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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
島山(도산 안창호)장(丈) 위감(偉鑑) 사오(四五) 성상(星霜)이 경과하도록 문안을 궐하였사옴에 원(遠)히 양서(洋西)에서 심부차희(深孚且希)하시는 선생님의 저어(齟齬)하심도 기차(幾次)가 유(有)하셨을 것이오. 요(遙)히 양동(洋東)에서 앙모협칭(仰慕協稱)하고 열제(劣弟)의 초창함도 부소(不少)함이 적(積)하였을 것은 하등 경우런지 서촉(恕燭)하시옵소서. 경문(敬問) 경세(經歲) 경년(經年) 이래로 보체(寶體) 공무(公務) 노뇌(勞惱)하시는 중 항상 건강하시옵니까? 원앙송축(遠仰頌祝) 만만(萬萬)이오며 열제는 객장(客狀)이 의견(依遣) 오니 타하경달(他何更達)이오릿가? 금(今)에 누년(累年) 적회(積懷)를 약략(略略)히 강령(綱領)은 진거(盡擧)코자 하오며 제의 은미한 사실과 우(又)는 이상을 세인(世人)은 상세히 알지 못하나 제는 신착(身着)한 자기인 고로 시비 선악과 지우(智愚) 원달(寃達)을 타인보다 천배 만배 밝게 아는바 차(此)를 조곰도 가식이나 혹 엄피(掩避)치 않코 차세(此世)에 둘도 아니고 오직 하나이신 선생님에게 직적(直的)으로 고하오니 문의(文義)보다 사정으로 더욱 멀리 널리 생각하여 보시옵소서. 거금(距今) 7년(七年) 전(前)에 선생님께서 아국경(俄國境, 러시아 국경)에 두류시(逗留時) 도미(渡美)하신 후(後) 해삼위(海參威 , 블라디보스토크)에 열제(劣弟)가 낙재(落在)하는 때에 정(鄭)·이(李) 양형(兩兄) 있는 곳에 김성무(金成武) 씨(氏)와 동왕(同往)하여 대세(大勢)의 착오(錯誤)될 점(點)도 상의(相議)하고 제(弟)의 일신(一身)을 처치(處置)코자 토론(討論)하옴에 정형(鄭兄, 정재관)은 후애(厚愛)하는 마음으로 출(出)하는 말씀이 자기 집에 내유(來留)하라고 하며, 이형(李兄, 이강)도 권(勸)하오나 열제(劣弟)가 일찍 여성격(女性格)의 보통(普通)을 짐작하고, 또는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의식(衣食)의 두충(蠹蟲) 노릇이나 하고, 송세월(送歲月)하게 되면 녕사(寧死)가 유승(猶勝)하리라는 견고(堅固)한 습성(習性)을 자극(自克)치 못하여[무미(無味)한 세월(歲月)을 외촌(外村)에서 소견(消遣)할 수 없다고] 답(答)한 후(後)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으로 환귀(還歸)하여 본 즉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은 일시(一時)를 떠나지 못하게 판국(板局)이 되었는데, 이유[제(弟)가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으면 금력자(金力者)와 관력자(官力者)로 능(能)히 대대(對待)하여 정신적(精神的)으로 국가사회(國家社會)의 이익(利益)을 파급(播及)할 수도 있고, 또는 유명무실(有名無實) 혹(或) 무형유적(無形有跡)한 사면(四面) 국민회(國民會)도 할 수 있는데 까지 명맥(命脈)을 끊지 않게 할 수도 있고, 또는 정·이(鄭·李) 양형(兩兄)은 기시(其時) 구무(構誣)하여 해(害)할 경우(境遇)이오며, 또는 이종호 등의 주의(主意)는 외양(外洋)의 통일(統一)을 질투(疾妬)하는 것이 극도(極度)에 달(達)하고 모처(某處)에서 내(來)하여 모국(某國)으로 유학(留學)하러 가려든지 하는 자에 대하여도 혹 돈이 많으면 억류(抑留)할 계(計)도 있고, 혹 대용(貸用)하기도 하고, 혹 자기 무리를 만들어 인격이 완전한 선진(先進)을 배척(排斥)하기로 급급(急急) 경영(經營)하는데, 열제(劣弟)는 치따로 최촉(催促)하여 정·이(鄭·李) 양씨(兩氏)를 빨리 청(請)하도록 일변(一邊) 양형(兩兄)을 떠나도록 하며, 이종호의 주의(主意)와는 원법(原法)으로 반대(反對)이온즉 이(李, 이종호)를 병준(송병준)·완용(이완용)으로 생각까지 하였소이다. 제(弟) 생각에는 이것이 큰 일인 줄로만 알고, 이곳을 떠나서는 아니 되겠거니 하는데, 월송(김형식)은 우함을 저에게로 보내고 통신을 모두 저에게 맡기라고 간접(間接)으로 사람까지 보냈습니다. 그런즉 어리석고 아무 것도 모르는 열제(劣弟)가 욕설(辱說)과 질증(疾憎)도 많이 받았겠지요. 