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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01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 5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6-04-21 발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메이지29년(1896) 4월 21일 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앞 무쓰[陸奧] 외무대신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에 관한 전신(前信) 중 누락된 재 한국 각 영사의 보고 및 그 후의 보고 개요를 아래에 통보합니다. 29년(1896) 3월 18일 재(在) 부산 가토[加藤] 일등영사의 보고 요사이 입수한 진주 폭도의 적정(賊情) 탐정기 및 진주 폭도의 거괴(巨魁) 노응규(盧應奎)의 상소문, 동 정한용(鄭漢鎔)의 격문 등에 따르면, 이번에 봉기한 폭도가 큰 취지로 삼는 점은 첫째 왕비 살해 사건, 둘째 단발령 이행 사건으로 인해 격앙하여 필시 이것들은 일본인이 교사(敎唆) 강박한 데에서 나온 결과이니 모름지기 일본인을 배척하여 국가의 체면을 온전하게 해야 한다 라는 데에 있으며, 그 밖의 각 지방에서도 역시 거의 궤를 같이 하는 듯합니다. 동 3월 27일 재 원산 니구치[二口] 이등영사의 보고 북관(北關) 연안의 각 항구에서 회항한 우선(郵船)회사 대관(代管) 이운사(利運社) 기선 소류호[蒼龍號]의 승무원이 말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배는 이 달 17일 오전 함흥부의 서호(西湖)에 정박하자마자 해안 일대에 흰옷을 입은 한인이 군집한 것을 보고 이 곳은 전부터 불온한 소문이 있었으므로 상륙하지 않았고 같은 날 오후 북청부(北靑府)의 신포(新浦)에 정박하였지만 역시 상륙을 보류하고 중개인 거룻배 등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얼마 있다가 한아(韓兒) 다수를 실은 배 1척이 와서 이 아이들이 말하기를 부사(府使)의 명이니 서호와 신포에 기선이 출입하면 곧바로 이를 보고하고 탑재한 화물은 뱃짐을 풀지 말라고 하여 1시간 여 기다렸는데, 중개인 우정삼(禹鼎三)이라는 자가 나에게 와서 종잇조각 하나를 내밀며 이것은 부사의 포달이라 하여 여전히 탑재한 화물은 뱃짐을 풀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하고 우려하는 상태였는데 백방으로 위유(慰諭)한 끝에 화물 5개와 승객 2명을 상륙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곧장 되돌아 와서 다시 신창(新昌)가는 표를 사며 나는 원산에 사는 사람인데 이 곳에 상륙하면 목이 잘릴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로써 민정이 어떤지 약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창으로 옮겨 정박하였는데 해질 무렵 중개인 신 아무개가 배에 와서 말하기를 요사이 부사로부터 화물과 승객을 상륙시켜서는 안 된다는 포달이 있었으며, 또 전 마을에 일본인을 보면 곧 포박하여 이를 보고하라는 유달(諭達)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사가 내린 명령은 표면상 위와 같지만 이면은 그렇지 않으며 일본인이 상륙하여 위해를 당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또 일설에 부사는 부청(府廳)에 갇혀 움직일 수 없으며 명령과 포달에 부사의 서명이 있지만 전부 인민에게 강요당하여 하게 된 것이니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비도(匪徒)에게 알랑거려 목숨을 보전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동 21일 오후 경성부(鏡城府) 독진(獨津)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아침 거룻배가 와서 화물을 푸는 데에 필요한 인부는 곧 배로 올 것이라고 명령하여 여러 시간 기다려 겨우 뱃짐을 풀 수 있었습니다. 이 배 요리인 이인덕(李仁德)이 상륙하자 주민들이 이를 붙잡아 모자를 벗겨 두발을 검사하고 폭행을 가하려고 했으므로 곧장 도망쳐 돌아왔다고 합니다. 동 29년(1896) 3월 31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죽변만(竹邊灣)에서 일어난 우리 어민 피해 사건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보고하였는데, 해를 입은 어선 소유자인 나가사키 현 고다 구마하치[幸田熊八]의 대리인이 자세히 보고한 바에 따르면, 동인(同人) 소유와 연관이 있는 잠수 기계 어선 3척이 쓰치하시 사쿠우마[土橋作馬)를 지배인으로 삼고 외부 고용인 23명을 승선시켜 어업을 하기 위해 지난 달 26일 이곳 부산항을 출발하여 경상도 연안을 거쳐 이 달 12일 오후 6시 강원도 울진군 영일만 죽변에 도착하였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므로 앞에서 말한 쓰치하시 외 1명이 곧 상륙하여 죽변동에 이르러 마을 사람에게 일본술 5되를 주며 지난 해 출어 때의 후의에 보답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도 뱃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상태였으며 악의의 징후는 없어 그 날 밤은 해안에 정박하였습니다. 다음날 13일 아침 북풍이 몹시 거칠게 불고 오후가 되자 더욱 심해졌으므로 마을 사람들도 뱃사람에게 주의하기를 파도가 이렇게 높으면 어선을 육상에 끌어올려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하기에 전원 상륙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1척을 다 끌어올리고 일동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후방의 대숲에서 총・창・곤봉을 손에 든 폭민이 무려 수백 명 나타났지만 몸에 무기라곤 지니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할 수 없었고 끝내 전원 24명 중 15명은 그들의 독수(毒手)에 당하여 불행한 참사(慘死)를 맞이했고 나머지 9명의 생존자도 부상자도 있었지만 간신히 호랑이굴을 빠져나와 이곳 부산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4월 6일자 보고 제3 중에 3월 15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전보 참조) 동 4월 1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이번에 함경도 함흥부 관찰사에 임명된 김유성(金裕成)이 부임해 가는 도중에 오늘 찾아 와서 담화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 관(官)이 경성을 출발한 것은 지난 달 23일이었는데 9일 간의 날짜를 허비한 것은 다름 아니라 도중에 병이 났고, 또 하나는 폭민이 아직 진정되지 않고 각지에 집합하고 있어 위험이 적지 않아 그 때문에 집합지를 피해 우회하여 오느라 지연되었다고 합니다. 또 안변 관하 풍평(豊坪)에 오니 인민 5, 6백 명이 집합하여 동 관을 뵙고 아뢰기를 청하였으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지난 날 원산에서 일본 수비대가 신평장에 와서 폭민이라 칭하며 수십 명을 죽이고 양민의 가옥에 이르러 재물을 가지고 가버렸고 그래서 우리들도 그 복수를 하려고 협의 중이라 말했습니다. 동 관은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일본병은 규율이 엄정하여 이 같은 일은 추호도 있을 리가 없으며, 일본병이 온 까닭은 너희들과 같은 무지한 자가 갖가지 설에 빠지고 혹은 또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선동하여 일본인을 해치려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정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일본은 실로 우리나라에 대한 후의가 얕지 않다. 오히려 존경해야 할 것이지 결코 난폭한 거동을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와 같은 천박한 생각을 하지말고 각자의 업에 종사하여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폭행을 도모하려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붙잡아 관아에 끌고 가서 처분할 것이니 이런 때는 폭민도 해산하여 피차 양국 인민 모두 안전을 획득하는 데에 이를 것이다. 만일 동 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제부터 곧바로 입경하여 정부에 아뢸 것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마디 말로써 회유하니 그 뜻을 약간 이해하고 일동이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무지한 자들이기 때문에 혹 기회를 틈타 거류지에 언제 해를 입힐지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수비대가 체재 중이므로 당분간은 충분히 경계해줄 것을 희망한다고 합니다. 동 4월 2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영동 시찰 어사(御使) 어시협(魚時協)이라는 자가 올해 1월이래 강원도 각지를 순회한 다음 폭도의 정찰하고 상경하는 도중에 영사관에 와서 담화한 바에 따르면, 지난번에 우리 수비대로 인해 신평장에서 쫓겨난 폭도는 일단 강릉에 집합하였는데 의병장 민영호(閔永鎬)(여주 사람)?이병채(李秉采)(춘천 사람)?