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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91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1789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5-29 참 1발 제 14호 메이지(明治) 44년 5월 29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평안남도(平安南道) 동창(東倉) 헌병 분견소장(分遣所長)인 구마모토(熊本) 오장(伍長)은 5월 14일에 안주(安州) 헌병 분대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동창(東倉) 서쪽 3리(뇌봉면(雷封面) 팔하리(八下里))에서 투숙중 그날 밤 오전 2시 적 7명이 밀어닥쳐 이들과 격투한 끝에 즉사했음.

    92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1802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5-27 메이지(明治) 44년 5월 27일 헌기(憲機) 제 1003호 폭도가 극약을 휴대하고 집합한다는 풍설(風說)의 건 5월 27일 경성(鏡城) 헌병대장 전보 보고 전문(電文) 번역 우물에 넣을 극약을 휴대하고 우리 수비대를 전멸시킬 목적으로 폭도 40명이 신아산(新阿山) 대안에 집합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흥(慶興) 분대에 명하여 정찰하게 하였으나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경계를 강화해 두었음. 수비대에는 이미 통보해 두었음.이상 본 건을 보고(報告) 통첩한 곳 육군대신 외무대신 참모차장 헌병사령관 총독 정무총감 총무부장관 외사국장 군사령관 남북부수비사령관 각 헌병대장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참모장 안동(安東)영사 관동헌병대장

    93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1895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6-05 참 1발 제 15호 메이지(明治) 44년 6월 5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적도와의 충돌 사항은 다음과 같음.

    94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2070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6-19 참 1발 제 16호 메이지(明治) 44년 6월 19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적도와의 충돌 사항은 다음과 같음.

    95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2178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6-26 참 1발 제 17호 메이지(明治) 44년 6월 26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1. 임시 조선(朝鮮) 파견 보병 제 1연대 제 10중대(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榮川) 수비대)장 무나카타(宗片) 대위(大尉) 이하 13명은 헌병 1명, 보조원 2명과 협력하여 6월 14일에 경상북도(慶尙北道) 순흥군(順興郡) 순흥(順興)의 북쪽 약 3리에 위치한 연화동(蓮花洞)에서 적괴(賊魁) 김상태(金相泰)를 야습(夜襲)하여 그를 체포했음. 김(金)은 종래부터 소백산(小白山) 부근을 근거지로 삼고 경상북도(慶尙北道), 강원도(江原道), 충청북도(忠淸北道)의 3도에 걸쳐 발호하여 부하 약 140명을 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지닌 적괴로서 지난 가을에 토벌을 실시했을 때에는 도망하여 소재를 감춰 버렸던 자임.

    96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수 제 2529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11-07-31 참 1발 제 20호 메이지(明治) 44년 7월 31일 조선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메이지(明治) 44년 6월 21일부터 동년 7월 25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수색 및 검거 등에 의해 폭도에게 입힌 손해는 다음의 표와 같음.

    97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 제50호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905-10-05 발신자: 외무대신 임시대리 문부대신 후작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수신자: 외무대신 임시대리 문부대신 후작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지난 날 이래 전보로써 아뢴 대로 이 나라 평안도 상원군에서 지난 달 10일 저녁에 폭도가 봉기하였는데 그 중 40명 정도가 외국총을 가지고 군수의 관택 및 민가에 난입하여 무기・탄약・한전(韓錢) 등을 약탈하고 같은 곳 동남 약 5리 떨어진 곳에서 둔집하고 있다는 내용의 전보가 남부병참감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곧 탐방을 해본 바 이 적도의 괴수는 김교원(金喬元)글자는 확실하지 않음 이라는 자로서 원래 상원 군수 아래에 따르던 사람이며, 봉기의 주된 의도는 대체로 국정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 부하의 실수는 187명이라고 합니다. 14일에 이르러 우리 군이 소굴을 토벌하는 것을 염려하고 황해도 해주를 습격하여 약탈할 목적으로 총기와 재물을 소에 싣고 처자를 데리고 황해도 수안(遂安) 방향으로 달아났습니다. 이후 재령(載寧)과 은파(銀波) 사이에 있는 장수(長壽) 산성으로 옮기고 연도에 가서 작년 겨울 일찍이 동학당에 가담했던 자들을 불러모아서 점차 창궐하려는 기세가 있었지만, 지난 달 30일 해주 관병이 이를 포위하여 불을 놓았기 때문에 다시 평안도로 향해 달아났다고 합니다. 또한 향후 이 적도의 거동에 대해서는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고 보고할 것입니다. 이 적도가 살포한 격문이라는 것을 입수했으므로 아래에 초록을 첨부하고 앞에서 밝힌 상황을 일단 보고합니다. 메이지 38년(1905) 10월 5일 특명전권공사 자작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외무대신 임시대리 문부대신 후작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98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5호 조선국 각 지방에서 일어난 폭도 봉기건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6-01-25 수신자: 재 영국, 프랑스, 러시아, 청국, 미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네덜란드 공사 메이지29년(1896) 1월 25일 재 영국, 프랑스, 러시아, 청국, 미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네덜란드 공사 앞 (각통)사이온지[西園寺] 외무대신 대리 조선국 정부가 지난 달 30일의 관보로써 국민의 단발을 유도하는 조칙을 발포하였다는 것은 이 달 2일 고무라[小村] 변리공사로부터 전보가 있었습니다. 