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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1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1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02 발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6월 1일 동경(東京)착 2일 홍주(洪州)의 질서 회복은 주차군(駐箚軍)으로부터 인계를 받아 한국 경찰에게 넘기는 것으로 결정하였음.

    42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秘)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2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02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6월 2일 동경(東京)착 39년 6월 2일 홍주성(洪州城)에서 포로가 된 폭도의 처분에 관해서는 아직 타협을 보지 못했으나, 군사령부측에서는 메이지(明治) 38년 7월 3일의 한국주차군군율(韓國駐箚軍軍律)에 비추어 군법 회의에서 처단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지 않나 추측됩니다. 단순히 한국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면 폭도를 한국 정부에 인도하지 않고 주차군(駐箚軍)에서 처리하는 편이 장래를 위해서도 득책이 될 것이라 사려되나, 그렇게 하면 또 한편으로는 열국의 비난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한 사정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에 미리 지시[指揮]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상 상신(上申)합니다.

    43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송(電送) 제 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3 발신자: 통감(統監) 수신자: 통감(統監) 메이지(明治) 39년 6월 3일 홍주성(洪州城)에서 포로가 된 폭도는 주차군군율(駐箚軍軍律)에 의거하여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함. 한국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일한(日韓) 양국의 교의(交誼)에 방해가 되는 행위에 대해서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데에 주저해서는 안 됨. 더욱이 이번에 발생한 폭동과 같은 경우는 한국 스스로 이를 진압할 수 없었던 결과로서 부득이한 것으로 인정함.

    44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2 발신주소: 경성(京城) 발신자: 1906년 6월 3일 수신자: 1906년 6월 3일 발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주소: 동경(東京) 경성(京城)발 39년 6월 2일 동경(東京)착 3일 홍주성(洪州城)에 있는 기리하라(桐原) 경시(警視)로부터 전보가 있음. 도가타(土方)는 전사한 것으로 판명함. 사체는 발견하지 못함. 즉사한 2명의 사체는 나누어 화장함.

    45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4 발신주소: 경성(京城) 발신자: 1906년 6월 4일 수신자: 1906년 6월 4일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6월 4일 동경(東京)착 39년 6월 4일 홍주성(洪州城)에 출정한 사령관 다나카(田中) 소좌(少佐)로부터 그 후에 다음과 같은 전보가 도달했음. 홍주성(洪州城)에서 각지로 흩어진 비도(匪徒)는 머지않아 홍주(洪州)를 회복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어서 양민 중에는 거취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자가 있음. 따라서 기병(騎兵) 및 보병소대를 각 도로에 파견해 시위운동을 벌이고 있음. 또한 홍주(洪州) 남쪽의 청양(靑陽) 방면에서 비도들이 약탈을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음. 현재 조사중임. 포로는 145명이 됨. 성 안팎에 있는 비도의 시체는 82구가 넘음. 적괴 민종식(閔宗植)은 덕산(德山) 서쪽의 해미군(海美郡) 방면으로 도망친 흔적이 있음. 현재 조사중임.

    46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4 발신주소: 경성(京城) 발신자: 1906년 6월 4일 수신자: 1906년 6월 4일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6월 4일 동경(東京)착 39년 6월 4일 이전에 이미 상신(上申)해둔 바와 같이 충청남도(忠淸南道)와 기타 지역에서의 폭도의봉기가 궁중에 출입하는 잡배의 사주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은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대로 방치해 둔다면 그들은 더욱더 다양한 수단으로 우리의 정책을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홍주(洪州)에서 포로가 도착한 뒤 조사한 결과, 잡배 등 이번 사건에 관련된 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는 전부 우리 헌병에서 체포 유치하여, 그들 일파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처분이라고 생각되므로 하세가와(長谷川) 군사령관에게도 내담(內談)한 바 동감이라는 대답을 얻었습니다. 이에 미리 재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에 상신(上申)합니다.

    47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송(電送) 제 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5 발신자: 통감(統監) 수신자: 통감(統監) 메이지 39년 6월 5일 홍주(洪州) 폭동 사건에 관계한 혐의가 있는 잡배 체포의 건에 이의가 없음. 다만 이를 처벌하는 데에는 신중한 심판을 요하는 것은 물론임.

