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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61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1894(암(暗))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8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18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경성(京城)발 39년 6월 18일 오후 1시 3분 본성(本省)착 오후 10시 10분 제 36호 지난 16일에 헌병대에서 궁내협판(宮內協辦) 민경식(閔景植)과 내부협판(內部協辦) 이봉래(李鳳來) 및 홍재봉(洪在鳳)의 언동이 치안에 장애가 된다고 인정하여 이들을 유치 구속했음.

    62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1898 암(暗)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8 발신주소: 비엔나(Vienna) 수신일: 1906-06-19 발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수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비엔나(Vienna)발 39년 6월 18일 오후 0시 55분 본성(本省)착 19일 오전 9시 10분 제 40호 이 곳 신문에 라후안 통신사의 동경(東京) 전보로 다음과 같은 사항이 전재(轉載)되었음. 지금은 한국의 불온한 형세로 용이하지 못함. 국내 일반에서 불평의 무리가 들고 일어나 일본인이 거주하는 가옥 대다수가 불에 타버리고 일본인 가족은 난을 피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음. 이에 일본 정부는 이를 진무(鎭撫)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했음. 한국 황제는 이토(伊藤) 후작(侯爵)의 부재를 틈타 자국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획책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함. 이상은 사실 무근의 풍설이라고 취소시켜도 무방할 것인지 훈시를 바람.

    63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참작(參作)제3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9 메이지(明治) 39년 6월 19일참모총장(參謀總長) 한국주차군(駐箚軍) 참모장(參謀長)으로부터의 6월 14일 발 보고의 요지 이전에 홍주(洪州)에 파견했던 토벌대는 6월 7일부터 9일 사이에 각각 자신들의 수비지로 귀환했음. 이번 토벌에서 포박한 자 가운데에는 한국인으로서 휴직한 장교 5명과 정직중인 경부(警部)가 약간 명 있음. 총 인원은 154명에 이르며 취조한 결과에 따라 82명을 경성(京城)에 수감하고 기타는 방환했음. 우리의 공격으로 인하여 죽은 비도(匪徒)는 83명임. 노획한 병기 가운데 주요한 것은 대포와 소포 79문, 무라다식 총(村田銃) 및 모젤식 총 16정, 화승총 226정, 칼 71자루, 화약 71관(貫), 탄환 약 150관(貫)이 됨. 당지 부근은 또한 아직 완전히 진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홍주(洪州) 헌병대는 약간 명이 증원되었음. 또 한국군의 중대장은 부하 150명을 이끌고 홍주성(洪州城) 안에 있음. 홍주군수[洪州郡主] 및 덕산군수[德山郡主]는 6월 3일에 홍주(洪州)에 와서 인심을 진무(鎭撫)하는 중임. 비괴(匪魁) 민종식(閔宗植)은 여전히 행방이 불명함.

    64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제21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자: 니시(西) 대리(代理) 수신자: 니시(西) 대리(代理) 수신주소: 오스트리아(在墺) 재오스트리아(在墺)니시(西) 대리(代理) 하야시(林) 대신(大臣) 귀전(貴電) 40호에 관하여 한국의 극히 일부분에서 폭도가 봉기한 것은 사실임. 이 때문에 일본인 가운데 위의 소요 지방을 떠나 난을 피해 다른 지방으로 옮기는 자가 있음. 그렇지만 한국[就國]주재 일본군대에서 1개 부대를 해당 지방에 파견하여 진압에 종사한 결과, 동 지방은 곧바로 진정되어 이미 충분히 질서를 회복하기에 이르렀음. 군함 파견 운운은 사실 무근임. 지난번 목포(木浦) 부근에서 해적이 출현했던 것과 관련하여 이를 제거하기 위해 1, 2척의 구축함(驅逐艦)을 순찰시킨 일이 있었을 뿐임. 위의 소요에 대해서는 한국 궁중(宮中)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판명되지 않음. 이와 같은 사정이므로 귀 지사는 전혀 라후안 통신을 취소시킬 필요가 없음. 오히려 전술한 취지를 수식하던지 발표하여 그에 상응한 정오(正誤)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할 것.