지난 21일 강원도 원주에서 이 단발령으로 인해 폭도가 일어나 군아(郡衙)를 습격하여 군수는 도망쳤습니다. 또 충청도 홍주에서는 전 목사(牧使)가 의병을 일으켜 공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접했습니다. 이에 따라 신속하게 출병하여 이를 진압해야 한다는 취지를 이 나라 군부대신에게 권고하니 이 나라 정부는 칙사를 원주에, 친위대 1중대를 공주에 파견하였습니다. 경상도 안동 지방에서는 인민이 단발을 거부하고 여러 곳에 집합하여 볼온한 조짐이 있지만 아직 폭거에 이르지 않았다는 소식은 고무라 공사로부터 전보가 있었습니다. 강원도 춘천부에서는 폭도가 일어나 관찰사?경무관 등을 몰아내고 관청을 빼앗았다는 소식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부가 신임 관찰사의 부임에 즈음하여 병사를 시켜 단발을 강제해야한다는 망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민영준(閔泳駿)과 그 밖의 민씨 일족은 이 폭도와 관계없으며, 오히려 이 사람은 이를 진정시키는 데에 진력하고 총리대신 김굉집(金宏集)을 방문하여 폭도에 대한 설유 해산의 방법을 설득하니 정부도 그 설을 받아들여 급히 신 관찰사를 부임하게 하여 설유할 예정이므로 아마 병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진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강원도 원주의 폭도는 과반수가 해산했으나 그 일부 대략 400명이 충청도 제천으로 향했기 때문에 정부는 내일 1중대를 파견하여 원주?제천을 거치고, 겸하여 충청도에서 일어난 시위 때문에 행군 중인 1중대와 충주 부근에서 만나 경상도 안동 방면에서 일어난 폭도의 세력을 살피게 하고 과연 그 세력이 우세할 때는 2중대를 합쳐 안동으로 향하게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중 1중대만 안동까지 행군하게 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의 폭도는 물론 앞으로 이러한 폭도를 진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오로지 자국의 병력을 사용하고 타국의 병력을 빌리지 않도록 이 나라 정부에 권고한 바 당국에서도 이 방침을 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지방 인민에게는 지난번에 발포한 단발령은 인민에게 단발을 강제하는 것이라 오해를 삼으로써 이러한 폭도를 유발하는 데에 이르렀으므로 이번 기회에 정부는 칙유를 청하여 단발을 강제할 뜻이 없음을 밝혀 단발을 하든 하지 않든 각자의 임의에 있음을 지방 인민에게 알릴 방책을 취하는 것이 당장의 급선무라는 취지를 김굉집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김도 이에 동의하였으므로 이 나라 정부는 아마 가까운 시일 내에 이런 칙유 또는 훈령을 발표할 것이라는 내용을 지난 23일 고무라 공사가 전보로 보고하였습니다. 이 개요는 어제 전보로 통지해 두었지만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 여기에 상세하게 통첩합니다. 경구(敬具)

    99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 3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6-03-31 발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메이지29년(1896) 3월 31일 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앞 외무대신 임시대리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에 관한 전신(前信) 중 누락된 재(在) 한국 각 영사의 보고 및 그 후의 보고 개요를 아래에 통보합니다. 29년(1896) 2월 21일 재(在) 부산 가토[加藤] 일등영사의 보고 가흥에 있는 다나카[田中] 대위가 이곳 이즈노[伊津野] 소좌에게 보낸 수 차례의 전보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주의 폭도는 지난 17일 충주를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민가에 불을 질러 동 부(府)의 반 이상을 다 태웠으며, 다른 한 무리는 세력을 모아 가흥을 습격하려는 기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1일 폭도를 진압하기 위해 이곳을 출발한 다나카 대위가 거느리는 수비병 1중대는 17일 해질 무렵 충주 부근에 이르렀는데 동 부는 이미 폭도로 인해 함락되었기 때문에 다음 날 18일 새벽녘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정오 무렵에 이르렀지만 폭도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이를 사수하며 교묘하게 우리 군을 저격하였으므로 쉽게 함락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뒤쪽에 해당하는 가흥 부근에 많은 무리의 폭도들이 습격해오려는 조짐이 있어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군사를 수습하여 가흥으로 퇴각했습니다. 충주를 막아서 지키는 폭도의 수는 약 1천 명으로 아주 좋은 총기를 휴대하고 대포 4문(門)을 가지고 있으며 보초를 1리 밖에 내보내어 이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동 2월 24일 재 경성 우치다[內田] 일등영사의 보고 이 달 23일 마포에서 마포의 한인과 용산 부근의 한인 사이에 편전(偏戰)(인민이 군집하여 돌을 던지며 서로 싸우는 것)을 하고 있을 때 마포에 거류하는 야마구치[山口] 현 평민 다키가와 쥬이쓰[瀧川籌逸]라는 자가 속에 칼을 장치한 지팡이를 가지고 구경하러 갔다가 마포 사람들 편에 들어갔으므로 용산 사람들이 분개하여 머리와 그 밖의 신체 각 부분에 돌을 내던져 부상을 입히고 또 그 지팡이를 빼앗아 머리 부분을 베어 상처를 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이 영사관에서는 나카니시[中西] 경부(警部)와 순사 14명을 현장에 급히 내보냈고 또 이 나라 경무청에서도 순검 15명을 파견하여 엄중하게 가해자를 수색하게 하여 혐의 있는 자 10명을 구인(拘引)하여 현재 취조 중입니다. 동 2월 25일 재 경성 우치다 일등영사의 보고 이 달 21일 무렵 경기도 용인 부근 금산령(金山領)에서 우리나라 사람 2명이 한인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은 우선 전보가 와 있었는데 어제 수원 지방에서부터 폭민의 난을 피해 이곳에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의 말에 따르면 용인 부근에서 우리나라 사람 6명이 살해되었다고 하므로, 앞에서 말한 2명 외에 우리나라 사람 4명이 또 살해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년 2월 25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이 달 23일자로 대구 후지타[藤田] 대위가 이 곳 이즈노 소좌에게 보낸 전보에 따르면, 그곳에서 서북방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진주부에서 폭도가 봉기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천 명에 달하며 그들은 순검을 죽이고 단발한 자는 눈에 띄는 대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현재 동 부(府) 부근의 인민을 선동하고 있는데 동 부 관찰사는 있는 곳이 분명하지 않고 경무관은 대구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오늘(2월 25일) 대구에서 보낸 전보에 따르면, 오늘 대구의 한국 병사 60명과 순검 5명이 진무(鎭撫)하기 위해 진주를 향해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밖에 성주, 통영 등 낙동강 이서(以西)의 각지에서도 일반적으로 봉기의 조짐이 있습니다.