권익형(權益衡)(강릉 사람) 세 사람은 또다시 600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여 양양(襄陽)에 와서 거류지를 습격한다고 공언하며 현재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혹 근간 이곳 원산항 부근에 쳐들어올지도 헤아리기 어렵고 또 이들 폭도 때문에 양민은 모두 재물을 약탈당해 하는 일에 종사할 수 없으며, 특히 머지 않아 일본병과 개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유포되어서 다른 데로 피난하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가는 곳마다 연도가 적막한 것을 보니 차제에 정부 또는 지방관이 이 의병장들을 체포하지 않으니 도저히 진정될 날이 없기 때문에 피차 상민은 경영의 길이 두절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동 4월 4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내지가 불온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출장지에서 철수하여 귀항(歸港)하게 한 이곳 부산항 수산회사원 야스무라 세이겐[安村成言]이 말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 외 54명은 지난번에 어업을 하기 위해 이곳 부산항에서 해상 약 7리 정도 떨어진 가덕도(加德島)로 출장갔는데 근래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이 섬 주민의 소행이 왠지 평소와 같지 않아 물건을 사러 가도 이를 꺼려 거절하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 사람들이 이 섬에서 철수하는 날, 즉 지난 달 20일 전에는 평소 눈에 익지 않은 수상한 자가 오두막 근방을 배회하였고 그밖에도 약간 불온한 기미가 있었던 바 동 20일에 이르러 평소 친하게 지내던 촌장이 서생을 데리고 와서 그 전날 진주의 폭도 23명이 섬에 건너와서 형세가 불온하니 빨리 이 섬에서 피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급히 전하므로 일의 진위는 명백하지 않았지만 생각하지 못한 변을 당할까 염려하여 서둘러 부산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또 효고[兵庫] 현 어민 모리노 세이키[森野淸記]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올해 1월 배 6척(기계선)을 타고 경상도 장기군(長?郡) 관하 구련포(九連浦)(인가 5, 60호)에 가서 그곳에 임시 집을 짓고 그 이후 고기잡이와 사냥에 종사하였는데, 지난 달 초순부터 그들을 대하는 그곳 한인의 기질이 왠지 모르게 난폭해졌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친절한 자는 이 사람들에게 일본인이 이곳에 있으면 위험해질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한인들에게도 폐가 되므로 빨리 이곳을 따나라고 권유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인심이 더욱 나빠져서 혹은 돌을 던져 영업을 방해하고 먹을 물을 푸러가도 돌을 던져 푸지 못하게 하는 등 갖가지 난폭한 짓을 하였는데 마침내 지난 달 21일에 이르러 수십 명의 한인이 임시로 지은 집에 몰려와서 돌을 던지며 난폭한 짓을 하므로 간신히 이곳으로 도망쳐왔다고 합니다. 또 앞서 전라도 지방에서 우리나라 매약상(賣藥商) 3명이 폭도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난 번 폭도의 정황을 정찰하기 위해 진주성 내에 들어갔던 한인이 귀항(歸港)하여 말한 바에 따르면, 일본 상인 3명이 폭도에게 포박 당하여 진주성 내로 끌려오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혹 앞에서 말한 매약상인가 합니다. 동 4월 13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이 달 11일 진주의 폭도는 ‘구포’ 우리 수비지 및 부산 거류지를 습격하기 위해 그 일부를 김해로 보냈다는 급보를 접하고 ‘구포’에서 즉시 정찰대를 파견하였는데 폭도가 이에 대해 발포했으므로 우리는 이에 대응하여 포격하였습니다. 폭도는 패하여 창원 지방으로 달아났으며 그 수는 약 200명 내외라 합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102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 6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6-05-01 발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메이지29년(1896) 5월 1일 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앞 무쓰[陸奧] 외무대신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에 관한 전신(前信) 이후 재 한국 각 영사로부터 보내온 보고의 개요를 아래에 통보합니다. 29년(1896) 3월 26일 재 인천 하기와라[萩原]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충청도 지방에 재류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철수시키기 위해 명령을 받고 출장을 간 순사 등이 각기 직무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온 다음에 말한 바에 따르면, 귀로에 연안 각 마을의 인심은 점차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더욱 냉담한 경향이 있어 대오를 이루었을 때는 줄곧 환대하는 체하지만 소수자라고 판단될 때는 위해를 가하는데, 심한 경우는 생명을 위험스럽게 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또 이 순사 등이 군산에서 얻은 보고에 따르면, 3월 15일 전주 및 공주에서 폭도가 봉기하여 관찰사와 경찰관은 끝내 죽임을 당하였고 황산(黃山)?강경(江鏡) 지방은 이 때문에 소요 일로인 상태라고 합니다. 또 2월 24일 진위에서 일본인 1명이 폭도에게 살해된 것은 3월 15일에 이르러 동 군리(郡吏)로부터 급보가 있었으므로 다음날 16일 순사 3명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이 복명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 순사들이 18일 오미장(五味場)에서 경성영사관 소속 순사를 만났는데 진위의 피해자를 검시(檢視)하고 돌아오는 길임을 알고서 곧 함께 수원으로 돌아가 그 상세한 내용을 들었다. 2월 24일 새벽에 이천의 의병이라 칭하는 자 300여 명이 진위에 쳐들어와 세무주사를 결박하고 금 5천 9백여 량과 구식 포(砲) 4정(挺)을 빼앗았다. 또 마을 안을 수색하여 일본인을 찾았는데 일본인 1명이 경기도로 통행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붙잡아 총살하고 그의 소지품을 빼앗은 다음 안성 방면으로 퇴각했다고 합니다. 이 폭도는 이천의 의병이라 칭하지만 용인・양지 부근의 자들이 아닌가 합니다. 그 후 조사해보니 이 피해자는 경성에 재류하는 후쿠오카 현 사람 곤도 에이조[近藤榮藏]라는 자로서 아산 둔포에서 행상을 하던 자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이 건에 대해서는 이미 개요를 보고하였습니다(위에 관계된 전보(前報) 중 진의(鎭義)라는 것은 진위(振威)의 잘못으로 조선어 음이 상통하여 이런 오류가 생겼음). 그리고 3월 19일 이곳 인천에 귀착한 이곳 이오이[五白井]상점 소유 일본형 돛배 승무원이 말한 바에 따르면, 이 배는 지난 1월 하순이래 상용(商用)으로 인해 진남포에 정박하였는데 평양이 불온하다는 소식을 듣고 만일의 변에 대비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달 12일에 이르러 진남포에서 몇 리 떨어진 강서?용강(龍岡)?삼화(三和) 등에 폭도가 봉기하여 강서를 근거지로 삼고 그 수가 3천에 달하며, 용강에 800명 내지 900명, 삼화에 700명이 있었으므로 강서 부사(府使)는 모두 도망가고 무기 등은 전부 적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용강・삼화의 관리들은 모두 적에게 협박을 당해 이에 항복하였고, 폭도는 이 기세를 이용하여 바야흐로 평양을 습격하려는 모양이라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객주나 혹은 잘 아는 한인에게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니 이를 평양에 급보합니다. 그런데 폭도 봉기설이 더욱 고조되자 객주나 그 밖의 사람들은 자기들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일본인의 출입을 금하고 또한 간절히 귀항(歸航)할 것을 권유하니 마침내 15일 밤중에 출범하여 귀로에 올랐다고 합니다. 