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콘텐츠

선택

선택

    의병자료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51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한국 강원도(江原道)의 폭도에 관한 제 2함대 사령관 나카오(中尾) 소장의 보고 발췌(拔萃)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수신일: 1906-06-11 메이지 39년 6월 11일 접수 6월 12일 맑음, 해상 평온. 오전 7시에 치요다(千代田)함 및 다쓰다(龍田)함을 이끌고 부산(釜山)을 출항함(원속(原速) 10해리). 통역생 및 향도를 위해 다음과 같은 인원을 양 함대에 분승시킴. 치요다(千代田)함 편승 - 통감부 통역생 다카오 겐조(高雄謙三) 죽변(竹邊) 거주의 정어리 건조업[干 業] 나카네 가즈스케(中根和助) 다쓰다(龍田)함 편승 - 통감부 순사부장 후쿠야마 쵸효에(福山長兵衛) 포항(浦項) 거주의 곡물상 나카다니 다케사부로(中谷竹三郞) 오전 9시 40분에 속력을 11해리로 증가하여 오후 3시 25분에 영일만(迎日灣)의 포항(浦項) 정박지에 닻을 내림. 양 함대에서 각각 육상 시찰원을 파견함. 오후 6시 40분 치요다(千代田)함에서 포항(浦項) 및 영일(迎日)에 파견했던 시찰원이 귀함함. 참고인으로서 11일에 후리포(厚里捕)(평해(平海))에서 화적(火賊)을 만났다고 하는 행상인 히라노 미스케(平野彌助)라는 자를 동반해서 돌아옴. 동인은 뱃길 안내를 시키기 위해 다쓰다(龍田)함으로 보냄. 오후 8시경에 잠수 어업을 하는 다카라다 도라기치(寶田虎吉)라는 자가 함대로 와서 죽변(竹邊)에서의 조난 사건에 관해 진술함. 대체로 수산 조합 본부에서 부산(釜山) 이사청(理事廳)에 보고했던 것과 일치함. 동인은 또 이 사건 이래로 한국인이 폭도를 두려워한 나머지 어부들에게 토지 가옥을 대여하거나 혹은 음식물의 제공을 꺼려하여 영업에 곤란함을 겪고 있음을 호소함. 오후 9시 20분에 다쓰다(龍田)함에서 흥해(興海)에 파견했던 시찰원이 돌아옴. 양 시찰원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귀착하는 것으로 생각됨. 1. 포항(浦項) 부근에 폭도가 내습한다는 소문은 소위 풍성학려(風聲鶴 )에 지나지 않음. 2. 경주(慶州)에 주둔한 진위대 가운데 30명은 1명의 소위의 지휘 아래 10일에 포항(浦項)을 지나 8명을 그 곳에 잔류시키고 그밖의 나머지는 영덕(盈德)을 향해 발진했음. 3. 울진(蔚珍) 방면에는 약간의 폭도가 모여 있으며 무기를 휴대한 자가 있는 것으로 보임. 이로써 내일 13일의 행동을 예정하고 오늘 오전에 전투준비, 전투조련을 시행함. 일몰 후 1시간 동안 탐해등을 점등함. 6월 13일 맑음, 남풍, 풍력 4 내지 5. 오전 7시에 포항(浦項)을 출항함. 닻을 올리기 전에 어부 1명이 와서 후리포(厚里捕)에 화적이 출현했음을 알림. 앞서 말한 히라노 미스케(平野彌助)의 보고내용과 부합함. 또한 다쓰다(龍田)함에는 축산(丑山)에서 피난한 어부가 찾아와서 어제(12일) 오후 4시에 화적이 동지에 내습했음을 보고했다고 함. 다쓰다(龍田)함의 함장이 이상을 근거로 화적이 남하해서 오늘 영덕(盈德) 부근으로 올 것이라고 상정하여 동지로 기항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에 그 의견에 따라 오전 8시 10분에 다쓰다(龍田)함으로 하여금 대열을 벗어나도록 함. 정오에 치요다(千代田)함은 울진(蔚珍) 해안에 접근하였으나 남풍이 강하고 해박(海泊)에 적합한 곳이 없어서 다시 죽변(竹邊) 북측에 이르러 오후 0시 50분에 닻을 내리고 시찰원 및 호위로서 총대(銃隊) 1개 소대를 죽변(竹邊) 및 울진(蔚珍)에 파견했음. 오후 4시경부터 풍향이 북서풍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오후 8시에 정박지를 죽변(竹邊)의 남측, 즉 죽변만(竹邊灣)으로 옮김. 오후 9시 20분에 육상 시찰원이 되돌아옴. 다쓰다(龍田)함은 대열에서 벗어난 후 영덕(盈德), 축산(丑山) 및 후리포(厚里捕)(평해(平海) 부근)에 기항하여 각지의 상황을 조사한 뒤 오후 7시 50분에 죽변만(竹邊灣)에 닻을 내림. 양 함대의 시찰보고를 종합하여 이로써 판단하건대 폭도의 상황은 다음에 적시한 바와 같지 않을까 생각됨. 1. 폭도(그들은 스스로 의병이라고 칭함)는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 부근에서 봉기하고 있는 자들로서 그 수는 3, 400명이 될 것이며, 두령(頭領)은 신돌석(申乭石)(혹은 신돌산(申乭山)이라고도 함)이라고 하며 이조폭(李照暴)(이전에 관리를 역임한 적이 있다고 함)이라는 자가 부두령(副頭領)임. 신(申)이 이끄는 한 부대는 현재 삼척(三陟) 부근에 있으며 이(李)는 160명의 폭도를 인솔하여 이달 7일에 죽변동(竹邊洞)을 침략하였으며 다음날 울진(蔚珍)을 습격하였고, 11일에는 후리포(厚里捕)에 출현하고 12일에 영해(寧海)(축산(丑山) 부근)로 향했으나 한국병에게 격퇴당하여 현재 평해(平海)와 영해(寧海)의 중간에 있는 것으로 보임. 2. 폭도는 비록 그 미명을 의병이라 칭하고 있으나 그들의 실체는 초적(草賊)의 집합으로서 일본인의 배척을 구실로 하여 본국인[邦人]과 교통하기 위해 비교적 부유한 연안 부락을 약탈하고 또 본국인[邦人]의 재보(財寶)를 탈취하려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함. 결코 신변에 위해를 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음. 그 증거로는 미리 습격한다는 통지를 하고 있는 점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또한 수차례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본국인[邦人]의 사상자가 없는 것도 그러함. 3. 폭도의 반수 이상이 화기(火器)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식 소총과 같은 것은 극히 드물며 대부분은 구식 총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함. 이런 연유에서 이들을 보면 배후에 유력한 응원 등이 있다는 사실은 한낱 공상에 불과함. 4. 6월 1일에 영덕(盈德)을 습격한 것은 다른 화적의 한 부대라고 생각되지만 자세하지는 않음. 요컨대 이러한 종류의 도적이 횡행하는 것이 우리의 어업과 상업을 매우 방해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일조일석에 이들을 모두 제거할 수는 없음. 