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콘텐츠

선택

선택

    의병자료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671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수(受) 제2342호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의 소란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1-31 수신일: 1910-02-01 발신자: 외무대신 백작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수신자: 외무대신 백작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참1발 제416호 메이지 43년(1910) 1월 31일 육군대신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인 외무대신 백작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귀하 별지와 같이 전보가 왔으므로 통보합니다. 전보역(電報譯) 1월 31일 오후 1시 0분 발 1월 31일 오후 3시 10분 착 대신 앞 발신자 오쿠보〔大久保〕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1월 29일 시장세(市場稅)에 대해 소민(小民)과 재무소(財務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소민 5백 여 명이 군아(郡衙)에 방화하고 재무주사, 우편소장, 농사시작장(農事試作場) 주임 등을 살해하였으며 거류 일본인 중에도 다소 피해가 있는 듯하다. 이에 은산(殷山)의 헌병이 경찰관과 협력하여 이들의 진무(鎭撫)에 종사하고 있다.

    672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평안북도 용암포(龍巖浦)에서의 토민 소란에 관한 동국 주차군 참모장 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2-03 발신자: 고무라〔小村〕 외무대신 수신자: 고무라〔小村〕 외무대신 별지 전보가 도달하였으므로 참고하시도록 귀하께 올립니다. 메이지 43년(1910) 2월 3일 데라우치〔寺內〕 육군대신 고무라〔小村〕 외무대신 귀하 한국주차군 참모총장으로부터 참모총장 앞 전보1 2월 3일 오후 6시 25분 발 2월 3일 오후 8시 40분 착 평안북도 경찰서장의 보고를 받아 경무국장이 통보한 바에 따르면, 용암포(龍巖浦)에서 3리 떨어진 양시(楊市)에서 지난 2일 시장세 징수 건으로 인해 토민들이 폭거에 나서려 하므로 경찰관은 주모자 7명을 검거하였는데, 토민 약 3천 명이 경찰서에 몰려와 이들을 방면할 것을 청구하고 만약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모든 관아를 불태워 버릴 것이라 발설하여 불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급히 보고합니다. 동(同)2 2월 3일 오후 8시 발 동 오후 9시 50분 착 오늘 오후 3시 50분 용암포에서 보내온 전보에 따르면, 앞 전보 요지의 인민 약 1천 명이 용암포에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673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秘受) 제420호 평안북도에서의 토민 소란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2-03 수신일: 1910-02-04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전보 2월 3일 오후 10시 45분 발 4일 오전 0시 20분 착 육군대신 앞 한국주차군사령관 발 지금까지 받은 보고를 종합하면 소요(騷擾)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2일 평안북도 양시(楊市) 시장에서 시장세 징수에 대해 시민이 소요를 일으켜 재무서원(財務署員)에게 폭행을 가하였으므로 순사와 헌병이 칼을 뽑아들어 해산하게 하고 주모자 7명을 용암포 경찰지서에 동행하였는데, 오늘 오후 4시 약 5백 명의 한인이 용암포에 몰려들어 불온한 상황을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헌병이 일동을 모아 청원 대표자 4명을 뽑게 하여 설유(說諭)한 다음 해산하게 하였으나 아직 진정되지 않아 현재 경계 중입니다.

    674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평안북도에서의 토민 소란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2-05 발신자: 고무라〔小村〕 외무대신 수신자: 고무라〔小村〕 외무대신 별지와 같이 전보가 왔으므로 통보합니다. 메이지 43년(1910) 2월 5일 데라우치〔寺內〕 육군대신 고무라〔小村〕 외무대신 귀하 전보 2월 5일 오전 11시 10분 발 동 오후 2시 30분 착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부터 육군대신 앞 지난 4일 오후 3시 무렵 양시(楊市)의 토민 약 1천 5백 명이 다시 용암포로 몰려왔지만 설유(說諭)한 다음 3명을 총대표로 삼고 나머지는 전부 해산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상황이 평온하게 된 듯합니다. 의주 수비대에서 특무조장(特務曹長) 이하 9명이 3일 밤 1시 의주를 출발하여 용암포 부근을 정찰하게 하였다고 합니다.평양과 숙천(肅川)에서는 순천(順川)의 폭민이 들어와 토민을 선동하는 듯한 기색이 있어서 경계 중이라고 합니다만 아직 이상(異狀)은 느낄 수 없습니다.