그런 중에 툭하면 정탐으로 붙들어 가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부득불(不得不) 제(弟)가 알은 체 할 수밖에 없이 되었소이다.] 사세(事勢)가 여차(如此)할새 아령(俄領, 러시아) 각처(各處)의 지형(志兄) 지우(志友)들은 열제(劣弟)가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혹(或) 나은 줄로 생각하게 되었소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못된 제(弟)가 아니면 어찌 좋은 사업(事業)으로 장래(將來)의 국가사회(國家社會)의 어떠한 이익(利益)될 점(點)도 연구(硏究)하고 일신(一身)의 장래(將來)까지 경영(經營)치 못하겠습니까? 지각(知覺)도 없고 능력(能力)도 없이 자격(資格)이 불완전(不完全)한 몸둥이로 외상(外上) 밥 먹기나 쉽게 하고 아어(俄語, 러시아어) 한 마디를 힘써 배우지 아니하면서 그래도 국가사회(國家社會)에 관(關)하여 이(利)로운 영향(影響)을 끼쳤다고 해삼항(海參港,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편네를 하나 얻어 술장사라도 하던지 또는 노름을 부쳐서라도 지내가면서 이곳에 있어야 하겠다 하는 그런 생각으로 그런 길을 얼마 것고 생각하여 보면 답답한 것뿐이라 이러하고는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 그때부터 죽고 싶은 생각이 날로 심(甚)하여지는데 이따금 밥값에도 수치(羞恥)를 당(當)하고 입을 것 신을 것도 더럽게도 되나이다. 그러나 열제(劣弟)가 유서(儒書)를 좀 읽은 까닭에 여간(如干) 구의폐사(垢衣弊屣)는 꺼리지 아니하오나 나신적족(裸身赤足)되는 마당에 답답하옵디다. 그런즉 서너 푼 어치의 힘을 좀 써주었으면 도리어 그보다 얼마 식(式) 더 받게 되는 데에도 청백(淸白)을 표하지 못하고 또한 일반(一飯)의 덕(德)을 천금(千金)으로 갚아야 할 터인데, 백반(百飯)의 은(恩)을 일분(一分)으로도 일력(一力)으로도 갚지 못함에 그 목석(木石)이 아닌 심정(心情)의 사람으로 어떻다 하올런지요, 그런 중에 더구나 괴악(怪惡)한 일은 모국(某國)으로 유학(留學)하러 가는 학생(學生)을 차 한 잔 사주지 못하고 기원(幾元) 식(式) 얻어 쓴 것이 감상(感想)에 여하(如何)하오릿가? 그런데 신형호(申衡浩) 씨(氏)에게서는 미화(美貨) 이십오원(二十五元)[아화(俄貨, 러화) 오십 원]을 대용하고, 선생(先生)님에게서 받으라고까지 하였소이다. 이렇듯 비루(卑陋)하고 용악(庸惡)한 처지(處地)에 있으면서도 그래도 큰 나만(大我) 변치 아니하면 되겠거니 하고 모지방(某地方) 모인(某人)이 학교로 위(爲)하여 왔다던지, 또는 여러 선생(先生)과 지우(志友)를 앙모(仰慕)하는 자(者)가 래(來)하면 동서(東西)로 분행(奔行)하여 전(錢) 얼마를 변통하여다가 소위(所謂) 교제(交際)라는 것도 하며 제일(第一) 미안(未安)하고 답답(沓沓)한 것은 장기영(張基永) 씨(氏) 같은 이가 선생(先生)님 가신 후(後)에는 열제(劣弟)의 청(請)을 응(應)하여 교수(敎授)하러도 다니고 하였는데,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에 래(來)하면 여간(如干) 푼돈은 제(弟)가 담당하여야 되겠고 아니할 수는 없는 사세(事勢)로 이렇게 민망하게 지내면서도 장래(將來)도 모르고 세상(世上)도 모르는 열제(劣弟)는 외둔(外邨)으로 밥동냥도 떠나지 못하였소이다. 이러한 경력(經歷)이 있은 즉 크게 신용(信用)은 잃지 아니하였으나, 남루(濫縷)한 걸객(乞客)을 타매(唾罵)하는 인(人)과 처(處)뿐이지, 가뜩이나 여러 기관이 병립(竝立)하는 때에 알뜰이 생각할 사람 누가 있으리오. 그러한 중(中)에 수년 후(後) 추정[秋汀, 이갑(李甲)]이 내도(來到)하여 같이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 일동(一洞)에 있으나, 추정(秋汀, 이갑)은 자기(自己) 병세(病勢)로 위(爲)하여 치료비(治療費)도 없는데, 한갓 우려(憂慮)만 끼치게 되었소이다. 추정(秋汀, 이갑)이 내도(來到)한 후(後)에 일반(一般) 지우(志友)의 명령(命令)과 청탁(請托)을 일체(一切)로 시행(施行)하나 제(弟)의 형상(形像)을 보고 감상(感想)의 여하(如何)할 것을 아는 자(者)는 없는지라. 그때부터 악감정(惡感情)이 또 생겼소이다.