    65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통참(統參)?? 제585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19 발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자작(子爵) 하야시 다다스(林董) 수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자작(子爵) 하야시 다다스(林董) 이달 4일 밤에 의병이라 칭하는 비도(匪徒) 100여 명이 전라북도(全羅北道) 태인군(泰仁郡)에서 일어났으며 동시에 전주(全州), 목포(木浦) 간의 전선을 절단하여 상황이 불온하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에 앞서 홍주(洪州)의 비도(匪徒)는 거의 전멸되었으나 그 거괴(巨魁)가 아직 잡히지 않았으므로 한때는 다시 재연하지 않을까 생각되었지만 전혀 예상이 벗어났습니다. 그 거괴(巨魁)는 작년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의 성립에 즈음하여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우리 헌병으로부터 퇴경(退京)을 명령받은 전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이라는 자로서, 임병찬(林炳瓚)이라는 자를 부장으로 삼아 태인(泰仁)에서 정읍군(井邑郡)을 거쳐 순창군(淳昌郡)을 점령하고, 혹은 담양(潭陽)에 이르고 혹은 곡성(谷城)에 진입하여 머지않아 광주(光州)로 남하하려는 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전라남도(全羅南道) 각 군의 인심이 흉흉해졌으며 도처에서 부설(浮說)과 유언비어[流言]에 현혹되는 경우가 있어서 각 지역에 소재한 본국인[本邦人]도 또한 그들의 생업에 편히 종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목포(木浦) 이사관(理事官)으로부터는 수비대의 파견을 요청해 오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광주(光州)진위대(鎭衛隊)의 거동에 혹시 적과 내응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케 하는 점이 있어, 치안유지상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여 주차군(駐箚軍)과 협의한 결과, 목포(木浦), 군산(群山) 지방을 수비할 목적으로 보병 1개 중대를 광주(光州)에 주둔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달 14일 이 곳을 출발하여 인천(仁川)에서 해로(海路)로 목포(木浦)에 상륙하여 동지역에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전주(全州)에 파견한 진위대(鎭衛隊)는 11일을 기하여 순창(淳昌)을 공격하여 수괴 최익현(崔益鉉), 임병찬(林炳瓚) 등 13명을 포획하고 나머지 무리는 해산시켰다는 취지의 확실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대개 이러한 부류의 비도는 근래에 들어 삼남(三南)의 각 도(各道) 및 강원도(江原道) 지방 도처에서 나타나 봉기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혹은 궁중과 어떠한 형태로든 결탁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되는 점도 있어서 포로를 심문하는 등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를 한국 조정(韓廷)의 손에 맡길 경우에는 애매모호하게 처리되어 매각되어 버릴 염려가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포로는 지난 16일에 전주(全州)에서 이를 우리 헌병의 손으로 수령(受領)하여 지난 18일 그곳을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이상 참고로 하시라고 말씀해 올리는 바입니다. 경구(敬具) 메이지(明治) 39년 6월 19일 통감부(統監府) 총무장관(總務長官) 쓰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외무대신(外務大臣) 자작(子爵) 하야시 다다스(林董) 각하[殿]

    66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3755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11-22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11-22 발신자: 하세가와(長谷川) 통감대리(統監代理) 수신자: 하세가와(長谷川) 통감대리(統監代理) 39년 11월 22일 오후 4시 15분 경성(京城)발 본성(本省)착 7시 23분 금년 6월에 충청남도(忠淸南道)에서 의병이라 칭하며 봉기한 폭도의 수괴 민종식(閔宗植) 및 그 심복의 무리는 홍주성(洪州城)에서 패주(敗走)한 후 교묘하게 그 소재를 숨기고 있어서 백방으로 수색 중인바, 이번에 경무고문(警務顧問)이 홍주(洪州) 지부에서 20일 오전 2시에 마침내 홍주(洪州)(군동(グントン))에 있는 산에서 체포했다고 하는 내용의 보고에 접했음.