이 달 22일 낙동에서 이 곳 수비대장 이즈노 소좌에게 보낸 전보에 따르면, 여전히 동 부에 주재하고 있던 친위대는 군사를 되돌리라는 이 나라 정부의 명령을 접하고 곧바로 철수하였으므로 다시 폭도가 봉기하여 인민을 괴롭히고 양식을 약탈하며 온갖 노략질을 저질렀고, 게다가 강원도 지방에서 와서 모인 자가 더욱 많고 총기를 휴대한 자가 다수 있다고 합니다. 동 2월 26일 재 경성 우치다 일등영사의 보고 이 달 18일 경기도 고양군 공릉장(恭陵場)에서 나가사키[長崎] 현 평민 이데 쓰네지로[井出常二郞], 동 하야시다 데이지[林田貞二], 후쿠오카[福岡] 현 평민 사카미 게이자부로[酒見慶三郞] 세 사람이 한인에게 폭행을 당한 사건(도우 상업(屠牛商業) 다가와 사에몬[田川佐衛門]의 범인은 전신(前信)에 게재한 2월 20일자 우치다 영사의 보고 참조)을 취조하기 위해 파견한 순사의 복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지방에서 가해자의 혐의가 있는 조선인 이용기(李龍起)?이점백(李点白)?이종손(李鍾孫)?강상남(姜上男)의 4명을 구인하여 신문하였더니, 이용기가 이데 외 2명이 공릉장에서 산 생우(生牛) 6두(頭)에 대한 구전을 받아내려고 무리하게 청하였는데 이데가 이에 응하지 않자 이에 노하여 이 사람을 구타했다고 합니다. 그가 도망간 뒤에 하야시다와 사카미에 대해 동향인 아무개와 함께 우리에게 단발을 하게 한 것도 이들 일본인의 짓이니 때려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고을 사람 다수를 불러모아 구타하여 부상을 입힌 다음 칼을 채워 구금하고 다음날을 기다려 살해하려고 결심하였는데 그 날 밤 두 사람이 도망쳤으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종손?이점백?강상남 세 사람은 이용기의 친동생인 이운집(李雲執)이 우리형을 죽인 일본인이라고 외치며 이데를 쫓아가 우란다이누라는 곳에 이르렀으므로 그 마을 사람 몇 명과 함께 이를 사로잡아 돌과 곤봉으로 마구 때려 학살했다고 합니다. 동 2월 29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오늘 이곳 이즈노 소좌에게 도착한 전보에 따르면, 지난 24일 여주 부근 이천에 주재하는 우리 수비병 20명이 그곳의 한병(韓兵) 40명을 만나 여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므로 동 부(府)의 폭도는 장호원 남쪽으로 패주했다고 합니다. 장호원 주재 우리 수비병은 24일 오후 폭도가 갑작스레 쳐들어와서 포격하므로 밤새 방어하다가 다음날 25일 정오 무렵에 이르러 일제히 이를 돌파하여 폭도를 격퇴하니 폭도의 다수는 원주 남쪽으로 패주했다고 합니다. 동 3월 1일 재 원산 니구치[二口] 이등영사의 보고 원산에 기거하는 중매상 야마구치[山口] 현 평민 요시자키 유타로[吉崎祐太郞]라는 자가 한전(韓錢)과 그 밖의 물품 등 약 1천500 원(圓)어치 정도를 휴대하고 함북 지방에서 행상하고 있었는데 2월 26일 함흥부에서 폭민의 박해를 만나 동 성밖 3리 떨어진 서포(西浦)라고 하는 곳에서 마침내 횡살(橫殺)당했다는 급보를 접했습니다. 이것은 한인으로부터 한인에게 전해진 말로써 사실을 판명할 수 없지만 조속히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원산항 지사부(知事府)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원산항 경무서에서 경비를 청구하기 위해 함흥부에 파견된 순검 이용필(李龍弼)이라는 자가 그곳에서 폭민에게 횡살당했고, 또한 동 부(府) 관찰서리(觀察署理)도 마찬가지로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동 3월 2일 재 경성 우치다 일등영사의 보고 평양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철수를 잠시 보류한 일은 앞서 보고하였는데, 지난 달 24일 그곳에 출장 중인 히라하라[平原] 경부의 보고에 따르면, 그 후 그곳의 상황이 일변하여 그곳 부근의 이천(伊川)?곡산(谷山)?수안(遂安)?평산(平山)?서흥(瑞興)에는 황해산포당(黃海山砲黨)이라 칭하는 폭도가 100명 내지 200명 정도씩 집합하여 서로 기맥을 통하며 이천을 근거지로 하고 이곳에는 400명 정도의 폭도가 군집해 있다고 합니다. 또 곡산 부근에서 폭도 백 수십 명에게 습격을 받고, 23일 평양으로 돌아온 어느 우리나라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폭도의 목적은 전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위해를 가하는 데에 있다고 여겨지며, 구동?성천(成川)?상원(祥原)?삼등(三登)?자산(慈山)?은산(殷山)?삼화(三和)?덕천(德川) 지방에 격문을 가지고 가서 흉도(兇徒)를 불러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평양 부근의 형세가 이처럼 불온하므로 그곳 지방관이 순검을 파견하여 탐정과 진무에 진력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곳 관찰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진무할 가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 경부 등은 우리나라 부녀자, 병자, 또는 상인으로 한전?은화 등을 많이 저장하고 있는 자는 위해를 당할 우려가 절박하기 때문에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하여 기선 1척을 진남포까지 회송하기로 조처했다고 합니다. 경기도 용인 부근 금산령에서 지난 달 21일 무렵 우리나라 사람 2명이 살해된 것과 수원 지방에서 위의 2명 외에 우리나라 사람 4명이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접했으나, 당시 그 지방은 불온하고 또한 우리 영사관 순사도 인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잠시 출장을 보류하였습니다. 그 후 탐정을 하기 위해 그 지방에 파견된 한인의 보고에 따르면, 용인 부근에서 살해된 것은 그곳에 거류하는 이와테[岩手] 현 평민 엔도 마쓰고로[遠藤松五郞]와 그의 처가 폭도에게 살해된 것이며, 수원 지방에서 우리나라 사람 4명이 살해되었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와전입니다.경기도 진위(振威)에서 우리나라 사람 1명이 살해되었다는 보고에 대해 조사해보았더니 이것은 그곳에 재류하는 후쿠오카[福岡] 현 평민 곤도 에이조[近藤榮造]라는 자로 추찰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건을 탐정하기 위해 한인 1명을 출장보냈는데 그가 복명한 바에 따르면, 앞에서 말한 마을 이외에서 일본인 1명이 총살되었음이 확실하지만 그 지방은 현재 적도(賊徒)가 다수 군집해 있어서 충분히 시찰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곧 순사를 파견하여 상세하게 조사하게 할 예정입니다. 