[제일차(第一次) 악감(惡感)은 열제(劣弟)도 스스로 그른 줄 압니다. 그렇게 잘못 생각한 것은 무슨 일인고 하니, 열제(劣弟)가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통(苦痛)으로 다소(多少) 세월(歲月)을 지냈는데, 어느 방면(方面)으로든지 좀 편(便)하게 안심(安心)하게 힘써주지 않고 돈 한 푼 보내지도 아니하면서도 소식(消息)이나 통(通)하여 달라는 부탁(付托)만 사면(四面)에서 하다가 들은 즉 치따 총회(摠會)에서 최씨를 공선하여 아경 유학을 시킨다 하는지라. 장래(將來)에 관(關)하여는 열제(劣弟)가 갈 곳이라도 대신(代身) 보낼 만한 처지(處地)와 인격(人格)인 줄은 알지 못함이 아니오나 열제(劣弟)의 고통(苦痛)을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는 것이 어찌 분울(憤欎)한지 몰랐소이다.] [이제부터 쓰는 것은 오육일(五六日) 후(後)로 시속(始續)하옵니다.] 제이차(第二次) 악감정(惡感情)의 시비(是非)는 열제(劣弟)가 자해(自解)치 못하나이다. 추정(秋汀, 이갑)이 내도(來到)한 후(後)에 제(弟)가 제반사정(諸般事情)에 제우(諸友)와 동모동력(同謀同力)하는데 삼동(三冬)에 어한(禦寒)의 의관(衣冠)이 부족(不足)한 제(弟)로 동지(同志)의 여간(如干)한 일까지 다 주선(周旋)하려하고 또는 동지(同志)들도 너무 사역(使役)을 시키고자 함이 심(甚)한 말로 지각(知覺)없는 우마(牛馬) 부리듯 하려 하기로 그때부터는 추정(秋汀, 이갑)의 여관(旅館)에서 다른 동지(同志)들의 어림없는 말은 항철(抗撤)하기로 주장(主張)하니 제(弟)의 졸연(猝然)히 여차(如此) 반항(反抗)을 혹의(或疑) 혹오(或惡)하는지라. 그러나 기시(其時)부터는 인생(人生)이라는 것에 관(關)하여 아(我)가 아(我)의 여하(如何)한 것도 말하고 녹녹(祿祿)히 부릴 생각 못두도록 하였소이다. [추정(秋汀, 이갑) 이외(以外) 제인(諸人)] 얼마 후(後)에 추정(秋汀, 이갑)은 목릉[穆稜, 흑룡강성 목릉시]으로 가고 제(弟)는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에 잉유(仍留)하는데 수년(數年) 식가(食價)와 기타(其他) 채부(債負)의 불신용(不信用)한 것은 진합위토(塵合爲土)요, 비루(卑陋)한 행위(行爲)는 연가법(連加法)을 행(行)한 즉 못된 노릇은 거진 다 행(行)하였는지라. 행위(行爲)와 사세(事勢)가 차(此)와 여(如)한 즉 돈도 매우(買牛)할 것으로 마(馬)도 선매(先買)하고 매마(買馬)할 것으로 우(牛)도 선매(先買)케 되었소이다. 그러므로 윤섭(尹灄) 씨(氏)의 반구(返柩)하여 달라고 아화(俄貨, 러화) 일백원(壹伯元) 보낸 것을 김치현(金致鋧) 씨(氏)의 몸 구(求)하노라고 사십원(四十元)을 먼저 쓰고, 사십원(四十元)을 더 청구(淸求)하여 반구(返柩)시킨 일도 있소이다. 그러다가 치따 지방(地方)에서 돈 삼십원(三十元)을 정씨(鄭氏)에게도 보내여 정씨(鄭氏)에게 주라는 돈이 있는데, 제(弟)가 잘라 쓰고 뒤를 미쳐 돌루지 못하였더니 정근(定根, 안정근) 씨(氏)가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도(來到)하였기로 제(弟)는 목릉으로 가겠다 하고 목릉으로 가서 추정(秋汀, 이갑)과 동류(同留)하려 하였소이다. 그러나 정씨(鄭氏)에게 보내는 돈을 충대(充代)하려고 제인(諸人)에게 애써 고구(苦求)하는데, 정근(定根, 안정근) 씨(氏)가 기전(其錢) 흠축(欠縮)한 줄 알고 목릉(穆稜)으로 회환(回還)하여 제(弟)의 청구처(淸求處)에도 불응(不應)하도록 말하고, 제(弟)는 타지(他地)로 이행(離行)하라 하기로 추정(秋汀, 이갑)에게는 답답(沓沓)하고 울울하여서 못있겠다고 말한 후(後) 떠나서 소왕령(우수리스크)으로 향(向)하였소이다. 이때 목릉에서 떠나기는 추정(秋汀, 이갑)도 모르게 먼 곳에 지(至)하여 자구(自救)하기로 결정(決定)하고 소왕령(우스리스크)에 도(到)하여 음(陰) 팔월(八月) 초구일(初九日)[거금(距今) 오년전(五年前)] 열제(劣弟)의 생일(生日) 저녁까지 먹고 화차(火車)에 올랐소이다. 당일(當日) 아침에 신학봉 씨와 외촌(外村)으로 가기를 상약(相約)한 후(後) 신(申, 신학봉) 씨(氏)는 먼저 마차(馬車)로 떠나 보내면서 모처(某處)에서 고대(苦待)하라 하고 열제(劣弟)는 기일(其日) 석(夕)에 화차표(火車票)도 내지 않고 올라서 얼마나 갔던지 안내자(案內者)가 차표(車票)를 채근(採根)하기로 이곳이 아마 운명(運命)할 곳이라 하고 화차(火車)에서 뛰어 내렸소이다. 