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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691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秘受) 제1782호 한국 각도의 적의 상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6-13 수신일: 1910-06-14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16호 메이지43년(1910) 6월 13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강원도 북창(北倉)의 헌병과 보조원이 5월 14일 북창 동남방 약 6리 지점에서 적 14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이 밖에 5월 9일부터 같은 달 27일까지 우리측 헌병과 보조원이 경기도 양주와 풍덕(豊德) 부근 및 경상도 청하(淸河)와 순흥(順興) 부근에서 각각 몇 명의 적과 충돌하여 1명을 죽이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총 2정을 노획하였다. 3.참1발 제15호 및 위의 2항에 게재한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의 요지 이외에 메이지 43년(1910) 5월 초순부터 같은 달 말일까지 수색・검거 등에 의해 적도(賊徒)에게 입힌 손해는 다음과 같다.

    692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秘受) 제1818호 북창평(北蒼坪) 부근에서 폭도가 전선을 절단한 것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6-15 수신일: 1910-06-16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17호 메이지43년(1910) 6월 15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6월 5일 밤 북창평(北倉坪)・온성(穩城) 사이에서 3곳, 북창평・경원 사이에서 2곳의 전화선이 절단되었다. 그 후 또 북창평・경원 사이에서 전주(電柱)가 절단되었다. 그 목적은 명확하지 않으나 도문강(圖們江) 건너편 기슭에서 폭도가 침입한 혐의가 있기 때문에 이를 소탕하기 위해 회령(會寧)에서 장교가 지휘하는 하사 이하 40명을 파견하였다.

    693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秘受) 제1923호 한국 각도에서의 폭도의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6-27 수신일: 1910-06-28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18호 메이지43년(1910) 6월 27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평안남도 북창(北倉)의 헌병과 보조원이 5월 24일 북창 북방 약 10리 지점에서 적 13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 6월 14일 밤 폭도 약 50명이 평양 헌병 분대 선암(仙岩) 분견소(分遣所)에 쳐들어왔다가 다대한 손해(중경상)를 입고 총 3정을 버려 둔 채 도주하였다. 우리측 분견소에서는 헌병 상등병 1명, 보조원 1명이 즉사하였고 군조(軍曹) 1명과 보조원 1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헌병이 곧바로 이들을 추적하였지만 적도는 원산 방향으로 달아났다. 상세한 것은 아직 조사 중이다. 3. 이외에 6월 8일부터 동 14일 사이에 황해, 경기, 전라의 여러 도에서 우리측 헌병이 각각 몇 명의 적과 충돌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총 5정을 노획하였다.

    694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수 제14238호 북창평 부근에서 폭도가 전선을 절단한 것에 관한 동국 주차헌병대장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6-28 수신일: 1910-06-29 발신자: 외무대신 백작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수신자: 외무대신 백작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육보(陸普) 제2818호 메이지 43년 6월 28일 육군대신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인 외무대신 백작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귀하 한국 북창평(北蒼坪) 부근에서 폭도가 전선을 절단한 건에 대해서 별지와 같이 한국 헌병대장으로부터 보고가 있었으므로 참고하시도록 이첩(移牒)합니다. 한국주차(駐箚) 헌병대장의 보고 6월 19일 북창평(北蒼坪)과 경원의 중간, 그리고 북창평과 온성의 중간에서 6월 5일 밤 전주(電柱) 각 1본(本)을 절단하고 전선 약 18간(間) 남짓을 탈취해간 자가 있었다. 범인을 수색하던 중 6월 17일 오후 3시 북창평 헌병 분견소에서 수상쩍은 한인 4명을 조사하였는데, 그 중 1명으로 북청(北靑) 출신 강 쇼킨이라는 자가 대공용(大工用) 기구와 노국식(露國式) 톱을 휴대하고 있었으므로 엄중하게 취조하였더니 6월 5일 밤 온성・북창평 사이의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다고 자백하였다. 또한 이 사람은 노령(露領) 연추(烟秋) 샨나폰에 있는 폭도의 수괴(首魁) 세이와사이 쓰우쇼히치케 55세 정도되는 자의 부장(副將)인 킨키케이의 부하 폭도이며, 수괴 사이로부터 자신과 오우카이쿠 2명이 전주와 전선을 절단하고 그 위에 일본의 관헌이 어떤 조치를 취하는지를 정찰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오우카이쿠는 경원・북창평 행영(行營) 사이를 절단하고, 자신은 온성・종성 사이를 절단하려고 했는데 종성 사이의 경계가 엄중하여 절단하지 못하고 단념하였으며, 킨카이쿠는 6월 5일 5시에 헤어진 뒤로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였다.