    67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참(參)1발 제 25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0-09-05 메이지(明治) 43년 9월 5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강원도(江原道) 통구현리(通口懸里)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상등병 2명, 보조원 3명은 8월 6일에 동 지역 서남쪽 약 2리의 지점에서 적 24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궤주(潰走)시킴. 2. 경상북도(慶尙北道) 오제동(奧齊洞)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상등병 1명, 보조원 3명은 8월 21일에 오제동(奧齊洞)의 동북쪽 약 2리의 지점에서 수괴 한명만(韓明萬), 윤국범(尹國範)이 이끄는 적 30명과 충돌하여 이를 격퇴시키고 그 가운데 2명을 부상입힘. 3. 동도(同道) 풍산역(豊山驛)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헌병은 8월 27일에 풍산역(豊山驛) 서남쪽 약 3리의 지점에서 적 약 27명과 충돌하여 그 가운데 2명을 살해하고 총 2정을 노획함.

    68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秘受) 제 2693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0-09-19 참 1발 제 26호 메이지(明治) 43년 9월 19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평안남도(平安南道) 삼등(三登)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상등병 1명, 보조원 1명은 8월 28일에 성천(成川) 재무서장(財務署長)을 호위할 목적으로 출장을 가던 도중에 삼등(三登) 서북쪽 약 3리의 지점에서 적 12명의 습격을 받고 교전한지 약 30분 후에 이들을 궤주시켰음. 적은 사체 1구와 화승총 1자루를 버려두었음. 2. 강원도(江原道) 토성(土城)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상등병 2명, 보조원 2명은 8월 10일 밤에 토성(土城) 동북쪽 약 3리 지점에 있는 산중에서 불을 피우고 있던 적 13명을 습격하여 그 가운데 1명을 죽이고 이들을 궤주시켰음. 3. 함경남도(咸鏡南道) 원산(元山) 수비대의 나가이(永井) 중위 이하 25명은 8월 28일에 마전동(馬轉洞) 서남쪽 약 5리의 지점에서 적 29명을 야습하여 적 3명을 부상시키고 화승총 1자루를 노획했음.

    69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2792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0-10-03 참 1발 제 27호 메이지(明治) 43년 10월 3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경기도(京畿道) 유산리(杻山里)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상등병 1명, 보조원 2명은 9월 11일에 유산리(杻山里) 북쪽3리의 지점에서 적괴 홍원유(洪元裕) 이하의 적도 7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궤주시켰음. 2. 전라북도(全羅北道) 금산(錦山) 헌병 분대(分隊)의 헌병 4명, 보조원 4명은 9월 18일에 금산(錦山) 남쪽 4리의 지점에서 적 6명과 충돌하여 그 가운데 1명을 죽이고 5명을 생포하였으며, 화승총 4정, 칼 3자루를 노획했음. 3.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榮川)경찰서의 순사(巡査) 8명은 9월 12일에 예천(醴泉) 동남쪽 약 3리의 지점에서 적 4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궤주시키고 총 2정을 노획했음.

    70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2935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0-10-18 참 1발 제 28호 메이지(明治) 43년 10월 18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황해도(黃海道) 하남리(霞嵐里)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하사(下士) 이하 6명은 9월 15일 하남리(霞嵐里) 동쪽 약 6리의 지점에서 적 2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궤주시켰음. 2.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安東)수비대의 하사(下士) 이하 5명은 9월 29일 안동(安東) 서쪽 약 3리의 지점에서 적 10명과 충돌하여 그 가운데 1명을 살해하고 2명을 부상시키고 2명을 생포함. 3. 경상북도(慶尙北道) 예천(醴泉), 안동(安東), 영천(榮川)의 각 수비대 및 풍산역(豊山驛) 헌병 분견소(分遣所)의 연합 토벌대는 9월 30일 예천(醴泉) 동남쪽 약 5리의 지점에서 적 8명과 충돌하여 그 가운데 1명을 죽이고 2명을 부상시키고 2명을 생포했으며 칼 1자루를 노획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