어떻게 되었는지 눈을 뜨고 본 즉, 신성(晨星)은 종종(種種)하고 효천(曉天)은 훤하여 오는데 닭의 소리가 들리면서 일신(一身) 반부(半部) 좌편(左便)은 쓸 수 없는데, 차차(次次) 정신(精神)을 돌린 즉 천지(天地)가 다 밝았는데 한인(韓人)의 둔락(邨落) 수십가(數十家)가 보이기로 짐도 없고 쓴 것도 없이 다만 입은 것뿐으로 기동리변(其洞里邊)에서 배회(徘徊)한 즉 촌인(村人)이 나와 보는데 예전(例前) 지면인(知面人)이라. 제(弟)의 모양을 보고 끌고 들어가 침(針)을 수십처(數十處) 놓고 사정(事情)을 묻기로 모르겠다고 답(答)하고 좀 있었더니 신학봉 씨가 해처(該處)로 래(來)하여 제(弟)의 모양과 심리(心理)를 짐작하는지 위로(慰勞)하면서 예정(預定)하였던 촌(村)에 가서 세월(歲月)을 다소간(多少間) 보내자고 하기로 도병허(都兵墟)라 하는 곳으로 향(向)하여 그곳에서 아(兒)이들과 동유(同遊)케 되었소이다. 그러한 그때에 선생(先生)님이 락희(樂喜, 김락희) 씨(氏)와 동행(同行)케 하라고 돈까지 부송(付送)하였으나, 제(弟)가 그때 무린을 떠나 도병허(都兵墟)로 가서 있는데 [제(弟)가 죽기로 결정(決定)하고 간병제(簡秉濟)에게와 기타(其他) 수인(數人)에게 기(其) 사정(事情)을 토(吐)하였더니 정근(定根, 안정근) 씨(氏)도 하처(何處)에서 썩어졌으리라 하고 다시 생각지 아니하였는지 진정(眞正)하고 청백결대(淸白潔大)한 정근(定根, 안정근) 씨(氏)로서 신용(信用)도 없고 아무 것도 취(取)할 인격(人格)이 못되는 열부(劣夫)로 생각하니깐 다시 심방(尋訪)할 생각도 아니하였는지 기시(其時) 이강(李剛) 씨(氏)와 추정(秋汀, 이갑)과 여하(如何)케 생각을 정(定)하고 말았는지] 해지방(該地方)에 안중근(安重根) 씨(氏)와 공동회(共同會)로 저금(貯金) 기백원(幾百元)이 유(有)하기로 열제(劣弟)가 말하여 안정근(安定根) 씨(氏)를 청(請)하였더니 내도(來到)하여 사백여(四百餘) 원(元)을 찾아 갔소이다. 그리고 열제(劣弟)는 해지(該地)에서 아(兒)이들과 십개월(十個月)을 동유(同遊)한 후(後)에 떠났는데, 기간(其間) 성재[誠齋,이동휘(李東輝)]가 권업회(勸業會)의 총대(摠代)로 내도(來到)하였기에 상봉(相逢)하여 약간(若干)의 사(事)를 상론(相論)한 즉 직(直)하고 성(誠)하고 열(熱)하고도 좀 진솔(眞率)하신 선생(先生)이 자기(自己)의 주견(主見)대로만 하려는 고집(固執)과 또 좀 다른 점(點)이 보이기로 기쁘게 자미(滋味)있지 못하였소이다. 십개월(十個月)만에 소왕령(우스리스크)에 내도(來到)하여 추정(秋汀, 이갑)을 다시 보고 성재(誠齋, 이동휘)의 편협(偏狹)을 공격(攻擊)한 즉 추정(秋汀, 이갑)은 정직(正直)한 이라고만 변답(辨答)하기로 병석(病席)에 있는 이와 더 쟁론(爭論)치 아니하였으나, 아마 성재(誠齋, 이동휘)도 전문(傳聞)한 듯하옵니다. 그리고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를 다시 가서 본즉 우둔(愚鈍)한 배척(排斥)의 기운(氣運)이 얽혀 있기로 쌍성(雙城, 소왕령 : 우스리스크)에서도 소위(所謂) 동지(同志)들의 냉대(冷待)를 보고 이곳에서도 또 이러하니 돈이나 이제는 모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거금(距今) 사년전(四年前) 윤(閏) 오월(五月)[양력 유월(六月)]에 미깔뇌(니꼴라옙스키)로 향(向)하였소이다. 미깔뇌(니꼴라옙스키)에 당(當)하여 본즉 그곳이 역시(亦是)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이라, 권업회가 곧 배척(排斥) 기관뿐인 고로 기처(其處) 어장(漁場)에서 노동(勞働)하고 지내고자 하는데 당지(該地)는 하(夏) 삼개월(三個月)에 하등(何等) 사업(事業)을 종(從)하여서 구개월(九個月) 동안을 먹고 살아야 하는 곳이오이다. 그러나 기위궁행(旣爲躬行)한 바에 노동(勞働)을 종사(從事)코자 하여 여름에는 노동도 하고 혼자서 금법(禁法)의 술도 만들어 팔고 그렇게 양년(兩年)을 지낸 후(後) 작년(昨年) 하(夏)에 돈을 좀 많이 벌고자 하여 어업(漁業)의 소주인(小主人)으로 역인(役人) 얼마를 부쳤더니 이삼천원(二三千元)의 실패(失敗)가 되어 제(弟)의 앞으로 육칠백원(六七百元)이 지어짐에 이럭저럭 다 물어주고 공권적수(空拳赤手)로 그곳에 있을 자미(滋味)도 없고 기후(氣候)에 관하여 병세(病氣)가 생(生)하기로 음(陰) 구월(九月)에 소왕령(우스리스크)으로 회환(回還)하였소이다. 