또 19일 게이자이호[慶濟號]가 진남포 근방에 정박 중일 때 지나가는 일본 재래의 목조선에 부탁한 가미야[神谷] 경부의 보고에 따르면, 평양은 아직 폭도가 봉기하지 않았지만 그 부근 4, 5리 땅에는 난민(亂民)이 충만하여 기진포(棋津浦)에서는 우리나라 사람 1명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재작년 메이지 27년(1894) 풍도(豊島) 앞 바다의 해전에서 충청도 태안부 관동(官洞) 부근에 좌초된 청국군함 광을호(廣乙號)는 지난 28년 3월이래 하시모토 기요시[橋本淸]라는 자가 그 인양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달 11일에 이르러 공주 지방에서 봉기한 폭민이 그곳으로 습격해오려는 것을 알고 일단 이곳 인천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기계 인양품 및 그밖에 일체를 처리할 생각으로 일행 7명 중 나가사키 현 사람 오구라 안조[小倉安藏] 외 2명과 한인 1명을 머물게 하고 다른 4명은 일본 재래의 목조선에 올라타 13일 이곳에 도착하여 여러 가지 협의한 끝에 소증기선(小蒸氣船) 1척을 그곳에 보내어 일동 철수하게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차질이 생겨 일본 재래의 목조선을 타고 15일 밤 관동 부근에 도착하였는데 육상에는 화톳불을 피워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해안가 바위 틈으로부터 저격을 당하여 어쩔 수 없이 일동은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얕은 여울이었으므로 걸어서 바다를 건너 적이 존재하지 않는 ‘시나리’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16일 낮 동안은 해안의 바위 속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17일 아침 한인 한 사람을 만나 자기들이 난파되었음을 말하고 넌지시 나머지 3명의 안부를 물으니 관동에 있는 일본인 3명은 폭도로 인해 살해되고 가옥도 불탔다고 말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그 방면을 바라보면 불꽃과 연기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므로 다시 ‘시나리’ 마을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마을에는 지난 16일 1천 여 명의 폭도가 난입하여 일본인을 수색하였는데 이 날도 역시 그 일단(一團)이 멀리서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할 수 없이 해안을 따라 1리 여를 달려 겨우 작은 배 1척이 매어있는 것을 보고 곧바로 이에 올라탔습니다. 18일에 이르러 ‘카로린’만 곶 모퉁이 근방에서 한선(韓船) 1척에 옮겨 타고 간신히 23일 귀항했다고 신고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곳 영사관에서는 곧바로 순사 등을 파견하여 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게 하였습니다.(4월 6일자 보고 제3, 3월 25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의 전보 참조) 동 3월 28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앞서 강원도 죽변만에서 일어난 살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군함 도리우미호[鳥海號]는 이 달 25일 귀항하였습니다. 동 군함 함장 오구라 뵤이치로[小倉?一郞]가 제출한 검사 기록 등에 따르면, 동 군함이 조난지에 도착한 후 즉시 조사에 착수하였지만 이 만의 인민은 동 군함이 입항하는 것을 보자마자 멀리 피난하여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고 합니다. 겨우 도주자 6명을 잡아 신문한 것과 후당포(後塘浦) 등의 인민이 말한 바에 따르면, 폭도는 강원도 강릉에서 일어난 자 20명, 울진에서 30명, 평해(平海)에서 또 20명을 모집하여 도합 70명으로 죽변만의 일본인을 습격하고 나중에는 각 마을 사람도 대체로 이에 가담하여 폭행했다고 합니다. 동 3월 29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강원도 장진(長津) 방면에서 우리 어업자 4명이 폭민에게 살해되었다는 설이 있어 순사 및 순검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이 복병한 바에 따르면, 히로시마[廣島] 현 평민 기소 요에몬[木曾與右衛門] 외 3명이 강원도 연안에서 어업하던 중 3월 12일 영진(靈津)에서 폭도에게 포박당해 기소는 포박당할 때 총창(銃創)을 입었으므로 이틀이 지나자 고성부(高城府)에서 사망하였고, 다른 3명은 동 부 영중에 있었는데 동 20일 폭도에게 끌려 강릉으로 가 그 지경에서 총살되었다고 합니다. 이 폭도의 거괴(巨魁) 권화경(權化京)이라는 자는 23일 고성부에서 관계 당국의 손에 포박되었다고 합니다. 동 4월 4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최근 길주에서 원산으로 돌아온 행상 오카다 기쿠타로[岡田喜久太郞](이오이 상점)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은 올해 1월 16일 원산을 출발하여 북길주 부근 임명진(臨溟津)에 이르렀고 그 이래 한 객주집에서 묵으면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한력(韓曆) 1월 중순부터 강원도 적도의 부침(浮沈)이 일반에게 유포되기에 이른 후에는 인심이 왠지 어수선하여 이 사람을 심하게 경멸했다고 합니다. 때때로 공갈을 치므로 몰래 원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력 1월 23일 아침 길주의 폭도 3명이 느닷없이 이 사람의 숙소에 난입하여 갑자기 이 사람을 향해 “누구냐”고 검문하고 “너는 누구이길래 이곳에 머물러 가지 않는가. 만일 구태여 이곳에서 꾸물거리고 있으면 감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과 얼굴에 노기를 띠며 말했습니다. 이미 큰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주인이 간절하게 비호하고 또 이 사람도 한복을 입은 채 언어가 통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일체의 변명은 주인이 이를 담당하여 그 자리는 그럭저럭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상품은 흩어져 없어졌으므로 그것을 챙기고자 하여 한 주간 남짓 이 집에 몰래 숨어들어 있었는데 그 후 다시 종종 마음껏 공갈을 쳐 혹은 쫓아내야 한다고 하고 혹은 이를 박살내야 한다는 등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와서는 주인도 이 이상은 비호할 수 없으며 만일 굳이 이를 한다면 헛되이 재액을 함께 할 뿐이니 빨리 원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종용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동 2월 2일 한선(韓船)을 빌려 출범하였습니다. 출범하여 삿대를 젓는 한 순간 과연 생각하던 대로 폭인(暴人)들이 바짝 쫓아왔지만 바다와 육지를 가로막는 큰 파도가 일어나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동 지대에 체재 중 겪은 일로서, 폭도가 하루는 산발한 한인이 말을 타고 그곳을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이는 일본 측량자가 변장한 것이라 하여 곧 이를 잡아 구타하여 거의 절명하기에 이르러 이 사람의 옷을 벗겨 나체로 검사하니 전혀 일본인이라는 흔적이 없고 또 주머니 속에 있던 서류로써 간신히 자국인임을 알고 비로소 이를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또 이 사람이 고용한 한인이 말한 바에 따르면, 한력 2월 25, 6일 무렵 누구든 불문하고 일본인을 잡는 자에게는 상당한 상금을 준다는 격문이 강원도에서 회송된 것을 실제로 보았다고 합니다. 동 3월 28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나가사키 현 평민 야마구치 규지로[山口久次郞] 외 3명이 일본 재래의 목조선을 타고 인천항으로 항행하던 도중 지난 달 22일 밤 전라도 영암군 도시포(嶋時浦)(목포에서 나주를 향해 우리 거리로 약 8리 강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서 폭도가 습격하였습니다. 그 중 2명은 어디론가 달아나 행방을 알지 못하고 나머지 2명은 난을 피해 한인의 집에 숨어 있다고 동행했던 한인이 육로를 통해 밤낮으로 달려 이곳으로 돌아와 이 달 1일 이곳 영사관에 급보하였습니다. 따라서 곧 당시 정박 중인 군함 도리우미[鳥海]의 함장과 협의한 다음 동 군함을 회항하게 하고 조사를 하기 위해 순사?순검 등을 파견하였습니다. 동 4월 6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앞서 평양에 재류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철수시키기 위해 게이자이호[慶濟號] 및 가이류호[海龍號]로서 파견한 경부(警部)・순사 등이 철수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온 다음 말한 바에 따르면, 평양 지방은 종래 폭도가 가장 주목하는 곳으로, 격문이나 그 밖의 갖가지 방법으로써 인민을 유도했으나 그곳에는 일본인의 수가 매우 많고 뿐만 아니라 진위대(鎭衛隊)가 수비함으로써 폭도에게 응하는 자가 없어서 대체로 평온한 모양이지만 그곳에서 7리 떨어진 강서(江西)에서는 3월 17일 황해 지방의 폭도가 난입하여 동 지방의 인민을 위협하고 폭도에게 가담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군수는 곧 평양에 가서 구원을 청하였으므로 바로 진위대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고 그 거괴(巨魁)를 잡아 이를 총살하고 또 주모자 15명을 잡았습니다. 이로써 폭도는 마침내 패하여 남으로 달아나는 도중 황해도 치하포(治下浦)에서 행상 중이던 나가사키 현 사람 쓰치다 조료[土田讓亮]라는 자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 상황은 다음 항에 상세하게 썼습니다. 또 요사이 중화(中和)에 적의 무리가 출몰한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보고를 접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앞서 황주 치하포에서 나가사키 현 평민 쓰치다 조료가 한인에게 살해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히라하라[平原] 경부 등이 복명한 바에 따르면, 동 경부 등은 그곳에 도착 후 곧바로 앞에 말한 쓰치다가 숙박했던 숙소 주인을 심문하니, 쓰치다는 3월 8일 황주 십이봉(十二峯)에서 한인 1명과 한전(韓錢) 6가마와 그 밖의 물품을 작은 배에 탑재하고 진남포로 가던 도중 그 날 밤 치하포에 도착하였고 다음 날 9일 오전 3시에 상륙하여 그곳 여인숙 이화보(李化甫)의 집에 와서 아침을 먹고 마침 승선하려고 앞뜰을 나서는데 그 숙소의 한인 4, 5명이 갑자기 철 방망이를 가지고 그의 등을 치고 끝내 이를 박살내어 사체를 강속에 던지고 곧 배로 가서 그가 소지한 한전과 기타의 화물을 빼앗아 한전은 이를 숙소 주인에게 맡기고 그 휴대품을 빼앗아 해주 방면으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당시의 핏자국이 아직도 땅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숙소 주인의 처(숙소 주인은 도망치고 없음)와 마을 사람, 그 밖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따져 물은 끝에 이 숙소 주인이 한 소행임이 명백해졌으므로 각 지방관에게 가해자의 체포를 의뢰해 두었습니다.