또한 본대(本隊)의 이번 행동을 즉각 한국인 사이에 전파시키는 데 노력했기 때문에, 그들을 매우 두려워하게 만들었다고 확신하여 더 이상 그 뒤를 쫓지 않기로 결정했음. 한국인은 대체로 본대(本隊)의 순항을 기뻐하는 것 같으며 울진(蔚珍)의 촌민과 같은 경우에는 크게 우리의 병사를 환영하고 있다고 함. 일몰 후 약 1시간 동안 탐해등을 점등함. 6월 14일 천둥, 북풍, 풍력 3 내지 4. 오전 3시 40분에 어부 히로세 나가기치(廣瀨長吉)라는 자가 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어제(13일) 오후 4시에 적이 강원도(江原道) 장울리(長鬱里)를 내습하였다고 함. 우리의 어선 10척이 그곳에 있었으나 해상으로 피난하여 피해가 없음. 밤이 되어 탐해등 불빛을 보고 우리 군함이 있는 것을 알고 와서 보고한다고 함. 오전 6시에 죽변만(竹邊灣)을 출항함. 원속(原速) 10해리. 오후 0시 30분에 영일만(迎日灣)의 포항(浦項) 정박지에 닻을 내림. 치요다(千代田)함에서 장교 1명 및 다카오(高雄) 통역생을 파견하여 거류민에게 다음의 사항을 훈시하도록 함. 본대(本隊)의 이번 순항 목적은 거류민의 요청에 따라 이를 보호하는 데 있으며, 본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적의 세력은 아직은 그다지 창궐하지 못함. 또한 비록 그 미명을 의병이라 칭하고는 있지만, 실제는 초적들이 집합하여 있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재물을 탐하는 이외에 정치적 편견[僻見]에서 비롯된 참화를 초래하는 등의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함. 그리고 본대(本隊)의 순항이 그들 적을 두렵게 만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는 하나, 원래 이런 종류의 도적은 일조일석에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재차 내습해 올 것인지 어쩔지 장담하기 어려우며,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위(自衛)의 방도를 강구하는 데 있으며 위험에 처하여 기리(奇利)를 얻고자 하는 자는 항상 각오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됨. 함부로 타인의 구조를 기대하여 자주 봉화를 올리는 것과 같은 방법은 본인[本職]이 깊이 원하는 바가 아님. 그렇지만 여전히 이후의 임무는 한국의 경비에 있기 때문에 시기적절하게 자주 순항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도할 수 있도록 할 것임. 오후 1시에 그제 함대에 왔던 다카라다 도라키치(寶田虎吉)가 다시 와서 한국인이 완고하여 그의 청탁에 응하지 않고 있음을 호소함. 다카오(高雄) 통역생으로 하여금 이를 처치하도록 함. 오후에 욕조선[湯舟]의 군장(軍裝) 및 방수조련을 실시함. 6월 15일 흐림. 오전 6시에 포항(浦項)을 출항(원속 10해리)함. 오후 3시 0분에 부산(釜山)에 도착함.

    52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고비(顧秘) 제483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4 수신일: 1906-06-11 발신자: 외무차관(外務次官) 친다 스테미(珍田捨己) 수신자: 외무차관(外務次官) 친다 스테미(珍田捨己) 메이지 39년 6월 11일 접수 메이지(明治) 39년 6월 4일 경무고문(警務顧問) 마루야마 시게도시(丸山重俊) 외무차관(外務次官) 친다 스테미(珍田捨己) 각하[殿] 삼가 아룁니다[拜啓]. 홍주성(洪州城) 함락에 관해 동지(同地)에 있는 기리하라(桐原) 경시(警視)로부터 별지와 같은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상 참고로 하시길 바랍니다. 서둘러 용건만 아룁니다[草草頓首]. 홍주성(洪州城) 함락 및 그 후의 상황 신보(申報) 적도가 소위 난공불락이라고 과시되어온 이 홍주성(洪州城)도 5월 31일 총공격으로 1시간도 안 되 마침내 함락시켰습니다. 지금 그에 관한 상보(詳報)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5월 29일 밤에 기병 제1소대와 보병 2개 중대는 홍주성(洪州城) 부근에 도착하자마자 요로(要路)를 점거하고 이들을 감시함. 다음날 30일 오전, 월계촌(月溪村) 부근의 적을 소탕하고 성에 접근하여 기관포로 위협사격을 가함. 그날 밤 대대장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림. 1. 적은 여전히 홍주(洪州)를 점령하고 있음. 2. 헌병 및 경찰 양 부대는 일시적으로 나의 지휘하에 속함. 3. 지대(支隊)는 내일 새벽을 기하여 홍주성(洪州城)을 탈취하고자 함. 4. 제2중대의 제1소대는 갈매지(葛梅芝)의 남쪽 고지를 견고하게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그렇지 못하면 폭발과 동시에 서문 밖의 가옥에 방화할 것. 제4중대에서는 하사(下士)가 지휘하는 반(半) 소대를 교동(校洞) 서쪽의 막다른 길목 입구로 보내어 그 지역 부근을 확실히 점령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시키도록 할 것. 5. 제 4중대에서는 1개 분대를 평리(坪里)의 북쪽 끝으로 파견하여 그 지역을 견고하게 점령시키고 적의 퇴로를 차단시키도록 할 것. 6. 이상의 제 부대는 주로 적을 생포하는 데 힘쓰고 여의치 않으면 사격할 것. 7. 기병(騎兵) 소대의 폭파반(爆破班)을 제외한 나머지는 천촌리(川村里)에 위치하여 홍주(洪州)의 예산가도(禮山街道)를 감시하여 그 지점??에서 대행리(大行李)??를 엄호할 것. 8. 또한 나머지 모든 부대, 제2중대 제1소대, 제4중대 3분대, 기관포대, 기병소대, 폭파반, 헌병대, 경찰대는 오늘 오후 11시까지 가능한 한 발각되지 않도록 하여 홍주(洪州) 동쪽 약 500미터 지점의 삼차로(三叉路) 부근 산림에 집합할 것. 9. 대행리(大行李)는 천촌리(川村里)에 있어서 오후 11시 이후에는 출발 준비를 해두어야 함. 10. 나는 오후 11시에 홍주(洪州) 동쪽 약 500미터에 위치한 삼차로(三叉路) 지점에 있을 것임. 이상 위의 명령에 따라 각 부대는 집합 지점에 모임. 다음날 31일 오전 2시 30분, 서문 밖에서 불빛이 오르는 것을 신호로 하여 즉시 운동을 개시해서 동문에 접근하여 기병(騎兵)이 폭약을 가지고 성문을 파괴하는 작업을 기다림. 