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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국민회 에 대한 전체 4117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01 구미위원부통신 제4호(1919.10.6.)

    1919년 10월 6일 주차구미위원부통신 제4호이다. 제4호에는 기존 '주차구미위원부통신' 대신 '구미위원부통신'이란 제목으로 발행되고 있다. 구미위원부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사이에 공채표와 애국금 문제로 이견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그에 따른 구미위원부의 확고한 입장 등을 밝히고 있고 대한인국민회는 정부가 추진하는 일에 적극 따라줄 것과 정부가 하는 사업에 일일이 비난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402 구미위원부통신 제5호(1919.10.)

    1919년 10월 주차구미위원부통신 제5호이다. 애국금과 공채표 발매를 두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서재필 간 왕래한 전보 상황과 헐버트와 여운홍의 순행 연설 행보, 김규식의 순방활동을 통한 구미위원부의 정황 등을 알렸다.

    403 구미위원부통신 제6호(1919.10.15.)

    1919년 10월 15일 주차구미위원부통신 제6호이다. 애국금 수합과 공채표 발매를 둘러싸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 백일규-중앙총회장 윤병구와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 간에 왕래한 서한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규식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상호간 오해 없이 연합해서 독립의 대의를 위해 정진할 것을 답신했다.

    404 구미위원부통신 제7호(1919.10.17.)

    1919년 10월 17일 주차구미위원부통신 제7호이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받은 전보에 따라 계속 애국금을 수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구미위원부에 알리고 있으나 집정관총재 이승만은 이를 인준하지 않으니 정부 수장의 말에 따르는 것이 진정 정부에 대한 복종임을 알렸다. 또 그동안 중앙총회에서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 보낸 재정이 도합 1,040원에 불과한데 중앙총회가 지금까지 수합한 많은 의연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반문하였다.

    405 구미위원부통신 제8호(1919.10.21.)

    1919년 10월 21일 주차구미위원부통신 제8호이다. 일인들은 국내 한인들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나 해외에 있는 한인들에 대해선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인데 지금 와서 해외 한인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계책을 쓰려 한다 하니 향후 몇 가지를 주의할 지침을 마련해 알렸다. 그것은 언어와 문자 그리고 폭발물에 주의하고 일인에 의한 특별 보호를 받지말 것, 일인과 절대 연락하거나 교통하지 말 것 등이다.

    406 구미위원부통신 제9호(1919.11.6.)

    1919년 11월 6일 주차구미위원부통신 제9호이다. 미 하원 의원 메이손의 한국 동정을 위한 의안 제출, 이승만의 미국 동부지역 순행 연설 상황, 워싱턴에서 미국인 부인들이 조직한 한인구제회 활동, 김규식의 샌프란시스코 순행, 하와이 한인들이 공채표 발매를 위해 결의한 5개의 결의안 등을 알렸다.

    407 구미위원부통신 제10호(1919.11.12.)

    1919년 11월 12일 주차구미위원부통신 제10호이다. 상해통신을 인용해 하와이 영자신문에서 나온 상해 임시정부의 기사가 낭설임이 밝혀졌고, 서재필이 캔자스지방을 방문해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으며, 인디애나폴리스의 신문에 나타난 한국인의 자유와 능력이라는 기사를 한글로 번역해 게재하였다.

    408 민언 제5호(1919.11.)

    1919년 11월에 발행된 민언 제5호이다. 민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주영한이 1919년 9월 내지 10월경부터 발간한 주간 또는 격주간의 소식지다. 제5호에는 대한적십자회 회장 이희경의 로스앤젤레스 방문에 따른 환영회 개최와 남가주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정영수가 리버사이드 비행학교에 입학한 소식, 독립 원조와 사회개량을 목적으로 설립한 신민회의 입회청원서를 소개하고 있다. 그 외 제5호에 포함된 것인지 불분명하나 염세우와 기고문과 김규식의 연설문 전문이 실려있다.

    409 민언 제8호(1919.12.15.)

    1919년 12월 15일에 발행된 민언 제8호이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제22호에 게재된 '임시정부와 국민'을 전호에 이어 연재하고 있고, 조선총독 사이토가 3.1운동 이후 국내 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일본정부에 군대 파견을 요구하였다는 소식을 싣고 있다. 그리고 공채금을 구입한 사람들의 명단과 성탄절을 맞이하여 나성지방에서 본국에 있는 한인들을 돕기 위한 자선회를 열어 구제의연금을 수합했다는 것 등을 실었다.

    410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게 보낸 공문 제16호(1919.7.9.)

    1919년 7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게 보낸 공문이다. 내무총장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대리 백일규)에게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양한묵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악행을 당하며 수감생활하던 중 5월 27일 순국하였음을 알리고 재미 한인들이 그를 애도하기 위한 추도식을 거행할 것을 주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