    695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 제1954호 선암(仙岩) 지방에 폭도가 내습한 것 및 남산 고산(高山) 헌병 분견소의 토적(討賊)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7-01 수신일: 1910-07-01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19호 메이지43년(1910) 7월 1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 6월 14일 선암(仙岩) 헌병 분견소에 적도(賊徒)가 쳐들어왔다는 앞의 보고 중 적에게 탈취된 병기 수는 다음과 같다. 30년식 총 13, 동(同) 총검 15, 탄약합(彈藥盒) 17, 32년식 군도(軍刀) 1, 26년식 권총 1, 실포(實包) 868 2. 6월 22일 남산역(南山驛)・고산역(高山驛) 양 헌병 분견소의 상등병 2명, 보조원 8명은 고산역에서 서남방으로 약 10리 떨어진 이천군(伊川郡) 내에서 적의 괴수 채응언(蔡應彦) 및 강두필(姜斗弼)이 이끄는 약 85명의 적과 충돌하여 이들을 격퇴하였는데, 추격 행동 중 갑자기 이 적에게 포위되어 보조원 2명이 전사하고 상등병 1명과 보조원 1명이 행방 불명되었다. 이에 하사가 이끄는 상등병 4명과 보조원 23명은 토벌을 하기 위해 24일 아침 고산역을 출발하여 그쪽 방면으로 향하였고, 법동(法洞)의 헌병 분견소 하사 이하 10명 및 보병 제4연대 제2대대의 1소대도 이 보고를 접하자 같은 방향을 향해 출발하였다.

    696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 제2042호 황해도|| 경상도 방면에서의 적의 상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7-11 수신일: 1910-07-1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20호 메이지43년(1910) 7월 11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황해도 평산의 헌병 분견소 상등병 1명과 보조원 4명이 6월 19일 누천(漏川) 서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2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 황해도 수안의 헌병 분견소 상등병 3명과 보조원 3명이 6월 20일 수안(遂安) 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10여 명과 충돌하여 총 1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 3. 앞의 보고 중 이천군 내의 적도를 추격하기 위해 파견된 헌병 및 수비대가 끝내 소득 없이 끝났다.또 행방 불명이었던 상등병 2명과 보도원 1명은 그 후 각 분견소로 귀환하였다. 4. 경상북도 예천의 헌병 분견소 상등병 1명과 보조원 3명이 6월 26일 예천(醴泉)에서 동방으로 약 4리 지점에서 총기 7정을 가진 적 약 12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였다.

    697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 제2179호 황해도|| 함경도 방면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7-25 수신일: 1910-07-26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21호 메이지43년(1910) 7월 25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황해도 해주 수비대의 미즈시마〔水島〕 대위 이하 18명은 6월 12일 해주군 해주 부근에서 적의 괴수 한정만(韓貞滿) 이하 43명의 적과 충돌하여 약 30분 동안 교전하였는데 적 2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으며 이들을 격퇴하였다. 2. 함경북도 무산(茂山)과 보천보(普天堡)의 두 헌병 분견소 하사 1명, 상등병 4명, 보조원 7명의 연합대가 7월 9일 무산군 허정령(虛頂嶺)에서 동북방으로 약 4리 떨어진 산 속에서 수를 알 수 없는 지나(支那) 마적과 충돌하여 교전하였는데, 적은 사망 2명, 총 1정과 탄약 42발을 버려두고 패하여 달아났다. 우리측에는 손해가 없으며, 그 후 다시 적 1명을 붙잡고 계속해서 수색 중이다.

    698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 제2245호 평안남도|| 강원도|| 황해도 방면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8-01 수신일: 1910-08-0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22호 메이지43년(1910) 8월 1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적도(賊徒) 17명이 30년식 보병총 6정, 양총(洋銃) 4정, 화승총 7정을 휴대하고 7월 11일 오후 8시 화창(化倉)에서 남쪽으로 약 2리 떨어진 민가에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고 우리측 헌병 상등병 1명과 보조원 3명을 급파하였는데 소득이 없었다. 토민의 말에 따르면, 적은 황해도 곡산군 백년산(百年山)(곡산 동북방 약 5리 지점) 부근을 근거로 하는 적의 괴수 채응언(蔡應彦)의 무리라고 한다. 2. 강원도에서 폭도의 괴수 강기동(姜基東) 및 강두필(姜斗弼)이 이끄는 약 100여 명의 적도는 금성군 내에 집합하여 회양(淮陽) 및 통구현리(通口縣里) 방면의 2대로 나누어 통구현리 방면으로 왔는데, 적은 7월 13일 통구현리의 헌병 분견소에 대해 전투를 신청하였다. 이에 다음날 14일 동 분견소에서 곧바로 헌병 2명과 보조원 4명을 파견하였으나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그런데 그 적도는 다시 2대로 나누어 북창(北倉)(금성 동북방 10리 지점)과 그 남방 두 방면으로 향한 듯하여 인제 수비대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3. 황해도 해주 부근(해주에서 서북쪽으로 약 6리 떨어진 지방)에서는 적의 괴수 이진룡(李鎭龍)이 이끄는 적도 약 55명이 각자 총기를 휴대하고 7월 15일, 16일 양일 간 밤에 출몰하였다가 17일 아침에 도주하였다. 그리고 이 적의 집단에는 적의 괴수 한정만(韓貞滿)도 합류한 듯하므로 해주 수비대의 미즈시마〔水島〕 대위 이하 70명, 재령과 송화의 양 수비대 및 해주 헌병 분대 경찰의 합동대(合同隊)는 7월 20일 밤 행동을 개시하여 이를 토벌 중이다. 4. 분견대(分遣隊)의 철수 전라북도 대장촌(大場村) 분견대가 헌병 분대를 신설하기 위해 7월 23일 철수하였다.