오전 3시 20분, 불빛이 한차례 섬광을 번쩍이며 폭발하여 산악을 진동시키고 견고한 성문도 유감없이 파괴되었음. 선두에 선 보병은 기관포를 연발하며 돌격을 개시하고 헌병대가 이를 뒤따랐으며 우리 경찰대는 전군(殿軍)이 되어 칼을 뽑아 돌입하려고 하는 순간 성루에서 대포 소총이 발사되어 한꺼번에 마구 뿌리는 것과 같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성내로 돌진하여 남문 부근의 고지를 향함. 이때 폭발이 다시 일어나 북문 또한 기병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음. 적이 혼비백산하여 난사하는 한밤의 포성은 우리의 함성과 서로 어우러져 그 처절함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려움. 오전 4시에 이르러 홍주성(洪州城)은 확실하게 우리가 점령하기에 이름. 그렇지만 적 또한 여기저기에 흩어져 여전히 여러 곳에 잠복해 있음으로 보병은 성벽을 포위하여 그들의 도망을 봉쇄함. 또 한편으로는 그 중 한 부대를 나누어 성밖의 각 요로(要路)를 포위하여 적의 도망에 대비함. 우리 경찰대는 헌병과 협력하여 날이 새는 것을 기다려 성 안팎으로 적에 대한 수색작업을 실시하여 오전 7시에 이르러 종료함. 이번 야습으로 인하여 적은 거의 섬멸되기에 이르렀고 사망자는 약 80여 명, 포로는 130명에 달하며, 노획품은 구식 9입(九 ) 대소포 약 75문, 화승총 약 259정, 무라타 식 연발 소총(村田銃) 1, 양총(洋銃) 9정, 엽총 3, 쟁( ) 453, 조선칼(朝鮮刀) 138. 소총연탄(小銃鉛彈) 7상자, 화약(종이포장) 87포, 그밖에 화약고에 화약 큰 상자(절반 정도 들어 있음) 1개와 큰 병 1개가 있음. 깃발 72-3, 쌍용도 3, 쟁신( 身) 약 210, 진영착(陣營着) 4, 화승총신(火繩銃身) 150, 기간(旗竿) 74, 철제 대포실탄 약간 등이다. 그런데 적도 중에는 성벽을 넘어서 도주해 버린 자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다나카(田中) 대대장은 기병(騎兵)으로 하여금 추격하게 하였으나, 적과 양민을 구별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적이 깊숙이 산중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추적한 효과도 없이 결국 되돌아왔음. 우리측의 손해는 동문에 돌입할 때 남서(南署)의 순검(巡檢)인 남운선(南雲善)이 유탄에 맞아 전사했으며 同보병 2명이 경상을 입었을 뿐임. 그리고 수괴(首魁) 민종식(閔宗植) 이하 주요한 자들을 놓치고 그들의 종적을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우리 일동이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임. 둘, 포로에 대한 조사는 오로지 헌병대에서만 담당하고, 우리 경찰대는 이를 보조하기로 하였음. 포로 중 참모로 보이는 자가 2명이 있음. 그 중 1명은 이전에 공주(公州)경무서[警務署]에서 총순(總巡)이었던 신현두(申鉉斗)로서 《함락전권설(陷落前卷說)》에 소위 산발한 참모란 자가 바로 이자가 아닐까 추측됨. 다른 1명은 포로의 말에 의한 것으로 그다지 확실치 않음. 포로는 한결같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으며 적도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하지 않아 조사하는 데 곤란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내일중으로는 어떻게든 종료될 것으로 예상됨. 셋, 북문 밖 약 1정(丁)의 지점에 일본인 4명, 한국인(韓人) 3명의 시체가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조사해 보니, 7명 모두 총 또는 도쟁창(刀 創) 혹은 구타상(毆打傷)을 입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중에는 소살(燒殺)된 자가 있는 등 신체가 부어오르고 또는 살이 썩어 문드러져[腐爛] 있으며 모두 나체로 되어 있음. 혹은 의복이 타다 남아 있어서 그 참상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으며 그 광경은 비참하기 그지없음. 그 모습으로 추측컨대 1명은 구시하시(櫛橋) 순사(巡査)인 듯하며 오른쪽 팔을 붕대로 감고 있고 다리 부분에 부상을 입고 있음. 이는 27일 오후 5시 반에 북문 밖에서 적병에게 포위되었을 때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됨. 다른 1명은 송(宋) 총순(總巡)으로 그도 또한 흉부에 총상을 입고 있었음. 그렇지만 도가타(土方) 경부(警部)에 대해서는 하등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었고, 다만 동인(同人)의 외투를 성내에서 발견했음. (그 밖에 구시하시(櫛橋) 순사(巡査)의 칼( ) 및 허리띠(胴締), 송(宋) 총순(總巡)의 칼( )과 칼집( ), 허리띠(胴締) 및 상의(上衣) 한 장을 발견했음.) 한국인(韓人)의 말에 따르면 사형은 29일 밤에 민종식(閔宗植)이 직접 말을 타고 나와서 집행한 것으로 보임. 당일은 7명의 일본인을 포격하였는데 4명은 도망치고 2명은 포로가 되고 1명은 중상을 입고 자인(自刃)했다고 함. 한국인(韓人)의 말을 아직 쉽게 믿기는 어렵지만, 도가타(土方) 경부(警部)는 중상을 입고 진퇴양난[進退維谷]에 빠져 자살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됨. 요컨대 이들 3명의 일행은 이미 보고한 대로 전사한 것으로 생각함. 또한 동(同) 경부(警部)의 사체를 수색하기 위해 내일 그가 전사했다고 생각되는 지점 부근에 기병대를 보내기로 협의했음. 그리고 구시하시(櫛橋) 순사(巡査)와 송(宋) 총순(總巡)의 사체는 오늘 화장(火葬)시켰음. 넷, 홍주(洪州)는 한 사람의 양민도 없고 물자가 부족하여 공급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못함. 또한 부근의 인민은 적도에게 동정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후 질서회복 다소 어려움이 따르고 시일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됨. 이상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메이지(明治) 39년 5월 31일 홍주성(洪州城) 내에서 기리하라(桐原) 보좌관(補佐官) 마루야마(丸山) 고문(顧問) 각하[殿] 덧붙여 이 곳 홍주(洪州)의 우편물은 오늘부터 개시함. 