(4월 6일자 보고 제3, 3월 20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의 전보 참조) 그리고 앞서 광을호 인양인의 조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출장 보낸 순사 등이 복명한 바에 따르면, 동 순사 등은 3월 25일 태안군 마방동(馬方洞) 해안에 도착하여 이 해안에서 1정(丁) 떨어진 곳으로, 전에 일본인이 살던 가택에 가서 검사하니, 광을호에 사용했다고 하는 철판, 철 조각이 있을 뿐 그밖에는 다 타버렸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마방동과 기타의 동장 및 마을 사람을 소집하여 그 전말을 조사하였더니 같은 달 15일 부상(負商) 2명이 남아있던 일본인 3명이 있는 곳에 와서 철봉 몇 개를 가지고 가려고 하였으므로 이를 나무랐는데 부상은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고 또 얼마 안 있어 다수의 의병이 자주 올 것이라 공갈을 치며 이들을 구타한 다음 화물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에 몹시 공포심이 생겨 이 날은 앞서 인천에 간 일행이 돌아오면 함께 그곳을 도망치려고 물건을 해안에 내놓고 오로지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는데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자기 화물이 약탈되는 것을 염려하여 화톳불을 피우고 포를 발사하여 밤새 경계하였습니다. 다음날 정오 근처의 해안에 일본배 1척이 표착한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검사하게 하니 바로 앞서 인천에 도착한 일행이 탄 배로, 배 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지만 승선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에 이 일본인 일행이 인천으로 갔거나 혹은 돌아오는 도중에 폭민에게 습격 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상상하고, 폭도가 쳐들어 올 때를 대비하여 비치해둔 도주용 일본 재래의 목조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해 외항하였습니다. 그 후 의병이라 칭하는 자 및 근처의 마을 사람들이 일시에 많이 모여들어 유류품을 가지고 갔을 뿐 아니라, 야간에 불을 밝히기 위해 집안 내에 모닥불을 피웠는데 그 불이 지붕에 번져 마침내 집 전체가 다 타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동장은 즉시 태안 군수에게 보고하고 그 물품 등은 전부 동장이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로써 생각해 보면, 앞서 인천에 간 일행이 돌아올 때 해안에서 화톳불과 발포하는 것을 만난 것은 잔류자가 허세를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정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쌍방이 모두 오해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관동(官洞)의 부호 김사현(金士賢)이라는 자가 와서 고한 바에 따르면, 마방동 부근에 거주하는 악한들이 광을호에서 인양한 금속을 빼앗으려고 꾀하여 의병이라 칭하고 우선 부하 2명을 보내어 일본인을 위협하고 그들이 도망간 후 제멋대로 물품을 약탈한 것이라 합니다. 따라서 백방으로 수색한 끝에 마침내 그 거괴(巨魁) 2명과 그 밖의 연루자 2명을 잡아 이를 이곳에 보내고 유류품은 동장의 보관서를 받고 가해자는 일단 조사한 다음 이곳으로 인천항 관찰사에게 인도하였습니다(4월 6일자 보고 제3, 3월 28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 전보 참조). 동 4월 7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임시 측도부(測圖部) 제4반장 기쿠치[菊池] 대위가 보낸 보고에 따르면, 2월 15일 문경의 측도부 반 반원(班員) 중 3명과 2명으로 이루어진 2조(組)가 측도 작업을 하기 위해 문경을 출발하여 다음날 충청도 단양 부근에서 회합할 예정으로 나누어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3시에 가흥 수비대장 미야케[三宅] 대위가 문경 수비대장 나카오카[中岡] 군조(軍曹) 앞으로 측도원 일행이 단양에 가면 위험하므로 출발을 멈추어야 한다는 취지의 전보를 보냈는데, 재(在) 문경 육지 측량기사 이케다 가쓰노유[池田活之裕]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 급사(急使)를 보내어 두 조의 진행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3명의 조는 급사를 만나 귀환하였지만, 우에다[植田]?오가와[小川] 두 측도기사 조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17일 오후 2시 무렵 그 조를 수행한 고용 한인 ‘장도룡’이라는 자(대구 사람으로 작년이래 고용하고 있는 자)가 돌아와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지난 16일 오후 2시 무렵 이곳에서 8리 떨어진 ‘수산’이라는 산에서 작업하던 중 한인 10여 명이 와서 위의 우에다・오가와 두 측도기사와 자기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며 캐묻고 또 한인 수십 명이 달려들어 난폭하게 굴었으므로 두 측도기사는 권총을 쏘며 싸워 혈로를 열려고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3명 모두 생포되어 ‘수산’ 마을에 끌려가 그곳 시장에 묶여 있었는데 주위는 폭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밤이 되자 우에다 측도기사는 틈을 엿보아 한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끝내 벗어날 수 없으니 깨끗하게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너는 한인이니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 문경에 가서 우리의 정황을 보고하라” 하고 곧 입으로 고용 한인의 포승을 깨물어 끊었다고 합니다. 이 한인은 두 측도기사의 포승을 풀고 함께 도망치자고 했지만 우에다는 “우리는 설령 일단 이곳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폭도가 소재한 것이 많고 또 의복이 달라 끝내 탈출하여 돌아가지 못할 것이니 너는 폭민 속에 섞여들어 갔다가 틈을 보아 도망쳐 이 상황을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혼자 도망쳐 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도 가벼운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같은 달 18일 오전 9시 문경 수비대에서 병사 5명을 ‘수산’에 파견하여 정찰하게 하였는데 19일 오전 9시 귀환하여 보고한 바에 따르면, 우에다?오가와 두 측도기사는 그 후 ‘쳇첸’이라는 곳으로 끌려갔다고 하는데 ‘수산’ 근방은 폭도가 많아서 이 이상 탐색할 길이 없다고 합니다. 또 동 병사와 동시에 탐정을 하기 위해 출장 보낸 한인 7명도 같은 날 오후 6시 돌아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수산’에 이르러 상황을 들으니 두 측도기사는 청풍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해되었으며, 이 두 사람을 끌고 간 것은 ‘야동’이라는 마을의 폭도로서 20관문(貫文)의 포상을 받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동 4월 7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전보 군함 도리우미[鳥海]는 전라도에서 조난 당한 조난자 3명과 배 1척을 이끌고 오늘 귀항하였습니다. 또 다른 1명은 육로를 통해 무사히 귀착하였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103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 7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6-05-07 발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메이지29년(1896) 5월 7일 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앞 무쓰[陸奧] 외무대신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에 관한 전신(前信) 이후 재 한국 각 영사로부터 보내온 보고의 개요를 아래에 통보합니다. 29년(1896) 4월 7일 재(在)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전에 진주부에서 폭도가 봉기한 이래 이곳 거류지 부근은 대체로 불온한 조짐을 보입니다. 