동 3월 6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진주부(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곳)에서 봉기한 폭도는 진해?함안 지방에 둔집하여 함안 군수를 살해하고, 이곳 부산항으로 수곡(輸穀)하는 한선(韓船)을 차압했으며, 또 사천(泗川) 주변에서 행상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 2, 3명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소문이 자주 들리는 등 그 기세가 몹시 창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폭도는 점차 북진하여 이곳으로 다가오는 모양입니다. 지난 3일을 기하여 마산포(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16리 떨어진 곳)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 후의 상황은 아직 상세하지 않습니다. 또 창원, 김해(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7리 떨어진 곳) 등도 불온한 기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 진주부 관찰사는 대구로 도주하여 부재중이므로 동래부 관찰사에게 권고하여 현재 동래부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그 정황을 시찰하는 한편 특별히 조처하여 설유하게 하였습니다. 동 3월 9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3월 6일 귀항(歸港)한 일한무역상사(日韓貿易商社) 사장 엔도[遠藤] 아무개의 조난 전말을 들으니, 이 사람은 상용(商用)으로 진주부 관내 팔장포(八丈浦)에 가서 그곳 객주 아무개 집에 투숙하고 있었는데 지난 달 24일 오후 10시 무렵에 객주의 친척이 진주부에서 달려와서 적도가 쳐들어올 기미가 있으므로 급히 피난하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곧장 통변(通辯) 한인과 함께 그곳에서 2리 정도 떨어진 어느 산 속에 숨어있었습니다. 다음날 25일 밤이 되자 이 한인을 시켜 상황을 시찰하게 하였는데 좀처럼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므로 다른 방향을 택하여 어느 작은 포구에 이르러 한인의 배를 빌려 타고 26일 오후 4시에 통영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통변을 다시 팔장포에 보냈더니 객주 부자는 적도에게 잡히고 두고 온 물품은 모두 빼앗아갔다고 합니다. 고성 군수도 26일 통영까지 피해왔는데 적도의 추적이 심하여 끝내 적도에게 잡혔다고 합니다. 적도는 일본인을 살육하는 자에게는 상을 준다는 말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합니다.적도는 전 통제사(統制使)에게 일치 단결하여 동래부(즉 부산을 가리킴)를 습격하자고 말하였으나 전 통제사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100명의 병사와 무기를 대여하라고 다시 말했지만 역시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 3월 11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보고 여주?장호원 두 곳의 폭도는 우리 수비병에게 격퇴되었습니다. 폭도는 현재 충주부를 근거지로 삼아 이를 사수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 달 6일 충주 다나카[田中] 대위가 이곳으로 보낸 전보에 따르면, 이 달 5일 오후 11시 가흥 부근의 우리 수비병은 기세를 돋우어 충주부를 공격하여 마침내 이를 함락시켰고, 이 전투에서 폭도의 사망자는 50명, 우리 군은 하사 이하 9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폭도는 다량의 탄환?화약?양식?그 밖에 소총?창칼류를 버리고 단양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현재 가흥 부근은 다시 조용해졌으므로 우리 군은 더 나아가 송파진(松波鎭)?곤지암(昆地岩) 사이에 둔재한 광주 부근의 폭도를 격퇴하기 위해 지난 9일 가흥을 출발하였습니다. 동 3월 14일 재 인천 하기하라[萩原] 영사관 사무대리의 전보 평양 재류민 철수를 위해 어용선(御用船) 오타루호[小樽丸]를 파견하기로 하였으므로 경성과 이곳 영사관에서 경부(警部)와 순사를 어제 오후 3시에 출발시켰습니다. 동 3월 15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전보 나가사키 현 유키타구미[行田組] 기계선 2척, 소형선 1척의 승무원 도합 24명이 이곳에서 대략 80리 떨어진 강원도 치쿠헨 만에서 이 달 13일 오후 5시 무렵 오두막을 가설하고 있었는데 폭도 300명이 쳐들어와서 총포 및 창으로 그 중 15명을 살해하였습니다. 나머지 9명은 간신히 앞 바다에 매어둔 기계선까지 헤엄쳐 가서 이곳으로 도망쳐 왔으므로 곧 이를 급히 보고합니다. 동 3월 23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의 전보 평양 재류민 철수를 위해 지난 10일 출장간 일행은 유빙(流氷) 때문에 일단 되돌아왔으므로 오늘 출항하는 게이자이호[經濟號]에 다시 이곳 영사관에서 경부 1명, 순사 10명을 파견합니다. 동 3월 24일 동 영사관 사무대리의 전보 일전의 상황으로는 이 나라 폭도도 점차 진정될 것 같은 기색이었는데, 요즈음은 그 기세가 다시 솟아올라 각지 도처에서 몹시 창궐하므로 그곳 재류민 및 행상인은 모두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 폭도는 일본인을 매우 적시(敵視)하여 지방에서 축적한 물품을 탈취할 뿐 아니라 혹은 그 물품을 이곳 항구로 운반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소행을 함으로써 이곳 항구의 상업은 날로 쇠퇴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조선 정부가 한 일은 너무 완만할 뿐 아니라 각지로 향한 관군은 도처에서 계속 패하여 도저히 진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태로 경과하면 이곳 인천항의 상황(商況) 회복은 바랄 수 없고 향후 이 나라에서의 우리 상권(商權)이 상실될 염려가 있습니다. 동 상(同上) 엊그제 진남포에서 기항(寄港)한 일본형 선박의 승무원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그곳에서 폭도가 봉기하여 기세가 몹시 창궐하므로 고우세이 군수와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적에게 항복하였고, 바야흐로 폭도가 평양을 치려하는 형세이어서 자기도 위험을 무릅쓰고 겨우 도망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전에 파견한 경부(警部) 일행의 안부도 마음놓을 수 없고 평양 재류민의 소식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를 탐정하기 위해 오늘 그곳으로 가는 가이류호[海龍號]에 순사 5명을 태워 파견하였습니다. 