아울러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53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고비(顧秘) 제496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5 수신일: 1906-06-11 발신자: 외무차관(外務次官) 친다 스테미(珍田捨己) 수신자: 외무차관(外務次官) 친다 스테미(珍田捨己) 메이지(明治) 39년 6월 11일 접수 메이지(明治) 39년 6월 5일 경무고문(警務顧問) 마루야마 시게도시(丸山重俊) 외무차관(外務次官) 친다 스테미(珍田捨己) 각하[殿] 삼가 아룁니다[拜啓]. 홍주(洪州)에 있는 기리하라(桐原) 경시(警視)로부터 사체 수색에 관해 별지와 같은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상 참고로 하시길 바랍니다. 서둘러 용건만 아룁니다[草草頓首]. 도가타(土方) 경부(警部) 사체 발견 신보(申報) 도가타(土方) 경부(警部)의 행방[行衛]이 아직까지 판명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이지만, 패잔병이 여전히 부근에 잠복하고 있기 때문에 전투력이 부족한 경찰대로서는 아직 충분한 수색을 수행할 수 없었는데, 어제 1일과 같은 경우는 대대장의 호의로 기병 전부를 사체 수색을 위해 파견하게 되었고, 본인[本職]도 기병과 함께 각 방면의 수색에 종사하였음. 그리고 한편으로는 포로들에 대해 조사를 하였으나 그들 대부분이 완강하게 버티어 여전히 그 단서를 얻지 못했음. 오늘 오전 8시부터 경찰대 전원을 동원하여 수색에 종사하도록 함. 그런데 이와타(岩田) 경부(警部)의 일행은 성의 서북쪽 약 2리 지점의 덕산군(德山郡)으로 통하는 신리촌(新里村)에서 도가타(土方) 경부(警部) 일행이 그 지방에까지 퇴각했다고 하는 풍설이 있음을 탐지하고 부근의 농민들에 대해 엄밀히 취조한 결과, 당일(5월 27일) 오후 7시경에 일본인 2명은 중상을 입고 적도에게 포획되어 홍주성(洪州城) 방면으로 보내졌고, 다른 1명의 일본인은 신리촌(新里村)에서 전사하였으며 사체는 적도의 엄명에 따라 그 곳의 촌민이 네 곳의 촌(村)과 동(洞)을 거쳐 홍주성(洪州城)으로 전송했다는 사실을 확인함에 따라 연도(沿道) 수색에 착수하여 오후 5시에 성의 서북쪽 약 10정(丁) 거리에 있는 교동(校洞)의 보리밭에서 사체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접하고 즉시 출장하여 검시(檢視)해 보니, 사체는 가마니에 싸여 장목이 부착된 채 방기되어 있어서 전신이 부패되어 있었으나 확실히 도가타(土方) 경부(警部)란 것을 알 수 있는 상의를 입고 있었고 아래는 속옷뿐으로 바지는 없었음. 왼쪽 다리 경부(脛部)에 관통한 총상을 입었고 인후(咽喉)의 좌측 동맥 부분은 깊게 절단되어 있었으나 다른 부분에 창상(創傷)은 없었음. 추측컨대 퇴각 도중에 다리 부분에 총상을 입고 적의 추적이 급박해지자 결국 자진한 것으로 추찰됨. 생각하건대 후일 만약에 우리가 적도에게 능욕을 당하게 될 경우, 반드시 우리 옛 무사의 기개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 일행 모두 마음속에 기하는 바가 되므로, 도가타(土方) 경부(警部)는 결국 이러한 행동을 보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됨. 그리고 휴대품이라고는 그저 한 권의 수첩을 지녔을 뿐이었음. 위의 사체는 너무 심하게 부패되어 운반할 수 없었으므로, 관을 구하여 화장하였음. 이상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메이지(明治) 39년 6월 2일 홍주성(洪州城)에서 기리하라(桐原) 보좌관(補佐官) 마루야마(丸山) 고문(顧問) 각하[殿]

    54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내전(來電)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2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12 발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주소: 동경(東京) 내전(來電) 경성(京城)발 6월 12일 동경(東京)착 동월 동일 전주(全州) 지부에서 파견되어 있는 보조원 2명, 순검 6명, 통역 1명은 10일 오후에 단양(丹陽) 부근에서 적 400명에게 습격을 당하여 보조원 1명과 통역 1명은 피해서 돌아왔으나 나머지는 행방불명[行衛不明]이 되었음. 따라서 전주(全州)수비대에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하사(下士) 이하 16명을 파견했음.

    55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내전(來電)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2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12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내전(來電) 경성(京城)발 6월 12일 동경(東京)착 동월 동일 수비대 1개 중대를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주(光州)에 주둔시키기로 결정함. 수일(數日) 내에 이 곳을 출발할 것임. 이상 아룀.

    56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1823(암(暗))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2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12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경성(京城)발 39년 6월 12일 오후 3시 5 본성(本省)착 10시 20분 제33호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주(洪州)의 폭도 궤란(潰亂) 후 전라북도(全羅北道) 태인(太仁) 지방에서 폭도가 일어나 전라남북도(全羅南北道)에 걸쳐 당시 순창(淳昌)을 근거지로 하여 광주(光州)에 임박할 것 같아 인심이 평온하지 못함. 관민 중에는 목포(木浦) 방면으로 철수하는 자가 있음. 조만간 새로 수비대 1개 중대(기관포 1문을 부여함)를 광주(光州)에 증가 배치하기로 되어 있음.