따라서 한인 사이에서는 간혹 가재를 챙겨 사방으로 도피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폭도는 머지않아 이곳 거류지를 습격할 것이라고 발설하였으므로 거류지 내의 인심이 자연히 위구심을 가지고 자못 경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경찰관 및 소방부 등을 독려하여 비상시를 경계하게 하고 있는데 지난 3월 28일 이곳에서 7리 정도 떨어진 김해로 폭도가 습격해와서 속속 그 지방에서 도망쳐온 자들이 있어서 거류지 내외의 인심이 갑자기 더욱 동요하여 한때 안도하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군함 도리우미도 항내에 정박하여 가능한 한 대공황을 야기하지 않도록 거류민에 대해 오로지 위무하기에 힘써 거류지의 경계는 책임 있는 보호자의 조치에 일임하고 생업을 영위하고 조금도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간절하게 설유하였습니다. 그 후 거류지 밖 5, 6리 땅에는 수비대에서도 정찰을 보내고 이곳 영사관에서도 순사를 파견하여 사정을 정찰하게 한 결과 모두 위급 절박한 상황은 인식되지 않으나 경계는 여전히 엄중하게 하고 있습니다. 동 4월 10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지난 달 28일 이곳에서 약 7리 떨어진 김해로 폭도가 쳐들어온 건에 대해서 구포 전신소에서 이곳 부산항 통신소로 보낸 보고 및 그 지방에서 이곳 부산항으로 도망쳐온 자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폭도가 김해로 쳐들어온 것은 29일 오전 2시 무렵이며 이 폭도는 진주를 본거지로 삼는 폭도의 일부분이 주동자가 되었고 여기에 창원?칠원?함안 등의 병사와 마부와 같은 무리를 더하여 그 수가 대략 100명 내외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들이 김해로 들어갈 때 대(隊)를 이루지 않고 삼삼오오 잠입하여 그 집합을 기다려서 관사를 파괴하고 구 관제(官制)의 이방?책방(冊房)?형방 등의 지방 관리 9명을 포박해 가서 동 김해부에서 서남 1리 떨어진 배다리에서 취합하였습니다. 이 폭도의 목적은 김해 군수는 조세를 착복하고 또 단발했다는 이유로 이를 포박했으며, 세무주사가 상납한 돈과 곡식을 약탈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군수는 일의 위급함을 알고 그 며칠 전 이곳 부산항으로 도망쳐 왔고 세무주사 또한 폭도의 내습을 피해 그 종적이 애매하였으므로 폭도는 저들을 붙잡지 못하고 헛되이 백방으로 수색한 끝에 빨리 충분한 돈과 곡식을 갖추고 충분한 병력을 훈련시켜 훗날의 명령을 기다릴 것이라는 취지를 전하고 앞에서 말한 배다리를 향해 그 곳에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 후 폭도는 배다리를 떠나 다시 김해에서 2리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러 60명 정도 둔집하였는데 그곳에서 무리를 풀고 포박한 7명 중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폭도는 혹은 상인 차림을 하고 혹은 노동자 모습을 하고 각지에서 내왕하며 김해?구포?부산 등은 물론 일부분은 이곳 거류지에도 들어와 있는 상태이지만 그 옷차림이 이상하지 않기 때문에 주민도 역시 폭도인 자를 식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들은 바에 따르면, 저들 중 어떤 자는 손목에 가느다란 피혁을 감고 있는데 이것은 의류의 소매에 감춘 물건의 끈으로써 보통 방망이나 도검을 휴대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폭도가 쳐들어온 후 김해 인민의 의향은 폭도가 다시 쳐들어 올 때는 바야흐로 응하려 할 것 같지만 아직 나서서 진주의 폭도에 투신한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고 일반적으로 평온합니다. 구포 통신소에서는 때로 정찰을 그곳으로 내보내지만 인민은 일반적으로 폭도의 시기로 인해 훗날 재액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자못 일본 병사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동 28일 충청도 태봉(台封) 지방에서 전주(電柱)를 절단하거나 쓰러뜨리고 갔습니다. 의병이 이를 절단했다고 표방하므로 우리 수비병이 이를 정찰하니 적 약 70명이었습니다. 먼저 발포하여서 우리 병사는 이에 응하여 50분 동안 싸워 적을 모두 퇴각시켰습니다. 또 다음날 29일 적 약 7천 명이 대포 몇 문(門)을 갖추고 충청도 태봉에 쳐들어왔으므로 그곳 수비대 및 원조병 2분대가 협력하여 9시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전투하여 모두 격퇴하였습니다. 적은 사체 30을 남기고 용궁 방면으로 패주하고 우리 병력은 무사하다는 보고입니다. 또 이 달 3일 조령 제1관문에 적 약 500명이 쳐들어와 그곳에 있던 무기 및 화약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하므로 수비대가 이를 추적하니 적은 모두 약탈물을 버려 두고 가 버렸습니다. 다음날 4일 문경에서 출발하는 우편각부(郵便脚夫) 2명이 조령 제3관문 기슭에서 적 약 100명을 만나 불 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우리 부대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안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후 6일 수비대 2분대는 가흥에서 안보를 향해 행진 중 적 약 300명과 충돌하여 격전 2시간만에 마침내 이를 격퇴하였는데 적의 사망자 5명, 우리 군사는 무사하며, 적은 ‘타이로인’ 방향으로 패주하여 부근의 촌락은 전부 병화로 근심한다는 통보를 접하였습니다. 동 4월 16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앞서 이곳 부산항 거류지 경계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였는데 이 달 12일에 이르러 진주의 폭도 200명 내외가 다시 김해로 쳐들어와 김해의 인민이 이에 가담하니 곧 그 수가 수천 여 명이 되었고 구포의 우리 수비지 및 부산 거류지를 습격할 것이라는 취지의 급보를 접하였습니다. 이에 곧 구포에서 파견한 정찰대를 파견하여 우선 창원 지방으로 패주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원래 이곳 부산항 수비대는 그 병력수가 적고 특히 김해와 이곳 거류지 사이에는 여러 갈래의 통로가 있어 상당한 경비를 요하지만 다만 그 가운데 요충인 구포에만 경계할 뿐이어서 아직 거류민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안도하게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관계자의 협의한 이래 이곳 부산항에서 1리 반 떨어진 하단(河端)이라 칭하는 낙동강 연안 일대에 우리 순사 및 소방부를 파견하여 경비를 조금 보충하고 또한 동래부 관찰사를 재촉하여 조선 순사도 앞에 말한 하단에 파견하게 하여 편의 협력하여 경계에 종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달 12일 사가[佐賀] 현 사족(士族) 오타 료사부로[太田良三郞] 외 1명이 제출한 조난 시말서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지난 28년(1895) 9월 잡화 및 매약(賣藥) 판매를 하러 5일에 경성을 출발하여 충청도를 거쳐 목포에 갔다가 다시 나주 지방 각처에서 행상을 하던 도중 올해 3월 2일 무안 삼거리면(三巨里面) 및 함평면(咸平面)이라고 하는 마을에 이르니 불온한 조짐이 있어 속히 목포로 되돌아오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무안군에 이르렀을 때 여기도 역시 촌민 100여 명이 군집하여 자못 위험할 우려가 있어 행로를 돌려 같은 달 8일 함양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300여 명의 폭도를 만나 당장 포박 당한 다음 나무 몽둥이 등으로 난타 당하고 게다가 소지하고 있던 금원(金圓) 및 휴대품 등을 전부 약탈당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9일 그곳에서 닷새를 허비하고 진주로 호송되었고 그곳에서 21일 동안 투옥되어 참혹한 취급을 받은 다음 4월 1일 폭도의 거괴(巨魁)로부터 방환의 언도를 받고 간신히 구사일생으로 동 10일 이곳 부산항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또 이 사람 등이 풀려났을 때 폭도의 거괴로부터 ‘방송(放送)할 것’이라고 쓴 통행권을 부여받았고 마산포에서도 역시 배둔(背屯)에서 그곳으로 출장온 방수장(防守將)으로부터 ‘고성(固城) 방수소(防守所)에서 쓴 음지(音旨) 이를 속히 호송할 것’라는 통행권과 같은 것을 부여받았다고 합니다. 동 4월 16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이 달 11일 진주의 폭도가 다시 김해로 쳐들어왔다는 건에 대해 구포 통신소에서 이곳 부산항 통신소에 보낸 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달 29일 김해로 쳐들어온 폭도에게 잡혔다가 나중에 풀려난 김해 군수의 아들 이민봉(李敏鳳)이라는 자가 이 달 8일 우리 구포 수비대에 와서 고한 요지에 따르면, 당시 폭도가 김해를 습격한 것은 단발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자신이 잡힌 것도 단발의 명령자라는 혐의 때문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진주 및 마산포의 적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진주에서는 부민(府民) 일반이 폭도에 가담하여 대부분 총기를 휴대하고 그리고 저들은 1달에 한전(韓錢) 2관문(貫文)과 쌀 6되의 급료를 받는데 이 돈과 곡식은 전부 각 군의 부호에게서 징발한 것이며, 마산포와 그 부근에 있는 폭도는 화약의 제조에 종사하고 빈번하게 연병(練兵)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덧붙여 말하기를, 김해에 일본병을 파견한 것은 이는 감사해마지 않지만 폭도 입장에서 이것을 보면 김해 부민이 스스로 일본 군대에 의뢰한 것이라는 시기를 받아 재습격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일본 병사는 구포에 머물고 김해에 들어오지 않을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부산에 와서 관찰사 및 자기 아버지를 면회하고 또 곧바로 김해로 갔다. 