동 3월 25일 동 영사관 사무대리의 전보 이 달 5일 우리나라 사람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목포 지방에 출장 보낸 순사 일행은 군산에서 18명, 목포에서 13명을 동행하고 19일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로써 그 지방은 대체로 철수가 끝났습니다. 동 상(同上) 광을호(廣乙號) 철수를 위해 카로린 만에 체재하는 일본인 7명은 폭민에게 습격을 당해 그 중 4명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이곳 항구로 도망쳐 왔고 다른 3명은 살해되었다는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얕은 여울이기 때문에 어용선이 회항하기 어렵고 또한 재항(在港) 중인 자도 없어서 이곳 영사관에서는 작은 증기선 1척을 빌려서 어용선으로 삼아 사체 탐색과 유류(遺留) 재산 보호를 위해 어제 밤 이곳 영사관 소속 순사 8명, 경성영사관 출장 순사 8명, 순검 2명을 출장보냈습니다. 동 3월 26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의 전보 지난 14일 평양을 출발하여 어제 25일 이곳에 도착한 일본형 선박의 승무원이 말한 바에 따르면, 지난 12일 평양 4, 5리 이내의 지역에서 폭도가 봉기하여 평양의 인심이 평온하지 않으며, 재류민도 줄곧 맞이하러 오는 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배는 대동강을 내려오다가 도중에 경성에서 출장온 히라하라 경부 일행을 만났는데, 경부 일행은 폭도에게 살해된 일본인 1명의 사체를 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이곳 영사관에서 파견한 게이자이호는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게이자이호 및 가이류호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보고도 없으나 오늘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라 추측됩니다. 본관(本官)이 평양 친위대장 린헤이키 및 동 대(隊) 교관 이나무라[稻村] 중위에게 거류민이 철수할 때는 승선지까지 충분한 보호를 했으면 한다는 취지를 의뢰해 두었기 때문에 게이자이호 등이 도착하면 200명 가까운 재류민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 3월 28일 동 상 광을호 철수를 위해 카로린 만에 재류하던 일본인 살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출장 보낸 순사 16명은 어젯밤 무사히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피해를 입지 않았나 염려한 3명은 밤을 틈타 어선에 편승하여 일본으로 귀항한 것이 명백합니다. 무사히 내지(內地)에 도착했는지 아닌지는 곧바로 나가사키 현 지사(知事)와 부산 영사에 조회해 두겠습니다. 그들을 습격한 폭민은 농민이며, 그들이 모은 금전과 물품을 빼앗기 위해서였습니다. 폭행을 가한 혐의가 있는 한인 4명을 잡아서 돌아왔으므로 사실을 확인한 다음 관리서에 넘길 것입니다.평양에 출장간 경부 1명과 순사 15명은 철수 수속을 마쳐 재류민 대부분을 이끌고 26일 포산진(浦山鎭)을 출발하여 오늘 정오에 가이류호를 타고 무사히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경성의 히라하라 경부 일행은 남은 재류민을 이끌고 27일 이른 아침 게이자이호를 타고 만경대를 출발하여 내일 중에는 인천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로써 평양 지방의 일본인은 관민 모두 철수를 끝냈습니다. 동 3월 29일 재 부산 가토 일등영사의 전보 진주의 폭도(200명 내지 300명, 실제로는 50명이라고도 함)는 지난 28일 오전 2시 무렵 이곳 부산항에서 7리 정도 떨어진 근해(近海)를 습격하였는데 군수는 앞서 이곳으로 도망쳐 와 있었고 그 이후 거류지의 인심이 자못 동요합니다. 가능한 한 대공황을 초래하지 않도록 오로지 위무(慰撫)에 힘쓰고 관계 당국과도 협의하여 거류지 내외의 경계를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항구 내에는 우리 함대 도리우미[鳥海]와 러시아 함대 보블이 정박하고 있습니다. 동 3월 30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의 전보 평양에서 돌아온 히라하라 경부의 보고에 따르면, 나가사키 현 사람 도다 다케스케[戶田丈助]라는 자가 홍주에서 인천을 향해 대동강을 내려오는 도중 ‘안포’에서 이달 9일 폭민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히라하라는 12일 보고를 받았으므로 다음날 13일 순사 2명과 순검 5명을 데리고 현장에 출장갔지만 사체는 이미 불 속에 던져져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의 짐 속에 있던 한전(韓錢) 약간을 이 폭민에게 빼앗겼던 것입니다. 부언(附言) 2월 11일 경성 사변이래 우리나라 사람이 조선인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또는 살해당한 자가 적지 않으므로 이들 흉행자(兇行者)의 처리 방법에 대해서는 고무라[小村] 공사가 조선 정부에 엄중하게 교섭하고 있는 중이므로 이를 알려드립니다.

    100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 4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6-04-10 발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메이지29년(1896) 4월 10일 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청국 각 공사 앞 무쓰[陸奧] 외무대신 조선 각지 폭도 봉기건에 관한 전신(前信) 중 누락된 재 한국 각 영사의 보고 및 그 후의 보고 개요를 아래에 통보합니다. 29년(1896) 3월 4일 재 원산 니구치[二口] 이등영사의 보고 2월 26일 함흥부에서 야마구치 현 평민 요시자키 유타로[吉崎祐太郞]가 한인에게 살해된 건에 대해 동 부(府) 관찰사 대리가 이곳 원산항 지사(知事)에게 보낸 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같은 날 원산 순검 2명이 피복 60구(具)?사벨 60진(振)을 차 3대에 싣고 함흥부로 왔는데, 이 날은 음력 상원(上元) 가절(佳節)에 해당하여 이곳 풍습으로 아동들이 성 안팎에서 무리를 나누어 돌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둘러 승부를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그들이 성문 밖에 포진한 곳으로 위의 순검들이 진을 뚫고 차를 급히 달리니 아동들이 이를 저지하고 차 위에 실은 물건을 따져 물었으므로 순검은 곧바로 칼을 휘두르며 이들을 내쫓으면서 이 물건은 양복이며 곧 너희들의 머리를 자르고 너희에게 입힐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단발이라는 두 글자는 어리석은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혐오하는 때였으므로 일단 이 말을 듣자 분개하여 마침내 저항하며 뒤쫓아 와서 훈련당(訓練堂) 문밖에서 그 차량을 파괴하며 매우 난폭하게 굴었습니다. 