    48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6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06 발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6월 6일 동경(東京)착 39년 6월 6일 기리하라(桐原) 경시(警視)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가 있음. 도가타(土方) 경부(警部)는 적에게 포위되어 전투하던 중에 다리 부분에 중상을 입고 도망했으나, 길이 막혀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자진(自盡)해 버린 흔적이 있음. 사체는 성밖의 보리밭에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함. 총순(總巡) 구시하시(櫛橋) 등과 함께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성내로 연행되어서 소살(燒殺)된 것으로 보임. 그 참상은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음.

    49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고비(顧秘) 제 58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1 수신일: 1906-06-06 발신자: 외무차관(外務次官) 친다 스테미(珍田捨己) 수신자: 외무차관(外務次官) 친다 스테미(珍田捨己) 메이지(明治) 39년 6월 1일 한국정부 경무고문(警務顧問) 마루야마 시게도시(丸山重俊) 일본정부 외무차관(外務次官) 친다 스테미(珍田捨己) 각하[殿] 삼가 아룁니다[拜啓].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주(洪州) 지방에서 봉기한 의병이라 칭하는 비도(匪徒)를 진압하기 위해 미리 파견해 둔 보좌관보(補佐官補) 경부(警部) 도가타 겐노스케(土方源之助) 외 2명이 숙영지(宿營地) 정찰 임무를 하던 중에 적에게 포위되어 전투를 벌인 끝에 생사불명에 이르게 된 당시의 상황에 관해서 홍주(洪州)에 있는 기리하라(桐原) 경시(警視)로부터 별지와 같은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상 참고로 하시길 바랍니다. 서둘러 용건만 아룁니다[草草頓首]. 단 도면(圖面)을 생략함. 도가타(土方) 경부(警部) 외 2명 행방불명[行衛不明]의 건 홍주성(洪州城)은 우리 보병이 도착하기까지는 헌병대의 협의[協議]에 의해 홍주성(洪州城) 주변의 각 요로를 경비한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어제 27일 오전 10시 30분에 우리의 담당 지점인 서문 밖에 있는 월계동(月溪洞) 및 덕산가도(德山街道)의 정찰을 위해 도가타(土方) 경부(警部)와 송(宋) 총순(總巡)에게 구시하시(櫛橋),이마노(今野),요시가와(吉川),하시모토(橋本), 다카쿠라(高 ) 등 순사 5명을 붙여서 출발시킴. 오늘은 어제 내린 비로 하천과 논 표면에 물이 넘쳐 도로가 진흙탕이 되어 있어서, 물이 흐르는 2개의 강을 건너 정오 12시경에 성의 북쪽을 우회하여 덕산가도(德山街道)의 오른쪽 가장 고지(高地) 부근에 도달했을 때, 북문으로 통하는 작은 길에서 2명의 한인(韓人)과 조우했음. 그 거동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 신원을 파악(誰何)한즉, 1명은 연령 40세 정도이고 다른 1명은 그 종자로 보임. 백미(白米)의 수취(受取)라고 쓴 4촌(四寸) 평방의 도장을 날인한 종이조각과 또한 문감(門鑑) 모양의 종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체포함. 이어서 고우촌(高又村)을 지나 해미가도(海美街道)로 나왔는데 서문과의 거리 약 400미터 지점의 작은 언덕에서 적의 보초병으로 보이는 2명의 한국인을 발견했으나 그들은 즉시 작은 언덕을 넘어 도주했음. 오른쪽 방향으로 논을 사이에 두고 약 5, 6그루(丁)의 소나무 숲에서 배회하는 4명의 한국인(韓人)이 있어서 상황이 매우 심상치 않았으므로, 도가타(土方) 경부(警部)는 쌍안경으로 사방을 전망하면서 목적지 월계동(月溪洞)은 바로 그 소나무 숲이 있는 방향으로 산을 내려서 진행하기 시작했음. 그런데 한국병 복장을 한 적도(賊徒) 약 30명이 앞에서 말한 작은 언덕에서 갑자기 저격을 시작함. 