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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815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3-13 참 1발 제 8호 메이지(明治) 44년 3월 13일 조선주차군사령관이 보고한 적정(賊情)의 요지

    82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1243 암(暗)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3-20 발신주소: 간도(間島) 수신일: 1911-03-20 발신자: 고무라(小村) 외무대신(外務大臣) 수신자: 고무라(小村) 외무대신(外務大臣) 수신주소: 동경(東京) 간도(間島)발 메이지(明治) 44년 3월 20일 오후 12시 30분 동경(東京)착 동 동 오후 3시 37분 제 23호 3월 16일 종성(鍾城) 근처에 폭도 225명이 나타남에 따라 우리 병사로 하여금 공격시켜 3월 17일에 3명을 살상하고 9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나머지는 간도(間島) 방면으로 도주했으므로 당관(當館)은 그들 도주자의 행선지를 밀정중임. 동 폭도는 홍범도(洪範道)의 부하로서 노령(露領)에서 경원(慶源)을 경유하여 조선에 들어온 것이라고 함.

    83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899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3-20 참 1발 제 9호 메이지(明治) 44년 3월 20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작년 11월 하순부터 실시하고 있던 황해도(黃海道) 평산군(平山郡) 지방의 적도토벌은 대체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여 그 지방이 대체로 평정을 되찾았으므로, 3월 10일을 기하여 토벌행동을 중지하였으며 단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당분간 토벌부대의 일부를 남겨 두고 그 대부분은 3월 12일을 기해 그곳 주둔지를 철수하여 원래의 수비지로 복귀하도록 하였음. 2. 함경북도(咸鏡北道) 행영(行營) 서북쪽 약 6리의 재선?サイセン 부근에 적도가 집합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행영(行營)수비대의 상등병 이하 4명은 방원진(防垣鎭)(경성(鏡城) 남쪽 3리)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헌병과 협력하여 3월 17일 오후 2시 サイセン동쪽 1리의 지점에서 적도 25명과 충돌하여 그 가운데 7명을 포획하였으며, 나머지 사망자 1명, 부상자 2명을 버리고 간도(間島) 방향으로 해산했음. 이 적도는 북한(北韓)의 우리 관헌을 습격할 목적으로 금년 2월 말에 포염(浦 )을 출발하여 남하해 온 자들로 이들 이외에 역시 25명으로 구성된 일단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 소재는 불명임. 관동도독(關東都督) 보고의 요지 1. 3월 10일 천금채(千金寨)에서의 우리 거류민과 청국(淸國) 순경의 쟁투이후 상황으로 볼 때 필요가 인정되어 연습을 겸해 일시적으로 호석대(虎石臺) 중대의 주력(主力)을 천금채(千金寨)에 파견했음.

    84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1433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5-02 발신자: 외무성(外務省) 정무국장(政務局長) 구라지 데쓰기치(倉知鐵吉) 수신자: 외무성(外務省) 정무국장(政務局長) 구라지 데쓰기치(倉知鐵吉) 별지는 회람이 끝났으므로 되돌려 보내는 바입니다. 메이지(明治) 44년 5월 2일 내무성(內務省) 경보국장(警保局長) 아리마쓰 히데요시(有松英義) 외무성(外務省) 정무국장(政務局長) 구라지 데쓰기치(倉知鐵吉) 각하[殿]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작년 11월 하순부터 실시하고 있던 황해도(黃海道) 평산군(平山郡) 지방의 적도토벌은 대체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여 그 지방이 대체로 평정을 되찾았으므로, 3월 10일을 기하여 토벌행동을 중지하였으며 다만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당분간 토벌부대의 일부를 남겨 두고 그 대부분은 3월 12일을 기해 그곳 주둔지를 철수하여 원래의 수비지로 복귀하도록 하였음. 2. 함경북도(咸鏡北道) 행영(行營) 서북쪽 약 6리의 「사이센??」 부근에 적도가 집합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행영(行營)수비대의 상등병 이하 4명은 방원진(防垣鎭)(경성(鏡城) 남쪽 3리)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헌병과 협력하여 3월 17일 오후 2시에 「사이센??」동쪽 1리의 지점에서 적도 25명과 충돌하여 그 가운데 7명을 포획하였으며, 나머지는 사망자 1명, 부상자 2명을 버리고 간도(間島) 방향으로 궤주했음. 이 적도는 북한(北韓)의 우리 관헌을 습격할 목적으로 금년 2월 말에 포염(浦 )을 출발하여 남하해 온 자들로서 이들 이외에 역시 25명으로 구성된 일단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 소재는 불명임. 관동도독(關東都督) 보고의 요지 1. 3월 10일에 천금채(千金寨)에서 우리 거류민과 청국(淸國) 순경이 쟁투한 후의 상황으로 보아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연습을 겸해 일시적으로 호석대(虎石臺) 중대의 주력을 천금채(千金寨)에 파견했음.