그런데 앞서 보고한 사가 현 사족 오타 료사부로 외 1명이 이 달 10일 오전 10시 구포 수비대에 와서 자신들의 조난 상황 및 적의 정세를 말하고 끝으로 한 가지 경보를 전하며 말하기를, 폭도는 오늘내일 중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경보에 근거하여 우리 구포 수비대에서 동 11일 오전 7시 정찰을 하기 위해 병사 4명을 김해 방면으로 파견하였는데 구포에서 김해에 이르는 사이에 제3의 도선장(渡船場)인 선암(仙岩)에 도착하니 과연 진주의 폭도 약 200명이 구포 우리 수비지 및 부산 거류지를 습격할 목적으로 전날 밤 다시 김해에 와서 선암의 도선을 전부 빼앗는다는 내용을 돌아와 보고하였습니다. 이로써 같은 날 오전 10시 다시 그 여부를 시찰하기 위해 다른 배로 정찰병 1분대를 김해 방향으로 파견하였는데 오전 4시 무렵 김해에 도착하자마자 부민(府民)이 일시에 모여들어 우리가 가는 것을 막고 말하기를 의병이 진주에서 와서 백성이 모두 안도하는데 또 일본병사가 올 필요가 없으니 빨리 돌아가라고 하며, 저들에게 폭도의 상황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 언동이 몹시 무례하였습니다. 곧바로 성문에 이르렀지만 문짝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폭도는 성벽 위에서 우리를 향해 발사하는 흉내를 내거나 혹은 비방하고 욕을 하였습니다. 끝내는 돌을 던지며 공포(空砲)를 쏘다가 실탄을 쏘기에 이르니 우리도 이에 응하여 일제히 사격을 시험해 보이니 폭도는 이 기세에 놀라 일시에 사방으로 흩어져 어지러웠습니다. 따라서 정찰병은 밤이 되어 선암에 돌아왔지만 도선이 없어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처럼 일행이 아직 정찰의 요령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음 날 12일 다시 김해로 나아가니 또다시 폭도와 충돌하였습니다. 때마침 폭도의 추격을 방지하면서 배진(背進) 중인 원병(援兵)을 만나 다시 전진하니 폭도는 원병이 오는 것을 보고는 겨우 물러나 흩어져 창원 지방을 향해 퇴각하였습니다. 우리 병사는 나아가 성내에 들어갔는데 지금은 적의 그림자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버리고 간 쌀 대략 2, 30석, 깃발 몇 류(旒), 창 몇 개 중 약간을 분포(分捕)하고 같은 날 오후 10시 일동은 구포로 돌아왔습니다. 이 충돌로 인해 우리 병사가 부상당한 자는 4명, 그 중 병사는 3명, 통역 1명이고, 적은 사망 4명, 부상 20명이라고 합니다. 그 후 김해에서 온 자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 군사가 돌아간 후 폭도는 다시 김해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동 4월 18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지난 번 보고 후 이곳 인천항 및 부근은 그다지 불온한 모습이 없습니다. 다만 지난 14일 밤 오류동(이곳 인천항과 경성 중간에 해당하는 촌락)에서 50여 명의 폭민이 무리를 이루어 약탈을 하였으므로 농민들이 동 촌락에 피난하고 전에 야행(夜行) 우편 보호를 위해 주둔하는 우리 병사의 보호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동 4월 21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앞서 폭도를 경계하기 위해 순사 및 소방부 등이 하단에 출장간 건에 대해 보고하였는데, 폭도는 이 달 12일 우리 정찰병과 충돌한 후 창원 방향으로 퇴각한(다시 김해를 점령했다고 전한 자가 있었지만 결국 소문에 지나지 않았음) 이래 다시 올 기미가 없고, 김해의 상태는 완전히 평온하게 되어 인민은 모두 생업에 안도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제 하단의 경계는 필요 없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따라서 불온한 경우에는 급보해야한다는 취지를 그곳의 중심 인물에게 위탁해두고 순사 소방부 등의 하단 출장은 오늘을 기해 모두 폐지합니다. 동 4월 23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이 달 5일 이곳을 출범하여 전라도를 향한 군함 도리우미호가 목포에 기항하여 우리 순사와 조선 순검이 상륙하고 육상의 상황을 정찰할 때, 품팔이를 하기 위해 그곳에 와 있던 부산포 한인 11명이 폭도에게 고통을 당하였는데, 그 중 9명은 어디론가 도망치고 나머지 2명은 도망가지 못하고 때때로 목포에 와서 폭도에게 구타당하고 모진 고문을 당한다고 하므로 이 2명의 구조 방법을 조선 순검에게 말하였더니 동 군함에 승선시켜 이곳 부산항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곧 관계자에게 인도하였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104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 8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6-05-13 발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메이지29년(1896) 5월 13일 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앞 무쓰[陸奧] 외무대신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에 관한 전신(前信) 이후 재 한국 각 영사로부터 보내온 보고의 개요를 아래에 통보합니다. 29년(1896) 4월 16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k@고원@/k@ 이북의 각 군에서는 저 창의(倡義)의 무리가 자주 당여(黨與)를 모집하여 함흥과 북청을 그 본영으로 삼고 약탈을 하여 양식과 재화(財貨)를 징집하고, 또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 지방관에 대해서는 폭행을 가하려는 상황이므로 누구든지 두려워합니다. 현재 정평(定平) 군수는 도망치려다가 잡혔고, 북청 군수는 신임 관찰사의 마중을 구실로 육로를 통해 이곳 원산항으로 도망쳐와서 곧바로 부산행 기선에 편승했다고 합니다. 또 함흥에서는 신임 관찰사가 착임한 후, 전부터 각지에서 들어와 있던 비괴(匪魁) 3명을 체포하였으므로 저 창의의 무리들의 세력이 겨우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또 앞서 폭민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있던 이천 군수도 피난하기 위해 이곳 원산을 향해 출발했다고 하며, 동 군수의 가족은 이 달 11일 입항하는 겐에키호[顯益號]를 타고 원산에 왔다고 하는데 곧 그 방면에 상황을 문의하니 동 가족은 동 7일 이원(利原)과 단천 사이에 있는 곡구(谷口) 역이라는 곳에서 폭민의 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동 4월 22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앞서 전라도 영암군 도시포(嶋時浦) 중 도포(都浦)라는 곳에서 조난 당한 나가사키 현 평민 야마구치 규지로 외 3명을 구조하기 위해 그 지방으로 향한 군함 도리우미호는 조난자 중 3명을 구조하여 이 달 18일 귀항하였고, 또 조난자 중 다른 1명은 육로를 통해 부산으로 돌아온 건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이번 도리우미 함장의 보고 등에 따르면, 이 달 6일 동 군함이 목포에 기항했을 때 그곳에서 4, 5정(丁) 남짓 떨어진 곳인 유달산(鍮達山) 산 위에서 작은 깃발을 세우고 뭔가 신호를 하는 것을 보고 이는 폭도의 파수꾼으로 일본 선박을 압수하기 위한 것이라 여겼는데 동 군함이 정박하니 그 깃발을 걷어 치워 버렸다고 합니다. 그곳은 호수 31호로 나주 및 무안으로부터 20여 명의 폭도가 때로 포구에 오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5월 7일 제6 보고 중 4월 6일 가토 영사의 보고, 동 18일 동 영사의 전보 참조). 동 4월 29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요사이 입수한 강릉의 창의사(倡義士)(남부 폭도의 괴수) 민용호(閔龍鎬)라는 자가 경성 주차(駐箚) 러시아 공사 및 원산 재류 외국인에게 보낸 서면(書面)에 따르면, 하나는 러시아 병사가 한국에 들어온 것에 감사하고, 하나는 우리를 습격하는 계획을 외국인에게 내통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 사람 외의 외국인에 대해 다른 뜻이 없음을 표명한 것인데, 이는 이번에 봉기한 비도(匪徒)가 주로 우리에게 적의(敵意)를 품고 우리 인민에 대해 제멋대로 잔학한 행동을 하며, 다른 외국인에 대해서는 조금도 폭행을 가하지 않는 원인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강원도 통천(通川) 지방에서는 폭도 수천 명이 남쪽으로부터 온다는 설이 있어 민심이 불안한 모양입니다. 또 간성(杆城)에는 폭도 38명 정도가 있으며 거괴(巨魁)가 이를 인솔합니다. 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력(韓曆) 4월 1일 배로 묵행하여 통천?흡곡(?谷)?안변(安邊)?덕원(德源)?원산을 공격한다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또 양양(襄陽)에는 폭도 300명 정도 있으며 민장(閔將)이 이를 이끌고 있는데 아무런 계획도 세우고 있지 않습니다. 강릉에는 약 700명 내지 800명의 폭도가 둔재하며 양양에 있는 민장의 실형(實兄)이 이를 인솔하는데, 이들의 양식은 모두 토지의 부호로부터 징발하고 있습니다. 철원?평강(平康)?