이 보고를 접하자마자 관찰사 대리는 이를 제지하고자 나가서 보니 13, 4세 내지 17, 8세 아동들과 다수의 무뢰한이 포정문(布政門) 밖에 둘러 모여 차량을 파괴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가 겨우 그들을 꾸짖어 물리치고 순검 2명을 거느리고 내아(內衙)로 되돌아갔는데 밤이 되자 다시 함성이 일어나 관아 내에 돌을 던지며 단발한 순검을 때려 죽여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무도한 아동들이 관문(官門)에 돌입하였습니다. 끝내는 내아에 뛰어들어와 관방(官房)의 기물과 서류를 모두 파손하였으므로 그들의 기세를 도저히 방어할 수 없었습니다. 순검 등은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그 중 1명은 무도한 아동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아동들이 그를 박살내고 불에 태워 재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불쌍한 것은, 남문 밖에 살던 일본 약상(藥商) 요시자키 유타로[吉崎祐太郞]라는 자로서, 그는 그곳 상인들과도 친숙하게 지내며 행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사변에 대해 듣고서 몹시 두려워 도주하고자 조선인 의관을 입고 나귀를 타고 달밤에 급히 가던 중 무도한 아동들이 그의 이상한 행동을 수상쩍게 여겨 단발을 단행(斷行)한 순검이 아닌가 하고 이를 멈추게 하여 그가 단발에 나무꾼 복장을 한 자임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타살하고 불에 태웠다고 합니다. 동 3월 6일 재 인천 하기와라[萩原]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목포 지방에 인심이 약간 불온한 경향이 있어서 2월 28일 그 지방에서 입항하는 가이류호[海龍號]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온 우리나라 상인 구로카와 나오타로[黑川直太郞]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구로카와 외 1명 두 사람은 매약(賣藥) 행상을 하러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부터 은산(恩山)을 거쳐 같은 달 11일 만경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체재 중이었는데, 동 17일에 이르러 여관 주인인 조선인에게서 이번에 일어난 경성 사변을 들으니 거류민은 모두 철수하였다는 말을 들었지만 여느 때와 같은 거짓말이라 여겨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 그 지방 한인의 거동이 갑자기 변하여 이 사람들에 대해 기왓장과 돌을 던져 끝내 부상을 입게 되니 위해가 닥치기 전에 그 곳에서 철수하기로 결심하고 동 19일 그곳을 출발하여 부안 등을 거쳐 25일 목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목포에서 가이류호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는데 여행 중에 우리나라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고 다만 전주에서 일본인 7명이 살해되었다는 등의 소문을 들었지만 이는 조선인이 하는 이야기이므로 그 진위는 바로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흥덕에서는 일본인은 일체 숙박을 하지 말라는 포령(布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앞서 충주에서 일어난 폭도는 그 후 안성으로 옮기고 그 일부 약 300명 정도는 둔포(屯浦)와 수원 사이의 진의(鎭義)라고 하는 곳의 연도에 출몰하여 일본인 혹은 단발을 한 한인은 눈에 띄는 대로 이를 향해 발포하였으므로 이미 일본인 1명은 일전에 총살당했다고 합니다. 지난 번 이곳 인천항 무역상사 이나마쓰 상점에서 보내어 충청도 둔포 지방을 순회하던 스에마쓰 다미키치[末松民吉]라는 자도 현재 매우 위험한 처지에 빠졌다가 겨우 신성포(神星浦) 부근의 절에 숨어서 몸만 피해 있을 뿐인데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진퇴유곡의 곤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급히 보호를 청한다는 뜻을 본인의 편지에 첨부하여 동 상점에서 청원하였으므로 우선 이 달 1일 이곳 영사관 순사 1명에 조선 순검 2명을 동행시켜 수로를 통해 그곳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스에마쓰의 편지에 의하면, 현재 둔포 근방에서는 의병이라 칭하는 자로 앞에 쓴 300명을 제외하고 안성에 600명 정도 있으며, 그 일부는 음력 정월 14일 직산 근방에 와서 부근 각 읍의 사냥꾼을 모집 중이며 나아가 아산 지방에도 만연하게 된다면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하지 않을까 라고 합니다. 동 3월 7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요시자키 유타로 피해건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이곳 원산항 지사(知事)가 보낸 사자(使者)가 어젯밤 원산으로 돌아와 보고한 바에 따르면, 함흥부 관찰사 대리 목유신(睦裕信)과 동 부(府) 주사(主事) 피(皮)・홍(洪) 세 사람은 이 달 3일 부민(府民)에게 살해되었고 그 목은 가두에 효수되었으며, 부청(府廳)은 폐쇄되어 형세가 불온하므로 헛되이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부 각지의 폭도는 이곳에서 10리 내외 떨어진 곳에 쳐들어왔고 가까이 온 것은 이미 신평장(新坪場) 원산에서 약 7리 떨어진 곳 까지 밀어닥쳤다는 확실한 보고에 접했습니다. 동 3월 11일 재 경성 우치다[內田] 일등영사의 보고 2월 23일 경성 부근 마포에서 야마구치 현 평민 다키가와 쥬이쓰[瀧川籌逸]에게 부상을 입힌 범죄인 조사건에 대해서는 혐의가 있는 자 십 수명을 체포하여 현재 취조 중인 것은 이미 보고드렸습니다만, 그 후 엄중히 취조하였더니 실제 하수인은 이춘삼(李春三)과 안흥생(安興生)이라는 자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이들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앞에서 말한 폭행 후 집안을 거두어 어디론가 도망쳐서 그 행방이 불분명하므로 어쩔 수 없이 체포 방법을 관계 당국에 조회하고 또 우리 경찰관을 시켜 이들을 탐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체포된 혐의자는 마을 사람 중에 중심이 되는 자로 하여금 마을 사람 일동은 결코 일본인을 향해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되며 또 이번의 범인은 반드시 포박하여 데리고 올 것이라는 보호장(保護狀)을 제출하게 한 다음 모두 방환(放還)하였습니다. 동 3월 11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둔포 지방에 파견한 순사 후타가와 히코이치[二川彦一]가 이 달 7일 이곳 인천항 무역상 이나마쓰 상점의 고용인 스에마쓰 다미키치 외 13명과 동행하여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일행의 보고에 따르면, 충청도 둔포 지방에서는 올해 1월 단발령의 발포 후 어느 정도 일본에 대해 악감정을 품은 자가 있었지만 아직 상업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는데 2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이 감정이 점차 증진되어 일본인은 도처에서 적시(敵視)당하고 폭도 봉기의 소문이 있어 자못 불온한 징후를 보인다고 합니다. 