    57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1852(암(暗))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4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14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경성(京城)발 39년 6월 14일 오후 3시 37분 본성(本省)착 9시 50분 제 35호 전주(全州)에서 파견된 한국진위대(鎭衛隊)는 지난 11일 오전 8시부터 폭도의 근거지인 순창(淳昌)을 공격하여 동일(同日) 오후 5시에 이를 함락하고 수괴 최익현(崔益鉉, サイ エキ ケン), 임병찬(林炳瓚, リンジチウ) 2명과 기타 중요한 인물 십수명을 잡았다는 보고에 접했음.

    58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통발(統發)?? 제540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3 발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자작(子爵) 하야시 다다스(林董) 수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자작(子爵) 하야시 다다스(林董) 올 4월 중순에 전 참판(參判) 민종식(閔宗植)이라는 자가 주모자가 되어 제국(帝國)에 반항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의병을 소집고자 경기도(京畿道)의 시흥(始興), 안산(安山) 부근을 배회하고 있다는 풍문이 있음. 따라서 경무고문부(警務顧問部)가 나서서 그의 체포에 착수했으나, 그는 교묘히 그 종적을 감추어 버렸음. 이후 전혀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으나 그는 도망하여 충청남도(忠淸南道) 남포(藍浦), 홍산(鴻山) 지방으로 가서 거병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음. 5월 13일에 이르러 돌연 서천(舒川)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비인(庇仁), 남포(藍浦), 홍산(鴻山), 보령(保寧) 등 각지에서 도당을 소집하고 또한 총과 창, 금전, 곡식을 강탈하고 동월 19일에 나아가 홍주군(洪州郡)에 들어가 그 곳의 성곽을 점령했음. 그사이에 본국인[本邦人]으로서 남포군(藍浦郡) 내에 거주하던 후지무라 도요구라(藤村豊藏)(농업), 야마다 히사지(山田久次), 메사키 마끼타로(目崎 太郞)(석재 채취) 등 3명은 그들에게 붙잡혀 결국 참살되었고, 그밖에 7, 8명은 다행히 호구(虎口)를 벗어나 군산(群山)으로 도망하였다고 함. 또한 폭도활동에 관한 통보가 전해지자 공주(公州) 주재 경무고문지부(警務顧問支部)는 즉시 경부(警部), 순사(巡査)를 파견하여 폭도의 체포에 종사시키고, 인천(仁川) 및 군산(群山)의 이사청(理事廳)도 역시 경찰관을 파견하여 본국인[邦人]의 보호에 임하도록 하였음. 그렇지만 적의 세력이 나날이 증가하여 부근에 사는 주민들 또한 그들에 부종(附從)하는 자가 많으므로, 한편으로는 한국정부에 대해 상당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고 또 한편으로는 각 지역의 주재헌병을 증파하고 또한 경무청(警務廳)으로부터 경시 이하 경찰관 및 한국경찰관으로 하여금 가서 원조해 주도록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병(韓兵)의 출병은 겨우 2, 30명에 그쳐서 우리 헌병과 경찰관을 합해 60여 명에 지나지 않음. 이에 반하여 적의 세력은 점차 만연하여 7, 800명에서 1,000명이라 칭하기에 이름. 불완전하기는 하나 수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고 높은 성곽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어서 도저히 소수의 인원으로는 진압의 효과를 아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음. 특히 본디 민종식(閔宗植)이 이번 거사를 일으킨 연원(淵源)은 궁중에 있는 것으로 추측됨. 즉 한국 황제[韓皇]의 신임이 두텁다고 칭해지는 민형식(閔炯植)이 그 수모(首謀)로서 몰래 궁중에 출입하면서 폭도를 조종하고 있다는 풍문마저 전해지고 있고, 또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지방의 지방관들 가운데에는 비록 폭도의 협박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을 위해 당여(黨與)를 소집하고 병기와 양식의 징발을 관하(管下)에 발령하는 자가 있음. 출정한 한국병(韓兵)은 주저하여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정부 또한 무슨 이유인지 꺼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굳이 증원군을 보내지 않음. 형세가 이와 같은 까닭에 하루를 지체한다면 단순히 해당 지방의 안녕과 질서를 교란시킬 뿐만 아니라, 전국 일원에서도 이에 향응(響應)하여 맹동(盲動)할 기미가 있음을 파악하고, 즉시 단연코 우리의 병력을 사용하여 이들을 잔멸하기로 결정하여 5월 27일에 주차군(駐箚軍)에서 대대장의 지휘에 속하는 보병 2개 중대 및 기병과 포병 약간 명을 더해 해당 지역으로 출정시키고 동시에 그 취지를 한국조정(韓廷)에 통지했음. 출정병(出征兵)은 29일 홍주성(洪州城) 밖에 도착하여 이를 포위하고, 31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수시간 내에 이를 함락시킴. 적의 사시(死屍)가 80구, 포로가 130명이며 기타 노획품이 다수 있음. 우리측의 손해는 병졸 2명이 경상을 입은 데 그침. 다만 출정병(出征兵)이 도착하기에 앞서 적정(賊情)의 정찰 또 감시의 임무를 맡았던 경무고문부(警務顧問部)의 경부(警部) 도가타 겐노스케(土方源之助) 및 순사 5명은 정찰시에 폭도의 협격을 당하여 4명은 겨우 혈로(血路)를 찾았으나, 경부 및 순사 1명은 결국 전사하여 시신을 적의 손에 넘기고 말았음. 당초 출정병(出征兵)의 작전은 가능한 한 적도를 생포하는 데 있었으나 적괴 민종식(閔宗植)은 또 교묘하게 종적을 감추고 해미군(海美郡) 방면으로 일주(逸走)한 것으로 추측됨. 현재 이를 수색중임. 또한 공격 이후의 이 지역은 적도가 완전히 궤산(潰散)해서 다시 그들이 집합하지는 못하리라 생각되지만, 어쩌면 다시 재연될지 모른다는 풍문이 전해져 인심이 특히 불온한 상태에 있음. 헌병 및 경관 등이 협력하여 오로지 질서회복에 노력하고 있음. 이상 참고가 되셨으면 하여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메이지(明治) 39년 6월 13일 통감부(統監府) 총무장관(總務長官) 쓰루하라 사다기치(鶴原定吉) 외무대신(外務大臣) 자작(子爵) 하야시 다다스(林董) 각하[殿]