    675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秘受) 제444호 평안도 수비병 파견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2-06 수신일: 1910-02-07 발신자: 고무라〔小村〕 외무대신 수신자: 고무라〔小村〕 외무대신 전보역(電報譯) 2월 6일 오전 11시 50분 발 오후 7시 43분 착 육군대신 앞 오쿠보〔大久保〕 한국주차군사령관 발 양시(楊市)의 시장세 징수에 관한 폭동 사건은 정황이 불온하여 토민이 주모자 탈취를 계획하고 있으며, 현재 용천군(龍川郡) 전반에 걸쳐 소요가 일어날 염려가 있습니다. 본관은 신의주 경비를 위해 오늘 중대장이 지휘하는 30명의 1소대를 평양에서 신의주로 파견하려 합니다. 사카키바라〔 原〕 헌병대장은 오늘 아침 경성(京城)을 출발, 평양을 거쳐 소요지로 향합니다. 중대장은 모든 일을 동관(同官)과 협의한 다음 행동하게 하였습니다. 안주(安州), 숙천(肅川) 등의 각지에 불온할 염려가 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아직 아무런 상황의 변화를 느낄 수 없습니다. 군(軍)에서 장교 1명을 용암포에 파견하여 실황을 시찰하게 하였는데 오늘 저녁 그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본 건은 보통 폭도가 아니라 행정상에 대한 인민의 폭거이므로 군사를 보내는 간섭을 피하여 지난 3일 통감의 의견을 구하였으나 어제 밤까지 명확한 해답이 얻지 못하였습니다. 끝내 시기를 잃을 염려가 있어 오늘 아침 이시즈카〔石塚〕 장관을 불러들여 담합한 다음 전문(前文)과 같이 군대를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676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秘受) 제481호 경기도 방면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2-07 수신일: 1910-02-08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호 메이지43년(1910) 2월 7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경기도 방면 개성의 경찰서원이 12월 28일 동 군 대흥사(大興寺)(개성과 양합리의 대략 중간)에서 적 19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2)고안(高安)의 헌병과 보조원이 1월 14일 그곳 남방 약 1리 지점에서 적 15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고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

    677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秘受) 제482호 평안도 양시(楊市) 용암포 지방에서의 토민 소란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2-08 수신일: 1910-02-08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전보역(電報譯) 2월 7일 오후 3시 0분 발 오후 7시 50분 착 육군대신 앞 오쿠보〔大久保〕 한국주차군사령관 니시〔西〕 대위가 지휘하는 신의주 분견대가 오늘 아침 그 수비지(守備地)에 도착하였습니다. 여러 보고들을 종합하면, 재무관이 일시 징세를 중지하여 상황도 일단 평온해진 듯하며, 용암포 부근에 있던 의주 수비대의 일부가 오늘 수비지를 향해 귀환하였습니다.

    678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 제541호 경기도 방면에서의 폭도 토벌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2-14 수신일: 1910-02-15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4호 메이지43년(1910) 2월 14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경기도 방면 (1)주포(周浦)의 헌병과 보조원이 1월 18일 후평리(後坪里) 동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13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총 2정을 노획하였다. (2)문산(汶山)의 헌병과 보조원이 1월 25일 그곳 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12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고 총 1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 또 일부가 문산 남방 약 3리 반 지점에서 다시 그 적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3)강원도 금화 수비대의 일부가 1월 28일 경기도 연천(連川) 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였다. 이 수비대의 일부가 다시 1월 29일 경기도 영평(永平) 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의 괴수 연기우(延起羽)가 이끄는 적 약 30명을 야습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2.메이지42년 12월 중에 한국주차군이 보고한 요지 이외에 수색・검거 등에 의해 폭도에게 입힌 손해는 다음과 같다.

    679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 제617호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방면에서의 폭도 토벌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2-21 수신일: 1910-02-2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5호 메이지43년(1910) 2월 21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황해도 방면 청석두(靑石頭)의 헌병과 보조원이 1월 31일 재령군 내에서 적 47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강원도 방면 평강(平康)의 헌병과 보조원이 1월 21일 그곳 서방 약 8리 반 지점에서 적 31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3.경기도 방면 양천(陽川)의 헌병과 보조원이 1월 29일 그곳 서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13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총 1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 4.올해 1월 중에 한국주차군사령관이 보고한 요지 이외에 수색・검거 등에 의해 폭도에게 입힌 손해는 다음과 같다.

    680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비수(秘受) 제745호 경기도에서의 폭도 토벌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10-03-04 수신일: 1910-03-05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전보역(電報譯) 3월 4일 오후 12시 35분 발 오후 2시 36분 착 육군대신 앞 발신자 오쿠보〔大久保〕 여러 보고들을 종합하면, 3일 오후 3시 경기도 잠성역(岑城驛)과 계정역(鷄井驛) 사이에서 수괴(首魁) 이친류(李チンリウ)가 이끄는 폭도 80명과 헌병 토벌대가 충돌하였고, 개성 수비대와 부근의 헌병이 같은 날 응원하여 이들을 추적하였다. 또 같은 날 오후 4시 북행(北行) 열차는 계정역에서 북방으로 2리 떨어진 지점에서 기관차가 탈선하였으나 승객과 기타 피해는 없이 4시간 후 다시 진행하였다. 이것은 증원대(增援隊)의 출장을 방해할 목적으로 전항(前項)의 폭도가 선로에 방해물을 설치했기 때문인 듯하다.