동 24일에 이르러 충주의 적 300명이 안성에서 이동하여 진의(鎭義)로 들어가 부사(府使)를 포박하고 돈과 곡식을 징발하며 도로를 차단하였으며, 당시 그곳을 통행하던 일본인 곤도 에이조[近藤榮藏](경성 재류)라는 자를 붙잡아 이를 총살했습니다. 그리고 안성에서 경성으로 돌아가려던 일본 매약(賣藥) 행상도 마찬가지로 용인에서 살해되었으며 둔포민도 또한 폭도에 가담하려는 정황이라 합니다. 안성에 있는 폭도는 점차 그 수가 늘어나 동 29일 무렵에는 3천 명 이상에 달하였는데 그 무리는 대부분 경상도에서 왔고 그밖에 안성의 백성 300 여 명이 이에 가담하여 직산(稷山)?진의?군문포(軍門浦) 등에 출몰하여 곡물 등의 징발에 종사하며, 군수는 살해 또는 축출되고 일본인 및 단발을 한 한인도 역시 모두 살육하여 흉폭함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이 달 2일에 이르러서는 둔포 또한 폭민에게 유린되었다고 합니다. 이 달 8일 이곳 관찰사는 허둥지둥 가마를 타고 이곳 인천항의 각 영사관 등을 두루 방문하여 이곳에서 9리 떨어진 수원부에 폭도가 틈입하여 부사를 쫓아내고 밤을 틈타 인천항을 습격하려는 계획이 있음을 탐지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방어를 강구하지 않겠는가 하고 간원하러 왔기 때문에 그 지방의 사정을 탐정하기 위해 순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사이 강화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불온한 기미가 있다고 하는데 아직 확실한 보고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동 3월 12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오늘(3월 12일) 이원(利原) 군수 이기홍(李起泓)이 살해되고, 함흥?정평(定平)?영흥(永興)?고원(高原) 등의 폭도는 남부 폭도와 상응하여 이 달 19일을 기해 원산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미리 상의하기 위해 춘천 폭도의 수괴(首魁) 재태언(宰太彦)이라는 자가 북부를 향해 떠나갔다가 2, 3일 전 남부로 돌아갔다는 첩보를 접했습니다. 동 3월 13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요시자키 유타로의 시체 등을 챙기기 위해 동거인인 이케다 이치타로[池田市太郞]가 함흥부에 파견한 고용 한인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그곳은 앞서 조선 순검과 요시자키 등이 살해된 뒤에는 특별히 부민(府民) 사이에 동요하는 기색이 없으며, 다만 폭민 등이 여러 곳에 집합하여 일본인 배척론을 주장할 뿐으로 이 달 초순 춘천의 수령 박 아무개가 와서 격문을 부중(府中)에 뿌리며 말하기를 “나는 춘천 의병장의 명을 받들고 와서 여러 사람들에게 고하니 곧 성문 밖에 와서 모이라”고 하니 금세 모여든 사람들이 수백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박은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이번에 국모를 시해하고 게다가 군부(君父)에게 강요하여 단발하고 양복을 입게 한 것은 어느 하나 일본인이 교사한 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실로 그지없이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속히 일본인을 소탕하여 고례(古例)를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일본인에 앞서 여기서 벌해야 하는 자는 현직에 있는 참서관(參書官)과 그 밖의 주사(主事)로서 일전에 순검 등에게 보호를 받은 일본당(日本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자를 불문에 부치는 것은 우리 주의(主義)가 아니다”라 연설하자 사람들은 분개하여 곧 관아에 이르러 사방으로부터 참서관에게 다가가 기왓장과 조약돌을 던져 참살하고, 계속해서 주사 2명을 잡아 모두 목을 베어 한 묶음으로 하여 이를 성문 밖에 효수하고 시체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박 아무개는 아직도 그곳에 머물러 우리 거류지를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 3월 14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강원도의 폭도가 우리 거류지를 습격하려는 계획을 하고 이미 이곳 원산항에서 7리 떨어진 신평장(新坪場)에 집합했다는 것은 보고드렸는데, 현재 각지에서 그곳으로 집합한 자들 중 중심이 되는 자의 성명 등을 들으니, 강릉 의병장 권 아무개?이 아무개, 춘천 의병장 박?민?유(兪), 그밖에 군량도감(軍糧都監) 1명, 전도감(錢都監) 6명, 방수군감장(防守軍監將) 3명, 서기 2명 등이며, 모여든 폭도의 수를 들어보면 이 달 8일부터 10일까지 춘천에서 170명, 고성(高城)?간성(杆城) 두 곳에서 240명, 이외에 기병(騎兵) 30여 명입니다. 이 자들은 앞서 모인 폭민 300 여 명과 만나 경계를 엄하게 하고 줄곧 강릉의 폭도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폭도 중에 군량도감 혹은 전도감이라는 직책을 자칭하고 양민의 물품을 약탈하기 때문에 각지에서 피난하는 자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또 폭도에 가담하는 자는 매일 쌀 2되와 엽전 30문(文) 씩을 배급받고 있으며, 특히 폭도는 본 원산항으로 쳐들어오기에 앞서 원산리에 있는 가옥을 불태우려고 꾀하여 이미 3, 4명이 들어와 4, 5일 전에 4곳에 방화하였습니다. 따라서 원산리 및 우리 거류지에서도 경계를 더욱 엄하게 하고 있습니다. 동 3월 16일 재 경성 우치다 일등영사의 보고 우리나라 사람 몇 명에게 해를 입힌 경기도 여주 지방의 폭민에 대해서는 가흥에 있는 우리 수비대에서 이를 소탕하려고 착수하고 있습니다. 이곳 영사관에서도 한인 탐정을 파견하여 적의 정세를 정찰하게 하였는데, 폭도는 전에 살해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체를 모아 이를 소각하고 나서 그곳에서 달아났으므로 이를 조사하기 위해 이곳 영사관에서는 경부(警部)・순사 및 통역을 파견하였고, 또 관계 당국에서도 순검 10명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런데 2월 6일 경기도 분원(分院) 지방에서도 후쿠오카 현 의사 오노 요시토시[小野好敏]라는 자가 폭민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이 일행은 그 계제에 해당 지방에도 들러 조사할 예정입니다. 동 3월 16일 재 경성 우치다 일등영사의 보고 앞서 경기도 진위(振威)에서 폭도에게 우리나라 사람 1명이 살해되었고 또 그 지방 적의 기세가 매우 치열하다는 것은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그 후 이곳 영사관에서 파견한 한인 탐정의 정보에 따르면, 현재 폭도는 그 지방에서 퇴산(退散)하였으므로 특별히 위험한 염려는 없다고 합니다. 동 3월 18일 재 경성 우치다 일등영사의 보고 지방의 폭도는 현재 광주성(廣州城)(서울에서 5리 떨어진 곳)에서 농성하며 여주?