소왕령(우스리스크)으로 회래(回來)할 시(時) 생각은 아령(俄領, 러시아)에도 일인(日人)의 세력(勢力)이 부소(不少)하고 열제(劣弟)는 사소(些小)한 신용도 많이 잃고 또는 능력(能力)과 금력(金力)도 없기로 고국(故國)에까지 환(還)하여 하등(何等) 이익점(利益點)을 취(取)하려 하였더니 소왕령(우스리스크)에 당도(當到)하여 본즉 석오[石梧, (이동녕(李東寧)]부터 좌가 되고 기외(其外)는 모두 국가(國家) 공익(公益)에 생각두는 자(者)가 별(別)로 없이 모두 절망(絶望)뿐이라. 수년(數年) 내(來) 유치(幼穉)한 지사(志士)만 보면서 울울(鬱鬱)히 지내던 자(者)로 이제 사천리(四千里)세에 오면서 유지자(有志者)는 하나도 못본 시(時)에 석오(石梧, 이동녕)까지 이러한 것을 본즉 고국(故國)으로 돌아갈 생각은 어느덧 없어지고 아무쪼록 절맥(絶脈)되지 않토록 소리쳐 봐야 하겠다는 근심과 생각이 생기며 능력(能力) 불급처(不及處)와 금력(金力) 불급처(不及處)는 고사(姑舍)하고 할 수 있는데까지 자격(資格)대로만 하여보자 하였더니 마침 박영갑(朴永甲) 씨(氏)도 소왕령(우스리스크)으로 내도(來到)하여 모사(某事)든지 성취(成就)하려한 즉 가급적(可及的)으로라도 행(行)할 자료[資料 즉(卽) 금전(金錢)]가 무(無)하옴에 반대성(反對聲)만 얼마 듣다가 피득보(彼得堡,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내(以內)로 노동(勞働) 역부(役夫)를 태거(駄去)한다는 소문(消聞)이 있기로 그리로 나가자 하고 역부록(役夫錄)에 기명(記名)한 후(後) 화차(火車)에 등(登)하여 십이(十二) 주야(晝夜)만에 치타에 당도(當到)하여 고성삼(高成三) 씨(氏)를 방(訪)한즉 고성삼 씨(氏)는 인촌(隣村)에 행(行)하였으나 기가(其家)에 있는 여러 형제(兄弟)가 만류(挽留)하고 치타에서 하등(何等) 노동(勞働)이라도 하라 하기로 이강(李剛) 씨(氏)도 칠년(七年) 동안이나 못보고 치타 형편(形便)도 처음이기로 내렸소이다. 이강(李剛) 씨(氏)를 만난 즉, 이강 씨(氏)는 작년(昨年)부터 농업(農業)에 종사하여 아직 채부(債負)로 있으나 추절(秋節)에는 진상(盡償)하고도 의식(衣食)이나 될 듯하외다. 그런데 아국(俄國, 러시아) 정부(政府)가 혁신(革新)한 후(後) 언론(言論) 집회(集會) 판권(板權)의 자유(自由)를 허(許)함으로, 차지(此地)에서 국민회(國民會)의 허가(許可)도 받고 신문(新聞)도 발간(發刊)도 하기로 작정(作定)하였으므로 제(弟)를 유(留)하면서 집필(執筆)이나 하라 하기로 이(李, 이강) 씨(氏)는 농사(農事)에 분다(奔多)할 듯하여 그리하기로 허(許)하고 유(留)하였더니 활자(活字)도 없는 차지(此地)에 석판(石板)까지 인쇄(印刷)할 역인(役人)이 없음으로 신문(新聞)을 곧 발간(發刊)치 못하고 타처(他處)에 가서 인쇄(印刷)하기로 영(營)하는 동시(同時)에 소왕령(우스리스크)으로서 전보(電報)와 통지서(通知書)가 연래(連來)하였는데, 아령(俄領, 러시아) 전체(全體)의 한인(韓人)의 일대(一大) 단체(團體)를 조직(組織)하겠으니 각처(各處)에서 대표(代表) 일이인식(一二人式) 선거(選擧) 이송(以送)하라고 하였으며 신문(新聞) 기타(其他) 각(各) 기관(機關)을 협동(協同)하자 하였음에 차지(此地)에서 신문(新聞) 발간(發刊)하려던 것은 일변(一變)하여 한인회(韓人會)를 경과(經過)한 후(後) 경우(境遇)의 여하(如何)를 쫓아 발간(發刊) 혹(或) 정지(停止)하자고 결정(決定)하고, 차지(此地)에서 이강(李剛) 씨(氏)를 대표원(代表員)으로 선송(選送)하여 아(俄, 러시아) 오월(五月) 이십이일(二十二日)[양(陽) 유월(六月) 사일(四日)] 소왕령(우스리스크)에 각처(各處) 대표원(代表員)이 회집(會集)하였으나 원호편(原戶便) 한인(韓人) 칠십명수(七十名數)와 여호측(餘戶側) 한인(韓人) 삼십여명(三十餘名)이 협동(協同)은 되지 못하고 원호측(原戶側)에서만 고려국민회(高麗國民會)라고 조직(組織)하였소이다. 