금성(金성)?회양(淮陽) 등 각지는 현재 조금도 이상이 없지만 전에 폭도가 둔집했던 곳으로 그 당시 자주 폭행을 당하여 재물을 약탈당했기 때문에 양민은 아직까지도 그 피해를 탄식하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105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 9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6-05-20 발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메이지29년(1896) 5월 20일 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앞 무쓰[陸奧] 외무대신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에 관한 전신(前信) 이후 재 한국 각 영사로부터 보내온 보고의 개요를 아래에 통보합니다. 29년(1896) 4월 16일 재 경성 우치다 일등영사의 보고 이곳의 상황은 지난 번 보고 후 계속해서 평온합니다. 지방의 폭도도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한 무리의 적도(賊徒)가 패하여 흩어진 후에는 그 기세가 갑자기 꺾여 혹은 여전히 양근(陽根)) 지방에 집합했다고 하며 혹은 용인 지방을 배회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원래 양식 등의 준비 없이 다수의 폭도가 오랫동안 집합할 리가 없으며, 특히 현재 바야흐로 농사 계절에 해당하므로 그들의 협박으로 인해 일시 어쩔 수 없이 좇았던 양민들은 모두 흩어져 돌아가 논과 들의 생업에 종사할 것입니다. 이로써 실제 다수의 폭도가 여전히 한 곳에 집합한 것은 현재 전라도 나주 및 경상도, 함경도 지방이며, 경기 지방은 우선 평온한 상황입니다. 동 4월 23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대구에서 이곳 부산항 통신부에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전에 진주의 폭도를 진정시키기 위해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친위대 2개 중대가 이 달 18일 진주를 함락하여 폭도는 사체 약 30을 남기고 단성(丹城)?의령(宜寧) 방향으로 패주했다고 합니다. 동 4월 29일 재 경성 우치다 일등영사의 보고 앞서 우리나라 상인 밀행자(密行者)를 조사하기 위해 개성부로 출장가라는 명령을 받은 순사 등이 이 달 26일 영사관에 돌아온 다음 복명한 바에 따르면, 그 지방은 매우 평온하며 종래와 같이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매우 호의를 표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모조리 철수해 가는 것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으며, 당시 그곳에는 한병(韓兵) 1소대가 있었는데 이를 경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 5월 6일 재 부산 사카타[坂田]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앞서 진주의 폭도 상황을 탐정하기 위해 파견한 한인의 시찰 일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은 지난 달 22일 부산을 출발, 같은 날 김해에서 들은 소문으로는 진주에 둔재하는 폭도 1천 명 중 500명은 김 대장이 이를 이끌고 의성으로 향했으며, 500명은 서 대장이 이를 이끌고 삼가(三嘉)를 향해 출발했다고 합니다. 동 23일 창원군 하관 시장 가게에서 이 사람이 점심을 먹을 때 폭도의 탐정이라 칭하는 자 3명이 와서 거주와 성명을 심문하였으므로 거짓으로 전라도 화순에 사는 사람인데 상용(商用)으로 부산에 갔다가 지금은 귀향하는 도중이라 대답하니 그렇다면 통행에 지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동 24일 마산포에서는 며칠 전 진주에서 폭도 40여 명이 와서 부호의 집을 침범하여 금은을 약탈해 갔으므로 그곳 인민은 모두 그 폭도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동 25일 진주부 관하의 어느 촌락에서 이 사람이 들은 바에 따르면, 전날 밤 관병(官兵) 500명이 진주부에 와서 일단 척후 2명을 보내어 성벽에 올라가 폭도의 동정을 정찰하게 하니 성안은 적적하고 소리가 나지 않으므로 선진(先陣) 200명은 곧바로 성벽을 파괴하고 성안을 향해 발포했다고 합니다. 당시 성안에 있던 노 대장 부자와 폭도 약간 명은 남문 밖으로 도주하였고, 수백 명의 인민은 그 포성에 놀라 성밖에 있는 강변으로 달아나 간신히 3척의 도선(渡船)에 올라타 막 배를 출발시키려 할 때 관병이 강변까지 쫓아와서 폭도 대장이 저 배에 있다고 말하자마자 그 배를 향해 발포하니 배에 타고 있던 인민 등은 탄환을 피하기 위해 서로 놀라 움직이니 마침내 3척의 도선은 전복되고 인민은 모두 익사했다고 합니다. 또 관병은 경병(京兵) 500, 대구병 200, 도합 700명이었다고도 합니다. 동 29일 김해군 관하 삼거리(三巨里)에서는 서 대장이 500명의 군병을 이끌고 삼가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관병이 의성을 함락하고 성안을 불 태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기가 크게 꺾여 마침내 폭도들은 서로 의논한 끝에 자신들이 서 대장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동 30일 이 한인은 무사히 부산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또 진주에서 이곳 부산항으로 돌아온 한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사람은 경성에서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난 3월 19일 경상도 함양군을 지날 때 폭도에게 붙잡혀 진주의 본진으로 호송되어 그곳의 옥에 11일 동안 있다가 동 30일에 이르러 갖가지 신문을 받고 마침내 방면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진주에 있는 폭도의 여러 대장은 노 대장 및 정 대장 등으로 당시 관병이 대거 진주를 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 여러 장수를 불러 도주 명령을 전하고 4월 12일까지 모두 병기와 양식 등을 짊어지고 삼가 지방으로 퇴각하였습니다. 다만 노 대장만이 겨우 5, 60명의 병졸을 이끌고 진주에 머물러 진을 치고 관병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병이 진주를 점령할 때 성안에는 겨우 노 대장과 약간의 군졸만 있었을 뿐인데 저들은 재빨리 도주하였고 당시 관병에게 살상된 자 대부분은 양민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진주의 폭도는 관병이 토벌하러 오는 것을 알고 잠시 자취를 감춘 것에 지나지 않고 관병이 진주를 떠나자 폭도는 다시 모여들 것은 필연적인 일이 아닌가 합니다. 동 5월 7일 재 부산 사카타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충청도 가흥 통신소에서 이곳 부산항 통신부로 보낸 보고에 따르면, 경기도 양지(陽智) 현리(縣吏)는 동 현을 보호하기 위해 미리 조선 정부로부터 한병(韓兵) 30명을 빌려왔는데 지난 달 20일 폭도 수백 명이 습격해 오니 한병은 매우 급히 무기와 피복을 버리고 도주했으며 폭도는 그 버리고 간 물건을 수습하여 그것을 착용하고 동 현 ‘부기’ 시장을 습격하여 제멋대로 물품을 약탈하여 죽산현(竹山縣)을 향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죽산현에서는 폭도 수령 4명을 잡아 일본병 또는 한병이 오는 것을 만나 크게 기뻐하였는데, 그러자마자 가장한 폭도는 갑자기 그 현의 촌락을 공격하고 군수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이 낭패하여 도주하는 틈을 타 수령 4명을 구하고 죽산을 모두 불태우고 ‘무키요쿠’ 방위로 향하였습니다. 그 후 참령(參領) ‘최기련’은 제천의 폭도를 격퇴할 목적으로 동 26일 부하 300명을 거느리고 충주 부근에 이르고, 또 충주 관찰사는 선유사로서 원주 및 제천을 향해 출발했다고 합니다. 또 이 달 1일 전선(電線) 감시를 겸하여 하물 호위를 하기 위해 하사 이하 10명이 가흥을 출발하였다가 하담(河潭)의 남방에서 폭도 약 200명의 습격을 받고 방어 전투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가흥에 있는 미야케[三宅] 대위는 그 총성을 듣고 곧바로 헌병 12명과 보병 14명을 이끌고 급히 가서 응원하였고, 동시에 충주발 전선 감시 헌병 및 보병이 이에 합세하여 1시간 반 동안 전투하여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폭도는 ‘고료’ 방면으로 패주하였는데 사상자는 상세하지 않고 우리 병사는 무사하다는 보고입니다. 이처럼 충주 부근에서는 아직도 초적(草賊)의 출몰이 여간 아닙니다. 우리 전신선(電信線)과 같은 것은 수리하면 따라서 또 절단하는 상태로, 형세가 매우 평온하지 않지만 이곳 부산항 부근에 이르면 앞서 보고한 바와 같이 진주 폭도가 패주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 다시 쳐들어올 기미도 없고 일단 평온한 상태로서 거류지 내외의 인민은 약간 안도하는 듯합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106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 9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6-06-04 발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메이지29년(1896) 6월 4일 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앞 사이온지[西園寺] 외무대신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에 관한 전신(前信) 이후 재 한국 각 영사로부터 보내온 보고의 개요를 아래에 통보합니다. 