    59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제출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7 발신자: 제2함대 사령장관(司令長官) 데와 시게도오(出羽重遠) 수신자: 제2함대 사령장관(司令長官) 데와 시게도오(出羽重遠) 메이지(明治) 39년 6월 7일 6월 7일 목포(木浦)에서 들은 한국 서안의 정황 6월 7일 목포(木浦) 이사청(理事廳)에서 알게 된 의병의 소재 및 그 진행방향은 별지의 도면상에 간략하게 표시한 것과 같음. 군산(群山) 방면의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하 목포(木浦)에서 파견된 정찰인(순사 2명, 한국인 1명)은 고창(高廠)에서 흥덕(興德)에 이르는 도로상에서 전주(全州), 태인(泰仁) 방면에 의병이 있음을 듣고 전진을 중지하였다고 함. 홍주성(洪州城)에 있었던 민(閔) 아무개[某]는 덕산(德山) 서쪽의 해미(海美)로 도주해 버린 흔적이 있다고 함. 군산(群山) 방면의 사정에 대한 답사와 그 연안 순시는 차제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그럼에도 광주(光州)에 파견했던 동운(東雲)호와 연(漣)호 2척은 연료량이 부족하여 겨우 24톤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죽부(竹敷)로 귀항시키고, 부운(簿雲)호와 하(霞)호 2척을 이끌고 6월 8일 목포(木浦)를 출발하여 군산(群山)으로 향하기로 결정을 하였음. 그런데 6월 7일 오후 11시 목포(木浦) 이사청(理事廳)의 통보에 의하면, 태인(泰仁)과 정읍(井邑)의 폭도가 담양(潭陽)을 거쳐 광주(光州), 나주(羅州) 쪽으로 향할 것 같은 상황이어서 광주(光州)와 나주(羅州)의 상태가 걱정되어 즉시 순사 4명과 헌병 약간 명을 광주(光州)와 나주(羅州)에 파견했다는 취지의 연락이 왔기 때문에, 해상의 상태를 순시하고 즉시 목포(木浦)로 귀항하기로 하였음. 이상 우선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39년 6월 7일 목포(木浦)에서 카사마(笠間) 10구축대(驅逐隊) 사령(司令) 데와(出羽) 제 2함대 사령장관(司令長官) 각하[殿] 덧붙여 동운(東雲)호와 연(漣)호 2척은 연료 적재 후에 즉시 목포(木浦)로 귀항할 것을 명령해 두었음을 아울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전주(全州) 목포(木浦)간 전신선이 절단됨. 군산(群山) 방면의 정황은 불명 *(지도 설명) 홍주(洪州)의 수괴 민(閔)의 탈주 방향 의병이 배를 많이 모아 해적행위를 한 지역 6월 5, 6일경에 의병 100여 명이 담양(潭陽)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음. 이 부근에는 여전히 1,000여 명의 의병이 있는 것으로 보임. 6월 7일에 목포(木浦)에서 파견된 정찰자의 도착 위치 부사(府使)가 인민에게 죽창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함. 그의 사람됨은 수구파(守舊派)로서 적도들과 내응하려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임. 6월 7일 마산(馬山)을 거쳐 일본으로 관통하고 있는 새로운 전신선 동운(東雲)호, 연(漣)호의 순항(巡航) 보고 5월 30일 수요일 날씨 맑음, 풍향 북동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04 한난계(寒暖計) 71 오전 7시 명령에 따라 동운(東雲)호, 연(漣)호, 하(霞)호를 이끌고 좌세보(佐世保)를 출항, 동 10시에 소치하(小値賀) 수도(水道)를 통과, 오후 7시에 한국 거문도(巨文島)의 해밀턴(Port Hamilton, ハミルトン) 항에 닻을 내림. 입항에 즈음하여 항구에 있던 어부(본국인[本邦人])에게 해적의 모양을 물었으나 충분한 대답을 얻지 못함. 거문도(巨文島) 부근에는 해적의 출몰 일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신함. 오후 11시 반에 명령에 따라 하(霞)호를 좌세보(佐世保)로 회항시킴. 이 날 오전은 전투준비와 전투조련을 실시하고 오후는 함대운동과 기류(旗旒)신호 연습을 실시함. 5월 31일 목요일 날씨 맑음, 풍향 동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33 한난계(寒暖計) 81(水道)오전 7시 해밀턴 항을 출항, 동 11시에 횡견(橫見) 수도를, 오후 1시에 명진(鳴津)나루터[渡]를 통과하여 동 3시에 목포(木浦)에 닻을 내림. 곧바로 이사관(理事官)에게 가서 해적의 정세에 관해 묻고 본 소대의 임무를 말함. 동 이사관은 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곧바로 군산(群山)의 이사관(理事官)에게 전보로 알아보았음. 그 답전은 다음과 같음. 귀전을 배송(拜誦)함. 당 항구 부근에서는 현재 특별히 해적이라 칭할 만한 것은 없고 다만 요시미(녹도(鹿島)와 사시미(호도(狐島)) 부근에 15, 6명의 승무원을 태운 적선(賊船) 152척이 인천행 어선 또는 빙선(氷船)을 위협할 소지가 있으나 아직 피해자로부터의 고소는 접하지 못함. 그밖에는 평온함. 이상의 전보에 의해 외인(外烟)열도 부근에 출몰하여 약탈을 행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처음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음. 6월 1일 금요일 날씨 맑음, 풍향 남서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38 한난계(寒暖計) 83 오전 7시에 연(漣)호가 출항함. 