연(然)한데, 제(弟)가 윤(閏) 이월(二月) 이일(二日)[양(陽) 삼월(三月) 이십삼일(卄三日)]경(頃)에 소왕령(우스리스크)을 떠났는데, 이상설(李相卨) 씨(氏)는 음(陰) 윤월(閏月) 구일(九日)에 서세(逝世)하고, 이강(李剛) 씨(氏)는 아(俄, 러시아) 오월(五月) 삼십일일(三十一日)[양(陽) 유월(六月) 십삼일(十三日)]에 소왕령(우스리스크)에서 떠났는데, 추정(秋汀, 이갑)은 기일(其日) 서세(逝世)한 듯 하외다. 작년(昨年) 봄에는 김익용(金益鎔)이를 정탐으로 여겨서 수유(囚幽)하였다가 아(俄, 러시아) 오월(五月) 십일(十日) 경(頃)에야 신정부(新政府)된 후 몽방(蒙放)되고, 이동휘(李東輝) 씨(氏)는 신정부(新政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일을 좀 하려고 중령(中領,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가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閏) 이월(二月) 붙들려서 상금(尙今) 놓이지 못하였으나 사면(四面)의 전보(電報)와 청원서(請願書)가 환지(還至)하고 또는 신정부(新政府) 까닭인 고로 관대(寬待)하는데, 성재(誠齋, 이동휘)의 정탐으로 구무(構誣)된 원안(原案)은 구정부(舊政府) 시대(時代)에 있음으로 신정부(新政府)의 관리(官吏)는 준행(遵行)한다는 등설(等說)로 답(答)하고 아직 여하(如何)한 판결(判決)이 무(無)한 듯하외다. 연(然)한데, 원호(原戶) 고려국민회(高麗國民會)에서는 『청구신보(靑邱新報)』 여호측(餘戶側)에서는 『한인신보(韓人新報)』를 발간(發刊)하여 두 호식(號式) 세상(世上)에 탄생(誕生)되었으나, 두 신문에 하나도 주필(主筆)이 없이 졸발(猝發)됨으로 볼 것 없소이다. 두 곳에서 신문을 잘하려고 주필(主筆) 기인(其人)을 택(擇)하나 아마 용이(容易)히 얻을 듯 못하외다. 지금(至今) 신정부(新政府)가 된 후(后) 자유(自由)가 극도(極度)에 달(達)하옴에 장차(將且) 여하(如何) 변경(變更)할는지 모르오나 다소(多少) 교정(矯正)이 있을 듯 상상(像想)됩니다. 시기(時機)는 여차(如此)하되 아령(俄領, 러시아) 일폭(一幅)에 한인(韓人) 전체(全體)를 어위(御衛) 동솔(董率)할 만한 인격(人格)이 전무(全無)하고 정(鄭)은 현금(現今) 전호(戰壕) 제일선(第一線)에서 일차대전(一次大戰)까지 경과(經過)하였소이다. 아국(俄國, 러시아)의 소식(消息)을 듣는대로 심량(深諒)하시어 조만간(早晩間) 출가(出駕)하시면 좋을 듯하오이다. 그러나 미주(美洲)·하와이 두 곳 신문(新聞)을 본즉 하와이는 그 못된 것들이 또 망종(亡種)의 짓만 행(行)하니 근거(根據)를 튼튼히 못하고 그곳 떠나시기도 미안(未安)하실지라. 제(弟)가 일개월(一個月) 전(前)부터 하와이로 기서(寄書)를 연송(連送)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懇切)하오나 중정(中情)의 산란(散亂)함과 자아(自我)의 부정(不正)한 것을 생각하고 또는 시기(時機)에 위반(違反)되게 당도(當到)될까 하는 려(慮)로 기서(寄書) 일장(一張)도 못하고 여러 가지로 애달파하올 뿐이외다. 고국(故國)의 정상(情狀)을 회억(回憶)하고 천하(天下) 대세(大勢)의 파성(波聲)을 득문(得聞)하면 무한(無限)한 감상(感想)이 전신(全身)을 뜨겁게 하며 벌레 같은 우리 민족(民族)을 어찌하여 금일(今日) 경우(境遇)를 면(免)하게 하며 어찌하여 금일(今日)에 국가(國家)로 표준(標準)을 잡고 일치 협력하면서 정도(程度)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여 열강(列强)의 지위(地位)와 병립(竝立)할까 하는 분발뿐이외다. 아령(俄領, 러시아)에는 인심(人心) 수습(收拾)할 자격(資格)이 무(無)하고 서전(瑞典, 스웨덴)에서는 만국사회당(萬國社會黨)의 큼지큼직한 문제(問題)가 생긴다는 신문(新聞)을 보고 너무 답답(沓沓)하여 안정근(安定根) 씨(氏)에게 편지(片紙)를 보내었소이다. 안정근 씨(氏)도 군무(軍務)에 복역(服役)하다가 현(現)에 환가(還家)하였는데, 혹가(或家)에 잉유(仍留)할 듯하다는 전설(傳說)을 문(聞)하였기로 안정근 씨(氏)가 주동자(主動者)가 되어 아령(俄領, 러시아)에서 일좀 하여 보라고 또는 헛소리든 실(實)소리든 독립(獨立) 소리나는 곳에도 못가보면 안되겠는 등설(等說)로 하였소이다. 제(弟)는 죽어야 되겠고, 또는 살고자 하여도 살 수 없소이다. 