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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31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5-28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5-28 발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5월 28일 동경(東京)착 39년 5월 28일 본인[本職]은 어제 밤에 홍주성(洪州城) 밖 약 2,000미터 지점에 도착하여 오늘 26일에 헌병대와 함께 성의 내외를 정찰했음. 성내의 상황은 불분명하지만 적은 겨우 200명을 넘지 못할 정도로 극히 미약하나, 성 주위는 논으로 둘러싸여 있고 높은 성벽에서 사방을 저격하고 있기 때문에 400미터 지점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음. 헌병 쪽에서 주차군 보포병(駐箚步砲兵)의 파견을 요구했다고 하는 점에 관련하여, 본인[本職]은 내일 27일에 이 곳을 출발하여 귀경 길에 오를 예정임.

    32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5-29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5-29 발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5월 29일 동경(東京)착 39년 5월 29일 25일에 우편배달부[郵便遞送夫] 1명과 이를 호송하던 헌병(護送憲兵) 2명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진보군(眞寶郡)에서 의병 300명에게 습격을 당하여 헌병이 참살되었다는 보고가 있음.

    33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한참보(韓參報) 제 144호의 제2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5-28 발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하야시 다다스(林董) 수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하야시 다다스(林董) 메이지(明治) 39년 5월 28일 참모총장(參謀總長) 자작(子爵)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외무대신(外務大臣) 하야시 다다스(林董) 각하[殿] 한국의 비도(匪徒) 건에 관해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사령관으로부터 별지의 전문(電文)과 같은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에 통보해 드리는 바입니다. 5월 27일 오후 3시 17분 경성(京城)발 3시 45분 착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주성(洪州城)에 거점을 둔 약 3, 400명의 비도(匪徒)는 우리가 파견한 헌병과 경찰관 등의 진무(鎭撫)에 저항하고 있고 그 태도가 매우 완강함. 따라서 신속하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27일에 대대장이 이끄는 보병 2개 중대를 파견함. 단 통감(統監)과는 이미 충분한 의논을 마쳤음. 또한 한국 관헌(官憲)에 대해서는 거듭하여 한국병(韓兵)을 파견할 것을 독촉하여 그 중 약간명(30명)을 파견받았으나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함.

    34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한참보 제 145호 제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5-29 발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하야시 다다스(林董) 수신자: 외무대신(外務大臣) 하야시 다다스(林董) 메이지(明治) 39년 5월 29일 참모총장(參謀總長) 자작(子爵)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외무대신(外務大臣) 하야시 다다스(林董) 각하[殿] 한국 홍주(洪州)에서 비도(匪徒)를 진압하는 건에 관해 한국주차군(駐箚軍) 참모장(參謀長)으로부터 별지와 같은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에 통보해 드리는 바입니다. 5월 28일 오후 5시 40분 발 8시 30분 착 한참보(韓參報) 제 143호 28일 오후 3시 30분 아래와 같은 통감(統監)의 명령(27일)에 접함. 충청남도(忠淸南道)에서 봉기한 폭도 진정을 위해 적절한 부대를 파견할 것. 27일 오후 7시 반 서대문(西大門) 정거장에서 보병 2중대를 출발시켜 동일 밤 천안(天安)에서 숙박함. 28일 예산(禮山) 부근에서 숙영(宿營)할 예정임. 내일 4개의 성문을 봉쇄하여 일거에 모든 비도(匪徒)를 포박할 계획임.

    35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5-30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5-30 발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5월 30일 동경(東京)착 39년 5월 30일 홍주성(洪州城)은 오늘이나 내일중으로 공격에 착수할 것임. 성의 주위를 포위해 한 사람도 도주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임. 성은 주위가 약 25정(町)으로 장벽의 높이는 대체로 15척(尺) 정도임. 현재 홍주(洪州) 및 진보군(眞寶郡) 이외에는 각 지방 모두 이상이 없음.

    36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5-30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5-31 발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5월 30일 동경(東京)착 39년 5월 31일 28일 오후 11시 홍주(洪州)발 기리하라(桐原) 경시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가 있었음. 어제 27일 오전 10시 경비 지역[警備地]을 정찰하기 위해 히지카타(土方) 경부(警部)와 총순(總巡)에게 순사 5명을 딸려 서문(西門) 밖을 향해 출발시켰는데, 오후 5시경에 동(同) 방면에서 나는 총성을 듣고 숙영지에서 망원경으로 살펴본 즉 두세 차례의 교전 끝에 적이 추적해 왔음으로, 즉시 헌병 및 이와타(岩田) 경부에게 순사를 딸려 보내어 응원하도록 하였으나 교전은 이미 끝났고 도가타(土方) 일행의 행방이 불명하여 수색중임. 순사 4명은 오늘 오후 6시에 돌아왔으나 도가타(土方) 및 소오(宗) 총순(總巡) 1명은 현재 행방불명[行衛不明]임으로 수색중임.