화원반도(花源半島) 서쪽에서 자차수정(自差修整)을 시행함. 오후 1시 출항시 하도(下島) 부근에서 연(漣)호와 만나 함께 북행하여 면도(綿島) 수도, 재원서(在遠西) 수도를 지나 안마도(鞍馬島)로 향하던 도중에 본국인[本邦人]의 범선 및 한국인의 어선을 만났으나 달리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음. 오후 5시 20분 안마도(鞍馬島)의 정박지 안으로 들어가 항구 안을 일주함. 그 안에는 어선 10척 정도가 있었던 것 외에는 의심할 만한 점은 없었음. 동 5시 반에 항구 밖으로 나가 북4도 동의 침로로 어청도(於靑島)로 향함. 동 8시 50분에 동 섬의 정박지에 닻을 내림. 항구 내에 는 1척의 범선(帆船) 및 2, 3척의 어선이 있을 뿐임. 닻을 내릴 때 정박지를 탐조(探照)하기 위해 탐해등(探海燈)을 켰으나 육상에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함. 이 날 잡업(雜業)을 함. 6월 2일 토요일 날씨 맑음, 풍향 북동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27 한난계(寒暖計) 78 기상(起床)후 바로 육지를 탐색하게 함. 그 보고는 다음과 같음. 재주(在住) 일본인 150명 순사 1명 우편취급소 1 음료수는 우물을 사용함. 교통통신은 주로 어선을 이용하여 인천(仁川)을 왕복시키고 1개월에 약 3회로 함. 재주(在住) 일본인의 다수는 어부 및 소상인으로 판매하는 물품은 일용품이 가장 많음. 오전 8시 반에 출항하여 외형도(外炯島)로 가서 동 정박지 내를 일주하고 항구에 있는 어선(본국인이 승선)에 물어본 바, 해적은 호도(狐島) 이서(以西) 지역에 출몰하는 일은 없으며 충청남도(忠淸南道)와 전라북도(全羅北道)의 연안을 노략한다는 것, 적도는 모두 한국인(韓人)으로 주로 안면도(安眠島) 부근에 횡행한다는 것, 2개월 정도 전 호도(狐島)에 내습했다는 것 등을 알게 됨. 또한 그 배의 승무원 중 1명은 인천(仁川)에서 돌아오는 도중 적선에게 습격을 당하였는데 총탄이 20발 정도 발사되었다고 함. 또한 지금부터 약 2주일 전에 옹도(瓮島) 부근에서 참살당한 일본인의 사체가 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함. 그 후 인천(仁川)의 헌병 순사가 연안을 수색했으나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양민은 공황상태에 있음을 고함. 동운(東雲)호가 이러한 정보를 얻고 있는 사이에 연(漣)호는 육상을 정찰하여 ソクテイ島에서 일본인 석공 1명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탐지함. 이로써 해적이 호도(狐島) 이동(以東)에서 출몰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연(漣)호로 하여금 녹도(鹿島)를 수색하게 하고 동운(東雲)호는 호도(狐島)로 향함. 오전 11시 40분에 호도(狐島)의 북쪽 연안에 이르렀는데 한 어선이 국기를 게양하고 와서 마중함. 그 어선의 승무원은 모두 적도에게 약탈을 당했으며 어제 그들의 주박에서 벗어나 호도(狐島)에 이른 것이라고 함. 그들의 현적(現籍)과 성명은 다음과 같음. 오오야나기 후사키치(大柳房吉) 29세 야마구치현(山口縣) 구마게군(熊毛郡) 히라오쵸(平尾町) 805번지 가네코 쓰네마쓰(金子常松) 44세 미야시타 스케이치(宮下助一) 26세 나가사키현(長崎懸) 아마쿠사(天草) 사이와 촌(村) 동 데쓰지(鐵次) 22세 동 상 우라카와 다메시치(浦川爲七) 23세 나가사키현(長崎懸) 아마쿠사(天草) 미야타쵸(宮田町) 동 아라기치(荒吉) 22세 동 상 이 중 오오야나기 후사키치(大柳 房吉)는 한국인(韓人)을 수부(水夫)로 고용하여 1척의 어선에 탔으며, 가네코 쓰네마쓰(金子常松) 이하 5명은 다른 1척의 어선에 승선하여 지난달 29일에 보령포(保寧浦) 일각에 있는 군입리(軍入里)에서(고기낚시용 미끼를 구입하기 위해서 갔던 것임) 적도의 습격을 받고 약탈을 당했음. 이에 3일 앞서 오오쓰치 한우에몽(大土半右エ門)(히로시마현(廣島縣) 사에키군(佐伯郡) 에노구치촌(江ノ口村))이 탄 배가 カウル島(안면도(安眠島) 서쪽의 백주(白洲) 수도를 통해 들어가는 곳)에서 약탈을 당했다고 함.적도(賊徒)는 앞에서 말한 6명의 소지금을 모두 빼앗고 어선 및 선구 일체를 마을 사람들에게 위탁하고, 이들을 보령부(保寧府)를 경유하여 홍주(洪州)로 보내는 도중 일본병이 온다고 알리는 자가 있어 곧바로 6명을 버려 두고 도주함에 감신히 군입리(軍入里)로 도망쳐서 마을 사람들의 호의로 선구 등 일체를 찾아 어제 호도(狐島)로 돌아왔다고 함. 그들 중 1명은 머리 부분에 타박상을 입었고 양손 엄지손가락에도 부상을 입고 있음. 이 외 오오야나기 후사키치(大柳房吉)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손에 세게 포박을 당하여 생긴 부상을 입고 있었음. 따라서 간호원으로 하여금 그에 상응한 치료를 하도록 조치함. 이미 말한 가네코 쓰네마쓰(金子常松)가 빼앗긴 금액은 50여 원이라고 함. 또 말하기를 4월 23일에 적도 수백 명이 녹도(鹿島)에 내습하여 소총을 쏘고 한국인을 위협하여 그들 가운데 15, 6명을 부상시키고 돈 300여 원을 빼앗아 갔다고 함. 이 밖에 ベ-カ-島(白牙島) 부근에서 20일쯤 전에 행방불명[行衛不明]이 된 본국인[邦人] 3명(이 가운데 2명은 남자, 1명은 부인)이 있다고 함. 앞서 말한 오오야나기 후사키치(大柳房吉)가 진술한 바에 의거해 고찰해 보니, 이 곳의 폭도는 배일당(排日 )의 일원으로서 빈번히 돈을 모아 거사할 자금으로 쓸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일본인에 대한 욕설은 극도에 달하고 있다고 함. 오후 2시에 닻을 올림(호도(狐島)를). 동 3시 40분에 백아도(白牙島)에 도달하여 항로를 안면도(安眠島)에 가깝게 잡고 남하하여 군입리(軍入里)로 향함. 오후 7시 45분에 닻을 내린 즉시 장교 1명과 하사, 졸병 10명을 파견하여 육지를 정찰시킴. 이때 탐해등(探海燈)을 비추어 시위적인 운동을 행함. 파견원이 보고하는 바에 의하면 현재 달리 의심할 만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 부근에 산재해 있는 적도의 행동으로 보아 영향을 끼치는 일이 적지 않을 것으로 확신함. 