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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국민회 에 대한 전체 4117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391 나성지방 임시공동회 서기 한봉석이 중앙총회장 윤병구에게 보낸 서한(1921.1.25.)

    1921년 1월 25일 나성지방 임시공동회 서기 한봉석이 중앙총회장 윤병구에게 보낸 서한이다. 나성(로스앤젤레스)지방 한인들이 중앙총회에서 보내온 공함을 갖고 1921년 1월 23일 임시공동회를 개최한 결과 공함의 내용이 본 지방 한인들이 의논할 사항이 아님으로 이를 환송하겠다고 했다.

    392 최능익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낸 서한(1919.6.10.)

    1919년 6월 10일 최능익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낸 서한이다. 시카고에 거주하는 최능익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구타펠 여사의 5, 6월의 월급 300달러 지불과 비용 부족에 따른 문제들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393 로버트 프루엘(Robert L. Pruell)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낸 서한(1920.2.28.)

    1920년 2월 28일 로버트 프루엘(Robert L. Pruell)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낸 서한이다. 로버트 프루엘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일본의 한국 지배와 통제에 관한 출판 문제를 문의하고,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한국인들을 진심을 다해 동정한다고 했다.

    394 신형호의 통신문(1919.6.18.)

    1919년 6월 18일 신형호의 통신문이다. 1919년 6월 6일 미국 워싱턴DC의 메소닉 템플에서 그리피스, 톰킨스, 서재필이 연사로 참석하고 2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집회가 열렸고, 그 결과 오덴버그와 윤병구를 중심으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한 뒤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작성했음을 알리고 있다. 또 4월 23일 국내에서 발표한 한성정부 수립 소식을 재차 전하고 재미 한인들이 새 정부를 받들어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395 신형호의 통신문(1919.6.)

    1919년 6월 신형호의 통신문이다. 이승만과 동행하며 그의 활동을 돕기 위해 워싱턴DC에 있는 신형호가 재미 한인들에게 독립운동 상황을 알리기 위해 발행한 첫 번째 통신문이다.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들이 대표회('제1차 한인회의')를 연 이후 한국인들과 한국 독립을 돕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어 마침내 톰킨스를 회장으로 한 한국친우회를 처음 결성한 사실을 전했다. 한국친우회 설립 목적은 한인들의 자유를 지지하고 종교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라 했다. 향후 워싱턴DC에서 한국친우회를 결성할 것과 미 의회를 상대로 한국문제를 제기하는 계획을 갖고 추진 중에 있다고 했다.

    396 신형호의 통신문(1919.8.13.)

    1919년 8월 13일 신형호의 통신문이다. 워싱턴DC에서 이승만을 돕기 위해 통신원으로 활동한 신형호는 재미 한인들에게 원동과 국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소식들이 미주한인사회에 전파된 뒤 정부의 진위에 대한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고 있지만 국내에서 국민대회로 수립된 한성정부는 온전한 정부로 인정해야 함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정부를 중심으로 합동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397 신형호의 통신문(1919.8.25.)

    1919년 8월 25일 신형호의 통신문이다. 헐버트가 상해 주재 독일은행에 임치된 광무황제의 돈 125만 마르크의 인출을 추진했으나 일인들이 먼저 알고 가로챘다는 것과 헐버트의 노력으로 미국 의회의 스펜스 의원이 한국문제를 의회록에 남기게 된 것, 헐버트가 재간하기로 한 '한국역사'와 맥켄지가 출간한 '한국의 비극' 책자를 구입해 널리 활용할 것, 파리에 있는 김규식이 뉴욕에 도착할 예정인지라 이대위와 임병직이 마중나갈 것, 스위스 루체른의 만국사회당대회에 참가한 조소앙과 이관용의 활동상, 새 정부 수립을 계기로 공채표 발매를 개시할 것이며 이를 위해 재무위원부를 설치한다는 것 등을 알렸다.

    398 구미위원부통신 제1호(1919.9.20.)

    1919년 9월 20일 주차구미위원부통신 제1호이다.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의 자격으로 이승만이 위원부(주차구미위원부)를 조직한 사실을 알리고 있고 9월 18일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가 보낸 전보를 근거로 임시정부 조각 내용을 공포하였다. 향후 방침은 정부의 제반 행정사무는 상해의 임시정부가 주장하고 구미의 행정사무는 미국에 있는 구미위원부에서 처리한다는 점을 알리고 구미위원부 구성은 위원장 김규식, 회계 이대위, 서기 송헌주로 정했으며 미국 내 각 지방에 3명으로 구성한 지방위원부를 설립하는 데 우선 임시위원들을 임명해 발표한다고 했다. 끝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전보를 보내 애국금 수합활동을 정지하고 대신 공채표 발매를 지시한 것과 워싱턴의 위원부에 통신부를 새로 설치하고 통신원으로 신형호를 임명하였다고 했다.

    399 구미위원부통신 제2호(1919.9.25.)

    1919년 9월 25일 주차구미위원부통신 제2호다. 제2호 발행 때부터 구미위원부는 처음으로 '주차구미위원부통신'이란 이름으로 발행하고 있다. 제2호의 내용은 통신원을 책정한 이유, 애국금을 정시시킨 이유, 구미위원부와 중앙총회 간에 왕복한 전보와 공문들, 각 지방위원부의 임시위원들에게 보낸 전보 내용, 원동통신의 내용과 워싱턴에서의 활동상 등을 알렸다.

    400 구미위원부통신 제3호(1919.9.28.)

    주1919년 9월 28일 차구미위원부통신 제3호이다. 제2호에 이어 제3호에는 공채표와 애국금 문제로 구미위원부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간에 왕래한 전보 내용을 알리는 한편 중앙총회에 의연금 지출문제에 대한 구미위원부의 입장을 밝혔다. 그 외 미국 상원에서 한국에서 벌어진 모우리와 벨 목사의 체포사건을 다루었고 헐버트와 여원홍의 순행연설, 이승만의 순행연설 계획 등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