안성 지방의 폭도와 기맥을 통하여 그 세력이 대단히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 나라 정부에서는 친위대 및 강화도의 병력을 파견하여 토벌 중이지만 아직 첩보를 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타 각 지방의 폭도도 집산(集散)이 평소와 다르므로 조선인들 사이에는 갖가지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동 3월 18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원산 수비대장이 보내온 내첩(內諜)에 따르면, 지난 17일 남안(南岸) 폭도가 더욱 창궐하여 전진한다는 보고를 접하였으므로 우리 임무상 이를 요격하기 위해 하야시 중위에게 병사 40명을 인솔하고 연안 가도에서부터 지금 출발하게 했다고 합니다. 또 오늘 아침에 다시 부하 25명을 남방을 향해 출발하게 했다고 합니다.원산에 재류하는 내지 행상자인 모리 소지로[森宗次郞]라는 자가 간신히 해로를 통해 신창(新昌)에서 원산으로 돌아온 다음 말한 바에 따르면, 북청은 폭민 400여 명이 둔집하여 일본인 배척론을 맹렬하게 주장하며, 또한 일본인 행상이라 인정되면 즉시 포박해와야 한다는 벽보를 여러 곳에 붙이고 있다고 합니다. 동 3월 18일 재 인천 하기와라 영사관 사무대리의 보고 이곳 인천항에서 9리 떨어진 수원 지방의 불온한 정황을 정찰하기 위해 출장 보낸 순사 등이 복명한 바에 따르면, 그곳은 아무런 이상이 없으나 그 근방 천안・용인・안성 등에는 수천 명의 폭도가 집합하여 난폭하게 약탈함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심하게는 천안 군수를 죽여 그 목을 효수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폭도의 대부분은 이 순사 일행이 수원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광주(廣州) 지방으로 철수하였고 그 나머지 무리는 여전히 때때로 진위?칠원(七原) 등에 출몰하여 민가를 불지르고 양식을 약탈하였는데 그들은 안성?금양(金陽) 등에서부터 왔으며 수원 남쪽 4리 떨어진 진위 노상에는 오미장(五味場)에 집합하여 바야흐로 수원을 습격하려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위 군리(郡吏) 양주국(梁柱國)이 보낸 급보에 따르면, 동 군(郡)의 군수가 상경 중인 것을 노려 2월 24일 오전 7, 8시 무렵 이천의 의병이라 칭하는 자 300여 명이 동 군에 습격해 와서 지난해의 공부(貢賦)인 관금(官金)을 탈취하고 몹시 난폭하게 굴었으므로 군리와 주민 등은 모두 난을 피해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곳은 때마침 시장이 서는 날이었으므로 일본 상인 1명이 와 있었는데 폭도는 즉시 이를 잡아 끝내 총살하고 오후 4, 5시 무렵 안성 방면으로 철수했다고 합니다. 현재 안성군에는 300여 명이 둔집해 있기 때문에 실지(實地) 검사를 하기 위해 그곳으로 순사 및 순검을 출발시켰습니다. 동 3월 19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나카가와[中川] 수비대장이 보낸 내보(內報)에 따르면, 남안(南岸) 연도를 향해 진행하고 있는 하야시 중위 1대는 지난 18일 오전 3시 웅진동(熊津洞) 부근에서 폭도들에게 불의의 저격을 받아서 우리 부대는 즉각 산개(散開)하여 추격, 사격을 가하여 이를 격퇴하고 하장진(下長津)에 도착했으며, 오늘 아침 화등(火燈)(이곳 원산항에서 약 7리 떨어진 곳)의 폭도를 공격 중이라고 합니다. 동 3월 23일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의 보고 함경도 갑산에서 도망쳐온 총순(總巡) 김용빈(金溶彬)이 말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작년 11월 동 부(府)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경성에서 조(趙) 경무관, 김・조 두 총순이 부임하여 순사 70명을 모집하여 새 제도를 시행할 때 각처에 폭도가 봉기하였는데, 그들이 전하는 원인을 들으니 개화당, 즉 순검을 죽이고 일본인을 배척하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이미 함흥에서는 순검을 죽이고 게다가 일본당인 참서관(參書官) 및 주사(主事)를 살해하여 마침내 경찰서의 설치를 폐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갑산에서도 속히 경부 이하를 태워 죽이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형세가 날로 불온한 때에 이 김용빈은 해직되었으므로 이 달 1일 그곳을 출발하여 귀경길에 올랐다가 다음 날 2일 수백 명의 폭도에게 체포되어 갑산에 이르러 경부와 함께 참살 당하려고 하였는데 군수의 진력에 힘입어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두 구타당해 간신히 도주하여 함흥에 이르러 관찰사와 앞일을 도모하려고 그곳에 이르러서 보니 관찰사 대리 및 주사 등이 참살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사잇길을 통해 원산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갑산으로부터 비보(飛報)가 있었는지 갑자기 함흥의 폭민에게 습격을 받아 다시 매우 곤란한 처지에 처했다가 간신히 도주하여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조 경무관과 조 총순도 도망쳐 와서 이곳에서 합류했다고 합니다. 또 이 사람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갑산의 폭도는 600여 명이며, 길주?단천?북청의 폭도도 창궐하여 그 수가 역시 적지 않다고 합니다. 함흥에는 포수(총을 가진 자) 500명이 서호(西湖)(서호는 해안이며 함흥에서 3리 떨어진 곳)에 모여 영흥?고원?문천에서 오는 폭도를 모집 중이며 각처에서 경계를 하고 있으므로 원산인의 왕래는 매우 위험하다고 합니다. 이곳 원산항의 우리 수비대가 폭도를 진압하기 위해 남진한 후 보내온 첩보에 따르면, 지난 19일 안변에서부터 우회한 군사는 같은 날 오전 3시 신천동(新泉洞)을 거쳐 신평장의 측면으로 나와 오전 8시 서왕동(西王洞) 마을가에 도착하자마자 적군의 함성을 듣고 소대를 셋으로 나누어 둘은 양면의 산 위로 올라가고 나머지 하나는 중앙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8시 40분 개전한 후 2시간 여 걸려 우리 군사는 세 방면에서 돌진하여 10시 30분에 그곳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또한 연안 전진대(前進隊)는 선평장(仙坪場) 북쪽의 비탈길을 내려올 즈음에 개전하였는데, 적은 모두 회양(淮陽) 방면을 향해 달아났습니다. 또 흡곡(?谷) 방위로 퇴각한 자도 적지 않습니다. 그 날의 폭도 수는 약 1천 명이며 그들 중 사망자는 30여 명, 포로 5명이고, 우리 병사의 사상자는 없습니다. 동 3월 24일 재 경성 우치다 일등영사의 보고 여주 방면에서 폭민에게 우리나라 사람 몇 명이 살해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동 지방으로 출장보낸 가도이[門井] 경부 일행의 복명에 따르면, 그 지방은 현재 폭도의 잔당이 여전히 출몰하여 군대의 호위 없이는 통행이 위험하기 때문에 재(在) 이천 수비대로부터 군조(軍曹) 1명, 병사 10명을 요청하였고, 지난 17일 여주에 이르러 그곳의 이원(吏員) 및 토민 등에게 우리나라 사람의 피해 장소 및 상황을 심문하니, 2월 5일 폭도 대략 200명이 여러 방향으로부터 쳐들어와서 일본인 7명을 살해하고 그 시체는 군청 뒤의 강 속 얼음 위에 내다 버렸는데 해빙으로 인해 유실되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