망한(亡韓) 인종(人種)이 국가(國家) 관념(關念)은 의례(依例)히 박약(薄弱)하겠지오만은 국가(國家)를 참말로 사모(思慕)하고 생각하여 절절(切切)하는 자(者)는 몇 사람을 볼 수도 없고, 광인(狂人)으로 대접(對接)함이 상사(常事)인데 동물적(動物的) 즉(卽) 육체(肉體)만 위(爲)하여 살지 않고 정신적(精神的) 즉(卽) 인생(人生)의 관(觀)을 위(爲)한다는 사람들 혹(或) 동지(同志)들도 자기(自己) 몸으로 집까지에 골똘하고 소위(所謂) 공익(公益) 혹(或) 국가사(國家事)에 관(關)하여 협력(協力)하는 인사(人士)를 평상(平常) 교우(交友)만치도 생각지 못하니 이러한 정도(程度)의 인물이 어찌 타인의 심리를 아는 처사(處事)할 수 있습니까? 제(弟)는 인격(人格)이 불완전(不完全) 능력(能力)이 일무(一無), 금력(金力)이 일무(一無), 육력(肉力)이 미유(未有), 장기(長枝)가 일무(一無)하온즉 마음만 가지고는 육체(肉體)도 지배(支配)할 수 없고 이상도 실행할 수 없은 즉 어찌 발발(勃勃)하는 분기(忿氣)와 유유(悠悠)한 원통(冤痛)을 어찌 참아서 생명(生命)을 부지(扶支)하오릿가. 이강(李剛) 씨(氏) 집에 온지도 수삭(數朔)이라. 이제 몇날 후에는 하등(何等) 노동처(勞働處)로 행하려 계(計)하오나, 멀리는 가지 않고 살기를 도모(圖謀)하옵나이다. 그러나 살지 못할 까닭이 여럿이 오면 또는 자미(滋味) 없이 없음으로 일생(一生)을 보내면서 아무 것도 차세(此世) 소위(所謂) 대소사회간(大小社會間)에 이익(利益)되게 못할 바에는 죽는 것이 유승(猶勝)할 듯 하오이다. 열제(劣弟) 외(外)에 타인(他人)이나 혹(或) 동지(同志)들은 다 각각(各各) 장기(長技)와 능력(能力)이 있고 인격(人格)이 구(具)함으로 가정생활(家庭生活)의 자미(滋味)도 보는데, 제(弟)는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 떠난 후(後) 모지방(某地方)이라도 일우(一隅)를 경영(經營)하려고 외교정책(外交政策)으로 취(娶)코자 하여도 불능(不能)하였소이다. 제(弟)도 가처(家妻)가 왜인(倭人)과 같이 보이지 아니하면 솔래(率來)하여다가 그것으로 일시(一時) 소견법(消遣法)의 례(例)를 작(作)하겠지오만은 무슨 까닭으로 왜인(倭人)과 여(如)히 생각된 즉, 십여년(十餘年) 상기(相棄)한 것을 경속(更續)할 수 없고, 객지(客地)에서 재전(財錢)없는 걸인(乞人)이 아무리 살고자 하여도 난(難)하외다. 그런데 육력(肉力)과 장기(長技)와 직업(職業)의 경력(經歷)도 없고 현전(現錢)도 없고 의관(衣冠)도 없이 꽤 살 수 있을까요. 수천년전(數千年前) 인심이 순후(純厚)한 시대(時代)에 소진(蘇蓁)의 육국(六國) 상인(相印)을 괘(掛)할만한 자격(資格)으로도 기처(其妻)와 형수(兄嫂)의 욕(辱)을 보았거든, 황차(況且) 부모자녀간(父母子女間)에 방세(房貰)를 받는 이 세상(世上)에서 어찌 살겠소. 분(忿)하여서도 죽을 것이오, 원통하여서도 죽을 것이오. 기(氣) 막혀서도 죽을 것이오, 굶어서도 죽을지라. 자격(資格)은 못되나마 대소간(大小間) 일을 좀하려 하여도 그마저도 실행(實行)할 금전(金錢)이 없어 못하니 죽지 않고 무엇 하겠소. 만일(萬一) 살지라도 장한몽(長恨夢)이라는 소설책(小說冊)에 이수일(李守一) 같이 돈에 헌신(獻身)하여 육체(肉體)가 못 견디든지 정신(精神)이 모절(耗絶)되든지 불고(不顧)하겠소이다. 이제 돈 모으고 살 생각하는 것은 자녀(子女)들 아이를 두었더니 십오륙세(十五六歲)된 여아(女兒)는 고등(高等)과 심상어간학교(尋常於間學校)에서 필업(畢業)되고, 십여세(十餘歲)된 남아(男兒)도 삼학년(三學年)에 있다 하기로 이놈도 가정정책(家庭政策)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큰 이상(理想)이외다. 이렇게 마구 쓰는 것은 선생(先生)님을 다시 못뵈면 유서(遺書)도 될 듯하고 또는 부득(不得) 사세(事勢)로 인(因)하여 일수지(一手指)와 일피부(一皮膚)의 소소(小小)한 병증(病症) 흠파(欠罷)로 전체(全體)를 못쓰게 생각하는 대오(大誤)가 유(有)하여 우익(羽翼)을 진전(盡剪)하는 자해(自害)까지 지(至)하는데, 심(甚)한 결과(決果)를 보지 아니함이 혹(或) 가(可)할 듯하는 치우(痴愚)의 생각이오이다. 현금(現今) 오제(吾儕)의 상응(相應)할 동지(同志)로는 박영갑(朴永甲) 씨(氏)가 이곳에서 피득보(彼得堡,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행(行)하는 중간에 체류(滯留)하면서 곤과(困過)할 터이오. 