    85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기밀선(機密鮮) 제 36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3-24 발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백작(伯爵)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수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백작(伯爵)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메이지(明治) 44년 3월 24일 비수 제 1011호 재(在) 포조사덕(浦潮斯德) 총영사(總領事) 대리(代理) 후다모치 헤이지(二甁兵二) 외무대신(外務大臣) 백작(伯爵)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각하[殿] 북조선(北朝鮮)의 폭도에 관한 건 본 건에 관하여 이달 20일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오오토리(大鳥) 총영사(總領事) 앞으로 보내 온 별지와 같은 전보 내용이 있었으므로 이후의 단속에 필요하므로 위의 전보내용중 2월 27일 포조(浦潮)발 운운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밀정을 시켜 내탐하게 하였습니다만, 이번에 별지와 같은 내용의 정보에 접하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이에 송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검토[査閱]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경구(敬具) 메이지(明治) 44년 3월 20일 발 21일 오전 6시 10분 착 동 동 10시 착 오오토리(大鳥) 총영사(總領事) 앞(야마카타 도리이(山形鳥居)) 3월 17일 함경북도(咸鏡北道) 행영(行營) 부근에서 무기를 휴대한 폭도 25명이 헌병과 충돌하여 2명을 죽이고 4명을 생포함. 이번 적도는 홍범도(洪範道)의 부하로 일행 50명이 2월 27일에 포조(浦潮)를 출발하여 경원(慶源)의 대안(對岸)에서 진입하여 25명씩 2개의 조로 나누어 한쪽은 행영(行營) 근처에 이르러 헌병과 충돌하였고, 다른 한쪽은 어딘가를 향했을 것이나 분명하지 않음. 또한 이 일파의 적은 점차 조선의 내지로 잠입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음. 포로의 말에 의하면 홍범도(洪範道)는 4월 20일경에 니코리스크 ニユリスク(蘇王嶺: 현 우수리스크) 부근을 출발하여 간도(間島)에 집합할 예정이라고 함. 3월 23일(신타로(新太郞)) 1. 홍범도(洪範道)는 아직까지 노브키에프스크 ノウオキ-エフスク에 있으며 그의 부하 4명과 함께 이종호(李鐘浩)의 보호를 받고 있음. 당지에서는 폭도에 관한 아무런 소식이 없음. 원래 조선인의 성질상 수령격의 인물은 차치해 두더라도 부하에 속하는 무리들은 도저히 절대적인 비밀을 지킬 수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폭도의 출발 지점은 당지가 아니라 노브키에프스크 ノウオキ-エフスク 부근임이 틀림없음. 연추(煙秋)에는 허(許)영장(營將)과 같은 폭도의 수령이 있음. 어쩌면 동인(同人)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됨. 만약 홍(洪)의 부하라고 한다면 이종호(李鐘浩)도 폭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의 종래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李)는 반드시 그렇다고는 볼 수 없음. 1. 폭도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허(許)영장(營將)(연추(煙秋)에 있음)의 재부재(在不在)는 커다란 관계가 있음.허(許)는 재작년 연추(煙秋)에서 군총(軍銃) 3정을 몰래 감추고 있다가 러시아(露國) 관헌에게 발견되어 반년간 투옥된 사실이 있음. 아버지가 있음. 그 곳의 주민들로부터는 부자가 모두 사갈(蛇蝎)을 대하는 것처럼 질시를 받고 있음. 동인(同人)은 단지자(斷指者)와도 깊은 관계가 있음. 연령 45,6세 세력은 거의 없음. 허(許)는 회령(會寧) 사람인 이범윤(李範允)의 부하로서 토착군[土軍] 200명을 이끈 적이 있음. 러일전쟁[日露戰爭] 때에는 러시아군을 위해 크게 활약한 자임.

    86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1104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4-04 참 1발 제 10호 메이지(明治) 44년 4월 4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적도와의 충돌 사항은 다음의 표와 같음2. 북관(北關)에 출현한 폭도에 관해서는 그 후 다시 침입하는 등의 정황을 볼 수 없으며 대체로 평온함.