이와 동시에 같은 복장을 한 적 15, 6명이 또한 오른쪽에 있는 민둥산[禿山]에서 나타나 마침내 협격을 당하기에 이르렀음. 이에 도가타(土方) 경부(警部)는 즉시 준비 명령을 내리고 전방의 적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음. 게다가 우리 일행의 목적은 주로 정찰 임무에만 있었기 때문에 수적으로 중과부적이므로 퇴각명령을 전달하여 배진(背進)하기 시작함. 추격이 매우 심하였으므로 응전하면서 퇴각하던 중 구시하시(櫛橋) 순사는 다리 부분에 총상을 입은 것으로 보임. 도가타(土方) 경부(警部) 및 宋 총순(總巡)은 구시하시(櫛橋) 순사와 함께 어느 외딴집에 들어갔고, 요시카와(吉川)와 하시모토(橋本) 두 순사는 끝까지 버티며 방전(防戰)에 힘썼으나 이때는 적의 포위망이 더욱 좁혀져 와 이미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마노(今野), 다카쿠라(高 ), 요시카와(吉川), 하시모토(橋本) 등 4명의 순사는 서남쪽의 고지로 살 길을 찾아 다행히도 숨어 있다가, 다음날 오전 3시 결성군(結城郡) 결성읍(結城邑)을 2리 정도 지난 지점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오늘 28일 오후 6시에 마침내 우리 근거지에 도착하여 위와 같은 사정을 보고하였음. 이에 앞서 본인[本職]은 어제 27일 오후 5시 30분경에 총성을 듣고 숙영지의 배후에 있는 고지에서 전망해 본즉, 성의 서남쪽 고지에서 총화를 교환하고 있었음. 도가타(土方) 일행이 적과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여 이를 헌병대에 통지하고 이와타(岩田) 경부(警部)에게 순사 2명, 헌병 상등병(上等兵) 2명 및 순검 1명을 딸려 보냈고, 또한 히사카(日榮) 대위(大尉)는 경비임무를 맡은 사카모토(阪本) 헌병 조장(曹長)과 그 일행 7명으로 하여금 그들을 응원하는 한편, 정황을 시찰할 목적으로 출발시켰음. 이와타(岩田) 경부(警部)의 일행은 마침내 그들과 만나지 못하고 오늘 28일 오후 5시 반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되돌아왔고, 사카모토(阪本) 조장(曹長) 일행은 계속하여 수색중에 있음. 그런데 한국인 밀정의 말에 의하면 27일 오후 6시경에 일본인 1명이 전사했고 2명은 포로가 되었다고 함. 또한 1명의 일본인이 덕산가도(德山街道) 근방에서 전사했고 적은 그의 총과 칼을 빼앗고 사체는 성안으로 운반해 갔다고 함. 또한 덕산가도(德山街道)로 도망간 일본인이 있었다고도 함. 이상의 정보에 의하면, 도가타(土方) 경부(警部) 이하 3명은 그 후 덕산가도(德山街道) 방면으로 퇴각하여 적의 추격을 받은 것으로 추측됨. 그렇지만 과연 포로가 된 것인지, 전사한 것인지, 아니면 달리 도망하여 생존해 있는 것인지 아직 결정하기 어려움. 어제부터 정찰한 바에 의하면, 도가타(土方) 경부(警部) 일행이 고전 분투한 행적이 역력하여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후의 소식을 알 도리가 없음. 현재 여전히 수색중에 있음. 나아가 별지의 약도를 첨부함. 전보 및 이 글과 함께 참조하기 바람. 이상 보고 드리는 바입니다. 메이지 39년 5월 28일 홍주(洪州) 숙영지에서 기리하라(桐原) 보좌관(補佐官) 마루야마(丸山) 고문 각하[殿]

    50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9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10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경성(京城)발 39년 6월 9일 동경(東京)착 10일 이전부터 전라남도(全羅南道)에 출현한 폭도는 계속하여 세력을 증가하는 형세이며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 광주(光州)에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했음. 이미 헌병 및 경찰에서 경계 중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본국인 거류민이 많은 요소(要所)에는 수비대로서 약간의 병원(兵員)을 배치하는 사항을 협의하는 중임. 이상 상신(上申)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