간병제(簡秉濟)·노기정(魯基楨) 양씨(兩氏)는 환국(還國)하였사옵고, 이강(李剛) 씨(氏)가 차지(此地)에 장유(長留)할 거지(據地)이요, 소왕령(우스리스크)은 다대(多大)한 인원(人員)이 유(有)하나 빈곤(貧困)한 제등(弟等)으론 상용(相容)치 못할 자격(資格)이요, 서초(徐超)는 수천(數千)[근(近) 만원(萬元)] 자본(資本)으로 아경(俄京)과 합이빈(哈爾濱, 하얼빈)으로 행상(行商)하는데 일분(一分)도 상용(相容)할 수 무(無)하고, 최광(崔廣)·이태휘(李泰徽) 씨(氏) 등(等)도 환국(還國)하였소이다.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토크)는 일삼칠우함(一三七郵函)이 항상(恒常) 오제(吾儕) 수중(手中)에 있었음으로 현금(現今)도 윤능효(尹能孝)·채성하(蔡成夏) 씨(氏)가 주관(主管)하고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에도 윤씨(尹氏, 윤능효)가 주관(主管)하는데 제(弟)가 다소(多少) 신용(信用)은 무(無)할지라도 여간(如干)의 재전(財錢)으로 교제(交際)할 자력(資力)만 되면 모수자천(毛遂自薦)을 기탄(忌憚)없이 행(行)하여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에 들어가 주인(主人) 노릇하겠사옵고, 또는 여간(如干) 자력(資力)이 있으면 원호측(原戶側) 신문사(新聞社)에라도 들어가 오인(吾人)의 복리(福利)되도록 하여 볼 생각은 없지 아니하오나 공상(空想)뿐으로 귀(歸)하는데 어찌 하오릿가. 할 수 없음으로 차지(此地)에서 아문(俄文, 러문) 능통(能通)한 인사(人士)와 본국(本國) 역사(歷史)를 기등(記謄)하고 오십년(五十年) 이래(以來)로 왜인(倭人)의 관계(關係)를 들어 세상(世上)에 공포(公布)하려고 아문(俄文, 러문)으로 인쇄(印刷)코자 기초(記草)하옵니다. 어떻든지 선생(先生)님이 시기(時機)를 보시고 조만간(早晩間) 속(速)히 차지(此地)로 출가(出駕)하시옵소서. 제(弟)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성력부족(誠力不足)하여 우익(羽翼)되지 못할 것은 없소이다. 제(弟)는 어린 자녀(子女)를 위(爲)하여 금전(金錢)에 헌신(獻身)하는 것으로 유일(惟一)의 목적(目的) 자미(滋味)를 정(定)하고 처세(處世)코자 하옵나이다. 하와이를 수십일(數十日)에 마음대로 다닐 것 같으면 만사(萬事) 불고(不顧)하고 건너가서 분념(憤怨)이나 쾌설(快雪)할 생각이 첩첩(疊疊)하오나 여러 가지로 심란(心亂)하여 기서(寄書) 일장(一張)도 못하옴에 여하(如何)타 하올런지오. 쓸데없는 말 너무 썼다고 대책(大責)하실 줄 아옵니다만은 이 말이 혹(或) 허귀(虛歸)되지 아니할까 하고 쓰나이다. 이제는 다정다애(多情多愛)하고 강개(慷慨), 활발(活潑), 관후(寬厚), 조밀(稠密), 자세(仔細), 과감(果敢)의 구비(具備)한 인격(人格)인 추정(秋汀, 이갑)은 금세(今世)에서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사옵고, 기외(其外)에도 소리치던 인물(人物)들이 점점(漸漸) 타락(堕落)하고 회진(灰盡)의 겁(刦)을 자위(自爲)하니 수(誰)로 세사(世事)를 상의(相議)하며 호기(好機)를 응용(應用)하오리까. 제(弟)의 수신처(受信處)는 이강(李剛) 씨(氏)와 동(同)하오니 후폭(後幅) 영문(英文)대로 서부(書付)하시옵소서. 무례(無禮)한 문사(文辭)는 만(萬)번 용납(容納)하시기를 바라옵고 그치옵니다.
열제(劣弟) 백원보(白元普) 상(上)건국(建國) 4250년(1917년) 7월 23일(음 유월 오일)P.O.Bax20Chita citySiberia Russia재고(再告) 아령(俄領, 러시아) 전채(全體)에 금번(今番) 조직(組織)된 원호측(原尸側) 고려국민회(高麗國民會) 외(外)에는 확실(確實)한 단체(團體)가 없고 국민회(國民會)에 대(對)하여서도 누구나 마음뿐이지요. 확장(擴張)하기로 정돈(整頓) 실천(實踐)하는 인(人)은 아무도 무(無)하외다. 금번(今番) 원여호(原餘戶)가 미합(未合)한 것은 최재형(崔才亨)의 반대(反對)로 떨어졌소이다. 연이(然而) 일군만 있으면 좋은 시기(時機)이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