    87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기밀송(機密送) 제 15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4-05 발신자: 나가타키(永瀧) 총영사(總領事) 수신자: 나가타키(永瀧) 총영사(總領事) 수신주소: 간도(間島) 메이지(明治) 44년 3월 31일 기초(起草) 동 년 월 5일 발견(發遣) 고무라(小村) 대신(大臣) 재(在) 간도(間島) 나가타키(永瀧) 총영사(總領事) 앞 북조선(北朝鮮)의 폭도에 관한 건 북조선(北朝鮮)의 폭도의 건에 관한 재(在) 포조사덕(浦潮斯德) 후다모치(二甁) 총영사(總領事)로부터의 보고 비수(秘受) 제 1011호 및 부속 서류를 서사함.

    88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1257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4-17 참 1발 제 11호 메이지(明治) 44년 4월 17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북관(北關)에 출현한 폭도는 그 후 여전히 조선 내부로의 진입을 감행하고 있지는 않으나, 근래에 러시아(露國) 관헌이 흑룡강성(黑龍江省) 및 연해주(沿海州)에 있는 조선인과 청국인을 추방한다는 정책을 취한 결과, 그들이 준열(峻烈)한 수단을 강구하여 압박하였기 때문에 점차 남하해 온 조선인이 간도(間島) 방면으로 모여들어 지금은 도문강(圖們江) 우안(右岸)에 집합한 자가 천명에 이르렀을 정도임. 이 가운데 폭도로 볼 수 있는 자 또한 분명히 존재함. 조선인 홍범도(洪範道)는 이러한 형세를 이용하여 많은 무리들을 규합하였으며 무산(茂山), 간도(間島) 방면으로 이주하여 의병이라는 미명 아래 자기의 세력을 부식(扶植)하고자 기도하고 있는 듯함. 그리하여 홍(洪)은 3월 20일경에 여전히 연추(烟秋)(포시엣트항 연안)에 있으므로 현재의 상황으로는 바로 위험이 발생할 염려는 없지만, 해당 방면의 수비대는 더욱더 도문강(圖們江) 대안(對岸)의 정찰과 폭도의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계속해 노력하고 있음. 2. 강원도(江原道) 삼근(三斤)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상등병 1명, 보조원 1명 및 울진(蔚珍) 헌병 분대의 보조원 1명은 3월 30일에 경상북도(慶尙北道) 봉화군(奉化郡)에서 적괴 정경태(鄭敬泰) 이하 4명과 충돌하여 적괴를 체포하고 총 1정을 압수했음. 정(鄭)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양군(英陽郡)에서 부하 약 20명을 거느린 적괴임(메이지(明治) 44년 1월 16일 참1발 제 2호 참조). 관동도독(關東都督) 보고의 요지 1. 천금채(千金寨) 지방의 방역을 위해 경찰, 관리(官吏)의 원조를 목적으로 3월 17일부터 다음과 같은 감시초소(監視哨)를 설치함. 무순역(撫順驛) 감시초(監視哨) 장(長) 이하 5명 천금채(千金寨) 구시가( 市街) 감시초(監視哨) 장(長) 이하 5명 2. 페스트 예방을 위해 배치한 보란점(普蘭店) 및 금주지협(金州地峽) 감시초(監視哨)는 4월 4일을 기해 철거했음(메이지(明治) 44년 2월 6일의 참 1발 제 4호 참조). 3. 3월 16일부터 천금채(千金寨)에 파견중이던 호석대(虎石臺) 수비중대의 주력은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4월 8일에 원래의 수비지로 복귀시켰음(메이지(明治) 44년 3월 20일의 참1발 제9호 참조).

    89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1411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5-01 참 1발 제 12호 메이지(明治) 44년 5월 1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적도와의 충돌 사항은 다음의 표와 같음.관동도독(關東都督) 보고의 요지 1. 천금채(千金寨) 지방의 방역을 위해 경찰, 관리의 원조를 목적으로 3월 17일부터 배치했던 감시초소(監視哨)는 이달 6일을 기하여 철거했음(메이지(明治) 44년 4월 17일의 참 1발 제 11호 참조).

    90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기밀송(機密送) 제 27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5-03 수신일: 1911-05-04 발신자: 나가타키(永瀧) 총영사(總領事) 수신자: 나가타키(永瀧) 총영사(總領事) 수신주소: 간도(間島) 메이지(明治) 44년 5월 3일 기초(起草) 동 동월 4일 발견(發遣) 고무라(小村) 대신(大臣) 재(在) 간도(間島) 나가타키(永瀧) 총영사(總領事) 앞 북조선(北朝鮮)의 폭도에 관한 건 북조선(北朝鮮)의 폭도에 관한 재(在) 포조사덕(浦潮斯德) 후다모치(二甁) 총영사(總領事)로부터의 보고 비수(秘受) 제 1011호 및 부속서류를 서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