어야 하고 욕설 행위나 모욕적인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된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되면 시신을 처리하는 데 있어(운반이나 매장) 필요한 도구와 원조를 해주어야 한다. 6. 부상자는 성의 있게 돌보아 주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 그들의 상처를 친절하게 치료해 주어야 한다.7. 사상자들의 가족에게 심하게 굴면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며 상황이 허락하는 한 그들을 도와주고 안내를 해줄 것.8. 소동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필요. 특히 노인, 아이, 여성에 대해.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에 있어서는 그들이 현장에서 잡힌 것과 같이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바람. 9. 귀관 휘하에 있는 장교와 사병들(특히 작은 부대로 특파된 사람들)이 그들의 충성심과 용기는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깨끗하고 예의바르며 겸손하고 점잖게 생활하여 우리의 고상한 역사적 무사도 전통의 모범적 예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10. 각 부대의 본부는 공무집행당국, 경찰조직, 철수된 징집병들 그리고 주재한 지역의 다른 계층 사람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190 미국 장로교회 해외 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

    발신일: 1919-07-28발신주소: 뉴욕 5번 가 156번지발신자: 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수신자: 한국 선교사 가족 및 친지 제위여러분||교회연방회의 산하 동양위원회(Federal Council’s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에서 일본의 하라(Hara) 수상에게 보낸 전보와 관련해 6월 30일자로 보내 드린 서신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의 전보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조선에서 학정(虐政)이 자행되고 있다는 여론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우리의 호의를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수상께서는 그와 같은 학대가 근절되었고|| 적절한 행정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는 공식적인 발언을 하시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결과에 대해 전보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수신인을 교회연방회의(Federal council churches) 산하 동양위원회(Federal Councils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로 하여 보내 주십시오.”우리가 받은 답신은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일본 정부 대리인들이 한국에서 저질렀다는 학대 보고서에 아주 심각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는 점을 확실히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실제 사실을 공명정대하게 볼 자세를 완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 번 선언한 바와 같이 거의 10년 전인 합병 당시 한국에서 발족한 행정부가 이제는 변화된 상황에 맞는 실질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현 내각이 조직된 이후로 나는 한국에서 필요한 행정개혁 계획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계획중인 포괄적인 개혁안이 이미 심의중에 있습니다. 명백히 알고 있다시피 불행히도 한반도 여러 곳에서 소요가 일어나 개혁안이 공식적으로 도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최근 상황이 개선되고 있음을 볼 때 계획된 개혁안이 안전하게 도입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며|| 개혁안을 명문화하기 위해 필요한 법적 절차가 완료되는 대로 실행에 옮겨질 것입니다. 현재로선 좀더 완벽한 형태를 갖추기 위해 계획의 발표를 보류하겠지만|| 한국인들의 영원한 복지를 향상시키고 국내의 상황을 확실히 개선시키기 위해 나와 나의 동료들이 확고한 결심을 갖고 노력해 온 것이 오해를 받거나 잘못 해석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 믿으며 또한 여러분께 약간의 격려가 될 것으로 생각해 이 편지를 보냅니다.감사합니다.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