    699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 제2323호 경상북도|| 평안남도 방면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8-08 수신일: 1910-08-09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23호 메이지43년(1910) 8월 8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 경상북도 영양 수비대 하사 이하 7명이 7월 17일 재산(才山) 동방 약 6리 지점에서 적 8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 평안남도 상원의 순사주재소 순사 3명이 7월 21일 상원(祥原) 서방 약 4리 반 지점에서 적 8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총 1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

    700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 제2467호 강원도|| 평안남도 방면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8-22 수신일: 1910-08-23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24호 메이지43년(1910) 8월 22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 강원도 북창 헌병분견소 상등병 2명, 보조원 5명이 8월 3일 오전 4시 북창(北倉) 북방 1리 반 지점에서 적 약 30명과 충돌하여 약 30분 동안 교전하였는데 이들을 금강산 방면으로 격퇴하였다. 2. 평안남도 평지원(平地院) 헌병분견소 상등병 1명 외 2명이 8월 4일 숙천(肅川) 동방 약 5리 지점에서 적 약 16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같은 도 맹산(孟山), 성창(城倉), 석우동(石隅洞)의 각 순사주재소 순사 3명이 7월 31일 덕천(德川)에서 동남방으로 약 11리 떨어진 오강면(吳江面)에서 각자 총기를 휴대한 적 약 23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같은 도 고원(高原) 헌병분대에서 파견한 하사 이하 5명, 보조원 4명이 8월 7일 양덕군(陽德郡) 내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총 1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같은 도 안주(安州) 수비대의 가와카미[川上] 소위 이하 15명이 8월 9일 오후 4시 북창(北倉) 동남방 약 8리 지점에서 적 18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고 총 2정을 노획하였다.같은 도 북창의 헌병분견소 상등병 1명과 보조원 2명 및 덕천 수비대 13명으로 이루어진 연합토벌대가 8월 9일 덕천(德川)에서 동남방으로 약 11리 떨어진 오강면(吳江面)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적 3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총 2정을 노획하였다. 참고 한국 폭도의 상황 작년 7월 한국 경성(京城)에서 폭도가 폭발한 이래 잠시 각 도에서 만연하여 많은 경우는 오륙백 명이 무리를 이루어 사방을 약탈하였다. 이에 우리측 군사령부는 폭도 진정의 방책을 정하고 군대를 소란한 지방에 분산 주둔시켜 예의 폭도 진정에 진력한 결과 겨울이 되어서는 집단을 이루는 폭도를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저들의 행동 구역이 수비대의 배치에 따라 점차 축소된 것과, 시절 관계상 집단으로 행동할 수 없는 것에 의해 마침내 어지럽게 패하여 각 도에서 출몰하여 작은 무리의 화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우리측 정부는 각 도의 소란 지역에 한층 세밀한 경계망을 배치하여 초적(草賊)으로 하여금 다시 집단을 이루어 행동할 여지를 없게 하였다. 또한 남아 있는 초적을 근본적으로 진압할 필요를 느껴 올해 3월에 헌병의 병력을 증가하고, 5월에 다시 보병 2개 연대를 증가하였다.현재 시절이 온난함을 틈타 각 도의 폭도가 또다시 준동(蠢動)하기 시작하였는데, 집단을 이룬 것으로는 경상북도 북부, 강원도 남부, 임진강구, 평안북도 강계 지방 및 함경남도 갑산 부근이며, 그밖에는 소수의 적도(賊徒)가 출몰하는 것일 뿐이다. 증가한 군대는 겨우 그 배치를 마쳤을 뿐으로 폭도의 상황에 아직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종래에 비해 배치 개소(個所)가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므로 폭도의 행동 구역은 크게 축소될 것이다.요컨대 작년에 폭도가 봉기하기 시작한 이래 소란한 지역에서의 산업은 다대한 손해를 입었고 교통 운수 등에 여러 차례 위해(危害)를 입었지만, 우리측 군대 및 헌병이 예의 토벌에 종사하고 인민에 대한 처치가 적당하였으므로 소란한 지역은 점차 축소되었고 인민은 각기 생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철도 연선(沿線)은 물론 산업 교통상 긴요한 지방에서는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어 어떠한 소란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만 먼 지방에서 강도와 같은 화적이 출몰할 뿐이며,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은 겨우 몇몇 지방에 있기는 하지만 어느 것이나 인가가 드물어서 산업상 전혀 가치가 없는 지방이다. 더구나 증가한 우리측 군대가 새로 배치됨에 따라 진정(鎭定)의 효과를 거둘 날이 멀지 않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