1. 29년(1896) 5월 9일 재 인천 하기와라[萩原]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앞서 평양 지방의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출장 명령을 받은 신조[新庄]?야마구치[山口] 영사관 두 서기생이 이 달 8일 인천에 돌아온 다음 복명한 바에 따르면, 동 관(官) 등은 평양에 가는 도중 남포 및 보산(保山) 등에 잠시 들렀는데 그 지방의 인심이 매우 평온하고 인민은 일반적으로 오로지 농사에만 힘써 한가한 틈이 없는 듯했다고 합니다. 동 관 등이 평양에 도착한 후 곧바로 관찰사 정경원(鄭敬源)과 참서관 최석민(崔錫敏)을 방문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일행의 도착을 기뻐하며 평양 지방은 대체로 평온하다고 말하고 그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그 지방은 지난 3월 13일 강서군에 토비(土匪)가 일어나 삼화(三和)?함종(咸從)?증산(甑山)?용강(龍岡) 등을 소란하게 하였는데 이는 해주 지방에서 들어온 비류(匪類)가 선동하고 협박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진위대(鎭衛隊)가 그곳에 이르자마자 금세 소문을 듣고 도망친 이래 다시 봉기할 조짐은 없다고 합니다. 또 4월 24일 은산(殷山)(평양에서 북쪽으로 12리 떨어진 곳) 지방에서 금광 공부(工夫) 등이 무리를 지어 그 군(郡)의 무기를 약탈하였는데 그 지방의 마을 사람들이 집합하여 이를 몰아내었으므로 폭도는 양덕(陽德) 지방에 이르러 무기를 버리고 함경도 지방으로 도주하여 완전히 평온해졌다고 합니다.이와 같이 이곳은 매우 평온하며 부근 지방도 역시 불온한 기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또한 강서의 비도는 일단 진위대에게 쫓기고 나서부터 주민들의 생각은 동 진위대에 중점을 두는 듯하며 따라서 평양을 안거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다른 지방에서 성안으로 이주해오는 자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1. 동 5월 14일 재 부산 아키즈키[秋月] 일등영사의 보고 앞서 이 지방 연해를 시찰하기 위해 이곳 부산항 경비함 도리우미호[鳥海號]에 편승하여 파견한 순사 이소무라 다케쓰네[磯村武經]가 오늘 영사관에 돌아온 다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마산포?거제도?삼천포?통영?중앙항의 각 연해 지방에 상륙하여 조사하였는데, 현재 모두 폭도의 우려는 없고 상황(商況)도 점차 회복하는 상태이며 우리 어선은 무사히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1. 동 5월 18일 재 경성 고무라[小村] 특명전권공사의 보고 조선 내지가 불온하기 때문에 앞서 우리 행상에게 철수를 명령한 이래 내지로 가는 행상은 대체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작금에 이르러 평양 및 개성 지방은 차차로 평온을 회복하는 상태이므로 경성 영사관에서 신조[新庄] 서기생과 인천 영사관에서 야마구치[山口] 서기생을 파견하여 그곳의 실황을 관찰하게 했는데 그 지방은 이제 평온을 회복했다고 보고하였으므로 앞에 말한 두 영사로부터 그 지방으로 가는 행상을 허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내지 행상 철수건에 대해서는 최초 조선 정부로부터 의견을 낸 점도 있으므로 동 정부와 협의한 다음 평양 및 개성 관찰사에게 우리 행상자에 대해 충분한 보호를 해줄 것을 특별히 훈령하게 하고 우선 이 지방에 한하여 허가하기로 합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107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전수(電受) 제143호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7-04-10 수신일: 1897-04-10 발신자: 가토 변리공사 수신자: 가토 변리공사 수신주소: 경성 메이지 30년(1897) 4월 10일 오후7시 30분 발, 오후 11시 50분 착 제41호 충청도 일부분 및 전라도에 동학당이 재흥할 조짐이 있습니다. 강원도 금성(金城) 외 세 곳에서 폭도가 횡행하며 약탈하며, 함경도 삼수(三水)?갑산(甲山) 지방에 한 떼의 마적(馬賊)이 배회하고 삼수 군수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이 나라 정부는 각도에 주재하는 대장(隊長)에게 포획 및 진무(鎭撫)를 명령하였습니다. 영국 43 프랑스 47 독일 55 이탈리아 39 오스트리아 47 러시아 39 미국 54 청국 39

    108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7-04-12 발신자: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청국 각 공사 메이지30년(1897) 4월 12일 재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청국 각 공사 앞(각통) 오쿠마[大?] 외무대신 조선국 충청도의 일부분, 특히 전라도에서 동학당이 재흥할 조짐이 있습니다. 강원도 금성(金城) 외 3곳에서 폭도가 횡행하고 약탈을 하며, 또 함경도 삼수?갑산 지방에는 한 무리의 마적이 배회하며 삼수 군수를 살해하였으므로 조선 정부는 각 도에 주재하는 대장에게 그들을 포획과, 특히 진무(鎭撫)를 명령하였다는 것은 이 달 10일발 재 경성 가토 변리공사로부터 전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4월 1일자 재 원산 니구치 영사가 올린 보고에 따르면, 지난 달 22일 삼수군에 폭도가 봉기하여 동 군수는 살해되었고, 갑산 군수는 북청 읍내로 도망쳐 왔으므로, 북청군 주재 한병 100명은 동 28일 아침 삼수군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이 폭도는 작년 봄 함흥부에서 쫓겨난 이른바 의병이라 칭하는 비도(匪徒)의 잔당으로서 중국인 15명 정도가 이에 가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세한 보고가 올라오는 대로 통보할 것입니다만 이상으로 우선 알려드립니다. 경구(敬具)

    109 한국 각지 폭동 잡건

    공(公) 제 47호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7-04-01 발신주소: 원산 발신자: 외무차관 고무라 도시타로[小村壽太郞] 수신자: 외무차관 고무라 도시타로[小村壽太郞] 현재 북관(北關)의 북청군 관하 신창(新昌)에서 행상 중인 우리나라 상인이 보낸 서신에 따르면, 지난 달 22일 삼수군에 폭도가 봉기하여 동 군수는 폭도에게 살해되었고 갑산 군수는 북청 읍내로 도망쳐 왔으므로 북청군 주재 한병 100명은 동 28일 아침 삼수군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이 폭도 등은 작년 봄 함흥부에서 쫓겨난 비도(匪徒)의 잔당(이른바 의병이라 칭하는 무리)으로서 중국인 15명 정도가 이에 가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우선 보고드립니다. 메이지30년(1897) 4월 1일 재 원산 이등영사 니구치 요시히사[二口美久] ? 외무차관 고무라 도시타로[小村壽太郞] 님

    110 한국 각지 폭동 잡건

    공(公) 제 54호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7-04-12 발신주소: 원산 발신자: 외무차관 고무라 도시타로[小村壽太郞] 수신자: 외무차관 고무라 도시타로[小村壽太郞] 함경도 삼수군 폭도 상황에 관한 보고 본도(本道) 삼수군에 폭도가 봉기하여 동 군수가 해를 입은 건에 대해 전번 소식 공(公) 제47호로써 보고하였는데, 그 후 이곳 원산항 감리(監理)의 이야기와, 신창(新昌)에 있는 우리나라 상인이 다시 보고한 바에 따르면, 폭도 등은 이미 퇴산했다고 합니다. 개요는 별지(別紙)와 같사오니 일람(一覽)하십시오.메이지30년(1897) 4월 12일재 원산 이등영사 니구치 요시히사[二口美久] ?외무차관 고무라 도시타로[小村壽太郞] 님 [별지] 함경도 삼수군에서 일어난 폭도 상황 1. 폭도의 수령은 강원도 사람 최 참봉(參奉) 문한(文汗)이라 하며 지난 해 봄 함흥부에서 주사(主事) 2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자라고 합니다. 1. 삼수 군수가 살해된 것은 음력 2월 22일의 일이며, 폭도는 일본 은화(銀貨) 100여 엔(圓)?마제은(馬蹄銀) 2개?사금 6포(包)?한전(韓錢) 50관문(貫文)을 강탈하여 다음 날 갑산군을 향해 출발했다고 합니다. 1. 삼수 군수를 살해한 폭도는 오직 조선인으로써 그 수는 30명에 지나지 않지만 갑산을 향해 진행하는 도중 중국인 24명의 한 무리와 25명의 한 무리가 전후하여 왔고, 갑산에 도착했을 때는 조선인도 차츰차츰 증가하여 그 수가 100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1. 갑산 군수는 삼수 군수의 피해 보고를 접하자마자 곧바로 북청으로 달아났으므로 폭도들이 군아(郡衙)에 몰려갔지만 군수가 없는 것을 알고 촌장에게 명하여 한전 30관문을 징발하고 음력 3월 1일 새벽녘에 단천(端川)으로 통하는 샛길을 거쳐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2일 갑산 군수는 북청의 한병(韓兵) 100명을 인솔하고 귀임(歸任)하였는데 그 날 밤 폭도들이 다시 갑산에 되돌아와서 먼저 군성(郡城)을 에워쌌습니다. 성안의 한병들은 출전할 용기가 없어 농성하며 한편으로는 급사(急使)를 북청에 보내어 한병 100명 증파해줄 것을 요청하는 중 폭도 사이에 뭔가 갈등이 생겨 마침내 싸우지 않고 해산했다고 합니다. 1. 폭도 해산의 원인은 원래 수령 최 참봉은 무뢰한 중국인을 임금을 주고 고용한 것인데 이 임전(賃錢)이 잘못되어 중국인은 모두 철수해 가버렸으므로 그 밖의 조선인도 제각기 실망하여 해산한 것이라 합니다. 1. 최 참봉은 한병에게 잡혀 살해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