    37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비(秘) 참작(參作) 제1호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1 수신일: 1906-06-02 메이지(明治) 39년 6월 2일 접수  메이지(明治) 39년 6월 1일 한국 충청남도(忠淸南道)에서 봉기했던 비도(匪徒)는 홍주성(洪州城)에 근거하여 우리가 파견한 헌병과 경찰관 등의 진무(鎭撫)에 저항여 태도가 매우 완강하여 우리 당국은 한국 관헌(官憲)에 대해 여러차례 한국병(韓兵)의 파견을 독촉하여 그 중 약간 명을 겨우 파견받았으나 효과가 거의 없음. 결국 한국주차군(駐箚軍) 사령관은 한국통감(韓國統監)의 명령에 따라 5월 27일에 다카야마(高山) 소좌(少佐)가 지휘하는 보병 2개 중대를 홍주(洪州)에 파견했음. 이 토벌대는 5월 30일부터 적의 상황을 정찰하고 31일 오전 3시 홍주성(洪州城) 동쪽과 북쪽의 두 성문을 파괴하고 약간의 격렬한 시가전을 치른 끝에 오전 7시 30분 해당 성을 점령했음. 포로가 된 적의 말에 따르면 적은 약 1||000명에 이른다고 함. 우리 병사는 경상(輕傷)자가 2명이고|| 적의 사망자는 60명|| 이미 포박된 자가 127명으로|| 계속해서 포박하고 있음. 노획품 또한 다수임. 다만 적장(賊將) 민종식(閔宗植)은 서남쪽으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있어 토벌대는 이를 추격했음. 앞서 적에게 포로가 된 도가타(土方) 경부(警部) 외 2명은 이미 참살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음.

    38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5-31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01 발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자: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5월 31일 동경(東京)착 6월 1일 오늘 기리하라(桐原) 경시(警視)로부터 전보가 있음. 31일 오전 3시 홍주성(洪州城)의 동문(東門)과 북문(北門)을 폭발하고 성내에 진입하여 오전 6시에 확실하게 점령함. 수괴(首魁) 민종식(閔宗植) 이하 약 100명은 도주함. 우리측의 손해는 순검(巡檢) 1명이 즉사하고 병사 2명이 부상함. 포로가 120명, 시체가 60구이고 대포와 소총 다수를 포획함. 도가타(土方) 경부(警部) 이하는 전사한 형적이 있음.

    39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1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01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6월 1일 동경(東京)착 39년 6월 1일 방금 홍주성(洪州城)에 출정(出征)중인 지휘관 다나카(田中) 소좌(少佐)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가 도달하였습니다. 예정대로 어제 30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정찰을 실시한 다음 오늘 오전 3시에 동문(東門) 및 북문(北門)의 두 성문을 파괴하고 약간의 격렬한 시가전을 치른 후 오전 7시 반에 성(城) 전체를 점령했음. 우리측의 사상자는 경상자가 2명이고, 적의 사망자는 60명임. 현재의 포로는 127명이고, 또한 계속하여 포획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됨. 적장(賊將)은 아직 찾지 못함. 서남쪽으로 도주한 의심이 감. 패잔병에 대해서는 현재 이들을 계속 추격하고 있음. 노획품의 수는 조사중임. 포로의 말에 의하면 적병의 수는 약 1,000명이라고 함. 적에게 잡혔던 일본인은 참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함.

    40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전신(電信) 발간일: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1 발신주소: 경성(京城) 수신일: 1906-06-01 발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자: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總務長官) 수신주소: 동경(東京) 전신(電信) 경성(京城)발 39년 6월 1일 동경(東京)착 39년 6월 1일 하세가와(長谷川) 사령관이 어제 밤 귀임(歸任)하셨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면담한 결과, 홍주성(洪州城)의 폭도 토벌대는 어제 31일에 이미 주요한 목적을 달성하였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에 점차 당지로 철수시키고, 동 지방의 질서회복에 관련해서는 헌병 및 경찰로 하여금 적절한 수단을 취하도록 하기로 하고, 포로는 이곳으로 호송시키기로 협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