또 군입리(軍入里) 부근에는 항상 1, 2명의 첩자가 있어서 보령(保寧) 및 홍주(洪州)에 있는 적괴와 기맥을 상통하여 연안에 정박하는 어선이 있으면 즉시 사람을 보령(保寧) 부근으로 보내어 이를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연(漣)호는 사장포(沙長浦) 정박지에 닻을 내림. 이 날 오전에 화재조련과 함선 안의 대청소를 실시함. 6월 3일 일요일 날씨 흐림, 풍향 남서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11 한난계(寒暖計) 71 오전에 내통포(內筒砲) 사격을 실시하고 기관병에게 시위 목적으로 육지를 산책하게 함. 연(漣)호는 오전 8시에 닻을 올려 연도(煙島)에 도착하여 동 섬 부근에서 내통포(內筒砲) 사격을 실시함. 오전 11시에 출항하여 연도(煙島) 동쪽 편에 있는 정박지에 이름. 본국인[邦人]이 승선한 어선이 있음을 발견하고 해적의 정세를 물었으나 달리 참고로 할만한 사실이 없었음. 동 정박지는 서풍을 피하는 데 매우 적합한 곳으로 당시에도 다수의 범선이 정박하고 있었음. 오후 1시 35분에 장포강(長浦江) 입구에 도달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 동 3시에 군산(群山)에서 닻을 내리고 그 지역의 부이사관(副理事官)에게 본 소대의 행동 및 탐지해서 얻은 사항에 대해 통고함. 군산(群山) 이사청(理事廳) 소속 아이자토(愛里) 경부(警部)의 담화에 의하면, 금년 봄부터 계속하여 죽도(竹島), 연도(煙島), 위도(蝟島) 부근에서 해적이 횡행하여 4월 초순에는 법성포(法聖浦)에 20명 정도씩이 승선한 해적선 2척이 입항한 일이 있고 또 수일 전에는 연도(煙島) 연안 8리 정도의 지점에서 약탈을 당한 일이 있다고 함. 적선(賊船)이나 적도(賊徒)의 특징, 목표는 달리 지적할 만한 것은 없다고 하나 대체로 대형의 한국선박(韓船)에 2, 30명이 승선하여 소총 및 탄약류를 적재하고 있다고 함. 드물게는 군복[兵服]을 착용하고 선복(船腹) 부분에 총구멍[銃眼]을 설치한 것도 있음. 혹은 보통의 한국인(韓人) 복장으로 목표한 어선에 접근하여 선내를 구경시켜 달라고 말하거나, 혹은 우리들은 해적을 단속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하며 틈을 타서 순식간에 곤봉류를 가지고 위협하여 손발을 묶은 다음 약탈하여 사라진다고 함. 또한 최근 홍주(洪州)에서 격퇴된 적도(賊徒)의 수괴를 민종식(閔宗植)(이전의 참판(參判))이라 하고, 5월 13일 처음으로 서천(舒川)에서 일어나 그 세력이 매우 창궐하여 우리 헌병과 순사 70명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으나, 별효과도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 이에 그 급박함을 경성(京城)의 수비대(守備隊)에 알렸고 동 수비대에서는 2개 중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격파함. 적도는 비인(庇仁)과 남포(藍浦)를 거쳐 홍주(洪州)에 거점을 둠. 5월 31일 마침내 홍주(洪州)의 공격으로 거의 완전히 격멸되었음. 그간 정찰임무에 종사했던 경부(警部)와 순사(巡査) 각 1명은 적에게 잡혀 살해되었다고 함. 이상으로 볼 때, 해적은 모두 홍주(洪州)를 근거로 하는 폭도의 수족이라 볼 수 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해적질로 군수용의 금품을 약탈하여 크게 사용하려 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됨. 따라서 위의 적도를 평정한 뒤에는 결국 연안도 평온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확신함. 6월 4일 월요일 날씨 흐림, 풍향 북서풍, 풍력 1, 해상 조용함, 청우계(晴雨計) 29.93 한난계(寒暖計) 83 오후 1시에 출항, 동 2시에 강을 벗어나 오른쪽에 있는 군산군도(群山群島)를 향함. 도중에 함대운동을 실시함. 동 4시에 연(漣)호는 곧바로 정박지로 향하고, 동운(東雲)호는 관지도(串芝島)의 서쪽 지점에서 정적이 감돌았기 때문에 항해하면서 내통포 사격을 실시하고, 동 6시 반에 횡경도(橫境島)의 남쪽에 있는 정박지에 닻을 내림. 6월 5일 화요일 날씨 흐리고 안개, 풍향 북서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13 한난계(寒暖計) 70 새벽부터 농무가 내습, 정오경에 안개가 점차 걷혔음으로 오후 1시에 출항함. 위도(蝟島)의 동쪽 1리를 지나 다시 남하하여 오후 6시 반에 함평만(咸平灣)으로 들어가 도리포(道里浦)에서 닻을 내림. 이에 앞서 함평만(咸平灣)내에서 동운(東雲)호는 타기(舵機)에 고장을 일으킴. 그래서 즉시 닻을 내리고 이를 점검해 보았는데 「롯트」접합용 톱니바퀴에 기름찌꺼기가 차 있는 것을 발견했음. 이 날 잡업을 실시함. 6월 6일 수요일 날씨 비, 풍향 북동풍, 풍력 2, 해상 온화, 청우계(晴雨計) 20.02 한난계(寒暖計) 69 오전 7시에 출항함. 동 9시에 수도(水島)의 수통(水通)을, 동 10시에 면도(綿島)의 수통(水通)을 통과하여 동 11시 목포(木浦)에 닻을 내림. 이 날 오전은 전투준비와 조련을 실시하고 오후에는 잡업을 행함. 동운(東雲)호, 연(漣)호의 순항항적도(巡航航跡圖) *(지도 설명) 동운(東雲)호의 정박장 동운(東雲)호, 연(漣)호의 정박장 연(漣)호의 정박장 동운(東雲)호의 항로 연(漣)호의 항로 동운(東雲)호, 연(漣)호의 항로

    60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1893(암(暗))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8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18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경성(京城)발 39년 6월 18일 오후 4시 15분 동경(東京)착 동 오후 9시 50분 제 37호 오늘 헌병(대의 글자에 탈자가 있음)에서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 민영돈(閔永敦) 및 민형식(閔衡植)을 치안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정하여 유치 구속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